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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김창길
서울 의존교회150313a (이질적인 것)―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첫 번째 시간에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사용하시되 택배 상자처럼 찢어서 그 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끄집어낸다고 했죠.
그 방식이 이스라엘 하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오늘날 자기 사람들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 바탕이 뭐냐 하면 자기를 위하여예요. 자기를 위하는데 여호와가 찾아오니까 여호와가 나를 위한다는 이것에 대해서 여호와께서 긍정적으로 호응해 주는 줄 알고 착각한 거예요.
하나님이 오신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것이 맞죠? 그 점에 대해서는 주님이나 나나 생각이 같은 거죠. 그렇다면 주님의 취지에 맞추어서 우리가 주의 말씀대로 잘 협조해서 이스라엘을 제대로 해 봅시다. 라고 나온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속에다 뭔가 탄광처럼 파고 들어가요. 그 내부를 파고 들어가다 보면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내부에 대부분 사람이 이스라엘을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이질적인 효소가 거기에 들어있어요.
이들이 누구이냐 하면 이들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대표적인 사람 중에 하나가 엘리야인데 아합이라는 북쪽 임금이 엘리야들 만나 첫마디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라고 이야기했어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엘리야 너는 우리가 지금 지키려고 하고 챙기려고 하는 이스라엘의 유지와 번영을 위해서 너는 전혀 협조적이지 않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엘리야가 뭐라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아합, 이스라엘을 챙기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쓰는 당신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입니다. 라고 했어요.
자, 이 두 사람의 만남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그 실체가 같아요? 달라요? 전혀 다르죠. 엘리야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누가 친히 만들어 나갑니까?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 나간 것이고 요압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자기가 여기 왕으로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 쪽에서 좀 지켜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가 중심으로 보이는 이 이스라엘을 전제로 하고 하나님이 협조 좀 해 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관계에서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면 두 개의 이스라엘이 생겼으니까 이 둘은 어떻게 됩니까? 둘 중에서 하나가 티가 나야죠. 진짜 티가 나야죠. 그 티가 난 이벤트 행사가 뭐냐 하면 바로 갈멜산에 제단 만들어 놓고 한 겁니다.
그 이야기를 좀 해 보면 갈멜산에 제단을 해 놓고 850대 1, 바알선지자 450, 아세라 선지자 400 토탈 850명, 이쪽은 엘리야 혼자! 17대 1로 싸웠다는 그런 전설은 있습니다만 850대 1로 싸웠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봐요.
850대 1로 배틀 들어간 거예요. 들어갔는데 이 850명이 한 행동은 기존에 아합왕이 이스라엘을 규합하고 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지켜주는 이스라엘이 맞습니다. 라고 했을 때 거기에 규합했을 때 동원된 원리원칙이 거기 다, 제단 섬기는데 다 동원됐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를 찌르고 열심내고 자학하고 부르짖으면 주께서 응답하신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내가 흥분하면 주님도 같이 헌금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전도사가 앞에서 예배 전에 강대상을 치면 주님도 흥분해서 덜썩덜썩, 완전히 주님과 같은 노래방 시스템 됐던 모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질적인 엘리야를 보내서 이질적인 장애요소가 와야 비로소 감추어진 자기의 본색이 드러나요. 이 방법을 여전히 지금도 사용해요.
우리는 다 보니까 다 괜찮은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성령께서 십자가를 우리 속에 집어넣는 순간 우리는 괜찮다는 것을 믿는 우상숭배자로 들통 나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이만하면 어때서? 내 나이가 어때서 부르기도 하는데 이만하면 어때서? 이만하면 내가 신앙인답지 뭐! 라는 그것이 예수님 앞에 들통 나면 그게 바로 꼬깃꼬깃 숨겨 놓은 우상숭배의 잔재가 또 남아있어요.
열심히 제단에다 고기를 올려놓고 생고기죠. 가슴 찔러가면서 자학하면서 피 흘리니까 누가 흥분해요? 그것을 보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같이 흥분했어요.
같이 주여! 부르면서 저렇게 우리 제사장들이 희생하는데 신이시여 불을 내리지 않으면 정말 안 됩니다. 내리셔야 됩니다. 자기들끼리 흥분했어요.
주님께서는 아예 흥분을 가라앉히십니다. 불이 떨어져야 될 그 제단에다가 물을 갖다 부어요. 상극되는 물을 붑니다. 율법 통을 붇습니다. 다 갖다 부어요. 부었는데 물을 얼마나 부었는지 물이 제단을 축축 적신 정도가 아니고 흘러 넘쳐 아예 도랑에까지 넘쳤어요.
그러고 난 뒤에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는 하나님꺼잖아요. 딱 한 마디 했어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 나라는 하나님꺼 맞죠? 딱 하니까 불이 떨어졌는데 그 불이 흘러 넘쳤던 물을 따라 가며 다 핥아서 증발시켜 버렸어요.
수증기로 만들어 버리고 물은 하나도 없이 홀라당 다 타버렸어요. 뭐죠? 이게 뭐죠? 그래서 엘리야가 이겼습니까? 엘리야가 이긴 겁니까? 그래서 끝났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된다는 것은 원래 진짜 이스라엘이 우리가 덮쳐서 나를 보이지 않도록 완전히 나를 숨 막히도록 덮쳐버릴 때가 그 상태가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 상태에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 지시하게 되면 우리가 마중 나와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이렇게 대화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이것을 덮쳐버립니다.
이불 가지고 꼬마를 덮쳐보세요. 아이가 이불속에서 잠 안자고 먹겠다고 까까 먹을 때 엄마가 지금 잠 안자고 뭐해? 과자는 몸에 해롭단 말이야, 내일 아침에 먹어야지 하고 빼앗는 것은 그 애를 인간으로 가치 있게 보고 애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아이의 동의하에 과자를 뺏아서 내일 아침에 준다는 이런 교류가 성립되잖아요.
그런데 성격 급한 엄마는 그런 것이 아니고 아무 소리 안 하고 두꺼운 겨울 이불 가져와 무게 있는 이불을 그 위에 눌러버린다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돼요? 아이는 숨이 막혀 더 못 먹겠죠. 바로 이런 상태, 대화의 상대로 간주한다? 안한다? 일체 우리를 대화의 상대로 간주해 주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영생이고 이게 구원이에요. 꼼지락 꼼지락 우리가 입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여! 해도 그런 것을 일체 주께서는 그것을 덮어버려요. 이불로 덮어 버려요.
구원 받은 사람은 특징이 있어요. 그것은 구원 받게 된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구원받게 된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다만 내가 아는 것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지 어떤 식으로 구원받았다는 방법에 대해서 나는 놓쳐버리고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나 모르게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것을 알아서 뭐 할 건데? 그것을 알면 안돼요. 알면 구원에 대해서 자기 값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자기 기여도를 찾아서 그것을 끄집어내서 자기 자랑꺼리로 삼을 수가 있어요.
일방적으로 덮쳐버리면 남들 앞에서 구원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자랑하죠. 나, 주님이 와서 완전히 인간 말 종으로 전락했어! 완전히 나를 짓밟아 버렸어! 지금 자랑하는 것인지 않으면 불평하는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진짜 주님 자랑이죠.
주님이 와서 나를 짓밟았다는 거예요. 이게 어디서 돈을 좋아해? 짓밟아 버렸다는 겁니다. 우리 같으면 좋은 게 좋다고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에요. 앞으로는 돈은 월 25만 원 이상은 쓰지 마시고 24만원 쓰면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 25만원 이상 쓰면 돈 사랑하는 것, 이렇게 좋게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돈 일만 악의 뿌리라고 아까 디모데전서 6장에 나오잖아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해 놓고 여기에 액수가 나왔습니까? 안 나왔습니까? 액수가 안 나왔죠.
이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이 대목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적습니다. “단절된 윤리”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여기 10절에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딱 보는 순간 사람들은 뭐라 생각하느냐, 생활비 빼고 욕심내는 것은 욕심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런데 재벌회사의 생활비가 한 달에 2,500만원이에요. 그래서 2,499만원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게 되고 2천5백만10원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되고 이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그 순간에서 자기 정당함이 자기 행동이 딱 턱걸이 할 수 있는 기준을 누가 만들었어요?
본인이 그렇게 정해 버린 거예요. 단발성이에요. 그런데 그 재벌이 하루아침에 망했습니다. 망하고 난 1년 뒤에 생각하기를 돈을 사랑하는 것은 하루 소주 한 병 마시는 것은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되고 두병까지 마시게 되면 그것은 욕심으로 이렇게 바뀌었어요.
전에 2500만원하더니 왜 갑자기 소주 한 병으로 줄었어요. 남들 보기에 대단한 겸손이죠. 그런데 그것도 단발성이에요. 아까 기준 사례와 연결됩니까? 연결 안 됩니까? 이게 단절되어 있죠. 인간의 모든 윤리는 단절성이에요. 왜? 순간순간 자기 잘남을 기어이 포기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아직도 나는 양심이 살아있고 아직도 나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네가 아직도 네 속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내가 말씀을 준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이해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왜? 누가 뭐래도 내 양심은 내 최후의 보류, 나의 의는 그것이 나의 자존심이고 나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존재의 이유에요. 나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이고 누구든지 나는 나 때문에 사는 거예요.
내가 없다면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 더 이상 나는 나를 위해서 손을 놓을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는 게 아니고 누가 말씀을 대신 다 지키고 그 지킨 양상이 뭐라 했습니까? 십자가 죽으심이죠.
십자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빈방을 만들어요. 빈구석, 빈 구멍을 만들어요. 제가 이것을 부산 피 강의 하면서 이렇게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만약에 2014년 10월부터 예수님을 알았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때부터 동행한다고 하잖아요. 이제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나는 성화되고 말씀대로 살게 되고 말씀대로 살게 되고 전에는 성령 없다고 핑계되고 말씀을 못 지켰는데 이제는 성령 받았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는 이런 식으로 가는 거예요.
점점 착함을 자기가 나타내는 거예요. 그런데 착함을 찾아내는 방법이 뭐라 했습니까? 이게 단발성 단절된 윤리로 찾아내는 거예요. 어떤 경우라도 변명의 여지를 계속 자기가 만들어 내요.
단발성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이거 안 되죠. 그럼 단발성 말고 반대말은 뭡니까? 단발성의 반대말은 지속성이라는 거예요. 지속적으로 말씀에 맞춰야 되지 않습니까? 그 지속적인 것은 누가 할 수 있느냐, 찾아오신 예수님이 할 수 있어요.
그럼 동행이 뭐냐? 동행은 이런 겁니다. 우리의 동행은 우리 옆에 주님이 같이 손을 잡고 같이 가는 거예요. 이것을 우리는 동행이라 하는 겁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했죠. 부부가 같이 동행한다고 결혼을 동행이라 하는데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부부가 한마음 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냥 동행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하는데 실질적으로 아내 마음과 남편마음이 하나된 적이 없습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세요. 너하고 평생을 살아도 네 마음 모르겠다. 이게 솔직한 거예요. 그러면 저쪽에서 미투합니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평생을 살아도 몰라요. 심지어 내 속에서 나온 자식도 무슨 마음으로 사는지 모릅니다. 왜 저게 중학교 들어가서 왜 반항하지? 그 이유를 몰라요. 그런데 자식도 남편도 모르고 아내도 모르죠. 그러면 본인은 본인 마음 압니까?
‘네가 나를 모르는데’ 그런 노래 있잖아요. 타타타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나도 나를 모르는데 네가 나를 알리요. 어떻게 자기 마음도 모르면서 어떻게 남을 압니까? 부부도 모르는데 주님의 마음을 안다고요? 몰라요. 동행은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동행은 주께서 우리에게 광산 갱도를 만들어 파고들어요. 그래서 여기에 구멍을 냅니다. 어떻게 하느냐 이 모든 말씀은 우리 안에 분명히 핵이 있어요. 그 핵 때문에 우리의 모든 행동이 결정이 되는 겁니다.
그 핵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히브리서 2장 14절 15절입니다. “자녀들은 혈육” 혈육, 신체, 몸체입니다. 모든 인간은 몸체를 갖고 있죠. 그 안에 핵이 들어있어요.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인간의 모든 신체는 죽음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도망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사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행동은 이게 죽음과 멀리 가는 태도인지 아니면 죽음을 유발할 수 있는 죽음에 접근하는 태도인지를 구분해서 죽음과 멀리 달아나는 식이에요.
왜 돈을 좋아합니까? 왜, 인기를 좋아 하고 왜 명예를 좋아하고 왜 친구를 좋아하고 혼자서 왜 외롭습니까? 이게 다 어디서 온 거예요? 우리 안에 핵이 있어요. 핵이라는 말에 적당한 말이 얼마 전까지 저한테 티눈이 있었어요. 티눈이 있을 때 아파요.
티눈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바르는 약이 있고 액체가 있고 밴드처럼 붙이는 게 있어요. 이전에는 바르는 약을 발랐는데 이번에는 붙여봤어요. 10일 지나고 뗐어요. 떼니까 화산에 분화구처럼 시커멓게 구멍이 나버렸어요.
티눈이 있을 때 티눈 있는 그 주위가 살이 전부 다 누구의 살이냐, 누구의 힘줄이냐? 내꺼에요. 내건데 티눈을 제거하고 보니까 내꺼는 맞는데 떨어져 나가야돼요. 그럼 떨어져 나오는 구멍은 어떤 구멍이었냐?
전에 내거라고 착각했던 그것이 있던 현존의 자리였어요. 주께서 말씀으로 와가지고 뜯어내고 구멍을 만든 그 자리가 전에 우리가 마귀를 오야 봉으로 모시고 살던 오야 봉이 우리한테 해 준게 뮙니까?
너는 신이다. 너 인생은 네가 책임져야 돼! 너 죽으면 끝나는 거야, 네가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든 너는 살아야 돼! 너 죽어서 나중에 지옥가면 안되잖아! 천국가야지!
이게 오야 봉이 우리보고 계속해서 행위를 동요한 거예요. 너는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야고보서 2장을 보지도 못했나? 그거 있데……. 이렇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행위가 있어버리면 믿음은 제거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아셔야 됩니다. 야고보서의 말은 믿음에 합당한 행위이지 행위가 믿음을 대체하는 게 아니에요. 절대로 행위가 믿음을 대체할 수 없어요.
믿음을 구체와 시키는 행위입니다. 그게 뭐냐,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쳤고 기생 라합은 거짓말한 거예요. 인간이 행함을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마귀가 아까 네 번째, 예수님을 모독하는 재미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다 이루심을 웃기네! 하는 식으로 모독하는 식으로 행동하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내가 아무리 못나도 나를 인간 취급도 안하고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구원해 버리면 나는 그러면 천국 가서 내 주장을 못 피잖아! 그럴 것 같으면 그렇게 재미없으면 나는 천국 안가고 지옥 갈거야! 왜? 내 주장이 살아있으니까
내 자존심이 살아있는 곳, 그곳을 가고 싶어 해요. 천국에 가고 싶은 것이 아니고 말은 천국이고 지옥이고 다 떼어 버립시다.
당신은 어디 가고 싶습니까? 나를 인간 취급하지 않는 망하게 하는 곳에 가고 싶다고 하는 이런 인간은 없어요. 나를 빛내는데 가고 싶다. 이러잖아요. 그 빛나는 데가 안에 티눈이 있어요.
악마가 주인공으로 있는 그 나라가 우리를 신으로 인정해 주는 그 동네입니다. 왜? 선악과 따먹을 때 네가 신처럼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아담아! 네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 너는 완전히 쪼다 되는 거야! 너는 끝났어! 너는 죽어!” 이러니까 아담이 따먹어요? 하와가 따먹었어요? 아, 나 인간 안 돼! 나 죽어 마땅해! 그래서 따먹었습니까?
제 말이 맞아요? 이게 아니잖아요? 뭐라 했습니까? 네가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진다고 했죠. 그러면 그 마귀의 말은 무슨 뜻입니까? 지금 너는 눈이 어둡다는 겁니다.
너는 더 위대해 지고 절대자가 될 수 있는데 왜 기회를 놓치고 있느냐? 저 선악과 말이야? 그것은 네가 신처럼 될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협박조로 이야기한 거지, 따 먹으면 죽는다. 그것은 너희들도 하나님처럼 될까봐 하나님이 시기해서 그래서 그렇게 못 따먹는 거지!
금지된 것을 듣는 순간 우리 욕망은 금지된 그 건너편을 향하여 미사일 7발을 날릴 수 있습니다. 북한 군사들한테 미사일을 날리게 되어 있어요.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그 방향이 있어요. 그 방향은 바로 내가 신이 되는 곳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되어 있어요.
모든 행동이 그래요. 이 행동해서 내가 신이 되는데 얼마나 보탬이 되는가?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만나고 저 사람을 회피하고 이 사람을 만나면 내가 신이 되는데 내가 위대해 지는데 보탬 되겠다! 생각해서 그 사람을 만나고 저 사람은 멀리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내가 신 되는 것에 방해 하는 자는 내가 용서치 않으리라! 이것은 임금 이야기가 아닙니다. 조선 시대 때 임금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이 말씀은 언제 누가 어떻게 지킵니까? 이 말씀은 누가 이미 지켰습니다. 지켰고 그러면 우리는 안 지켰잖아요? 우리는 안 지켜야 되죠. 왜 안 지켜야 되는데? 우리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우리는 못 지킨 값을 해야 돼요.
우리는 저주 받아야 마땅한데 이것을 왜 지켜요? 주께서 왜 추방했습니까? 오지 말라고 생명나무 따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 주님의 취지 잖아요. 주님 기 좀 살려 줍시다.
아이고, 오지 말라고 보냈는데 왜 자꾸 가려고 해요? 천국 오지 말라고 하는데 우리가 왜 가요? 말을 지독히 안 들어요. 오지 말라고 막아놨는데 그것을 왜 자꾸 들어가려고 하는 겁니까?
들썩 들썩 마귀가 티눈의 핵이 되었어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거기에 가 있잖아요? 지금 변화 산에 보니까 모세와 엘리야는 주님과 같이 아주 신이 났어요. 변화산 천국 오니까 모세와 엘리야 이야기 하고 그들은 어떻게 갔습니까?
그들은 주님이 새로 만들어서 가는 거죠. 어떤 것으로? 주의 사람으로, 주의 사람으로 개입되는 것을 주님의 행함이라 하는 겁니다.
주의 행함이 들어갈 자리는 빈방이에요. 빈자리입니다. 어떤 자리? 우리의 모든 것이 빠져 버린 자리, 그 빈자리를 주님이 채워서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빠져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뭐라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라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뭐라 했습니까? 내가 죽는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했죠. 그 세상은 세상에 속한 자기 택한 백성의 죄를 이야기하는데 자기 백성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을 때 그거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그냥 죽을 때 이미 하나님 앞에 합당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합당한 죽음이라 것을 어떻게 압니까? 사흘 만에 부활했으니까 알죠.
누가 부활했어요? 주님이 유일하게 인정했기 때문에 사흘 만에 부활시킨 거예요. 부활시켰다는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말씀에 부합되는 죽음이라는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부합된 죽음을 뜯어보면 누가 정당하다는 말입니까? 택한 백성은 죽어 마땅함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님이 보시기에 정당한 거예요.
우리만 삐져있어요. 나를 왜 죽이십니까? 우리만 삐졌지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서 이미 우리는 죽어 마땅한 것은 땅땅땅 이미 결정 난 사항이고 그게 합당한 조치다 이 말이죠.
지금 우리가 뭐가 문제이냐 하면 우리가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직 안 죽은 것처럼 살려고 설쳐 된다는 것이 이게 자꾸 문제가 되는데 그거 살기 위해서 그냥 삽니까? 어떤 행동을 할 것이고 행동에다 의미를 줘요.
행동에 의미를 준 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아요. 그것을 다 끌어 모아서 우리의 제일 깊은 곳에 집어넣어요. 우리의 찬란한 역사의 씨앗으로 보관을 해 놔요.
22살 때 이런 일했고 35살에 했고 37살 때는 내가 유엔에 파견해 가서 에볼라 치료하는데 가서 흑인들을 위해서 무상으로 내가 치료했고 42살에 유엔에 또 가서 뭘 했고 그런 게 다 있다니까요.
한국에 돌아와서 주위에 가난한 사람 도와주고 노숙자를 돌보고……. 이게 우리 역사 속에 있어요. 해 봐야 들어간지 알죠.
여러분 버전으로 이야기할게요. 우리 자식이 7살 때 내가 학교 다 보내고 쟤를 위해서 뭐든지 하겠다. 해서 9살부터 영어 학원 보내고 헤밍웨이 원서 펴놓고 가르치고 12살 때 수학 과외선생 잘 붙여서 경시대회 잘 됐고 걔가 의사된 것이 자기 덕이 아니고 다 내 덕이야!
이미 찬란한 역사가 우리 속에 하나의 핵이 담겨 있다니까요. 네가 결혼해서 나 몰라라 하면 너는 호래자식이다. 벌써 압력부터 넣어주고 시작하는데 뿐만 아닙니다.
이 교회에 꽃꽂이 누가 했고 피아노는 누가 기증했고 교회 처음 전세금은 반은 내가 냈고 이런 게 있다니까요. 또 목사는 내가 설교 잘해서 몇 명 모이고 이게 다 있어요.
그 인간이 가고자하는 거기가 어디 입니까? 그것을 살려주는 곳에 가잖아요. 그게 천국입니까? 그게 자기 자랑하는 곳이 천국입니까?
오늘 본문의 핵심이 이겁니다. 이 이야기를 누가 하셨느냐? 두 번째 누구 보고 이야기했느냐? 우리보고? 아니! 너희는 죽었어! 너희는 죽었어요. 죽은 자에게 이 말씀 주는 법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분들끼리 이야기해요.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셨고 예수님이 이 말씀을 받았고 그 예수님이 죽었던 그 자리에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질 사람들이 있어요.
어떻게? 이 말씀을 완성된 상태로서 그 사람의 빈자리에 채워지게 되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디모데전서 6장을 지킨 사람으로서 의인이 되어서 천국에 가게 됩니다.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하실 때 천사가 묻죠. 당신은 천국 와서 어떻게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뭐라 해야 됩니까? 너 어디서 왔냐? 대구에서 왔어! 이러면 안 됩니다. 저 예수님의 피로 흰옷 입고 피로 씻어서 왔습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계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너 어디서 왔느냐? 어린 양의 피로 씻어 왔습니다. 이것은 미국이냐 나이지리아냐 관계없어요. 신앙생활에 아무 지장 없습니다. 북한이냐 중국이냐 관계없어요.
직업도 상관없어요. 백수하다 왔지? 이런 것도 묻지 않아요. 사장이었냐? 이런 것도 묻지도 않아요. 어디서 왔느냐? 묻는 질문 이것 딱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의 피로 씻어서 왔습니다.
주의 피의 능력으로 나한테 쳐들어 왔고 나를 갱도 탄광 파듯이 팠고 파면서 나는 내가 이 정도로 우상 숭배자인지를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 50년하고 교회 충성 다하고 했지만 그 모든 것이 전부 다 어느 한 순간도 나를 위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고 나는 더욱더 우상숭배자로 굳게 하기 위해서 더욱더 단단히 하기 위해서 성경말씀에 애를 쓰면서 심지어 온갖 희생을 다하고 순교를 각오하면서 나는 우상숭배자로 거듭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께서 그 우상숭배가 모여 있던 창고에 쳐들어가서 거기에 폭탄을 장착해서 그것을 폭파시켜서 그것을 완전히 뻥하고 화산의 분화구를 만들어 뻥뚫렸어요.
완전히 다 들어 내 버렸어요. 티눈 빼듯이 말입니다. 티눈 빼고 난 뒤에 제 소감은 참 시원했다! 그러면 그 전에는 어땠습니까? 움직일 때 마다 아팠어요. 스트레스 받았습니다. 꼭 우리네 인생하고 똑같아요.
우리가 아파요. 스트레스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려고 하는데 세상은 나를 죽이려고 해요. 그러니까 그것을 이겨내고 또 기어이 월급 챙기고 살려니까 진짜 속상해서 못 살겠어요. 그게 힘들었어요.
그런데 티눈 빼내고 난 뒤에는 주님께서는 네가 몇 년 살았냐? 네가 한 달 월급이 얼마냐? 아파트 몇 평이냐? 그것을 일체 묻지 않는다는 것, 너 어디서 왔지? 우리는 정답 이미 알아요. 짜고 치는 고스톱입니다.
너 어디서 왔지? 묻거든 그때는 이렇게 대답하라고 짜고 치는 고스톱입니다. 주의 피로 주께서 저를 망쳐놨잖아요. 피로 주께서 저를 죽인 놈을 또 죽여 놨잖아요. 그렇지 그렇다면 네가 자랑할 데가 어디 있지? 아예 없지요.
천국 가서 자랑할래? 안할래? 천국 가서 주님만 자랑하죠. 면유관은? 주께 반납하죠. 이게 바로 천국입니다.
오늘 낮에 안양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그것을 아예 뺏지를 만들어서 안에 문신처럼 새겨버리세요.
내가 지키는 것은 신처럼 위대해 지는 나지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채찍의 맞음이고 아팠고 찢어지고 상처입음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상처를 뺏지로 만들어서 아예 몸 안에 박아 놓으세요.
수시로 보면 잘난 척 하다가 이게 또 우상숭배자구나!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시는 그 작업을 성령께서 그렇게 해 주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딤전 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할 때 우리의 반응은 ‘여기 누구 아는 사람 있어요?’ 일단 나는 아니고 ‘목사님, 누구에요? 밖의 누구에요? 나 아닌데’ 주께서 ‘너야! 나 아니라고 하는 바로 너야!’
왜, 나는 내가 아니라고 할까요? 우리는 말씀이 될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없습니까? 구멍이 뚫렸거든요.
말씀대로 살아서 저장고가 폭파 돼 버렸어요. 이미 허락도 없이 주께서 십자가 능력으로 쳐들어와서 최고의 여리고성 본부를 폭파시켜 놨어요. 이제는 저장할 내 거룩하고 내 고상한 것을 쌓아 모을 곳이 없어 졌어요.
내 영혼이 없어요. 죽은 자가 무슨 영혼이 있어요? 내 영혼이 없습니다. 부자 농부는 뭐라 했습니까? ‘내 영혼아 내 창고 지어 놨으니까 든든하지?
한번 봐라, 이제 한 50년 먹고 살겠다’ 할 때 밤에 몰래 토끼 발을 해 가지고 들어가 주께서 그 영혼을 데려가게 되면 아침에 살해된 시체가 되고 배 조사해 보니까 뻥하고 구멍이 뚫려있고 총알 맞은 것처럼 구멍이 뚫려 누워있고 창고는 그 대로 있고 옆집이 와서 주인 없지요? 다 가져갔을 때 저 창고의 곡식이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 어리석은 부자야! 저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나님의 구원방법을 왜 아직도 모르느냐? 왜 그래요? 너를 위해서 하는 그것에 동조하는 방법이 아니고 너를 위해서 하는 그것이 바로 악마가 그렇게 그 짓 하는 악마를 겨냥해서 그것을 후벼 파는 식으로 이제는 너를 위해서라는 그것 자체가 우리한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혹시 이 중에 이거 찍은 사람 있습니까? 목사님? 인내했어요? 인내 해 볼 랍니까? 지금 까지 견뎠어요. 더 어려운 것 줘봐요?
우리는 이 세상에 인내하지 못합니다. 지금 까지 인내한 것은 견딜 만 해서 한 거예요. 어떤 천하의 유혹도 결국은 자기 몸을 치니까 앞에서 원망이 끝도 없이 계속 나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어떻게 했습니까? 주둥이를 탁 닫아 버렸어요. 욥이 하는 말이 유구무언입니다. 진작 그랬어야죠. ‘왜 저를 낳았습니까?, 저는 나쁜 짓도 안 했는데 왜 벌주십니까?’ 입만 벌리면 막 나와요. 그런 식으로 주께서는 갱도를 파십니다.
네가 몰랐던 거, 사건으로 말씀을 주니까 내가 나만 챙기고 있는 인간인 것을 주님 앞에서 쏟아놓는다는 이것이 바로 이미 구원 작업에 참여된 사람의 행복입니다.
영광이에요. 주님 앞에 모든 것이 강탈당한다는 이런 혜택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면 아무나 그런 혜택을 안 줍니다.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가 없어요. 없으니까 우리가 어떤 난관에서 이겨내야지 하고 용기를 내면 돼요? 안 돼요? 내면 안 됩니다.
‘뭐 주께서 주신 것인데 할 수 없지 당하라면 당해야지’ 이것을 가지고 인내라고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랑이라 하고 그것을 가지고 믿음이라 하고 그것을 가지고 소망이라 해요.
그러면 옆에 사람들이 ‘아이고 김집사님, 왜 그렇게 어려움을 당해? 다른 사람은 원망할 텐데 어떻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열매를 맺습니까?’ ‘제가 했습니까? 주님이 하셨지!’ ‘아이고 또 겸손까지?’ ‘아이 겸손 아니고 진짜라니까’
진짜에요. 진짜로 그렇다는 거예요. 마치 대청마루에 누워있는데 앞마당에 있는 정원수가 햇빛이 나면서 그늘이 지잖아요? 그 그늘이 저녁이 돼서 대청마루에 있는 내 몸에 흔들리는 정원수의 그늘이 비췄다면 그것을 보고 다른 식구가 ‘네 몸에다가 뭘 그렇게 문신을 새겼어?’ 하면 뭐라고 말합니까?
문신이 아니고 정원수의 그림자가 비추는 거잖아요? 우리는 하나의 습자지라니까요. 습자지고 도화지고 주님의 인내와 소망과 사랑이 우리를 덮치니까 우리는 환란과 곤고 가운데서도 주님의 인내가 나오지 나의 인내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짜증밖에 나올 것이 없어요. 주님의 인내, 주님의 사랑, 주님의 온유가 나오죠. 그럴 때 그것은 나의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싸우라! 싸워 보실래요? 아저씨! 이런 게 아니거든요. 싸워라! 명령이잖아요. 이 명령이 왔다. 이 명령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누가 지켰습니까? 예수님이 지켰죠.
그러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가지고 그냥 갖고 있습니까? 누구에게 덤빕니까? 우리한테 덤비죠. 우리한테 덤비면서 우리 속에서 나를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모든 것을 전부 다 빼내서 동강내고 다 처리해 버리죠.
이게 어디서 너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해? 어디서 선한 싸움을 싸워? 어디서 건방을 떨어? 내가 다 지켰는데 이게 지킨 거야? 다 쳐버립니다.
그러면 마지막 막장까지 가죠. 가서 턱하니 주님의 선한 싸움이 거기에 장착되어 버리면 그 사람은 선한 싸움을 싸운 사람이 돼요. 누가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살아서 다 해 버렸으니까요.
오늘 강의 쉬워요. 나는 못한다. 그래서 영생 얻은 겁니다. 내가 못하게 되어서 영생 얻은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이왕 못 할 것 내가 안 하겠습니다. 그러면 안하면 영생 얻습니까? 못 얻습니까? 안하면 영생 못 얻어요. 왜? 안하는 것도 행함의 일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하는 방법으로 기어이 영생을 얻어내고자 꼼수를 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본색을 드러내야 되는데 본색을 안 드러내고 내가 아무 것도 안하고 영생을 얻어야지 하는 것은 본색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본색은 내가 반드시 내 일은 내 인생 책임자는 바로 ‘나’라는 것이 마귀가 우리에게 심어준 습관이고 본성입니다.
그것을 말씀 앞에서 티를 내셔야 돼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선한 싸움을 싸우세요. 사도바울하고 똑같이요. 싸우시고 깨지세요. 어디서? 십자가 앞에서
어디서 어쭙잖게 흉내를 내? 하고 지적질 받으세요. 성도입니다. 하나님 사람은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제가 강의 처음에 했죠. 인간은 반드시 반응을 나타낸다고요.
반드시 말씀에 반응을 나타내요. 그 반응은 숨겨져 있는 나의 우상 숭배적 요소의 반응입니다. 주여! 이것 지키면 지난번에 부도난 것 빨리 보상 해 주시렵니까? 이것 지키면 우리 애 성적 올리게 해 주시렵니까?
그렇다면 내 아이를 위해서 뭘 못할까? 주여! 기도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말입니다. 반드시 이것 하게 되면 이것 해 주시겠습니까? 저것 하게 되면 이것 해 주시겠습니까? 조건부로 하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심상이에요.
그래서 칸트는 그것을 알고 하는 말이 조건부로 하지 말고 무조건하라고 한 겁니다. 그것을 칸트의 정언명령이라 합니다.
조건 없이 해야 하기 때문에 해야 되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칸트가 복음을 몰라요. 이미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왜 인정을 하지 않을까요? 신이시여!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습니까? 아직도 쫓겨난 주제에 구원을 논하고 구원을 언급한다는 자체가 자기가 지금 어느 처지에 있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 안 하려고 하는 거예요.
칸트가 네 번째 악인 같아요. 악마와 함께 네 번째 악인 같아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재발 이것만큼 시비 걸지 마세요! 라는 것이 확고한 것 같아요. 이 정신이…….
그렇게 확고해 버리면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시끄러워요. 왜 각자 누구 자랑한다고? 자기 자랑한다고 면류관 벗어서 주님 앞에 던지는 것이 아니고 면류관 벗어서 광내기 바빠요. 후-후-후- 막 광내요.
목사님 어떻게 그렇게 잘 압니까? 어떻게 그래 잘 알게 됩니까? 교회에서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데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꽃꽂이 한번 해 보세요. 꽃꽂이 해 놨는데 철없는 애가 근처에 오면 ‘어이 저리가! 내가 토요일 밤에 10시까지 한 건데 어이 저리가! 저리가!' 내가 한 것에 흠집을 내?
실제 있었던 일이에요. 성가대 지휘자가 지휘를 하는데 테너 하나가 할렐루야하고 같이 나와야 되는데 하-할렐루야 이렇게 나와 버렸다 말입니다. 교회 남성선교 장로 석에서 성가대 테너 제일 먼저 튀어 나온 사람 누구야? 네, 저거든요.
지금 도대체 여기 교회가 뭡니까? 자기의 연습량에 합당한 완벽함을 자랑 질하는 곳이에요? 아니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곳입니까? 교회가 어느 쪽입니까?
아이 이골이 났었어요. 그게 다 동일화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있죠. 교회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각각 자기의 자랑꺼리를 모아 놓은 거예요. 그리고 다 이야기합니다. 우리 이미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렇게 사랑과 온유가 있으니까 영생을 얻었다고 당신은 어떤 인내가 있는데? 시어머니가 교회 가지 말라고 했는데 머리 쥐 뜯어도 기어이 기도해서 교회 갔다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렇게 했습니다. 머리 쥐 뜯겨라! 그러면 천국 간다. 이렇게 했을 거예요. 너 어디서 왔니? 머리 쥐뜯겨서 왔습니다. 이러면 천국 안 넣어줍니다.
너 어디서 왔느냐? 예수의 피로 씻음 받아 왔습니다. 그 정도로 네가 악인이야? 예, 그 정도로 악인입니다. 어떤 악인데? 머리 쥐뜯겼다고 나는 그걸 내 인내라고 여겼을 정도로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었습니다.
그 다음 12절 봅시다.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내가 부르심을 입었고’ 보세요. 영생을 취하라 부르심을 입었죠. 누가 불러주십니까? 주님이 불러 주시죠. 주님이 불러 주셨는데 영생을 못 얻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불러 주셨다면 불러 주셨을 때 마지막 마무리까지 영생 취하는 것까지 손에 쥐어 주기 위해서 불렀지 불러 주기만 하고 네가 손이 짧구나! 가거라! 이런 중간에 흐지부지한 부르심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끝입니까?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끝입니까? ‘그 얻은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마무리까지 ‘이미 하셨느니라!’ 그 일은 우리 소관이 아니고 주님의 소관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옛날 자존심이 있던 자리에 말씀이 들어가야 돼요. 말씀이 자리를 잡아서 말씀이 스스로 완성된 그 폼이 우리를 통해서 발현되는 겁니다.
발현되는 것 알죠? 발그스름하게 빛이 나는 거예요. 발그스름하게 빛이 올라오는 거예요. 우리는 내 속에 나의 이질적인 것이 담겨있을 때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삶은, 뭐가 신앙이냐? 내속에 이질적인 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내 속에 뭐 이런 게 다 들어있어! 나는 절대로 내 행함 외에는 믿을 놈이 아닌데 왜 그것을 지적 하나? 십자가 왜 있지?
이 분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다면 그러면 나의 자존심을 챙기는 모습은 없잖아! 아, 나는 완전 다른 사람에게 쪼다 소리 듣겠네! 이런 느낌을 가져야 돼요.
내가 해도 지워지지 않는 목욕해도 지워지지 않는 문신 같은 것, 예수님의 흔적, 그것이 나의 모든 것을 정화할 때 그것이 바로 말씀이 완성된 예수 안에 속했던 사람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아! 라고 외치는 거예요.
뭐 똑같은 것 같은데, 저 말입니까?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은 있다는 겁니다. 왜 주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분명히 그런 사람은 있다는 겁니다.
너를 두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보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반드시 영생을 취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입어서 그 혜택을 입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에게 이 편지가 전달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본문에 주신 편지입니다. 따라서 이 편지는 우리가 행함에서 끝났다고 잊어버리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이 편지가 우리에게 지적질 해야 돼요. 왜? 그래야 우리의 중심은 늘 거덜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말씀이 주인공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