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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20151203 혜화동특강d-언약의 흐름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혜화동 특강·언약의 흐름

20151203 혜화동특강d-언약의 흐름

정인순 2015. 12. 15. 11:17

음성4   

 

녹취:한윤범

 

20151203 혜화동특강d-언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아브람과 아브라함이 구분되지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전이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하게 되면 거기서 축복과 저주가 아브람은 저주, 아브라함은 축복, 아브라함의 가정 내부에서.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 민족이 단체로 복 받는다 하니까 일단은 기분 좋았는데 언약이 계속 개입되니까 안심 놓고 있던 아브라함의 혈육적 관계 자체가 구원이 보장 안 되지요. 언약이 내부에서 내부로 깊숙이 파고들어옵니다.

 

아까 요한복음 할 때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한다 했잖아요. 안심 푹 놓았지요. 세상치고 다 사랑받네, 하다가 나중에 요한복음 17장에 보니까 그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사람이 따로 있고 그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준 자만 국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정론은 구원론으로 접근할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하나님의 일관된 작업 중에 하나가 예정된 자로 도입돼야 돼요. 사람들은 예정론 생각할 때 창세전부터 되니까 창세전의 자기 모습과 지금 자기 모습과 직접 연결시키는데 그래서는 해명이 안 되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도록 동원된 자는 인간이 노린다고 해서 넣어주는 게 아니에요. 구원돼야지, 구원돼야지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아버지께서 보낸 자에 한에서 예정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 후손이 복 받는 민족이라고 해서 그 민족이 흔히 생각하는 아브람 민족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족속에 속하지요. 그러면 아브라함만 쳐다봐서는 안 되죠. 왜냐하면 언약이 계속해서 추가되니까. 추가되어 새롭게 발생된 현실이 있잖아요. 그게 이번 시간에

 

그 이삭과 이 이삭. 이삭의 차이점이 다르죠. 어릴 때 이스마엘과 대비되던 그 이삭과 그 이삭과 대비되는 이삭. 이 이삭은 죽었다가 살아난, 하나님께 죽음으로 바쳤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살게 된 이삭, 이것은 믿음의 내용이 함유된 이삭이에요. 죽었다가 살지 않으면 아무도 이삭 계열이 아니다. 그리고 네가 알아서 자살하는 수는 없고 주께서 언약대로 실시한 그 죽음에 가담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언약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구원론이 날아가 버려요. 구원받겠다는 그 의식 자체가 전혀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는 외부에서 투입된 악마적인 사고방식이죠.

 

구원받겠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증거로 어떻게 만들어내느냐는 관계에 있거든요. 예를 들면 과자가 있는데 이 과자는 초콜릿 과자고 이건 초콜릿 과자 아니잖아요. 새카만 초콜릿 과자가 보기 좋았던 모양인지 나는 어떻게 하면 초콜릿 과자가 될 수 있어요, 라고 하나님 앞에 요청한다면, 그렇게 기대한 자체가 내가 어떻게 달라질까를 생각하잖아요. 그럼 하나님께서는 자리를 이렇게 이쪽 자리로 옮겨버립니다. 그 순간 처음 자리에서 봤던 모든 것은 무산됩니다. 하나에 환각에 불과합니다. 내가 이게 탐이 나서 나도 천국 가고 싶어요, 한 그것이 막상 구원받으면 그것은 내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천국 가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진 게 아니고 주께서 천국 일을 하려고 이미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뒤늦게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받겠느냐, 안 받겠느냐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닌 것으로 정리되어서 날아가 버려요. 쓰여지는 게 중요하지 구원되고 안 되고는 관계없는 거예요. 주께서 까맣게 사용하면 까만 케이크가 되는 겁니다.

 

이 이삭은 믿음의 내용이 함유돼있습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이삭이 살아난 것은 바로 장차오실 예수님이 죽었다 살아오실 것을 이삭이 그 내용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삭과 동일한 믿음의 계열이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복된 민족이라 할 수 없지요. 다시 이야기하면 아브라함의 족속은 복되다. 기분 좋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언약을 아브라함 자손에겐 손 안 대고 바깥에만 손댈 줄 알았는데 천만의 말씀, 아브라함 자손에게 손대니까 이제는 그 이삭은 안 되고 새로운 이삭으로 변모돼야 되지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포함된 새로운 인간이 이삭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삭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자기가 경험했던 죽었다 살아난 운명을 자기 인생을 통해서 후대에 똑같이 반복이 되는 자만이 이삭에 속한 복된 자식이 되는 겁니다. 그 반복을 경험한 사람이 바로 야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삭은 둘로 나눠집니다. 에서를 좋아하는 이삭과, 에서를 좋아한다는 말은 같은 말로 야곱을 싫어하는 이삭, 그 이삭을 통해서 뭘 하느냐 하면, 뽑아냅니다. 이삭이 복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삭은 하나님이 복 주는 절차에 방해자로 가담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결과적으로 가린 게 됩니다.

 

그럼 처음부터 왜 몰랐는가? 처음부터 주의 뜻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자기 취향대로 하다 보니까 돌아서서 보니까 주의 뜻을 가렸군요. 그러면 주의 뜻을 가려도 구원된다는 말은 내가 행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의를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언약적 메커니즘(기제) 속에서 이삭은 주님 덕분에 구원받는 겁니다. 야곱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되게 함으로써 야곱이 진짜 야곱 되게 하는 동시에 이삭은 자신의 죄가 용서받는 거죠.

 

이삭에게 복이 전달되면서 아브라함이 복을 받는 거죠. 야곱 때문에 이삭이 복을 받고.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멀리 있는 노아가 구원받고, 아벨이 구원받고, 아브라함이 구원받는 겁니다. 그 논리를 끄집어내야 돼요. 그 논리를 끄집어내려면 소위 하나님 일에 가담한 자가 죄를 알기 위해서 가담했다는 사실. 주의 일을 알아서 스스로 열심히 했더니만 구원되는 건 없어요. 오히려 그 일을 통해서 자기 성질과 자기 취향이 드러나고 그 취향과 성질은 주의 일과 아무 상관없이 오히려 방해만 되는 육적인 속성이 방출되는 겁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죠. 하나님 지시에 따라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가운데, 그 전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공들였습니까? 모세 양 치는 데까지 와서 떨기나무에 불붙이고 신발 벗으라까지 친절한 하나님, 일부러 찾아오셔서 거룩한 산으로 유도하셔서 지시 다 내렸으면, 남은 일은 모세가 알아서 하면 될 텐데 모세가 내려가는 숙소에서 모세를 죽이려고 했잖아요. 이게 얼마나 모순 돼요.

 

시작을 괜찮게 했으면 계속 괜찮게 해야 되는데 인간의 사고방식이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잖아요. 주님은 반대가 되어 네가 준비한 미래는 미래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한 미래는 과거가 원인이 되어 나온 결과로서의 미래거든요. 그런데 주께서 그걸 틀어지게 하는 겁니다. 네가 과거에 생각했던 미래와 다른 미래를 제공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생각한 과거 자체가 제대로 된 과거가 아니고 거기서 농축된 현재가 제대로 된 현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소명 얻었기 때문에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억측이 되고 오해가 되는 겁니다. 나중에 그리스도 앞에서 모세마저 죄인이 되는 거예요. 모세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지지 아니하면 모세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게 변화산이에요. 모세와 엘리야, 얼마나 일 많이 했습니까? 그들이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대화한 내용은 뭐냐? 주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별세에 관한 문제였어요.

 

다시 말해서 모세와 엘리야가 한 통속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주님이 죽으시는 그 죽음에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 개입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너희들은 고생 많이 했기 때문에 그냥 구원해줄게. 이게 없어요. 모세란 인간도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대신 죽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천국은 없다. 이미 천국에 살면서도 그것을 분명히 일깨워줍니다. 별세에 대해서. 제자들도 마찬가지죠.

 

이삭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실패를 보여주는 겁니다. 나는 에서 쪽인데 하나님께서 야곱 쪽으로 돌렸다는 거죠. 그런 일 없지만 만약에 이삭이 야곱을 좋아한다면 주께선 에서 쪽으로 돌려버릴 겁니다. 언약은 반드시 인간의 것을 피해가야 대신 죽으심이 의미가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각이 일치되게 되면 대신 죽음의 의미가 죽어요. 모독 받습니다. 사실은 마귀가 노리는 건 그겁니다. 마귀가 노리는 것은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따먹은 만큼 지식의 효과를 구원받는데 보태라고 주장하죠.

 

마귀들 생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이삭이 에서를 밀어주고 야곱은 싫어하는 그런 모습 속에 구체적으로 함유돼있어요. 마귀가 뿔 달고 녹색 얼굴 하고 날개 달고 나타나는 게 아니고 실제로 역사 속에 마귀가 세밀하게 작용하고 있어요. 다만 복음이 들어오니까 마귀가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냥 복음이 없으면 다들 점잖고 정상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죠.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고. 세상 제대로 잘 돌아가고 있지요. 문제가 뭐 있어. 문제없는 거야. 문제없이 보이고 세상이 평화롭게 보입니다.

 

우리 공부가 언약에 관한 문제고 언약은 전쟁에 관한 문제인데, 마태복음 10장 34절 읽어보세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보세요. 도대체 우리가 말하는 인간들만의 세상은 항상 평화, 평화.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며 고요하게 사는 게 남는 거다. 하지만 주님은 의도적으로 화평을 주는 게 아니고 더 분란을 일으킵니다. 검을 주러 왔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불화지요. 화평하지 못한 불화하기 위함입니다. 이게 우리들과 저쪽이 싸우는 게 아니고 가정 내부에 딸이 엄마와 얼마나 친합니까. 내부를 조각조각 내는 거예요. 가족끼리 서로 싸운다는 말은 더 내부에 들어가면, 내 마음 자체가 안정을 원하고 지속을 원하는데 이것마저 주께서 허락하지 않고 그걸 깨버립니다.

 

그래서 38절에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이 못난 네 목숨은 지금 개판이란 거죠. 네 마음 지키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집착하고 지키는데 네가 지키는 그것을 깨버리겠다. 부셔버리겠다. 그러면 이 말 듣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럼 어떻게 살라고요?” 이렇게 나오겠지요. 살지 마. 네가 지금 뭘 지키려고 하느냐? 지키려고 하는 것이 너한테 올무고 그것이 나의 전쟁에 훼방이 된다는 사실이죠.

 

쉽게 말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 전쟁할 마음이 있긴 있어? 나의 전쟁에 함께 마음이 있는 거야, 그냥 편안한 게 행복이라고 싶어. 관람이나 하고 싶은 거야, 전쟁터에 뛰어들고 싶은 거야?” 그걸 묻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열두 제자의 사명이 전부 전쟁에 관한 거예요. 네가 핍박하면 도망가고, 그런 이야기 있잖아요. 11장도 마찬가지에요.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뱃새다야”(20,21절) 이게 갈릴리 바닷가 근처에 있는 지역인데,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21,24절)

 

지금 전쟁이 불나게 일어난 겁니다. 미국의 침례교 쪽 보수주의라든지 성결교 쪽에서는 이스라엘 땅에 의미를 두는데 주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이스라엘이 아니라 러시아 어느 땅이라도 분란이 일어나는 이유가,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화평을 원하고 있다는 마음 자체에 기존의 것을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적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여, 내 마음을 다치면 안 돼요.

 

십자가 진다는 말은 주님의 불화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옛날 이스마엘과 비교되는 이삭이 아니고 아브라함 가정 내부에서 벌어지는 지금의 이삭, 언약적 내용을 품고 있는 이삭입니다. 십자가란 내용을 품었다는 말은 나의 행복은 끝났다는 거죠. 나의 구원은 끝났고. 나의 아름다운 미래도 끝났어요. 내가 관리하거나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내가 없어지는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내 속에 분란 요소가 있지요. 옛 자아와 새 자아로 분란을 일으키죠. 로마서 7장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런 분란만 있을 뿐이지 어느 자아가 구원받느냐고 따로 빼내지 마세요. 빼내면 분란이 사라지게 되면, 우리는 전쟁할 군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목사님, 마음이 편안한데요. 복인 줄 아세요. 그리고 감사하면 돼요. 심란하다? 그러면 기도하면 돼요. 고요하면 찬양하면 돼요. 문제가 있거든 기도하고 고요하거든 찬양하란 말은 어떤 상황이든 네가 기대한 상황이 아니고 주께서 다루시는 상황이기 때문에 미리 내 것이라고 미리 예상할 필요는 없다 이 말이죠.

 

강의 중에 이러면 안 되는데 찝찝해서. 어떤 분이 질문했네요. “안녕하세요. 야고보서 5장 15절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라, 돼있는데 주께서 이 병든 자를 알고 계시는데 굳이 믿음으로 기도시키는 이유가 뭘까요? 아니 이미 중보자께서 기도하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병 낫기를 기도하시잖아요(죄 사함).” 이게 질문입니다.

 

-죄인임을 깨닫게 하려고^^

 

목사님도 이런 질문 많이 받지요. 쉬운 시간에 답하고.

 

언약이 주도권을 쥐고 있고 우리는 언약의 부름을 입었기 때문에 주도권이 언약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언약의 내용과 기대하는 내 내용이 다르게 되지요. 그러면 우리가 언약의 내용이 뭐냐고 물으면, 구약적 입장에서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야곱도 마찬가지거든요. 아브라함이 소명 받을 때 내가 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자기가 기도하니까 롯 조카가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원받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이 뭡니까? 네 자손이 하늘의 별 같이 많을 것이다. 항상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같이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자기가 뭔가 된다고 당연히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 외부에 치장하는 게 아니고 드디어 이스라엘 가정에 들어오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삭 주시고, 그래 이삭은 나의 후손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삭을 죽이라 하지요.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자기 게 바닥이 드러나죠. 찢어진다, 깨진다고 표현할 수 있는데 아브라함은 자기의 최후라고 할 수 있는 밑바닥까지 깨져버리면 아브라함은 옛 자아와 새 자아로 분리될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옛 자아는 새 자아로 넘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옛 자아가 알아요. 무지무지 중요한 이야기를 방금 제가 내뱉었습니다. 옛 자아에서 새 자아로 넘어갈 수 없어요. 이건 새 자아로 등장할 때만 옛 자라로 판정되지 어떻게 옛 자아로 새 자아로 하겠다? 이건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고 상상한 겁니다. 어떻게든지 살려보려고. 자기가 자기를 살려보려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거죠.

 

그런데 그것이 상상이 아니고 실제로 옛 자아는 끝나고 새 자아로 주어진다는 것을 뭐로 아느냐 하면,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주어지고 이삭을 바쳐야 된다는 사실이죠. 이삭을 바치는 게 대신 죽음이 되는 겁니다. 대신 죽음이 돼버리면 이제는 아브라함이 스스로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끝나버렸어요. 그럼 어디로 건너가야 돼요?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건너가서 이삭의 효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뒤늦게 구원의 혜택을 입잖아요.

 

언약구조인데 똑같은 방식이 아까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대비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면 언약적으로, 이번에는 이삭 대에서는 이삭을 야곱을 상대로 똑같은 그러한 지적을 이삭이 받아야 되겠죠. 그럼 야곱은 어떻게 됩니까? 응용문제. 요셉을 통해서 똑같은 지적을 받는 거예요. 내가 뭔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이렇게 해서 됐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내가 알지 못하는 사건 앞에서는 그것마저 구원에 훼방된다는 사실. 대신 죽으심,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내 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언약을 증거하기 위한 조치 현상에서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가만있는데도 불구하고 주께서 그렇게 이끌어 가시고 인도하시는 거예요. 내 마음에 옛 사람과 새 사람의 불화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그게 모든 인간에게 다 주어진 거죠. 이건 성경에 나오는 구원받은 사람 다 마찬가지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지요. 가락지 끼고 소 잡고 난리 났잖아요. 상상해보는 거예요. 그 뒤에 자랑질했겠습니까, 나는 탕자라고 유지했겠습니까? (나는 탕자라고)유지했겠지요. 지금 목사님은 고백하는데 이걸 아는 사람이 참 드물어요. 복음을 알기 때문에 나온 거예요. 십자가 알고 난 뒤에 더욱 더 죄인인 걸 아는데 맨날 저한테 따지기를 의인 됐는데 왜 죄인이라 합니까? 이걸 따지는 거예요.

 

실제로 상상했을 뿐이지 실재가 침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자랑질하기 급급해서 그렇습니다. 왜 그걸 자랑질하고 싶냐 하면, 교인들이 “목사님, 구원받았어요?” 할 때 나, 구원받았다는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랑질해서 뭐 합니까? 주님을 자랑해야지 구원받은 걸 자랑하면 자기 증인 되지 주님의 증인 되는 것 아니거든요.

 

이럴 때는 구원 못 받았다고 하지 마시고, 구원 안 받을래. 또 구원 못 받았다고 하면 우리 목사님 구원 못 받았단다. 나도 구원 못 받는다. “나, 구원 안 받을래.” 얼마나 여유가 있으면 구원 안 받겠어요. 얼마나 자유로우면 구원 자체에 대해서 구원이거든요. 구원 자체에 대해서 탈출했으니까 구원 문제에 연연할 필요 없으니까 그 자유 함을 보이는 거죠.

 

이제는 내가 용서하니 너는 두 번 다시 죄 짓지 말라고 간음한 여인에게 이야기했지요. 그 뒤에 누가 간음한 여인에게, “당신은 예수님께 용서받았지요?” “용서받았습니다.” “죄 지었습니까?” “주께서 죄 짓지 않게 하셨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본인이 가서 죄 안 지면 본인이 옛날 죄 된 세계에 그대로 눌린 셈이 됩니다.

 

답장을 안 하니 자꾸 오는데 잠시 답장하고 갈까요?

“정정하겠습니다. 중보자께서 기도하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병 낫기를 기도하잖아요. 중보자께서 기도하고 계시잖아요.”

 

지금 어디까지 했느냐 하면, 사실은 요셉까지 끝난 셈이 돼요. 하나님의 언약이 우선이다. 언약이 끼어들었다. 언약 앞에서 인간들은 자기가 복의 근원인 것처럼 행세하고 싶어 한다. 주께서 그걸 틀어버리는 거예요. 내가 상징으로 버티고 있으면 실재가 나로 인해 가려져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내 뒤를 가린 것을 내가 상상해버리는데 그게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내 뒤에 계신 분이 현실 속에서 나를 치면 나는 엎어지고 자빠지겠지요. 비로소 그때 등장하시는 분, 그분과 나 사이는 나 같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나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분으로 등장할 경우에만 언약이 포함된 언약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다. 뒤에서 발길로 찬단 말이죠. 우리는 자빠지죠. 그것도 아주 꼴사납게 자빠지죠.

 

야곱언약을 이루는데 야곱이 한 게 뭐있습니까? 마차 타고 온 것밖에 없지요. 아들 죽었다고 징징거리다가 잘 믿기지 않은 상태에서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마차 타고 왔지요. 와 보니까 다 돼있는 걸 자기는 언약 이루는데 죽은 자가 됐지요. 주님께선 오히려 살았다는 나를 죽은 자로 무능한 자로 만들고 죽었다고 여겼던 살아서 요셉이 생생하게 살아서 모든 다 이뤄놓고 아버지와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서 애굽으로 데려오잖아요. 그럼 야곱이 한 게 뭡니까? 그냥 언약만 누리죠. 그게 바로 언약이었단 말입니다.

 

그것을 야곱이 품게 되면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큰 아들, 작은 아들 자리 바꾸고 그냥 할 수 있는 걸 어긋맞다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자리를 바꾸지 않고 어긋맞게 해요. 교차되게 한다고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한 옛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구체화되어 나타났다는 거죠. 그러면 그동안 자기 인생을 하나님이 마음대로 이끌어 오신 거예요.

 

그걸 시편 105편 17절,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한 사람을 앞서 보냈지요. 그리고 요셉이 종으로 팔렸는데 19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이 말은 요셉 이전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스스로 성취하기 위해서 성취하는데 구체적인 인물인 요셉을 움직였단 말입니다. 요셉은 다 끝나고 난 뒤에 형제들이 아버지 죽었으니까 이제 나한테 복수할래? 하니까 요셉이 오히려 더 난처해하면서 분명히 내가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서 나를 먼저 앞서 보냈다고. 내가 여러분을 살리고 죽일 권한은 없습니다. 말씀이 말씀되도록 우리를 사용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야곱언약을 해석하게 만들고 야곱언약이 실제로 지금 유일한 창조의 원리로 언약적 원리로 살리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 구원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집단을 이루며 이 집단이 언약의 민족으로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것이 집단화되고 구체화되는 현장 속에 본인들이 다뤄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건 개인과 개인의 이기심 다툼의 문제가 아닙니다.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그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요셉의 인생에 보면, 분명히 자기보다 못 났는데 잘 되고 잘난 자기는 교도소 가고 역전 현상이 일어나지요. 그건 왜 그러냐? 말씀이 응하기 때문에 그렇다는데 구체적으로 말해서 말씀 내용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낮아지는 것이 포함되기 때문에 말씀이 응한다는 것이 뜻대로 된다는 말이 아니고 장차올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성도에게 말씀이 응한다는 말은 그냥 뜻대로 되겠지, 내 주여 뜻대로, 그게 아니고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한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여주기 위한 거기에 우리가 다뤄지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럼 다뤄지는데 낮아져야 되는가? 낮아지는 게 아니고 죄인 된다니까. 낮아지는 만큼 인간은 지 잘난 체해요. 나는 모든 걸 포기했습니다. 이게 자랑질하는 거예요. 자랑질 안 하려면 죄인 돼야지 낮아졌다는 걸 고백하면 안 돼요.

 

-그게 어려워요.

 

성령 안에서 헌금했습니다. 그러면 안 돼요. 헌금하다보니까 내가 죄인인 걸 알았습니다. 이래 돼야지. 항상 내가 잘났나, 네가 잘났나, 이게 계속 육속에 살아있으니까 잘난 사람 없는데 내가 잘난 사람으로 다시 뽑아내려고 시도하거든요. 그런데 언약에서는 둘 다 죄인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누가 죄인인 걸 깨닫느냐는 문제지 누가 잘났느냐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야곱이 실수를 범합니다. 자기가 에서를 이겼으니까 자기가 잘났다는 겁니다. 삼촌보다 자기가 잘났고.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내가 소유하기에 합당한 존재이기에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얍복 강가에서 그걸 다 잃어버립니다. 얍복 강가에서 알게 된 것은, 야곱은 낮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대낮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은, 이런 말을 안 쓸 때는 사람은 그냥 산다고 되는데 낮에 속한 사람이 돼버리면 인간은 온전한 진리를 모르는 게 돼요. 왜? 밤에 속한 세계가 낮에 속한 세계와 대비가 되고 전쟁을 치루고 있다는 사실을 낮에 속한 사람은 상상도 못한 거지요.

 

창세기 32장 봅시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1,2절)

 

그럼 하나님의 군대, 천사들은 어디서 만나느냐 하면,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밤에 꿈을 꾸지요.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지요. 전쟁은 누가 합니까? 밤에 속한 자들이 주관이 되어 전쟁을 벌이지요. 천사들이니까. 야곱은 밤에서 벌인 일의 결과가 낮에 있는 야곱, 본인이 된다 이 말입니다. 꿈에 나타났으니까. 꿈에 나타난 천사들이 군대가 되어 전쟁하기 위해서 온 거예요. 그래서 야곱은 전쟁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쥔다. 자기는 주님의 은혜 덕분에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군대와 자기는 한 패라고 생각한 거예요. 자기 자신이 문제 있는 걸 몰랐지요. 그런데 얍복 강에서 누가 오니까 야곱이 자기 적인 줄 알고 싸웠단 말이죠. 그 정체를 밝혀보니까 마하나임에 속한 분과 싸움을 벌인 거예요.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해보자는 거예요. 야곱은 본인의 문제가 뭔지 몰랐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낮에 속한 것이 밤에 속한 일과 자동적으로 순하게 연결되지 않아요. 여기에 싸움이 있고 다툼이 있고 희생이 있어야 밤과 낮이 교통이 됩니다.

 

그래서 야곱은 천사를 붙들고 축복해달라고하지요. 그래 축복하마. 이렇게 끝난다면 야곱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언약이 없어요. 축복을 하되 이름을 바꿉니다. 그러면 이름이 바뀐 야곱과 이스라엘로 바뀌었잖아요. 야곱과 이스라엘, 그 이삭과 이 이삭처럼, 아브람과 아브라함처럼 이제는 야곱과 이스라엘 사이에 새로운 언약의 내용이 근원적인 언약의 내용이 추가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를 위해서 내가 희생해야 된다는 것, 야곱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희생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요한복음 1장에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결과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잖아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다나엘이 나오지요. 네가 무화과나무에 혼자 있는 걸 내가 아는 것으로 놀랐느냐, 더 큰 일이 있을 것이다.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리라. 야곱언약은 내가 이룬다. 어떻게? 죽음으로써 이루는 거예요. 그러니까 야곱이 천사와 싸웠던 그것이 한 때 실수가 아니고 본 핵심으로 이스라엘 속에 담아버립니다. 그러면 야곱은 그때부터 내 대신 죽어야 될 자가 내 몸에서 인생을 통해서 시작되는 거예요.

 

희생이 없는 것은 야곱이지만 희생이 있는 인생은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그 희생자로 등장한 것이 요셉이에요. 자기 대신 요셉이 희생해서 고생하고 자기는 그 혜택을 입는 겁니다. 이스라엘적인 혜택을 입게 되죠. 그러면 야곱은 뭡니까? 어긋맞게 되는 거죠. 높은 자가 낮아지고 낮은 자가 높아진다는. 처음에 태어날 때 들었던 그 이야기는 야곱 자기중심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바꿔지니까 이스라엘 중심인 것을 그동안 이스라엘이 야곱을 가린 거예요. 야곱이 하나님과 다투면서 자기가 뒤통수 맞고 난 뒤에는 야곱을 밀쳐내고 위에 이스라엘이 덮치니까 야곱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이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종으로 팔려가서 죽도록 고생하는 그 경로가 야곱언약을 야곱에게 이루기 위한 절차 가운데 포함됩니다.

 

-에서와 관계없는 거군요.

 

에서는 빠지는 거죠. 계속 내부로, 내부로.

 

-높은 자는 이스라엘이었네, 결국. 낮은 자가 야곱이고.

 

계속 파고들어요. 그래서 국가 이스라엘은 망해야 살아요. 그리고 우리가 망하지 않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제가 망한다고 했잖아요. 이걸 십자가에 죽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냥 의인으로 죽는 게 아니고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서. 다른 사람은 그냥 죽지만 우리는 죽어 마땅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해서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주가 부활할 때 함께 영생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 내용이 언약의 내용으로 품게 되면 그리스도의 증인 되는 거죠. 새로운 자아를 부여받은 겁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의 완성은 요셉을 통해서.

 

예.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이라고 불러주시고.

 

요셉언약은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고백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야곱이 받은 언약 때문이지 내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니다. 아버지가 받은 그것을 아들이 완성해요. 아브라함이 받은 것을 이삭이 완성하고 이삭이 받은 언약을 야곱이 완성하고 야곱이 받은 것을 요셉이 하고. 이스라엘이 받은 언약은 예수님이 하시고. 미래에 준비된 메시아가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완성시킵니다. 지금은 미래라고 하지 말고 위에 계신 주님이라고 해야 되지요. 왜냐하면 묵시 안에서 시간이 사라졌으니까.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으니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할 때 큰 자는 이스라엘?

 

없지요. 큰 자도 없고 작은 자도 이 땅엔 없지요. 없는 데서 생겨버려요. 밤에 속한 분이 낮에 튀어나오죠. 이 세상은 낮의 세계니까. 밤의 세계는 이 땅에 없는 세계에요. 언약 때문에 그 순간에 나타나는 겁니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영적인 세상이라는 보면

 

그렇지요. 낮 속에 이질적인 아까 보편성 속에 특이하게 발생되는. 그 특이함은 모든 낮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특이함, 그게 언약의 장소입니다. 없던 장소가 새로 생기죠. 그래서 성도는 없던 내가 새로 생긴 거예요.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3페이지 봅시다. 이스라엘 국가의 승리. 이스라엘 국가가 특이한 나라에요. 우리가 언약적 내용을 잘 알았다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은 이질적인 요소가 이스라엘 속에 포함되겠지요. 그렇다면 애굽에 고생한 사람은 이스라엘입니까, 히브리인들이에요? 히브리인들이죠. 아직 이스라엘 나라가 없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이라고 붙이려면 이스라엘 요소를 품은 자가 히브리인들 속에 섞여야 되겠지요.

 

여기 초코과자잖아요. 초콜릿이 묻어 있잖아요. 초코과자라고 붙이려면 초콜릿이 있어야 되듯이 히브리인이 이스라엘 되려면 야곱의 언약에서 완성된 이스라엘 언약이 히브리인에 삽입이 되잖아요. 그 삽입이 외부에서 와요. 내부 인물이 외부로 갔다가 외부에서 뭔가 덧입고 내부로 침투하게 됩니다. 그게 피를 머금고 와야 돼요. 피 언약. 출애굽기 4장, 여긴 피 언약이라 하지 않고 피 남편이라고 돼있습니다. 자기 남편을 피 남편이라고 하는 건 처음일 거예요. 십보라가 4장 26절에 보면 뭐라고 돼있지요?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하지요.

 

여기 22절에 보면 참 어려워요.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했지요. 아들들도 아니고 장자들도 아니고 그냥 단수에요. 대표적 단수가 되는 거예요. 하여튼 단수로 표현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인정한 아들이 그 안에 폭 집어넣을 때 그 아들 외에 다른 것은 아들이라고 간주하지 않는 조건 하에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각자, 각자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하면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라고 하면 안 돼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돼야지 머리는 하나여야 되지 나도 머리, 너도 머리 되면 안 돼요. 교회 머리는 주님으로 하나로 대표돼야 되고 우리는 주님에 예속돼야 되지 따로 내가 교회라고 하면 안 됩니다.

 

억지로 표현하면 집단적 단수라고 하는데 다양성과 일자성이라는 논쟁으로 번져서 복잡해요. 둔스 스코투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 이것 때문에 고민 많이 했어요. 어떻게 하나님이 한분인데 다양한가? 이 문제에요. 하나님 개성은 하나인데 사람들은 개성이 다 다룬가? 그럼 중간에 뭔가 종합할 경로가, 프로세스가 있어야 될 텐데 그 프로세스가 뭔지 모르겠다. 그래서 각자가 실체다, 아니야 객체다. 이런 논쟁이 중세 스콜라철학에서 나온 겁니다.

 

거기서 나온 개념이 뭐냐? 실체 개념에서 근대에 들어오면서 드디어 데카르트의 주체 개념이 등장합니다. 독자적으로 주체가 된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와서 주체는 없다가 돼요. 누가 주체냐? 주체 자체가 없다. 이런 논쟁이 강한데 이게 오늘날 국가 정치이론에서 마찬가지로 적용돼요. 민주주의 주인이 누구냐? 국가 주인이 문제가 돼서 주인이 각자냐, 아니면 모임이냐? 답변하기 곤란해요.

 

어쨌든 우리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에 모세가 삽입돼야 돼요. 모세가 그냥 삽입되면 안 돼요. 모세언약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이스라엘 언약은 유월절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고 시내 산 위에서 체결되지요. 십계명을 통해서 맺어집니다. 그러면 출애굽은 뭐냐? 시내 산에 오기까지 전초작업이 되는 거예요.

 

애굽에서 건져낸 그게 언약이 아니고 언약은 따로 세워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출애굽은 이스라엘과 애굽이란 집단과 집단의 문제지만 이스라엘 내부의 문제는 십계명으로 와요. 십계명에서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은 우상 단체가 돼요. 모세 빼놓고 우상 단체가 되는 겁니다. 모세 빼놨으니까 나머지는 모든 자가 우상 숭배자가 되지요. 마땅히 저주받아야 됩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