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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사도행전44강 / 행 17:24 / 121227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도행전

사도행전44강 / 행 17:24 / 121227

정인순 2012. 12. 28. 13:52

 

음성1     

 

동영상1      

 

녹취:공은주

대전121227a-사도행전17장24절(죽음너머)

44강-이 근호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4절입니다. 사람들의 신학이라 하는 것은 그건 옳지 않은 신학이라는 거지요. 그 이유는 뭐냐, 이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현세를 늘여요. 죽음의 세계까지 관여하게 됩니다. 확장이 돼요. 하나님이 관여하는 그 영역이 사는데 욕을 먹는 것이 아니고 죽음 그 너머까지 확장이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는 그냥 편하게 할 수 있어요. 우리 하나님은, 죽음으로 책임진다. 말이야 그렇게 하는데 실제로 죽음 너머에 책임지는 증거가 있어야 됩니다. 바로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개인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장차 올 세계는, 이걸 그림으로 그려야 되는데, 예수님의 하나의 계기가 죽었다. 죽었는데 살았다. 이렇게 돼버리면 이 살았다하는 이것은 예수님의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하나의 연장된 체면에 불과한 거예요. 이건 아무 의미 없어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갑자기 확장이 돼 버립니다. 확장이 돼 버리면 이것이 천국이 되어 버려요. 이것이 천국이 된다고요. 그러면 다른 인간들은 죽었다가 그 다음부터는 모르지요. 다른 인간들은 부활 안했으니까. 돌아가신 할아버지 부활 안됐거든요. 부활했으면 공동묘지 옆에서 사진 찍고 있고, 전부다 놀고 있고, 죽은 이순신장군하고 세종대왕이 장기 두고 있고, 골프치고 있고, 바쁘다 말이지요. 그러지는 않잖아요. 지금 조용하고 흰 눈이 덮여 있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과 우리하고는 뭔가 차이가 나야 돼요. 둘 다 인간이다. 단순한 인간이 돼 버리면 예수님의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그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사실이기 때문에 이것은 뭐가 안 되는가 하면, 복음이 안돼요. 기쁜 소식이 안돼요.

 

 

문재인 떨어지고 난 뒤에는 서울 쪽에는 기쁜 소식이 아니었어요. 기쁜 소식은 다 같이 기쁜 소식이 되어야 되는데, 이것은 자기가 빠진 상태가 되었다 말이지요. 기쁜 소식이라 하는 것은 우리 개인들이 더 이상 내가 죽어서 어떻게 될까를 이 선에서는 더 이상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점이 기쁜 소식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개인적으로 죽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보험 들어야 돼요. 보험들 때, 그냥 죽음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죽고 난 뒤에 장례 치르는 보람상조 그런 정도가 아니고 아예 그 뒤까지 책임을 져야 돼요. 이걸 책임질 수 있는 보험회사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유일하게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됐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뭘 믿어야 됩니까? 바로 죽었다가 사셨다 할 때에 그러면 여기서 힘든 것은, 제가 아까 처음에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다른 신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차이는 다른 신들은 눈에 보이는 이 현생에서 국한된다고 했지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게 어떻게 확장됐습니까? 죽음 이후까지 확장된다 했습니다. 그런 차이점이 있어요.

 

 

죽음 이후까지 확장되려면, 지금 사도행전 17장 24절부터 하고 있습니다. 확장이 되려면 이 쪽 우리의 노림수를 포기해 줘야 돼요. 내가 죽고 난 뒤에 천국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어떤 보험 계약을 해야지? 라고 한다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영생하려는 하나의 종교적인 욕구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이 노선은. 여기에 사기꾼들이 있는데. 어제 수요설교에서 이런 경우를 보이스 피싱이라 했지요. 이쪽에서 개인의 사적으로 죽었다가 죽고 난 뒤에 어느 세계에 가느냐 하는 이런 의식자체를 양보를 해야 돼요. 어디에다가? 진짜 죽었다가 사신 분에게 이 노선을 이탈해서 이렇게(예수님 노선으로) 와야 돼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이 복음이라 하는 것이 내가 죽었다가 내가 구원받는다는 게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예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복음이에요. 복음 속에 자기 자신을 여기에다가 내용 속에 자기 자신의 희망을 여기에다 끼어 들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은 복음 안에서 그걸 빼줘야 돼요. “나처럼 되시면 됩니다.”하는 내용을 복음에 섞이면 안돼요. 그렇게 되면 보험회사 직원과 똑같은 거예요. 나도 보험 들으니 좋던데 보험 들으세요. 이런 식으로 하면 그것은 자기 노선을 유지하는, 고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돼요. 노선을 개인에서 예수님으로 이동해야 됩니다. 이걸 예수님께서 이미 예고했어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부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17장23절에서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했는가 하면, 너희들이 종교성이 많다고 했습니다. 자기 부인을 한다는 것은 자기 종교성을 부인한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자기 부인이 되려면 나의 종교성을 부인해야 되니까 도대체 나에게서 나의 종교성이라 하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를 파악을 해줘야 돼요.

 

 

혹시 교회 올 때, 내가 종교성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가, 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이것마저 자기부인이 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항상 생각을 해줘야 돼요. 자기 종교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복음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조미료처럼 그냥 자기 탐욕에다가 그냥 양념치는 거 밖에 안돼요. 이걸 피자의 토핑이라 하는데. 자기의 밭에다가 장식용으로 예수를 한다 말이지요. 결국 그 예수는 뭐냐 하면, 나한테 이익을 제공하는 조건하에 예수가 돼 버립니다. 그러면 뭐가 빠졌는가 하면, 여호와 증인처럼 하나님의 심판성이 내 자리에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심판성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옆구리에 뭐가 있었지요? 창 자국 있었지요. 손에 못 자국 있었지요. 이거 예수님이 누구한테 받은 거예요? 이것을 로마국민한테 받았다 하잖아요. 예수님은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나를 죄도 없으면서 세상 죄를 지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냥 세상 죄를 지었을 때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예수님이 흔적으로 남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받았다 하는 것은 곧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았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저주받은 증거로서 십자가에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뭘 지라 했습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라 했지요. 제가 방금 십자가를 뭐라고 정의했습니까? 저주받은 증거라 했지요. 그러니까 나는 구원을 받고 나는 천국을 가야지, 라고 그렇게 내세울 만한 입장이 못 된다는 증거를 가져야 돼요. 하나님, 저 구원 안하면 섭섭해 합니다. 라고 내세울 자격이 없는 거예요. 이걸 로마서 9장에서는 뭐냐 하면, 사람이 행한 것도 없이 이유도 없이 그냥 야곱은 그냥 사랑했고, 에서는 그냥 미워한 거예요. 나중에 한 짓거리를 보고 미워하겠다고 나중에 판단한 것이 아니고 무슨 하는 짓거리도 없이 너의 하는 모든 짓은 반드시 나한테 밉상 받을 짓을 해야만 해야 돼, 라는 스케줄 따라서 태어난 겁니다.

 

 

이것은 바로 24절에 인간의 종교성에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의 다른 종교는 어떠한가, 그 당시 종교도 지난주에도 했잖아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설명했지요. 그걸 다시 이야기할 수는 없고, 오늘날로 이야기한다면 그 스토아학파는 오늘날로 이야기한다면, 불교가 되겠습니다. 불교가 뭐냐, 불교는 석가모니라는 사람이 그 전에 있는 인도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다 베꼈어요. 불교를 조사해 보고, 역사를 조사해 보면, 석가모니가 자신이 창안한 게 별로 없어요. 다 전에 있던 것들을 짜깁기해서 만든 건데, 그것이 정치적 상황과 맞아서 히트상품이 되고 말았는데 그 전에 있는 흰두교 쪽에서 나온 그게 뭐냐 하면 ‘비약’이라 합니다. 그전에는 ‘극단적인 자기 모멸성’ 이었습니다. 지금 불교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라고 솔깃하게 보이겠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극단적인 자기 모멸성을 하는 이유가 있어요. 십자가 앞에서 보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죄 있는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하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는 죄인이라는 것이 아니고 이건 뭐냐 하면, 사는 게 힘든데 힘든 이유가 재물이 없어서 힘든 게 아니고 재물을 줘도 자꾸 만족함을 이루지 못하는 거예요. 욕심이 자꾸 생겨서 그것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젊은 사람들은 욕심을 가져도 욕심인 줄 몰라요. 나중에 늙어서 젊을 때 가진 것이 욕심인 줄 아는데 나이 들면 들수록 과거에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도 욕심의 일종이었다는 것을 알아요. 제가 언젠가 설교할 때, 정지 위성 설명했지요. 분명히 인공위성이 정지되어 있지만, 사실은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지구하고 같이 도는 거예요. 젊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모든 만사는 나를 위하여 같이 돌아 줘야 된다는 거예요.

 

문재인을 찍었는데 박근혜가 된다면 도대체 세상 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왜 세상은 나를 실망시키는가 말이지요. 그런데 나이 많은 사람은 어떻게 해요? 니가 뭔데? 하지요. 젊은 사람은 내가 뭐라고 생각 안 해요. 이거는 무조건 무조건이야. 무조건 세상은 내 뜻대로 되어야 돼! 이유 따질 것도 없이 무조건이에요. 무조건 돼야 돼요.

 

 

우리 가족에 고모가 두 분이 계시는데, 영원한 라이벌이에요. 나이 차도 2살 밖에 안 나는데, 학교도 그대로 따라가요. 중학교 그대로 따라가요. 따라 가는데 언제 갈림길이 벌어지는가 하면, 언니가 괜찮은 남자하고 결혼했거든요. 언니가 서울대학 나온 남자와 결혼했어요. 동생이 따라가야 되잖아요. 학교도 같이 좋은 학교 나왔으니까. 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노력하면 되는데, 남편은 이건 누가 사랑을 해줘야 되는데 안 되는 거예요. 거기서 못 따라갔어요. 따라가지 못하고 세무사하고 결혼해서 나중에 무엇으로 따라 붙였는가 하면 누가 재산을 많이 모았는가 따라가는 거예요. 언니는 복부인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어요. 동생도 복부인해서 재산을 모았어요. 그런데 그만 동생분 남편이 죽었으니 따라 갈 수도 없고.

 

 

그래서 불교에서는 뭐냐 하면, 아무리 행복해지려해도 내가 속에서 나오는 욕심이 욕심 때문에 행복이 거덜 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조치가 뭐냐, 욕심이나 욕망을 잘라내면 안되겠느냐 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견물생심, 욕심을 잘라내다 보니까 이 욕심의 뿌리가 너무 많이 박혔어요. 박혀도 그냥 박힌 게 아니에요. 너무 깊이 박혀서 이것을 다 잘라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청교도에요. 오늘날 교회가 청교도훈련과 똑같은 거예요. 교회도 12단계, 56단계예요.

 

 

불교가 나온 뒤에 신학이 발전하거든요. 유식불교라는 게 있습니다. 불교의 철학발달 가운데 유식불교가 나오는데, 유식불교에 보면 단계가 34단계가 있어요. 34단계까지 나왔다고 하는 것은 그 단계까지 나오는데 돈으로 한 20년 닦았을 거야, 그러니까 절에서 중들이 머리 깎고 큰소리치는 이유가 계급화로 보는 거예요. “보살님, 몇 단계입니까?“ 이렇게 보는 거예요. ”저는 5단계” “나는 적어도 30단계, 끓어!” 이리 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모멸감을 느끼는 게 아니고, 불자들이 목표들을 가지게 되는 거예요. “나도 언젠가는 더욱 더 도에 정진하면 지금 5단계지만...“ 이게 뭐냐 하면, 카레이서의 즐거움이에요. 카레이서 알지요? 어느 날 빨리 달리다 보면 자기 뒤에서 쳐져있는 즐거움, 젊은이들은 그 때문에 달리잖아요.

 

 

교회에서나 절에서나 카레이서하는 즐거움 있어요. 목사가 어느 단계를 주게 되면, 빠른 시일 안에 돌파하는 거예요. 산이 있잖아요. 나이 먹은 할머니는 12단계 제자훈련 하는데 느릿, 느릿 가는데, 젊은이들은 직통으로 암벽타기 해 버리면 그 성취감 얼마나 좋을까요? 결국 교회가 뭡니까? 도 닦는 곳이 돼요. 이것은 인간의 뭐다? 자기 부인이 안 되고 자기 종교성만 하는데 이걸 목사들이 잘 구슬려서 자기 패로 삼지요. 돈도 그만큼 뽑아낼 수 있고, 좋은 점이 교회의 무료봉사도 할 수 있지요.

 

 

극단적인 자기 모멸성은 외부에서 참고로 모델을 제시해요. 불교 쪽의 모델은 많지만, 천주교 쪽에는 성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들, 이게 모델이 되는 거예요. 사람이 모델이 있다는 말은 현재 나의 위치가 그 모델 사이에 격차를 느끼게 만듭니다. 미흡하지요. 미흡하면 사람은 새로운 소망과 비전이 만들어져요. 만들어진 만큼 이거 메우는데 있어서 자기 생애의 원동력을 여기다가 집중하면서 자기의 현재 삶에 오는 돈을 적게 번다든지, 가정형편이 어렵다든지, 그런 자괴감을 마약처럼 잊을 수가 있습니다. 이걸 마르크스는 종교를 마약이라고 합니다.

 

 

사회적 구조에서 오는 사회적 노동 생산 관계의 뒤틀림에서 오는 거기서 착취당하는 줄도 모르고 이것은 내 팔자다, 팔자니까 그냥 팔자 됨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교회에서 나는 돈은 없지만. 그렇지만 영적으로는 나는 자본가보다 뛰어나면 하늘나라 패자부활전, 연옥에 가면 대접을 받지 않을까 라는 이런 사상을 그렇게 교섭해 왔다. 그러니까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원동력을 자본가들이 질식시키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문재인 돼야만 이거 다 들통 나는 건데.

 

 

결국은 이게 뭐냐 하면, 극단적인 자기 모멸성을 가짐으로서 이게 바로 불교이전에 시도였던 겁니다. 이 이야기하면 끝도 없어요. 얼마나 자기 가족을 떠나고 숲속에 가서 불교이전의 이야기에요. 불교는 이 아이디어를 얻었으니까. 절대로 떨어진 것만 주워 먹어야 돼요. 그 열매 따면 나무가 아프니까. 나무 많이 아파. 따먹으면 안돼요. 이슬도 함부로 건드리면 안돼요. 아플 수 있으니까.

 

 

그리고 발을 걸을 때는 항상 조심해야 돼요. 개미가 밟혀 죽을 수 있으니까. 부처는 바로 이런 열차에 일단 들어가다가 갑자기 도약을, 비약을 할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비약을 하게 되면 이걸 해탈로 보는 거예요. 비약이니까 비약했던 구체적인 증거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그러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해탈했다’가 이게 증거입니다. 일종의 사기지요. 일종의 사기행위예요. 그런데 사람은 이런 사기를 왜 그렇게 감쪽같이 그렇게 해탈이 되는 욕망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바로 곁에 두고 그걸 왜 못 깨달았을까 이 말입니다. 성철스님이 그걸 증거 한 거예요. 돈오돈수라는 거예요. 깨닫는 것도 순간이고 거룩한 것도 순간이라는 겁니다. 성화론이 아니에요. 순간에 거룩해진다는 겁니다. 성철스님은.

 

 

그러기 위해서 법정부터 해서 동국대에서 깨닫는 것은 믿음으로는 순간이지만 성화되는 것은 정진이다, 돈오점수를 주자, 하는 겁니다.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겁니다. 교회나 불교나 똑같은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 원인은 뭡니까? 사는 게 힘들어서 그러는 거예요. 고상한 소리 다 때려치우고 사는 게 힘들다! 왜 힘든가? 왜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가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합니까? 자기를 부인하라고 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자기 부인하면 불교 돼요. 옆에 뭐가 붙었습니까? 십자가 이야기하는 거지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바로 자기를 부인해도 기껏 속임수로 불교의 해탈정도밖에 안 돼요. 그런데 십자가라 하는 것은 숨어있던 하나님이 비로소 인간세계와 접촉하는 접촉지점에서 나온 유일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기 공개입니다.

 

 

이것은 해탈하고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나 비약을 했다는 자신을 다시 자기 자신으로 다시 가서 끌어당겨야 돼요. 자기 부인을 하는 이유가 사실은 자기의 결정적인 자기 긍정을 위해서 일시적으로 부인하는 티를 냈을 뿐이에요. 완전히 속임수라니까요. 속임수. 혜민 스님, 법륜스님이고 뭐고, 전부다 속임수들이에요. 결정적인 증거는 본인이 갖고 있다고요. 본인이.

 

 

아까 처음에 했던 것처럼 복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이후의 삶까지 영역이 확장된다 했지요. 그런데 인간은 뭡니까? 죽음 뒤에는 점선으로 그만 상상할 뿐이지요. 점선이라니까요. 불확실해요. 뭔가 죽고 난 뒤에는 좋은 세계에 가고 싶다, 그냥 내가 원하는 것뿐이에요. 그게 활력소가 돼서 힘들지만 견디면 뭔가 일이 있겠지? 하고, 이건 있겠지? 고,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 버렸다, 말이지요.

 

 

그래서 고린도전서15장에 사도바울이 뭐라 합니까? 사람이 죽었다가 살은 게 없으면 내가 전한 복음도 다 말짱 헛것이다, 부활이 없으면 모든 게 사기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뭔 뜻이냐, 세상을 부활 쪽에서 다시 들여다 보자에요. 부활 쪽에서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자, 그러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부활을 부활의 세계를 되게 하는 재료가 되는 거예요. 많이 어려워요. 세상이 무효가 되는 것이 아니고 쓸데없는 것이 아니고 부활의 세계, 천국을 위하여 그림자로서 활발한 움직임을 당연히 보여줘야 했던 세계로서의 그렇게 있어야 하는 겁니다.

 

 

십자가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요기 새끼 십자가, 크기는 똑같은데 새끼 십자가 두 개가 있었지요. 아~ 하나님께서의 작전은 오묘합니다. 결국은 십자가가 하나로 귀결되면서 처음에는 두 개 있다 말이지요. 쌍걸이처럼 둘 다 들어가면 좋겠는데. 세상에 둘 다 직업이 동일해요. 둘 다 강도에요. 하나는 계속해서 비난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우리 강도를 위해서 하늘에서 천사를 보내든지 해서 우리를 풀어내면 믿겠다. 하는 거예요. 그 때서 믿겠다는 거예요.

 

 

어느 설교에서 그렇게 한 적 있지요. 말을 마차 앞에다가 붙이는 게 정상입니다. 말 있고 그 뒤에 마차 있어야 돼요. 그런데 마차를 앞세우고 뒤에 말이 붙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바로 이 똑똑한 강도가 예수님에게 그런 이야기하는 겁니다. 확실히 구원해 주면 그 때 믿겠다. 말은 마차 뒤에 세우면 나는 자진해서 마차 돼 줄 게.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런데 이쪽 강도는 자기가 죄인인 줄 뻔히 알면서도 뻔뻔스럽게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있을 때 나를 생각해 달라, 예수님 답변이 뭡니까? 이 뻔뻔스러운 게 어디 우체국에서 금고 뺀 놈이 어디 까불어, 그것도 경찰하고 공무해서 어디서 까불어, 이리 나온 게 아니고 “오늘 니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은 납득이 안 돼! 건축학 개론에 나오잖아요. 납득이 안 돼, 어떡하지!

 

 

바로 교회 목사가 설교할 것은 사람들을 납득을 시키지 말아야 돼요. 이게 고린도전서 2장에 나와요. 내가 말하는 말은 사람들의 지혜로 하는 게 아니고 절대로 지혜로 해서는 안 돼요. 왜? 자기 부인, 십자가를 정곡해서 필히 십자가 앞에서는 나의 종교성을 부인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그렇게 납득을 설득을 시켜 버리면 에스겔말씀에 어긋납니다. 죽을 영혼을 살려버리고 살 영혼을 죽여 버리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면 교회는 보이스 피싱 단체가 돼 버려요. 이것은 거짓말 정도가 아니고 아예 복음을 정면에서 가로막는 그야말로 장사하는 집이 돼 버려요. 아버지께서 다루는 집이 아니고 진정한 아버지는 예수님이 하나님인데,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교회가 십자가를 대체해 버리고 십자가 믿는 거 대신 교회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해서 교회에서 제도와 형식을 계속 생산해 내는 게 됩니다. 거기에 맞춰서 가는 것은 이것은 굉장히 쉬운 거예요.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까.

 

 

모태신앙하면 유아세례 받으면 되고, 6개월 지나서 학습 받으면 되고, 어지간하면 학습 다 시켜주니까. 교회 유리창 안 깨는 한 다 합격이에요. 평신도 됐다가 나중에 기둥감이다 싶으면 집사로 승진시키면서 조건으로 십일조 내야 되고, 요런 조건을 해서 교회가 응집하는데 이거는 해골만 자꾸 모집하는 거예요. 시체 보관소도 아니고, 납골당도 아니고 자꾸 모아서 뭐 할 건데요?

 

 

십자가에서 양쪽에 작은 십자가 함으로서 십자가 사건의 의의라 하는 것은, 이 두 강도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그냥 무심한 쓸데없는 낭비가 아니었던 거예요. 우리가 애들 공부시키고 피아노 레슨 가르치고 이게 전부 다 시간 낭비가 아니에요. 이것은 평소에 우리의 육의 잠재되어 있던 속성을 한껏 마음껏 평생 원 없이 다 털어내어서 보여주는 거예요.

 

 

젊은 분들은 모를 거예요. 어릴 때에는 식구들이 많을 때, 한 방에 자면, 겨울 되면 두꺼운 스웨터 밑에 왜 그리 이들이 많은지, 아침 되면 원숭이도 아니고 털어서 톡! 톡! 톡! 잡고 이리 했어요. 지금은 위생시설이 좋아서 그러는데, 그때는 씻는 것도 없고. 지금 우리 육이라는 것은 우리가 입고 있어요. 그리고 사는 게 힘들기 때문에 힘들수록 방법이 껴입게 되어 있어요. 자꾸 껴입어요. 자기는 가리고, 약점은 가리고 장점은 드러내고. 스웨터를 한 개, 두 개 자꾸 껴입고 내복, 발 내복까지 껴입는다 말이지요. 그러면 그 사이에 뭐가 생기겠습니까? 이나 빈대가 생기겠지요. 그걸 계속해서 양성하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내가 스스로 나를 보호하지 않으면 아무도 보호할 자가 없다는 것을 그걸 굳게 하고 그 다음에 교회 나온 것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주님께서 내가 하는 일에 후원을 해달라는 쪽으로 하는 거예요. 빌 테니까 정성만큼 보답을 해주시고 달뜨면 달보고 빌고, 해 뜨면 해보고 빌고, 이번 해 뜨면 본다고 정동진 예약 다 끝났어요. 계속 비는 거예요. 올 한해도 남편사업 잘되고, 자식 잘되고, 온 가족 건강하고.

 

 

세상은 그래요. 나하나 잘되면 우는 사람 있어요. 젊은 분들은 이걸 몰라, 반드시 내가 성공하면 몇 명이 울고 있어요. 제가 지난 주일날 낮 설교 했잖아요. 사람이 죄를 안 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요. 왜냐, 사람은 자기와 닮지 않으면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예를 들었잖아요. 인간이 싫어하는 네 가지 다 나왔잖아요. 인기 없는 자를 왜 싫어하는가, 니는 왜 뚱뚱해? 니는 왜 촌사람이야? 니는 왜 키가 작아? 그러니까 뭐든지 사람은 자기와 닮지 않으면 미워하게 되어 있고, 자기를 닮으면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자신이 형제든 다 사랑하지 않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있다는 자체가 가만히 있어도 죄를 짓게 되어 있어요. 따지지 않고 무조건 미워. 저 탈렌트 나오면 드라마 안 봐, 이유도 없어요. 주고받는 것도 없는데 무조건 미워. 무조건 미워서 안 봐요. 나와 닮지 않으면 다 미워요. 내가 신이라, 내가. 그래서 인간은 가만히 있어도 주둥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고, 가만히 있어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이것은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라 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무조건 나를 봐야 되고, 나를 도와줘야 되고, 나를 격려해야 되고, 나의 희망을 들어줘야 되고, 나의 비전을 들어줘야 되고, 그러니 스웨터 속의 이나 빈대를 양산해 내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주일날 했잖아요. 교회 온다는 것은 죄를 적게 짓기 위해서 오는 게 아니고 죄를 많이 짓기 위해서 교회에 오셔야 됩니다. 많이 짓기 위해서. 요번 주일에는 무슨 소리 할지 모르지만, 하여튼 교회 와서 제발 죄 좀 많이 지어 달라, 많이 지으면 많이 지을수록 일찍 자기 자신의 의, 자존심을 포기하게 됩니다.

 

 

포기하게 되면 이 쪽 노선에 대해서 포기하게 되면,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안 하게 돼요. 안한다는 말은 억지로 자기 몸을 해서 자기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자기 부인이 돼 버려요. 그러면 이 쪽 노선이 안 되면, 어느 노선?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이 부활의 나라에 내가 죽었다가 사는 이 나라가 천국이 아니라 천국은 예수님 노선의 끝에 천국이 있다는 사실, 예수님의 죽었던 노선에 합류해 버리면 천국이 있지, 내 노선에는 내가 보험 들어 놓은 노선에는 천국이 없어요.

 

 

지옥 간 부자가 지옥가도 인간 들 됐어. 지옥 가서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지옥 가서 누구한테 심부름 시킵니까? 세상에 정신머리가 지옥 갔으면 일찌감치 포기해야 되는데, 아브라함이여, 천국에 보이는 저 나사로한테 시켜서 지한테 물 배달 해달라는 거예요. 물 배달을 아직도 지 주제파악이 안 돼! 세상버릇을 아직도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 지옥 가도.

 

 

그래서 누구한테 시키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다들 있지만, 목사들이 그런 게 많아요. 이 사람들은 천국가도 재미없어서 못 가요. 차라리 지옥 가는 게 속편해. 똑같은 놈들이 모였으니 재미나요. 그게 재미있어요. 지옥이 훨씬 재미있어요. 천국가면 심심해서 못 살아. 권태로워. 니체가 말했잖아요. 나는 천국 안 간다고, 심심해서 못 살겠다고. 매일 찬양 드리고, 면류관 주께서 쓰시는 게 합당합니다. 매일하면 재미없어요. 고스톱이 있겠어요? 포카가 있겠습니까? 프로야구가 있겠어요? 이대호 나옵니까? 이선영 나오지도 않는데, 뭐가 재미있겠어요?

 

 

애굽에서 사람들이 광야로 나왔잖아요.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는 게 빈말이 아니에요. 진짜입니다. 약속의 땅은 재미없어서 못 살아요. 애굽이 훨씬 재미있는 거예요. 거기에는 감각적인 음식도 많았고,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뭐냐, 아예 통째로 애굽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통째로.

 

 

24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소리를 하니까 욕 얻어먹게 돼 있어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신다 했지요.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 한다 이 말입니다. 얼른 들으면 그거 말하나마나 당연한 거 아니냐 이렇게 하지요. 여기에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깔려 있습니다. 왜냐 하면, 손으로 지은 전이니까 이건 어떤 특정한 공간을 특정 점유된 공간을 이야기하지요.

 

 

칸트의 선언적인 욕구에 의하면,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사물을 판단해요. 인간은 세상을 볼 때, 앞에 그것을 대상화 시켜서 세상을 본다는 말을 해요. 데카르트가 그런 말을 했거든요. 세상을 볼 때는, 세상은 저 쪽에 있고 나는 이쪽에 있어서 사이에 틈을 만들어요. 실제로는 간격이 있을 수 없어요. 산소와 질소의 공기가 꽉 차 있는데 그거 다 무시해요. 멀찍이 본다니까요. 멀찍이.

 

 

애들 학교 선생님이 애들이 볼 때, 선생님은 강단에 있고 애들은 의자에 앉아 있잖아요. 그런데 난데없이 선생님이 애들에게 가까이 오면 갑자기 애들은 어떻게 됩니까? 당황스러워요. 왜? 간격이 좁혀지니까. 간격이 좁혀지면 선생님은 하나의 대상이 아니에요. 대상이 아니고 둘 중에 하나에요. 내가 선생님을 가지고 놀던지, 아니면 선생님한테 잡아먹히던지, 그게 겁나는 거예요.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세요. 이리 나오는 거예요.

 

 

그냥 어떤 가수 노래 좋다. 그냥 놀면 되는데, 팬클럽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가수의 평소의 생활습관, 점심은 어떻게 먹고, 하루 스케줄은 어떻게 되고, 그건 너무 많이 알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야 대충 좋아하는 게 아니고 완벽하게 퍼팩트하게 좋아할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말은 뭐냐, 내 안에 들어있어서 내가 들여다볼 수 있는 정도가 돼야 그 때는 사람들은 무슨 용어를 쓰게 되느냐 하면, ‘사랑’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너무 많이 알면 안 돼요. 내가 잡아먹던지, 잡아먹히던지 해야 되는 거예요.

 

 

남자들이 못된 심보가 이런 게 있어요. 남자들은 보통 여자보다 철이 없잖아요. “니, 내하고 결혼해 줄래?”이리 하잖아요. 그러면 여자가 보통 한 번 쯤 팅겨야 되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 오빠 고마워, 오빠랑 살게” 하면 그 때 남자는 고민이에요. 왜? 책임질 못할 말을 했기 때문에. 그냥 농으로 해봤는데. 간격이 너무 가까이 와버렸어요. 지가 벌어서 지 혼자 못쓰고 나누어질 판이니까. 나중에 통장까지 내놓을 판이니까 골치 아파. 지 차도 사야 되는데. “아이, 나는 그 말이 아니고 빠르다, 좀 더 기다려 보자.”

 

 

어려운 거 해 봅시다. 시간과 공간할 때, 앞에 칸트는 무엇을 붙였는가 하면, 절대시간, 절대공간을 붙인 겁니다. 이게 나중에는 아인슈타인 상승원리에서 문자화 돼요.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이.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심성을 도화지에 그대로 그려낼 수 있는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으로 칠판을 삼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 속에 뭐가 있습니까? 종교성이 있잖아요. 신은 항상 자비롭고, 거룩하고, 사랑스럽고 이런 분이지요. 그걸 공간에 그려내는 거예요.

 

 

그러면 특정 공간은 인간들이 일부러 묵인 화에 “우리는 거기에는 함부로 가지 말자.” 남겨 둘 때, 특정한 거룩한 공간이 따로 있다는 것을 통해서 자기 심성을 그대로 빼다 박은 특정 공간과 특정 시간대가 있음으로서 자기 속에 있는 신에 대한 형상 또는 신에 대한 관념은 정당한 걸로 보장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여기까지는 인간의 영역이지만, 저기에서는 함부로 들어가면 안 돼! 강대상에도 올라가면 안 돼! 이것은 성령님이 함께 계시는 곳이야. 또는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황금 돈, 바위에 있는 바위 돈이라고 하는데, 거기는 지금 이슬람에 신전이 있거든요. 알라신을 모시는데 거기는 함부로 못 들어가요. 옛날에 솔로몬 성막도 마찬가지이고.

 

 

특정 공간에는 특수한 권한을 부여해서 이걸 이데오르기라 합니다. 이념이라 하거든요. 그 자리를 우리 서로 안가기로 묵과함으로서 자기 속에 있는 종교성이 참으로 정당한 신을 향하여 정당하게 참 바르게 믿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입장에서 그렇게 만든 겁니다. 이걸 사도바울은 허물어 버립니다.

 

 

왜냐 하면, 진짜 하나님이 계시는 지점은 바로 오직 한 지점밖에 없다. 십자가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지점 그 지점이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지점이 아니고 그렇게 되면 똑같이 칸트처럼 이리 되잖아요. 아니고 이것은 성령이 역사하는 십자가 사건화 될 때, 어떤 사건? 내가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느끼는 그 사건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켜 버립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도행전에서는 성령 받았다,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들이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지금 제가 하는 말에 일리를 느낄 거예요. 사도행전은 특징이 뭐냐 하면, 이상하게 자꾸 세상이 국가권력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데, 잡아 죽일 때마다 성령께서는 이방인에다가 성령 실어서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들어내요. 무슨 말인가 하면, 한 쪽은 잡아 가두고, 한 쪽은 새로 생기고, 이 ‘새로움’이에요. 사도행전의 주제가 뭐냐 하면, ‘주에 의한 새로운 창조행위’입니다. ‘새로움’이에요.

 

 

교회가 모였지만, 이 교회의 깨어 부수는 역할도 누가 해줘야 돼요. 국가가 해줘야 됩니다. 국가가 와서 핍박을 하게 되면 핍박할 때는 누가 잡혀 죽는가 하면, 야고보 죽지요, 베드로 잡아 족치지요, 나중에는 다 죽지요. 사실은 순교적인 입장에서 다 죽어요. 사도바울도 전설에 의하면 참사당해서 죽었다는 말도 있고, 베드로 거꾸로 십자가에 죽고, 사도 요한은 귀향 가서 죽고. 하여튼 이리 죽고, 저리 죽고 한다 말이지요.

 

 

그 죽을 때, 그냥 곱게 늙어죽는 것보다도 뭔가 강제성을 띠는 죽음을 유발시키는 역할을 누가 해요? 국가가 하는 거예요. 그러면 국가가 한다는 말은 국가가 마이너서(-)지요. 부정적 아닙니까? 그러면 성령은 플러스(+)라 보게 되면, 이 마이너스 역할이 하는 것은 인간은 어디서 못 빠져 나온다? 인간은 마이너스 국가의 힘에서 자진해서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아무도 자진해서 나올 필요도 없고, 거기서 출세하면 되니까. 거기서 대통령 되면 되잖아요. 여기서 잘사는데 왜 빠져 나와요? 빠져 나온다는 개념이 우리한테는 전혀 없는 거예요. 여기서 보란 듯이 출세하게 되면 남들에게 존경받고 부러움 받는데 무엇 때문에 수고스럽게 빠져 나옵니까? 이 땅에서 출세해 보세요. 교회 와서 환영 받는데. 나온 지 6개월도 안됐는데 장로 시켜 주는데 왜 빠져 나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아요. 내가 그렇게 성공할 수 있는 그 환경이 실은 무엇을 가로막는다? 내 안에서 나를 새로운 존재로 그러니까 오늘밤에 니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에 가게 만드는 그 새로운 피조물을 누가 방해한다? 바로 나와 더불어서 내가 속해있는 그 세력이 나와 더불어서 나와 한통속이 돼 가지고 그걸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결국 나의 구원은 누가 방해하는 셈이 되는 겁니까? 내 구원을 내가 방해해요.

 

 

내일 만약에 예수님 재림하신다 하면, “아이고, 내일 딸 시집가는데 2달 정도 미루지요” 만약에 지금 신랑 신부가 결혼하게 되어 좋아하고 있는데 주께서 천사가 나타나서 “내일 낮에 내가 재림할 것이다.” 하면 아이고, 한 달만 미루지, 예약 다 해놨는데....주님의 일이 별로 시답지가 않아요. 별로 좋지가 않아요. 끊임없이 우리는 이 새로움에 대해서 겁을 집어먹습니다. 막상 우리는 이론상 지식상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시고, 함께 동참해서, 교회에서 많이 배웠잖아요. 그러면 성령이 함께하시면 우리는 예수님과 동참한다. 해 놓고는 이거는 이론이고 지식에 불과하고 실제로 삶의 속에서 이 새로움에 있어서는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새로움에 대해서. “주여, 이러면 망합니다. 어찌할꼬?”이런 거. “주여, 다른 것은 다 되지만, 저 여자만큼은 허락하소서.” 임재범의 이런 거.

 

 

실제로 성경에서 백날 이야기해봐야 이거는 지식으로 채워놓으면 이것이 뭔가 지한테 도움이 될까 싶은데 이건 전혀 도움이 되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하나의 핑계거리만 자꾸 삼는 거예요. 실제로 우리의 몸은 딱 들어붙어서 떼면 아파요. 아파도 너무 아파요. 헤어지기가 싫어요. 자식을 놔두고 왜 천당을 가요? 자식 놔두고 지는 천당 간다. 아이고, 저거 재미있겠다. 지 자식 고생하는데. 그 생각하면 차라리 자식 따라 지옥 가는 게 낫지. 모성애 아닙니까? 모성. 교회 완전 개판입니다. 모성으로 쌓여 있고, 부성으로 완전 쌓여 있으니. 교회가 불당인지 절인지 분간이 안 되는 판이에요.

 

 

자, 이 새로움을 어떻게 하는가, 구약을 한 번 찾아봅시다. 하나님이 얼마나 치밀하신지 한 번 봅시다. 민수기3장 39절,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레위인을 각 가족대로 계수한즉 일개월 이상 남자의 수효가 이만 이천명이었더라“ 레위인 남자가 22,000명이고요. 3장 46절 읽어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 칠십 삼인이 더한즉 속하기 위하여 매명에 오 세겔씩 취하되 성소의 세겔대로 취하라“ 했지요. 보세요. 하나님이 인간이 어느 정도로 세상과 밀착됐다는 것을 알아요. 세상에서 나오라 해도 나온다는 핑계를 대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고 말을 해도 말을 듣지를 않아요. 우리의 육체의 생리에요. 그런데 이걸 뻔히 아시면서 22,000명 보다 속죄한 사람이 273명이 레위인이 적어요. 이 적은 분량만큼 속죄료를 비용을 물게 되어 있어요. 이게 민수기 3장에 이게 하나님 말씀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뭐 하라가 아니라 주께서 이 이스라엘을 요 숫자에 맞춰서 만들어 내신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충격을 받아요. 273명을 자식을 더 낳게 해가지고 이것만큼 속죄라는 값을 치룬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레위인 자체가 인간 인물 자체가 한 사람당 한 사람당 일대일 담당해서 인간 자체가 속죄되는 인간으로 레위 족속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나라가 본인이 애를 낳고 싶어서 낳고 또는 존재하고 싶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 땅에 존재케 한 겁니다. 뭘 위해서? 이론적인 지식으로서의 말씀이 아니라 실제로 말씀은 실제 역사를 이룬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육적으로 세상 좋아요. 이왕 천당 갈 거 보란 듯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떵떵거리며 대통령 한 번 해 먹고 가는 것이 훨씬 남 보기에도 좋고 주의 복 받았구나, 나도 예수 믿어야지, 전도의 용도로서 근사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싶은 욕망 다 있는 거 알아요. 아는데, 주님께서 이 새로움이란, 주께서 주시는 새로움이라는 것은 니는 그런 식으로 그 쪽으로 죽죽 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움은 너의 예측이라든지, 니 상상에 포착되지 않는 방식의 새로움을 줘버려요.

 

 

그럴 때, 진정한 뭐가 되는가 하면, 자기 부인이 성사가 돼요. 야~~ 이거는 내가 평소에 불교 도 닦듯이 나는 부족합니다. 이게 자기 부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그 즐거움, 내가 요거 행동 조심해야지, 왜? 자기를 부인해야 되니까. 나는 절제해야 돼, 왜? 성령의 열매는 절제와 온유가 있으니까 절제해야지, 이게 절대로 절제와 온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 새로움, 나는 정말 결국은 나의 이기주의이며, 나는 나밖에 모르며, 나만 사랑하며, 나는 하나님이 돈이 아니면 하나님을 버릴 언제든지 가능성이 있는 그런 존재로서 그런 내면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는 그 새로움. 그게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게 바로 여호와죠.

 

 

교회에 가니까 교회 개판이다. 교회 안가야지, 이것은 교회 안 가게 되면 뭔가 새로움이 올 거라고 기대하잖아요. 그건 새로움이 아니에요. 교회 가나 안 가나, 십일조 하나 안 하나,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법으로부터 해방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법을 만들어요. 왜, 자기가 정담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없는 법도 자기가 자기 규칙을 지켜요. 나는 오늘 일기 쓴다. 일기 못 쓰면 내가 스스로 끓어 앉아 손을 들 거야, 지가 법을 만들어요. 그게 절제이고 온유이고 성령의 열매인 줄 알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봐줄 줄 알고 그런데 그건 새로움이 아니고, 내가 이미 내 안에서 기안해 가지고 창작해 낼 수 있는 나의 육적인 창작품의 일종입니다. 내가 만든 하나의 예술품이라 할 수 있어요. 멋있어 보이는 나의 하나의 인형 같은 이런 거.

 

 

그런데 새로움은 그것도 구원 받는데 아무 짝도 소용없을뿐더러 그것도 구원에 방해되지 않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그 새로움. 그것은 바로 지금도 십자가만으로 우리를 다루고 있다는 그 신선함. 그 신선함은 바로 우리의 육을 털어내는 작업을 병행하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