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디모데전서 4:8 / 연습 불가 / 1409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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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김창길
서울 의존교회140905a (연습불가)―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4장 7절부터 봅시다. 딤전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여기에 연습하라 하는 말씀이 나올 때 보통 학교에서 공부할 때 연습문제 많이 풀잖아요. 연습문제 풀 때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해답이 뒤에 있어요. 해답이 있고 연습문제가 출제가 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풀었던 것도 그 다음에 학년에 가서도 풀고 그 다음에 올라가서 풀고 연습문제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각각 새롭게 학년이 올라가면 그 연습문제 푸는 거예요. 예를 들어 수학 연습문제 풀기, 그 연습문제가 출제 범위 내에서 거기서 거기죠.
그래서 여기서 연습하라고 한다면 우리가 얼른 이해하기를 연습문제 푸는 거죠. 그러면 조건이 있어야 되죠. 방금 제가 제시했죠. 하나는 뭐냐 하면 해답이 있어야 되고 그리고 이것은 연습문제에 해당된다가 확정이 나 있어야 되는 겁니다. 연습문제가 누가 이렇게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말이죠. 이 문제 풀어! 풀었어? 그럼 해답 맞춰보자 맞네! 그럼 너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잘해! 이렇게 할 때 보통 연습문제 하잖아요. 또 운동선수들이 체조 선수 같은 경우에 어떻게 해 보니까 새로운 고 난이도의 기술이 나왔다, 그러면 그 다음에 그냥 하면 돼요? 안 돼요? 안되잖아요. 그러면 하는 방법을 어떻게 해야 돼요? 숙달하고 연습하게 되면 그 똑같은 모델이 나오겠죠.
그 똑같은 기준이 나온다 말입니다. 두 가지가 뭐냐 하면 이것은 경건한 연습문제에 합당합니다. 라는 첫째는 기준이 성립돼야 되고 또 한 가지는 아까 이야기한 해답이 있어야 되죠. 아- 이것은 잘 풀었습니다. 못 풀었습니다. 그 연습은 제대로 됐습니다. 하는 해답이 있어야 되요. 기준이 먼저 있고 해답이 갖추어 졌을 때는 그 다음의 조건이 뭐냐 하면 연습을 한다고 하니까 지금은 그 수준이 도달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지금은 그 수준에 도달이 안 된 상태이죠.
연습을 한다고 하는 말은 도달이 미흡 한 상태에서 점차 기 기준에 합체하도록 맞춰 그 기준에 가까이 접근해 나간다는 뉘앙스가 있죠. 그것을 연습한다고 하는 겁니다. 체조 같은 경우에 또는 프리킥 찰 때, 바나나킥 할 때 전부 다 연습한다, 또 투수가 공을 던질 때 연습을 많이 한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코스에다가 공을 척척 던질 수가 있죠. 결국 연습하라 하는 것은 해답과 기준이 이미 여러분 알고 계시죠. 하는 경우나 연습과 해답이 가능하죠.
또 하나 더 쉬운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암벽등반이라든지 높은데 기어 올라가는 것을 취미로 하고 있다고 할 때 암벽타기를 스파이더맨처럼 올라가죠.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떤 빌딩을 봤는데 100층짜리 빌딩이 있는데 저것을 맨손으로 1층부터 100층까지 가고 싶다고 할 때 바로 달려듭니까? 뭐해야 됩니까? 연습해야 되죠. 그 연습한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목표가 이미 정해 져있습니까? 안 정해 졌습니까? 만약에 그 사람이 부단히 연습해서 100층까지 올라가게 되면 그 사람은 연습의 효과가 100% 있는 거죠. 분명히 목표가 딱 100층까지 올라야 되죠. 80층까지 오른다고 하는 것은 안 되죠. 100층 건물은 100층까지 딱 오를 때 연습이 실전의 하기 효과를 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 이 정도까지 되면 나는 신앙생활이 있다 하는 그 기준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형제를 미워하지 마라,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라는 말씀에 대해서 그것에 합치되는 목표가 있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형제를 미워했는데 연습 많이 하니까 그 다음부터 형제가 미워 지지 않더라 하는 것이 성립이 될까요? 안 될까요? 우리가 형제를 몇 명 만나봤습니까? 한 10명 만나보고 형제 사랑한다고 하는 11번째 형제도 자연적으로 사랑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죠. 부모님이 자식을 가르칠 때에 부모가 그런 이야기합니다. 너희들 밥 먹기 전에 일찍 좀 일어났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런데 아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났어요. 일찍 일어나서 하는 말이 엄마의 말씀대로 아침에 일찍 일어났으니까 됐습니까? 일찍 일어난 것은 당연한 것이고, 네가 게임 그만하고 숙제좀 했으면 좋겠다!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지게 되면 그 아이는 뭐라 합니까? 나, 엄마 시키는 대로 일찍 일어났는데 왜 일찍 일어나니까 왜 칭찬 안 해 주고 또 다른 과제를 주면서 엄마는 불만족하다고 그렇게 이야기합니까?
그래서 애가 오기가 나서 게임 안 하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말입니다. 엄마, 시키는 대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게임도 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이제 됐습니까? 나는 너 친구를 좀 정리했으면 좋겠다! 또 과제를 주는 거예요. 아이 한도 끝도 없어요.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할 때에 나는 이 정도는 사랑하겠다고 말을 했는데 막상 그 수준에 이르니까 사람이 욕심이 납니까? 안 납니까? 나죠. 더 다른 것을 요구하게 되죠. 부부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이랬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니까 됐고 그 다음에 이것 좀 해 줬으면 좋겠다, 그것 하니까 됐고 그 다음에 또 하니까 도대체 내 인생이란 없고 누구 장단에 손에 놀아나는 자기가 결정하는 인생은 없고 배우자 요구하는 대로 다 살아주는 이것은 한도 끝도 없어요.
어느 날 자기 배우자가 원하는 대로 딱 했어요. 딱 하니까 여자 하는 말이 아니, 남자가 돼 가지고 내가 하라는 대로 다해? 뭐 어쩌란 말이에요.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또 시키는 대로 했다고 난리를 치니 그러니까 요구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서 결국 요구하는 사람도 본인이 지금 요구 할 거냐, 요구 안 말거냐를 본인도 스스로 마음을 잡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마음을 잡을 수가 없죠. 왜냐 하면 모든 인간은 상황에 따라서 감정이 휘둘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자녀가 어떤 행동을 해도 예뻐 보이지만 똑같은 행동을 해도 본인이 기분이 나쁘면 그 다음부터는 자녀에게 매를 들고 내가 배렸다고 하면서 호되게 혼내는 경우도 많이 있잖아요. 장사하다 보면 똑같이 오는 손님인데 집안에 어떤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미소를 띠면서 맞이하는데 손님이 불친절해도 뭐 집안에 좋은 일도 있는데 그것은 신경도 안 쓰는데 집안이 안 좋은 상태에서 장사를 하게 되면 고객이 기분 나쁘게 하면 같이 되받아 칩니다.
그러면 도대체 경건에 이르렀다는 그 해답을 누가 정하는 겁니까? 본인이 경건을 행 했다고 하는데 그 경건가지고 참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자기에게 있는 경건을 총동원해도 도저히 그 사람의 행동을 그냥 보고 못 넘어가겠다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지금까지 자기가 쌓아왔던 그 경건의 연습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무효가 될 수가 있고 소용없는 기술이 되죠. 소용없는 자기 습관이 된다 말입니다. 써 먹을 때가 없는 겁니다. 경건의 표시를 내야 되는데 경건의 표시를 내려하니까 상대방이 안 받아 줄 때는 경건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죠.
경건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장착할 수 있는 자기의 능력으로 전환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나는 건드리기만 해도 경건이 나와!’ ‘왜?’ ‘나는 내 안에 경건의 능력이 늘 충만하기 때문에’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게 가능하다면 연습하면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두 번째 문제는 가능하다고 치고 그게 연습하면 그 수준에 도달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래서 여기 성경에서는 육체의 연습과 믿음의 연습을 구분한 겁니다. 육체의 연습이라는 것은 피아노 치는 사람들이 젊을 때 피아노를 잘치고 또 재원성도님이 하는 일처럼 노래 가르치는 일을 한다면서요? 65세 노인을 가르쳐봤습니까? 만약에 65세 할머니가 와서 이선희처럼 부르게 해 달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뭐라고 이야기해요? 왜 못한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몸이 안 되죠. 그러면 그 쪽에서 하는 말이 열심히 연습하면 되겠죠? 라고 할 때 연습해도 안 되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는 말은 계속 간다? 계속 지속된다는 말입니까? 안 된다는 말입니까? 안 되지요. 그러면 신앙생활이 육체의 연습으로 가능하다? 가능하지 않다? 가능하지 않죠. 그러면 신앙생활은 육체하고 관계가 없는 겁니까? 신앙생활 잘 한다는 것은 어떤 형식적인 기준과 해답이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그대로 우리는 모방하고 흉내 내면 돼요. 여러분들은 실제를 그것을 지금 많이 하고 있습니다. 뭐냐 하면 나는 기도 할 때 꿇어앉아하니 기도가 은혜가 되더라! 그러면 꿇어앉는다는 말은 내 몸의 다리를 접는 거죠.
처음에 하게 되면 다리가 저려 5분도 못 앉아있죠. 그런데 이것은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이것은 형식이기 때문에 육체의 모습에 해당되는 거죠. 육체의 모습에 해당되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기도가 안 되더라!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증하기를 내가 관절이 아파서 항상 그냥 앉아 있지를 못했는데 어느 날 내가 기도원에서 기도 하는 가운데 기도에 푹 잠겨있었는데 나중에 일어나보니까 내가 지난 3년 동안 관절이 아파서 꿇지도 못하던 그 무릎을 나는 밤새도록 꿇어서 기도를 하고 산에서 내려올 때는 돈으로 고치지 못했는데 기도 하는 가운데 다 고쳤습니다. 라는 간증을 했다고 칩시다.
그런 종류의 간증들이 많아요.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나도 관절이 안 좋은데 나도 기도원에 가서 뭘 해 볼까? 그러면 그 목적이 뭡니까? 목적은 결국은 무릎이 아픈 것이 안 아프게 되는 목적이죠. 그러면 그 안 아프게 되는 목적을 위하여 몸이니까, 형식이니까 육적인 연습이 가능 하겠죠. 연습을 해 보는 거예요.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 기도 할 테니까 무릎 꿇겠습니다. 죽이 되던 밥이되던 여기서 못 일어나도 할 수 없고 해 보니까 이게 되더라 이 말이죠.
그런 노하우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도 우리나라 무릎 아픈 사람들이 전부 다 그 기관에 와서 연습들을 해 보겠죠. 그런데 그게 신앙생활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일까요? 아닐까요? 그것은 육체의 연습이지 신앙생활이 아니죠. 육체의 연습이라는 것이 그 당시 디모데전서에 나왔듯이 교회에서 그런 바람이 있었고 그런 모습들이 보인다는 것은 결국 신앙생활을 형식적으로 대충 끼어 맞췄다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했다고 치는 그런 경향들이 있었다 말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앞자리에 앉아야 은혜가 되더라 하면서 목사님이 요청했는데 사람들은 앞자리가 낯 뜨겁고 부끄러워서 자꾸 뒤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보다 못해서 오늘은 예배 안 드립니다. 오늘 도저히 이런 기분으로 예배 못 드리겠습니다. 오늘 예배를 안 드리던지 여러분들이 앞자리에 오던지 둘 중에 하나를 하세요. 여러분이 앞자리에 앉을 때 까지 예배 안 드립니다. 하고 잠시 목사님이 그 자리를 퇴장을 하니까 장로님이 여러분, 부탁합니다. 우리 예배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자리에 껌 붙은 것도 아니고 한번 그냥 앉아보세요. 앉으시면 제가 대표로 목사님 불러드리겠습니다.
다 해 놓고 목사님, 한번 와 보세요. 대충 앉았습니다. 보니까 대충 앉았다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자, 시작합시다. 할 때 이것은 무슨 연습이에요? 이것은 경건의 연습입니까? 육체의 연습입니까? 육체의 연습이잖아요. 육체의 연습인데 교회가 처음 간 것도 아닌데 목사님이 앞자리에 앉으라고 왜 그랬을까요? 자기 형식이 앞자리에 앉아줘야 이게 경건 된 모의 예배로 느껴지는 것이 그 목사님의 수십 년의 세월동안 그게 몸에 배긴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그 목사님이 뭔가 나름대로 그리고 있는 경건한 예배, 참된 경건의 모습을 나름대로 머릿속에 그려져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1. 사람들이 방긋방긋 웃는다. 2. 앞자리에 앉는다. 3. 눈을 맞춘다. 4. 노트 필기 준비 되어 있다. 이런 조건이 경건의 훈련입니까? 일반 모든 학교 수업의 훈련입니까? 학교 수업도 이런 것을 원하고 있죠. 왜 이렇게 원하느냐 하면 강의를 하거나 설교를 하게 되면 사람들이 설교자가 집중력을 가질 때 자기가 준비한 것을 힘들지 않고 내 놓을 수가 있어요. 만약에 앞자리에 아무도 안 앉고 뒷자리에 서있다던지 그냥 서 있는 게 아니고 전부 다 스마트폰으로 ‘예, 예 예배 마치고 곧 가겠습니다.’ ‘아이고 순희 엄마 내가 전화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지금 이렇게 하고 있을 때 앞에서 목사님이 강의를 할 수 있겠어요?
심지어 강의를 하고 있는데 띠리리띠 하고 벨소리가 울려버리면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을 때 보는 순간, 목사님이 그 다음 흐름, 그 다음 논리를 전개 하려고 했는데 분명히 목사님이 중요한 포인트를 했는데 띠리리띠 하는 그 쪽을 보다 보니까 다시 5초 지나고 난 뒤에 다시 보니까 목사님, 거기서 왜 그 말이 왜 나왔죠? 그렇게 되면 목사님도 그 말을 되돌려하니까 목사님도 설명하기 힘들뿐더러 그 다음에 그 사람의 휴대폰이 또 전화올 가능성이 있는 것을 미리 생각하려고 하니까 미리 오기 전에 중요한 것을 하려고 하려하니까 말이 바빠지는 거예요. 또 전화벨이 울릴 테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이 울리면 또 사람들이 돌려볼것이고 울리기전에 중요한 것을 빨리 압축해서 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뿐만 아닙니다. 강의 하는데 애 우는 것부터 해서 어떤 사람은 다리를 후덜덜 떠는 사람도 있고 어느 사람은 지금 강의를 하고 있는데 카메라 맞춘다고 뒤에서 있고 어떤 사람은 강의 하는데 반 이상 졸고 있을 때 흔히 말하는 교감이 안 된다 말입니다. 그러면 교감이 안 되면 그것은 경건한 예배입니까? 아닙니까? 경건한 예배와 상관이 있습니까? 육적인 연습에 해당됩니까? 어느 쪽이에요? 그것도 육적인 연습이에요.
이제부터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옛날에 제가 대구 성모교회에서 이단하고 공개 논쟁이 있었어요. 제가 그랬어요. 제가 제안을 했어요. 이 자리에서 하는 논쟁, 나 50% 하고 당신 50%하는데 녹음합시다. 그 쪽에서 하는 말이 녹음 못하겠답니다. 지금 주님이 지켜보고 계시는 것을 믿는다면 녹음하는 것이 어떠냐? 당신은 복음을 전하러 왔지 않느냐? 그럼 녹음이 안 된다는 말은 복음을 듣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냐? 복음이 진리하면 마음껏 전해야지 왜 그것을 녹음을 못하게 하느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지금 주님이 부활해서 살아 계시다는 겁니다.
주님이 살아계셔서 부활했으면 무엇의 의미도 날아갑니까? 우리가 여기 있다는 의미는 의미 없이 다 날아가 버려요. 살아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죠. 내가 이겼다! 네가 이겼다! 내가 잘했다 못했다 그게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의미 없죠. 그러면 지금은 진리의 복음을 전하고 어떤 사람에게 성경의 복음을 듣는 기회를 줘야 된다면 그 자리에서 우리는 뭐가 빠져야 됩니까? 내가 이겼다, 내가졌다, 내가 최면 깎였다 하는 것이 고려 대상입니까? 고려 대상이 아닙니까? 고려 대상이 아니죠.
그런데 그 사람이 나중에 내가 녹음해서 남들이 욕하는 것이 싫다 하는 이 말은 지금 주님이 살아 계심에 신경 쓰지 않고 누가 살아있다? 내가 살아 있다 에 신경 쓰죠. 그렇잖아요?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나타났다 이 말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자기를 신경썼습니까? 그 주님을 바라봤습니까? 그런데 주님하고 엘리야와 모세만 신경 쓴 거예요.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습니다. 라고 한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나한테 어떤 이익이냐 그런 것을 생각할 입장이 못 되죠.
제가 방금 이야기했듯이 경건의 훈련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육적인 인간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누가 계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전제로 할 때만 경건의 모습, 경건의 훈련이 된다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끼리, 우리 인간들끼리만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 경건의 모습을 아무리 훈련을 해도 이것은 결국은 자기체면과 자기 위신과 결부된 육체의 훈련이죠. 육체의 잘남이죠.
어떤 모임에서 내가 이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의 기억을 삭제해 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에 관해서만 경건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 만큼 경건하다를 챙겨버리면 그것은 경건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그 경건한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본인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본인의 체면과 위신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은 그 모임이 자기 잘난 자랑 질을 하는 그런 모임으로 전락하고 마는 겁니다.
사람이 나, 여기 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우리생각에는 나 여기 있다 해서 나만 생각하는 것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저 사람도 아니고 이 사람도 아니고 나 여기 있다 이런 뜻으로 생각할 때만 나 여기 있다가 되는 겁니다. 저 사람도 아니고 저 사람이 내가 아니고 이 사람도 내가 아니다 할 때만 나 여기 있다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이 계시면 뭐가 생각납니까? 주님 여기 계시니 되죠. 그 다음 뭐가 생각나요? 자기 생각납니까? 안 납니까? 안 나죠. 남 생각납니까? 안 납니까? 안 나죠. 이게 경건의 상태입니다. 왜냐 하면 경건한 분, 경건의 최종 해답은 누구입니까? 예수님만이 의롭고 경건하죠. 우리는 죄인으로서 구원받잖아요. 주님은 죄인을 용서하고 우리는 용서받는 죄인이 되고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어떤 사이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는 주 앞에 용서받았기에 예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사람이잖아요. 그게 뭐냐, 십자가의 증인되는 겁니다. 십자가의 증인이 뭡니까? 십자가 달렸다는 그 의가 뭡니까? 내가 율법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죄인인데 그 십자가의 흘린 피가 나를 용서했다는 것이 십자가 의가 맞죠. 그래서 누구를 자랑한다? 우리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만 자랑한다. 또는 갈라디아서 6장 같은 경우 우리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만 자랑한다. 또는 고린도전서 2장에는 예수님과 그 죽으심만을 자랑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 자랑할 것이 남아 있어요? 안 남아있어요? 안 남아 있죠. 주님 앞에 내 자랑할 것은 없죠. 그 다음에 만약에 주님이 안 계시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이 안 계심을 느끼면 우리는 그 관심이 어디로 갑니까? 남, 타인, 저 사람은 내가 아니고 남이고 나는 나고 하는 이런 관점으로 될 수밖에 없죠.
엄마가 이렇게 있고 아기가 이렇게 있다면 아기가 젖 달라고 운다면 이 때 애가 엄마한테 달려든다 말입니다. 엄마한테 시장가지 말라하고 보챕니다. 아기가 엄마한테 보챌 때 애기가 뭐만 쳐다봅니까? 엄마만 쳐다보죠. 그런데 애기가 엄마, 나 어때? 이렇게 됩니까? 안됩니까? 그것은 애아가 컸을 때 엄마한테 자기 자랑하고 싶을 때 “엄마, 나 어때?” 이렇게 됩니다. 그 때는 아기가 어떤 때입니까? 애기가 자아의식이 생길 때입니다. 그런데 갓난아기가 어떻습니까? 엄마만 있으면 돼요. 자기 자신이 누구냐를 생각 못합니다.
시편을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마치 젖을 먹는 어린 아이가 엄마 품속에서 젖을 먹는 것과 같은 상태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경건의 상태는 뭐냐,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서 누구만 있으면 족하다? 주님의 품 안에 있고 주님이 날마다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고 날마다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로 우리가 매일같이 살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주님을 생각하면서 늘 감사하는 그 마음이 경건이잖아요. 여기에 대해서 이의 없죠? 그렇다면 육체의 연습은 왜 해야 되는 거죠? 그 종교적인 육체의 연습을 왜 해야 됩니까? 이것은 주님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의식하는 겁니까? 남을 의식해서 하는 거죠. 목사님, 이런 것은 경건입니까? 앞자리에 앉으면 경건입니까? 제 말은 주변사람들을 의식한다는 말은 결국은 뭐를 의식한다? 내가 지금 어떨까? 내가 지금 남한테 잘 보일까? 머리 파마는 잘 나왔을까? 내 옷차림이 너무 야하지 않을까? 여러 가지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은 결국은 이것이 뭡니까? 남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남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일까? 나에 대한 집중 나의 관심사가 있기 때문에 나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잘 보이기 위해서 잘 보이기 위한 그 훈련을 하겠죠. 그 훈련을 하게 되면 이 정도하면 남들이 욕하지 않겠지! 라는 식으로 나름대로 목표를 정하고 해답, 기준을 정한다 말이죠. 그런 연습을 디모데전서에서 무슨 연습이라 했습니까? 이것을 육체의 연습이라 하는 거예요. 따지고 보니까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육체의 연습을 안 한 게 없죠. 전부 다 육체의 연습을 하고 있죠. 주님, 오늘 어떤 옷을 입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고 주여! 제가 어떻게 옷을 입으면 남들이 나보고 미치지 안하겠는가를 생각하겠죠. 주님을 인용하는 거예요. 주님, 제가 어떤 옷을 입고 나갈까요?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입히시는 대로 입히시면 제가 남들한테 욕을 안 얻어먹을 듯 합니다. 이렇게 해서 옷을 입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남의 시선과 남의 안목이 겁나고 두려워서 살아가는 겁니다. 육체의 연습이라는 말씀을 제가 왜 하느냐 하면 여기 본문에 육체의 연습이 나온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매일같이 내 육체의 연습 외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경건의 연습은 우리소관이 아니에요. 우리는 경건의 연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예수님을 타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제가 어떻습니까? 하는 것은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보시기에 근사해 보이는 나 자신을 먼저 우선적으로 챙기기 때문에 그런 버릇이 우리 몸에 남아 있어요. 이것도 육체의 연습이에요. 주님 보시기에 저 어떻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석에서 주님 만났을 때 뭐라 했습니까? 주님 보시기에 저 어때요? 이렇게 했습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했을 때 주여! 저 어때요? 이런 식으로 물었습니까? 진짜 자기 생각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만 생각해서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물었습니까? 그냥 주님만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본인이 인정하는 거예요? 주님 쪽에서 알려주는 겁니까?
주님 쪽에서 알려줬죠. 뭐라 했습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되어 있죠. 그렇다면 성경에서 나라는 개념은 내가 정하는 개념이 아니고 누가 정합니까? 예수님이 정해 놓고 그 정해 진 것을 나한테 돌려주는 것이 아니고 주님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들을 경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가 되는 겁니다. 이럴 때 이게 경건입니다. 경건의 주인공이 따로 있어요.
경건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경건의 주인공이라니까요. 주님이여! 오늘 제가 앞자리에 앉을까요? 뒷자리에 앉을까요? 이것은 주인공을 인정한다는 거예요. 내가 앞자리에 앉으면 주님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이것은 여전히 자기가 주인공이에요. 내가 앞자리에 앉는 것이 주님께서 예쁘다고 하시겠죠. 하는 이것은 자기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주님께서 오늘 어디에 앉으면 주의 뜻에 합당하겠습니까? 뒷자리에 앉을까요? 앞자리에 앉을까요? 이것은 어디에 앉던간에 그 자체가 주님께서 시키신 일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게 경건이에요.
제가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경건이란 반드시 무엇을 염두해 두느냐 하면 육의 연습을 고려한 입장에서 경건이 등장해야 돼야 됩니다. 육의 연습은 주인공이 누구다? 주님이 아니고 나가 주인공입니까? 나 자신의 근사하고 멋있어 보이는 나 자신이 주인공이 될 때 이것은 육의 연습이 되는 겁니다.
아까도 목사님이 설교한 이야기를 했지만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다보면 그것이 반복이 되죠. 반복이 되면 자기 나름대로 틀이 있어요. 그 틀대로 설교를 할 때 가장 자기 몸이 편해요. 왜? 늘 그런 식으로 해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휴대폰이 울린다든지 왔다 갔다 해 버리고 뒤에서 잡답을 하고 또는 졸거나 하면 집중도가 떨어지죠. 집중도가 떨어지니까 목사님이 뭐라 하느냐 하면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어제 밤새기도 하면서 백날 좋은 꼴, 참 오래간만에 써보는데 좋은 양식, 목자가 좋은 양식을 준비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좀 협조가 돼야 은혜가 되는데 여러분들이 그렇게 본의 아니게 훼방을 놔버리면 제가 준비한 것을 다 못하니까 결국은 여러분 손해입니다.
여러분, 옛날에 많이 듣던 맨트 아니에요? 조용히 하란 말이야! 지금 목자가 귀한 양식의 꼴을 주려고 하는데 여러분들이 그렇게 협조가 안 되면 제가 무슨 여러분에게 꼴을 먹이고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경건을 연습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은 내가 설교하는 것에 대해서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협조하도록 내 몸이 연습되어 있다는 표현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떠들던 뒹굴던 장난을 치던 간에 이 현장에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렇게 하는데 화가 난다는 말은 주께서 그렇게 하신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실 때 거기에 대해서 화가 난다다는 말은 설교자 본인이 그 상황을 자기 몸에 맞는 상황으로 지금 우기면서 시작했다는 표시입니다.
주님이여! 이런 상황을 만들어 줄 경우는 제가 설교를 하겠습니다. 안 그러면 기분 나빠 못하겠습니다. 라고 자기가 주님한테 지시하고 명령하고 협박하는 것이 꼴이 된다 이 말이죠. 설교라는 것이 이런 경우가 참 힘들어요. 설교를 하는데 뒤에서 벅벅 화를 낼 때는 설교 초반을 잡기가 참 힘들어요. 동영상 안 된다고 화를 내고 있는데 같이 화가 나는 거예요. 제발 좀 화를 그만 내라고 자제하라 입장에서 설교가 급작스럽게 설교가 되어 버린 거예요.
많이 당황스럽죠. 이런 경우를 오랜 만에 당해 가지고……. 저 사람은 화 안 풀면 설교를 잘하겠는데 그것이 어느 새 나의 익숙한 나의 육의 법칙이 되고 말았던 거예요. 평온가운데서 웃으면서 전하고 싶은 것을 웃으면서 전할 수 있어야 되는데 예상 밖으로 갑자기 화를 내고 있으니까 같이 화를 내니까 설교가 초반부터 그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약간은 당황스럽죠. 웃음도 안 나오고요.
그런데 조금 하다보니까 아하,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 주께서 일부로 하셨다, 갑자기 동영상 안 되는 것도 주께서 하셨고 화내는 것도 주께서 하셨고 뒤에서 화를 내던 말든 앞에서 무슨 영문이야, 무슨 뜻이야? 왜 갑자기 목사님의 설교가 딱딱하지? 로 느끼게 하는고 있도 주께서 그렇게 하셨고 바로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미리 사태를 예상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겁니다. 장차 일은 내 뜻대로만 되어야 된다고 되지도 않는 그런 권리도 없으면서 그런 고집을 부렸던 거예요.
이것은 목사님의 설교만 예를 들었지만, 여러분 모든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다 마찬가지에요. 퇴근하고 돌아오는 남편의 모습은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집에 있는 아내가 짐작을 하고 예상을 해 버리면 그 뜻대로 안될 때 우리는 얼마나 아내의 입장에서 화가 납니까? 누구는 이 집에서 노는 줄 알아! 들어오자마자 싸우고 난리가 나죠. 피곤해 죽겠는데 말을 그 모양으로 해야 되냐? 나는 힘 안 드는 줄 알아? 당신 시가집은 어떻고? 갑자기 시가집 이야기를 하니까 남편 쪽에서 그럼 친정집은? 너는 그 따구로 배웠냐? 뭐? 친정집? 갈라서자! 갑가기 부부싸움이 크게 되어 버리죠.
문제는 왜 둘 다 예상했느냐 하는 겁니다. 그 예상이 어디서 나온 겁니까? 내 몸의 연습에서 나온 겁니다. 우리 가정은 이래야 되고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야 되고 이것을 내 편한 몸이 미리 예상을 하니까 주께서는 그 예상을 꺾어버리는 거예요. 이 세상은 네 중심이 아니라고요. 꺾으니까 우리의 본성이 튀어나와 버리는 겁니다. 언제인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번 수련회에서 했는데 강의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출애굽을 공부하지만 사실 출애굽하고 싶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어요. 왜 아무도 없느냐? 출애굽이 되려면 애굽에서 탈출을 일단해 보고 그리고 그 나라가 참 좋다는 것을 알 경우에 애굽 생활이 아이고 지긋지긋하다 이렇게 될 때에 탈출의 의지가 생기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가 태어낼 때부터 봐왔던 세상뿐이에요.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없습니다. 무슨 동기로 무슨 의지로 우리가 이 세상을 벗어난다 말입니까? 뭐 죽으면 좋은 나라가 있겠지? 그것은 이 세상에서 만든 조작된 거예요. 결국 천국은 아닙니다. 죽으면 좋은 나라 있겠지 그것은 이 세상 살면서 상상한 세상이지 정작 출애굽은 주님이 알아요. 주님은 그 나라에 사셨던 분이 왔기 때문에 압니다. 이 땅을 그냥 다녀가신 겁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다녀갔다는 말을 하면 안돼요. 그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태어난 자리가 이 자리 밖에 없는데 무슨 다녀가요. 차라리 욥이 솔직해요. 하나님이여! 이럴 것 같으면 태어나지도 말아야지! 차라리 욥이 솔직하지 다녀간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다녀간다는 말을 하니까 이런 노래가 있어요. 조수미가 불렀던 ‘나 가거든’이란 명성황후 주제곡이 있어요. 거기 가사 중에 ‘이 세상 다녀간 후에’라는 것이 있는데 자기가 뭔데 다녀갑니까? 자기가 예수님입니까? 우리는 태어날 때 이 세상 밖에 없는데 탈출이 안 됩니다. 탈출 안되는 게 아니고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아이고,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이런 생각이지 무슨 탈출을 해요?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보고 여보, 오늘도 탈출합시다. 이럽니까? 돈 많이 벌어와요! 그래서 우리도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잘 살아요! 그것은 출애굽입니까? 아니면 죽치고 앉아 있겠다는 겁니까? 이 땅에 죽치고 앉아있겠다는 거예요. 애굽에서 탈출이 아니고 애굽에서 성공 못해서 환장한 사람들이에요. 무슨 탈출을 해요? 탈출의지가 없는데 디모데전서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저 육체의 연습만할 뿐이죠. 내 신앙생활 맞지요? 만날 연습만 해 가지고 남을 의식하면서 남이 보기에 신앙인다우냐! 자꾸 그것만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 까지 오면서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목사님, 저 선택된 것 맞습니까? 저, 예정된 것 맞아요? 그 질문을 왜 합니까? 누구한테 관심이 있기 때문에 타인인 나보고 묻는 거예요. 그럼 제가 아이고 택하신 백성 맞네요. 이러면 그 사람은 저 핑계를 대고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이럴 작정인 모양이에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그 사람자리에 제 핑계가 계속해서 들어와야 되는 거예요. 자기를 위한 나가 되는 거예요. 나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타인이 요구가 되니까 이것은 육체의 연습에 불과한 겁니다.
성경에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는 말은 이 약간의 말은 전혀 진짜 경건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육체의 연습을 왜 하느냐? 그동안 사람들이 신앙생활, 경건의 생활, 거룩한 생활하는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육체의 연습과 구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그것을 시도 하는 거예요. 그렇게 시도 하는 이유는 나름대로의 아마 이정도 되면 경건일 것이다. 하는 어떤 형식같은게 있어요. 모양새가 있어요. 그것은 어디서 배웠느냐? 그것은 주변에 있는 모임에서 나온 것이고 그 주변에서의 모임은 너나 내나할 수 있는 고상한 것들, 경건한 것을 뽑아서 계속 누적되다 보니까 남들이 하는데 내가 왜 못해? 나도 할 수 있지! 그래서 흉내 내는 거예요. 앞자리 앉고 기도 할 때 꿇어앉아하고 이것은 흉내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는 경건은 뭐라? 경건은 그렇게 나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고 그 현장에 누가 계시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계시고 주님 계심에 무엇을 잊어버린다? 나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아, 주님께서는 또 이렇게 모든 것을 주셨구나! 주님이 우선이고 나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니까요. 거기에 무슨 형식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제도가 있습니까? 형식과 제도 대신에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나, 이렇게 용서받았습니다. 나오죠. 용서받았습니다. 하고 나오면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용서받은 상태가 바로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상태이기 때문에 용서가 의미가 있잖아요. 죄인도 아닌데 용서라고 하는 것이 의미가 없잖아요. 용서해 달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 죄지었습니다.’ 그런 뜻이잖아요. 나는 죄인이라고 했으니까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을 것이고 다만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해 주신 주님께서 감사하겠죠.
그것이 자연스럽게 자기의 몸과 행동과 태도에서 나오게 되면 그 사람은 결국 뭐가 나온다는 말이냐? 결국 사랑이 나오고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이 나오고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가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사랑과 용서가 결국 무엇으로 이어지는가? 감사함으로 이어집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용서를 받았고 용서받았기에 용서가 나와서 그게 감사로 이어진다고 제가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을 제가 이야기하는 순간, 이것을 모방하고 흉내 내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학대하거나 자기의 몸을 추스르게 되면 이것은 경건입니까? 아니면 육의 연습입니까? 육체의 연습입니다. 이것도 또는 육체의 연습이 됩니다.
왜냐 하면 제가 말한 것을 형식화시킵니다. 아, 사랑이 오게 되면 사랑이 느끼게 되고 모든 범사에 감사되는구나! 이게 갑자기 형식화됩니다. 머리에 들어오게 되면 그러면 그 형식에 따라 붙이기 위해서 미진한 부분을 스스로 자기를 절제하면서 거기에 맞추려고 애를 쓰다 보면 이것은 육체의 연습으로 되는 겁니다.
8절에 봅시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여기에 유익하다고 한 것은 어디에 유익하다는 말입니까? 범사이죠. 범사라고 하는 것은 이 상황과 어떤 사태에 대해서 내 쪽에서 예상한다, 기대한다가 없죠. 예상 안 해도 되고 기대를 안 해도 되는 거예요. 내가 퇴근했을 때 아내는 방긋 웃면서 앞치마 두르면서 여보, 이제 오세요! 하면서 인사해야 된다는 이런 것을 예상해야 됩니까? 안 해야 됩니까? 할 필요 없죠. 남자들은 이러한 로망이 있어요.
결혼을 했으면 자기가 회사에 갖다오게 되면 아내가 된장찌개 맛있게 끓여놓고 앞치마 두르고 여보, 이제 오세요! 라고 한복이든지 이런 것을 입고 마치 새댁처럼 반겨줄 때 가방을 던지지면서 ‘내가 이 맛에 산다!’ 이런 시나리오, 이런 소설을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퇴근하는데 아내는 콜라텍에 가서 춤추고 하는 것을 예상 안했다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범사에 감사한 것이 아니잖아요? 왜 자꾸 미리 예상하고 기대합니까? 이것은 자기 손가락과 자기 눈알 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자기 주님 주신 상황을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타인에게 원망하고 이것을 백날 연습해도 한 순간에 욱 하고 올라오면 연습한 것이 다 깨져버립니다. 육의 연습을 하지 마시고 지금 누가 손질하고 누가 도와주고 있는지를 범사에 그것을 헤아려 새삼스럽게 뒤에 일이 되고 난 뒤에 경건을 찾아내는 그런 존재가 바로 성도의 존재입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40905b (연습불가)―이 근호 목사 성도가 경건이냐 육의 연습이냐를 구분하는 방법은 그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사후에 그것을 발견하는 식으로 알게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예상하고 짐작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아, 이 정도하면 경건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경건에서 땡! 탈락이 돼 버려요.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기도를 가게 되면 아마 10일후에 내 모습은 하늘의 해처럼 아우라가 있을 것이고 광채가 빛날 것이라고 예상을 하게 되면 이미 그렇게 얼굴에 광채가 나야 경건이라고 여기는 순간 그것은 육체의 연습이 되어 버려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잘 했던 거예요. 금식하고 난 뒤에 금식했을 때 그들의 뒷모습이 아주 치근해 보이고 뭔가 심한 영적 악마와 사투를 벌였다는 흔적을 마구 내밀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금식하고 난 뒤에 아주 찡그렸죠. 그것을 보고 예수님은 뭐라 했습니까? 차라리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이랬죠. 예수님이 머리에 기름을 바르라고 했으면 그 다음에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어요? 금식하고 난 뒤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면 그것이 뭐가 되겠어요? 그것도 육체의 연습이 되어 버리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 보고 일부로 찡그리며 오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차라리 금식한 티를 내지 마라라고 했으면 그 다음부터 그것을 듣는 순간, 우리는 금식의 티를 안내는 티를 내게 되어 있죠. 인간이 미리 그것을 예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한 겁니다. 경건이라 하는 것은 나는 경건하고자 하지 않았는데 주께서 경건의 길로 인도했음을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차후에 그것을 발견하는 식으로 그것을 우리가 거기에 접하게 된다는 것을 첫 시간 끝에 이야기 한 겁니다. 돌아보면 경건이 아닌 게 없을 정도로 느낀다면 그 사람이 평소에 경건의 생활을 하고 잘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얼마나 경건 생활을 안 했으면 육체의 연습을 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이미 본인스스로 경건의 생활을 안 하고 있다고 스스로 확정을 지어 버린 거예요. 이러니까 이것은 관심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내가 얼마나 경건하냐. 거기에 눈독들이고 거기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이 말이거든요. 그래서 경건치 않는 나를 어떻게 하면 경건한 모습으로 전환될까 라고 시도하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짐작이 되고 예상이 되고 기대가 된다면 그 사람은 무엇을 해도 그게 육체의 연습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말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 보세요. 선지자들이 연습했습니까? 어떤 북쪽 이스라엘 선지가가 주의 말씀을 어기면 안 된다고 소리를 듣고 일부로 어겨보니까 사자가 와서 뜯어먹었던가요? 가르게 아니죠. 길에 사자가 나타난 것을 본인이 예상했어요? 예상 안했어요? 전혀 예상 못 했죠. 그거라니까요. 예상 못한 거라니까요. 경건은 내가 미리 내가 이쯤 돼야 경건이지 하고 예상 못하는 가운데서 평소에 주님께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인도해 왔다는 것을 나중에 돌아보면서 몽땅 주앞에 감사하는 것이 그것이 경건입니다. 발람 선지자가 당나귀를 만났잖아요. 발람 선지자가 당나귀를 이야기를 할 줄 미리 알았어요? 몰랐어요? 당나귀가 이쯤 되면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하고 미리 알았어요? 몰랐어요? 당나귀가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로 없었어요. 오직 어떤 순간? 발람이 당나귀를 때릴 때 그 순간, 왜 때립니까? 이렇게 나왔단 말입니다. 그게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신직수씨 집에 강아지 한번 때려보서요. 말하는지, 왜 때립니까? 하고 이야기할 때 얼마나 놀라시겠습니까? 내가 지금 강아지랑 사는지 귀신하고 사는지 구분 안되겠죠. 이게 예상되었던가요? 홍해가 갈라지는 것이 예상되었습니까?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이 예상되었습니까? 전혀 예상되지 않았죠. 이 말은 그 예상되지 못한다는 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 8절에 뭐라 하냐 하면 금생과 내생에 뭐가 있으리라? 약속입니다. 약속은 우리가 예상한 대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약속이 우리가 예상한대로 주어진다면 쟁기 잡는 자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겨두지를 않아요. 신랑 오는 시점을 안다면 몇 시에 온다면 절대로 그 여자들이 다 잠을 자지 않았어요. 다 깨어 있었을 꺼예요. 신랑이 몇 시에 온다면 만약에 새벽 2시 반에 온다면 2시 15분까지 이미 sk주유소가서 전부 다 기름을 다 준비했을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언제 오십니까? 인간의 예상을 비껴서 오시죠. 그래서 주님이 오고난 뒤에 휴거되어 올라가 천국 간다면 그 사람이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하고 이야기하겠어요?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라고 이야기하겠죠. 왜요? 주님께서 깨어 있도록 조치를 해 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깨어 있어야 주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오실 때 자기 백성만은 깨어있도록 조치를 해 주셨다는 것이 그 약속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하다보니까 너무 어렵게 되었는데 약속이라는 것이 내가 만든 약속이 아니고 저쪽, 주님이 만들었죠. 주님이 약속을 만들 때 그 약속 안에 뭐가 포함되었느냐 하면 우리가 약속을 받아들인다는 내용도 이 내용 안에 포함이 되어 있을까요? 없을까요? 내용 안에 들어있어요. 엄마가 애를 낳을 때 애 크기를 보고 기저귀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고 미리 준비를 해 둡니다. 이름 지을 때도 태어나면서부터 짓잖아요. 이름을 지을 때 내가 이름을 짓기보다는 아이의 자존심도 있으니까 아이한테 물어봐야겠다. 아가야, 네 이름을 뭐라 짓는 것이 좋겠냐? 엄마야, 옳지 엄마라고 짓자! 이렇게 짓습니까? 안 물었죠. 일방적으로 다 짓잖아요.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이름을 이미 하나님이 지었다는 말은 그 사람이 예상하는 대로 이름을 짓지 않아요. 우리가 남에게 별명을 붙일 때 그 사람한테 물어보고 별명을 짓습니까? 야, 개코야! 하고 부를 때 그것을 개코한테 물어보고 개코라고 졌습니까? 아니죠. 일방적으로 부르잖아요. 어떤 할머니가 토스트를 구우면 토스트 할머니가 되죠. 어디서 들어본 적 있습니까? 드라마에 나오는 겁니다. 나는 이제부터 할머니를 토스트 할머니라고 부를 거야! 그런 드라마가 있어요. 왜 자꾸 토스토 할머니라고 하느냐 그것은 그 아이 마음대로에요 그 손녀 마음대로에요. 이게 무슨 드라마이냐, 장보리 드라마에요. 주님의 약속가운데서 우리는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존재해야지 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어진다는 것이 우리의 실력이 아니고 그 약속 속에 너는 반드시 이 약속을 믿게 되어 있어! 라고 그 안에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 약속의 능력이 발휘된 현장에서 우리는 거기에 그 약속이 있음을 증명하듯이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다. 거봐! 약속 때문에 이렇게 되었잖아! 너는 어떻게 믿게 되었는데? 약속 때문에 믿게 되었어! 약속이 뭔데? 약속은 예수그리스도야! 그건 뭔뜻이야? 예수님 때문에 내가 믿게 되었어! 왜? 주님 주신 선물이니까! 그렇게 되는 겁니다.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고 했는데 금생과 내생에 관해 내생은 죽어봐야 안다고 이야기를 하죠. 내세는 죽어봐야 아는 겁니까? 그러면 죽어봐야 안다면 내세는 약속에서 삭제가 돼야 돼요. 주님이여! 금생까지만 알고 내세는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약속을 두 토막을 내서 금생에 있는 약속은 우리가 믿고 내세에 대해서는 나는 모르겠다! 가봐야 알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둘로 쪼개서 따로 따로 믿을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약속을 믿는다는 말은 내생과 금생을 다 믿어야지 어느 한 쪽만 내가 믿을 만한 것만 믿는 것이 없잖아요. 그래서 구약에 있는 믿음의 조상들에게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밑을 수 없는 것까지 주께서 믿게 만드는 조치들이 따라왔던 겁니다. 그중에 하나를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가질 때 아내 사라의 태가 이미 죽었죠. 태가 이미 죽었습니다. 죽을까 말까도 아닌 태가 죽었어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히 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우리가 금생과 내생에서 약속이 있다는 말을 할 때에 금생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경험할 수 있는 내용과 그리고 내세의 내용과 이렇게 다른 내용이 아니에요. 연결되어 있다 말입니다. 여기에 만두가 하나 있는데요. 이렇게 중간에 관통을 시킨다 말이죠. 여기 안에 있는 것을 금생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을 내생이라면 이게 같은 꼬지에 전부 다 같은 내용이다 말입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같은 내용이거든요. 내생이 만약에 이 땅에 들어왔다고 보게 되면 이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믿을 수 없을까요? 인간의 능력으로 믿을 수 있을까? 없을까요? 못 믿죠. 우리 인간 세상에서 인간이 죽어버리면 또 삽니까? 안삽니까? 못살아요. 죽은 사람은 더 못삽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기 때문에 이것을 믿습니다. 누가 살았다고 하면 에이 거짓말하지 마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여자가 임신이 죽었으면 애기를 낳아요? 못나요? 못 낳죠. 시험관 아기해도 안 돼요. 임신태가 죽었는데 시험관 아기 백날해해도 안돼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뭘 믿었다는 말입니까?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것은 내 아내의 태가 죽은 것은 내세의 약속이 죽은 자도 살려낸다는 내용 때문에 그 내용에 포함이 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태가 죽은 것으로 보는 거예요. 말을 어렵게 안했는데 어렵게 되어버렸는데, 내 아내가 임신을 못하는 태가 늙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이 태가 죽어도 애가 나올 수 있는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을 나를 통해서 발휘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 태를 죽은 가운데 일부로 태를 죽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었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그냥 태가 안 죽을 때 애를 낳으면 우리는 금생밖에 안되는데 이 금생과 내생이 연결되는 그 꼬챙이는 약속 되는 거거든요. 내가 아는 상식으로 사는 게 아니고 이 관통의 미래에서 현재로 관통해 들어오는 그 약속이 내 영혼을 관통하려면 일반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믿으려야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속에 이미 발휘되는 쪽으로 우리가 지금 환영 당하고 있는 거예요. 인생이 내 의지 대로 되는 게 아니고 약속의 의지대로 되어 가는 거예요. 약속이 죽은데서 사는 살리게 하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 인생이 발현되어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추석 때 안 하지만 안 믿는 사람들은 추석 때 뭐합니까? 좌측용 우백호 하면서 제사하죠. 제사상 차릴 때 애들이 야 맛있는 것 하면서 제사 드리지도 않았는데 상위에 올라가면 뭐라 합니까? 에이 때치! 어디? 제사 드리고 먹어야지! 이렇게 내 쫓죠. 왜 그 상에 들어가면 안 됩니까? 신성한 것이고 거룩한 것이고 조상한테 드리는 깨끗한 것이죠. 그러면 애가 거기에 왜 올라가면 안돼요? 애는 평소에 신성하지도 않고 거룩하지도 않고 그렇죠? 특별하지도 않죠. 그러면 애는 그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제사 끝날 때까지 참아야 되지요. 애는 왜 참아야 됩니까? 제사 지낸다는 그 종교 의식을 위해서 먹고 싶어도 참아야 되지요. 우리 인생이 무엇을 위하여 왜 이 모양 이 꼴입니까? 내생과 금생의 관통되는 그 약속을 보여 주기 위해서 참아야 되고 그 길을 가야만 되는 길에 초청받은 사람이 성도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 말입니다. 그게 믿음의 자손이라 이 말이에요. 화살이 여러분들에게 관통되어 있습니까? 하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들은 내생에 금생을 통하는 약속이 있습니까? 라는 같은 질문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파푸아뉴기니의 식인종도 마찬가지로 사람 바비큐, 불 피워 놓고 사람하나 잡아 묶어서 양념 발라 입맛다셔가면서 빙빙 돌리면서 약속이라는 꼬챙이에 끼워서 멧돼지 바비큐 하듯이 빙빙 돌리는 겁니다. 우리 인생이 지금 그런 꼴입니다. 싫어요? 이 꼴이 싫어요? 내 인생이 왜 이 모양이야? 1등도 안되고 고생하고……. 내 인생이 따로 있으면 그것은 뭘 믿는 겁니까? 내 인생이 내 인생을 만드는 겁니다. 내가 노력하고 내가 열심히 한 내가 만든 그 인생은 믿는 게 아니죠. 자기가 자기 믿는 게 무슨 믿음입니까? 그것은 경건의 모습을 띠려고 하는 육체의 연습에 불과한 거죠. 교회에 와서 만날 연습해요. 목사님, 또 뭐하면 됩니까? 높이뛰기 할까요? 뭐 하면 됩니까? 기도는 어떻게 하고 찬송가 부를 때는 어떻게 하고 해병대 박수를 칠까요? 온갖 모방을 다하는데 그게 바로 그것이 아주 고상하게 정립되어 있으면 그게 천주교의 예배 제도 형식이라는 겁니다. 그게 관행이고 관습이 되는 거죠. 우리는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할 때 그럼 그게 관행이고 관습이고 행색이라면 우리는 교회에 와서 개판치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 되겠네요. 또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어요. 지난 시간에 분명히 제가 이야기했거든요. 사랑이 오면 뭐가 나온다? 사랑과 감사와 용서가 나온다고 했죠. 그 이야기는 쏙 빼먹고 그러면 형식 제도 없애면 우리는 개판 쳐도 되네요? 이렇게 질문하는 질문이 십자가 마을에 한 천개 넘습니다. 한 번에 말길을 못알아 들어요. 사랑이 나오고 감사가 나오고 용서가 나옵니다. 뭐가 더 필요한데요? 그것도 모르고 개판 쳐도 되겠네?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온 것은 바로 내가 죄인이다. 그것뿐입니다. 내가 한 평생 살아온 것이 내 뜻대로 내 고집대로 살았지만 주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지 아니하시고 내 몸을 주님의 약속을 발현하고 약속을 펼쳐 보이고 약속을 발산해 보이는 사람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바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아브라함 인생에게 찾아오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찾아온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구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에요. 그 사람들만 장차 천국에서 집합하게 됩니다. 천국에서 헤쳐모여 해서 천국에서 다시 모이게 돼요. 그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 행위를 자랑하지 않아요. 왜? 자기가 꼬챙이 꼽은 게 아니니까요. 주님이 약속의 꼬챙이를 집어 줬으니까요. 이제 남아 있는게 뭐가 남아 있느냐 하면 우리에게 문제가 그게 육체의 연습이냐 아니면 그게 약속에 해당되는 것이냐 하는 그것만 통과하면 되겠어요. 하나님의 약속이냐 경건이냐 아니면 우리의 육신의 반복이냐 하는 것은 제가 이야기했어요. 이게 예상하고 짐작한 것이라면 이것은 육체의 연습이고 예상도 못하고 짐작도 못했는데 감사와 사랑과 용서로 이어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신 약속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참 쉬워요. 히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이게 뭐냐 하면 죽은 자과 방불했다는 겁니다. 그럼 조금 더 진도 나갑니다. 목사님, 약속이 뭡니까? 약속이라 하는 것은 소급해서 파악하는데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면 내가 만약에 죽은 자라면, 죽음과 관련해서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그러한 계기들입니다.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예상하고 짐작하거든요. 그런데 내가 만약에 죽은 자라면 내가 만약에 관속에 묻혔다면 관속에 묻힌 상태에서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와 관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와 관련 없는 일이에요. 앞으로 5일인가 6일 뒤인가에 아시안 게임하잖아요. 지금 내가 오늘 저녁에 죽는다면 내가 아시안게임에 심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하죠. 그러면 아시안 게임이 어떻게 되든 한국이 몇 등을 하던 이미 죽은 자한테는 상관이 없죠. 바로 그겁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나를 묶어놓고 돌아가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 묶어놨다는 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죽은 자와 방불한 거예요. 그럼 내가 활동하고 하는 모든 것은 이게 내 계획입니까? 주님의 계획입니까? 나를 죽은 자로 만들어 놨기 때문에 이것은 누구 계획입니까? 주님의 약속에 포함된 내용이 나를 통해서 지금 발현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먹든지 마시던지 살든지 죽든지 누구의 것이다? 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그럼 숨도 쉬지 말까? 하나, 둘, 셋 합죽이가 됩시다! 합! 그러면 두 손을 묶어놓고 백날 묶고 백날 숨 쉬지 마세요. 지금 숨쉬도 있다는 그것부터 살아 있어요. 그것을 묶어야죠. 나 숨 쉬고 있다 지금 5분동안 참고 있다! 그것도 묶어놔야죠. 그것도 없어야죠.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식하는데서 벗어나는 경우는 어떤 경우 밖에 없느냐 하면 자기 보다 더 우선적이고 더 크신 분이 느껴질 때 그 순간만큼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려요. 예를 들어 남자들이 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TV, 영화에서 봤던 여자 배우가 갑자기 앞에 등장할 때 나는 평소에 점잖아! 나는 아무 여자한테 반하지 않아!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예상 밖에 미모의 여인이 나타났을 때 순간적으로 싸인하나 부탁합니다. 할 때 그 순간 그 사람이 숨을 멈추고 있는 겁니까? 손발을 묶은 겁니까? 아니면 어떤 행동을 보여 주는 겁니까? 상대방에게 무조건 기어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무조건 당신의 미모에 굴복하겠습니다. 하는 자신도 모르는 그런 행동이 나왔죠. 바로 그 행동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행동이라니까요. 자기 자랑과 자기 위신과 체면을 순간적으로 놓쳐버리는 그런 행동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베드로가 변화 산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자기를 위해서 집을 짓지 않는 거예요. 주를 위해서 엘리야 모세 집을 짓듯이 그 순간이 뭡니까? 갑자기 지금 하는 행동에서 나한테 자기 이익이 빠져버리죠. 그런 감격적인 순간, 또는 반대로 운전을 하는데 상대방이 추월해서 지나 갈 때 자신도 모르게 몸의 연습이 아닌데 에이씨 하고 욕이 나온 거예요. 평소에 욕을 많이 연습한 게 아니에요. 차가 지나 가면 내가 욕을 해야지 이게 연습한적이 없는데 자신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와버린거예요. 특히 나이 많은 여자 분들, 여자분들은 욕을 잘 할 줄 몰라요. 왜냐 하면 욕을 배우는 환경이 아니고 가정에서 주부로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자 분들이 나이가 많아서 약간의 치매 끼가 있다고 할 때 누가 뭐라 할 때 평소에 우리 어머니는 저런 쌍스런 욕을 할 일이 없다 생각했는데 아이 육실할 욕이 나오는데 예상 밖의 귀에 담아 듣기 난처한 욕이 나오는데 그것을 사전에 연습하지 않은 게 어디서 나왔느냐 이 말이거든요. 우리가 매일접하는 일상에서 준 것도 없고 받은 것도 없으면 이상스럽게 미운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게 뭐냐, 자기 자신을 놓쳐버린 순간입니다. 나는 착하다, 예수 믿는다, 남을 사랑해야 돼! 왜냐, 나는 주님 앞에 죄인이고 용서받았기 때문에 누구를 사랑해야 돼! 하고 백날 주문 외우듯이 해 보세요. 갑자기 어떤 인간이 딱 나타날 때 저거는 보기만 봐도 헉! 직장에서 그런 사람이 있어요. 내가 저 사람 때문에 직장 못 다니겠다! 보기만 보아도 짜증나고 어디 가다가 차에 받혀 죽지 않나? 제발좀 죽어줘! 속으로 그럽니다. 동네에도 그런 사람 있어요. 아파트 위아래 그런 사람이 있다니까요 그 사람은 나한테 친절해요 이사하면 떡도 줘요. 떡도 주고 친절하면 뭔 소양 있습니까? 내가 빨리 죽기를 소원하고 있는데요. 주고받고 있는 이해관계가 없이 무조건 싫은 사람이 있다니까요.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투가 싫을 수도 있고 그 사람이 경상도 사투리를 심하게 해서 싫을 수 있고 전라도 사투리가 심해 싫을 수도 있고 그 사람이 개를 끌고 산책하는 것도 꼴 보기 싫고 하여튼 하나가 꼴 보기 싫으니까 그 사람이 부속된 전부 다 꼴보기 싫어서 말도 친절하지 않게 되는 그런 낫선 체험들이 우리속에서 나오면서 본인이 놀래죠. 내가 이렇게 못된, 내 자신이 이런 인간인지 몰랐다. 그래서 제가 정리하면서 글을 쓰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믿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어야 되는 겁니다. 자신은 이런 사람이다. 규정하지 마세요. 그거 가짜입니다. 그거 며칠 못갑니다. 인간은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자격이나 권리가 없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것으로 족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담 안에서 죄인이라는 그 자체를 아는 것으로 족하지 죄인 가운데서 근사한 죄인, 교양 있는 죄인, 멋있는 죄인, 화낼줄 모르는 죄인, 자꾸 그렇게 하지 마세요. 테레사 수녀같은 죄인, 자꾸 그렇게 하지 마세요. 우리 인간은 나의 모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나의 모델이 될 수 없고 나는 그 사람이 되지 못하고 그 사람은 내가 되지 못해요. 왜냐 하면 주님의 약속을 위해서 우리가 독특하고 그냥 하나밖에 없는 인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운명이라든지 우리의 모든 것은 약속 안에 포함이 되어 있는 사항이지 남들 안에 내 모습이 있다든지 하는 그런 것은 아니에요. 각자 개성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부부가 마음을 맞춥니까? 라고 하는데 마음을 맞추려면 나는 이런 인간이라는 것이 정립이 될 때 그때 마음 맞추는 시도가 되는데 본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무슨 마음을 맞췄다 안 맞춰다를 어떻게 정합니까? 본인이 누구인지 알아요? 본인이 세월 따라서 시간 따라서 계절 따라서 심지어 조석 따라서 찬바람 나면 기침 나는 이 가을철에 나하고 여름철의 나하고 다 달라요. 환경 따라서 다 달라요. 나는 도대체 내 마음을 좀 잡을 수 없을 정도에요. 그런데 어떻게 누구하고 맞춰요? 나도 나하고 못 맞추는데 남이 나하고 맞춰요? 안되지요. 부부 둘 다 꼬챙이로 확 깨서 약속으로 둘 다 내생과 금생에 약속이 있으리라 그것으로 만족하는 겁니다. 주 안에서 하나가 되라, 주 안에서 서로 존경하고 주안에서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주 안에서 언약 속에 꼬챙이, 일관된 꼬챙이 약속 안에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히브리서 11장에서 봤던 하나님의 약속에는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나님의 약속에는 죽음과 관련되어야 된다. 항상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들어 놓고 약속이 차후에 이미 일이 벌어졌는데 아하 이게 바로 약속이었구나! 주님이 늘 도와주시는구나! 새삼스럽게 깨닫는 가운데서 내가 예상하고 짐작했던 것은 다 허사구나 하는 것이 새삼스럽게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우리 마음에 와 닿아야 되죠. 내가 오늘 하루 이렇게 살겠다는 그 약속과 맹세도 헛수고이고 소용없는 거예요. 그래서 야고보서나 산상설교를 보면 맹세하지 마라 합니다. 야고보서에도 나와 있고 산상설교에도 절대로 내가 말하노니 맹세하지 마라! 세상은 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9절에 봅시다. 미쁘다 이 말이여, 저는 미쁘다는 말이 처음에 예쁘다는 말인 줄 알았어요. 이쁜게 아니고 믿음직스럽다, 믿을만 하다 그런 뜻입니다. 믿을 만 하다 이 말의 내용이요 모든 사람이 받을 만 하다 무슨 이야기했다고 믿을만 하다고 합니까? 약속은 인간의 모든 육체의 연습을 초월한다. 이 말을 믿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육체의 연습한다고 하나님께서 거기에 감동 먹고 약속과 미래에 구원의 약속을 해 주는 게 아니고 아예 약속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육신의 연습은 다 헛수고라는 것을 알게 만드는 그런 조치가 우리에게 따라 올 때 이것을 우리가 과연 믿는 자에게 믿을만 하다 이 말이에요.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 해서 약간의 유익을 위해서 육체의 연습을 하고자 하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는 말은 곧 끝난다 이 말입니다. 유익이 하다고 하다가 어 유익이 아니네 하고 곧장 끝나 버린다 이 말입니다. 이게 지속될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꾸 시도 한다는 것은 지속되지 않는 끊어지는 것을 해 봐야 이어지지 않거든요. 그것은 계속을 대체할 수가 없습니다. 10절에 봅시다. 딤전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지금 디모데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계속 번갈아 사용하는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언급합니다. 구주시니 곧 하나님이다. 이것을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에서 예수님으로 건너할 수 있는 다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다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큰 범주에 속하고 예수님은 아들이니까 아버지 안에 아들이니까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들어 있으니까 그저 있는 하나님에다가 예수님 하나 추가 하면 이게 온전한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거 땡입니다. 이거 아닙니다. 이게 아니고 사울이라 사람이 하나님만을 믿었죠. 믿었는데 큰 범위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잖아요. 이 믿음 주신 예수님을 포함시킬 수 있다? 없다? 아마 예수님을 핍박한다. 어느 쪽입니까? 하나님 믿은 것이 뭐를 추방해요? 예수님을 추방하도록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낄 자리가 여기 없어요. 사울이나 우리나 다 아담의 족속이니까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특히 사울 같은 경우에 공부를 더 많이 한 사람이니까 우리보다 더 완벽하겠죠. 하나님 더하기 예수님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이 체계가 무너져야 돼요. 하나님의 체계가 무너져야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믿게 될 때는 이 체계가 무너지면서 예수 믿게 되어 있어요. 그게 바로 대표적인 것이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될 때 변화하죠.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예수님께서 누구한테 살해당했느냐 하면 바로 여호와를 믿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살해했다 이 말이에요. 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을 살해 한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생각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신다면 일단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인정해 주고 그 다음에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추가해서 오시게 되면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일하시면 될 텐데 왜 무너뜨리는가 그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아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구나, 알기는 아는데 좀 모자란 게 있네! 뭐? 독생하신 예수님을 모르네! 그러니까 그들이 아는 하나님 플러스 더하기 예수까지 첨부해 보면 온전한 구원받는 자가 된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왜 안 될까요? 왜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을 실시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쉬운 게 있는 하나님에다가 자리 하나 만들어서 예수님을 추가 시키면 간단하게 예수님 믿고 하나님 믿고 다 되는데 왜 그게 안되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왜 안 되느냐 하면 인간이 믿는 여호와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게 악마에서 나온 거예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인간하고 상대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인간하고 상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부터 사람들이 몰라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도둑이 냉장고를 훔쳐갈 때 도둑이 담을 넘어왔습니다. 냉장고가 저기 있습니다. 냉장고야 나 따라와! 하면 냉장고가 따라 갑니까? 그러면 냉장고 훔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냉장고한테 백날 이야기 걸어봐야 냉장고는 말길을 못 알아들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돼요? 자고 있는 집 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그 다음에 냉장고를 가져가던 tv를 가져가던 마음대로 가져가야 되잖아요. 이게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이야기 맞죠. 하늘나라는 도둑이 담을 타고 넘어와서 먼저 집주인부터 묶어놔야 돼요. 이것은 냉장고와 세간에 누가 있다? 그 주인이 따로 있고 그동안 그 주인이 냉장고와 가스레인지 이런 것의 주인 행세를 해 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출애굽이 안 되는 이유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는 다른 세상이 없어요.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갇혀있는 것이고 마귀를 섬기고 있는 중에 있다 이 말이에요. 왜? 출애굽이 안 되니까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없어요. 모세도 그래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냈죠. 보내고 어떻게 합니까? 애굽에서 잘 살라 했습니까? 나가자 합니까? 나가자 하죠. 그 나가자 할 때 히브리인들이 그곳이 어디인지 압니까? 모릅니까? 모릅니다. 그것을 몰라요. 왜냐 하면 그곳은 가나안 땅이 아니고 그곳은 주님이 계신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나안 땅이 아니에요. 주님이 계신 땅이에요. 주님이 계시지 아니하면 가나안 땅이고 뭐고 약속의 땅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생각해 놓은 그 땅이 약속의 땅이고 인간이 상상한 그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인간이 생각한 천국은 천국이 아니고 하나님이 생각한 천국만이 천국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이미 선악과 따먹고 죄중에 있기 때문에 인간들이 아무리 상상을 많이 하고 천국은 골프장 같고 분수가 넘치고 여자들이 많고 백날해도 그것은 인간들이 죄악된 인간들이 끄집어낸 마귀의 종 된 인간들이 끄집어낸 악마의 아이디에 불과합니다. 세간이 냉장고가 아무리 상상해 봤자 그 상상한다고 해서 냉장고가 tv가 자기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없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도둑놈이 넘어와야 돼요. 그러면 냉장고가 지금 까지 알았던 섬기던 주인은 뭐냐, 집주인이었습니다. 담 타넘고 온 도둑놈이 어떤 분인지 몰라요. 그런데 집 주인을 꽁꽁 묶어 놨죠. 예수님이 무엇을 묶는다? 마귀를 묶어놨을 때 그동안 마귀를 묶어놨으니까 드디어 마귀가 냉장고나 tv에게 더 이상 영향력을 입히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그때부터 냉장고가 갈 곳은 냉장고가 정할 수가 없어요. 왜냐, 냉장고가 지금까지 살았던 세월과 장소는 지금 묶여진 그 주인과 더불어 살았던 그 외에는 일체 몰라요. 제가 말을 어렵게 하는 게 아니고 지금 쉽게 하는 거예요.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살던 것은 이 세상만 정붙여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 갈 줄도 몰라요. 어디 가고자 상상 해 봐야 기껏 이 세상 살았던 그 아이디어가 조금 근사하게 정리된 상상의 세계 그뿐이에요. 그러면 그 세계를 누가 아느냐? 도둑놈 밖에 모르죠. 우리를 강제로 보쌈 해 가듯 가는 그 분만이 알죠. 그래서 내생과 금생에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 이 말이죠. 오신 주님을 믿어야 돼요. 그런데 그 주님이 도둑을 잡잖아요. 잡으면서 발생된 사건이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십자가 지신 그분을 믿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럼 누구를 믿지 말아야 된다? 냉장고 하나님을 생각했잖아요. 마귀가 자꾸 시키니까 우리가 이 땅에 종교가 한 두 개입니까? 종교가 많이 있잖아요. 신을 이야기했잖아요. 내세도 이야기하고 그런 것을 다 잊어버려야 된다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장세우고 데려가는 그 장소가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말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궁금합니까?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이냐 하면 주님만 섬기는 나라입니다. 주님만 섬기면 그 나라가 어느 나라이던지 간에 그 장소가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겁니다. 목사님, 그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고요 그 말 하니까 바짝 부담이 되는 게 우리는 주님을 본적도 없고 사진 찍은 것도 없는데 어떻게 주님을 믿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믿는다는게 눈으로 보이고 만나서 손으로 만지고 악수하고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할 때 아는 사이가 되는데 주님은 꿈으로 나타나서 잘 있느냐? 하고 이야기한 적이 없고 실제로 모습으로 나타나서 손잡고 가자 한 적도 없고 기껏 있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 나를 믿어라! 십자가 지고 네가 용서받았다는 그 이야기밖에 없는데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바짝 따라서 한 통석이 되어 모든 것을 걸고 주님을 따라 갈 수 있겠습니까? 라고 이야기 한다면 여러분은 뭐라 답변해야 됩니까? 여기 10절을 봅시다.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지금 10절에 나오는 이런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안 나타났어요? 실제로 나타난다는 거예요. 왜 나타나야 되느냐 하면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모든지 말씀대로 이런 실제로 사람이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볼 때 믿는 사람이 있었어요? 없어요? 자기 외에는 믿는 사람이 없었죠. 그런데 성경에 하나님이 뭐라 했습니까? 믿는 사람은 없지만 이 나라에 내가 누구를 남겨 두었다? 누구를 남겨 뒀습니까? 몇 명입니까? 7천명, 그 다음에 뭐에요? 남겨 두었죠. 로마서에 보면 이게 뭡니까? 은혜로 남겨 뒀죠. 그러면 본인들이 남았습니까? 주께서 남겨두셨습니까? 주께서 남겨 주셨어요. 남겨 두신 이유가 본인이 남겠다고 해서 여기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본인이 싫던 좋던 7천명을 주께서 그렇게 말씀대로 일을 치러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힘으로 믿기 참 힘들어요. 예를 들면 어제 야구를 했는데 삼성라이온하고 기아 타이거하고 야구를 했어요. 5 대 4로 삼성이 이겼거든요. 그런데 삼성 선수 중에 어느 누구도 오늘은 반드시 5 대 4로 우리가 이기도록 주께서 그렇게 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아무리 9회 8회까지 기아가 4 대 1로 이겨도 9회 마지막 회에 가서 우리가 5 대 4로 역전한다라는 것이 이미 예정되어서 그것을 믿는 사람은 누가 있겠어요? 인간적으로 힘으로 없죠. 만약에 삼성 선수 가운데서 그게 있다면 그게 본인의 실력이겠습니까? 주의 은혜이겠습니까? 그게 주의 은혜인거예요. 그게 바로 약속이 지금도 관통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믿습니까? 묻지 말고 본인이 발견하면 돼요. 자기 인생 속에서 이것을 제가 자꾸 설명을 해 주려고 하니까 이렇게 되면 이렇게 된다, 따라하게 되면 그게 육체의 연습이 되어 버려요. 시킨 대로 다 했는데 안 믿어지네요. 이렇게 되면 괜히 내 책임이 된다 말입니다. 제가 시킨 대로 하지 말고 여러분 속에 작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 주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발견하라 이 말입니다. 좋아요. 하루 24 시간 가운데 23시간이 오늘 내가 하루 사는 것이 내 뜻대로 내 힘대로 했다고 자부합시다. 그런데 그 어느 순간, 그 짧은 순간에 그런데 이게 혹시 주님이 이미 예정된 내 인생이 아닐까 하고 생각이 된다면 그것은 믿는 자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파이프라인 안에 뭐가 흐르죠? 거기 석유, 기름이 흐르죠. 그런데 기름이 흐르는 파이프라인에 어떤 집에는 기름이 나오고 어떤 집에는 팥죽이 나오고 이렇습니까? 어떤 사람은 주스 나오고 커피 나오고 그렇습니까? 파이프라인은 어디를 때려도 기름이 나오게 되어 있죠. 그렇잖아요. 왜, 기름이 관통하니까요. 우리 인생이 약속이 관통한다면 어느 순간에 약속이 믿어진다면 우리 안에 약속이 관통하고 있는 거예요. 살기 바쁘다보니까 만날 돈, 돈, 돈, 자식, 이렇게 보이지만 어느 순간에 내가 이렇게 죄를 지어도 주님이 십자가 지셔서 용서가 된다는 것이 믿어진다면 이미 우리 인생 자체가 약속이 그 안에 흐르고 있다는 증거예요. 가만 있자, 이런 생각이 언제야? 지금 밤 10시 42분에 이런 생각을 했네, 내일 10시 42분에 한번 기다려 봐야지, 내일 10시42분 돼도 그런 생각 안나요. 내일은 아마 오후 2시 15분에 나타날 거예요. 왜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조작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때그때 마다 파이프가 기름이 새듯이 약속이 새도록 조치를 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 예상밖에 우연한 일이 터질 때에 그래 그래 내가 죄인 맞습니다. 어, 가만 있어봐, 내가 죄인 맞나? 아, 진짜 죄인 맞구나! 그래, 내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내가 이런 일이 터지니까 나도 성질나네! 내 본성은 죄인 중에 괴수 맞구나! 성경 말씀대로 맞네! 자꾸 성경 말씀대로 맞다는 것이 확인될 때 그것이 바로 약속에서 관통되어 있는 삶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기나오는 10절의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는 이 말을 한다고 해서 24시간 이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요. 24시간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이렇게 사는 사람 없어요. 다들 각자가 바쁘게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디모데전서 4장 10절이 딱 마음에 온다는 겁니다. 그래, 우리의 소망은 우리 주님밖에 없지! 그게 바로 디모데전서 4장 10절의 말씀인 거예요. 가만히 들어 보니 어렵지 않은 문제죠. 뭡니까? 우리가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보통 일반적 평범한 일상입니다. 새삼스럽게 경건의 티를 내는 것이 아니고 새삼스럽게 종교적 티를 내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그냥 막사는 거예요. 막국수처럼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살아가다보면 주께서 관통된 주님의 약속이 그때그때마다 솟구쳐 오르고 나오는 겁니다. 아침 눈만 뜨면 ‘주의 소망!’ 이런다고 신자가 아니고 살다보면 언젠가는 주님께서 내 인생을 만들었다는 사실, 관리한다는 사실을 느낄 때가 온다면 그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우리는 경건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늘 수시로 발견되는 겁니다. 때로는 징계를 통해서 때로는 예상 밖의 기쁨을 통해서 주께서 주신 은혜로 삽니다. 하는 것을 늘 느끼도록 주께서 그렇게 지금도 우리로 숨 쉬는 것, 우리가 잠자는 것, 일거수 일투족 우리의 발걸음, 머릿카락 자라는 것, 우리 몸이 키가 크는 것, 전부 다 참새를 키우듯이 우리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차후에 늘 발견되는 식으로 오늘도 성도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은혜로 살면서도 남따라 간다고 눈을 거기에 두고 보니까 주님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감사도 놓치고 기쁨도 없어지고 그저 잘 살아야 되는데 그것만 남아 있는 우리의 불쌍한 모습, 옛날 마귀에게 잡혀있는 그 모습, 다시 주님이 인수인계 했는데 날마다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깨닫게 되는 그런 경우가 많아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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