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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공은주
안양20150213a-히9장19절(죄사함)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9장19절입니다. 항상 강의 초반에 중요한 게 나오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려주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분명히 여기서는 염소 피와 송아지 피가 동원되지 않습니까. 그렇잖아요. 이 본문대로 한다면 옛날에. 그런데 그것이 왜 사람의 죄를 씻어주지요? 염소가 죽고 송아지가 죽는데 왜 사람이 사느냐 이 말이죠. 대신하려면 동일한 동질이 대신 되어야 되잖아요. 사람을 살리려면 누구를 대신 잡아야 되지요? 사람을 잡아야 되는데, 사람을 잡아서 사람을 살리는데 왜 송아지 염소만, 그 당시 송아지 염소가 죄 지은 적 있습니까? 그 송아지 염소 죄지으려고 송아지 염소 바쳐야 되는 것이 같은 레벨에서 동질로서 합당해 보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모세의 율법은 왜 송아지와 염소의 피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가 씻어지느냐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자, 이거 알려면 인간의 죄가 어디서부터 생겼느냐를 알면 돼요. 인간의 죄가 선악과 따먹으면 죄가 되지요. 선악과 따먹으면.
자, 에덴동산을 한 번 이리 보면, 여기가 에덴동산입니다. 나무 과일이 이리 있는데 선악과나무입니다. 선악과나무가 있다 합시다. 그러면 선악과나무가 있고 생명나무가 있는데 선악과 따먹게 되면 죄가 되고 죄를 지으면 죽음이 오지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죽잖아요. 그러면 요 나무 밑에다가 염소나 양이나 송아지나 즐비하게 돼있습니까? 요거 내가 따먹고 후딱 송아지 피 바르면 어떻게 용서가 되겠어요? 그러면 니가 따먹고 후딱 염소 피 바쳤어요? 그러면 내가 너 안 죽일게. 너 안 죽도록 해줄게. 이런 조치가 있었습니까? 그 당시 에덴동산에.
에덴동산 선악과 밑에 염소 몇 댓 마리 놓여있어요? 혹시 선악과 따먹고 싶거든 따먹으시고 요거 염소 잡으시면 됩니다. 이런 장치가 있었느냐 말이죠. 그런 장치가 없었지요. 그냥 나무 밑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송아지 염소 하는 것도 없었단 말이죠. 피 뿌리면 용서받는다는 그런 것도 없었단 말이죠. 그런 것이 없었다는 말은 아담만 괜히 손해 본 느낌이 드네요.
아담도 죄를 지었고 이스라엘도 죄를 지었는데 이스라엘이 죄지를 때는 송아지 염소 바쳐서 씻어주는 그런 배려가 있었는데 아담이 범죄 할 때는 그런 배려 없이 정녕 죽으리라, 끝! 이리 되어버리면 아담만 손해 보는 거예요. 여기에 보니까 다 이루었다, 해놓고 끝이라 했지요. 이 끝은 상당히 좋은 기분의 끝인데 에덴동산에 선악과 따먹었을 때에 그 때 끝은 완전히 절망적인 끝이다 말이죠.
방금 제가 한 말 중에서 정답이 벌써 나왔습니다. 절망적인 것. 절망을 맛보게 하는 거예요. 이 죽음이란 것이 단순히 이 목숨 죽는 것이 아니고 백번 죽어도 다시 선악과 과일을 본드로 다시 못 붙인다는 사실, 한 번 위반했으면 그걸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죄 죽음의의미라 하는 것은 끝났다는 겁니다. 더 이상 니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모든 것이 끝이 난 거죠.
그러면 이 제물들, 송아지 염소 이러한 양, 이 제물들이 보여주는 것은 방금 제 이론에 의한다면 이 제물들이 피 흘려 죽는다는 말은 그 피라는 말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방금 제 이론으로 한다면 절망과 끝을 보여주는 거죠. 그냥 죽음이라 하니까 이게 의미가 와 닿지를 않는 거예요. 왜냐 하면, “에이, 죽고 난 뒤에 또 부활이 있잖아.” 드라마 내용 벌써 눈치 다 채버리 고. 감이 영 오지를 않는 거예요. “에이, 죽어도 살려줄 건데 뭐.” 전혀 의미가 하나님의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한 그 죽음의 의미가 전혀 와 닿지를 않는 겁니다.
염소의 피를 가지고 우리의 죄를 씻는다. 이게 앞뒤가 맞지를 않아요. 염소의 피로 자기 염소를 못 살릴뿐더러 염소의 피로 죽었는데 왜 인간이 사느냐, 이게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송아지의 피, 염소의 피 또는 양의 피를 가지고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결국은 끝을 보여주는 겁니다. 끝을.
그러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있는 곳이 중앙에 있지요. 여기서 네 개의 강물이 나옵니다. 네 개의 강물이 있으면서 네 개의 강물이 에덴동산의 생명을 유지하는 에너지원이 되는 겁니다. 물이 흐르는 곳곳마다 생명이 유지가 돼요. 그런데 여기서 선악과가 따먹지 않은 상태가 될 때 이 에덴동산은 모든 게 사는데, 만약에 선악과에서 훼손된다면 결국 이 에덴동산은 뭘 보여주느냐, 끝을 보여주는 겁니다. 끝!
에덴동산에 있어서 처음은 시작이 되면서 시작과 뭣과 함께 있느냐 하면, 시작과 끝이 같이 있는 거예요.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시작과 끝이 같이 있는 거예요. 제가 강의하는 취지를 지금 길게 논리로 따지려 하면 복잡하니까 제가 성질 급해서 미리 알려드린다면 우리 성도가 이리 앉아 있잖아요. 그럼 우리 안에 뭐가 있느냐, 시작도 있고 끝도 있고 뭐는 없어요? 나는 없어요. 시작을 보여주는 나, 끝을 보여주는 나지 나 잘되기 위해서 주님이여, 그런 계산하지 마세요.
시작과 끝을 보여준다면 우리의 역할 다한 겁니다. “니 교회 가서 복음 듣고 뭘 알았나?” “내가 끝인 걸 알았어.” “또 뭘 알았나?” “내가 시작인 것을 알았어.” 그걸 이야기하게 되면 우리의 할 증거는 다 한 거예요. 알파요, 오메가 되신 분이 함께 있기 때문에 시작이고 끝이고 내가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데 같이 거기에 참여되고 거기에 종으로 쓰여 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과 시작과 끝을.
더 쉽게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옛날 심청전도 그렇고 춘향전도 그렇고 옛날 모든 동화나 재미난 드라마 이 모든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드라마 중 <압구정동 백야>지요. <압구정동 백야>를 들어봅시다. 압구정동 백야를 하는데 시청률이 15%가 아니고 100%라 봅시다. 온 국민이 그걸 본다고 칩시다. 그러면 압구정동 백야에서 일어나는 그 이야기가 그 나라의 중심이 되겠지요. 드라마 끝나고 길거리에 나가면 그 이야기하겠지요. 옛날에 TV이 없을 때 여로 같은 거 할 때는 시청률이 70%나왔어요. 다 봤잖아요. 여로 할 때는 전부 다 길거리에 나오고. 여로의 못된 형 나오면 그 사람 욕하고 이랬다 말이죠. 장 보리도 마찬가지고 그렇거든요.
그렇다면 우리가 시작이고 끝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마다 다 사적인 일이 있더라도 주님께서는 특별히 자기 성도를 가지고 세상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우리를.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왜? 다른 사람은 거기에 없으니까. 다른 사람은 사적인 인생이에요. 그런데 성도는 사적인 인생은 날아가 버렸어요. 예수님이 어떻게 세상을 시작했고 예수님이 세상을 어떻게 끝장내느냐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그걸 성경에서 ‘언약의 사람’ ‘언약 맨’이 되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노아입니다. 노아 당시에 사람이 노아밖에 없었습니까? 아니지요.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집가고 먹고 장가가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그 때 노아는 뭐했지요? 물론 시집가고 장가가고 다 했지요. 했는데 노아가 보여주는 게 뭘 보여주는가 하면, 시작과 끝을 보여준다니까요. 시작과 끝을 보여주면서 그냥 보여주지 않고 뚝딱 뚝딱 뭘 만들지요. 뭘 만듭니까? 방주를 만들지요.
강의 다시 해드리겠습니다. 강의 다시 해도 먼저들은 사람들 몰라요.(중간에 오신 분을 위하여) 지금 히브리서9장19절을 하거든요. 거기에 보면 모세의 율법이 나온다 말이죠. 모세의 율법이 나올 때, 우리는 생각합니다. ‘어? 모세의 율법이 나왔구나. 지키면 되겠지.’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건 모세율법이 누구 좋아라고 지키는 거예요? 내 좋아라고 지키는 게 되잖아요. 내 구원받으려고. 율법을 내 좋아라고 구원받으면 이게 내가 천국에 합격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왜냐 하면, 율법을 주게 되면 율법을 주신 그 안에 정답이 있게 돼있고 그 정답은 누가 지킬 수 있느냐 하면, 율법을 만드신 분만이 그걸 지키게 돼요. 다른 사람에게 율법을 준 이유가 율법을 지킨 분과 너의 간격과 그 차이가 어느 정도 멀어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유대인들은 그걸 오해해가지고 내가 애써서 지키면 구원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는 걸 가지고 만약에 예를 들게 되면 어떤 쉐프가 요리사가 음식을 내어놓고 하는 말이 “이 음식을 맛있게 드시면 내가 이 요리 값을 받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나의 내기를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맛있는 요리를 먹고 난 뒤에 사람들이 다 뭐라고 하겠어요? 어떤 사람은 아! 진짜 맛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너무 맛있다. 어떤 사람은 맛이 죽인다. 이런 표현할 거고 그렇게 표현하게 되면 요리사가 뭐라고 하겠어요? “어떻습니까?” “맛있습니다.” 그럼 합격해줍니까? 안 해줍니까? 합격 아무도 안 해주지요. “내가 원했던 정답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한마디만 하면 끝나는 거예요. 돈 다 내야 돼요. 이런 장사법도 괜찮겠다.
떡볶이 만들어 놓고 맛있게 드셨으면 돈 안 받겠습니다. 해놓고 “아이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니요, 제 성에 안 찹니다. 그거 정답 아닙니다.” 이러면 결국은 맛있게 먹었다는 게 누구 입장이에요? 자기가 지킨 입장에서는 자기는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그걸 지켰지만, 그건 실패지요. 정답이 아니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율법을 줄 때는 뭐도 포함되어있다? 정답도 포함되어있다. 율법을 지키신 분이 바로 율법을 주시는 겁니다. 그럼 왜 주시느냐, 율법을 너희들이 받았고 지키게 되면 그 정답에 미치지 못하고 정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정답에 미치지 못하면 어떻게 돼요? 복 받습니까, 저주받습니까? 율법 안이 뭐냐 하면,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저주받는다는 내용이 그 안에 포함돼 있어요. 그것도 백 개를 지켜도 하나를 못 지키면 하나도 못 지킨 게 돼요.
그런 입장에서 히브리서9장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로 이렇게 제사를 드려봤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받겠어요, 안 받겠어요? 구원 못 받습니다. 결국은 로마서 말씀 그대로 그들에게 율법을 준 것은 구원을 받게 함이 아니고 구원을 못 받게 하기 위해서다. 못 받는 존재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 이리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히브리서9장을 보면서 뭘 알아야 돼요? 왜 우리는 율법을 못 지키는가를 그걸 아는 거예요. 성경 펴놓은 이유가 그거예요. 왜 우리는 송아지 염소 피를 해도 왜 안 되느냐, 그것은 송아지 염소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한다는 그 중간 과정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구는 압니까? 하나님은 알지요. “송아지 잡아라.” “예” “양 잡아라.” “예” “염소 잡아라.” “예” “피를 뿌려라.” “예”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구원해줍니까? 아니.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왜 구원이 안 되지요? 떡볶이 맛있게 먹었다고 주장해도 그건 맛있게 먹은 게 아니듯이 시킨 대로 했다고 해서 그게 시킨 대로 한 게 아니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그 율법 속에는 뭐가 들어있는가, 시작과 끝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덴동산에 선악나무와 생명나무 두 개의 나무가 중앙에 있지요. 중앙에 있다는 말은 중앙에서 물이 나오고 강물이 나오고 그 강물이 에덴동산을 살리지요. 그것은 어떤 조건인가 하면, 선악나무도 생명나무도 그게 그대로 흠 없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조건하에는 살잖아요. 만약에 선악과가 다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다치게 되면 생명은 날아가 버린 거예요. 날아갔지요.
그러면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에 정녕 죽으리라, 되어있다 말이죠. 정녕 죽으리라 되어 있잖아요. 뱀이 꼬셔가지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어버렸습니다. 만약에 유대인이 생각하는 율법 같으면 고 선악과 따먹은 밑에 뭐가 있어야 하느냐 하면, 소나 양이나 음메~~하고 돌아다녀야 돼요. 따먹자마자 어이쿠 죄 지었구나! 양 잡아라.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아담 시절에 그게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어요. 이 선악과 따먹어라, 하는 이야기는 모세 때 주어진 겁니다. 모세 때. BC1400년경에. 모세 때 주어진 거거든요. 모세 때 율법을 줬다 말이죠. 제 이야기는 이거에요. 왜 아담 때 안 줬느냐 이 말입니다. 제 이야기가.
자, 율법이 인간을 살리기 위한 용도라면 아담이 죄 지을 때 그 죄에 대한 처방책도 에덴동산에 뭔가 한 구석에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니가 죄 지었나? 그럼 빨리 처방해야지. 후시딘연고 바르고 빨리 테이프가지고 빨리 선악과 과실에다가 꼭지에다가 달아놓으면 그러면 되는 거야.” 이렇게 되는데 거기에는 어떤 처방할 수 있는 조치할 수 있는 그 방법이 에덴동산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어요. 이건 사람 죽이겠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에 있어서 송아지 염소 받으니까 ‘아, 죄를 지었다고 조치하셨구나!’ 이렇게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모세만 인간이고 아담은 인간 아닙니까? 왜, 모세한테 모세시대에 율법을 줘가지고 죄를 용서할 방법이 있다면, 애초에 처음부터 아담한테는 왜 그걸 안 줬어요? 줘야지. 아담한테도. 같은 인간인데 심지어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아담은 인간의 조상입니다. 인간의 조상한테는 주지도 않고 왜 뒤에 와서 줄 리가 있느냐 이 말이죠.
따라서 이 말은 뭐냐, 어느 쪽이 잘못이다? 율법을 준 것은 죄에 대한 처리하라고 준 게 아니다, 라는 말이 확실하다는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율법을 왜 줬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담에게 허락한 것과 동일한 것을 준 거예요. 왜? 모세는 아담의 자손이니까. 아담에게 허락한 상황과 모세에게 한 상황이 똑같은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한 이유가 뭐냐, 그것은 제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시작과 끝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곳이 에덴동산입니다. 시작과 끝이.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 사적인 일밖에 모르는데 하나님의 성도한테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성도한테는 시작이 들어있고 끝이 들어있어요. 이게 성도가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냥 자기의 과거, 기억이 들어있는 반면에 성도는 일어서서 걸으면 뛰면 시작과 끝이 둘 다 출렁이고 있어요. 시작과 끝이 다 들어있어요. 뭐냐 하면, 시작은 이렇게 해서 시작됐고 끝은 이렇게 끝난다가 들어있어요.
그걸 우리한테 오기 전에 먼저 주신 분이 있다고 했지요. 아까 강의 처음부터 들으신 분은 들었지요. 이게 집안이 노씨 집안입니다. 노아. 노아 당시에 노아만 살았습니까, 다른 사람도 살았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살았잖아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했는데 유독 다른 사람이 없는 것. 노아에게만 있는 게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난다는 것을 노아는 그게 있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안 만든 걸 노아는 만들죠. 뚝딱 뚝딱 만들었습니다. 뭘 만드는가,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이게 어디에 쓰는 물건이고? 방주를 어디에 쓰는 물건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의아해할 수밖에 없어요.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 그거 왜 믿어요? 십자가 믿는다고 월급 더 오릅니까? 십자가 안다고 몸이 낫고 그런 거 있어요?
어떤 교회는 그런 교회도 있습니다만. 제가 수요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예수여 불쌍히 여기소서.’를 하루에 12000번을 하게 되면 기적이 일어난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일은 언약 외에 벗어난 일은 우리에게 기적이라고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게 아니고 우리가 원치 않는 걸 줬어요. 그게 뭐냐, 세상은 이렇게 시작되고 세상은 이렇게 끝장난다는 그 정보를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끝, 그것뿐이에요.
여러분, 사극 보게 되면 귀부인이나 고관대작들이 뭐를 타고 다닙니까? 가마타지요. 가마 탈 때, 그 가마꾼들이 네 명이 쥐잖아요. 그런데 그 가마꾼이 자가용의 주인 되시는 그 부인이나 고관대작을 태우지 않고 가마꾼이 자기 아들 태우고 자기 동생 태우고 이러면 돼요? 안돼요? 즉시 실직당하지요. 쫓겨나겠지요. 주께서 주시는 모든 말씀은 내 욕구와 내 욕망과 내 소원을 실으려고 우리로 하여금 가마꾼 되게 한 게 아닙니다.
주께서 실으려고 하는 것은 언약입니다. 시작과 끝입니다. 시작도 언약으로 시작했고 끝도 언약으로 끝장낸다는 겁니다. 기준이 언약이라는 것,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 그걸 실으라고 우리를 가마꾼으로 삼은 거예요. 내 소원과 내 포부와 내 희망과 그런 것을 달라고 말씀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 강의에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모든 말씀은 성경 말씀과 모든 율법은 지금 우리가 히브리서9장하니까 모든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 속에 있는 은근히 내가 노리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끄집어내는 역할을 해요.
첫 번째, 역할은 내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는 거죠. 욕망이죠. 왜냐 하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으니까. 내 욕심 내 죄를 끄집어내는 역할을 하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그게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게 아니다 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약 올리기 작전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세 히브리서9장19절에 보면, 모세의 율법대로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 취하여 잡잖아요. 잡으면서 사람들이 그냥 잡는 게 아니에요. 이걸 잡으면 누구 죄가 사해진다? 우리 죄가 사해질 거라 했잖아요. 그게 땡 탈락이라니까요. 그게 바로 속에 들어있는 잘못된 생각, 자신도 미처 몰랐던 자신의 탐욕이었습니다.
제가 죄 용서 받는 것도 탐욕이라 하니까 여러분이 의아해하실 거예요. 그런데 의아해 하시면 제가 또 섭섭해요. 지금까지 제가 강의한 게 중요한 걸 이야기했는데 금방 몇 초 만에 다 잊어버렸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주신 것은 뭐를 끄집어내려했습니까? 시작과 끝을 심어달라는데 우리는 갑자기 내 죄를 용서받겠습니까, 이게 나왔으니까 이게 안 맞다 말이죠. 우리가 은근히 내 죄 용서받아서 죄는 지어놓고 헤헤 거리면서 나 죄 없다, 라는 것을 은근히 고대했던 욕망이 우리 속에 있었던 거예요.
그것이 죄의 자체로서 들추어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말씀을 주시고 그 다음에 그게 아니다, 라는 거예요. 그게 아닌 거예요. 그럼 그게 아닌 게 뭐냐, 그게 아닌 것을 로마서1장에서는 이걸 가지고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관계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겁니다.
아까 제가 쉬는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소유의 대상이 안 된다고. 만약에 하나님의 의가 소유의 대상이 돼버리면 이리 돼요. “내가 하나님의 의를 알았는데 염치불구하고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 이걸 가지고 마음껏 찬양하고 영광 돌리고 감사해야 내가 성도된 마땅한 도리이지.” 요런 오해를 하는 거예요. 이런 오해를.
그러면 처음에 강의할 때부터 뭐했습니까? 시작과 끝이 날아가 버리고 나는 이렇게 구원받았습니다. 가 튀어나와버렸다 말이죠. “나는 이렇게 구원받았습니다.” 라는 것은 사실은 처음부터 우리는 뭐를 무시하느냐 하면, 죄 지을 당시의 아담의 속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거와 똑같은 거예요. 아담이 선악과 따 먹기 직전의 사고방식이 뭡니까? 이걸 먹으면 어떻게 된다? 내가 뭐가 된다? 신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아담이 선악과 따 먹을 때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나만 잘되면 되는 거예요. 나만 잘되면.
그런데 제가 강의 처음부터 할 때 뭐라고 했던가요?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을 이야기하지 내가 잘되는 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시편105편16~19절 보겠습니다.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 하였도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19절입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그 다음에 뭡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 까지죠. 그러면 요셉이 자기가 감옥소 내려가고 꿈을 꾸고 남의 총무 대신하는 것 자기 뜻입니까? 누구 뜻이에요? 자기 뜻 아니지요. 자기 뜻 아니거든요.
요셉은 수시로 이야기했어요. “주여, 제가 왜 이런 팔자입니까? 내가 이렇게 억울한 일 당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너무 억울합니다.” 수시로 이야기했어요. 요셉도 나중에 알았어요. 지금 나는 억울합니다, 를 풀어주려고 하나님께서 일을 벌인 게 아닌 거예요. 니가 억울한 건 관심 밖이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이 요셉보다 더 세요. 말씀이 먼저 있고 말씀에 맞추라고 요셉이 이 땅에 출생하고 꿈을 꾸게 된 거예요. 요셉이 꿈꾸고 싶어서 연습하고 그런 게 아닙니다. 요셉이 꿈 되도록 하기 위해서 꿈을 연습하면 되겠네요. 낮에 이렇게 해서 밤에 안자고 그대로 해서 자게 되면 그게 영상이 되어서 떠올라 꿈이다! 이렇게 우길 수도 있는 문제고. 그게 최면술인데.
말씀에 응하게 되기 위해서 요셉은 본인은 원치 않는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요셉에게 주어진 것이 야곱언약이거든요. 자, 언약을 설명합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언약에 담겨있는 시작과 끝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을, 언약을 주신 사람을 활용하겠다는 것이 언약의 취지입니다.
노아한테 무엇이 주어졌습니까? 언약이 주어졌지요. 언약을 주시니까 언약에는 무엇이 들어있다? 시작과 끝이 있지요. 시작과 끝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아를 선택했고 노아는 그로 말미암아 말씀이 응하기 위해서 노아는 남이 안하는 짓을 해요. 뭐냐 하면, 아무 쓰잘데기 없는 방주를 만든다니까요. 방주를. 배를 만들어요. 훤한데 배를 만들고 있다 말이죠. 미쳤어요. 미쳤어.
그런데 노아만 미치면 안돼요. 노아랑 우리가 같이 미쳐야 돼요. 노아라는 나라에 합류가 됩니다. 안 미치면 합류가 안돼요. 히브리서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이런 일을 했지. 니는 뭐했노 이 말이죠.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나그네 길을 갔지. 그 뒤에 추임새를 다세요. 니는 뭐했나?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임을 거절하고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즐거워했다. 그 뒤에다가 추임새를 붙여야 돼요. 얼~쑤 이런 거 말고 지금 나는 뭐하고 있지?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톱에 켜는, 돌아 맞는 고난을 당했다. 그 뒤 추임새가 뭡니까? 나는 뭐지? 나에게 준 말씀은 뭐냐 이 말이죠. 그럼 말씀은 뭐겠어요? 시작과 끝이지요.
먹든지 마시던지 우리는 뭘 보여주면 됩니까? 시작과 끝을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남편인데 아내가 라면을 끓인다면 우리 집은 반대가 됐지만, 라면은 내가 끓여요. 만약에 남편이 언약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런데 아내가 라면 끓이다가 연속극 보다가 그만 라면이 퍼졌다. 그러면 어지간한 남편 같으면 라면도 제대로 못 끓인다고 하다가 울컥 나오려고 하다가 “그래, 세상 끝 날에 라면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괜찮아 여보.” 이렇게 될 때 그 남편은 시작과 끝을 보이는 겁니다. 그럴 때 내 훌륭한 게 아니고 말씀이 응하게 하는 거예요. 그게. 그게 언약대로 사는 거예요.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지만, 우리는 라면 불었다고 탓하지 않는 구박하지 않는 그런 식으로 나름대로 방주를 만드는 거예요. 그럼 아내가 “별나다. 평소 살면서 그런 소리 한 적이 없는데. 잔소리꾼이 그런 소리를 왜 하지?” 하고 물으면 “내가 곧 시작과 끝이거든.” 그러면 아내가 “교회 갔다가 미쳤구먼.”하지요. 걸어 다닐 때 그냥 다니는 것이 아니고 시작과 끝이 걸어 다니는 거예요.
비가 온다. 비가와도 끝나면 의미 없는 걸. 바람 분다. 바람 불면 날려 죽겠지. 죽으면 죽는 거지. 이런 식으로. 별 의미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거예요. 그걸 제가 어느 설교할 때 사도바울의 여유 또는 자신감이라고 했습니다. 지지난주 설교였는데. 사도바울은 어떤 자신감이 있었는데 얼마나 자신감이 있었으면 너희는 잘됐고 나는 쓰레기가 되었다고 하겠어요. 그래, 너희는 잘되고 우리는 쓰레기 될게. 잡초 될게 너희는 잘돼라, 잡초 될게. 기꺼이. 도대체 이러한 배포 이러한 여유만만, 이런 당당함, 그거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시작과 끝을 품고 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비전 품지 마시고 시작과 끝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비전 품고 실망하지 마시고.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 속에 그런 과정을 할 때 일단은 내 속에 있는 나의 은근히 노리는 것, 은근한 맛을 들추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시키는 대로 해보면 그 시킨 대로 했다고 우리는 값을 해요. “주여, 이거하는데 시키는 대로 하는데 힘들어죽겠습니다.” 전도 좀 했다고 “아이고, 오늘 전도 했으니까 큰일 주의 일 했으니까 오늘 고스톱 쳐도 되겠지” 10원뱅이 한 번 쳐도 되겠지. 이런 식으로. 꼭 이렇게 착한 일한 게 우리한테 막대한 피곤함을 줘요.
우리는 나쁜 짓하면 피곤함을 모르지만, 되지도 않는 착한 일을 하게 되면 우리는 여기서 그야말로 상스런 말이지만, 경상도 말로 주둥이가 한 다발 나와요. 딸한테 명절날 지짐이 하라고 시켜보세요. 그 지짐 다 궂고 난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입이 한 다발 나오지요. 했다. 씨~ 이러고 있지요. 그것처럼 우리가 꼭 그런 식이에요. 무익한 종이 할 바를 했습니다.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고. 자, 내가 이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이제는 내 원하는 것을 줘야지요. 꼭 이렇게 당당하게 손 내밀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뭔가 열심히 한다는 것은 꿍꿍이속이 따로 있어요. 열심히 하게 되면 진작 내가 노리는 것을 하나님이 설마 양심이 있겠지. 설마 내 일을 수월하게 도와주겠지. 흥정하는 심리가 있어요. 그게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20절에 봅시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언약의 피. 언약의 그 다음 뭡니까? 피지요. 노아는 언약의 방주 만들었지요. 그런데 마지막 때에 율법의 완성에 보면, 언약을 짜면 방주가 나오겠어요? 방주는 노아 때고. 뭐가 나오겠습니까? 찍 짜면? 낯선 피. 그냥 피가 아니고 낯선 피지요. 하나님의 피 입니다. 하나님이 피를 줄 생각은 하지도 못했지요. 하나님의 피가 아니면 우리의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자살 100번 해도 소용없습니다. 천 번해도 구원 못 받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있어야 돼요.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죄를 끄집어내는 그 작업을 하나님이 해내지 우리가 스스로 반성한다고 내 죄가 나오지를 않아요.
우리는 우리의 죄의 끝장을 모릅니다. 끝까지 죄를 지어도 우리의 죄의 끝을 몰라요.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 짧고요, 세상 경험이 적어서 그래요. 인생을 다 안 살아봐서 몰라요. 우리는 죄를 기껏 지어도 90년밖에 못 짓잖아요. 아, 아까워라. 100살까지 살면 100살까지 죄 지을 건데. 그 만큼 10년 동안 죄를 못 지은 게 돼서 죄를 몰라요. 죄를 유일하게 아시는 분은 주님이기 때문에 그 죄를 씻는 방법도 유일하게 아시는 분이 주님밖에 몰라요. 그래서 잔소리해서 죄를 씻어주는 게 아니고 니가 모르는 죄의 마지막을 내가 아니까 그 죄를 씻는 것은 어떤 방법이다? 니 피가 아니고 내 피 만이 너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피가 나도록 무릎 꿇고 앉아서 만약에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면 이건 우리가 힘들긴 하지만 할 수 있는 거예요. 꿇어앉아서 하면 되니까. 십일조해서 용서 받을 거 같으면 이것은 할 수 있어요. 십의 구는 내거니까 남는 거니까 십분의 일만 투자하면 되니까. 그런데 아무리 해도 우리의 죄가 용서가 안돼요. 그게 뭐냐 하면, 이게 언약입니다.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언약 안에 뭐가 들어있다고 했습니까? 시작과 끝이 있지요. 우리한테 주어진 끝이지요.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 주어진 것은 절망이에요. 끝입니다. 선악과 밑에 양과 염소 없습니다. 따먹었다. 끝났어요. 정녕 죽으리라, 끝났어요.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나한테 조치는 없습니다. 끝났습니다. 우리가 전도하고 헌금하고 소용없어요. 그거해서 죄 용서 될 거 같으면 진작에 전도하고 선교하라 했을 거예요. 안돼요. 어떤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도 우리의 죄를 씻어낼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쪽에서는 끄집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럼 뭐하면 됩니까? 우리는 안 된다는 것, 끝이라는 것, 그것만 보여주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칠 때, 항상 끝장에 있는 사람들을 고쳤지요. 누구냐 하면 바로 강도, 그리고 38년 된 병자, 날 때부터 소경된 자, 죽은 지 이미 나흘 된 사람, 그리고 회당자의 아들이나 과부의 아들 같으면 죽어서 이미 장례 치르고 있는 가운데 애는 죽는 게 아니고 잔다. 그리고 도저히 못 고친 중풍병자, 이런 사람들 주님의 그 모든 일을 하시면서 주께서 겸해서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뭐냐 하면 니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이 산을 들어서 바다에 빠져라하면 빠졌을 것이라는 것은 결국 이것은 뭡니까? 우리는 할 수 있다, 못한다? 우리는 못하지요.
그러니 못 함을 믿어라 이 말이죠. 니 끝을 믿고 니 절망을 믿어라 말이죠. 내가 나한테 할 수 있는 것은 일체 없음을 믿어라 말이죠. 그것 때문에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을 준 이유는 율법이 옴으로 말미암아 우리한테 모든 입을 막고 우리를 뭐하려 함이라? 저주아래 두게 하심이라. 저주아래 둘 때, 그 저주가 우리의 참다운 현실이에요. 다른 현실 찾지 마세요. 저주만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현실입니다. 저주만이.
이제 성도가 됐으면 그 저주를 우리는 자랑하지요. 저주 받음을 자랑하지요. 미장원에 가거든 저주 받음을 자랑하세요. 아, 머리 너무 잘 나왔네. 저주 받았어. 정말. 이렇게 이쁘게 저주받을 줄은 몰랐지. 식당에 가거든 맛있는 음식이 나왔을 때는 그 요리사 부르고 그 주인보고 마음껏 자랑하세요. 아, 오늘 음식 맛 너무 맛있어요. 오늘 두 그릇 먹었어요. 세상에 이런 저주가 다 있다니. 이렇게. 이 음식을 안 해줘도 괜찮고 머리를 다 태워도 괜찮은데 왜 이리 머리가 잘 나왔느냐 이 말이에요. 반드시 저주를 깔아놓고 왜 저주 받을 나에게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떡볶이를 해주셨습니까? 고맙습니다. 그런 말을 해야 된다 말이죠. 그게 우리가 해야 될 성도가 해야 될 일입니다. 항상 끝이 있어야 돼요. 끝을 두고 있을 때 그러면 끝인데 뭔가 생기잖아요.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 줄 알아요? 그것은 시작하시는 분의 은혜지요.
끝이라는 쟁반에다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굵은 후지, 맛있는 사과를 주는 거예요. 쟁반에다가 뿅하더니만 아무것도 없는 쟁반에 뿅하면서 거기서 사과가 생기면 그 사과는 은혜지요. 어제 죽어야 되는데 뿅하니까 오늘 살아 있잖아요. 지금 살아 보고 있잖아요. 그러니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은혜라는 거예요. 이게.
그렇다면 우리는 뭡니까? 우리 안에 어제 죽어야 되는데 오늘 살았으니까 끝과 시작을, 시작하신 분은 주님이니까 우리는 공유하면서 이 땅에서 특이한 존재로 신앙인으로서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인간의 힘으로 능력으로 되지를 않고 바로 율법의 완성으로 되는 겁니다.
자, 오늘 여기까지 한 거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리면, 모세가 율법대로 송아지 염소의 피를 하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율법은 지키라고 한 것이냐,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느냐, 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끝을 보는 겁니다.
끝이 뭐냐 피거든요. 피를 찍어 바르면 효과 보느냐, 아니에요. 피는 끝을 의미하기 때문에 피를 찍어 발라서 효과 보는 게 아니고 피라 하는 것은 그 끝이라는 사건에 참여된 사람은 주님과 더불어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피를 생각할 때는 나의 끝장을 십자가 피에서 확인해주시면 되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살았건 인생이 어떻게 되었건 관계없이 나는 이미 내 인생은 끝났고 시작이 누구부터 시작했다? 주님이 시작했으니까 내가 날 때부터 주님의 인생으로 살아왔지 사실은 내 인생은 이미 주님의 인생 앞에서 끝났다, 라는 사실을 우리가 보여주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피라는 것의 의미에 담겨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 다음 문제 봅시다. 그럼 염소의 피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염소의 피로 구원하면 되는데 왜 오늘 우리보고는 염소 잡으라고 왜 이야기를 안 하지요? 왜 소 잡으라고 이야기를 안 하지요? 여러분이 아는 상식에 의하면 예수님이 어린양이 되시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염소의 피나 소의 피는 필요 없이 누구의 피면된다? 예수의 피면된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알고 있잖아요. 예수님의 피면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염소의 피나 예수님의 피나 일단 내 피는 아니잖아요. 내 피는 아니지요. 내 피가 아니면 타인의 피잖아요. 송아지도 마찬가지고 염소도 마찬가지고. 타인의 피가 어떻게 내 속에 들어오지요? 주님의 피가 들어오려면 그게 개울가가 되어가지고 밑바닥으로 해서 스며듭니까? 스폰지처럼. 어떻게 되지요?
여기 22절에 봅시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했지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할 때에 이 현장에 우리가 빠집시다. 그러면 해결돼요. 예수님이 피 흘리고 있습니다. 주여, 이 피를 받으소서. 할 때 우리가 근처에 이렇게 팔짱끼고 이리 앉아있으면 피 흘리기만 해봐라. 얼른 찍어서 몸에 발라야지. 이러면 내가 피 근처에 살아있는 존재가 되잖아요.
따라서 예수님의 피 흘리는 그 사함의 역사가 올 때는 아무도 그 근처 거기에 관찰하거나 그걸 지켜볼 수 있는 위인은 아무도 없어요.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만이 그 현장을 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누구보고 이야기합니까? 아버지지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것은 아버지하고 예수님하고의 문제 돼요. 우리는 그 근처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도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그 권역에 포함이 안 된다 말이죠.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서 예수님이 지신 죄가 용서가 되어버려요. 누구한테? 아버지에게만. 하지만 그것을 적용하려고 우리가 그 근처 얼쩡거리지 마세요. 우리는 거기에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죄 용서 하고 안 하고는 우리의 요청에 따라 용서해 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본인 의사에 따라서 본인의 자기 권한이라니까요. 용서가. 자기 공로잖아요. 자기 공로.
예를 들면 밤나무에서 밤이 떨어졌는데 아침에 어떤 아주머니께서 일찍 와가지고 밤나무의 밤을 몽땅 땄어요. 따서 갖고 있어요. 뒤늦게 일어나가지고 다라 들고 대야 들고 따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한 아주머니가 이미 다 따고 있거든요. 그러면 그 밤 좀 주세요. 라고는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주고 안 주고는 누구 마음입니까? 그것은 먼저 딴 사람 마음이지 그거 안 준다고 이 욕심 많은 것, 멱살 들고 할 수 없잖아요.
죄 사함은요, 죄 사함의 현장에 모든 인간은 나가 있어라. 왜? 끝이니까. 절망이니까. 죄 지어놓고 어느 뻔뻔스럽게 용서해 달라,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소리지요. 죄 지어놓고 죄 용서해 달라는 그게 죄입니다. 죄 지었으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가만히 꿇어 앉아있어야지 어디 뻔뻔스럽게 죄 지어놓고 “죄 지은 건 미안한데요, 용서해 주세요.” “니 언제 봤다고?” 성경에 보면 니가 원한다고 죄 용서해주는 것도 아니고 달음박질한다고 열심히 애쓴다고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사람만 긍휼을 입는다고 되어있어요.
그게 출애굽기33장19절에 나와요. 나는 은혜줄자에게만 은혜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만 긍휼히 여겨주고 밤 주고 싶은 사람만 밤 주고 대추 줄 사람에게만 대추주고 이건 오야 마음대로에요. 이건 달라고 해서 주는 게 아닙니다. 결과입니다. 그러니 회개의 반대말이 반성입니다. 반성은 하나님께 “이래도 안 줘” 라고 악을 쓰면서 자기 낮추는 걸 자기반성이라 해요. 그게 누가 전문인가 하면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이 전문가였어요. 예수님이 죄인들하고 술 잡수러가고 밥먹으러갈 때 저희들은 뭐하는가 하면 “부족합니다.” 이거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고난주간에 잘 먹고 있었거든요. 왜 너희 선생은 왜 고난 안하느냐, 왜 금식 안하느냐 하니까 나는 의임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부족합니다. 이게 뭐에 속한다? 죄에요.
다시 하겠습니다. 요셉이 총무 되려고 꿈꿨습니까? 아니지요. 요셉이 요 코스로 가면 나중에 2인자 될까 해서 일부러 교도소 들어갔습니까? 아니지요. 그걸 가지고 뭐라 했어요. 말씀이 응하기까지. 우리가 구원 받는 것, 우리의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요청이 아니었고 말씀이 응해서 용서받은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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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0150213b-히9장19절(죄 사함)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은 뭐냐 하면 피 흘림이 죄 된다는 것은 우리 인간한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니 피 흘리면 그 피로 죄 용서가 사해졌다. 예수님 안에 누가 있습니까? 아버지가 구원할 백성들의 죄를 대신지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돌아가셨잖아요. 그렇지요. 예수님께서.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죄를 짊어졌다는 것이 어디에 나타나느냐 하면 세례요한의 세례 받을 때 그랬어요. 세례요한한테 세례 받을 때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아이고, 당신은 세례 받을 필요 없어요.”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하는 말이 “아, 나둬. 나둬. 가만히 있어.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려면 바로 내가 죄 없는 예수님께서 백성들이 퍼트려놓은 그 장소에 풍덩 뛰어들어야 돼요. 코팅이죠. 죄의 코팅. 시커먼 곳에 하얀 거 집어넣으면 새카맣게 되잖아요. 먹물 묻잖아요. 그것처럼.
세례요한의 죄에 뛰어들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했지요. 물과 성령. 물이라 하는 것은 세례요한의 물세례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례요한의 물세례가 누가 한 것이다? 세례요한이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누구 일로 보느냐 하면, 자기일로 봤어요.
다시 하겠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세례요한의 물세례가 세례요한의 세례라고 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한 일로 본다? 세례요한이 한 일이 아니고 본인을 위한 본인의 일로 그걸 인수해 버리는 겁니다. 본인의 일로 인수해버리면 이미 인수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세례요한 속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러면 세례요한의 물세례가 의미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이미 죄 속에 합류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자, 첫 째 시간 들었으니까 여러분에게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일이 될 경우에 예수님의 일의 성과는 바깥에 관찰하고 있는 인간보고 관계되는 일입니까, 인간이 빠진 상태에서 할 일입니까? 인간이 빠집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모든 일은 인간은 빠지고 누구보라고 하신 일이 되지요? 아버지보라고 하는 거죠. 아버지보라고.
그러면 이 성경의 모든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일을 펼쳐놓은 것이 성경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이 이유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 존재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멸망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을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야, 우리에게는 여호와도 있다. 우리에게는 이젠 동행하시는 하나님도 있다. 따라서 우리 이스라엘은 멸망하지 않을 거야.” 심지어 성전마저 있었고 그 성전에 누가 임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고, 영광이 그냥 임했습니까? 누구든지 여기 와서 기도하면 응답받고, 만약에 죄 용서해 달라하면 죄 용서해주고, 전쟁 이기게 해 달라하면 이기게 해주고, 병들어서 오게 되면 병 낫게 해주고 세상에 이런 시스템이 어디 있어요. 최고잖아요.
성전이 하나 있는 한 특별히 좋은 것은 성전과 함께 있게 되면 주위에서 침범해도 침범할 수가 없어요. 성전이 전쟁에서 승리케 해주기 때문에. 이거 얻을 거 다 얻었잖아요. 끝났지요. 가만히 있어도 되니까. 그런데 망했잖아요. 심지어 성전까지도 망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주의 이름이니까 주의 이름은 어려워요. 주의 이름이 사실은 굉장히 어려운 용어인데 그 당시 예수님이라고 쉽게 하겠습니다. 그 당시의 예수님. 주의 영이 임하니까.
그 당시의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온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의 근원지로 만들기 위해서,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여기에 오신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해하기를 이스라엘이 잘되기 위해서 왔다고 생각한 겁니다. 주님께서 성도에게 임할 때 성도에게 임하는 목적은 성도로 하여금 죄를 아는 사람 되기 위해서 임하신 거예요. 죄를 아는 사람.
성도가 죄를 알게 되면 그 죄에 대해서 자기 힘으로 그 죄를 씻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없으니까 첫 째 시간에 이걸 뭐라고 했어요? 절망, 한 자로 하면 끝이지요. 끝. 성도로 하여금 나는 끝났어. 나는 뭘 해도 안 돼. 라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거예요. 깨우치게 하면서 끝에 뭐가 있는가 하면 시작이 있지요. 이게 에덴동산을 파괴하는 요소도 에덴동산에 있고 에덴동산을 완성하는 요소도 에덴동산에 있었지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가 에덴동산을 완성하면서 에덴동산을 끝장내는 요소는 선악과나무지요. 시작과 끝이 나란히 나무가 되어가지고 짝이 되어가지고 동산 가운데 있는 거예요. 시작과 끝이 함께 있는 거예요. 에덴동산에. 에덴동산이 뭉겨지면 끝이고 에덴동산이 세워지면 그것이 완성이 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 인간이 있었으니까 뱀은 말하기를 관심이 하나님이 하신 일, 시작과 끝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만들고 뱀은 니가 잘될 것이다. 갑자기 독자적으로 너에게 초점을 둬가지고 니가 따먹는 날에는 정녕 니가 신이 된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전부 다 자기주체밖에 모르는 이런 삶을 살게 된 거예요. 이러다가 우리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매일 자기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생각. 겨울에 눈이 안 오고 비가 안와가지고 농사 끝나는 게 아닌가. 매일 이거 생각하는 거예요.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야,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이런 고생을 시킵니까?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태어나지 말았어야지 왜 태어나게 하셔서 이런 고생을 합니까?” 전부 다 자기 생각하는 거예요. 나중에 욥은 어떻게 됩니까? 재를 뒤집어쓰고 “세상에 이렇게 철도 없는 인간이, 내가 이렇게 철이 없습니다. 회개하나이다.” 하고 이렇게 뒤집어쓰지요. 그래서 시편105편19절 말씀이 중요한 겁니다. 요셉이 그렇게 된 것은 말씀이 응하게 함이라. 말씀이 응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지 내 좋아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첫째 시간에 중요한 것은 바로 딴 게 아니고 죄에 피를 흘렸는데 어떻게 사함이 되느냐, 그것은 우리 인간을 내 쫓아버리고 아버지하고 예수님 사이에 이미 약속이 뭐냐 하면, 니 죽음을 통해서 니 죽음 자체를 하나님의 죄 없는 상태, 하나님의 의로 만들겠다고 이미 창세전에 약속이 되어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일을 그렇게 벌이신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백날 송아지 잡아도 소용없는 거예요. 송아지 잡고해서 죄 씻는 거 아닙니다. 백날 해봐야 소용없어요. 그들은 예수님 오셔가지고 아버지를 만나야 돼요. 아버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송아지 잡고 염소 잡으면서 이 죄가 왜 씻어지는지를 모르지요.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 정리해 봅시다. 이렇게 정리하는 게 중요하니 정리해 봅시다. 우리가 이렇게 있고 타인이 있고 또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다면 반드시 우리는 그냥 하나님을 만나던지 타인을 만나지 말고 뭘 경유해야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경유해서 창조전의 약속이지요. 하나님의 약속을 경유해서 우리는 주님에게 나아가고 타인에 대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경유해서 타인에게 나아가야 되고,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을 했으면 “저 사람은 내 남편이다.” 라는 것은 이건 잘못된 거예요. 내 남편이라는 게 없어요. 왜냐 하면 내가 없기 때문에 없어요. 여성이 결혼을 했으면 신부 또는 아내라 하지요. 그런데 여성이 결혼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신부, 아내가 아니에요. 왜냐 하면 여성자체가 없어요.
여성 자체가 있게 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대로 여성이 있게 했으면 언약대로 결혼했으면 그럴 때 아내고, 그것이 바로 신부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언약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 저 결혼했습니다. 이제는 신부가 되었습니다.” 하면 하나님이 신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언약이 없는 것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걸 음녀라고 해요. 성경에서. 바람피우는 여자를 음녀라고 하지 않습니다. 언약이 없는 이 세상의 경향을 가지고 음녀라고 해요. 요한계시록17장에서. 음녀 바벨론. 언약이 없는 것.
언약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의 그 약속을 적시지 않았다. 그걸 경유하지 않았다 이리 되어버립니다. 그럼 그걸 경유하지 않게 되면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은 존재가 되어버려요. “목사님, 우리가 죽었다 살아났잖아요.” 그것은 틀림 말입니다. 우리는 죽고 말씀에 의해서 살아나지요. 내가 살아난 게 아니고 우리 안에 주님이 살아나요. 말씀이 사는 용도로 우리가 살아가는 겁니다. 그냥 살아나는 게 아니에요. 혼자 죽고 혼자 살아나봐야 그건 니가 죽었나? 죽었구나! 살았나? 살았구나! 주께서는 있으나마나 한 거예요.
시험기간이 됐다. 애가 시험을 친다. “엄마, 시험 쳤어.” 그거 의미 없어요. 엄마가 노리는 것은 무얼 경유해야 돼요. 어디냐, 교무실에 성적표를 가지고 이야기해야 돼요. “그런데 몇 점 나왔는데?” 이걸 묻는다니까요. “엄마, 시험 쳤어. 니 몇 점 나왔는데?” “엄마 수능 점수 나왔어.” “몇 개 나왔는데?” 이걸 묻는 거라니까요.
주께서 결혼시킬 때는 하나의 그냥 일반적인 여자가 아니라 언약에 있는 주님의 신부로서 결혼했느냐를 묻습니다. 또는 주님의 신랑으로서. 그래서 내가 부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에베소서5장에서 그렇게 언급한 겁니다. 상당히 신비로운 말이라고 언급을 달아요. 너무 어려운 말이라고. 저는 그래서 이런 어려운 말을 쉽게 해서 “그 냥 코팅하세요.” 코팅이란 말밖에 할 수 없어요.
내일 발렌타인데이 하는데 제가 어릴 때는 그게 참 맛있었어요. 안에는 초코렛 들었고 바깥에는 노란 사탕, 빨간 사탕으로 입혀서 m&m에서 나온 미제 초코렛. 캡슐화 된 되게 맛있었는데. 지금도 팔기는 팔지만 지금은 입맛이 변해서 모르겠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코팅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안에는 예수님의 피, 언약의 완성이 들어있고 바깥에는 몇 살이냐, 나이 나와 있고. 모자 썼습니다. 파마했느냐, 이런 것 묻고. 파마 안하셔요? 언제 파마하는지 기다리겠어요. 생머리가 되니까 하는 거지. 어쨌든 관계없어요. 어차피 코팅되어 있는 거. 어차피 우리는 하나의 캡슐에 껍데기에 불과하니까. 속에 언약이 중요하지요.
그래서 히브리서11장에 보면, 노아가 방주를 만들던지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던지 관계없이 항상 그 안에 살아있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이 있어서 믿음에 의해서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인생, 다윗은 다윗 인생, 모세는 모세 인생,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지만 그걸 거부하고 애굽의 모든 보화를 거부하고 백성과 고난 받기를 즐겨하는 그것이 내부에 있는 언약의 완성 때문에 언약과 함께 있는 내용 때문에 바깥에 퍼져 나오는 그 모습도 그런 현상을 보이는 겁니다.
모세가 그런 인생을 살고 싶은 게 아니고 그렇게 살도록 안에 계신 분이 인생을 그렇게 꾸며낸 거예요. 그게 바로 죄 사함의 효과라 하는데 죄 사함 할 때, 제가 제일 좀 들으면서 좀 불만, 짜증 그런 걸 느끼는 이유가 죄 사함이라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목사님, 피 찍어 바르면 효과 봅니까?” 매일 이런 질문을 해요. 여기 예수님 피가 있는데 찍어가지고 바르면 이게 죄 사해지냐 이 말이죠. 로션도 아니고. 종이약도 아니고 붙이면 병이 낫습니까. 죄의 삶이라 하는 것은 이게 그냥 삶으로 나타나요. 삶으로.
“자, 여러분, 죄 사함 받았지요? 여러분, 바르게 사세요.” 이거 자체가 땡 탈락이에요. 그 자체가 성경에서 언급이 안 되는 거예요. 그게 거짓말이에요. 거짓말. “예수 믿었습니까? 믿었으면 티를 내야지. 돈을 내야지.” 맨 날 이런 소리하거든요. 교회가 그 할 소리 없잖아요. 돈 내라고. 죄 용서 받았으면 뻔뻔하게 뭔가 가만히 있지 말고 봉사하던지 돈 없으면 시간을 바치던지 때우던지 그렇게 하라. 그게 아니고 죄 사함은 찍어 바르는 게 아니고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것이 죄 사함의 효과이어야 한다 이 말이죠. 죄 사함의 효과.
다시 말해서 “이것은 내가 원한 인생이 아닙니다.” 그 고백이 나와야 돼요. “이건 주께서 원하는 인생이지 내가 원하는 인생은 요만큼도 아닙니다.” 그 고백이 나와야 돼요. 그 전체가 죄 사함이에요. 그걸 근거로 대라면 그런 근거가 어디 있느냐, 바로 예수님의 생애가 예수님의 출생 따로 있고 십자가 따로 있고 그게 아닙니다. 출생할 때부터 이미 십자가를 내다보고 살아왔어요. 그리고 부활해도 이미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 부활하고. 예수님이 병 고친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피 흘림과 관계되어있어요.
그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8장에 나오지요. 세상에 있는 의사들은 병을 고쳐주지만, 예수님은 병을 짊어진다니까요. “니 아프나?” “아프다.” “그러면 나도 아플 게. 그 대신 너는 안 아프고 나는 아프고.” 이렇게 해서 주님이 아픔을 가져가는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은 완전히 종합병원 온갖 병은 다 품고 있어요. 강도가 지었던, 간통한 죄도 자기가 품고, 마음속으로 욕했던 거 그것도 품고 있고, 잘난 체 한 것도 품고 있고, 교만한 것도 품고 있고, 베드로처럼 내가 내 목숨 바쳐서라도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는 그런 건방짐도 품고 있고, 내가 예수를 세 번씩 모른다 한 그 죄도 주께서 품고 있고, 택한 백성 죄는 다 품고 있는 거예요. 38년 된 병도 품고 있고. 그 모든 걸 품고 십자가의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았다 하는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강도 짓 안했지만, 내가 강도고 내가 간통 안했지만, 내가 간통한 여인이고 내가 깡패 아니지만, 깡패 맞습니다.” 이렇게 할 때 그게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면 세상에 그렇게 지어놓고 뻔뻔스럽게 밥은 입에 잘 들어간다. 차마 처먹는다는 말은 못하고요, 그렇게 죄를 지어놓고 밥은 왜 잘 먹는가? 그러니까 은혜지. 밥 먹게 하는 힘도. 팔 하나 아파보세요. 팔이 올라가는가 안 올라가지. 깁스 해가지고. 그런데 깁스 안하고도 올라가네. 제가 한 2년 동안 안 됐거든요. 지금은 괜찮아요. 이게 돼요. 차 후진할 때 못했어요. 그런데 여유 있게 멋지게 돌린다니까요. 은혜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본다 이 말이지요.
성경의 신약에 나오는 성령의 충만이 이겁니다. 성령의 충만이 뭐냐 하면, 내가 안 보이는 것. 이것은 내가 내 인생에 보탬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는 것. 이게 성령의 충만 이니까 이걸 가지고 그 열매를 가지고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입니다. 만약에 내가 보이게 되면 육의 열매에요.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나보다 기도 더 오래 하기만 해봐라, 나보다 헌금 더 하기만 해봐라, 나보다 목사한테 사랑 더 받기만 해기만 해봐라, 이게 전부 다 내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을 받으면 나를 십자가에 다시 육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다 했거든요. 갈라디아서5장24절에 보면. 열매이야기 할 때. 십자가에 못 박으면 터져 나오는 게 죄 사함이 터져 나오니까 나는 죄 사함의 열매로서 이 땅에 살아가는 거죠. 죄 사해달라고 요구한 적도 없어요. 주님이 일방적으로 죄 사해줬기 때문에 죄 사해진체로 살기만 하는 남은여생 이게 우리의 여생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가 제 이야기가 아니고 히브리서10장18절 미리 봅시다.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내 안에서 주님이 제사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제사드릴 게 없는 거예요. 제사가 끝났다는 말이 아니고. 처음부터 인간은 제사해도 제사한 적도 없어요. 백성이 백날 제사해봐야 그건 헛된 제사에요. 제사도 아니었어요. 지가 지 잘난 체 하는 게 무슨 제사겠어요. 마트에서 실컷 배달해서 다해 놓은 거 그냥 내놓고 그게 무슨 제사겠어요.
제사는 우리가 해도 소용없고 한 적도 없고 제대로 한 적도 없고 그런데 제사는 있어야 죄 씻음이 되니까 다른 분이 우리 안에서 제사를 드리는데 우리는 죄 사함의 효과기 때문에 우리 안에 제사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게 없다 이 말입니다. 죄를 위해서 제사를 드릴 게 없다는 말을 더 응용해서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헌금해서 용서받을 일없고 전도 더 한다고 해서 용서되지도 않을뿐더러 예배 참석한다고 더 용서받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걸 다시 응용하게 되면 용서받고 난 뒤에 헌금 안하고 제사 안하고 예배 안 드려도 여전히 죄 사함 받은 상태다 이 말입니다. 이걸 설교시간에 이야기를 해야 돼요. 이걸. “늦게 오셨습니까? 더 늦게 와도 전혀 구원 받는데 지장 없습니다.” 이걸 해야 된다니까요. 그러나 but을 빼버리세요. 들어가지 마세요. 괜히 거론해서 이중으로 사람 죽이지 말고. 그걸로 끝내세요.
다시 할게요. 우리가 빠진 상태에서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의논한 상태이기 때문에 뒤에 서서 “뭐 도와드릴 거 없어요? 설거지 하겠습니다.” 이러지 마세요. 고무장갑 끼고 나서지 마세요. 괜히 나서면 다된 밥에 재만 뿌립니다. 우리는 다된 것에 누리고 효과만 보면 돼요. 우리 자체가 효과니까. 그것 때문에 히브리서 자체가 있어요. 히브리서 자체가 뭐냐 하면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끝났다는 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이러 이러한 것이 믿어지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라고 확인 차원에서 히브리서를 준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보면 돼요.
“아, 또 뭘 지켜야 되지? 이거 안 지키면 벌 받는가?” 이러지 마시고 느긋한 몸으로 성경을 보셔야 돼요. 너무 느긋하게 보다가 잠자는 분도 계시는데. 그건 너무 느긋해서 그렇고. “자, 구원받았으니까 인간 값 해야지.”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무슨 니가 왜 있는데? 우리는 없는데. 항상 언약을 경유해야 되는데 언약을 그냥 멀찍이 보는 거예요. 보고 고맙습니다. 하고 다시 자기 독자적으로 자기 노선으로 돌아서니까 또 내가 뭘 해야 되는 것처럼 되는 거예요.
언젠가 제가 달그림자 노래까지 불러가면서 설명했지요. 달그림자라 하는 것은 우리가 만드는 게 아니고 생기는 거잖아요. 우리가 그림자에요. 주님의 그림자를 내가 만드는 게 아니고 내 그림자인 줄 아는데 내 그림자가 아니고 주님의 그림자인데, 그림자를 보니까 히브리서9장이에요. 그게. 말씀이 응하게 함이라.
요셉이 평생 살았는데 돌아서하는 말이 뭐라고 합니까? “형이여, 무서워하지 마세요. 내가 당신한테 보복안합니다. 왜, 내가 나 된 것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를 앞서 보냈기 때문에 주께서 그렇게 하신 일인데 괜히 나를 무서워하지 마세요.” “니 아버지 죽었다고 이제 슬슬 나한테 복수하려고하지?” “아닙니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있고 없고 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혜택 주려고 저를 앞서 보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너무 신경 안 써도 됩니다.”라고 요셉도 그 형들에게 안심을 줬는데 요새 목사들은 왜 안심을 안 주는지 모르겠어요.
요셉도 고생했다고 해서, 고생한 것은 남한테 대우받으려고 고생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앞서 고생한 거고요, 그리고 성도치고 고생 안한 사람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갈비 뜯는다고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데요. 백화점에 가서 옷 고른다고 얼마나 고생하는데요. 아휴, 이 피곤함 벌써 2시간반째. 어느 옷을 입을까? 고생하고 있는데 산다는 게 고생이에요. 그런데 그 고생이 바로 주님의 고생을 되밟아 간다는 입장에서 우리는 감사해야 돼요. 우리 같으면 고생 안 할 고생을 주님께서 이끄시기 때문에 주님을 더욱 더 확실하게 느껴지는 그런 고생들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자,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여기에 나오는데요, 이걸 설명하려고 이렇게 길게 했습니다. 9장24절요.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리 되어있지요. 그러면 구약의 이스라엘 우리 선배들이 뭐였다? 그림자였습니다. 그들이 그림자라면 우리는 뭡니까? 우리도 역시 그림자지요. 지금 주님의 그림자입니다. 님 그림자이고 달그림자에요. 주님의 그림자입니다.
따라서 피 흘려서 용서받는다. 우리선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어서 용서받는 게 아니고 주님이 아버지한테 결정 난 문제이지 우리가 믿어줄 때 용서되고 안 믿어주면 용서가 안 되고 그거 없어요. 우리가 믿어야 용서된다는 것은 그것은 유 병언 개인이 다 그래요. “여러분,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받습니다.” 이러거든요. 그리고 그 날짜를 기억해야 돼요.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이것뿐만 아니고 침례교 계통이 다 그래요. 입으로 하고 고백해야 된다고 손들고 나오래. 또 안 나오면 안 돼. 그리고 또 침례를 받아야 된데. 침례. 물 뿌리는 것은 세례고 물에 들어갔다가 첨벙 튀어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욕조 없는 교회는 교회도 아니에요.
다시 할게요. 세례라는 것은 우리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다? 아까 했지요. 세례를 이미 주님의 일로 자기 일로 이미 가지고 가버렸어요. 예수 믿는 순간 우리는 이미 세례 받은 사람 돼요. 물 안 뿌려도 괜찮아요. 교회에서 세례식 하는 그 이벤트 안 벌려도 돼요. 성만찬 이벤트 안 벌려도 돼요. 일 년에 두 번씩 안 해도 괜찮아요. 예수님이 모든 일을 자기 일로 다 가지고 가버렸는데 왜 우리 일이 또 남아있어야 됩니까?
“목사님, 내가 지난번에 목요일 날 뇌물 받았는데 오늘 주일날 내가 성만찬을 몰랐습니다. “아이고, 성만찬 할 거 같으면 내가 지난 목요일 날 안 받고 성만찬하고 난 뒤에 내일 받을 걸 미리 받아가지고 분명히 성경에 보면 죄 짓고 난 뒤에 이 성만찬 참여하게 되면 어떤 사람은 침대에서 나가떨어지는 사람 있고 어떤 집사는 갑자기 벼락 맞아 죽은 사람이 있다는데.” “니가 이걸 분별치 않고 먹으면 급사하거나 아니면 병원에 입원하거나.” 그러니까 그걸 보고 곤경에 있는 사람들은 빨리 자기 할 거 있으면 “목사님, 성만찬 언제 합니까? 우리교회에.” 해요. 그러면 월요일로 미뤄요. 급사당하면 안되니까. 맛있게 먹고 그 다음날 이제 용서받았으니까 또 슬슬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성만찬입니까?
제가 분명히 합니다. 성만찬과 세례식은 계시가 확정되기 이전까지의 보조계시였습니다. 보조계시. 방언도 마찬가지고요. 통역 없는 방언은 방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방언과 통역은 그것은 바나나 껍질이에요. 그걸 벗기고 알맹이만 먹으면 돼요. 알맹이가 뭐냐 복음입니다. 성경이 확정되지 않아서는 복음이 확정되지 않았어요. 왜냐, 사도가 안 죽었기 때문에. 사도가 죽고 난 뒤에는 이미 성경이 확정돼요. 더 이상 더 보태거나 뺄 수가 없어요. 확정돼요. 요한계시록에서 성경이 확정되고 난 뒤에는 더 이상 방언이고 뭐고 이런 것은 복음이 방언을 대체하고 복음이 통역을 대체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그것이 방언이에요. 복음이 나오기 때문에. 복음이 없으면 방언이 아니고 복음이 있으면 방언이에요. 왜냐, 방언이라는 말 자체가 에스겔에 나오는 구약에 나오는 종말적 용어기 때문에 그래요. 오순절 날 방언한 것은 그 종말의 영이 왔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 승천하고 예수님 오시고부터 종말이라는 표적으로서 방언이 나온 거예요. 10족속의 말이 나온 겁니다. 그래서 현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내용이 중요한 거예요. 도대체 무슨 원어를 말을 했습니까가 아니라 누구를 믿어야 됩니까? 그 말이 더 중요해요.
원어라는 말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아니라 워랄라라라 하느냐 관계없이 우리는 “누가 내 안에 시작이고 누가 내 안에 끝입니까?” “알파요 오메가입니까?” 그걸 아는 것이 그것이 구원입니다. 방언했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거 아니고요, 방언 안 했다고 해서 구원 안 받는 거 아니고 그래요. 사도바울은 방언하세요, 라고 가르친 게 아니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설교를 봤지요? 뭐라고 돼있습니까? 이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했기 때문에 누구든지 십자가의 죽음의 부활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그걸 전했어요. 그럼 우리도 그걸 전하면 되는 거예요.
왜 성만찬, 세례식, 방언에다가 힘줍니까? 그건 아까 집사님의 말대로 종교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일단 이 보통사람을 종교인 만들어 놓고 두 번째 공장에 나서겠다는 거예요. 보통 사람을 종교인으로 만드는 것은 쉬워요. 이것은 훈련과 습작에 의해서 반복된 교육과 학습에 의해서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심사도 남들이 하기 때문에 고 심사에 맞추면 돼요. 확인이 가능한데, 그 다음부터 교회 온 종교인으로부터 천국에 가는 것은요, 마치 땅에 있는 사람 들어 올려가지고 하늘로 던지는 것처럼 불가능한 겁니다. 산을 들어서 바다에 빠지는 것처럼 이건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안 됩니다. 될 일이 아니에요. 사도바울도 단 한 명도 구원 못했습니다. 왜냐, 자기는 뭐라고 합니까? 나는 내가 십자가 진 게 아니다, 라고 했잖아요.
신천지에서 나오는 글을 가지고 우리교회 집사님이 저한테 가지고 왔어요. 내가 이래서 주의 종 맞다, 는 그것을 죽 성경구절을 뽑아놨어요. 그래서 내가 한마디로 이야기했어요. 사도바울은 십자가 진 적 없습니다. 고게 정답이에요. 사도바울은 본인이 이야기해요. 내가 십자가를 졌느냐? 너희를 위해서? 사도바울이 증거 하는 것은 ‘나, 아니오.’ 에요. “나, 아니오.” 나 아닙니다. 왜 나를 봐요? 내가 산타에요? 나, 아니라니까. 이걸 증거 하는 거예요. 나, 아니고 나에게서 나오는 구원의 말씀이라니까요. 이제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나 아니야, 이런 뜻이에요. 나는 내 갈 길을 간다. 하지만, 내가 전한 복음은 너희를 살린다. 디모데야, 부탁~해요. 이 복음을! 부탁해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했잖아요. 디모데의 자리는 사도바울의 자리라고. 디모데가 바울의 신앙의 아들 되기 이전부터 디모데가 있었지만, 디모데가 신앙의 아들이 된 것은 디모데 그냥 디모데에요. 새로운 자리가 들어왔기 때문에 된 겁니다. 그 자리가 예수 안이라는 자리입니다. 예수 안 자리에요.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이 그림자라 하는 것은 실체가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그림자라고 물러서는 거예요. 이 말은 그림자 보지 말고 우리를 그림자 되게 하신 분을 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의 태도는 뭐냐 하면 이거에요. 복음전파입니다. “나, 아니오.” 그럼 다른 사람이 “니가 아닌데 니가 왜 예수 이야기하느냐?” 내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를 못한다. 사도행전 마지막 대목이잖아요. 나는 말씀을 전하는데 그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분명히 들어도, 듣는다 하여도 그것이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듣게 한다는 거예요. 봐도 구원 못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전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너희들 앞에는 복음 전하는 사람이 보여야 되고 그 복음소리가 들려야 된다. 하지만, 너희들 구원하고는 관계없다. 구원은 나, 아니오. 내가 왜? 나는 십자가를 진 적이 없기 때문에. 구원은 누구 맘대로? 오야 맘대로. 구원은 주님 맘대로 입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주님과 아버지의 계약에서 인간은 빠져있기 때문에. 빠져있는 자가 감히 들여다보면서 “혹시 제 거 없습니까?” 들어오지 마세요. “나가 있어.” 빠져있어야 돼요.
빠져 있다가 구원 받았거든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저 구원 안 해줘도 되는데” 이게 성령의 고백입니다. “굳이 나 같은 인간을 천국을 안 넣어줘도 되는데. 아~ 이렇게 넣어줘 가지고 제가 할 말이 없네요.” 이게 바로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에요. 이게. 그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24절,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빨리 정리합니다. 성소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은 언약의 인간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언약의 인간. 방주는 노아와 하나님의 만남이죠. 그리고 제단은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만남이죠. 그런데 성소는 모세이후에 이스라엘 집단과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모세이후에.
모세와의 만남이 아닙니다. 모세와의 만남은 시내산이에요. 시내산에 있던 하나님의 만남이 산에서 내려왔잖아요. 내려오면서 이제는 모세하고 만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만납니다. 그러면 모세는 은퇴를 해야 되고 모세의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방금 이스라엘 백성하고 만난다 했지요. 누가 들어가느냐, 레위지파가 들어갑니다. 그게 요번 수련회에 민수기 강의한 거예요. 레위지파가 들어가요.
그 레위지파가 들어가게 되면서 13지파가 되어야 되는데 레위지파가 초월적 지파가 됩니다. 초월적 지파가 되면서 이것이 편재가 돼요. 편재란 말 이해하시겠습니까? 편재. 온 두루 다 없는 것이 없게 다 스며드는 걸 편재라고 해요. 참 어려운 말인데, 하나님의 편재성이라고 할 때, 신학교에 가면 편재성이라고 배웁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는 거예요. 시편에 보면 바다 끝에 가도 거기에 계시고 하늘 끝에 가도 거기에 계시고 그게 편재성이라고 해요. 무엇의 편재성? 레위지파의 편재성. 레위지파가 편재한다는 거예요. 어느 지파에? 12지파 안에.
그러니까 뭐냐 하면, KT 기지국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나라에 기지국이 있지요. 그걸 편재라고 합니다. 그 기지국처럼 거기에 다 파견 근무하는 걸 레위지파가 할 일이 그거에요. 48군데 도성을 만들어가지고 거기에 그 땅을 총괄 지배하고 있지요. 지배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레위지파 식으로 지배하지요. 레위지파 식으로. 그럼 레위 지파 식으로 지배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레위지파가 하는 일이 뭡니까? 농사입니까? 목축이었어요? 뭐였어요? 제사지요. 제사.
그럼 제사 드리는 일을 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 있어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접점은 인간이 아니고 장차 예수님과 아버지와 있었던 그 언약이 미리 당겨진 그림 같은 형식이지만, 미리 예고편이지만, 예고편처럼 어떤 형식이 반복된 지점이 바로 하나님과 자기 백성 언약 적 백성을 생산해 내고 생산해낸 백성과 만나는 지점이 그 지점입니다.
그래서 요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쉽게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뻥튀기 기계를 하늘에서 이미 제작을 했어요. 그 제작할 때 인간은 어떤 아이디어도 인간은 없었어요. 일방적으로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뻥튀기 기계를 만들어 놓고 그 기계를 처음에는 시내산에 있었던 걸 가지고 시내산의 뻥튀기 기계를 보고 모세가 그걸 보고 다 기억해와가지고 이 땅에 만들었지요. 만들어놓고 그 뻥튀기 기계가 만들어진 성막 성소에 와버리고 뻥튀기 기계니까 뻥이오! 뻥하고 터트리면 그게 뭡니까? 새로운 백성들이 새롭게 없는 백성들이 생산되는 겁니다. 새로 생겨난 하나, 하나의 강냉이들. 강냉이 하나, 하나가 공통점이 있어요. 뭐가 묻혀 있느냐, 피가 묻어있어요. 양의 피, 소의 피. 피가 묻어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만나는 지점이 성소지만, 좀 더 가까이, 가까이 가보면 성소 지나서 지성소 있어요.
지성소에 가까이 가게 되면 거기에는 사람은 1년에 한 번밖에 못 들어오고 나머지는 누가 관장하느냐 하면, 천사가 관장해요. 그래서 제일 그 막에다가 천사그림의 태피스트리 양탄자 같은 그림 걸기가 있고 그리고 언약궤 뚜껑에 보면 천사가 마스게임 하듯이 둘이 있어요. 천사 둘이 보면서 눈은 서로 보는 게 아니고 밑을 봐요. 그 밑이 뭐냐 하면, 언약궤 상자가 있어요. 상자 안이 궁금하잖아요. 인간을 못 열어봐요. 그런데 열어본다 치고 살짝 열어보면 거기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거기에 돌 판이 십계명이 들어있습니다. 돌 판의 십계명,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만나 항아리가 들어있지만, 하여튼 대표적인 것이 돌 판이니까 솔로몬 때까지 있었으니까 그 돌 판을 이렇게 지키고 있는 겁니다.
돌 판을 왜 지키는가 하면, 어떤 인간도 이 돌 판대로 안하면 저주를 받아요. 저주 받는데, 이 저주가 바깥까지 퍼집니다. 왜냐 하면, 시내산에서 올라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올라오지 말라 해놓고 하나님 이름이 시내산 밑으로 내려와 버렸으니까 그 다음부터 시내산 올라가도 시내산에 아무도 없어요. 어이, 떨기나무! 해도 그 떨기나무 가만히 있습니다. 혹시 여기 하나님 계시는데? 없어요. 벌써 떠났어요. 지상으로 내려와 버렸거든요. 그 무서운 하나님이 지상으로 내려와 가지고 곧 언약궤 속에 성소가 있으니까 땅에 있는 형식으로 있으니까 거기에는 짐승의 피가, 저주가 계속 나오니까 그 저주를 막아줄 필요가 있어요.
저주를 막는데 어디서 막는가 하면, 그 동쪽에 뜰이 있어요. 지성소 나가게 되면 뜰이 있어요. 25m 앞에 뜰이 있는데, 그 뜰에 보면 제단이 있거든요. 제단에서 매일같이 불이 올라오면서 거기서 홀라당 제물이 다 태워집니다. 그러니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일단 죽은 거예요. 불에 태워서. 그 불은 진노의 불이에요. 그 불을 가지고 향로를 해야지 그 불이 아니고 다른 향로로 하게 되면 제사장도 그 향로로 인하여 불로 인하여 죽어버립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그리 죽거든요.
그 제단에 있는 홀라당 다 타서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남긴 게 있어요. 뭐냐, 죽기 전에 피를 미리 짜내요. 그 피를 들고 1월 10일 날 그 염소나 송아지 피를 들고 대표자가 방울을 달고 죽은가 싶어가지고 딸랑 딸랑 들리면 살아있고 안 들리면 죽어요. 문 열고 천사들만 있는 곳에 가요. 지성소에 가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지성소가 하는 일은 뭐냐 하면, 율법의 저주와 그 피는 백성들의 모르는 죄까지 일괄해서 다 처리해버려요. 모르는 죄까지. 죄를 지어놓고 죄를 몰라도 괜찮아요. 몰라도 이 제사면 용서를 받아요. 그럴 경우에 이 일은 인간이 기대하거나 은근히 노리거나 하지 말고 니는 피만 남기고 나가버려야 돼요. 그 다음에 나머지는 천사의 몫이에요. 천사와 하나님 몫이에요.
그렇게 해놓고 거기서 하나님끼리 어찌 어찌 해가지고 그게 용서가 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그 쪽에서는 저주가 막히고 하나님의 복으로 백성들을 약속의 땅까지 이끌어갑니다. 그럼 약속의 땅은 어떤 땅이냐 하면, 살기 좋은 땅이 아니고요, 약속의 땅은 뭐냐 하면, 언약의 용서가 영원히 반복되는 곳이 약속의 땅이에요. 천국은 뭐냐, 살기 좋은 곳이 아니고 예수님의 어린양의 십자가 효과가 영원히 지속되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안 좋아하게 되면 천국에서 못 살아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그 말입니다.
주께서 하신 일이 내가 하는 일보다 더 우선 되는 것을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가면 재미없어서 못 가요. 안 알아줍니다. 자기를 안 알아줘요. 거기는 주님만 알아주는 곳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알아주기 위해서 우리가 천국가기 이전에 이 땅에서 뭘 해야 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셔야 돼요. 내가 나한테 실망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그게 취미가 되어야 돼요. 일을 저지르세요. 막 사세요. 그리고 실망하세요. 막 사시고 실망하세요.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막 살고 돌아서서 실망하고 또 돌아서서 감사하고 순서가 그렇게 돼요. 아이고, 내 주제 이제 알았다. 돌아서서 또 그 짓하고.
삼손 같은 경우에 봅시다. 삼손이 처음부터 눈뜨고 머리카락 길 때, 그 기둥 사이에 들어가 가지고 잡아당겨가지고 블레셋 사람 삼천 명 왜 안 죽입니까? 처음부터 왜 그리 안하지요? 삼손이야기하면서 그 복잡한 여자 밝히는 드릴라 그거 말고 다 귀찮고 빨리 속전속결로 해서 힘 좋겠다, 젊었겠다, 경비원들 한 번 치고 축제날 들어가 가지고 기름해서 부어놓고 까불고 있어! 하고 눈뜨고 그 다음에 가서 드릴라 이리 와! 나와 결혼해! 이리 해도 될 문제를 왜 그 순서를 여자 세 명 밝히는 순서를 왜 즐기는 겁니까?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힘이 이스라엘의 죄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 지배를 받았고 지배받으면서도 지배 받는 이유를 아무도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왜 13년 동안 블레셋의 지배를 받는지를 알기 위해서 대표자가 필요하고 그 대표자로 없던 인간이 나와요. 마노아 가정에서 자식 못 낳는 마노아 부인이 애를 낳으면서 없던 인간이 새로 나오면서 그 인간에게 이스라엘이 어떤 죄를 거기서 뽑아낼 수 있는 역할로 만든 겁니다. 만들어놓고 그 이스라엘의 죄를 누가 다 보여주는가 하면, 삼손이 보여줘요.
생각은 뻔해요. 속으로 이야기해요. ‘엄마, 아빠, 내가 여기에 온 것은요, 내가 그냥 태어난 게 아니고 난 아버지의 사명이 있어요. 내가 블레셋에서 우리 민족을 내가 해방할 테니까 아빠,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속으로 이야기해요. 삼손이 사자를 때려가지고 했을 때는 자기는 자기 부하한테 입을 다물었어요. 왜냐 하면, 자기는 하나님과 관계되어있지 사람하고 의논할 게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하는 일은 전부다 하나님의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 되는데 이상하게 하나님의 일을 벌이면서 꼭 일이 꼬이게 되어있어요. 어떤 요인이 꼬이는가 하면, 여자 문제 때문에 꼬여요. 블레셋을 공격하는 그 모든 빌미와 그러한 모든 계기가 꼭 거기에 누가 개입되는가 하면, 여자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자하고 결혼했어요. 결혼해가지고 사는 것도 여자하고 결혼해서 살기 위함이 아니고 성경에 보면. 누구의 여자인가 하면, 아버지가 하나님을 믿는 여자와 해야지 이방신을 믿는 그런 여자와 하느냐 할 때, 말을 안 하고 속으로 이야기하죠. 성경에 나와요. ‘내가 이 여자와 하는 것은 실은 이 여자와 결혼함이 아니고 이걸 통해서 블레셋을 힘들게 하기 위해서 내가 혼자서 힘으로 끄집어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그 힘이 실패에요. 매 달. 그 여자의 눈물에. “야, 내가 사흘을 줄 테니까 내가 수수께끼 낸다. 이 여자의 일가친척들아, 만약에 너희들이 이 문제를 못 풀면 너희들은 다 조진다. 어떻게 강한 것에서 단 것이 나오겠는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가까이 있는 그 여자가 울면서 사흘 동안 매달려가지고 알아차려서 하니까 삼손이 그걸 자기 아내 때문에 했다는 걸 알고 “너희가 암소가 아니면 농사가 안되지?” 이렇게 하면서 뼈다귀로 해서 삼십 명 죽이잖아요. 그러니 그 방법이 약속은 자기가 위반해놓고 그 탓을 블레셋에게 돌리면서 하더란 말이죠. 그런 방식.
그런 방식이 뭐냐, 이것은 내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그 당시 이스라엘의 죄성을 삼손이 그 행세를 통해서 그대로 반복해서 되풀이해서 보는 겁니다. 마지막에 삼손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주여, 회개하였나이다.” 바로 그거에요. 회개하겠다는 것은 삼손이 내 회개한 힘으로 구원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주님 당신이 이런 모든 일이 주님의 일이잖아요.” 고백할 때, 비로소 주님이 블레셋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삼손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내가 나를 구원 못해요.
우리는 삼손처럼 살아야 돼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으스대면서 늘 깨져야 되고 늘 실패로 끝나야 돼요. 복음 알고 난 뒤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지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거예요. 내가 안 되는데 내가 왜 구원받지? 내가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구원을 받아야 되지? 주님이 니 빠진 상태에서 주님이 아버지하고 다 알아서 했다 이 말이죠.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내가 영광 실패했을 때 비로소 주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그림자인데 왜 그림자인지 그냥 잊어버리라고 한 그림자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그림자의 삶을 살라고 그림자라고 했사오니 이제는 주님만 증거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