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이사야 57:1-4 / 의인과 무녀의 자식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이사야

이사야 57:1-4 / 의인과 무녀의 자식

정인순 2013. 11. 6. 11:52

 

153강-사57장,1-7,(의인과무녀의자식)-isa08081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153강-사57장,1-7,(의인과무녀의자식)-isa080813.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153강-사57장,1-7,(의인과무녀의자식)-isa080813.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153강-사57장,1-7,(의인과무녀의자식)-isa080813.hwp

 

 

 

의인과 무녀의 자식

2008년 8월 13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57:1-4

(사 57:1)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사 57:2)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사 57:3) 『무녀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씨 너희는 가까이 오라』

(사 57:4)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궤휼의 종류가 아니냐』

 

오늘 본문 1절의 내용은 실은 하나님께서 비비 꼰 투로 하신 말씀입니다. 풀어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의인들은 너무너무 재수가 좋아서 하나님께서 일찍 데리고 가셨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조기에 빼돌린 것이 의인에게나 주어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풀기만 하면 뭐가 빠트리게 되느냐 하면, 왜 의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찍 죽어야 하는지를 밝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악한 자들이 의인을 죽도록 미워했고 핍박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두 종류로 보십니다. 하나는 의인이요 다른 하나는 ‘무녀의 자식’이라고 욕설하시는 대상으로 분류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사는 자연적으로 의인과 ‘무녀의 자식’으로 구분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모이게 됩니다. 사실 이 기준을 아는 자가 의인입니다. 그리고 이 기준에 무관심하는 자들이 ‘무녀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무녀의 자식’들은 이 기준에 무관심할까요? 그것은 두 마음을 품고 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10;2에 보면,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겉으로는 신자이지만 속으로는 전혀 자신이 믿는다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관심을 안 갖고 다른데 관심 두는 자들이 그 당시에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들이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태도는 ‘혼합주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 표현대로라면 ‘씨가 섞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인’에 해당되는 사람은 ‘씨가 섞이지 않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이들 의인들은 어떻게 해서 ‘두 마음’이 아닌 ‘한 마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까? 구약 이스라엘에게는 언약이 주어져 있고 이 언약에 의해서 ‘의’란 하나님의 희생물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의인’이란 하나님의 희생을 생각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희생’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완벽, 자기 행함, 자기 관리 같은 것에 신경 쓰는 자가 아니라 자기 외부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희생을 바라보면서 사는 자들을 말합니다. 언약을 바라본다는 것이 이런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서 하나님의 희생을 발견하고 앞으로의 세상사가 다 이 하나님의 희생에 입각해서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곧 의인입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희생 앞에서 할 말을 잃습니다. 뭐가 말할 건덕지가 없음을 압니다. 희생을 통해 ‘산 하나님’이 아니라 ‘죽는 하나님상’을 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마저 ‘죽음’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마저 죽음 속으로 들어왔다면 인간은 말할 것도 없이 모두 죽음 안에서 죽은 자일 뿐입니다. 사업을 하던, 장사를 하던, 운동을 하던, 정치를 하던, 운전을 하던, 목회를 하던 모두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 식으로 버티다가 죽어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함부로 욕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희생을 늘 생각한다면 그 누구를 만나도 모두 죽은 자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으로 인해 주눅 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가진 재산이나 권력이나 정보나 학식으로 인해 위협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죽은 자에게는 있어 협박이라는 것은 부질없는 몸짓에 불과합니다.

 

의인이 의인이라고 인정받는 것도 모두 ‘죽음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밖에서 하나님을 보겠다는 것은 곧 자신을 더 이상 죽은 자로 간주 안하겠다는 시위에 불과합니다. 의인은 죽음의 의미를 아는 자입니다. 죽음의 의미란 단순히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미리 아는데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희생에 대해서 인간이 어떻게 관여하고 있느냐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누구를 죽이고 싶을 때’ 바로 그 순간이 죽음의 의미를 아는 순간입니다. 사람은 왜 타인을 죽이고 싶어할까요? 그것은 자신의 가치와 행복을 가로막고 방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진정 죽어 마땅한 자라는 것을 언제 아느냐 하며는, 속에서 남을 죽이고 싶은 충동을 올라올 때입니다. 소위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한 일을 당하게 되면 사람은 신마저 살해하고 싶어합니다. 군에서 깊이 잠 던 신참을 깨울 때, 고참은 주의해야 합니다. 성질 급한 신참에게 총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죽음 밖의 배열에 두고 싶어합니다. 죽음과 상관없는 산 자의 노선에다 위치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다 탄 모기향처럼 연약한 재로 부서지는 것이 인생사입니다. 한 줌의 흙이요 먼저가 곧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의인으로 통해서 이 사실을 지적하려 했던 것입니다.

복음만 전하는 설교자들이 밉상을 받는 이유는, 사람들이 죽이고 싶어하는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만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격분을 살 수밖에 없는 발언을 의인들은 아니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의인들은 하나님의 희생을 바라보면서 자신에게 관심두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무녀의 자식’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유리를 최우선적으로 따지면서 삽니다.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씨가 섞여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나 의인이나 하나님의 희생만 쳐다보는 자들은 이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복에 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증거하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5:10-12에 보면 진정한 복이 이 세상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가 나와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진정 희생을 아는 자는 본인도 희생적인 억울한 일을 당해 봐야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과연 생명이 됨을 아는 자는 자신이 조기에 생존과 생계와 생명이 상실할 입장에 쳐해 본 사람입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억울함보다도 예수님의 희생만 크게 보이는 남은 생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