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사사기 2:6-10 / 여호수아의 죽음 본문
이근호
07강-삿2장6-10(여호수아의죽음)-jdg07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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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의 죽음
2007년 11월 25일
본문 말씀: 사사기 2:6-10
(삿 2:6)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삿 2:7)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삿 2: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십 세에 죽으매』 (삿 2:9)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삿 2:10)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세대가 바뀌면 다음 세대는 기성 세대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접수하지 않습니다. 자기 시대에 만든 사고방식으로 전환됩니다. 오늘날 우리 주의에 보이는 큰 예배당을 지었던 기성 세대들은 이미 많이들 죽거나 병들거나 재정적으로 큰 보탬이 되지 못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들은 젊을 때에 예배당 지으면 하나님께서 10배나 축복해 줄줄 알고 시험삼아, 모험삼아 돈을 교회에 바쳤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미래를 더 키워보겠다는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세대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겠다는 자들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 찾지 않고 자력으로 살아보겠다고 나서는 자들입니다.
당연히 교회로서는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충성된 자들은 늙고 죽어가고 있고 새로운 젊은 세대들은 하나님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젊은 세대들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기성 세대들은 실제로 하나님께 받은 혜택이 있다고 믿기에 그 보답으로 바쳤지만 자기네들은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뭔가 받은 게 있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줄곧 어려서부터 모든 인생의 난제들은 자신들이 알아서 자기 힘으로 해결왔는데 뭘 새삼스럽게 하나님께 도움받았다고 하나님께 바친단 말입니까?” 라는 식입니다.
즉 하나님께 뭔가 받은 게 있어야 하나님께 드릴 이유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후 세대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섬긴 것은 하나님께서 뭔가 혜택을 잔뜩 받았기에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는 식으로 과거사를 해석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여호수아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즉 자신의 야심과 야망을 채워주실 분으로 하나님을 끌어당긴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일관된 일에 자신이 개입당했기에 그 현실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본인의 신앙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원하고 노리는 바를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이 되고 싶어하는 그 상황이 되었기에 그게 너무 좋아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믿는 하나님은 도리어 여호수아를 박살내는 하나님이시에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원해 내는 자를 날마다 치시면서 다가오시는 하나님, 구원해 내는 자를 쉬지 않고 공격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구원받은 자가 스스로 살려고 하면 그것을 그냥 묵과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정없이 못살게 구시는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수아 5장 끝에 보면, 여호수아가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 분에게 전적으로 모든 것을 맡깁니다. 오늘날 세대는 자기 인생을 전적으로 맡길 위인이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은 자신의 힘으로 획득해 왔습니다. 그 누구의 도움도 최소화하면서 오로지 믿을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식으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은, 곧 자신의 위대함을 더욱 크게 부각하기 위한 행동들입니다. 현재 자신이 위대하다는 말은 계속 날이갈수록 더 위대해야만한다는 요구처럼 이해합니다. 달리 말해서 여기서 더 망가지면 나답지 못하다는 생각을 갖고서 오로지 자기만 겨냥하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함’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꼭 자신의 이익을 덧대어서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냥 순수하게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이득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이냐는 식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궁금해합니다.
그러니까 참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으로 덧칠된 엉터리 하나님을 신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굿판입니다. 한국 민속 종교의 일종인 굿은, ‘인간을 위로하는 신’으로서 나타납니다. 인간을 탓하지 않고 인간의 괴로움이나 한맺힘을 풀어주는 그런 신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여호수아가 이해한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참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발에서 신을 벗이고 꿇어앉게 만드는 신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다 해내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즉 여호수아가 만났던 군대장군은 도리어 칼을 들고 여호수아의 진격의 길을 가로 막습니다. 여호수아는 자력으로 이 약속의 땅을 접수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분 앞에서 신발을 벗어야 될 그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인간이 할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단지 그 하나님의 일에 부름받은 것입니다. 그 부름받은 입장이 뭔가 하면 바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걸레며 쓰레기라는 말입니다. 즉 자신의 위대함을 더욱더 키워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소위 나의 장점이라는 것까지 단칼에 베어버리는 그런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수아가 밟은 땅들은 모조리 다 하나님께서 홀로 일하셔서 그저 받은 땅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로 하여금 단순히 생존하라고 주신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과연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드러내라고 주신 땅입니다.
이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여호수아는 군대장관 앞에서 신발을 벗어야만 했습니다.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 했습니다. 이점은 사도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의 손수건을 죽은 자를 살리고, 그리고 고린도후서 12장에서는 사도 바울은 천국까지 갔다 옵니다. 살아서 천국을 구경하고 온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결코 사도 바울이 천국보고 싶다고 해서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서는 사도 바울이 교만할까봐 사도 바울의 육체에 하나님께서 가시를 박하넣습니다. 이 박힌 가시는 사도 바울이 본인이나 타인에 의해서 빠질 가시가 아닙니다. 왜 하나님께서 가시를 박아넣었을까요?
그것은 사도 바울의 약함을 통해서 예수님의 일하심이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을 이 젋은 세대들이 이해해야 합니다. 즉 나를 위대하게 하나님이 아니라 도리어 나를 박살내시는 그런 하나님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께서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길을 가로막아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한 길이 되지 말고 주님의 길로서 가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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