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이사야 58:6-9 / 금식 본문
156강-사58장,6-9,(금식)-isa08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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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
2008년 9월 3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58:6-9
(사 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 58: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 58: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사 58: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유대 사람들은 그들의 습관대로 절기에 맞추어 금식을 했습니다. 그들이 금식한 목적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하늘에 상달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이 헛짓하고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도대체 그들의 금식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까?
금식날에 서로 싸웠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오락을 했다고 했습니다. 금식날에 밥 굶어가며 금식하는 마당에서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까? 그것은 밥을 끊을지언정 결코 인간으로서 끊어지지 않는 본성이 금식을 통해서 마구 쏟아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금식의 참된 하늘의 판단은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알려집니다.
거기에 보면, 금식할 때에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리지 말라고 합니다. 차라리 머리에 기름을 발라서 다른 사람들이 금식하는지 모르게 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만 생각해서 금식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 이렇게만 한다면 오늘 본문 9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앞뒤로 호위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구하는 바를 들어주실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제일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생활 습관 자체가 인간의 눈치를 살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보람과 희망으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남보다 우위에 서고, 남들보다 앞서고, 그래서 남들로부터 부러움을 받고 사는 모습이 인간들의 소망입니다. 이것을 흔히 ‘정(情)’이라고 하지요.
사람들은 이웃들 간의 정으로 삽니다. 사랑으로 삽니다.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삽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 없다면 삭막하고 외로워서 견디지 못하는 것이 또한 인간입니다. 자기를 연호하고 자기를 환영하고 사랑하는 자들이 숱하게 있는 마당에 하나님이 보고 싶어 괴로워하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평소에 인간들은, 하나님 생각 안하고는 살 지언정 사람을 생각 안하고는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금식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구제를 하든지 간에 사람들의 평가와 호의와 대가를 의식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요한복음 12:43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사람들은 자기 영광이 최우선입니다. 자기 영광을 포기하면서 뭔가 나서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금식일로 정해놓고 금식을 해도 그 안에 자기 영광을 포기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 영광을 늘이려는 ‘노림수’가 따로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가식적인 금식을 하나님께서 받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 와서 도마라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일이 일어납니다. 도마라는 제자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금식을 자주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예수님은 도마에게 찾아오십니다.
그 때 도마는 자기 평생에 그토록 충격적인 일은 처음 겪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얼마 전까지 분명히 죽었던 분이 산 채로 자기 앞에 나타났을 때, 이것은 기절 초풍할 일입니다. 도마는 뭐든지 자신이 관찰해서 결정지으려는 타잎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관찰력을 무시하고 찾아드신 예수님 앞에 도마는 할 말을 잊습니다. 이제 도마에게 있어 ‘인생 성공입네 실패입네’라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해주신 이 마당에 와서 과거에 자신이 뭐가 잘못되었느니 뭐가 잘되었느니 하는 것도 의미가 없이 되어버렸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인간의 죄악된 한계를 들추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약의 예수님 오심은, 인간이 이루지 못했음에도 다 이룬 자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을 제공해주기 위함입니다. 도마는 자신이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만져본 창자국과 못자국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한 일이 뭔가를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오심은 곧 ‘죽었던 분’의 오심입니다. 이 말은 죽음 자체가 현실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구약 때 사람들은 금식이라는 것을 자신이 달성해서 금식으로 인해 받을 복을 얻으려고 했다면 신약은 ‘내가 뭔가를 한다’가 아니라 ‘내가 죽음 속에 놓여 있구나’를 아는 자가 이미 복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곧 자신의 죽음입니다. 자신이 죽은 자가 되면 더 이상 자기 영광을 위한 행동도 의미가 없음을 압니다. 즉 금식일날 오락을 한다든지 싸운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여전히 세상적인 정과 자신의 자존심을 포기 안된 태도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이미 죽은 자로 봐버리면 남은 것은 자아가 아니라 자신의 사명만 남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길러주시는 신체라는 이 덩어리 자신을 가지고 따로 ‘자아’라는 것을 규정하게 됩니다. 나름대로의 공간과 시간을 점유해가지고 그것으로 자아의 내용으로 삼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 현실적으로 자신 신체라는 덩어리가 처한 형편과 자아가 기대하는 바가 일치되지를 않기에 늘 마음속에 신에게 원망이 가득합니다. 기도나 금식이나 예배나 헌금이나 기타 종교적 행위들도 실은 자아가 기대한 그 기대대로 되게 해달라는 ‘노림수’를 발휘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금식의 완전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죽음의 공포가 아닙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마저 무너뜨려버리면 남는 것은 저 하늘나라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까지 범위가 넓어집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 보좌에 이르는 그 넓은 영역에서 과연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인 진정한 금식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만든 ‘자아’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아를 쥐게 되면 그 ‘자기 것’이라는 것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젊을 때는 일을 열심히 하되 나이 많으면 모든 것이 해이해져 버립니다. 말년에 아무렇게나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지금 이 순간에 와서는 지나간 무수한 세월이란 이미 다 없어져버린 꼬리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젊을 날 어느 한 순간에 죽기 싫다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여전히 죽기 싫은 것입니다. 전혀 달라진 바가 없습니다.
진정한 금식이란 자아를 포기하는데 있습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 것이 금식입니다. 남은 것은 이 신체라는 덩어리입니다. 이 덩치는 하나님의 것이지 결코 나의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신체를 위해 먹고 마시는 것도 자아를 포기한 상태라면 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도마와 같은 신앙고백으로 나타난 진정한 금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챙길 ‘나의 것’은 아예 없음을 알게 주시고 자아는 나의 죄가 만든 허구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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