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20151203 혜화동특강c-언약의 흐름 본문
녹취:한윤범
20151203 혜화동특강c-언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세 번째 하겠습니다.
계속 전쟁이야기하고 있는데 전쟁할 때는 하나님이 동행하면서 언약을 거기에 삽입시킨다는 이야기를 계속 해왔습니다. 언약이 주어지면 분리가 일어난다는 거죠. 분리를 신약용어로 구약도 마찬가지지만 거룩입니다.
거룩이란 반드시 전제로 속한, 더러움이 있어야 돼요. 더러움에서 거룩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죄가 있어줘야 죄에서 의를 끄집어내죠. 죄 없는 데서 의 없어요. 더러움밖에 없어요. 모든 걸 더럽다고 해줘야 돼요. 그래야 거룩이 거기서 솟구쳐 올라오거든요. 마치 우주선이 차고 오르듯이. 더러운 세상에서 본인이 깨끗함을 추구해선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의 동행 의미도 없고 언약적 의미도 상실해요. 자기가 스스로 더럽다는 걸 깨달아서 회개하면 종교가 되고 불교가 되고 도 닦는 게 되지
하나님께서 더러운 걸 모아놓고 거기다가 예수님이 피로써 전환시킬 경우에만 거룩이 되지 그리스도의 피 없이 자생적으로 거룩이 되는 법은 없어요. 전쟁은 다른 전쟁이 아니고 네가 거룩을 할 수 있다는 게 마귀의 최후의 전략이고, 주님의 무기는 일체 인간은 거룩할 수 없고 의로울 수 없고 천국 올 수 없다. 내가 추방시킨 에덴동산에 다시 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그 싸움이에요. 믿음이냐, 행함이냐? 그 싸움이에요. 자생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속된 것으로 더러운 것으로 몰아가요.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서 더럽다 하면 되지 않습니까?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자기가 더럽다, 죄인이라고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더럽다고 안 것 자체는 의롭지 않을까 하는 논리적 모순성을 인간이 갖고 있거든요. 이것은 나쁘다고 한 그것만큼은 나쁘지 않고 진실 될 수 있다는 여지를 항상 쥐고 있는 게 인간입니다. 칸트의 이성론에 나오지요.
회개하는 그 순간만큼은 옳지 아니하냐. 제가 이 돈은 제 돈이 아니고 주의 돈이라고 성령이 임해서 헌금한 것은 참된 헌금이라는 생각을 갖고 싶어 해요. 사실은 마귀의 장난입니다. 기어코 의미를 자기에게 두려고 해요. 꼭 가룟 유다 같아. 내가 스승을 팔아먹다니, 이런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고 자살을 선택하고 자살을 결정한 의지만큼은 자기 죄를 약간이나마 감량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본 거예요. 때리기 전에 자기가 알아서 때리니까. 그만큼은 착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유다는 자기가 스스로 그렇게 했고, 성령에 의해서 만약에 헌금을 한다면 그것은 ……
성령에 의해서 헌금하면 성령의 일은 헌금은 과정에 불과하고 십자가 앞에 죄인인 것을 들어나는 경우가 주께서 하신 헌금이 되는 겁니다. 헌금 행위를 통해서 내가 죄인인 걸 아는 거죠.
-성령에 의해서 헌금한다는 자체가 없는 거네요.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하고,
없지요. 성령은 그냥 십자가만 이야기할 뿐.
-그래서 헌금하면서도 죄인임을 고백
예. 다른 사람은 헌금 안 하는 행위로 죄를 알지만 나는 헌금하는 행위를 하면서 죄를 알 뿐이기 때문에 그 행위 자체는 의미 없어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게 되면 의미를 둔다고. 남은 안 했지만 전 했잖아요. 반드시 이걸 기억이 되고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자기 존재의 가치가 돼요. 이건 갑자기 상징에서 실재가 돼버립니다.
분리시켜버립니다. 분리시킨다는 말은 분리될 수 없는 한계에서 끄집어내서 새로운 분리가 등장하죠. 모든 인간은 물에 빠져야 된다. 노아죠. 그런데 방주로 말미암아 방주 안에 있는 특수한 인간과 방주 바깥에 있는 새로운 세상을 분리시키죠. 방주가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모든 세상은 물에 빠져야 되잖아요. 분리고 뭐고 없지요. 그런데 방주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거룩의 의미가 새롭게 방주 안이라는 제한된 범주 내에서 새로운 거룩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8장 20절,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이게 방주에서 나왔을 때죠. 방주는 끝났습니다. 깨지든 말든 방주 만들 때 고생을 했지만 섞어 문드러지든지. 방주의 의미가 제단의 의미로 함축해서 후대로 전수되는 겁니다. 이게 무지개 언약이에요. 방주 안에 무지개 언약이 들어있는 겁니다.
무지개 언약의 취지가 뭐냐 하면, 8장 21절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에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태어날 때부터 악함이라. 악하면 보통 저주받아야 되잖아요.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악하기 때문에. 악함이 원인이 돼서 저주받지 않는 결과는 나올 수 없지요. 중간에 매개체로 뭔가 들어가야 되겠지요. 이게 언약입니다. 악함에도 불구하고 정결한 짐승이 대신 죽음으로써 제단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노아 방주가 영원한 방주로써 계속 이 땅에서 제단 쌓을 때마다 반복이 되고 되풀이되겠지요.
그러면 제단 쌓을 때마다 인간은 악하다, 고 반복되지요. 언약을 품은 것만 거룩이 되지요. 언약을 품은 자가 등장하면 그게 바로 거룩한 자가 되는 겁니다. 거룩한 자가 실제 삶에서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 그게 바로 창세기 9장에 나옵니다. 20절에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벌거벗은 것에 대해서 “가나인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으며” 덮었는데 함과 가나안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잖아요.
덮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냐 하면, 덮기 전의 모습과 덮은 모습이 차이가 나야 된다는 거죠. 노아가 아버지고, 함과 셈과 야벳은 아들이죠. 아버지가 갖고 있던 언약이 아들에게 어떻게 전수되는가? 아버지가 알고 있던 언약이 아들에게 전수될 때는 반드시 두 가지 양상으로 전수돼요. 하나는 축복으로 전수되고 하나는 저주로 전수돼요. 우리 가정은 복 받는다, 이런 것 없어요. 우리 가정이 중심이 아니고 언약이 중심이니까. 언약이 언약대로 실체 본질을 드러내야 되거든요. 본질을 드러낼 때 반드시 양발차기, 축복만 아니고 축복과 저주 두 가지 다 나와야 돼요.
아까 고린도후서 2장에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어떤 사람은 악취로 느껴지고 어떤 사람은 향기로 느껴진다. 이게 양발차기잖아요. 한쪽을 찼는데 두 가지 상반된 대비되는 결과물이 나온다. 그래서 천국 가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반드시 그 현장에 지옥 가는 사람이 새롭게 확인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천국 가는 사람이 확인된다는 말은 지옥 가는 사람도 동반해서 같이 이어지면서 짝을 이루면서 그 현장에 지옥 가는 사람도 등장하게 마련이지요.
그러면 천국의 원리가 뭐냐? 바로 아까 이야기한 정결한 것을 잡아서 어릴 때부터 악한 모든 것을 덮어주는 거죠. 그러면 언약이 주어졌다, 축복이 주어졌다는 말은 우리 자신의 행함으로 구원이 된다, 안 된다? 구원되지 않는 거예요. 주목은 거룩한 것의 대신 희생, 8장 20절을 다시 보면,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
그럼 방주 안에 정결한 짐승만 모여 있는 것이 상식인데 사실은 더러운 짐승도 같이 타지요. 정결한 짐승은 일곱 쌍이고 더러운 짐승은 두 쌍이고. 우리 같으면 될 수 있는 대로 더러운 것을 제거해서 정결한 비율을 늘리는 것이 상식인데 오히려 반대로 더러운 것이 죽는 게 아니고 죄 값으로 정결한 걸 잡지요. 정결한 것이 우리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담보로 대신 희생한 것, 정결한 것을 거룩을 희생으로 해서 우리 더러운 죄가 용서받는 그 구조가 언약적 구조입니다.
그것을 자식들에게 할 때 이해하게 되면 축복 노선이고 그걸 모르게 되면 저주 노선이 되는 겁니다. 이제 방주 만들어서 구원받는 시대는 끝났어요. 어떤 희생, 정결한 분의 희생을 발견하느냐, 못 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죽지 않아야 될 분이 내 대신 돌아가신 걸 발견한다면 언약을 아는 복 받은 사람이고 그걸 모르고 내가 행동 바르게 해서 구원받겠다고 나선다면 그것은 저주 노선에 속했다는 것을 노아의 후손을 통해서 확정되지요.
아버지의 하체, 하체는 수치를 의미하고, 왜냐하면 수치는 뭔가 정상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담이 죄 짓고 난 뒤에 제일 먼저 가리지요. 뭔가 본래의 내가 아니고 잘못됐다, 틀어졌다, 고장 났다, 이건 하나님에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이게 수치입니다. 그걸 커버해주는 겁니다. 인간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커버할 때 주께서는 가죽으로 커버했잖아요. 결국 인간은 어떤 식으로 커버될 것이냐에 따라서 지옥 가느냐, 천국 가느냐에 따르는 거예요. 뭐로 덮느냐에 있는 거죠.
덮을만한 것을 자기 채택해서 덮느냐, 아니면 예상 못한 내가 덮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친히 주께서 덮어주는 거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거절하고 주께서 하신 것만 고스란히 덮어주느냐에 따라서 천국 가고, 지옥 가고 하는 거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행해서 구원되는 건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참 이게 옳은 이야기인데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전혀 먹히질 않습니다. 맨날 설교 끝나면 묻는 게 어떻게 하면 돼요? 그래서 저로서는 막 살라는 것밖에 대안이 없는 거예요. 이렇게 하시라 하면 흉내 낸다니까. 더욱 더 사람을 지옥 백성 만드는 거죠.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배나 지옥 백성 만드는 거예요.
특히 9장 23절에서 셈과 야벳을 옷을 취해서 뒷걸음쳤지요. 뒷걸음친다는 것은 덮어야 된다는 것, 덮는 그것이 우리를 살린다고 생각한 거예요.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인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가나안과 함이 저주받는 이유는 야벳과 셈처럼 안 했다는 겁니다. 보세요. 얼마나 함과 가나안 입장에서 억울합니까. 사전에 내가 술 먹고 하면 덮으라고 했다면, 흉내 내서라도 행할 건데 그게 아니고 그냥 어떻게 할 걸 모른 거예요. 셈과 야벳이 하고 난 뒤에 아버지가 그것이 옳다고 하니까 이쪽이 그 행동을 안 한 본인들이 나쁜 자가 된 거예요.
그래서 내가 옳고 그르다는 것은 추후 문제인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지 않으면 모든 게 죄가 되는 거예요. 내가 판단해서 죄다, 아니다 하는 것은 소용없는 기준이에요. 주님처럼 십자가에 죽지 않으면 모든 인간은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없어요. 왜? 그 모델을 내가 세우기 때문에. 내가 세워봤자 가짜가 가짜를 만드는데 무슨 소용 있어요. 주님이 내 인생에 개입해주셔야 되지 이렇게 인생 살았으니까 착하지요, 라고 내세우면 그건 함과 가나안 꼴 되는 겁니다. 자기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주께서 주신 십자가만이 우리를 덮을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되지 못하지요.
이렇게 지금까지 한 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계시다. 보이지 않는 전쟁은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마귀도 안 보이고 주님도 안 보이고 실제에서 일어나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들인데 그 현상이 굉장히 특이해요. 특이하다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 따로 있다. 특수한 것이 아니고 특이한 겁니다.
일반적인 것은 특수한 것과 관련돼있고 보편적인 것은 특이성과 관련돼있는데 상당히 말장난 같기도 한데 다만 이해를 위해서 해봅시다. 일반적인 것은 모든 것 가운데서 특수, 특수는 모든 것에 포함돼요. 수평적으로 모든 것 중에 특수한 것, 이중에 하나 끄집어낼 수 있지만 보편적인 것이 있다면 특이한 것은 없는 데 튀어나온 거예요.
제가 어느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베토벤이 위대한 음악가입니까, 모차르트가 위대한 음악가입니까? 물으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최고의 음악가는 베토벤이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유일한 음악가에요. 평가대상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베토벤은 특수한 뛰어난 거고 모차르트는 기이한 거고. 성도는 기이하지 뛰어난 영웅이 아닙니다.
창세기 10장 9절에 봅시다.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여기는 ‘특이한’으로 돼있지만, 번역은 별 의미 없으니까)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특별한 영웅이죠. 니므롯이 함의 아들이죠. 함의 특징은 영웅이에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영웅은 최고의 인간이 되는 겁니다. 상상에 의해서 신의 세계가 있고 인간의 세계가 있거든요. 인간이 신의 세계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영웅이 되는 겁니다.
신에 접근한 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신의 영역은 죽음 이후의 영역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신이 되려면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게 되면 그 사람은 영웅이 되는 겁니다. 영웅은 인간과 신의 경계선, 다른 말로 한계선에 위치해서 모든 인간의 모델이 되는 게 영웅이죠. 그 영웅은 사실은 인간에 속하면서도 신에 속한.
그래서 사실은 성경에 말하는 우상이란 인간의 신격화를 의미합니다. 제가 설교시간에는 물질의 정신화라 했고. 교회에서 원하는 당회장 목사는 인간 교인들이 영웅을 원해요. 자기 기도는 기도발이 안 서는데 목사가 기도하니까 헌금이 늘어나고 교회 예배당 짓고 영적인 카리스마 있는데 영웅을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웅입니까, 패배자에요? 패배자지요. 인간은 특수한 존재를 원하지만 주님은 특이한 분이죠. 영웅은 뛰어난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다른 분이죠.
예수님이 처음에 기적을 베풀고 귀신을 쫓아냈을 때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영웅으로 본 겁니다. 그래서 오병이어 뒤에 사람들이 예수님 붙들고 임금 삼으려고 했지요. 우리가 기다렸던 거다. 그래서 예수님 따라오니까 예수님은 따라오는 그들을 떡을 먹고 배부른 족속이라고 규정했어요. 자기를 위해서 떡 주면 좋아하는 그런 족속들. 나는 그런 족속과 매치되는 영웅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뭐냐?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게 나와야 돼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느니라. 그러니까 그 사람들 다 어디 갔어요? 다 떠나갔지요. 제자들은 왜 안 갔지요? 제자들은 오해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알아봤으니까 안 떠나지요, 이렇게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그게 아니야.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않으면 올 수 없다. 이렇게 하면 온다가 아니라 올 수 없는 자가 너다. 네가 생각할 때 나는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자란 걸 인식하란 거예요.
인식해야 주님과 함께 있음에 자신이 기여한 바가 아무것도 없어야 돼요. 내가 예수 믿게 된 것이, 내가 예수 믿는 결심이 빠져야 돼요. 들어가면 안 돼요.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은 내가 이렇게 해서 알았다는 것을 늘 삭제당해야 인생을 살아야 돼요. 삭제당해야 그 현장에 주께서 동행하심과 개입하심이 부각되면서 우리는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창세기 10장에서 드디어 이 세상이 노아의 세상, 언약의 세계다. 노아언약의 세계 특징이 마태복음 6장에 나옵니다. 31절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거기까지 하고 그 다음에 5장 45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5장 45절에 보면, 악인과 선인과 함께 하나님께서 햇빛과 공기를 주시죠. 그런데 6장 31절에 보면,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있지요. 지금 이방인에게서 아버지께서 햇빛과 공기를 주신다는 사실이 빠졌지요. 내가 열심히 싸대야 밥이나 먹고 산다는 인식을 갖고 있단 말이죠. 이걸 이방인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이방인이란 말은 저주받을 자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자.
약속이 없는 자들이 분명히 드러나는 그 현장에 약속이 있는 자들이 같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아무리 하나님이 은혜를 줘도 사람은 두 종류로 필히 등장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야 전쟁이 성립되니까. 여기 누가 봐도 커피 있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들어왔다면 여기서 의견이 생깁니다. 내가 돈 주고 샀다는 패가 있고 목사님이 돈 주고 샀다는 패가 있단 말이죠. 커피는 그냥 있어요. 그런데 의견은 두 종류란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몸은 그냥 있잖아요. 주께서 나를 만들었다는 쪽이 있는 반면에 내 인생은 내가 살아왔다는 의견이 있단 말이죠. 그게 언약의 효과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은 다른 분의 개입으로 구원받는다는 쪽과 내가 뭘 해서 구원받는 쪽과 항상 두 종류로 나눠지잖아요. 언약은 항상 그래야 돼요. 왜냐하면 언약은 양발차기니까.
그 다음 12장 봅시다. 계속 전쟁 중입니다. 전쟁이란 서로 섞일 수 없는 대립된 두 개의 성질이 만나요. 그 성질의 내용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언약이 추가할 때마다 계속해서 차이가 나요. 12장 2절을 읽어보세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당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여기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는 벌을 내리죠. 그런데 아브라함에 끝나는 게 아니고 후손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 후손에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게 돼있지요. 그럼 단위가 개인에서 민족 단위로 단위가 커졌잖아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언약은 노아는 방주 만들기로서 언약을 나타냈지만 이것은 방주가 아니고 민족 덩어리로 단체로 복의 민족이 등장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어떤 차이가 나느냐? 노아언약에서는 셈과 야벳의 족속은 모조리 축복 받는 걸로 돼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셈과 야벳이 축복 받는 것은 큰 범주고 사실은 셈과 야벳이 다 복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중에 새롭게 구성되는 아브라함의 후손만이 복을 받는다고 보다 세밀해지고 구체화되겠지요.
그러한 경우가 요한복음 3장 16절 다 아시지만 읽어보세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누굴 사랑한다 했어요? 세상. 그 다음에 사랑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했지요. 큰 범위 내에서 그런 거예요. 17장 9절,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여기 보면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그러면 큰 범위에서 점점 더 작은 범위로 내려야가야 되잖아요. 그럴 때 진짜 사랑하는 자는 바로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려고 보내준 자만 위해서 주께서 기도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중보기도 외에는 다른 기도는 중보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기도하면 반드시 자기를 포함시키거든요. 그건 반칙이에요. 누구 마음대로 포함시키며 나니까 나한테 어드밴티지를 줘서 나를 구원에 집어넣는 것은 인간의 죄악 된 타고난 본성입니다. 나를 포함해서 구원? 이건 언약이 아닙니다. 인간의 기도란 사실은 자체가 죄가 되는 거지요.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럼 진짜 기도를 어떻게 합니까? 가짜 기도를 하셔야 돼요. 가짜 기도 속에 진짜가 나와요. 성도 같으면. 기도 안 할래, 이러면 안 되고 기도를 하게 하시는 가운데서 그 자체에서 바꿔치기가 일어납니다. 이게 가짜고, 이게 진짜라고 바꿔치기하죠. 주여, 기도하지 않더라도 다 주셨는데 기도함으로서 더 얻고자 한 것이 죄군요, 라고 자기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의 목적이 챙기기 위해서 준 게 아니고 주의 증인 되라고 나를 사용하시는 주님의 기도를 다시 보게 하는 기회로써 기도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설명하면 이상하게 문장이 길어져요. 그래서 골치 아픈 사람은 그냥 하세요. 막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여튼 뭔가 나오는데 그 가운데서 주님께서 친히 개입하시면 성령이 하는 기도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걸 연출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어디까지 왔습니까? 민족단위로 왔지요. 민족단위는 구원문제가 아니고 아까 이야기한 전쟁에 관한 문제, 전쟁단위로. 언약이니까. 단체로 언약적 민족이 되면서 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여기 12장부터 관건이 민족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하는 문제거든요.
우리의 상식은 그거야 자식 낳으면 되지. 일반상식은 뭐냐? 민족은 혈족이고 혈연관계기 때문에 자식을 낳으면 되겠지요. 자식은 남자 혼자는 못 낳고 여자가 있어야 되겠지요. 여자와 남자와 결합해서 성관계해서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자식이 또 새끼를 까게 되면 그 자체가 민족덩어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방법으로 민족을 만든다고 누구나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아브람 민족이고, 지금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아브라함 민족이에요. 그런데 현재 있는 것은 아브람밖에 없어요. 아브라함은 없어요. 아브라함은 아브람 뒤에 숨어있어요. 이게 언약의 능력으로 계속 나타날 때 아브람이 찢어질 때 나타나거든요. 이근호란 인간은 육에 속한 겁니다. 그러나 이근호가 찢어지면서 그리스도에 속한 새로운 그리스도의 몸이 튀어나오잖아요. 목사님도 마찬가지고. 다시 말해서 내 뜻대로 안 될 때.
자기 뜻대로 안 될 때 튀어나온다고 하니까 어떤 분은 생각하기를 내 뜻대로 안 하면 되지, 하는데 그것도 뜻인데. 사람이 자기 뜻이라는 것이 시작할 때 뜻이 아니고 일 끝나고 난 뒤에 그걸 뜻이라고 규정하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뜻이 없다는 말은 없어요. 본인이 있는 이상은 뜻은 항상 정리되게 돼있습니다. 뭔가 함축해서 갖고 있게 돼있습니다. 그 뜻을 없앨 수 없어요. 내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뜻은 있어요.
아브람밖에 없어요. 아브라함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브람 말고 따로 만드는 게 아니고 아브람으로 아브라함을 만들겠지요. 그럼 언약의 원칙에 의해서 누가 대신 죽어줘야 되겠지요. 그게 바로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후손이, 이삭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조상되게 만드는 겁니다.
자식이 자기 대신 죽는 겁니다. 제사를 드렸다는 자기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내 행위로 말미암아 누가 죽는가가 중요하죠. 아브라함 때문에 이삭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복의 근원은 이삭한테 전달되면서 더 구체화되면서 세밀화 되지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라 한 것이 이삭이 복의 근원이라고 전달됩니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데요.
22장 17절에 보면,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을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복을 얻는데 네 씨로. 그 씨가 이스마엘 아닙니다. 이삭이죠. 아브라함에서 나온 자식이 다 복의 씨가 아니고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전이되고 변이되는 현장에 개입되면서 등장한 후손이 복의 자손의 되겠지요. 이삭이 아브라함의 복의 자손인 동시에 이삭 자체가 아브라함뿐만 아니고 후손에 복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자기 주도권을 잃어버리잖아요. 이삭이 주도권을 쥐고. 이삭도 마찬가지로 야곱한테 넘어갑니다. 그럼 모든 주도권은 장차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쥐고 있지요. 그 사실을 알고 아브라함은 기다렸다가 보고 기뻐한 거죠. 예수님이 모든 역사의 주인 되는 기호, 만유의 주가 되시는 겁니다.
그러니 과학이나 철학, 진리라고 우기는 이것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주되심을 가리는 악마 짓하고 있는지 잘 압니다. 우리가 어떤 사업을 한다든지 다 할 수 있어요. 종사할 수 있고 또는 목사라든지 목회하더라도 그게 바로 죄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걸 시킨 거예요. 그 짓을 하면서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늘 느끼는 자체가 그동안 숨길 수 없는 나의 죄성을 폭로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하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늘 느끼게 되죠.
모든 일이 주께서 알아서 예수 십자가에 수렴하라고 한 의도로서 나한테 유발되었다는 고백이 돼야 돼요. 심지어 교회 오는 것도 내 마음대로 오는 게 아니고 나가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 나가요. 나가라고 한다고 나가는 게 아닙니다. 오라 한다고 오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이끄시지 않으면 아무도 올 수 없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에요. 그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선교와 전도에 무슨 보탬이 되겠어요. 그 멘트가, 문장이.
아브라함 민족과 다른 민족과의 전쟁이지만 사실은 아브라함 내부에서 가정부터 전쟁이 시작된 거죠. 전쟁이 없는 구석은 없어요. 다 전쟁이 벌어지게 마련이에요. 이건 나의 전쟁입니다. 아브라함의 전쟁 또는 이스마엘과 이삭의 전쟁. 이스마엘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창세기를 보면 이스마엘이 지은 죄가 없어요. 아무 잘못이 없어요. 태어난 게 무슨 죄가 됩니까? 그런데 태어난 게 죄가 돼요.
에서가 태어나기 전부터 미움 받기로 작정하고 태어난 거예요. “아이고, 이 밉상아, 화상아.” 주님의 미움의 대상으로 태어나게 한 겁니다. 그래서 어느 인간도 우연은 없어요. 다 주님의 뜻이 있어서 태어났는데 미움의 대상인지, 사랑의 대상인지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기 전부터 결정된 상태에요. 거기에 대해서 섭섭해 할 필요 없어요. 섭섭해 한다는 것은 뭔 뜻입니까?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는 관행과 습관이 그대로 정신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섭섭해 하잖아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할 건데. 아직도 그러고 있어요.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잘 하셨다고 해야지요. 너, 지옥 가기 위해서 태어났다. 잘 하셨어요. 이렇게 돼야지요. 그런 여유가 있어야 되지요.
-그럴 수 있는 인간은 한 명도 없겠지요.
성령 받으면 돼요.
-그러면 이미 그 사람은 지옥 가기 위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언정 주께서 원하시면 사용해달라고. 성경 참 무서운 책입니다.
아브라함의 전체 이야기는 이렇게 언약 형성과정에서 전쟁이란 중요한 경로를 밟아서 언약이 구체화된다는 사실입니다. 언약이 던져주지만 그 던져줌을 통해서 기존의 죄는 죄대로 드러나게 하고 저주받는 쪽 나타나게 하고 양발차기 하고 언약 대상자가 하나님의 원수로 작동하게 하죠.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원수 된 자를 의롭다 하시고. 그러니 원수 아닌 자가 없는 거예요. 마귀에 속한 자가 없어요. 마귀에 속한 자를 끄집어냈다. 죄가 있는 곳에 의가 있는 거예요. 죄인 된다는 것을 그렇게 섭섭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고맙게 여겨야지요.
창세기 14장 봅시다. 14장 14절에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 십 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이렇게 돼있지요.
지금 아브라함이 전쟁하고 있지요. 하나님이 전쟁을 시킵니다. 무슨 전쟁이냐 하면 땅 싸움이죠. 재산 싸움이었잖아요. 전쟁이 잃어버린 개인 소유물 되찾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전쟁하고 돌아왔는데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나요. 그 멜기세덱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아,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승리케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거기에 동의해요. 자기가 사병을 훈련해서 했는데 그게 아니고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승리케 했음에 동의하면서 모든 전리품은 자기 수완, 자기 노력이 아니고 전체가 주님의 것이라고 하면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드리는 방식이 멜기세덱에서 주면서 드려요.
그러면 아브라함 보기에 멜기세덱은 하나님이 계심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등장한 인물, 그리고 자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로 공짜로 얻어 챙긴 입장,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또 언약이 그만큼 발달된 형태를 띠는 거지요. 발달된 형태를 띠면서 제3의 인물이 개입되지요. 전에는 하나님 있고, 이 세상 있으면 중보자가 누굽니까?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었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자기 자리를 보다 더 세밀하게 보여주면서 자기 있던 자리 뒤편에 감추었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지요. 그 사람 이름이 멜기세덱입니다.
그러면 자기 자리를 멜기세덱에게 양보하지요. 그리고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원했다. 멜기세덱 반열이 당신 맞지요, 라고 기뻐하는 거예요. 나 아니고 주님입니다. 나 아니고 멜기세덱입니다. 내가 이렇게 승리한 것은 내 덕분이 아니고 멜기세덱 덕분이다. 내가 열심히 훈련시켜서 된 게 아니고 멜기세덱 기도 덕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멜기세덱의 기능은 뭡니까? 주님의 뜻을 받들어서 복 받을 자에게 복을 주는 기능이죠. 그 기능대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히브리서 7장에. 그럼 예수님이 홀로 다 해놓고 우리는 그냥 아브라함처럼 복은 받아 구원받는 입장. 그렇다면 성도의 고백은 나 아니고 중간에 개입된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게 전쟁의 승리 요인이 점점 더 구체화되는 겁니다.
멜기세덱의 특징이 히브리서 7장에 나와요. 7장 2절, 3절 읽어보세요.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여기에 보게 되면 분명히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죠. 살렘이란 지역이 실제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제사장으로 있단 말은 나머지 모든 인간은 멜기세덱에 비해서 한시적이고 임시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중보자는 항상 있어야 중보자지 일시적인 인간은 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이 중보기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중보기도 하는 분이 없으면 인간이 해도 모르겠는데 지금 중보기도 하는 분이 있잖아요. 항상 제사장인 분이 기도하고 있는데 왜 인간 중보기도에 나서야 됩니까? 그건 자기 뜻을 억지로 관철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잘못된 거죠. 그건 마귀의 장난이죠.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가리면 자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거니까 거기에만 열중하고 있죠.
동행한다는 것은 그냥 동행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못났습니다, 한시적 존재입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동행해야지 나는 하나님과 한 편이라서 나도 대단하다는 이런 동행은 없어요. 동행하시는 동행자를 주께서 원수로 취급해서 공격하는 그 결과로 우리는 주의 군사가 되기 때문에. 전쟁은 바깥에서 하는 게 아니고 안에서 일어나는 효과로 바깥 전쟁이 이어집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언약을 세웁니다. 그 언약의 표징이 뭐냐 하면, 17장 11절 읽어보세요.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언약의 표징인 양피를 베어라. 양피를 베면 거기서 피 나오지요. 출애굽기 4장에서는 피 언약이라 하지요. 그러니까 언약이란 피를 내는 거죠. 피는 죽음을 의미하거든요. 다시 말해서 어떤 분의 죽음으로 맺어진 언약, 이것이 피 언약, 할례 언약입니다.
어떤 분이 죽느냐 하면 바로 육신의 혈연관계는 죽어줘야 돼요. 그럼 뭐는 살리고? 살린다는 개념보다 죽음의 반복이 곧 사는 양상이죠. 이 땅에서. 이것 죽고 뭔가 나타난다는 개념보다도 어떤 분이 먼저 있었기에 항상 한시적인 것은 매일같이 죽어줘야 되는 거예요. 육신은 날마다 죽어 없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육신을 갖고 있으면서 계속 반복해서 그런 현상이 있어줘야 됩니다.
그럼 아브라함언약의 반복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 행함은 의미 없다는 것을 날마다 반복하는 그 자체가 아브라함 행위의 의미가 돼요. 행위를 안 하는 것이 아니고 하면서 이걸로 구원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날마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 결과를 믿음이라고 해요. 행위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가 믿음에 해당되는 행위가 되는 거죠. 계속해서 행위 하면서 행위를 의미 없게 만드는 그 무엇을 증언하는 그런 모습의 행위이기 때문에 믿음의 행위가 되는 겁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누가 내 인생에 개입했다. 나는 믿는다. 내 인생에 개입한 분을 믿는다. 그렇다면 내 아들 바치고 다시 살아나는 것은 내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내 인생이 내 아이디어를 구성하는 인생이 아니고 누군가 쳐들어온 인생이다. 누가 날 사용하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정리해봅시다. 노아는 방주 만들었지요. 아브라함은 첫 번째로 민족단위로 왔지요. 민족단위로 전쟁이 되겠습니까? 내부의 전쟁이 일어났지요. 그 내부 전쟁이 혈육이냐, 약속이냐의 전쟁, 그게 이삭으로 넘어갑니다. 언약은 내부적으로 계속해서 뭔가 변화가 일어나면서 바깥에 효과를 주는 거죠.
축복이란 내 민족이 복 받는 것이 아니고 그 민족 내부에 언약적인 작용 때문에 축복된 사람이 거기서 생산됩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축복된 자가 누구냐고 보여주는 기능이 일어날 때 그 기능자가 축복과 관련된 복 받은 사람이 되는 거죠. 내가 구원받았느냐고 물을 게 아니고 주께서 무슨 일을 일으키셨고 어떤 기능을 일으키십니까? 그걸 보여줄 때 주의 증인이고 언약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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