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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강 [해석오류]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15여름(사시기)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강 [해석오류]

정인순 2015. 8. 8. 13:09

 

 

음성2 

 

녹취:한윤범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강 [해석오류]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 끝에 하나님께서 혼돈에서 질서를 만드신 것은 부수기 위해서 만들었어요. 히브리서 1장 10절에 의해서. 그냥 부수면 만든 이유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바꿔치기 위해서 만들었다. 그리스도는 영존할 것이지만 그리스도 외에는 영존 못한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이 허물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만드신 분이 만들었다고 하면 될 텐데 왜 꼭 부수면서 만드는가? 그것은 바로 마귀와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한 번 만들어진 것 부수지 말라는 것이 마귀 생각이고, 만들어졌기에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게 첫째 시간에 하나님의 존재증명이라고 했지요. 자기성을 스스로 파괴시켜 나가는 겁니다. 그러한 자기 파괴는 모든 인간에 대해서 굉장히 낯설고 인간을 불쾌하게 만들어요.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그 발언에 대해서 동의할 위인이 없습니다. 전부 다 한 통속이기 때문에 아담의 족속이기 때문에 다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 성경을 해석하면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해야 될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지금부터 설명하면서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적어볼게요. 영희가 죽다. 또는 같은 말로 철수가 죽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우리 보기에는 영희라는 개인이 죽는 게 되지요. 영숙이는 안 죽었는데 영희가 죽었잖아. 개인이 죽은 거예요.

 

그런데 ‘죽다’를 주사기로 뽑아내봅시다. 죽음이 영희를 통해서 자기가 스스로 나타냈다고 봅시다. 그러면 어떤 인간도 죽음을 주사기로 뽑아내면 모든 인간이 죽음 앞에 똑같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노리는 것이 바로 그거에요. 네가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너를 이용해서 죽음이 실제라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영희 같으면, 나는 살아있고 나는 실제라고 여기지만 진짜로 너의 주인, 너의 왕은 네가 아니고 너를 죽게 하는 죽음이 너의 왕이라는 겁니다. 로마서 5장 이야기입니다. 죄가 왕 노릇하는 거예요. 죽음이 왕 노릇하는 거예요.

 

주사기로 뽑아내는 겁니다. 뽑아낼 때 우리가 주어부분에 턱하니 건방지게 앉아 있잖아요. 이걸 앞에 세우고 영희를 뒤에 세우는 거예요. 죽음이 영희로 하여금 죽게 했다. 그러면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희가 살았다. 사실은 이 말은 성립 안 돼요. 영희가 계속 살고 있다. 그 차이는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영희가 계속 살고 있다고 하면 안 되고, 계속 사는 생명을 증명하기 위해서 잠시 영희를 이용했을 뿐이다.

 

그렇게 될 때 피조물들의 다양성은 날아가고 60억 인구는 날아가고 모든 것이 하나에서 나온(주님이죠) 원리원칙 아래 전부 다 모든 것이 종속되고 묶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기 위해서 있는 책이에요. 말로만 그러지 말고 해석할 때도 그것을 거기다 집어넣어줘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리니.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선교단체 하면서 많이들 안 외웠습니까? 시험 치고 하지 안 했어요? 꼭 중요하게 나오는 말씀은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은 꼭 나오지요. 나의 나 된 것은 나의 행함이 아니고 믿음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그런 구절. 그리고 디모데전서 2장 4절은 중요한 구절이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런데 그건 중요시 하면서 그 앞에 선교단체라는 것이 주어 부분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어 부분으로 하게 되면 영희나 철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우연적 존재가 돼요. 자체적으로는 존재증명이 안 됩니다. 나를 나 되게 하신 분을 경유할 때 비로소 본래 자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반드시 경유해야 돼요. 신학교 가서 기도 많이 했습니다. 이러면 안 되고. 안 하고 싶었는데 주께서 나를 이용하고 싶데. 나는 기꺼이 이용당했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야 자랑할 것이 그리스도만 자랑 되지요.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거죠.

 

그렇게 주체가 바뀌게 되면 사사기에 나오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것이 어느덧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어요. 나? 내가 주체 자리에 왜 있지. 나는 아니야. 나는 주께서 하신 결과 자리에 있어야 돼. 이렇게 옮겨지는 겁니다.

 

이렇게 바뀌는 걸 해석오류라고 하는데 이런 해석오류들이 굉장히 많이 생겨요. 그것은 교인들이나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주체 자리를 내놓을 생각을 안 해요. 신이 나한테 뭘 해줄 겁니까? 만약에 내가 원하는 걸 해준다면 저도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뭘 내가 행하면 30배, 60배 약속한 것 주시겠습니까? 내가 30배 받으면 15배 정도는 내놓을 용의가 있습니다. 60배 받으면 30배 내놓겠습니다. 100배 받으면 50배 내놓겠습니다. 계산해보는 기라. 200 같으면 100은 남잖아요. 그런 계산은 밝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왜 이런 해석오류가 발생되는가? 어느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의 문제풀이를 보세요. 국어시간인데 다음 중 지문의 내용과 가장 먼 것은? 1, 2, 3, 4, 5번. 그 아이는 5번이라고 한 거예요. 왜냐하면 줄자로 재봤거든요. 가장 먼 것은 5번이란 말이죠. 굉장히 쉬운 문제를. 이게 old perceptions에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에서 배웠어요. 얼마나 쉬워요. 이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거예요. 왜냐하면 지문이 여기 있고 가장 먼 것은 이거란 말이죠. 초등학교 5학년인데 이 얘 걱정돼요. 시킨 데로 안 하고 분명히 연예인, 배우 한다고 설칠 수 있어. 특이해요.

 

여기서 해석오류가 일어났지요. 선생이 묻는 질문과 답하는 인간이 서로 다른 지평, 다른 층을 이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층을 이루면 어떤 일이 발생하느냐 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층으로 비약, 도약할 수 없습니다. 도약할 수 없으면 저쪽 층에서 와서 건져내면 되잖아요.

 

[어벤져스]가 왜 생겼습니까? 안 되니까 생겼잖아요. 보통 사람이 안 되니까 힘 센 사람으로 악한 자를 이기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기대하면 뭐가 문제냐 하면, 아래층, 우리 인간 층에서 은근히 고대했던 바의 연장에 있어요. 누가 나를 구원할 자 없을까? 드디어 왔구나, 흑기사. 이렇게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기다림이란 비록 내가 못하지만 나의 의미는 한계를 벗어나서 누가 나를 구원해줄꼬, 라고 벗어날 수 있는 거예요.

 

요 근래 강의하면서 그랬잖아요. 큰 암소가 들어온 이유가 뭐냐? “아빠, 내 마음에 암소 들어왔어.” 아빠가, “암소가 너보다 큰데 네 속에 어떻게 들어가?” 마가복음 5장에 나오잖아요. 귀신 이천 마리가 청년 속에 들어갔지요. 어떻게 그렇게 많은 귀신이 그 안에 다 들어갈 수 있느냐 말이죠. 납득이 안 돼.

 

이게 왜 암소가 되느냐 하면, 암소에 대한 모든 의견을 나에게서 출현, 출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동일성이라 합니다. 내가 생각했던 세계와 동일한 성질을 갖고 있는 그것이 아마 천국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여호와증인의 표지에 저 푸른 초원이 나오잖아요. 여호와증인들 잔디밭 못 가져서 환장한 것 같아.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이슬람에 나오는 천국 개념도 마찬가지에요. 얼마나 사막 지역이 척박했겠습니까? 분수가 나오고(전기세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 들판에 골프장이 있고 거기에 옵션 하나 추가된 것이 미인들. 그게 이슬람 교인들이 목숨 걸고 지키는 경전입니다.

 

이걸 동일성 사고방식이라 합니다. 단절이 없어요. 내가 꿈꾸는 세계가 곧 천국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은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천국 단어 끄집어내서 이건 내가 원했던 그 세계라고 한 거예요. 베드로도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천국 가면 누가 높습니까? 다들 그렇게 했지요. 주님께서 칼질을 했어요. 잘라버렸어요. 칼질하는데 누굴 동원했느냐? 그 당시 권력자들을 동원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나이 어린 소녀 하나가, “아저씨(하여튼 싸지도 없어), 저 잡힌 예수와 한 패지요. 내가 봤는데.” “왜 이러느냐? 네가 지금 실성을 했구나. 정신 차려라.” 당장 하옥하라고 싶을 거예요. 아가씨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봤는데 예수와 함께 돌아다녔잖아.” 내가 아는데. 그러니까 베드로가 더 적극적인 부정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옆에서 불 쬐던 사람들도 그런가 하여 바라보고 있고 해서 “나, 저 사람을 저주한다. 됐냐? 이만하면 됐어? 이러면 예수와 관계없는지 됐어?”

 

인간은 타인의 시선에 놀아납니다. 타인의 시선에 놀아나는 이유는, 본인한테 눈이 박혀있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오후설교에 아예 목을 잘라버려라. 거기다 십자가를 박아 넣는 것이 에베소서에 나오는 교회의 머리라는 거예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가 모든 통제력을 쥐고 있어요.

 

오후설교에서 이야기했잖아요. 간음한 여인을 잡아다가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해요. 너는 나만 바라봐. 저 사람 보지 말고. 너의 얼굴은 나를 바라보게 한 얼굴이었어. 내가 너를 보는 시선을 위하여 영희는 그동안 간음했어야 했어. 영희가 죽는 이유는, 죽음이 영희를 지배하듯이 그리스도가 바라보는 시선을 위해서 소경된 자가 필요했고, 간음한 여인이 필요했고, 38년 된 병자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필요했던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받는 자가 아니라 구원에 쓰이는 자에요. 구원받는 자가 아닙니다. 주제넘게 그걸 요구하지 마세요.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이미 구원의 작업 속에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는 중입니다. 무익한 종이니 할 바를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할 뿐이에요. 뭐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바로 내가 보는 내가 관찰해서 정리하는 나의 현실을 나에게 더 이상 그것이 오류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한 세계지요. 좀 더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혼돈에서 질서로 한 것은 악을 구체화한 거예요. 그러면 질서의 중앙부분이 꼭 있어야 돼요. 그 중앙부분에 두 나무가 사이좋게 있어요. 두 개의 나무가 배후로 서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인간들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어쨌든 둘로 보입니다. 따먹어라, 따먹지 말라는 두 개의 나무가 있어요. 여기서 물이 나옵니다. 생명수가 나옵니다. 생명수가 에덴동산의 네 개의 강을 적시면서 에덴동산은 낙원이 되었어요. 에덴동산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고 두 나무가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우주의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인간 되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었고 그 형상은 조건부로 인간에게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다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교재 1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에. [그런데 이 의미가 두 개의 층으로 구분 지어진다. 하나는 사법적 영역과 일상적 영역의 구분이 그것이다.]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은 인간 나름대로 혼돈에서 질서로 다듬기 위해서 의미를 주는 거예요. 혼돈을 방지하고 질서체계를 잡기 위해서 의미가 주어지는 최종적인 것은 법적인 권위가 부여되는 의미가 바로 사법적 영역이에요. 그런데 사법적 영역보다 더 높은 영역이 바로 도덕적 영역이 있어요. 이건 법 없이도 사는 세계, 바로 동양철학에서는 이걸 추구하는 겁니다. 법 없이 사는 것.

 

법 지키는 것이 정의가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건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 사람이 법으로 정의를 구현하려고 치면 반드시 희생자가 발생되게 돼있어요. 이게 아쉽지만 인간의 법집행의 한계입니다. 그걸 보여주는 것이 사사기 마지막 대목이에요. 바로 베냐민지파가 날아가 버린 겁니다. 정의롭게 법집행을 했는데 이게 이스라엘이 안 됐어요. 이스라엘이 빵꾸났어요. 한 지파가 날아가 버렸어요. 이빨 하나 빠진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그 나라가 아니에요. 이건 엉뚱한 나라가 된 거예요. 안티이스라엘 된 거예요. 본인들도 당황스러워요.

 

그러면 베냐민지파가 왜 법을 어겼느냐? 법 위에 뭐가 있다고 했어요? 법 자체를 없애버리는 거거든요. 원래 법이란 법 위에 선함이 있고 선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으로써 법이 동원되는 겁니다. 이것을 지키면 당신은 선합니다, 라고 하기 위해서 선을 위해서 법이 있었는데 이게 더 연구해보니까 법을 위해서 선이 있는 것이 아니고 법 자체를 무조건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예 중에 하나가 선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법을 지키기 위해서 행할 선행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죠. 왜냐하면 사람마저 착한 일 해놓고 법 지켰다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나는 법대로 했다. 너만 법대로 했나. 나도 법대로 했다. 법은 하나인데 선이 너무 많아져요. 하나의 법인데 선이 백 개가 되면 곤란하잖아요. 까불지 마. 잔소리하지 마. 무조건 법대로 해. 법이 우선되고 선이 밑에 내려가게 됐습니다. 착하게 살아도 법대로 안 하면 착한 게 아니다. 이렇게 돼야 나라꼴이 돼요. 아는 사람이라고 봐주고 하면 나라꼴이 안 되잖아요. 법은 법이고.

 

만약에 교통경찰이 단속하는데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내려 보니까 “아버지? 웬 일이십니까?” “볼 일 있어서.” “바깥에서 보니까 아버지가 달리 보이네요. 3만 원 되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3만 원짜리 끊고. 왜냐하면 공무원은 법을 지켜야 되기 때문에 사사로운 정에 매여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선 위에 법 있고 법 위에, 법을 뛰어넘어야 비로소 완전한 자유에 이르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취합니다. 아예 법을 무시하는 거예요. 이걸 사다니즘이라 합니다. 나 같으면 법 같은 건 없어. 이게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베냐민지파가 길 가는 나그네의 첩을 윤간해서 죽여 버린 사건. 그 사건도 나쁘지만 그러한 것을 오히려 감싸주면서 그 범인만 내 놓으라는 다른 지파의 요구조건을 무시하고 우리 지파는 우리가 지킨다고 나선 그것, 우리가 법이야. 각자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한 거예요. 우린 그리스야. 유로 말 안 들어, 이런 식으로 우리가 법이라고 나설 때 극한 악을 통해서 법 자체를 무시함으로써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 있고

 

두 번째 방법은, 법이 시키는 것보다 더 철저하게 준수함으로 말미암아 법을 요구하는 쪽이 미안스럽게 하는 것. 요새 메르스 때문에 손 씻으라고 엄마가 무심코 던졌는데 아이는 그렇지 않아도 엄마한테 복수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다가 그 소리 듣고 손 씻다가 나중에 손 껍질이 다 벗겨졌어. 12560번 씻어서. 손 씻는데 두 시간 반 걸리고. 그럼 엄마가,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이런 것 안 시킬 게.” 이걸 성화론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지키라는 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법 주신 주님이 나한테 미안해야 돼. 너무 착하니까. 어쨌든 이 두 가지 방법은 다 나한테는 법 따위는 없다. 나는 법 위에 있다는 것. 선 위에 법 있고 법 위에 나 있다. 이게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법을 동원함으로 말미암아 법 위에 각자 있다. 각자 소견대로 행하는 게 있다. 그게 바로 인간의 타고난 속성입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 드린 에덴동산은 어떻습니까? 에덴동산에서는 인간 위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있어요. 이게 법이냐 하는 겁니다. 이것 법 아닙니다. 법 아닌데 하라, 하지 말라는 뭐냐? 이것은 바로 약속입니다. 법과 약속의 차이점이 뭐냐? 법은 지켜야 될 대상이 있지만 약속은 약속 내린 분이 스스로 알아서 그걸 완료해버립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없고 주님의 구원만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져서 구원받는 겁니다. 웬 횡재인지 모르겠어요. 그동안 왜 우리가 이걸 왜 몰랐는가? 해석오류 때문에 생긴 거예요.

 

그러면 해석오류를 목사들이 똑바로 가르쳐야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엉터리로 가르치면 되느냐?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우리가 무슨 해석을 해도 우리한테 불쾌한 해석은 아예 차단시켜버립니다. 그리고 바른 복음을 전하면 좇아내 버리죠. 바른 복음이라고 계속 전하자, 그런 것 없습니다. 설교 듣다가도 도중에 나가버려요. 누구 말마따나 허리끈 쥐고 당기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고. 우리교회 방식은 그냥 나가시는 방식으로 해요. 중간에. 오늘 낮에도 한 분 나갔는데 더워서 나갔겠지. 에어컨 고장 났으니까. 저는 그렇게 믿을래.

 

인간 층에서 위층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방법은 의도적인 단절에 의해서 항상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있는 이런 사실을 갇혀있다고 이야기해요. 갈라디아서 3장에 의하면, 인간은 갇혀있어요. 이걸 구약적으로 이야기하면 약속의 땅에 갇혀있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약속은 뭐로 돼있습니까? 생명나무와 선악과 구조로 돼있지요. 그러면 생명나무와 선악과 구조 안에 갇혀있는 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갇혀있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돼있지요.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굉장히 쉬워요. 그냥 죽으면 돼요. 정말 복음 쉬워요. 그냥 죽으면 된다고요. 자살할까요? 누가 사이다에 농약 안 탐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게 벌 받고 있는 거예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 팔십 넘은 노모가 계십니까? 벌 받고 있는 중이에요. 혹시 여러분 중에 구십까지 사는 분은 복역기간이 길어졌어요. 어떤 사람은 구십삼 세, 백세까지 사는 분이 있어요. 제대가 자꾸 지연되네. 예수님은 서른세 살만 살아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는데 우리는 무슨 좋은 날 보겠다고 스스로 말뚝 신청하고 또 말뚝 받고. 진급도 못 하면서 맨날 중사로 있으면서. 그것은 은퇴해서 갈 곳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자기는 살아있으면서 이미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어떻게? 이삭이 죽거든요. 자기가 이삭을 잡았으니까. 이삭의 죽음이 자신의 죽음의 본질을 말해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진실을 말해줬습니다. 이삭은 아들로서의 죽음이거든요. 아들이란 말은 이스라엘을 아들이라 하고 예수님도 아들이라 하는데 아들은 확정된 신분이란 뜻이에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모든 것이 끝나 버렸어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아버지가 설치한 아들 사이와의 관계에 그냥 포함됐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사기에 보면 자식이 죽어요. 입다가 객기 부린다고 이번 승리만 주신다면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은 내가 죽이겠습니다. 제일 먼저 누가 나왔습니까? 자기 딸이 나온 거예요. 마치 강인국이 김옥균을 죽인 것과 똑같은 거예요. 무슨 소린지 모르지요? [암살] 이야기입니다. 매국노 강인국이 자기 딸인 줄도 모르고 쌍둥이 딸을 자기 출세에 방해된다고 내일 결혼하는데 그 딸을 암살하는 그 내용이에요. 혹시 복음에 도움 될까 해서 제가 일찍 봤어요. 과연 입다가 나오네.

 

입다의 잘못은 뭐냐 하면, 이 땅의 아버지란 위치가 가짜란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진짜 아버지는 하늘나라에 있는데 자기가 아버지 행세하려고 건방을 떤 거예요. 이 땅에 있는 모든 위치나 조직은, 그것은 혼돈스럽기 때문에 무너져야 될 사항이거든요. 모든 질서는, 가정이고 모든 것은 무너져야 돼요. 그래서 사사기의 내용은 국가가 무너지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가정 내부도 다 무너져요. 다 무너지게 하고 뒤에 멘트 하나 달아요. 자기 보기에 소견대로 행하였더라.

 

그러면 우리 가정은 왜 안 무너졌습니까? 안 무너졌다고 여기는 것은 해석오류입니다. 지문의 내용과 제일 먼 것은 5번이라고 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왜 안 무너졌느냐 하면, 누가 내 형제고 모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형제가 있기 때문에 안 무너진 거예요. 하지만 안 믿는 딸, 안 믿는 아들이 있다면 헤어져야 돼요. 물론 누가 어디로 헤어지는지는 제가 장담 못하겠어요. 믿는 아버지 지옥 가고 안 믿는 딸이 천당 가는 식으로 헤어질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왜? 인간의 믿음이란 가짜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내가 나의 판정을 내릴 수 없는 문제거든요.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모든 관계는 전부 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너져야 되는 거예요. 천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오늘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동성애 문제가 나오는데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중요하기 때문에 하는데 동성애자들이 퀴어 축제인가 하면서 우리도 정당한 부부가 되도록 법적인 조치를 내려달라고 자꾸 데모하는데 여성이 여성과 결혼하고 남성과 남성이 혼인하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남성과 여성과 결혼하는 소위 합법적인 부부도 문제가 있다니까. 이게 정상이 아니에요. 임시방편이라니까. 정욕을 방지하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주어진 게 부부라니까. 이게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없는 소리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우리가 천국 갈 때까지만 어설프지만 임시로 지내보자. 이게 부부라니까. 내년 1월 23일 주례 앞두고 참 걱정된다. 김종인 권사님 아들 결혼식이 있습니다. 이건 대놓고 간접광고다.

 

부부란 것은 정상적이 아니에요. 이별이 만남보다 쉬워요. 혼돈이 쉽다니까. 부부로 사는 게 얼마나 억지인데. 혼자 살면 결혼하고 싶지요? 결혼했다가 혼자 살면 두 번 다시 안 하고 싶어요. 그냥 사귀기만 하지 결혼은 안 하고 싶어요. 특히 여자들. 남자들은 불 켜고 환장을 했어. 그러나 여자들은 절래절래. 미쳤나, 결혼하게. 한 번 실패했으면 됐지 또 실패하나.

 

혼돈이 훨씬 쉽습니다. 혼돈이 쉬운데 왜 정상적인 부부라 하느냐? 정상이 아니라니까요. 혼돈인데 아닌 척하고 있을 뿐이에요. 여기에 돈 문제 있으면 대번에 찢어집니다. 합의에 의해서 하든지 가라로 하든지 세무조사를 방지하기 위해서 하든지 세금 덜 내기 위해서 둘이 한 집에 살면서 부부 아니라고 하는 데가 한두 집이 아니거든요. 그것도 돈 좀 있어봐야 알지 저같이 해당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러니까 정상적이지 아닌 부부에서 자식이 나오잖아요. 이제는 자식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해요. 그러면 자식은 정상적이냐? 나오면 천재지요. 한 삼년만 지나면 돈이 천재 만든다는 사실, 돈 없으면 둔재 된다는 사실을 알아요. 특히 아이 많이 낳으면 걱정돼요. 모르겠다. 너희들끼리 알아서 살아라. 여기까지 내 역량은 이것밖에 안 돼. 일찍이 포기해서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철이 나요. 하여튼 못 사는 집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철이 들어서 공고 가고 알아서 잘 갑니다. 기특하지요. 기특한 게 아니고 자기 살 궁리하는 거지요. 산다는 게 기특한 게 아니고 또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

 

산다는 자체가 지금 우스개 이야기로 했지만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참 어지럽게 살아요. 너무너무 힘들 게 살아요. 로마서 8장에서는 그걸 탄식한다고 했어요. 붕어 소리가 어떻습니까? 허~ 이러지요. 이건 되도 않는 개그입니다. 부엉이가 부엉부엉하는 게 탄식이에요. 신음소리에요. 모든 피조물들이 썩어짐 때문에 신음하면서 손가락질합니다. 인간, 니가 조져나서 그 여파가 우리한테 퍼졌다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스가랴에 나오는 천사들이 그걸 조장하지요. 그 천사들이 사사기에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돼요. 이스라엘 스스로가 망치는 이스라엘로 돌변하도록 그렇게 조치하는 것은 집단적 위기의식 때문에 그래요. 개인적 위기가 아니고 집단적 위기의식을 하나님께서 조장한 겁니다. 이러다 우리 망하는 게 아니냐.

 

그런데 옷니엘, 에훗이 등장해서 구원하는데 점점 세월이 지나가면 집단 다 건지는 건 아니고 서너 지파라도 우선 살아야 되지 않느냐. 이제는 지파별로 사사들이 등장해요. 그래서 사사들끼리는 모르는 사이에요. 누구십니까? 사산데요. 처음 듣습니다. 이런 거예요. 원래 사무엘 활동과 삼손 활동이 같은 시대거든요. 그런데 둘 다 모르는 사이에요. 입산 태어날 때 사무엘 태어났어요. 성경에는 사사기 다음에 사무엘상 나오니까 먼 나라 이야기지요. 동시대인데 길에서 만나도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모르는 사이가 돼버려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무엘도 사사로 넣자고 주장하는데 그건 넣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없어요. 어쨌든 간에 사사라는 것은 이스라엘 네트워크를 회복할 수 없다. 무능하다. 이건 어떤 경우라도 본인이 개인적 소견대로 행하는 이상은 사사가 아니라 우사사가 와도 구원 안 된다. 이스라엘은 그런 이스라엘이라고 보여준 게 사사입니다. 무너지는 조직이 붕괴하는 겁니다. 삼풍백화점 무너지듯이 와르르 무너지는 거예요. 무너지면서 그들은 자기 보기에 소견대로 했을 뿐인데 무너지거든요.

 

그러면 그 다음 대책은 우리에게 왕이 있어야 되겠다고 나와요. 그게 사무엘상 8장에 나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입니다. 인간이 왕을 구한다는 것은 자기 소견을 포기했다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소견을 극대화시킨 모습 중에 최종적인 결론 중에 하나가 왕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왕이 있어서 일을 더 망쳐버리죠. 왕이 있으면 국가가 됩니다. 왜냐하면 왕은 세습제거든요. 세습제가 이뤄집니다. 국가가 되면 개인의 몽상, 망상의 극한입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짐승이라고 이야기하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인간은 짐승에게 인박히지요. 짐승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지요.

 

그럴 때 우린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가 저항해야지 국가 시키는 대로 해, 라고 하지만 우리가 요청한 구조입니다. 본인의 소견에 의해서 요청한 구조가 왕이 나를 때려주고 지배하는 마조히즘이잖아요. 나를 때려주고 학대함으로써 내가 어떤 보호를 받고 안심을 느끼는 얻어맞더라도 오히려 그게 다행스러울 정도로 우리의 정신 사고는 혼돈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그냥 망가지는 거죠.

 

그렇다면 혼돈에서 질서 속에서 악이 나온다고 했어요. 질서 자체에 선악과를 심어놨고, 선악과 벌칙이 정녕 죽으리라. 따라서 죽어야 될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악이 있고 악이 죄를 유포해줘야 돼요. 죄가 장성하여 죽음을 낳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질서 속에서 선악과를 이루기 위해서 악을 활기차게 만들고 그 결과로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그들에게 죽음을 야기하는 이것이 짐승으로 치닫는 현재 우리가 사는 모든 현실이라는 구조가 되는 겁니다.

 

이 현실 구조를 위해서 언어를 사용하고 언어는 의미를 붙이면서 문화가 되는 겁니다. 문화가 되면서 이 문화는 짐승에게 복속이 되지요. 문화 가운데 하나가 종교, 기독교 이런 것들이 문화 활동하는 거예요. 취미활동이지요. 문화 활동은 뭐가 빠졌습니까? 십자가가 빠졌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연속성을 내세우기 때문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라고 계속해서 작년도 그 노래 불렀고 올해도 부르면서 단절이 안 돼요. 계속 연속되는 거예요. 어디까지? 지옥 갈 때까지. 아마 지옥 가서라도 그 노래 부를 걸.

 

뭔가 중간에 끊어줘야 돼요.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자가 아니구나.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참여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라고 뭔가 끊어줘야 돼요. 사랑이란 단어를 주님의 자리에 놓고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이루는데 동원된 일꾼이거든요. 주님의 사랑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것이지 그 사랑 하나 얻어내기 위해서 내가 있는 건 아니란 말이죠. 흥정하기 위해서 있는 건 아니거든요. 이 세상의 주인공을 위해서.

 

그래서 혼돈이 질서가 되고 다시 혼돈이 되면서 혼돈 속에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요. 혼돈이 뭐냐? 쉽게 말해서 끝났다. 모든 것이 끝난 거예요. 끝났다. 이젠 내 생각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끝났어. 그럼 주님이, 진작 그러지. 그러니까 선악과 따먹어서 죽으리란 말을 내가 취소할 것 같으냐? 취소 안 해. 아니 할 수 없어. 아까 약속은 본인이 남긴 약속은 실현하기 때문에 정녕 죽여 버립니다. 정녕 저주해버립니다. 융통성을 보여주소서. 그래서 약간의 여유는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

 

네가 중심이 아니고 네가 중심이라면 어떻게 살려보겠는데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중심이기 때문에 너는 그걸 위해서 있기 때문에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교류가 없이는 우리에게 생명은 없는 겁니다. 그 교류에 있어서 등장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지 우리는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름이 바뀝니다. 이것하고 마치겠습니다.

 

이제는 내 이름으로 구원 못 받습니다. 이름이 자체가 바뀌어야 돼요.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뜻이고 그 존재의 속성도 이름의 내용에 합치된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아요. 이걸 오해해서 해석오류가 있어서 예수 이름을 몇 번 부를까요? 이건 몇 번이 아닙니다. 이천오백 번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되는 변하지 않는 진실에 우리가 쓰이는 겁니다. 왜 내 헌금, 내 전도, 내 목회, 내 설교로서 내가 구원 안 되는지 그걸 증명하면 되는 거예요. 참 쉽지요. 그냥 혼돈스럽게 살면 되잖아요.

 

왜 우리 가정은 내가 성실하게 설거지한다고 유지되는 게 아닌 이유가 뭐냐? 주님이 관여해서 살고 있잖아요. 그 말을 못해요? 내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해주니까 내 사랑에 탄복해서 아내가 날 사랑한다. 되도 않은 이유를 붙이지 마세요. 그런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왜 사느냐? 주께서 붙여줘서 사는 거예요. 언제까지? 주께서 끊어줄 때까지 이별은 쉬우니까 이별할 때까지 붙어서 사는 거예요. 토 달지 마시고 이유 달지 마시고 푹 주무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