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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연대강의 19강 본문

해외 특강/14연대연합

연대강의 19강

정인순 2014. 3. 20. 10:57

강의:이근호 목사

음성19 

 

연대강의 19강 녹취

 

다니엘 이후에 소선지서들이 나옵니다.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우리가 이 책들을 보게 되면 잔소리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책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잔소리 하지 마시고 기적 베풀어 주세요. 잔소리는 나도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잔소리, 남 비난 비판 잘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병 고쳐 주고, 그러지 말고 축복해 주어서 나라가 잘 되게 하시면 감사합니다라고 할 겁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이렇게 하지 말고. 무화가 소출이 더욱더 풍성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풍성하며, 감람나무 소출이 열배가 되며, 밭에 먹을 것이 엄치며, 우리의 양이 날이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나며, 외양간 소가 갈수록 늘어나는 이야기를 해 준다면 우리가 하박국을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는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조류 독감으로 인해 닭장에 닭이 다 죽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합니다.

출애굽기에 의하면 약속의 땅이 복 받았다 복 받지 않았다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른다면 복 받은 것이고(출3:17), 즉 포도나무의 소출이 풍성하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풍성하다면 축복받은 것인데, 만일 포도나무의 소출이 없고, 무화가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다면 저주 받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하박국에 와서는 그것이 축복과 저주가 된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랬다 저랬다 하십니까? 왜 이렇게 일관성이 없습니까? 우리가 어느 것을 채택해야 할지 헷갈리게 하시는 겁니까?

종말은 모레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현상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이 천국이지 좋은 곳에 계신다는 생각을 버려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많은 소유를 가졌습니다. 요셉도 총리가 되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잘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가까이 오면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면 그곳이 가난하고, 소출이 없어도 그것이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조건이 됩니다.

 

왜 잘되는 것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과 같은 이런 생각에 쉽게 동의할 수입니다. 그런데 쉽게 동의 할 수 있도록 해 주셔야 하는데 잘 되는 것이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어버리고 부자가 천국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 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십니다(눅18:25).

사람에게 높임을 받으면 하나님께 미움 받고(눅16:15),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은 부자는 지옥가고 거지 나사로는 지옥 갑니까(눅16:19-31)?

 

왜 이런 식으로 시대의 마지막, 종말을 거꾸로 장식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이 이야기가 목회에 도움 되지 않습니다. 복 받기 위해 교회 오는 사람에게 여러분 복이 저주일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 교회 오려는 동기부여조차 제거하는 것이 됩니다.

 

왜 이렇게 거꾸로 되었습니까? 그것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의 기적이란 요나의 기적밖에 없기 때문입니다(마16:4). 주님이 충분히 기적을 베푸신 후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만일 기적을 베풀지 않고 이런 말씀을 하신다면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기적을 충분히 보여주신 후에 하시는 말씀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에 너희를 죽일 때 너희는 곱게 수용하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와 동행하신다고 하실 때 너희들을 죽이기 위해서 동행하십니다. 너희들은 죽는 용도로 사용하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한 손길입니다. 죽여주실 때 죽어 줘야 합니다.

 

이것을 요나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나를 보면서 선교이야기 하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요나에서 핵심은 요나가 과연 선지자 맞느냐 입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복음을 전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거처서 이스라엘을 전도하셨습니다.

멸망한다는 니느웨는 회개해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니느웨가 망한다고 했던 이스라엘은 그 모양 그 꼴이냐?

 

요나선지자 시대에 북이스라엘은 가장 잘 살았던 시대입니다(왕하14:25). 이것은 요나의 예언대로 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나 왕 둘 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하나의 경로를 거치게 하십니다.

요나 선지자에게 니느웨 멸망당한다. 요나가 상식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가 멸망할 것을 네가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요나는 신났습니다.

신났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전하나 전하지 않으나 망하는 것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전할 이유가 없지요. 꼭 예정론 믿는다고 하는 목사가 선교에 소홀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전하나 전하지 않으나 지옥갈 자는 지옥가고 천국갈 자는 천국 가는데 갈 이유가 없지요. 그래서 요나는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주님이 알아서 잘 하실 텐데 내가 거기에 끼어들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요나는 자신은 일단 구원받았고 그리고 난후 나를 제쳐놓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요나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니 다시 손대지 않아도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죠?

 

합창할 때 도레미파솔 할 때 레 소리를 낼 때 도 소리를 내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로 하여금 이스라엘 나라가 어디서부터 구원받았는가를 보여줍니다. 첫사랑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요나가 경험한 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중심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존재한다. 언약의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요나가 어디에서 알았습니까? 요나는 나 하나 너 둘, 너 셋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시스로 가는 중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 요나는 나하나, 너 둘이 아니라, 나 하나, 나-둘, 나-셋이 됩니다. 그들의 운명은 누구 손에 달렸습니까? 스스로 그들을 구원할 위인이 못된다고 자처한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대도 않은 겸손이지요.

나 같은 인간은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나 없어도 주의 일은 주님이 하시니 저는 빠지겠습니다 하는 그런 요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그런 요나를 사용해서 요나의 목숨과 함께 배에 탄자들의 목숨을 하나로 묶어 버렸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죽어야 당신들이 산다고 합니다.

 

요나가 과감하게 죽습니다.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요나는 드디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죽으심으로 구원하는 것을 자신의 죽음으로 보여줬다. 그러니 요나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끝. 이게 일부입니다.

예수님은 요나를 성취해 버립니다. 요나는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그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혼자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요나가 살아날 때 함께 살아남으로 성전의 의미가 요나의 운명 속에 새롭게 별처럼 나옵니다. 그냥 죽지 않고, 죽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것도 아니고. 분명히 죽었습니다. 요나는 여기서 성전을 향해 기도합니다.

여기에서 묻습니다. 성전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고기 뱃속에 있는데 성전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어찌되었든 성전을 향해 기도하니 살아났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선지자의 존재는 어디에 복속되고 어느 원천에서 나왔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있어야 합니다.

 

요나를 위해서 요나가 살면 안 되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으면 안 됩니다. 성전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요나가 있고, 이스라엘이 존재합니다. 그 성전에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십니다.

열왕기상8장에 솔로몬이 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질병, 기근, 전염병, 전쟁 패배 등이 있을 때 죄지은 줄 알고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죄를 사하고 축복해 주시겠다는 것이 다윗 언약입니다.

 

모세 율법은 개개인이 지켜야 합니다. 다윗언약은 왕하나 잘되면 다른 사람들은 문제가 있어도 왕덕택에 복을 누리는 체계입니다.

모세언약에서 왜 다윗언약으로 넘어갑니까?

율법으로는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제사장 가문 실패했습니다. 사울왕도 전쟁하기 전 제사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왕을 생각하지 않고 내가 유리한 대로 법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금 전 쉬는 시간에 목사님이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렸을 때 교회 잘 나왔답니다. 그런데 암이 나은 후에는 교회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참 좋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암에 그냥 걸려 있었으면 참 좋을 뻔 했다고 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성령의 참여한바 되고 타락한 자들은 두 번 다시 회개가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나는 암 낫는 혜택을 못 받았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 햇볕 쬐지 않았습니까? 숨 쉬지 않습니까? 물 안 마셨습니까?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비를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미 혜택을 입었습니다. 세종대왕 강감찬, 이순신 모두가 혜택을 입었습니다(마5:45).

 

감리교에서는 복음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때 죽은 사람들은 복음의 기준에 의해 지옥가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잖아요. 들은 것이 없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듣지도 못한 사람을 지옥 보내는 것은 과거 안기부가 고문하는 것과 같은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너무나 터무니 없는 책임을 묻잖아요. 예수라는 이름을 들어 본적이 없는 사람을 지옥 보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래서 이들은 양심 법에 의해서 심판받는답니다. 부흥사에게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것은 이미 가톨릭에서 나왔습니다.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천국 갔는가 지옥 갔는가?

천국 갔다는 겁니다. 연옥에서 예수님만나 천국 갔다는 겁니다. 그러면 석가모니도 연옥에서 예수님만나 알아 모시면 천국 가겠네요. 그렇다면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못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연옥에는 가시고 지옥에는 가시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근거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할 수 없지만 사랑을 받아주는 자라면 얼마든지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게 내버려 둔 것은 하나님이 시근이 없어 실수한 것이 됩니다.

처음부터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아닙니까? 모든 책임은 하나님이 지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변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하나님이 무엇으로 변합니까? 산은 하나고 길은 여러길이다로 변합니다. 올라가면 모든 종교가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천주교신학자 칼 라너의 주장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이름 중심, 즉 성전중심입니다. 방금 감리교 이야기를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면 죽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언약 안에서만 활동합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면 멸망시킵니다(신4:23; 신17:2; 신29:21).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신8:19,20)”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멸망시킵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이름이 동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서 수난 당하신 그분이 동행하십니다. 우리가 곧장 하나님께 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14:16).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플러스 부록으로 예수님을 집어넣습니다. 성부가 대장이니까? 재벌이 중요합니까 재벌 2세가 중요합니까? 재벌1세가 중요하지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직접만나면 아들은 더불어 온다는 겁니다. 문제는 아들이 그것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그것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은 우상이고 마귀가 조작한 하나님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뭡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설명해도 모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이란 모든 인간 속에 다 들어 있는 하나님상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앞장세워 우리에게 나타나시기 때문에 요나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언약 속에서 알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했습니다. 그곳이 니느웨 앞바다입니다. 니느웨는 큰 성이라 사흘 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야 하지만 하루 동안 다니면 외쳐 이르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올을 입었습니다. 이 일이 왕에게 들렸습니다. 왕도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니느웨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말씀대로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매우 싫어하며 성을 냈습니다.

지시가 어긋났습니다. 하나님 저와 동업자 맞습니까?

 

그러면서 따집니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지 않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반드시 니느웨 성이 멸망당하는 꼴을 보고야 말겠답니다. 그래서 성읍동쪽에 앉아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실 때 사십일 지나면 니느웨성이 멸망당할 것이라고 전하라고 하셨을 때 무엇이 빠졌다는 겁니다. 회개하는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십일 후에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회개할 가능성이 있는 일을 요나가 알아차렸다면 사십일 후 망하는 것이 유보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 40일 지나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리 지시받은 그대로 알고 있습니다. 사전에 회개한다는 그런 이야기, 계획이 없었습니다.

 

죽는다고 해 놓고 죽기 전에 니느웨가 망하는 꼴을 보고 죽으려고 하는지, 그런데 더위는 또 참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자기를 위해 초막을 지었습니다. 죽겠다는 사람이 그늘 아래 앉아서 니느웨성이 망하는 것을 구경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해 주셨습니다.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해 주니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했습니다.

한강 뛰어 내려 죽을 때 물살이 덜 센 곳에 뛰어내려 죽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박넝쿨을 예비하신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들었습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소선지서에서 기적은 없고 왜 멸망소식을 외치느냐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였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혼미하여 이제는 더워 죽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요나가 대답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여호와께서 네가 수고도 안 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즉 요나야 너는 내가 그쪽에도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상상했느냐 못했느냐를 물으시는 겁니다. 요나나 이스라엘은 자신들 쪽에만 하나님이 계시고 저쪽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대속의 효과가 자시에게만 있고 저쪽에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성이 회개하는 모습을 볼 때 이스라엘, 요나는 다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갑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이, 나중 되었던 자들이 먼저 되었다고 자처하는 자들에게 본래 그 자리, 은혜만 있는 자리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우리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자리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성을 통해 하나님의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전도하신 겁니다. 전도 대상자를 통해 오히려 전도하셨습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 갔더니만 자신이 선교한다고 설쳤던 본인이 오히려 선교대상자들에게 선교당하는 것이 됩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심판의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바로 이 과정 속, 즉 예수님의 코스가 요나의 코스입니다. 내가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 자칭 천국 간다고 자청하는 이 세대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너희들은 지옥간다입니다.

지금부터 보여주는 표적은 너희들이 지옥가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너희들 속에 메시아 내가 친히 죽는 그 표적이 요나의 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제자들이 이 말씀을 알아들었을까요? 아무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이미 제거했고, 이제는 열두 제자를 제거할 시기가 왔습니다.

열두 제자를 데리고 무화과 나무로 갔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정상재배입니다. 비닐하우스 재배 아닙니다. 속성재배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시장하셔서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잎사귀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 열매를 거두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막11:12-14; 11:20,21). 제자들이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무화과나무와 자신을 일치시켰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때가 되었는데 과실을 못 내면 그 잘못을 무화가 나무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피조물이 어디 메시야가 달라고 하는데 안 줘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때가 되지 않아서 열매를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터무니없이 저주를 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잘못이 없는데 저주를 해버렸습니다. 이것을 제자에게 일치시킨다면 자신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주님은 축복할 권세도 있지만 저주할 권세도 있다는 사실에 제자들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께서 택하여 세울 때에는 나 좋아라고 택하여 세운 줄 알았습니다. 주님이 주님 좋아라고 주님 드러내라고 택하여 세웠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우린 동업자니 곁에 있으면 복 받을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 사건과 일치 시킬 때 아무런 잘못 없는 무화가 나무가 저주 받았을 때 같은 동업자로 여기고 있던 사람들은 납득 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랍비여 보소고 저주하신 무화가 나무가 말라 죽었나이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것이 심판받아야 할 이유다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이런 성질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라는 장치를 통해 이스라엘 전체가 예수님께(메시아) 어떤 권한이 있다는 것에 대한 오해를 제거합니다. 메시아가 오면 왜 좋으냐? 축복해 주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와서 심판하고 저주하는 것은 그들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처럼.

 

축복 권과 저주권을 다 같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축복권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가 자기를 위한 메시아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무화가 나무가 된다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한데 예수님의 피가 있으면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예수님이 다 가져가신 것이 됩니다.

무화과나무도 저주받고 십자가도 저주받고, 왜 저주가 둘입니까? 십자가 저주가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축복으로 전환하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옆에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두 강도중 누가 정상입니까?

예수를 비방하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는 자가 정상입니까 아니면 그 강도를 꾸짖어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하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는 강도가 정상입니까(눅23:29-43)?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정상입니다. 메시아라면 본인부터 구원하고 자신들도 구원하여 메시아 나라를 이룬다면 참 메시야라고 생각합니다. 이 메시야 상이 어디에서 나온 메시아 상입니까? 구원받지 못할 자들에게서 나올 백퍼센트 맞는 메시아상입니다.

 

그런데 비정상적인 사람을 봅시다. 그 강도는 자신이 강도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너무 오버하는 말을 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물에 빠졌을 때 함께 물에 빠진 사람에게 살려달라는 것이 정상입니까 아니면 물에 빠지지 않은 사람에게 살려 달라는 것이 정상입니까? 이 강도의 말은 말이 안 됩니다. 정상이 아닙니다.

같이 죽어 가는데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죽으면 끝나는데, 무엇이 임합니까? 그러나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할 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소리를 로마 군병들이 들었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또라이 둘이 놀고 있네라고 하겠지요. 유대인들은 표적을 원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원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보기에는 구원의 능력이 어리석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라이 둘이 놀고 있습니다. 그 또라이 행동에 자진해서 나설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린 또라이가 됩니다. 그 또라이가 되는 즐거움을 누리세요.

 

정상인들에 보기에 또라이로 보이는, 바보로 보이는 그 자유함을 마음껏 누립시다. 내 행함과 상관없이 구원받고 내가 죄지은 것과 상관없이 구원받습니다. 구원받은 강도의 일생은 그것이 구원받는 코스였습니다. 강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강도보다 더 못한 창녀도 구원받습니다. 그것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입니다(롬5:20).

그래서 사도바울의 모든 말씀은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도바울의 말씀은 윤리와 도덕이 됩니다. 이상사회 구현을 위한 규칙이 됩니다. 그러나 그 실험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 했습니다. 이웃 사랑하고 성전섬기고, 안식일 지키고, 할례행하고, 서로 결집하고 단결 해 봤습니다. 느헤미아 식으로 해보고 에스라 식으로 해보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것을 다 해보았습니다. 천국 아니었습니다. 천국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짐승의 노림수였고 짐승에게 지배당하는 일면입니다.

 

너무나 간단명료합니다. 주님에게는 모든 것이 yes 가 되었는데 왜 자꾸 우리는 no 라고 합니까(고후1:19)?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에 시비를 걸지 맙시다. 그가 무슨 짓을 해도 주께서 아십니다. 그분이 주님만 내세우면 그 주님이 어떤 주님인지 시비 걸지 맙시다. 우리가 그 사람 속에 들어가 판정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다른 것을 전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 합시다.

예수님을 믿는 코스는 각자 다 달라요. 강도는 강도 코스가 있고 부자 코스도 있습니다.

부자가 천국 못갑니다. 그러면 부자는 천국에 한명도 못갑니까? 갑니다. 부자라도 갈수 있다는 것을 주님 쪽에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자 되더라도 그것을 자랑하지 말고 저는 부자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는 부자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부자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벤츠타고 골프치고 했으면 좋겠는데 그 코스가 아닌 모양입니다. 내 코스는 고생하는 코스인 모양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바울 서신으로 넘어가는 결합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에서 언약으로 넘어올 때에는 언약이 없었고 약속이 왔습니다. 약속이 오면서 등장한 이름이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6)”

여호와의 이름이 책임지고 역사에 개입하면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역사 속에 집어넣습니다.

창세기5장에서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하면서 에녹은 죽지 않았습니다(창5:24).

이것은 언약을 미리 보여줍니다. 에녹은 물의 심판을 미리 당겨 보여 주었습니다 .때가 온다 회개하라.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1:14,15)”

 

회개한 사람이 없네요. 물론 그전에 회개한 사람이 있겠지요. 언약이 역사 속에 드러나면 하늘나라를 보여주는 지점이 됩니다. 처음에는 구멍에서 시작하여 종이가 찢어집니다. 이 찢어지는 지점에 언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이 법으로 바뀝니다. .

다른 것은 다 지키되 피체 먹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면 죽이시겠다고 합니다(창9:5.6).

이 말은 정결한 제물의 피 흘림에서 나온 혜택을 선인과 악인이 다 누리고 있으니 누리는 것으로 고마워하지 말고 도대체 나 같은 인간에게 이렇게 농사가 잘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누굽니까? 라고 찾아보니 노아 당시에는 노아가 있었습니다. 노아가 정결한 희생제물 드렸기 때문에, 피 때문에 이방민족 우리가 산다는 것을 안다면 언약 안에서 구원받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다는 것과 동일한 원리입니다. 그 전에는 언약 안에서.

 

언약을 가정단위로 구체화 시키면서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세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첫 번째 아브라함은 껍데기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아니다. 그 안에 복의 근원이 들어 있습니다. 이 원리는 이삭과 야곱 안에도 들어 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의는 네가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잡을 제물 속에서 의가 튀어 나옵니다.

세 번째는 땅, 자녀, 축복개념들은 묵시적 인물로 구체화됩니다.

 

예를 들면 멜기세덱 반차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룻을 구하여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을 만났습니다(창14장).

묵시세계에서는 시간이 없습니다. 이유는 알파와 오메가이기 때문입니다(계1:8; 21:6).

묵시세계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입니다. 그래서 완성된 구원입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멜기세덱의 반차가 점으로 아브라함 가정에 옵니다. 이것이 복의 근원인 동시에 저주의 근원이 됩니다.

그렇다면 껍데기고 제물 되고 하늘과 연계되어 있는 묵시적 존재와 연계되어 있으면서 육을 잘라야 합니다. 그게 이스마엘입니다. 할례입니다. 내 자식이 아닙니다라는 뜻에서 잘라야 합니다. 할례를 행함으로 내 힘으로 태어난 자신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겁니다.

아내가 임신하는 것에 남편이 어떤 기여도 못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두 번째 원리 제물이 되어야 됩니다. 제물이 되어야 되는데 그냥 제물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개인단위에서 국가 단위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국가에 수많은 가정들이 있지만 아들들이 있지만 한 아들입니다(출4:22). 이것은 지상에 수많은 아들이 있어도 그 하나 되게 한 한 언약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하나 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너나나나 구원받는 것은 하나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풀장이 있습니다. 풀장에서 헤엄칩니다. 나는 A 문으로 나는 B 문으로 나는 C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떤 문으로 들어왔던지 관계없이 헤엄치잖아요. 어떤 교단, 어떤 교회 관계없습니다. 그들이 헤엄친 곳은 예수 안입니다. 그리스도 안입니다. 십자가 은혜입니다.

천국에서 누구만 자랑하겠습니까? 교단? 교회? 아닙니다. 죽임당한 어린양밖에 없습니다.

주님-1, 주님- 2 ,주님- 3이 됩니다. 둘이 아닙니다. 셋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경유하면 한 형제입니다. 본인이 싫다고 하면 할 수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가 설 때에는 주님을 경유해서 한 형제라 불러 주어야 합니다. 아니면 말고.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본인 신앙생활하시면 됩니다. 남 걱정 하지 마세요.

 

국가 이스라엘이 되면서 제물이 서서히 구체화 됩니다. 제물이 인물로 바뀝니다.

어린양이 죽어 사람이 살았습니다. 어린양은 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흐르면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은 기이한 노선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괴상한 이론입니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철학입니다. 양은 양이 살리고 사람은 사람이 살린다는 것을 16세기경 아즈텍, 마야제국에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람을 죽였습니다. 아포칼립토 라는 영화를 보시면 나옵니다. 같은 류가 죽어야 합니다. 신이 있다면 같은 류를 죽여야 합니다. 어디 비싼 것 살리려고 헐은 것을 내 놓아!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 쪽에서 사람을 살립니다. 같은 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살립니다. 그러니 천사들이 부러워 미치는 겁니다. 너는 무슨 팔자가 하나님의 대신 죽음으로 구원을 얻는 팔자가 되었는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의 특혜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국가단위로 하나 되면서 다시 깨어집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껍데기였습니다. 껍데기 속에서 알맹이가 나옵니다. 그 모습이 어린양의 모습이 아니라 왕같은 어린양이 나옵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3,4)”

 

의인은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면서 믿음을 설명하는데 율법을 제시해서 모든 인간의 행함은 율법에 의해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선언해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고 경건치 않는 자인데 우리가 믿을 만한 근거를 따로 주셨습니다. 그 근거에 의하면 어떤 행함과 상관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근거로 하나님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담겨 있고 그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어야 하기에, 하나님의 의가 되었기에 이미 되어진 신분을 스스로 부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심지어 어떤 환난과 핍박과 곤고나 적신이 오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어떤 권세도 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나의 사랑이 아닙니다(롬8:33-39).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이런 일에 대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롬8:28).

 

성령에 의해 계시가 된 이상 이것을 반복합니다(사도들이 썼다고 다 성경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쓰신 책을 반복하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 좋다. 은혜 받았다는 간증을 사도행전29장에 보탤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28장으로 끝났습니다.

그 후 내용이 궁금해도 그것은 계시가 아닙니다. 새로운 비디오가 나왔다 해도 필요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성경만 사용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목회자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말씀의 반복입니다. 맨날 똑같은 말 한다고 누가 뭐라고 하지요. 그런데 똑 같은 말이 똑 같은 말이 아니지요. 날짜가 바뀌고, 기후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었잖아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은 들을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실 겁니다. 그러니 쓸데없이 종이 주인 하는 일에 걱정해서 걱정 끼쳐 드리지 마세요.

우리가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십니다.

나름대로 꿈꾸지 마시고 꿈은 주님 홀로 꾸게 하시고 우리는 누리는 것 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안 되네. 아니고 실패했네 라는 것이 없습니다. 안 된다는 것조차 되어진 종류에 불과합니다. 안된다고 느껴진 것도 일이 이미 되어진 것인데 잠시 우리가 착오를 일으킨 것뿐입니다. 천국가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이 두려움에 떨고 무서워하고 공포에 떨고 미래를 걱정했습니다. 숨길 수 없어서 걱정했습니다. 걱정하고 싶어서 걱정한 것이 아니고 자연발생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입니다. 하지만 육신을 성령과 연결시켜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신 그 주님의 작업을 의심치 않고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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