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24, 25강 / 빌4장1절 본문
100813 빌립보서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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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100813빌4장1절a
빌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립보서 4장 1절, 간단한 문장인데 여기 보면 ‘나의 사랑하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잖아요. 그 다음에 ‘사모하는 형제들’ 이 말도 우리가 이해되지요. 그런데 그 뒤에 있는 말 ‘주 안에 서라’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이것이 성경책이 아니고 일반 도덕책이나 학교 교과서 같으면 ‘사랑하는 형제들아’ 이런 것은 일반 교과서에 다 나와요. 그런데 뒤에 있는 말 ‘주 안에 서라’는 것이 국어책에 나옵니까? 영어책에 나옵니까? 일반 책에는 잘 안 나오지요?
‘주 안에 서라’ 이거 한번 보세요. 비타500 보세요. 이러면 주 안에 선거예요? ‘주 안에 서라’ 지금 ‘주 안에 서라’는 말이 지금 빌립보서4장 1절하면서 우리가 난처한 것이 뭐냐 하면 ‘사랑하는 형제들아’ 이런 것은 다 아는 이야기인데 지금 우리가 뭐가 납득이 안 되느냐 하면 주 안에 서라는 말이 이것이 잘 납득이 안 된단 말이죠.
‘거기 뒤에 떠드는 학생! 뒤에 가서 서라!’ 이해 돼요? 안 돼요? ‘손들고 서’ 이해되지요? 충분히 이해된다고요. ‘아, 화장실 가는 저 구석에 손들고 서라는 말이구나!’ 충분히 이해되는데 ‘어이, 여기 안경 낀 학생! 주 안에 서라’ 무슨 뜻이에요? 안경만 낀다고 다 이해 되는 거 아니잖아요. 주 안에 서라가 무슨 뜻입니까? 이게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주 안에 안서면 어쩔 건데?’ 주 안에 안서면 지옥 가죠. 주 안에 서면? 천국 가죠. 그러면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결정이 주 안에 서는 건데 당체 주안에 선다는 의미를 모르겠다 이 말이죠. 주안에 서면 천국가고 주안에 안서면 지옥 가는데 그것은 좋다 이 말이죠. 문제는 주 안에 선다는 말을 알아야 주 안에 서던지 말든지 하는데 주 안에 선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 말입니다.
한번 적어 볼게요. ‘사랑하는 형제들아’ 뒤에다가 ‘주 안에서 서라’ 했습니다. 성경에서 지금 빌립보서 4장 1절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아 밥 먹어라’ 얼마나 쉬워요. ‘밥 먹어라’ ‘사랑하는 형제들아 잠자라’ ‘사랑하는 형제들아 일하라’ ‘사랑하는 형제들아 교회 나오라’ 다 이해가 돼요. ‘사랑하는 형제들아 헌금해라’ ‘사랑하는 형제들아 밥 먹어라! 그러면 천국 넣어 줄게’ 얼마나 쉽습니까? 밥 먹고 천국 가겠다 이 말이죠. ‘사랑하는 형제들아 잠자라! 잠자면 천국 넣어 줄게’ 얼마나 쉬워요. 잠자면 천국 간다 말이죠.
그런데 ‘사랑하는 형제들아 주 안에 서라!’ 어떻게 해야 주안에 설수 있습니까? 이것을 거꾸로 해야 주안에 서는 겁니까? 이것을 바로 하면 주안에 안서는 겁니까? 주안에 서려면 두 가지를 해야 돼요. 첫째는 간단한 겁니다. 주 안이 어디냐? 두 번째 서다가 무슨 뜻이냐? 이렇게 꿇어앉아야 되나, 어떻게 서야 하는가? 두 가지를 알아야 하는 겁니다.
주 안이 어디냐? 몇 번지냔 말이죠. 신월동 몇 번지가 주 안이냐 이 말이죠. 주안이 어느 동네에 있어요? 난처합니다. 왜 우리가 이것을 난처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이유는 우리가 어디 안에 서라 할 때는 항상 두 가지를 정해줘야 돼요. 시간과 공간을 이야기 해 줘야 합니다. ‘오후 8시에 의존교회에서 모여라.’ 우리가 얼마나 쉽습니까? ‘오후 8시에 모여라’ 어디서? 서울 어디에서 모르잖아요? ‘모여라 의존교회에서’ 몇 시에? 새벽 4시에 모일까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8시에 의존교회에서 모여라!’ 시간과 공간만 있으면 모임이 성사가 되지요?
그러면 ‘주 안에 서라!’ 주 안에 설 때는 우리가 두 가지가 필요한 거예요. ‘주 안이 어디입니까?’ 동시에 ‘언제 모이면 됩니까? 언제 주안에로 가면 됩니까?’ 이 두 가지 문제, 시도 때도 없이 24시간 주안에 있어야 되는가 하는 그런 문제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문제를 모를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문제를 지워 버리는 거예요. ‘사랑하는 형제들아’ ‘예’ 그리고 ‘사모하는 형제들’ ‘예’ ‘사랑한다.’ ‘고맙습니다.’ 그만 넘어가 버립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아!, 사모하는 형제들아!’ 그 다음에 ‘주 안에서라’ 는 들어도 이해 못하니까 빼버립니다. 그냥 ‘사랑하는 형제들아, 사랑한다.’ ‘고맙습니다.’ 그냥 넘어 갑니다. 그냥 넘어가면 일반적인 교회가 되고 말아요. 일반적인 한국교회가 된다고요.
한국교회가 뭐냐 하면 ‘우리는 사랑하는 형제들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자매들입니다. 끝! 서로 사랑한다, 사모한다 하면 그게 진짜 사랑이고 사모입니까? 성경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주 안에 설 마음이 없거든 주 안에 들어올 마음이 없거든 사랑하는 형제도 아니고 사모하는 형제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안’이라는 것을 빼 먹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집어넣어 봅시다. 주 안이니까 우선 주님계신 곳에, 안에 들어가면 되니까 주님은 언제 오시고 어디에 계시느냐?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주가 된다고 이렇게 생각 하겠죠.그래서 그 안에 들어가면 되는데 여기에 이러한 시도와 노력들이 다 헛방, 헛수고입니다. 해봐야 아무 소용없고,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도 딱 빌립보서 4장 1절에 ‘주 안에 서라' 하는 말이 도저히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된다면 우리가 천국 간다하는 것이 장벽이 되어 버렸죠. 주 안에 들어가지도 못할 인간, 백날 목사님이 집사님을 사랑한다 해도 이것은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주안이 어디냐? ‘뜸들이지 말고 목사님 주안이 있다고 하는데 주안이 어딥니까?’ 라고 여러분들이 솔직하게 탁 터놓고 이야기하기를 바라겠죠.
신월동 오다가 보니까 할머니들이 너무 더웠던 모양이죠. 주택가에 할머니 네 사람이 집에 계시지 않고 돗자리를 내놓고 골목에 펴놓고 나란히 네 할머니들이 부채질을 하고 앉아 있는 것을 봤어요. 그렇다면 그 순간에 할머니의 안은 어디죠? 집안에 있지 않고 어디에 나와 있죠? 집 밖으로 나왔죠. 그러면 할머니 만나려면 집안에 들어가면 안 되고 골목에서 노시는데 가면 할머니를 만나겠죠. 오다가 제가 진짜 봤어요. 사람들 못 다니게 골목을 막아 놓고 네 분이 떡 앉아 있더란 말입니다.
주님께서 따로 전을 펴 놓은 거예요. 주님께서 돗자리를 펴 놓은 겁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뭔가 솟구쳐 올라온 거예요. 보기 들어갑니다. 세상이 이래요. 세상이 볼록 올라왔어요. 올라온 이 자리에 돗자리 펴놓고 이 자리가 주님의 자리, 주 안이 됩니다. 볼록 튀어 올라왔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 있으면 주 밖이 되고 세상을 밀쳐서 볼록 튀어나온 이 안에 있으면 우리는 주안에 거한 것이 돼요.
제가 일단 이야기 하니까 쉽지요. 아, 세상에서 볼록 튀어나왔구나! 그런데 한번 보세요. 왜, 가만히 있는 세상이 볼록 튀어나옵니까? 여기 가만히 있는데 지진이나 화산이 나서 볼록 튀어나오면 기가 막힐 것 아닙니까? 왜 이렇게 볼록 나왔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안 나오시면 세상은 그냥 평탄해요.
'GOOD'가 무슨 뜻이죠? 과외 안받는가보네요? ‘좋다’에요. 반대는 뭐가 되겠어요? 'BAD' 'bad boy' 비가 나쁜 남자란 말이죠. ‘좋다’ ‘나쁘다’ 세상은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여기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사람들은 세상을 좋다고 봅니까? 나쁘다고 봅니까? ‘good'으로 봅니까? ’bad'로 봅니까? 좋다는 거예요. 아무문제 없다는 겁니다. 좋은 세상, 'we are the world' 이 아름다운 세상, 좋은 세상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와 버렸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었어요. 일종에 여기 구멍이 뚫린 거죠. 이 좋은 세상을 너 같은 나쁜(bad)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거예요. 그런데 죽였던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흘 만에 부활시켰죠. 이 융기, 융기란 말은 떠오르는 것, 상승하는 것 솟구쳐 오르는 것을 말하죠. 여기 예수님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이 위치가 반대가 되어서 볼록 나와 버린거에요. 이렇게 되니까 좋다는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요? 좋다는 세상이 무엇으로 바뀌었습니까? 나쁜 세상으로 바뀌고 나쁘다고 여겼던 주 안의 세계는 좋은 세계가 된 겁니다.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예수님이 안 오셨다면 세상은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요 옛날처럼 그냥 흐르고 흐르다가 봄, 여름, 가을 되고 겨울 되면 다시 또 뭐가 돌아오죠? 봄이 되고 30년 정검하고 80년 정검하고 90년 살면서 정검하고 정검해 봐야 세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흐르는 물은 그대로 흘러가고 ……. 강물은 흘러갑니다. 훅! 한강교 밑을……. 그대로 죽~ 흘러가고 하늘은 가을되면 푸르면 마찬가지로 푸르러 가고 북한의 김정일 김정은 그대로 건재하고 약간 현기증이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로 있고, 미국은 미국대로 태평양 물은 파도치고……. 세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대로 왔다가 가는구나……. 아무 문제없어요.
제가 이것을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빌립보서라는 성경책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등장하지 않으면 빌립보서라는 성경책을 우리가 펼 이유도 없고 이것을 우리가 볼 이유도 없어요. 그래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성경이야기 하면 ‘나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나는 성경 없어도 세상 좋게 본다. 성경 없어도 밥 먹는데 아무 지장 없고 잠자는데 지장 없다 나는 성경이나 교회 없이도 나는 잘 먹고 잘 살았어요. 원래 엄청 벌었어요. 펀드해서 돈 많이 벌었어요. 성경이, 하나님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나는 하나님 안 믿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OK란 말이에요. 그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마음이다 이 말이죠. 이제 슬슬 어려워 져요.
더 쉽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진정 믿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지 마란 말이죠. 예수님을 안 믿으면 여러분에게 손해나는 겁니까? 왜, 아버지가 목사라서 교회 안 나가면 뭐라 할까봐, 용돈 안 줄까봐……. 그러면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에 양심선언하면 되니까 지금 친구들 중에 예수도 안 믿고 교회도 안 나가고 절에도 안 나가는 사람 얼마든지 재미나게 행복하게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서 취직도 잘되고 출세도 하고 가정도 화목하고……. 얼마든지 행복하거든요. 성경을 볼 때 항상 염두에 두어 볼 구절이 있어요. 성경 73편에 보면 제가 읽어볼게요.
시 73: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시 73:2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시 73: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시 73: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교회도 안 나오고 예수도 안 믿어도 건강검진하면 항상 좋게 나오고 똥배도 안 나오고 항상 초콜릿 복근이고 늘 아픈데도 없고 잠 잘 자고 항상 사람 보면 인상이 확 피어가지고 허허 웃으면서 ‘집사님, 요즘 더운데 교회 가느냐고 애쓰지요?’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나는 교회 안 나와도 이렇게 행복하답니다. 이 쪼다야’ 이 말 뜻이라 이 말이죠.
제가 며칠 전에 누구를 만났는데 아주 제가 실감나는 말을 들었어요. 연세가 74세가 되는 분인데 그분을 만난 사람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내가 평생 후회할 것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내가 지난날 젊었을 때 교회 나간 것을 후회된다.’ 라고 했어요. 74세인데 그분이 미국 사람이에요. 어릴 때부터 세례 받아서 한 60세까지 믿었는 모양이에요. ‘지금 생각이 모두 도루묵이고 헛짓이고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인데 내 인생 살면서 실수를 안 하는데 실수를 한 것이 있다면 딱 한 가지 내가 아무 소용도 없는 교회를 다닌 것, 예수 믿는다는 그 헛짓을 왜 했던고……. 그래서 지금 늦으나마 정신차려가지고 교회도 안 다니고 예수도 안 믿고 얼마나 편한지…….’ 저한테는 복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빌립보서 4장 1절에 ‘사랑하는 형제들아’ 그건 좋았어요. ‘사모하는 형제들아’ 그건 좋았어요. 하지만 무엇이 끝까지 이해가 안 되었느냐 하면 ‘주 안에 서라’라는 말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뭐라 하느냐 하면 ‘주 안에 안서면 어쩔껀데? 내가 주 안에 안 선다고 당신이 내 재산 다 뺏어 갈 거야 내 건강을 뺏어 갈 거야? 나 주 안에 안서도 이렇게 행복한데 아, 도대체 나 이해가 안 돼 교회 왜 가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더운데 예수 왜 믿는지 몰라 보이지도 않는 분을 괜히 있다고 착각을 해서 믿고……. 나 봐라, 나 지금 자유롭잖아 나 이제 70넘어서 정신 차렸잖아’ 저는 그분하고 같이 간증 집회 다니고 싶어요. 한국교회 전체를…….
이분처럼 진작 양심 고백을 하란 말이에요. 스무 살 때 하란 말이에요. 서른 살 때 하고 사십 된 장로가 이런 고백을 하란 말이에요. 뒤 늦게 후회 하지 마시고...... 같이 진짜 패키지 쇼를 그 사람하고 하고 싶어요. 데리고 다니면서 이번 교회 가서 간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용없다! 예수 믿는 것’ ‘예, 됐습니다. 다음 이 교회.......’ 하고 싶어요. 정말……. 제가 74세 먹은 할아버지의 고백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단 한 번도 주 안에 서라는 말을 해 준 적이 없고 기껏 교회에서 하는 말이 ‘형제님들 서로 사랑합시다!’ 그 이야기 했습니다. ‘형제님들 서로 사모하시고 서로 위해 주시면 여러분 삶이 윤택해지고 풍성해 질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 없이는 못삽니다. 서로 이웃 사랑하는 것이 이 괴로운 인생에서 여러분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라는 말을 교회들 마다 한 거예요. 왜? 납득이 되니까, 그건 이해가 되니까, 그것은 교회 문 열고 올 때 내심 노리고 내심 원했던 바가 그 소리 들으려고 온 거예요.
이 사회에서 나를 무시할 때 교회만큼은 목사와 모든 교인들이 나를 위해주고 관심 가져주고 ‘시집가고 싶어요? 장가가고 싶어요? 결혼하고 싶어요? 취직하고 싶어요? 주변에 좀 알아볼게, 가게 차렸는데 단골 없어요? 우리교회 단골 시켜줄게’ 그런 것을 원했던 거예요. 교회에 와서 나에게 조금이라도, 한 푼이라도 도움이 되는 그런 교회이기를 원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분이 나중에 자기가 성공하고 난 뒤, 74세 되고 보니까 내가 성공한 것은 내가 노력해서 성공한 거지 교회에서 하나님이 도와줘서 성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 정신 차리고 보니까 안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뭔가 교회에서 형제님 사랑합니다. 형제님 잘 했습니다. 하는 것은 뭐냐? 교인 하나 꼬셔가지고 교회 헌금해서 교회 목사 밥 먹고 살려고 그 짓 한 거예요.
그 이야기 듣고 잠이 확 깨는 거예요. 아, 저게 복음이다. 왜 저런 소리를 한국교회 교인들은 진작 그것을 못하고 꿍하고 감춘다고 감춰집니까 나이 70 넘어서 다 그런 소리 할걸…….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이 무엇에 딱 이해가 안 되죠? ‘주 안에서라’ 당체 이게 무슨 말이냐? ‘주 안에 서라’ 그것은 내가 교회 문 열 때 원했던 거 아니거든요. 뭔가 예배드리면 복 온다는 기도 리스트에 없어요. 그것은 아예 예상치도 못한 겁니다. 주 안에 서는 게 뭐냐? 주 안에 선다는 것은 예수님과 A라는 사람이 있다면 ‘어이 예수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다. 똑같이 당신도 밥 먹고 나도 밥 먹는다.’ 이 사람 말이 맞아요.
예수님 우리하고 똑같아요. 식사 같이 하고 잠도 자고 예수님이라고 해서 날개 있는 것 아니고 평범해요. 그런데 평범하지 않은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이 예수님은 자꾸 이 세상이 악하다고 온 동네 돌아다니면서 ‘너는 죄인이야, 이 세상은 불바다 돼, 이 세상은 곧 심판받아! 이것은 하늘나라 못 들어가, 너는 지옥에 들어가야 돼!’ 라고 자꾸 부정적인 소리를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아이, 저거 성격 문제이겠지. 저거 원래 부정적인 인간성이라서 성격 문제이겠지, 저러다가 말겠지. 저러다가 자기 교주 하나 되려고 팬클럽 작성해서 돌아다니고 자기 떠 보려고…….’ 옛날에도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세상은 망한다. 나를 믿어라!’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어요.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러다 말겠지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당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에 들어갔어요. ‘이게 어디서 장사를 해’ 비둘기를 엎어버리고 헌금 바꾸고 달라 바꾸는 것 다 엎어버리고……. 이것은 테러에요. 테러……. 예수님 본인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고 본인은 남을 비판하지 마라 해 놓고 혼자 저주하고 혼자 비판하고 ‘이 저주 받을 놈들아! 이 마귀의 자식들아!’ 욕은 혼자 다 하시고 ‘이 독사의 새끼들아! 네가 이 저주를 생각하니 참 암담하구나!’ 이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나중에 이것도 화가 안 풀렸던지 상을 엎어 버린다 말이죠.
‘어질고 점잖고 훌륭하신 우리 바리새인님들 인내심 많고 겸손하시고 얼마나 겸손한지 금식일이 되면 자기를 치면서 나는 부족하다. 나는 죄인이다. 할 정도로 그 겸손하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님들 그리고 율법사님들과 서기관님들’ ‘저러다 말겠지 참자, 참자 원래 큰마음 가진 대승대제한 사람이 참는 쪽이다. 대인이 소인배하고 다투는 게 아니야’ 하고 참으려고 했지요. 그런데 막된 인간이 증세가 심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당시 총회장 되시는 대제사장께서 우리가 그냥 봐주고 싶어도 로마정권에서 통치하에 있으니까 요새로 보면 일본 군정에서 ‘너희 나라 시끄러운데 왜 가만 놔둬?’ 이렇게 나오니까 한사람을 죽여서 다른 사람이 편하게 사는 게 낫지 않겠느냐?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우리 민족이 사는 것이 옳다 그러면 가차 없이,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제거합시다. 이렇게 했는데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이 회의해서 제거하려는 중에 아니 거기 예수님 진영에서 용감하게 귀순하신 분이 계시네. 귀순하신 분이 누구죠? 가룟유다 ‘커밍아웃 고백합니다. 나 이제 돌아왔습니다. 나 예수를 3년 동안 따라 다녔고 예수님은 나의 친구였지만 예수를 위해 나는 모든 것을 바쳤지만 결국은 예수님은 똘아이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귀순합니다. 내가 체포하는 형식으로 해서 잡아가세요. 그래야 내 위신이 서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밤중에 기도하는 가운데 붙잡혀 갔잖아요. 이야기 끝났어요.
그런 힘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걸, 그것도 옛날이야기를 지금 우리가 누구를 믿는다고요? 아, 하나님 믿는 것은 인정하지요. 누구나 하나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예수를 믿어서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 간다? 이거 나이 70넘어서 후회하시지 마시고 지금 커밍아웃하세요. ‘목사님 그렇게 나오시니까 이제 말 합니다. 나도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도 예수님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습니다.’ 라고 속으로 이야기 하시는 분은 여기는 없겠지요? 그런 분들은 여기 없겠지요? 바로 아주 평범하게 정말 전혀 믿을 구석은 전혀 없도록 뭔가 얻을 것, 이익이라는 것은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그저 ‘너는 죄인이야, 너는 죽으면 지옥 가는 거야’ 라는 그 소리만 ‘네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밀어 넣는 자를 두려워하라’ 라는 ‘인자를 시인하면 구원받을 것이요 나를 부정하면 너는 지옥 갈 것이다.’ 이런 아주 도발적이고 독단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해도 너무 심해요. 예수님은 자기 밖에 몰라요. 어지간히 해야죠. 어지간히 해야지……. 자기 빼 놓고는 사람도 아니고 자기 빼놓고는 다 짐승이고 뱀 새끼고 자기는 하나님 아들이고 어지간히 해야지 너무 심하잖아요. 사람이 어지간히 봐 주려고 해도 봐줄 건더기가 있어야지 너무 심하잖아요. 제자들 그렇게 충성하고 기적보고 물위를 걸었던 사람들 아이고 잡혀가고 나니까 도망 가 버렸죠. 수제자? 아이고 꼬끼오 하고 세 번 딱 우니까 ‘나는 저 사람을 저주 한다! 저주 한다! 나는 저 사람을 저주 하노라!’ 그 당시 베드로가 그 정도로 나왔으면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아도 우리는 베드로 못지않습니다.
제자들 도망갔지요. 따라온 여자들 벌벌 떨고 있다가 죽고 난 뒤에 장례는 치러줘야지 하며 찾아갔어요. ‘아이고 불쌍한 양반, 그래도 믿었는데 할 수 없네. 죽고 난 뒤에는 아무것도 아니구먼! 혹시 했는데 역시였어.’ 죽고 난 뒤에 주님의 무덤에나 찾아갔지 곁에 아무도 없어요. 모든 양들은 흩어지고 오직 하나님은 목자만 친다는 그 말씀대로 주위에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연속극 끝났습니다. 이야기 끝났어요. 무덤에 내려간 지 3일 만에 이게 비약적으로 위에 올라갔어요. 왜 이렇게 불룩 튀어나오게 하느냐 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반인들이 만날 수가 없습니다. 부활하신분이 찾아오시면 만날 수 있지만 아까 얘기 했죠. ‘오후 8시에 의존교회에서 만나자!’ 이것은 육신과 육신 같으면 다 만나요. 만날 수 있어요. 마음만 있으면 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없어요. 왜? 부활했기 때문에 그 말은 너희들이 나를 찾는 시기는 이제 게임오버! 끝났어요. 우리가 예수님을 찾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예수님, 여기 나타나세요. 옳지 예수님 잘한다. 빵 줄게. 다음에 부를 때 또 나타나세요. 다음, 이쪽에 옳지 잘한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을 가지고 놀 수 없어요. 이제는 역전이에요.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안 타나나는 분이 아니고 보고 싶다고 해서 나타나 주시는 분도 아니에요.
유비쿼터스 [Ubiquitous]에요. 어디 있는지 모르고 우발적으로 나타나시면서 ‘나 여기 있다. 주 안에 거하라’ 하면 우리는 쫓아가서 ‘주님’ 하면 없어요. ‘나 여기 있지’ 하는데 보면 없어요. 우리가 주 안에 거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오늘 성경 보면 ‘주 안에 서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냐? 참 어렵지요. 정말 어렵습니다. 이게 무당집 같으면 간단해요.
여기에 예수님 그려놓고 천주교 성당처럼 예수 모자이크 그레이스 해 놓고 신부들이 들어와 제복입고 휘휘 향유 성의 없이 뿌리고 떡 같은 것 만들어서 입에 넣어주고 ……. 이러면 마치 있는 것처럼 거기다가 김수환 추기경이 와서 ‘여러분 사랑을 베풉시다. 사랑이 밥입니다.’ 하면 거룩해 보이고 그렇게 해서 주님 오실 것 같으면 우리도 그렇게 합니다. 주께서는 그것을 엎어버려요. 이것이 불룩 튀어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는 인간들이 기어 올라가서 불룩한 주안에 함께 거할 수 없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 이 어려운 것을 초등학생에게 설명하려니 참 힘듭니다만 여러분 이해 잘 하세요. 잘 들으세요.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에 십자가 못 박히실 때 그 십자가는 그저 평범한 보통 죄수와 함께 십자가의 세리처럼 그냥 땅 위에 있는 거예요. 십자가 달릴 때 하늘이 어두워진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십자가 질 때 필리핀이나 브라질에 지진 안 일어났습니다. 그 동네만 약간 복잡했지 다른 곳은 아무 일 없어요. 그냥 일시적이에요. 일시적인데 여기에 부활이 되면 부활세계, 영적세계는 실지로 있으면서 사람 손에 잡히지 않을뿐더러 이 영적 세계의 주인공으로서 예수님이 계시다는 말은 이 계시는 예수님 때문에 이 현재에 아주 평범하고 조용하고 사계절이나 어떤 소나무나 물고기나 오징어나 아무 일 없어요. 아무 일 없는 이 세상이 예수님 세상과 끊어져 있어요.
주안에서라는 말은 네가 끊어진 세계에 들어가란 말이에요. 이 세상과 끊어진 세계에 네 육신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세계에 들어가란 말이에요. 들어가지 못할 세계에 들어가란 말이에요. ‘들어갈 만하면 들어가라’ 이게 아니고 들어가지도 못할 세계에 너는 들어가서 서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과 함께 멸망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야기 할 때나 지금 사도바울이 이야기 할 때나 형편은 똑같아요. 예수님이 이야기할 땐 어렵다가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면 들어가기 쉽고 이런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 이야기 할 때도 ‘대략난감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야’ 모르는 것처럼, 사도바울이 이야기 할 때도 이게 무슨 뜻이야 똑같아요. 쉬운 게 없어요. 문제가 다 같이 어려운거예요.
큰일 났습니다.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이게 끊어졌어요. 이것을 두자로 하면 ‘단절’이에요. 그런데 제가 수요일에 설교하면서 단절만 설교한 것이 아니라 뒤에 뭐 하나 이야기 했어요. 단절 그 다음에 ‘출몰=나타남’ 끊어짐, 나타남 수요일 설교를 잠시 해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먼저 얘기 했죠. ‘물 다오’ ‘내가 물 긷는 물 밖에 없습니다. 이물이라도 좋습니까?’ 예수님께서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다오, 네가 나의 영원한 우물이 되게 만들겠다.’ ‘You are 우물’ 너는 나의 우물이다. 네 속에서 파이프가 연결 되어서 분수가 있어서 계속 샘솟듯이 분수가 춤을 춰요. 계속 내 안에서 생수가 터져 나와서 계속 나온단 말이죠. 이것은 말릴 수가 없어요. 너 안에 어떤 장치가 있는데 하늘나라 호수가 연결되어서 이것은 계속 마르지 않고 끝없이 영원토록 생수가 나온다는 겁니다.
여러분 영원토록 하는 것은 항상 생명나무와 관련 있어요. 생명나무를 따먹는 사람에게나 있을 일이지 그런데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했어요. 못 따먹게 했는데 못 따먹는 여기에 하나님이 하늘나라 호수를 잡아당겨서 그 여자 속에 그것도 남자 5명 사이에 별로 특별한 것도 없는 여자에게 특이성 특별한 것, 호수를 집어넣으니까 그 여자가 자기 몸이 하나의 기계, 무슨 기계냐 하면 하나님의 생명수가 터져 나오는 설비, 하나의 기계장치가 되고 말았어요. 어디를 가도 호수가 따라와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구주이시다.’ 막 나옵니다. 자기 힘으로 우물을 판게 아니에요. 그 여자가 생각은 기껏 사람들이 마시는 맹물 같은 것인데 예수님은 그 물 말고 세상적인 우물 말고 진짜 하늘나라 생명수가 있는 우물을 집어넣은 겁니다. 그것이 바로 구조에요. 하늘나라 구조가 그 여자 속에 장착되는 겁니다. 들어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장치가 설비된 겁니다.
진짜 이런 것을 실감나게 하려면 의존교회 돈 좀 내야 돼요. 어떻게 하냐하면 여기 설비 업체 불러서 다 뜯어서 수도파이프를 다는 거예요.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의자에 앉으면 붕붕 떠서 앞에서 물이 팍 쏟아져 나와야 해요. 온 천지가 물바다가 될 정도로 될 때 그것이 바로 온전한 교회, 주안에 서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안에 선다는 것은 주도권이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이 하늘나라 구조를 가지고 나에게 덮쳐버려서 나에게 장치, 설비를 해 버리니까 나는 그 다음부터 내가 원치 않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희한한 존재로 달라지고 마는 거예요. 주 안에 서라는 이 말씀은 이제 누가 성취할 소관이냐 하면 우리가 할 소관이 아니고 예수님이 ‘내가 부활했다.’ 이 말입니다. 나, 설비업체는 아직 안 죽었다. 무덤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무덤을 젖히고 무덤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저주와 사망을 이기고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뭐냐 하면 내 이 물이 들어 있는 인간은 다시는 저주도 없고 다시는 죽음도 없고 사망도 없고 다시는 하나님의 심판도 없다는 거예요. 마귀가 너를 지배할 수도 없다는 거예요. 그것이 물방울 하나하나가 되어서 우리 속에서 튀어 나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15장에 보면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냐? 이미 예수님께서 여기 십자가 죽으시고(푹꺼지시고)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셨을 때(봉우리) 처음에는 혼자 죽으시고 혼자 부활하셨죠. 왜, 제자들도 무시했으니까 ‘아이 똘아이, 나는 저주한다. 저 사람이 뭐 볼게 있어 아이 별것도 없는 게 죽으면 그만인걸! 불쌍한 양반 당신이 메시야 같으면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내려와라 죽는 꼬락서니 봐라 죽으니까 소용없잖아’ 어떻게 죽은 자가 사흘 만에 살아납니까? 죽으니까 소용 없는 거예요. 아무리 잘난 척해도 안 죽어야지 죽기 전에 천사가 내려와 줘야지 그런데 그냥 맥없이 죽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거예요. 이미 죽어버렸으니까 그런데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이 말은 이게 예수님께서 평소에 깔아놓았던 모든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여기에 필요한 사람을 데려가는 작업이에요. 데려가는 작업을 우리 속에 분수 설비 장치를 해서 팍 물줄기가 솟아나도록 ‘심봤다. 내안에 생명수 있다! 주님이 심어놨어 이것은 내가 철거할 수가 없어 나는 이제 미쳤어. 예수님이 내 안에 있어’ 그 예수님과 함께 온 것이 뭐냐 하면 ‘천국구조’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 거하라는 말은 죽어서 천국 가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내 안에 그런 설비가 되어 있다면 천국은 너와 함께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너에게 이뤄지는 모든 것은 바로 천국에서 이미 예수님의 공로로 만들어진 천국구조가 설비로 장착되어서 폭발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처음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는 세상과 예수님이 철저히 단절되었죠. 단절되었다는 말은 너, 나하고 같이 놀자 해도 붙잡아도 안 잡히고 가만히 있으면 붙잡고 다시 붙잡으려고 하면 없고 다시 가만히 있으면 오고……. 왜 그렇게 합니까? 그것은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성경적 이단이다.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내가 구원받겠다 하는 것은 이기적인 노림수에 불과한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만만한 분이 아니에요. 우리는 믿고 싶어도 74세 드신 분의 고백이 뭐라 했죠? 내가 인생에서 실수 한 것은 딱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내가 교회 가서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 실수다. 이제 내가 속 시원하게 나는 이제 하나님 필요 없다. 하고 소리 지르니까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그것이 시편 73편에서 뭐라 합니까?
시 73: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시 73: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보통 교회에서 앞에 이야기를 빼놓고 여기 4절만 해 보는 거예요. 자, 여러분 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세요. 들어보시고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아멘) “그 힘이 건강하며” (아멘)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아멘)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아멘) 여러분 해 줄줄 믿습니까? 믿습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 바로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누가 믿겠습니까?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맙시다. 예수를 믿지 말고 예수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말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 안에 하나님의 부활의 영이, 설비가 장착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와서 ‘이목사님 어떻게 해서 구원받았지요? 목사님 예수 참 잘 믿데요’ ‘아닙니다.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에이, 내가 보니까 믿는데’ ‘믿을 수 없습니다. 주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주도권을 주님이 쥐고 계시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기때문입니다. 그전에 지상에 있을 때는 내가 어떻게 탐색해서 내가 조사해서 예수를 믿어 볼까? 어떤 이익이 있을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시고 난 뒤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주님께서 이제 우리를 놓지 않으세요. 우리를 내 팽겨 치지 않고 본인이 와서 붙잡아 주니까 이제는 안 믿을 래야 주께서 믿게 하셨다는 이 사실 때문에 내가 안 믿어도 괜찮을 정도에요.
내가 예수를 내 쪽에서 믿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주께서 믿음을 주셨다 이 말입니다. 그런 느낌이 없다면 74살 되어서 고백하지 마시고 지금 고백하면 돼요. 목사님 저 이제부터 예수 안 믿을 랍니다. 이런 고백하면 돼요. 그러면 슬슬 약을 올리죠. ‘죽고 난 다음에 지옥 있는데 용감하셔라’ 박수 한번 쳐주고 ‘그런데 지옥은 얼마나 뜨거운지 닭 튀겨봤죠? 그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튀기는데 1, 2년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끝없이 있습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지옥가지 뭐’ ‘좋습니다.’ 박수 한 번 더 치고……. 그러면 그 사람이 할 수 없이 ‘그러면 지옥 무서워서 믿겠습니다.’ ‘그것은 가짜고 지옥이 있어! 믿는 것은 가짜고…….’ 어쩌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구조가 와 버리면 나의 시간과 공간 전부가 사실은 다 헛되고 주께서 이런 복음을 듣도록 그렇게 하신 겁니다. 시편 22편 29절 한 번 봅시다.
시 22:29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지옥 가는 사람들도 누구한테 절한다고요? 결국에는 예수님 앞에 절한다 이 말입니다. 인간에게 무시당한 예수님 앞에 지옥간 사람들이 지옥에서 절 할 수밖에 없어요. '역시 내가 틀렸고 예수님 당신 모든 말씀은 맞았습니다. 역시 우리는 지옥가도 마땅합니다. 이 세상은 불바다가 된다는 것이 장난이 아니고 진실이었군요.'라고 '주'라고 섬기는 거예요. 모든 하늘과 땅에 있는 땅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예수님 앞에 절하게 하시는 그 주님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사람의 힘으로 믿지 못하게 만들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예수님의 공로로 믿게 하기 위해서 믿는 것까지라도 예수님께 영광 돌리게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작전이었고 전략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 안에 서라 할 때 네가 이미 선자라는 뜻이에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서울100813빌4장1절b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어렵게 이야기하려고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모든 쉽게 하려고 애씁니다. 쉽게 하는데 쉽게 하는 방법이 뭐냐 끊어져 있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제가 제일 쉽게 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요. 끊어 졌습니다. 세상 따로 있고 천국 따로 있고 그런데 둘이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기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은 떨어져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끊어져 있는데 어떻게 들어갔어?’ 라고 물으신다면 주님께서 주님의 솜씨를 발휘했더니만 도저히 못 들어 갈 자들이 이미 주안에 들어 가 있습니다. 라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인간은 도저히 때려 죽여도 교회 갈사람 아니고 예수 믿을 사람 아니야’ 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예수님 복음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정말 이상합니다. 미스터리한 거예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지…….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안 믿고 있는지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눈이 여기 있잖아요. 눈이 위에 올라가면 안 돼요 눈이 어디에 있어야 하느냐 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눈이 밑에 내려와서 내려갔다가 올라간 것, 이 시선을 가졌을 때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런 그림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에요. 어떻게 저렇게 망가진 분을 하나님이 사흘 만에 부활시키는가! 어떻게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시키는가! 그것이 바로 구원 가는 믿음이에요. 아마 제가 이렇게 하면 제 멱살 잡고 ‘목사님 시비 걸고 싶습니다. 성경책이 이 만큼 두꺼운데 당신은 십자가 부활만 이야기해 놓고 하는 말이 십자가 부활만 믿으면 구원 받는다 당신이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는 것 맞잖아요?’ ‘예, 맞습니다.’ ‘그러면 다른 것 다 놔두고 성경책이 이렇게 두꺼운 데 십자가 부활만 이야기한 다고해서 구원이 됩니까?’ 라고 따지고 싶을 거예요 로마서 10장 9절에 나오잖아요.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제가 성경 두꺼운데 일부로 이것만 찾는 게 아니고 십자가 부활, 이것이 중심이 되는 거예요 나머지는 곁가지가 되는 거예요 화산 이야기 또 해야 되겠는데 화산이 여기 있는데 화산 뒤에 맨틀 현상에 의해 마그마에서 올라와요 지각이 있으면 밀도가 강한 것이 밑으로 내려가면 위에 있는 땅이 떠요 뜨면 숨어있던 맨틀에서 대류현상, 돌고 도는 현상이 있습니다. 뜨거운 것이 돌다가 틈을 바라보면서 틈사이로 끌어 올 때 땅덩어리가 올라오면서 터져버리는 거예요 마그마가 터지면서 용암도 나오고 화석도 나오는데 이렇게 터져 나오면서 홈이 파인 것처럼 나옵니다. 밑에서 마그마가 압력 받아서 올라와요.
여러분 지구는 딱딱한 것이 아니에요. 안에 들어가면 난로에요. 학생들 배웠어요? 안 배웠어요? 지구는 안에 뜨거운 난로로 되어 있어요. 들어가 보세요. 뜨거워서 못 들어가요. 난로가 나오면 여기가 십자가 부활이라면 나머지 이야기, 용암이 흘러나오는 것 같은 것은 곁가지입니다. 용암이 식으면 화산재가 되고 화강암이 되고 암석이 됩니다. 식습니다. 중심이 있어야 돼요.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의 뿌리이다. 그러면 돈을 사랑하지 않으면 구원받습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중심을 헛다리짚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 중심이 무엇인가 하면 시선을 올라가지 말고 밑으로 내려서 ‘어, 그분 죽었는데, 사흘 만에 살아났데!’ 이렇게 밑에서 위로 따라오는 마음이 여러분 속에 들어 있다는 말은 여러분들은 여기서 믿을 수 있도록 이미 하나님께서 장치를 하셨어요.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이미 성령이라는 장치를 집어넣으니까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다 믿어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때 우리도 시선이 따라서 같이 예수님과 죽고 주님 부활할 때 같이 부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겁니다. 로마서 6장, 예수님이 죽을 때 우리도 죽었고 예수님이 살 때 우리도 살아났느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공간 개념이 아니에요. 이것은 새로운 설비 업체가 하늘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무시하려고 합니다. ‘주님이여, 몇 년 뒤에 살아 날겁니까?’ ‘그런 것 따지지 말고 이미 살아났느니라.’ ‘주님, 저는 아직 안살아 났는데요?’ ‘그것은 네가 아직도 설비를 몰라서 그래’ 하늘나라 구조에서는 이미 시간을 넘어가서 이미 살아났느니라. 하면 살아 난 줄 믿으라, 그것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제가 괜히 강조하는 것 같아 미안한 느낌이 드네요. 제가 강조할 문제가 아니에요. 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성경에 그렇게 되어있어요. 이미 너는 하늘에 앉히시니 이렇게 되어 있다 말이죠.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광스럽게 했느니라. 로마서8장 29, 30절에 나오죠. 이미 그렇게 하셨느니라.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러분들이 성경을 내가 행함으로 지키려고 하니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성경은 우리가 행하고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이미 다 행하셨다는 거예요. 여러분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 태가 이미 죽었어요. 죽어 있는데 아브라함이 남편이 아내의 배에 손에 대고 간질 간질였습니까? 아기 하나 생겨라 간질간질 간질이니까 점점 배가 불러지는 겁니까? 두껍아 두껍아 애 하나 다오 했습니까? 아니에요. 오늘 만져도 죽었고, 내일 만져도 죽었고, 낌새도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이 ‘자식이 있을 것이니라.’ ‘자식이 있을 것이다’가 여자 배속에 들어가니까 ‘자식이 있을 것이다.’가 ‘자식이 있었다.’로 바뀌잖아요. 말씀이 나에게 임하매 우리는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들어오니까 그 말씀이 내 속에서 자생하는 거예요. 스스로 성장하고 스스로 커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밭에 떨어지면 밭이 어떻게 못해요. 씨가 알아서 열매를 스스로 맺고 알아서 한다 이 말입니다. 알아서 다 해주는 거예요. 이것을 믿으라고 강조하는 나도 참……. 이것은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하늘나라에 단어가 나오면 그 단어가 우리 속에 들어와 버려요. 그것이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3절에 나옵니다.
빌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봤나? 이름이 생명책에 있는지 봤나? 장부 내 놔봐 이것을 우리보고 자꾸 닦달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생명책에 있느니라는 하는 그 말씀 자체가 하늘나라에서 설치를 해 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이삭이 있느니라 하면 이삭이 생기는 것처럼, 생명책에 있느니라 하면 이미 생명책에 이미 있어버립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74살 먹어서 ‘생명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나도 있는 줄 알고 믿어봤지. 없더라’ 라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어요. 우리는 진작부터 그것을 하란 말 이예요. 74살 먹도록 기다려서 하지 말고 지금부터 하란 말이죠.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말이 아니라 ‘생명책에 있지! 왜 있느냐 하나님이 있다하면 있는 거야,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잖아. 사람이 있으라 하면 사람이 있듯이 생명책에 있다 하면 있는 거야. 성경말씀은 무조건 맞는 거야’ 라고 이것이 믿어지는 것이 인력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믿어질 수가 없어요. 이것은 나도 내 마음대로 못해요. 이것은 내 평생에 내가 뺄 수도 교체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어요. 성경 자체가 내 안에 들어와 버렸는데 내 안에 성경책이라는 것이 꿈틀거리고 살고 있는데 내가 부인할 수가 없는 거예요. ‘생명책에 있느니라’ ‘아, 내 명단도 있겠구나! 그러면 나는 살았네.’ 왜? 명단에 있으니까 그럼 걱정할 것 없네. 없지요.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했습니다. 교회에 처음 올 때는 병 낫기를 원했고 돈 벌기 위해서 오고 사업 잘되기 위해 오는 무슨 노림수가 있어서 이거 안 해주면 삐져서 교회 안 나오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어쨌든 간에 교회 와서 말씀을 편 순간 생명책에 있느니라. 하니까 ‘아이고 감사해라. 이게 웬 횡재냐! 예상도 못한 건데 나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 되었데……. 아, 이런 횡재를! 주여 감사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냐 이 말이죠. 바보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할 때 제자들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믿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을 빼 버리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니까 ‘야, 제자들이 똑똑하니까 믿었을 거야’ 사람은 예수님을 못 믿게 되어 있어요.
‘아이 목사님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을 왜 못 믿어요.’ 그것은 당신에게 예수님의 영이 왔기 때문에 믿는 것이 부담 없이 쉽게 믿어지는데 당신보다 똑똑한 사람보고 믿어 보라 해 보세요. 안 믿어지지……. ‘인생에 무슨 길이 있고, 죽고 나면 그만이지 무슨 생명이 있어.’ ‘목숨이 생명이지 무슨 생명이 또 있어.’ 이렇게 나온다 이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편지를 쓸 때 성령에 의해서 썼습니다. 그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베드로가 그렇게 썼어요. 사도바울의 글들은 성령에 의해서 쓰게 됐다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해석하고 번역할 때도 설교할 때도 항상 성령 받은 입장에서 해석을 해야 돼요. 성령 받은 입장에서 해석을 해 버리면 절대로 우리가 이 말씀을 지킨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 말씀 하나 하나가 믿어지는 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도와줄 때 우리와 함께 할 때 우리가 믿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무엇인가 하면 기쁨이며 이 기쁨은 단절의 기쁨,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올라갈 때 이미 예수님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는 단절되었어요. 끊어짐에서 오는 기쁨이에요.
회사에서 회식하는데 사장님부터 전 직원이 하는 말이 ‘너는 교회가고 예수 믿으니까 술 안 먹지?’ ‘술 먹어도 천국 가는데’ ‘아니, 너는 술 먹으면 안 되잖아?’ ‘아니요, 술 먹어도 천국 가요’ ‘이상하다 다른 교회에서는 술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술 먹는데 천국 가냐?’ ‘천국은 내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술 먹던 안 먹던 무슨 짓을 하던지 간에 이미 창세전에 성령이 오면 그 사람은 구원 받았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술을 먹더라고 생명책에 이름이 변동되지 않습니다. 바뀌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감사함과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그럼 술 먹을 수 있다는 말이지?’ ‘술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 앞에서 먹어봐라’ ‘당신이 시키니까 난 안 먹는 거예요. 당신들이 시켜서 당신들의 강압에 의해서 나는 주님의 힘보다 당신의 힘이 더 센 것이 되기 때문에 그 꼬락서니 보기 싫어서 안 먹습니다. 나 혼자 있을 때 먹고 싶을 때 먹지만 당신들이 먹으라고 해서 먹을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다니엘서의 세 친구 이었었어요. 되지도 않는 고집이 있었어요. 하라하면 안하고 하지 말라 하면 하고……. 왜? 우리는 그런데 구애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내 안에 설비를 뜯어내 버리고 주님께서 설비를 교체해 놨기 때문에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이 기쁨이 되는 거예요. 가만히 놔둬도 되고 손을 데도 상관없고 손을 안데도 상관없고 이래도 상관없고 저래도 상관없고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손 덴 거예요. 그것이 세상관의 단절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와의 단절, 내 몸은 나와의 단절,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몸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나온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홀가분함, 기쁨이죠. 얼마나 기쁜지 4장 12절에 보면 ‘내가 자족할 줄 아노니 내가 비천에 거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모든 일에 배부르며’ 이 대목 모든 일에 뭐한다고요? ‘모든 일에 배부르며’ 쉽게 말해서 안 먹어도 배부르며, 인생 실패해도 배부르며……. 왜? 모든 일이니까…….애가 아파도 배부르며, 교인수가 줄더라도 배부르며, 성경공부 교인들이 참석 안 해도 배부르며, 수박이 좀 쉰 것 같아 해도 배부르며, 단술이 맛있어도 배부르고 맛이 없어도 배부르고 모든 일에 배부르며……. 한마디로 미쳤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화산에서 기어 나온 새로운 인간들이 나오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 믿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못 믿을뿐더러 이렇게 새사람 된 사람을 다른 이웃, 친구들이 믿는다? 못 믿는다? 이 사람을 못 믿어요. ‘네가 미쳤다. 미쳤어 네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상이었는데 왜 이렇게 됐느냐? 누가 너를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놨어?’ 믿지를 못해요. 왜냐? 단절되었기 때문에…….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가에 물을 길러 왔던 여자가 물을 길러 왔으면 물 길러 가야지 가만히 있는 양동이는 왜 버립니까? 이런 겁니다. 여기 식혜가 있는데 식혜주시는 집사님에게 ‘식혜 좀 주세요!’ 식혜주려고 왔는데 옆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물이다’ 하니까 식혜 던져버리고 ‘나는 배부르다.’ 하는 것 하고 똑같은 소리에요. 미친 거 아니에요. 식혜를 받으러 왔으면 식혜를 받아 가야지 ‘나는 식혜가 없어도 괜찮아, 나는 살았네!’ 하는 이 소리하고 똑같다는 말이죠. ‘나는 메시야를 보았다.’ 이 소리예요. 표정들이 왜 그래요? 안 믿는 것처럼…….(ㅎㅎ)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워낙 적기 때문에 내가 혹시 저렇게 물들면 나도 광신도 되지 않겠나! 걱정이 먼저 드는데 예수 믿기 전에는 광신도가 염려되지요. 그런데 주님의 성령이 와서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알면 그 다음에는 광신도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고맙게 여기고 자랑스럽고 그야말로 식혜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여러분 외양간에 소가 없으면 목축업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그러면 포도 농사 왜 짓습니까? 미쳤습니까? 왜 짓습니까?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이 사람이 살려는 거야, 죽으려는 거야? 그래도 나는 무엇으로 기뻐한다? 나를 구원한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한다. 이게 하박국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일반 교회 어떻습니까? 기도 하시면 소떼가 많아지고, 기도하시면 열매가 커지고 포도 알이 굵어지고 무화과나무 열매가 3개 열렸던 것이 10개 열립니다. 그러면 그 기쁨이라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마귀가 준 가짜 믿음이죠. 성령이 없으니까 그런데 혹하고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 나도 교회 나왔으니까 기죽지 않고 살아야지. 이게 무슨 꼬락서니냐 10년이 되도 이 모양 이 꼬락서니이고 20년이 되도 이 모양 이 꼬락서니…….’
그러니까 74살 되어서 ‘아이고 소용없더라, 헛짓했다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지요. 잘 하셨습니다. 진작 본색 드러냈어야지 어떻게 숨긴다고 해서 하늘나라 심판을 통과 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시선을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그거예요. 구원은 이미 나와 있어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미 끝났어요. 어떤 목사가 변경을 시켜도 변경이 안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시선을 안 따라 간다는 거예요. 무화과나무에 소출은 많고 외양간에 소가 많은 것 자꾸 그것을 따라 가는 거예요. 몸 병 낫고, 교인 수가 많고 헌금 많아지는 것, 그런 것을 따라 가는 거예요. 그런 걸 따라 가니까 무엇과 멀어집니까? 점점 더 로마서10장 9절과 멀어집니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점점 더 멀어져 간다 하니까 노래가 생각나는데……. 김광석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인데 자기가 나이가 서른 되고 보니까 점점 멀어진다는 거예요. 세상 축복을 쫓다보니까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거예요. 고마운 사실은 예수 믿는 사람은 점점 더 생각이 나게 하세요. 아, 그동안 예수 믿고 노림수를 가졌었는데 그것이 바로 마귀의 장난인 것을 알고 진짜 물동이를 버릴 정도로 물동이고 뭐고 다 버려도 괜찮다 할 정도로 주께서 뺏어감으로서 잊었던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시 한 번 회복시키는 그런 성령의 역사가 매일같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어요.
뭔가 얻고자 하는 것은 빼앗기고 그래서 탄식할 때 다시금 떠오르는 십자가의 복음,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는데 뭘 또 원하고 있어? 너는 나의 쓴잔을 마실 수 있느냐?’ 우리는 식혜만 먹을 줄 알지 주님의 쓴잔을 마실 생각은 안하잖아요. 주께서 먹게 하십니다. 먹게 하시면서 이렇게 달고 맛있는데 그동안 왜 미숫가루만 좋아 했던가! ‘내게 모든 것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의 일체의 비결을 배웠는데’ 일체의 비결이 뭐냐?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미 내 안에 계신분에 의해서 내가 못하는 것이 없다. 못하는 게 없다는 것은 ‘슈퍼맨! 도와주세요!’ 이런 것이 아니고 무엇을 해도 ‘주님의 능력으로 이만큼 살아왔습니다.’를 깨닫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예수 믿는 거예요.
지금까지 제가 예수 믿는 것이 이런 거라는 것을 설명한거예요. 단절이에요. 친구하고 대화가 안 되는 즐거움, 가족끼리, 동서지간에 전혀 대화 안 되는 그 기쁨, 심지어 자식 간, 심지어 부부사이에도 대화가 딱 끊어진 그 행복......, 그래놓고 모든 것에 나는 배부르다. 이것은 히딩크가 한번 들어봐야 돼요. 히딩크가 4강 가고 나서 뭐라 했습니까?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하잖아요. 제가 안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죠. 사람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차지하고 나면 욕망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인간은 견딜 수가 없다고 따라서 욕망을 차지할 때쯤 되면 욕망의 다른 대상을 찾아가요. 찾아가서 또 다른 욕망에 배고파하면서 자기 사는 보람을 느껴요 어떤 욕망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그 자체가 인생사는 보람이 되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 믿고 난 다음에 모든 욕망은 욕망에서 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배부른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때 그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만들어 낸 아주 단절된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고 또 설명조차 안 되는 뭔가 낯선 힘이 와서 나를 강타하고 모든 것을 덮쳐버렸어요 성령이 와서 덮쳐버리니까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내가 왜 예수를 믿는 지 설명할 길이 없어요. 설명하지 마세요. 그냥 나는 믿습니다. 그것으로 주님만 고백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구태여 남에게 설명하려고 설득할 필요 없어요.
다음에 약간 어려운 것을 해 봅시다. 어려운 것을 하지만 제가 쉽게 하려고 애씁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에 예수님만 죽으신 게 아니고 주위에 있는 모든 이 세상구조, 세상구조가 어려우면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것,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모든 것이 다 저주받았어요. 예수님이 저주 받을 때, 예수님이 저주 받았다 하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저주 받았다는 말이 어디 나오냐? 성경에 그런 게 있느냐? 하는 데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서 저주받는 다고 했으니까 그런 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저주받을 때 예수님만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이 저주 받았어요 세상 것은 이제 전부 다 저주 덩어리에요 세상에 모든 것, 우리 몸까지 모두 저주받아요. 저주받는 것이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저주받는다는 것이 기쁨입니다. 왜냐 하면 저주라고 하는 것은 교체되는 겁니다. 현재 우리의 몸은 없어지고 새로운 몸을 받거든요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흔히 드라마 보면서 사람들이 드라마에 빠지는 이유가 그 순간 잠시 동안 바꿔치기 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내가 저 사람 돼서 내가 현재 이 지긋지긋한 이 사회에서 벗어나서 잠시 저런 공주가 되고 저런 재벌2세가 되고 저런 재벌 집에 며느리가 되고 나는 별 재주가 없는데 빵굽는 재주가 있는 탁구가 돼서 빵도 잘 굽고 …….뭔가 바꿔치기 돼서 뭔가 하고 싶고 자기 집이 없을 때는 강남에 이십만 평 사서 이범수처럼 땅이 있어서 집을 짓고 미운 사람 있으면 안기부에 형님이 있어서 대신 복수해 주고 ……. 자이언트 이야기입니다. 그 순간은 일상에서 오는 슬픔과 피곤함을 잊어버리거든요 제 아내가 늘 집에 오면 피곤해 할 때 뉴스보자 하면 나 피곤하니까 나 보고 싶은 거봐요 리모컨을 딱 제킵니다. 예예예 이 세상이 나는 저주 안 받았다 하면 그때부터 사는 게 힘들어져요
저주 안 받으려고 하는 몸짓, 착한 일하기, 천사되기, 훌륭한 사람 되기 ‘주여, 저주 받았지만 약간 감해 주세요!’ 이런 식으로 그렇게 살지 마셔요 인생 그렇게 사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마저 저주 받았다면 예수님이 왜 저주 받았어요 ? 누구 죄 때문에 저주받았어요? 우리의 죄 때문에 저주받았잖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저주받지요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십자가를 믿고 본다하는 것은 예수님 믿고 시선을 따라가 보면 ‘저분이 왜 저주 받았지? 내 죄 때문에 저주 받았구나! 그럼 나는 뭐하고 있지?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구나! 아 즐거워라 이렇게 된 다 이 말입니다. 저주 받고 그 다음에 시선을 따라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면 어디로 올라가느냐 하면 부활이 되는 겁니다. 부활이 되면 저주받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부활했기 때문에 그 부활의 영이 성령이죠. 부활의 영인 성령이 오면 우리의 저주가 무엇으로 바뀝니까?
우리의 모든 저주가 축복으로 교체하기 위한 작업이 우리의 남은 인생, 남은 세월입니다 저주받은 병든 이 몸을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몸으로 갈아치우는 작업, 이것이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옵니다. 어서 옛 옷을 홀딱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을 그날이 어서 왔으면 ……. 사도바울이 그 이야기할 때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이 몸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무엇으로 봅니까? 추리닝, 경상도 말을 난닝구, 러닝셔츠 사도바울은 자기 몸을 동대문 시장에서 파는 옷 한 벌로, 셔츠 하나로 본거예요 사도바울은 자기 몸을 남들은 보약 먹고 침놓고……. 어깨가 안 좋아 침 맞아야 되는 데 오십견이 와서 불안불안 한 데 입에서 '옷을 벗어보자! 주여, 옷 갈아입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자기 인생을 그렇게 볼 정도로 그만큼 자신만만하고 복음에 확신이 서있는 거예요 모든 것은 말씀대로 그대로 되어 간다! 나는 확신합니다. 이런 쪽으로 본겁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뭔가 하면 이것은 얼토당토않은 자신감 이예요 본인은 아니지만 남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자신감…….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탁구 내지는 황정음, 이범수 누이동생 그렇게 고아라고 수모를 당하고 무시를 당해도 모독을 당해도 자기는 즐겁게 자기인생을 사는 것 거기에 무슨 우울증이 옵니까? 전부다 남 탓이고 세상이 더럽고 어떻고 이런 것이 아니고 세상은 더러워도 나는 단절되었다 더러운 세상으로부터 나는 단절되어 있어 세상은 더러워 나는 옷 갈아입고 갈란다. 할 정도 로 주어진 것에 은혜에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이라는 거예요 환란 중에 너희가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구나하는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면서 예수님이 독수리라면 여기 날갯죽지에 자기가 구원하실 생명책에 기록된 분을 여기에 담는 거예요 그것이 오늘 빌립보서 4장2절에 보면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보세요! 이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도저히 인간은 믿을 수 없는데 진짜 믿는 자들이 있더라 이 말이죠.
‘목사님 못 믿습니다.’ ‘아니 있다니까 글레멘드 라는 사람이 있다니까’ ‘인간이 못 믿습니다.’ ‘생긴다니까’ 누가 생깁니까? 주님께서 믿음 준 사람이 여기저기서 생긴다니까 그렇게 사는 사람, 동역자들이 있어요. 신기해요 사도바울은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것을 전하고 내가 너희가 믿으면 손에 장을 짓는 다고 했는데 이제 장 짓을 판이에요. 도저히 믿지 못하는 이야기라는 거예요 사람은 무엇을 믿고 싶냐하면 예수 믿고 잘되고 복 받고 하는 것을 싶어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배부르다는 소리를 해 버리니까 누가 믿습니까? 배고픈데 뭐가 배불러…….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해놓고 이것은 못 믿을 거야 아, 믿지 마 이것은 시작부터 나는 못 믿을 거야 못 믿는다고 해 그런데 믿음이 생길 때 이것은 주님께서 활발하게 일하고 있는 증거다 이 말입니다.
지금도 주께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형제라 할 때 그것이 피를 나눈 형제 정도가 아니잖아요. 혈육의 형제가 아닙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바로 주님께서 같이 천국에서 잘 살라고 곁에 붙여준 형제, 저와 여러분입니다.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 예? 여러분은……. 윤복희 노래죠. 신기할 정도죠 그래서 목사가 설교할 때 이 신기함을 유지하도록 복음만 외쳐야 되요 복음은 안 외치고 '여러분 기도 하면 복 받습니다.' 이렇게 하면 형제가 아닌 아, 형제 맞구나 지옥 갈 형제들 (ㅎㅎ)
그래서 74살 먹어서 나는 예수 믿은 것이 헛것이다. 내 힘으로 살았는데 뭐 하나님 힘으로 살았다고 뭐 웃기지마 그런 고백할 사람 모으지 말고 정말 이것은 여러분 때려죽여도 못 믿습니다. 약을 살살 올려서 아, 그거 거짓말 못 믿어 아예 못 믿는 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목사 네가 어떻게 나를 알아? 나는 모든 것을 버려도 모든 것이 배불러’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등장한 다면 그것은 주께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입니다. 아마 그 사람 밑에 이름이 있을 거예요 글레멘드, 글레멘유, 글레멘정, 글레멘최, 글레멘박……. 이렇게 합격통지서에 한꺼번에 나와 있을 거예요
한번 빌립보서를 정리해 봅시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에 편지를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여러분 고생이 많지요? 위로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편지를 사도바울을 안 보냅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고 주안에 서세요. 여러분 주안에 섰다면 이런 환란은 잽도 안 됩니다. 환란도 아닙니다. 이것보다 더 센 환란이 와도 저처럼 기뻐하고 기뻐합니다. 여러분 저는 옥에 갇혀있습니다. 인생 망가졌습니다. 희망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옷 갈아입고 싶어서 환장하겠어요. 빨리 감옥소의 옷을 홀딱 벗어버리려고 나처럼 기뻐하는 사람 없을 거예요 아마 있다면 주의 형제입니다. 라는 식의 편지를 보내는 거예요 그 편지내용은 도저히 일반인들은 윤리 도덕적으로 납득이 되는 편지가 아니에요.
빕립보서 1장 29절 봅시다.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분명히 그렇게 있죠. 제가 이제 설교를 하겠습니다. 우리 의존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 믿는 것은 뭐 복 받는 것으로 알지요? 이제는 그렇지 않고 주님의 쓴잔을 마시세요 설교 끝! 그 다음 주가 또 되었어요. 여러분, 주님의 쓴잔을 마시기 위해서 나오셨군요. 쓴잔을 듬뿍 드리겠습니다. 설교 끝! 연달아 4주만 해 보세요 그 다음부터 슬슬 안 보이기 시작해요 슬슬 자리가 비기 시작해요 성경에 있냐, 없냐를 따지지 않고 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내게 주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시선을 예수님 가신 곳으로 가 버리면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고는 모든 것이 빼앗긴다 할 때 비로소 신자 맞고 안 맞고가 그때 등장됩니다.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 내가 원했던 것 다 날라 갔을 때 진짜 신앙이냐 아니냐는 그때 들통 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을 발가벗길 때 감사한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이야기가 빕립보서 4장입니다. ‘환난 중에 기뻐 하라’ 그리고 나온 2장이 뭐냐 하면 예수님은 당신들보다 더 고생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지만 이 땅에서는 희한 하게도 이 땅에서는 하나님 영광을 포기 하고 가장 낮은 인간으로서의 하나님, 하나님이 맞아요. 틀린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인데 영광스런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보다 더 천한 하나님, 인간보다 더 낮은 하나님, 더 비참한 하나님으로서 나를 믿느냐 라고 제시 했던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를 믿고 부활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제가 아까 로마서 이야기할 때는 쉬운 것 같은데 막상 제가 빌립보서 가지고 설명하니까 인력으로 믿기 곤란하겠죠. 우리와 함께 왔으되 우리보다 더 비참해진분이 진짜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즐겨 ‘고맙습니다.’ 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영, 성령이 임하면 ‘아, 주님께서 멋지게 일 하셨습니다. 아이고, 자칫하면 놓칠 뻔했습니다. 주님 여기 숨어 계셨군요. 내가 십자가를 덥석 붙잡습니다.’ 라고 나오신다면 여러분은 성령 받은 분입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을 봅시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어떻게 한다고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죠. 그러면 자기를 어디에 집어 넣으려합니까? 죽은 자 가운데에 자기를 집어넣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제대로 알려준 코스인거예요 죽은 자의 특징은 모든 것을 빼앗겨요 목숨 빼앗기면 모든 것을 빼앗긴 거죠. 이것이 얼마나 홀가분합니까?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해요 제가 이번 수련회 때 했고 주일 설교도 했는데 일가친척이 내가 사랑 줬으니까 사랑 줄 꺼라 생각하시는데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 밖에 몰라요 사랑 준 다고 사랑 되갚아 주는 게 아니에요. 관속에 누웠을 때 제가 장난치듯이 이야기했습니다. 죽으실 때 그냥 관속에 눕지 말고 죽은척해서 관속에서 빼꼽히 살짝 열어보라 했어요. 누워서 못을 한두 개 빼서 관 뚜껑을 열어서 조카는 어떻게 나오나 보고 큰 아들 어떻게 나오나 보고 시집간 둘째 딸은 어떻게 나오나 죽은 다음에 보라 말이죠. 죽은 다음에 보게 되면 ‘아이고 아이고 하죠.’ 죽으면서 ‘네가 형식이구나! 남을 의식하고 하는구나!’ 그런데 엎어져서 울면서 ‘형님 가시면 안 됩니다.’ ‘아이고 진작 그렇게 하지 죽기 전에 나한 테 사과하지 죽고 난 뒤에 사과하면 무슨 소용 있나’ 한번 드려다 봐요 참 재미있습니다.
아마 그거 다 보고 나면 명이 살아있어도 자기가 자살하고 싶을 거예요 ‘이 더러운 세상 진작 떠날걸! 뭘 믿을게 있다고 뭘 기대 할 게 있다고 아이고 저게 자식이라고 내가 죽을게.’ 하면서 자기가 죽어요.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죽게 하시고 날마다 살게 하십니다. 날마다 세상에 대해서 실망케 하시고 날마다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흐뭇하게 하시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 주님의 설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설비하고는 완전히 단절되어 사람이 이상하게 되어 뭔가 정상적이 아닌 사람처럼 그렇게 되요 사도바울의 모습이 그래요
다음 빌립보서 3장 18절
빌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리스도 십자가 원수로 행한다.’ 십자가가 밥 먹여줍니까? 십자가가 뭔데 그렇게 십자가가 가지고 안달을 내느냐 이 말이죠. 사도바울은 생각에 저런 십자가 때문에 내가 살았다는 거예요 지금 내 행세 같으면 천번 만번 지옥가고 왔다가 또 가고 또 들어가고 영원히 못 나올 인간인데 예수님의 십자가 피 때문에 내가 살았다는 겁니다. 이야기, 끝난 이야기예요 ‘목사님 고함지르지 마세요. 내가 20년 살다가 예수님 믿을게요.’ 이러지 마세요. 왜냐 하면 20년 살다 믿던 30년 살다 믿던 관계없이 십자가 피로 죽을 우리가 살아났기 때문에 누구든지 십자가 피에 대해서 ‘무용지물이다 네가 헛짓하고 있다 꿈은 환상이구나! 그것은 소용없는 거야 그렇게 믿다가 안 믿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야’ 라고 모독하게 되면 자기는 여기서 울고 싶다 그게 아닌데 그것은 가짜인데 진짜로 하늘에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 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영원한 기쁨으로 간직할 텐데 아 가짜가 너무 많구나 하고 그들은 십자가 안다고 하면서도 십자가 안 믿는 인간을 영원한 십자가의 원수라고 해요
제가 또 들은 이야기 할게요. 미국에 어떤 사람이 너무 부자 인데 돈이 너무 많아서 자살하려고 했어요. 진짜에요 실화에요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자기 친구 중에 감리교회 목사가 있어서 불렀어요. 감리교회 목사는 죽을 때 돈이나 주는가 싶어서 갔는데 ‘친구야 내가 너를 만나고 오늘 밤 죽으려 한다. 진짜 자살하려한다. 죽기 전에 기독교가 뭔지 한 번들어보자’ 하니까 친구가 귀찮다는 듯이 ‘치 기독교가 궁금하냐? 요새 아무도 안 믿는다니까’ ‘그래도 이야기해 봐라’ ‘안 믿는다니까 해 봐야 너도 안 믿을 거고 나도 물론 안 믿고 옛날에 그런 것이 있었다는 그뿐이야 같은 목사들도 안 믿어’ ‘무슨 이야기인데?’ ‘옛날 교리에 보면 예수라는 사람이 왔는데 그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 피로 구원받는 다나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그런 이야기 초대 기독교에 보면 그런 게 있어 예수님이 대신 죄용서 하고 피 흘리면 피와 더불어서 자기 죄는 없어지고 그 피가 우리를 의인 만들어서 의인들이 가는 천국을 가는 그런 이야기인데 니 못들은 것으로 해라 나도 안 믿어 옛날이야기야’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사람은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친구 앞에서 한 시간 반 동안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왜 우나?’ 하니까 ‘예수가 살렸데 예수가 내 죄를 씻었데.’ 그것만 되풀이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씻었데.’ 그것만 이야기하면서 한 시간 반 동안 계속 우는 거예요 목사 그 친구는 ‘미쳤네. 아무도 안 믿는 건데 나 갈란다’ 가고 난 다음에도 계속 우는 거예요 이 좋은 소식을 이제 와서 왜 전하냐 이 말이죠. 그 목사는 ‘그런 설이 있데 그런 이론이 있어 책에 그런 내용이 있는데 성경 자체가 옛날 책이라 믿지 마. 요새 우리교회 아무도 안 믿어’ 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생명이었습니다.
행했습니까? 자살을 행해서 그런 겁니까? 행함 없어요. 예수님은 자기가 생명책에 기록될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서 아닌 자가 누구인지 알아서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되는 방식으로만 그 사람에게 믿음을 줘요 믿음을 줘놓고 ‘내가 믿어서 구원받았어’ 라고 안 나오는 사람에게만 진짜 성령 보내서 성령으로 믿게 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죽어 마땅한 데 예수님의 피 때문에 살았다는 말이 나오는 사람에게만 성령을 줬다는 증거가 돼요 그 외에는 안 돼요 열심히 교회 20년 다녀서 구원받는 것. 이런 것 없어요. 다 거짓말이에요. 아무것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부활하는 것을 믿으면 네가 죽어도 천국간다. 유치원 아이들도 아는 이 간단하고 단순한 이야기를 사도바울은 울면서 하는 거예요 ‘누구야! 누가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을 모독해! 나는 울고 싶다!’ 이거예요 그 뒤에 나온 이야기가 빌립보서 3장19절 20절 봅시다.
빌 3: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저의 시민권은 대구시 동구 지묘동이에요. 끝나고 나면 집에 가고 싶어요. 왜? 우리의 시민권이 거기 있으니까 제가 만약에 신월동에 이사 온다면 저는 대구 갈 필요 없습니다. 얼른 집에 가고 싶어요. 내시민권 있는 곳에 내 영원한 안식처고 고향입니다. 영원히 살 곳이에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예수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고향이 어디 라고요?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데요 이거 터무니없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거 믿는 사람 없잖아요 없는데 이게 믿어진다면 그것은 단절입니다. 세상과의 모든 것이 단절된 상태에서 주께서 은혜 주셔서 믿게 하신 거예요 그 외에는 달리 설명이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14절에 보면
빌 4: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 4: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찌어다 아멘
사도바울의 이런 고백의 삶 자체가 그 당시에 하나의 계시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이 안보이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아, 사도바울이 성령 받은 사람 맞다’ 라고 동감할 때 그때 동역자가 되고 예수님, 주안에 같이 서는 주님 때문에 인간이 이렇게 달라졌다는 같이 동감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주안에서 거하는 영광을 받는 성도라는 이런 뜻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고함을 치지 않더라도 우리가 애쓰지 않더라도 이미 일은 벌어졌고 이미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받아 천국 갔고 지옥 갈 사람은 이미 지옥 갔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 가 있고 부자는 지옥 가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눈이 열려서 눈에 보이는 세상만 보지 말고 성경말씀대로 죽고 난 뒤의 세계도 같이 아울려서 믿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 9. 1. 김창길 녹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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