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벧후3장17절 / 질문하심 / 121214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베드로후서

벧후3장17절 / 질문하심 / 121214

정인순 2012. 12. 15. 20:25

 

음성1         음성2

 

             동영상2

 

녹취:공은주

안양20121214a-벧후3장17절(질문하심)-이 근호목사

 

 

오늘은 베드로후서3장 16절부터 하겠습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무슨 편지가 억지로 풀면 멸망에 이르는 그런 편지가 다 있습니까? 편지는 반드시 수신자에게 도달하게 되어 있다. 자크 라캉이 이야기한 유명한 말이거든요. 편지는 돌고 돌아 결국은 수신자에게 돌아오게 돼 있다. 이것을 그대로 성경에 적용시키면 하나님이 주신 성경은 분명히 풀기 어려운데 이게 구원될 사람에게는 도착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도착되는 것이 아니고 그 중에 구원되지 말아야 될 자들은 그 편지 경로를 통해서 제거대상이 되어야 됩니다.

 

 

결국 그 편지는 멸망될 자를 멸망시키는 능력의 편지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경입니다. 같은 글자로 되어 있고, 같은 한글로 되어 있고, 같은 헬라어로 되어 있더라도 문자로 들어가 버리면 우리는 그러한 기능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문자인데, 누구를 멸망시켜!“ 하는 식으로 모르는데, 문자로 해석해서 영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영으로 들어가서 문자로 되어버리면, 문자라 하는 것은 표면에 바깥에 들어나는 것뿐이지, 사실은 이 글씨 하나, 하나를 우리가 들여다보는 정도 이상으로 하나님이 이 말씀을 지금도 활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누가? 성령님께서.

 

 

성경은 누가 썼다? 성령님이 썼지요. 디모데후서3장 16절에 보면 나오지요. 하나님의 영으로 썼지요. 써놓고 나와 버립니까? “나는 쓰기만하고 나는 관여는 안 해!” 이런 거 없잖아요. 저자가 책을 썼으면 책임을 지듯이 성령의 저자가 누구십니까? 성령님이잖아요. 어떤 사람은 사도가 썼다고 하는데 사도가 쓴 게 아니고 성령님께서 사도로 쓰게 하신 거예요. 사도가 썼다면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돼요. 사도가 글씨를 제대로 못써서 성경에 편입 안 된 게 아니고 많은 글을 남겨도 성경에 들어오는 것은 그 결정은 사도 본인이 하는 게 아닙니다.

 

 

요한이 많은 걸 보고 많은 걸 썼어도 요한복음은 하나밖에 없어요. 누가 그걸 결정하고 누가 그걸 자제시켰겠습니까? 누가 그걸 정리정돈 했겠습니까? 성령님께서 관여하신 거예요. 성경 자체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와 있는데, 어떻게 똑똑하다는 원어도 많이 알고 신학 고수들은 나도 보면 보이는 그런 글들이 그들에게는 전혀 안 보이고 이건 매일 사도바울이 썼대요. 심지어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마태복음은 마태가 쓰고, 마가복음은 마가가 썼다는 거예요. 아니거든요. 마태복음, 누가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 전부 다 누가 썼는가? 성령님이 쓰신 겁니다. 그런 언질들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문자로 들어가는 버릇이 있으니까 성경도 만만하게 보는 거예요. 제가 어제 강의할 때 그랬잖아요. 다니엘을 볼 때, 다니엘을 그냥 보면 안 보인다고요. 다니엘은 어디 가야 다니엘이 보인다? 사자 굴속에 들어가야 다니엘의 위상이 보이잖아요.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잠깐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 사자들이 다니엘을 먹지를 않았습니다. 자, 사자 이빨에 문제 있습니까? 사자가 비정상이 아님을 다니엘을 안 먹은 증거가 그 뒤에 나오지요. 다니엘을 빼내고 난 뒤에 다른 처자들을 집어넣으니까 사자들이 왜 그리 식욕이 좋은지 심지어 뭐까지 다 발라먹었다? 뼈까지 다 발라먹었잖아요. 그러면 사자가 비정상이 아니지요. 그 사자들이 비정상이 아닌데 왜 다니엘 앞에서만 비정상이 돼 버립니까?

 

 

이걸 제가 어제 뭐라 했는가 하면, 그걸 ‘초과’라 했지요. 초과. 분명히 비정상은 아니에요. 바다는 물 분자로 돼있다. 틀린 게 아니에요. 이건 맞아요. 물 분자로 되어 있는데, 주님이 꾸짖으니까 바다도 순종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미처 모르는 분야가 있는데 모르는 분야를 감안하지 않고 지가 아는 게 전부라고 여기고 정상이니, 비정상이니 지가 판정하니까 주님과 다니엘 쪽은 전부다 우리가 잡히는 쪽이 잡히지 않고 그 외곽에 초과인물로서 잉여인물로서 거기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이라는 것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니까 성경은 이것이 자꾸 우리를 안다고 우기면서 멸망 길로 가도록 성경은 독촉하고 있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가, 가, 빨리 가! 안다니? 많이 아세요.” 하고 자꾸 보내는 거예요. 인간은 내가 어느 정도까지 아는 그 한계 안에서만 진리라고 여깁니다.

 

 

그러니 성경이 영적으로 썼다는 것은 인간에게 뭘 의미하는가 하면, 초반부터 점심 먹고 졸음도 오는데 어렵게 해서 미안합니다. 할 수 없어요. 이것은. 인간의 한계라 하는 것은 외부에서 인간에게 질문하면서 자기에게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누가 나에게 질문한다는 것은 아는 사람한테는 상당히 건방진 외부입니다. “내가 니한테 질문할거야, 어디 감히 나에게 질문해?” 이리 되는 겁니다. 서울대학 출신한테 지방전문대 출신이 질문해 보세요. 기분 나쁘다 하지요. 그렇죠? “어디 수능 70점짜리가 어디 감히 수능 580점에게 질문해? 내가 질문할 게. 내가. 니는 내게 답변할 면만 있지, 내가 질문할거야.“

 

 

고려, 조선시대 때 임금 나오잖아요. 그게 신하들이 과연 왕에게 질문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되지요. 이미 왕에게 질문해댄다는 자체는 이미 왕이 아니고 허수아비란 뜻이에요. 지금 대선주자들은 국민들을 다 섬긴다 하지만, 막상 돼 보면 대통령이 백성들에게 질문한다 치고, 밑에 사람은 질문하면 안돼요. 그냥 순종만 하면 돼요. 시키는 대로 해야지 토 달면 안 돼.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자기가 왕이에요. 신입니다. 신도 인간이 신이 되기 위해서 필히 뭘 경유해야 하는가 하면, 신이라는 것을 경유해서 자기가 신 됨을 확인하는 작업이 종교라는 겁니다.

 

 

이 종교라는 게 신을 섬기는 게 아니고 자기를 섬기는 방편 중에 하나가 신을 다룸으로서 신을 다루고, 질문하고 신을 조절함으로서 실은 내가 더 신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는 거예요. 신하한테 좋게 잘해주는 것은 니 왕은 신하다, 라는 뜻이 아니고 왕은 왕인데 어진 왕임을 니가 알아서 기라는 식으로 신하에게 잘해주는 겁니다. 그걸 하나님이 모를 리가 있겠어요? 그래서 성령으로 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질문하는 겁니다.

 

 

처음에 질문이 뭐냐 하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벌써 외부에서 질문이 오잖아요. 그 질문하기가 질문 받는 우리 내부에서 구성하거나 우리가 미리 예상하거나 상상할 수 없다는 겁니다. 세상은 우리 상상한대로 안 돌아갑니다. 분명히 세상은 우리 상상한 대로 안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껏 하는 것은 매일 아침 눈만 뜨면 하는 짓은 상상하는 것밖에 할 줄 몰라요. 오늘도 내 뜻대로. 만날 상상을 미리 당겨서 해요. 오늘 상견례 하는데 눈 안 오기, 오늘 상견례 가는데 길 질퍽하지 않기. 매일 상상한다니까요. 내가 일본에 배타고 가는데 바람과 바다도 잔잔하기. 바람이 웃습니다. 니가 주인도 아닌데 내가 물 분자가 순종 안하지요. 왜냐하면, 바다와 바람은 말씀에만 순종하지, 우리한테는 순종 안합니다. 말씀에게 주에게만 순종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세상을 내 말에 순종하려면 어떻게 하는가, 이게 애초부터 성립이 안되는 게 우리가 말씀 안에 들어가면 세상도 순종할 수 있습니다. 논리상 그래요. 원리상은. 우리가 말씀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가면 세상은 순종합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 되느냐 하면, 우리가 말씀 안에 들어가면 말씀 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내가 말씀 안에 살아서 세상만사 내 뜻대로 해야지, 잠실체육관에 300명 모인다 하면 모이도록 만들어야지 하고 싶은데, 막상 말씀 안에 들어가 버리면 그냥 못 들어가고 죽어야 돼요. 들어가기 전에는 내가 그 안에 들어가서도 살았다고 여기는데, 막상 말씀 안에 들어가면 말씀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나도 같이 살면 안돼요. 고린도후서에 보면 주님께서 날마다 나를 죽음에 넘기움은 죽음에 넘기운 내 안에서 내가 죽어줘야 내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거예요.

 

 

내가 펄펄 살아버리면 주님이 살지 않아요. 삐져요. “니가 알아서 다 해” 그러면 살지 않으면 우리는 뭐하느냐, 풍랑일 때 밖에서 물 퍼내는 것 밖에 못해요. 퍼내면 또 들어오고, 우리 인생 같아요. 오늘 일 없다 싶으면 차사고 나서 문제 일어나고 이거 했다하면 여기 물들어오고, 잠잠할 일이 없어요. 그 말은 뭐냐, 주님께서 이 세상은 너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미 질문 식으로 우리에게 들어왔는데 우리는 그 질문을 시답지 않게 계속 무시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서 멀어지는 겁니다. 분명히 해답은 성경에 있어요. 그런데 그 성경이 우리의 체험이 되지 않고 체험이 안 되니까 우리는 그 딴 거하고 우리는 그걸 마음에 두지를 않아요.

 

 

나의 상상력, 희망, 욕망, 내가 좋아하는 미래 이런 것이 너무 강렬해가지고 우리의 희망과 탐욕과 욕심의 자리에 주의 말씀의 자리가 들어올 여지가 없다니까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 100날 주님께서 옆에서 잔소리 해봐야 우리의 욕심이 중지될 기미가 보이지를 않습니다. 대책 없습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대책 없습니다. 젊을 때, 박정희 시대 때, 경제개발 5개년 계획할 때, 계획을 보게 되면, 이건 완전히 천국입니다. 그런데 그거 끝나면 2차 5개년 계획 또 나와요. 2차 5개년 계획 보면 놀래버려요. 집마다 차가 있고, 국민소득이 드디어 5천불, 우리의 수출이 100억불, 와~ 우리 땡잡았어! 또 참습니다. 곧 끝나면 천국이냐, 아닙니다. 3차 5개년 계획 또 들어가요. 북한의 천리마 운동과 똑같은 거예요.

 

 

정리해 봅시다. 성령이 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질문을 함으로서 우리가 스스로 한계를 모르는 우리를 한계를 들추어내는 겁니다. 그러면 그 한계를 들추어내면, 그 한계가 뭐냐, “아! 나는 이 정도로 부족하구나!” 그런 한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놀라운 게 있어요. 주께서 이끄시는 우리의 한계 바깥으로 나와 보니까 멸망 받을 자는 필히 멸망되어야 되고, 천국 갈자는 지옥 가겠다고 몸부림을 쳐도 지옥으로는 못가고 필히 천국가야 된다는 이 결단 난 사태, 결정 난 사태가 우리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이것을 감사로 받아들일 마음준비가 돼 있어야 돼요. 이것 받아들이면 마태, 마가, 사도행전 모든 성경 해석은 이해 다 됩니다.

 

 

이 바탕 자체가 하나님이 깔아 놓은 이 말씀 지반이 내가 주인공 되고, 내가 입을 벌릴 세상이 아니구나! 욥처럼 재를 뒤집어쓰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이쁜딸 세 명 낳는 그런 세상이구나! 모든 것이 내가 설치는 세계가 아니고, 주님이 설쳐서 기어이 예쁜 딸 세 명 낳아야 되고, 전보다 곱빼기로 부자 되어야 될 욥이라면, 부자 되게 하는 것이 욥이 희망삼고 기대해서가 아니라 욥이 상상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니가 상상한 대로 될 것이다, 하는 것은 인간이 한계를 모를 때, 이 쪽 철학, 경영학에서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 계속해 봅시다. 과학적으로 물이 물 분자다, 이게 잘못된 게 아니고 사자는 육식을 좋아한다, 이게 잘못된 게 아닙니다. 그런데 과학의 문제점은 과학의 한계를 모른다는 거예요. 왜? 뭐를 차버리기 때문에? 과학은 건방이 한이 없어요. 건방져서 성령의 말씀을 배제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성경 보는 것은 과학이 죄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게 아니고 내 과학은 우수한 과학이고, 내 과학은 진리에 가장 근접했다는 과학임을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성경을 도용해 버리니까 이건 주객이 전도된 거예요.

 

 

과학을 버려라하면 그 과학을 못 버려요. 왜? 과학이라는 것은 스스로 버릴 때는 그냥 못 버립니다.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칠 때만 과학을 버리게 되는데, 그냥 옆에서 버려, 버려, 한다고 버리는 게 아니에요. 물어, 물어한다고 브라우니가 무는 게 아니듯이, 버려, 버려한다고 과학이 “예, 버리겠습니다.” “수학은 엉터리야.” “예, 수학은 엉터리입니다.” 이런 게 무슨 말이 됩니까? 수학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버려라” 하면 “예, 180도 아닙니다. 잘못되었습니다.” 이런 수학자가 어디 있어요. 그래도 돌아서면 지구는 돈다, 그러는데. 그래도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다, 이러고 있다 말이지요.

 

 

태양이 지구를 위해서 돈다. “지구가 태양을 위해 도는 게 아니다. 빨리 물어, 물어” 하니까 갈릴레이가 “씨이~ 예, 동의합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바로 그것이 비 진리예요. 왜냐하면 사람이 아무리 과학자고 갈릴레이 갈릴레오라 할지라도 지 목숨 끊어지면 무엇도 없어진다? 과학의 업적도 같이 날아가요. 그 현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현실이란 말입니까? 이걸 모르는 거예요.

 

 

성경에는 나옵니다. 모든 현실은 주를 위해서 있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은 믿지를 않아요. 갈릴레이가 믿었던 예수, 과학자가 믿었던 예수, 지식적인 예수, 사실은 그들은 예수를 안 믿고 지가 행한 업적인 과학을 믿고, 이 과학 잘되기 위해서 예수라는 좋으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좀 내가 아는 과학 업적이 날마다 새롭게 되기를 뒤에서 받쳐주고 밀어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사업하는 사람이 교회 나와서 예수 믿는다. 거의 거짓말입니다. 사업이 죄라고 생각 안 하고 내가 교회까지 나오면서 사업하고 사업 잘되면 십일조 바치고 교회 잘되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데 내 사업이 잘게 하시면 나만 잘되는 게 아니고 내 새끼 잘되고 내 새끼 예수 잘 믿고 하면 국가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큰일을 할 텐데, 하나님 나 건드리면 하나님 손해입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예수 믿는 겁니까? 자기랑 과학을 믿는 거잖아요. 결국은 예수여, 당신이 나한테 순종하라는 이야기밖에 더 되겠어요.

 

 

그런데 말씀은 바로 그런 것을 표면화시키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 뭐라 합니까? 무식한 자들은 굳세지 못한 자들은 이 성경을 풀다가 뭐한다? 성경을 풀다가 멸망의 길로 가도록 하시는 능력이 어디 안에 있다? 성경 안에 있다.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멸망할 자는 필히 멸망하는 것, 저는 성경의 이런 구절도 좋지만, 마태복음18장 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뭐냐, 우리에게 외부에서 질문자가 없으면, 다른 말로 하면 영적인 것이 없으면, 우리는 숫자 번호메기기, 하나, 둘, 끝, 이리되지요. 초라하지요. 뭔가 실패했다는 느낌이 확 다가오지 않습니까? 실패했다는 느낌이.

 

 

어제 제가 동영상하면서 13번째 했지요. 사람은 축복을 저주로 여기고, 저주를 축복으로 여긴다. 왜 그러느냐 하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쫓겨났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쫓겨난 그 자리에서 인간의 해야 될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어떤 역할? 반대로 살아야 될 역할을 담당해야 돼요. 그래야 뱀하고 같이 산다는 티를 내야하지 않겠습니까? 축복을 저주라 간주하고 저주를 축복이라고 간주하는 역할을 인간이 해줘야 됩니다. 해라, 안 해라해도 인간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나를 힘들게 하면 무조건 저주고, 나를 잘되게 하면 무조건 축복이고, 그래서 하늘 여신 섬길 때는 예레미야44장, 그렇게 만사가 형통한 거예요. 모든 것이 풍부해요. 예수 믿고 난 뒤에는 꼬질꼬질하게 살면 예수 믿는 재미도 안 나고 그러잖아요. 하늘 여신 섬길 때는 이스타르라는 신이예요. 여신인데. 그렇게도 잘되더니만, 신을 여호와로 바꾸고 난 뒤에는 완전히 망해버렸어요.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가? 그게 축복이에요. 하나님 자체를 위해서 믿는 게 아니고 내 좋아라고 여호와를 믿던, 예수를 믿던, 성령을 믿던, 그건 전부 뭐다? 우상임을 외부에서 질문 식으로 우리에게 통보해 주는 그 관계성, 그게 축복이에요. 두 세 사람이라도 중요한 것은 뭐가 축복이냐, 하나님이 너와 함께 있다는 자체가 축복입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하나님이 계신 그 자체가 축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천 명 모여도 거기에 하나님 안 계시면 그게 축복이 아니란 말이지요. 제가 이리하면 “하나님도 계시고, 천명도 모이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지가 지한테 질문해서 그래요. 사실은 주님이 함께 있어 좋은 게 아니고 천명 모인 게 좋으면서 사실은 그걸 감추기 위해서 ”천명이 중요합니까? 주님이 계신 게 좋지요.“ 이런 입 발린 거짓말로 입을 쳐라. 이런 거짓말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침 바르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문자대로 믿는다고. 성경을 문자대로 믿는 사람 많거든요.

 

 

제가 전에 얘기 했지요. 독수리의 날개로 업어왔다고. 신명기, 출애굽기에 나오거든요. 독수리 날개로 몇 명을 업었겠어요? 봉황 돼도 50만명 못 실을까 싶어. 문자대로 한다면. 문자대로 믿을 거 아닙니까? 그리고 왕벌을 보내서 물리친다. 가나안 10족속이 전부 다 멸망당한 것이 벌한테 쏘여서 죽었습니까? 아니잖아요.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아듣는 말을 해야지, 우리가 납득이 안돼요. 납득이. 납득이 안 돼! 오똑하지. 이 말은 건축학개론에 나와요.

 

 

성경이 우리를 납득을 시키려면 왜 우리가 이해되는 용어를 사용 안 하시느냐 말이지요. 우리가 얼마나 성경에 열심이고 성경 알려고 뻔히 알면서도 우리에게 통용되는 의미, 그러니까 우리에게 이해되는 용어를 담아서 왜 말씀을 안 하셨습니까? 지금까지 이야기하면서 했지요. 왜냐 하면,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질문을 누가 던지고 누가 답변합니까? 질문을. 내가 나한테 질문하는 버릇으로 우리가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야 돼요. 성경이 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예요? 간단히 뭘 의미한다? 질문을 함으로 말미암아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다? 아~ 나한테 살고 죽고 하는 이 문제가 내가 걱정할 권리가 우리한테는 있기? 없기? 없기! 내 인생을 어떻게 마감하느냐? 어떻게 더 끌어가느냐 하는 걱정 근심을 애초부터 우리가 우리한테 걱정할 권리가 없는 겁니다.

 

 

왜? 우리는 질문 없는 상태에서 내가 걱정해 버리면 누가 누구한테 질문한다? 결국 내가 나한테 질문해 버리면 누가 신이고, 누가 신봉자입니까? 내가 신이고 나의 충실한 유일한 철저한 교인은 누구입니까? 내가 교인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지옥가면 어깨를 주물러 주면서 “걱정하지 마! 니가 지옥가도 위로할 자는 니밖에 없어.” 거기가거든 또 같이 위로할 사람은 많은 여러분들이 지옥 가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거기에 많이 있잖아요.

 

 

수요일날 그런 설교했습니다. 부자가 지옥 가니까 누가 없더라? 물이 없는 게 정도가 아니고 지가 부자 되게 만들어 줄 티를 내게 만들어 줄 중간에 있는 설계 배치물들이 없는 거예요. 거지가 없는 거예요. 거지 없으면 구분할 사람이 없어 버려요. 지가 신 노릇해도 재미가 없어. 왕 게임해도 지 혼자 왕 게임하면 뭐가 재미있습니까? 바둑, 장기 지 혼자 둬 보세요. 재미없어요. 몰라, 가끔은 지 혼자 직업여성들이 손님오기 전에 지 혼자 화투쳐서 오늘도 누가 손님 오겠나 해서 운수대통이다 하겠지만, 재미없어요.

 

 

미드게슈타인이란 사람이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은 게임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세상은 아무 소용없는 기라~ 그저 지가 즐길 게임을 지가 찾아가서 만들어 놓고 거기서 지가 승자냐, 패자냐, 결정 봐 놓고 패자가 되면 다른 게임을 해서 지가 꼭 승자가 되는 자리를 확보할 만한 게임을 찾아갑니다.

 

 

세상에서 인기 없고 세상에서 버려진 인간이 교회 와서 장로해서 대우받으려하는, 그러면 그 교회는 뭐가 돼요? 하나의 지 생각의 장기판, 게임 판이 되는 거예요. 그 게임 판을 교회가 제공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작은 교회는 싫은 거예요. 왜? 작은 교회의 우두머리보다도 큰 교회 닭 꼬리가 더 낫다 말이지요. 작은 교회의 닭 머리보다도. 이 게임에 주님께서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뛰어들면서 그 게임에 승자가 아니에요. 무슨 자라? 패배자라. 고린도후서13장에서는 그걸 연약하다 했어요. 뺨을 때려도 그냥 얻어맞고, 옷을 뺏겨도 그냥 뺏김을 당하고, 눈을 가리 우고 니가 선지자라면 누가 때렸는지 알아 맞춰보면 믿지! 옆에 강도 조롱하고, 이런 패배자가 없어요. 하나님의 종이 되셔서 스스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구원의 길을 높은데서 사다리 걸쳐서 하는 게 아니고, 인간이 찾지 않는 낮은 곳으로 숨어 있는 곳으로 구원의 길을 주께서는 이걸 포장된 길은 아니지만, 울퉁불퉁한 길이지만, 그 길을 열어버린 거예요. 아무도 그 길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 길을 찾으려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주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줄 때만 십자가길이 보이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지 않으면 또 스톱돼 버려요. 길이 없어요. 길이 없는데 또 다시 갈라지지요. 성령께서 사태를 만들어서. 이 세상은 게임인데, 제발 이 세상의 패배자가 되어줘. 제발 패배자로 살아줘. 패배의 승리 자체가 의미 없이 살아줘.

 

 

어제 가락교회에서 뭐라 했습니까? 헬륨가스가 들어있는 풍선이라 했지요. 이질적인 것이 들어오니까 지는 가만히 있어도 존재가 너무 가벼워줘요. 이걸 마태복음 11장 끝에 뭐라고 나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가스를 바꿔라, 니 가스 바꾸지 말고 내게 배워라, 나는 이 땅에서 아예 작심하고 패배자가 되고, 심지어 제자로부터 배신당하는 그런 바보 같은, 배신당하면서도 복음 전하고, 떡을 같이 나눠주고 그랬다 말이지요. 떡을 나누고, 잔을 나눈 그 인간이 자기를 배신하잖아요. “가룟 유다야, 니도 먹어라, 먹고 니 할 일 해야지.” 지 할 일이 뭡니까? 이것 먹고 제발 나를 배신하라 말이지요. 이거 먹고.

 

 

마치 부모가 김장김치해서 “이거 하나 먹고 밥 먹고, 나를 배신해” 하는 거예요. 세상에 그런 부모 어디 있습니까? 이거 먹고 앞으로 나 아플 때, 잘 돌봐라, 이리 돼야 되는데, 이거 먹고 버려라. 도대체 납득이 안 돼요. 납득이.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세상 게임하고 다른 게임 룰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께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는 주님의 게임 입장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느냐?” 다른 말로 하면, “니가 원래 있을 곳이 아니야” 니는 마귀하고 짝짜쿵하고 좋다고 마귀하고 놀고 있을 게임이 아니다 이 말이지요.

 

 

개그콘서트에 보면 어르신네라는 코너에 보면 이런 코너가 있어요. 아주 못된 교도소 왔다, 갔다하는 정남이가 겉만 멋 부리고 잘난체하는 껄렁이가 와 가지고, “어르신, 이번에 선보는데 잘될 것 같지 않습니까?”하면 어르신이 뭐라 합니까? “응, 잘될 것 같지 않다.” 하지요. “주님, 요번이 인생이 잘될 것 같지 않습니까?” “응, 잘될 것 같지 않다.” 하시지요. 항상 부정적으로 이야기하지요. “주님, 이번에 우리교회 부흥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 부흥될 것 같지 않다.“ 우리가 비정상이 아닙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자가 사람고기 싫어하는 사자가 아니에요. 막상 다니엘을 빼놓고 다른 처자을 집어넣으니까 사자가 정상적인 사자 기능으로 돌아왔지요.

 

 

그러니 과학이라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과학의 문제는 다른 게 아니고, 과학이 스스로 자기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왜? 뭘 배제하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배격했어요.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뭘 한다? 딱 하나, 질문을 해대야 될 텐데, 지가 질문을 해버리면 과학은 지가 돛대고 지가 대장인데 누가 자기한테 질문한다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결국은 우리는 질문 받아야 될 낮은 입장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그게 싫은 거예요.

 

 

어제 수요일 설교초반에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람들이 성경을 안 보는 이유는 성경을 펼쳐보면 세상의 모든 역사가 인간의 행함에 의해서 있다고 보는데 성경은 누가 관여한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관여해 버리지요. 그러면 나는 뭐고? 나는 공들이고 애쓰고, 젊은 사람들이 애쓰고 누구 노력으로 기어이 밤새워 코피 터져 가면서 잔업해가면서 겨우 벌은 돈 가지고 아파트 부금 넣고 있잖아요. 그러면 이 아파트가 주님의 것이 될 일이 없고 수도 없다 말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성경을 안보는 이유가, 성경을 펼치면 질문을 해대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 아파트는 내 아파트다.”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그 게임이 자기는 싫은 거예요. 왜? 그 게임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패배자가 되기 때문에. 그러면 자기의 존재의미와 자기의 존재가치는 어디서 찾습니까?

 

 

제가 어느 답 글에 이런 말을 썼지요. 제발 속임수라도 좋으니까 우리에게 희망을 달라고. 교인들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교회 오면, 교회 있는 마귀들이 속임수를 너희가 원했기 때문에 내가 속이더라도 너는 참아라, 해가지고 사기만 치고 있는 거예요. 그들은 할렐루야! 아멘! 외치고 있고. 그거 당해도 쌉니다. 그거는 돈 뺏기고 몸 빼앗겨도 싸요. 당연한 겁니다. 거기서 빠져 나왔다는 것을 축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 빠져나온 것은 성령이 와서 질문해서 그래요. 뭐냐 하면, “지금 노는 게임이 지금 하늘나라 게임하고 달라“ 라는 그 질문이 왔을 때, 비로소 구원, 구출이라는 의미가 ”야, 내가 구출 돼야 되는구나! 바보같이.“ 구원을 내가 소유하는 입장이 아니고 그냥 구원에 딸려가야 되는구나! 저쪽에서 당기면 나는 계속해서 끌려가야 되지, 그냥 여기 있는데서 여기 내가 원하는 그 세계를 주께서 집어넣어서 내 역사를 만드는 게 아니구나! 민족과 국가와 교회를 위해서 영광돌리겠다, 이런 게임 판에 주께서는 거기에 대해서는 관여를 안 하시는구나!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인생을 깽판 놓지를 못합니다. 그 정도로 우리한테는 아주 관대해요. 꼭 우리는 우리 자신한테 느브갓네살 같아. 너무나 관대합니다.

 

 

500명, 300명 대적을 죽이는 에스더에 나오는 아하수에로왕(크세르크세스1세)이 나와요. 대군 크게 믿다가 아주 깨지지요. 스파르타 3인방과 싸워서 수십만명을 죽인 거로 나오지요. 실제로는 그게 아니고 영화기 때문에 그렇고, 바사나라가 망합니다. 고레스, 캄비세스 졌지요. 다리오왕 졌지요. 아닥사스다왕 졌지요. 마지막 다리오왕3세 졌지요. 그 다음에 알렉산더가 등장합니다. 고레스가 BC589년에 바벨론 망하고 나중에 BC421년에 망해서 바사 나라 역사가 얼마 되지를 않아요. 약간 100년 넘습니다.

 

 

전부 다 제국들이 지 마음을 생각 안하고 이때는 지가 이 게임에서 영원한 승자라고 자꾸 자처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 게임 판에 대해서 외부에서 질문을 하는 것은 아까 강의 처음에 한 것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뭐하게 한다? 멸망될 자는 제발 멸망되어야 하고, 그냥 멸망되는 게 아니고 이래서 멸망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느 길로 가야 되겠습니까? 멸망의 길로 가야 되겠지요. 지금 사도바울보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우리보고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구약 성경을 못 외웁니까? 그냥 달달 외우지요. 성경말씀을 그렇게 봤다 말이지요. 성경을 봤는데, 그 성경을 본 것이 여호와를 잘 믿고 성경을 본 그것이 자기를 자꾸 어디로 미끄러져 내려갑니까? 지옥가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말씀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한다? 지옥가게 인도하는 말씀이 맞는 거예요.

 

 

다만, 고린도후서에서 사도바울이 뭐라 합니까? 나는 옛날에는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성경을 뭐로 봤다? 문자로 봤다는 거예요. 그럼 내가 문자로 봤다는 고백이 나오려면, 문자로 봤을 때는 문자로 봤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가 없어요. 왜?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이고 전부이기 때문에. 문자로 하는 말이 필요 없어요. 그들은 문자로 본 게 진리에요.

 

 

언제 문자로 봤다는 그런 반성이 나오는가 하면, 영으로 봤을 때 아닙니까? 그럼 문자로 보면 영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온다는 것을 처음 강의에서 했지만, 이것을 말하고 싶은 거예요. 아~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모든 신학자들과 모든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아무리 성경을 문자로 본들 영이 안 나온다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문자로 봐서 무엇을 끄집어낸다? 영을 끄집어내려하는 거예요. 성경공부 많이 하면 뭐 된다? 영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이게 안 됩니다. 이건 안돼요. 안 돼!

 

 

그러면 성경공부 하지 말까? 해야지요! 왜? 멸망의 길로 가야 되잖아요. 멸망의 길로 가기위해서 성경공부 해야 돼요. 12단계 10단계 다 하고, 후천지 신천지 다 왔다 갔다 다 거쳐야 돼요. 하여튼 마주치는 것은 다 하세요. 아! 이제 다 끝 맞췄다. 아, 내가 고함지르다 더 고함지르네.

 

 

다른 성경같이 억지로 푼다하는데, 억지라는 말도 이건 일방적인 말이에요. 지금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이 직접 “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또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런 질문을 안 받은 사람은 자기들이 억지로 풀면서도 자기들은 억지로 안 풀려고 억지로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억지로 안 풀려고 억지로 노력하는데 그게 전부다 뭐가 된다? 성경말씀대로 억지로 푸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여준 게 돼요.

 

 

그러면 인간은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나태해도 성경말씀에서 그렇다면 그렇다는 범위에서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그 자체가 지반이고 구조고 바탕이기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해요. 우리 서 경수 목사님이 요 근래 주례를 연거푸 2번을 했는데, 첫 번째 주례한 말씀이 요한복음 1장 3절 말씀 있잖아요. 주례하면서 이걸 본문으로 잡았어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있다? 없다? 없잖아요. 그러니까 억지로 풀다가 멸망한다는 말씀도 필히 피하라는 게 아니고 어떤 이도 피할 수가 있다? 없다? 없다는 말이에요. 못 피하는 게 정상인데, 왠 은혜인지, 왠 사랑인지, 주께서 끄집어내는 구출작업이 개시되어버리니까 무엇을 통해서? 질문하심을 통해서.

 

 

질문하심을 통해서 해버리니까 빠져나오면서 “아하, 그동안 억지로 풀었구나!” 이게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빠져나오면서 “역시 나는 훌륭해! 왜? 나는 역시 억지로 성경을 안 푸니까.” 이렇게 빠져나오는 인간은 없어요. “억지로 푸는 나를 이렇게 구원하시는구나!”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남을까 그런 게임이 아니고 내가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끼리 있었던 그 계약 에베소서1장 4절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그 계약,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그 모든 계약게임은 우리가 관여됩니까? 안 됩니까? 관여 안 되니까 욥처럼 재를 뒤집어쓰고 우리가 할 말이 없어요.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회리바람 가운데 있어서 주님이 직접 욥에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왜 이렇게 어려움을 주십니까?” 하다가 막상 나타나니까 게임 판이 다른 거예요. 게임 판이. 자꾸 주님의 게임 판을 어디 쪽에서 해석한다? 내가 지금 내 쪽 게임 판에서 해석하려 하니까 모든 게 모순되는 거예요. 해답도 없을뿐더러 모순도 되고 그리고 대책도 없고.

 

 

제가 십자가마을에 자아는 무엇인가 하면서 답변 글을 올렸지요. 올린 글을 아까 다시 읽어봤어요. 그러니까 이리 되어 있어요. 현대인들은 아무도 나에게 의미를 던지지 말라, 나는 그런 거 다 귀찮다하는 식으로 답변해요. 인간들은 이걸 ‘원자적 존재’라 합니다. 원자라 하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단자’ ‘원자’ 마지막 쪼개도, 쪼개도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것을 원자, 알갱이, 스스로 뭐가 되는가 하면 스스로 하나의 알갱이가 되고 싶은 거예요. 스스로 알갱이.

 

 

스스로 알갱이 되면, 얽히고 섞인 거 다 잘라버려야 되지요. 어디 조용히 아무도 없는데서 홀로 살면서 니는 왜 그렇게 사는가를 나한테 질문하지 마라, 니는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런 질문조차 하지 마라, 나는 이대로 조용히 사는 것이 나는 최후의 낙이다, 라는 식으로 원자적하는 거예요.

 

 

이거 옛날 같으면 나이 많은 사람이 동네의 어르신네가 쇠고기 구우면서 하는 그런 이야기인데, 그런데 지금은 나이대가 점점 내려가고 있어요. 60대에서 20대까지 내려가고 있어요. 심지어 10대로 내려가서 문 잠그고 나오지를 않아요. 가족이란 이름으로 간섭하지 마라. 이게 원자적 존재.

 

 

원자적 존재의 모든 만남은 그냥 우연한 마주침이고 부딪침이에요. 그러니까 만남이지, 이게 무슨 사랑이겠어요? 집착이지. 안 만나주면 죽이고. 이게 뭐겠어요? 울산에서는 어떤 남자가 두 자매를 죽여 버리고 이런 현상 있잖아요. 이게 벌써 지가 알맹이가 돼서 그래요. 아무도 자기에게 그게 문제 있다고 누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아담아, 네가 어디 있지?” 질문을 던지는, 사람 말고 하나님이 직접 와서 질문을 던지면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의하면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그거 아닙니까? 문을 열면 내가 있던 게임에서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어떤 낯선 존재, 미션계통 학교 졸업해서 매일 예수, 예수, 강제로 채플을 참여하고 그렇게 즐겨 들었던 그 성경말씀 속에는 안 계셨던 그 어떤 분.

 

 

“아담아, 이 구석에서 이리 고생해” 찾아올 때, 그것도 피 묻은 손으로 찾아올 때, 세상에 그게 축복이고 그게 로또지, 더 이상 무슨 축복이 행복이 더 이상 필요합니까? 뭐가? 하나님 자체가 주님만 보이면 축복이지 뭐가 필요해요? 뭐가?

 

 

두 세 사람, 나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주님만 함께 있으면 그걸로 됐잖아요. 뭘 책임 줘요. 언제부터 내 인생 내가 책임 줬습니까? 언제부터 내 몸을 국가가 관리했습니까? 억지로 풀면서 살아왔어요. 억지로 풀 수밖에 없는 게 중심이 성경말씀은 주님중심인데, 이걸 자기중심으로 푸니까 이게 억지로 안 될 래야 안 될 수가 없는 거예요. 모든 게 억지에요. 교회도 내 중심, 내 가족 중심, 내 새끼 중심, 달 보면서 내 중심, 그저 올 한 해도 내 가족 잘되고, 내 남편 사업 잘되고, 내 가정 잘되고, MBC KBS 틀면 다 그 얘기라, 해 뜰 때 정동진 가서 뭘 빌었습니까? 하면 전부다 그 이야기에요.

 

 

누구 마음대로?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누구 마음대로? 니 상상한대로? 그들은 말합니다. “상상도 못하나?” 그 상상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게임에서 나온 겁니다. 패배자는 되기 싫고 뭐가 되겠다? 어떻게 해서든지 승리자가 되는 거. 김기덕 감독은 바로 그걸 영화로 다룬 거예요. ‘섬’이란 영화에서 주변은 텅텅 비어있는데 자꾸 그 직업여성은 밀려와서 섬에서 차도 팔고, 커피도 팔고, 몸도 팔며 살아가는 거예요. 본인은 태어날 때부터 그 짓하려고 기도한 게 아니에요. 자꾸 중심에 들어가면 떠밀리고 들어가면 떠밀리는 거예요. 어릴 때 가정에서 부모에게 사랑받으려하면 이혼해버리고, 자꾸 떠미는 거예요. 교육 좀 받아서 좋은 학교 가려하면 “야야, 우리 집안 돈 없다. 니는 공장 다녀라”해서 뭔가 본인의 뜻이 아니고, 본인은 상상해요. 나이팅게일 되겠습니다. 온갖 것 상상하지요. 부모에게 효도하겠습니다. 하지만 뭔가 중심지에서 흐르고 있는 와류 소용돌이 속에서 들어가면 떠밀리고 들어가면 떠밀리고, 나중에 사해 바다 근처에 보면 두껍게 소금 층이 누적이 돼서 층을 이루지요.

 

 

그 밀집된 층을 조사해 보면, 과거의 흔적이 다 나오지요. 그 유명한 영화가 희미한 등불 밑에서 고개도 못 들고 눈물만 뚝 뚝 떨구지요. “니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렇게 묻잖아요. 그것이 유명한 소설가에요. 작사한 사람이. 어디서 뭘 하며 니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무 소리 못하고 오랜만에 만난 모양이라, 눈물만 흘리고 있어요. 그 주름진 거 보고 다 알 수 있잖아요. 한평생 어떻게 살았는지, 밀려온 거예요. 소외된 자, 외곽 된 자, 그 쪽을 분석함으로서 잘나고 잘난 그들이 얼마나 떠밀었는지 그들의 숨어있는 속성을 밝히고자 한 김기덕 감독의 주제가 되지요. 소외된 자를 통해서 현재의 자본주의 중심부가 어떤 게임 판을 벌리고 있는지. 김기덕에 의하면 그 밀려온 사람 중에 예수님도 포함되어 있다 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경제적으로 포함된 게 아니고.

 

 

밀려온 놈도 마찬가지에요. 밀려오거나 떠밀거나 이 세상 그저 섬 끝에 있던지, 중앙에 있던지, 그냥 찍혀가지고 뽑아 올린 것만이 구원받고 두 사람이 밭을 갈매,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것도 똑같아요. 가진 자, 못 가진 자, 밀린 자, 떠민 자 똑같아요. 소외된 자 관계없어요. 지가 중심부에 가면 또 그 짓할 인간이에요. 지가 정권을 안 뺏어서 그렇지, 정권 바뀌면 또 그 짓하는 인간들이라.

 

 

중요한 것은 세상은 예수님으로서 있는 것이지, 민주당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정권교체 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사람이 엉뚱한 게임에서 자기가 패배자가 되기 싫고 승자가 되고 싶은 그 야심에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귀 벙어리 하나님이여! 혀 잘린 하나님이여! 그 따위 광주 사태에서 그런 민중의 노래가 마구 튀어나온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가 상상도 못할 게임을 준비해 놨는데, 그 게임이 뭐냐, 죄인을 사해주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안양20121214b-벧후3장17절(질문하심)-이 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17,18절에 봅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했지요. 이게  상당히 어려운 논리인데요. 왜 어렵냐 하면, 법이라 하는 것, 무법이라 하는 것은 법을 어긴 거잖아요. 그러면 게임 판에서 지금 예수님이 나타나기 전에는 유대나라나 이 모든 세상에는 뭐가 지배하고 있는가 하면, 모세의  율법의 게임이거든요.

 

마태복음9장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하면, 옛 포도주는 어디에 담아라? 옛 부대에 담아라, 했어요. 이게 무슨 뜻일까? 부대는 뭐고? 포도주는 뭘까? 옛 포도주는 결국 율법을 의미하고. 옛 것을 율법이라 해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창고에서 옛것과 새것을  끄집어낸다 할 때,  옛것을 옛것이라고 할 때는 새것이 등장해야 옛것으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옛것도 없으면서 옛것이라 하면, 이게 있는 게 전부지요.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다. 그렇다면 구원이라는 것도 성립이 안 됩니다. 자리이동은 되지만 구원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옛 세상 속에 천국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천국이라는 개념이 있을까? 없을까요? 당연히 있지요. 옛 세계에. 지옥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있지요. 부모효도 안하면 지옥가고, 효도하면 천국 간다. 회신곡에 나오잖아요.  종교에 다 나오지 않습니까? 인간이 착한 사람 되어야 천국 간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나쁜 사람 되면 어디 간다? 지옥 간다. 이미 개념들이 다 마련돼 있다니까요.

 

단, 마련되어 있는데 그 자체 내에서 완결성 모자람이 없음, 이렇게 되는데 그 자체가 옛것이라면 그러면 그 자체가 옛것이 되려면 그 것에 속하지 않은 다른 규칙 다른 법칙이 새것이란  이름을 달고 여기 옛것 속에 출몰돼야 되지요.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위에서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 이 말을 따지고 보면 말 같지도 않은 말입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하잖아요. 그 사람이 “뭘 받아? 있는 것으로 충분한데, 뭘 받아?“ 이러면 그 말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위에서 안 오면 받을 수 없지!“ 이렇게 하면, 저 쪽에서 ”안 받으면 그만이지!“하면 이게 무슨 대화가 됩니까? ”나, 안 받을래, 안 받을래, 있는 것으로 충분해“  모세의 율법이 있잖아요.

 

모세의 율법이 있는데 그대로 지키면 선한사람 되고, 안 지키면 악한 사람 되어 지옥 간다. 이미 그걸로 완결적이고 충분한데, 뭘 더 필요해? 교회에 등록했다. 등록해서 세례 받고 성만찬 떡 떼고 구원 받고 뭐가 더 부족합니까? 목사 있고, 장로 있고 뭐가 더 부족합니까? 이거 전체가 어디에 속한다? 옛 것에 속해 버리면 옛 것을 가지고 새것으로 연결될 것 같으면 새것이 올 이유가 없지요. 옛 것 속에서 새것을 생산해내면  되니까.

 

그런데 옛 술은 옛 부대에 담는다는 말은 거기서 새로운 술이 나올 수가 없고, 부대도 옛 부대에서 새 부대가 안 나오지요. 제가 아까 첫 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이 바로 한계예요. 한계. 이게 한계가 되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 어려운 거 해 봅시다. 한계가 올 때 어떻게 오는가, 이걸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골치 아프기 때문에 결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창세기3장에서 하나님께서 네가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어떻게 된다? 선과 악을 알지요.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이미 선과 악에 대해서 지식을 알고 있잖아요. 그러면 이 지식이라 하는 것은 이걸 정신세계고 마음세계잖아요. 지식이 돌멩이처럼 생긴 게 아니란 말이지요. 수술해서 이걸 머리 속에 집어넣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지식이라 하는 것은 정신이고 마음이잖아요.

 

잘 한 번 보세요. 결론부터 내리기 때문에 어렵지만, 여러분들이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들어보세요. 납득이 됩니다. 이 정신과 마음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가니까 이 주변에 여리고성이 무너지더라 이 말이지요. 애굽 군사가 깊은 물에 빠져요. 이거는 정신세계 아닙니다. 물이 넘쳐서 애굽 군사가 푹 젖었다. 이게 정신입니까? 정신이 아니잖아요. 여리고성이 무너졌다. 돌멩이가 정신입니까? 아니잖아요. 실제로 무너졌잖아요. 분명히 처음 시작은 뭐 됐다? 정신이고 마음인데 하나님의 정신과 마음으로 이스라엘 속에 심지 되어서 역사 속을 통과하니까 그 주변에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난데없이 블레셋 산헤립이라는 앗수르 군대장관이 엄청난 군대를 몰고 하루아침에 쳐들어와서 다 죽었잖아요. 그게 정신이 아니고 실제로 잖아요. 그리고 그뿐만 아니고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가니까 마음으로 아팠습니까? 정신이 아팠어요? 문둥병이라, 손톱이 빠지고 눈썹이 빠지고 실제로 빠졌잖아요. 요단강이란 물을 7번 왔다 갔다 하니까 실제로 병이 낫잖아요. 그렇다면 분명히 정신으로 출발한 것이 이게 하나의 현실로 구성하지요. 이게 어렵다 이 말입니다. 이게.

 

우리는 과학적 사고를 하기 때문에 물질은 물질이고 정신은 정신이에요. 마우스가 이렇게 있는데, “컴퓨터 마우스야, 니가 움직여라, 움직여라” 하면 마우스가 움직입니까? 이게 움직인다고 기대한 인간이 나쁜 놈이지요. 왜? 마우스는 물질이고, 언어는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거 아닙니까? 내 마음이 물질을 못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까요? 물이 든 컵이 깨어져라, 깨어져라, 해도 컵이 말을 안 듣지요. 그러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소프라노를 데려와요. 컵에 물을 담아놓고 소프라노가 하이에너지를 냅니다. 목소리로. 컵이 깨지라고. 그러면 컵이 깨질 거예요.

 

그런데 그 컵이 깨질 때, 너무 아름다워요. 깨졌으니까, 아니면 에너지파가 너무 세서 깨졌어요? 에너지가 세서 깨지지요. 결국은 아름다워 하는 것은 정신 용어는 빠져버리고 에너지로 번역해서 에너지와 에너지의 만남에서 더 큰 파장의 에너지가 작은 에너지를 삼킬 때, 컵은 깨져버리는 거예요. 컵을 유지하는 분자의 구조는 새로운 에너지가 와서 분자구조가 해체돼 버리면 이 깨어짐이라는 게 성립되는 겁니다.

 

여리고성을 할 때, 여리고성이 고함지르니까 무너졌습니까? 아니지요. 아무리 여리고성을 허름하게 지어도 사람의 고함소리, 파장 그걸 모은다고 에너지파장이 저 쪽의 구조,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에너지 한계를 넘어서서 그걸 와해시킬 에너지 물리적인 방법은 안 된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제가 어렵다고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아무리 정신적으로 정신 차려도 물질은 동요를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물질은 물질로 다루어야 되고, 정신은 정신으로 다루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프란치스코 그 사람이 새들을 위해서 기도하니까 새들도 좋아한다 하지요. 그게 신기한 이유, 성모 마리아상에서 최근에도 눈물이 나올 때, 그게 신기한 이유가 그게 옛날 같으면 하나도 신기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물질은 정신의 연장이기 때문에 물질과 구역이 없어요. 과학이 발달되다 보니까 성모 마리아는 석고로 만들었고 석고는 물질로 만들었고 눈물이라 하는 것은 세포에서 나온 거잖아요. 세포와 석고의 만남은 어울리지 않잖아요. 성립이 안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 식으로 따지니까 우리가 지구에서 살다가 화성에서 산다. 이것은 납득이 되지만 지구 살다가 천국 간다. 이거는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의 많은 부분을 윤리적, 도덕적인 것은 잡고 요상한 소리하는 것은 다 제거해야 돼요. 그렇게 해놓고 “믿습니다!” 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바라볼 때, 물질과 영은 서로 분리되어있다 생각하고 그 자기를 바라봄으로 연장시켜 놓고 게임 판에다가 하나님의 성경책까지 예수님까지 거기에 집어넣어서 해석을 해버리니까 결국은 뭡니까? 옛 부대에 옛 술을 담는 그 버릇을 못 버리는 거예요. 그걸.

 

제가 지금까지 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성경을 연구해도 예수의 말씀을 집어넣어도 이미 내가 나를 바라보는 규칙이 그렇게 석고처럼 굳어져 버렸는데 예수님의 생각의 본래의 취지가 우리 속에서 우리 능력으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돼요? 옛 포도주의 옛 부대는 찢어야 되고, 부대가 찢어지면 뭐가 쏟다집니까? 율법은 아무 쓸데없이 땅에 그냥 버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됩니다.

 

자, 처음에는 정신이지요. 이야기 이어갑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7번 도니까 여리고성이 무너지지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 장군이 전쟁할 때, “아이 씨~ 해만 안지면 마저 죽일 수 있는데.” 갑자기 해가 멈췄지요. 해가 멈춘 것은 물리학자는 뭐로 봅니까? 지구 공전이 잠시 스톱됐다, 이리 보는 거예요.

 

동방박사가 별 따라 왔을 때, 그 별은 그 당시의 천문학자는 기록을 살펴서 유성일까? 아니면 궤도 일탈일까? 이리 조사를 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조사를 하는가 하면, 자기가 옛 술과 옛 부대의 원칙을 가지고 새 부대와 새 술을 해석해보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왜 하느냐? 납득을 해야 되니까. 납득을

 

왜 납득을 해야 되는가? 납득을 해야 기존의 해석법이 옳지 않다는 소리를 안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지 생각이 옳다는 것을 지옥가도 안 버려요. 주제파악도 못 해서 지옥 가서 누구보고 물심부름 시키는 게 어디 있습니까? 물 떠다 달라하니. 니가 뭔데 물을 왜 버려요. 아니 물을 버릴 것 같으면 처음부터 지옥은 안 뜨거웠어요. 안 뜨겁고 좀 뜨거울만하면 옆에 물탱크 만들어 놓고 해결했습니다. 지옥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나라예요. 지옥만 그런 게 아니에요. 천국도 그렇습니까? 천국도 내 위신 세우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 2시간 섬기고 “아이 씨~ 주님, 섬기느냐 어깨가 뻐근하네.” “아이~ 찬양하느냐고 목 다 쇠었다.” 조금 쉬고 교대했다가 찬양 드릴게요. 해서 지 컴퓨터 게임하고 바둑 두면서 했다가 시간 됐다, 해가지고 가서 또 주님이여! 찬양 받으시옵소서! 이런 짓 하는 게 천국 아니라니까요. 그러니 어떤 사람은 천국 안 가려하잖아요. 천국 재미없다고.

 

재미없다는 게 뭔 뜻입니까? 지금 뭘 호소한다? 옛 술을 옛 부대에 담는 율법이 우리는 좋은 거예요. 왜 좋으냐?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낼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거예요. 목사님이 우리에게 율법적으로 이야기해 달라는 거예요. 왜? 납득이 되니까. 납득이.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벌 받고, 이게 수월해요. 어떤 사람이 목사가 시키는 대로 했더니 복 받았다. 이게 솔솔 들어온다니까요. 반대로 니가 이 교회에 봉사 안하면 당신 아들 요번 시험 치는 거 떨어집니다. 이게 술술 들어온다니까요. 이게.

 

2012년 12월 12일날, 12숫자가 세 개로 겹쳤어요. 홍콩 상하이 중국계통에서는 난리 났어요. 결혼하려고. 작년도에도 그랬거든요. 어떤 특정한 날짜라든지, 이렇게 우연히 겹칠 때, 12월 12일에 예약한 것을 “아이고, 실수했네.” 하는 것은 12월 12일에 하고 싶은 거예요. 왜 하고 싶을까요? 12, 12, 12가 12, 12,10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거, 그거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 이거 진짜 어렵다. 제가 진짜 설명하기 어려운데.

 

인간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엄마 뱃속에서. 그건 물질이고. 그거 말고. 그 질문은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나를 낳게 한 엄마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똑 같은 질문이 되풀이되기 때문에 그 질문은 답변이 될 수 없어요. 내가 왜 있느냐? 인간은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뭐냐, 과정에서 나온 거예요. 모든 게 어울림에서 나온 거예요.

 

어떤 남자가 있었고, 어떤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 남자 안 만났으면 오늘날 내가 아기로 태어나지 않았다 이리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많은 남자와 여자 중에서 우리 아버지와 우리 어머니가 만났는가, 그것은 태어난 입장에서 소급해서 설명이 됩니까? 안 됩니까? 설명이 될 수가 없어요. 그거는 아빠 엄마한테 물어보는데 아빠, 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 하면, 할아버지에게 또 미루기 때문에. 해답을 계속 미루는 거예요.

 

결국, 인간은 자기가 안 만큼 안에서만 해답을 내리는 버릇이 있어요. 특히 젊은 사람들이 그렇지요. 존재감이 없다는 것은 지가 아는 범위 내에서 존재감이 없지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요양병원에 봉사시켜 보세요. 존재감 생기지요. 항상 자기보다 펄펄 넘치는 재벌3세를 쳐다보고 사니까 이리 사는 것 보다 낫다고 하는 거예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아픈 사람을 지금도 몸 건강한 것만도 복이라고 느끼면 그런 존재감소리 안 나옵니다. 축복이라고 여기는 거지요.

 

지 보다 잘난 것만 쳐다보니까, 아까 첫 시간에 한 섬에서 밀리는 생각만 하니까 그러는데, 지가 살아온 그것이 자기의 중심이라 생각한다면 밀리고 자시고 하는 그러한 규칙자체가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있는 곳이 바로 중심이다, 이 말이지요.

 

우리 십자가마을의 복음 아는 성도들의 모습 보면, 공통점이 그거예요. 기죽지 않고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이 어디서 생겼습니까? 도대체. 내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자신감 하나는 펄펄 넘치고 있어요. 전목사님처럼. 개뿔도 없으면서 머리 기르고 사는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는지 몰라. 납득이 안 돼요. 납득이.

 

지금 어렵다는 게 뭐냐 하면, 왜 정신이 됐는데, 주변에서 이렇게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벽돌이 무너지고 하느냐 말이지요. 도대체 그걸 과학적으로 설명해보라, 설명이 안 돼요. 상자가 뭐 길래 들여다보면 왜 죽습니까? 상자가 뭔데? 언약궤가 뭔데? 만든 게 오동나무에다가 금박이 입힌 거거든요. 지금도 오동나무 금박 입힌 거 보세요. 들여다보면 죽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어디 거기서 질문을 해요. 과학을 기계를 만든 사람에게 “교수님, 기계과 박사지요?” “네, 박사입니다.” “선생님, 질문하나 있는데, 유령은 어디서 나옵니까?” 물어보세요. 기계 들고 때리려 할 거예요. 왜 나한테 유령을 묻느냐 하는 거예요. 유령을

 

그러면 질문한 사람이 “유령도 모르면서 왠 박사입니까?” 하지요. 왜 당신은 박사라는 것을 하면서 유령은 없어도 됨을 그 범위를 잘라버리고 나머지만 박사라, 이거 반칙 아니에요? 반칙 아닙니까? 박사가 되려면 유령을 포함해서 해야 돼요. 왜 그들은 유령을 빼놓고 로봇만 만듭니까? 유령을 만들어 놓으면 지가 유령을 다룰 수 있다? 없다? 못 다루잖아요. 그런 반칙이 어디 있어요? 지가 다룰 수 있는 거만 해놓고 지는 박사고 천하에 진리를 아는 거고, 지가 다룰 수 없는 것은 발로 차 버리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율법을 안다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다른 해석을 내어 놨잖아요. 율법은 누구에 대해여 증거 한 것이다? 내게 대하여 증거 한 것이라, 하니까 사람들이 죽여 버렸잖아요. 죽여 놓고 저희들은 모세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모세가 너희들을 단죄할 것이다. 자, 이제 나왔다. 정신세계에서 물질이 연결이 안 되지요. 납득이 안 되지요. 납득이 안 되는 것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고 이게 무엇의 근거인가 하면, 단죄 받을, 정죄 받을 근거가 되는 겁니다. 아~ 무서운 이야기예요. 정말 무서운 이야기예요.

 

양의 피를 냈습니다. 조사해 보면 양의 피도 그냥 혈구로 되어 있고 과학적으로 봐서 그냥 혈소판이 있어요. 그런데 그 피가 어린양의 피가 그 주변에 있는 사람이 12월 10일날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받는다는 것은 어린양의 피는 물질이고 용서받는다는 것은 정신세계잖아요. 물질과 정신이 어떻게 연결됩니까? 다른 이방민족은 믿는다? 안 믿는다? 안 믿지요. 죽음의 사자가 올 때, 문설주와 문지방에 피를 발랐더니만 그냥 가더라, 이건 누구와 누구와의 약속입니까? 정신세계, 언약세계 속에 임한 약속인 거예요.

 

그런데 어린양의 피를 안 바르고 약간 염료를 섞어서 양의 피의 흉내를 내면 천사가 어떻게 합니까? “뭐, 이런 게 다 있어?” 대번 죽여 버리지요. 왜 안 되는 걸까요? 이런 어려운 질문이 성경에는 우리가 아는 질문보다 어려운 질문이 더 많아요. 우리가 성경을 안다하지만, 성경은 보면 볼수록 성경세계는 우주보다 깊어요. 말씀세계는 우주보다 더 깊다니까요. 이거는 한도 끝도 없어요. 우리는 그걸 잘라놓고 제쳐놓고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옛 부대에 옛 술을 담는 그런 방식 안에서만 갇혀 살면서 안다느니, 뭔가 이용했다느니, 삼성그룹의 주가가 180만 통과해서 우리는 이제 잘 먹고 잘사는 떵떵거리는 이 따위 소리를 하니 그게 축복이냐 말이지요. 밖으로 다 쫓아내놓고.

 

새 술과 새 부대를 모르는 입장에서 옛 술과 옛 부대의 입장에서 지가 선악과 따먹은 선과 악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지가 다룰 수 있는 거만 해놓고 하게 되면 되느냐 말이에요. 결국 그 정신은 뭐한테 밀리게 되어있어요. 물질한테 밀리게 돼 있어요.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거 보다 더 무서운 말은 한 쪽을 사랑하면 반드시 한 쪽을 미워한다. 니 내 미워하지? 이렇게 돼요. 마지막에. 누가복음 16장에는 너희들이 날 미워하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미워함이라. 왜? 돈을 사랑한다고 단죄하기 때문에. 우리는 옛 술과 옛 부대를 갖고 있다는 그런 입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우리는 원 없이 단죄와 정죄를 당합시다. 당하는 게 축복이라. 빼내줄려고 단죄하는 거예요. 빼내주려고.

 

니 죄인이야, 죄인이야 할 때, 나아만 장군이 물에 들어가려할 때, 의사는 오지도 않고 간호사가 와가지고 조수가 와가지고 오늘날 성령이 간호사거든요. 성령이 오신거와 똑 같아요. 요단강 7번 들어가라 했습니다. 이것은 엘리사 만나기 전에 상상도 못했습니다. 옛 술과 옛 부대 속에서 기껏 꺼낼 수 있는 상상 속에는 의사 안 만나고 요단강 들어갔다가 나오면 된다는 발상을 할 수가 없어요. 왜? 주님의 새 술과 시 부대의 적용 방법은 옛 술과 옛 부대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만 골라서 줍니다.

 

수능시험 준비했는데 EBS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한 문제도 EBS와 관련된 문제가 안 나올 때, EBS준비한 사람들 빵점 맞지요. 주께서 주시는 문제는 문제도 생소할뿐더러 답변도 알아들을 수 없는 답변을 주십니다. 환장하는 거예요. 성만찬해서 구원받는다면 아마도 성만찬 상표등록해서 공장에서 만들어도 돼요.

 

어떤 물이 우리에게 생수 된다면 그 물을 양산하면 됩니다. 중요한 무기물 집어넣어서. 우리가 물질을 집어넣는 방식에 어떤 방식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하는 방식을 준적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준적이 없다. 예수님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도 누구한테 세례준적이 없어요. 가로 열고 예수님이 준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준 것이라 하고 가로닫고, 요한복음4장에 나오거든요. 세례요한은 세례를 줬지만.

 

그러니까 도대체 이렇게 우리 쪽에서 다가서서 새 술과 새 부대를 가져올 수 있는, 배급부대를 우리에게 준적이 없어요. 배급을 주겠다하는데 그걸 받을 수 있는 부대가 우리한테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다만 무슨 말만 하는가, 없다는 말만 해요.

 

그런데 없다는 말만 계속 강조해야 받을 수 있는 부대까지도 저 쪽에서 일방적으로 주셔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에요. 하늘에서 아버지께서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는 말은 받을 수 있는 능력까지 우리 내부에는 없다는 거예요. 하늘에서 줄 때, 우리는 그걸 넙죽 받을 수 있는 능력도 우리한테는 있다? 없다? 없고, 받을 수 있는 능력까지 그것조차도 하늘에서 줘야 된다. 그게 선물인데 선물 중에 뭐냐, ‘믿음’이란 말이지요.

 

믿음은 우리 행함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 선물이기 때문에 선물 속에는 누가 관여합니까? 주님이 주도적으로 관여하지요.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그 믿음 안에 깨보면 주님이 주도적으로 성령께서 말씀대로 하게 하십니다.

 

아직까지 이렇게 이야기해도 해결 안됐습니다. 계속해서 문제가 뭐였습니까? 어떻게 정신이 가는데 물질이 왜 변화하는가, 이 문제입니다. 진전 안 되면 나보고 화낼 거니까 겁나서 계속 가겠습니다. ㅎ 아직까지 해결 안 됐어요.

 

그런데 여기서 드디어 해결책이 하나의 낌새가 있습니다. 요 이스라엘이란 구체적인 물질이, 이스라엘은 구체적인 물질 맞잖아요. 성전 있고, 칼, 활, 그것가지고 다윗이 전쟁했잖아요. 돌맷질 했잖아요. 그거 다 물질 아닙니까? 성전 있고, 실제 양 아닙니까? 물컹물컹한 양, 피, 전부다 물질이죠. 어떻게 양의 피를 발랐더니만 애굽이 죽었다는 것은 해결 안 되지만, 하여튼 그들이 만지작거린 것은 물질 아닙니까? 돌 판도 돌로 만들었다면 성분분석해보세요. 어떻게 돌 판이 있는 법궤를 봤는데 왜 죽느냐, 이 문제 그것은 돌 판 자체에서 저주파가 나와서 죽인 게 아니잖아요. 에너지가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요. 그게 설명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망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그동안 “야, 우리의 물질 때문에 주변의 물질이 깨지더라, 야, 신기해. 신기하든 어쨌든 간에 고마워” 라고 까불다가 이스라엘과 그 외부적인 관계로 자기는 장담하다가 이게 어떻게 돼요? 이거는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네요. 지금 중요한 것은. 지금 블레셋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서 물러가고 다른 나라가 문제가 아니고. 실제로 문제가 야기되는 것은 율법이 없는 저 쪽은 망해라, 우리는 율법 있다, 이 정도가 아니라 율법 있는 자기 나라에 뭐가 생겼습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율법대로 제사 드립니다. 그런데 적들이 쳐들어 왔어요. 한 번 봅시다. 율법대로 제사를 드렸더니만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나라는 납득이 안 되지만 이스라엘은 납득이 되지요. 왜? 언약궤를 메고 가니까 요단강이 스톱했으니까. 그리고 여리고성 들어갔잖아요. 그 정도 까지는 율법대로 제사를 드렸더니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았다. 납득이 되거든요. “아! 이거였구나, 주께서 도와준 것은.” 그런데 그 다음은 율법대로 제사를 지냈는데 적들이 쳐들어와서 점령했다. 그러면 전에 있던 법칙가지고 해명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이거 미치는 겁니다.

 

그러면 해결점은 어떻게 하느냐, 해결점 없음이지요. 없으면 우리한테 주신대로 율법을 지키면 지키는 대로 너희들은 다른 나라로부터 보호를 받고 다른 나라가 나한테 패배할 것이다. 라고 주신 그 당사자의 원래의 취지가 뭐냐고 물을 수밖에 없지요. 이걸 성경에서는 부르짖는다고 되어 있어요. 사사기에 보면 그들이 부르짖을 때에 그런데 그들이 곱게 부르짖을 위인들이 아닙니다. 어려움 당했다고 교통사고 났다고 부르짖을 인간들이 아니에요. 밑바닥까지 내려가요. 밑바닥까지.

 

아직까지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면 부르짖는 것도 건성이에요. 순순하지 못해요. 진실성이 없습니다. 그냥 한편으로는 부르짖고 한 편으로는 지 할 수 있는 거 다해요. 그런데 사사기에서 어떻게 됐습니까? 그런데 자기 식대로 해보는 게 기껏 뇌물 받치고 조공 받쳐서 형님, 봐주소! 이리하다가 그것마저도 점점 더 압력이 가할 때, 에이~ 이판사판,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그 때는 자기는 죽는 수밖에 없지요.

 

모압 여인 룻이 남편 죽고 시아버지 죽고 남은 것은 여자들만 달랑 셋이 남았을 때, 기가 차고 코가 찹니다. 이 때 나오미도 마찬가지예요. 남편 죽고 기둥 같은 아들 다 죽고. 도대체 모압이란 이 동네가 문제인지, 아니면 나한테 문제 있는지, 나오미는 누구한테 문제 있다 했습니까? 이름을 바꿨어요. 나오미라는 것이 기쁨이라 했는데, 이름을 바꿨습니다. 슬픔이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기쁨의 여자가 되지 말고, 니는 슬픔의 여자가 되어야 하나님을 바로 안다 해서 이름을 바꾼 겁니다. 문제가 누구한테 있다? 문제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외부나라 이방나라 문제가 아니고 소위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나에게 문제가 있다.

 

드디어 이스라엘 멸망하면서 사사기에서 문제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뭘 잘 지켜봐라? 율법을 잘 지키라고 율법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고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는 방앗간 주인을 보내 버린다고요. 방앗간 주인은 제사장이 아닙니다.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는데 뭐가 오니까 성신이 와버리니까 성신이 와도 본인도 마찬가지예요. 똑같은 인간이에요.

 

그걸 못 믿어가지고 바알세블 우상 섬기는 것도 밤에 몰래가서 깼다가 나중에 그게 CCTV에 걸려서 기브스하고, 양털을 해서 하나님, 미안합니다. 세상에, 누구를 시험한다는, 누구를 질문할 때는 시험하는 거거든요. 질문할 때, 질문의 내용은 지가 아는 세계관을 묘사하는 거예요. 내가 알고 있는 세계에서 기껏 기적이라 하는 것은 아침에 이슬내릴 때, 이슬이 폭 젖는다는 그 사실은 그게 기껏 지가 아는 기적의 수준이에요. “하나님이여, 양털만 촉촉하고 나머지는 바짝 마르시게 하면 내가 하나님이 하신 줄을 믿겠습니다.” 뭔 뜻입니까? 인간은 어떤 수를 써도 이걸 못해낸다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게요. 이것도 중요한 문제인데, 번개가 치고 전염병 오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라고 중세까지 동서양 관계없이 다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프랭클린이 피뢰침을 만들었지요. 파스퇴르가 시험관에서 우연히 모든 전염병은 세균에 의해서 간염 되기 때문에 항생제를 사용하게 되면 어떻게 돼요? 잡아먹으니까 하더라, 그게 발명되기 전까지 페스트 병은 흑사병은 하나님의 재앙이라고 본 거예요.

 

기껏 질문하는 것이 여기는 축축하고 저기는 바짝 마르게 하시면 계십니다. 이걸 오늘날 과학적으로 재현할 수 있습니다. 마술사들이 자다가도 다 해요. 그게 되니까 이번에는 바꿔보는 거예요. 혹시 어떻게 될지, 또 바꿔보는 거예요.

 

인간의 세계에서는 인간이 기껏 생각하는 우연도 인간세계에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냥 필연에 불과한 거예요. 진짜 우연은 우리가 감도 못 잡고 체험도 해본 적이 없어요. 주님의 준비된 체험은 주님의 준비된 기적은 우리가 미처 예상도 못한 기적들입니다. 우리 인생사가 또 그래요. 우리가 예상 못한 것만 가가지고 기적의 하나님 인도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기드온 본인은 죽어난 겁니다. 하여튼 그 정도로.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우리가 지금 성령으로 성경을 보고 있지요. 잘못 풀면 우리는 멸망한다 했지요.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이 성경 풀 때, 특징이 뭡니까? “야~ 풀었다!”가 아니라 성령 받은 사람은 본인도 매일같이 죽어나는 겁니다. 새 술과 새 부대 속에 있는 사람은 본인도 신난다가 아닙니다. 아직도 옛 술과 옛 부대가 살아있기 때문에 본인은 매일같이 얻어터지고 있는 거예요. 얻어터지면 얻어터질수록 본인도 살고 주변에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전파되고.

 

우리는 똑똑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돌아서면 바보예요. 돌아서면 다시 옛 술과 옛 부대의 법칙으로 또 우리의 삶을 측정하고 평가하고 스스로 자기 인생을 잘 살았느니 못 살았느니 성공했느니 실패했느니 매일같이 자기 자신을 닦달하는 이 작업을 버릇을 멈추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그런 것을 그냥 방치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망해라, 니는 망했지만 말씀은 니 망함을 통해서 유력하게 살아 있다. 생생하게 살아 있다. 니 망한 게 슬프냐, 니 살아 있는 게 좋으냐, 그걸 묻는 겁니다. 제가 수요일날 말했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는 중심체로 사용하는 거예요.

 

다른 민족과는 달리 이스라엘을 망하게 함으로서 비로소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그 참여하는 체험을 느끼게 하는 거예요. “아! 주께서 이렇게 돌아가셨구나!” 바로 이런 느낌으로. 그렇게 동참케 하시는 축복은 아!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돈보다 낫습니다. 태진아의 명언이 아니고 태진아는 그런 소리해서 돈 벌지마는. 주께서는 변함없는 원칙입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지요. 그러면 새 술은 복음이고 다른 말로 주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사랑을 담을 부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없으면 우리가 왜 부대냐, 사랑에 의해서 우리가 그동안 살아왔던 원리원칙이 욕을 얻어먹는 그 자체가 부대로 만들었어요.

 

단죄함에서 오는 우리의 화풀이, 우리 뜻대로 안 되는 속상함, 원망, 불평, 그 단죄함을 통해서 우리가 단죄 받을 만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나니” 가 성립되는 겁니다. 병 주고 약 주고, 병도 주님이 주시고 약도 주님이 주시고. 병 줌으로서 옛 부대가 새 부대가 되고, 약 줌으로서 옛 술이 새 술이 되고,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던 다른 바탕과 다른 게임의 법칙에 의해서 우리가 지금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강도 맞습니다. 맞는데, 구원으로 천국 갑니다. 죄인은 못 간다는 그 천국, 의인들만 간다는 그 천국에 강도라는 레벨을 달고 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놀리는 그 창녀, 돌로 때려 죽여도 괜찮은, 니 때문에 이혼한 가정이 한 두 가정이 아니었어! 그런 꽃뱀 같은 여인이 덜렁 어디를 간다? 천국에 가는 거예요. 기생이 어디에 참여 한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만천하에 동원되면서 직업도 빠뜨리지 않아요. 기생 라합. “아이고, 부끄러워라, 씨~” 바람피운 상대방 남자를 때려죽인 그것도 미필적 고의로 얍삽하게 죽인 그 사람이 천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

 

새 술과 새 부대가 적용되는 원칙인 나라에서는 얼마든지 그것이 충분하게 가치 있는 거예요. 아침 10시부터 일한사람들은 잘리고, 달랑 1시간 받아놓고 하루 종일 품삯 다 받아 챙긴 사람이 천국에서 산다. 납득이 안 돼요. 납득이. 어떡하지? 이럴 때는. 1시간 땡땡이치다가 제대한 사람과 3년 동안 빙빙 돌면서 제대한 사람과 둘 다 예비군이라, 납득이 안 돼! 납득이. 이걸 매일같이 어떻게 감당하지요? 매일같이.

 

이게 감당이 안 되니까 십자가마을보고 이렇게 욕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껏 죄지을까요? 그러면 우리가 막 살아야 되겠네.” 이게 바로 옛 술과 옛 부대에 담아서 원칙 했던 사람이 성경말씀 보면서 어느 길로 갑니까? 멸망의 길로 가지요. 멸망되기로 작정한 사람을 노출하는데 성공한 거예요. 복음은 항상 성공입니다. 복음을 들고 가면 잘 풀리는 집이라, 아무 하자 없어요.

 

천국 안 갈 사람이 교회 안 나오는 것, 너무나 잘한 짓입니다. 천국 못 갈 사람이 계속 교회 나오는 것, 다 힘들어요. 분명히 이것은 장사 거래가 있었던 거예요. 종교적인 거래가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그걸 너무 이용했어요. 그것 교회 컸다는 자긍심이 복음을 바꿔버린 거예요. 그냥 죄인 같은 우리가 용서받은 것을 가지고 우리는 그 귀한 복음을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지 목숨 잃으면 무슨 소용없다 했잖아요. 우리는 천하 잃어버린 사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걸 얻어놓고도 세상 떠나가는 것을 그걸 못 붙잡아서 한 맺혀 있어요. 사랑이 저 만치 가네. 그걸 가지고 눈물 흘리고 있어요.

 

주의 십자가 생각하면서 울 눈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배반해 떠났다고 그것 때문에 사랑이 저만치 가네. 하고 울고 있다고요. 끊임없이 우리의 기존의 숨겨진 옛 술과 옛 부대를 율법에 갇혀서 율법으로 단죄 안 받는 축복받는 인생 되고자 노력하고 있는 교회에서 목사 말 들어서 우리의 저주대신 축복이 오기만을 바라는 그 분투노력이 그것이 바로 사실은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했다는 사실을 성령께서 계속해서 까집어 뒤집는데 성령 받은 우리는 환장할 지경이고, 주변사람은 복음이 뭔가를 아는 계기를 마련하는 겁니다.

 

이익은 말씀만 이익보고 힘든 것은 우리만 힘들고 그런데 힘든 가운데서도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순간 우리는 아! 우리의 영광이라고 살아온 것이 후회될 때,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희열과 기쁨이 잠시 반딧불처럼 불꽃놀이 하는 것처럼 잠시 화려했다가 다시 가버리고. 또 다시 밀물처럼 왔다가 또 다시 가버리고.

 

오는 것은 주께서 보내고 미는 것은 나의 욕심이 보내고 “이제 복음 알았으니 됐습니다. 오늘 저녁에 봅시다.” 밀어내고. 또 사건 터지면 화들짝 놀래다가 좀 살 것 같으면 이제는 내 힘으로 살겠다고 밀어내고.

 

18절 봅시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이게 뭐냐 하면, 정신에서 물질로 가다가 우리의 이스라엘 물질을 위해서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다가 이 물질이 깨졌을 때에 원인을 찾아보니까 그 원인이 결국은 뭡니까? 물질은 물질이 아니었고 결국은 내 안에, 내 정신 안에 말씀을 주신 그 말씀이에요.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물질과 정신을 나누어서 생각하게 했다가 결국은 그의 끝을 보여준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망한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고 그 망했던 그것을 이방인인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심어주게 되면 우리는 이스라엘이 잘못했던 것을 또다시 되풀이 하면서 결국은 정신, 물질 두 개다 챙기려 하는 우리 자신이 자신 속에 나보다 힘이 더 센 깊이 있고 넓은 말씀이 이미 우리를 접수한 거예요. 우리를 정복하신 겁니다.

 

우리는 선지자 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예수님이 이미 우리에게 승리했기 때문에 이제는 남한테 굳이 승리할 골머리를 수고할 이유가 없어요. 마귀를 이겨도 주께서 이기는 것이지, 우리가 이기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가 마귀에게 복 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주께서 함께 있다는 그 자체가 축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끝으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산상설교 보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빛은 숨겨놓지 않고 들어낸다, 할 때에 어떻게 우리가 나선다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숨는 게 주특기예요. 우리는 나서기 싫어하는데 자꾸 나서도록 이슈가 되도록 자꾸 등경위에다가 놓아요.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이거는 흙이지 소금이겠습니까? 자꾸 독특한 맛, 소금다운 맛을 내도록 주께서 말씀이 너희는 빛이라는 말씀이 우리의 고집보다도 더 세고 너희는 소금이라는 그 언질이 그 말씀이 살아 생동해서 쪼개서 살아 운동하여서 기어이 소금되는 쪽으로 우리를 사용하는데, 우리는 환장할 지경이에요.

 

기생 라합이라는 이름으로 그 레벨을 떼어보니까 소금이 튀어나오고, 나는 강도다! 하고 강도는 분명히 물질적으로 맞아요. 강도라는 물질을 떼어보니까 세상의 빛이라고 사용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게 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대학 나왔고, 직분은 목사고, 장로고 붙이는데, 레벨을 떼어보니까 나는 목사이고 싶고, 죄인 아니고 싶고, 전과자 아니고 싶은데, 우리는 창기 아니고 싶은데, 그 레벨을 떼어보니까 너는 자유자다, 하면서 튀어나오는 겁니다. 말씀이 진짜고 바깥에 있는 것은 그냥 껍데기에 불과한 것을 우리를 이렇게 인도하시니 우리는 날마다 어떡하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어떡하지?”의 답변이 뭐냐,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라가라.”그리스도 아는 은혜의 지식으로 자라가라, 니가 너를 그렇게 조저 놓은 그 분에게 고마워하면서 살아가라, “나는 내 능력으로 나를 이런 인간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를 고백하면서 분명히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질문하신 말씀하신, “맞지요? 당신이지요?”라고 하면서 자라가라.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마지막 18절에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나의 영광이 아니고, 주님의 영광이 영원한 날까지, 여기서 ~까지라는 말이 나오는데, 까지라 하는 것은 마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지속’을 의미한다. 이리 했지요.

 

지속은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밀어 붙이는 속력이 계속해서 연장되거든요. 그런데 흔히 쓰는 까지라는 말은 뭐냐 하면, 여기까지 와서는 그 다음에는 아예 없어지는 것처럼 하거든요. 니가 하늘나라 올 때까지 포도주에서 난 것은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할 때는, 그 까지라는 의미는 진짜 포도주는 본격화된다, 그런 뜻이거든요. 성경에서.

 

‘천년이 차기까지‘는 천년 다음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천년동안 왕 노릇 한다, 그런 뜻이에요. 우리는 지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습니다. 왜? 내가 조절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조절하신다? 주께서 이미 영원히 박혀있으니까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하고 영원히 우리를 조절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영원히 찬양하고, 영원히 감사하고, 영원히 내 영광 조지고, 주의 영광 높이는 그 작업이 오늘도 쉬지 않았음을 저희들 새 술과 새 부대의 입장에서 고백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