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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공은주
안양20150313a-히9장25절(구원의 장치) - 이 근호 목사
제가 한 번 읽어볼게요. 히브리서9장 25절,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이리 되어있지요. 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구원할 때, 낚시대로 구원하면 되는데 왜 여기 대제사장이 필요하고 또 성소 할 때 그냥 가는 게 아니고 피를 들고 가야 되고 그 다음에 또 성소에 들어갔다고 되어있거든요. 성소에. 이런 장치가 왜 필요하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는 어떻게 만들었는지 우리는 모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지려고 하면서 우리를 만드실 때 동원됐던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주십니다. 창세기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한 것으로 되어있지요. 말씀으로 하는 것은 요한복음1장에 나오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어떻게 일했는지 우리는 몰라요. 그러면 아는 방법은 뭐냐, 우리를 다시 건져주면서 건져주는 경로를 통해서 아, 우리를 빼내가는 그 방식이 처음에 우리를 있게 하는 고 원리가 펼쳐진 대로 그걸 다시 돌돌 되감으면 그게 우리를 빼내가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어떤 말썽꾸러기 아들이 있었는데 하도 집안에서 말을 안 들었다 말이죠. 그런데 가족끼리 소풍을 가는데 애가 울고불고 장난치고 땡깡 부리면서 이렇게 해서 그 아빠가 그만 보다 못해 그 애를 한 방 쳐서 기절을 시켜놓고 이제 드디어 춘천 강가에 남한강변에 유원지 많잖아요. 그 애가 거기 가서 깨어보니까 자기가 집에 있어야 될 애가 남한강 강가에 있거든요. 그런데 묻거든요. “아빠,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 와있지?” 그러면 나중에 집에 갈 때 보면 알아요. 갈 때 보면 왔던 곳을 리턴하게 되면 다시 가버리면 왔던 길이 되는 거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가, 그것은 우리는 몰라요. 그냥 태어났을 뿐이고. 태어났다는 것을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걸 ‘피투성’이라고 해요. 피투성이란 말을 처음 들어보지요. 피(피동적인 의미), 투(던지다), 성(성질) 누구에 의해서 던져진 존재, 이걸 ‘피투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용어는 누가 사용했는가 하면, 샤르트르 프랑스 철학자가 이 말을 했어요. 인간은 던져진 것이다. 그래서 던져졌기 때문에 누가 나를 던졌는가 묻지 마라. 우리는 그냥 던져졌기 때문에 누가 던졌는가 묻지 마라. 던져진 채로 우리는 어떻게 살 것만 생각해라. 거기에서 나온 게 실존주의 철학이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어쨌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그냥 던져진 거예요.
던져졌기 때문에 태어난 것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질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이게 바로 오늘날 윤리 도덕의 문제점이 되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닌데 왜 자꾸 사회는 우리보고 똑바로 살라고 요구를 해요. 그렇게 되면 마치 내가 나를 만들었으면 그러한 지적을 받아도 합당한데 내가 나를 안 만들었잖아요. 엄마가 무심코 화가 나서 자식한테 이런 이야기한다고요. “니 왜 이렇게 공부를 못해.” 이걸 공부 못하도록 누가 낳는데. 본인이 낳아놓고 그걸 책임을 아들한테 묻고 있다 말이죠. 이건 왜 키가 작아? 작고 싶어서 작겠어요? 아빠가 키가 작으니까 유전자가 작으니까 키가 작지요. 이걸 ‘피투성’이라 하는 겁니다.
‘피투성’을 언급한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인데요. 제가 써놓은 의미도 있어요. 왜냐 하면, 자기 인생에 자기를 책임지지 마세요. 아, 이것은 책임지는 순간부터 스트레스 받습니다. 교회 와서 자꾸 목사가 잔소리하는데 그 잔소리 들어주지 마세요. 그리 말하는 지도 못 살아요. 우리는 책임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똑바로 하라고!”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똑바로 하고 싶더라도 똑바로 못하는 존재에요. 똑바로 해서 똑바로 할 것 같으면 똑바로 하라고 이야기해도 정당하지요. 똑바로 말씀대로 살라고 윽박질러도 우리는 말씀대로 못 살게 되어있는 것으로 아담의 후손입니다.
사도바울이 발견한 게 그겁니다. 우리는 말씀을 지킨다? 못 지킨다? 못 지킨다는 것을 발견한 거예요. 누구로부터 잔소리 듣지 마세요. 잔소리 들어서 바뀔 것 같으면 잔소리 듣는데 우리는 애초에 그런 가능성이 없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 안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라는 것이 기쁜 소식이에요. 개과천선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 아니고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 안 된다는 것을 이걸 수긍을 해버리세요. 이게 기쁜 소식의 시발점입니다. 시작입니다.
내가 만약에 말씀을 지킬 수 있다면요, 우리는 이렇게 건방떨며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말씀하옵소서. 예? 말씀하옵소서. 예?” 마치 야구에서 포수가 투수가 던지는 공들을 “자, 던져! 던져! 다 받아낼 거야.” 이렇게 건방을 떠는 것처럼 “하나님이여, 성령 받고 새 사람 되었으니까 말씀하옵소서. 내가 다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건방떠는 것, 그게 바로 유대인들의 실수였습니다.
제가 오늘 강의시작하면서 뭐라고 하던가요? 히브리서9장 25절에 제사장, 대제사장이 왜 있어야 되는가. 피는 왜 갖고 가야 되는가. 성소는 뭐 할라고 성소 만들었어요? 왜 이걸 만드느냐 이 말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하던가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있으니까 남한강의 소풍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왜 이런 지경에 있는지를 몰라요.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왔던 그것을 경로를 밟아서 도로 우리를 주님의 자리로 가게 하신 그런 일을 해야 될 사람이 누구냐 하면 대제사장입니다.
이제 대제사장이 있는 이유를 알았지요. 대제사장은 같은 인간이면서도 다른 인간을 대표합니다. 제사장도 그런 제사장이 아니에요. 대제사장, 큰제사장이에요. 키가 커서 대제사장이 아니고 대표하는 분입니다. 다수의 제사장이 있거든요. 다수가 숫자로 하나가 됩니다. 대표자니까 하나가 됩니다. 둘이 아니고. 하나밖에 없어요. 다수가 하나가 됩니다. 그 대제사장은 같은 인간이지만, 뭔가 다른 인간이에요. 어떤 점에서 다른가 하면,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우리가 미처 모르는 존재가 있게 된 경로를 밝혀주기 위해서 하나님과 연결고리로 연결된 존재, 그게 대제사장입니다.
그 대제사장을 다른 말로 하면 요걸 다섯 자로 하게 되면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돼요. 기름발린 자. 기름발린 자를 이걸 헬라어로 이야기하면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라 하는 것은 호두 안에 탁 깨어보면 그 안에 호두가 있듯이 기름 바른 자가 나와요. 기름이 들어있어요. 기름 바른 자의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피를 유일하게 자기가 관리할 수 있는 자격자가 기름 발린 자입니다.
자, 정리해 봅시다. 대제사장은 다른 사람하고 다르다. 어떤 점이 다르냐, 기름을 발랐다는 점에서 다르다. 기름 발랐다는 기능이 뭐냐, 기름 바른 자는 피를 관리할 대상이 된다. 그럼 그 피를 관리한 것과 우리가 구원 받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그 피가 있음으로서 죄가 사라지게 하겠다는 약속을 함유하고 있는 사람이 기름 바른 자에요.
피를 하나님 앞에 제공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몸에서 발생되고 있는 죄를 없어지는 쪽으로 이렇게 약속이 되어있는 그러한 약속을 받은 사람이 기름 받은 자입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최초로 등장한 기름 바른 자, 여러분 궁금하지요. 그럼 기름 바른 자를 보려하면 기름과 피, 두 가지와 연관되어 있는 인물을 찾으면 되는 겁니다. 창세기4장4절에 보면 그 사람 나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라고 되어있어요. 양의 첫 새끼와 그 다음에 기름을 따로 분류시켰어요. 분류를 해놨습니다. 그것은 이 기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분류를 시킨 거예요. 기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기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늘어내어 놓았는데 그 기름이 어디서 나왔다? 양의 첫 새끼에서 나온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드렸던 아벨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목 졸라 죽는 것이 아니고 피를 흘리면서 죽었어요. 창세기4장10절에 보면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올라온다. 핏 소리, 그 피를 흘렸던 당사자가 아벨이고 아벨이 뭐했던 사람이냐 하면 양과 그 기름을 분류시켜서 기름을 부각해서 하나님께 제사 드렸더니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셨어요.
그러면 아벨은 하나님과 연락이 되는 사람이고 반면에 제사 못 드린 가인은 연락이 안 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이에요. 하나님과 정상적으로 끊어진 자가 누굴 죽였지요? 하나님의 관계가 통했던 사람을 살해하면서 인류의 역사는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뭐냐, 하나님께 돌아가는 여정이에요. 그게 불편한 여정일 수 있지만.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어떻게 돌아가느냐 죽여서. 죽여서 돌아가지요.
아까 제가 대제사장이 뭘 대표한다고 했습니까? 제사장을 대표한다 했지요. 대제사장은. 제사장은 누굴 대표하는가 하면, 레위지파를 대표해요. 레위지파는 누굴 대표하는가 하면, 나머지 12지파를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굴 대표하지요? 여기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했다면 예수님은 누굴 대표하는가 하면, 구원 받기로 작정된 자를 대표하는 사람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혼자 자살했습니까? 늙어 돌아가셨습니까? 어떻게 죽었어요? 피 흘려 죽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대표자가 되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죽음을 당한 처지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천국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산자에요? 죽은 자에요? 개인적으로는 죽고 누구 안에서 살았어요? 예수님과 동행한다는 조건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 보시고 우리를 산 자되게 돼요. 왜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안에서 또는 부활의 영 안에서 또는 성령 안에서 그걸 예수 안에서 우리는 주님 앞에 산 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산 자라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뭐가 되지요?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 안목을 가지고 일가친척 자식 가족들 만나시기 바랍니다. 동창회에 참석해가지고 거기에 등장하는 시체들을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살아있는 모습으로 죽은 자지요. 하나님 앞에서 끊어진 가인 같은 존재들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 믿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걸 믿는다면 더 이상 우리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없다는 것도 같이 믿어야 돼요. 같이 믿어야 돼요.
예수님 믿어서 영생 얻는다면 더 이상 우리에게 일체 심각한 문제는 없습니다. 이걸 제가 낮 설교 초반에 넣었잖아요. 기억나십니까? 안 나겠지요. 심각한 문제는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이 땅에 심각한 문제는 없어요. 왜냐 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심각한 문제라는 것은 딴 게 아니고 사실은 질적으로 나쁜 거예요. 살아있는 나를 더 살리기 위해서 애쓰다 보니까 난간에 부딪힐 때 심각하다 하잖아요.
그것 때문에 주님께 기도한다고요. “주님이여, 이런 곤란한 일에 처했으니까 어떻게 처리해 주세요.” 그럼 주님의 답변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죽으면 되잖아.” “니 눈을 꽉 감으면 될 문제를 가지고 별 문제도 아닌 걸 심각하게 여기느냐.”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뭐 예수 안 믿는 사람 바람피우던 뭐하던 재미로 사는 건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그 말이죠. “결혼식인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예수여, 어떻게 하면 좋으냐.” 이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여자여, 그거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참, 예수님의 안목을 갖는다는 것이 갖기만 하면 참 좋은데, 만약에 가졌다고 생각해 보면, 우리가 상상하기가 겁날 정도로 정말 너무 겁날 정도로 황당하게 느껴지겠지요.
주님께서는 이 땅에 살겠다고 오신 게 아닙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느냐, 관심사가 주의 뜻을 이루는데 관심 있기 때문에 자신이 죽는 것도 아버지 손에 달렸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죽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죠. 단지 죽을 때 죽으면 되고 안 죽을 때는 안 죽으면 되는 것이지 그러면 되잖아요.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말을 함부로 하니까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절벽으로 떠밀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나는 평소에 죽으러 왔다면 떠밀려죽지 왜 안 죽느냐, 아직 때가 안 됐다 말이죠. 떠밀려하니까 그들의 사이로 통과해 가지고 지나가버렸어요. 성경에 그런 대목 있어요. 다 죽고 사는 문제가 스케줄이 딱 있어요.
학교 때 여러분들이 시간표 기억이 나잖아요. 첫 째 시간 국어, 둘 째 시간 영어 이렇게 되어있는데 국어시간에 영어하고 영어시간에 국어하게 되면 선생님이 싫어해요. 다 스케줄 따라서 국어시간에 국어하고 영어시간에 영어공부 해야 되거든요. 우리의 인생 스케줄은 우리가 마련하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피투성이라니까요. 피투성 이라하니까 피투성이를 말하는 것 같은데 그 피투성이가 아니고 누구에 의해서 던져진 존재기 때문에 던져줄 때, 스케줄 따라서 던져진 존재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감사하느냐, 그걸 뒤돌아보면서 감사하지요. 뒤돌아보면서.
기차타고 가면서 요새 기차는 못 보게 되어 있잖아요. 옛날에는 창문 열고 그랬잖아요. 그 때가 그립습니다만. 완행열차 타고 교복입고 통학할 때 보면 학생들이 목 다 내놓잖아요. 어떤 학생은 폼 잡는다고 일부러 출입구에 서가지고 바람맞고 하잖아요. 그런데 보게 되면 특징이 뭐냐 하면, 절대로 앞의 기관차는 안 보여요. 꼭 볼 때 지나간 뒤를 보게 돼 있어요. 우리의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앞의 계획은 주께서 응답 안합니다. 그런데 뒤 돌아보면 모든 게 감사할 풍경만 우리 앞에 주어지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겁니다. 뒤돌아보면서.
자, 오늘 본문 정리해 봅시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간다고 할 때에 이 성소라는 장소, 이 장소는 이스라엘이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성소를 그들에게 던져준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옛날에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텐트생활 했거든요. 늘 이동해야 되니까. 정착이 아니에요. 계속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재촉을 하니까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 하늘에는 만나가 오고 그러니까 그들의 생활은 딱 깨놓고 말해서 그들은 죽은 자의 생활이죠. 사람이 살아있으면 자기의 의미를 챙겨야 되는데 이건 농사도 안 돼, 그저 주는 대로 먹는 개 사료 주듯이 아침마다 새벽마다 만나가 나오고 그리고 어디로 가느냐를 미리 알게 되면 그들이 계획을 잡을 텐데 어디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그 시기에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방향타는 누가 하는가 하면, 아침에 구름 기둥이 성소 안에 피어오르면 출발! 이리 되는 거예요. 출발!
“모세님, 어디로 갑니까?” “나도 몰라” 에브리 바디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그 누구도 몰라요. 아무도 이스라엘 가는 방향을 모릅니다. 광야 시대 때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없어요. 약속의 땅은 없습니다. 약속의 땅이 어느 쪽입니까? 동쪽입니까? 서쪽입니까? 하는 모세한테 묻는 것은 모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그럼 뭘 하느냐, 약속의 땅이 있다는 증거를 지금 광야 이 속에서 찾아내면 되겠지요. 그게 바로 만나입니다. 만나가 거치는 그날 그들은 어느새 어느 땅에 왔습니까? 그들의 두 발은 약속의 땅에 도달한 겁니다.
너는 약속의 땅이 어디 있느냐를 알 필요가 없다. 다만, 니가 약속된 사람이다, 라는 것은 흔적만 니가 평소에 간증하고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흔적만. 갈라디아서6장에서 나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 사도바울이 했잖아요.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흔적을. 그 흔적은 누가 새겨주고 누가 만들어주느냐 흔적은 주님께서 만들어주십니다.
그 흔적이 뭐냐 하면 바로 성소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성소에요. 그리고 성소가 있는 이유는 그 성소를 히브리서9장25절 말씀처럼 성소는 성소의 운영 그것은 돈으로 처바르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오늘날 교회가 그 짓하지. 성소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소는 인간의 노동한 것으로 처바르는 게 아니에요. 성소에다가 TV놓고 탁구대 놓고 농구장하고 커피 자판기 놓고 그렇게 해서 성소가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성소에 들어갈 모든 것은 일체 인간의 아이디어나 인간의 행위에서 나올 수 없는 것들만 거기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인간의 문명이라는 인간의 손으로 아이디어로 만드는 건데 인간이 만들지 않고 인간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럼 누가 그걸 성소 안에 있는 모든 장치는 누가 장치하느냐, 그것은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 때마다 집어넣어주는 거예요. 집어넣어줄 때 뭘 집어넣어줍니까? 목사님!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깨어진 돌판, 만나가 든 항아리, 이게 나중에 성전에 들어가요.
자, 깨어진 돌판, 만나 든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거기에서 살구나무 열매가 맺혔거든요. 그것은 인간들이 만든 겁니까? 지팡이에다가 싹을 모조품을 만들었어요? 이미테이션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아니지요. 도리어 인간들은 그럴 리 없다고 뺐잖아요. “에이, 아무리 하나님 살아계신들 어떻게 지팡이가 싹이 나. 있을 수가 없어.”라고 뺐다 말이죠. 반대하고 방어한 거예요. “어떻게 아론 너만 잘났고 우리는 왜 못 났느냐?” 사실 그 때 아론은 죽었지만. 어떻게 모세 너만 잘났고 왜 우리는 같은 레위지파 우리를 무시하느냐 이렇게 뭔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발하면서 생긴 흔적들이 바로 성전에 안치될 흔적들이에요.
그러면 성전에는 뭐가 들어가면 됩니까?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에 대해서 우리의 불신앙의 증거들이 성전에 수북이 쌓이고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 전시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성전 안에서 우리가 잘난 척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우리는 잘난 척 할 수 없어요. 십일조하면서 얼마나 손은 1분에 30번씩 떨었습니까? 드르르. 어느 목사님은 이거 없다고 하는데 나는 눈치 보여 안 할 수도 없고 에이, 더러워서 동양 주듯이 하자 이런 식으로. 아이고, 이것만 있으면 애 피아노 레슨 하는데 이거 하나님께 바치니까 하나님께서 다음 달에 피아노 1등 하게 해주시오, 이런 흥정 논리로 얼마나 냈습니까?
그동안 감사헌금 안했다고 우리 집에 우리 남편이 차사고 났는데 하나님은 얼마나 그거 헌금 안했다고 그렇게 사고를 내시면 하나님, 나 어떻게 삽니까? 더러워서 그럼 내가 냅니다. 다음부터 빨리 좋은 차 사 주세요. 이렇게 하면서 얼마나 냈던가요. 주정헌금 안했다고 애가 이렇게 성적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도 참 돈 디게 밝히네. 에~에에 이거 먹으시고 다음 애 성적 원상 복귀해 놓으세요. 이런 식으로. 그것들이 전부 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줬는데 우리는 돈 달라 해서 그 돈으로 평소에 애굽에서 살아왔던 그 방식으로 살아야 그게 사는 줄로 아직도 착각 속에 있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를 죽이는 작용인데.
제가 아까 강의 처음하면서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처음부터 다시 해볼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히브리서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가 왔던 그 자리가 어떻게 해서 이런 자리에 살게 됐느냐를 그 경로를 밝히기 위해서 했다고 했지요. 히브리서2장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우리가 신체가 있다는 것, 세포로 되어있다는 것, 세포로 된 이유를 과학자는 몰라요. 세포가 몇 개냐는 그걸 조사는 하지만, 왜 우리가 이런 세포라는 단백질형태로 되어있는가를 그건 과학자가 어누 과학자도 말을 못해요. 인간에게 DNA있다. 왜 있느냐? 몰라요. 진화의 산물인데. 이런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고. 그럼 처음부터 아메바지 왜 아메바 됐다가 진화됐는데? 몰라요. 하여튼 과학자에게 물어보면 전부 다 모른데.
그런데 성경에 나와요. 혈육이 만들어진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마귀로부터 시험받기 위해서. 마귀는 뭐냐, 혈육 적 존재가 아닙니다. 영적 존재에요. 천사입니다. 타락한 천사에요. 천사한테 육은 패배하게 되어있어요. 영은 모든 걸 알고 천사는 무재하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처음부터 무재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무재하게 만들면서 하시는 당부한 게 있어요. 절대로 니가 똑똑하면 죽는다. 어떻습니까? IQ높고 공부 잘하는 사람들 수상하지요. 많이 안다는 사람들 굉장히 곤란스럽지요. 무지가 구원이 될 줄이야. 똑똑함이 지옥 갈 줄이야 상상이나 했습니까?
“똑똑하게 알고 제대로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내뱉는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이건 변명이에요. 처음부터 몰라야 된다는 거죠. 처음부터 몰라야 되는데 우리 인간은 뭐냐 하면, 알고 제대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알고서는 제대로 못하게 되어있어요. 왜요? 바로 알고서 못했던 자가 있기 때문에. 그게 누구냐, 사탄입니다. 사탄은 선악에 대해서 알고 그 선악의 기준대로 못 살았어요. 그래서 욥기에서 사탄을 보면, 욥기1장에 보면 나옵니다.
욥의 하는 기능이 뭐냐 하면 바로 지적질이에요. 스가랴4장에 사탄나오지요. 사탄이 하는 일이 뭡니까? 얼레리 꼴레리에요. “저기 여호수아 옷 더럽습니다. 아이~ 옷 더러워라.” 욥기에 보면, “욥이 잘난들 얼마나 잘났겠습니까? 받아먹어 챙긴 게 있으니까 주께 감사하지. 다 뺏어보세요. 원망하지.”라고 했던 게 욥이에요. 그러니 사탄은 하나님의 천상회의의 반드시 앞자리에 있어요. 하늘나라 회의에. 반드시 천사도 있고 반드시 사탄이 있어요. 사탄이 해야 될 일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고 철저하게 그걸 밝혀내는 검사 역할을 해야 됩니다. 검찰청 기능을 해야 돼요.
말씀에 의해서 철저하게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해서 완벽하게 선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 하는 것을 사탄은 알고 있어요. 그 함정의 늪에 인간을 집어넣어버린 겁니다. 선악과 따먹는 순간 인간은 감당 못할 다른 영지, 다른 토지, 다른 영토에 와버렸어요. 그게 느낌으로 온 겁니다. 그게 뭐냐, 아무 이유도 없이 부끄럽게 하는 거예요. 부끄러워진 거예요. 부끄럽다는 말은 왜 부끄러운가? 기껏 이유를 찾는 것이 벌거벗었기 때문에 부끄럽다는 겁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왜냐 하면, 전에는 안 벌거벗었습니까? 왜 부끄럽습니까? “벌거벗었기 때문에 부끄럽습니다.” 라는 이유를 토를 단다는 것은 이미 그 인간이 그 인간 아닙니다. 이미 잘못된 존재에요. 벌써 망가진 장난감입니다. 장난감 디디디디 소리만 크지 재미하나도 없지요. 이것은 밟아야 돼요. 밟는 게 사랑입니다. 죽여 없애는 게 사랑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죽이시는 게 사랑이고 죽이는 과정이 인생 실패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실패가 구원이라 했지요. 인생 실패가 구원이에요. 여러분들이 내가 실패하도록 주께서 조치한다는 것만 요 하나만 아셔도 교회 가서 목사한테 사기꾼한테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 목사의 모든 설교는 “이렇게만 하시면 성공합니다.”라는 것이 주 내용이기 때문에. 나는 마땅히 실패해야 될 이유를 알고 싶어서 교회 찾아온 사람한테는 그런 속임수가 먹혀들지를 않겠지요. 그런데 빨리 원상회복하고 싶어서 성공하고 싶어서 그 때 성공의 그 시절이 그리워서 온 사람한테는 이거 대학교수건, 박사건, 신학박사건, 철학박사건 다 필요 없어요. 다 넘어갑니다. 그 속임수에.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에요.” 이래가지고 다 넘어갑니다.
인간이 가장 성공하는 순간은 어떤 순간이냐 하면, 내가 실패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가장 성공한 사람입니다. 나의 자리가 제일 밑바닥인 것을 아는 것이 가장 성공한 사람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출애굽기25장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 되어있지요. 즐겨내는 자에게 받는다, 라고 되어있지요. 말씀에 분명히 되어 있잖아요. 이 보는 순간 모든 인간은 이걸 실시하려고 시도하겠지요. 왜? 이걸 시도함으로서 나는 주의 백성 새로운 피조물 맞다, 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차원에서 지키고 싶은 거예요. 성경 말씀에 나온 것은 그대로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사야53장10절에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여기에 이사야53장10절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지요. 그렇잖아요. 담당시키고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이리 되어있지요. 자, 우리는 양 같아서 도망쳤다 말이죠. 그런데 도망친 우리를 위해서 4절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리 되어있지요.
아까 출애굽기25장2절에서 우리가 드리면 받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다 드렸잖아요.”하지요. 드렸는데, 그것이 주님 앞에 받으심 즉한 그런 성질이었느냐 그 말입니다. 아닌 거예요. 그게 아니라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의 대표자가 오셔서 자신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는 양 같아서 도망쳤고 우리를 대신하여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았다. 자신을 드릴 때,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고 채찍에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고 찔림을 받는 식으로 드리는 이것이 성소에서 마치 제물을 죽일 때, 째서 도리고 피 흘리고 한 그런 제물의 양상으로 드림과 동일한 거예요.
그러면 이게 무슨 뜻입니까? 성경 전체가 출애굽기, 이사야 두 개를 합쳐보세요. 그럼 무슨 뜻입니까? 우리에게 아무리 말씀을 줘도 말씀대로 하는 그 행세가 결국 무엇을 계속 유발한다? 주님의 아픔을 주님의 찢기심을 채찍 맞음을 더욱 더 유발시키는 행위가 된다는 겁니다. 그 말은 방금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주님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뭐다? 당연히 실패자이다, 이 말이죠. 그것을 아는 자가 구원에 성공한 자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은.
그래서 교회는 오직 십자가 복음만을 전해야 돼요. 최종적으로. 마지막 돈 내라, 선교회비 내라, 이 말을 하면 안 되고 십자가만 전해야 돼요. 여러분들이 뭘 내든 뭘 헌신하고, 교회 유리창을 닦는 봉사를 하고 꽃꽂이 하고 피아노 치는 봉사를 한다 할지라도 찬양하는 봉사를 한다 할지라도 주일에 봉사할지라도 그것은 안 받습니다. 오직 받는 것은 못난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피만 받습니다만 외치는 교회가 되어야 돼요.
만약에 우리가 새삼스럽게 십자가 피가 왔는데도 이렇게 주께서 그냥 곱게 올라가신 게 아니에요. 완전히 난도질당해서 올라가셨잖아요. 그런 난도질당했다는 그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행하라고 하는 말은 이건 분명히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주여, 이거 바치면 30배, 60배, 100배 더 준다 했으니까 줄 거죠?” 요거, 자기 인생 성공 만들기 위한 수작으로 그렇게 하는데 그게 속임수라는 말이죠. 그렇게 하면 마귀가 놀립니다. “니, 똑바로 했어?” “제대로 했나?” “그 지폐 다림질했어? 다림질할 때 침 뱉어서 했어? 안 뱉고 했어?” 이것은 “니가 분명히 헌금할 때 그 순간 10시45분에 했는데 와 그날 12시 25분에 부부싸움 왜 했는데?” 모든 순간, 순간이 완벽하게 의로운가를 자꾸 마귀가 와서 촉구를 하니까 인간은 정신병자가 돼가지고 “그래, 더 열심히 해야 돼!” “더 바쳐야지.” “구약에는 십일조 했는데 신약에는 십에 이조를 해야 된다.” 이래가지고 점점 더 늪에 빠지는 거예요. 마귀의 늪에 빠지는 거예요. 자기 완벽성에 더 빠져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2의 제3의 위선자가 계속 점점 위선자로서 위선이라는 그 질병에 더 깊이 더 빠져들어요. 지금 방송에 보게 되면 건강 프로그램이 많잖아요. 그리고 또 인문학 강좌가 유행해가지고 이렇게 하는데 건강문제나 인문학 문제는 그 마지막 심지어 기독교 케이블에 있는 기독교 방송 문제는 전부 다 하나로 초점돼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인간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 그것과 관련되어있어요.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니가 뭔데 행복해야 되는데?” “니가 왜 행복해야 되는데?” “니가 마땅히 행복해야 된다는 그 이유를 나한테 이야기해봐라.” 예수님이 찢겨진 대로 예수님이 피투성이가 안 되면 우리는 하나님 멀쩡하고 우리 멀쩡하면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멀쩡해야 됩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중간에 누가 들어가 있어요? 이미 우리를 대표해서, 아까 대제사장이 뭐라고 했습니까? 대표자라고 했지요.
우리를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섰던, 아버지 앞에 섰던 그 분이 완전히 난도질당했잖아요. 그건 우리가 받을 난도질이거든요. 우리 주제파악 하라고 주신 죽었던 그 사건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성전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사건으로 유지돼요. 날마다 사건으로.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 때 그 때 만든 것으로 갈아치워야 되는 겁니다. 만나를 이틀 치 주면 안 됩니다. 썩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당시 아줌마들은 또 만나를 썩는다고 분명히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자식새끼 걱정돼 가지고 자식 키운다고 또 이렇게 비축을 해놓은 거예요.
그렇게 비축을 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오늘이 3월13일이죠. 아침에 만나 받았잖아요. 그러면 내일이 3월14일이 되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비축한 아줌마는 13일의 연장이에요. 14일은 오지도 않았어. 그 아줌마한테는. 내일이 14일이 되려면 13일을 잊어줘야 14일이 되는 겁니다. 그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제발 주님의 스케줄로 따라가세요. 3월14일에서 3월15일로 가는 것은 우리가 기다려서 오는 게 아니고 3월15일 날 눈 떠봐야 알아요. 그냥 눈이 떠지거든 주께서 또 살려주셨고 살려주신다면 일용할 양식, 하루치만 주시겠지요.
그리고 주무실 때는 내일은 없어요. 오늘 잘 때는 오늘 그날이 마지막이에요. 마지막 않겠다고 눈에 성냥개비로 해서 밤새도록 TV보지 마시고. 그러더라도 잠 와요. 잠이 뭐냐 하면, 죽음이거든요. 잠의 특징은 뭐냐, 살아있다는 의식을 못하는 게 잠의 특징이에요. 내가 살아있으면서 꿈꾸는 사람은 그건 아직 잠에 안 들어간 거예요. 잠잤다는 말은 수면내시경 다 해봤지요. 깨보니까 벌써 끝났어요. 깨어보니까 꼭 뭔가 빼앗긴 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 늘 촘촘히 내 의식으로 꽉 채워야 될 그 시간이 이건 의사가 주사 한 방으로 똑! 똑! 떨어지고 난 뒤에는 뭔가 구멍이 뻥 뚫렸어요. 그걸 무엇으로 채우지요? 되게 허전한 걸 느끼지 못했습니까? 여러분. 수면내시경하고 난 뒤에. 징검다리가 촘촘히 건너야 되는데 붕 뜬 느낌이 들어요. 내 인생 뭔가 빵구 난 거 같아서 허전한 느낌 들지요. 어쨌든 3월 14일이고 15일이건 간에 그날의 잠을 자게 되면 잠과 동시에 그 사람은 죽은 겁니다.
죽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지금껏 살아온 것은 전부 다 날아가 버리고 없어요. 잔상이 있는데, 잔상이 바로 램(RAM)순간이라 해서 이게 꿈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꿈은 많은 꿈 중에서 제일 마지막 꿈만 기억하게 되어있어요. 앞에 것은 다 사라졌지요. 수요예배 드리면 주일예배는 다 잊어버리고. 마지막 설교만 기억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여인도 마지막 여인만 기억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보고 기억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만 기억하라는 거죠. 그런데 십자가만 기억하는데, 십자가에 들어가 보니까 어째서 십자가냐 하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 선배들은 옛날 이스라엘 때, 그 때 그 당시에 있었던 일을 지금 히브리서 9장25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개하는 겁니다. 옛날에는 제사장도 있었고, 옛날에는 성소도 있었고, 옛날에는 짐승의 피도 있었고, 그것도 언제에요? 자주. 자주인데 사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자주했다. 그게 바로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옛날일이다. 하지만, 26절에 보면,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자기를 어떻게 하지요? 단번에 드려야 되지요. 단번에. 단번에 드렸잖아요.
그러면 단번이라 하는 것은 처음부터 단번이 아니고 자주 드린 것을 먼저 전제로 깔아놓고 그 자주 드린 것과 단번과 니가 한 번 비교해보라는 거죠. 다시 말해서 “자주할까? 한 번에 끝낼까?” 하고 우리한테 묻는 거예요. 회충약 따로, 십이지장충 따로, 촌충 따로, 그리 먹어야 될까요? 회충, 촌충 그걸 한 번에 딱 끝내 버릴까요? 단번에 끝내잖아요. 단번에 종근당 제약에서 나오는 젤콤 있잖아요. 회충, 촌충 한 번에 끝나는 거. 딱 한 번에 끝내잖아요.
그럼 우리는 묻지요. “왜 그럼 한 번에 끝날 것을 왜 전에는 자주했습니까?” 그 때는 하나님이 제물 드린 게 아니고 그 때는 인간 제사장이 동물제사 드렸거든요. 동물제사 드리고 인간제사 드렸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얼마나 그게 부실했으면 아침, 저녁마다 매일 드려야 돼요. 매일. 여러분, 이거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럼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묻습니다. 예배를 몇 번 드려야 받습니까? 천국 갑니까? 한 주 예배 몇 번 드려요? 새벽기도가야 됩니까?
이런 이야기해서 여러분에게 미안하게 되는데. 교회에 한 번도 안다니다가 교회 오게 되면 구원받고 싶어서 또는 천국가고 싶어서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다 한다고 주보에 보니까 교회의 스케줄이 나와 있거든요. 새벽기도 늘렸지요. 주 오전, 낮 설교, 수요설교, 금요철야기도, 새벽기도 있다 말이죠. 그리고 보니까 11시 예배인데, 10시 반부터 전도사님이 앞에서 두드리면서 성경찬송 준비한다고 하니까 10시 반부터 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걸 처음 오게 되면 지켜봐요. 저분은 몇 일내에 5분 늦게 예배 참석하는지 보자. 몇일 내에.
처음에는 다해요. 모든 참석하다가 실실 한 두 개씩 제깁니다.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도 일주일 내내 오다가 주일은 지켜야 되니까 주일 새벽기도는 지가 타협하고 협상하고 바빠요. 지가 스스로 협상 타협한다고. 그 협상 타협할 때, 조심스럽게 뭘 하나 끊어 봐요. 그러니까 새벽기도를 늘 나오다가 주일날만 나오고 그 다음 한 주간 돌아본다고요. 왜? 혹시 벌 받는가, 안 받는가. 오!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아이고, 되는구나!
목사가 십일조 내라하니까 십일조 내는 범위를 정해요. 소득세 제기고 내느냐, 소득세 포함해서 내느냐, 이런 것까지 전세금 받은 것도 내느냐 하다가 몇 번 안 해봐. 안 해봤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무 일도 없어요. 그 다음에 보너스 포함해서 십일조냐, 수당 포함해서 십일조냐, 수당만 제기로 하느냐, 본봉하느냐, 마지막에는 십일조 하는 사람 본봉으로 마무리돼요. 본봉이 제일 약하거든요. 보너스 받을 때는 안돼요. 그 다음에 제기다가 온갖 다 제겨요. 주일 오전 오후 하다가 그것도 참석 안 해. 수요 예배도 참석 안 해.
수요예배도 처음에 참석하다가 처음에 너무 참석 안하면 안 돼. 수요일 날 비가 온다든지 날씨가 추우면 안 와. 집에서 동영상보면 되니까. 주일 오후에도 처음에는 참석했어요. 하다가 주일 오후에 밥 먹고 조는데 차라리 집에 가서 편히 쉬면서 듣는 게 낫겠다. 이래서 안 와. 11시 예배도 처음에는 10시 반에 왔거든요. 지만 10시 반에 왔고 나머지는 일찍 안 오거든. 10시 40분에와도 몇 명밖에 안 와. 나중에 교회 오래 다니다보니까 전부 다 11시 5분 되어야 들어오고 11시 시작해도 오지도 안 해. 사도신경해도 전부 다 오지를 안 해.
저는 그걸 보면서 참 신앙이 이제는 많이 성숙했다, 이리 봐요. 복음을 알기 때문에 자유를 찾은 거예요. 율법으로서 벗어난 겁니다. 물론 너무 벗어나서 이제는 한 달에 4번 오다가 2번 오다가 그것도 안돼서 두 달에 한 번 오다가 1년에 한 번 오고. 심했다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걸 보고는,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기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겁니다.
단번에. 왜냐 하면, 예배 참석, 헌금, 봉사 다 내가 하는 거야. 내가(인간)하는 것은 천국에 들여놓지를 않습니다. 일체 거부합니다. 이걸 아셔야 돼요. 내가 예배 몇 번 참석했다. 꽃꽂이 내가 했습니다. 주일학교 봉사했습니다. 반주 했습니다. 성경공부 참석했습니다. 일체 주께서 안 받습니다.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은 주께서 꽃꽂이 하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주께서 수요예배 참석하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오늘은 허락을 안 하셨네요. 가고 싶지만, 오늘은 동영상 봐야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전에는 남편 전도했는데, 전도하는 것도 이제는 안 해. 왜? 허락되어야 되니까. 잔소리해 가지고는 안 돼. 너무 낭비가 심해. 남편 교회 하나 보내려고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 이것도 이제 짜증나. 모든 것이 주께서 스케줄대로 된다는 사실을 받으시면 모든 것에서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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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0150313b-히9장25절(구원의 장치)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25절 다시 봅시다. 피로서 성소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제가 설명하면 너무 어려우니까 아주 쉽게 말씀드리겠어요. 성소, 피 이런 것과 관련 있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게 있음이 돼요. 그런데 성소, 피와 관련 없이 있는 것을 없음이 돼요. 없음이 되는데, 이 없음을 구약에서는 이걸 ‘이방인’이라고 합니다. 이방인.
있음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아들 또는 내 백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이고, 내 새끼 여기 있네.” 있다, 하잖아요. 분명히 이방인들은 있어요. 이스라엘 제사장 그 순간에 다른 민족들은 산에서 활 쏘고 양 몰고 나름대로의 농사짓고 살잖아요. 이스라엘 그 시대에. 이스라엘 국가가 있는 게 다윗 같은 경우는 BC1000년이거든요. 하여튼 다윗은 BC1000년으로 보면 계산 쉬워요. 모세는 BC1400년이고 그리 보면 돼요. 솔로몬시대에 들어가면 BC700년 들어오는데, 그 시대에 다른 중국도 있었고 다른 민족도 엄연히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없는 걸로 보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마지막 때는 남아있는 것이 하나님 곁에 남아 있는 자들이 자기 백성들밖에 없는 거예요. 자기 백성들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있다, 없다, 이런 모든 단어하나 사용하는 것을 미래에 쓰는 단어를 일찍 우리한테 줘놓고 우리한테 뺏지 처럼 달고 다니게 만드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낯선 존재가 돼요. 내가 생각해도 낯선 존재고 남들은 더더구나 “저거 똘아이 아니야?” 미친 존재가 되고 말지요.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십자가 옆에 달렸던 강도가 하나있고, 둘이었습니다. 그 구원받지 못한 강도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이런 이야기하는 거 잘 들어보세요. “예수여, 당신이 정말 메시아라면 지금이라도 우리를 못 빼고 여기서 다시 고향으로 교도소에서 나와서 내 있던 자리로 돌아가게 되면 당신을 섬기지 말래도 알아서 섬긴다. 그런 솜씨를 부려봐라.” 이리 나왔어요. 극히 정상입니다.
그런데 다른 강도, 방금 이야기한 똘아이라고 한 강도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생각해 달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지금 예수님 당신이 죽으신 그것이 당신나라, 하늘나라 만드는 코스 맞지요?” 이리 보는 거예요. 지금 하나의 경로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그런 식으로 해서 천국 만들려 하는 거 맞지요? 그렇다면 제가 눈치 챘으니까 그 주님 나라에 저를 생각해 달라할 때에 주께서는 “니가 나와 함께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옆의 정상적인 강도, 당신이 건져주면 내가 당신을 섬기겠다, 한 그 강도는 보면서 예수님하고 강도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둘 다 똘아이 아니야? 둘 다 미친 거 아닌가? 아프니까 정신이 혼미해가지고 지금 헛소리들을 하고 있구나!” 이리 되는 겁니다. 바로 구원받은 그 강도는 강도짓을 해서 구원받은 겁니다. 아니 더 심하게 말해서 강도짓을 해야만 구원받아야 돼요. 구원 못 받는 강도는 구원을 못 받아야 지옥 가는 겁니다.
그래서 언젠가 제가 그런 이야기했지만, 제가 느낀 것은 지옥도 절대로 자기 마음대로 지옥에 못 간다는 겁니다. 허락 없이는 지옥 못 들어갑니다. 지옥 가는 거 허락 있어야 돼요. 지 맘대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주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주님의 손이 좌지우지하고 당기고 밀었다 하는 것이 다 주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이게 아까 첫 째 시간에 했던 전 세계는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된 거예요. 창세기 1장에 그거 안 나와 있어요. 창세기1장에는 이리 나와 있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리 나와 있지요. 그거 이야기가 골로새서1장16절에 보면 세상 만물은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됐다. 이제 신약에 와서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복음을 전할 때, 고 때 고 내용이 섞여서 우리에게 알려지는 겁니다. 처음부터 다시 소급해 봐라. 거기에 예수님이 계셨다. 니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는 ‘피투성’이다.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이 땅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그리고 주님 가신 그 길이 죄진 우리가 주의 품에 안기는 그 경로를 예수님이 먼저 공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먼저 보여줬고 우리는 그 길을 이제는 차분하게 주께서 깔아놓은 그 길 따라서 우리는 끌려가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내가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고는 아버지에게 갈 자가 없다. 다시 말해서 너희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하나님이 없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은 우상이다. 마귀가 만든 거예요. 예수님에게만 하나님 있지,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게 되어있어요.
자, 있다, 없다, 를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있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소와 관련되어 있을 때, 있다. 그러면 진짜 있는 것은 구약의 25절에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크게 쓸게요. ‘성소’만 있는 겁니다. 이 성소를 구약 끝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성전’이라 했고 이 성전의 개념은 신약까지 이어집니다. 뭐만 있느냐, 하나님의 성전만 있어요. 그러면 성전을 다른 말로 풀이하면 어떻게 되는가, 나와 백성이 함께 있는 거죠. 임마누엘이죠. 그것만 있어요.
니만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죄 짓고 난 뒤에 있다 하는 것은 나만 있다고 이야기 하거든요. 요거 상당히 철학적으로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세상이 있는 이유가 내가 지금 눈 뜨고 있기 때문에 있는 거예요. 나에게. 이걸 현상학이라고 이야기해요. 철학에서 나오는 건데, 현상학이라 하는 것은 세상이라는 것은 내가 의식으로 구성해내기 때문에 내 앞에 의미 있게 있다는 그겁니다. 내가 눈을 감는 순간 이 세상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열 명이 있다면 열 명이 보는 세상이 다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열 명의 눈동자가 다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이 다르다는 말을 눈동자가 다 다르다고 이야기했지만, 자세히 이야기하면 살아온 성장의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현재 니가 보는 세상이 다 달라요. 그것을 가지고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기억되어 있는 질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각자 보는 세상이 다 달라요.
열 사람이 예수이야기하면 예수가 다 달라요. 열 명이 다 달라요. 기억된 정보가 있기 때문에. 그럼 열 명이 다른데 그럼 천국이 열 가지냐, 그럴 수는 없잖아요. 천국은 한가지입니다. 그러면 그 열 명이 천국에 갈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자기의 모든 기억을 죄라고 규정하게 됨으로서 다 잘라버려요. 다 자르고 그 기억들을, 자기가 아는 기억들은 다 잘라버리고 그 아는 기억을 다른 걸로 바꾸어줍니다.
어떻게? 죄 된 기억으로 바꿔 줘버리면 니가 살았던 내가 살았던 살아온 것은 기억은 있지만, 그것이 죄악 된 기억이고 그 죄악 된 기억을 예수님의 피로 다 의롭다함을 받아버리면 모든 천명이 오던 백 명이 오던 전부 다 똑같은 소리를 해요. “죄인인데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아서 여기에 왔습니다.”
제가 오후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까? 천국 가거든 이런 소리하라고 했지요. 천사가 와서 어디서 왔냐고 묻거든 “나, 대구에서 왔습니다.” 하지 말라고 했지요. 제가. “안양에서 왔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걸 묻는 게 아니고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은 있다, 없다, 를 묻는 겁니다. 성소에 담겼다 왔느냐, 아니면 없는 존재로 왔느냐, 그걸 묻는 거예요.
우리는 성소에 있음은 성전 안에 있음에 합류된 있음으로서 있다가 주의 피로 용서받고, 왜? 성소에 피가 있으니까. 제사장이 피로서 가니까. 피로 범벅이 되는 새 성전은 피로 범벅이 돼요. 피로 범벅이 된 세계에서 피 적심을 받아서 주님께 왔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라는 말이죠. 요러한 세상관은 누구의 세상관이냐 하면, 각자 우리의 세상관이 아니고 우리의 대표자이신 예수님이 다녀갔던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고 느낀 것이 우리의 안목으로 성령을 통해서 전환됨으로서 우리도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걸 사도바울은 내 안에 주님이 있다고 이야기하지요. 내안에 주님이 있고 주님 안에 내가 있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내 안에 주님이 있고 주님 안에 내가 있다는 말이 얼른 풀이하려면 설명하려면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따지고 보면 어려운 말은 아니에요. 뭐만 없애면 되느냐 하면, 이 물질적인 공간관만 살짝 포기하면 되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 못한다 했거든요.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 했잖아요. 그러면 그 말을 이렇게 하면 돼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우기는 것은 인간들이 우기는 겁니다. 인간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좌표를 정하는 것은 거기에 누가 있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다고 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담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했지요.
그런데 아담이 말하기를 뭐라고 합니까? “지금 주님 피해서 숨어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런 답변을 하면 안돼요. 왜냐 그런 답변은 이미 범죄하고 난 뒤에 죄 짓고 난 뒤에 자기 있는 위치를 정할 때, 자기중심으로 위치를 정해놓고 바로 여기 있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아, 니는 여전히 내 안에 있다.” 라고 언급하기 위해서 어디 있느냐고 물어본 거예요.
주님이 아는 공간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강요하시는 거예요. 강요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공간은 포기를 해주셔야 됩니다. 바다 끝에 가도 거기 계시고 하늘 끝에 가도 거기 계십니다. 라는 공간 관으로 바꿔주시기 바랍니다. 니가 산에 있는 노루를 니가 하나님께 바친다고 해서 바친 게 아니다. 왜? 산에 있을 때도 노루가 거기 있었고 니가 그걸 가지고 성소에 있더라도 노루는 거기에 있고 다 하나님 안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시편에서.
니가 헌금을 하는데 니가 언제 헌금을 했나? 내가 그냥 산에서 양이 뛰어놀면 그것도 내건데 뭐가 산에 있는 양을 잡아다가 바쳤으니까 받으소서! 그런 것은 나한테 안 통한다는 거예요. 너는 무엇을 바칠까 생각하지 말고 내가 너에게 준 것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보라는 말이죠. 준 것을 유지하고 있는가.
그래서 제가 음행이라는 설교를 했지요. 음행이란 설교를 했는데 제가 거기서 강조한 게 있지요. 음행이란 설교에 나옵니다. “음행을 나는 안 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받아주는 게 아니에요. 음행 안하고 지옥 간다니까요. 음행하고 천국가고. 이 소리하면 깜짝 놀랄 거예요. 성경에 나오니까.
하나님께서 음행한 자로 하여금 진짜 음행을 통해서 진짜 보호해야 할 게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면 구원받는 겁니다. 니가 음행했느냐, 안 했느냐 그걸 묻는 게 아니에요. 정작 니가 지켜야 할 것을 지켰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음행한 그 죄마저도 용서받는 그 복음을 니가 유지하고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그게 심각한 거예요. 아까 처음에 했잖아요. 진짜 심각한 것은 복음이 중요하고 심각하지 복음외적인 것은 안 심각하다 했잖아요. 분명히 이야기했지요.
히브리서9장25절, 26절에서 하는 이 이야기를 우리가 “목사님, 이 이야기가 무슨 뜻입니까? 설명해 주세요.” 라고 할 때에 제가 설명할 때에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하셔야합니다.” 이런 식으로 설명 못해요. “당신이 있기 전에 뭔가 있었습니다.” 라고 설명해요. “당신이 있기 전에 성소가 먼저 있고 성전이 먼저 있고 제사장이 먼저 있고 피가 먼저 있었습니다. 단지 여러분과 이것과 관련되어 있으면 여러분 진짜 주님 앞에 있는 존재고, 그게 없으면 여러분은 없는 존재입니다.” 라는 것을 지금 제가 1시간 4시간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야 이게 설명이 돼요.
왜 그렇게 설명이 되는지 이유를 대보세요. 하면 우리는 내가 여기 있으면 내 중심으로 봐요. “주여, 저 천국 갈까요? 말까요?” 내가 천국가고 지옥가고 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왜? 내가 우선 있어야 되는데, 내가 홀로 있는 것을 있음으로 간주로 안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여기서 언급이 없어요.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드릴 때, 다른 민족도 있었어요. 그러나 언급이 없어요. 그것은. 그걸 가지고 에베소서2장에서는 뭐냐, ‘언약 밖’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에베소서2장 12절,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그 때는 이방인들 너희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언약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지요. 밖에 있었다는 말은 없다는 말이에요. 이게.
지금요, 오늘 강의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은 자기 백성 만들기 그것만 생각하거든요. 그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오면 있는 거고, 그 안에 없으면 없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저는요? 저는요? 자꾸 내 중심을 본다고요. 내 중심으로 보니까 여기다가 성경 뭘 집어넣어도 우리는 이걸 전부 다 내 중심으로 ‘아, 내가 요걸 믿으라는 말이지, 행하라는 말이지.’ 자꾸 내가 뭘 행하고 믿는 것도 행함이니까. ‘내가 믿는다는 행함을 하게 되면 구원 받겠지. 자꾸 내가 뭘 시도하게 되면 시도한 그걸로 내가 나를 건질 것이다.’ 이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없는 존재를 있게 하려면 우리가 덮쳐져야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있는 것이 없는 나를 덮쳐버리면 우리는 그 때부터 없는 존재가 아니고 덮쳐진 안에서 우리는 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예수 안이 우리에게 덮쳐버리면 예수 안 에 우리가 있어버리면 우리도 예수 안에 있는 존재, 없던 존재가 있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이 접시가 언약이라면 접시가지고 덮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빼도 박도 못하게 구원이 되어버린 거예요. 간음하던 음란하던 관계없어요. 이미 예수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거예요. 이게 복음이라는 말이죠. 자꾸 사람들은 꼼지락거리고 행하라, 행하라, 이걸 행해버리면 덮어준 접시의 가치가 떨어지잖아요.
아까 이야기 다시 해볼까요. 이사야53장에서 하나님께서 뭘 받으신다? 출애굽기에서는 우리를 받는다고 해놓고 이사야에서는 오직 누굴 받는다? 주님만 속죄 제물로 받아요. 받을 때, 곱게 받는 게 아니고 난도 질 당했잖아요. 채찍질에 맞음으로. 이게 무슨 뜻입니까? 워낙 자기 백성은 양같이 도망을 다 가버렸으니까, 에베소서2장 말씀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접시를 만들어가지고 접시가지고 “요놈! 요놈!” 가는 곳마다 요걸 잡는 거예요. 요거 걸려들었다! 요 쥐새끼 걸려들었다! 탁탁 걸려들어서 요 걸려든 것을 예수 안에서 구원 받았다, 이리 되는 겁니다. 끝! 되게 간단하지요.
성경해석 할 때 하나님 입장에서 무엇이 있느냐, 누구를 사랑하느냐, 예수님만 사랑하거든요. 예수님 사랑에 맞추다 보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사랑받게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 때문에 받은 혜택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지 내가 열심 낸다고 구원 받는 거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은 누구를 위하여 이야기한 거죠? 저한테 물으면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우리를 가지고 요놈! 조놈! 하고 쥐 잡듯이 잡은 거예요. 자기 백성을. 잡아놓고 하는 말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니가 잡힌 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보낸 자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교회에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잖아요. 요한복음3장에 보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다 했는데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는 조로 질문을 했잖아요. 제가 뭐라고 답변했습니까? 그 세상은 세상을 사랑하는 그 세상이 아니고 요한복음17장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세상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걸 위에서 볼 때 세상을 버리지 않고 몽땅 버리지 않고 세상을 찾아간다는 뜻에서 사랑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만약에 우리 중심으로 세상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한데. 우리를 만든 것이 사랑이래. 그러니 만들었으니까 구원도 책임지겠지. 그럼 하나님은 좋은 분이지.” 그래서 좋은 하나님이라는 교회도 있잖아요. 순복음교회라고. 이건 완전히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요. 안 우는 사람 선물 다 준데. 그럼 지옥을 왜 만들어놨어요? 그럼 처음부터 에덴동산 쫓아내지 말지. 처음부터 왜 추방했어요? 주님은 사랑의 대상이 따로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아니에요. 따로 있어요. 예수님만 사랑해요. 우리는 거기에 그냥 이방인으로 걸려든 것뿐이에요. 그게 바로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애굽 사람을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왜 애굽 사람들을 못 살게 만드십니까? 왜 이스라엘만 살게 해요? 집집마다 어린양 잡으라고 광고를 하지. 왜 이스라엘 히브리인들만 알려줘 가지고 그들만 피 페인트해서 구원 받아요? 그것은 성경에 보면 그들로 은혜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은혜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지옥 갔다면 우리는 뭐 됩니까? 은혜받기 위해서 하나님과 아버지가 따로 은밀하게 속닥, 속닥 의논했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의 구원은 언제 끝난 겁니까? 속닥, 속닥 할 때 이미 끝나버린 거예요. 그것을 언제 통보받았습니까? 성령 받을 때 통보받은 거죠. ‘아, 창세전에 이미 구원받았구나!’ ‘아, 그동안 내 중심으로 살았는데 이 뭐야? 야, 이게 은혜네.’이게 불쌍히 여겨주심이라는 말이죠. 그럼 오직 자랑할 것은 예수님밖에 없지요. 그게 신자잖아요. 이게 뭐가 어려워요. 왜 자꾸 교회에서 봉사하라고 자꾸 사기를 치는 겁니까? 이 예수만 전하면 되는데.
목사님들이 그 말을 하거든요. 그 말은 맞는데, 그러면 교회가 안 된다는 거예요. 교회는 되면 안돼요. 교회가 되게 되면요, 교회를 믿지 예수를 안 믿게 돼요. 교회가 안 될 때, 비로소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자녀가 너무 잘돼보세요. 예수님 때문에 좋은 게 아니고 누구 때문에 좋아요? “나, 이제 니만 믿는다.” 갑자기 예수님 믿다가 니만 믿는다, 라고 바뀐다니까요. 남편이 너무 자랑스러우면 남편을 믿지, 남편을 자랑하지, 예수님 자랑 안합니다. 그게 인간이에요. 그냥 성경대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부끄러워합시다.
그런데 주께서 가죽옷을 입혀줬잖아요.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백화점에서 세일한다고 또 그 옷에다가 걸치지 말고. 항상 옷을 걸쳐도 안에는 주께서 입혀주신 가죽옷 이것이 나를 살린다는 그 고마움을 잊지 맙시다.
역사란 뭐라 했습니까? 돌아가는 길. 집으로. 천국으로 가는 길을 그 길에서 성소도 생겼고, 제사장도 생겼고, 매일 아침, 저녁마다 양 잡는 제사 드려가지고 온 몸에 피투성이 됐고 그런데 그것도 부실하고 그것도 족한 게 아니고 마지막 예수님께서 단번에 끝내버렸잖아요.
그러니 이 말은 제 말은 뭐냐 하면, 시작이고 끝이고 중간이고 간에 다 누가 하셨다? 그냥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하셨고 우리는 그냥 머리만 맡기니까 알아서 머리 감겨주고 파마하고 공짜로. 우리는 공짜로 들어가니까. 우리는 가만히 앉아있었는데 머리 해가지고 잘 되었습니다. 아이고, 보기 심히 좋았더라. 미용사가 혼자서 내 얼굴보고 감상하고 심히 기뻐하노라, 이리 돼가지고 너를 볼 때마다 나는 늘 기쁘다. 일방적으로 선언을 해버리고 말이죠. 우리는 거기서 몸들 바를 몰라요. 그게 바로 성도의 자유로운 생활입니다. 제발 교회에서 시킨다고 기죽지 마세요. 그것은 다 장사 속으로 하는 짓이니까. 다만, 아! 저래서 사기 치는구나! 알면 되는 겁니다.
자, 히브리서9장26절 마지막에 봅시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자기를 단번에 드려서 무얼 없앤다고 합니까? 죄를 없앤다 했지요. 그렇다면 죄라는 것은 누구만 알고 있어요? 단번에 드리신 분이 죄를 알아요. 제가 말을 어렵게 했습니까? 쉽게 합시다. 홍수 온다는 것은 누구만 알고 있습니까? 노아 때. 홍수 온다는 사실을 누구만 알고 있었습니까? 방주를 만드는 그 사람만이 알아요. 피 흘리는 그 분만이 죄를 알아요. 그래서 피를 흘리는 거예요.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잖아요. 노아가 배를 만들 때 다른 사람은 미친 짓이지요. “저거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아무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하고 있어요. 우리가 예수님 피 믿으면 남들은 뭐라고 합니까? 피 믿을 때 돈이나 벌어라.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한다 말이에요. 피 믿는다고 교회가 크게 부흥되는 것도 아니고 있는 교인도 다 나가고 말이죠. 피 이야기하면.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 그건 오직 노아만이 이게 다 쓸모 있는 시점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라는 것은 우리가 아는 죄는요, 선으로 보상이 가능한 죄만 지어요. 우리가. 그걸 죄라고 하는 겁니다. 도둑질을 하게 되면 두 배나 갚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죄는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어설프게 죄를 알아서 그래요. 우리는 죄의 끝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죄의 끝을 아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왜?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 받는 게 그게 죄입니다. 죄는 우리가 행함으로 짓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아버지께 버림 받음으로서 죄를 아는 것이지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를 아는 게 아닙니다. 보통 목사들 뭐라고 합니까? 표적을 잘못 쓰는 것이 죄다. 얼마나 이런 되지를 않는 소리를 했는지 몰라요. 입만 떼면 전부 다 거짓말 인줄 알면 돼요. 전부 다. 아이고, 과정을 잘못 써서. 거기서 뭐 하자고? 이제 똑바로 하자고? 화장실에 오줌 눌 때 똑바로 정 조준하라는 말이 있답니다. 저도 봤어요. 뭘 화장실 정조준해요? 대번 자식 매부터 올라가는 건데. 이런 정 조준 봤어요? 인간이 순간, 순간 죄밖에 안 짓는데 뭘 바르게 살아요? 뭘?
떡이 보이면 아이고, 이 떡을 집에 가지고 가서 아들 먹여야 되는데. 벌써 욕심부터 나는데. 어떻게 제대로 살아요? 주려면 많이 좀 주지. 요게 뭐야? 벌써 욕심부터 나오는데 무슨? 보기만 해도 죄가 나오는데. 뭘 정 조준해요? 그 소리를 듣고 교인들이 지가 또 스스로 해석해요. 그렇다. 요번 남편이 사업 잘못한 게 내가 정 조준 안 해서 그렇다. 지가 해서 다음부터 헌금 막 드리고 봉사한다고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해요. 새벽기도 막 나와 가지고. 빨리 원상복귀하려고.
마귀가 마귀마음을 집어넣으니까 우리 마음 마귀가 다 알아요. 우리 마음이 마귀 마음 다 아니까 어떻게 하면 벌벌 떤다는 걸, 교회에 헌금 퍽퍽 낸다는 걸 다 알아요. 수법을. 봉사 많이 하고. 하지마세요. 그거 하면 할수록 모독 받아요. 제가 요번 낮 설교에 그런 소리 했잖아요. 말씀 안 지킨다고 매를 쥐고 때리는 게 아니고 말씀을 왜 지키느냐고 때리는 분이 영적 아버지에요. 아버지의 자존심을 무산시키다니. 니가 말씀 지켜서 뭐할 건데? 니가 그걸. 이미 구원 받은 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매를 때리는 거예요.
단번에 했던 그 가치를 무시하게 되면 주님께서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매를 듭니다. 사람이 주님 중심이 아니고 내 중심 될 때 맞아야 돼요. 내 중심이 되게 되면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착해야 내가 얼마나 더 복을 받을 수 있느냐, 이런 계산만 딱 들어오기 때문에 이건 매를 한참 맞아야 돼요. 기차 탈 때 뭐라고 했습니까? 앞 보지 말고 뒤를 보라고 했지요. 뒤를 보게 되면 주어진 것이 다 내가 행하지 않았는데 다 얻어진 거예요. 전부 다. 자식이 집에 돌아온 것도 다 주께서 오게 하시고. 들어온 게 은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두고 봐야 알겠습니다만. 모든 게 주님의 조치에요.
27절 봅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뭐가 있으리라? 심판이 있으리라. 아, 이 성경이 있는 걸 우리가 알아요. 알면서도 이게 만약에 우리의 계륵이라 해요. 목에 있는데 삼켜지지 않는 것. 그걸 또 사래. 말하다가 갑자기 캑캑 사래 걸렸다 하지요. 뭔가 내려가지도 않고 토하지도 않고 꽉 걸려있는 것. 요런 구절이에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라는 말은 뭔 뜻인가 하면, 이 땅에서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니가 신경 쓸 거 없다 이런 뜻이에요.
사업이 망하던, 애가 집을 나가던, 집에 불이 나던 그걸 니가 왜 신경 쓰느냐, 어차피 그것은 죽으라고 하나님이 만든 하나의 시츄에이션이에요. 우리에게 죽으라고 만든 시츄에이션이에요. 저는 한 번도 그런 거 안 해봤습니다만, 영화관에 4D영화관이 있답니다. 영화 보면서 의자가 마구 흔들리는 거예요. 흔들리는데 만약에 어떤 노인네가 돈 주고 갔는데 갑자기 왜 흔들려? 하는 것은 흔들리라고 된 거예요. 흔들리라고 의자 자체가. 인생이 왜 자꾸 흔들립니까? 하루 한 시 조용히 갈 때가 없어. 늘 일이 터지고, 터지고 이게 왜 그러느냐, 4D에요. 이 땅은 원래 흔들려서 떨어져서 거기서 객사하라고 만든 거예요. 이 세상 자체가.
스케줄 자체가 제5교시가 영어, 6교시가 죽는 거예요. 7교시는 심판이에요. 심판,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다. 니가 잘못해서 죽는 게 아니고 정해졌다는 거예요. 니가 헌금 적게 하고 봉사 안 해서 아픈 게 아니고 원래 코스가 그런 코스다 말이죠. 왜? 주님도 죽었잖아요. 아픔을 가지고 죽었잖아요. 그 얼마나 아팠으면 주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했겠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는 그 이야기는 우리도 평소에 자주합니다. “주여, 난리도 이런 난리가 다 있습니까?” 우리는 이럴 때 갑자기 이런 위기를 어떻게 모면하지. 어디서 한 수 배울까? 흉내를 내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그럼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진짜로 그렇게 해본다.” 그런다고 진짜로 하시면 안 되시고. 내가 이 정도로 겸손하게 나오니까 알아서 좀 이렇게 배려해 달라는 그런 소리지. 아니, 진짜로? 괜히 헛소리 해봤네. 이리 된다고요.
그 기도 하나 안 하나, 이미 모든 것은 죽는 것은 정해진 것입니다. 어떻게 죽이느냐가 남아있어요. 어떤 사람은 15만평 부동산에다가 집이 세 채에다가 호화요트에다가 만날 틈만 나면 크루즈여행에다가 그러면서 이놈의 팔자가 크루즈여행 하다가 죽는구나! 이렇게 은혜 받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기초연금 대상자도 빠져가지고 아파서 죽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죽는 것도 정한 것이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은 오야 마음대로에요. 주님 마음대로지 우리가 할 수 없는 거예요.
어쨌든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말씀이 있고 우리가 있거든요. 그러면 우리 속에 흔적이 뺏지처럼 있어야 돼요.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두 번째 갈비뼈에다가 새겨놓으세요. 말씀이 딱 박혀야 돼요. 말씀이 내 안에 살아서 폭발해야 되니까.
심판이 있으리라, 그 순간 우리는 기절을 하지요. 뭐 한 게 없는데. 아이고, 그 때 이럴 것 같으면 봉사 좀 잘할 걸. 심판이 있데. 큰일 났어. 시험 친데. 아이고, 시험 있는 거 몰랐네. 그걸 위해서 28절에 있습니다.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어떻게 오셨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그 다음에 조건이 있어요.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에게 뭡니까? 두 번째 나타납니다. 두 번째.
두 번째가 어려워요. 어려우면서 쉬운데. 어렵지만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생은 두 번 사망, 두 번 죽음, 예수님 재림도 두 번 재림 있습니다. 예수님이 두 번 재림이 있기 때문에 두 번 오시기 때문에 인생도 사망도 두 번 있고 부활도 두 번 있어요. 탄생도 두 번 있고. 하여튼 피조물은 예수님의 스케줄에 맞추어서 그 그림자로 판에 깔리는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하나, 하나가 주님의 얼룩이에요.
주님이 몇 번 죽었습니까? 사실은 주님이 오셔서 한 번 죽었잖아요. 그런데 한 번 죽음 안에 겹쳐져 있어요. 사람이 찌른 죽음이 있고 아버지가 죽이는 죽음이 있고 사람이 죽이는 것은 사형이고, 주님이 죽이는 것은 저주고, 영원한 저주고 지옥으로 가는 겁니다. 겹쳐져 있는 것을 펼쳐버리면 그게 우리네 인생, 운명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한 게 아니에요.
그럼 왜 이렇게 두 번의 부활이 있습니까? 두 번의 부활이 있지요. 모든 인간도 두 번 살지요. 인간이 이 땅에 있고, 죽고 난 뒤에 또 주의 음성을 듣고 인자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지옥 가는 사람도 다 부활되지요. 왜 그렇게 되는가, 심판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왜 심판하는가, 심판 주를 주께서 뽐내기 위해서. 그 심판 주가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심판을 누구한테 맡겼습니까? 아들에게 맡겼다고 요한복음5장에 나옵니다.
자, 그렇게 보게 되면, 우리가 이렇게 있는데 홍두깨로 밀어버려요. 홍두깨는 칼국수 할 때 미는 것인데, 우리가 쥐포처럼 납작하게 되지요. 대구에 선문시장에 가면 납작 만두가 명물이에요. 진짜 맛있어요.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잡채 몇 개하고 채소 몇 개밖에 없어요. 그렇게 맛있어요. 납작하게 되어있지요.
납작하게 되어버리면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사이다 있잖아요. 차게 해서 뚜껑 막 떠보면 표면 위가 탄산가스가 팍 터져서 튀어 오르지요. 콜라도 마찬가지고 막 튀지요. 우리의 표면 위에 주님의 사건이 막 튀어가는 거예요. 주님의 사건이. 그 사건이 뭐냐 하면, 죄로 인하여 죽고 의로 인하여 살리라, 사건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부자가 됐던, 가난하던 사업을 하던 농사를 짓던 관계없어요. 그냥 눕혀놓고 밀어버리면 사업하는지 어부 인지 농부인지 몰라요. 밀어버리고 모든 인간 속에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드러내는 어떤 사람은 공의의 그릇이고 어떤 사람은 자비의 그릇이고. 지난 시간에 그릇가지고 한 기억이 나는데. 광주에서 했잖아요. 어떤 사람은 주님의 자비가 막 튀어나와요. 구원받은 강도처럼. 어떤 사람은 저주받을 소리만 해요. 니가 뭔데?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를 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드러내요. ‘사람은 한 번 죽는 것이 정해진 거야. 그 뒤에 심판이 있는데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 죄와 상관없이 기다리는 사람은 다 구원 받아.” 라는 고백이 그 사람이 사업하던, 농사짓던 고기 잡던 관계없이 전혀 직업과 자신의 과거와 상관없이 그런 고백이 튀어나온다면 그건 주에 속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있듯이 같이 있는 사람이고.
그게 아니고 “누가 쥐포래? 나는 똘망, 똘망해. 나는 쥐포 아니야. 나는 풍선이야. 하고 전혀 쥐포인 것을 못 느끼고 나는 내 인생 나는 내 식대로 살았고 나는 지금까지 후회 없이 산다.” 이걸 주장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프랭크 시나트라에요. 마이웨이 부른 사람이. 마지막 커튼이 쳐질 때, 나 내 인생 후회 없이 살았노라. 그 가사를 보세요. 그 가사가 바로 통통한 가사에요. 죽은 후에 심판이 있다, 그 소리 안 나옵니다. 나는 베스트 최선을 위해서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럴 때 우리 복음 아는 사람은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할 소리는 그것밖에 없어요. 그건 6째 시간이고 7째 시간에 심판이 있다. 니가 신자 아님을 지옥 갈 사람을 그런 식으로 고백하게 하신 것은 바로 주께서 니를 지옥 보내기 위해서 너를 그렇게 했다, 는 말을 할 수밖에 없지요.
그 이야기하라고 우리가 지금 이 공부를 하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런데 그걸 프랭크 시나트라에게만 할 게 아니고 매일 같이 우리자신에게 수시로 해야 돼요. 특히 어떤 일이 어렵게 할 때, 가정에 우환이 있을 때, “주여, 이럴 수가! 나의 일은 마이웨이는 어떻게 됩니까? 나의 인생의 길은?” 노래듣고 하다가 갑자기 “히브리서9장! 맞아! 정하신 것이잖아. 내가 미쳤지. 신자 아닌 것처럼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내가 너무 경솔했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주께서 그렇게 인도하시는 겁니다. 말씀의 사람으로.
특히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 죄에 대해서 우리는 모릅니다. 죄에 대해서 몰라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우리가 죄라는 것을 끄집어내자. 우리가 끄집어내는 죄는요, 부흥회 때 전에 이야기했지요. 수요일 날 죄를 강조한다 했지요. 하고 목요일 날 헌금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빨리 죄를 끄집어줘야 돼요. 그래야 헌금을 많이 거둘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끄집어내는 죄는 죄가 아닙니다. 그건 의가 될 가능성이 있는 나의 의의 일종의 죄에요. 이 정도로 죄를 끄집어낼 정도니까 나는 이 정도로 착하다는 폼 내기 위해서 죄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치 일기 쓰면서 일기 쓰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어휴, 나 왜 이리 착해’ 이런 거와 똑같은 거예요.
‘나는 오늘도 옆에 있는 애를 해코지했다.’ ‘나는 왜 이리 악할까, 호호 그런데 나는 이렇게 반성할 수 있다니 내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일 줄이야. 내가 봐도 내가 너무 착해.’ 이런 거 있잖아요. 내부적으로 마구 목소리가 나는 거예요. 내부적으로. 철학이 그거에요. 우리는 마음을 낮춥시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사람한테 칭찬을 받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행복해질 것이다, 이거거든요. 모든 인문학이 그래요. 서열대로 차별을 두지 말고 종교를 초월해서 서로 소통합시다. 한 형제라고 서로 평등을 주장한다면 이 세상은 건전한 세상이 됩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행복해질 겁니다. 그게 바로 지가 몰랐던 죄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죄는 누가 알아요? 예수님이 알아요. 그럼 우리는 그 죄를 어떻게 아는가, 그렇게 잘난 체 하다가 찢어질 때 알아요. 요번 여름수련회 하는데 8월초에 합니다. 8월초에 하는데, 강의 제목을 이미 정했습니다. 안양에서 특별히 제일 먼저 알려드리겠습니다. ‘약속의 틈새’입니다. 이번에 민수기 제목이 뭡니까? 불편한 여정이었잖아요. 약속의 틈새, 약속이 갈라지는, 찢어지는 거예요. 사사기인데.
백성들이 이만하면 됐다고 안일할 때, 외부에서 적들이 쳐들어 와서 이스라엘 내부를 찢어지게 해요. 그러면 그 틈새에서 미처 예상 못한 새로운 약속의 신약으로 가까이 가는 예수님 오실 날을 가까이 조치하는 그런 예수님과 관련된 새로운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약속의 틈새에요.
자, 그 다음에 28절 중간에 봅시다.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단번이죠. 예수님은 죄를 단번에 드렸잖아요. 그래서 이제 예배드린다고 용서받는 게 아닙니다. 성만찬 한다고 세례 받는다고 용서 받는 게 아닙니다. 용서받는 것은 우리가 행함으로 용서받는 것이 아니고 용서받음을 우리가 부여받은 거예요. 제공받은 거예요. 완제품을 우리가 공짜로 받는다니까요. 조립품이 아니에요. 이케아 가구 있지요. 이케아 가구가 하도 유명하다 해서 오늘 광명역에 딱 내리니까 바로 이케아 가구가 있어요. 처음 봤어요. 조립하거든요.
신앙, 구원은 우리가 조립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완제품이에요. 택배로 그냥 받아요. 요청도 안했는데 홈쇼핑해서 안했는데 방송시간에 하면 더 줍니다, 이것도 안했는데 그냥 날아와 버렸어요. 그게 단번이에요. 단번인데, 단번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이 단번에 풀렸어요.
구원 파는 뭐냐, 니가 언제 풀렸느냐 묻는 건데, 우리는 죽는 날까지 다 포함해서 단번에 풀렸어요. 그래서 앞으로 구원 파가 당신 언제 구원 받았습니까? 라고 묻거든 내 죽는 날 구원 받았다.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왜? 그동안의 어떤 짓을 해도 다 구원됐으니까. 어떤 짓을 해도. 단번이 시간을 초월하듯이 단번의 혜택도 오게 되면 우리도 시간 초월의 영역으로 우리가 뽑혀 들어가는 겁니다. 쑥 들어가 버리죠.
아까 이야기한 거 사람은 죽는 거 맞아요. 사람은 죽는데, 육체가 죽어요. 마찬가지로 십자가 앞에서 또 죽어야 돼요. 그러니까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십자가 앞에 먼저 죽고 우리 육체 죽을 때, 장막을 갈아입어야 되니까, 옷을 갈아입어야 되니까, 옷 갈아입으면서 죽고.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뭐가 있다? 육체의 죽음과 그 다음에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죽음, 두 가지가 다 있지요. 인간의 죽임도 다 있지요. 그걸 그대로 우리한테 뺏지로 달고 다니면서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걸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죽는다는 것은 주께서 단번에 용서했기 때문에 이미 영생 얻었기 때문에 ‘뭐 죽어도 괜찮지.’ 라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은 성도고 그럼 뺏지 없는 사람은 그냥 죽지요. 뭐. 그냥 죽는 거예요. 죽으면서 왜 죽는지도 모르고 점쟁이 찾아갔다가 철학자 찾아갔다가 백날 해봐야 자기 능력으로 왜 죽는지를 알지를 못해요. 이미 우리는 구원 받았기 때문에 죽는 것을 가지고 잠자는 것으로 이제 편히 쉬는 것으로 군의 제대하는 걸로 그렇게 합니다.
그 다음에 10장 봅시다. 이것만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런데 그거 하기 전에 두 번째 나타나신 다는데 재림이 왜 필요하지요? 전에 재림이 왜 필요한지 설명한 것이 기억나는데. 예수님이 한 번에 오셔가지고 한꺼번에 일처리하지, 재림은 왜 또 남겨뒀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일을 왜 또 남겨뒀느냐.
28절에 보면 나와 있어요.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나와 있지요. 고 ‘단번을’ 위해서 단번에 대해서 대드는, 단번 하심에 대해서 이의를 걸고 그걸 인정치 않는 세상을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해서 두 번째 오시지요. “네가 보기에는 두 번째 왔지? 내가 보기에는 단번이다.”라는 겁니다.
애가 갑자기 공부를 잘했어요. 잘하니까 아버지가 스마트폰을 사줬습니다. 애는 대단히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오면서 많은 케이크를 사왔어요. “아빠, 케이크는 왜 사왔는데?” “니, 공부 잘했잖아.” “아까, 스마트폰 받았잖아.” “그건 니가 생각하는 단번이고, 나는 케이크까지 맞춰야 단번이야.” 그래서 주님의 단번 속에는 뭐냐 하면, 주님의 단번에 이의 거는 이 세상 있잖아요. 완전히 불바다로 만들 때, 그게 단번의 효과를 효과의 연속이라고 보면 돼요.
십자가 지신 그 효과가 세상의 불 심판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노아 때는 어떻습니까? 물 심판 자체가 단번이었지요. 끝났잖아요. 주님께서는 죄용서와 불 심판을 시간적으로 늘여서 할 뿐이지 합치면 결국 그것도 죄용서 받았다는 그것이 이런 효과까지 주어지는 거예요.
용서를 모르는 자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죄의 용서 사건 속에 이미 하나의 세트로 들어있었던 거예요. 이런 예가 적당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TV주고 리모컨 주고, TV는 십자가, 리모컨 주는 건 재림이고. 왜 주는 거죠? 그래야 한 세트니까.
그게 왜 그런가 하면, 26절 봅시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그 다음에 뭐 나옵니까? 세상 끝에 나타나셨지요. 세상 끝에 나타났다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을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초림을 말합니다.
그런데 초림이 뭐로 본다? 세상의 끝인 거예요. 초림 안에 세트로 들어있는 것이 재림이 포함되어있는 겁니다. 그냥 TV와 리모컨 이야기하세요. 그게 제일 쉬워요. TV만 가지고 오면 어떻게 켜는데? 리모컨으로 켜야지요. 또 리모컨 줘놓고 밧데리 안 주면 안 되고. 하여튼 다 합쳐서 택배로 완제품으로 다 준거에요. 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돼요. 그냥 살기만 하면 돼요. 그래서 했잖아요. 선교하지 말고 그냥 살기만 하라고 했잖아요. 그냥 살기만 하면 그게 선교라니까요. 주께서 알아서 우리를 통해서 이런 고백이 나오도록 조치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내 소망과 내 기대를 위해서 내가 부지런히 설쳐서 내가 사는 줄 알았는데 이게 다 의미가 있었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의미를 말씀을 통해서 늘 되새기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