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5강 [자아의 틈] 본문
음성5
녹취:오용익강의:이근호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5강 [자아의 틈]
다섯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제목은 “자아의 틈” 자아 사이에 틈이 있는데 자아의 틈이라고 언급을 한 것은 사사의 개인적인 성향이 이스라엘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이것은 희한한 일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는데 우리가 천국을 간다? 이것은 희한한 일입니다. 불교처럼 “네가 극락가려면 네가 알아서 도 닦아라.” 이것이 훨씬 이해가 쉽지요. “가만 있어. 내가 다 할게.” 이것은 기분은 좋다마는 문제는 믿어져야 되거든요. 기분은 되게 좋아요.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 나만 믿어. 내가 넣어줄게.” 굉장히 좋은 말인데 문제는 이게 믿어져야 되는데 믿음의 증거를 어떻게 우리가 확보하느냐, 그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했던 그 말에 주님이 신빙성을 가지게 하려면 주님은 말만 하실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천국 보내줄게. 내가 다 할게.”라는 그 내용이 실제 우리 삶속에 뭔가 남겨줘야 되잖아요. 남겨줄 때 ‘야, 주님께서 이것은 인생뿐만 아니고 마지막에 구원받는 것까지도 알아서 챙겨준다는 그런 신호를 우리한테 보내줬구나.’ 이렇게 믿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기대하고 있고 우리가 손에 쥐고 싶은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무심코 툭 던지는 말이 “성령이 임하면 알리라.”
“성령이 임하면 알리라?” 우리 동네에서 소통되는, 흔히 동네 마트에서 파는 것들 있잖아요. 대형마트에서 팔고, 우리가 구입할 수 있고, 우리가 구경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그런 증거를 우리한테 심어주시면 우리가 “믿기만 하라. 천국은 내가 알아서 다 해줄게.”라는 이것이 보증이 되는데 우리가 기대하는 어떤 증거물, 그런 것이 없고 그냥 “성령이 오게 되면 비로소 내 사랑 안에 거하고 너는 나를 알리라.”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니고데모가 갑자기 이해가 돼요.
니고데모가 메시아인 듯, 메시아 아닌, 메시아 같은 그런 메시아가 와 버렸다는 그 말이지요. 그래서 과연 메시아인지 어떤 분이 밤에 찾아왔거든요. “하나님 나라에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할 때에 무슨 처방을 내려줄지 알았지요. “식후 30분에 하루 세 번씩 드시면 됩니다.” 이런 것이든지, 27센티짜리 침을 맞는다든지, 오늘날 목사들이 하듯이 “주기도문을 천 번 외우라. 그러면 방언 터진다.” 이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새벽기도 연속으로 40일하기, 성경쓰기, 이런 것들 있잖아요.
인쇄가 잘 되어 있는데 왜 쓰는지 모르겠어요. 안 그러면 총 동원주일 정해서 두 명 데려오기, 십일조 내기, 11시 예배에 10시 반에 와서 미리 찬양하면서 예배준비하기, 통성기도하기, 집 사달라고 기도하기, 이런 것을 시키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주님 하시는 말씀이 “다시 태어나야 된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도 굉장히 얄밉게 하셔요. 처음부터 “성령으로 태어난다.” 그러면 그냥 집에 갈 건데, “다시 태어난다.”고 해서 ‘야, 다시 태어난다면 갈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을 주고 ‘그러면 다시 태어나는 방법도 다시 태어나면 된다고 한 그 분에게는 이미 준비된 것이 있겠지?’ 그 방법, ‘어떻게?’ 영어로 ‘HOW’지요.
오 목사님이 저보고 영어를 쓸 때는 단어만 쓰지 말고 문장으로 만들어서 하라고 했는데, 자꾸 비겁하게 단어만 툭툭 던지고. 그런데 주일 낮 설교 할 때는 ‘over there’ 라고 해서 단어가 두개가 들어갔답니다. 제대로 영어를 썼다는 거예요.
‘방법도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다시 태어난다는 그 결과를 주실 것이다.’ 해서 “어떻게 다시 태어납니까?” 하고 물으니까 “성령으로 태어난다.” 물 건너 간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육에서 난 것은 육이야. 못해.” 그러면 처음부터 못한다고 하든지 하지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건 이렇습니다. 제가 강의 중에 여러분의 반응을 보면서 제가 어려워하는 것이 뭐냐? ‘아, 이 점이 참 이해가 안 된다.’ 하는 것을 제가 느꼈는데요.
실재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지우겠습니다. 문제는 A라는 역사 속에서 어떻게 B로 합세하는 현상이 어떤 현상이냐, 이걸 설명하는데 여러분이 이해를 못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다시 설명하고 싶은데요, 이것이 사사기와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중립적인 만남은 없습니다. 서로 공격하고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육과 영은 충돌하게 되어 있지 좋은 게 좋은 게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했듯이 중립지역에서 곱게 만나버리면 자칫하면 이것이 권태가 된다니까요? 권태는 짜증스러워요. 천국에서 할 게 없으면 천국이 지옥 같아요. 차라리 시끄럽게 노는 지옥이 좋지 고요하게 “받으옵소서. 제 면류관을 받으시옵소서.” 할 게 없어요. 또 할게 없으니까 “제 면류관을 받으시옵소서.” 주님께서는 “아까 줬잖아. 아까 주지 않았어?” ‘아 맞다. 아까 줬지.’ “그러면 제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아까 노래 불렀잖아. 다른 레퍼토리 없어?” “그러면 랩으로 할까요?” “그것도 지겹다.”
재미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천국이. 그 재미없는 곳에 데려가 준다면 괴로운 겁니다. 중립적인 만남이 아닙니다. 충돌이 일어나는데, 여기서 폭력사태가 일어나고 십자가사건이 일어나지요. ‘라인홀드 니버’라는 신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쓴 책이 이런 것이 있어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을 썼습니다. 유명한 책인데, 그 말이 뭐냐? 인간은 도덕적이면서 그 인간들이 모이면 비도덕적이 되는가? 도대체 그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그 책에 해답이 없어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이 사람이 이 책을 쓴 것은 해답을 준 것이 아니고 “그러니 이 비도덕적 사회야, 이기적인 사회야! 제발 도덕을 회복하자.”라고 권유하는 책이지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그 사람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분명히 점잖은 사람인데 예비군복을 입혀 놓으면 완전히 달라지잖아요. 휘파람 휙휙 불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 점잖은 사람 되고. 왜 그런가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이유를 모를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제목이 바뀌었어요. ‘비도덕적인간과 도덕적 사회’ 이 말이 맞아요. 왜냐하면, 이 사회라는 것은 중립적이고 차가운 사회이기 때문에. 개인의 성향, 개성을 용납하지 않고 굉장히 도덕적이에요. 그래서 신입사원들이 회사에 취직하고서 제일 힘들어하는 것은 까불 수가 없다는 거예요. 까불이, 까불이, 까불 수가 없어요. 그렇게 말 안 듣던 그 인간도 회사 들어가면 갑자기 행동이 달라지고 처신이 달라져요. 거기에 맞춰야 되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신입사원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자신의 돈, 소득을 벌어들이려고 갔는데 막상 가보니 조직이 너무나 우상적이라는 거예요. 절대적이라는 것, 그 앞에서 자기가 너무나 작아졌다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는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6개월 지나면 앞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치킨을 굽나 어쩌나, 그걸 고민하게 됩니다. 더럽고 숨이 막혀서 회사 못 다니겠다. 그 정도로 이 사회는 굉장히 도덕적 사회입니다.
문제는 혼자 있으면 갑자기 개 되지요. 비도덕적 인간이 되는 거예요. 무의식이 작용하니까. 이 사회는 상당히 중립성을 유지하고 있어요. 사법적이고 중립적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유지하고 있는데 사사기에서 사사가 보여주는 것은 자아에 틈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아에 틈이 생겨버리면 이 틈에서 나오는 그 힘으로 말미암아, 성신의 힘이지요, 그 힘으로 말미암아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아주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따라서 비도덕적 인간이 되어야 해요. 비도덕적 인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사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사랑의 체제로부터 탈출해서 벗어나야 돼요. 사랑의 체제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뭐냐 하면, 사랑하지도 말고 사랑 받지도 말라는 거예요. 무쏘의 뿔로 홀로 가라. 혼자 서라. 사랑하고 사랑 받고, 외로울 때 잠시 그렇게 하지만 사실 좀 더 들어가면 나 빼놓고 다 귀찮아요. 심지어 나이 많으면 자기도 귀찮아요. 자기 자신도 귀찮거든요. 장로님, 안 그렇습니까? 본인이 본인에게 좀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실례의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사실은 누구에게나 다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을 기대하다가 원하는 사랑이 안 오게 되면, 짜증이 나잖아요. 그러면 어떤 대비책이 있느냐? 차라리 사랑 안하고 사랑 안 받기. 안하고 안 받기. 그거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생은 영원한 사춘기에요. 전부 다 자폐증 환자입니다. 자기한테 갇혀 있는 즐거움, 나 혼자 책을 읽고 나 혼자 노래하고 나 혼자 밥을 먹고 울고불고, 그것이 인생이에요. 그것이 전부에요. 혼자서 TV보고, 혼자서 영화보고, 최고 편해요. 제일 편해요.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제가 몇 시간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뭐라고 했던가요? 우리가 바르게 사는 것은 이게 부자연스럽고 이것은 우리 본모습과 달리 억지스럽다고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폐증 환자기 때문에, 사춘기기 때문에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그것이 자기한테 가장 맞고요, 가장 자연스러워요. 그게 바로 그 당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더라.” 딱 들어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누구냐 하면, 사사되기 전의 그 사사에 해당돼요. 사사도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물론 남을 위해서 살지 않는 그것은 기본이고요. 그런데 이런 사사에게 주님의 신이 찾아오고 하나님이 찾아와 버리면 그 때부터 본인은 그냥 남들처럼, 자폐증 환자처럼 자기만을 위해서 살고 싶은데 남을 위해서 살지도 아니하고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도 살 수 없는 그런 난처한 궁지에 하나님이 빠트립니다. “하나님, 좀 살던 대로 살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주일 오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자기 본토 아비 집에서 불러냈다고 했잖아요. 불러내서는 여러 가지 기적도 일으키고 그랬는데 잘 따져보세요. 날 가만 두는 게 좋습니까, 주님이 찾아오는 것이 좋아요. 그냥 날 좀 내버려 두라는 겁니다. 살던 대로. 지옥을 가든 천국을 가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만 놔두면 돼요.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임신했던 마리아. 요새 말로 약혼하고 별일 없이 그 다음 순서로 결혼하는 그것이 마리아의 행복이겠습니까, 아니면 덜렁 임신하는 그것이 행복이겠습니까? 마리아 죽었어요. 마리아는 죽은 거예요. 인생 완전히 끝장났어요. 착하게 잘 일하던 구미공단의 여공 하나 임신시켜서 뭐할 겁니까? 그때는 구미공단 같은 것 없었지만 하여간 보통 사람들인데 임신해서 뭐할 건데요?
유명한 재벌 집 딸도 아니고, 땅콩이나 집어던지는 기업의 부회장도 아닌데, 그냥 평범하게 사는데 임신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냥 살던 대로, 사춘기로, 자폐증으로 그냥 살면 안 됩니까? “사랑받는 것도 싫어. 사랑 주는 것도 싫어. 그냥 나만 사랑할래.” 그냥 나만 사랑하는 것도 주께서 가만두지 않고 찾아오시는 사람, 이름은 사사, 그들이 사사입니다. 사사의 내부가 갈라졌어요. 그 자아에 틈이 생겼습니다. 그 틈에서 나오는 그 힘이 놀랍게도 자기뿐만 아니고 주변에 구원의 영향력을 제공하게 되는 겁니다.
원래 인간은 내 일은 나에게만 영향을 주게 되어 있지 남에게, 외부에 영향을 안주게 되어있는데 이상스럽게 사사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사가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분열되고 찌그러진, 째져버린 그런 경우를 겪으면서 그 효과는 남들이 보는 일들이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입다에요. 삼손도 마찬가지고. 기드온도 마찬가지고요. 사사기 6장을 보겠습니다. 사사기 6장 22절입니다.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으니까 이제 내 인생 끝났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하면, 어떤 특정인에게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사자가 등장하게 되면, 그 사람의 내부질서, 중립을 유지하는 내부질서가 바깥 외부질서로 확산되는 하나의 알맹이, 종자로서 사용이 되는 겁니다. 상당히 어려운 말이지요. 쉽게 하기 위해서 다니엘서 5장의 예를 들겠습니다. 바벨론의 벨사살 왕 시대인데 손가락이 왕 앞에 나타났어요. 손가락, 이것은 별로 좋지 않는 용어지만 손모가지가 나타났어요. 손모가지로 하고 싶은데 참는 거예요. 점잖은 말로 해서 손이 나와서 글씨를 썼어요.
그것은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쓴 겁니다. 그럴 때 왕이 술이 확 깨면서 “이게 대체 무슨 뜻인지를 이야기해 달라.”라고 했습니다. 그 때 다니엘이 하는 말, “제가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메네’가 두 번 있어요. “끝났다. 끝났다. 부족하다(데겔) 그리고(우) 바사나라.” 살을 붙인다면 “당신의 나라는 부족해서 주께서 끝을 내시고 당신의 이 바벨론 나라를 메데 바사나라로 넘기기로 이미 작심을 했습니다.”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은 뭐냐? 그렇게 풀이하는 다니엘 자체가 이미 세상의 끝을 지니고 있는 내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다니엘의 내부질서에요. 내부질서가 이제 다니엘이 죽고 난 뒤에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 그것이 인류의 마지막 운명이 그 질서의 법칙에 의해서 결정 나버립니다. 이상하잖아요? 한 사람의 심리적인 성향이 바깥에 있는 우주와 운명을 확정짓는다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성격의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에게 일단 누가 찾아왔지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오신 거예요.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오게 될 때에 기드온의 경우에는 본인이 지금까지 생각했고 또 앞일을 생각하는 미래의 계획은 다 찌그러지고 포기된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알다시피 하나님을 만나면 더 이상 살지 못한다는 것,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만나면 내가 죽는다고 그렇게들 알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 같으면 ‘그렇게 무서울 것 같으면 말 좀 듣지. 우상을 왜 섬겼어?’ 그런 생각이 있잖아요. 그런데 우상은 눈에 보이고 하나님은 눈에 안보이잖아요. 눈에 안 보이면 만만해요. 눈에 안보이면 만만하다고요.
집에 있을 때는 맘 놓고 시어머니 욕하지만 딩동, 하고 시어머니 찾아오면 ‘아이고, 나는 이제 죽었다.’ “언제 내려가실 건데요?” “아예 살려고 왔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어머니 당신의 생각이고 며느리의 자폐적인 사춘기는 깨져버리고 완전히 혼선이 일어나버린 겁니다. 다 깨진 거예요. “하나님은 하늘나라에 그냥 사시지 왜 소박하고 겸손하게 사는 인간세계까지 침범해서 무슨 일을 벌이시려고 나 같은 이 미천한 것에게까지 찾아오셨습니까?”라고 사사기 6장의 기드온에게 찾아올 때 기드온이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사사기 6장 15절에 보면,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제가 보잘 것이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하지요. 이 보잘 것이 없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 굉장히 겸손해 보입니까? 그게 아니고 “제발 그냥 가세요, 그냥!” 그런 뜻이에요. “저는 나름대로 제 인생의 설계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냥 똑똑하고 믿음 좋은 사람들에게 가시고 제발 주님은 거창하게 저에게 좀 찾아오지 마세요. 안 그대로 내 몸 하나도 간수가 안 되는데 어른까지 모시려 하니 괴롭습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저는 삼위일체 믿는 사람 보면 참 대견하다고 봐요. 시어머니 한 분도 모시기 힘든데 성부, 성자, 성령, 시어머니 세분을 세트로 모시려고 하니까 이것은 보통 힘든 게 아니잖아요. 성부 섬기면 성자, 성령이 삐지고, 성자 섬기면 “네 눈에는 성부 하나님이 안보이나?” 이래서 삐지고 성령 섬기면 “이제 제일 막내를 마지막으로 섬기는구나.”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요? 원래 삼위일체라는 것이 없어요. 괜히 사람들 꾀이려고 신학자들이 만든 건데 모든 삼위일체 개념들이 다 존재개념이에요.
인간존재의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인간의 질서체제를 더 확장시키는 것이 삼위일체라는 겁니다. 그 삼위일체에 뭐가 빠졌겠어요? 단절이 빠졌겠지요. 십자가가 빠져 있겠지요? 걸림돌 다 뺀 거예요. 왜? 그거 넣으면 온 국민이 신자가 안 되니까, 온 백성이 신자가 안 되니까 온 백성에게 세례주고 신자를 만들기 위해서 십자가의 단절을 다 빼버리고 “이 멘트에 동의하시면 신자입니다. 축하합니다. 합격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세분인 것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그 세분이 하나인 것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합격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문제 내고 자기 마음대로 합격시키고. 그런데 만약에 ‘아무래도 너무 쉽다.’ 싶어서 손들고 “저 신부님! 어떻게 3이 1이 됩니까?” “그것은 묻는 게 아닙니다.” 본인도 설명을 못해요. 설명이 안 되거든요. 3이면 3으로 몰아세우든지 1이면 1로 몰아세우든지, 3도 아닌 것이 1도 아닌 것이,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대나무인가?
왜 삼위일체를 그렇게 강조했느냐 하면, 삼위일체를 인정하는 그 단어, 그 기호집단을 유일한 정통집단으로 삼기 위해서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그 역사는 어떤 역사? 중립적이고 평화로운 역사, 질서가 갖추어진 역사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기증명, 하나님의 예정인 B층이 눈에 보이는 A층에, 역사 층, 표면층, 체제 층, 구조 층에 들어가게 되면 여기서 뭐가 일어납니까? 대 충돌이 일어나지요.
약간의 그 충돌을 일으켰던 사람이 있습니다. 루씨 집안사람, 루터에요. 루터는 말하기를,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인됩니다.”라고 십자가 이야기를 언급해버렸어요. 십자가이야기. 그러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루터야! 당신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그게 맞아?” “그래,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는다.” “그러면 교회의 능력은 십자가의 능력의 옆에 붙어야 해? 아니면 뒤나 앞에 있어야 돼? 어디에 있어야 돼?” 루터가 할 말이 없네요.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은 숨어 있는 하나님이고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천주교에서 하는 말이 “십자가로 나타난다면 그 나타난 공동체, 집단이 있을 것이 아니냐?” “있지요.” “그러면 그것은 교회냐, 교회 아니냐?” 루터가 “그거 교회네요.” “거봐. 우리도 교회잖아. 종교개혁 왜 했어? 쓸데없는 짓 했네. 뭐가 문젠데? 있는 교회에 십자가만 하나 첨가하면 되네. 옵션으로. 그러면 온전한 교회 되는데 뭐가 문젠데?”
지금 이 이야기가 꼭 십자가마을보고 하는 느낌이 드는데? 루터가 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은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다.” 그러니까 천주교가 하는 말이 “죄인이면 죄인으로 몰든지 의인이면 의인으로 몰든지 하나만 이야기해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의인이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의인이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죄인인데?” 루터가 입을 가만 다물고 있어요. 왜? 모르니까. 뭔가는 아닌데. 신부가 조롱이나 흔들어대는 그건 아닌데, 그건 분명히 아니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은 맞는데 막상 성경에서 뭘 내어놓아 보이니까 그 쪽에서는 “루터야! 성경의 내용이 그런 거였어?” 하고 궁금해 할 줄 알았는데 궁금해 하지 않고 역시 궁금해 하는 것은 “네가 어떤 소리를 했든지 그래서, 그래서 지금 있는 것이 교회란 말이야, 아니면 교회가 아니란 말이야?”
자꾸 묻는 관심사가 어디에 있어요? “지금 우리가 모인 교회가 교회입니까? 구원되는 단체가 맞습니까?” 그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틈새시장을 공략해서 칼빈이 등장했어요. 어떤 사람은 칼빈의 이름을 굳이 ‘깔뱅’이라고 하는데 하이고, 그냥 칼빈으로 쓰세요. 깔뱅이라고 프랑스말로 쓴다고 해서 별스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칼빈이 와서 하는 말이 “루터가 하는 말은 옳고 그 옳은 사람끼리 모인 사람만 거듭난 사람이고 거듭난 사람끼리 모인 것이 교회니까 여러분은 천주교에서 개종하세요.” 이렇게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내놓은 거예요.
이제는 선택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천주교를 하든지, 루터교로 하든지, 아니면 칼빈개혁주의로 하든지, 선택의 폭이 넓어졌는데 그 선택을 결정하는 요인은 옛날과 같아요. “야, 너도 교회 옮길래? 저쪽에 친구가 많은데?” “그냥 나는 안 옮길래.” 이거예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었습니다. 선택할 때도 육으로 하는 거예요. ‘우리 집안은 종교가 하나 되어야 평화롭다.’ 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평화로운 질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망치는 극단적인 파괴행위라 했지요? 질서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현재 있는 이 질서가 어떤 성질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도 무모하게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리고 빠져나와도 소용없습니다. 왜? 빠져나와봐야 질서 또 만들어요. 지방교회, 워치만니처럼. “우리는 거듭난 사람들의 집단이다.” 제가 이야기했지요. 12+0, 이게 12지 11+1 한다고 해서 그게 12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0이라는 이 부재, 보이지 않는 은혜가 이 12를 묶는 허리띠 역할을 해줘야 돼요. 이 허리띠 역할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지난 시간에 레위언약이라고 했습니다. 또는 모세언약이라고 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주무신다고 기억날 리가 있나요?
워치만니가 지은 책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를 언급하면서 열두 광주리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시고 남은 조각을 다 모으니까 이게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는 그 말이에요. 워치만니가 그걸 알 턱도 없고 그런 이야기를 한 적도 없지만 열두 광주리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열두 광주리는 1에서 나온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에서 나온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은 1이 아니고 숫자로는 0가 되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B층에서 오신 것이지 A층에 계신 분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 B층에서 오신 예수님이 열두 광주리,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는데 있어서 기존과 충돌과 폭력사태가 일어난 겁니다. 그 폭력 사태를 사도바울은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한 거예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폭력사태를 전한 겁니다. 이 세상은 평화롭고 중립적인 질서체제가 아니에요. 중립적인 질서체제가 되면 이것은 완전히 자폐증 환자가 되어버려요. 이것은 사춘기가 된다고요. “그냥 굳어진 질서 내에서 나는 놀 거야.”
그런데 기드온에 있어서 주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이 굳어진 체계에 허락도 없이 그냥 방문하신 겁니다. “네가 굳어진 그 체계를 내가 찢고 찢어진 쥐포처럼 틈을 만들어서 그 틈을 잡아서 외부로 확산시켜서 이스라엘을 이 압제에서 해방하는 힘, 에너지의 재료로 사용하겠다.”라고 일방적으로 침입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기드온에 대한 사적인 침입이 아니고 이스라엘에 대한 침입이에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공격입니다.
그 공격, 하나님의 전쟁, 그 여파로 이스라엘은 7년 동안 압제 당했는데 40년 동안 평화롭게 유지가 되었습니다. 평화롭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여러분이 아셔야 하는데 이 평화롭다는 말이 뭐냐? 다음에 얻어맞기 위해서 죄가 숙성돼야 돼요. 포도주가 맛있게 익듯이, 참외가 노랗게 익듯이 이게 숙성돼야 해요. 숙성되는 기간이 40년 동안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바깥에 있는 앞으로의 이스라엘의 일을 결정하는 요인으로서 새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사용한다는 겁니다.
다니엘 이야기를 다시 하면, 다니엘 자체가 “끝났다! 끝났다! 부족하다. 다음은 페르사에게 나라가 넘어갈 것입니다.”라고 했을 때 그 주변 사람들이 누굴 쳐다보겠습니까? “다니엘! 누구야 너! (7년 동안 군만두만 먹인, ‘영화 old boy에서’) 너는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다니엘 같으면 정체를 밝히지요. “나는 사망처리 된 사람입니다.” 호적이 없는데 새로 파견된 사람입니다. 마치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같아요. 나사로,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세상으로 살아났잖아요.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가 다시 살아났을 때 우리가 물어야 될 것은 뭐냐? “왜 천국에 살지 않고 이곳에 사십니까?”라고 물으면 뭐라고 하겠어요? “바로 내가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라고 할 거예요.
천국 간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이미 사망처리 된 자가 머무는 그곳이 천국입니다. 예수님마저도 사망처리 되지 아니하면 주가 될 수 없어요. 하나님의 아들은 되는데 만민의 주가 되지는 못합니다. 세상을 심판할 권한이 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이 땅에 와서 사망 처리된 분이지요. 사망처리 되어놓고 나중에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나서 마음 놓고, 유비 쿼터스, 마음 놓고 어디에도 출몰돼요.
“우리 집에 오세요.”라고 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원하는 곳에 그냥 본인이 나타나요. 꼭 <여고괴담>같아요. 팡, 팡, 팡, 이렇게 다가와요. 그냥 곱게 걷는 것이 아니고. 복도에서 곱게 걷는 것이 아니고 퉁, 퉁, 그렇게 걸어와요. 연속이 아니고 단절, 단절, 단절. 부활의 주님을 우리가 소지할 수 없습니다. 소지할 수 없고 그 대신 제자들은 자폐증에서 벗어납니다. 자폐증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더 이상 남을 위해서 살지 않을 뿐더러 더 섭섭한 이야기는 자기를 위해서도 살 수 없는, 참 슬픈 인생을 살아가요. 저와 여러분이 그런 인생을 살아가요. 여기서 한 마디를 해야 돼요. “믿습니까?” 쌍시옷을 넣어서.
쉽게 말해서 “주여, 저를 왜 건드리십니까? 그냥 남들처럼 자폐증환자가 되어서 살아가듯이 자기 재미에 살도록 그냥 놔두시지 왜 사랑할 줄도 모르고……, 이제 사랑받는 것도 귀찮아, 돈이 제일 좋아. 다 귀찮은데 그냥 놔두지 왜 저로 하여금 찾아오셔서 날 위해서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남 위해서 사는 그것도 안 되고. 그래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남 위해서 산다.’ 하는 사람은 전부 다 사기꾼인지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일은 없어요. 반드시 인간에게는 대가없는 행동, 대가없는 노동은 없기 마련이에요.
대가없는 노력, 대가없는 행동은 없습니다.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해마’라고 하는 이 두뇌의 기억조직 때문에 그래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고요? 바보입니까? 아이큐가 30이에요?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어떻게 왼손이 모르게 해요? 두뇌에 뇌량이 있어서 오른쪽이 하는 것을 왼쪽이 알고 왼쪽이 하는 것을 오른쪽이 알도록 브릿지로 다 연결되어 있는데.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한다면 이것은 참 좋지요. 범죄에 노출되기가 쉽지요. 오른손으로 훔치고 왼손으로 훔치고. 오른손으로 훔쳐놓고 “당신 도둑질을 했지?” 하면 “나의 왼손이 했는데? 나의 왼손이 한 거야. 내 책임이 아니야.”
인간은 자기만 챙기는 것, 이거 죽을 때까지 끝까지 갑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끝까지 가요. 인간은 자기만 사랑해요. 이 기억 때문에. 자기가 한 것, 꽃꽂이 한 것, 봉사한 것, 잊을 라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남한테 해코지 한 것은 잊어도 자기가 착한 일 한 것은 잊을 수가 없어요. 잊을 수가 없습니다. 헤어질 때 뭐라고 합니까? “네가 나에게 해 준 게 뭐 있나? 옷도 사주고 목걸이도 사줬잖아.” 자기가 행동한 것은 기억 못하고 자기가 해준 것만 기억해요.
그것은 해준 게 아니에요. 해주면서 뒤에 고무줄을 달아놓았어요. 해주고 다시 자기 쪽으로 회수합니다. 완전히 고래사냥이에요. 닐 낚시 돌리듯이 막 돌려서 자기 것으로 뽑아내는 거예요. 본전 없는 행동이 어디 있어요? 남지 않는 장사가 어디 있어요? 다 거짓말이에요. 다 남는 것 보고 장사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나인데 나를 위해서도 못살게 해버리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날 위해서도 못살고 그렇다고 남을 사랑하는 것도 이제는 귀찮아요. 사랑하는 것도 귀찮고 받는 것도 귀찮고 사랑도 안 돼.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가슴에 구멍 난 거지요. 뻥 뚫린 거지요. 부재자신고해야 됩니다.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꼭 이 땅에서 좀비 같아요. 날마다 다가오는 사건들이 낯설게 다가와요. 전에 나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했던 옛 버릇대로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데 내가 한 그 행동이 주의 영광을 돌리는 행동으로 되었을 때 남들이 “성령의 열매를 보여줘서 감사합니다. 축하합니다. 목사님 때문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하면 목사는 “왜 저를 이렇게 괴롭히십니까, 주여. 나도 좀 조용하게 살게 해주세요.” 이렇게 됩니다. “왜 저를 이렇게 괴롭히십니까? 이제 그만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했던 베드로의 고백처럼 성령 받은 사람은 다 그래요. 그렇지요? 다들 성령이 계셔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잖아요.
나를 가만두지 않고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강제로 이끄시는 그것, 바로 이 시대의 사사들이에요. 바로 B층에서 하나님의 자기증명을 위해서 우리를 도용하고 이용한 겁니다. 허락도 없이 내 속에 침투한 거예요. 이제는 내가 원하는 대로 가지 않을 때 그 길을 무슨 길이라 하는가? 세 글자로 ‘좁은 길’이라고 합니다. 좁은 길은 좁은 길이 좁은 길이 아니고, 고난의 길 혹은 순교의 길이 좁은 길이 아니고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그 좁은 길입니다. 부동산이 15만평, 아파트가 한 200평 될 때 그게 좁은 길입니다. 차는 한 세대, 아우디가 있고 BMW가 있고 벤츠가 있어서 자식들한테 하나씩 나눠주는 그것, 되게 좁은 길이에요. 그거 유지한다고 힘들거든요.
정리합시다. 좁은 길이란 내가 원치 않는 쪽으로 이끌림을 당할 때 그게 생명과 연결되어 있느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순교한다고 나대지 마세요. 그거 넓은 길입니다. 이디오피아 톰스가 울든 말든 가만 놔두세요. 가만 놔두면 돼요. 그거 흉내 내지 마세요. 아프가니스탄 갔다가 탈레반한테 잡혀서 벌금내지 말고 그냥 여러분 사시는 곳이 사사기 때문에 여러분이 사시는 곳이 땅 끝이고 그게 땅 끝 마을이에요. 민들레 홀씨 되어 날아간 그곳이 바로 그곳이에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주께서 부활해서 찾아왔거든요.
처음에는 몰랐어요. 너무나 낯선 인물이었는데 저녁때쯤 식사하면서 보니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네!” 하는 순간 예수님이 홀연히 사라졌어요. 그 사람들 완전히 바보 되었어요. 그래서 왔던 길로 도로 갔습니다. 이스라엘 지도가 이렇습니다. 여기 지중해가 있고, 북쪽의 헐몬산에서 비가 내리면 갈릴리 호수에 모였다가 죽음의 바다인 사해까지 내려갑니다. 옆에서 이스라엘을 보게 되면 사해는 지표보다 200미터가 더 낮습니다. 해발이 높은 산지 쪽의 서늘한 곳에 주요 마을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해발 630미터의 위치에 있어요. 주변에 세겜도 있고 실로도 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이 올라올 때는 힘들게 헉헉거리면서 올라오는 거예요. 위에서는 화살을 쏘기만 하면 돼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가면 엠마오가 있고 북동방향으로 가면 여리고고 갈릴리 호수에서 서남쪽으로 한 20킬로 지점에는 다볼산,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있다는 모리아산, 세겜에서 북쪽으로 있는 그리심산과 더 위쪽에 에발산이 있고, 갈릴리 호수 남쪽의 넓은 지역인 데가볼리, 갈릴리 호수 서쪽의 고지마을 가나, 여기에 유일한 평지가 있는데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90킬로 지점에 이스르엘평지가 있어요. 이 평지의 서남쪽 끝에 최후의 전쟁의 상징인 므깃도가 여기 있고 홍해는 여기에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북서쪽 약 56킬로 지점의 지중해 항구마을 욥바가 있고 시돈은 레바논 남쪽 여기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위쪽이 베냐민지파의 영역인데 베델을 기준으로 해서 그 위가 에브라임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 5킬로미터인데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6킬로쯤 더 가면 기브아라는 곳이 나옵니다. 물론 안 가봤습니다. 에브라임 지역에 있는 한 레위인이 베들레헴에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 지역은 이미 여부스 족속이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이방민족에게 대접받기 싫다.” 해서 기브아로 가게 됩니다. 모세율법에 의해서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그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기브아에서 대접받겠다고 올라갔다가 동성애 먹잇감을 찾고 있던 불량배들에게 걸려들었습니다. 묵고 있던 집의 노인이 “우리 집에 딸들이 있고 이 레위인의 첩도 있어서 이들을 내어줄테니 이 레위인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 첩만 내주게 되어서 봉변당하고 죽어버렸지요.
여러분이 보기에 그 일이 참 악하게 보이지요. 악한 것이 맞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악의 전부가 아니라고 했지요? 그것은 상대적인 악이고 그 상대적인 악에서 잘못된 정의감이 생기지요. 이 정의감 때문에 연합군이 결성되고 이렇게 결성된 연합군이 첫 번째 전쟁에서 지고 두 번째 전쟁에서도 지고 말았어요. 세 번째 전쟁에서야 승리하게 되는데 그 전쟁에서 “과연 형제를 칠까요, 말까요?” 하고 묻게 돼요. 이 말은 뭐냐? 이 정의가 문제가 있는 정의감이라는 말이지요. 상대적인 윤리거든요. “우리는 그런 짓 안하는데 우리나라에 이런 악한 자가 있다니!”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제가 강의하면서 뭐라고 했던가요? 진짜 악한 것은 누구를 만나야 알게 되는 겁니까? 하나님 앞에 설 때 진짜 악이 드러나잖아요. 하나님 앞에 서면서 하나님에게 장악되어야 할 내가 그게 싫어서 장악된 나 말고 따로 밖에 나가서 주님 앞에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멋지게 사명감으로 잘 쓰일까를 관찰하는 그 모습이 그게 절대적인 악의 모습이에요. 주께서 다루면 되는데 “주여, 제가 목사잖아요. 이렇게 나오시면 안 되지요.” 주님이 목사고 뭐고 하청 준 적이 없어요. 그렇잖아요. 요한복음 6장에 보세요. 주님께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린다(6:39)고 우리 주님이 그렇게 약속을 했으면 그냥 믿어야지 “내가 나서지 않으면 어린양을 잃을 것이다.”라고. 네가 뭔데?
문방구 점원이 주인보다 걱정을 더 해. 이것은 수상한 겁니다. 너무 긴장돼 있어요. 본인이 왜 그렇게 어깨에 힘주고 왜 그렇게 힘들어해요? 이것은 사망처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자가 아니기 때문에.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 영으로 오기 때문에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해놓고 다시 이 어두운 세상에 재파견 되는 식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되거든요.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지요. 믿습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목사님, 믿고 싶은데요. 증거를 주옵소서. 내가 믿을만한 증거를 주세요.” 이렇게 나올 거예요. 그 증거 십분 쉬고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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