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연대강의 17 본문
강의:이근호 목사
연대강의 17 녹취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기준들을 언급하셨습니다.
몇 가지만 뽑아 보겠습니다.
처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눅14:26).
천국에 어떻게 들어갑니까라는 정답은 이렇게 하시면 갑니다라고 하는 것이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런 경우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고 더불어 제공해 주어야 제대로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것을 빼 버리니 어떤 경우에 천국에 못 가느냐에 대해서는 교인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고 있지만 성경에는 있습니다.
처나 자식이나 남편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처나 자식은 내 혈육의 연장입니다.
또 예를 들면 누구든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마18:3).
아들이 없는 자에겐 영생이 없습니다(요3:36).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갑니까만 말하지 말고 어떻게 할 경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까를 함께 말해 주어야 천국의 윤곽이 드러납니다. 이런 경우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 첫 번째 말씀드린 것이 처나 자식이니 아비나 남편을 나보다 더 사랑하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아들이 없으면 천국 못 들어갑니다. 이것은 사회적 관계라고 한다면,
고린도전서16장22절에서는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십니다. 천국을 설명하면서 이것을 겸하여 증거해야할 필요성이 있겠죠.
가게 물건사면서 이거 얼마입니까 이거 얼마입니까 그러면서 나갈 수 있잖아요.
천국갈수 없는 조건 네 가지만 뽑아 보면 특징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내가 내 의사에 따라 의사결정을 제대로 하게 되면 천국에 가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지옥 가는 것으로 보이겠죠?
처나 자신이나 남편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겠어. 어린아이와 같이 되겠어. 예수님을 믿겠어. 주님을 사랑하겠어라는 것이 성립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미끼상품입니다. 정말 천국에 와보니, 자유의지라는 것이 천국 오는데 하나도 결정적인 요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을 부활시킵니다. 요한복음5장25절에 죽은 자들이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 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입니까? 군데군데 공동묘지가 있지요. 오는 중에도 봤습니다. 그 죽은 자들이 죽어서 어디 갔을까요? 우린 그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주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의 음성을 들어 호출되는 대상이 됩니다. 누구나 죽으면 호출당합니다. 호출당할 때 그들이 변명할 수 없습니다. .
그때 우리 마을에 복음 전하는 사람이 없어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라는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이미 택한 자만 구원하기 위해 적절하게 선교사, 복음전하는 자를 보내셨습니다. 모든 작업은 하나님이 손을 쓰셨습니다.
앞서 말한 세 가지 요건을 어떤 인간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너, 자기를 사랑할래 아니면 나를 사랑할래라는 질문까지 나옵니다.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고 합니다(눅14:26). 우리가 미워하는 재미로 살아갑니까? 오늘도 나를 미워하리라. 그러며 살아갑니까? 오늘도 열심히 자기를 미워하자로 살아갑니까? 아니면 그래 믿을 놈은 나밖에 없어. 나만 믿어야지라고 하지, 나는 믿을게 못돼, 나를 미워해야돼라고 하는 사람 없습니다. 하루하루 이것을 교훈으로 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천국에 들어갈 요건들을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절대 지킬 수 없고 행할 수 없는 것을 군데군데 깔아 놓고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걸려 넘어지게 하시면서, 넘어져야 마땅하고 천국 못와야 마땅한데 나 말고 다른 요인에 의해서, 주님이 스스로 깔아 놓으신 장애물을 주님께서 이겨내게 하셔서 천국 오게 하십니다.
특히 고린도전서16장22절에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예수 믿는 나를 사랑했지. 주를 믿는 나를 사랑했지. 주님보다 내가 더 귀합니다. 주님은 나를 천국보내주시는 이용물입이다.
어떤 경우에 주님을 사랑합니까? 왠지 모르게 내가 미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간이 얼마가지를 않습니다.
구약에서 새언약으로 넘어갈 때 이 부분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99퍼센트는 나를 사랑합니다. 일기장에 오늘 맑았다. 오늘도 주를 사랑했다. 이렇지 않잖아요.
밥이 있는데 왜 나는 맛있는 밥을 원했는데 왜 밥이 맛이 없느냐? 오늘 소풍인데 비가 와서 기분이 나빴다. 왜 비가 오면 기분 나쁩니까? 이런 것에 기분이 나쁘다는 것은 내가 내 사랑하는데 방해 요소가 일어났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에 다 저촉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도무지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것들만 만나는데 이상하게 천국에 도달했습니다. 도대체 내가 지키지 못한 율법을 누가 다 지키셔서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까?
우리는 정답으로는 압니다.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이것을 구약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의 연속적 흐름은 무엇입니까?
일번, 이스라엘 사람이다. 이번,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정체성이다. 삼번 율법이다. 사번, 땅이다. 오번, 선지자다. 육 번 왕이다. 칠 번 언약궤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연속된다는 것은 감 잡았는데, 실제로 연속되는 실체는 일곱 개중 어느 것입니까? 이중에 답이 있습니까? 답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실제로 읽어 보면 다닥다닥 끊어져 있습니다. 구약신학자들, 구약박사학위 받는 사람들은 난처했습니다. 그들은 자칭 그리스도인이고, 성경신학자인데, 그들이 해야 할 작업은 구약과 신약은 이러이러해서 연결이 됩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유대교가 됩니다. 유대교는 기독교를 참된 유대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디서 사이비 유대교가 진리인척 해? 어디 구약에 예수그리스도가 있어? 아직도 이러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유대교 입장에선 유대교를 모방한 하나의 사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15퍼센트가 급성분자입니다. 군에도 안가고 세금도 안냅니다. 안식일날 시장가서 문닫으라고합니다. 나머지 85퍼센트는 분해합니다. 돈은 자신들이 다 벌어 세금 내는 데, 그들은 병역 혜택 있지요. 세금 냅니다. 그들은 자신들 혼자 독점적으로 하나님 믿는 것처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를 믿지 않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지킨다만 믿어요. 이 나라를 여호와께서 지킨다고 믿는 사람들이지 개인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나라는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던 저렇게 되던 이스라엘은 연속된다는 입장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렇다 칩니다.
그런데 구약학자들이 구약과 신약이 연결된다는 논문을 내 놓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세계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신약성경을 연구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연구합니다. 혹시나 메시아일까 하여연구합니다. 예수님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말씀 외에는 희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연구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에 대해서 연구하겠지요. 그런데 연구결과는 예수님은 사이비이다 입니다. 그 사람들 바보 아닙니다. 합리적 이성을 갖고 있어요. 돈 사람들이 아닙니다. 정상적으로 따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죽였던 그들은 미드라쉬, 탈무드 성경해석을 통해 하나님의 법을 위해 인간이 있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건 그것이고 문제는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성경학자들이 무엇을 내 놓아야 하는데 그들이 유대교학자들 보다 더 잘 내어 놓을 수 있느냐 입니다.
조금 전 당회 실에서 서재를 보니 죤브라이트의 하나님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면 신약과 구약을 연결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히트 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죤브라이트의 논문은 나이 어린 신학자에게 욕 많이 얻어 먹습니다. 논리적 비약이 있다고 해서. 연결될 자료도 없는데 억지로 연결했다는 겁니다.
저는 말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연결고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구약성경과 사도들이 인용한 구약성경의 연결고리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역시 없습니다. 끊어져 있습니다.
마태는 너무 쉬워요. 마태복음1장23절에 이사야7:14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이라고 합니다(마1:25). 이것이 오늘날 구약학자나 신약학자나, 우리들이 볼 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임마누엘이 네자입니다. 예수는 두자입니다. 이것이 같아요 같지 않아요. 다르지요. 예수님의 이름이 예수가 아니라 임마누엘이라고 한다면 구약이사야가 예언한대로 진짜 올 메시아가 임마누엘이네 하지 않겠습니까? 임마누엘 맞네. 그러면 우린 아무런 의심 없이 아주 쉽게 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는 자신이 틀린 줄도 모르고, 이게 무슨 자신감입니까?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런데 25절에는 예수라 하지요. 맞지 않잖아요. 마태혼자 일방적 주장이잖아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고 해놓고 맞지 않잖아요. 왜 그렇게 신약성경에 과잉충성해서 권위를 줘서 넘어갑시다라고 합니까?
왜 그냥 넘어갑니까? 이것 설명한 이론 있습니까? 예수님과 임마누엘이 맞지 않는 것.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번역은 참 잘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뭐합니까? 임마누엘과 예수의 뜻이 다릅니다.
제가 말씀드립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연결고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있습니다.
죤 브라이트는 역사적으로 따집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어떠한 근거도 없습니다.
B. C. 400세기경 마지막 선지자가 말라키 선지자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까지, 대략400년 동안 계시는 없었습니다. 400년 동안이 끊어진 다리를 남아진 유대인들이 어떻게 구라로, 계시가 아닙니다. 구라로 자신들의 존속을 정당화시켰습니까?
무엇으로 매꾸었습니까?
그들이 매꾸는 반복은 과거 이스라엘이 한 것을 인위적으로 흉내 반복합니다.
선지자들이 있을 때에는 선지자들이 언약을 갖고 새로운 일을 제공하고 새로운 일을 제공했습니다.
새로운 일을 제공할 선지자가 끊어졌습니다. 하늘로부터 새로운 것은 오지 않고. 사람들이 여호와를 떠나니 여호와 중심으로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는 비책, 장치, 종교시스템같은 것을 따로 마련해야겠지요. 그래서 그들의 연속성이라 주장할 수 있는 것을 내세웁니다.
혈통입니다. 다윗의 혈통이 있는 한 자신들은 비록 선지자들이 없지만 연속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처나 자신이나 남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지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혈통이 하나님언약의 연속성을 보장해주는 근거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린 일차적으로 내 자신 내 아내 나 남편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다윗의 혈통이다라고 했습니다.
성전의 뜰은 이스라엘 뜰, 여성의 뜰, 이방의 뜰, 나가면 예루살렘입니다.
현재 예루살렘은 네부분으로 부동산 등기가 되어 있습니다. 처음은 유대인들이, 두 번째는 동로마제국이, 십자가 운동 때 서유럽 쪽에 점령(신성로마제국), 마지막엔 오스만 투르크제국, 이슬람에 점령했습니다. 지금은 현재 이스라엘이 점령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연속성이라는 것은 유다, 다윗, 아브라함혈통만 있으면 하나님에게서 끊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연속성이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끊어지지 않았던 혈통과 메시아가 만나면 하나님께서 그동안의 한을 다 풀어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죤 브라이트는 그 흔적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혼혈아들이 차고 들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순수혈통 없습니다. 느헤미아까지는 순수혈통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 후 순수혈통이 없습니다. 지도자급도 없습니다. 지도자급들이 순수혈통 주장하다가 바사, 헬라 마케도니아가 지배할 때 돈 많은 자들이 돈을 주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짜들이 지도자가 되었고, 덩달아 이방여인들이 왔고 이들이 권력자와 관련되면서 새로운 혈통들이 파급됩니다.
요즘은 DAN를 통해 순수혈통을 확인하지만 몇 대만 지나버리면 순수혈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순수혈통으로는 안되잖아요. 그래서 그 다음 한 것이 우리가 율법을 정리하자는 겁니다.
헬라 마케도니아 이후에 나라가 넷으로 갈라집니다. 톨레미왕국이 이집트, 팔레스타인 지역을 차지합니다. 셀류쿠스 왕조가 시리아 터키 쪽에 자리를 잡습니다.
톨레미왕조가 이스라엘을 봐 주었습니다. 이 틈에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70인경을 만듭니다. 혈통이 깨어 졌고, 성전도 세우면 다 부셔지니. 남은 것은 말씀 붙듭니다. 구약성경을 정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정경을 정리하는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같으면 예루살렘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이어야 믿음이 있는 자라 할 수 있잖아요.
이들은 신앙 내팽게 치고 돈 벌라고 이민간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의 태극기를 미국 이민간 사람들이 보존한 것과 같은 겁니다. 정체성을 저쪽에서 찾습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가 가짜가 됩니다. 우리는 핍박받으면서 포로 귀환한 후손들인데 우리가 전통이다. 이집트 쪽에서는 너희들 전통 전통하지만 혼혈아 되었잖아.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사랑하잖아. 이렇게 파가 생겨버립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어떤 전통성도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성경은 이집트에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이 사람들은 통치 받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습니다. 할례 못하게 했습니다. 집회 못하게 합니다. 청년들이 유대교 될까해서 벌거벗고 하는 경기장 세웠습니다. 모든 곳에 아폴로 신전을 세워 섬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민간 사람들이 더 잘 지킵니다. 예루살렘은 개판이 되었습니다. 메시아 온다고 하지만 기다릴 사람이 있어야지요. 순수하지 않고, 더러운데.
무슨 연속성이 있습니까? 연속성 없어요.
남쪽 톨레미왕조와 위쪽 셀류쿠스 왕조가 일곱 번 전쟁을 합니다. 위에서 내려오면서 성전 밟고, 밑에서 올라오면서 성전 밟고. 예루살렘이 완전히 황폐화 됩니다.
이것이 다니엘 70이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일곱이레, 육십이 이레, 한 이레. 성전은 바사나라 고레스 왕에 의해 세워집니다. 이방인에 의해서 세워진 성정이 이방인에 의해 망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성전을 하나님에 의해서 성전을 부셔버립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성전 붙들고 메시아 기다리는 그런 발상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혈통, 사마리아, 예루살렘 혈통 다 썩어 놓았습니다. 혈통 깨끗하니 혈통 깨끗한 것 골라서 구원하시겠지 하는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지 말라입니다.
땅이 어디 있습니까? 그 땅은 70년 동안 안식하기 위해 내쫓았습니다. 돌아와 보니 힘센 나라가 점령했습니다. 아 언약 끊어졌네.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하다고 하셨는데(시편89:34), 다 끊어졌습니다. 땅, 사람, 성전, 다 끊어졌습니다.
언약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언약궤 만들라고 지시한분도 하나님이시고 언약궤 불태워라고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구약을 보면서 하나님이 유다가 우상숭배 하니 바벨론을 통해 심판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질까요? 감히 하나님 믿는 백성을 네가 모독하다니.
엘리야, 예레미야가 말합니다.
이런 소리 하지마라. 바벨론은 총동원 시킨 분이 누구십니까? 여호와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도대체 살리시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망하게 하시겠다는지? 이렇게 망하게 할 것 같으면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겁니다.
한번구원은 영원한 구원인데 왜 우리를 멸망시킵니까?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도 우리보다 더 잘 믿는 나라가 멸망시킨다면 우리가 할 말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뉴스를 보는데 남편이 사십구 년 만에 돌아 왔답니다. 그 아내가 알기로 그 남자의 여자가 다섯 명이고 지금 현재도 두 집 살림하고 있답니다. 엠비시 기자가 물었습니다.
사십구 년 만에 돌아왔는데 기분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니 대답하는 말이, 자신의 남편과 사귀는 여자가 자기보다 젊고 예쁘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데 나보다 늙고 못난 여인하고 사귀니 자존심이 상한답니다.
유다를 짓밟은 바벨론이 여호와를 잘 섬겼습니까? 아닙니다. 우상숭배의 온상의 나라입니다. 마르둑 신이 여호와의 신을 이기는 것처럼 되었지요. 그런데 그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여호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여호와가 여호와자신을 치는 게 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위한 하나님입니까? 절대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쳐버리면서 역사성이 진행될 때 인간들이 기대하는 역사적 연속성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 똑똑한 유대인들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긴 시간 동안 연속성이 있다고 했는데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알려 드리겠습니다.
죽음입니다. 죽음을 연속하는 것. 아벨의 죽음에서 스가랴의 피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언약에 의해서 죽는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지난시간까지 모세언약이 다윗언약으로 넘어 왔는지를 했습니다.
다윗은 껍데기였고 다윗 속에 다윗언약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었습니다. 왕되기 전까지는 다윗이 고생했지만 다윗이 왕이 된 후에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나라로 착각했습니다.
착각하면서 벌어진 사건이 우리아 사건입니다.
암몬 즉 하나님의 원수와의 전쟁에서 우리아는 전쟁터에 나았고 다윗은 성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암몬과 전쟁하는 우리아장군을 죽인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지금 이스라엘 왕다운 겁니까 아니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전쟁의 훼방꾼입니까? 훼방꾼입니다(삼하11장). 어린애가 엿이 먹고 싶어 엿푸대에 들어갔다 나왔어요. 엄마가 돌아 왔을 때 엿 안 먹었어요 하지만 온 몸에 밀가루가 묻어 있지요. 다윗은 밧세바의 임신을 숨기기 위해 우리아를 죽인 후 입만 싹 닦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나단 선지가가 다윗에게 이야기를 하나 해 줍니다.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자, 하나는 가나한자인데 부한 사람은 양소 소가 심히 많았으나 가난한 사람은 암양새끼 한 마리밖에 없습니다. 암양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에게 딸처럼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행인이 왔을 때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해 자기의 양과 소는 아껴두고 가나한 사람의 양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해 잡았습니다(삼하12:1-4).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 왕이 대노합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가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다윗은 이렇게 율법을 어긴 사람은 죽여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죽어야 될 사람은 바로 다윗 당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순간 다윗은 산자입니까 죽은 자입니까? 죽은 자입니다. 맞습니다. 죽어야 할 자가 다윗인지 다윗을 대신해서 우리아의 아내가 낳은 아이가 죽었습니다. 다윗노선은 죽었습니다. 다윗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안 죽입니까? 그것은 다윗과 다윗언약이 관련 있기 때문에 다윗을 죽이지 않습니다. 솔로몬이 태어납니다. 우리아의 아내가 낳은 아이가 죽지 않으면 솔로몬이 결코 태어 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살려달라고 금식하며 울다가 아이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었습니다.
그러니 부하들이 이 일이 어찌된 것입니까?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어찌 이렇게 하십니까? 할 때 다윗은 주께서 자신의 죄를 떼내어 주셨음을 믿었습니다.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삼하12:23)”
다윗은 다윗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언약에 의해 사용되어지라고 내 인생이 사용된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낳은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1장 족보에서 다윗은 족보계산에서 빠집니다. 기록은 14대, 15대, 14대로 기록해 놓고 1장 17절에서 14대, 14대, 14대로 정리합니다. 여기서 빠지는 대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1장6절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아내는 누구의 아내입니까?
보통 아내는 한 남편의 아내이지요. 여기에서는 다윗과 우리아의 아내로 나옵니다.
솔로몬을 낳게 한 남자가 두 명입니다. 다윗도 남자, 우리아도 남자이름입니다. 남자가 두 명 등장하면서 철도 노선이 바뀝니다. 이것에 제가 말씀드린 ‘에게서’입니다.
‘에게서’가 들어가면 노선이 바뀝니다.
마지막이 마태복음1장16절에 마리아에게서가 나옵니다. 마리아에게서가 되면 비행기가 공중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지상에서 혈통은 연속성은 없습니다. 없는데서 있음이 되려면 철도노선이 하나라면 끊어지면 그것으로 끝이 나야 합니다. 그런데 철도 노선이 에게서가 나오면서 철도 노선이 바뀝니다. 끊기고 바뀌고 끊기고 바뀌고 끊기고 바뀝니다.
연속성이 없는 혈통인데 이 전체를 두고 연속성이 되었다고 해석을 해 버립니다.
그러나 너희들이 아는 혈통의 족보는 절대로 아니다입니다. 이 족보 속에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작용들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 스며들 때 마다 나타나는 현상이 죽습니다. 그러니 솔로몬 속에 무엇이 있는고 하면 다윗은 죄로 말미암아 죽었고, 솔로몬의 아버지는 죽은 우리아입니다. 죽은 우리아의 자식으로 계승됩니다. 솔로몬 속에는 언약에 의해 죽은 죽음이 솔로몬 속에 담기면서 그 죽음만이 연속적으로 갑니다. 아벨의 씨대신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개입된 장소에서는, 그냥 죽으면 안되고 언약사건에 의해서 죽은 죽음의 사건을 연속시키는 작업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동행하십니다.
복의근원이 아브라함이었다 아니었다? 아니었다. 복의 근원이 어디로 바뀝니까?
네 자식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할 때 야곱이 강탈해 가버립니다. 복의 노선이 야곱노선으로 가면서 야곱노선에서 야곱이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죽었습니다. 누굴 만나 죽었습니까?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이 사자를 만나 죽었습니다. 죽은 줄 어떻게 압니까? 야곱본인이 이야기하지요. 내가 하나님을 만났으나 생명이 보존되었다고 합니다(창32:30). 이름이 이제는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야곱은 이제 본인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명이 야곱을 살려갑니다. 사명에 종속됩니다. 사명이 주체가 되고 자신은 술어가 됩니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습니다고 할 때 내가 예수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소유하셔서 내가 주님 안에서 죽은 자가 되어버려야 합니다. 내가 죽어도 괜찮은 이유가 주님이 내 안에 자신의 인생으로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습니다.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어미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해도 그 사랑을 사랑으로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미워하고 저주해도 그것을 미워하는 것으로 저주하는 것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누가 더 셉니까? 죽은 놈이 무슨 소리 못합니까? 그런데 내 안에 살아계신 분이 너는 나를 사랑했다고 규정해 버리면 결국은 천국갈 때 모든 장애물들은 함께 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극복됩니다. 그래서 모든 영광과 공로는 주의 이름에게만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복잡한 것 같지만 하나만 하면 됩니다. 나는 똘마니다만 생각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종이 일한 후에 밭을 갈거나 양을 친 후 돌아왔을 때 종에게 않아 먹으라고 할 자가 있느냐 , 도리어 그더라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시중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6-10).
주님 만났다고 주님과 맞먹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사람은 죽기 싫어합니다. 따라서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땅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건드립니다. 혈통 건드립니다. 그러나 이런 것 가지고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제거해 버립니다.
네가 죽어야 산다고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는 맺느니라(요12:24)”
죽지 않으면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네가 하지 못한 것을 내가 할 테니 내 죽고 사는 곳에 네가 포함된다면 성경의 연속성속에 너도 포함된다고 보시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라고 하면서 다윗은 그 다음 14대에서 빠집니다. 우리아는 원래 죽은 사람이니 빠지고, 그래서 솔로몬부터 계산하면 딱 14대가 맞아요.
이제 죽음을 연속으로 한다면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솔로몬 속에 다윗언약이 들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했던 일 중에 여러 가지 일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잠언을 썼습니다.
예루살렘왕 솔로몬이 썼죠. 전도서도, 아가서도 솔로몬이 썼습니다.
그런데 잠언을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글입니까 아닙니까?
잠언을 보게 되면 잔소리입니다. 어찌나 잔소리가 많은지. 잔소리가 많고 스토리가 없습니다.
그게 과연 잔소리인가?
솔로몬의 위상이 무엇입니까?
10분 쉬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