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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디모데전서 5:1 / 기쁨의 폭발 / 141114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디모데전서

디모데전서 5:1 / 기쁨의 폭발 / 141114

정인순 2014. 11. 19. 10:47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김창길

 

서울 의존교회141114a (기쁨의 폭발)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51절 할 차례입니다.

딤전 5: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하고

딤전 5:2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하라

딤전 5:3 참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여기서 나오는 늙은이 젊은이 할 때 여러분들이 사도 바울의 편지하고 예수님의 뜻하고 일치된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사도 바울의 뜻이 또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까? 일치될까요? 다를까요? 일치되는 겁니다. 따라서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새로운 형제, 새로운 가장을 설명할 때는 순서가 이래요. 예수님께서 자기 가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먼저 생각해 봐야 됩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인데 로마서에서 이야기하기를 가족이란 혈육에 속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그 혈육 자체가 둘로 나눠집니다. 둘로 나뉘어졌다고 했는데 저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서 두 노선으로 나뉘어졌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성경 로마서를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하나는 사라, 또 하나는 하갈로 이렇게 나뉘어졌잖아요? 나뉘어졌을 때 이 사라와 아브라함의 관계가 그냥 혈육적인 애기만 낳는, 아내를 임신해서 자식만 낳는 그런 일상적인 아버지의 관계이냐 아니면 아브라함이 품고 있는 어떤 다른 놀라운 뜻이 따로 있느냐 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거든요.

 

베드로전서에 보면 아브라함을 뭐라 했느냐 하면 놀라운 이야기가 있어요. 베드로전서 36절에 의해서 보면 사라가 그냥 아브라함의 아내가 아니고 아브라함의 종이 되죠.

 

벧전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그리고 아브라함을 뭐라고 칭합니까? 주님이라고 합니다. 그냥 보통 부부가 아닙니다. 특수한 부부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특수성이 있는데 저는 이것을 여기서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떠야한다. 경상도는 단술이라고 하는데 식혜에 잣을 넣으면 뜨지요. 물에 뜨듯이 뭔가 뜬다 이 말이죠. 일상적인 혈육관계에서 뭔가 울어 나오는 게 있어요. 뭔가 떠야 되어 있어요. 뜨게 되면 어떻게 되게 되느냐 하면 육은 육대로 이해하고 영은 영대로 이해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자기 가족을 버리는 게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똑같이 사는데 뭔가 식혜 위에 잣처럼 뜨는 게 있어요. 같은 인생을 사는데 뭔가 달라요. 뭔가 다른 구석이 떠오르는 게 있어요. 떠 올라오는 게 있어야 된다 말이죠. 왜 그러느냐, 바로 성경 자체가 그런 모델을 제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고 그러면 믿는 자라면 아브라함처럼 그런 현상이 일어나야 하는데 아브라함은 자기 가족을 통해서 일반적인 가족 말고 그 외에 이상하게 기이한 현상이 새로운 관계가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떠오르는 것이라고 했는데 떠오르는 이것을 떠오르는 새로운 어떤 관계가 있어야 됩니다. 관계가 있어야 된다면 사라는 그 당시에 누구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까? 사라는 베드로전서 36절에 보면 자기 남편을 가지고 뭐라 했다고 했죠? 주라고 했죠. 그러면 이 베드로전서에서 언급하는 것은 오늘날 교인들아, 너희들은 누구 때문에 구원받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우리는 누구 때문에 구원받습니까? 주님 때문에 구원받죠. 이것을 뭐라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 하면 이것을 중보자가 작용하는 실제적인 현실이라 보면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지금 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추려보면 여러분들이 사시면서 무엇이 나와야 되느냐 하면 중보자가 나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 그러한 증거나 그런 효력들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야 되는 겁니다. 내 행동? 아니에요. 내 태도? 아니고 나의 있다는 이 자리, 관계를 통해서 내가 여기 있음에 내가 여기 있어서 착한 일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여기 있다는 자체가 누구를 어떤 특이한 관계, 떠오르는 관계에 의해서 내가 여기에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는 그런 관계성을 내놔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 관계성이 비춰져야 돼요.

 

우리는 그냥 교회 나와 성경공부하고 성경 지식을 알게 되면 그 지식이 나를 구원한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나는 그대로 있고 지식만 더 추가 될 뿐이. 그게 아니고 내가 소유한 지식 말고 내가 지식을 얻기 이전에 나로 하여금 뭔가 떠오르게 하는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그 무엇이 있다 말입니다. 그 무엇은 내가 뭘 행하기도 전에 주께서 이전부터 나한테 효과와 효력과 능력을 가미했기 때문에 나도 그것을 내가 했습니다. 라고 말을 못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돼요.

 

주여, 이번 일은 제가 했습니다. 하는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나도 이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습니다! 는 그 무엇이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그것을 저는 그냥 쉽게 떠오르는 관계라고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리고 그 예를 들서 아브라함이 사라와 결혼했는데 우도 같으면 여보라고 불러야 되는데 사라가 자기 남편보고 뭐라 합니까? 주여 라고 한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주례사 한다는 것은 큰 모험인거예요.

 

, 여러분 부부끼리 오셨습니까? 이제 남편을 향하여 주님이라고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이러면 큰일 날 소리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정에서 갑과 을의 관계가 어떤 관계입니까? 돈 벌어주는 쪽이 갑이고 돈 못 벌면 을이 되는데 남편이 퇴직해서 아랫목에 앉아 있을 때 주라고 부를 수 있겠어요? 돈도 못 벌어주는데 그것은 무리한 요구이죠.

 

벧전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그냥 주 정도가 아니고 베드로전서 36절에 보면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이 무슨 희한한 관계가 다 있습니까? 그 희한한 관계를 저는 뭐라 했느냐, 떠오르는 특이한 관계라고 했죠. 그 관계는 사라가 그렇게 되고 싶어 한 것도 아니고 아브라함이 그것을 의도 한 것도 아니고 그것은 아브라함과 사라 관계, 아브라함을 통해서 미리 일찍이 중보자적인 그런 효력을 하나님께서 내도록 그렇게 그 사람들을 붙들고 사용하신 거죠. 복음에 순종하는 모든 성도들이 아브라함에 소속된 딸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면 주께서는 여러분을 통해서 뭐가 삐져나와야 됩니까? 중보자적인 속성이 여러분을 통해서 보여 져야 돼요. 그러면 중보자적인 속성이 무엇입니까? 물으면 저는 이렇게 합니다. 목사님, 중보자적인 속성이 우리가 영의 생활하는 그것을 중보자의 속성입니까? 라고 물으시면 저는 아니요 라고 답변하죠.

 

그럼 뭡니까? 중보자적인 속성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이미 중보자 속성이 끝났습니까? 아니죠.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태어났을 때 그 자체로 중보자의 기능을 전부 다한 겁니까? 아니죠.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을 때 그게 중보자로서 마감입니까? 아니죠. 예수님의 중보자 기능이 뭡니까? 어디 까지 가야 돼요? 십자가 달리시고 죽어서 사흘 만에 살아나야 이게 중보자적 기능이죠. 그렇잖아요? 예수님의 생애 때 그렇잖아요.

 

그렇다면 우리 몸을 통해서 나오는 중보자적 기능은 뭐냐? 그것은 바로 육이 뭐며 영이 뭐며 둘 다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주께서 내가 착한 일 하기 전에 선한 일하기 이전에 뭔가 나에게 작용을 했었는데 뭔가 손을 댔었는데 손을 댔다는 흔적이 아브라함처럼 중보자적 기능으로서 밖으로 나온다면 그 중보자적 기능이 어떤 식으로 나오느냐 물으신다면 육이 뭐며 영이 뭐며 두 가지를 다 아는 거라 이 말이죠.

 

내가 영적 생활한다는 이것은 아니라고 했죠. 주여! 제가 영적 생활합니다. 이렇게 우기는 것은 그것은 주님의 특이성이 아니라 했죠.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 저 물위를 예수님 덕분에 걸은 적이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오병이어를 맛보았습니다. 또는 우리가 귀신을 쫓아냈는데 귀신이 떨어졌습니다. 그것으로 해서 그것이 주님의 성도 생활의 다라고 했습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12제자가 예수님의 특이성, 중보자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들은 필히 예수님을 배반해야 되고 예수님 곁을 떠나야 되고 떠날 때 사도 바울에서는 그것을 바로 육 된 요소, 육의 요소이죠.

 

그렇다면 예수 믿고 난 뒤에 이제는 가족과 따로 떨어져 살고 기도원에 기도 간다. 이게 아니고 현재 있는 가족과 그리고 교회 가족들에게 육적인 사람들이 하는 그 상황을 우리가 깊이 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우리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일반인이 살아가는 그 모습, 그대로 살게 하면서 거기서 특이성을 떠오르게 한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제가 지금 까지 길게 이야기한 거예요.

 

수녀 되기 위해서 어머니, 이제 저는 수녀니까 저를 잊으세요.’ 이런 게 영적 생활이 아니고 뭐 특이한 게 없어요. 뭐 우리가 특별이 할 수 있는 없어요. 그냥 사는데 어떤 생활을 하느냐, 육적인 생활을 하는 거예요. 육적인 생활을 하면서 그 하는 가운데 뭐가 배어져 나온다? 영이 배어져 나올 때 우리는 중보자적인 기능을 보여 준다 이 말입니다.

 

치매 걸린 부모님을 섬기는데 그 치매 걸린 부모님이 잘해 줘도 욕을 하고 행패를 부리고 욕을 어디서 배웠는지 뭐, 애들하고 치매 걸린 노인들이 이상해요. 욕을 배운 적이 없는데 애들이 욕을 하고 평생을 권사로서 교회에서 찬송하고 기도 하고 했는데 막상 치매 걸리니까 욕이 막 나오더라 이 말이죠. 도대체 그 욕은 성령의 역사인지 어디서 욕이 나오는지 그런 부모를 섬기면서 힘들어할 때 하나님께서 너 힘드니까 따로 기도 할 테니까 이 힘든 것은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너 혼자 기도 한다는 것이 그게 신앙생활 아니고 영적인 생활이 아니란 말이죠.

 

그런 부모와 함께 같이 섞여서 살면서 내가 얼마나 육적인가를 깨닫는 그것이 영적이다 말이죠. 제가 언제가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 세상을 초연해야 합니다. 세상이 없는 듯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듣고 지금 여기 신월동 한번 살아보죠. 지금 비행기 소리 나잖아요. 비행기 소리 들어보세요. 이게 사람이 가만히 듣나요? 짜증나죠. 돈만 벌면 이사 가야지 도저히 비행기 소리 때문에 못살겠다! 하죠. 그리고 아무리 초연하고 싶어도 이빨이 아프다, 잇몸이 흔들린다 하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데 지장이 많다 하면 인사돌 먹어야 소용도 없다, 이빨이 아파서 욱씬 욱씬 하는데 그것이 초연입니까?

애를 낳고 애를 키우는데 주여, 주여, 하고 마음의 평화, 내게 강같은 평화하고 있는데 애가 우는데 새벽 2시고 3시고 관계없이 마구잡이 울고 똥 싸고 하는데 그게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됩니까? 이게 어디서 똥 쌌어 하고 때리죠. 이게 초연이에요? 똑같습니다. 성령 받아도 전혀 달라질게 없어요.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아도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고 난리를 쳐도 세상은 전혀 바뀌지 않아요. 내가 성령으로 전도해도 상대방은 까딱도 하지 않아요. 까딱 거리는 것은 내 고함소리에 촛불만 흔들리지 그 사람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아무렇지도 않는 거예요. 아무렇지도 않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내가 특이함이 증명이 되는 겁니다. 내가 복음을 전했을 때 아무렇지도 않잖아요. 그런데 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은 말은 사실은 누구도 아무렇지 않아야 돼요? 이런 내용에 대해서 나도 아무렇지도 않아야 되는데 왜 나는 이것이 믿어질까? 이것이 나는 왜 믿어질까? 이상한 것은 내 속에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시여!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고 자꾸 밖에 있는 하나님보고 고함치고 항의 하고 대들지 말고 반대로 해야 돼요. 주여, 제가 왜 믿어지죠? 이렇게 기도 하시면 돼요. 이제부터 기도 할 것 없다고 저한테 달려들지 말고요. 하나님이여, 왜 이렇게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안됩니까? 이렇게 나 밖에 두고 항의 하고 대들지 마시고 반대로 기도해야 돼요.

 

이렇게 항의 하고 대드는데 왜 저한테 믿음 주십니까? 따질 내용을 잘 정해야 돼요. 따질 내용은 뭐냐, 믿음 없어도 되는데 지옥가도 되는데 왜 천국 가야 됩니까? 이것을 따져야지 왜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안되냐고 그것을 따지면 안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이 특이성이 내가 조작된 특이성입니다. 조작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성경에 많이 나오는 사건이거든요. 내가 뭐를 믿는다 할 때 내가 믿습니다! 할 때 그 믿음의 모델을 외부에서 찾아요. A타입, B타입, C타입으로 믿을까? 어느 게 나의 모델이 될까? 하고 모델을 찾아서 그 간격을 내 행함으로 메우려고 할 때 이게 바로 조작입니다.

 

본인이 모델인데 무슨 모델을 찾아요? 본인 자체가 모델인데 나 말고 또 무슨 모델을 줬습니까? 하나님은 내 구원의 모델을 나 말고 주신 적이 없습니다. 현재 이 몸뚱이 말고 주신 적이 없어요. 디모데전서 51절에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라고 했는데 우리는 여기서 또 다시 조작해요. 늙은이는 늙은이인데 돈 많은 늙은이, 그런 사람이 우리교회에 왔으면 돈 많은 늙은이, 돈 쓸 때 없어서 목사님 다 하세요. 이런 이야기하는 늙은이 그런 늙은이를 꾸짖지 말라고 하는데 꾸짖을 리가 있습니까? 감사할 마음이죠.

 

교회에 늙은이를 주되 꾸짖을 수밖에 없는 늙은이를 주신 거예요. 아이고, 나이 헛먹었네! 아이고 영감님, 젊을 때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젊은 때 행세를 해서는 이래서는 안 됩니다. 정말 젊은 아이들 같으면 제가 진짜 화내고 싶습니다. 정말 때리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내줘요. 왜 그런 사람을 보내 주느냐? 그런 사람을 보내줘야 디모데전서 51절의 말씀을 우리 힘으로 이루지 못하는 그런 육적인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을 증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라는 말을 이렇게 받아드리시면 수능 100점입니다. 늙은이를 너는 꾸짖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내가 보낼 것이다. 도저히 아버지한테 하듯이 하고 싶지 않은 늙은이를 너한테 보낼 터이니 너는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아비한테 하듯하라는 말을 비교해 봐라! 그러면 너는 늙은이를 꾸짖지 않고 구원하고 아비같이 하는 사람을 모델로 삼아 버리는 모델로 찾는 그러한 육적인 행동을 할 것이다. 네가 특이성을 조작하려는 시도 할 것이다.

 

그러게 바로 네게 숨겨진 너의 육의 모습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실 겁니. 그래서 성령 말씀은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주신 말씀이다는 것으로 정리하면 깔끔합니다. 어떤 말씀도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못 지켰죠. 그러나 예수님은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마태복음 12방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하실 때 예수님의 가족들이 왔어요. 왔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 여기에 예수님의 동생들과 어머니가 오셨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설교하는데 끼어든 거예.

 

제자들이 그런 소리를 한 것은 또는 궁중들이 그런 소리를 한 것은 예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했겠죠. 예수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이 육에 속한 것입니다. 육에 속해 줘야 육을 경유해야 떠오르는 특이한 관계가 떠오르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어머니, 동생들이 왔습니다. 할 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이고, 어머니! 여기 오셨습니까? , 저의 어머니입니다. 제 동생들입니다. , 우리는 모두 가족입니다. 이렇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문제가 일으키려고 해요. 왜냐 하면 육을 육 되게 하고 육에서 영을 떠오르게 하기 위해서 문제를 의도적으로 일으켜요. 주께서는 자꾸 문제를 일으켜요. 우리는 곱게 인생을 살려고 하는데 주께서는 곱게 살지 못하고 문제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라고 이야기했을 때 듣는 모친이 듣는 동생이 얼마나 기분이 상하겠습니까? 이 자리에 우리가 포맨인데? 이러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누가 가수야? 가수 없어! 이러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그렇지요? 송재원씨!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이 세상을 떠나야 됩니. 떠나지 않는 가족은 예수님의 가족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난 것은 맞는 이야기이고 세상이 예수님을 밀쳤다는 말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예수님은 이 땅과 어울리지 못하고 떠나 버렸어요. 주와 함께 떠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가족이 아닙니다.

 

따라서 오늘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늙은이 젊은이 여기나오는 과부, 모든 여자 모든 사람들은 몇 절에 나오느냐 하면 16절에 보면 딤전 5:16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 교회라는 용어가 나오죠. 교회가 뭐냐 하면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의 하나의 가족으로서 이 세상을 떠나야 될 자리에요. 떠나려면 뭔가 수소를 넣던지 질소를 넣던지 헬륨을 넣던지 뭔가 풍선이 뜨려면 풍선에 이질적인 요소가 들어가야 뜨잖아요. 풍선에 물을 넣으면 뜹니까? 안 뜨. 풍선이 공기 말고 다른 헬륨을 넣으면 뜨듯이 교회 자체가 지상에 발목 잡힌 것이 아니고 둥실 둥실 뜨려면 예수님의 속성, 떠오르는 예수님의 관계, 중보자의 관계가 중보자의 영께서 그 사람의 속에, 교회 속에 개입이 되어서 그래서 교회는 날마다 주님 계신 하늘나라로 점점 더 합치되도록 떠오르는 그런 현상을 보여야 되는 겁니다.

 

현대카드 cf에 이런 것이 있죠. 다 같이 길을 가는데 어떤 아가씨가 풍선 들고 가다가 갑자기 공중으로 막 올라가는 거 있죠? 그런 게 있어요. 같이 나란히 길을 걷다가 한 쪽이 풍선 들고 공중으로 막 올라가요. 떠오르는 거예요. 그게 교회에요. 같이 이 세상을 살면서 남들 다 똑같은 가정이고 세끼 밥 먹고 다 똑같아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차이가 없는데 마음은 자꾸 떠올라요. 마음은 집시 같아. 자꾸 뭔가 괜찮다는 생각, 떠오르는 것이 참 기쁘다는 생각이 자꾸 떠올라요. 이 특이성이 떠오릅니다.

 

그런 집단을 교회라는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집단을 교회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에서 가족들에게 하는 말이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점을 설명하면서 오늘 본문과 연결시켜 보겠습니다. 혈육과 관계된 여기입니다.

 

그래서 신약을 볼 때 항상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부터 먼저 들어가서 사도 바울의 편지로 나가야돼요. 바로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지 마시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그 통로, 그 노선을 따라서 사도 바울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야고보서를 봐야 돼요. 왜냐 하면 제자들이 일부로 그 당시, 그 위치만 하라고 제자가 아니고 오늘날 우리를 대표하거든요. 오늘날 우리들을 대표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있었고 제자들이 주님한테 말씀을 듣지만 막상 제자들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강한 세력이 있었던 겁니. 그것은 바로 세상 권세였거든요.

 

주님께서는 세상권세를 익히 아시고 말씀하는데 제자들은 나는 나다! 어떤 권세가 나를 지배해? 나는 그런 권세에 지배 받은 적 없어! 나는 당당해! 이렇게 오해하면서 주의 말씀을 듣다보니까 결국 그들은 예수님과 결별할 수밖에 없었던겁니다. 결별하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찾아왔잖아요. 결별하고 난 뒤에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육이 뭔지 알았고 찾아오시는 영의 관계 둘 다를 아는 거죠.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영적 생활은 뭐라고요? 육과 영, 둘 다를 아는 거예요. 영만 달랑 아는 게 아니고 육이 뭐며 영이 뭐며 둘 다 아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뭐만 알아요? 육도 모르고 영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모르죠. 왜냐 하면 무슨 내가 육이야? 나는 사람이야 이렇게 되죠. 다시 말해서 나는 아빠, 엄마, 나 우리는 가족이야, 그런데 주님은 그게 육이야!’ ‘아니야 우리는 가족이야’ ‘육이라니까 그게’, ‘아니 가족이에요. 그게’ ‘육이라니까 그게아 육이니까 교회 나와서 신앙 생활하는 모양이다. 그것은 해 봐야 영이 아니에요. 내 가족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육이란 말입니다.

 

제가 떠오른다고 이야기 했는데 떠오른다는 이야기를 다시 해 보는데 우리 가족은 세 명이다. 세 명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다 같이 교회가 되어서 떠오른다. 라는 생각을 하신다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 이것 자체가 육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을 떠오르게 하지 않아요. 육을 육 되게 드러내면서 그것 말고 떠오르는 게 있어야지 이 자체를 떠오르게 한다면 이 육이 가는 곳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 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이라는 생각 자체가 이것은 가족이 있을 때는 이게 육인지 몰랐죠. 이게 정상인줄 알았죠. 여러분, 다시 해 볼게요. 아브라함이 사라와 결혼할 때 우리는 부부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르고 사라는 또 아브라함의 딸이 되리라는 것을 그들이 예상했습니까? 예상 못했습니? 예상 못했죠. 뭔가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뭔가 어떤 일을 저질렀죠. 뭔가 어떤 낯선 일을 저지른 거예요. 그러니까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르면서 아브라함은 졸지에 그 당시에 중보자가 되는 겁니다. 주라고 해서 의시대고 까불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라고 부른다면 오히려 부담이 더 클 거예요.

 

아내가 남편보고 주님, 주님 이렇게 하면 남편은 다 도망갈걸요. 사모님이 한윤범 목사님 보고 주님, 하면 한윤범 목사님은 몸들 바를 모를 겁니다. 아브라함의 부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가족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본인이 원한 것도 아니고 아브라함과 사라가 육임을 드러내는 또 다른 측면 영적인 개입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 믿음의 가정이 되는 겁니다. 그 가정을 교회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아브라함과 디모데전서 그 사이에 마태복음 12장이 있는 겁니다. 12장이 뭐냐 하면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이것을 설명하는 대목이 왔습니다. 그 대목을 좀 더 깊게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여기 계시는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뒤에 있는 사람이 예수님, 당신의 가족, 동생과 어머니가 왔습니다. 할 때 이 사람은 지금 예수님의 동생과 어머니, 이 파트와 이 사람과 차이 난다고 봤죠. 차이난다는 말은 이 어머니는 예수님과 혈육적 관계에 있고 동생들 역시 혈육적 관계로 보고 다른 제자들이나 이 사람들은 각자 자기 가족과 자기 부모가 따로 있는 거예요.

 

육적으로 보게 되면 사실은 있는 각자의 가족에다가 추가적으로 예수님의 가족을 하나 더 추가 한 것뿐이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이 육의 기준을 주께서는 한꺼번에 날려 보내는 거예요. 누가 동생이고 누가 모친인데? 그 말, 거기까지 딱 들으면 여기에는 예수님의 동생도 없고 예수님의 모친도 없다는 거죠.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너희들 끼리 적용하는 그 혈육적 기준을 나는 너희에게 동조하지 않겠다는 나는 너희들과 같은 그런 기준을 나는 사용하지 않는 입장에서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맨트를 날리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그 설교를 들으면서 기존에 자기의 혈육적인 관계가 정당하다고 여기면서 이것도 하나님께서 인정할 걸! 이렇게 생각하면서 듣고 있는 거예요. 거기서 큰 차이가 나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의 모든 말씀을 효과 있게 하기 위해서는 이 기준을 틀어버려야 되고 이것을 부정해야 되죠.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라고 하시면서 하는 말이 여기 있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너희들이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다. 했습니다.

 

12: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그러면 예수님의 모친, 어머니는 예수님의 언급한 그 모친에 해당됩니까? 해당되지 않습니까? 해당되지 않죠. 내가 엄마다 하는 그런 기준은 더 이상 예수님한테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안 통하죠. 그 비슷한 예가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데 예수님을 잊어버려서 찾아다니는데 제가 지금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인데 영, 특이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 특이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특이성이 예수님의 특이성에서 끝나면 안 되고 오늘날 교회의 특이성이고 이전될 때 비로소 주님의 가족이라는 말을 지금 드리고 있는 거예요. 그 특이성이 뭐냐 물으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참석했는데 사흘 동안 찾았죠. 사흘 동안 찾았는데 못 찾았잖아.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났잖아요. 만났을 때에 하는 말이 내가 너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댓구 하는 말이 뭡니까?

 

2: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2: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어떻게 왜 나를 찾으십니까? 라고 물은 거예요. 왜 나를 찾습니까? 라고 물으신 거예요. 당연이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것은 아버지, 어머니가 당연이 알아야 되지요. 왜 찾아다닙니까? 혹여 여기 있을까? 저기 있을까? 내가 어디 있는가를 단번에 알아봐야지 왜 찾아다닙니까? 이 말이거든요.

 

우리가 이 이야기가 예수님만 해당된다고 흘려버리는데 아니에요. 이런 예수님의 가족이 교회에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들이냐? 내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이 내 형제이고 자매이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모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죠. ? 예수님의 아버지는 누구만 알아요? 예수님만 알아요. 다른 사람은 아버지를 몰라요. 그들은 하나님만 알지 그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니거든요. 인간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아버지는 서로 반대개념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때려죽일 때 그 죽음의 사건을 유발시킨 분이 바로 진짜 하나님이에요. 따라서 인간들이 예수님을 때려죽이지 않으면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교회가 복음을 믿는 사람을 핍박해 줘야 비로소 교회는 자기 정체가 파악되는 순간이에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하나님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하나님 이름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복음 믿는 사람을 공격해야 그 복음 믿는 사람이 당하는 그 현장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나타나요. 진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요. 하나님은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안 나타나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해 줘야 소자를 핍박해 줘야 비로소 그 현장에 아버지의 뜻이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이 드러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이용물로 하나의 미끼처럼 우리가 사용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하신 겁니.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곧 내 형제이고 내 자매니라 할 때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이 제자들을 보라 제자들이 내 자매고 형제라고 할 때 그것은 일방적으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되게 만들겠다는 뜻이지 제자들이 그 예수님의 뜻을 이해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 만들겠다는 겁니다.

 

베드로야, 네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은 베드로가 세운다는 말이 아니고 네가 어떤 짓을 해도 반드시 그것을 극복하고 내가 그 위에 교회를 세우고 말리라 하는 뜻이에요. 그 제자들은 전부 다 피동적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냥 제자들은 뭔가 당한 사람들이에요. 가만히 있는데 당했어요. 누구한테? 하나님한테 당하고 예수님한테 당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여기 교회라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 내고 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하는 교회를 부정해야만 하는 이유가 인간이 했기 때문에 부정당해야 돼요. 왜냐 하면 인간이 하지 못하는 일을 주께서는 해 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몸을 세우리라! 교회를 세우리라! 할 때 이게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이 이야기했죠. 예수님이 말만하고 교회 안 세우고 교회는 네가 알아서 해라! 나는 말만 했다 이러면 되는 겁니까? 말 하신분이 필히 뭘 만들어 내요? 교회를 만들어 내잖아요.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인간이 만든 교회, 그리고 주님이 만든 교회, 두 가지 교회가 나오겠죠. 그런데 저의 말은 주님이 만든 교회는 어디 있다 말입니까? 인간이 만든 교회에서 복음 아는 사람이 핍박을 받을 때 그것이 바로 주님이 만든 교회에요.

 

교회 다니라는 말이 아니고 교회, 또 교회 안 다니라는 말이 아니고 반드시 주님께서 핍박했던 이 세상은 주님만 핍박한 것이 아니고 주의 종을 핍박하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우리는 왜 핍박을 안 받죠? 핍박을 안 하는 이유는 주께서 아직 복음전하는 기회를 안 줬으니까 그런 거예요. 우리가 점잖아서 그래요. 우리가 사람이 좋아서 그래요. 사람 좋고 사람들이 평온하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일부로 또 설치는 것도 모양새가 더 이상해요.

 

일부로 설치지 마세요. 가만히 있으면 복음으로 기뻐하는 순간이 올 거예. 기뻐하는 순간이 바로 핍박받는 순간이 되는 겁니다. 기쁘지?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데! 하면 미쳤나?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러면 핍박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가 믿음의 티를 꾹꾹 누르고 티를 안 나게 애를 쓰다 보니까 핍박 받을 기회도 자꾸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왜 우리가 복음을 쌓아놓고 왜 눌리느냐? 눌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 지식으로 챙겼기 때문에 눌리는 거예요. 왜 지식으로 챙기느냐? 복음의 기쁨이 늘 상시적으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쁜 게 아니잖아요. 여러분의 자녀가 항상 수학 50점 맞다가 갑자기 100점 맞으면 기쁘던가요? 기쁘지 않던가요? 기쁘죠. 그 기쁨이 한 두 시간 갔다 합시다. 그 다음에 시험 쳤는데 또 100점이야 기쁩니까? 기뻐하지 않습니까? 전에 보다 덜 기쁘죠. 경제학에 나오는 기쁨 체감의 법칙입니다. 그 다음에 100점 맞았어요. 100점이에요. 그러다가 98점 맞았어요. 그러면 너 공부 못했어! 이렇게 나오죠.

 

복음의 기쁨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이성으로 합리적으로 누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그냥 튀어 나오기 때문에 자기가 억 누를 수 없습니다. 한 순간에 갑자기 기쁠 수가 없어요. 다시 하늘이 내려앉고 땅이 솟아나도 지금 이 바닥이 화산재로 유황재로 덥혀서 모든 게 불바다가 된다고 할지라도 심지어도 지옥이고 옆에 마귀 귀신이 서 있다 할지라도 그래도 괜찮아요! 할 정도로 이렇게 즐거울 때가 있어요. 그 순간이 바로 핍박받는 순간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기쁠 때 자식이 100점 맞는 자식이 빵점 맞아온다면 엄마, 이번에 빵점 맞았어! 이래서 꼴찌했어! 이럴 때 엄마가 뭐라 합니까? 괜찮아요. 그럴 수 있지 뭐 빵점 맞아도 괜찮아! 엄마, 나 내일 안산에서 결혼해! 괜찮아요. , 주례 없어, 괜찮아요. 뭐 아무렇지도 않아요. ? 복음의 기쁨이 세상이 날아가도 그 기쁨을 뺏어가지 못한다고 했거든요.

 

안산에 화산이 터질 수 있는 문제이고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복음의 기쁨을 이 순간 안다면 그것은 문제꺼리가 안됩니다. 주여, 내일 날씨 좋게 해 주시고 덜 춥게 해 주시고 기도 한다는 것은 복음의 기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기도 한다는 것은 복음의 기쁨이 없다는 뜻이에요. 뭐 기도 안한다고 해서 복음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터져 나오는 것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그 복음의 기쁨으로 나올 때 일곱 마, 귀신이 다 나가는 버리는 순간이 되는 겁니다. 귀신이 재미가 없어요. 건드릴 것이 없어요. 너 이러면 저주 받는데 이렇게 협박 공갈해야 할 것이 있어야 될 건데 너 내일 결혼할 때 비 막 와서 하객이 하나도 없다 이런 게 와야 되는데 괜찮아요, 뭐 하객 없어도 문제될게 아무 것도 없어요. 미장원에서 머리하고 나오는데 미용사가 잘못 해서 이쪽은 길고 이쪽은 반을 깎아버렸다 할 때 그래서 미용사를 찾아가는데 갑가기 0.2초 순간에 성령이 와 버렸어요. 괜찮아요 뭐 다 깍지 뭐! 다 깍아도 괜찮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 순간이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이 말씀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복음의 기쁨과 동반해서 주께서 이 말씀을 이루신 거예요. 내가 이룬 게 아니고 주께서 나를 사용해서 이루면서 내가 미쳤어! 내가 이럴 인간이 아닌데 사실 뒤 돌아서 몇 분 지나면 또 걱정돼서 기도 하게 되죠.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이지만 우리에게 주께서 나를 뭔가 다루고 있다는 것, 주께서 나를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은 뭐가 정지가 되느냐 하면 시간이 정지가 됩니다. 시간이 정지가 되어 버리면 과거, 현재, 미래가 이것이 사라져버리면 미래에 대한 무서움, 두려움, 공포가 이것이 한꺼번에 의미 없이 날아가 버리죠.

 

선을 보러갔다, 그런데 신랑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 가슴조이면서 이렇게 질문하면 나는 이렇게 대답을 해야 교양이 있겠느냐 없느냐 온갖 생각을 했는데 그런데 지하철을 타다가 은혜를 받았어요. 그러면 은혜를 받았으면 선보러 가면서 싱글벙글 웃는 거예요. 선보는 사람이 나는 지금 까지 교회를 30년 다녔는데 지금 까지 나는 십일조를 떼어 먹은 적이 없고 교회에 충성하고 주일에 목사님이 하라 하면 하고 목사가 주의 사자인줄 알고 섬기고 오직 교회밖에 모릅니다. 이렇게 한다면 괜찮아요! 뭐 그래도 괜찮아요. 안 그러면 사실은 내가 교회 다니는 것이 엄마가 다니라 해서 억지로 다니는데 사실은 결혼하고 난 교회안 다닐겁니다. 하면 괜찮아요. 뭐 교회 다니던지 말던지 관계없어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잔뜩 미래에 대해서 어떤 기대가 있으면 저 사람이 복음을 알아야 되는데 복음을 알면 결혼하게 되면 그 다음은 둘이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좋은가 하면서 자꾸 이렇게 되면 본인 자체가 기쁨이 날아가 버리고 본인자체가 어떤 특이성을 자기가 잠식해 버리고 자기가 깎아먹는 그런 육적인 주께서는 교묘하게 영을 위장한 육으로서 튀어나와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주변에 늙은 사람, 젊은 사람 이런 사람을 주는 것은 네가 어디서부터 구원받은 지를 교회를 통해서 다시 되풀이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교회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의 형제가 같이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41114b (기쁨의 폭발)이 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이 말씀을 우리가 지킬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고 아무리 해도 우리 힘으로 못 지킨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제시된 겁니다. 일상적인 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만 굳게 먹으면 쉽게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렇게 되어 버리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특이성도 사라지고 영을 우리가 육이 정복할 수 없어요. 육으로 영을 지켜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영은 누가 관리하느냐, 영은 관리담당자가 따로 있어요.

 

그것으로 누가 하느냐? 주님이 영의 관리 담당자입니다. 영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영되게 하시죠. 주께서 영되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군요라는 고백만 내세우면 되는 되죠. 바로 기쁨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하셔서 나한테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그게 큰 기쁨이 되는 겁니다.

 

기쁨이라 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으면 거기에 어떤 이익이라든지 내가 투자 했던 공로, 노력, 애씀, 기도, 헌금 이런 가치를 따지려는 생각이 강할 거예요. 그러나 이런 것도 없이 기도, 헌금 아무 것도 없는데 주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구원했다면 그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어요? 최고잖아요. 내가 나에게 어떤 일을 가미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에게 한 일이를 아니라 주님이 나에게 일을 하게 하셔서 나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신다면 그동안 내가 말씀을 지키니 못 지키니 하는 것은 그것은 문제꺼리가 안되겠죠.

 

내가 못 지키는 것이 구원의 기쁨을 뺏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말씀을 못 지킨 것이 도리어 구원의 기쁨을 추가적으로 더 높여 주는 거예요. 상당히 오해 될 소지가 있는 멘트를 제가 날리고 있는 겁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기쁨을 더욱더 증가 시킨다는 이 말은 이것을 잘못 생각하게 되면 복음의 기쁨을 증강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나쁜 짓만 골라하자 라는 논리가 나올 수 있겠죠. 그런 논리가 성립될 수가 있겠죠.

 

그러나 그런 논리는 어떤 경우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나의 회로에 나의 경로에 예수님이 개입하지 않을 수 경우 에는 그 말이 맞는데 주께서 개입했다는 그 엄연한 사실을 비춰볼 때는 그 논리는 중간에 찢어지게 되겠죠. 그러면 주께서 영광 돌리기 위해서 죄를 덜 짓자 하는 가운데서는 주님이 개입할 여지가 없잖아요. 죄를 지었는데 결과적으로 주께서 영광 돌리게 되었다면 이것은 중간에 누가 개입한 겁니까? 나 말고 다른 분이 개입했다는 증거가 된다 이 말이죠.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관여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했습니다. 하는 말을 하면서 반드시 병행해야 되는 말은 나는 죄만 지었을 뿐인데 라는 말을 반드시 같이 필히 겸해야 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 말로만 겸하지 말고 실제로 행동도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어떤 점에서 죄만 짓는 것이냐, 그것은 디모데전서 5장에 쭉 뒤에 나와 있는 이 모든 말씀이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능으로 이 말씀을 하나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 한 가지 예를 들면 5절에 보면 딤전 5:5 참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이렇게 되어 있어요. 가짜 참기름 말고 참 참기름처럼, 과부도 그냥 어설픈 과부 말고 과부돼서 또 결혼하려고 설치는 것 말고 갈아타려고 의도적으로 이혼한 그런 과부말고 참과부로서, 과부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성경 구약에서 어떤 뜻으로 이것이 하나님에 해당되었는가를 생각 해 봅시다.

 

과부라 하는 것은 남편 잃은 자를 말하잖아요. 남편은 구약 때 남편을 잃는 경우는 전쟁을 통해서 잃어버립니다. 전쟁을 하게 되면 가장이 나가게 되어 있고 그 가장은 민수기에 보면 숫자를 헤아리게 되어 있어요. 이번에 겨울 수련회를 대선에서 하는데 민수기 속에 그리스도그게 주제입니다. 곧 교제를 올릴 겁니. 민수기 속에 그리스도인데 숫자를 헤아립니다. 숫자를 헤아릴 때 그 숫자 헤아려야 하는 사람은 20세 이상의 어른들이에요.

 

결혼한 사람들도 물론 포함됩니다. 이렇게 숫자를 헤아려서 한다는 말은 개별자에서 집단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집단속에서 개별자의 가치를 찾지 말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이여, 내가 착하면 됩니까? 개인적으로 착하면 됩니까? 악하면 됩니까? 하는 말이 집단에는 그 자체가 의미가 없는 거예요. 네가 소속된 집단이 저쪽 다른 소속된 적들과 전쟁을 버리느냐 이게 중요하지 그 집단과 이 집단이 전쟁에 관한 문제이지 사적으로 내가 어떻게 바르게 삽니까? 안 삽니까? 그 문제는 이스라엘의 문제에 문제꺼리가 되지를 않아요.

 

전쟁 통에 자기 남편이 죽었다는 말은 여자가 어지간히 죄를 지었구나! 그런 뜻으로 연계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여자가 평소에 설거지도 못하고 라면도 못 끓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벌을 내리기 위해서 남편으로 하여금 전쟁에 끌려가서 죽게 만들었다고 그런 식으로 개별적인 운명으로 엮으면 안돼요. 하나님께서는 집단적인 것이지 개별적인 것은 고려대상이 아닙니다. 같은 예수를 믿는데 남들은 잘 사는데 나는 왜 못 나느냐고 자꾸 개별적으로 따지면 안돼요. 못 살던 잘 살던 복음으로서 구원 받으면 되잖아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해요. 돈 많은 세리가 키는 작은데 삭게오가 주님 만났는데 그 시로 주께서 내 집에 가자 이렇게 해서 그 집에서 구원을 이루었다는 삭게오 이야기가 나오죠. 그러니까 그것을 보고 하는 이야기가 돈 많아도 그렇게 구원 받을 것 같으면 나도 일단 돈 챙겨주시고 그 다음에 우리 집에 구원이 이르면 참 좋겠습니다. 돈도 챙기고 구원도 챙기고 삭게오는 참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삭게오가 그 전에 남한테 욕 얻어먹은 것을 생각해 보세요. 욕을 많이 얻어먹었거든요. 더럽게 빌어먹고 돈만 챙기는 인간이라고 질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삭게오는 삭게오이고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이고 어쨌든 저쨌든 간에 용서받는 것은 집단적으로 주님 앞에 용서받게 되어 있어요. 신앙의 모델은 따로 없는 거예요. 본인이 가는 인생이 곧 본인의 신앙 모델이에요. 아마 다른 모델이 필요할 것 같으면 우리로 하여금 다른 모델이 되게 했을 겁니다. 딱 이 길로 가야 구원받기 때문에 독특하게 우리는 거기로 가되 그 가치는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개별자가 아니고 집단이거든요.

 

그럼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이 일어나서 여기 남편이 죽었어요. 남편이 죽으니까 아내는 졸지에 과부가 된 겁니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다시 자기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농촌에 여자 혼자 농사 짓다보니까 생산물이 넉넉지 않아요. 농산물이 안 되고 소출을 못하니까 생활비는 나가고 안 되니까 결국 빚이 지게 되는데 여자보고, 자식보고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고 결국 노리는 것은 뭐냐 하면 농토보고 하겠죠. 당신이 갚지 않으면 이 농토가 차압되어 넘어갑니다. 나중에 그것도 안 되면 과부, 자기도 노예로 팔리는 이런 것이 과부라면 과부+남편이 있던 자리가 남편의 자리가 누구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남편이 돼요.

 

과부가 남편이 없는 것이 아니고 남편의 교체가 이루어 진겁니다. 그냥 보통 남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의 남편이 되는 겁니다. 남편이 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기의 사람으로서의 남편이 있다고 의시대면서 누구를 무시하느냐 하면 과부를 무시하게 되면 과부의 남편이 되시는 여호와께서 누가 내 신부를 무시해! 하면서 공격해서 이쪽이 궁지에 몰리게 되어 있죠.

 

그래서 하나님의 전쟁이라 하는 것은 전쟁에서 과부가 되게 하고 남편을 잃게 하더라도 그 전쟁은 사실은 본게임이 아니에요. 본게임은 이스라엘 내부의 전쟁이 본게임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고아와 과부로 나왔잖아요. 하나님의 구원자가 없었으면 못 나올 뻔 했잖아요. 일단 나오고 난 뒤에는 구원자가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습니다. 떠난 게 아니고 주변에 있는 과부와 고아를 지켜 주는 분으로 구원자가 같이 묶여서 그들 앞에 나타납니다.

 

그러면 과부와 고아를 도와준다는 것은 현재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니고 바로 그 과부를 구원하시는 여호와의 것임이라는 뜻에서 과부와 고아를 돌봐주고 가난한 자를 대접하라고 십일조도 하고 여러 가지 헌금도 한 그런 구조가 이스라엘의 법이에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스라엘입니다. 하는 순간 제가 걱정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두 번째 시간 첫 번째 뭐라 했습니까? 모든 말씀은 지킨다? 못 지킨다? 지키지 못하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이제부터 고아와 과부를 돌봐야지그렇게 오해하면 안돼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개입할 그 자리를 자기가 자기의 행함으로 자기의 잘남으로 그것을 덮어버리고 매 꾸어 버리는 십자가를 두 팔로 가려버리는 그러한 비 복음적인 행동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누구를 도와준다는 말은 제가 언제인가 그러한 이야기했잖아요. 복음의 삼종세트, 용서하지 말고 구제하지 말고 막살라는 삼종세트를 드린 이유가 사람이 누구를 구제하고 도와주게 되면 나는 갑이 되고 그 사람은 을이 돼요.

 

이것은 누가 일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적으로 눈감으면 떠오르게 되어 있어요. 저 사람은 나 때문에 살았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갑이 되지 않고 을이 되는 방법이 뭐냐 하면 그 어려움 당하는 사람이 와서 , 내꺼!’ ‘, 잘 보관해 뒀습니다.’ 하고 드리는 경우에는 주인이 자기 것을 찾아가는 식이에요. 그것은 갑이 아니고 을이 아니죠. 맡겨놓은 것을 찾아가는 식이니까요. 이러한 구제의 개념이 확산돼서 이게 용서의 개념으로 까지 번집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용서를 해 주시고 그리고 그 용서 한 그 의를 우리에게 되찾아가는 방식으로 우리가 구원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사도 바울 같으면 사도 바울아, 너는 로마에 가서 고생하면서 복음 전해야 돼! 하면 사도 바울이 뭐라 하겠습니까? 주님은 다른 사람들은 편하게 하는데 왜 저 혼자 고생시킵니까? 이러면 그 맡겨놓은 용서 내놔라! 하면 아이고 죄송합니다. , 로마 가겠습니다.

 

우리 상황이 어떤 상황이 벌여지더라도 그 죄를 용서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게 무슨 죄냐 하는 것은 오늘 디모데전서 5장의 쭉 나올 거예요. 5장에 보게 되면 거기에 나오는 말씀대로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못 지켜요. 못 지킴으로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죄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새로운 죄의 다양성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게 죄인데 아, 이게 죄인이구나! 하고 아는 사람은 바로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이미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의가 내장되어 있는 사람이에요. 그것은 주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찾아가는 식으로 하게 되면 우리는 같이 붙들려서 영원히 주님이 내장되어 있는 사람으로서 주님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그 나라까지 가야 되는 겁니다.

 

마치 목사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대만까지 가야 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목사를 촬영하러 대만까지 갔다고 합니다. 주님이 갑이고 우리는 을이에요. 주님 드러내라고 디모데전서 5장을 준 것이지 우리의 각오, 우리의 자존심, 우리의 가치를 빛내라고 말씀 준 게 아니에요. 오해들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

 

이 모든 성경 말씀은 주님을 빛내라는 것이지 우리를 빛내라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5절에 보면

딤전 5:5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러면 뭐 먹고 사는데요? 항상 간구와 지도를 하면 그러면 생활비는 누가 주는데요? 참 과부가 외로워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도 한다는 말은 제가 첫 번째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뭐냐, 빨리 죽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빨리 죽겠다는 이 모습이 굉장히 평화롭죠. 흔히 말하는 부부 싸움 할 때 죽여라! 죽여라! 하는 그것 말고 술 먹고 와서 그래 나 죽여라! 하는 이것 말고 죽여주세요! 죽여주세요! 하나님이여! 죽여주시옵소서! 죽여주시옵소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과부 있습니? 없습니까? 없습니다. 다행스럽습니다. 이런 과부가 있으면 교회에 또 모여 문제 일으켜요. 교회에 어떤 과부도 이런 과부 없습니다. 자기 딴에는 소망을 두고 기도 했다는데 그때 키185, 재산 76억 되는 성격 좋고 오직 여자만 위하고 인물은 최소한 이병헌 정도, 그런 사람, 성격 좋고 사람 점잖고 인물 좋고 여자 위하고 아나운서 출신, 님과 함께에 나오는 김범수 정도는 안 되괜찮은데 프랑스 좀 할 줄 알고 뭐 이런 예의 바르고 하는 그 사람이 와서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할 때 그때부터 가거라, 사단아! 이렇게 할 과부가 있겠어요? 없습니다.

 

하자마자 네 이름으로 재산 다 넘겨줄게 이래 나옵니다. 그것도 유부남 말고 총각이고……. 습니다. 따라서 참과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남자 만날 때까지는 스스로 자기를 참 과부인 것처럼 조작을 하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누가 복음 2장을 보죠. 제가 분명히 없다고 했습니다.

 

2: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몇 년입니까? 과부된 84, 84년차 과부, 이 사람은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서 섬기더니 이 사람은 참 과부입니까? 참 과부 아닙니까? 디모데전서 5장의 그 말씀에 의하면 본인한테 물어봐요. 당신은 참과부입니까? 물으면 나는 죄인입니다. 할 겁니다. 분명히 그렇게 할 겁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런 사람이 모델이 될 수가 없어요. 이 세상에서 모델을 같은 인간으로 삼으면 안 됩니. 모델을 삼으려면 이런 사람을 모델로 삼아야 됩니다. 그 사람이 이런 사람도 죄인이라는 사실로 모델로 삼아야 같은 죄인이라 입장에서 소통이 되고 같은 하나의 형제가 되는 거죠.

 

그러면 이 사람은 과부된 84년 됐는데 결혼도 안하고 성전을 섬겼느냐? 정답은 딱 한 가지에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의 악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관련되어서 이 사람이 과부가 된 거예요. 그럴 경우에 이 사람이 무슨 과부가 되느냐, 바로 참과부가 되는 겁니다. 진짜 어렵죠. 방금 참 과부가 이 세상에 없다고 했죠. 없어요. 멋있는 자기의 이상적인 남자가 오면 지금 까지 과부로 살아온 것을 청산하고 대번 또 결혼합니다.

 

나는 성전에서 하나님만 섬길래요.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냥 합니다. 처음에 한 두 번 튕깁니다. 그 다음에 더 센 사람이 다가오면 재산이 700억 되는 이런 사람이 오면 감당이 안 되. 참 과부라 할 때 과부는 예수님의 개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이게 교회에요. 하나의 과부라는 한 개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항상 성경은 예수님이 어떻게 개입을 했고 어떻게 교회를 정상적으로 만들어 내는가가 초점이지 한 개인이 구원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거기에 관점을 두면 안돼요.

 

그렇게 되면 너나 잘 하세요!’ 이렇게 돼요. 저 사람 구원받았겠습니까? 하는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옳지 않아요. 우리가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저 사람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하는 이것은 물을 수 있어요. 저 사람을 복음 못 듣게 해서 지옥가게 했습니다. 이것은 되는데 저 사람의 개인적인 행동이 저 사람이 지옥 간다라고 규정하기 곤란해요. 지옥 가는 것도 주의 뜻에 의해서 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의 뜻이 아니면 지옥가고 싶어도 못 가요. 천국가야 돼요. 인간이 천국하고 지옥을 선택할 자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디모데전서 5장에서 참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물어봅시다. 참과부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은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소망하고 주야로 항상 기도 하고 간구했는데 그러니까 당신은 참과부 맞습니까? 물으면 그 사람이 뭐라 합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 합당치 않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이런 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영광을 돌리려면 주님께서 영광 돌려야지 저의 이런 결단력과 결심에다가 그 영광을 주시면 그러면 제가 싫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거예요.

 

그 다음에 6절에 봅시다. 같은 뜻입니다. 이번에는 여러분들이 해답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딤전 5:6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딤전 5:11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시집가는 것이 지옥 가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어요. 시집간다는 말은 무엇을 배반했다? 그리스도를 배반했다, 그러면 시집 안가면 배반 안 한 게 돼요? 그러면 이런 경우를 봅시다. 시집은 안 갔지만 항상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배반한 자요? 배반 안 한 자요? 어떻게 되는 겁니까? , 어떤 여자가 70이 되었습니다. 혼자 70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 여자는 시집을 포기 한 사람입니까? 시집을 포기한 것이 아니고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여전히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겠죠. 그러면 그리스도를 죽을 때 까지 배반하는 사람이에요.

 

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딤전 5:5 참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이 말은 과부로서 외로울 때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주야로 항상 기도 하지 않는 자는 6절에 딤전 5:6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평소에 쾌락만 즐기는 그런 과부가 되었는데 그런 과부는 자기는 살았다고 여기나 다시 말하면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여기나 실은 죽은 자다 이 말입니다.

 

모든 게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제가 아주 단출하게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누구누구는 이렇다 할 때 그 모델을 제시할 때 그 모델은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모델에 합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합당하게 못 살 것 같으면 모델을 치워버려야 되지 않겠느냐? 아니에요. 그런 모델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이 아니고 육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해 지죠. ? 그렇게 못사니까요. 못사는 육을 영이 되게 할 때 영에 대해서 목표점, 도달점이 있을 겁니다. 그 도달점이 성경이라 말입니다.

 

그러면 육에서 영으로 바뀌어서 목표점에 도달했을 때 거기에 누가 개입했습니까? 주님이 개입했을 때 우리는 도달의 여부와 상관없이 주님에 대해서 영적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이 바로 교회가 된다 이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 보면 우리는 이것을 어디로 가져가느냐 하면 과부한테 가져가요. 가만있어봐 당신은 참 과부인지 아닌지 자꾸 남을 평가하고 판단하는데 이것을 사용하거든요. 이것을 남을 판단하는데 사용하지 말고 너한테 판단 해 보라 말입니다. 판단해 보면 우리도 이렇게 과부되어 외로울 때는 이렇게 되지 않아요. 될 수가 없습니다. 될 수가 없는 말씀을 주신 거예. 그 말은 주님께서 개입하셔야 우리가 육에서 영으로 전환된다는 사실을 이 말씀을 통해서 일상을 통해서 우리 주변에 일어날만한 그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느끼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하게 모여서 온갖 자신의 과거와 여러 가지 일들이 뒤섞이고 주고받고 해야 돼요. 이것은 내 일이 아니라 저것은 내 일이 아니라가 아니라 나에게 해당되는 일임으로 그 사람을 욕할 것이 아니고 우리도 그럴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공감을 해 줘야 되는 겁니다. 공감을 해 줘야 우리의 소망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바로 우리 주님밖에 없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만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일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할 때 이 말을 어떤 과부가 된 사람한테 던지는 거예요. 남편 죽어서 지금 애통하고 있는데 거기다가 일단 과부된 것에 대해서 상당히 애도합니다만 과부 되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자매님 이제부터는 외로울 때 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야로 항상 기도와 간구를 하시고 만약에 그것이 하기 싫으면 집사님은 구원받지 못하고 실은 죽은 자입니다. 라는 이야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라고 할 때 그분이 뭐라 하겠습니까? 불난 집에 부채질합니까? 나도 그 말씀이 있는 줄 나도 압니다. 하고 전화를 끊던지 할 것 아닙니까? 했을 때 남편 죽은 지 얼마 된 그 과부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성령이 있는 사람 또는 주님이 개입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울겠어요? 아니면 힘을 내겠습니까? 자기 주제를 파악하겠습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부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구나 하고 속으로도 그것을 받아드리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이야기가 우리에게도 일어날 상황이다 말이죠. 그런데 이상가게 과부 이야기는 나와 있는데 홀아비 이야기는 안 나와 있어요. 홀아비는 아예 제쳐 놓은 것 같아요. 성경에서 그만큼 이 땅에서 버틸 수 있는 힘 같은 것, 이런 게 있죠. 그 만큼 남자는 이 땅에 정착하는 속성이 강하고 여자는 약하게 살다가 어느 새 소리 없이 그냥 훌쩍 세상을 떠나 버리죠. 떠나 버리면 어느 쪽이 불리하고 유리하느냐 하면 떠난 쪽이 유리하고 남아 있는 쪽이 불리해요. 오래 살아봤자 치매 걸리고 나중에 죽을 때 비참하게 죽게 되거든요.

 

그래서 여기 8절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니라! 보세요. 사도 바울이 말이 굉장히 과격하잖아요. 앞에서는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해 놓고서는 제가 보기에는 뒤에 하는 말이 꾸짖는 것 보다 더 심한 말을 하고 있어요. 아이고, 남편 돌아가셨으니까 삼가 위로를 표합니다. 이래야 될 말을 뭐라 합니까? 네가 기도 됐나? 이제부터 기도 해라! 이게 얼마나 그 남편 죽어서 상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연약한 여자 에게 얼마나 짐되는 이야기입니까? 앞으로 네가 기도 하나 지켜 볼꺼야! 구멍 뚫고 볼 거야, CCTV 달아서 네가 늘 기도 하는지 한번 볼 거야! 이게 얼마나 심한 말입니까?

 

거기다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으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니라,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가 이 세상에 있습니까? 지옥 간다는 말이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하다고 하니까 지옥 가겠? 불신자가 지옥에 한 5미터 간다면 이 사람은 10미터 더 들어 가겠네요?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고 그러면 돌보지 않고 간 사람이 선교사 가운데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아내는 교사이고 자기는 밖에 선교사로 가버리고 자기 아내가 돈 벌어서 돈 보내주고 그런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았잖아요? 자기는 거룩한 주의 일을 한다고 아내가 새빠지게 벌은 돈을 번 것을 앵벌이도 아니고 그 돈 챙겨가지고 자기는 선교하면서 편하게 놀고 아내는 교사하면서 직사하게 고생하고요. 특히 아내가 교사, 약사, 피아노레슨, 유치원 선생님……. 험이에요.

 

9절에 봅시다.

딤전 5:9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딤전 5: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것이요

 

구제의 리스트가 있다는 겁니다. 구제의 명단이 오게 되면 이 명단은 교회에서 생활비를 대주는 그 특별대우를 받는 그런 과부 리스트가 있는 겁니다. 그 과부에 들어가려면 뭐를 해야 되느냐 하면 60되지 않고 50줄에 있는 과부는 몇 년을 더 기다려서 60이 되고 난 뒤에 교회에서서 남편 없는 과부를 교회에서 생활비를 대주라는 거예요. 그리고 한 남편의 아내였다는 말은 살아오면서 다섯 남편하고 헤어지고 이번 남편은 6번째 남편이고 사마리아 여인은 아예 나중에 과부 되도 명단에 못 올라와요. 남자가 6명이니까요. 예수님 만날 때가 6명이지 예수님이 가고 난 뒤에 몇 명을 더 만났을지 알 수 아가 없는 거죠.

 

교회라 하는 것은 어떤 멘트를 날렸을 때 문장을 날렸을 때 이것은 하나의 모델이에요. 그런데 모델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가 없어요. 할 수 없는데 이게 나타나요. 누가 그렇게 하셨습니까? 본인들이 그렇게 했습니까? 아니, 누가 했습니까? 교회는 누가 개입하십니까? 주님이 개입하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못하니까 하나님이 이런 말을 하나마나 덮읍시다. 이러면 교회가 아니에요. 이것은 진짜 악한 자에요.

 

그러나 진정으로 돌보지 않고 이렇게 해도 너는 배반한 자요라는 말을 늘 듣는 사람은 성도에요. 주여, 어떻게 저보고 하는 이야기가 딱 맞습니까? 라고 늘 받아드리는 사람이 성도라니까요. 이것을 성경을 덮으면 안돼요. 아이고, 듣기 싫어라! 사람이라는 하는 것은 자기 가치가 죄가 되기 때문에 누가 바른 소리를 하게 되면 듣기 싫어해요. 듣기 싫어한다는 말은 자기 가치는 제가 지키겠다는 거거든요. 그러나 성도는 뭡니까? 성도는 말씀을 늘 생각하면서 제발 나를 좀 때려주고 나를 지적질 하라고 요청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과부의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60이 덜되지 않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그 당시의 문화를 감안했거든요. 여자 나이 60돼서 홀로 살면서 대책이 없다 이 말이죠. 그 당시의 문화가 그래요. 지금은 뭐 최저 생계비를 나라에서 주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문화가 아니었어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교회라는 것이 따로 뚝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는 실상의 속에 섞여있는데 그 실상이라는 것이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을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시대정신이라 해요. 시대정신 속에 한 통속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다 육이에요. 다 육인데 주께서 개입하면 영이 되는 거예요. 육인데 어떻게 육이냐 하면 바로 자기 각자 성질대로 사는 육이에요.

 

하지만 육에 영이 개입하게 되면 용서를 받게 됩니다. 용서를 받게 되면 그 용서받는 기쁨이 용서라는 기쁨으로 다시 주께서 주신 사도의 편지를 보게 되면 이 모든 말이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이고 자신 있게 자기의 잘못을 지적한다는 그것이 기적적인 슬픈 일이 아니고 짜증나는 일이 아니고 그렇게 기뻐요. 주여, 제가 바로 여기에 해당되어서 이 말씀을 못 지키는 인간입니다. 라는 것을 감사히 받는 거예요.

 

감사히 받게 되면 그 모습이 무슨 모습이냐 바로 이 말씀대로 되어버린 결과를 보여 주고 있는 겁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라 하는 것은 디모데전서 5장에 의하면 보니까 네가 바로 이렇게 지킨 사람이네! 아니야 나는 죄인이야 이것 못 지! 주께서 그렇게 하셨어! 주님만 증거하는 사람, 그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합니다.

 

다시 516절을 보게 되면

 

딤전 5:16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은 누구든지 나는 예수님 믿는데 내 언니가 과부되었다, 따라서 과부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되게 했기 때문에 내가 언니를 도와줄 필요는 없어! 하나님이 도와주시겠지! 라는 생각은 누구나 다 갖게 돼요. 이 말씀을 보는 순간 무엇을 느낍니까? , 내가 죄인이구나, 언니가 과부된 것도 나의 죄인 됨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과부되게 하셨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말씀 봤으니까 언니를 도와주겠죠. 도와주는 게 이 말씀 지킨 겁니까? 아니죠. 도와주는 언니야, 너도 좀 이제는 너무 동생 바라보지 말고 너도 남자 찾아서 네가 알아서 해라! 도와주는 것도 한 해 두해지 이제 지겹다! 라는 생각이 들겠어요? 안 들겠어요? 내가 도와준 이것만 따로 모았으면 집한 채 샀겠다는 생각이 들겠어요? 안 들겠어요?

 

흉내는 냅니다. 다 성경말씀에 있으니까 흉내는 냅니다. 그래 교회에 짐 지우지 말고 우리가 도와줘야지 흉내는 내지만 기쁨은 생기겠습니까? 안 생기겠습니까? 억지가 되겠죠. 억지가 되는데 기쁨은 뭐냐, 이런 죄인도 주께서 용서했다는 그 기쁨이 나오죠. 기쁨으로 언니야 미안하다, 내가 언니 도와주면서 사실은 억지로 언니를 도와줬는데 내가 말씀으로 은혜 받고 난 뒤에는 내가 미안하다, 언니가 앞으로는 내가 진짜 진정으로 도와줄게 하고 나올 때 그 순간 언니가 하는 말이 동생아, 착하다하면 착한 게 아니야, 착하다고 하지 마! 나는 못된 동생이야! 그런데 주께서 이렇게 도와주게 하셨어! 요거 이틀 갑니.

 

그 기쁨, 얼마 가지 못합니다. 돌아서면 또 도와줬는데 언니 나한테 해 준게 뭐 있는데? 이렇게 나옵니다. 하여튼 언니가 싸가지가 없어! 이 만큼 도와줬으면 빨래는 해 줘야지! 또 나와요. 또 나옵니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언니가 불쌍하다고 도와줬는데 언니가 불쌍하다고 해 놓고 돈은 나보다 더 쓰고 못 도와주겠, 주여, 도와주고 싶어도 이런 꼬락서니보 내가 못도와줍니다. 또 나오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뭐냐, 자기 행동이 선하기 때문에 기쁨이지 주의 기쁨은 이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용서한 기쁨이 커야지 내가 말씀대로 지켜서 오는 기쁨, 이 기쁨은 얼마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결론하는 것은 디모데전서는 평생 계속 열어 젖혀야 되지 지켰다고 나한테 해당 상항이 없다고 덮을 책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 과부가 없으니까 뭐,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 과부 이야기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주변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주님에서 우리에게 특이한 현상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말씀을 들어서 다시 한 번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딤전 5: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것이요

 

10절 중간입니다. , 따져 봅시다. 어떤 사람이 60이 넘었어요. 62인데 나그네 대접은 잘하는데 성도의 발은 더럽다고 안 씻겨요. 그러면 명부에 오를까요? 안 오를까요? 제가 디모데전서 3장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감독된 자는 절제하고 근신하고 아담하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가르치기를 잘하고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쭉 나오는데 이 중에서 한 가지를 탈락하게 되면 감독이 되냐 안 되느냐 이 말입니다.

 

그때 제가 뭐라 했습니까? 이것은 존재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기능에 관한 문제라고 했죠.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모델로서 어떤 자도 이런 자가 없어요. 이런 자를 찾는 본인이 나빠요. 이런 자를 찾는 것 자체가 나쁜 짓입니다. 이런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주께서 이렇게 하신 사람은 있어요. 어떤 사람? 나는 이 말씀에 의해서 내가 죄인입니다. 하고 인정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복음의 기쁨을 유지 하고 있기 때문에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기가 나그네를 대접 못한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그 순간 나그네가 들어 닥치면 자신도 모르게 그 나그네를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자진해서 도와주게 돼요.

 

그리고 어떤 성도가 발을 내 밀 때 기쁨으로 발을 씻게 되어 있어요. 본인의 능력이 아니라 누구의 능력입니까? 주님의 능력이에요.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누가 무슨 봉사를 할 때 네 힘으로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주신 힘으로 하라는 말이 거기서 나온 겁니다. 우리는 다루어지는 겁니다. 내 힘으로 말씀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육이고 죄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못 지킵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런 모습을 다루어 질 때 남한테 이야기하세요.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못돼 쳐 먹은 나를 이 말씀에 맞추기 위해서 모델에 맞추기 위해서 나를 잠시 사용했다고 그렇게 고백하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목사님 사용안하면 어떻게 합니까? 사용을 안 한다는 말은 그 만큼 우리가 아직 아도 자기가 잘났다는 뜻이거든요. 이 말씀에 비춰서 자기가 내 힘으로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우리가 못 지키는 겁니다.

 

어떤 말씀도 못 지킵니다. 하지만 대기 상태에서 주께서 이 말씀대로 반드시 실시할 텐데 나를 통해서 할 수도 있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모든 영광은 그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을 그렇게 되게 하신 주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그게 같은 교회라고 할 수가 있다 말입니다. 개별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되었으면 이런 모습을 찾아보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교회에 올 때에 매일같이 술을 두병씩 마셔야 되는 사람이 있어요. 매일같이 술에 취해서 온다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덜 취했어요. 물어보니까 술 두병 오던 사람이 한 병 먹고 교회에 왔을 때 형제여! 주께서 함께 하셨군요!’ 이렇게 감사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 것을 찾아보란 말입니다. 같은 교회에서 말입니다.

 

주께서 어떻게 각자 각자를 다루고 있는지를 찾아보란 말입니다. 저 집사님은 애가 공부를 못해서 짜증내면서 하나님께 대들던데 어느 날 보니까 공부를 좀 못해도 아이고 공부를 못해도 건강만 해도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이 나올 때 그것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교회의 이야기이거든요. 거기서 뭔가 주께서 우리교회에 작용 하시는구나를 같이 공감하고 느끼는 겁니다. 마음 낮췄던 그 이야기를 듣자는 겁니다. 교만하다가 얻어터졌던 이야기, 자기 의를 내 세우다가 얻어맞았던 그 이야기…….

 

그 낮아짐이 그 사람의 개인의 공로가 아니고 주께서 했기 때문에 바로 그 주님이 우리가 믿는 주님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기능으로 활용될 수 있는 그런 때가 항상 있거든요. 물론 그렇게도 사용하셨고 지금 은혜 받은 것도 주의 기능입니다.

 

11절에 봅시다. 딤전 5:11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젊은 과부를 거절할 수가 있습니까? 예쁜데? 무슨 남자가 예쁜 여자를 거절할 남자가 있습니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예쁘면 모든 게 용서가 돼요. 그리고 예쁘지 않으면 모든 게 짜증이 돼요. 그것을 폭탄이라 해요. 아이고, 저 폭탄! 폭탄이 하는 모든 짓이 다 꼴 보기 싫어요. 그게 육이에요. 우리 출발점은 육으로 시작해요. 예쁘고 돈 많은 여자인데 교회 와서 새롭게 결혼하려고 한다, 미쳤어요. 거절을 왜 해요? 헌금 많이 하고 예쁜데 또 새 남편 얻었다고 간증할 건데, 간증하게 되면 젊은 과부들 다 올 건데. 이 교회에 신기한 효험이 있다고 하나님이 살아있는 교회라고 선전하면 다 오는데 이것을 왜 거절해요? 그래서 젊은 과부는 절대로 거절을 하지 않습니다. 못합니다.

 

딤전 5:11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딤전 5: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과부된 것도 심판인데 거기에다가 심판을 가해 버리면 너무 한 번 죄에 대해서 두 번 처벌할 수 없다는 법칙에 어긋나잖아요?(일사부재리의 원칙) 추가적으로 벌을 못 내리거든요. 같은 죄에 대해서 두 번 다시 같은 벌을 못하게 해야 되지, 과부가 된 것도 벌인데 거기다가 추가적으로 벌 받게 됐잖아요.

 

결과적입니다. 항상 일어나는 모든 말씀들은 주께서 개입하셔서 이런 사람을 만들 때 부러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리 젊고 돈 많은 사람과 결혼을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버려지는 현상이 일어나거든 그것은 주께서 못 믿게 하도록 그런 조치를 하는 것으로 봐서 우리에게 경고가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겁니다. 예쁘고 돈 많은 것도 좋지만 그리스도를 버린다는 말은 이것은 자기 운명을 변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누가 하셨다?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 믿음을 져 버린 것도 주께서 그렇게 하신겁니다.

 

13절에 보면 딤전 5:13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이 아니할 말을 하나니 딤전 5:14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그럼 젊은 과부도 또 오지 말라며? 그러니까 뭡니까? 젊은이는 시집가라는 이 말이거든요. 과부로 시집가라는 말이 아니고 젊은 과부 말고 그것을 본 받아서 20대에 결혼하라 이 말 아닙니까? 누가 결혼 안하고 싶어서 안 합니까? 사도 자기는 결혼 안 해 놓고 자기는 혼자 살면서 고린도전서에 뭐라 했습니까? 여자가 시집가는 것은 안 가는 것이 더 좋지만 구태여 가고 싶으면 그땐 가지만 가게 되는 사람은 환란이 있고 이랬다가 또 여기에 와서는 젊은이여 시집가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될지 모르겠죠.

 

해답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버릴 가능성이 있던 일과 그리스도 더 증거할 일을 구분하라 이 말입니다. 교회는 뭐냐, 교회는 교회가 아니에요. 교회는 어디 있느냐? 교회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드러난 교회는 교회가 아니고 이 교회로 인하여 핍박받을 때 이게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서 무엇을 찾아야 됩니까? 주의 활동과 기능을 찾으면 돼요. 어쨌든 저쨌든간에 어떤 이유라도 나는 그리스도를 안 믿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버리겠습니다! 할 경우 같으면 그게 바로 교회를 통해서 또 다시 그리스도의 활동을 배우게 되는 교훈을 얻게 되는 이런 순간, 현상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15절에 보면 확실하죠. 딤전 5:15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이 말은 실컷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여 아비에게 하듯하면 젊은이는 어떻게 하고 이렇게 죽 이야기해 놓고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서 기도원에 간다고 신앙생활이 아니란 뜻이에요.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는 거예요. 일을 하게 되면 또 우리는 오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기적과 천국의 계시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은 너는 육이고 너는 내가 아니면 구원 못 받는다는 사실을 너하고 똑같은 인간들이 득실하고 같이 교제하면 서로 이익과 시기와 질투하는 가운데 이런 말씀 속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속에서 정말 그리스도 보다 더 귀한 분이 없다는 것을 같이 느낄 때 그 사람에게 떠 오르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영적인 요소가 떠오르는 거예요. 인간된 것 아니에요. 인간은 맨 육이에요. 하지만 내가 육인데 이 육을 주께서 구원해 주셨다는 중보자의 용서와 기능이 계속 떠오르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진짜 성도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따로 모아서 이상적인 교회를 세우자! 그런 짓거리는 하지 마세요. 그런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잘난 맛에 사는 것은 교회가 아니거든요.

 

주께서 일을 일으키세요. 어떤 사람은 과부로 어떤 사람은 힘든 일들이 일어날 겁니다. 하지만 그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저 사람이 저렇게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고 주님은 어떤 식으로 개입하는가! 그것을 보는 거예요. 그것을 통해서 마음을 낮추고 나한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는 주의 용서하심의 복음의 기쁨이 더 크다. 이렇게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개입했고 그 개입된 성령이 오늘도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또다시 여전히 우리에게 개입을 할 때 우리는 하나의 형제가 되고 하나의 교회가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겁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실생활 속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마치 성경대로 사는 자인 것처럼 행색하고 조작했는데 깨닫게 됩니다. 그냥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맡기는 가운데 이런 일이 터지고 저런 일이 터지는 가운데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육이며 용서받아야 될 대상인 것을 감사히 여기면서 십자가의 포부에 대해서 큰 기쁨을 갖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