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디모데전서 5:21 / 천사 / 150109 본문
녹취:김창길 서울 의존교회150109a (천사)―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21절부터 하겠습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명하노니 이렇게 하게 되면 우리가 상당히 익히 아는 상황이거든요 그런데 거기다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해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고 천사가 개입하죠. 천사가 개입한다는 말은 천사에 대해서, 천사의 개입에 대해서 우리가 몰라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천사, 그거 뭐 필요해? 이렇게 해서는 우리가 주의 일을 온전히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천사가 들어간 일과 천사가 빠진 일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고 있어야 됩니다. 천사가 빠져 버리면 우리는 주의 일을 하면서 누구의 일을 한 샘이 되느냐 하면 내 일을 한 샘이 돼요. 사람이 자기 일을 하게 되면 감정의 변화가 많아요. 하기 싫으면 때려 쳐 버리고 하기 좋으면 신나게 하다가 아이고 몸이 피곤하다 싶으면 아이고 나 안 할란다! 이래도 주께서 아시겠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뭐 주님도 이해하시겠지! 주님이 우리끼리만 있으면 주님도 이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가 논다고 해서 천사도 같이 놀겠어요? 안 놀겠어요? 천사가 안 놀지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논다고 해서 마귀도 나도 좀 쉴래! 이럽니까? 그렇지 않죠. 천사의 세계는 항상 마귀와 엮여져있어요. 마귀의 활동이 있다는 말은 달리 말해서 악한 타락한 천사의 활동이 있다는 말은 곧 선한 천사의 활동도 같이 활발하다는 뜻이 됩니다. 자, 그렇다면 제가 주의 일을 천사가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을 하게 되면 듣는 사람이 뭐 천사가 일하는데 우리가 할 게 뭐 있나? 이렇게 나오죠. 우리가 그런 댓구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천사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겁니다. 모르는게 너무 많아요. 성경에서 천사가 안 나오고 또 천사가 하늘에서 그냥 지켜 보기만하면 우리가 무시해도 괜찮을 겁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면 천사가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을 합니다. 천사가 활동을 한다? 그러면 우리가 구태여 나설 필요가 없지 않느냐? 거기에 대해서 답변이 있어야 되겠죠. 바울과 실라, 베드로하고 요한이 옥에 갇혔을 때에 누가 도와줍니까? 성문, 옥문이 열렸습니다. 천사가 와서 도와주죠. 여러분, 그 대목을 보면서 이런 생각 안 들던가요? 천사가 그렇게 옥문까지 열 그러한 능력이 된다면 애초부터 안 잡혀 가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는 그런 생각이 들지요. 빼 내어줄 능력이 있다는 말은 곧 안 잡힐 수 있는 능력도 있는 것인데 왜 잡히게 하셔서 사람의 간담을 쓰담게 하느냐? 사람의 간담을 쓰담게 하고 천사가 와서 빼내 주느냐? 그 이유는 우리 성도로 하여금 늘 절망적인 상황에 절망을 느끼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절망이 없을 때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안 믿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상투적으로 그렇게 정기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지만 사사기 같은 경우를 보세요.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약속의 땅에서 편안히 있을 때에 그들이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택도 없는 소리죠. 그들이 언제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역량을 다 동원해도 그 사태가 호전되지 않을 때 그 때 하나님을 찾지요. 그러면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도와줬습니까? 아니면 그들이 하나님의 일에 협조한 샘이 되는 겁니까? 질문이 어려운 질문인데 그들이 기대하는 대로 하나님이 도와준 거예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기대하지 않은 다른 상황을 새롭게 조성하신 겁니까? 사사기에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냥 도와주기만 한 겁니까? 상황자체를 바꾸어 놓은 겁니까? 상황을 바꾸어 놓은 거죠. 그것을 놓치면 안돼요. 그게 중요한 문제이거든요. 자, 우리가 생각할 때에 어렵다! 어려울 때 매이면 안 되니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자! 왜? 하나님은 기도 하는 자에게 응답하시니까 기도했다, 어 응답 왔네! 그러면 우리는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하나님, 다음에 또 어려울 때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이렇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그 인간은 궁지에 몰린 그 상황이 그 사람을 새롭게 달라지게 한 요소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똑같아요. 전에 어려울 때 그 인간이나 새롭게 된 그 인간이나 새롭게 된 그 인간이나 똑같은 인간이에요. 사람 자체가 달라지지 않았죠. 하나님의 일은 그런 건 없어요. 어려움이 왔잖아요? 그러면 사사기에 나온 내용대로 합시다. 자, 그들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려움이 왔습니다. 자, 여러분 아시는 거예요. 그 어려움이 적들 때문에 생긴 겁니까? 본인들 때문에 생긴 겁니까? 본인들 때문에 생겼죠. 그렇다면 그 어려움이 해소되고 난 뒤에 무엇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까? 야, 내가 그 어려움이 안 왔으면 나한테 이런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을 뻔 했잖아! 이게 변화에요. 이런 것이 있어야 돼요. 암에 걸렸다, 암의 걸려서 온갖 것을 해도 낫지 않는다, 그래서 기도 했다, 기도하니까 암에서 나았다, 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인간이 안 되려면 지옥가려면 아,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많아서 암 고쳐주는 분이구나! 라고 이해할 거예요. 그런데 제대로 천국 가는 사람은 내가 암을 위해서 기도 할 때에 그 사고방식 자체가 성도답지 않는 사고방식인 것을 암에 걸리게 해서 깨우치게 하셨구나! 하고 라는 쪽으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암에 걸렸는데 병을 낫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하는 것이 그 사고방식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죠. 잘못됐다는 거죠. 자, 뭐가 잘못 됐습니까? 암에 걸려서 낫게 해 달라고 기도 하는데 그게 뭐가 잘못된 거예요? 자, 바로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천사는 우리말을 듣지 않습니다. 천사는 구원 받는 성도의 말을 듣지 않아요. 천사의 특징은 사람의 말을 듣는다, 안 듣다? 안 듣습니다. 천사는 누구의 말을 듣느냐하면 중보자의 말을 들어요. 아이 천사는 하나님 말 듣잖아요? 아니에요. 중보자의 말을 듣습니다. 그게 어디에 나옵니까? 히브리서 1장에 나와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누구의 말을 듣는다? 하나님의 말을 들었어요. 그러나 신약성경에 와서는 마지막 시대에 중보자가 옴으로서 천사는 누구의 말을 듣느냐 하면 천사는 중보자의 말을 듣습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1장에서 뭐라 했느냐 하면 천사는 아들을 섬긴다고 되어 있어요. 자,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여러분들이 누구를 섬긴다고 할 때에 예를 들면 아까 칼국수를 먹었는데 거기도 심방한 모양이에요. 심방해서 굴 국수 해 줄까 해서 그것을 먹고 체했다고 아주머니가 이야기를 하는데 자, 심방을 올 때 흔히 교회에서 목사님을 섬기자 하잖아요. 목사님을 섬기는데 그 목사님이 잡채 알레르기가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섬기려고 하는 집사의 주 특기가 잡채라고 합시다. 식당에서 아주머니 둘이 이야기를 하는데 몇 명이 오겠나? 두 명이 오겠지! 제가 속으로 심방을 오는데 뭐 2명이 와 더 오지 이랬는데 자, 잡채가 주 특기라서 맛있는 잡채를 목사님과 심방 온 사람들에게 줬다고 합시다. 그러면 백발백중 목사님은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겠죠. 결국은 그 집사님은 알레르기를 선물로 준 샘이 되죠. 목사님이 고생하라고, 아마 목사가 미국 같으면 내손에 혼나 보라고 일부로 해서 섬길 겁니다. 예를 들어 ‘사모님, 목사님이 어디에 알레르기가 있습니까?’ ‘우리 목사님은 땅콩만 먹으면 온 몸이 부풀어져요.’ ‘그래요?’ 그 다음에 심방할 때 땅콩 이만큼 준비해요. 그것도 봉지 채 준비해요. 까서 주는 게 아니고요. 그래서 목사님이 만날 화장실로 향하도록 한 것이 그게 섬기는 겁니까? 아니죠. 약 올리는 거죠. 이게 뭡니까? 집사님이 잡채 잘하는 자기 솜씨 발휘하는 거잖아요. 하나님을 섬길 때 어떻게 섬겨야 돼요? 누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 돼요?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해야 돼요? 주님이 좋아하는 것을 해야 돼요? 너무 쉬운 문제인데 주님이 좋아하는 거죠. 왜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 안 됩니까? 그게 자기의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중보자를 섬긴다는 것이 중보자가 이 세상에 멀쩡하게 살다 가면 우리가 멀쩡하게 주님을 대하면 돼요. 그런데 중보자가 이 땅에 와서 멀쩡하게 사시는 분이 아니고 힘들게 사셨잖아요. 사적인 죄 때문이 아닙니다. 이 집단, 이 세대,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 전체가 예수님에게 죽여라! 죽여라! 신의를 받았던 사람이에요. 그런 예수를 오늘날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이것은 신기한 일인지 아니면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지 둘 중에 하나에요. 죽여라! 죽여라! 하는 분을 우리가 가로막아 나서서 아니야, 저 분은 우리의 구세주야! 하고 가로 막고 나설 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섬길 때는 무슨 요소를 언급을 해야 되느냐 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핍박할 때는 분명히 예수님과 그들이 안 맞는 구석이 있어 핍박할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섬긴다 할 때는 우리가 맞아는 구석이 있어 섬기잖아요. 그러면 결국 그 말은 안 믿는 사람과 우리 사이에 천성적으로 다른 게 있다는 겁니다. 주여! 이런 것이 다릅니다. 하는 것을 내 세우면 되겠죠. 그것을 가지고 내세우면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했느냐 하면 헌금할 때 하나님이여! 받으소서! 받으소서! 이렇게 하나님이여 귀한 돈 가져왔습니다. 하고 하나님을 섬기겠죠. 그런데 방금 제가 한 논리에 의하면 그들과는 다른 요소로서 섬겨야 섬긴다는 그 논리를 폈죠. 그 논리에 하자가 없다면 헌금도 마찬가지지만 기도 할 때 바리새인들이 기도를 어떻게 했습니까? 떠오른 대로 기도를 했죠. 뭔가 달라고 기도를 했죠. 그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예수를 섬기고자 합니다. 그러면 그들과 기도 하나만 두고도 그들과 다른 마음씨를 가지고 다른 기도를 해야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겠죠. 그러면 바리새인들의 기도를 먼저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아이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내가 알아서 뭐하냐? 절대로 그러면 안돼요. 우리가 살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죽여라! 죽여라! 하고 예수님을 죽음으로 처단하기를 요청했던 그 분위기 속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우리가 거와는 반대되게 주님만 섬겨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우리들이에요. 이것은 기본적으로 마음가짐이 달라도 보통 다른 게 아닙니다. 한 쪽은 악령이 있고 한 쪽은 성령이 있으니까 달라야 되겠죠. 달라야 되는데 그들의 기도가 주여, 이것 필요하고 이것 필요합니다. 필요한 것을 달라고 기도 할 때 주님이 원하는 기도는 그게 아니고 어떤 기도라고 했어요? 주기도문에 나오죠. 먼저 뭘 알아야 돼요? 너희에게 무엇이 있어야 될 줄을 내가 알고 있다고 예수님이 이야기했잖아요. 아버지는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누가 안다고요? 우리가 알기 이전에 누가 먼저 아십니까? 아버지가 알지요. 그렇게 아는 입장에서 기도 할 때 어떤 내용을 다룰 것이냐 하는 거예요. 주께서는 우리가 뭐가 필요한지 이미 아는 상태에서 필요한 것을 달라고 기도 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러면 기도는 어떤 내용을 담고 아버지를 섬겨야 아버지가 기뻐하느냐 하는 그 문제가 새롭게 나온다 말이죠. 그 기도가 뭘까요? 그 기도가 자기를 위해서 기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안 믿는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서 기도 하지 않으면 할 게 없잖아! 하잖아요. 여기서 정답이 나와요.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섬겨야 될 그분을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때 우리가 기도 할게 있어요? 없어요? 그 때는 기도 할 것이 수두룩한 거예요. 왜? 주께서 남긴 말씀들이 있잖아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되라고 기도 할 것이 한 두 개이겠습니까? 분량도 많아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 다니까 엄청나지요.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 5장 22절에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서 너희에게 말한 다고 하다않고 앞에 뭐가 더 주가 됐죠. 뭡니까? 천사들 앞에서 라고 했죠. 그러면 천사들 앞에서 가 빠지는 것과 천사들이 있는 것의 차이가 뭐냐? 천사들이 빠져 버리면 누구하고 맞상대가 되느냐 하면 누군가 중간에 빠져버리면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서로 좋은 관계가 되어 가지고 주님을 섬기면 된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천사가 들어갔다는 말은 너희들이 예수님을 섬기려면 천사가 예수님을 섬기는 식으로 섬겨야 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취지예요. 그러면 천사는 본인이 알아서 섬겼습니까? 주께서 지시한 대로 섬겼습니까? 주께서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천사잖아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하시겠죠. 그렇다면 내 인생 더 살까? 말까? 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한테 있어요? 없어요? 아이 약 먹고 죽어버릴까 더 살까? 라고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천사가 주님 앞에 ‘주님, 나 그만 퇴직하렵니다. 나 기분도 나쁘고 해서 주의 일 안할 랍니다.’ 하는 천사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천사는 자기 일이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려면 천사가 섬기는 것처럼 섬겨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요? 독자적인 자기 일이 있죠. 그래서 이런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내 일을 잘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 이렇게 나오죠. 여러분, 내 일을 잘 해서 영광 돌리는 겁니까? 시키는 대로 해서 영광 돌리는 겁니까? 시키는 대로 해서 영광이지 내 일을 잘 해서 영광 돌리는 게 아닙니다. 목회자가 목회 잘 해서 영광 돌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목회는 주님이 하시고 목회자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요. ‘아이고, 나 사모인데 사모가 잘 해야지’ 아니에요. 사모 잘하는 것 필요 없어요. 시키는 대로 하시면 되는 거예요. 그게 제일 잘하는 사모에요.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내가 만약 일을 잘 하잖아요? 그러면 누가 아무리 위장을 해도 내가 나를 섬기는 실이 돼요. 그리고 자기가 자기 하는 일에 대해서 너무 예쁘게 보여서 자기한테 반하게 됩니다. 자기 한테 빠져 버려요. 호호호 나는 왜 이렇게 귀여워! 이거 김지민이 만날 하는 거 아닙니까? 이래도 귀엽고 저래도 귀엽다는 거예요. 개콘 쉰밀회에서 나와요. 목사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그 질문 답 나왔죠.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예요. 강의 여기서 끝냅시다. 빵도 사왔겠다 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이 질문 자체에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는 답변을 갖고 있는 사람을 별로 못 봤고 저한테 들리기에는 이렇게 들려요. 목사님, 내 인생을 어떻게 아름답게 꾸며서 주님 앞에 드릴 수 있습니까? 그런 쪼로 질문하는 것 같아요. 그거 백날 아무리 꾸며봤자 호호호 내가 왜 이렇게 예뻐! 자기 찬미, 그것을 자기 찬미라고 하는데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예찬” 인간을 찬미하는 거예요. 인간을 예찬의 대표적인 영화가 요 근래 나왔어요. 뭐냐 하면 ‘국제시장’ 보신분들이 있을 텐데 650만이 봤다고 하니 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예 세속과 끊고 살아가기 때문에 600만이 천만이 되도 눈도 껌뻑하지 않고 안 보잖아요. 일종의 고집 같은 거거든요. 천만이 돼도 세속적이라고 안 보는데……. 국제시장을 보게 되면 6·25때부터 월남전 등 모든 것을 겪으면서 하나의 가장이 자기는 없어요. 자기는 없고 오직 국가와 그리고 국가의 경제발전과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70평생을 다 바친 어떤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람으로 느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이 수시로 마지막 장면에서 믿는 것이 북에 남겨진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죠.1910년생이니까 나이가 벌써 90이 넘었으니까 그 사진을 보고 혼자말로 ‘아버지에 저 잘 살았지 에?’ 이북 사람이지만 부산에서 살기 때문에 국제시장이 부산에 있거든요. “아버지에, 이만 하면 저 잘 살았지에 그런데 저 진짜 힘들었거든요” 그게 마지막 장면이에요. 나 진짜 힘들었거든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너는 가장이 되어서 엄마하고 동생들을 잘 돌보라는 흥남부두에서 1·4후퇴 때 흥남부두에서 내려오면서 부탁받은 부탁이 그거에요. 너는 부산에 가거든 거기에 이모가 있는데 꽃분이 라는 가게를 하고 있을 거니 거기 찾아가서 살아라! 마지막 유언처럼 느끼는 그것, 아버지는 뒤따라갈게 하고 소식도 없이 못 따라 갔죠. 배를 놓쳤으니까요 1·4후퇴 나 홀로 왔다 했던 그 흥남부두에서 와서 실컷 온갖 고생 다하고 마지막 하는 말이 “아버지에 나, 잘 살았지에? 그런데 내 너무 너무 힘들었거든요” 울면서 너무 힘들었거든요. 창세기 3장만 봐도 정답이 나옵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됩니다. 남자라면 힘들어야 돼요. 힘들다는 말은 이 땅이 우리가 살 곳이 아니에요. 국제시장이 살 곳이 아닙니다. 신곡시장이 살 곳이 아니라니까요. 살곳이 어디냐? 거지나사로와 같은 아브라함의 품, 그리고 엘리야, 모세가 갔던 그리스도 안 그곳이 살 곳이에요. 하늘의 천사과 같은 영광, 그 영광이 천사와 같은 영광이에요. 천사와 같이 빛난다는 말이죠. 그 천사를 제가 지금 강의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 예찬, 인간 찬미 이것이 예수님을 이 땅에서 죽게 만드는 심적 분위기였습니다. 심적 분위기인데 그것이 실제 적용에 있어서는 우리가 오늘날 무심코 이렇게 적용합니다. 목사님,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바르게 살아서 영광 돌리겠습니까? 무심코 내 뱉는 그 질문이 사실은 그 속에 뭐가 담겨 있습니까? 자기예찬, 인간예찬이 담겨있는 겁니다. 마지막에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나서 ‘예수님, 나 참 잘했죠? 그런데 진짜 무지하게 힘들었거든요.’ 이렇게 할 겁니까? 뭐라고 해야 돼요? “주여,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이야기해야죠. 여러분, 다르죠. 달라도 너무 다르죠. 어떤 숙제가 주어지고 임무가 주어진 거예요. 그 숙제와 임무를 누가 해야 된다? 나 아니면 내 임무를 할 사람이 없고 생각을 해요. 자기 일이 있어요. 그러나 성도한테는 자기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도한테는 일체 우리 일이 없어요. 전부 다 누구일입니까? 주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예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우리는 무익한 종이니 그냥 할 바를 했을 뿐입니다. 교회가 있으면 뭐도 있느냐 하면 교회 공로상도 있기 마련이에요. 교회에 공로상이 있어요. 권사 은퇴할 때 주는 것이 권사 공로상, 장로 은퇴할 때 주는 것이 장로 공로상, 목사 은퇴할 때 받는 상이 목사 공로상을 줘요. 그리고 회사 은퇴 받는 상은 공로상, 학교에서는 재직 때 받는 공로상이 또 있어요. 공로상 받으면서 한 소리 하죠. ‘이 모든 것은 다 주의 은혜입니다. 주께 영광 돌립니다.’ 그것을 붙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받을 상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평생 동안 죄지었다는 죄지은 공로상 외에는 없어요. 귀하는 19몇 년도에 태어나서 지금 까지 줄 곧 죄를 지었음으로 그 죄인을 온 세상에 퍼뜨렸기 때문에 이 공로상을 드립니다. 이 공로패 외에는 받을게 없습니다. 은혜라는 말을 쓸 때는 반드시 전제가 뭐가 깔려 있어야 돼요? 은혜 받을 짓을 한 적이 없다가 반드시 깔려있어야 돼요. 은혜 받을 짓을 해서 은혜를 받아버리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과급, 보너스지 그것은 은혜가 아니잖아요. 천사가 여기에 개입된다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어떻게 잘해서 주께 영광 돌린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말입니다. 왜냐 하면 시킨 대로 하면 되는 거예요. 왜? 섬기려면 천사처럼 섬기면 돼요. 천사는 직접 하나님이 부리는 것이 아니고 누가 부린다? 히브리서 1장에서 예수님이 천사를 부리죠. ‘아이 목사님, 하나님이 부리는 거나 예수님이 부리는 거나 예수님도 하나님이니까 똑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전혀 아니에요. 이미 구체적 모델, 예수그리스도 중보자가 등장한 이상은 천사는 우리들에게, 성도로 하여금 이 땅에서 고난주는 방식으로 예수를 섬기게 만들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떠난 자리에 제2 제3의 예수가 등장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이 사도행전을 그냥 보신 적이 있지요? 과거완료입니다. 보신적이 있지요? 지금 보고 계실수도 있는데 사도 행전에 나오는 주인들이 누구죠? 주님 말고 이 땅에 있는 주인들이? 사도죠. 그래서 이름이 사도 행전이잖아요. 사도들이 사는 행색이 어떻습니까? 뭐 넉넉하게 진짜 풍족하게 이 돈 언제 다 써 먹지? 언제 다 소비하지? 이런 식으로 살았던가요? 아슬아슬하던가요? 아슬아슬 하죠. 아슬아슬하다가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는 아슬아슬하다가 결국에는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으로 끝났지요. 그렇지요?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돌에 맞아 죽으면서 이상한 것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스데반 얼굴이 어떻게 됐습니까? 1번 새파랗게 되었다. 2번 창백하게 되었다. 3번 우왕좌왕되었다. 4번 당황했다. 5번 천사같이 되었다. 몇 번입니까? 천사같이 되었죠. 어떤 의미에서는 스데반 집사를 다른 12사도가 부러워해야 돼요. 이렇게 돼야 돼요. “아이 나는 무슨 복을 못 받아서 이 고생을 해야 되나? 스집사는 좋겠다!” 빨리 털고 후딱 자기 본래의 집, 본집으로 가거든요. 전부 다 파견 근무한 거예요. 서울에 있다가 지방으로 파견 한번 가보세요. 가보면 여관방도 허술하고 냄새나고 빨리 집 밥 먹고 싶고, 식당 밥은 맛없어요. 침대방도 싫고 그저 집에 가서 안방에 눕는게 최고 잖아요. 후딱 파견 근무 끝나고 어디 가고 싶어합니까? 집에 가고 싶잖아요. 화상통화하면서 ‘여보 조금만 기다려요. 요번 토요일에 일 다 끝나고 내가 올라갈게’ 이야기하잖아요. 왜 우리는 그 통화를 못합니까? 주님, 곧 만납시다! 왜 이 이야기를 못합니까? 사도행전에서 성도는 인사가 그거 였습니다. 주님, 곧 뵙시다! 요게 인사 였어요.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곧 뵙시다. 이 말은, 주여! 제 인생 제가 관리하는 게 아닌 것 맞죠? 그런 뜻이에요. 제 인생 제가 관리하는 게 아니죠? 그런뜻입니다. 이 땅에는 휴식이 없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한테 마지막에 주는 보너스가 있어요. 그게 뭐냐, 휴식입니다. 죽는 겁니다. 그러니 스데반 집사가 기분이 싫었겠어요? 좋았겠어요? 어휴, 주여 이 때를 위함입니다. 아이참, 그 때를 다른 사람이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다른 사도가 아이고 형님, 좋겠습니다. 아이고, 축하해요! 형님! 이러고 난리 났죠. 축전 보내고요. 예를 들어서 어떤 목사가 그 교회 가서 복음을 전했더니만 그 장로들이 너 같은 인간은 당장 나가라! 하는 순간 진짜 복음 아는 부교역자나 복음 아는 전도사 같으면 목사님 억울해요! 나도 빨리 쫓겨났으면 좋겠어요. 이런 인사를 주고받습니까? ‘목사님 참으세요! 세상이 더럽기 때문에’ ‘너나 참아라!’ 우리의 선입견이 천사를 배제한 채 직접 주님과 상대하려고 하니까 만날 나오는 질문이 하나님, 바르게 살려고 내가 애 썼거든요. 애를 썼는데요 환경이 받쳐주지 못해서 제대로 못 섬겼습니다. 다음에 좋은 환경이 있을 때는 바르게 살아서 주께서 영광 돌리겠습니다. 하고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그러하게 되면 누가 좋아하느냐 하면 마귀만 되게 좋아해요. 마귀가 더 약을 올립니다. 환경 좋다고 잘 섬기는 게 아닙니다. 사사기 아까 이야기했죠. 사사기에 환경 좋을 때 그 사람들은 뭐 했어요? 하나님? 몰랐어요. 곧 뭘 모른다? 자기 자신이 천사가 주님 섬기는 방식이 아닌 것을 본인들은 알지를 못한 겁니다. 기드온한테 하나님의 지시가 떨어졌을 때 그때 누가 나타났습니까? 천사가 나타났지요. 그러니까 천사가 나타났다는 말은 모든 일에 천사가 다 개입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에 갔을 때 제일 먼저 누가 등장했습니까? 적들이 등장했습니까? 누가 왔어요? 죽은 모세의 유령이 등장했습니까? ‘여호수아야! 내가 모세다!’ ‘아이고 유령님 오셨네!’ 이러면서 제사 드렸습니까? 성도가 왜 제사를 드려야 되지 말아야 되는 이유가 제사라고 하는 것은 산자와 죽은 자와 갭, 간격이 있잖아요. 그런데 성도는 간격이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지금 천사가 일해서 도와주고 있잖아요. 군대 장군, 군대장군이 뭐하는 사람이에요? 천사 중에 전쟁 치르는 천사잖아요. 그러니까 이 가나안 땅에 여호수아 홀로 남겨 두지를 않았다는 이 말입니다. 좀 더 신학적으로 복음적으로 이야기해서 여호수아와 그리고 하나님 사이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언약이 있는 거예요. 모세 언약이 있어요. 그 모세 언약을 위하여 천사가 온 겁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길게 이야기를 했는데 천사는 어디에 봉사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고 중보자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인다. 중보자를 따른다는 말이 현실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천사가 심부름꾼으로 활동하는 거예요. 그래서 천사는 결코 우리 사람 편이 안 됩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알았으니까 여러분에게 아까 질문을 다시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실라를 옥에 갇히고 난 뒤에 천사를 통해서 옥문을 나오게 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옥에 안 갇히게 하면 어떻겠느냐 라는 질문을 던졌죠. 그 질문의 답변을 방금했는데 누가 이야기해 보세요. 천사는 우리 편하기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천사는 우리 소원대로, 우리의 기대대로, 우리의 뜻대로 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천사는 뭘 합니까? 천사는 구약을 통해서 신약을 통해서 뭘 합니까? 하나님의 언약, 약속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천사가 자기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가 천사를 가지고 “천사여! 내 뜻대로 도와 달라! 천사여! 보태 달라!”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우리는 지금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런 뜻도 모르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 천사한테 깨져야 되죠.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다, 갇혀야 되죠. 그게 중요하죠. 로마 지중해 항해에서 바울이 풍랑에 휩쓸립니다. 그때 누가 등장하는지 아세요? 천사가 등장하죠. 천사가 뭐라 합니까? 두려워 말라! 당신은 반드시 로마 바로왕 앞에 서야 합니다. 이거 바울 에게 힘이 됐겠어요? 안 됐겠어요? 물론 바울에게 힘이 됐겠죠. 하지만 바울을 위해서 그 말을 줬겠습니까? 아니면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까? 약속을 위해서 그렇게 했죠. 그러면 그 약속을 위해서 바울은 풍랑을 만나야 돼요? 안 만나야 돼요? 풍랑을 만나야 돼요.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 우리가 지금 로마에 전도하러 가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풍랑을 일으켜 나를 방해하게 되면 내가 삐져서 일을 안 하죠. 이렇게 되면 돼요? 안돼요? 절대 그렇게 되면 안 되겠죠. 바울이 또 그럴 사람도 아니고 바울이 삐져서 ‘나 이렇게 힘들면 일 안 해’라고 안 했다는 말은 평소에 사도 바울이 주님을 섬기는 방식을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게 뭐냐? 이 땅에서 십자가 고난의 반복, 십자가 고난의 되풀이를 사도를 통해서 해야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 있어서 지상의 주인공들이 사도들인데 그 사도들의 모든 행적을 보게 되면 그것은 여유 있는 행동이 아니고 아슬아슬하다고 했잖아요. 그 아슬아슬하다는 게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십자가의 사건을 반복시켜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알게 하고 새언약의 완성을 알게 해서 주의 합당한 나라, 천국을 이루기기 위해서 동원된 거예요. 이 말은 개인적인 사적 안녕이나 평안은 애초부터 고려대상도 되지 않는 거예요. 힘들어서 일을 못한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된다는 이 말입니다. 힘들게 해 주는 것 자체가 곧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즉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갔잖아요. 다시스로 도망간 것도 따지고 보니까 그것도 주의 일이었어요. 그리고 도망갔다가 물속에 빠지잖아요. 그것도 주의 일이고 준비된 고기가 있어서 고기가 요나를 받아서 산소가 약간 남아 있는 고기 뱃속에 갇히게 해서 냄새는 별로 안 좋겠지만 그 속에서 기도 하게 한 것도 주의 일입니다. 그 요나가 한 일이 장차 올 예수님을 요나의 기적에 입각한 예수님의 공생애를 요나가 미리 앞당겨 보여 준 거예요. 그러니 요나가 주님을 섬긴다는 말은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그런 모든 것이 사실은 질책 받으면서 꾸중 들으면서 주의 일을 하게 되어 있죠. 우리가 어떤 괜찮게 일을 하게 되면 이게 자기 애찬, 인간 애찬, 자기 자랑꺼리가 되어 버립니다. 공로상 받아버려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천사가 일을 하듯이 우리가 그렇게 해야 돼요. 천사의 특징은 자기의 일이 없다고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무슨 일이 없어야 돼요? 내 일이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내 일이 없으려면 내 인생이 없어야 돼요. 내 몸이 없어야 돼요. 그래서 모든 복음은 너는 나의 것이라고 못 박아 놓고 작심하시고 일을 벌려 나가는 겁니다. 이빨을 빼도 내 이빨이 아니고 다쳐도 내 몸 다치는 것도 아니고 주의 일이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간에 매일같이 들이닥치는 식으로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돌아보면서 다시 회고 하면서 느끼죠. 아,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것이 주의 일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그러면 천사들이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은 성령 받은 성도의 이야기이고요. 구약에서 천사들이 이스라엘나라에 개입을 했겠어요? 안했겠어요? 이것은 말할 것도 없죠. 악마가 개입했다는 말은 천사도 같이 개입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늘 구약 이스라엘에 개입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 때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줘서 야, 율법을 지켜라! 하는 명료하고 단출하게 십계명 지켜! 이거 율법 지켜! 제사드려! 그렇게만 하면 뭔가 축복과 저주를 받던지 일이 난다고 생각을 하는데 천사가 끼어들 자리가 없어 보이거든요. 자, 그러면 여러분 생각 해 보세요. 구약에서 천사가 끼어들 때 어떤 경우에 천사가 끼어들던가요? 제가 묻는게 잘못이죠. 답변을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경우에 천사가 끼어드느냐 하면 아까 사사기 말을 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이미 밑천이 다 들어났을 때 그때 끼어듭니다. 거기에 천사가 끼어든다는 말은 사실은 우리가 부끄러운 지경에 빠져있을 때라고 보시면 옳습니다. 예를 들면 사사기 때 삼손이 있잖아요? 삼손은 같은 경우 아예 아빠 엄마가 생각을 못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원자, 나실인을 만들겠다는 계획에 의해서 그 집에 삼손이 태어나게 하죠. 사사기 13장에서 천사의 기능을 한번 보세요. 물론 구약의 천사가 아브라함도 찾아오고 다 알지만 지금 이스라엘에서 천사가 어떨 때 개입하느냐 하는 그 문장입니다. 사사기에서 이미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삼손은 사사입니다. 사사인데 기존 앞서의 사사와 달라요. 이미 이스라엘이 많이 기울어졌던 그 당시에 나타난 사사인데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럼 나실인을 하겠다는 것은 자기 아버지,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의 아이디어입니까? 누구의 아이디어입니까? 마노아는 전혀 그런 계획이 없었죠. 그러면 삼손이 태어난 것에 대해서 마노아는 자기 자식 태어난 것으로 생각하겠죠. 뒤따라서 누가 옵니까? 기묘자라는 이름의 천사가 따라오잖아요. 그럼 천사가 따라 왔다는 말은 결국은 마노의 가정을 이용하는 거죠. 여기서 정리를 해 봅시다. 천사가 올 때는 절대 우리의 일을 도와주러 온다? 안 온다? 절대 우리의 일을 안도와줍니다. 안도와 주는데 우리가 감복할 일은, 우리가 감사할 일은 주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고 주의 일에 참여 시킨다는 신호로서 천사가 우리에게 온다고 보면 돼요. 그런데 그 오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우리가 기존의 생각으로 거뜬히 해 낼 수 있는 일까요? 못하는 일일까요? 못하는 일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그들이 옥에 갇히면서 신났습니까? 히히거리고 웃으면서 “야야, 우리 저기 갇혔다! 야! 천사가 구해 줄 거야!” 이렇게 사전에 알았어요? 몰랐어요? 사전에 몰랐습니다. 그러면 옥에 갇히고 옥에서 구출해 내는 그 모든 것은 천사가 관리했고 천사는 누구의 지시를 받는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의 지시를 받는다? 마지막 때에는 중보자 예수님의 지시를 받아서 하죠. 그러면 이 땅에서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사도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위에 있는 것만으로 안 되고 뭐가 양쪽에 교류를 하면서 왔다 갔다 하면서 교류가 해야 돼요. 바로 천사가 교류가 돼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정리를 해 봅시다. 교회라는 것은 예수님과 바로 직접 연락되는 사항이 아니고 누가 교회와 연락한다? 천사가 연락하죠. 그것을 교회의 사자라고 이야기해요. 그게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는 7교회 7사자가 나오는 겁니다. 왜 천사가 자꾸 활동하는지 이제 아시겠죠. 절대로 하나님은 우리 뜻대로 안 해 준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위해서 우리 뜻대로 안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이 여러분의 솜씨, 여러분의 인내성을 자랑하시면 안 됩니다. 안되고 주께서 참여시키기 때문에 신앙생활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일을 돕기 위해서 누가 우리 곁에 있느냐? 천사가 있는 겁니다. 천사라고 하니까 자꾸 안데르센동화집에 나와는 요정같은 것을 생각하는데, 조끔한 요정같은 것이 있어서 굉장히 앙증맞고 귀요미하는 것을 생각하는데 천사는 그때 그때 모양새가 달라져요. 여러분, 영적 세계에 있어서 영적 세계가 지상에 침투할 때는 거기에 걸맞게 형태, 모양새가 바뀌게 되어 있어요. 소돔과 고모라에 왔던 그 천사의 모습은 어느 누가 봐도 남자가 봐도 반할 만큼 얼굴이 바뀌어서 온 거예요. 김수현이나 원빈, 원빈하고 현빈이 왔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늘 미남이 아니에요. 늘 미남이 아니고 어떤 때는 아주 험난하게 생긴 모습도 와요. 어디에? 창세기에 야곱이 얍복강가에 있었을 때 “이게 어디에 산 도둑이 와서 누가 이기나 해 볼까?” 거룩한 천사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얻어맞고 난 뒤에 뭔가 이상하다, 이것은 다른 영적 존재라는 것을 알았지 몰라요. 예수님의 얼굴이 부활하고 난 뒤에는 그때 그때 달라요. 엠마오로 내려갔던 두 제자 때 예수님은 아무리 봐도 그때의 예수가 아니에요. 얼마 전에 봤던 십자가 달렸던 그 예수의 모습이 아닙니다. 히브리서에 오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너희가 나그네를 대접하라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해서 복 받았잖아 하는 내용이 나오죠. 이게 천사라고 알아보는 것은 다른 사람이 다 알아보는 것이 아니고 알아봐야 될 사람이기 때문에 알아보는 거예요. 주께서 직접 둘이 매치를 시키기 위해서 알아보도록 하는 대체가 일어납니다. 여기 마노의 가정도 마찬가지이고 어떻든 간에 나실인이 나왔다는 것은 나실인이 일반적인 구원자가 아니고 희생하야 될 정도로 그게 힘으로 벌리는 전쟁이 아니고 희생했느냐 여부에 따라서 전쟁이 판가름 나는 그러한 희생이 필요할 정도로 모든 것이 망가져 버린 그런 경우에 삼손이 투입이 되는 겁니다. 처음에 삼손은 힘으로 버티려고 하죠. 하지만 삼손의 마지막 승리는 결국은 자기 목숨하나 버릴 때 그때 죽인자가 살아있을 때 죽인자보다 더 많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기묘자라는 이름의 천사가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그 마노아 가정은 천사가 벌린 일에 대해서, 주님의 일이죠. 혜택을 입는 입장에 있습니다. 지금 까지 한 것을 정리해 보면 제가 여러 번 강조하지만 하나님, 어떻게 바르게 살고 영광 돌리겠습니까? 하는 그런 투의 신앙생활은 지금 우리가 매일같이 천사한테 혜택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살기 때문에 그런 투의 말이 나온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답답하면 기도하잖아요. 답답하면 기도를 하는데 무엇을 놓치고 있느냐 하면 답답할 때 하는 기도가 이런 식이에요. 채워주시면 다음부터는 이런 기도 귀찮게도 안할 거야 이런 게 포함되어 있다니까요 귀찮을 테니까 다음에는 이런 기도 안 할게요 하는 기도 같으면 애초부터 안해야 될 기도에요. 범사에,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기도해야 됩니다. 10분 쉽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서울 의존교회150109b (천사)―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천사가 그 만큼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 천사가 영광을 받아야 되겠습니까? 안 받아야 되겠습니까? 안 받아야 되겠죠. 그러면 그것이 영광을 안 받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방법 맞죠?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섬기려면 우리가 영광을 받아야 돼요? 안 받아야 돼요? 받지 말아야 되죠. 왜 그 여호수아 앞에 군대 장관이 등장했는지 이유를 아시겠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데 있어서 방법이 있다는 겁니다. 중구난방으로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언약을 알았으니까 우리가 땅을 차지하자! 지금 땅을 차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땅을 차지하되 이 땅에서 모든 공로와 영광은 누구한테 돌아가야 돼요? 언약을 주신 주님한테 돌려야 돼요. 그래서 군대장관이 직접 관여하는 겁니다. 천사가 관여하는 거예요. Follow Me 나를 따라오라 이 말입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전쟁을 했더니만 천사가 개입해서 전쟁을 승리하게 하죠. 갑자기 해가 멈추게 하고 하는 일이 일어나잖아요. 성경에서는 그것을 주님이 하시는 일로 되지만 사실 천사도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니까 같이 움직이죠. 요한계시록에서 이 세상의 모든 변화에 누가 관여되어 있습니까? 모든 변화에 누가 관여되어 있습니까? 천사가 관여되어 있습니다. 지금 까지 첫째 시간 듣고 보니까 어떻습니까? 세상의 모든 구원 문제에 나만 바쁜 줄 알았더니 여러분, 우리 자신들 보다 바쁜 사람이 있죠.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가 그렇게 바쁘잖아요. 사실은 그 만큼 주님이 바쁘다는 뜻이에요. 요한계시록에서 밧모 섬에서 예수님께서 계시를 주실 때 계시가 사도에게 바로 전달됩니까? 누구를 거쳐서 전달됩니까? 천사를 통해서 주의 종에게 전달을 하니까 나중에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밧모섬 요한이 누구한테 절해요? 천사한테 절하니까 천사가 그야말로 경상도 말로 ‘어데에? 어데에? 와 이 캅니까?’ 저보고 절하지 마세요. 천사가 겸손해서가 아닙니다. 천사는 심부름꾼이기 때문에 정말로 그래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낫게 할 때에 그 베드로와 요한이 뭐라 합니까? 경상도 말로 “어디에? 왜 내보고 내가 했다고 하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그렇게 되죠. 이게 겸손입니까? 실제입니까? 실제로 주님이 하신 거죠. 겸손의 티를 뭐 온유와 화평과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고 그런 짓을 한 거예요? 진짜로 주님이 하신 거예요? 진짜로 주님이 하셨죠. 저나 여러분의 인생이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원하려면 모든 일은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과 예수님이 부리시는 천사들이 일을 이렇게 다 이런 식으로, 구원이 되는 식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아셔야 돼요. 뿐만 아니고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시는 일을 누가 하느냐 하면 또 성령이 하셔요. 성경에 나오는 성령, 천사, 주님이 괜히 계시는 분들이 아니죠. 괜히 그냥 이름만 걸쳐 있는 분이 아니죠. 실제 일은 이분들이 다 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 “아, 조금만 참을걸! 그때 말을 심하게 해서 좀 참을걸!” 스데반 집사가 그렇게 생각하고 돌을 맞을 때 후회했습니까? “내가 좀 과하기는 과했지! 때리는 사람도 성질이 급하지만 나도 좀 심했어!” 이렇게 스스로 반성했어요? 아니면 천사의 얼굴이 반성하는 얼굴입니까? “드디어 주와 함께 있게 되었군요!” 하면서 반가워 미칠 지경이야 꼭 합격 통지서 받은 사람 같아요. 갑자기 존재가 가벼워요. “살다보니까 어우, 세상에 살다보니 이런 좋은 날이” 이런 식이라니까요. “주여, 제 암은 언제 낫게 해 줍니까?” 이거 아니에요. 그런 식은 아니에요. “주여, 언제 시집간 내 딸의 팔자가 펴겠습니까?” 이런 게 아니라니까요. 스데반 집사가 만약에 전화한다면 “딸아!” “엄마, 나 힘들어 죽겠어?” “죽어라!, 죽는 게 복이야! 안녕” 이런 식이라니까요. 제가 과도하게 이야기한 게 아니고 현실을 그대로 이야기한 겁니다. 우리가 그동안 천사를 빼 놓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어쨌든 간에 열심히 신앙생활 해야 겨우 구원받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 때문에 천사를 빼놓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문제, 천사가 영광을 안 받아야 된다, 안 받아야 될 이유가 뭡니까? 겸손해서? 아니에요. 그러면 뭐냐, 에스겔 1장에 보면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겔 1:15 내가 그 생물을 본즉 그 생물 곁 땅 위에 바퀴가 있는데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 겔 1:16 그 바퀴의 형상과 그 구조는 넷이 한결 같은데 황옥 같고 그 형상과 구조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겔 1:17 행할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않고 행하며 천사의 얼굴이 10절에 보면 겔 1: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겔 1:11 그 얼굴은 이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에스겔에 천사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보내준 이유는 이미 에스겔 자체가 이스라엘이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천사가 언제 모습을 드러낸다고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더 이상 기대할게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중단되거나 미완료로 남을 수 없는 거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은 차질 없이 진행돼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의 구조, 그 내용을 더 명확하게 천사를 통해서 드러내 줍니다. 천사가 이렇게 드러낼 때 절망적인 인간들은 그 에스겔 같은 천사의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겁나죠. 겁난다. 또는 무섭죠. 여러분, 천사의 얼굴이 겁나고 무섭다는 말은 그 만큼 그 사람은 뭐할 가능성이 있느냐 하면 감사하고 행복하고 안심할 가능성이 높아요. 왜냐 하면 천사가 무서우면 무서움이 등장되기까지는 뭐가 무섭겠습니까? 자기를 죽이려 달려들고 이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했다는 이 자존심 상한 상황자체가 겁나는 상황이 되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겁내는 것보다 더 겁나는 것이 왔을 때 뭐가 날아가 버리죠? 세상 적으로 두렵고 겁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별로죠. 이사야 6장에 보면 그 이사야 선지자가 누구를 만납니까? 성전에서 천사를 보죠. 하나님의 영광을 천사들이 날갯짓 하는 것을 보죠. 하나님과 천사를 같이 봤죠. 그때 이사야가 하는 말이 뭡니까? 나는 봤지롱,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을 이야기해요.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그러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면 이것이 절망적일 것 같은데 ‘누가 나를 위해서 갈꼬?’ 할 때 이사야가 자기가 나서겠다고 나서지요. 그만큼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사야가 신나는 거예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자기가 봤잖아요. 그리고 자기는 어떻게 됐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죠.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말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자기가 챙길 자신의 것이 아직 남아있다? 안 남아있다? 안 남아 있죠. 이제는 인생이 나를 위해서 살던 인생이 뭐로 바뀌었다는 말입니까? 나를 위해서 누가 할꼬? 그 나라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인데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누가 할꼬 할 때 제가 여기 있나이다. 하는 순간, 뭐가 떨어져 나갔어요? 더 이상 나를 위한 나는 존재하지 않죠. 여러분, 그 상황이 본인한테 어떻겠어요? 힘들겠어요? 신나겠어요? 좋겠습니까? 좋지요. 안 좋아요? 좋은 겁니다. 좋아요. 하나님 앞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하면서 주의 일을 나설 때에 물론 그렇게 하면 천사가 도와주잖아요. 왜? 뜻이 같으니까요. 천사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향과 이사야가 섬기는 방향이 일치되니까 성령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일치되죠. 그럴 때 이사야는 뭐를 생각지 않았느냐 하면 “타인의 시선” 타인의 모든 시선이나 타인의 모든 눈치, 평가, 비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거기에 대해서 신경을 안 써도 되죠. 자유입니다. 이게 자유입니다. 천사의 얼굴이 안될 수가 없어요. 이사야 20장에 보면 이사야가 어느 정도까지 수모를 당하느냐 하면 벌거벗은 채로 애굽에서 3년 동안 하나님의 계시, 뜻을 전하는 일을 맡게 됩니다. 남들 보기에 얼마나 해 내기 힘들겠어요? 그야말로 생판 모르는데 가서 남자 팬티를 팔아야 될 그런 미생의 인생과 비슷하죠. 남자사우나 앞에서 팬티 파는 장면이 미생드라마에 보면 나오잖아요. 부끄럽게 참, 내가 이런 짓까지 해야 되느냐? 이렇게 되잖아요. 그 미생의 장그래는 내가 꼭 이런 짓까지 해야 되느냐? 이렇게 나오잖아요. 이사야는 뭐라 합니까? 주여,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되죠. 얼마를 팔고 안 팔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3년을 보낸 것이 문제가 아니고 삶의 자세, 세상을 보는 자세 자체가 이것은 달라도 너무 다른 거예요. 우리는 그동안 천사를 누락 시켰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하나로 고정시켰습니다. 악착같이 살고 그래도 성실하게 살면 하나님이 나를 예뻐하신다는 단 하나의 현실만 현실이라고 생각하다보니까 내가 어느 정도로 성실한지 어느 정도로 신앙생활 잘하는지를 남들한테 평가 받아야 되고 특별히 누가 평가해야 되느냐 하면 내가 나를 또 평가해야 된다는 부담을 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날 자기를 때리죠. ‘이 바보야! 바보야! 왜 그런 실수를 했어! 이 바보야 이 멍텅구리야! 네가 왜 그러한 죄를 지었어! 다시는 안하겠다고 이야기해!’ 지가 지한테 이야기를 합니다. ‘주여!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싹싹 빌어!’ 자기가 자기를 길들이고 채찍질하고 당근주고 혼자 다한다고 그것을 혼자 두는 장기라고 하는데 바둑이나 장기는 원래 두 사람이 둬야 되는데 자기가 공격하고 자기가 상대방에가 옮겨 방어하고 장군이야! 우리의 인생이 결국은 하나의 조작된 자기가 영광을 위해서 자기가 스스로 조작해서 만들어 나가는 그러한 게임 같은 아무 무의미한 그러한 인생이죠. 그런데 이사야의 모든 인생의 게임이 그렇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죠. 시키는 분 있고 자기는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그러면 시도 때도 없이 계시를 주는 게 아니죠. 그러면 계시 오게 되면 계시 전하면 되고 엘리야도 마찬가지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이고 계시 안 오면 안 전하면 되고 세상에 그렇게 복장 편한 직업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다가 굶어 죽으면, 죽으면 되고 이것은 이사야만 해당되는 상황이 아닙니다. 마태복음10장에 보면 모든 성도한테 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 10: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마 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받는데 왜 이렇게 힘듭니까? 이게 혼자서 구원받으려하면 힘들어요. 그런데 우리 속에 누가 계신다? 우리 속에 성령이 계시고 성령이 말하는 대로 하게 되게 되면 그 뒤 따라 부수적으로 따라 오는 어떤 미움과 핍박, 그런 게 따라 온다는 것은 오히려 성령께서 계시다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그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더욱더 신나지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동방박사가 별따라 왔을 때에 특별히 어떤 조언을 받던가. 전문가한테 초반부터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없죠. 그냥 별이 인도하는 대로 왔죠. 단지 별이 멈추거나 별이 사라졌을 때 그때는 누구한테 물어봤습니까? 그 예루살렘에 있는 박사들한테 물어봤고 그 다음에 다시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니까 그 사라졌던 별이 다시 떠오르죠. 뭐 어떤 사람은 이럴 때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동방박사가 날씨도 추운데 고생했다 동방박사가 여행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았겠다, 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동방박사는 신났어요. 왜? 별이 움직이니까요. 만약에 MBC, KBS 인터뷰한다고 합시다. ‘박사님들, 참 노고가 많습니다. 고생이 많죠?’ 하면 그 사람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나 보고 인터뷰하지 말고 저 별을 보세요!” 라고 할 꺼다. 이 말이죠. 결국 사도 바울이 했던 일이 뭡니까? 결국은 복음, 십자가를 보라! 이거잖아요. 그게 힘듭니까? 십자가 없는 사람은 무지 무지 힘들 겁니다. 어디 갔지? 결국은 없으니까 누구를 보라 합니까? “아, 나를 보세요. 나!” 그러니까 교회의 목사들이 보여 줄 복음이 없으니까 누구를 자꾸 보라고 합니까? 내가 이 교회의 당회장입니다. 나를 보세요! 이렇게 나오잖아요. 설교하면서 모든 것이 나처럼 해 봐라! 이렇게 뭐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현실은 그런 현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들이고 진짜 사도들, 진짜 동방박사, 진짜 스데반 집사, 방금 이야기한 구약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보면 뭔가 그들이 보는 현실은 현실 전체를 보고 있어요. 우리가 못 보는 현실을 보고 있다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마셨던 공기와 지금 우리가 마시는 공기가 똑같은 공기에요. 그들이 봤던 하나님이나 지금의 하나님이나 똑같고 아무리 시대가 발달을 해도 김홍도가 그린 풍속도에 나오는 개를 보세요. 그 개하고 요즘 세퍼트하고 똑같아요. 사람은 옷차림 바뀌면 바뀐 줄 알죠. 개보니 똑같은 개이고 닭을 보니 똑같은 닭이고 똑같은 고양이에요. 그 말은 옷을 바꿔봐야 그 옷 안에 들어있는 그 몸뚱이는 그 인간이나 지금 인간이나 똑같아요. 뭐? 자기 밖에 모르는 것, 자기 자신밖에 모릅니다. 똑같은 거예요. 아이고, 100년 뒤에 태어나면 잘 살 건데,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100년 뒤나 100년 전이나 이순신 장군이나 전부 다 똑같은 인간입니다. 인간애찬, 자기 애찬, 자기 자랑, 자기 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당시에 있었어도 또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이 천사들이 여기 누구를 등장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가 절망적일 때입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럼 요즘도 천사가 있습니까? 하는데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에스겔이 이스라엘이 멸망했잖아요. 멸망하니까 천사가 나타났다 말이죠. 그것을 여기에 중요하니까 적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이 줄곧 가요. 마지막 때까지 계속 갑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나라, 유대 나라가 멸망했는데 그것은 뭐냐, 예수님 당시의 만남은 너희들이 근본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던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한테 소개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것이 유대인이 저주 받아야 될 이유가 되는 거죠. 그런데 이스라엘의 멸망은 줄곧 갑니다. 마찬가지로 천사의 활동도 줄곧 가죠. 그러면 에스겔 1장에서 천사의 활동이 나타났다는 이 말은 우리가 이 두 가지의 현실을 다 보아라는 뜻입니다. 에스겔이 뭐했습니까? 에스겔 선지자가 한 것이 뭐가 있어요? 칼 들고 무슨 농사를 지었습니까? 어디 집을 지었습니까? 에스겔이 한 것이 이것을 했어요. “모든 일은 천사들이 합니다.” 이것을 에스겔이 했어요. 이것을 전하는 것을 했어요. 모든 일은 천사가 합니다. 그러니 에스겔 1장 나오는 천사의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천사가 사방으로 움직여요. 세상을 표현할 때 스가랴도 마찬가지지만 네 개의 바람이 나오고 백마가 얼마 나오죠? 4마리 오죠. 왜? 동서남북 각각 한 마리니까 말이 달려서 어디 까지 달려가느냐 하면 세상 끝까지 가요. 세상 끝까지 말이 달려간다는 말은 천사가 세상 끝까지 간다는 말이에요. 이러면 세상 경로가 누구의 영역이다? 활동영역이다? 천사의 활동영역이 된다 이 말입니다. 물론 어떤 일을 합니까? 할 때의 말은 천사 고유의 일은 하나도 없어요. 천사가 활동을 하되 그 천사가 해야 될 고유의 일은 누가 채워주느냐 중보자와 예수님이 채워주고 성령에 의해서 거기에 채워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에스겔 1장에 나오는 천사의 활동에 보면 천사는 바깥을 차지합니다. 차지하고 안에는 뭐냐, 바퀴가 있죠. 그 안에는 바로 주의 형상이 들어있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죠? 에스겔에 보면 주님을 사방으로 누가 보호한다? 천사들이 보호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활동을 계시하게 되면 그 각각 담당했던 방향대로 누가 뛰어나간다? 천사가 뛰어나가요. 그리고 그 천사가 뛰어나와서 전해야 될 임무는 어떤 임무냐 하면 그 임무가 나오는 기적, 중앙에 있는 지점, 주님이죠. 그게 바로 에스겔에 있는 성전입니다. 갑자기 어렵게 됐는데 정리해 봅시다.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는 말은 성전이 불타버렸죠. 성전은 뭐냐, 하나님과 지상의 유일하게 만남의 장소에요. 교류의 장소입니다. 성전은 원래 주의 이름이 있어야 되죠. 그런데 주의 이름이 더럽다고 철거했어요. 우상 있는 곳에 주의 이름은 안 계시기 때문에 철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다윗 언약에 의하면 성전은 있어야 된다고 했고 여기 에스겔에서는 성전이 깨어졌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다윗 언약대로 성전이 만들어 져야 돼요? 안 만들어 져야 돼요? 만들어 져야 되겠죠. 그 성전을 만들기 위해서 다윗 같은 분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야 돼요. 그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에스겔은 바로 이미 이스라엘의 역사가 멸망되고 난 뒤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있어야 하나님과 만남이 되는데 만나야 전 세계를 통괄할 수 있는 중심매체가 돼요.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성전을 어디서 짓느냐 하면 성전 장소가 어디 있냐? 성전이 불탄 장소에요. 불탄 그 위입니다. 성전이 불탄 그 위에 성전을 지어요. 학개, 스가랴 보세요. 성전 어디에 짓습니까? 옛날 터에 짓죠. 이것은 신약성경에 뭐라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와서 성전을 지을 때 반드시 인간들이 예수님을 살해해 줘야 돼요. 왜냐 하면 예수님이 성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전은 반드시 불타버린 위에 세워지잖아요. 예수님이 와서 그냥 성전을 짓지 않고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그 자리에 새로운 성전이 세워집니다. 그러면 좀 어렵기 때문에 물어 가면서 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새로운 성전에 여러분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까? 못 들어갑니까? 지금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죠? 사람한테 죽었죠. 그러면 우리도 사람이죠. 사람한테 죽임을 당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신 분의 터 위에 죽음 이후에 성전이 세워진다면 그 성전에 우리가 거기에 우리의 힘으로 그 성전에 가름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안 되죠. 왜냐 하면 우리는 싫어해서 외면해 버린 자리니까 그 분 예수님은 싫어버린바 되버렸거든요. 모든 인간에게 싫어버린바 되신 분이 성전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싫다고 외면한 그 자리에 성전이 있다는 말은 우리의 시선으로부터 가리어진 장소에 성전이 세워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 쪽에 시선을 돌릴 마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우리도 같이 주님을 위해서 무너져 버릴 때 비로소 왜, 저를 무너뜨립니까? 할 때 아하, 나는 내 죄 때문에 무너져야 되고 저분은 내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무너져야 되고 비로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게만 이것이 성전에 합류가 될 수 있어요. 여기서 천사를 연결 시켜 볼게요. 에스겔에 있어서 하나님의 천사의 모습을 보여 준다는 말은 이미 성전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바벨론이라는 성전은 모두 불타버렸어요. 성전이 불탔다는 것은 무슨 장소가 없다는 것이냐, 만남의 장소가 없다, 주님께서 지상에 일할 장소가 없다는 거예요. 그게 없어 버리면 주께서 지상에서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어떤 접촉지점이 없어지죠.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이 땅에 이루어지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전을 만들어야 돼요. 만드는데 이미 인간이 만든 성전은 불탔기 때문에 그 성전 만들기에 누가 나서느냐 하면 바로 주님이 장차 오실 다윗의 자손이 오셔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에스겔 37장에 특수한 의미인데 뭐냐 하면 다윗 같은 임금님이 오세요. 다윗이 자손이 온다고 해 놓고 이름은 여호와라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람의 아들로 온다 이 말입니다. 오게 되면 그러면 사람한테 협조를 얻을까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미 사람들이 모든 성전은 불타버렸을 때 사람에게 협조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해 봐야 또 불 탈건데 그래서 성전을 누가 하느냐 하면 성전을 천사들에게 둘러 싸여서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에스겔 1장에서 천사의 해야 될 일이 뭡니까? 성전 만들기에요. 그 성전의 주인공이 누구죠? 하나님과 인간에게 유일하게 매치되는 분이 누구죠? 장차올 다윗의 자손, 우리는 예수님이지만 에스겔 식으로 하면 다윗의 자손이 와서 드디어 성전을 이룹니다. 그러면 다윗의 자손이 바뀌었다는 말은 다윗의 자손 안에 뭐가 흘러들어오느냐 하면 다윗에게 약속한 모든 것이 성취된 채 흘러 들어오게 되죠.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뭐냐, 성전이에요. 그게 천국이에요. 지금 까지 이렇게 했으니 이제 여러분은 아실 거예요. 천국은 어디서 만들어 진다? 사람이 멸망하고 난 뒤에 만들어 집니다. 그러면 이 말은 사람이 천국을 안다? 모른다? 모르지요. 모르면 어떻게 들어갑니까? 처음부터 인간은 못 들어가요. 천국? 어림도 없어요. 못 들어가요. 저주 받아야지 어디 천국을 들어가요? 그러면 천국은 누가 넣어주느냐? 그렇게 천국을 만드신 분이 넣어 줄 때 들어가는 겁니다. 제가 하는 말은 천국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넣어줄 때 들어가는 거예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택한 자만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그 택한 자만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를 할 때 필요한 일꾼들이 있는데 그 일꾼들이 뭐냐, 바로 전 세계에 사방으로 흩어져서 그 자를 찾아와야 돼요. 그 일을 누가 하느냐, 천사가 해요. 주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아 천사가 해요. 어떻게 담당하느냐, 네 명의 천사가 각각 자기의 기능대로 그 모습을 갖춰서 하시는 겁니다. 사람, 그다음 사자, 소, 독수리 이렇게 해서 각각 기능에 맞도록 택한 백성을 찾아서 뽑아 세웠느니라. 그래서 구원은 우리가 찾아가는 게 아니고 주께서 찾아내시는 거예요. 그것을 적출, 솎아내는 것, 또는 분리시켜서 여기 있었네! 하고 뽑아내는 거예요. 택해서 뽑아내는 거예요. 사도행전에 보면 오직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만 다 믿는 말을 사도 바울이 했다는 겁니다. 영생 주기로 작정되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안 믿어지는 말을 했다는 거예요. 믿어진다면 당신의 능력이 아니고 실력이 아니고 작정되었기 때문에 영생 주기로 정해 진 사람이기 때문에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겁니다. 바로 그러한 일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나 그 사람에게 이미 천사가 작업을 다 하고 있다 말이죠. 그 천사들의 활동 앞에서 사도 바울은 지금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결국 지금 한 시간 이상 이야기했던 것은 나는 너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실이 되어 가는 것을 너희들에게 알려줄 뿐이다. 이거죠. 이게 내가 천사 앞에서 명하노니 너희들에게 이렇게 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내가 미리 알려주는 겁니다. 아까 천사에게 안에 바퀴가 있고 바퀴가 움직이는 대로 천사가 움직이죠. 그러면 이 말은 천사는 철저하게 피동적이다 이 말입니다. 천사 본인의 의사가 없고 항상 안에 계시는 분이 움직이는 대로 하는데 안에 움직이는 분이 누구죠?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 인자는 기도 하는 집이다. 주님이 움직이는 대로 천사가 같이 움직이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천사를 만난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구세주인 것을 믿게 되면 그것은 천사를 만난 거죠. 천사가 없이는 이런 예수 믿는 경우가 생기지를 않아요. 아, 천사가 우리의 구원을 도와주는 구나! 그것은 첫 째 시간에 아니라고 했죠. 다 잊어 버렸죠. 천사가 우리의 구원을 도와주는 게 아니고 천사는 언약대로 움직일 뿐이다. 눈치 보니까 돌아서면 다 잊어버릴 것 같아요. 내일 토요일 되면 다 잊어버릴 것 같아요. 천사는 언약대로 움직입니다. 따라서 누가 구원받았습니까? ‘주여, 언약대로 구원시켜 주셨구나!’ 하는 이것을 아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고 ‘아, 나 예뻐서 나를 건지려고 했구나!’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잖아! 몇 번 이야기를 해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면 마찬가지지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된 거예요. 이 말은 내가 구원받고 싶어서 했더니만 알았다! 그것은 빼세요. 그런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 교인들이 없다고 실망을 하시는데 분명히 주께서는 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읍시다. 믿으면 주님께서는 ‘아이고 건져야 되는데 네가 게을러서 못 받았다.’ 이런 일은 없어요. 우리보고 책임추궁하지 않습니다. ‘네가 그때 게을러서 한 사람 놓쳤잖아!’ 이런 주님 없습니다. 분명히 요한복음 6장의 말씀대로 나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중에 주님께 돌아올 때에 참, 우리가 어지간히 뺀질이인 것을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 믿으려고 그렇게 도망쳤는데 믿으라고, 믿으라고 기어이 천사를 보내셔서 주님께서 작성하셔서 믿었습니다. 라는 말을 우리 입에서 고백하게 만드셨잖아요. 그 자체가 이미 천사에 둘둘 쌓여있는 사람이고 주의 성령의 기적을 둘둘 말고 사는 사람이에요. 그냥 이불 호청만 둘둘 말지 말고 밤에 주님의 이런 작정하심으로 둘둘 말린 채로 오늘 밤 주무시기바랍니다. 이리 뒤척여도 거기에도 천사가 우르르 따라 가고 이렇게 뒤척여도 다치면 안 되지 너를 위해서가 아니고 언약을 위해서, 약속을 위해서…… 그러한 상황이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게 현실이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들만 있는 현실이 아니고 거기에 천사가 개입된 그 현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이제 12절 본문을 이제 시작되는데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네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구원받은 것을 안다면 이 언약을 어디 가도 훼손시키지 말라 이런 뜻이에요. 왜냐, 그 현실은 네가 방해될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너만 힘들죠. 사도 바울에게 예수님이 찾아와서 하신 말씀이 얼마나 흥미롭습니까? 네가 나를 핍박해 봐야 누구만 아프다? 네가 가시 채를 네가 차려니까 누구만 아파요? 너만 아프지, 너만 고생이라 안합니까? 주님께서 얼마나 자상하게 이야기해요. ‘아이고, 고생이라, 네가 나를 핍박했어요? 아이고, 너만 고생했어요?’ 이런 뜻이라 말입니다. 지금도 오늘 우리보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주님이여! 제가 게을러서 주님 말씀 못 지켰습니다.’ ‘네가 그런 생각을 했나? 그런 생각하면 너만 힘들어!’ 네가 뭘 잘해서 영광 돌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왜? 너의 일은 애초부터 우리의 일은 없으니까 나의 구원이 여러분, 나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고 천사의 일입니다. 그 다음에 23절 보세요.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아, 이 말씀 지키려면 이제부터 포도주 먹는 소믈리에 자격증 따서 맛있는 포도주, 위장에 좋은 포도주를 먹어야 되겠네요. 왜 갑자기 여기서 포도주 이야기를 합니까? 그것은 이렇게 신경 써주는 것도 주의 뜻이다. 네 몸이 주님 보시기에 귀하기 때문에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는 겁니다. 네가 예뻐서 관심 주는 게 아니고 천사 앞에서 주께서 친히 만드신 작품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내 작품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거예요. 요즘 말로 고치면 이제부터 물만 마시지 말고 그것도 부채표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활명수를 마셔라 이런 뜻으로 생각하시면 돼요. 이 정도로 바로 천사나 주님이나 사도나 우리를 세세하게 관리하는데 그것은 바로 언약에 합당한 우리 개인적인 마음을 기쁘게 하려는 게 아니고 우리한테 부담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이미 우리한테 관여하고 있다는 거예요. 만약에 이 말을 듣고 사도가 물도 있고 포도주도 있는데 흥, 이제 나는 물만 마실래! 이렇게 고집을 부린다면 마냥 뭐만 생각하는 겁니까? 그 주의 일, 현실에 대해서 또 다른 현실을 따로 만들어요. 나는 포도주를 일체 마시지 않고 물만 마시는 나만의 현실을 따로 만들게 돼요. 이 말은 중요한 말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 주님, 주님 하다가 자기 일만 생각하잖아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아이고, 현실이고 뭐고 나 잘되는 게 현실이다.’ 이런 생각을 하루에도 수백번 합니다. ‘아이고, 주님 계신 게 현실이 아니고 내 잘되고 내 속 편하면 최고이다.’ 이렇게 하게 되면 그야말로 주님의 사람이 아니고 내 사람으로 갑자기 태도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이죠.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여기 갑자기 죄 이야기가 나오죠. 죄 이야기 나오면 분위기가 확 깨잖아요. 자, 죄 이야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선입감에 싫어해요. 그런데 제가 오늘 강의에도 여러 번 이야기했고 평소에도 많이 이야기했지만 누가 나한테 죄인이라고 이야기 해 준다는 것,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 이야기 해 주는 것, 우리가 죄인임을 느끼는 것을 오히려 굉장히 감사할 일이고 고마워할 일입니다. 죄를 느끼는 순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순간 더 이상 타인의 시선에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주님이 죄라고 할 때는 너나 너 같은 인간이 너보고 죄라고 하는 그러한 심판 기준을 정의 시키지 않고 사람들이 모르는 은밀한 기준에 의해서 우리를 죄라고 했기 때문에 그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존재라는 그런 뜻으로 생각 하시면 되겠습니다. ‘너는 죄인이다.’ 할 때 아, 주께서 저를 쓰시는 군요! 이렇게 고마워하시면 돼요. 구원의 정의라는 말은 반드시 천국만 이야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뭐를 언급해야 되느냐 하면 지옥을 언급해 줘야 돼요. 왜냐 하면 기본적으로 심판 없는 구원은 없어요. 심판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 구원의 기쁨이 어디서 생기느냐, 심판의 무서움에서 생기거든요. 복이라는 것이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저주 받아야 마땅함에서 비로소 복의 의미가 새롭게 발생되는 겁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것은 현실자체가 죄와 심판을 계속 지금도 부글부글 드러내고 있는 현실의 차원이에요. 이것을 지평이라 하는데 또는 평지, 이 세상에 사는 게 심판과 죄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그것을 자꾸 들추려고 하는 그런 성질을 천사를 통해서 계속 주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요한계시록을 보고 느낌이 어떤 느낌입니까? 요한계시록을 본 사람의 느낌이 뭐에요? 섬뜩하다 하는 느낌을 아마 받을 거예요. 무섭다! 너무 가혹하다! 너무 노골적이다! 뭐 그런 느낌 안 들던가요? 요한계시록 보면 섬뜩하죠. 뭐 대충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고 완전히 깡그리 모든 것을 박살내는 처단하는 그런 순간이 오잖아요. 한꺼번에 모아 놓고 마치 중세 성당에 보면 사람들 교훈하기 위해서 그림 그려 놓은 것 있잖아요. 보면 천국, 지옥 이야기가 위는 천국이야기 저기는 지옥이 한 화면에 한꺼번에 다 들어 있는 것처럼 요한계시록 전체 속에 지옥과 천국이 다 들어 있어서 섬뜩하죠. 그것을 보려하면 현실의 고요한 흐름은 없고 정지가 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 짜증이 나죠. 그런데 그게 현실입니다. 그게 정지 되고 있는 게 아니고 그게 부글부글 끓어요. 온천에 유황이 분출되듯이 죄와 심판이 자꾸 부글부글 끓는데 우리는 돈 벌기 바빠서 옆에 뭐가 끓는지도 모르고 그저 자기만 돈 벌면 최고가 되는 거예요. 아, 끓는 게 있어요. 직장생활하면서 자기 성질만 끓죠. 추운데 버스 타야 되는데 오자마자 버스가 가 버리면 그때 속이 어떻습니까? 부글부글 끓죠. 이 추운데 15분 더 기다려야 되나?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현실이고 실제 전체 현실은 뭐냐 하면 전체가 죄의 심판이 들끓습니다. 왜냐 하면 그게 언약적인 현실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그것을 자꾸 놓치니까 사도 바울이 그것을 자꾸 주입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내 말을 듣는다는 것은 바로 주변에 죄가 있으며 심판이 있으며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돌아봐라! 그리고 그런 것을 돌아봐야 네가 구원의 기쁨이라는 것, 천국 영생의 기쁨이 계속해서 날마다 새롭게 부각이 되거든요. ‘아이고, 뭐 한번 구원받았으니까 이제는 남은 건 돈만 벌면 된다.’ 이런 식으로 해 버리면 목적이 갑자기 자기 이익으로 고정되어 버리면 세상이 부글부글 끓는 것이 아니고 고요해 져요. 고요해 지고 돈 못 버는 자기 성질만 부글부글 끓죠. 전체가 이 지구 전체가 죄와 심판과 저주의 심판으로서 들끓는데 그게 천사가 개입돼서 그래요. 천사가 그렇게 개입해서 온 천지를 다 쑤셔놓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천사가 개입 안한 곳이 없어요. 전체가 국회 청문하는 것처럼 천사가 다 쑤셔놔요. 죄와 심판이 다 덩달아서 같이 나오게 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사도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우리가 사도의 말을 충분히 이해를 해야 돼요. 아하, 내가 자꾸 현실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나만 고요하면 좋은 현상이라 생각 하는데 그게 아니고 성경은 전체 현실을 한꺼번에 우리에게 다 말해 주는구나!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은 뭡니까? 천사가 말해 줬으니까 우리가 천사처럼 섬겨야 되는 사람이니까 우리 입에서 뭐가 나와야 됩니까? 죄와 심판에 대해서 나와야 되죠. 저는 의존교회 사이트를 보면서 늘 감사하고 있어요. 다른 사이트는 그렇게 죄와 심판이 적나라하게 적힌 글이 없어요. 일반 교회는 그런 글이 거의 없다니까요. 아마 삭제 대상일걸요. ‘이게 미쳤나!’ 하든지 아니면 ‘이게 어디 뭐 돈 못 벌어서 환장을 했구나!’ 이런 식으로 비아냥거린다든지 얼마나 살기 힘들었으면 한 풀이를 이렇게 하겠냐! 이런 식으로 하겠는데 뭐 그런 경우도 있을 수도 있겠어! 그래야 되는데, 특히 이영춘 집사님의 글을 보면 섬뜩하죠. 특히 섬뜩한 분, 김명현 목사님의 글은 팔 벗고 나온 것 같아요. 한번 해 보겠다는 거예요. 네가 죽던지 내가 죽던지 한번 해 볼까! 글 자체가 이런 식이에요. 너 죽고 나 죽자! 아니 너 죽고 나 살자! 이런 식으로 아주 노골적으로 등장하잖아요. 사도 바울도 못지않습니다. 편지 쓰면서 죄의 심판에 대해서 쓰면 받는 사람이 얼마나 참 기분 나쁘게 볼까요? 그러나 단순한 편지가 아니고 에스겔 같은 선지자입니다. 현실 자체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죄의 심판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왜? 이것을 언급해 줘야 우리가 구원받은 기쁨을 새롭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했는데 성경 신약에서 선행할 때 주의해야 됩니다. 그 선행은 특히 요한계시록 마지막 22장에도 나오는데 그 모든 선행은 예수의 복음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왜냐 하면 복음을 모르면, 복음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뭐하기 때문에? 지옥 가잖아요. 그러면 뭐가 선행입니까? 유일한 선행은 주를 사랑하는 것, 그게 선행이에요. 그게 시작이고 끝이에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주의 형제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예요. 모든 사랑과 모든 구제와 모든 동경 속에 주님에 대해서 사랑, 그것이 들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사로 볼 수가 없어요. 따라서 여기서 선행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벌이시는 일을 선행이라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악행은 뭐다? 주님을 모르는 것,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 저주를 받을 지어다 했거든요. 이 세상이 주님이 만든 주님을 드러내는 현실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그것이 악행이 되는 거예요. 그게 죄가 되고 그게 심판이 되는 거죠. 따라서 이렇게 보면 돼요. 현실이 판이라 하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바로 된 컵을 이렇게 엎어버리는 거예요. 엎어버리면 여기 담겨 있던 몰랐던 컵의 내용들이 노골적으로 노출이 되겠죠. 그러면 애초부터 여기는 뭐가 있다?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분류되어 있다는 겁니다. 분류되어 있으니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디모데전서 5장을 이야기한 겁니다. 자, 천사 앞에서 이렇다, 들을 귀 있나, 없나? 어차피 나중에 뒤집어 지면 둘 다 자기 본색은 드러나게 되니까 그것을 봐서 이 사도라는 사람이 남들의 시선이나 남들의 평가를 전혀 개의치 않고 그야말로 천사처럼 주여! 오늘 또 뭐 할까요? 시킨 대로 움직인 거예요. 결코 자신만의 세계, 자신만의 찬란한 역사, 자기만의 자랑꺼리 그런 것을 일체 고려하지 않습니다. 거저 사도바울이 하는 것처럼 내가 어려울 때나 이게 가난할 때나 내가 부할 때 그게 그런 환경이 전혀 주의 일에 훼방을 하거나 걸림돌이 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환경조차도 주의 일인 줄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면서 안 이루어놓고 모든 게 원만하게 주님께서 보시기에 모든 것이 예수가 적합한 환경을 주신 것으로 여기고 아주 분명하게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왜냐 하면 그것이 바로 자기가 알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극한 현실주의자에요. 오직 현실밖에 몰라요. 주님의 천사가 활동하고 주님의 구원이 생겨지고 구원의 심판과 죄가 벌여지는 그 현실 판, 현실 판 데기 이것밖에 몰라요. 그 가운데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이것은 자신이 노력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작용해서 된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이 말씀을 받으실 때 은혜로 받으시게 되면 우리는 사도바울과 동일한 현실 판에 놓여 있음을 다시 한 번 감사함으로 기뻐 할 수 있겠죠. 그게 바로 자유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만든 현실이 아니고 주께서 계획한 현실 속에 놓여있으면서도 얼마나 나만 살기 위해서 나만 행복하기 위해서 따로 나가 살려고 하는 나만의 현실을 챙겼습니까? 이제는 그 경계선이 허물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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