복음과 믿음
베르그송 151110 본문
녹취:한윤범
20151110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8-베르그송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베르그송에 관한 이야긴데 베르그송이 신학과 무슨 관련성이 있느냐고 할 때 이렇게 관련성이 있어요. 보통 예배드릴 때 성경책 펴잖아요. 그리고 서양역사에 의하면 성경책이 신의 계시를 독점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중동아시아, 이슬람에서는 코란이 신의 계시를 알고 있다. 그런데 종교에서 이런 이야기할 때 철학자들은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의 계시, 성경책이나 코란이 있더라도 해석은 어차피 누가 해요? 인간이 하잖아요. 인간이 해석하는 것, 왜 종이로 만든 경전에 권위에 굴복하느냐?
서양에서 그런 이야기하면 네가 신이냐, 네가 절대자냐, 욕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평소에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그것 아니겠어요? 성경에 관심 없잖아요. 성경을 안 보고도 참 잘 살았다, 멋지게 살았다, 라고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누가 제시해준다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성경이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코란, 불경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무엇이 기분 나쁘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본성은 나는 나거든요. 절대 존재잖아요. 절대 존재가 이런 외부의 잔소리에 대해서 약간에 친다 할까, 의식해야 된다는 게 완벽한 영광, 완벽한 자기 자존심에 흠집이 되는 겁니다. 철저하게 내 위주라면 끝까지 내 위주로 가야지 속이 시원하잖아요.
흔히 간 본다는 이야기 있지요. 집적댄다. 교회에 간 보고 집적대는 사람이 아마 정기적으로 예배 참석하는 사람보다 열 배나 더 많을 걸요? 세상 살기 힘드니까 신이나 믿어보자고 문 열고, 문 열 때 그냥 여는 게 아니고 빼꼼 열죠. 그리곤 잠시 있다 나가지요. 굉장히 많을 거예요, 그 숫자가.
그런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신에 대해서 오는 것은 말씀의 성취에 복종하겠다는 뜻이 아니고 평소에 하는 자기 행동, 자기 영광성을 보다 보완하기 위해서. 나는 나를 위해서 사는데 막상 세상은 어렵잖아요. 내가 나로 사는데 하자가 있지 않은가? 이 구멍 난 대목은 교회에 가서 성경의 도사들한테 한 수, 팁을 얻으면 참고적인 교훈 같은 걸 얻으면 철저함에 더 철저함을 기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빼꼼 교회 문 열고 왔다가죠.
빼꼼 왔다가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매주 마다 빼꼼으로 앉아있는 사람들이 숫자가 상당할 걸요? 전 한 80~90%로 봅니다. 빼꼼 열고 나가는 사람이나 앉아있는 사람이나 자기 절대화의 작업을 중지한 게 아니거든요. 자기 절대화 작업에 오히려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참고로 듣고자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사실 대부분이죠.
그럴 바에야 아예 성경의 권위나 코란, 불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내가 알아서 나의 완벽한 인생은 이렇다고 철학을 갖춘다면 빼꼼 할 것도 없어요. 성경에서 벗어났다는 자유감까지 보상으로 얻을 수 있어요. 나는 성경에 기대지 않더라도 바르게 살 수 있다는 그런 철학만 있다면 세상에 이것보다 더 인간 해방이 어디 있습니까. 멋지겠지요. 그것을 베르그송이 제공해줍니다.
베르그송에 대해서 공부한 사람치고 기독교에 대해서 비아냥거리지 않는 사람이 없어요. 다 웃긴다고 놀리고 있어요. 지는 완전히 정립을 했다, 모든 걸 정립하고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베르그송의 철학의 어떤 내용이 성경이나 경전 없이도 인간 스스로 완성단계에 이르게 한 포인트가 뭐냐?
베르그송의 철학이 신학자에서 거론해야 될 이유가 방금 이야기한 베르그송의 범주를 이렇게 해요. 자연 신학자라고 범주에 넣지 않고 전 단계가 자연 철학자에요. 자연 철학자가 베르그송이라면 뒤에 자연 신학자는 유명한 화이트헤드란 사람이 있어요. 김욕옥 교수가 맨날 백두선생이라고 칭찬하고 본인이 직접 번역도 했어요. 화이트헤드가 베르그송의 사상을 신학적으로 점령했다. 베르그송은 신학, 그까짓 것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신학마저 베르그송 철학으로 덮었다고 하지요. 레슬링 할 때 심판이 하나, 둘, 셋, 게임 끝났지요.
그래서 화이트헤드에 와서는 신학이고 철학이고 완성됐다고 보는 겁니다. 감리교 쪽에서. 감리교는 은근히 뭘 노렸습니까? 인간의 행함과 하나님의 행함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게 감리교 신학이잖아요. 성경에 믿음도 있고 행함도 있는데 둘은 충돌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완성한다고 본단 말이요.
이렇게 주장할 때 어떤 뉘앙스가 강할까요? 하나님만 쳐다보지 말라는 이런 뉘앙스가 강하고 더 나가면 하나님 믿을 것 없다. 인간에게 잘하는 것이 하나님께 잘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 말은 설교시간에 하나님 존재를 빼자는 이야기입니다. 네 이웃에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그걸 그대로 철저하게 실천에 옮기자는 거예요. 하나님 빼고 예수님 다 빼자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빼고 예수님 빼면 예수 믿는 사람이 싫어하지 않겠느냐고 하겠지요. 과연 속으로도 싫어할까요? 아니면 속으로 물개 박수치겠습니까? 반기겠습니까? 우리 목사님은 천재야, 천재야. 은근히 원했던 바를 목사가 해주잖아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경전을 한다는 자체가 인간은 신경 쓰이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경전에 대해서 일반사람들은 아마추어잖아요. 성경은 주의 뜻이라 하고 자기는 아마추어고 그러면 누구한테 빌붙어야 되고 기분 되게 나쁘지만 누구한데 기대야 됩니까? 나이가 적든 많든 목사한데 붙어야 돼요. 목사한테 붙으면 붙는 그 대목만큼은 본인의 자유가 약간은 간섭받는 느낌이 들겠지요. 애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뭐예요? 간섭받는 거죠.
그런 점에서 여자들이 반칙을 해요. 여자들이 자꾸 가정이 자기 일이니까 남편이 돌아오면 간섭하고 잔소리하잖아요. 그러면 역할을 바꿔보자. 여자가 직장생활하고 남자가 전업주부를 할 때 여자가 직장에서 돌아와서 가정에 신경 쓰고 싶겠어요? 전혀 안 쓰고 싶은 거죠. 그러면 직장에 있는 아내는 가정에 대해선 아마추어가 되겠지요. 남편이 프로가 되겠지요. 프로 눈에 아마추어 하는 게 어설프겠지요. 어설프니까 자기가 하는 직장의 질서를 위해서 참아가면서 인내하면 안 들키도록 하면서 잔소리하겠지요. 그러면 아내가 싫어하지요.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누구로부터도 간섭받기 싫어하는 겁니다. 그 본성이 악마의 본성이에요. 악마가 왜 하나님께 대들고 예수님께 대들었습니까? 피조물에도 불구하고, 요즘 세상에 유행하는 말로, 그만해라 많이 묵었따, 그거거든요. 피조물 노릇을 한두 해 한 게 아니잖아요. 많이 하니까 성질 난 거예요. 알건 다 알면서 피조물 했잖아요.
인간처럼 선악에 대해서 모르는 가운데 피조물 노릇하게 되면 모르는 한계 때문에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데 선악은 하나님만 알아야 될 것을 건방지게 자기 분야도 아닌데 마귀가 선악에 대해서 알아버렸단 말이죠. 그래서 마귀가 선악으로 욥과 다른 인간들을 정죄하는 거예요. 율법을 주신 것은 마귀를 의식해서 주신 겁니다. 인간 속에 마귀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율법 쏜 거예요. 선악과 쏘듯이 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마귀를 알죠. 마귀를 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마귀가 점령했기 때문에. 마귀가 결국 하나님에 대적하고 하늘에 전쟁이 일어나듯이 대적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궁극적인 결정에 대해서 누구로부터 내가 지적받기 싫다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들었다는데 그 지옥의 특성이 뭡니까? 지옥을 만든 취지, 의미가 뭐겠어요? 바로 그걸 겨냥하는 거예요. 너의 선택보다 더 넓은 범위가 지옥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결정권이라는 겁니다. 네가 하는 최종적인 결정권은 피조물의 한계고 창조주는 최종적인 결정권을 죄악 된 것으로 덮어버리는 것이 창조주의 전권, 주권이죠.
그래서 내가 주일에 우리교회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인간의 의미는 한계 내에서만 생산한다고 했지요. 그게 나의 의미, 나의 마지막 진리, 내가 결정했다는 게 내 의미라는 거예요. 의미는 자기 범위 안에서만 최종적인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을 정신병자라고 이야기했잖아요. 맨날 내뱉는 모든 것이 행동하든지 말을 할 때 항상 밑바닥에 마지막 깔려있는 것이, 이 일은 내가 한다. 이 말은 내가 했다. 그 점을 알아 달라는 거예요.
지금 뉴질랜드 목사와 어제도 통화했습니다만 이런 거예요. 당회장 목사는 부교역자 설교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그만 두라고 했는데 교인들이 너무 좋다고 압력을 가해서 다시 설교를 시켰어요. 당회장 목사가 참 괴롭게 되고 부교역자도 괴롭게 됐는데 하여튼 문제가 복음 때문에 생긴 말썽이에요. 복음만 안 전했으면 아무 문제없는데 괜히 복음 전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거든요.
그럴 때 만약에, 오늘 나오는 첫 번째 어려운 건데 잘 들으셔야 돼요. 당회장 목사가 부목사가 마음에 안 든다고 강단에 안 세웠잖아요. 그러다 다시 세운다는 이야기 들었지요. 다시 세운 부목사가 당회장 목사가 가르친 대로 평소에 하던 대로 원했던 대로 설교를 곱게 해서 교회 말썽 없게 한다고 해서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당회장 목사님이 역시 옳습니다.” 그대로 설교했을 때 당회장 목사가 기분 좋겠어요? 그게 첫 번째 질문입니다. 기분 안 좋지요. 이게 헤겔의 정반합입니다.
외부 사람이 볼 때 중간에 약간의 반발이 있다가 다시 원상회복 됐으니까 아무 일 없는 게 되지요. 그렇지만 당회장 목사는 뭡니까? 안 세웠다가 강제로 세웠는데 부교역자가 자기를 의식해서 자기 구미에 맞도록 설교한 걸 본인이 이미 알지요. 그럼 일부의 주도권이 튀어나왔잖아요. 잘 들어보세요. 내가 시켜서 그대로 할 때 기분 좋아요. 왜? 내 주도권이 남아있으니까. 그런데 시켰는데 반발했단 말이죠. 또 한 번 시켰는데 그쪽에서 반발 안 하고 엎드려서 자기가 시킨 대로 했을 때 내가 시킨 대로 했다는 주도권은 당회장의 자유에요, 부교역자의 자유에요? 부교역자 본인의 자유지요. 그러면 자기 자유에서 일부 영역이 이미 떨어져나갔지요.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고문하는 자보다 고문 받는 자가 자유를 느낄 때 고문하는 자는 화가 나는 겁니다. 갑이 을에게 지시했을 때 을이 갑대로 고분고분 하는 것 갑이 기분 안 좋아요. 내 입맛에 맞추려고 고분고분 하지, 라는 의심이 드는 고분고분 있어요. 온전한 장악이 아니에요. 그래서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게 아니고 세상이 내 뜻대로 되도 기분 나빠요. 이 점을 아셔야 돼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러면 하나님이 마귀한테 물어요. 마귀야, 어떡하면 좋겠노? 마귀는 내가 이렇게 하겠다는 게 없어요. 그건 몰라요. 하나님이 벌인 주도권에 대해서 그냥 흠집만 내겠다는 게 마귀의 할 일이에요. 전쟁이란 누군가 한쪽에 달려들 때거든요. 마귀 전쟁의 목표가 누굽니까? 시편 110편에 주의 원수잖아요. 주님이 먼저 있다는 게 기분 나쁘다는 거예요. 마귀 입장에서 나만 있어야지 왜 주님이 계시냐 말이죠. 욥기를 보세요. 마귀가 누구한테 시비 걸어요? 욥을 보았느냐? 욥 같이 믿음 좋은 사람 없다고 할 때 마귀가 시비 걸지요.
그 마귀의 심성을 오늘날 우리가 고스란히 누리고 있어요. 우리가 이런 마귀의 심성을 분석하지 않고 모른 척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은 가면만 쓰고 그때마다 땜질하는 식으로 인생 자기 소비하듯이 하다 결국 자기 파탄 나요. 결국은 마지막 심판을 따질 수밖에 없어요. 지옥 가서. 왜 내 애는 구원 안 시킵니까? 분명히 이런 이야기 나올 수 있어요. 내가 그 자식 위해서 얼마나 애썼는데 왜 내 자식은 지옥 보냅니까? 이럴 수 있단 말이죠. 물론 그런 사람들만 모아서 지옥 가지만.
양이 백 마리 있는데 99마리 놔두고 한 마리 양을 찾잖아요. 주님의 숫자놀이 보세요. 양이 백 마리 있는데 세 마리는 찾아왔는데 97마리를 찾으러갔다. 예수님께서 숫자를 그렇게 하지 않지요. 99마리가 자기와 있는데 지금 잃어버린 양이 몇 마리에요? 한 마리죠. 그러나 한 마리 양을 찾아오면서 궁둥이 때리면서 하여튼 이 말썽꾸러기. 이렇게 때리면서 오면 99마리 양이 기분 좋아요. “그러기에 말 좀 듣지, 철딱서니 없는 양아.” 분명히 목자가 한 마리 양을 데려올 때 어깨에 메고 온다고요. 99마리 양은 목자 어깨에 메일 기회를 얻었어요? 어께 메면서 내가 잃었다 얻어서 기분 좋다는 거예요. 그러면 99마리 양은 뭐예요? 기분 좋음에 전혀 보탬이 못한 존재가 돼버려요.
예수님께서 숫자로 하는 것은 기존의 모든 세상이 태어나서 말도 안 하고 가만있어도 이미 마귀적이에요. 그 자체가 고요해도 마귀적이에요. 칼로 강도질하고 교도소 들락거려야 마귀 짓이 아니고 태어나서 가만있어도 먼 섬에서 해녀로 죽을 때까지 멍게만 찾다 죽어도 마귀에요. 이웃과 안 만나도 태어난 자체로 마귀에요. 사도 바울 말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그 말이 맞는 말이에요.
세상 참 잘 돌아가죠. 굉장히 바쁘게 잘 돌아가요. 바쁘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 볼 기회를 점점 잃어버리고 있는 겁니다. 굉장히 분주하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나에 대해서 누군지 알지 못하고 교회도 못 나오고 성경 볼 시간이 없더라도 이런 내가 어떤 하자가 없고 아무 문제없고 약간 게으름은 있지만 궁극적으로 인생이 파탄난다든지 그건 아니라고 누가 이야기 좀 해줬으면 좋겠다고 할 때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감리교 신학 등이 나타난 겁니다.
하나님 찾지 말고 이웃에게 잘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에요. 들에 핀 꽃과 사슴, 오소리, 로드 킬 당하는 짐승들은 어떻게 해야 되나? 그런 것들에 잘해줘야지. 나도 바빠서 그렇지 사실은 온 자연을 사랑합니다. 그게 바로 자연철학이라 합니다. 그걸 신학적으로 주장하면 자연신학이 되고. 자연신학의 근거를 베르그송이 체계적으로 잘 마련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자연은 믿는다가 아닙니다. 자연은 그냥 산다가 되죠. 자연은 대상이 아니니까. 내가 여기 있고 자연 있는 게 아니고 넓은 자연 속에 내가 포함돼있죠. 그렇다면 강의를 본격적으로 해봅시다. 자연이 잘 풀어지는 밀가루 풀 같다면 그걸 무형체라 하는데 형체가 없이 물컹물컹하면 나도 형체가 없이 물컹물컹하게 되겠지요. 이게 베르그송 철학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형체가 따로 마련돼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거예요. 물컹물컹하면 그야말로 시조에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그렇게 살아가면 고민할 것도 없는데 우리가 자연의 일부고 내가 자연이고 내 자체가 또 자연이고 난 자연 속에 포함돼있고. 자연이 그러하라 하면 나도 그러하면 되고. 양희은 노래에 산이 나더러 내려가라 하면 내려가면 되고. <한계령> 자연적인 사상이죠. 그럴 때 우린 뭘 느끼느냐 하면 자기로부터 초월을 맛보게 되죠.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죠. 초월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고형체, 유형체가 자꾸 방해되잖아요. 내가 저절로 자연으로 살려는 게 본성의 외침인데 물질이 방해하잖아요. 물질을 풀처럼 녹여버리면 되겠지요. 그게 베르그송의 철학의 아이디어입니다.
여기 교재 밑에서 일곱 째 줄에 봅시다. [의식은 현실적인 물질과 혼합되어 육화된 정신, 신체와 결합된 영혼]이라고 돼있지요. 우리가 과학이라든지 빵, 책, 덩어리 진 것 또는 코스모스, 들국화,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나의 냄새 맡는 코와 보는 눈과 들리는 귀는 전부 물질로 돼있어요. 그러면 물질은 우리 속의 의식으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강의 내용은 어렵기 때문에 자꾸 복습을 하겠어요.
그냥 아무 무형의 죽처럼 형체 없으면 좋겠지요. 코도 눈도 입도 녹아버리는 거예요. 고문을 해도 신경 세포가 녹아버리면 고문하는 맛이 없겠지요. 뭔가 아파야 지지든지 하는데 타는 냄새만 나지 아프지 않으면 고문하는 사람이 재미없겠지요.
그래서 의식이 뭐냐? 불교에 나옵니다. 불교에 육식(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이 있는데 그게 신체에 관한 구조, 감각기관에서 나온 의식을 말하는데 그 의식을 말하는 거예요. 의식이 있다는 것은 일단 나를 물질로 간주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걱정, 근심은 뭐냐 하면, 의식 밑으로 내려가면 되는데 모든 염려와 걱정, 불안,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의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베르그송을 들어보면 불교를 이야기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비슷하게 이야기해요.
그럼 해결점이 뭡니까? 지금 문제가 내가 어떤 고형 된 구체적인 형체를 갖추었기 때문에 의식이 있고 의식이 보니까 갖고 싶어요, 아파요, 그러면 망해요, 온갖 것을 걱정하는데 이걸 밑에 내려가면 의식 밑에 무의식이 있어요. 그럼 무의식에서 철학을 시작하면 되지 않겠느냐.
무의식에는 뭐가 있느냐? 무의식에는 지속이 있어요. 지속하면 여러분이 느끼는 뉘앙스가 어때요? 의식 있는 제가 의식 있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지속이란 언어를 들으면 지루하다고 느끼죠. 그렇게 느끼면 아직도 의식 레벨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무의식 레벨에 있는 사람은 지속이 되면 그게 자연이라면 그래야지. 초탈 또는 해탈, 당연한 것 아니야, 이러한 자유로움이죠.
해방과 자유는 달라요. 자유는 거치는 것이 없을 때고 해방은 그 전에 어디 갇혀있다는 걸 의식하면서 이제는 그때만큼 안 갇힌 것입니다. 출애굽은 해방일까요, 자유일까요? 해방이죠. 탈출이죠. 반드시 갇혀있음을.
계속 보겠습니다. 1페이지 중간에 봅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의식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관과 객관의 접촉지점이자 교차혼합지점이다.] 교차지점이란 산 위에 올라가면 산 저편의 동네가 비로소 보이잖아요. 산 밑에 있을 때는 산 넘어 동네가 안 보이죠. 그런데 산에 올라가게 되면 이쪽도 보이고 저쪽도 보이고. 그러니까 그 중간은 접촉지점이죠. 의식은 주관과 객관의 접촉지점이 의식이다.
그러니까 의식은 그런데 무의식까지 들어오면 진짜 주관성은 의식에서 보이는 저건 책이고 나는 나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의식 세계가 아니에요. 무의식 세계라면, [진정한 주관성은 잠재적인 무의식에 있으면 이 무의식의 주관성과 대립하는 것이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물질적 세계다.] 세상눈에 보이는 의식세계 전체가 무의식의 대립 세계가 되는 거예요. 무의식을 감추고 있고 가리고 있는 거예요.
진짜 나는 따로 있는데 거짓 나로 인하여 심리적인 아픔을 겪는 거예요. 그래서 베르그송은 호소합니다. 의식에 머물지 마시고 무의식으로 내려갑시다. 그런데 내려가는 방법은 반드시 의식을 알고 내려가야 돼요. 그래야 되는 이유가 뭐냐? 무의식이 의식세계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한 마디가 어려운 베르그송의 철학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어입니다. 과거의 바다. 모든 것은 과거에요. 과거의 바다를 두 자로 줄이면, ‘기억’이에요. 무의식은 지속이에요. 지속이 계속해서 출렁거리고 있다가 어떤 계기, 현재가 돼버리면 그것이 응축이 되면서 잠재돼있는 바다는 계속 출렁이고 있고, 그러다 물방울이 튀죠. 그게 현재고.
현재는 지속이 응축된 것, 또는 무의식이 의식으로 응축됐다, 단단해졌다, 순간적으로 모아졌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현재가 되죠. 현재란 뜯어보면 안에 과거가 들어있어요. 그런데 그 과거는 밀려오는 과거에요. 과거가 하나가 아니고 과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많은 과거 중에 하나만 기억하게 되면 현재화된 과거인데 과거의 전부는 아니고 과거의 부분, 일부를 잡은 게 현재가 되는 겁니다.
이쯤 이야기하게 되면 별로 필요 없어 보이죠.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기본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잖아요.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에 마귀가 있기 때문에 마귀의 근본적인 특징은 누구한데 간섭받기 싫고 지시받기 싫어요. 여호와 뜻이 뭡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에요. 마귀가 모방한 거예요. 너만 신이냐, 나도 신이다. 스스로 있다는 말은 모든 진리 결정은 내가 선택하고 내가 주관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 같은 게 있으면 짜증나는 거예요. 성경 모르면 의존해야 되고 그러니까. 아예 내 구미에 맞는 철학을 누가 장만해주시면 좋겠다고 했는데 베르그송이 준비돼있습니다. 화이트헤드가 준비돼있는 거예요.
그러면 묻지요. 우리는 성경 보고 진리를 아는데 성경을 치워버리면 당신은 어떤 식으로 진리를 아는지 묻겠지요. 거기에 대해서 베르그송은 기억입니다. 시간관입니다. 인간이 시간을 느낀다는 자체는 그것이 인간이 진짜 본질과 진실을 알 수 있는 사려하는 맨홀 구멍이 되는 겁니다. 깊은 무의식에 갈 수 있는 시간 의식이. 과거-현재-미래가 바로 의식인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어요. 2페이지 두 번째 단락에. 다 읽으면 여러분이 지루해서 중간, 중간 붕붕 뜁니다. [순수 과거는 비연대기적인 방식으로 현재와 관계 맺으며] 연대기라 하는 것은 그냥 선이라 보면 돼요. 여기서부터 칙칙폭폭 가는 열차로 보면 돼요. 비연대기는 이 지점에서 이 지점으로 가야 되는데 A에서 B로 가야 연대기인데 엉뚱한 바깥에 있는 C란 지점으로 붙이면 비연대기가 되겠지요. 그런 뜻입니다. [행위와 운동의 연속성을 탈구시킨다.] 탈구 알지요. 여기 있는 갈빗대가 툭 튀어나온 걸 탈구라 합니다.
[예컨대 ‘물 컵을 본다’와 ‘물을 마신다’ 사이에] 연대기로 봅시다. 물 컵을 본다. 물마시고 싶었지. 이러면 원인과 결과가 성립이 되지요. 물 컵을 본 것이 원인이고 물 마신 것은 결과가 되지요. 그런데 물 컵을 보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유년시절의 친구가 생각난다. 옛날 초등학교 때 그 애가 이런 식의 물 컵을 좋아했는데. 그 친구 지금 하와이 갔는데 잘 살고 있는지 연락 안 되네. 갑자기 연대기에서 탈구됐지요.
물 마신다는 과거는 연대기적으로는 물 컵을 봤다는 하나로 한정이 돼야 되는데 여기서 위치를 이탈해서 엉뚱한 옛날 컵과 얽힌 일화들, 그걸 기억하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현재가 일방적으로 기억이라고 한 그 순간 난데없이 잃어버렸던 과거들이, 나도 과거 속에 넣어줘, 하면서 분명히 있었던 과거들이 그동안 잠잠해 있다가 현재 응축된 속에 쏟아져 들어오는 거예요.
베르그송은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인간의 무의식적 주관이라는 거예요. 남들 앞에서 내가 어떤 모습을 하느냐, 그건 주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그리고 싶었던 목적이 강요해서 목적에 필요한 것에 기여한다. 그것도 주관 아니에요. 그냥 사건을 통해서 예상 밖에 튀어나올 때 컵과 얽힌 설화들, 지금은 이민 간 친구가 갑자기 생각날 때 그것이 현재가 합세했다고 할까요, 추가가 된다면 그게 사실이죠, 경험이죠.
베르그송은 우리한테 묻습니다. 당신이 누군지 당신이 아십니까? 이 말은 뭡니까? 우리가 생각지도 않는 친구가 물 컵 보고 생각날 때 우리는 많은 부분을 놓쳤다는 거죠. 평소에 많은 부분을 분명히 경험했음에도 기억 안 하고 살죠. 그렇다면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내 전부라고 할 수 있어요? 전부가 아니죠. 지금 현재 필요해서 일방적으로 써먹기 위해서 있는 자아를 니들이 좋아하는 성경책으로 은혜 받는 것이 그게 과연 은혜냐고 베르그송이 따지고 들면 할 말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교회에 은혜 받겠다고 왔을 때에 이미 자아가 자아를 구성했잖아요. 그게 자아의 전부냐고 베르그송이 시비 거는 거예요. 그게 자아의 전부입니까? 그걸 자아로 삼아서 목사 설교에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게 과연 살아 계신 신의 은혜냐 하는 겁니다. 아니면 자연이 일으킨 우연한 사건의 다발이냐? 어느 쪽이에요? 베르그송에 의하면 자연이 저절로 그러함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이 스스로 그러함으로 그냥 흘러가는 거죠.
[‘물 컵을 본다’는 습관화된 ‘물을 마신다’로 이행하는 대신] 베르그송은 습관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는데 습관까지 이야기할 시간은 없고요. [전화를 건다거나 사진첩을 뒤진다와 같은 예측불허의 행위로 연결될 수 있다.] 그래서 베르그송이 말에 뒷받침하는 것처럼 현대 정신과학이나 뇌신경하는 사람들도 인간의 행동 가운데 90%는 무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의도적으로 따진 것은 10%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는 충동입니다. 나머지는 기분 상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 10%는 억지로 이유를 갖다 대는 거예요.
2페이지 세 번째 단락. [현재들의 익숙한 연속]라고 베르그송이 이야기한 것은 현재를 옹호하는 거예요, 현재를 부셔버리는 거예요? 현재를 부셔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베르그송의 철학은 과거의 바다, 하나뿐이에요. 현재는 껍데기에 불과해요. 표면효과에요. 밀가루가 하얀색이죠. 밀가루 풀이 굳어지면 노랗게 변하지요. 그럼 밀가루가 노란색입니까? 아니지요. 일시적인 표면효과로 껍데기가 노랗게 된 거잖아요. 그게 현재에요.
현재는 현재를 쥐고 있으면 안 돼요. 다시 과거로 가야 돼요. 과거로 잠수했다가 현재를 통해서 다시 튀어나오게 되면 그게 미래가 돼요. 현재가 미래를 밀어붙이는 게 아니고 현재 밑에 있던 과거가 흘러가다보면 우리의 미래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현재에서 시작한 미래는 착각이죠. 나는 그 식당에서 얼마나 맛있다고. 지금 식당에 가기 전에 현재에서 전에 봤던 기억으로 그 식당은 맛있다고 하잖아요. 그건 착각이잖아요. 그런데 막상 두 시간 뒤에 그 식당에서 맛을 볼 때 그 맛은 현재에서 나온 맛이 아니고 예상 밖에 있는 과거의 요소가 미래에 삽입해서 미래의 식당의 맛을 결정짓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은 맛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막상 식당에서 밥을 먹는 순간 나를 욕하고 나에게 비난하고 나를 미워하면서 욕질했던 아는 사람이 바로 앞에서 식사하고 있을 때 그건 예상 안 했지요. 지금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지요. 밥맛없지요. 그래서 꼴 보기 싫은 사람을 밥맛없다고 하지요. 돌발적인 너의 출현으로 인하여 내가 현재에 예상한 그 미래가 아니라서 나는 기분 나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이것은 무의식세계에요, 의식세계에요? 의식세계지요. 표면이니까. 의식세계니까 나는 기분 나쁘다가 성립된 거예요.
그러면 잠재적 주관이어야 할 우리가 의식세계에서는 잠재적 주관은 날아가고 의식적인 주관이 되니까 마음에 안 드는 의식적인 객관이 있겠지요. 꼴 보기 싫은 밥맛없는 어떤 아는 사람,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의식세계에서 짜증내고 불안하고, 화내고, 신경질 부리고 또는 좀 좋으면 좋다고 웃고 즐기고. 지난번에 하이데거처럼 새로운 자극, 쾌락을 위해서 헤매고. 자꾸 그런 거예요.
다 알 수 없는 못 다 아는 나, 하지만 다 알지 못하는 나를 무의식세계에 있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식세계에 머물러서 모든 흐름 변화를 내 구미에 맞추려고 애쓰다보니까 사는 게 본인만 힘들지요. 본인의 의식의 주관 욕구, 주관에서 욕구, 욕망이 나와요. 그 욕구 욕망에 맞추어 세상이 돌아간다고 억지를 부리니까 나만 힘들지요. 그러니까 이 주관을 제대로 알아서 이제는 무의식, 잠재적 주관으로 돌아서라, 사람들아. 괜히 성경 본다고 은혜 받는 게 아니고 네 자신만 알면 은혜 된다. 이게 베르그송의 철학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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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0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8-베르그송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2페이지 세 번째 단락에 [현재들의 익숙한 연속에 탈구를 일으키고 현재와 현재 사이의 균열지점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분출시키는 것이 바로 순수 차원으로부터 현재 속으로 현실화하는 근원적 시간의 운동이다.] 문장은 이렇게 돼있지만 그림으로 그리면 간단하지요. 아까 밀가루 풀 이야기로 다 끝나는 겁니다.
밀가루 풀 끓이면 딱딱한 부분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그게 갈라지잖아요. 그 갈라진 틈에서 새로운 분출하는 끓는 밀가루가 위로 또 올라오겠지요. 그게 쌓이게 되면 현재가 되고, 올라오는 것은 과거가 되고.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결국 남는 것은 순수 과거의 운동만 남지요. 그걸 과거의 바다라고 해요. 이게 운동한다. 왜? 자연 자체가 운동하니까.
[“과거를 현재로 연장시켜주는 기억의연속적인 삶”이 창조적 생성의 시간인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시간이란 흔적이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에게 시간이 있는데 시간은 무의식세계로 들어가는 출발점이 되죠. 시간을 통해서 의식세계에서 무의식세계로 내려갈 수 있다.
[현재는 삶에 몰두하는 행위가 멈추었을 때 비로소 불출하는 창조적 사유의순간이고 또한 비결정적이고 비목적적인 방향으로 예측 불가능한 미래의 행위가 전개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물 컵을 본다. 물을 마신다. 물마시고 놀러가야지, 하는 순간 갑자기 옛날 어릴 때 이 물 컵으로 먹던 친구가 생각나서 놀러가는 대신 전화를 건다든지. 그러면 미래가 바뀌어요. 현재 순간 솟아오르는 다른 과거 때문에 현재가 바뀐다고요.
2페이지 네 번째 단락에 [우리가 시간 안에 있다는 것은 “시간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라는 자체가 그러니까 너와 내가 동일하지 않는 이유가 이제 드러났지요. 왜 달라야 됩니까? 순수 과거가 운동하기 때문에 오늘날 너와 나를 다양하게 만드는 겁니다. 다양하게 만들어도 동일한 게 있어요. 똑같이 과거-현재-미래라는 연대기적 시간을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세계는 다양하더라도 우리는 동일한 자연에서 동일한 무의식세계에서 함께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베르그송 당신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무의식세계가 어떻게 있는지 증명해봐라. 이렇게 반발할 수 있잖아요. 왜냐하면 사람이 생각하는 게 눈에 보이는 것밖에 없는데 무의식세계라고 하니까 그 무의식세계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또 이야기하니까 그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거기에 대한 증명 방법을 뭐라고 했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동일한 시간의식을 갖고 있다. 과거-현재-미래로 흐른다는 그것을 통해서 무의식세계가 분명히 있다고 증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 다음에 3페이지 봅시다. [따라서 주관성이란 단지 바깥과 대립되는 안으로서의 내면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건 왜 이야기했느냐 하면, 베르그송 당시 유럽은 기독교 국가 아닙니까. 교회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여러분의 내면을 닦아야 됩니다. 외형적인 돈 보다도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라고 이야기할 것 아니냔 말이죠.
그러면 베르그송이 그 교회에서 설교 들었다고 칩시다. 백날 닦고, 백날 성결하고, 백날 성화시키고, 백날 주관해도, 그 주관은 누구 주관이에요? 나의 주관되잖아요. 나의 주관되는 이상은 어디까지 정결해야 돼, 순수해야 됩니까? 지금 베르그송에 의하면 의식세계에서는 순수라는 게 없어요. 순수 시간, 순수 체험은 전부 무의식세계에서 과거의 파편으로 해체돼있단 말이죠. 과거의 바다로.
그런데 교회에서 순수한 네가 되라면 의식세계에서 순수함을 고수한 게 되지요. 그러면 만약에 모기한테 물렸다. 깨끗한 피부가 모기에 물리면 순수한 피부입니까? 순수한 피부 아니잖아요. 현미경으로 피부 들여다보세요. 털이 기둥으로 보이잖아요. 순수합니까? 털에 바이러스 붙어있는데, 먼지, 병균 붙어있는데 순수합니까? 불교에서 생물 아낀다고 빗자루로 쓸지요. 빗자루에 미생물 묻어있는데 그건 죽이는 거예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이 모든 문제가 어디서 생겼느냐? 베르그송은 이렇게 보는 거예요. 교회에서 그런 설교하는 자체가 아무 문제가 안 되는 이유가, 순수 주관이 따로 있는데 의식적 레벨에서 주관을 자꾸 고집하게 되면, 어느 통계에 보면, 종교 갖고 있는 사람이 더 이기주의라는 통계가 나왔답니다. 자기밖에 모른데요. 자기 주관이 베르그송에 의하면 의식적 주관을 더욱 더 강화하기 위해서 열심히 교회 다녀서 자기 잘난 맛에 교회 다니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베르그송은 말합니다. 그게 무슨 윤리냐? 그게 무슨 보편적 윤리가 될 수 있느냐, 개인적 윤리에 불과하지. 따지는 겁니다.
[주관성이란 잠재적인 것, 그것도 현실화하는 잠재적인 것이고, 무엇보다도 현실화하면서 자기 자신과 달라지는 잠재적인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 자기와 달라지는 새로운 자기가 나오게 만드는 주관. 그게 의식세계에 있는 게 아니고 무의식세계에 잠재돼있는 거예요. 현실화된 게 아니고. 잠재돼있는 게 날마다 새로운 주관을 날마다 만들어낼 때 그게 의식적 주관이라는 겁니다. 베르그송이.
이걸 자기 변용이라 해요. 모양새가 달라지는 것. 자기 변용이 되는데 베르그송은 더 나갑니다. 변용된 자기가 색다른 자기죠. 인간은 자신을 타인으로 보는 거예요. 나를 타인으로 볼 수밖에 없어요. 내가 순간마다 둘 되는 거예요. 셋 되는 건 아니에요. 둘되고 없어지니까.
이걸 숫자로 하게 되면 +, - 해서 0이 되는 게 아니고 ++0=0이 되어서 +가 되는 거예요. +1+0에서 결국 남는 게 +1로 남는 거예요. +1이 뭐겠어요? 잠재돼있는 주관이겠지요. 잠재돼있는 주관이 0이 되는 게 아니고 잠재돼있는 바깥에 표면에 있는 것을 0으로 보잔 말이죠. 1이니까 있음이잖아요. 있음의 표면은 그 자체로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피부가 있잖아요. 피부가 납니까? 아니잖아요. 나의 피부잖아요. 피부만 할 때는 숫자로는 1로 해야 돼요, 0으로 해야 돼요? 1로 밀어붙인 0이잖아요. 왜 이렇게 어렵게 설명하느냐 하면, 우리는 자꾸 처음부터 의식적인 나로부터 출발하니까 설명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나 여기 있으니까 1로 치잖아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1이고 여기 나타난 것을 0로 보잔 말이죠. 그럼 나는 뭡니까? 없는데 있는 주관에 의해서 매일같이 새롭게 생겨나잖아요. 이걸 베르그송은 생성이라고 해요. 존재와 생성. 존재는 밑에 있고 생성 또는 생성된 존재라 해도 괜찮고. 그런데 그것이 늘 변용됩니다. 마치 제가 아까 과거의 바다라고 표현했듯이 바다 표면은 맨 바다지만 바람 부는데 따라서 늘 물결의 모양이 다르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인간과 바다의 차이점이 뭐냐?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나, 이걸 타자라 하는데 나한테 내가 타인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그리던 타인이 되고 싶어서 우리는 분투노력하게 되고 공부하게 되는 거예요. 수능 이틀 남았지요. 수능 준비하면서 공부하는 자기만 생각하지 않아요. 수능 치고 난 뒤에 좋은 점수 받아서 좋아하는 나를 항상 상상하고 있겠지요. 그것은 현재로서는 타인이에요. 하지만 타인은 이상적인 존재로서 타인이라니까요.
왜 자기를 타인이라고 하는지 이 점에 굉장히 중요한데 왜 자기를 보고 타인이라 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남을 볼 때 그냥 보지 않아요. 박 목사님 남이다. 이렇게 보지 않아요. 내가 알던 박 목사님이에요. 남을 볼 때.
사람이 전혀 모르는 걸 보게 되면 전혀 모르는 걸 본 게 아니고 안 본 게 돼요. 이건 마술도 아니고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올라오면서 분명히 내 눈으로 가로수 낙엽 떨어진 것을 봤을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중에 누가 저한테 목사님, 낙엽 색깔이 어떻습니까? 나는 거기에 신경 안 썼기 때문에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나무 없었는데? 봐도 내 한계 바깥에 있기 때문에 나한테 없는 게 돼요.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에게 예수님께서 진흙 발라주고 실로암 못에 씻으라하니까 눈 떴지요. 두 단계입니다. 누가 고쳐줬느냐 하니까 모른다는 거예요. 눈 뜬 건 아는데 누가 고쳐줬는지는 모른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눈 뜨게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나라고 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다고 나오지요. 그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게 된 거예요.
그렇다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언제 알았습니까? 오순절 성령 받을 때 알아요. 그러면 그때 안 것은 뭐냐? 본인의 타인으로서의 예수에요. 아니 자신의 이상형으로서의 예수이에요. 예수여, 하늘나라 갔을 때 누가 더 높겠습니까? 예수를 이용한 거예요. 예수를 이용하면서 내가 되고 싶은 미래의 나를, 그것은 과거에 내가 되고 싶었던 나의 의식적 욕망이 미래의 나를 만든 겁니다.
무의식의 주관이 표면에 올라오면 의식적 주관이 돼요. 여기서 욕구가 생겨요. 욕구의 문제는 다음 시간에 메를로퐁티의 몸의 문제 할 때. 몸에 욕구가 생깁니다. 욕구에서 미래가 나와요. 현재에서 미래가 나온다고 했지요. 현재에서 미래가 나오는데 제자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예수님이 나름대로 갖고 있던 뜻이 밀어붙이니까 졸지에 자신들은 그동안 예수님을 몰랐던 거예요.
몰랐다는 것을 예수님을 몰랐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베드로는 본인 입으로 이렇게 이야기해요. 소녀가, 당신도 한 패지 하니까, 나는 저 사람을 알지 못한다. 또 이야기하니까 강한 부정이 나오지요.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 그러면 그 순간 베드로가 생각하고 있는 미래상에는 누가 주인공입니까? 본인이 되고 싶은 본인이 생각한 자기가 자기의 타자가 되어서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밀쳐야 되겠지요.
사도행전 2장 37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할 때 그 당시 유대인들이 어찌할꼬, 라고 돼있지요. 컵을 볼 때 하와이 이민 간 친구 생각나지요. 베드로가 설교할 때 자기가 죽였던 예수 그리스도가 그 순간 생각났지요. 이걸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 받았다. 그럼 성령은 십자가 사건을 반복시키는 겁니다. 어찌할꼬, 제가 죄인입니다. 한 번 하고 말까요?
지난 오후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광야에서 한 번 거역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거역할 수 있는 존재란 말입니다. 거역할 때마다 볼펜으로 점을 찍게 되면 우리 인생은 새카만 점으로 된 구조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살았던 모든 흔적들은 십자가 앞에 죄가 되는 거예요. 이 지평이 새카만 죄가 된다면 그 맞은편에 누가 있겠어요? 영원토록 의로우신 십자가 주님만 의인 되겠지요. 주님이 의인되는 방법은 뭐냐? 우리로 하여금 새카맣게 한평생 죄가 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원망하도록 유발된 겁니다.
베르그송의 철학을 공부하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안다는 것이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표면적인 것, 일부만 의식적 주관만 알아서 천국에 올려 보내려고 얼마나 쓸데없는 노력을 했습니까. 지금도 교회마다 그렇게 하고 있어요. 의식세계에 있는 주관적 자아를 다듬어보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했어요. 그러다보니까 가면만 자꾸 늘어나는 거예요. 위선 덩어리, 억지가 돌아다니고.
교회에서 목사한테 나가라 하니까 내가 이 교회 와서 그동안 몇 명이나 불렸는데 왜 나가라 하느냐. 나가라는 건 현재지요. 그 순간 목사는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기가 그 교회에서 했던 나쁜 짓은 다 날아가고 교회에 교인 모았다는 좋은 것만 따오는 게 아니에요. 현재에서 조작한다니까, 과거를. 그게 이 글에 보면 나와요.
3페이지 위에서 다섯 번째 줄. [우리 존재의 현재는 자기-차이화한 과거 그 자신이다.] 현재는 과거의 얼굴이란 말이에요. 과거의 가면이다. [우리 자신이 그 안에 잠겨 있는 시간의 내면성, 시간의 주관성이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주관성이다.] 잠재적 주관성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시간 안에 존재하며, 그리고 시간이 주관성이라는 주장은 결국 그 시간과 분리불가능한 우리 자신이 시간의 형식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시간은 우리에게 흔적을 남긴다. 아니 우리 자신이 시간의 기록 장부이다.] 우리 자신이 시간이라는 자연의 흔적이죠. 기록 장부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은 없지요. 이쯤 되면 우리 자신은 일시적인 자아가 되죠. 흩어졌다 모이고, 모였다 흩어지는 일시적인 자아가 되면서 진짜 자아는 자연이 우리 자신을 대변해주잖아요.
[자기 분열하는 시간의 방식으로 우리의 시간적 자아 역시 자기 분열적 자아가 된다.] 그 다음에 어려운데 어렵더라도 통과해야 됩니다. [우리의 현실적 존재는 매 순간 현실적인 차원과 잠재적인 차원으로 분열되며 지속한다.] 이제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아까 그림으로 위, 아래 하는 것.
[현실적 차원의 의식은 이질적인 두 요소를 능동적으로 종합하고 수축하고] 종합하고 수축해야 그게 현재인 내가 되니까. 현재란 자체가 수축이 되고.
[삶에 주의하는 반면] 집중하는 것. 아까 올라오면서 오늘 강의를 이렇게 할까, 하고 집중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나무에 집중하지 못했잖아요. 매사가 그래요. 정신 딴 팔려있으면 불러도 언제 불렀냐고 합니다. 교회에서 주님 생각해야 되는데 우린 복 받을 생각하고 구원받을 생각하면 주님의 뜻을 놓쳐버려요. 매사가 그래요.
[잠재적 차원의 무의식에서는 끊임없이 이질적인 두 차원으로, 즉 보존되는 과거와 지나가는 현재로 양분되며] 똥 싸듯이 우리는 과거를 배설하고 있는 거예요. 응축하다보니까 필요 없다고 여기는 과거는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없어져도 자연은 없어지지 않거든요. 모아있어요. 우리의 배설물들이. 우리를 경유해서 우리한테 쓸데없어 버릴 것들이 한껏 있어요. 우리 자신은 현재화되지 않는 거죠.
[따라서 우리 자신은 언제나 완전한 자기 자신으로 현실화될 수 없으며] 나는 이걸로 끝이야. 나는 해답, 진리 알았어. 더 이상 알 필요 없어, 라고 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무슨 과거가 또 튀어나올지. 다음 차례의 현재되기 위해서 새로운 과거가 융합되고 집중되는데요. 쉽게 하면 이런 거예요. 지금 공부를 하면서 공부 정말 재밌네,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형님, 도미니카와 한국과 야구하는데 같이 봅시다. 공부하는 게 더 재밌는데. 저녁 사줄 테니까 같이 봅시다. 보니까 왜 그렇게 재밌는지.
야구 보기 전에는 야구 보는 재미를 몰랐잖아요. 자기는 공부하는 재미를 보고 있었는데 이런 재미를 미처 몰랐지요. 나는 야구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건 없을 것이라고 또 장담을 해요. 왜? 현재로서는 정답이기 때문에. 그게 다일까요? 연애할 때 저 여자만 같이 한 방에서 늘 자면서 같이 살 수 있다면 더는 하나님께 기도할 게 없습니다. 너무나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해놓고 결혼하고 난 뒤에 육 개월도 안 돼서 각 방 쓰지요.
[나는 온전한 나가 아니며 항상 내가 아닌 나와 공존한다.] 많은 나가 있는 건 아니에요. 내가 아닌 나만 있어요. 세 명, 네 명 되는 나는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미 나 하나가 확정됐기 때문에 반대 나거든요. 내가 아닌 나와 공존하지 네 명, 다섯 명 있다는 건 말이 안 돼요.
[따라서 자아는 결코 자기 동일적일 수 없다. 내 속에 항상 내가 너무나 많다. 나는 그 자체로 끊임없이 자기-차이화하는 잠재적 다양체가 된다.] 따라서 나는 자연이 내 내용물의 전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내 속에 과거의 바다가 되었어요. 나는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어항이에요. 일시적 어항이에요. 어항 유리 깨지면 바다로 돌아갑니다. 어항 유리가 내 몸이에요. 몸 깨지면 다시 옛날로 원상복귀 되죠. 이게 바로 불교입니다. 기의 집합과 해체. 동양철학이에요. 이게 김용옥의 기철학입니다.
[칸트의 경우, 주체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겪는 수동적 자아와 능동적인 종합을 갖고 있다.] 이때 칸트가 말한 시간이란 내가 만들어내는 세상 보기 형식을 시간이라 하거든요. 칸트는 근원적으로 시간과 공간은 정해져있어요. 절대적 시간과 절대적 공간으로서 내가 세상을 보는 방편으로서의 시간과 공간인데 베르그송은 나보다 시간이 먼저 있어요.
그러니까 칸트의 윤리는 옳은 윤리가 아니라는 거죠. 칸트의 윤리는 의식적 주관에 갇혀있는 내가 잘남을 증명하는 거고, 베르그송의 윤리는 잘날 필요조차 없다는 윤리고요. 어느 것이 더 성화스러워요, 어느 것이 더 해탈스럽습니까? 베르그송이죠. 내가 나한테 메여있는 있는 이상은 온전한 윤리가 될 수 없지요. 나한테 손해되면 남한테 해코지해요.
나는 관대하다, 나는 관대하다. 이러다 성질나면 관대 안 하다. 내가 내 관대함을 내가 자꾸 유지하려면 그것은 한계에 부딪쳐서 성령의 일곱 열매가 다 깨져버려요. 차라리 자연스럽게 내 바깥에 잠재적인 것에 맡기고, 사해에서 팔만 펴면 뜬다는 거예요. 사해에 내 몸을 맡기자. 과거의 바다에 내 몸을 맡기면 나는 뜨잖아요. 뜨는 가운데 미사일 왔다 갔다 하겠지요.
거기에 대해서 여기 보면, [반면 베르그송의 경우, 협소한 경험을 사는 현실적 차원의 내가 오히려 잠재적 차원의 자아에 의해 확정된 경험을 획득하게 된다. 자기 동일적이고자 능동적 종합을 수행하는 현실적 나는 잠재적인 자아에 의해 항상 타자화하고 끊임없이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주체가 된다.] 주체는 임시적이라는 말이에요. 밑에서 올라오는 잠재적 때문에 나는 그때만 주체가 된다.
[의식의 능동적 종합은 무의식의 수동적 종합에 의해 자기-차이화 한다.] 뭔 뜻인지 이제 아시겠지요.
[지각-행동-감정의 통합체] 이게 뭔 뜻이냐 하면, 그동안 베르그송 본인이 나타나기 이전에 모든 철학은 항상 의식된 우리 자신에 대한 괜찮음과 우수함과 훌륭함과 그리고 신에게 복종하는 자신의 피조물다움, 복 받음, 여기서 기독교적인 자아가 있었던 거예요. 근데 그걸 따지고 보면 그저 충동이요, 감정이요, 행동이고, 감각적인 통합체에 불과한 거예요. 이 말은 아무리 내가 훌륭하고 싶어도 지각 달라지고 행동이 시간 따라 달라지고 시간 따라 새로운 충동이 온다면 이 통합체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나의 잘남도 다 날아가 버린다는 말입니다. 뭔 뜻인지 이해하시겠지요.
이 통합체의 문제가, [생물학적 필요와 욕구에 의해 제한된 의식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무리 바르게 착하게 살아도 내 몸이 생물학적으로 아무리 점잖은 체해도 배고픈데 돈 만 원 있다. 저것 주우면 빵 살 수 있다. 배부르면 안 주울 수도 있지만, 만 원짜리면 다 주울 수 있겠다. 천 원도 많다.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오백 원짜리 있다. 마트 가면 오백 원짜리 빵 팔거든요. 끼니는 때워요. 오백 원이 빵으로 보이는데 그냥 두고 가요? 자기 것 아닌데?
드라마에 그런 것 나와요. 태백 재벌 딸인데 선 봐라. 못 사는 여자와 사귀지 말고 너는 후계자니까 아버지 사업에 도움 되고 미국에서 유학했고 영어 외에 중국어도 할 줄 알고 특히 마음씨가 착해. 여자가 마음씨 착하다는 말은 뭔 뜻이에요? 인물은 볼 것 없다는 뜻이거든요. 온갖 좋은 것으로 이야기해서 강제로 선을 봤어요. 보니까 진짜 맞아요. 공부 잘하고 다 잘해요. 그런데 애프터 없어요. 왜 없어요? 통합적인 자기 의식적 주관으로 봐서 내 아내로 받아들일 마음이 안 들어요. 왜 안 드는지 이유 있어요, 없어요? 문제는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어떤 여자를 봤는데 다 괜찮아. 인물도 잘 생겼어요. 그런데 왜 아내로 안 삼고 싶어요? 본인이 이유를 알아요, 몰라요? 본인이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왜 모릅니까? 본인이라 할 때 의식에서 나온 본인이잖아요.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내려가야 돼요. 무의식으로 내려가니까 옛날에 내가 과거에 안 좋았던 기억들이 모여서 지금 나의 감정이란 통합체를 이뤘기 때문에 그 여자를 보는 순간 안 좋았던 기억이 반복되거든요.
“아니, 내가 안 좋아하는 타입인데.” 본인이 안 좋아하는 타입이라는 게 현재 당장 만든 게 아니고 과거의 다발이라니까. 과거에 안 좋았던 모양이라. 본인도 몰라요. 지나간 세월 어떻게 다 분석합니까. 어쨌든 현재 감정으로선 이상하게 영 마음에 안 드는 타입이에요. 그래서 기껏 공부 많이 하셨네요. 사실은 제가 사랑하는 여자가 따로 있습니다. 이러면 깨지지요. 그래서 집에 오면 엄마가, 이놈아, 그게 어떤 자린데. 아버지는, 너는 내 자식 아니다. 회사 그만 둬. 못 사는 여자와 살아. 드라마가 그렇게 진행되겠지요.
[나를 부추기는 것에 몰두하는 이 의식은 직전에 지각한 감각(과거)과 막 실행할 행동(미래)으로 수축된 현재를 산다.] 순간에 불과하죠.
[이상으로 살펴본 대로 베르그송에서 시간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과 본질적인 관계를 지닌다.] 무의식과 대비해야 비로소 의식의 정체가 밝혀진다는 말이에요.
[시간은 의식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무의식은 결코 무시간적인 것이 아니다. 의식의 시간이 추상적인 현재를 중심으로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연대기적 시간이라면, 무의식적 시간은 잠재적인 과거를 현실화하는 창조적 생성의 시간이다. 무의식적 시간 안에서 현재는 더 이상 단순하고 불가분한 순간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과거에 의해 물들어 있는 혼합물이고 이중분열체이며 생성이고 지나감이다. 무의식적 시간 안에서 과거는 더 이상 무가 아니며, 또한 현재에 의해 사후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존재하며, 현실화하면서 자기-차이화 하는 시간의 잠재성 그 자체이다.] 빨리 읽어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늘 만들어낸다, 그렇게 간단하게 늘 현재를 만들어낸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라캉의 무의식과 베르그송의 무의식과의 차이점. 같은 점부터 먼저 봅시다. 둘 다 무의식을 상정한다는 거예요. 둘 다 기억이라는 흔적은 의식세계에서 하나의 상징적 기호로 표현된다는 것, 이것도 공통점. 상징적이라는 것은 미흡하다는 뜻이에요. 불만적인 요소가 있다. 한계가 있다, 그리고 라캉적으로 말하면, 안에 실패가 담겨있다. 이미 실패하도록 돼있다는 의미죠. 상징이란 일치하려고 애는 쓰지만 결국 실패로 끝남 또는 진리에 대한 놓침, 이게 상징입니다. 자세한 것은 대전에서 요한계시록 할 때 할 거예요.
요한계시록이 상징이란 말이죠. 뭔 뜻입니까? 해석하는데 실패하라고 준 책이다. 네가 아무리 알아도 진리란 해석한다고 나오지 않는다. 그럼 진리는 어디 있는가? 상징 안에 있는가? 상징 안에는 없어요. 상징 바깥에 있어요. 진리가 상징되게 했기 때문에. 뭔 뜻이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 나오죠. 일곱 교회는 실패하기 때문에 등장한 교회에요. 왜냐하면 실패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성공한 교회를 따로 생각한다면, 그 자체가 진리 바깥에 있는 존재에요. 진리 바깥에 있다는 걸 증명한 겁니다. 진리 바깥에 있기 때문에 진리 같은 교회를 또 찾고 있는 거예요. 실패하면 될 일을 실패 안 하려하기 때문에 그것이 지옥 갈 사람입니다. 그게 십자가 의미에서 나타난 요한계시록에요. 십자가로 나타내는 요한계시록의 특징입니다.
차이점은, [베르그송의 비판에 의하면, 이러한 회고적 가상은 현실적인 연대순을 전도할 것을 명령하는 것밖에 안 된다. 존재해야 하고 존재한다고 추정되는 원인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원인을 대체하는 셈이다.] 감추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라캉에 의하면 회고적으로 진리를 안다고 하는데 회고적이 되면 이건 연대기적이 되잖아요. 라캉은 무의식이 밑에 있는 게 아니고 같이 있는 거예요. 근데 베르그송은 밑에 있는 거예요. 베르그송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원인을 라캉은 위에 있는 무의식이 대체한 게 됐다. 무의식은 대체하면 안 되는데 그걸 대체한 게 문제란 말입니다. 설명하는 내가 더 어려워.
어쨌든 의식하고 내가 있잖아. 베르그송 입장에선. 그런데 왜 라캉은 나라는 것은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서 지금 나를 생각한다고 해버리면 내가 어디서 왔는지 원인은 여전히 안 밝혀지지 않느냐는 게 베르그송의 생각이란 말이죠. 물론 라캉이 베르그송의 후대 사람이지만. 베르그송 입장에선 더 폭넓게 이야기한다는 말이에요. 라캉은 주체에 대해서 문제 삼는데 베르그송은 그런 주체가 어디서 나오는지 더 깊이 있는 철학이라고 베르그송은 이야기하는 거예요.
있는 것은 가짜야. 이건 라캉이지만 어쨌든 간에 이게 어디서 나왔는지는 베르그송이 이야기한다 말이죠. 자연에서 나왔잖아요. 베르그송은 자연철학자지만 라캉은 자연철학자 아니에요. 인간의 정신을 왜 병들었느냐? 거기에 대해서 언급하죠. 있는 것을 정신병인 이유를 밝히는 범위보다도 아예 자연 전체를 이야기하는 범위가 더 넓으니까 더 깊은 철학이라고 베르그송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4페이지에 [이렇게 되면 과거와 현재 사이에 고유한 실재적 지속을 보지 못한다.] 이걸 자연이라 했잖아요. [아무튼 정신분석학의 목표는 묻혀 있던 과거를 더 많이 복원하는(베르그송)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불충분했던 구성을 해체하고 환자가 만족스러워 하는 새로운 구성] 환자가 지금 현실을 싱싱하게 살아가는 게 정신분석학의 목표기 때문에 베르그송처럼 자연까지 들먹이지 않는 것이 라캉의 철학의 한계라고 베르그송 쪽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과거의 사건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질병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현재의 의식이 원인이 되어 과거를 그런 식으로 해석함으로써 과거를 현재의 결과로서 산출하는 것이다.] 라캉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허구로 허구를 치료하는 것이 정신분석입니다.
저는 너무 허무해요, 라고 불평하잖아요. 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고민하다 찾아오면 정신분석학에서 말하기를 그래, 그 허상이 당신이라는 말로 치료가 된다. 뭘 더 원해요. 이게 라캉의 치료법이고, 베르그송은 그 허구가 자연에서 만들었다는 원인까지 제공하는 것이 베르그송의 철학이란 말입니다. 둘 다 허구라는 건 맞는데 차이점은 원인까지 제공해주기에 더 깊다는 것이 베르그송 쪽 주장이란 말이죠.
라캉과 베르그송의 공통점은 뭐냐? 5페이지 두 번째 단락 중간에 나와요. [항상 그 그물 밖으로 새어나가는 무언가가 초과적으로 남아있다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라캉은 왜곡될지언정 그렇게밖에는 달리 실재를 언표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말하는 인간의 근본 조건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반면에 베르그송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간의 조건을 넘어서 실재 그 자체를 직관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왜? 의식 자체가 무의식의 증거기 때문에. 근데 라캉은 의식된 인간으로 실재는 무의식세계는 모른다.
마지막으로 복음적 평가에 들어갑시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한 마디로 말해서 생명계 전체를 설명하기에 개체를 포기하는 ‘탈개체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각 생명체의 죽음이란 사실 생명의 흐름 전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극히 사소한 것에 불과하며 단지 일시적 피곤을 나타낼 뿐이라고 했다. 우발적인 계기며 인간들만이 호들갑을 떠는 지성적 산물이라고 말한다. 생명의 약동은 죽음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제 이야기입니다. 이러다보니까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찾을 수 없지요.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신념, 철학, 인류의 역사도 마찬가지지만 일반 교회에서 설교의 제일 큰 문제점이 뭐냐 하면, 설교를 해석하는 나를 죄인이라고 지적하는 요소가 빠졌다는 겁니다. 성경 보고 순종하려고 애쓰는 착한 나를 죄라고 지적하는 것은 십자가밖에 없어요.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죄인 되는 겁니다.
그런데 베르그송은 아프다, 안 아프다, 기억난다는 이것이지 죄라는 이야기는 안 나오지요. 죄가 나오려면 의가 나와야 되는데 자연을 아무리 뒤져보세요. 아무리 바다를 찾아보세요. 거기서 죄가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이 이야기가 욥기에 나옵니다. 광물을 찾아봐도 진리가 안 나오지요.
욥이 궁금한 것은, 염소 새끼가 어떻게 낳는지, 별을 누가 만들었는지가 아니에요. 죄와 의의 문제에요. 나는 의로운데 죄인이 받는 왜 벌을 받는지 죄와 의의 문제가 궁금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황무지에 비가 왜 오는지 아느냐고 했어요. 주님은 황무지에 비 내리는 것도 네가 궁금해 하는 의에 속한 문제로 보는 겁니다.
제자들과 예수님 갈릴리 바다에 있을 때 풍랑 쳤지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꾸짖지요. 꾸짖는 것은 나쁜 짓했을 때잖아요. 우리가 흔히 보는 해운대 앞 바다, 어디에 봉사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의에 봉사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나타난 의가 되고 그것이 십자가로 나타난 거예요. 로마서 1장에서. 오직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나니 곧 복음이라. 그 의 앞에서 우리는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옷 입으니 벗으나 십자가 앞에서 부끄러우면 세상 앞에서 수치스럽지 않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주님이 의롭다 했다면 우리는 누구 앞에도 당당해지는 거예요.
지금 베르그송이나 라캉도 마찬가지고 욥이 하는 관심사, 욥은 제가 의인이에요, 죄인이에요? 그게 관심사죠. 그 관심사는 오직 언약에서만 나옵니다. 왜냐하면 언약의 주인공이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이 땅에 십자가 진 이유가, 세상을 만든 이유가, 풍랑을 잔잔케 한 이유가, 욥에게 고난 준 이유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알고 하는 말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그 의 앞에서 인간의 철학부터 과학, 모든 것은 전부 깨트림을 당해야 될 걸림돌로 이 세상에 등장해야 되는 겁니다. 하이데거도 마찬가지고, 신학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고, 철학도 마찬가지고. 교회가, 철학이 구원하는 게 아니거든요. 베르그송 철학이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십자가의 능력인데 그 능력을 우리가 소유할 순 없고 그 앞에서 날마다 깨어지면 돼요. 깨어진 파편은 죄가 돼서 흩어지고 깨트리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의로움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6페이지 봅시다. 마지막에. [언약에서 언약으로 나아가는 현실상] 아까 베르그송은 무의식이 현실이라고 했지요. 베르그송한테 이야기하고 싶은 언약에서 언약으로 나아가는 현실상, 이게 바로 구약 이스라엘이 알고 있던 그 현실입니다. 하나님과 다투었다고 해서 맛사 있지요. 또는 주께서 어린양 준비했다고 여호와이레. 보세요. 새기잖아요. 하나님의 언약을 새긴다고요. 야곱이 이름이 바뀌니까 뭐가 됐어요? 이스라엘. 언약을 새긴다고.
그 언약을 십자가 이전에 새겼고 오늘날 우리는 주께서 십자가로 새겨진 언약이기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자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바깥으로 나오게 되지요. 이게 우리가 움직이는 언약체, 이렇게 볼 수 있어요. 베르그송은 그 점을 모르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오늘도 언약에 이끌림을 받아서 베르그송 철학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주의 뜻이 함께 하사 십자가의 능력이 왜 위대하고 십자가의 의만이 왜 의인지를 더욱 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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