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요한계시록의 숫자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의 숫자

정인순 2012. 7. 16. 18:34

 

 

요한계시록의 숫자

 

이근호

 

1(완성)7(완성) 사이에서

 

. 주체와 자아

 

인간에게 주어진 최대의 형벌은 늘 선택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선택을 통해서 자아됨을 유지하는데 전혀 책임질 수 없는 입장임을 알게 된다. 인간은 주체(subjet)을 지키기 싶어 하지만 얼마 안가서 그것이 상실을 바라봐야 하는 갈라진 주체상이다. 인간이 자아(moi)와 주체(subjet) 사이에서 일치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타인에 의해서 강요당하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기표(記標)의 세계다. 나의 존재가 있기 이전부터 주어진 거짓 존재들의 집합에 압력과 유혹을 받고 있다. 주체는 기표로 태어나고 기표로 분열된다. 따라서 나(moi) 주체(subjet)은 타자(the Other)의 효과요 결과이다. 주체의 자리를 기표로서 보장받음과 동시에 나는 나(moi)로서는 사는 것은 상실된다.

 

단일기표(s1)은 대항기표(s2)와 결합하여 온간 의미화 현상을 연출하고 주체를 주체로서 드러내게 만든다. 단일기표가 대항 기표들과의 은유적 대치현상(s₁→s)을 통해 의미화, 주체화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한 자리에 응결과 석화(石化)되어 무의미 상태로 남아있게 되는데 이 석화에서 벗어나 활성화 되려고 하면서 비로소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생각이 이 세상의 진실에 부합되지 못하고 늘 미끌어지고 있음을 파악한다. 자신이 생각해내는 것은 모두 소외된 자기 존재에서 출발하기에 환상에 머물 수뿐이고 그 환상은 실제 변화에 의해 억압당하고 무시당하게 된다. 그러면서 인간은 계속해서 미지의 의미를 쫓아 몸부림친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진리는 어디 있을까?”라고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여기 문이 있다. 똑같은 문에 글자는 달리 쓴다. ‘신사라고 쓰고 다른 문에는 숙녀라고 쓰면, 이 신사라는 문은 신사라는 화장실이 되고, 이것은 숙녀 화장실이 된다. 이걸 기표 밑에 기의(의미)가 미끄러진다.'는 식이 된다. S에 새끼를 쳐서 작은 s들이 줄줄이 따라붙는, 이건 무슨 의미일까? 한 가지의 표시는 오직 한 가지의 사물에게만 해당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 꽃이 장미라면 백합은 장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역사적 사고방식의 해석이다. 이 작은 s'기의'라고 하고 큰 글자(S)를 기표라 하는데, 작은 새끼(s)들끼리 모아 놓아놓게 된다.

 

 

작은 s가 큰 의미인 S라는 기표 아래 있고 (억압되어 있고) F는 함수이고 I는 의미다. 늘 타인의 기표가 담고 있는 의미에 눌려 사는 식으로 인간은 자기 주체성을 정립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함수가 되는 이유는 시간에 흐름 따라 같은 원칙 속에서 되풀어 된다는 말이다. 눌려지내면서 계속 다른 것으로 치환 되고, 치환 되고 넘어가고 넘어가는 것이다. 소위 은유작용이다. 인간은 말실수나 또는 자기가 강조하는 것에 따라서 방향성, 자기의 관심사를 품고 있다. “내가 지금 예수를 믿습니다.”는 말이 연속적으로 언급을 해서 남은 몰라도 본인은 말 할 때마다 그 의미가 달라진다. 먼저 번 언급한 상황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계속해서 자신을 주체됨을 제공한 외부 세계를 의식하게 마련이다. 이것이 본의 아니기 지속적으로 미지의 공포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주체자가 등장해야 하는데 그 분의 바로 완성된 주체곧 성령이시다.

 

그러니 사람 속을 성령이 아신다.

. 요한계시록의 대표적 숫자는?

 

1. 7

요한계시록 71로서 예수님의 모든 활동을 설명한다. 세상은 7로서 펼쳐지면서 1를 지향한다. 71의 성질을 품고서 지상에 활동하게 되면 10의 배수 표시로서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1,000), 12×12×1000) 71을 지향하고 17로서 지상에 자리를 편다. 1는 이 세상을 두(2) 종류의 대치되는 속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 사실을 기어이 드러나게 만든다.

 

7은 창조와 관련 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시므로서 어떤 인간도 창조의 원리 밖으로 못 나가게 돼 있다. 일종의 가마솥 안이다. 그 안에서 1의 원리가 7의 모양을 보여주면서 버글버글 끓고 있다. 그 안에서 인간도 같이 끊고 익마도 같이 끓고 예수님도 같이 끓는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 걱정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 이 모두가 창조의 원리 속에 포함돼 있다. 그게 뭐냐 하면, 1,2,3,4,5,6,7이다. 8도 아니고 9도 아니다. 로 끝나버린다. 1234567안에 다 들어있다.

 

마치 여리고성을 도는 일이다.(6) 일곱 바퀴 돌았다. 여덟 번째는 없다. 첫 날에 한 바퀴 돌고, 두 번째도 한 바퀴 돌고 마지막 날에 일곱 번 돌았다. 일곱 번 돌았다는 것은 여덟 번째 바퀴, 아홉 번째 열 번째 바퀴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여리고 성 무너지는 것도 창조의 원리에 맞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너짐은 필히 무너져주어야 창조 원리가 여전함을 알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곧 7에 참여된 그들만이 7을 앞장세우고 창조 완성의 세계에 진입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123456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가 앞에 있는 123456를 총괄해서 이것을 흡수시켜 버리면, 6은 비로소 그 본래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즉 세상 모든 사건들은 7이 보여주는 유일한 사건에 종속된다는 말이다. 시간이 먼저 어떤 완성을 내다보고 6이라는 시간이 밑에 먼저 깔렸다는 것이다. 7일째가 없으면 123456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천사는 인을 뗀 예수님의 지시에 의해 첫째 인, 둘째 인, 셋째 인을 떼 나가는데, 예수님께서 인을 뗄 때는 이미 7번째 인을 뗀 그 관점에서 떼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첫째 인을 뗄 때에는 아직 둘째 인, 셋째 인에 대해서는 아직 떼지 않았기에 첫째 인의 의미도 모르지만 막상 둘째 인을 떼버리면, 더 이상 첫째 인은 둘째 인 의미 속에 합류하여 셋째 인으로 나가가게 되는데 이런 식으로 7인은 중첩적으로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7를 지향하는 방향성은 완성 관점에서 볼 때에는 지상의 멸망을 취소시키는 방도는 없다는. 것이다. 마치 물을 엎어버리면 되 담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여기에 저항세력이 고개를 처드는데 그것은 인과 인간의 경계선상에서 등장한다. 우리 손으로 죽여버린 예수가 여전히 설치는 것을 우리 악마 나라에서는 묵과할 수 없다는 식으로 노골화되도록 예수님께서 유도하시는 것이다.

 

6에서 스톱을 악마 세계에서는 실시하게 된다. 1,2,3,4,5,6에서 멈추게 하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싫어하고 멀리하는 경우는, 자신의 것으로 자신감을 가질 때이다. 즉 창조 세계를 계속 유지해가겠다는 것이다. 구태여 7로 나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창조는 그 목적 없이는 창조로서 충분하다는 것이다. 도저히 창조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에 아예 안 벗어나는 식으로 버티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1,2,3,4,5,6,7을 통해서 벌인 것은 전쟁이다.(12)

 

2. 1의 의미

 

요한 계시록 712에 보면,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이라고 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유난히도 아멘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1에 쏠리게 됨을 미리 맛보고 동의하면서 찬송하는 것이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1:8)

 

처음부터 이 1는 깨어짐을 통해서 1로 복귀한다. 언약이 자진해서 이 세상에서 깨어지겠다는 것이다.(32:19) 1이 깨어지면서 7이라는 부채살로 펴진 세상은 깨어진 1’의 속성에 의해서 다루어지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 축복이 개입되는데 그것이 바로 1에서 비롯된 12이다. (112) 야곱이 12자식을 낳은 것도 하늘(1)과 땅(7)을 잇기 위함이다. 곧 저주와 저주를 유발하면서 12라는 언약의 꾸준히 제 모습을 추가적으로 드러내어 왔다.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 그것은 도저히 저주에서 못 벗어날 위인들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과정을 유발한다. 언어 세계에서의 요한계시록은

 

라캉의 공식: = 로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주체란 분열된 주체이고 a란 주체의 상실된 대가로서 찾게 되는 타인의 욕망이다. 즉 인간은 알 수 없는 권세에 지배받고 있으면서 어느새 그 지배자의 욕망을 자기 욕망화하기에 아무리 해도 이 언어적 상황으로 표현된 현실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성경을 해석하면서 아무리 원어로 해석해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원언 연구나 의미연구는 단지 세분화되고 세분화될 뿐이다.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7별을 한(1)1분이 쥐고 있는 양상이다. 7교회란 인간 세상을 7교회가 대표가 되어 그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 원칙을 담아내어주고 있다. 71의 간섭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이는 결코 1이 자신의 본질을 철회시킨 적이 없음을 7교회를 통해서 분명이게 드러나게 된다. 71로 묶어지고 그 1에서 12가 파생된다. 한정된 숫자 안에는 무한정의 개수가 담겨있음을 보여주는 숫자가 144.000이다. 이 숫자는 결국 하나(1)로 모아 진다.

여기에 체리가 다섯 개 있으면 숫자로 5이다. 5는 결코 무한정이 아닙니다. 다섯 개이니 5예이다. 만약에 여기에 1개다 더 있다면 이건 다섯 개가 아니고 여섯 개다. 이것이 인간들끼리 통용되고 있는 숫자의 의미다. 이런 식으로 숫자를 알게 되면 체리 하나, 하나마다 가치가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체리가 다섯 개 있는데 이것을 만약에 7 속에 포함시켜 7를 미리 보여주기 위한 5라면 그 5는 고유의 가치와 의미는 찾을 길 없다. 57과 연관되어 배속된다. 이것이 인간을 통한 모든 자연 세계의 매개 입지다.

 

결론

 

왜 심판을 7로 통해서 단행하는가? 심판조차도 창조가 품고 있던 그동안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한 사건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판이라는 속성이 깔려야 최종 1로 표현된 안식의 의미가 드러난다. 따라서 인간은 예수님 1 앞에서 0가 된다. 이미 죽은 자라는 말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