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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공은주
가락-요한복음7장14절(미움의 하나님)
1506018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7장14절, 초막절 날인데, 초막절은 3대 절기 속에 또는 5대 절기 속에 하나입니다. 절기가 뭐냐, 절기라 하는 것은 순환되는 옛날에 일어났던 사건을 순환구조 속에 집어넣어서 하나님이 항상 이스라엘의 시간 속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러한 축제절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절기 자체가 시간에 새겨진 계시라, 이게 절기라는 거예요. 시간에 새겨진 계시.
이걸 지금 서양 유럽에서도 이것 비슷하게 하고 있어요. 유럽들이 지금 공휴일들이 있잖아요. 공휴일이 뭐냐 하면, 전통적으로 소위 유명한 성자들의 생일이라든지 축일, 기본적으로 베이스로 깔려있는 것이 예수님께서 했던 부활절, 오순절, 고난주일 거기다가 유명한 성자들 이렇게 해서 시간 속에다가 이스라엘의 문화적인 흔적을 남기고 공간적으로서는 뭐냐 하면, 그들의 명성 지, 유적지는 전부다 성자들이 고난 받았던 그 길, 올레길이라 하지요.
거기다가 게스트하우스 지어가지고 게스트하우스가 하는 게 뭐냐 하면 성체, 성 관리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거든요. 게스트하우스처럼 활용해가지고 성지순례 자체 내에서 성지순례를 해요. 그래서 자손들에게 설교를 할 수 없고 부모들이 어떻게 하는가 하면, 놀러 가는 셈치고 가게 되면 자연적으로 옛날에 죽었던 그 신앙선조들이 했던 것을 안 볼래야 안볼 수가 없잖아요. 물론 유적지니까 보긴 하지만, 어릴 때는 28세까지는 인간의 두뇌는 유동성이 있어요. 가소성이 있어가지고 한 번 싹 들어가면 당장 기억하지 않더라도 그게 밑에 층에 딱 남아있어요. 그래서 예수는 안 믿지만, 기독교신자로서는 평생 유지되는 겁니다. 마치 유대교 같아요.
유대교는 여호와를 안 믿어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믿거든요. 희한한 사람이에요. 여호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결집력 이거 하나는 아주 단단합니다. 그걸 소속감이라 하는데. 자기의 신체에 대한 소속감이 있다는 말은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너무 힘들어요. 조금 실수해버리면 지옥 가니까. 그렇잖아요. 완벽! 완벽! 하다가 아이쿠 실수해 버리면 이것 때문에 내가 벌 받는 게 아닌가? 이렇게 할 때는 다른 대체 방법이 뭐냐 하면, 소속이 되어버리면 일종의 보험이죠.
소속이 되어버리면 소속에서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사람도 많고 나를 위해서 여러 가지 생각해 주는 분도 많이 있으면 어지간히 실수해도 그 한 국물 속에 들어가 버리면 이것이 내가 못하지만 잘한 사람이 들어가 버리면 그 사람 덕을 내가 볼 수 있으니까. 하나의 팥인데, 팥이 팥죽에 들어가면 같이 부글부글 끓잖아요. 그러면 한 통속으로 구원받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그것 때문에 교회에 출석을 하게 되지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일종의 해병대 기질이지요. 아쉬우면 “우리는 해병대 몇 기입니다.” 하면 충성! 이래가지고 돈을 주든지 같은 해병대끼리. 그 소속감, 연대감 그것이 현대인들이 아직도 종교를 버리지 못하는 대표적인 이유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교회 안 다니고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기본적인 단체가 없는데 어떻게 니가 믿는 것이 니가 실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어떻게 겁도 없이 내가 하는 믿음은 실수가 아니라는 그런 확정을 니가 어떻게 자신만만하게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생겼느냐, 보통 자신감이 아니면 소속 없이 예수 믿는 사람되어버려요. 보통 자신감 아니면.
그런데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서신에 보면 바로 소속감을 떼어버리라는 거예요. 그건 예수님의 뜻과 마찬가지지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 그리 나오니까. 소속감 없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진짜 모험도 이런 모험이 아닙니다. 이건 도박보다도 글쎄 도박은 돈만 날리지요. 이런 영적 도박은 영원히 영혼이 날아갈 수 있는데 이건 위험한 도박이에요. 보통 도박이 아니잖아요.
따라서 이것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외로운 길을 가게 하시면 거기서 발을 뺄 자가 없다는 사실이죠. 숫한 교회에 가서 숫한 실망을 했을 때, 그래도 실망하지 않을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다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절실하게 다가오지요. 목사가 되어서 교단에 속했다. 그러면 소속감은 교단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하지만, 주께서는 그 교단으로 하여금 실망케 하는 계기가 생겨버리면 그래서 내 인생은 누가 책임질 것이냐, 같은 신학교 동기동창? 아니지. 교인들? 아니지. 돈 많은 장로? 아니지요. 그러면 위로하는 아내? 가족들? 아니지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신앙 생활하는 거예요. 제대로. 주 예수보다 귀한 건 없다. 제대로 신앙 활하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이러한 신앙 생활하는 절기에 방금 절기 이야기하면서 절기의 진수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게 바로 절기의 진수에요. 같이 절기를 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같이 절기를 지키는 동시에 무엇도 알려주느냐 하면 실망감을 하는데 타인에게 실망감이 되다가 시작은 타인이지요. 조금 있으면 어디까지 실망감이 미치는가 하면 본인한테 실망감을 갖게 될 거예요. 이게 바로 십자가 영을 받은 증거입니다. 자기 자신한테 실망할 때. 그러니 자기 자신의 믿음에 우리가 실패해야 돼요. 믿음에 실패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믿음에 성공해버리면 그 사람은 자기 믿음을 믿는 우상숭배자가 돼요. 주님을 자랑하라고 분명히 되어있는데 자기 믿음을 예수 믿는 믿음을 남들한테 자랑하는 또 하나의 교주처럼 그렇게 행세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주신 모든 시간적 요소, 공간적 요소 이 모든 이 세상의 삶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잔뜩 걸었던 내가 내 자신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라고 주신 멋진 기회입니다. 축복의 기회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는 안 돼!” “내 인생 내가 꾸려가는 것 이것은 터무니없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의 책임자는 분명히 나 있기 전에 나부터 먼저 만드신 그 분에 의해서 책임져주실 거야. 그리고 미래까지.” 왜? 주님 안에는 비 지속. 비 지속이 된다. 비 지속이라는 게 뭐냐, 지속이라 하는 것은 시간이 계속 가는 것을 지속이라 하거든요. 비 지속이라는 말은 시간의 저촉을 받지 않는 것. 어떤 시간의 변화가 와도 흔들리지 않는 것.
그리되려면 시간의 끝에서 비로소 나타난 것이 시간 속에 집어넣어지는 형식으로 이미 와있어야 돼요. 아이고, 오늘 처음부터 어렵게 해서 미안합니다. 시간이 끝에 와서 비로소 드러나는 완성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는데 미리 당겨서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시간 앞에 변화가 됐느냐, 시간의 변화에서 내가 달라질 것이냐, 아니면 달라지지 않는 요소가 내 안에 장악하고 있느냐에 그 내 안에 투쟁의 싸움이 일어나는 겁니다. 내 안의 투쟁의 싸움이.
그러면 우리는 상식적으로 시간의 저촉을 받지요. 예를 들어서 뭐냐 하면, ‘아! 나는 지난번에 말을 그렇게 했을까? 똑바로 했어야 되는데. 아! 지난번에 내가 착해도 너무 착했지.’ 과거의 어떤 지점을 나의 대표라고 여기고 그걸 자꾸 붙드는 것. 붙들다가 실망스러운 일이 벌어져버리면 ‘아!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어?’ 이리되면 이것은 도대체 하루에도 몇 번 바꿔져요. 나라는 것에 대해서. 기대를 했다가 실망을 했다가 다시 용기를 냈다가 수치스럽게 됐다가 또는 자랑스러워졌다가 이게 변화에요. 인간은 자기만 챙기기 때문에. 이게 늘 변화거든요.
그런데 그 변화에도 불구하고 나쁜 일을 했을 때나 착한 일을 했을 때나 달라지지 않는 그 무엇.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모든 시간이 끝나고 난 뒤에 만날 그 분이 시간이전에 우리한테 이미 집어넣어준 그 무엇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경에 약속이라고 합니다. 약속은 지키는 게 아니고 약속은 칩처럼 새겨지는 것이지요. 약속은 지키는 게 아닙니다. 20%지켰다. 30%지켰다. 어디 뭐 스마트폰 충전합니까? 저도 얼마 전에 스마트폰 구입해보니까 충전할 때 보니까 이만큼 올라와있어요. 데이터 몇 %남았다. 그거 없거든요. 그거 없는데 이상하게 오늘날 교회에서는 데이터 가지고 몇 %남았느냐 그것가지고 목사들이 설교를 해댄다 말이죠. 당신은 요 20%만마저 채우면 좋겠는데…, 이런 식으로. 당신은 교회 몇 번 빠졌더니만 데이터가 쭈욱 내려가 가지고 바닥을 헤매네. 빨리 채워. 기도원에 가든지. 이런 식으로.
절기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영원한 게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절기를 지켜버려요. 그게 사단이 난 거죠. 절기는 지키는 게 아닌데, 절기는 지키는 분이 따로 있는데, 이건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가지고 절기를 지켜버려요. 마치 오늘날 주일 지키듯이. 예배 드렸다. 예배는 드리는 게 아니에요. 예배는 참여되는 것이지 드리는 게 아닙니다. 신령과 진정한 예배에 참여 되는 거예요. 참여는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게 되면 자동적으로 예배가 되게 하시지요. 예배 안 되는 걸 되게 하신다니까요.
나사못 작은 거 있잖아요. 카메라에도 나사못이 여러 군데 있는데. 나사 못 작은 것을 이 카메라 만드신 분이 나사못을 집어다가 이렇게 집어넣고 드라이버로 돌려버리잖아요. 그러면 나사못 입장에서는 이 카메라 하나 만드는데 참여했지요. 나사못이 나는 언제까지 나사못이 되기 싫어. 나는 카메라 되어볼까. 이렇게 해서 친구들아, 우리 카메라 해체해서 밴드조직해서 카메라 만들었습니까? 그게 아니거든요. 가만히 있는데, 너는 나사못이야. 해놓고는 여기다가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인데 거기다가 집어넣어가지고 드라이버로 돌려버렸다 말이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나사못이 아니고 카메라 안에 있는 나사못이지요. 그럼 나는 나사못이라 하면 안돼요. 나는 카메라 몸체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지 내가 아니라니까요. 나 맞아요. 나 맞는데,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된 나가 되는 거예요.
절기라 하는 것은 구약의 율법이 주어집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인간들의 속내, 자기 본성이 얼마나 율법의 본정신과 위배된다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시험코자 한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동안. 그들은 온갖 것 다 해봤습니다. 성전도 지어봤고, 십일조도 해봤고, 십계명 지켜봤고, 온갖 것 다해봤는데 결국 마지막 결론은 뭐였습니까? 실패한 정도가 아니고 메시야를 살해했잖아요. 예수님이 유대인보고 하는 말이 너희 애비는 악마다 했지요. 악마의 그 모양새를 사전에 품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만 그런가요? 그렇지 않지요. 유대인도 아담의 후손이니까 다 그렇지요.
오늘 본문 절기이전에 먼저 언급해야 할 게 있어요. 7절 봅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이리되어있지요. 자, 이제부터 난해한 게 시작됩니다. 그리고 난 뒤에 11절에 보면,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님이 명절에 올라가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절기는 우리가 지키지 않는 거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절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속성의 표현된 것, 구체화된 것.’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속성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속성이 딱 두 가지 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는 사랑이고 하나는 미움입니다. 에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미워했지요. 야곱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랑했지요. 속성이 딱 2가지밖에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이란 말을 많이 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런데 뭐는 놓치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은 미움이다, 라는 것을 깜빡 자꾸 빠뜨리는 경우가 있어요. 하나님은 미움이시다. 하나님은 뭐를 미워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은 미워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첫째, 죄를 미워하지요. 사탄을 미워하지요. 그리고 자기가 창조한 인간을 미워하지요. 에서를 미워했으니까.
그런데 인간들은 이미 하나님 앞에 미움 받아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꾸 무엇을 제거하려는가 하면 이 미움을 제거하게 되면 내가 내 마음 속에 있는 신적인 형상이 회복되리라는 그런 잘못된 기대를 자꾸 하는 버릇이 있어요.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불교잖아요. 불교는 모든 자와 원수를 맺지 말고, 공자도 이야기했지만, 대자대비해요. 성철스님이라는 사람이 죽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석가탄신일 특별한 법언을 남기면서 “오, 사탄이시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어느 정도로 불교는 대자대비 해야 하느냐 하면 악마마저도 용서하는 것. 그 정도 급 돼야 진짜 신다움 같다는 거예요. 신의 속성에 합당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정작 뭘 하는 분이다? 적어도 미워할 줄 알아야 니가 신의 속성을 닮았다는 거예요. 얼마나 우리한테 반가운 소리입니까? 우리는 지금 속성이 미워하고 싶어도 신자라고 티내면서 참고 있는 중인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주님께서 먼저 미움을 해버렸으니까 우리는 이제는 마음 놓고 미워해야 돼요. 마음 놓고 마음대로 미워해야 돼요. 복음의 신발짝이 두 짝인데 한 쪽을 내던져버리고 한 쪽만 사가지고 신발 신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과 미움, 미움과 사랑, 이게 같이 가줘야 주님의 형상을 입은 게 돼요. 주의 마음을 닮는 게 된다 말이죠.
주님 미워하는 걸 같이 미워해야 되고, 주님 사랑하는 걸 같이 사랑해야 되지 주님 미워하는 것은 “주님은 미워하세요. 저는 너무 마음이 착해서 저는 안 미워할 거예요.” 이리 되어버리면 그것은 부처마음이지 예수님 마음 아니거든요. 부처가 창조했습니까? 부처가 부활했어요? 부처가 부활했으면 우리는 부처 믿읍시다. 부활하지도 못한 게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정말 중 만나면 정말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지요?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꼭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머리카락은 왜 깎습니까? 부처는 안 깎는데 왜 머리카락은 깎아요? 이유는 그게 돈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권력이 되기 때문에. 영적 권위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꾸며서라도 권위를 갖춰야 된다는 겁니다.
신부들이 로만칼라를 왜 합니까? 이거 왜 해요? 심지어 장신목사들까지 감리교 목사들까지 이거 왜 해요? 로만칼라를. 주님이 하는 목회를 본인이 하려고 하니까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자기가 목회를 하려고 하겠습니까? 성도는 라디오에요. 방송국 없으면 음악 안 나옵니다. 라디오가 무슨 방송을 해요? 기가 막힐 짓이에요. 저는 어릴 때 라디오 안에 사람이 들어있는 줄 알았어요. 자그만 라디오 안에 어떻게 사람이 들어있는지. 라디오 안에 아무것도 없거든요. 라디오 안에 DJ 안 들어있어요. 방송국이 따로 있다 말이죠. 주파수 맞춰서 소리 나오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라디오 공로로 돌립니까? 방송국 섭섭하게.
본 방송국에서 사랑과 미움이 다 들어오면 라디오도 사랑과 미움이 다 나와야 돼요. 사랑만 나오면 안돼요. 사랑만 나와야 된다는 사고방식 그걸 지적하기 위해서 주께서 하신 마태복음의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니 원수를 사랑하라. 드디어 사랑의 딜레마가 생겨버렸어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강의한 책이 있거든요. 책에 보면 설명을 해놨어요.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대목을 설명한 게 있어요. 원수를 사랑해 버리면 원수가 없어집니다. 그렇잖아요? 원수가 없어진다면 그 다음에 원수를 사랑할 원수가 또 생겨나야 돼요. 생겨나지 않으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기회조차 부여받지를 못하거든요.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내놓으라가 실제로 나한테 체험이 되려면 누군가 내 오른뺨을 때려줘야 돼요. 마음속으로 간음해도 간음죄가 된다는 것을 실제 체험이 되려면 뭐 시시하고 똑똑하고 못생긴 그런 것도 어른거리지 말고 진짜 이쁜 사람이 그것도 내 스타일에 맞는 사람이 와야 돼요. 와서 예수고 뭐고 간에 그 여자한테 푹 빠져야 돼요. 그런데 그 푹 빠지는 순간 이미 빠져버린 순간 그 사람은 본인은 뭘 느끼겠습니까? ‘드디어 내가 이 여자 하나 때문에 드디어 내가 예수를 버렸구나. 나는 믿음이고 뭐고 개뿔이고 뭐고 나는 믿음도 없어.’ 라는 적이 오겠지요. 그게 바로 주님의 원수가 된다니까요. 주님의 작전이 멋있지요.
지금 유대인들이 뭐냐 하면, 나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편이라고 되어 있잖아요. 우리가 하나님편이 되어버리면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말씀이 더 이상 추가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편이 되어버리면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말씀이 더 이상 추가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합격해버렸는데. 이미 서울대 합격했는데 수능시험 왜 하는데요? 서울대학 합격해 놓고 EBS 수능 강좌 듣는 사람 봤습니까? 합격했는데. 운전면허 합격하고 난 뒤에 운전면허 교습서 안 보잖아요. 몰라도 안 봐요.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합격한 사람들이에요. 합격했는데 합격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말씀대로 지켰기 때문에 합격한 거예요. 말씀대로 지켰기 때문에.
아무리 말씀을 봐도 전부 다 자기가 지금 지키고 있는 거라니까요. 왜? 말씀이 문제입니까? 그들의 해석이 문제이겠습니까? 어느 쪽이 문제겠습니까? 자기들이 지킬 만한 수준에서만 해석을 한 거예요. 지금 교회에서 교인들이 와서 뭐냐 하면, “목사님, 말씀만 하옵소서.” 이게 무슨 뜻이 들어있는 줄 알아요? 내가 그걸 해내서 “나, 신자 맞지요? 라고 좀 이렇게 합리화, 정당화 시켜 주세요.” 라는 그런 뜻이에요.
그런데 거기다가 만약에 목사님이 그들이 못 지키는 정말 못 지키는 이야기를 했다고 칩시다. 그 교회에 안 나갑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교인이 와서 “목사님, 제가 성경말씀대로 남을 용서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한 일곱 번쯤 용서하게 되면 아마 용서했음의 레벨에 경지에 올라가지 않습니까?” 이렇게 했는데 그 목사가 하는 말이 “일곱 번이 아니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을 하세요.” 하면 490번하고 또 찾아옵니까? 두 번 다시 안 찾아와요. 왜? 490번 해서 찾아가면 “목사님, 제가 490번 용서하면.” 목사님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일흔 번에 일흔 번에 일곱 번 하세요.”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모든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지킬 분이 따로 있어요. 주께서 율법을 위해서 한 몸을 예비했다 하잖아요. 폼으로 예비했겠습니까? 말씀을 지키는 전문가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지키는 전문가인데, 우리는 못 지키고 예수님은 지키는 이유가 뭐냐,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는 주의 말씀을 내가 지키는 양으로 해석을 해버리고.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어떤 말씀을 볼 때,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는 이래서 남은 지옥가도 나는 천국 가는 사람 맞지요?” 라고 자기 정당화를 위해서 일방적으로 해석을 했고, 주님은 그 해석을 나 빼놓고 아무도 못 지키는 쪽으로 해석을 했기 때문에 주님만 지키는 거예요.
어제 수요일 설교했는데 참 어렵습니다. 어려운데,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제사 드려가지고 그들이 멸망 안 당한 게 아니고 제사 드렸는데 이스라엘이 멸망당했잖아요. 성전 있고 제사 드렸는데. 1년에 3번씩 큰 절기했어요. 5절기 다했습니다. 그런데 망했거든요. 그 망한 이유가 뭐냐 하는 거예요. 그 망한 이유가. 제사 드리고 제사장 있고 다 했는데. 왜 망했느냐 말이죠. 하나님이 제시한 성전은 뭐냐, 성전에서 물이 나와야 돼요. 백날 제사 드려봐야 뭐가 안 나와요? 물이 안 나와요. 그래서 어제 그런 소리했거든요. 아마 성전 밑에 수도공사 하다가 수도파이프 건드려서 물이 나오는 외에는 물이 안 나오지요. 이 말은 너희들이 물 나오는 성전을 너희들은 성취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 너희들은 해석을 잘못한 거예요.
어떤 해석이 잘못됐는가, 해석을 왜 예수님처럼 못하고 인간들이 자기가 지킬만한 해석을 왜 했는가, 어제 수요설교의 핵심은 이거였습니다. 자기네들이 사람인 줄 알았던 거예요. 자기들이 사람인 줄 알았어요. 이게 문제에요. 인간이 만든 신은요, 어디서 나왔는가, 내가 사람이니까 나를 만든 어떤 분이 계실 것이다. 나 같은 동일한 존재, 이게 존재론적 실루엣이라 하는데. 인간은 존재하니까. 존재한다는 속성이 인간에게 있잖아요.
나는 존재한다. 나는 의사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뭔가 있듯이 그 중에 하나가 나는 존재 한다, 에도 나는 무엇, 무엇이다, 에 여러 가지 붙어있는 그러한 조항 중에 하나에요. 그냥 붙어있는 속성 중에 하나가 존재하는 속성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존재하는 속성이 있듯이 하물며 신에게는 존재하는 속성이 없겠느냐, 있다 말이죠. 그러니까 신은 존재한다. 이렇게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거예요. 그렇게 증명하려면 이리 해야 돼요. 내가 머리카락이 빠져서 대머리가 되었다. 인간도 머리카락이 빠져서 대머리됐는데 신이야 하물며 머리카락 빠지겠지. 그러니 하나님은 대머리다. 똑같은 논리다 말이죠. 이건 인간이 지어낸 거거든요. 인간이 지어낸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뭐냐 하면, 인간은 그냥 흙이에요. 흙은 어떤 속성이 있느냐 하면, 쫓겨나야 마땅함이 속성으로 갖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살면 안돼요. 에덴동산 사람은 흙이 아니지요. 에덴동산에서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속성을 마음껏 품고 있는 존재 그게 흙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마라는 것을 했던 것이 나의 운명을 결정했던 그런 존재가 흙이에요. 따라서 너는 흙이다, 라는 말은 너는 하지 말라는 것을 해서 죽어 마땅해! 라는 속성을 영원토록 니 살 동안에 유지해! 그걸 아주 간출하게 말해서 너는 흙이라고 한 겁니다. “죄인 주제에 어디를 넘봐!” 이거거든요. 생명나무? 천국? 주제 파악도 못한 죄인 주제에 어디를 천국? 니가 아예 그렇게 천국이 필요한 것 같으면 내가 애초부터 너를 쫓아내지도 않았다. 쫓아냈다는 말은 넘보지 말라는 것이에요. 그 말은.
에덴의 동쪽을 넘보지 말라는 거예요. 에덴의 동쪽으로 가는 길이 생명의 길이니까 그걸 넘보지 말라는 거예요. 구원받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천국 오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그런 하나님을 믿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신이시여, 저 인간입니다. 주께서 만들어줬잖아요. 만들었으면 책임져야 되지 않습니까?” 다 책임지라 하니까 미안하니까 “시켜만 주시면 종이 듣겠나이다.” 우리 그런 쪽으로 나갑시다. 그냥 쉐마, 쉐마, 많이 들었지요? 쉐마. 많이 못 들었어요? 맨 날 하는 건데. 쉐마. 쉐마.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아, 들으라. 쉐마 뜻이에요. 들으라. 그러면 이쪽에서 해야 될 응대는 뭡니까? 종이 듣겠나이다. 요게 짝을 이루는 거예요. 그래서 망했어요. 쉐마하고 종이 듣겠나이다. 그래서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망한 정도가 아니라 했지요. 애비가 누구다? 애비는 마귀였다.
마귀가 에덴동산도 겁내지 않고 들어온 마귀가 이스라엘이 무서워서 안 들어왔을까요? 들어옵니다. 예배당 무서워서? 어이구, 이 강대상 무섭다. 마귀가 못 들어옵니까? 에덴동산에 들어와서 인간을 휘젓고 인간을 장악했던 정신을 장악했던 그 마귀가 지금도 우리 정신 장악 못 할 것 같아요? 일곱 귀신 안 들어올 줄 압니까? 주님께서 기도해주니까 우리로 하여금 마귀한테 안 팔려가는 것이지, 주님의 기도가 없으면 우리는 벌써 베드로처럼 말려들어갔습니다. 팔렸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님 생각나거든 그 공로가 주님한테 있다고 생각하세요. 나한테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빡세게, 야무지게 믿었더니만 믿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뭐가 야무져요? 우리한테 뭐가 야무진 게 있어요? 야무지게 사랑해보세요. 주께서 우리를 미워하게 만드는, 내가 가장 싫어하고 미워하는 인간 내 눈앞에 돈 빌려줘! 하고 나타날 건데. 돈이고 뭐고 니 나한테 죽었다. 갑자기 은혜고 나발이고 없어요. 다 날려 보내고 니 나한테 죽었다. 니. 그렇게 새벽기도 가서 은혜 받아가지고 운전하는데 앞에서 보복운전 들어와 보세요. 니 내한테 죽었다. 오늘 니 내 성질 잘못 건드렸다. 내려가지고 니 한 번 보자. 벌금내도 좋다. 니 오늘 죽인다. 이게 한 성질 하는 거고요.
목사 되어가지고 직분 받아가지고 주여! 하고 간절히 기도하더라도 나중에 아파트가가지고 층간소음 나보세요. 몽둥이 들고 가가지고 내가 조용하라 했지. 아들, 딸들. 예고 없이 난데없이 우리의 속내를 완전히 발칵 뒤집어놓는 주님. 진짜 우리의 본성은 우리가 미처 몰라요. 성질이 이 정도로 더러운지는 몰랐는데 고마우신 주님께서 성질을 뒤집어놓으니까 쟁기로 밭 갈듯이 바깥에 있는 위장술은 안으로 들어가고 안에 있는 위장술은 곱게 숨겨놓은 것이 바깥에 나오니까 자기가 보기에도 자기가 실망스러워요.
늘 이렇게 실망에 떨어질 때, 가장 주님 보시기에 신자다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게 주님께 영광이 돼요. 영광 되는 공식은 딱 이미 창세부터 영원까지 딱 하나로 확정 났습니다. 오직 예수 중보자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에요. 그리스도 빠지는 영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직접 나와 영광 돌리는 법은 없어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걸쳐서 영광돼요. 주님을 걸치려면 주님은 죄를 용서하신 분이거든요.
따라서 주님 앞에서 우리는 뭡니까? 스스로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야 되고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을 못하는 인간이 되어야 되고 내 죄 문제를 내가 허겁지겁 손도 어떻게 못 대가지고 내 몰라라하고 나자뻐질 그런 존재가 있어줘야 돼요. 죄인인체 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지, 죄인입니다! 라고 말하는 떠벌이는 그런 의인을 부르러온 게 아니거든요. 그냥 죄인을 부르러왔어요. 따라서 이 2가지 속성이 절기를 통해서 나타나는데요, 예수님께서 사랑과 미움을 2가지를 다한다고요. 그동안 하도 한국교회에서 사랑만 이야기했지 미움을 이야기 안하니까 제가 특별히 미움을 강조하고 싶어요.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그 대목을 다시 해보겠어요.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은 바로 그 당시 유대인 바리새인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너희들이 너한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은 이방인도 한다. 그 말 맞지요? 니가 남한테 대접 받을 때, 그 사람이 대접받고 난 뒤에 다시 도로 “아이고, 제가 대접받았으니 제가 대접하는 게 도리이지요.” 라고 하는 사람을 대접하지 말라. 그럼 어떤 사람을 대접해야 되느냐 하면, 나한테 대접을 받아놓고 “제가 보답하려하니 돈이 없네요.” 라는 사람에게 대접을 해야 니가 하늘나라 상이 있을 것이다. 이게 누가복음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주님 안에 다 들어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것 같으면 애초부터 주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한 그 취지가 살지를 않아요. “니가 선악과 따먹었느냐?” “예, 따먹었습니다.” “아이고, 사람이 한 번 실수할 수 있는데 니가 니 잘못을 아느냐?” “알고 말고요.” “그런 짓 하지 마라!” “예” “앞으로 똑바로 해야 돼. 마귀가 와서 꾀더라도 유혹되지 마라.” “예, 두 번 다시 꾀어 넘어가면 저는 인간도 아닙니다.” “그렇지, 그리 나와야지. 그래, 같이 살자.” 이렇게 어떤 기회를 주시는 것이 우리 보기에는 굉장히 하나님답잖아요.
그러나 아예 나가떨어지게 만들어요.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니고 인간을 그야말로 흙으로 만들어 놓음으로 말미암아 흙이 스스로 구원 못 받는 지경까지 밀어 넣음으로서 모든 천국가고 구원받는 모든 공로를 인간 말고 다른 한 분, 자기 아들, 예수님을 주되기 위한 하나님의 고도의 작전이고 전략입니다. 사람은 들러리였어요. 누구 들러리? 주님의 주되심을 위한 들러리였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못 나야 되고 마땅히 말씀을 못 지켜야 돼요. 지켰다하면 그건 분명히 백발백중 100%오해입니다. 내가 지킬만한 해석을 해놓고 지켰다고 우기는 거예요. 모든 말씀은 예수님만 지키도록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는 어떤 말씀이라도 우리는 못 지키게 되어있습니다. 끝났어요. 컴퓨터 켜시고 어떤 말씀이라도 성경 펴놓으시고 자기가 지킬만한 걸 다 지키는지 찾아보세요. 성령이 오셔보면 어떤 구절도 못 지켜요. 어떤 구절도. 그러면 컴퓨터를 끄세요. 끄면 무슨 소리 나지요. 드리릴링~~ 소리 나지요. 그겁니다. 컴퓨터 끌 때 효과음나지요. 그거에요. 그걸 가지고 에스겔37장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한 자. ‘뼈’에요. 뼈.
뼈도 그냥 뼈가 아니고 어떤 뼈? 바짝 마른 뼈지요. 어제 수요일 날 이 설교했잖아요. 바짝 마른 뼈로 우리는 있으면 뒤에 다른 분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했지요. 인자되신 분하고 여호와 하나님 이야기하고, 우리는 뼈로 있는 거예요.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아요. 두 분끼리 이야기해요. 두 분끼리. “저, 뼈들이 어떻게 살겠느냐?” “주의 말씀으로 살겠지요.” 인자되신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이야기하시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어떤 모양새로 쭈그리고 있어야 돼요? 뼈라니까요. 주님 하는 일에 도운다고 문방구에 가서 본드 사가지고 살도 붙이고 옷도 번쩍 번쩍 발라놓고 선크림 바르고, “나름대로 뭔가 보답을 해야지.” 이러지 마세요. 은혜받기 위해서 앞자리 나온 것처럼 그렇게 하지 마세요. 뒤 자리 가도 은혜 올 자는 은혜오고 앞자리와도 은혜 안 옵니다. 그걸 가지고 뭐냐, 기분이에요. 기분. 기분은 오늘도 실패다.
그냥 기분이라니까요. 왜 그런 기분을 갖고 싶냐, 기어이 실패 안 되기 위해서. 스스로 꾸민 일이 자기한테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요 일만큼은, 요것마저 실패를 한다면 진짜 자기 가치는 없기 때문에 마지막 최후에 나오는 마지막 자존심, 그런 류의 일을 뭔가 해보는 거예요. 그거 냄새 맡고 일곱 귀신 파리처럼 날아옵니다.
“이번 일 성사된 것은 니가 앞자리 와서 된 거야. 그러니까 다음에도 앞자리에 앉아.” 마귀가 와서 나불됩니다. “갑자기 니가 요번에 큰 재앙을 면한 것은 지난번에 니가 십일조해서 그런 거야. 요번 십일조 듬뿍 내라. 아끼지 말고.” 마귀가 또 시험을 해대요. “지난번에 한 것은 기도해서 된 것이고 성경 열심히 해서 된 거야. 니 부모한테 효도해 봐라. 모든 자식이 잘된다. 니 자식이 잘된 것은 니가 부모한테 잘해서 그런 거야. 이건 하나님의 약속 있는 계명이야.” 십계명에 나오지요. 약속 있는 계명. 어버이날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약속 있는 계명이라고. 딴 건 약속 없는데 이건 약속 있다고. 부모한테 잘하면 자식 잘된다고. 이건 불교도 아니고 유교도 아니고 기독교인지 복음인지.
우리가 잘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지금 앞당겨 죽는 게 잘되는 거예요. 메르스 걸려가지고 이게 잘되는 거예요. 스데반집사가 잘되는 것은 뭐냐, 맞는 즉시 주님만나서 편안하게 제대해서 사는 게 이게 잘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는 우리 잘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매일 일상을 만나지요. 일상. 매일 하루 일과 자식 키우는 것. 네 명이나 키운다 하니까 얼마나 힘듭니까. 자식 네 명 키우는 게. 이게 뭐냐 하면 우리를 죽이는 방법이라니까요. 자식 키워서 호강하세요, 가 아니라 내가 니 키우다가 골병 나겠다. 골병 들으라고 자식 낳고 키우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 니는 내 덕분에 오래살고 나는 니 키우다가 죽어서 천당 갈란다.” 이런 식으로 계산 이런 식으로 하란 말이죠.
그렇게 되려면 그 미움이 나의 적들에게 꽂히면 안 되고 그 미움이 누구한테 와야 되는가 하면, 오늘 강의 제일 중요한 이야기인데, 그 미움이 누구한테 와야 되는가, 나에게 와야 돼요. 마태복음10장에 나오지요. 누구든지 너를 미워하라. 주님의 미움이 너한테 꽂히는 그것을 가지고 십자가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뭐라고 했습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했지요. 그 버림받아야 될 그 분이 버림받아야 될 분이에요? 죄도 없는데. 그럼 그 분이 버림받는다는 분이 죄 때문에 주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거든요. 그 분이 죄를 갖고 있으니까 미움 받았는데. 그 죄가 본인 죄 아니에요. 그럼 누구 죄에요? 바로 나의 죄잖아요.
그러니까 실존을 여기서 찾지 말고 실존을 어디서 찾는가, 십자가 달린 채 찾아야 돼요. 진짜 내 자리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2장20절에서 사도바울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목 박혔나니, 나의 고향은 십자가다. 나의 장래 직장도 십자가고, 나의 고향도 십자가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럼 우리가 기도하고, 목사님이 기도하고, 성경보고, 예배드리고, 설교하고, 또 강의하러 다니고 이거 왜 합니까? 이거 왜 해야 됩니까? 오늘도 실패다.
그럼 은혜 받는 건 뭡니까? 그건 기분이지요. 기분입니다. 진짜 은혜는 뒤돌아보면서 소급해서 느껴지는 게 은혜에요. 한 가지 예인데요, 여자 축구 캐나다 가가지고 월드컵 할 때, 기대 안합니다. 그거 뭐 축구 몇 년 찼다고 월드컵 나간거만 자랑하지 빨리 끝내고 집에 오지 숙소비만 아깝다 빨리 와. 라고 했는데 하니까 중계방송 보자 했는데 전반전도 밀리기 시작하다가 한 꼴 또 먹었네. 스페인한테. 끝! 끝! 다 껐는데, 제 이야기 아닙니다. 대부분 그럴 거라 하는 거예요. 껐는데 후반전에 1골 넣었다고 하니까 아이고, 또 스페인이 또 봐 줬구나! 봐 줬어. 스페인이 화나가지고 1골 주고 또 4골 먹을 거야. 한 5:1로 질 거야. 했는데 2:1 되니까 인터넷 들어가니까 기적 중에 기적이다. 킹 오브 킹. 기적 중에 기적. 무슨 뜻입니까? 기대를 안했지요.
왜 우리는 우리 자신한테 기대를 합니까? 문제가 여기 있어요. 지금 우리 구원을 누가 방해합니까? 내가 방해해요. 왜? 나는 구원받을 거야. 이게 구원을 방해하는 거예요. 이게. 제발 너 자신을 뭐라고 합니까? 너 자신을 이제부터는 월드컵나간 여자 축구팀으로 간주하라는 말이지요. 아무도 기대 안 해요. 차비도 아깝다. 빨리 빨리 와. 그거에요. 너 같은 게 천당 가면 손에 장을 지진다. 내가 나한테 늘 그렇게 세뇌를 주세요. 아이고, 미치겠네. 나 같은 게 천국 가면 천국이 흔해 빠졌다. 나 같은 게 천국 가다니. 꼭 이런 사람이 안 다쳐요. 홈런치고. 9회 말에 역전시키고. 우리 자신의 이름을 바꾸세요. 변 반전, 이 반전, 최 반전, 김 반전. 이제는 반전의 사람이에요. 이걸 변전법이라 하는데. 헤겔의 철학은 바로 신학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지 않고 인간들이 기대하는 하늘에 있지 않고 인간들 속에 섞여 있다는 거예요. 하늘의 나라는 그 속에 있다는 거예요. 그게 성육신이라는 겁니다.
“나 같은 인간을 주여! 저는 개입니다. 주여 떠나소서.” 베드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죄인, 떠나소서. 떠나소서가 무슨 뜻이냐 하면, 니가 니 인생 평가는 그걸로 끝난 거죠. “주여, 떠나소서!” “자, 드디어 니 인생에서 손 뗐지? 손 뗀 니 인생 내가 그러면 가져가도 니 할 말 없지.” 그래서 찾아온 거예요. 이제부터 고기 잡지 말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그것은 성령이 와야 됩니다. 왜냐, 성령은 십자가사건을 우리한테 재현시키는 것이 성령의 일이거든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게 성령의 일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안 됩니다.” 하는 것이 “안 되는 가운데서도 되게 하시는구나!” 이게 성령의 일이거든요.
“로마 못 갑니다. 오! 폭풍 칩니다. 안됩니다. 폭풍 쳐서 로마도 뭐고 지금 집에도 못 갑니다. 끝났습니다.” 했는데 폭풍 가운데서 살게 만드는 것. 모든 것이 반전이에요. 죽었다 했는데 살고, 살았다 하면 다시 죽게 만들어버리고. 우리 인생은 롤러코스터 같아요. 늘 좀 섰다하는 자는 교만하고 엎어지면 일으켜 세우고. 그것은 바로 미움과 사랑이라는 두 개의 주님의 속성이 우리를 장악하고 우리를 그렇게 인생을 이끌고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속해서.
그래서 이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고칩시다. 미움의 하나님. 미움이 나를 미워하시는 방법으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러면 왜 그냥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 미움을 왜 집어넣는가,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지막에 우리가 사랑하는 자는 우리밖에 없어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내 사랑하는 일 이외에는 다른 일을 할 줄을 몰라요. 내 사랑하는 거 외에 할 줄을 모른다고요. 이웃사랑? 그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이웃사랑을 할 줄을 모른다니까요. 내 사랑하는 거 외에는 그 노선에서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어요. 우리는. 왜? 마귀가 그렇게 강렬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에 나간 적이 없습니다. 노선이 KTX가 기차가 철도노선하면 그건 탈선하잖아요. 우리는 탈선할 수가 없어요. 내 사랑하는 철도노선에서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어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죽을 때까지 계속 그럴 거예요. 죽을 때까지.
그럼 어떻게 하느냐, 기차타고 그 노선을 가는데 거기다가 뭔가 뒤에 뭔가 붙었어요. 붙어서 이걸 속에서 균열 잘라버려요. 그러면 우리 속에 나는 껍데기고 내 안에 주님을 영화롭게 못할 수밖에 없는 그 원인, 죄가 나와요. 그 죄를 주님께서 직접 처리해버리면 우리가 죄를 늘 승리하듯이 이 기차는 나중에 공중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하늘나라로 날아가 버려요. 활주로에서 비행기 뜨듯이 날아가 버려요. 어떻게? 나 있는데 붙어가지고 예수 안에서 죄인을 건져내시면서 요거 전체를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5장21절 봅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한 자로, 다시 말해서 우리하고는 상대 안하지요. 우리는 뼈다귀니까 상대 안합니다. 우리는 감자탕이에요. 그냥 뼈에요. 상대 안합니다. 하나님은 일하셔요. 누구와 일합니까? 우리하고 일 안해요. 말씀 지킨다고 하지 마세요. 우리보고 아예 일을 안 한다는데 무슨 말씀을 지켜요. 우리가 말씀 지키는 것은 우리가 일방적으로 해석해가지고 나는 지켰다. 자기 기분일 뿐이에요. 우리는 어떤 말씀도 사도바울의 어떤 말씀도 못 지켜요.
니가 어느 도시에 가서 일하리라, 도시에 일하는 것도 악이라 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어떤 희망을 품고 있지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일을 해서 돈을 벌리라. 그것조차 악이 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못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과 우리를 대신으로 하셔서 일을 벌리셔가지고 거기서 뭘 생산했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빠진 게 뭐냐 하면, 우리를 대신하여 이미 죄를 처리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주님이 하시는 일이 뭐냐 하면 대신했던 그 인간을 찾아오는 일이 아직 남아있어요. 그래서 찾아왔잖아요. 누가요? 주님이 자신의 영을 통해서 찾아왔잖아요. 됐잖아요. 끝났잖아요. 끝났네. 뭘 할 게 남아있어요? 없는데.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일은 주님이 하실 일이지 재림도 주님이 하실 일이지, 마귀에게 시험 들고, 걸리고 주께서 하실 일로 우리 일은 없어요. 우리는 다만 주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일에 말려들어 가도록 그 태풍과 허리케인 속에 말려들어가서 지금 살아가는 중입니다.
없는 자를 택하사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똑똑한 자를 버리시고 무식한 우리를 택하사 똑똑한 자를 부끄럽게 만드시고, 고린도전서1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우리의 실상은 뭡니까? 남보다 더욱 더 똑똑하게, 남보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주께 영광이고 복 받은 티낸다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수록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게 아니고 못난 인간 되면 될수록 주님만 영광이 더욱 올라가고 우리가 무식하면 무식할수록 주님께 더 영광이 돌아가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무식할까요? 그럼 어떻게 없는 사람이 될까요? 성질 급하게 하지 말고 가만히 기다려 봐요. 기다려 보시면, 보이스피싱 당하게 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무식했던가. 당했답니다.
그러니까 이게 똑똑해서 안 당한 게 아니고 주께서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게 되면 졸지에 똑똑한 인간이 무식한 인간이 되고, 좀 자랑질하다가 자랑할 게 없게 만들어주실 때에 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가지고 장난치시는구나! 이렇게 믿으시고 감사하시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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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요한복음7장14절(미움의 하나님)
1506018b-이 근호 목사
주님의 일은 죄인 되게 하는 일이에요. 거기에 반해서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은 실컷 죄 지으면서도 자기 변명하기 위해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는데, 인간은 자기 사랑 외에는 배운 가락이 도둑질밖에 없어 도둑질밖에 못한다고, 배운 가락이 죄짓는 것밖에 없기 때문에 죄만 짓게 되어있어요. 그걸 그냥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어디서 인정하는가, 여러분이 아는 이야기해봅시다. 이스라엘은 뭐로 만들어졌는가 하면 언약으로 만들어졌지요. 언약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죠. 그렇지요? 이스라엘은 어떤 현실이냐 하면, 말씀의 현실입니다. 전체가 말씀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이유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어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은 누구를 위한 이스라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자기 자신을 위한 이스라엘이 됐으면 좋겠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속의 선지자나 모세는 이 이스라엘은 누구를 위한 이스라엘입니까? 이스라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이스라엘 되어야 되는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망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이, 요번에 수련회합니다. 8월2일부터 3일 동안 하는데 사사기해요. 사사기를 보게 되면 그들이 이상해요. 그들이 편할 때, 행복할 때, 만족스러울 때, 누구를 버립니까? 하나님을 버린다고 되어있지요. 사실은 하나님을 안 버렸어요. 사실은 그들이 여호와를 버린 적이 없어요. 여호와를 버린 게 아니고 다른 종교에 관심을 가졌지요. 바알종교에 관심을 가졌지요.
여러분들이 창세기6장에 보면 노아홍수 직전 나올 때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후회하사 물로 쓸어버린다 하지요. 쓸어버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 섞이지 말아야 할 게 섞였어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은 섞여서는 안 되는 거예요. 순수성이 유지 되어야 돼요. 그걸 싹쓸이 해버리고 언약을 믿는 사람만 따로 뽑아내는데 8명, 그 8명의 후손이 오늘날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보면 옷을 다른 직종으로 짜깁기 하지 마라, 그리로 모종할 때, 씨를 뿌릴 때 다른 작물을 같이 섞지를 마라고 했어요. 섞이는 걸 싫어해요. 그리고 돼지고기를 먹지 마라했잖아요. 못 먹는 음식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왜 못 먹느냐 하면, 이게 하늘하면 하늘하든지 땅이면 땅이든지, 물이면 물이 있어야 되는데, 이건 물에 사는 것도 아니고 땅에 사는 것도 아니고 하늘에 사는 것도 아니고 어중간한 것은 전부 못 먹게 했어요. 초식이면 초식만 하던지 육식이면 육식만 하던지 섞이는 걸 싫어한다고요. 섞이지 않는 걸 가지고 두 자로 ‘거룩’이라 합니다. 거룩. 따라서 인간은 거룩해질 수가 없어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섞여서 태어나니까. 내 속에는 하나님의 법을 원하나 다른 법이 있으니, 이미 섞여버렸어요.
자, 계속해 봅시다. 지금 언약이 이스라엘보다 뭐가 먼저 있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먼저 있었지요. 이게 중요하니까 여러분이 꼭 기억해야 돼요. 이스라엘은 없는데서 만들어졌어요. 없다는 게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있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먼저 있었고, 아브라함아, 니가 4대만에 애굽에서 나오리라, 4대만에 나오려면 그 4대동안 어디가 있어야 됩니까? 후손들이 애굽나라에 가있어야 돼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애굽나라를 알아요. 애굽나라는 어떻게 하고 바로가 어떻게 핍박하는지를 사전에 다 알고 있다니까요.
언약이 먼저 있고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뭡니까? 말씀이 먼저 있고 교회가 있음을 믿는 자가 교회에요. 교회 생겨놓고 교회 부흥시키기 위해서 잘되기 위해서 말씀 가르치는 것이 교회가 아니고 그것은 종교업종이고 업소고, 말씀이 우선이에요. 말씀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니지요. 부채표가 아닌 것은 활명수가 아닌 거예요. 유사품에 속지 마세요. 복음이 아닌 곳은 교회가 아닌 겁니다. 친목단체지요. 계모임이라니까. 2000년 교회역사가 그래요. 천주교 성당이 그래요.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찾지 말고 거기서 뭘 찾아야 됩니까? 말씀의 현실로 감안해야 돼요. 말씀의 현실로. 그럼 말씀의 현실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007영화에 보면 유명한 도둑이 유물을 훔칠 때, 분명히 박물관가면 사람 눈에는 안 보이지만, 특수한 안경 쓰면 여기에 촘촘히 망으로 주변에 선이 쫙 깔려 있잖아요. 그걸 안경으로 쓰고 온 폼 다 잡아가면서 뒤보면서 요 사이를 빠져나가서 무사히 보물을 탈취하잖아요. 이 세상이 지금 말씀의 망으로 꽉 짜져 있는 거예요. 건드리기만 하면 죄인 되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 올 때도 너무 건드려가지고 거미줄이 눈에는 안 보이지만 말씀 어긴 것이 한 꺼풀 있어요.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에 율법이 2번입니다. 하나는 십계명이 있고 또 하나는 제사법이 있어요. 제사법이 먼저 있어요. 제사법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십계명은 나중에 있어요.
그렇게 해야 십계명가지고 죄짓고 죄지은 인간 제사법 통과해서 의롭게 되고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사람이 입을 막고 더욱더 죄 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 오직 예수님의 제사, 예수님의 몸,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래서 영광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화목제물만 경유해야아버지께 영광이 돼요. 예수 믿고 착하게 산다고 영광 되는 게 아니에요. 착하게 사는 게 없다니까요. 말 똑바로 합시다. 착하게 사는 게 없어요. 우리는 착하다는 말을 붙이지 마세요.
내가 너희에게 말씀을 준 것은 예수 믿고 선한 일 하게 하심이라, 그 선한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말이 선한 말이에요. 그리스도 증거 하는 것. 강도가 천국에 무사히 갔습니다. 왜? 선한 일을 마지막에 한꺼번에 너무 많이 해서. 강도가 어떤 선한 일을 했습니까? “주여, 오늘 밤에 저를 생각해주세요.” 얼마나 선한 줄 몰라요. 왜? 자기를 떠났으니까. 자기 운명을 자기가 책임 안 진다고 손들어버렸으니까. 이처럼 선한 일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그런데 부자청년은 예수님께 나와 가지고 지가 선한 일한다고 지금까지 선한 일 했고 십계명 지켰고 거기다가 플러스 추가해서 예수 믿는 선한 일하려고 왔다가 나중에 근심하여 돌아갔다고 되어있어요. 너희는 왜 너희 자신을 미워할 줄 모르느냐, 너 자신을. 주님은 주님을 버리는데 왜 너희들은 너희 자신을 못 버리느냐. 죄 없는 나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나를 십자가에 버리는데 죄 없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죄를 뒤집어쓴 인간이 뭐가 아깝다고 그걸 못 버리느냐 말이죠. 시커먼 연탄재야 좀 뗄 게 있으니까 남겨두겠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다 타가지고 허연 재만 남아있는 걸 가지고 왜 못 버립니까. 아까워가지고. 그것도 추억이라고. 죄 지은 것도 추억이라고 못 버리잖아요.
주께서 말씀의 그물망이 안 되지요. 죄만 짓지요. 그것을 의로 전환시키는 것이 이 말씀의 그물망이 해주는 하실 일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또 용서받았네.” 맨 날 하는 모든 것이 말씀의 완성된 십자가에서 뽑아서 나온 스파이더맨처럼 십자가에서 나온 그 십자가의 용서의 줄에 매일 걸려가지고 또 죄를 지었네. 또 용서 받았네. 또 죄 지었는데 또 용서받았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령을 못 받은 사람은 007이에요. 온 폼을 다 잡아요. 죄에 위반 안하려고, 만약에 좀 위반하다 싶으면 과욕, 오버하듯이 헌금을 해가지고 그걸 대충 때워 넘어가. 요거 죄를 지었지만 이것 헌금 받으시고, 그냥 눈 감아 주시고, 또 넘어갔다 치고, 넘어갔다 치고 또 뭐하고. 그래서 자기가 온전하게 지금 이렇게 복 받은 것도 말씀 잘 지켜서 복 받았다. 이리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자기를 미워할 줄 모르는 거예요. 바리새인, 마귀의 종들의 특징이 바로 그런 거예요.
현실은 뭐라 했습니까? 말씀의 망이다. 말씀의 망을 제가 이해되기 쉽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의 생활의 팁인데요. 살림하는 사람이 빨래할 때에 빨래가 상한다 싶으면 그냥 하지 말고 빨래 망에 집어넣어서 빨래하고 같이 섞어 넣는답니다. MBC에 살림의 지혜에 나와요. 빨래를 조금할 때는 세탁기에 넣지 말고 비닐봉지에 비누를 넣어서 활용해가지고 싱크대에서 조물락하면 빨래가 된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의 망 속에 빨려 들어가지고 말씀이 우리를 주무르면 거기서 하나님의 의가 나온다니까요. 우리는 주님의 빨래감이에요. 그냥 살면 돼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살면 돼요. 아무것도 안하는 그것이 최고로 열심히 하는 주의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의 일은 뭐냐, 주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주의 일이에요. 예를 들면 교회에 갔는데 왠지 보니까 전에는 안 보였는데 피아노에 먼지가 끼었다. 먼지가 끼었으면 아이고, 먼지가 하면서 닦고 있는데 다른 분이 와서 “아이고, 집사님 성화되셨네요. 세상에 남들이 하지 않는 주의 몸의 몸 된 주의 봉사를 하시네요.” 그러면 이렇게 하세요. “그냥 나, 이리 살아요. 나는 먼지 있으면 못 봐요. 성질이 더러워서.” 이게 주의 일이라니까요. 꼭 주의 일은 뭐냐 하면, 나의 한일로 영광 돌리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용서가 다시 새록, 새록 생각나서 영광 돌리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애가 못됐다. 그러면 몽둥이로 회초리로 패면서 “엄마는 집사면서 나를 때리나?” 중2가 꼭 티를 달아요. “그래, 나 죄인이다. 나 이리 산다. 손 내! 나 더럽게 산다. 이게 내 성질이야. 이 성질 주께서 용서했어.” 애는 때리면서 복음은 복음대로 다 전하고. 일거이득 아닙니까. 지는 성질 풀고 복음은 복음대로 전하고.
이걸 참아야 되나, 때릴 것이냐. 마귀는 때려라, 천사는 참아라. 인내는 인내로. 아휴 골치 아파. 그냥 성질대로 하세요. 이미 빨래 망 속에서 빨래가 됐는데 뭘 걱정해요? 괜히 그걸 참으면 위선이 돼버려요. 위선이 돼버리면 나중에 무슨 말하는지 알아요? “주님, 이럴 것까지 없잖아요. 참았는데 이런 사태는 정말 주님답지 않습니다. 정말 이런 어려움을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얼마나 착하려고 노력했는데.” 공연히 누구한테 원망이 돌아가느냐 하면, 주님한테 원망 돌아가요.
지가 착한데 이럴 줄은 몰랐다는 거죠. “니가 어떤 인간인데?” “적어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잖아요.” “니 최선의 노력이라 하는 것은 뭐냐, 니 성질대로 사는 것이 최선의 노력이야.” “참았습니다.” “참은 것도 니 성질이야. 지금까지 니 성질이야. 내가 참는 것이 옳다는 식으로 잘못된 해석을 니가 지금 성경해석을 하고 있는 거야. 니가 성질대로 살아봐. 성경해석이 다시 되는 거야.” “아, 성경대로 사는 것이 되는구나!” 해석이 다시 된다니까요. 야고보서1장 25절에 뭐로 되어있어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라 했지요.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보면 자유는커녕 왜 갑자기 숨이 막힙니까?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부산에 가니까 부산의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설교를 딱 하는데 10분 동안 설교를 안 하고 눈물이 팍 쏟아졌다는 거예요. 그것도 10초가 아니고 10분. 설교시간이 50분인데 10분 동안 눈물만 흘리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어느 대목이냐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주여, 나귀를 어디서 구합니까? 주께서 쓰시겠다고 한다면 그 주인이 내줄 것이다. 그 대목에서 막혀가지고 5분도 아니고 10분 동안이나 눈물만 흘리면서 나귀는 이렇게 쓰시는데 나 지금 뭐하고 있느냐, 그게 감격이 돼가지고 아무소리 못했답니다.
그래서 제가 했지요. 아이고, 목사님 좋겠습니다. 그런 혜택도 주시고. 저는 설교시간에 한 1분이나 못 할 때 있는데 휴대폰이 울려가지고 기다렸다가 못한 경우가 있는데. 그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10분 동안 뭐 생각 안하겠어요? 오늘 왜 저 집사 참석 안 해가지고 교인 수 왜 이렇게 부족 하냐, 오늘은 교인들이 헌금 얼마 낼 것이냐, 오늘 이래가지고 내가 이렇게 교회해가지고 애들과 밥 먹고 살겠느냐, 그런 생각이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안 나잖아요.
그러니까 고 순간만큼은 누구의 사랑이 날아가 버리겠어요? 내 사랑 날아가 버리지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만 사랑하니까 상대적으로 누구를 미워하게 돼요? 자기 자신을, 이런 말씀대로 못 사는 내가 얼마나 미워지겠어요. 그게 뭐냐, 주님이 주시는 미운 감정이 고 순간 합체가 된 거예요. 그동안 나를 아무리 미워해도 내가 이뻐지게 되어있거든요. 그런데 진짜 주님의 안목으로 미움이 그 순간만큼은 나한테 그냥 장애물 없이 들이닥치니까 내가 너무나 미워서 말한다는 자체가 부끄러운 거예요. 미운 놈이 뭘 말을 해. 뻔뻔스럽게 무슨 말을 합니까? 그 앞에서. 내가 죄인인데. 그 목사님은 그 때 돌아가셔야 돼요. 고 때.
그 순간만큼은 어떤 순간이냐 하면, “세상이 천지개벽하고 어떤 어려움이 온다할지라도 저는 개의치 않겠습니다.” 라는 마음이 생겨버린 그 순간이에요. “나한테 갑자기 온 몸에 암이 걸리고 갑자기 내 앞에 불이 나도 저는 요 말씀 앞에서만 눈물만 똑똑 흘리겠습니다.” 하는 그 순간이에요. 그 행운 자주 찾아오는 거 아닙니다. 가끔 와요. 가끔 옵니다. 길가다가 자전거 박을 때 가끔 와요. “주여, 오늘 무슨 일인데 이렇게 저한테 벌을 주시고 자전거 바쳐서 아프게 하십니까?” ‘아차! 평소에 자전거 안 바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지. 내가 조심해서 안 바친 게 아니구나!’ 다시 한 번 소급해서 은혜를 깨닫게 하는 고 짧은 순간. 그것도 성령 받은 사람한테나 해당되지 성령 받지 않은 사람한테는 안 되고요. 절기에 올라가는데 뭐냐, 세상을 미워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올라가십니다. 그 이야기 하려고 1시간 이상 이야기한 겁니다.
요한복음7장7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뭐라고 합니까? 악하다고 하지요. 악하다고 하면 세상이 어떻게 합니까? 세상의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겠지요. 본성이 뭡니까? 감히 이 세상이 악해? 그러면 나는 너를 미워해. 벌써부터 예수님과 세상과의 건널 수 없는 강을 지금 건너가고 있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이야기거든요. 제가 4자를 쓸 테니까 요 4자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성립하는 방법을 나한테 알려주세요. 자연물 띄우고 외(자연물 ~외)이게 지금 성립될까요? 안 될까요? 이게 사실은 성립이 안돼요. 왜냐 하면 우리가 어디에 포함돼요? 자연물 안에 들어있지요. 요 컵이 있는데요,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요 컵 안에서 살고, 개미보고 니는 컵밖에 나가면 뭐할래? 라는 말의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의미가 없지요. 왜, 컵 안의 세계가 전부기 때문에. 지금 기대하는 이 세상 사람들 살아가는 거 보세요. 그들의 세계의 한계가 어디입니까? 그들이 주님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아침에 눈만 뜨면 해질 때까지 꿈속까지 누구만 생각해요? 꿈속까지 눈에 보이는 컵 안의 세계만 생각한다고요. 자연물외에는 없어요. 주님께서는 자연물 자체를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걸 악하다 했다고요. 이 세상자체를 악하다 하니까 “그럼 예수님 어떤 분입니까?” 세상바깥에서 오신 분이에요. 악이니까 아까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미움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쫓아내시면서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너는 악해서 마땅히 쫓겨 나가야 돼! 라는 통보를 만드신 분이 이제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지금 통보를 해줍니다. 고마운 분이에요. 뭔가 집에 수도가 새는데 어디서 새는지를 모르겠다. 그런데 지나가는 과객처럼 어떤 수도에 전문가가 지나가면서 “계십니까?” “누구십니까?” “지나가는 과객입니다.” “그냥 지나가시지요.” “저는 사실은 수도에 대해 아는데 이 집에 어느 대목에 아마 물이 샐 겁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삿갓 쓰고 했다 합시다. 그러면 나는 아무리 봐도 모르는데 찾아가보니까 거기에 물이 새요. 그 삿갓 쓴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럴 때 그 다음부터는 삿갓 쓴 사람을 믿겠지요.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이 말은 뭐냐, 내가 알고 내가 알아서 나의 세계를 바라보지 않고 들어오지 않고 이 세상의 바깥에 계신분의 안목에 전적으로 위임하겠습니다. 내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 이 말은 뭡니까? 내가 세상 보는 것에 대해서는 드디어 나는 손 털고 나다움에 포기했습니다. 뜻이에요. 나는 나를 절대로 신뢰하지 않겠습니다.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아내가 남편을 잘해주니까 남편이 오해하기를 “당신이 나를 사랑하네.” 할 때, 제가 뭐라고 했지요?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 눈에는 이게 사랑으로 보이나?” 이리 하겠지요. 결혼은 실패하라고 하는 거예요. 결혼이라는 것은 내가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내가 믿었던 그 모든 것이 허구에 불구하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결혼이라는 절차를 한 거예요.
결혼 안 한사람은 그 절차를 다른 방식으로 실패를 느끼도록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남편이 세상만, 컵 안만 생각한다면 ‘아이구, 이 여자가 왠일이야, 나를 사랑하다니?’ 그 남편은 컵 밖의 안목을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자기한테 잘해주면 그게 자기가 사랑이라고 느끼는데, 문제는 그걸 사랑이라고 느끼는데서 끝나면 문제가 안 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내가 사랑 받을 만한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는 당연히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 마땅 하니이다.’ 이리 생각한다니까요.
왜 그렇게 생각할까요? 이 컵 안에 있는 개미는요, 이 세상을 그냥 세상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세상으로 일방적으로 그렇게 해석을 내려버렸어요.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 다 내 좋아라고 돌아가야 좋은 세상이라는 겁니다. 마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미울 경우 한 가지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 내 집에 안 오고 건너뛰면서 유월절처럼, 저 집에 선물주고 그 다음 집으로 갔을 때, 두 번 다시 크리스마스 지키나 봐라, 이리 나오지요. 모든 집에다가 선물주기 때문에, 울지 않는 조건하에만 주기 때문에 누구한테나 좋은 분이잖아요.
지금 예수님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뭡니까? 건너뛰는 거예요. 구원을. 뭐가 없는 집에는? 피가 없는 집에는 저주고 피가 있는 집은 십자가에 피 발린 자만 구원을 해주기 때문에 그걸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는 자연물 또는 현실, 세상의 바깥의 분으로 오셔야 되는 겁니다. ~외. 외에요. 굉장히 중요해요.
외 하나 때문에 우리의 모든 생각은 죄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내 중심으로 세상 돌아가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중심으로. 스페인보세요. 얼마나 분통하겠습니까? 랭킹도 낮은 우리가 올라가고 지는 떨어지고. 친구 사이에도, 같이 친구라 하는 것도 다 친구를 왜 만나는가 하면 실패하기 위해서 친구를 만나게 해주십니다.
어떻게 실패하느냐, 둘 다 친구라 생각하고 같이 야구장에 가보니까 저쪽은 두타(두산타워)좋아하고 나는 삼성 좋아하고. 친구라 하다가 둘이 야구장에서 싸워가지고 깨졌거든요. 깨지고 난 뒤에 그동안 니한테 투자한 햄버거가 아깝다. 이리 돼가지고. 그럼 투자를 왜 했어요? 투자함으로서 결국 친구도 잃어버렸지요. 자기는 두산 응원한다고. 그러니까 누가 실패해요? 내가 실패잖아요. 맞잖아요.
친구 만난 이유가 뭐다? 내가 실패자인 것을 몰랐는데, 친구를 통해서 비로소 내가 세상은 내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이게 애초부터 말씀의 그물망을 몰랐고, 내 중심의 욕구에 욕망에 그물망으로, 세상을 짜깁기한 일방적인 환상과 착각 속에 살았던 나를 실패로 몰아넣게 한 하나님의 전략이었습니다.
요한복음7장37절 봅시다. 중간을 건너뛰었는데,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뭐가 나온다? 생수의 강이 나온다 했지요. 이게 세상을 악하다고 욕하시는 미워하시는 방법입니다. 미워! 미워! 미워! 이리 하는 게 미워하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은 말씀의 그물망입니다. 말씀의 그물망에 대해서 이 세상 안에 인간들은 해석을 잘했다? 못했다? 못했지요. 못하면서 그들은 절기를 지켰지요. 그럼 못한 게 뭐냐 하면, 절기 지키면 우리 유대에게 하나님께서 절기 지켰다고 잘했다고 박수치면서 복을 주겠지요. 그 해석이 잘된 해석이다? 못된 해석이다? 그게 잘못된 해석이에요. 왜냐하면 자기를 미워할 줄 모르고 자기 유대인을 사랑하면서 내가 나를 사랑한 것처럼 하나님도 사랑해 주겠지. 라고 잘못된 해석에 의해서 절기를 지킨 거예요.
그런데 제가 첫 째 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절기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의해서 심어준거라 했지요. 사랑과 미움을 심어준 거죠. 그 속성의 심어준 것이 이 세상의 절기라는 이름으로 말씀 망이 됐잖아요. 그 망을 누가 지키느냐, 유대인들은 해석도 제대로 못하면서 지켰다고 우기지만 그 못 지킨 해석을 누가 지킵니까? 예수님이 지켜버리지요. 예수님이 지키니까 지킨 결과가 뭡니까?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내 배에서 뭐가 나온다?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 딱 두 개의 결과가 같이 나란히 되고 말았지요. 그러면 한 쪽이 한 쪽을 미워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미워 죽겠어. 진짜 미워 죽는 거예요. 이게.
왜 밉냐 하면, 그 사람을 포섭해서 내 사람이 될 것 같으면 밉더라도 참고 설득해서 내 사람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이 제시한 것은 건너갈 수 없는 그런 차이를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십자가는 사람의 능력으로 못 믿는다 했어요. 누구도 그 십자가 개울가를 건널 수 없어요. 자기를 미워해야 되는데 자기를 미워할 수가 없어요. 왜?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그리고 평소에 내가 주인공이 됐기 때문에. 주인공 빼놓고 조연만 하는 드라마가 어디 있어요? 내가 주인공인데. 이 세상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나인데요.
데카르트가 이런 말 했잖아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세상 뭐있어? 내가 있음에 세상이 있지. 하나님이 뭐 있어? 내가 있음에 하나님이 의미가 있지. 내가 없는데 무슨 하나님의 의미가 있어. 이거거든요.
하나님이 뭐라 합니까? 니는 있지도 않을 때, 나는 의미 있었다. 이게 요한복음1장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없을 때도 먼저 빛과 생명이 먼저 나타났어요. 말씀이 우리보다 먼저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죽어도 괜찮아요. 왜? 우리를 만드신 말씀이 먼저 계시면 우리는 죽어도 상관없어요. 또 만들면 되잖아요. 화가가 그림 그렸다고 조졌다. 그러면 또 그리면 되잖아요. 주님을 믿읍시다. 간단한 문제에요. 나를 믿지 말고 주님을 믿읍시다. 죽으면 또 살려주면 되잖아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 오빠 나사로를 봐라. 분명히 증거를 보여줬잖아요.
믿으면 되는데 왜 교회에서 뭘 하려고 하느냐 이 말이죠. 자꾸 기도하려고 하고, 헌금하려고 하고, 전도하려고 하고, 선교하려고 하고, 봉사하려고 하고, 왜 자꾸 하느냐 말이죠. 안 하려고 하는데 자꾸 시키잖아요. 그러면 하세요. 그러면 하면 되는데 이게 무슨 나에게 의미될 게 아닌가. 그렇게 하지 마세요. 원래 우리한테 의미 없습니다. 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아무것도 안하면 아무것도 안 한 것이 영광이 될 거예요. 참, 오래 만에 복음 전한다. 아무것도 안한 것이 영광이 될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면서도 혼자 일은 다하더라.” “내가 한 거 아니거든. 주께서 내 안에서 하신 것이지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따라 오너라. 이것은 주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실 말이죠. 우리가 할 수 있는 재주는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요한복음7장 다시 봅시다. 오순절 날 유대인들은 실로암에다가 물을 퍼 담아요. 성전이 있는데 물이 안 나옵니다. 에스겔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물이 나오지요. 물 나오는 대목은 어제 제가 설교했습니다. 실로암이 여기 있어요. 다윗시대 때 여부스 족속의 성이 다윗성이 되고 모리아산은 따로 있어요. 있는데, 솔로몬시대에 도시가 확장되어서 전부다 예루살렘이 된 거예요.
그 중에 하나 포함된 게 뭐냐, 실로암 못이 포함됐어요. 실로암 못은 기혼 샘이라 해서 기혼 샘에서 히스기야 때 터널을 뚫어놓은 게 있어요. 있는데, 여기서 절기 때 되면 여기서 1Km정도밖에 안돼요. 여기서 물이 안 나오니까 오순절 날 성전에서 물이 나와야 되는데 물이 안 나오니까 여기다가 폼을 잡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벤트 행사를 하는 거예요. 장차 오실 새 성전은 이렇게 물이 나옵니다. 요게 제일 마지막 오순절이 끝나고 요 행사를 해요. 물을 부으면서 장차 메시아가 오게 되면 이 성전에서 물이 나올 겁니다. 지금 메시아가 안 왔으니까. 물이 나올 겁니다. 요 타이밍에 들어가 가지고 “물이 나오거든!” 하고 나선 거예요. 나를 믿는 자는 니 배에서 생수가 나오거든. 이리 된다 말이죠.
그럼 보세요. 에스겔에서는 성전에서 나오지요. 성전을 측량했지요. 그러면 성전은 물질입니까? 정신적이에요? 완전히 물질이지요. 어떤 물체지요. 물체로 벽돌 다듬어서 이렇게 건물 지어서 물이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의 망, 말씀의 망의 성취된 예수님의 해석은 뭡니까? 이런 물체가 아니고 이런 벽돌이 아니고 돌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이 돌은 46년 동안 지어도 이건 다 날아가고 이 성전을 몇 일만에 짓겠다고 했습니까?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한 거예요. 그러면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의 해석과 주님의 해석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개입이 생긴다 했지요. 한쪽은 모든 것은 물체인데, 물체가 어떻게 정신으로 이게 뛰어갈 수가 있습니까?
아까 제가 자연물 다음에 외라고 했지요. 자연물을 컵이라고 칩시다. 외는 바깥에 있지요. 창조하신 것은 자연물 안에 계시지 않고 바깥에서 바깥 안을 보시면 자연물의 그 실상이 드러난다 했습니다. 요것이 차이지요. 요 차이를 주님께서 미리 이 자연물 속에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보고도 믿지 못하는 거예요. 요게 성경 해석입니다. 요게 십자가의 해석이에요. 보고도 믿지를 못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눈, 코, 심지어 예수님의 손을 만지고 잠자리를 함께해도 예수님과 3년 동안 숙식을 같이해도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하는 고백밖에 없는 베드로의 한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그 때만 몰랐고 앞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았어요? 몰랐어요? 뒤에 몰랐으면 앞에 것도 몰랐어요.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몰라요. 그래서 46년 동안 성전 헐어라, 사흘 만에 짓겠다, 해도 그들은 무슨 말인지 몰랐다가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성령 받고 난 뒤에 아하! 그 말씀이 그 말씀이구나! 그래서 성경은 문자로 해석하는 게 아니고 성령 안에서 해석해야 된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해석해줘야 된다.
그 복음을 해석하려면 우리가 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나오면 안 되고 그 차이가 나오면 돼요. 그 차이. 우리는 때려죽여도 이 말씀 못 지킨다. 라고 차이만 제시하게 되면 성령 받은 사람은 “그러니까 십자가 때문이군요.” 하고 십자가만 자랑할 거고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러니까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지.” 최선의 노력이 다 나와 버려요. 그 다음부터는. 그래서 매일 최선의 노력을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벌써 어른들이 되어가지고 가득 차요. 최선의 노력이 내신 성적들이 95점, 90점 당당합니다. 시험 치면 전부다 좋은 대학 갈 사람들이 많아요. 앞에.
주께서는 그걸 보고 어떤 차이를 내느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또 차이를 하는데, 이 차이가 주님한테는 미움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차이. 왜 미움이 됐느냐 하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 같으면 열심히 해볼까 되는데, 도저히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해버려요.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하늘나라 어떻게 갑니까?” 하니까 다시 태어난다 했지요. 다시 태어난다 하니까 니고데모가 어려워가지고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면 엄마 뱃속에 들어가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까?” 자기가 자기를 해석한, 다시 태어남, 그게 전부였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으로 백번 태어나봤자 못 태어나고, 영에서 다시 태어나야 돼요.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하는 말이 “영이 뭡니까? 성령이 뭡니까?” 이미 차이 났지요.
인간은 답을 모르는 게 아니고 문제 만들조차도 몰라요. 나는 어떤 문제를 만들어야 하는 것조차도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준비 안 되었는데 답이 와버리니까 그 답이 답과 맞출 문제가 없다니까요. 우리한테는. 십자가가 왜 이 땅에 필요한지 모른다니까요. 헌금하라 하면 헌금하면 되고, 찬양하라 하면 찬양하면 되지,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 그 이유를 모른다니까요. 십자가가 꼭 필요할 문제로 본인이 다듬어지지 않아서 그래요.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말은 다른 해석을 자기한테 가미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해석이 뭐냐, 남은 죽어라, 나 혼자 살아남겠다. 제가 <매드맥스> 영화 나오기 전에 예를 들었잖아요. 몇 년 전부터. 그 전에. 사나이 하나가 마지막 나타나서 핵폭탄해서 지구는 멸망했다. 그러나 여기에 호주의 사막 한 가운데 사나이 하나가 난닝구 째 진거 입고 들어와 가지고 드디어 기름과 물을 찾기 위해서였다. 뭐냐 하면 그 <매드맥스> 개봉이전에 20년 전에 젊을 때 히트 친 영화거든요. 호주에서 촬영했는데. 그게 얼마 전에 개봉해서 히트 쳤잖아요. 자기 자신을 해석해야 되는데 같은 동료들끼리, 같은 죄수들끼리, 같은 컵 속에 있는 개미들끼리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들이 해석하면서 이런 해석합니다. 그냥 해석하면 밉지나 않지, 꼭 이런 해석을 해요. 정통적으로 역사적으로 합법적인 것만 골라서 정통적 개혁주의 신학이 들어있어요.
개혁주의 신학이 뭔데요? 개혁주의 공부하신 목사님. 개혁주의 신학이 뭐예요? 갑자기 질문해서 미안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뭐냐 하면, 오래된 사람이 오래되고 나중에 온 사람은 나중 되고. 이게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게 용납을 못 합니다. 화가 나요. 역사와 전통 자랑합니다. 천주교와 똑같아요. 역사와 전통.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에서 제일 쳐주는 교리가 뭐냐, 삼위일체에요. 무슨 개 뜯어 먹는 엉뚱한 소리를 해도 삼위일체를 인정하면 정통이 돼버려요. 삼위일체 방패 망으로 좋아. 어떤 짓을 해도 “저 삼위일체 믿습니다.” 하면 “예” “삼위일체 목사님을 우리가 치리 못하지요.” 이리 나와요. 무슨 짓을 해도 삼위일체를 믿으면.
그러면 교인들도 “목사님, 삼위일체 믿습니다.” 이러면 목사가 또 가만히 두지를 않아요. “삼위일체를 집사님 믿어요?” “예” “한 번 설명 해봐요.” 설명한다고요. “집에 가면 아버지, 회사가면 회장님, 교회가면 장로님, 삼위일체입니다.” “그건 양태론인데요.” 어떻게 설명해도 삼위일체 위반되게 되어있는 게 삼위일체입니다. “그럼 목사님이 설명해 보시지요.” “이것은 너무 신비롭기 때문에 믿음의 대상이지 설명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는 발 빼. 자기는 말 빼고 아마추어들 집사한테 묻는 것은 감히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하나의 간접적인 그런 발언이에요. 절대 그리되면 안돼요.
삼위일체는 없습니다. 삼위일체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예요. 삼위일체는 어디서 나왔는가, 예수님이 하나님 플러스 인간에게 나왔어요. 그것은 플라톤 철학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더하기 인간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부족했는데 하나님이 아들 보내가지고 인간을 신으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이 신되고 싶어 하는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내는 겁니다. 예수님은 뭐냐, 예수님은 인자입니다. 인자 안에는 뭐가 들어있는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들어있어요. 그러면 인간하고 인자와의 차이점이 뭡니까? 요게 차이에요. 건널 수 없는 차이입니다.
사람들은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복음16장에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어떤 사람은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할 때, 그 때 나온 베드로의 고백이 사람으로서는 나올 수 없는 고백이 나와요. 그게 뭐냐, 그게 차이에요. 건널 수 없는 개울, 개울 넘어보세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은 혈육이 아니고 누가 이야기했다? 내 아버지, 네 아버지 말고 내 아버지. 내 아버지가 너에게 그렇게 알려주었다. 누구 증거 하라고? 예수님 증거 하라고. 내 아버지가 너에게 입을 놀려서 그런 고백이 나오도록 했다. 따라서 이것은 니 실력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뭐냐, 그 차이를 계속 그 개울을 계속 유지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절기에 가서 물을 니 생수에서 나온다, 이 말은 바로 너희들이 절기를 지키면서 절기를 위반하고 있다는 겁니다. 모세의 법을 지키면서 모세의 법을 위반하고 있는 거예요.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모세의 법을 어기거든요.
공부했으니까 안다고 치고 복습해 봅시다. 그들이 왜 모세의 법을 유지하려 했을까요? 그것은 자기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지요. 자기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사랑할 것은 자기만 사랑하잖아요. 그러면 자기를 사랑하는 안목을 가지고 뭘 본다? 구약 성경 모세 율법을 봤지요. 보니까 보는 쪽 쪽 뭐가 나왔습니까? “주가 나를 사랑하네.” 이것만 보이겠지요. “내가 뭘 해도 나를 사랑하시네.” 이것만 보이겠지요. 이런 이야기를 내가 노골적으로 하기에는 미안해요. 왜냐 하면 지금 여러분들이 그대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자부하고 있으니까. 노래도 불러보잖아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그러니까 뭐든지 우리는 미움이라는 단어는 아예 빼버렸어요. 주께서 미워하시고, 미워하신 자를 미워하셨기에 죽여 버리고 죽은 우리를 살려냈는데, 미워 죽겠어! 하는 자를 사랑으로 살려내고, 우리보고 살려낸 게 아니고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 이름으로 살려냈는데, 우리는 내 이름으로 내 이름이 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이름으로 더 이상 인정하지 않습니다.
니 말고 주님 때문에 살려냈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그 다음에 뭐다?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10장13절. 사도행전2장21절. 요엘서2장.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늘이 캄캄한 별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구원을 얻으리라.
“니 인생 니 거 아니고 내거야.” 고린도전서6장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제는 너희 것이 아니고 이제는 내 것이다. 도대체 여러분들은 성경 구절을 어떤 대목을 봅니까? 나는 그런 대목이 잘 보이던데요. 하라, 하라, 대목보다도 그 대목이 잘 보이던데요.
하라, 하라, 대목이 보인다는 것은 자기한테 가능성을 주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옳지, 말씀대로 살면 예수 믿은 거고, 말씀대로 못 살면 예수 믿은 거 아니니까 내가 말씀대로 사는가를 테스트 해봐? 오! 되네. 온유가 되고 화평이 되네. 야~ 예수 믿는 거 맞구나! 장기 둘 때 몇 명이 둬요? 2명이 두지요. 바둑도 2명이 두지요. 몸 파는 아가씨들 화투 칠 때, 몇 명과 화투 칩니까? 그 사람들 아침에 손님 없을 때 몇 명과 화투를 쳐요? 혼자 쳐요. 영화에서 봤지요. 영화에서. 혼자 친다니까.
사람은 혼자 노는 게임이에요. 자기 인생이라는 것은. 아무리 옆 사람이 도와줘도 누가 잘 났어요? 엄마가 도와주고, 아빠가 도와주고, 잘 도와줘도 누가 장해서 이만큼 살아왔습니까? 내가 장해서. 내가 장해서 이만큼 살아왔어요. 그래서 나를 건드리면 화나는 거예요. 내 드라마고 내 삶이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뭡니까? 고만해라, 많이 먹었다. 니 혼자 치는 장기, 바둑 많이 쳤잖아. 이제는 나 혼자 할란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름을 바꿔요.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듯이. 내 이름으로 살지 않고 누구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살기 때문에 주님이 주시는 기름과 물과 공기와 햇빛이 전부다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가는 거예요. 취직하는 것도 주의 이름으로 취직했고, 쫓겨난 것도 주의 이름으로 쫓겨났고. 주의이름으로 모든 것이 일거수일투족 머리카락 자라는 것도 발걸음 세는 것도 전부다 참새가 떨어지는 것, 메르스(MERS) 걸리는 것도 전부 다 주의 이름으로 다 걸리기도 하고 안 걸리기도 하고 전부 주의 이름으로 와요.
그러니까 평소 돌아보면서 살 게 뭐냐 평생 돌아보면서, 내가 나 산 것은 주의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그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뭐를 얻으리라? 구원을 얻으리라. 말은 짧은데, 왜 그리 2시간 걸렸을까 그것 설명하는데. 내 이름이 없어요. 나중에 하나님께서 우리 붙들고요, 볼때기 쥐고 “너 아버지 뭐하시노?” 물을 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인데요.”이렇게. “우리 아버지 주님이에요.” 이렇게 툭 튀어나와야 돼요.
자, 그렇다면 7장에 건너뛰었는데 건너뛰기 전에 그 이야기 뭡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테스트하는 거예요. 니가 진짜 모세의 율법을 잘 지켰는지, 아니면 모세의 율법을 위반했는지 그렇게 하는 겁니다. 왜 모세의 율법을 들이댈까요? 오늘 성경한 게 공부한 게 다 얽혀져있어요. 유대인들은 자연물 외, 자연물 외를 뭐로 보느냐, 외를 율법 주신 분으로 알아요. 그 말 맞지요? 그렇지요. 율법 여호와가 줬잖아요. 그 말 맞잖아요. 문제가 뭐냐 하면 율법이 뭐냐 차이, 갈라짐이 아니고 율법이 Bridge over troubled...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된다. 율법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그러니까 선교단체에서 주로 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인간이 여기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뭐가 된다? Bridge over troubled 하나의 다리가 되어 건너갈 수 있다는 거예요. 이거 아니거든요. 이것은 다리가 끊어졌어요. 내가 건너가는 게 아니고 주께서 다리를 걸쳐주고, 걸쳐주기만 하면 안돼요. 아예 걸치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 안에 들어와야 돼요. 우리가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무뢰하게 우리의 허락도 없이 내 안에 다 이루었다! 가 내 안에 허락도 없이 침 놓듯이 들어와 버렸어요.
들어오니까 우리는 우리 내부가 차이가 나요. 나는 내 사랑하고 싶어요. 그런데 가끔은 종종 가끔은 내가 미워져요. 세상에 내가 나를 미워진다는데 이것은 월드컵 16강보다도 더 큰 기적입니다. 내가 왜 갑자기 미워요?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데. 나보다 더 귀한 존재가 없는데 내가 왜 미워져요? 주의 속성이 구원받았기 때문에 미워지는 거예요. 주께서 나를 미워해서 죽여 버리고 예수 이름으로 사랑해서 죽은 나를 건져가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절기 지킨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여호와께 영광 돌린다는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을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그 시대에 있었다면 우리도 그들과 한패인 것을 고백하고 그런 인간을 미워지도록 주신 그 성령이 사랑의 하나님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