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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4강 [이유 없는 구원]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15여름(사시기)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4강 [이유 없는 구원]

정인순 2015. 8. 8. 13:17

 

음성4

 

녹취:오용익

강의:이근호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4강 [이유 없는 구원]

 

이번 시간 제목은 “이유 없는 구원”입니다. 세 번째 시간 끝에 한 것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자기증명은 하나님 스스로 자기를 예정하는 겁니다. “나는 나다. 알파요 오메가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내 이름을 묻지 말라.” 이렇게 이야기하셨거든요. 그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약속을 던져 놓고 그것을 자기완성 쪽으로 회수하면서 거기에 동반해서 이 세상 운명은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은, 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쪽에서 엔진이 가동되게 되면 그 변화에 따라서 우리가 같이 변한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따로 실시하시는 그 변화는 무엇이지?”라고 묻고 싶지요.

 

이것이 우리의 버릇이에요. 그러면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야 너! 네가 변화야. 자꾸 찾지 마.” ‘주님이 보고 싶어.’ 주님이 보고 싶다. 주님이 보고 싶다는 말에서 문제점은 뭐냐 하면, 보고 싶다는 그것이 문제에요. “♬보고 싶다.” (왜 자꾸 무의식이 나오는지…….) 주님을 봐서 뭐할 건데? 주님이 보고 싶다고 할 때 주님에 대한 대처는 뭐냐? 봐도 모른다는 거예요. 차라리 소경이 “소경이어서 나는 아무것도 보는 것이 없습니다.” 할 때 이 사람이 소경에서 벗어난 사람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네 눈 안에서 벗어나라는 말이에요. 네가 응시하는 그 시선에서 벗어나라는 겁니다. 어디에 감추어져 있다고? 감추어져 있다는 그 생각도 잘못된 말이에요. 감추어져 있다는 말은, ‘지금까지는 이 만큼을 아는데 범위를 넓히면 보다 많은 정보가 확보되고 그렇게 되면 구원에 대해서 보다 많이 알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현실적 버릇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뭘 안다고 해서 더 아는 것이 아니고 알면 알수록 우리의 눈은 더 침침해져요. 마치 저 카메라의 초점처럼. 늘 강의 때마다 사용하던 저 카메라가 지금 고장 났다는 거예요. 고쳐야 되는데. 초점이 흐려서 침침해요. 카메라가 노안이 들었어요.

 

가까이 가면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보고 있는 내가 혼란스러워요. 정작 주님이 보게 되면 불쾌 성을 느끼고 “에이, 내가 못 볼 걸 봤네. 저리 가세요.” 하고 밀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양과 염소를 가름하는 중요한 심판의 대목에서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소자니까 이 소자는 항상 무시당하는 대상이 되겠지요. “이 형제에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다.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다.”

 

그런데 정작 소자가 하는 말이, “제가 언제요?” 경상도 말로 “어데예? 언제 제가 그렇게 했는데요.” 본인이 몰라요. 왜 본인이 모르는가? 본인은 자의식이 날라 가버렸기 때문에 주께서 하신 일에 참여할 뿐이지 그것을 따로 떼 내서 내 것이라고 가지고 올 나의 자리가 따로 구비되지 않았거든요. 내 것 만드는 나의 영역, 나의 구역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게 되면 주님의 예정의 CCTV가 다 보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예정된 거야. 그것도 예정된 거야.’ 그렇게 되지요.

 

강도가 강도질을 해야 되는 것은 주께서 그렇게 해서 구원되기 위한 주님의 자기증명입니다. 강도가 누굴 증명한다고요? 주님을 증명하지요. 그래서 강도를 통해서 주님이 증명됩니다. 이 공식, 강도나 세리나 창녀를 통해서 ‘주님’이 증명됩니다. 그러나 강도나 세리나 창기를 통해서 절대로 하나님은 증명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라는 이것은 백 프로 가짜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느냐? 인간이 자기존재 증명한다고 끌어당겨서 만든 하나의 개념이라니까.

 

“아, 이 자연은 하나님 외에 누가 만들었겠어?” 우리가 이렇게 중얼거릴 때 만약에 주님이 나타나서 “그래서 어쩌라고?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누가 너보고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릴 하라고 했어?” 너는 누가 만들었는지를 몰라요. 우리가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소리를 하려면 우리가 만들어지는데 서 있으면 안 되고 만들어진 곳에서는 옷만 벗어놓고 바깥에 나와서 ‘누가 만들었지?’ 이렇게 살펴야 되거든요. 그렇게 살필 수 있는 자리를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살펴놓고 “하늘의 별을 하나님이 만들었지 누가 만들었겠어?” 하면 그것이 바로 욥을 그렇게도 정신적으로 구박했던 욥의 세친구의 공통점입니다.

 

“욥아,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욥은 “네가 아는 하나님은 나도 아는데 왠지 낯설다.” 딱 그거예요. “제가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는데 왜 하나님은 나를 버리도록 이렇게 종용하십니까?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욥이 철이 나도 보통 철난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시도를 하는데 왜 주님은 저를 멀리 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십니까? 주님이 저를 멀리 해서 뭘 얻고자 하는 겁니까? 왜 주님은 저를 반기지 않는 거예요? 왜 주님은 저를 자꾸 밀어내는 겁니까?”

 

그러니까 친구들이 하는 말이, “네가 미쳤구나. 네가 귀신이 들렸다. 하나님은 누구나 가까이 하기를 원하시는 거야.” 하고 우리가 다 아는 상식을 이야기하지요. 욥이 뭐라고 합니까? 욥이 갈수록 말이 길어져요. “그 정도는 나도 아는데 너희들이 모르는, 너희들의 말로는 절대로 표현되지 않는 그 무엇이 현재 나에게 도달되었어.” 그러니까 나는 너희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부르짖음이에요. 신음소리에요. 먼 산의 부엉이가 “부엉, 부엉!” 하듯이 하나의 신음소리, 탄식소리, 부르짖음이라니까요? 그냥 헐떡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도가 성도로서 구원 받는 것은 내가 주님을 붙잡아서가 아니라 주님이 자기존재증명에 필요해서 우리를 놓치지 않는, 단지 주님의 예정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예정된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예정된 거예요. 그래서 욥은 바로 ‘하나님’에서 무엇으로 바뀌는가?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게 됩니다. 뭐라고 바뀌는가? 나에게 고난을 임의로 주신 그 하나님이 종전의 친구들이 알고 있던 그 하나님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하나님으로 새롭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선지자에요.

 

욥이 고난 받는 이유가 뭡니까? 이유가 뭐지요? 없지요. 그래서 이번시간 제목이 “이유 없는 구원”이에요. 욥은 옛날 기존의 사고방식대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이유, 나를 괴롭히는 이유, 종기 나게 한 이유, 열 명의 자식 다 죽이고 재산 다 날라 가는 그 이유가 뭔지를 정확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만나면 따질 거야. 내가 이 몸 떠나고 난 뒤에 하늘나라에서 구주를 만나면 내가 멱살 쥐고 따질 거야.”라고 했는데 그 따지는 손모가지가 날라 갔어요. 나중에 주님이 직접 등장할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염소 새끼 낳을 때 네가 거기 있었나?”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기원, 원천, 오리진, 근원, 그 때에 네가 있었어, 없었어? 없었지?” 그렇다면 지금은 그 근원의 반복이에요. 그 시초의 반복적용입니다. “그러니까 네 인생에 대해서 네가 안다고 나불대지 마. 나는 너에게 근원을 집어넣고 그 근원과 더불어서 너의 끝도 집어넣은 거”예요. 이게 바로 B의 세계, 다시 말해서 주님의 예정하신 세계입니다. 이만큼 여러분이 알았다 치고 이번 시간에는 이 B의 세계(실재)를 지워서 없앨 겁니다. 이 B의 세계를 없애버리고 아까 말한, A1에서 A2, A3……An으로 가는 무한, 극한의 세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언젠가는 우리가 잘사는 때가 오겠지.’라고 ‘고도’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오지도 않을 그 누구를 기다립니다.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오지 않아도 내가 기다린다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내가 ‘올 것’이라고 믿는 것이 중요하지 실제로 오는 것은 안 중요해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제일 화가 났다는 것은 그들이 그냥 기다려야 되는데 기다림을 째고 미리 왔다는 것이 제일 화가 나는 겁니다. 정말 이것은 유머에요. 주님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유머가 그겁니다. 출장 간 남편이 일주일 뒤에 온다고 하는데 미리 왔을 때, 이거 뭐예요? 왜 준비도 안 되었는데 왔습니까? “내가 준비하고 있는 네 허락을 왜 맡아야 되는데?” “그래야 내 존재증명이 되잖아요. 내가 그만큼 잘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네가 ‘신’ 해라. 네가 천지창조고 뭐고 다 알아서 네가 해라.”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할 예정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세계는 ‘유’의 세계입니다. 유에서 질서를 뽑아내서 그 질서로 새로운 유를 뽑아내는 거예요. 이게 바로 과학입니다. 과학에는 두 가지가 있지요.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있어요. 요새 인문학강좌가 열풍을 일으키고 있어요. 그동안 얼마나 돈이 안 되었던가요? 설움을 받고 있다가 “우리한테도 돈 좀 줘.” 이렇게 하는데 인문학은 다 사기입니다. 인문학의 목표가 뭐냐? 해피니스, 행복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서로 소통하자.” 이거 빼면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서로가 서로의 권위를 인정하고 타인의 가치를 존중해주고, 그러며 행복하다는 거예요.

 

저는 멱살 쥐고 싶어요. “남의 가치를 존중하면 네가 행복하다고?” “행복하지요.” “남 잘되고 네가 못되는 식으로도 너는 행복 할래?” “그것은 아니고.” “그러면 다 같이 잘사는 식으로 행복 할래?” “그래.” 그러면 다 같이 잘사는 그것은 지루함인가요, 그게 행복인가요? 그것은 지루함이에요. 그 지루함이 싫어서 천국 안가겠다는 사람도 있어요. 천국가면 당구장 없다고 천국 안가겠다는 거예요. 당구장도 없고 골프장도 없고 그래서 너무 지루하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동질성이에요. 여기 이 지상에 있는 나를 계속 이어서 무한대에 이르면 아마 그것이 천국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천국은 오면 안돼요. 무조건 우리가 천국을 기다려야 돼요. 계속해서 기다려야 돼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이렇게 기다리는데 있어서 미래가 남잖아요. 미래는 이렇게 점선으로 되어 있는데 그 미래를 알기 위해서 A와 A1 사이에 원인과 결과를 놓고 여기서 어떤 질서의 원칙을 뽑아내요. 질서의 원칙을 뽑아내서 그 다음에 이것을 적용시킵니다. “이렇게 했더니 이렇게 되더라.” 예를 들어 “30분 빨리 걷기, 그리고 식사량을 반으로 줄이기. 그러면 반드시 한 달에서 두 달 만에 4-5킬로그램의 몸무게가 빠지게 되어 있다.”는 원칙을 뽑아내는 거예요. 저를 보세요. 제가 지금 빠졌잖아요. 제가 증인이잖아요. 이게 과학입니다. 이게 나의 존재증명이에요. 그냥 이렇게 하면 좀 미안하잖아요. 여기에 ‘주의 은혜로’를 갖다 붙여요. 너무 미안하니까 기껏 자기 것 챙겨놓고 ‘주의 은혜로’를 붙이는 거예요.

 

주의 은혜라는 것이 기준이 뭐냐 하면, 내가 원인으로 기대했던 대로 만족스런 결과가 나왔을 때만 이것을 은혜로 연결시키는 겁니다. 내가 기대를 했는데 딱 그대로 될 때, ‘내가 저 사람에게 보험 상품 하나 팔겠다.’고 했는데 딱 성사될 때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겁니다. 요새 은혜로 사는 사람, 은혜를 직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지요. 이렇게 한 번 성공했잖아요. 그러면 이 원칙을 그 다음의 원칙으로 적용시킵니다.

 

자,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이유가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유가 뭐냐?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나 잘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나 잘 되라고 점차 나를 천국으로, 구원의 길로, 선한 길로 인도한다면 내가 삐걱거리고 잘 못되는 경우, 졸음운전 하다가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는 이유가 있는 거예요. ‘나에게 이런 징계를 내리신 이유는 회개하라는 뜻이다.’ 라는 이유를 여기서 뽑아내요. 이거 사기입니다. 사기당해서 수십 년 동안 삥땅 뜯긴 사람들이에요.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가계에 저주가 흐른다니, 그런 소리들 해가면서.

 

“당신의 인생이 그렇게 꼬인 것은 문제가 당신한테 있습니다. 어서 주 앞에 돌아와 회개하세요. ♬돌아와~ 돌아와~,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주여, 아버지여! 집 사 주세요, 집 사 주세요!” 쌍둥이 애들이 할머니 따라서 통성기도 하는 것처럼. 정답 말씀드리겠습니다. 욥처럼 이유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놀랍게도 우리하고 거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없는 존재기 때문에.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아요. 부재의 존재에요.

 

왜 존재하지 않느냐 하면, 이것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참 난해한 것인데 할 수 없어요. 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는데 할 수 없어요. ‘나’는 두 가지에요. 인식적인 것과 존재적인 것, 두 가지로 생각하거든요. 인식이란, 내가 어떻게 뭘 아느냐? 무엇을 안다. 주님 앞에서는 이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안다’고 하니 이것이 소경이 되는 겁니다. “보고 믿겠다.” 도마지요. 인간은 알고, 보고, 그 다음에 내 존재로 가져옵니다. 존재로 가져오면서 ‘누가 있다.’가 문제가 아니고 그 있음에 대해서 ‘누가 있다.’보다 ‘그 있음을 내가 안다.’가 중요해져요. 나로 와버리거든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계십니까? 그러면 저에게 보여주세요. 어? 하나님이 계시네.” 그러면 그 다음에 뭡니까? “나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나가 된다.” 이게 목적이에요. “무시하지 말라. 나는 하나님을 알고 믿는 그 나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순환구조가요, 목적이 이미 정해져 있어요. 누구로부터 나옵니까? 나를 위해서 한 거지요. 네 번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아래의 층, B층을 없앴다고 했지요. 없애고 위의 층, A층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응용문제 하나 나갑니다. 요한계시록에 짐승이 나오거든요. 요한계시록에 짐승이 나오는데 “짐승이 무엇입니까?”라고 교인들이 물어요. 요한계시록에 짐승이 나오니까, 짐승이 666 숫자로 표현되기도 하고, 기적도 일으키면서 짐승이 적그리스도활동을 하니까 어떤 무식한 사람이 봐도 짐승은 무조건 나쁜 쪽에 속하거든요. 나쁜 쪽에 속하니까 나쁜 쪽은 피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이지요. 피하려면 짐승이 누군지를 알아야 피하지요. “짐승이 어디 있으며 누구십니까?”를 빨리 이야기해 달라는 거예요. 왜? 그쪽은 피하면 되니까. 만약에 짐승의 손목에 666 베리칩을 심어야 되는 순간이 오면 나는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돼요? “나는 거부한다. 나는 주 예수를 믿습니다. 주여! 도우소서. 마귀가 나를 이렇게 찌릅니다. 666 이거 없이는 매매도 안 되고 살기가 힘들어지는데 이 마지막 때에 드디어 말씀대로 이 세상이 정말 더러운 세상이군요.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빨리 전 3년 반, 후 3년 반의 기간이 빨리 끝나고……”

 

하여간 스케줄도 빡빡해요. 환란이 있고 주님 재림 때 주님이 이스라엘 저 감람산에 턱 하니 재림하시면 휴거 되는데, 그 전에 그 마곡에 있는 악의 일곱 족속들이 오는데, 이스라엘은 원자폭탄 준비하고 있는데, 이란이 마곡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공격할건데, 빨리 미리 벙커를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벙커 만들어 놓고 생수 준비해야 돼요. 삼다수 박스로 사서 쟁여놓고 비상식량, 건빵, 라면, 잔뜩 쌓아놓고 아울러 필요한 것은 뭐냐? 기관단총 준비해야 합니다. 환란이 올 때, 이거 빼앗아 먹으려고 덤비는 인간들 몰려 올 때, “어딜, 우리 식구들만 먹어야 해.” 하고 막을 수 있는 기관총 준비한다는 겁니다.

 

종말을 대비한답시고 이런 짓을 해야 돼요. 그거 지금 안상홍집단이 하고 있거든요. 돈 모아서 그런 짓 하고 있어요. 미쳤어요. 자기존재증명에 미쳐버렸어요. 남 욕할 거 아니고 우리는 돈이 없어 그 짓 못해요. 일단 돈이 없고 그렇게 남 시선 느끼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남들에게 밉상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는 좋은 게 좋다고 그냥 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지하에 벙커 만들어서 기어들어가 숨고 싶지요. 미국에서 지하벙커 임대하는데 한 40만 불 한답니다. 없어서 못 판답니다. 아주 유행이에요.

 

원자폭탄 떨어져도 안심되는 것, 갑자기 십자가마을도 구미가 당기십니까? “짐승이 무엇이냐? 어떻게 생겼느냐?” 요한계시록 보다가 이것을 묻는데 그 물음보다 그 물을 왜 묻느냐고 물어야 돼요. 그러면 “짐승을 알아야 구원받지요.” 그러면 십자가 피로 용서받은 것은 어디로 날라 가버렸습니까? 예수 안에서 의인된 것은 어디로 날라 갔지요? “아, 그 십자가 저도 아는데, 알거든요, 십자가로 용서 받는 것은 알지만 십자가 용서받고 난 뒤에 이왕 구원받은 이상 주께서 재림할 때는 구원 받지만 사는 동안만큼은 편안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주께서 우리하고 거래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인이잖아요. 죄인인 것을 확정짓고 난 뒤에 아버지와 아들의 거래, 그 언약의 관계에 의해서 십자가 능력을 줬기 때문에 우리가 ‘나’를 거기에 끼워 넣으면 안돼요. 십자가를 우리가 알게 되면 주의해야 할 것이 있어요. 일단 십자가를 인식했잖아요? 알았잖아요. 안 것을 가져오는 다른 자리가, 나와바리가 있으면 안돼요. 어떤 자리가 있으면 안돼요.

 

나는 십자가를 내 구원용도를 위해서 내가 가져와서 결국 ‘나는 이제는 십자가로 구원받았다.’는 그 나를 다시 구축해버리면 안돼요. 그거 성경해석의 오류입니다. 표정들 보니 다들 그렇게 사시는 모양입니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에스겔 37장에 보면, 골짜기에 뼈들이 있잖아요. 하나님이 그 뼈들과 대화하지 않습니다. 왜? 뼈기 때문에. 그것도 바짝 말랐어요. 누구보고 이야기하는가? 옆의 인자보고 이야기해요. “이 뼈들이 살겠느냐?” 그것은 에스겔 입장에서도 굉장히 난처한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존재거든요. 그러면 산다는 말을 물을 때는 에스겔이 주님 앞에 “살려주세요.” 라고 하는 것을 주님이 차단했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지금 중요한 이야기 하는 겁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백프로 가짜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살려주세요.” 하다가 전부 다 망했어요. 살려달라고 해가지고. 지가 살려 달라할 입장이 못 되고 자격이 못됩니다. 그럴 때 인자가 주체를 넘겨요. “주의 말씀으로 살 겁니다. 주님이 스스로 던져놓은 약속에 의해서 주님이 회수하는 주님의 자기증명의 과정 속에서, 아마 나를 데리고 온 목적, ‘이들이 죽은 자인데 살 것입니다.’라고 해서 그 뼈들이 그야말로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면서 살았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한 유머를 생각해 봅시다. 뼈 아닌데 모습만 뼈로 변장, 위장해서 뼈인 척을 하면서 ‘저분이 지금 이야기한다. 잘 들어야지. 어? 살려 준단다. 앗싸! 뜨거운데 조금만 더 참아. 곧 힘줄이 생길거야.’라고 하면 그 뼈 살겠어요, 안 살겠어요? 천사가 와서 살려주다가도 “이거 뭐 이런 가짜가 여기 섞여 있어!” 빼고 진짜 바짝 마른 뼈만 살려낼 거예요. 왜? 그들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기 때문에.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고 완전히 죽음으로 끊어놓습니다.

 

십자가능력이 왔다는 말은 죽기 전에 이미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는 그 능력이 바로 나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존재증명이라는 이유 때문에 저를 구원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주님한테 가 있지 우리한테 오는 게 아니거든요. 나에게 따로 구원의 이유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짐승이 뭐냐 할 때, 이 이야기가 궁금하지요? 짐승이 뭐냐, 할 때는 내가 묻는 게 아니고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는 것처럼 짐승을 누구하고 대비시키느냐 하면,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과 대비가 되어야 요한계시록이 풀립니다.

 

짐승이 누구냐고 묻는 그 자체가 건방지기 짝이 없는 것이고 그것을 물어서 뭐할 건데요? 그거 물어서 구원받으려 하잖아요. 누가? 내가. ‘나’ 구원은 없어요.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구원은 없거든요. 우리는 철저하게 에덴동산에 쫓겨날 때 그 취지가 계속 일어나야 돼요. 선악과 따먹고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것이 계속해서 반복돼야 됩니다. “정녕 죽으리라”가 죽은 척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죽은 체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살아 있어도 죽은 것으로 간주하시는 거예요.

 

다만 그것이 ‘예수 안’에서 우리가 이미 산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우리가 인식하지 말고, 그걸 인식하게 되면 내 존재로 가져오기 때문에 인식하지 말고, 다만 인식을 하되 주님의 존재로 돌아가기 위한 그 인식은 돼요. “그러니까 제 몸은 제 것이 아니고 값으로 산 주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 말씀대로 “주의 것임을 다시 한 번 제가 인정합니다.” 하는 조로 인식을 해주면 돼요.

 

자, 그렇다면 이 법칙을 가지고 응용문제를 풀어봅시다. “짐승이 뭐냐?” 하는 것은 “어린양이 누구냐?” 하고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면 짐승이 노리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 어린양이 하시는 그 업적과 위업을 훼방하는 일을 하는 거예요. “예수 공연히 죽었다. 예수 죽어도 소용없다. 누가 죽는다고 해서 네가 구원받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하는 거야. 네가 성실하면 살고 불성실하면 죽는 거야. 착하면 살고 네가 나쁜 짓을 하면 죽는 거야.”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윤리도덕으로 주님 안에 있는 그 나를 그 밖에 나가서 관찰하는 나의 존재증명용으로 마귀가 자꾸 시도하는 거예요. 그럴 때 짐승은 뭐냐 하면, 이렇게 보시면 돼요. 짐승의 기능이 무엇인가? 짐승은 무엇을 가리고 싶어 하고 무엇을 훼손하고 싶어 하느냐,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을 보겠습니다.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여기서 저희시체가 누구시체냐 하면, 복음 전하는 두 증인의 시체입니다.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지요.

 

여러분, 소돔하고 애굽하고 위치가 다르잖아요. 소돔은 북쪽에 있고 애굽은 저 남쪽에 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지문의 내용과 가장 가까운 것은 5번, 이러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방법을 사용해서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지요. 놀라운 사실은 여기는 어떤 사건, 기능이 나옵니다. “주께서 십자가의 못 박히신 곳이라” 그렇게 나와요. 사람들은 이 대목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성급하게 “짐승이 뭡니까? 오늘날 유럽연합과 어떤 관계로 되어 있는데요? 오늘날 신디게이트와 어떤 관계인데요? 오늘날 프리메이슨과 무슨 관계인데요?” 꼭 자기가 어디서 들은 아는 것만 골라서 자기를 커버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뭐냐? 자기 힘으로 그것을 대비하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 대비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질서를 끄집어내는데 여기 보면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했습니다. 9절에서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했고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했습니다. 13절에,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요한계시록을 이해를 하려면 이 짐승을 기능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짐승의 기능은 연루된 기능이 있어요. 어린양, 어린양 앞에 어떤 형용사가 붙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 입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 십자가지요. 십자가의 기능에 대해서 짝을 이루어서 반대하는 기능이 짐승의 기능이에요. 그러면 십자가지신 예수님은 지금 하늘로 승천해서 올라갔잖아요. 올라가게 되면 그 남아 있는 인간세계 모두가 십자가에 반대했던 세력들이 지배하는 동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두 증인이 거기서 죽임을 당하는 거예요.

 

죽임을 당한다는 말은, 그들이 참수를 당했습니까, 아니면 호랑이한테 먹혔습니까? 그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보기에 그 두 증인은 살아도 죽은 자 취급을 받는 겁니다. “너 너하고 말 안 해.” 동창생이 “나는 너와는 말을 한해. 난 너의 친구 아니야.” 하나님에 의해서 그렇게 될 때 주의 말씀대로, 요한계시록대로, “네가 당하는 그 현장이 소돔으로 되게 하고 애굽으로 되게 하고 더 놀라운 축복은 바로 내가 당한 그 현장이 주께서 십자가 지신 그 현장이 된다.”는 사실이에요. 그 주님의 기능입니다.

 

따라서 제가 내린 결론은 짐승은 주님께서 다뤄낸다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왜? 뭘 위하여?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자기존재증명을 위해서 짐승들이 부지런히 설쳐야 되고 활동을 해야 돼요. 그리고 복음 아는 사람들을 개 무시해 주시는 좋은 일들을 해주셔야 돼요. 사람 취급하지 않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런 일을 당할 때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시고 “외롭습니다.” 하고 너무 어리광부리지 마시고 “야호! 신난다.”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는 것 맞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짐승의 기능을 예수님을 경유해서 알았기 때문에 짐승을 알았다는 말을 하면 안 되고 “주님을 새롭게 알았습니다.” 이렇게 돼야 되지요. 사도바울의 모든 말씀,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는 항상 모든 것이 예수님을 아는데 필요해서 일어나야 했던 사태들이고 사건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밥 먹고 사는 것까지 전부 다 우리가 잘났음을 보여주는 증명의 기회가 아니라 예수님이 지금 살아 있다는 거지요. 주님이 살아 있어서 지금 십자가를 가지고 언약대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활동들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마 어떤 무식한 사람은 사도바울 불러다가 “차안에 깔린 자기 자식을 들어내라.”고 할 거예요. 사도바울이 배트맨도 아니고 스파이더맨도 아닌데 자기 자식을 건져내라고 요청을 할 거예요. 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못하는 것이 없다.” 했으니까, 다 할 수 있으니 해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애 포기하세요. 왜냐? 그게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외에는 사랑이 없어요. 하나님이 죽이시거든 곱게 죽으세요. 긴장하지 마시고 곱고 순하게 죽으세요. 이것이 내가 이 땅에 살던 방식이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바로 그 짐, 당신이 당신의 짐이 되었어요. 당신은 그것을 포기하시면 비로소 당신은 A가 보이는 것이 아니고 밑바닥의 주님의 자기존재증명, 예정이 보일 것입니다. 그만큼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주의 은혜라, 아마 알게 될 것입니다.

 

뭐, 내 힘으로 뭘 알아가지고? 짐승 알아서 뭐할 건데요? 짐승 안다고 구원됩니까? 이미 구원에 들어온 사람은 새삼스럽게 구원받을 필요는 없어요. 구원에 쓰이기만 하면 되는데 어떻게? 하나의 이름 없는 소자처럼 그냥 주의 형제처럼, 평소에 뭔가 했는데 나중에 심판대에서 보니까 “네가 평소에 했던 그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해 한 것이다.” 주님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의미를 두니까 우리로서는 “감사합니다.” 할 뿐이지요. 그것을 성경에서 미리 당겨서 줬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실을 온 몸으로 체험하면 돼요. “이것도 주의 은혜고 저것도 주의 은혜다.” 하고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번시간에 중요한 것을 해보겠습니다. 사사들을 투입해서 이유 없는 구원을 한다는데 그러면 구원의 방법으로서 “야, 이유 없다.” 이렇게 합니까? 안 그러면 구원 작업을 할 때 뭔가 이유가 있는 듯이 행세하면서 작용을 합니까, 하는 그 방식이 있겠지요. 여러분 중에 아주 머리가 뛰어난 사람은 이야기할거예요. 인간들이 A1에서 A2로 가면서 거기서 뭘 찾습니까? 거기서 원칙을 찾지요. 과학이니까 질서를 찾는다는 말이지요. “30분씩 운동하고 밥을 반으로 줄이면 살이 빠집니다.” 제가 살이 빠졌잖아요.

 

살이 빠졌는데 그 빠진 그것이 질서가 된다는 말이지요. 다음 날 되면 “또 그렇게 해야지?” 할 때 이 질서를 공격하는 게 있다는 거예요. 이 질서를 무산시키는 혼돈으로부터의 공격이 들어오지요. 밤이 낮을 공격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베냐민하고 이스라엘 연합군하고의 싸움에서 이방나라는 한 명도 전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자기들끼리 분란을 일으켰기에 한 명도 전사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방나라 화 시켰어요. 이스라엘에 대해서 다른 쪽에 안티 이스라엘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고 우기는 너희들이 스스로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이스라엘로 자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사의 활동방식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왜 너희들은 스스로 안티 이스라엘, 반 이스라엘이 될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를 거기에 집어넣는 방식으로 그들의 구원방식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는 지금 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사는 뭐냐? 사사는 구멍이다. 어떤 구멍?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올라오는 유일한 입구역할을 하면서 옵니다. 그러면 사사의 자아가 이렇다면 그 안에 뭐가 있어야 돼요? 거기에 구멍이 뚫려야 되겠지요. 그래야 바람이 들어오니까. 뻥 뚫려 있어요. 뻥 뚫려 있으니까 자아가 온전합니까, 온전치 못합니까? 온전치 못한 것은 현재 온전치 못한 이스라엘이 형편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현재 사사의 형편이 너희들 형편이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뭔가 조직을 갖추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한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거예요. 교회라 하는 것은 모일 때 조직을 하지 마세요. 성령은 원래 바람이에요. 바람같이 왔다가 바람같이 사라지는 겁니다. 이것은 소유대상이 되지를 못해요. 소유하게 되면 그게 내 존재로 탈바꿈되기에 절대로 소유되지 못하게 합니다. 내가 나를 소유하면 안돼요.

 

그게 뭐냐? 주님의 의미인데 이 의미라는 것이 대상이 바뀌고 주체가 바뀌고 대상과 주체를 둘러싼 그 장, 필드가 바뀌면 의미라는 것이 없잖아요. 모든 것이 다 바뀌게 되는 거예요. 이거다, 싶으면 벌써 시간이 지나버리면 다른 것으로 바뀌어버려요. 왜냐하면, 대상이 바뀌고 내가 바뀌고 그 형편이 바뀌기에 그렇습니다. 서로 친구사이인데 한쪽은 실장이 되어 있고 다른 한쪽은 신입사원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실장이 와서 친구한테 하는 말이 “내가 아직도 내가 네 친구로 보이나? 나는 직장에서 네 상사야. 상사말을 그냥 들어. 내 사무실 청소 똑바로 해.” 이렇게 수십 년 친구를 막 부려먹어요. <이브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친구를 막 부려먹는 거예요. 7시 40분부터 8시 30분까지 하는 엠비시 드라마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각자 자기존재가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 존재한테 걸려들어서 부려먹음을 당하시는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에요. “나를 위한 구원자가 아니면 당신이 왜 왔어?” 하는 그 행세가 이런 식이란 말이지요. “우리 가정도 화목하게 못하는 게 무슨 메시아라고. 저리가!” 꼭 이런 식이라. 뭘 맡겨놓았습니까? 돈이라도 받을 무슨 권리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으면서 “당신 착하잖아. 당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잖아요. 크리스마스 때 울지 않는 애들에게 선물 준다면서? 그렇게 착하면 나한테는 왜 그 착한 짓을 안 하는데? 왜 내 인생이 꼬이는데? 그 착한 거 다 어디 갔는데? 왜 남 주고 나는 빠트리는데?” 평소에도 막 그러고 싶지요.

 

제가 대신해서 말 다 해줍니다. 속 시원하라고. “만약에 당신이 계속해서 날 이렇게 구박하면 난 당신과의 관계를 끊을 거야.” 그런데 그것을 주께서 이용했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주님은 이용하신 거예요. “더 까불어봐라. 더 까불어.” 그래서 계속 까불까불 거리는 그 속에서 기원, 원천이 나오지요. 원천이 솟아 나오면서 그동안의 나의 질서가 주님을 압박했고, 핍박했고, 무시했고, 주님을 모독했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보고 싶다. 보고 싶어서 미치겠다. 견딜 수가 없다.”고 해놓고는 주님 앞에서는 아주 그냥 쌩까요.

 

전혀 보고 싶지도 않고, 주님이 반갑지도 않고, 미치고 싶지도 않아요. 구름타고 오는지 뭘 타고 오는지 오면 오고, 가면 가고, “나는 지금 돈 번다고 그런데 관심 둘 시간이 없어, 관심 안 둬.”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언제 그것이 깨지는가 하면, 내가 생각했던 내 질서가 와장창 깨질 때, 그리고 내 자아에 구멍이 뚫릴 때,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구멍이 뚫릴 때 나는 그 순간 그 현장에서 사사가 되는 겁니다. 사사 참 꼬라지 좋지요? 주님한테 당하세요. 당하고 난 뒤에 사사됩니다. 주님한테 당하고 난 뒤에 열두 제자가 열두 사도가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는 짓을 했는데 주께서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 소리 들으면서 드디어 열두 사도를 대표하는 최종적인 이방인의 사도로서 등장한 겁니다. 그 절차 똑같이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여름인데 여러분, 우리 시원하게 삽시다. 냉장고나 에어컨 있다고 되는 게 아니고 제일 중요한 이 구멍 날라 가면 돼요. 박격포 가지고 치면 구멍 뚫립니다. 뻥 뚫리면 내 저장고가 날라 가버려요. “주님! 이것만큼은 내가 못 놓습니다.” 하는 저장고 다 날라 가려요.

 

내 저장고가 날라 가게 되면 나는 값을 주고 산,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으로 그동안 주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후적’이라고 합니다. 일이 터지고 난 후, 사후적이라, 또는 소급해서 우리는 A에서 B층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느끼게 될 때 이미 자아가 구멍 난 자아로 느끼기 때문에 나는 나가 아니고 주님의 것으로 느끼게 되는 겁니다. 주님은 그걸 노린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누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하거든요.

 

사람들은 그 말을 자꾸 바꿔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니 주님도 살고 나도 살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러면 성경 새로 쓰세요. 본인이 알아서 쓰세요. 그런 성경 없습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나는 주님이 사시는 하나의 새장, 울타리에 불과합니다. 주님이 초콜릿이라면 우리는 포장지. 날마다 주님의 무늬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표출되기를 원합니다. 남들이 이야기해요. “주님은 어디 계시는데? 봐라! 여기 있다. 구멍 난 나.” 총 맞은 것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식사하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