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20151203 혜화동특강f-언약의 흐름 본문
녹취:한윤범
20151203 혜화동특강f-언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신약에 들어옵시다. 마태복음 6장에 봅시다. 6장 1절 읽어보세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됐습니다.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면 누구한데 보인다는 겁니까? 인간에게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 들키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하나님은 전부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보시기에 인간이 의식해서 하는 모든 것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짓거리가 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사람으로 온 겁니다. 같은 사람인데 하나님을 섬기는 게 왜 그렇게 다른지 몰라요. 예수님이 아버지 섬기는 것과 사람들이 신을 섬기는 것과 같지 않아요. 같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반대가 되고 충돌이 일어나지요. 싸움은 바로 이 싸움입니다.
예수님 본인 빼놓고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규정짓고 말았어요. 자꾸 아니라고 하면 안 돼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사람을 의식하고 하는 겁니다. 그걸 세밀하게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자기들 집단, 시대 이름을 빙자해서 같은 인간들끼리 서로 눈치 보기, 의식하기, 그리고 만약에 그 집단에서 그들 식으로 믿지 않으면 추방에 대한 생존의 위협, 두려움, 외로움, 이런 걸 두고 이야기하겠지요.
그러면 인간은 인간 시선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경계는 주님이 정하지 인간들끼리 정하는 게 아니거든요. 인간들이 테두리를 만들어놓고 이게 전부라고 하잖아요. 이 전부 바깥의 것을 상상하겠지요. 인간이 만든 테두리는 가짜입니다. 그 바깥의 여백을, 잉여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가짜 전부가 되겠지요. 진짜 경계선은 예수님 오셔서 치면 인간은 모두 이 안에 갇히게 되는 거죠. 인간이 상상한 그 무엇이 되던 그것마저 주님 안에 갇히게 되죠. 더 큰 범위에서. 이 바깥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예수님 몫이지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바깥이 뭔지 몰라요. 바깥 모르면 내가 누군지도 몰라요.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 모릅니다. 왜? 바깥의 시선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그저 남들이 이렇다고 하더라는 것밖에 모르지요. 전통과 역사 가운데서 나는 정당하다고 이야기하더라, 그것밖에 몰라요. 주어들은 정보로 그것으로 조립해서 자기를 구성하거든요.
그런데 사람에게 보인다는 말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테두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리 신에게 순수하게 해도 안 돼요. 예를 들면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못 하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인간이 백날 해봐야 사람에게 보이려는 범위 안에서 이뤄지는 행위만 할 뿐이지 심지어 예수님께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그걸 그대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거예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 바르는 행동이 사람에게 보이려는 행동일 수밖에 없어요. 주기도문을 반복하는 것고 마찬가지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도 마찬가지고. 맹세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고. 백날 흉내 내봐야 그 흉내에 불과하고 흉내 낸 자아는 사람에게 보이려는 자아입니다. 왜냐?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그 경계선은 제자들도 모르고 예수님 본인만 알아요. 아버지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주님만 그 경계선을 알지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릅니다. 모든 인간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거지요.
그건 뭘 의미하느냐? 마가복음 7장 15절,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게 더럽지요. 그러면 사람에게 더러움이 들어있는 걸 봐서 마귀의 세계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마음에서 만들어내는 모든 현실관이 마귀의 세계입니다. 마귀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그만큼 마귀 세계와 친화적이에요. 자발적으로 그 세계를 원하고 있어요. 더러운 마음이 원하는 세계가 인간이 원하는 현실적 세계거든요.
인간이 구성한 모든 역사와 모든 것은 마귀의 세계인 이유가, 이미 마음에 기획안과 설계도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매일같이 쏟아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마귀의 세계만 좋아합니다. 차마 그걸 마귀라고 표현하지 못할 뿐이죠. 그 마귀의 세계를 나의 세계라고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 세계가 아닌 이상 마귀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마귀의 세계에서 못 벗어나고 주님 세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 마지막 기대치가 있어요. 국가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 갑자기 진도가 빨리 나가네. 어쨌든 다 했다는 형식이 중요하니까 무리하게. 요한계시록 17장 1절 봅시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여기서 물 위에 앉은 음녀, 바벨론. 바벨론 성이 몇 개지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바벨론 성이 하나밖에 없지요. 하나밖에 없으니까 통합이에요. 인간이 구성한 세계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둘이 아닙니다. 싸워봐야 결국 한 통속이에요. 그걸 하나로 규정짓는 것은 일곱 대접이죠. 일곱 대접이라는 것은 이미 경계선 안에서 움직이는 겁니다. 어느 인간도 일곱 대접 바깥으로 못 벗어나요.
일곱 대접에서 멸망한다는 것은 그때 멸망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멸망된 상태에요. 새삼스러울 게 없어요. 이미 포위돼있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폭삭 주저앉는 겁니다. 일곱 나팔, 일곱 인, 일곱 대접으로.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이 세상이 불바다 되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미 가두어진 자체를 놀라워해야지 가두어진 상태에서 불바다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기 때문에 그건 이상한 게 아니에요. 인간이 인간 세상에서 못 벗어나는 자체가 이게 이미 절단난 거예요. 예수님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게 절단난 거예요. 무슨 수로 알아듣습니까? 갇혀있는데.
따라서 갇혀진 세계에서는 일방적으로, 여기 보면 음녀지요. 음녀란 표현을 누가 합니까? 음녀가 표현할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국가라고 표현하지요. 그러나 음녀라고 누가 표현합니까? 일곱 대접으로 포위시킨 그분이 음탕한 여인이라고 표현했지요. 음탕한 여인에게는 이미 다른 주, 다른 남편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용서나 긍휼은 없습니다. 이미 명칭 자체가 음녀기 때문에 음녀는 반드시 멸망당해야 돼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새삼스럽게 어려운 점은 없어요. 있는 그것을 명칭만 바꿨을 뿐입니다. 음녀.
그런데 요한계시록 이전에는 세상, 이렇게 하지요. 세상, 하니까 약간 희망 있을 것 같고 잘하면 구원될 것 같지요.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동결, 꽁꽁 얼어붙은 음녀에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곱 대접의 심판 대상. 일곱 대상은 노끈 같아요. 체포할 때 묵비권이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하는 꽁꽁 묶어놓는 노끈 같아요. 일곱 대접, 일곱 나팔이란 빠져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꽁꽁 묶였다 이 말이죠.
여기 나오는 음녀가 어떤 식으로, 특히 17장 3절에 보면,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이거는 마태복음 4장에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데리고 광야로 간 것과 유사한 형태지요. 예수님이 광야로 가니까 마귀와 만났지요. 인간 세계는 마귀가 없어요. 인간들 세계는 인간만 있어요. 인간들의 뭉치가 사회와 국가입니다. 그것뿐이에요. 마귀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하느냐 하면, 이걸 묶어놓는 외부 시선에서 주님의 시선으로 볼 때 이게 마귀의 세계에요.
그러나 내부 인간들 시선에서는 마귀의 세계나 음녀도 아니에요. 인간들의 지혜와 노동의 발전책이 현재 국가입니다. 왜 국가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국가는 마지막 통합적인 이데올로기, 사상이기 때문에. 국가 바깥은 없습니다. 국가 대 국가지요. 그 통합국가 최고는 유엔. 그런데 국가 대 국가는 화합하지 않습니다. 민족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데 성경은 모든 국가를 하나의 바벨론, 음녀로 통합시키고 말았어요. 따라서 그 시선과 평가, 안목으로 봤을 때는 우리는 꽁꽁 묶인 겁니다. 동결된 겁니다. 개인 심판, 개인 구원은 없어요.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마땅히 망해야 되는 겁니다.
아까 마가복음 다시 봅시다. 7장에 보면,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게 아니고 나오는 게 더럽지요. 그 대목 다시 할게요. 국가란 것은 인간의 마음들이 모여서 국가가 된 거잖아요. 인간이 국가로 여기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동의한 겁니다. 내 마음이 국가를 유발시킨 거예요. 국가를 원해요. 최고의 통합사상, 통합체계입니다.
국가를 위해 충성한 사람이 안중근 의사잖아요. 그리고 우리나라와 일본이 축구하면 누구 편 들 거예요? 한국 편 들지요. 왜 그래요? 내 마음이 내가 소속돼있다는 의식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국가도 살아있어요. 음녀도 살아있고. 나는 그 국가 안에서 안심과 평화를 얻고 싶고 행복을 누리고 싶어요. 그런데 그 속에서 나오는 그것이 악한 것이란 겁니다. 그래서 모든 국가는 악한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어디 있습니까? 이 마음이 전부 인데 전부인 줄 알았는데 모든 건데 낯선 마음이 나온 거예요. 그게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4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소속이 어디라 했습니까? 생명이 있는 곳이 소속인데 우리 생명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요.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그리스도의 마음이 삐치고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언약의 요소를 품고 있는 거예요.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과 같은 양상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성령께서 예수처럼 사용하셔서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서도 데려가지 않으면서 이 땅에 그냥 머물러 두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내가 세상이 속하지 않은 것처럼 너희도 속하지 아니했다. 하지만 너희를 데려가지 않겠다. 이 세상에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서 너희를 남겨두겠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혼나는 거죠. 소속이 아닌 남의 나라에 사는 겁니다. 이방인, 나그네로서 히브리서 11장 말씀처럼. 우리 본향은 따로 있는데 남의 동네에 사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죽어서 지옥 구경 못하는데 살아서 실컷 구경하라는 거예요. 맛있는 짬뽕 먹고 짜장면 먹으면서. 그 세계에서 예수님이 시달렸던 그 시달림과 당했던 시련과 아픔을 같이 겪어라. 그래서 내 백성이란 말이죠. 하지만 두려워 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이 이겼으면 우리도 이긴 거예요. 내가 이긴 게 아니고 이김의 요소가 발생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군사에요. 성도에요. 맨날 지는데 이기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 속에 옛 자아와 새 자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옛 자아는 이 세상이 좋아요. 한국 팀이 축구할 때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막 듭니다. 제발 한 골 넣고 이겨라. 지고 나면 하루 종일 기분 나빠요. 괜히 말 툭툭하게 되고. 내가 응원하던 프로야구 팀이 지면 기분 되게 나빠요. 내가 은근히 좋아했던 팀이 이기면 갑자기 기분이 삽니다. 감정적으로 충동적이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중심적이죠. 그게 내 마음이죠. 속에서 나오는 주님과 관계없는데도 기분이 좋아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주로 인하여 기뻐하라하는데 내가 원하는 걸로 기뻐하는 그런 모습이 나옵니다.
그렇게 나오게 되면 결국 성도는 실망스럽지요. 평소에 성도가 내 뜻대로 안 되지요. 내 뜻이 어디서 나온 겁니까? 내가 기대하고 싶은 것을 주변에서 이미 그런 욕망들을 보았어요. 나도 저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 감출 수 없이 내 속에서 터져 나온 겁니다. 그걸 주께서 꺾어버리죠. 그러면 우리는 짜증내고 실망스럽잖아요. 그런데 실망스런 가운데 갑자기 기쁨이 확 생기게 만드는 현상이 일어나버리죠. 그게 주께서 주시는 기쁨이죠. 성령의 기쁨이죠.
그럴 때 다시 말씀이 우리 속에 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 생명은 이쪽에 없고 저기 있다는 거죠. 너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 땅의 것을 생각하면 그 뒤에 나오는 땅의 것은 우상 숭배니라.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이 우상 숭배고 탐심이라면 이 세상 자체가 뭐냐? 우상을 유발하는 세상 속에 너희는 태어났고 살아왔고 성장했다는 겁니다. 우상만 생각하는 곳에서. 내가 곧 우상이죠.
그 뒤에 나오는 바로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이것을 주께서 매일같이 우리한테 실시시킵니다. 옛 사람을 버리려면 옛 사람을 유발시켜야 돼요. 내가 아는 옛 사람은 옛 사람 아닙니다. 새 사람으로 여겼다는 것도 좀 있으면 옛 사람으로 밝혀지지요. 왜냐하면 새롭게 나와야 되는데 옛날에 나온 것을 붙잡아서 경건함으로 포장할 때 이미 옛 사람 돼버립니다. 또 지 자랑하고 싶죠.
그냥 내 마음을 내가 다스리지 말고 주께 맡기면 주께서 알아서 옛 사람이 늘 지적받고 나오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약의 사람 되지요. 아까 이야기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주님 만나고 옛 사람과 새 사람 같이 뒤죽박죽 나왔지요. 자기가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고 대신 죽은 아들이 신앙생활 다 해주지지요.
내가 인생 산다고 생각합니까? 대신 죽으신 예수님이 내 인생 다 준비한 걸 모르고 내가 따로 경건한 내 인생을 시나리오를 짜고 소설을 쓰고 있는 겁니다. 주여, 저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살았습니다. 다 찢어버립니다. 주께서 이렇게 했고 이렇게 하신 거죠. 앞으로 그렇게 하실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미처 모르기 때문에 지금도 돌아서면 내가 이걸 했다고 슬그머니 자랑거리로 내놓지요. 주께서 그것을 주의 일로 교체시키는 작업이 언약 작업이고 그럴 때 우리는 언약의 내용이 담겨있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오늘 보았습니다. 결국 하고 싶은 것은 언약중심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두 분의 세계다. 우리는 그 분의 세계의 하신 일의 결과물로 이 땅에 왔을 때 비로소 창조물이 제 자리를 찾은 거예요. 창조주를 찬양하기 위해서 창조물이 있어야 되는 당연한 자리를 주님에 의해서 실현시킨 겁니다. 종이니까 무익한 종이 할 바를 했을 뿐입니다. 면류관 반납하고 주님만이 이 모든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에 다른 사람이 묻기를 당신이 방금 이야기한 것이 멋있게 보이지만 증거가 뭐냐고 물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실제로 부활했다. 부처가 그랬느냐, 공자가 그랬느냐, 누가 그랬느냐, 대통령이 그랬느냐? 어느 역사에 십자가 부활을 그렇게 강조했나, 옛날에 예수란 자가 그랬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뿐이지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었습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이 어떻게 설교했는지 보세요. 사도행전 17장 30절 읽어보세요.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실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의 설교 포인트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 십자가 복음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4절에서 6절까지.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조에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아멘.
여기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가 상상한 그리스도가 아니고 죽었다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십자가만이 복음이라고 우리 내부에서 퍼 올려주시는 우리 내부를 복음의 현장으로 사용하시는 주님만이 이 고백에 동참, 그런 자만이 사도 바울 같이 동참할 수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론이 아니고 신학이 아니고 교리도 아니고 실제로 이천 년 전에 예수님 오셔서 죽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했다는 말은 지금 살아 계시다는 뜻인데 살아서 일한 그 결과가 십자가 복음에 감사하는 결과로 이어졌사오니 그 원천을 따라서 옛날에 살았던 많은 선지자를 따라서 성도로서 십자가 복음만 증거 하다가 주님 얼굴 뵈옵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저서 & 기타(이근호) > 혜화동 특강·언약의 흐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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