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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공은주
안양-20121012a-벧후3장5절(물의 심판)-이 근호목사
시작하겠습니다. 베드로후서3장5절부터 봅시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5절에 보면,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되어 있는데, 하늘과 땅과 하나님의 말씀, 이 세 가지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하늘이 있고, 그 다음에 하늘밑에 땅이 있겠지요. 땅이 있고, 그리고 하늘이 하늘답게 성립하는 것도, 땅이 땅 노릇 유지되는 것도, 말씀으로 생겨났고, 또 말씀으로 유지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늘이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유지된다고 생각하거든요. 하늘에 달이 있잖아요. 달이 지가 알아서 팽팽 돌고, 해는 알아서 화끈하게 열기를 내뿜고, 바다도 마찬가지고요.
땅은 물에 포위되어 있다. 땅은 물에 포위되어 있어서 그냥 땅이라는 게 없고 물 가운데 땅, 물이 약간 비켜 가면 땅이 되고, 물이 넘쳐버리면 땅이 사라지고, 그런 식으로 땅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물과 더불어서 이렇게 돼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 재림하시면 물과 땅으로 됐던 관계 속에 하늘에 불이 주어지게 되면 불과 물과 땅, 하늘이 전부 다 짬뽕이 되어버려 가지고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요. 예수님이 재림하게 되면 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땅이라 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물에서 분리되어서 땅이 되었다. 이렇게 된 땅은 말씀으로 됐다는 거예요. 그러면 땅에서 재미나게 노는 여우나 사슴이라는 것도 무슨 힘으로 그 애들이 뛰어놀고 재미나게 논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렇게 됐다는 겁니다. 이걸 누가 압니까?
우리가 아는 자연과학적인 사고에 의하면 하늘과 땅과 물과 바다 이 모든 것을 한군데 모으는 것은 오직 에너지에요. 에너지 개념은 칼로리 개념은 19세기 말부터 나온 개념입니다. 에너지라 하는 것은 힘, 열, 운동한다는 것은 그만큼 에너지를 소비한다거나 에너지를 발산한다는 거예요. 운동한다는 것은 이 지점에서 저 지점으로 이동하는 거고, 이동할 때는 누가 민다는 겁니다. 누가 미는 게 아니지요. 무엇이 밀어요. 그게 에너지가 밀어주면 운동에너지가 되게 되면 이 때 운동 에너지가 나오고, 상태에너지 받고 전부 다 에너지로 설명하는 겁니다.
지금의 천문학과 물리학 모든 것은 따지고 보면 에너지의 형태 변화입니다. 에너지가 어떻게 바뀌는가, 사람이 뭐냐? 에너지에요. 사람이 에너지다. 사람이 병을 고칠 때는 에너지를 제 때에 공급해 주면 살고, 에너지를 공급 못해주면 죽고, 그런 거예요.
그리고 그 에너지라 하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사람을 분해해 보면, 단백질로 되어 있지요. 단백질을 분해해 보면, 분자로 되어 있지요. 분자 깨지면 원자 나오지요. 원자 조사해 보면, 원자는 전자와 핵으로 되어 있지요. 핵은 강력과 양력과 전기력과 중력, 이 네 가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다 되어 있어요.
사람들은 자연과학에 의하면, 우주에 대한 신비감이 삭 없어지는 이유가 지구로 날아오는 유성 있잖아요. 유성 보면, 야~ 이거 우주에서 날아온 것이기에 지구에 없는 거다! 전부다 이리 생각했잖아요. 막상 하늘에 뜬 유성을 조사해 보니까, 에·~ 지구에 있는 거예요. 지구에 있는 금속이에요. 그러니 이 말은 뭐냐 하면, 지구 밖에 것이 지구 내부에 있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지구 내부의 자석이니까 자장이 생기고, 자장이 생기는 것은 지구 내핵과 내핵이 돌아가면서 거기서 마찰력생기고 거기서 금속 내에 자장이 밖으로 퍼져서 자정, 자석부터 해가지고 태양에서 날아온 우주선도 차단시켜 가지고 생명을 보존하게 되는 이렇게 설명이 돼요.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놀라운 사실은 하늘에서 날아온 유성 있잖아요. 분명히 지구 밖이라고 생각했는데, 조사해보니까 세상에 지구 안에 있는 내부와 똑같아요. 밑에 있는 화석 재와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바깥에 나가봤자, 새로울 게 없는 거예요. 그러면 금속 가운데 철이라 하는 것은 처음에 빅뱅시대부터 시작해서 수소와 헤롯부터 해서 굳히고, 굳히고 해서 아주 단단한 금속이 최고의 금이거든요. 나중에는 철의 화합물이라든지 제일 강한 금속이란 말이지요. 금속도 여러 가지 있지만 그렇게 볼 때, 전부 다 에너지로 되어 있다 말이지요. 에너지로 단단히 굳혀져 있으면 그게 다 힘이 되고 그게 풀어지면 파동이 되고 헤엄치는 거, 빛이라 하는 것은 입자가 되지만, 파동으로 날아오고, 빛이라 하는 것은 단단한 태양 같은 것이 팡하고 깨질 때, 빛 에너지가 오니까 세상에는 에너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교육하는 사람에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렇게 납득이 되도록 단계를 밟아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단계를 걸칠 사다리가 성립이 안돼요. 에너지로부터 시작해서 에너지의 변형들이 하나는 토끼가 되고, 하나는 코스모스가 되고, 하나는 인간이 되고 그런 거다 말이지요.
그래서 20세기 초에 공산주의 되고 난 뒤에 종교를 아주 핍박했어요. 신을 가르친다 해서. 공산주의는 종교가 아편이라 해서 어떻게 했냐 하면, 일요일도 없애기 위해서 9일 일하고 하루 놀게 했다고요. 반발이 너무 심해서 다음부터는 6일 일하고 하루 놀았지만, 처음에 스탈린이 그런 짓 했거든요. 그래서 종교 없앤다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신을 언급을 하려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하는데 이 지상에서 지금까지의 논리가 과학시대의 논리가 없어졌어요. 없어요.
옛날에는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전부 다 “아이고, 신이여!” 이렇게 나왔지요. 번개가 친다, 벼락이 친다, 그건 신의 노하심이라고 요한계시록에 나온다 말이지요.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벼락과 지진이 일어나는데. 그런데 미국의 3대 대통령 프랭클린이 피뢰침을 발견했어요. 하나님의 진노를 잡아버린 거예요. 헨리포터와 똑같아요. 그야말로 마술사에요. 하나님의 벌을 잡아버렸네요. 그러니 그때부터 신이라 하는 것은 잊자, 신이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도외시하고 남겨진 신이 있다 하면 그 신이 남겨준 이것을 인구가 밥 먹고 사는데 어떻게 필요할까 하는 그런 유용물, 실용주의지요. 그걸로 가는 거예요.
가다 보니까 인구는 많아지잖아요. 인구가 많아지니까 인구를 먹여 살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인구를 먹여 살리는 방법은 2가지 방법밖에 없어요. 하나는 기술과 과학의 발전밖에 없습니다. 과학과 기술이라 하는 것은 뭔가 필요할 때,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아닙니까? 필요하기 때문에 발명되는 거예요. 아프리카 토인들한테 컴퓨터 줘 봐요. 소용도 없는 거잖아요. 많은 인구가 증가함으로 말미암아 에너지가 필요했고, 그 에너지가 드러나 있는 노천에 나와 있는 석탄만 캐다가 기술이 발달해서 뚫기 시작했고 뚫어보니까 기름까지 뚫려 버렸네. 옛날부터 기름은 있었어요. 나왔는데 그 기름을 사용할 줄 몰랐어요. 중국 같은 경우에 석탄만 사용하다가 기름도 사용하자, 해서 그 다음부터 기름을 정제하는 방법, 암모니아 필요한 것, 이런 것을 발견하고 그 다음부터는 많은 사람이 옷 입기 위해서는 섬유 재단질 하다가 섬유를 추가 발행해서 그걸 제트기처럼 박아버리니까 완전히 애들이 하루에 16시간 이상 앉아서 재단하다가 대산업혁명이 되고, 산업혁명이 발달하면 금융자본주의가 발달하고, 금융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면, 노동하는 사람보다 자본가진 사람이 모든 정권과 모든 주도권을 쥐는 이 시대가 바로 자본주의 시대가 아닙니까?
신으로 가는 다리가 없다는 것을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신으로 가는 다리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창세기27장에 보면, 야곱은 신을 어떻게 봤습니까? 꿈을 꿨잖아요. 꿈을 꿨는데 야곱은 어떻게 신을 봤습니까? 꿈에 사다리가 오지요. 사다리. 그 사다리가 바로 요한복음에서 내가 바로 야곱의 자리이고, 인자위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거예요. 사다리를 내려주신, 천사를 보내주신, 그 분이 왔기에 여기는 일반적인 공간과 다른 공간이 생겼는데, 그 공간 특수한 공간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건을 일으키는 그 공간, 예수님이 함께 있는 그 공간, 새로운 공간이 발생되는 겁니다.
다른 공간에서는 아까 이야기한 에너지만 있으면 살고, 에너지가 없으면 죽는다, 돈을 가지고 양식을 제공해서 우리 속에 에너지 제공할 때, 에너지가 오게 되면 우리 세포에서 그걸 분해해요. 미토콘드리아에서 분해해서 우리의 열량이 되고 그 열량으로 모든 세포가 원활히 돌아가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은 처음부터 기계고, 그 기계는 에너지만 주면 그 기계는 돌아가게 돼 있어요. 그게 인간이에요. 그런데 그 자체를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은 말씀이 없는 상태기 때문에 죽었다고 보는 겁니다.
결국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관계성’입니다. relation. 관계성.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성. 야곱이 사실은 죽은 인간인데, 자고 있는데 하나님이 사다리를 보내 줬지요. 그 사다리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은 누구였습니까? 야곱의 형님이었고 야곱의 아버지였습니까? 천사라니까요. 천사. 천사는 에너지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천사가 배고파서 밥 달라고 하는 천사 없어요. 천사가 무슨 밥을 먹습니까? 사람이 죽고 나면 뭐와 같다? 우리는 천사와 같은 거예요. 죽으면 천사와 같은 거예요. 천사가 되면 시집도 안가고 장가도 아니가요. 애는 아예 없고. 애를 낳을 필요도 없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고 이야기했어요. 너희들 왜 그걸 몰라, 너희들은 자꾸 천국가가지고 시동생하고 형수하고 결혼했는데 누구의 남편이 되겠는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데 그런 소리는 이 에너지 세계, 이 세상에서나 그 소리 통하라는 말이지요. 부부사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만 가시적으로 임시적으로만 갖는 관계입니다. 두 분 사이좋게 지내도 할 수 없어요. 이 세상에서만 사이좋지 천국가면 다르겠지만.
흙에 속한 것은, 우리가 흙이라는 말은 그냥 흙이 아니고 말씀에 입각해 볼 때, 흙이라는 거예요. 자꾸 말씀을 가위로 잘라 버리고 흙이라 하니까 이것은 괜히 흙이라 해서 괜히 신자인 것처럼 유세떠는 거와 똑같습니다. 요즘 들려오는 소리 보면, 하나님도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 믿기로 해서 교회를 만들어요. 한국교회 다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 안 믿습니다. 안 믿고 뭘 기다리는가 하면, 자기가 성도라고 합니까? 뭐라고 합니까? “기준! 해서 나 하나님 믿는데 같이 믿을 사람 손들어 보세요?” 해서 계모임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 믿는 사람을 원하고 있지 예수님을 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제 말 이해하겠어요?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 믿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거예요. 왜? 외로우니까. 사는 게 외로우니까. 그리고 남들과 만남을 통해서 나의 존재가치를 확정짓고 싶어서. 이 이야기는 여기서 안 하겠습니다. 인간은 타인을 통해서 자신을 재정립한다고. 혼자 있으면 외롭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누군지가 허전하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모으게 되면 그 속에서 “아! 나는 이 정도 레벨은 된다고 스스로 자기가 기대했던 자아를 되받아 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 만들기 또는 교회 다니기 하는 겁니다. 안 믿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주님 사랑, 주님 이야기하면 화냅니다. 교회 이야기하고 우리교회 재미있다고 해줘야지,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하면 화를 버럭 냅니다. 그래서 그냥 모이려 하니까 미안하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 때, 예수 믿는 사람이다, 그 규칙을 정해놓고, 법을 정해놓고 그 법대로 지킨 사람들은 우리 예수님 믿는 사람이라고 천국 간다고 확정짓자, 저희들끼리 그런 머리 맞대고 연구하는 거예요. 외롭지는 않지요. 하지만 그래 가지고 그게 사다리입니까? 인간들이 사다리 될 수 있어요? 사다리 되지 못하는 인간 믿어놓고. 그렇잖아요.
성령의 역사라 하는 것은, 육과 영을 구분하는 일을 해요.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성령은 무슨 일을 한다? 육과 영을 구분하는 일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오해하기를 성령이 오시면 영의 일을 한다, 하는데 육과 영의 일을 구분하는 일을 한다니까요.
육과 영의 일을 구분해서 “아, 이게 육이고, 이게 영이구나!” 구분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의 육은 뭡니까? 우리의 가까운 육이 뭐냐, 자식과 남편과 아내 그 사이지요. 우리가 울고불고 하는 것은 주님 십자가 때문에 울고불고 안 해요. 평소에.
지 자식 성적 내려가고, 웃는 것도 지 자식 잘 되면 웃고, 전부 다 육적인 거예요. 그게 육이라고 지적해 주는 것이 성령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루, 하루 무슨 재미로 삽니까? 영 때문에 삽니까? 육 때문에 삽니까? 육 때문에 살잖아요. 육이 나를 만족 시키면 우리는 웃고, 육이 나를 실망하게 되면 우리는 울고, 왜? 나도 거기에 같은 육이니까. 바로 그게 육이라고 오호라, 그게 곤고한 사람이라고 그게 사다리가 끊겨진 상태라고 알려주는 거예요. 그렇게 찾아서 알려주면 그것이 유일하게 사다리가 되는 거예요. 천상의 사다리.
아까 이야기한 야곱 해석해 봅시다. 야곱이 잠을 자는데 사다리가 왔잖아요. 야곱은 또 육으로 오해하는 거예요. “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내가 여기 또 오게 되면 이 장소가 하나님과 유일하게 통하는 어떤 UFO와 통하는 유일한 비밀, 서로게이트 영화 같은, 영적인 세계와 유일하게 통하는 그런 채널 터널 같은, 그 장소해서 그것을 돌을 취해서 기름을 붓고,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다른 것과 차별된 기름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별된 기름을 붓는 거예요.
옛날부터 기름을 부으면 독특한 특수성을 띤다 하는 것이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뜻이 뭐예요? 기름 부음을 입은 사람, 다른 사람과 같은 취급 받지 마라, 특수한 분이다. 그 분한테는 신의 계시가 떨어진다. 이거거든요. 기름부음으로 해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해서 내가 여기서 제단을 쌓겠습니다, 이리 나온다 말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할 때에 제단을 드린다 할 때에,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십일조 드린다는 것은 아버지와 같은 계열입니다, 이런 뜻이에요.
아브라함이 하늘에 속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 드렸거든요. 유튜브 십일조 했거든요. 멜기세덱과 유일하게 통하는 것, 그런데 그 야곱이 돌아올 때는 야곱으로 돌아오지 않아요. 야곱은 죽어요. 사람을 죽이지 않고 구원하는 방법은 없어요. 모든 사람을 죽여 놓고 구원해요.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나는 죽고, 내가 아닌 딴 사람이 되어서 지금 주님한테 은혜 받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그런데 육에 속한 사람은 “아이고, 오랜 간만이다. 니 고등학교 몇 회지?” 하고 그 쪽에서 육으로 나오지요. 아이고 오래간만이다. 그렇잖아도 해서 주머니에서 청첩장 꺼내지요. 우리 딸 치우는데 온나 하지요. 보험 하나 들고.
야곱은 죽어요. 돌아올 때는 죽은 야곱으로 돌아오는데 죽은 야곱을 살려내는 것은 야곱의 본인의 기대나 희망은 버리고 이스라엘이란 이 새로운 이름의 장착된 그것이 하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구와 연결되어 있느냐, 장래 오실 메시아,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어요. 그러니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내가 여기 육이 있는데 누가 나를 붙잡고 당기는 그 이름이 내막을 조사해 보니까 하늘에 계신 승천하신 예수님과 엮여져서 질질 끌고 다니는 거예요. 야곱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야곱의 운명은 없고, 무슨 운명이 있느냐 하면, 야곱의 언약이 제공하는 운명만 있습니다.
야곱의 언약이 제공하는 운명을 저 위에서 정체는 들어나지 않지만 어떤 어르신네가 계시는데 그 어르신네가 야곱의 언약을 완성하실 분입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야곱의 언약을 이룰 사람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속에는 이스라엘이란, 야곱이란 몸체의 껍데기 이스라엘에 진짜 이스라엘이 들어있지요. 그가 누구겠습니까? 그게 예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은 누구의 이름이에요? 야곱의 이름이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신과 인간이 이긴다는 것은 예수님이 장차 기능과 관련되어 있는 이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겁니다.
자, 봅시다. 특수성, 지금 물리학을 계속하는데. 야곱은 에너지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적 분석에서는 야곱을 아무리 조사해 봐도 실체로 분석해 봐도 태워보면 열량 나오지요. 열량이 나온다 하는 것은 평소에 에너지가 신체적 세포로 형성되어 있다가 태워버리면 이것이 재라는 뼈라는 형태로 바뀌면서 그 중에 소비된 소모된 열량만큼은 열과 연기로 공기 중에 퍼져 버리지요. 그러면 그 에너지는 우주에서 밖에 나갑니까? 안 나갑니까? 안 나갑니다. 그걸 에너지보존의 법칙이라 하는 거예요.
에너지보존의 법칙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윤회설과 비슷하게 돼요. 그 에너지가 다시 진화하게 되면 쥐가 될 수 있고, 고양이가 될 수 있고, 낭만 고양이가 될 수 있고, 소가 될 수 있고, 저처럼 연탄재가 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 말라하는..... ㅎㅎ 인간은 에너지의 응축이니까.
그래서 스탈린은 사람을 죽여도 1,500만명 죽였어요. 세계 기네스북에 올라야 돼요. 자기 백성을 1,500만명을 죽인 거예요. 왜 죽였느냐, 아이~ 금속인데 뭐, 물질인데 뭐, 종교를 없앤다 했지요. 종교를 없애버리면 인간은 그냥 물질이에요. 인간은 흙이라 할 때는 반드시 언약적, 아브라함 야곱의 언약,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되어서 흙이라 해야지 그냥 이것 때문에 흙이라 하면 에너지 덩어리의 흙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흙이라 하는 것은 하늘의 형상, 흙이 아닌 형상을 염두에 두고 흙이라 하는 거예요. “너는 흙이야.” 하는 것은 욕하는 게 아니고, 언약 적으로 봐서는 “너는 희망 있어.” 이런 뜻이란 말이지요. 너는 주님께서 말씀으로 흙 되기에 흙이 되게 하신 말씀이 있다면 그 흙된 그것도 말씀의 능력으로 하늘의 형상, 주님의 부활된 모습으로 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그 말씀 풀이하려면 1시간 이상 걸립니다.
예수님께서 말장난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앞에 용어 죽어서, 살아서 같은 개념이 아니에요. 같은 개념 같으면 말이 안돼요. 니가 무릇 죽어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게 그 용어가 같은 용어로 배치할 수가 없어요. 죽은 인간이 뭘 믿고 살아 있으면 믿을 필요가 없잖아요. 이미 살아있는데 왜 믿어요. 그렇잖아요. 성경 그 말씀 듣고. 이미 살았건만 챙길 건 다 챙겼는데. 이미 영생 얻었는데 무슨 예수를 믿어요. 영생 얻었는데. 맛있는 생명나무 따 먹고 있는데 뭘 또 예수 필요해요. 따 먹고 난 뒤에 "예수님, 어떻게 따 먹으면 영생 얻어요?" 이런 말 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면 예수는 예수고, 볼 일 보러 가고, 나는 영생 받고 천당 가고, 이게 바로 선악과 사고방식 아닙니까?
그러니 선악과 사고방식으로 성경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영생 얻기로 교회 오는 것은 이거 문제 있어요. 말씀에 입각한 사람이 돼야 되는데 말씀이 아니고,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거는 차라리 절에 가라, 절에 가야 돼요. 우리 동네 갓바위나 가세요.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이거는 가게 들어가서 “여기에 혹시 잉크 있습니까? 여기에 혹시 자전거 있습니까?” 묻는 사람과 똑같은 거예요. 동사무소에 가서 “여기 호적등본 떼 주세요.” 이런 거와 똑같은 거예요. 호적등본 떼고 가면 되지, 내가 동장님의 아들 되겠습니다. 이럴 필요 없잖아요. 그런데 교회는 그게 아니고 뭐 떼 내고, 돈 주고, 영생 얻어가지고 챙기고, 이거 아니에요. 그냥 죽여 달라는 거예요. 그냥 죽으면 안 되고 자살 되고, 말씀에 입각해서 죽여주시옵소서! 말씀에 입각해서 죽여줘야 말씀 자체가 예수님에서 완성되기 때문에 완성된 그 말씀으로 우리를 살릴 수가 있는 겁니다. 그 말씀으로.
그 차원에서 오늘 베드로후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베드로후서는 구원 안 받을 사람에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을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에요. 안 받은 사람들은 이거 보고 또 화를 내지요. 에너지로 되어 있는데 무슨 말씀으로 관계있는가?
여기서 좀 더 해 봅시다. 이제부터 어려워요. 하늘과 땅, 말씀인데, 이 말씀을 바로 언약이라 했지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하늘과 땅과 물이 다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보면, 물에서 분리된 게 땅인데 임시적으로 다시 물이 땅하고 합쳐버리니까 땅이 없어졌지요. 물속에 잠겨버린 거예요. 그걸 가지고 창세기 6장에 언급해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이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땅이 물속에 잠겼다. 이리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말씀은 누구라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이라 했지요. 그래서 머리 좋은 사람들은 생각하지요. 하나님의 하는 일은 전에 홍수 내리신 그 분이 바로 "아!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구나!" 더 소개해 보면, “천지창조 하신 분도 예수님이구나!” “그리고 예수님께서 천지창조만 하신 게 아니고 노아 때는 물로서 땅을 덮어버린 것도 예수님이시구나!” 그 다음에 제일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신 일 중에서 천지를 창조하는 것과 물로서 세상을 심판하는 요소가 예수님이 하신 일속에 이미 내장되어 있다는 것을 감 잡을 수가 있어요. “아, 예수님의 하시는 모든 일에는 그 안에 천지창조도 담겨있고, 노아홍수 담겨있고,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담겨있고, 전부 다 예수님의 3년 동안 생활 가운데서 그게 다 안에 내장되어 있고 감추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다음 말씀,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다.” 이 말은 이게 헛소리가 아니고 이게 허풍떠는 소리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걸 이미 노아홍수를 염두에 두고 예수님이 제공한 마지막 기적은 뭐가 있느냐,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었다 하니까 우리는 뭔가 별난 이벤트 벌이는 줄 알았어요. 주님께서 오버한다. 잔소리하면 우리가 잔소리 들어서 지을 건 짓고 좋은 관계가 되는데, 예수님께서 덜렁 죽어버리면 우리가 선행을 해야 될 그 자체가 차단돼 버리잖아요.
예를 들어서 애가 시험을 쳤는데, 두 과목 모두 100점을 못 맞고 90점을 맞았다. 90점 맞으니까 엄마 성에 못 차지요. 애를 불렀어요. “애야, 네가 100점을 맞아야 되는데, 우리 집은 그런 적이 없다. 내가 도저히 못 참겠다.” 하고 약봉지 꺼내서 먹고 퀙 죽어 버렸다. 갑자기 죽어버렸다. 애는 엄마가 너무 오버하는 거예요. 지금.
매일 공부 잘 하라 라든지, 틀린 문제는 다시 봐서 다음에는 틀리지 말라 라든지, 이렇게 뭔가 대안을 제시하고 앞으로 더 나아질 비전을 제시하고, 차근차근해서 좀 하면 잘할 수 있어, 이것만 고치면 돼, 하고 희망을 제공하는 것이 그야말로 어른된 도리인데, 90점 맞았다고 피 흘려서 죽어버리면, 그러면 자식은 뭘 해요? 죽은 엄마 뒤치다꺼리 하면 되겠어요? 보험 하나 없고, 뭘 해야 되는 돼요?
예수님 돌아가셨잖아요. 십자가에. 그러면 우리는 뭐 해야 됩니까? 이 이야기부터 들어야 되는데. 기껏 한 게 장례예요. 막달라 마리아하고 마리아하고, 아리마대 요셉이 기껏 한 게 뭡니까? 시체를 독수리에게 뜯어 먹힐 수는 없다 말이지요. 죽은 자의 고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잖아요. 예의가 아니다 말이지요. 그래서 시체 달라 해가지고 무덤에 넣었잖아요. 손 털었지요. 무덤에 넣었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그런데 그 죽은 예수님의 천사가 방문할 줄이야. 에너지가 방문한 게 아니고, 위치에너지, 열에너지, 진동에너지, 에너지가 아니고 단백질 탄수화물 이게 아니고 지방질이 아니고 칼슘이게 아니고 프로폴리스 주사 놨습니까? 이거는 막달라 마리아가 기도한 게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마사지 한 게 아니에요. 그냥 돌문으로 가둬둠으로서 인간의 할 도리는 끝났어요.
우리의 구원은 내가 할 도리가 끝났을 때, 비로소 구원이 보입니다. 주님의 공로입니다. 내가 할 도리, 십일조, 헌금, 봉사, 기도, 교회참석, 온갖 짓들을 다해도 그게 바로 능력이 안 될 정도로 불신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불신중의 행동이라니까요. 교회 다니고 하는 모든 것이 자랑 질 하는 거, 구역예배 참석하는 거, 모든 게 불신, 안 믿어져서 환장한 것들이에요.
요번에 청도에서 특강했잖아요. 우리 몸이 기록이란 말 했잖아요. 우리 몸이 기록이에요. 우리 몸에 재봉틀로 박는 거예요. 주의 말씀으로 마구 박히는 거예요. 제가 그 이야기할 때 했잖아요. 욥은 단시간에 보답 받았지요. 우리는 90평생 상처가 찢어지고 째지고 온갖 질고로 롤러코스트를 타고 있어요. 수련회에 참석하면 따라와서 데려가려 하고. 온갖 것을 다 겪는다고. 욥은 단시간에 했지만, 우리는 천국 가는 걸 이미 결정됐기 때문에 한평생 걸쳐서 주님의 은혜 받은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의 은혜를 받았으니 뭐로 보답할꼬? 보답하지 마! 뭘 보답해! 찢어지는 것만 남아 있는데. 뭘 보답해요? 산다는 자체가 남에게 피해주는 죄인인데. 살아있는 자체가. 뭘 보답해? 보답 못해서 그것이 너무 허풍이다. 보답할 생각 말고 주께서 쥐포 찢듯이 하시면 찢어지세요. 어떤 날은 환란, 어떤 날은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모든 것이 찢어져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영적인 사람은 뭐냐, 내 일상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게 뭔가 취소되지 않는 게 있어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동안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는 이런 보배가 그동안 우리 육적인 것에 때가 너무 겹겹이 쌓여서 잘 안 보였던 거예요. 보이지를 않아요. 귀한 것은 받아놓고 너무 세속적인 버릇이 남아가지고 완전히 질식하도록 쌓여서 되도 않는 것이 울고불고 하고 있어요. 우리는 안 울어도 되는데 울고, 웃어야 되는데 울고 그래요.
그래서 차라리 물로 그냥 심판 받아도 그것도 환난이라면 그것도 괜찮고, 환난에서 유황불 떨어져도 노탱큐 상관없어요. 괜찮아요. 오히려 우리의 신상 털기 백날해도 괜찮아요. 다 털려도 괜찮아요. 진짜 나의 나됨은 내가 나에게 관리해서 내가 되는 게 아니고 나 때문에 손을 다 털어내니까 정말 나의 나됨은 이스라엘 됨은 주의 언약에 의해서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아버지가 택한 자를 구원하는 것처럼, 나도 내가 택한 자를 구원하고, 아버지가 택한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살리는 그 손길을, 사실은 우리의 저 밑바닥에 가있어서 우리가 잘 느끼지를 못해요. 그런데 집안에 우환이 있다든지 누가 하나 죽던지 이리하면, “아~~ 인생 햇빛과 공기 내가 세금내서 얻은 게 아니고, 잘 때도 쉬지 않고 뛰는 심장은 내가 자면서 꿈속에서 마사지해서 사는 게 아니고, 내가 발걸음 세는 것도 하나, 둘, 셋, 넷, 세는 것이 아니고, 머리카락 빠지는 것도, 나의 나됨은 주의 은혜지 내거라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남의 것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이리 봐도 다 주의 것이에요. 근육이 울퉁불퉁해도 다 주의 것이에요. 자, 물로 심판했다하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 것들은 가라, 천국가지 못하는 것들은 가줘! 해서 씻어내는 거예요. 다시 물밖에 없었던 세계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땅은 취소가 되지요. 땅은 없는 거예요. 물밖에 없지요. 물속에 살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물이 땅 되면서 사람 살았잖아요. 그러니 “인간들아! 니가 땅이 없었을 때를 생각 못하고 있구나!” 땅이 없었을 때를.
그러면 우리에게 물을 줘놓고 왜 뺏어 가는가, 물이라 하는 것은 너희들이 원한다고 해서 물이 있고, 원하지 않는다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물은 말씀 자체를 이루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이걸 도약해서 말해 버리면 언급하면, 물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옛날에 물이 한차례 땅을 덮었던 겁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적이 뭐라 했습니까? 요나의 기적이지요. 십자가의 기적이지요. 십자가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옛날에 한 때, 물은 땅을 덮쳐야 했던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발생되는 것은 언약의 위대성, 노아방주의 위대성, 그 노아방주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노아 때 만들었다면 지금은 방주가 아니고 어떤 배 모양이 아니라 십자가 죽는다는 거예요.
십자가에 죽는다는 이 사건은 우리 눈에 안 보입니다. 왜냐 하면 옛날에 있던 사건이고 거리가 멀고, 한국에서 너무 머니까 십자가 있어도 큰 망원경으로 보려 해도 잘 안보여요. 그 십자가를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이 보이지 않는 이미 지나가버린 한물간 십자가를 지금 현재의 것으로 성령께서 너희 속에 십자가를 심어줘 버리면, 니는 십자가 안에 존재한다. 니 안에 십자가 있고, 십자가 안에 니가 있다. 나는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노라.
그래서 그 사람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의미가 뭐냐, 로마서 7장, 8장, 9장 죽 설명해 놨어요. 그래서 사도바울 편지가 어려워요. 십자가란 그 사건을 설명하는데 그 십자가란 설명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특이한 몸과 인간의 흙에서 만든 몸과 몸이 결합할 때, 십자가로만 결합이 된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결합이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십자가로만 결합이 되느냐, 그것은 우리의 몸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보여줘야 될 죄인된 몸으로 보고, 우리의 의인된 몸은 예수님의 부활하고 난 뒤에 의인된 그 몸을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의 몸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화 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됐다, 에 필요한 사건들이 우리 몸 중심으로 십자가 사건의 이름으로 늘 상 발생되는 겁니다. 이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걸 구체적으로 한다면, “이러니 내가 죽어도 싸다.” 그런데 죽어도 싸다하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또 살려주시고. 요러한 생각들이 매일매일 들게 만드는 거예요. 나는 죽어도 마땅한데, 살려주는 것은 주의 복음을 위해서, 주의 일을 위해서 하라고 지금도 하루하루 살려주는 겁니다.
지금 목회를 몇 십 년하고 성경연구를 몇 십년해도 그래도 참, 역시 어렵고 난해한 게 말씀인데요. 주기도문에 보면 이런 게 있지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할 때, 왜 일회용인가, 열흘 치는 왜 안 되고 한 달 치는 왜 안 됩니까? 왜 일용할 양식입니까? 그게 뭐냐 하면, 주기도문 안에 출애굽 정신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출애굽 정신을 담아버리면 출애굽16장에 보면, 거기서 매일같이 뭐가 내리지요? 만나가 왔지요. 왜 만나를 이틀 치를 안 주는 거예요. 참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이틀 치를 안 주는가 하면, 만나는 만나가 아니고 말씀이라는 거예요. 신명기8장에서. 그걸 양식으로 생각하면 오해라는 겁니다.
그러면 같은 만나를 먹어도 죽어요. 만나를 먹을 때마다 이거 말씀이다! 하면 사는데, 이건 양식이네, 애굽에서 먹었던 것과는 다르긴 하지만 매일 애굽에서 하루 세끼 먹다가 안 먹으니까. 이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우리 흔히 아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압축된 예수님의 공생이 압축된 그 개념으로 주기도문에 담긴 겁니다. 그 주기도문의 내용은 딴 게 아니에요. 아버지를 이 자리로 가야 아버지가 보인다는 뜻입니다. 너희들에게는 아버지가 없는데 내가 주기도문 내용대로 실현시키는 그 현장에서 내 아버지가 보이고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가 되고 너희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그것은 성령의 처소 안에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3장에 말씀으로 물이 됐다 하는 것은 이것은 물도 치우고, 하늘도 치우고, 언약도 안 들은 걸로 치고 남는 것은 땅밖에 안 남겠지요. 여기서 하늘이라 하는 것은 땅의 연장은 하늘이에요. 하늘은 새로운 하늘이 등장하면 또 땅과 하늘 돼서 새로운 하늘은 그 뒤에 나옵니다.
땅은 창세기3장에 아담이 죄 짓고 난 뒤에 어디에서 쫓겨났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어디로 갔지요? 땅으로 갔지요. 여기서 보세요. 여기서 또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에덴동산은 흙 아닙니까? 땅 아니에요? 왜 에덴동산과 기존의 땅과 왜 구분하는 거예요? 지금도 땅에서 에덴동산을 찾는 작업을 고고학자들이 하고 있거든요. 기껏 찾아낸 에덴동산이 뭐냐 하면, “야~ 유브라데 강의 발원지가 어디일까?” “아, 이라크라” 이라크 가보세요. 테러폭탄 맞으려고. “아니야, 아라랏산 근처일거야” 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야, 시나이반도 그 근처일거야” 이리 하는 사람도 있고, 어쨌든 그걸 찾는다고 봅시다. 찾아보면 “내가 흙이야” 그러니 성경에서 말하는 에덴동산이 아니에요. 그게 뭐냐, 생명나무 과일 없습니다.
인간이 땅의 존재가 돼버리면 그때부터는 인간이 생각한 세계관을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17살 같으면, 17살 애가 생각하는 지가 기껏 보는 세계가 전부예요. 전부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초등학교 애들한테 엄마생일이 되었다. 엄마의 생일이 되었으니까 몰래 선물하는 것이 인형, 브라우니 개 이름 이런 거. 왜 그렇습니까? 지가 기껏 생각한 세계관에서 제일 이쁘고 아름다운 것은 개 인형이거든요. 그걸 엄마한테 하는 거예요. 엄마는 웃기지요.
우리가 나이를 떠나서 우리가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고 초등학생이라고 생각하고 볼 때,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면 그렇게 늙었어요. 은행에 앉아서 지나가는 청소년 애들 노는 거 보면, 현재 자기와 노는 거와 똑같이 자기와 똑같다고 생각하는데 그 청소년 뒤에 어떤 할머니가 지나가게 되면 “아이고, 저 할머니 참 저 할망구 많이도 늙었다.” 하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그 할머니와 동갑내기라고 생각한다면 30, 40대 아줌마 아저씨가 그렇게 어려 보여요.
그러니까 인간의 보는 세계라 하는 것은 지가 어떤 세계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변형이 다 달라져요. 변화가 돼요. 왜냐 하면 인간은 땅에 속해서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곧 말씀이고 자기가 다 전부이니까. 그러니까 이런 입장에서 물은 그냥 물로 나와서 물이고 강은 강이고 바다는 바다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지극히 당연한 거죠. 당연하니까 이 인간은 뭐가 지금 엮이지 않았지요.
말씀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이라 했지요. 말씀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냥 계시는 예님이 아니라 엮어주는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사다리처럼 엮어주는 거예요. 사다리가 완성된 게 예수님이란 말이지요. 인자의 머리위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없고, 성령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예수님 연구해도 그것은 지금까지 지가 경험한 예수뿐이에요. 그런데 그 예수는 예수님 세계, 천국세계가 아니고 지가 생각하고 있는 좋다는 기적을 베풀어주는, 이야기하기 힘든데, 이 이야기하면 쉬울 거예요. 이거 정리하고 해 봅시다. 많이 하고 빨리한다고 좋은 게 아니니까. 아까 최종기적은 무슨 기적이라 했습니까? 요나의 기적이고, 십자가지요. 그런데 육에 속한 인간이 돼버리면 인간의 기적은 사물이나 인물, 자기 자아한테 기적이 눈에 보기를 원하는 겁니다. 기적을. 병이 낫는다든지, 귀신이 나갔다든지, 내 사업이 갑자기 잘된다든지, 애가 공부를 잘한다든지, 눈으로 보기를 원하는 거예요.
요렇게 생각하는 것은 기껏 자기가 생각하는 세계관이 이미 있다는 거예요. 요렇게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지금 머리카락이 점점 빠지는데 제가 육적인 기적이라면 갑자기 머리가 까마지면서 다시 회춘이 되면서 머리가 난다든지, 갑자기 힘이 불끈불끈 생겨서 암벽도 마구 탄다든지, 아니면 육상선수 우사인 볼트가 현재 9초63인데 자기 소망이 9초5라면 갑자기 힘이 나서 9초5뛰는 거, 그거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기적이잖아요. 바로 그런 기적을 원한다는 것은 결국 뭐가 없다? 바로 요나의 기적이 없는 거예요. 이미 기적은 영화 끝났는데.
영화 끝났어요. 영화 끝났는데 지가 빈 영화해서 지가 상상해서 영화관에다가 투사해가지고 “야, 참 잘됐다, 광해군 멋있다, 멋있어.” 이러고 있다 말이지요. 진짜 영화는 다 끝났는데. 예수님 십자가의 영화에 의하면 이 세상은 지옥입니다. 왜냐 하면, 불 심판 받으니까 지옥입니다. 그리고 짐승의 나라에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짐승이 활발하게 우는 사자같이 택한 자도 꼬시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이게 기적이에요. 이걸 아는 게 기적인데.
우리는 자꾸 자기 기적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게 느껴지지도 않고 손에 붙잡히지도 않고 목사가 교회 세워놓으면 만날 그게 기적인지 알고. 돈 많이 있는 사람 와서 헌금 많이 하고, 웅성웅성해서 자기 친목계 계원들 많아지는 거. 자꾸 그걸 기적이라고 보는 거예요. “주께서 함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밤에 나타나셔서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밤에 나타난 꿈까지 내가 관여할 수 없고. 꿈에 귀신이 나타나고 예수가 나타나고 그건 좋은데 말릴 수는 없는데 어쨌든 그건 기적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기적은 이미 영화상영 끝났어요.
성령께서는 이미 마무리된 기적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를 책망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희망과 비전과 보이스 비 앰비셔스! 이렇게 하고 있다 말이지요.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내 사랑은 이루어질 거야, 이런 식으로 하면서. 저 여자만 허락 하소서, 내가 어떤 벌이라도 받을게요. 임재범이 나와서 노래 불러가지고. 고백이라는 거 있지요. 어찌합니까? 하면서 저 여자만 허락한다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해서. 연애할 때는 그렇지, 결혼해보면 저 여자만 내쫓는다면 어떤 짓이라도 하겠습니다, 라고 반대로 나올 텐데. ㅎㅎ
왜 기도해서 병 낫는데 그걸 왜 부정하느냐, 그게 바로 니가 아는 예수 범위, 지어낸 예수, 지어낸 하나님, 지어낸 삼위일체 그 정도예요. 이미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자꾸 마귀가 그런 식으로 육적인 그러한 범주에 머물라고 하고 있으니 그런 거 안 되면 삐지고 또 원망하고, 주께서는 아주 냉혹하게 이 계획 차질 없이 진행시킵니다. 이거는 우리보고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니가 믿든 믿지 않던 니 마음대로 하라, 해서 분리해 놓을 테니까. 그거는 몰랐다는 소리는 하지마라. 주의 계획은 차질 없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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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0121012b-벧후3장5절(물의 심판)-이 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6절,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물이 넘치는데, 처음에 2월 10일에 시작돼서 그 다음해에 2월 27일에 끝났어요. 노아홍수가. 창세기에 읽어보면. 들어가서 당장 온 게 아니고 문 닫자마자 비가 후두둑 온 게 아니고 일주일간 기다리다가 비가 떨어졌고, 비가 40일 동안 그냥 내리부었고, 물이 150일 동안 줄지 않고 꽉 차 있다가, 그 다음에 줄어드는데 150일이 걸렸어요. 물차고 빠지는 데만 벌써 1년이 걸렸어요. 300일. 옛날에는 1달을 30일로 했으니까. 근 1년 가까이 했고. 그 다음에 물 빠지고 난 뒤에 처음에 까마귀 보냈잖아요. 까마귀 보내고 비둘기 3번 보내고, 그리고 물이 마른 걸 알고 난 뒤에 딱 1달 27일을 더 기다렸어요. 땅이 말라야 되니까. 땅이 말랐구나 알고 난 뒤에도 계속 기다려요. 1월 2일에 알았으니까 1달27일 뒤에 방주에서 나와서 번제를 드렸어요.
하나님 앞에 정결한 짐승으로 번제를 드리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표시로 무지개 떴고, 그리고 그 무지개 의미가 내가 다시는 물로서는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겠다, 그러니 이게 뭐냐 하면, 너희들은 모든 게 악하기 때문에 물로서 심판했다. 인간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악했어요. 악한 존재가 땅에 있다는 것은 일종에 함정에 빠진 겁니다. 함정에.
“어, 땅 괜찮네, 형, 우리 여기서 땅에서 삽시다.” 라고 했는데, 물이 넘칠 줄은 몰랐지요.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것도 말씀이 쫓아냈는데, 말씀이 계속 따라왔는데, 이제는 에덴동산 벗어나니까 우리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여긴 거예요. 이 말씀이란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하루, 하루 살면 이게 사는 거야 생각했지, 진정 우리가 누구 안에 갇혀있으며 어떤 구조 안에 갇혀있다는 것을 생각을 못 한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는 사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말씀의 끝이 예수님이 와야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 중간 절차에 그만 인간이 거기에 있는 거예요. 끼인 거예요. 유원지에 가면 구름다리 있지요. 축 늘어진 다리 중간에 가다가 무섭다고 못 간다고 하잖아요. 에덴동산 추방부터 해서 예수님 오실 때 해서 축 늘어진 구름다리 있는데 여기에 중간에 인간이 온 거예요. 와서 에덴동산과 예수님을 모르는 거예요. 말씀으로 된 걸 모르고 그냥 코앞에 눈앞에 있는 거, 재미있는 거 보고, 배고프면 돈가스 시켜먹고, 그게 전부라, 시험 봐서 점수 잘 보면 행복이라, 애 낳고 애 키우고 애 시집장가 보내고 죽으면 이게 전부에요. 말씀 속에서 작용 받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이거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말씀이 말씀대로 티를 내느냐, 하면 돼요. 임무 끝나는 거예요. 손 털면 되는 거예요. 어떤 면에서는 냉혹하지요. 거미줄에 곤충이 말려든 거와 똑같은 신세예요. 앞뒤 분간 못하고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요. 지금 노량진 고시원 마찬가지입니다. 판사, 변호사 마찬가지예요. 세상 철수고 안철수고 다 몰라요.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요. 지가 대통령 되려고 설칠 뿐이지.
여기에 보면, 그렇게 할 때, 여기서 우리가 한 번 봅시다. 물이 어떻게 홍수가 내려졌고, 어떻게 사라졌는가, 그 과정과 불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같은 말씀의 취지니까 공통점이 있을 것이지요. 공통점이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 하면, 결론부터 내려 보겠습니다. ‘죽음 안에서의 삶’ 산다는 것은 죽음에 포위된 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산다는 게. “아이고, 살았어!” 이건 죽음 안에서 에요. 암벽 등반하다 실수해서 죽 내려가잖아요. “아휴, 살았어!” 죽음 안에서의 죽음 유보된 거예요. 유보된 거에 불과한 겁니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늙어 죽지요. 평생을 동영상으로 찍어놓고 빨리 돌려 봅시다. 빨리 돌리면 1분 내에 늙어죽는 게 나오지요. 태어나서 우드드 하다 죽어요. 빨리 돌리면. 그래서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 하잖아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흙이라 하는 것은 흙 성분을 말하는 게 아니고 에너지 덩어리를 말하는 게 아니고 말씀에 비춰볼 때, 흙이고 그리고 하와가 그냥 생명이 아니라 말씀에 비춰볼 때, 생명이라는 사실이에요. 그렇다면 노아홍수라든지 그리고 번제라든지, 무지개 모든 것은 말씀과 엮여서 필요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자재였고 하나의 교육장비들 이에요. 교육 장치들. “자, 이래도 말씀이 없느냐, 이거 보고 말씀 속에 있다는 사실을 파악해라.” 라고 하는 그 설치 장비들이 뭐냐 하면, 번제라는 걸 드렸어요. 번제를 하나님이 흠향했고, 하나님은 안 보여요. 안 보이니까 지상에 있는 것만 나열하면, 번제 드렸고 그리고 하늘이란 이름의 땅, 하늘, 궁창은 땅에 속해요. 무지개 떴고, 그 다음에 지상에 뭐가 있느냐 하면, 초기 율법, 선악과 따 먹지 말라 하는 거 있지요.
선악과 따 먹지 마라는 여기 와서 뭐로 발전하는가 하면, 생물을 피 있는 걸 먹지 말라, 그 죽음은 니가 다룰 성질이 아니다. 죽음이 너를 다루어야지 니가 죽음에 대해서 피동적인, 수동적인 처지에 놓여있다. 필요할 때마다 죽일 테니까 니가 죽은 자나, 니가 스스로 죽는 거나, 남을 죽이거나, 죽은 것을 먹거나 하지 마라, 너는 죽음을 위해서 너가 살아야 한다. 진짜배기 죽음을 위해서 니가 살아 있어야 한다. 왜냐, 번제가 있기 때문에. 번제는 죽음이잖아요. 거봐라, 그의 죽음이 너를 살렸잖아, 왜? 너희는 날 때부터 악한 인간이기 때문에.
물이 홍수가 아니라 매일같이 홍수 맞아도 당연한데, 다시는 매일같이 홍수 내리는 것을 대신해서 번제를 드린 것으로 매일같이 홍수 맞고 있다는 것을 늘 느껴라, 이 말은 니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봐줘서 살아간다. 이 불쌍한 것들아!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깡패들 같으면 뿌드득~ “아이고, 내 주먹이 운다.” 이런 말이지요.
이걸 마태복음 5장 45절에 보면, 내가 선인과 악인에게도 햇빛과 비를 내리지요. 거기에 놀랍게도 악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줘버리면 문제가 생겨요. 뭐냐 하면, 악인인지 선인인지 햇빛 많이 받고 적게 받고가 측정이 됩니까? 안 됩니까? 그걸로 가름이 안 되지요.
그러면 다 같이 비를 받고 다 같이 햇빛을 받았으면 다 같이 선한 사람이라 해야 되는데, 악인과 선인에게 그랬다고요. 비의 혜택을 받으면서도 악인 따로 있고, 선한 사람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뭐냐 말이에요. 그 기준이. 오래 사는 거 안 되지요? 오래 살아도 역시 악인도 오래 살게 하기 때문에. 건강한 것도 안 되지요? 시편73편에 나오잖아요. 내가 미끄러질 뻔했다. 어떻게 악인은 벌 받아야 되는데 저주 받아야 되는데 악인이 재벌3세라, 악인이 더 잘사는 거예요. 늘 행복하고, 죽을 때도 고통 없이 죽고, 세상에 그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처음도 끗발이고, 끝도 끗발이고. 전부 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행복하게 살면서 지옥간다는 거예요.
천국 갈 때는 거지돼 가고, 지옥 갈 때는 실컷 부자 되어 가가지고 거지는 이 땅에서 물 귀한 줄 알지만, 지옥 간 부자는 물이 이만큼 귀한 줄 몰랐지요. 세상에 손가락에 물 묻혀 달라고 그게 얼마나 가겠어요? 불꽃에너지가 얼마나 강한데. 맛보다가 입만 버리는데. “아! 이 맛이었는데. 살아있을 때, 이 맛이었어. 이 물맛이었어.” 그런데 문제는 뭔가 즐거웠다는 것이 현재 없음에 더 고통스럽게 만들지요. 아름다웠던 것 때문에 지금이 더 비극스러운 데요. 차라리 그걸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노래가사에 차라리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괜히 사랑했어. 괜히. 괜히 사랑해서 떠나 가버린 그 사랑이 더 그리워지고. 괜히 알았어. 이렇게 사랑이 아픈 줄 몰랐었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 심판을 내리실 때는 인간은 이미 노아홍수 때, 처음부터 인간은 죽어있었다는 겁니다. 죽어 있는 걸 숨 쉬도록 해주니까 마치 저희들이 살아도 당연한 자격자인 것처럼, 살아도 마땅한 존재인 것처럼, 그렇게 촐랑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떤 글에 손수건처럼 촐랑댄다. 아가책의 머리말로 짧은 글을 썼어요. 손수건처럼 촐랑대고, 레코드판 위에 얹어놓은 바늘처럼, 그게 세상인데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촐랑대다가 자기 나중에 힘 빠지면, 지 풀에 지가 죽는 걸. 인생이라는 것은. 염탐해 보라, 우리 속에 내가 없다는 사실을. 이 비어있는 곳에 아가의 사랑이 넘치기를 바라며, 이런 식으로 글을 썼었어요.
그러니 지금 죽어있는데, 왜 인간은 지가 죽어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말이에요. 노아는 알았지요. 뭘? 번제를 드렸으니까. 이 번제 드린 짐승아! 니가 내고, 내가 니고. 현재 주변에 주의 하나님의 말씀 속에 만들어진 환경 속에 있으면 진실한 내 모습은 너의 운명, 너의 모든 것이 진짜 내 모습이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바로 이 세상에 뛰어 들어 갔다 말이에요. 외계인처럼 뛰어 들어갔어요. 어떤 사람이 낙하산 안 매고 스카이다이빙해서 그걸 신기록 세우겠다고 성층권에서 뛰어내리는 거예요. 대기권을 벗어난 성층권. 성층권에 올라가서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거예요. 그리되면 마하 속도가 음속보다 빠르답니다. 끝에 가서는 낙하산 펴겠지요. 하여튼 세계신기록에 환장했어요. 그 모습이 바로 죄 속에 뛰어든 예수님 모습입니다. 예수님 출생이 그 모습이에요. 이거는 마하보다 더 빠르게. 아기 예수로 태어나서 그걸 세상에 눈치 챈 자가 있었다는 거예요. 아무도 모르는데 하여튼 귀신은 귀신이라, “주여,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왔지요?” 대번에 예수님 알아보는 거 보세요.
“이 분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길을 찾은 분이다!”해가지고 귀신들린 자가 사도행전에 나오지요.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니까 가까이 붙으면서 “ 이분은 구원의 길을 전하는 사람이다!” 우리 같으면 구원의 동업자인 줄 알겠는데, “저리가, 저리 가, 마귀 저리 가!” 계속 따라오면서 하잖아요. “이 악한 인간아, 니 음란한 멸망자니까.” 사람들을 혼동시키기 위해서 “이 분은 그리스도의 종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전합니다.” 하는 것이 우리는 구원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마귀가 그런 소리하는 것은 보탬이 안 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의 구원의 것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식으로 평준화시켜 버리는 거예요. 이 사람은 예수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누구나 예수님 믿을 수 있다는 뉘앙스를 안겨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 믿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되거든요. 성령이 임해야 되는데 성령이 임하지 않고 이 사람처럼 이런 고백을 하게 되면, 그리스도인입니다, 라고 이것을 마귀지어서 그걸 그냥 교육용으로 할 수가 있어버려요.
그러면 교회에서 제자훈련해서 전부 다 성도 다 만들어버려요. 오늘날 교회도 그 짓하잖아요.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성령 안 받고 천국 가는 법은 없어요. 왜 진실로 복음 전하는 사람을 미워하는가 하면,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사기를 안치기 때문에 그래요. 사기를 안치면 사람들은 싫어해요. 대통령 될 후보가 사기를 안치면 표 없습니다. 허경영처럼 국회의원 하면 누가 표 찍어줍니까? 안 찍어주지. 너무 진실하기 때문에 찍어줄 수 없어요. 너무 진실한 것은 너무 깨끗하면 사람들이 거북스럽습니다. 시어머니 깨끗해보세요. 며느리 힘들지요. 이게 뭐야? 먼지가? 이리 나오면, 골치 아픈 거예요. 적당히 사기치고 적당히 거짓말 쳐서 다가서기에 부담 없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짓선지자를 그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사람에게 높음 받는 것은 하나님에게 미움 받는 거예요. 누가복음 16장에 나와요. 바리새인보고 하는 말이에요.
자, 하늘 안 보입니다. 하늘 안 보이고 그냥 예수님이 아기 예수로 왔을 때, 그들이 눈에 보는 것은 그냥 아기예수예요. 그러나 동방박사가 동사무소 가서 아기예수 찾은 게 아니지요. 누가 인도했습니까? 별이 인도했지요. 그 별이 베드로후서1장에 샛별 뜬다 했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지금 우리 성도라는 것이 있을 수 없어요. 없는데, 별이 떠서 성도 만들어 놓고 우리보고 니가 살았던 세상과 니가 새롭게 된 니가 가야 될 세상과 한 번 주님의 나라와 비교해 보면서 이 땅을 마감하라는 거예요. 나그네 생활을 마감하든지 끝내든지 알아서 하라는 거예요.
우리가 그동안 우리를 우리 되게 만들었던 세상의 꼬라지를 보라는 거예요. 그들은 말씀이 없고 니 속에도 말씀이 붙잡고 끌고 가는 거예요. 동방박사처럼. 말씀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죽음의 위력 속에, 죄의 위력 속에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제가 이런 소리를 하면, 부정적으로 본다. 세상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봐서 누가 믿겠느냐, 누가 믿으래? 싫으면 말고.
긍정적으로 해야 사람들이 모이지요. 아는 사람이 하지만, 특히 누가 많이 이야기하느냐 하면, 목사와 관련된 사람들, 일가친척들, 누가 하나 목사 됐다하면 “아이고, 목사 되면 지 혼자는 좋긴 좋은데 아가 셋이나 돼가지고 지가 안 되면 우리가 또 품돈 뒤를 데 줘야지. 목사해서 지가 스스로 하려고 하면 교인들 200명 정도 돼야 되는데 저 인간 언제 200명 되가지고 지 안식구를 먹여 살릴고. 걱정된다. 지는 좋다마는 지는 복음 전하다고 하지 마는 지 남은 일가친척은 밑 빠진 줄 알기 때문에 ”내가 무슨 팔자고?” 이리 나온다니까요. 그게 피에타 아닙니까? “아이고, 예수야! 니는 세상 구원해가지고 니는 참 빛내고 좋다마는 내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죽인 이 어미의 심정을 니가 알긴 아나?” 이게 피에타에요.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비탄, 슬픔, 그런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말씀이 없으면 반드시 이 세상은 일단은 살기 좋다. 죽음? 어디 죽음 있는데? 죽음 없어. 그런데 하나님이 역설적으로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아름다운 무지개로 보여준 거예요. 이게 얼마나 역설입니까? 그토록 아름다운 무지개, 실은 극도의 아름다움 이상으로 실정은 현실은 극도의 처참이라는 거예요. 극도의 처참을 극도의 아름다움으로 묘사한 겁니다. 그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으로 묘사될 수 있는 것은 니가 착함이 아니라 내가 희생해서 내가 니 대신 너희들이 제일 싫어하는, 죽는 걸 제일 싫어하잖아요. 니가 제일 싫어하는, 그것도 죄가 있어 죽으면 들 억울하지, 죄가 없는데 죽음, 흠 없는 양의 죽음이 무지개를 만든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 성전에 보면 무지개가 떴어요. 어린양의 보좌에 무지개가 뜬 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고, 에스겔도 무지개 뜨지요. 하나님의 성전에 무지개가 환하게 뜨지요.
왜 이렇게 훌륭하고 양심적으로 남한테 해코지 안하고 담배피우는 것도 싫어하고, 주차위반한 사람 있으면 지적하고, 꽁초 있으면 다 줍는 이 착한 내가 어떻게 저 사람과 똑같은 죄인으로 합당한가, 이렇게 훌륭한데. 고귀하고 가치 있고 옳은 일하고, 주의 일하는 내가 어떻게 지금 당장 내가 죽어도 당연한 조치인 것처럼, 그것도 그냥 저주받아 죽어도 마땅한 것이 어찌 그런 것인지, 그것은 바로 주께서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어떤 죽음이었습니까? 아름다운 죽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꽃다발 하나 없었어요. 조화도 없었습니다. 완전히 결별이었어요. “마리아야 수고했다.“ 거기까지. 니 선은 거기까지. 이쪽은 이제 천사가 와서 관리해야 돼요. 남양 공원묘지 450,000원 주고 하는 그 거, 그 사람들이 하는 거 아닙니다. 묘지하나 하는데 900만원 주고 하는 그런 거 아닙니다. 끝났어요.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어? 혹시 묘지지기 십니까?” 현대에는 “공동묘지 관리인이십니까?” ”회비 냈잖아요.“ 와 똑같은 거예요. ”아닌데요.“ ”누구신데요?“ ”천사인데요.“ 우리가 이걸 믿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말씀은 말씀으로 우리가 만들어 진 것을 인정하게 되면 믿어지고, 내가 예수를 선택한다면 절대로 못 믿습니다. 우리는 나한테 합당한 이치에 맞는 것만 골라서 선택해서 나한테 유리하다고 싶어서 골라 바구니에 담는 식으로 우리가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말씀 중에서 믿을 건 챙기고, 안 믿을 건 내려 두는 이런 식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수법에 넘어가지 않고 믿든, 안 믿든 그냥 덮쳐버립니다. 대문에서 석고대죄하고 눈이 쌓이도록 다 맞고, 그 이야기 듣고 소녀의 기도 생각했어요. ‘오늘도 무사히’ 이거는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그냥 통고예요. 통고.
자, 그러면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서” 여기서 한 번 봅시다. 왜 불로 사르느냐 말이지요. 왜 불이냐 말이지요. 물은 땅과 관련되어 있어요.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싹쓸이하기 위해서 물을 준겁니다. 그런데 불은 이거는 땅뿐만 아니고 범위가 넓어져요. 하늘까지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위 아래로 완전히 압축이 돼버려요. 하늘과 땅이 날아가 버리면 그 하늘에 걸려있던 해와 달과 별도 같이 날아가 버려요.
이유가 뭐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제 헌 하늘과 헌 땅의 기능이 역할이 마감되기 때문에 그래요. 필요 없기 때문에 그래요. 쇼 끝났어요. 연극무대 끝나고 막이 내리는 거예요. 해와 달과 별이 날아가 버리면, 뭐가 날아가 버리는가 하면, 시간이 날아가 버려요. 그래서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것은 시간이 없다는 것을 지상의 시간으로 이걸 표한한 겁니다. “시간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이 말입니다. “시간이 없어도 시간 따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이 말이에요.
이 말은 성도에게 뭘 요구하느냐 하면, 성도 속에 내장되어 있는 말씀은 성도는 시간에 맞추어서 스케줄에 맞추어서 하루 세끼 챙겨야 하겠지만, 성도 안에 있는 말씀은 들어온 완성은 그런 것은 이미 먹어봐야 죽은 목숨이고, 이미 죽은 우리를 밥 먹어도 죽는 우리를 살려내는 위력이 시간에 부여받지 않고 작용합니다.
그래서 50돼서 죽으나, 51돼서 죽으나 성도한테는 별 의미 없습니다. 아침에 죽으나 저녁에 죽으나 의미 없어요. 아침 10시에 와서 노동하고 죽으나 오후5시에 놀다가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은 품삯은 똑같아요. 전부 다 한 데나리온씩 다 받습니다. 우리 인생은 품삯, 영생 받아놓고 시작하는 인생이에요. 그걸 사도바울은 십자가 성령으로 왔을 때,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 안에 인생을 대신 살아주시는 분이 있어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인생은 이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생을 살기 때문에 우리가 시간 때문에 울고, 공간 때문에 울면, 우리를 나무라지요. 성령이 책망한다고요. “뭐? 뭐? 눈물이 아직도 안 말랐나? 울 일이 뭐가 있다고? 뭐 어쨌다고? 내가 어쨌다고 우나?” 막 나무라지요.
그래서 아까 제가 우리의 인생은 욥이라 했지요. “이러니 태어나지 말게 해주시고, 제 생일을 저주합니다.” 하나님께서 “ 뭐, 뭐, 뭐, 뭐, 내가 어쨌는데? 뭐” 입을 막고 “할 말이 없습니다.” “니가 해를 만들 때, 관여했나? 해를 누구 때문에 만들었는 줄 알아?” “니 때문에 만들었어?” “달 만들 때 니 있었어?” “황무지에 비 내릴 때, 니한테 허락 맡았어?” “이게 어디서 시비야?” “와, 입 벌리고 해보지?” “왜, 잘 났다 해보지?” “없습니다. 없습니다.” “제가 무지한 인간 중에 하나입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망한 백성 중에 하나다.” 이사야처럼.
우리가 인생을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는 접어라, 이 말이거든요. 별 인생 없고, 우리가 기대하는 희망,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제일 기대하는 것이 그거잖아요. 막 멋있어 보이는데 가보면 단풍은 멀리 있을 때나 아름답지, 가까이가보면 별로 아름답지 않아요. 뭔가 모일 때나 아름답지, 낱개는 별로 아름답지를 못해요.
영화배우들 예쁘지요. 민낯해 보세요. 아침에 세수하고 보면 화장발이지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그것도 늙어가고 있습니다. 탈랜트 한 번 오래간만에 나오게 되면 처음에는 못 봅니다. 너무 늙어서. 그것도 자꾸 보니까 이순재도 볼만하지, 처음 나이70넘은 사람 나와 보세요. 저 할아버지 왜 나오지? 하지요. 꾸준히 나오니까 익숙해져서 그 미묘한 차이가 감춰져서 그렇지 갑자기 만나 보세요. 어릴 때 첫 사랑 만나 보세요. 완전 늙어빠졌지요. 하지만 같이 10년 살다보면 못 느끼지요. 아이구, 이쁘다하고 나오지요. 하여튼 뭐든지 장기간 해야 돼요. 장기간.
인기가 빌보드 2등 올라가도 소용없습니다. 시간이 그게 다 헛되고 헛된 것을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그러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아”이 사실을 잊지 말라. 이미 우리 속에 잊지 않도록 내가 조치해 났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것을 잊지 않으려면 하나님 조치가 뭐냐 하면,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세상을 지독스럽게 온 몸으로 체험해야 됩니다. 제가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제일 이해 못하는 것이 십자가를 이해 못하는 거예요.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 혼자 십자가에 달린 그 십자가만 아니고 캄캄한 속에 십자가에요. 십자가를 반대하는 진흙탕 속에서의 십자가를 생각 안 하고 십자가로 온 사람이 다 반대한다는 그걸 환경을 깔고 십자가인데, 그걸 제거하고 십자가만 달랑하면, 이건 연극하는 거나 똑같은 거예요. 연극 무대에.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에 휩쓸려서 주님의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형편에서 십자가가 들려져야 돼요.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제가 로마서 첫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이 약속이란 말을 한 것은 이 세상은 비약속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약속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꾸 자기를 중립지대에 놓고 거기다가 약속을 석류 따듯이 하나 딱 따가지고 집어넣으면 구원되는 줄 알아요. 그게 아니에요. “야, 내가 비약속이구나. 내가!” “내가 주님을 미워하고 핍박했구나.” 이걸 아는 거예요.
두 번째 로마서 설교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왜 모르냐 말이지요. 우리가 믿는 예수는 버림받은 예수예요. 버림받은 예수를 믿겠다는 뜻은 무슨 뜻이에요? 나도 이 세상에서 버림받아도 좋습니다, 하는 그런 의미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 믿고 버림 안 받으려고, 앞, 뒤가 뭐가 이상히 됐어요. 볼트가 안 맞는 볼트라, 맞지를 않아요. 예수를 믿겠다하면서 자기는 버림받지 않겠다, 예수님 버림받은 것은, 니가 버림받을 인간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버림받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 인생하고 내 인생하고 별개 문제라, 예수님은 유대인이고, 나는 유대인 아니고, 이상한 생각이라, 예수님은 대학 안 나왔고 나는 대학 나왔고. 차이나는 게 아닙니다.
‘버림받았다’ 하는 것은 제대로 내가 누군지를 몰랐었는데, 그래서 제가 설교한 적 있었잖아요. 예수님이 오병이어 행하고, 물위를 걸으시고, 병을 고친 것은 전부 다 그런 것들이 버림받는 모습이에요. 버림받는 모습.
주님께서 구원할 때, 그냥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병 주고 약주고 하는 식으로 구원하지요. 처음부터 소경 안 되게 하면 되는데, 소경되게 해놓고 진흙 발라라, 그 대목 보고 그 아저씨 진흙 바를 때, 얼마나 따가웠을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실로암에 가서 “아이고, 찐득 찐득 해라, 아이고 씨~ 병 낫는 것도 좋지만, 이런 짓 안하고 조용히 살면 안 되나?” 우리 이런 생각 들지요. 그게 뭐냐, 버림받아야 될 인간에게 자비가 왔기 때문에 “아, 내가 버림받을 인간이구나.” 비로소 안다는 거예요. 그러니 버림받는 것에 춤춰라 이 말이에요. 내가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내가 죄인된 것을 춤춰야 될 문제를 가지고 이 근호 목사는 “누구든지 이단이라 하고, 죄인이라 하더라.”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 근호 목사 말 들으면 영원히 피폐한답니다. 여기 피폐한 사람 있네요. 다 피폐했어요? 피폐해야 됩니다. 피폐해야 짤 릴 사람이거든요. 피폐 더 할까 싶어서 나간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는 우리보고 구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근거로 해서 구원하십니다. 예수님 방식이 아니면 구원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그것들이 인간들의 인기가 어느 쪽에 쏠리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기적을 베풀었고, 사람들이 노리는 것은 결국 예수님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자기 이익 때문에 그걸로 만족한다는 사실, 니가 나를 따르는 까닭이 뭐냐,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잖아. 그런 식으로서는 천국에 살 수가 없어요. 지만 지 좋으면 뭐합니까? 들어가서 살지를 못하는데. 매일 빙빙 돌면서 “집 좋다.” 남의 집인데.
들어가려면 죽어야 들어가요. 그냥 죽으면 안 되고, 죄인 값을 해서 죽어야 당연하다는 그것을 수용하면서 가야 됩니다. 사람이 아무리 반성 해봐도 반성하는 자기를 아까워해요. 이만큼 반성했는데 이 반성마저 헛되이 하면 난 싫어. 반성하면 반성할수록 반성이 안돼요. 이상하지요? 회개하면 회개할수록 자기를 버릴 수가 없어요. 그동안 회개한 게 너무 아까워서. 세례 받은 것도 아깝지, 십일조 특히 아깝지, 머리에 물 뿌린 것도 아깝고, 성찬식 떡 먹은 것도 아깝지, 떡을 몇 번 먹었겠어요? 일 년에 2번씩 먹어도 얼마나 먹었겠습니까? 피가 다 예수님 피로 다 교체된 거 같아요. 투석을 해도 그런 투석이 없어요. 그런데 그게 전부 다 소용없는 짓이고 오직 예수님 피로만 구원받는다니까요. 우리가 얼마나 쓸데없는데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깡그리 보여주시면서 구원하니 이걸 사도바울은 그게 뭐냐,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감당 못할 정도로 사랑이 우리에게 퍼부어 주는 거예요. 그러니 주님의 구원방식대로 주께서 천년을 하루 같이 살아라, 이 말은 예수님께서 힘든 인생을 살았지만, 예수님은 이런 것은 어려우니까 그려보겠습니다.
예수님 앞에 우리가 이리 있잖아요. 우리 눈에는 뭐가 보입니까? 우리는 예수님만 보이지요. 이리 하면 안 보일 수도 있어요. 베드로가 더 클 수도 있으니까. 키 큰 베드로 앞에 키 작은 안철수 이리 생각하면 돼요. 예수님과 베드로는 뭔가 끊어져 있어요. 베드로가 뭐라 합니까? “제가 목숨 바치겠습니다.” 할 때 “아서라 말아라.”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하고 있어요. 뭐가 천국인지 구분 못하고 있어요. 죽으면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어요. 우리하고 똑같아요. “죽으면 천당 가겠지.” 천국은 그렇게 가는 나라가 아니에요. 인간은 죽으면 자체가 지옥가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과 아버지 관계가 있어요. 그래서 내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야곱의 사다리가 예수님의 인자의 머리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한다고 그랬지요. 아버지 관계라면 베드로는 아들이 아니에요. 아들은 이 분밖에 없어요. ‘예수님’ 제자들보고 하는 말이 아들을 공경하는 자가 아버지를 공경한다. 만약에 아들을 공경하지 않고 바로 하나님으로 들어가는 신은 아버지가 아닌 줄 아시기 바랍니다. 악마지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겁니다. 예수님 거치지 않고 하나님 거치고 예수님 뒤 늦게 아는, 붙여놓는 부록이고, 2000년 기독교신학 다 이런 겁니다. 카톨릭, 개혁주의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은 누구나 안다는 거예요. 참 기가 찬 이야기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세상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만, 우리는 하나님 더하기 예수까지 알아서 그 점에서 세상 사람과 차이 나서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거는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복음 알기는 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요. 설마 하나님마저 거짓이겠나? 거짓입니다. 그 하나님이 거짓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었잖아요. “너희 애비는 마귀다.” 악마를 하나님이라고 섬긴 거예요. 사도바울이 그렇게 예수 믿는다고 핍박할 때, 자기는 하나님께 그렇게 충성을 다 한다고 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핍박하는 짓이었습니다.
동방박사가 찾아올 때, 하나님 있으면 뭐하러 찾아오겠습니까? 바로 아기 예수. 신이시여, 받으시옵소서. 들판에서 그냥 몰약, 황금 드리면 되지, 무엇 때문에 아기 예수 합니까? 그리고 만약에 아기 예수를 성령 없이 받아버리면 아기예수와 하늘과 연결성을 논리적으로 제시해 보세요. 없습니다. 지금도 없어요. 아기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대라, 논리 없어요. 이건 오직 언약 관계예요. 언약 관계.
언약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 아들이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고,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둘만 알아요. 두 분이 다 해버렸어요. 우리는 끼지도 못해요. 성령이 와야 비로소 둘 사이 속에 우리가 끼일 수가 있어요. 베드로는 이것도 모르고 자기 죽으면 예수님 옆에 딱 붙어있으니까, 설마 당신과 나 사이에 불과 몇 센티 사이잖아요. 테이프로 본드로 붙여도 안돼요. 안된다니까요. 안 돼!
성령이 온다는 것은 그 관계를 말씀의 관계, 언약 관계라 하는 겁니다. 언약 관계가 성령의 이름으로 오게 되면 그 아버지와 아들에게 이루어진 것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이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뭘 알 수 있느냐, 모든 것이 말씀으로 돼 있다, 이 세상이 천지창조도 말씀으로, 모든 구체적인 것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사렛 예수라는 33살 먹은 청년을 위하여 된 겁니다. 마하매트를 위하여가 아니라 석가모니가 아니라 나사렛 청년, 신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교회가 너무 몰라요.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를 위해서 라니까요.
신을 위해서 같으면 사도바울이 그렇게 복음 들고 외치지 않습니다. 뭐 유대인과 똑 같네, 기독교나 유대교나 같은 형제네, 이렇게 돼 버려요. 그게 아닙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형제간이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은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뜻이에요. 유대인이. 여호와 믿는 자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들이.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니까요. 신을 아는 할머니들, 교회 다니는 교인들 하나님을 알잖아요. 그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라니까요. 예수님 원수들이에요. “그래도 교회 나가는 게 낫지.” 아이고, 그건 장소이동이죠. 같은 인간이 장소이동 해봐야, 유원지가나, 교회가나 마찬가지잖아요. 산에 갈까요? 교회 갈까요? 너 같은 인간 산에 가나 교회 가나 아무렇게 가나 마찬가지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예배당이라는 것이 하나의 공간에 있으나 산에 있으나 마찬가지지. 아까 했던 우리의 몸이 기록입니다. 우리의 몸이 욥이에요. 욥. 산에 갈까요, 교회 갈까요, 갈등하는 그 모습이 바로 이게 성전이에요. 갈등하는 모습이 성전이라니까요.
그래서 7절 끝에 보면,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여기 경건치 않는다는 것은 이 세상 자체를 그리스도의 안목으로 볼 때, 전부 경건치 않아요. 모든 게.
베드로후서에서 경건하지 않다는 것은 성령을 받아야 경건하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경건해요. 예수는 모르는데 경건하다, 이것은 도무지 예수의 사도가 아닙니다. 그냥 사도가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종 된 사도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그 관계를 가지고 경건이라 하고 그 외는 전부 다 비 경건이에요. 더러운 거예요. 이걸 구약으로 보면 노아처럼 은혜를 받은 자를 의인이라 하고, 나머지는 전부 다 악인 되는 겁니다. 선과 악은 그 당시의 언약의 기준해서 선과 악이 결정되고, 거기에 대비해서 선악과에서 인간들이 상식선에서 계시 받지 않더라도 아는 그런 상식선에서 나온 선, 악 체제와 대결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인간인 이상 로마서2장에 보면 모든 인간이 양심이 있어요. 양심이 있으면 선악을 알게 아닙니까? 그것과 그것에서 기껏 나온 게 유대교밖에 안돼요. 유대교가 그들의 양심적인 입장에서 극단적인 최고의 의로운 자는 바리새인인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가는 겁니다. 깔딱 깔딱 천국지점에 이르렀는데, 여전히 멀어요. 누구든지 바리새인 단계보다 더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바로 그런 입장에서 여기 경건이란 말은 바리새인보다 더 보태라, 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 쪽에서 와버려요. 그럼 예수님에 속한 어떤 인간도 이 쪽 어떤 인간보다도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의인이 되어 버려요. 왜 경건 하냐, 자기 자신을 생각 안하니까 경건한 거예요. 자기 생각해서 자기 반성해 버리면, 경건한 자기를 또 믿기 때문에 아직도 경건이 멀었어요. 늘 경건에 목말라. 완전히 히딩크 같아. “나, 아직도 목마르다.” 사람은 오기가 있어서 경건도 한 번 경건해 보면, 그 쪽에 또 목표가 생겨요. “아니, 아니야, 아직 멀었어.” 더 완벽한 경건, 철저한 경건. 아주 표백제를 달고 다녀요. 채소 씻을 때, 채소 빵구 다나요. “아니야, 박테리아가 있을 거야, 박박 씻어요.” 먹을 게 없겠다. 흐르는 물에 씻어라, 퐁퐁도 못 믿겠다. 유별나게. 예수님께서 “제자 이리 와 봐!” “베드로 이리 와 봐, 이것도 채소야.” 이리 따졌습니까? 주머니에 환경봉투 들고 가는 곳마다 청소했습니까? 가는 곳마다 담배 피운다고 간섭했습니까? 그것 때문에 오셨어요? 주차 위반한다고 딱지 떼러 오셨습니까?
인간들이란 선악의 관계, 그것은 다른 권세차원에서 그래야 돼요. 무질서하면 안 되니까. 하지만 그것은 구원의 능력이 아닙니다. 주께서 기뻐하는 권세는 그게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말씀 속에 우리가 지금 말씀의 작품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들이 납득이 돼요. 이게. 낯설지가 않고, “그랬었구나!” 이런 식으로 “어, 진작 이걸 이야기해주지, 이걸 20살 때 알아가지고 19살 때 알았으면 담배 안 피웠을 텐데, 담배 끊지도 못하고.”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말씀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담배 끊으나 피우나 죄는 마찬가지예요.
그 다음에 여기서 ‘멸망’이란 이야기가 있어요. 멸망의 날은 주님 안에서 뭐가 되느냐, 멸망이 되는 사건입니다. 어떤 날에 멸망이 오는 것이 아니고 멸망하는 날이 그 날이에요. 왜냐 하면, 집주인의 시간 입장 개념과 도둑의 시간 개념과 달라요. 집주인은 언제쯤 도둑이 오겠는가? 2시일까? 2시 반일까? 이래잖아요. 도둑은 지가 담 넘는 시간이 그 시간이에요. 그래서 도둑이 생각하는 시간을 생각하자 그 말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되지요. 아시겠습니까? 지가 도둑이라 생각해 보면, 도둑은 지가 마음 내키는 대로 담 넘을 수 있으니까. 항상 내가 도둑이라 생각한다면, 내 끌리는 대로 담 넘으면 그만이니까. 그러니 도둑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오늘 오셔도 내일 오셔도 괜찮은 거예요. 내가 담 넘는 순간이 그 날이 멸망이에요. 이 말은 우리가 새삼스럽게 멸망 말자, 하는 그런 쨉이, 입장이 안 된다는 거예요. 멸망 받아도 벌써 멸망 받고,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너는 멸망 받아야 돼! 라고 결정 난 입장에서 새삼스럽게 멸망 안 받아야 돼, 언제 오십니까? 기다리겠습니다. 멸망 안 받게. 이런 것은 너무 자기가 주제파악이 안 되고 있다 말이에요.
이미 멸망 받아야 된다는 아는 순간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분리하러 오셨지요. 알곡과 가라지, 가라지와 알곡, 멸망의 때가 와야 갈라지지요. 공부 못하면서 공부 잘한다고 하는 것은 시험쳐봐야 아는 거 아닙니까? 담임선생님이 시험 안치면 공부 잘하는 사람 힘들어요. 빨리 시험을 쳐야 구라라는 것이 드러날 것 아닙니까? 주님께서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 “기다려라. 천년에 하루같이 기다려라, 티 난다. 티 나! 조금만 기다려. 참아라.” 그 이야기 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기다리라는 말은 티 날 때가오니까 기다리라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니 구원에 신경 쓰라는 말이 아니고 “티나 확 나!” 티가 확 날 때, 그 때 감사나 이야기 하라는 말이에요. 재림 때 티가 안 나면 죽어서도 무덤이 열리면서 티 나게 되어 있으니까. 죽음에는 이미 게임 끝났어요. 우리는 죽은 채로 기다리면 돼요. 따뜻한 햇빛 비취는 묘지에 누워서 기다리면 돼요. 꿈꾸고 자든지 잔다 했으니까. 죽을 때는 지루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아브라함 보세요. 아브라함이나 엘리야나 이런 사람들은 지금 편안하게 살잖아요.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주님하고 이야기했잖아요.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팔짱끼고 내려다보면서. “아, 저기 인덕원 모임, 보고 있어, 알고 있어. 까불지 마, 나 안 보인다고.“ 다 보고 있는 거예요. 모세, 엘리야, 베드로도 마찬가지이고. 왜 같은 총회이기 때문에. 히브리서에 보면 같은 총회이기 때문에, 같은 형제이기 때문에 다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이걸 또 이용해서 성도의 기도는 간구라 해서 이상한 소리 하고 있는데, 모든 것이 성자의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기도가 우리를 응답하지 죽은 사람 베드로의 기도가 우리에게 응답하는 거 아닙니다. 나중에 주님의 기도가 힘이 빠져 못 하면, 그 때 베드로에게 부탁하고, 지금 주님의 기도는 생생한데 성령이 말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있는데, 무슨 다른 기도가 필요합니까? 인간의 우리의 기도는 육이 기도 하라 해서 하는 거예요. 또 하라할 때 또 기도 안하면 안돼요. 하라 할 때는 이유가 있어요. 해보면 우리 속에 이런 욕심이 있다는 것을 파악이 되니까 드러내니까 하라 합니다.
멸망의 날 했고요.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9절에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회개라는 것은 반성이 아니고 세상에 대한 저항이다. 그동안 나를 키워준 세상에 대해서 내가 저항하는 거예요. 이것이 나를 죽였다는 거예요. 나도 원래 나쁜 놈이지만, 나쁜 놈에다가 나쁜 분위기가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악마의 세상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욕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를 패역하게 만든 그런 나를 만들었다 하는 것을 분명히 알라 이 말이지요.
그러니 방향이 뭡니까? 주님도 보고 이쪽도 보고 양쪽 다 보는 것이 회개예요. 양쪽 봐야 회개되지 한쪽만 봐서는 회개 안 되잖아요. 10절에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해요. “치, 치, 베드로 지는 우이 아노? 어떻게 아노?” 베드로가 지금 자기 사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성경을 신학자 이름으로 성경을 분석해가지고 이것을 어떤 해석하지 말고 그냥 예수님이 주신 거예요. 그냥 전달하는, 배달하는 택배회사 직원이고. 베드로가 지 개인이 아니고 이거는 뭐냐, 그냥 믿든 말든 니 맘대로 해, 주님은 그냥 가는 거야, 그냥 지금 진행될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믿고 안 믿고가 아니라 그냥 될 뿐만을 우리가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모든 일을 우리에게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진행했사오니 그 진행된 일이 절차가운데서 성령 오셔서 이것이 말씀 안에 있음을 우리가 믿게 되어서 성도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입술을 열어서 이런 사실이 그대로 진행된다는 것을 주위사람에게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