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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이사야 52:3-7 / 속량의 기쁜 소식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이사야

이사야 52:3-7 / 속량의 기쁜 소식

정인순 2013. 11. 5. 17:40

 

141강-사52장,3-7,(속량의기쁜소식)-isa08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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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량의 기쁜 소식

2008년 5월 21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52:3-7

(사 52: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사 52:4)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이왕에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였었고 앗수르인은 공연히 그들을 압박하였도다』

(사 52: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할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 더럽히도다』

(사 52:6)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 알리라 곧 내니라』

(사 52: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 말고 타인이 자기 인생에 허락없이 개입하면 자존심 상합니다. 잘나던 못나던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겠다는 것이 인간들의 심보입니다. 이스라엘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다루고 왔습니다. 값없이 애굽 나라에 팔리게 했고, 돈없이 그 애굽나라에서 도로 풀리게 하셨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보통 하나님을 보고 싶으면 하늘을 쳐다보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진짜 하나님은 하늘을 쳐다본다고 해서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특수하게 다루고 계신 그 방식에 의해서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이 특수한 방식이 바로 언약이요 맹세입니다. 이 언약과 이 맹세를 거부하는 자는 곧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은 인간의 뜻을 배제한 채 이루어진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 근거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잡힐 때, 까닭없이 잡혔다는 겁니다. 까닭없이 잡혔기에 까닭없이, 돈없이 풀려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 잡혀 노예생활한 것이나 거기에서 해방되어 나온 것이나 모두 이스라엘 본인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작업이었습니다.

 

이처럼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다루어짐을 아는 자만이 신앙인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그 당시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 방주에 들어갈 생각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방주 아이디어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에 절대로 떠오를 수 없는 아이디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입니다. 오늘날의 십자가도 이 방주와 같습니다. 십자가 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원칙은 이 세상 그 어느 누구의 머리에도 떠올라올 수 없는 아이디어입니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그 특별한 사람만이 이 하나님의 방식을 즐겁게 반길 수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방식이 ‘속량’이라는 용어로 나타나있습니다. 속량이란 값을 치르고 빼내주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하지 못하고 참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속량작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짜 본질과 속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이 속향이라는 말은 현대말로 옮기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사랑해서 뭔가를 하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뭔가를 했다’에 주목하지 마시고 먼저 ‘사랑’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즉 사랑 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속량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지 한 예를 들겠습니다.

 

요한복음 11:25-26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이 문장이 성경 속에 문자로 박혀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참말로 이 말로 된다고 기뻐하는 자는 정말로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사랑을 받지 않는 자에게는 그저 평범한 문장에 불과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을 믿어서 이미 생명을 얻어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는 이런 혜택이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있음을 압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란 사람들의 말씀 순종 여부를 떠나서 더 우선적인 요건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루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사랑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다루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값없는 속령’이라는 용어로 등장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랑을 알게 되면 얼굴에 화색이 돕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 근심은 홀로 다 지고 가는 인상을 그리면서 살다가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도는 순간이 올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경우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에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불행하거나 겁나지 않게 됩니다. 사랑이란 누구를 못내 그리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으로 인하여 살맛이 나고 그분을 만난다고 소망으로 인하여 미래가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한결 같이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 뽑아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무수한 잔소리를 듣더라도 행복했고 무수한 핍박 중에서도 찬양한 것은 한결 같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그토록 보고 싶은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그 기쁜 소식을 확인하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사랑 앞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자신에게 놓아줍니다. 그 전에 율법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정죄당하고 시달려야 했습니다.

 

율법은 일종의 잔소리 심한 남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내부에 이런 율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스스로 완벽과 철저를 기한다고 노력해보지만 항상 불만스러운 것이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자기 인생을 본인들이 관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설프고 미흡한 지를 말해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 하시는 자로 다가오셔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사랑의 포로가 되게 하십니다. 사랑하고 있고 보고 싶은 분이 새로 생겼다는 그 소식이 바로 복음, 즉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사랑으로 찾아오셔서, 자기 백성들이 생기를 찾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어렵고 힘든 복음 전파를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만나고 싶은 사랑하는 분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너무 보고 싶어 하루 빨리 자신의 육체의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예수님 곁에 영원히 있고 싶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이 영생의 내용을 사랑의 속삭임으로 다가오신 분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자기 방식만을 자기에게 적용시키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힘겨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나중에서 하나님마저 거추장스럽게도 벗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자람과 부족함을 익히 아셔서 오직 믿음으로 영생을 주신 그 분이야말로 우리가 고대하고 또 고대할 최후의 분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지키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