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이사야 52:13-15 / 형편없는몰골 본문
142강-사52장,13-15,(형편없는몰골)-isa080528형편없는 몰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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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8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52:13-15 (사 52:1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사 52:14)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사 52:15)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메시아를 오신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대대로 내려오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때문에 주변 국가로부터 무수한 수모와 박해를 받아오면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탱하고 버릴 수 없는 이유도, 언젠가는 메시아가 오셔서 이 모든 고난에 대해서 넉넉하게 보상해주고 복수해 주리라는 기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그 어느 민족보다도 더욱 메시아를 고대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오실 메시아에 대한 준비가 제일 철저하고 연구가 깊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메시아가 막상 닥치자 그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고대했던 그 능력있는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희망이 현재 자신의 처지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후퇴되는 것을 희망으로 삼을 자는 없을 것입니다. 메시아를 고대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와같습니다. 현재 자신의 처지를 개선해 줄 수 있는 자를 메시아를 간주하려고 하지 도리어 현재 처지보다 못한 지경으로 빠뜨리도록 유도하는 자를 메시아로 모실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메시아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의 모든 예언과 말씀은 전부 예수님에게 쏟아져 있고 그 쏟아진 말씀 성취의 결과는 형편없이 망가지는 바로 그것입니다. 비록 나중에서 영광을 받고 존귀하게 될지언정 그 과정은 사람들이 외면하고 거부할 수밖에 인생으로 우리 인간들 앞에 등장했습니다.
사람이란 자신에게 이익이 될만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 합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을 친구로 삼았다가는 자신도 그 꼴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형편없이 깨어지고 망가지는 몰골로 출현시키시는 겁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14절에 나와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평소에 예상하고 상상하고 있는 바가 따로 있습니다. “적어도 나는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게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도 그 말씀이 본인이 어떤 모습으로 실상을 드러내는지 어둡습니다. 짐작도 못합니다. 항상 상상하는 것은 근사한 나 자신의 자태만을 고집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말씀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진면목을 예수님에게 담았습니다. 메시아의 망가진 모습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최후의 모습니다. 우리가 담고 있는 우리의 참 본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흉한 모습을 보고 놀라야 합니다.
예수님이 걱정되어서 놀라지 말고 자신이 바로 그러한 자임을 알고 놀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참 정답은 ‘망가진 메시아’가 다 보여주게 됩니다. 따라서 미리 놀라는 자만 구원받습니다. 오늘날 교회들 마다 철야 기도회를 열면서 자아의 성공과 번영을 위하여 밤새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망가진 모습으로 오기 전에는 사람들은 진정한 말씀의 뜻,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그저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종교생활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모든 말씀의 완성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망가진 모습 속에 다 담아내고부터는 인간의 모든 종교 활동은 다 욕심이요 이단적이요 악마적인 활동임이 들통나게 되었습니다.
종교라는 것이 다 자기 잘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준 바에 의하면 인간은 아예 ‘잘 되어야 할’ 그 어떤 명분과 자격도 권리도 없는 존재임이 드러나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할 것은 이런 진리 앞에서 미리 놀라버려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인들 고생을 좋아라 했겠습니까. 사람들은 인생 계획을 세우면서 갈수록 평안하고 행복하도록 설계를 하게 마련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예쁜 공주인형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는 것은 자신도 장차 이 공주처럼 인생을 보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아이가 흉측한 해골을 가지고 놀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흉하게 죽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지상에 보내는 인생 설계인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는 예수님보다 사명이 우선이었습니다.
이 점은 사도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9:3에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구원욕심보다 하나님의 사명이 자신을 앞서 인도함을 확신한 것입니다. 즉 사명이 있는 그곳이 곧 구원이 주어지는 곳입니다.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그는 다메섹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그는 시력을 잃었습니다. 눈은 떴으나 세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누가 옆에서 손을 이끌어주어야 했습니다. 과연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 불행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세상을 안 봐도 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늘 주님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쳐다볼 때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마음은 오직 빛되시는 예수님에게만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세상 물정 몰라도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행복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자신은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고 말입니다. 복음의 광채과 사랑에 미쳐버린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자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바라보면서 ‘더이상 자책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랑에 반해버리고 그 사랑을 뒤집어쓰고 미친 상태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관계성’이라고 합니다. 즉 내가 홀로 얼마나 위대하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신에 대해서 생각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위대함을 쳐다보고 사는 겁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편히 쉬게 해주겠다는 겁니다.
사람이 자신의 잘 잘못에 신경쓰면 마귀의 시험들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바로 알게 하옵소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없이는 저주받을 자임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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