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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121109a-벧후3장10절(불의 사실성) - 이 근호목사
시작하겠습니다. 베드로후서3장10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왜 날이 도적같이 옵니까? 좋게 오셔도 되는데 도적같이 와요. 아! 도적같이! 왜 모르게 오시느냐 말이지요. 도망갈 수도 없는 입장인데.
“도덕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따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난다.” 이리 되어 있어요. 베드로 보고 우리가 물을 거예요. “니가 봤나? 어느 책에서 이리 뽑았나?” 할 수도 있거든요. 니가 하나님도 아닌데 이것은 세상을 부정하는 정도가 아니지요. 세상이 나쁘다, 악하다, 정도가 아니고 세상 자체가 없어진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구라를 쳐도 대충 치면 우리가 믿어줄만한데. 베드로의 이 말은 구라, 거짓말 수준을 능가해서 아예 모든 게 없어지는 걸 믿어라 이 말이거든요. “우리 모두가 없어짐을 믿읍시다!” 없어지는 걸 찬양하면서 박수친다 말이지요. 모든 게 없어지는 걸.
그러면 교회에서 부흥회할 때, 이 본문가지고 한다 칩시다. “이 교회가 없어집니다. 우리 박수 칩시다.“ 와 같은 소리예요. 부흥회할 때, 오전에는 부모를 공경해야 구원받습니다. 해놓고 만약에 오후에 이 설교한다면 무엇이 없어진다? 부모도 없어지면 효도할 대상이 없어지는데 효도는 왜 하는데? 오전에 교회에 충상합시다! 오후에 이 말씀 전해버리면 교회가 있어야 충성하지, 교회가 없어졌는데. 그러니 지금 이 모든 것이 떠나가 버리고. 뭐가? 하늘이.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 지각 동그란 지구 땅덩어리가 뜨거운 불어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 그 땅의 모든 식물과 동물, 인간들이 하는 모든 일이 다 완전히 노출되고 다 드러나야 된다. 이것을 우리가 아주 기쁘고 즐겁게 믿읍시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지요. 이 이야기를 기쁘고 즐겁게 믿으려면 평소에 완전히 미친 사람 돼야 됩니다.
완전 미친 사람 돼야지 그러니까 이 말씀을 기쁘고 즐겁게 믿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여, 어서 세상을 끝장내 주소서!”라는 것이 더도 덜도 말고 오직 기도 제목이 하나, 그저 끝장내게 해달라는 그거 하나, 그냥 끝장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저 세상에 눈에 띠는 것, 안 띠는 것, 다 없애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만 이 본문이 즐겁다 이 말이지요.
그럼 이 본문만 딱 떼어서 앞에 나오는 사도바울 이야기나 다니엘 등 전부 다 대조해 보란 말이지요. 대조를 해보면, 성경자체가 결국은 이거 지켜야 되느냐, 마느냐 할 문제가 아니지요. 성경자체가 소용없는 거지요. 성경자체가 책으로 됐던 것이 폭파하니까 이것이 하늘도 날아가 버리고 땅도 날아가 버렸다. 성경자체는 하나의 시한폭탄, 또는 벌벌 타는 보일러 같아서 성경자체가 책인 줄 알고, 베개로 자기도 하고 이랬는데, 갑자기 폭발해버리니까 불기둥 나와서 하늘이고 땅이고 다 불기운에 다 녹아버리더라, 우리가 평소에 성경책을 베개 삼고 보는 것은 불을 보고 있는 거다 말이지요. “아이고, 불 색깔 봐!”
그러니 성경책 보자, 읽자, 그것도 의미 없고 지키자 하는 것도 의미 없어요. 왜냐하면 성경을 지켰더니만 폭발한 것이 아니고 성경을 지키든 안 지키든 읽든 안 읽든 관계없이 언젠가 때가 되면, 5,4,3,2,1,0 폭발해 버리면 성경자체도 다 날아가 버린다 말이지요. 이에 대한 이야기가 7절에 나옵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이렇게 되어 있지요. 말씀 안에는 무슨 능력이 있다? 세상의 하늘과 땅을 불살라 버리는 위력이 들어 있는 말씀이다. 모든 말씀이.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 게 진짜 말씀을 지키려면 말씀 속에 있는 불이 어디 속에 가야 되는가, 내 안에 있는 불로 이전되어야 말씀 지킨 게 되잖아요. 무슨 말이냐 하면, 불안에 세상을 불 지르는 에너지가 들어있지요. 그러면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말씀을 뚝 떼어서 내 품에 가졌다는 말은 세상을 폭파시킬 위력이 말씀에만 들어있는 게 아니고 말씀을 내가 안았으니까 내 안에도 세상을 폭파할 수 있는 위력을 가졌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내가 말씀을 간직하고 이걸 품속에 가졌다는 말은 시한폭탄을 평소에 쥐고 세상을 돌아다닌다. 시한폭탄을 품고 자전거 타고 오고, 걸어오신 게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 베드로후서 3장 1절부터 지금까지 쭉 읽어보면 눈에 띄는 게 뭐냐 하면, 폭발되기 직전에 우리는 한시적으로 뭔가 대기상태, 또는 말씀이 관찰하는 관찰자 대상의 입장에서 그냥 말씀이 지켜보는 가운데 폭발직전에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짧은 안개 같은 인생을 그냥 하루, 하루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이 뭔가 하면, 불신자는 말씀이 폭발해 온다는 것은 전혀 생각 못하고 자기 영역, 자기 공간을 어떻게 확장하고, 팽창할 것이냐, 여기에만 몰두하고 있지요. 그리고 누가 와서 “쉿! 비밀인데, 이 세상은 완전히 불로 불살라 버린데.“하면 ”시끄럽다. 어디 그런 게 있어?“ ”성경 말씀에.“ ”나, 성경 말씀 안 믿는다.“ 그러면 성경 말씀 안 믿는다고 내치게 되면 남는 게 뭡니까? 오직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그러한 논리와 진리, 그런 거만 덩그러니 남겠지요.
우리가 본문을 시작하면서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첫 번 째를 생각해 봅시다. 말씀에 세상을 불로서 살라버리는 그런 능력이 어떻게 말씀이 갖고 있느냐 그 문제입니다. 말씀대로 되니까 하늘도 땅도 불태워졌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그 능력이 왜 말씀이 갖고 있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①왜 말씀에 파멸의 능력이 있느냐? ② 모든 것이 불로 태워진다면 남는 것은 뭐만 남을까? 불탄 그 공백에 무엇이 등장하는가? 모든 것을 송두리째 훌훌 불태워버릴 때, 그러면 그 현장에 죄도 날아가 버린 그 현장에, 나타나는 게 뭘까요? 예수님의 나라지요. 그렇다면 ②번을 먼저 봅시다. 예수님의 나라가 등장하잖아요. 예수님의 나라를 뭘로 안 들키도록 무엇으로 감싸고 있다는 뜻이 됩니까? 말씀으로 감싸고 있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런데 말씀의 속성은 뭐로 되어 있다? 말씀이 지상과 만나면 결국은 말씀의 본색이 드러낼 때는 불로 나타나니까, 결국은 예수님을 뭐로 감싼다? 불타는 말씀으로 감싸는 것은 창세3장 21절에 보면 생명나무를 뭐로 감싸고 있어요? 두루 도는 불춤 추는 칼로서 화염검으로 사실은 천사거든요. 천사가 자기 기능을 발휘해서 불로서 보호하는 거예요. 이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1023
모세 때 홍해건널 때는 물로서 건넜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똑같이 인용하면서 무슨 바다하면, 불의 바다라, 다른 형식은 똑같은데 물이 뭘로 바뀌는가 하면, 불로 바뀌게 되어 있어요. 15장 2절에 말씀, 불이 섞인 유리바다를 건너가는 거예요. 옛날의 구약 때는 애굽나라, 홍해, 약속의 땅 이리되잖아요. 그런데 신약은 뭐냐 하면, 현재의 모든 세계를 전부 다 어디에 집어넣는가하면, 애굽나라로 다 집어넣어버려요. 몽땅. 전부 다 애굽나라라는 창고에 집어넣고, 그 다음에 세상나라가 애굽나라로 몰려갔으니까 그러면 세상나라 말고는 한 나라도 안 남아 있지요. 세상나라가 안 남아 있으니까 눈에 띄지도 않고 우리는 그런 세계 나라는 없어, 없어, 없다고 한 나라가 결국은 어느 너머에 있습니까? 불 홍해 저쪽 너머에 있는 거예요. 그럼 그걸 우리가 무슨 수로 압니까? 어떻게 경험해야 아는 겁니까?
어려운 거 해 봅시다. 열왕기상19장 11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위가 떨어져나가는 그 정도로 강력한 바람이 있는데 뭔가 경험했어요. 엘리야가 경험했는데 무엇을 강조하는가 하면, 여호와께서는 거기에 계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강력한 바람을 받았다는 것은 여호와가 거기에 함께 있다는 말입니까? 계시지 않다는 말입니까? 바람 불었다는 것을 가지고 여호와를 만났다고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는 거거든요. 그 다음에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한다. “야, 여호와 여기 계시는가보다. 어?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는 계시지 않네.” 이거는 옛날에 했던 방법은 시내산에 여호와 나타날 때, 시내산 전체가 벌벌 떨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났거든요. 그런데 그 지진에도 여호와는 안 계시거든요. 하여튼 하나님은 일관성이 없어요. 똑 같은 방법을 두 번 다시 사용하지 않아요.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같으면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여호와와 대화했습니다. 그래서 신기한 불이면 반드시 거기에 하나님 계신 거 맞다, 라고 누구한테 자부심, 장담을 할 수 있는데 그것도 아니다 말이지요. 계시지 아니하고 불 가운데 세미한 소리가 있는데 보니까 거기에 엘리야야! 하고 불렀다 했습니다. 세미한 소리. 이걸 초월적 돌파라 합니다. 뚫어가는 것, 돌파 하는 것.
인간이 경험할 수 있고,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한계 안에서 인간이 경험한 바람, 지진, 그 어떤 것에도 하나님이 거기에 있다고 확답할 수 없습니다. 그럼 뭐냐, 세미한 소리다. 소리. 분명히 요란스럽고 우당탕탕, 예를 들어서 지금도 허리케인 불고, 뉴욕에 허리케인 들이닥치잖아요. 돌풍불고 얼어붙고 화산 터지고 굉장히 요란스러운데, 지난 가락강의에서 실제로 나타난 것은 손가락 가지고 글씨 쓰는 거지요. 여기서 엘리야 같은 경우에는 세미한 음성. 그러면 결국은 뭐냐 하면, 인간이 불의 바다를 건너서 하나님 계신 곳에 가겠다는 말은 세미한 소리라고 되어있고 손가락이라고 했지만, 지금 손가락 잡으려고 매미채 들고 어느 교회를 찾아다녀야 되겠습니까? 아마 손가락 나타난 교회 같으면 부흥될 거예요. 드디어 우리 교회에 손가락 나타났다. 다른 교회는 우리 교회 목사님은 어제 밤에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 우리 목사님은 진짜 주의 종이다. 왜? 세미한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이미 그건 엘리야 때 다 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 요한 때,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본인들이 예상을 했어요? 안 했어요? 여기에 경건 나옵니다. 경건한 사람만 구원받습니다. 결국 경건이라 하는 것은, 경건의 법칙을 세웁시다. 예상한다? 못한다? 예상 못한다. 이거 하나 원칙을 세워야 돼요. 나는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믿을 거야, 예수님 믿을 만한 장소에 가도 안 계시는 거예요. 왜? 이미 우리가 예상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예상을 10개하면 11번째 나오고, 22개를 하면 23번째 나타나요. 반드시 우리가 예상을 모아 놓은 그 안에서는 주님은 우리하고 상대를 안 합니다.
옷가게 하면 손님이 꼭 이런 사람이 있어요. 없는 것 찾는 사람 있어요. 문방구가도 꼭 없는 거 찾는 애들이 있어요. 지금 주님 오시면 드리려고 온갖 것 준비했는데 꼭 우리 없는 것 찾는다니까요. 주님께서는. 없는 걸 찾아요. 실컷 오실 만반의 준비를 다했는데 기름도 SK기름, 현대오일도 넣고, 참기름, 들기름, 온갖 기름 준비해서 신랑 되신 주님만 오시기만 하면 아쉬운 것 없이 다 준비했는데, 내가 원하는 기름 없네. 하고 가버리면 그동안 준비한, 그동안 지혜로운 다섯 처녀 되겠다고 애썼던 노력이 다 헛수고가 되겠지요. 원칙 하나가 우리가 예상한 것은 안한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엘리야와 모세를 만난 그것은 사전에 모의하고 만난 그런 거 없지요. 사전에 목욕하고 그런 거 없지요. 꾀죄죄한 그대로 선배신앙인을 만났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 좀 깨끗한 거 입고 올 걸 그랬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거기 가니까 더러운 옷 입었다고 닦달하지 아니하시고, 헌금 들고 오지 않은 것도 닦달하지 아니하시고, 전도 몇 명인지 따지지도 않으시고, 지적 안하시고 “오늘은 3명만 변화산으로 올라 와.“ 가보니까 예상 밖의 모세와 엘리야가 있을 줄이야, 그런 미팅은 사전에 언 줄을 준적도 없어요. ”니만 알려줄게. 오늘 변화산 간다.“ 이런 것도 없었다니까요. 그냥 주님한테 따라가니까 그게 하늘나라라, 꼭 오늘날 우리가 주님 따라가는 거와 비슷해요. 항상 예상 못한 쪽으로 인도해 버립니다.
우리가 이건 좁은 길이라고 예상하면 그 길로 안 오십니다. 좁은 길은 생산되는 거예요. 창조되는 겁니다. 우리가 싸잡아서 우리가 거기에 눌러 앉아 있으면 그게 좁은 길이 얼마안가 넓은 길이 돼버려요. 항상 예상 못한 다른 길이 계속해서 번져 나오는 겁니다. 어? 길이 없네, 하면 새로운 길이 나오고, 주께서 자꾸 고시는 거 같아요.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귀신이 꾀이는 거 같아. 점점 가다보면 떠나온 길과 너무 멀러져. 이상한 길로 가는 것 같아.
그래서 결국 세미한 음성이란 뭐냐 하면, 세미한 음성은 다 주의 뜻이 아니고 친히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자립적으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이끄신다는 사실입니다. 에스더가 왕궁의 미스 바사나라에서 미스 진선미에서 진되어서 왕후 되었을 때에, 옛날부터 오디션 있었어요. 오디션 봐서 1등해서 왕비 되었을 때에 내가 한 6개월 뒤에는 죽으면 죽으리라, 예상 못했지요. 그걸로 인생은 불행 끝, 행복 시작으로 더 이상 위기가 찾아오지 않으리라 여긴 거예요. 모든 동화가 그렇지만, 마지막은 뭐로 끝납니까? 결혼이지요. 결혼해서 잘 먹고 잘살았다 하지 않습니까? 백설공주도 결혼으로 끝나지요. 신데렐라도 결혼으로 끝나지요. 춘향이도 결혼으로 끝나지요. 결혼은 전반전도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모든 드라마는 뭐로 끝납니까? 전부 결혼으로 끝나잖아요.
주님이 보여주는 끝은 뭡니까? 결혼이 아니고 죽음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란 말이지요. 모든 드라마는 죽음으로 끝나요. 그것도 그냥 죽음이 아니고 십자가와 함께 죽는 죽음, 제가 지금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세미한 음성도 아니고, 지진도 아니고, 폭풍도 아니고, 화산 터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세미한 음성처럼 나타나는 이야기가 뭐냐, 십자가 이야기,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그리고 베드로전서1장에도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피 흘림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얻었다. 하는 게 베드로도 이야기하지요.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말씀 불탄 공력이 뭐로 나타난다? 결국은 십자가로 등장한다. 십자가라고 표현했지만, 요한계시록에는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또는 ‘어린양의 보좌’ 거기에 24장로들이 면류관 받친다고 후닥닥 소리가 나지요. 먼저 받치려고. 자기 거 아낌없이 바치기 위해서. 그 보좌 앞에서. 그게 십자가의 효과 아닙니까?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생명나무 과실들이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강줄기를 따라서 양쪽에 생명나무 과실이 주렁주렁 맺히지요. 그것이 바로 불의 유리바다, 불타는 유리바다 그걸 건너 온 사람의 몫이에요. 일단 불탄 데서만 통과한 사람에게만 그 생명나무, 생명수 해당되지, 그게 아니고 그 불탄 유리바다를 못 건너온 사람들은 어림도 없는 소리를 들려줘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말이지요.
그래서 제가 대구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홍해를 건너와 보니까 세상에 애굽 군인들의 시체와 군장과 칼과 활들이 해변가에 널려 있을 때, 귀부인들이 뭐라 했습니까? 뭘 건너온 거야? 죽음을 건너온 거예요. 죽음을. 저 사람이 우리보다 더 건강해요. 더 식스팩이고, 전부 근육이고, 땅땅하니 전부 다 군사들, 용병들, 전사들 한 가닥 한 사람들인데 그들마저 시체가 됐는데, 자기 집의 어린애도 방금 통과한 것이 결국 뭐냐, 누구나 죽는다 하는 그 지역을 통과한 거예요. 우리가 놀라야 됩니다. 죽은 애굽 군사들보고 안타깝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내가 죽은 거야? 살은 거야? 자기가 지보고 깜짝 놀라야 돼요. 홍해바다 건너서 지가 거울보고 지가 지보고 놀라야 돼요. 이게 꿈이야? 생시야? 좀비야? 시체야? 유령이야? 니 정체를 밝혀라! 어떻게 죽어야 마땅한데 왜 살아난 거야?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저는 죽어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하란 말이지요. 어느 쪽을 향하여? 생명나무 과실이 맺히는 그 십자가를 향하여 하는 말이 “우리가 여기 올수 없는데 주님께서 뭔가 뒤에서 떠밀고 밑에서 당겨서 예상치도 못한 이런 결과가 났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거기에 무슨 교회가 있고 거기에 무슨 헌금, 전도 그런 행함, 성화론, 그런 게 어떻게 지 산 것도 발 앞에 던지기 바쁜데, 그게 무슨 성과주의가 있고, 그 무슨 세상 축복이 있습니까? 가나안땅, 이스라엘이 살았던 그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도 요한계시록에 오게 되면 그것도 어디에 몰았다 했습니까? 그것도 애굽의 일종으로서 애굽의 영토예요. 애굽의 영토. 소위 이스라엘 사람이 살았던 그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라는 것도. 성지순례를 왜 하는지 몰라요. 그것도 전부 다 애굽의 일종이에요. 지금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성지순례, 현지의 예수살렘, 그게 다 말씀에 불타 버리잖아요. 불타는데 재를 미리 본다고 갔습니까? 불탈 장소에서 사진 찍고. 가려면 피켓해서 ‘여기도 불타리라‘ 이런 거 하나 써가지고 ’여기도 불태워 지리라. 베드로후서 3장 10절‘ 이거 써서 관광단 성지 순례단에 껴서 들고 다니고. 써 붙이고.
제가 목회자로 설교자로서 늘 생각하는 게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이 말씀이 취미에 멈추지 않는가, 그걸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취미에 멈추는 것, 교회 다니는 게 취미, 말씀이 취미가 아니고 이건 실제 상황인데, 사람들은 취미로 여긴다 말이지요. 취미가 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고 이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걸로 숨겨진 취미잖아요.
옛날에 여러분들이 왕자표 크레파스 봤지요. 이 크레용 사게 되면 꼭 남는 게 있어요. 일찍 닳는 게 노란색, 길게 남는 색은 은색, 금색, 칙칙한 거, 감청색도 아니고, 그런 거 많이 남고, 좋아하는 색은 빨리 닳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요런 것도 필요하고 저런 것도 필요한데 덜 안 필요한 것도 있다 말이지요. 덜 안 필요한 것이 뭐냐, 잘 안 쓰는 크레파스 용도가 뭐냐, 교회 또는 성경보기 이런 거예요.
진짜 24시간 중요한 것은 돈 버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 한가로울 때, 심심해서 비틀어지고 재미없을 때 그 때 슥 보는 게 뭐가 있어요? 성경보기, 기도하기 이런 거지요. 잘 안 쓰는 크레파스 처럼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그거 없다고 가슴 아픈 거 없고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식입니다. 그래서 이야기했잖아요. 아브라함보고 니 자식 받쳐라. 부모가 밖에 나가 찬바람 맞으며 일하는 이유가 자식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남편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자식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어떻든 말씀이 실제인데, 돌아서면 취미활동 돼버려요. 꽃꽂이 하다가 이거 하다가 사물놀이 장구 치다가 이것도 하고, 교회 갔다가 신앙 있다 하면 권사들 모여 성지 순례 가는 거, 이거 노는 거예요. 교회가 노는 장소예요. 베드로후서 3장10절 전혀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이런 설교 함부로 하게 되면, 교회도 불타게 되어 있어요. 목사가 진짜 생각한다면 목사도 나이타 들고 가야 돼요. 교회 현판부터 불 질러야 돼요. 어차피 말씀이 중요하지, 교회는 안 중요하니까. 예배당은 안 중요해요. 뭐가 중요하다? 말씀이 중요한 거예요.
이야기를 이어보겠습니다.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지요. 그럼 첫 번째 나타난 게 어려운 게 뭐냐 하면, 그 무서운 불에 사르게 된 인간이 불 안 사르게 된 세계로 뛰어넘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종이를 태우려고 라이터를 들고 갔을 때, 종이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어요. “야, 주인님이 라이터 들고 온다.” “너는 파란종이, 나는 노란 종이, 그런데 우리 왜 같이 모여 있지? 수상한데, 어? 주인이 나타났어. 뭐? 손에 라이터? 그것도 폭팔한다는 중국산?” 라이터 들고 왔다 말이지요. “아이고, 나는 불타기 싫어!” 주인이 불을 퍽 쥐고 있으니까. 한 종이가 살려고 기어가서 “여기까지는 불이 안 붙었지. 불 속인데 불속을 통과해서, 와~ 나는 살았다! 드디어 불 속에서 벗어났다.” 이게 말이 되느냐 말이지요.
말씀은 동일한 말씀으로 세상에는 불타게 되어 있다 했지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우리는 불태워질 대상이 되잖아요. 대상이 되는 내가 어떻게 스스로 불에 탈 수 밖에 없는 요소를 갖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불 속을 통과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말씀은 불이다. 우리는 불태워진다. 불태워지는 우리가 그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불을 통과해서 불 안 붙는 그런 세계로 우리가 스스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없지요.
제 말이 논리상 맞지 않습니까? 없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그걸 통과한 사람이 있데요. 한 번 봅시다. 3장 7절,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여기 경건한 사람 따로 있는 거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경건한 사람은 뭘로 만들어졌기에 불에 안타는 거지요? 이상하다? 경간한 사람의 뼈와 살은 우리와 다른 DNA인가요? 아니면 경건한 사람은 불에는 안타고 불에 그슬리기만 하는 겁니까? 불났을 때, 나는 경건함, 불은 탔는데 보니까 불이 많이 번지지 않아서 그래서 구원 받는 거예요? 우리가 글자 그대로 해봅시다. 우리가 믿잖아요. 믿는다면, 고민거리가 한 두 개가 아니라니까요. 지금.
경건한 사람은 어떻게 구원 받느냐, 9절 끝에 보면 있어요.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그 다음에 뭡니까? 회개하지요. 회개. 그러면 경건하다는 말은 완벽하게 착하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을 한 사람이다? 회개를 한 사람이다. 회개를 한 사람이다 말이지요. 그러면 회개를 할 때, 내가 만약 회개해서 구원 받고자 한다면, 그럼 뭐에 대해서 회개한다고? 회개할 게 뭐가 있다고? 뭐에 대해서 회개하는데요. 제가 어제 글을 썼어요. 에스더, 느헤미야, 겨울수련회 한다고 해놓고 교재를 썼거든요. 교재 서론에 이런 내용 있어요.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다 했잖아요. 그런데 물이라 하는 것은 극성분자로 해서 전기적 성질을 띠고 있잖아요. 그리고 공유 결합되어 있고 다른 물과 분자는 수소 결합되어 있거든요. 나무랄 게 없잖아요. 뭘 잘못했다고 꾸짖어요. 물 분자가 뭐가 잘못 됐다고 꾸짖어요. 물 분자인데.
물 분자가 있는데, 바람의 에너지가 와서 흔들렸다 말이지요. 위로 움직이니 파도가 되는데. 그걸 나무라면 물 분자는 어떻게 하라고? 잘못된 게 있어야 잘못 됐다고 하지. 그런데 성경은 뭡니까? 바다를 꾸짖었더니만 그 때 바다는 어떻게 됐다? 잔잔하게 됐다 이 말이지요. 잔잔하게 됐거든요. 아니, 물 분자가 지가 잘못한 것을 지가 안다는 말이잖아요. 물질에 인격을 가미할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우리는 꾸지람을 할 때, 사람이라든지 개든지 뭔가 인격이라든지 감성이 있을 때만 나무랄 수 있는데, 바다는 물이잖아요. 바람은 공기의 집합입니다. 공기의 움직임이 바람이에요. 그걸 보고 꾸짖는다면 꾸짖는 대상이 뭡니까? 그 안에 귀신이 들어있어요? 뭘 보고 꾸짖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바다보고 지금 꾸짖었다는 말은, 제자들이 “어! 저 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네.“ 했지요. 그러면 예수님께 현재 제자들이 순종하고 있다? 안 하고 있다? 제자들이 순종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제자들은 왜 순종을 못할 수밖에 없는가 하면, 풍랑이 일 때는 배가 뒤집어져서 죽습니다. 그게 바로 제자들이 아는 경험한 거예요. 자기의 경험한 세계는 배에 물이 들어오면 자기는 고기가 아니니까, 아가미로 숨 쉬는 게 아니니까 물에 빠지면 죽는다. 따라서 살기위해서는 예수님을 깨웠고 물을 퍼내야 된다. 이것 자체를 주님 앞에서는 회개해야 된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회개할 수 없는 것이 기껏 인간이 아는 수준이 그것 밖에 안돼요. 지난주일 낮에 제일 먼저 운을 뗀 것이 뭐냐, 우리 교회에 나오는 태민이가 나를 만나자마자 로봇 팔 부러진 이야기하더란 말이지요. 인간이 경험한 것, 인간이 생각한 것은 인간의 눈에 보고 있는 것은 지세계 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뭘 회개해야 돼요. ”나는 내 세계밖에 모르고 그게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가 불로 싸질러져야 된다는 생각은 말씀이 오기 전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회개라 하는 것은 범위를 넓힙니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 과학을 이야기하고, 철학 이야기하는 그 범위를 우리는 넘어서는 거예요. 뭘로 바꿔야 된다? 말씀으로 바꿔야 되는 겁니다. 말씀으로 바꾼다하는 것은 말씀의 구절이 너무 많기 때문에 어느 구절로 바꿔야 하는지 말씀 통째로 외워야 하는지, 창세기1장은 중요하고 요한계시록은 안 중요한지, 어느 구절이 중요한지, 말씀이 온다는 것이 이게 또 우리한테는 하나의 딜레마가 되겠지요.
그런데 그 딜레마는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의 세계를 요한복음3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이 말씀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제가 철학을 공부하고, 학문을 공부하면서 이 말씀 없으면 특히 동양철학 공부하게 되면, 눌릴 수밖에 없어요. 기독교건 다 늘려요. 불교 같은 경우 워낙 범위가 넓어서 공부하게 되면 너무나 깊이 있게 다루기 때문에 “아이고, 기독교나 불교나 같네, 오히려 불교보다 기독교가 한 수 아래네.”하게 된다 말이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3장 27절 봅시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하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가 없다. 말씀을 공부하는 게 이게 하늘에서 받은 게 아니에요. 그럼 뭐냐, 모든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겁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바람과 바다가 예수님을 순종하는 것은 우리가 바람과 바다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이것이 수소 두개에 산소 하나로 된 것이 이게 물 분자거든요. 이런 식으로 물을 분석하고 관찰하는 그 관계 말고 다른 관계 바람과 바다는 주님을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관계, 다른 관계를 그들은 이미 갖추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왜 그걸 눈치 못 챘는가? 인간은 자기 범위와 영역을 그냥 확대시키는 용어로서 넓혀지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확대시키려고.
풍선 속에 인간이, 주머니 속에 있는 인간이 밖에 나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벽을 자꾸 미는 거예요. 벽을 밀면 좀 넓어지잖아요. 넓어졌으니까 그 만큼 발전했다고 보는 거예요. 이게 진화론입니다. 135억년전에 우주는 빅뱅이 일어나서 되었고, 지구는 47억년전에 유성들이 결합해서 지구가 됐다는 겁니다. 달도 비슷한 시기에 지구에서 갈라져 나가서 달이 되고. 그 이유가 뭐냐, 자꾸 돈다는 거예요. 공전이죠. 제자리에서 자꾸 팽이처럼 돈다는 거예요. 자전이죠. 돈다는 것은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옛날 처음에 깨어질 때, 놀던 그 관성이 계속 남아서 돈다는 거예요. 이 135억년 전에 빅뱅 때문에 우주가 발생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우주 너머에 뭐가 있느냐, 그거는 모른다고 하다가 한 20년전에 슈퍼스팅 초건이론이 나와서 평행우주론이 등장해요. 수학으로 11차원까지 계산해요. 우주밖에는 또 우주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주밖에 있는 우주, 그 우주 밖에는 또 뭐가 있는데? 우주밖에 없다. 그러면 불교의 중들이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중들이 맞지!” 세상은 옛적부터 그저 있었고, 있던 것이 그냥 변화할 뿐이다. 생, 노, 병, 사 그리고 태어났다가 소멸하고, 소멸한 게 태어나고. 천문학자는 말합니다. 현재 인류 이 몸, 지구 모든 것은 핵반응의 핵폐기물이다. 이리 하는 겁니다. 초반에 있던 수소와 헤륨이 결합되어서 나온 핵폐기물들, 그것들이 금, 은, 철, 금속이 되고 금속들이 뭉쳐서 오늘날 인간이 되었기에 결국, 핵 작용의 폐기물들,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까. 먼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으니까, 이 우주라 하는 것은 더 더할 필요도 없고 더 뺄 필요도 없고 있는 것이 그냥 모양새만 바뀌었을 뿐이다. 라고 하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보자기를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게 전부예요. 이렇게 하면 종교라 하는 것은 취미가 되는 겁니다. 잘 안 쓰는 크레파스, 물감, 취미가 되는 거지요.
그런데 요한복음3장27절에 뭐라 했습니까? 하늘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항상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은사는 하늘에서 왔다. 야고보서 1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외부에서 갇혀있는 우리에게 강제로 침투해서 뭔가 강제로 우리 속에 영생의 물질이 요소가 우리 속에 들어올 때만 비로소 육에서 육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육에서 영이 돼서 거듭나는 거예요.
그러면 거듭나기 이전의 인간들이 있던 모든 종교적인 것, 흰두교나 기독교나 모든 인간들의 아이디어는 다 불로 태워질 소실되어야 할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지키지 말고 말씀이 우리를 만들어낸다, 보시면 돼요. 믿음이. 내가 말씀 몇 개 지켰습니다. 하고 우기지 말고 지금도 주께서 나를 이렇게 새롭게 말씀대로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뭐가 탈락하는가, 시간도 우리 속에서 탈락해 버리고 공간요소도 우리에게 탈락해 버려요. 시간이라 하는 것은 추억이고 기억이거든요. 추억과 기억은 우리로 하여금 우울증에 빠지게 하기도 하고 힘들게 하기도 해요. 과학적으로 우울증이라 하는 것은 일조량이 적어져서 세로토닌이란 신경물질이 적게 나와서 남자들이 바바리 깃 세우고 낙엽 밟아가면서 우울해한대요. 가을철에 백날 우울해도요, 지 일이 바쁘면 그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할 짓 없어서 우울증입니다. 바빠 보세요. 우울증 있나. 바빠 보면 세월 언제 갔는지 몰라요. 후딱 가버리지요.
인간은 결국, 역사가 문제예요. 개인적인 인생사도 문제이고, 교회사도 문제이고, 가정사도 문제고, 이놈의 역사가 인간의 발목을 잡네. 역사가. 찬란한 역사든, 엉망진창인 역사든 간에 사람은 자기가 걸어온 긴 그림자는 그렇게 아름답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걸 미화시켜요. 자기한테 너무 관대해요. “아이고, 불쌍한 내야, 그동안 니 고생 많이 했지. 불쌍한 내야.” 이렇게 하지요.
역사라 하는 것은 공간이 없으면 역사가 사라져요. 역사라 하는 것은 공간의 변화가 집합한 게 역사의 시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가 없으면 시간도 없어요. 똑같은 변화지 않는 가운데 사람은 시간을 못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그래요. 삼풍백화점 무너졌을 때, 16일 동안 갇혀 있었던 애에게 몇 일 있었느냐 하니까, 내가 한 10시간 있었나? 생체리듬은 환경에 적응하게 되어 있거든요. 인간의 몸은 덩치가 있지만, 사실은 각자의 세포 아닙니까? 세포는 하나의 살아있는 거거든요. 살아있는 것은 외부환경과 상호보완적으로 주고받고 해서 환경에 껌딱지처럼 들어붙어서 안 떨어지려하는 버릇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동안 몸 전체를 놀던 게 몸이 중지돼 있으니까 세포가 다른 시간에 맞추어서 세포가 자동적으로 자동조절 돼버렸어요. 인간은 또 지가 누군지 몰라요. 환경이 이래서 내가 이랬다 하지만, 다른 환경에 집어넣어버리면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모해 버립니다. 환경 따라서.
군에 가기 전에 그렇게 말 안 듣던 아들이 그저 빠라빠라 오토바이 타고 돌아다니면서 골목에 사람 치여서 보상만 갚아주고 하던 애먹인 아들이 군에 집어넣고 난 뒤에 충성! 부모님께 경례! 그것도 울면서. 초코파이가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습니다! 어머님, 효도하겠습니다! 제대할 때 보세요. 효도하나. 원상복귀해서 그 전과 똑같이 돼요.
환경에 적응을 잘 할 줄 아는 시험이 뭐냐 하면, 개나 원숭이 훈련시키는 겁니다. 세상에 개가 글을 읽고 새가 숫자를 맞추잖아요. 훈련된 거거든요. 그러니까 현대 심리학에서는 인간은 훈련하기 나름이다. 북한의 주민들 전부 다 훈련된 거예요. 김일성한테. 김정일만 세워놓으면 전부 다 눈물 줄줄 흘린다니까요. 연기가 아니에요. 눈물이 막 흘러요. 그래서 교육학이나 심리학에서 환경이 70%, 타고난 게 30%라 하지 않습니까? 환경만 바꿔주면 인간되고, 환경 나쁘면 인간 안 된다, 이런 이야기예요. 그러면 환경 나쁜데 인간되면 이건 뭐예요? 환경 별로 안 좋은데 인간된 건 그건 평소에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못 잊어져 그런 겁니까?
말씀은 우리를 성도 만들기 위해서 모든 게 짜 맞춰진 거예요. 말씀이 인생의 틀을 만들어 놓았는데 모든 틀은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자기 백성 되게 하기 위해서 구비된 모든 설비들이고 장치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성도는 회개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바로 이 세계에 나는 주인공도 아니고 주님이 주인공인데 눈에는 안 보이는 거예요. 그걸 회개하는 거예요. 안 보이는 분이 주인공인데 마치 보이는 내가 주인공처럼 내가 행세해서 어떻게든 내 식으로 구원받아 보려고 애썼던 그걸 회개하는 겁니다.
말씀이 나를 구원해 주고 또 하늘에서 오신 은사가 구원하는데 우리는 내가 주물럭 주물럭 손꼽 놀이하는 것도 아니고 지가 어떻게 종교생활해서 신앙생활해서 지가 지를 구원하려는 모든 시도, 그게 얼마나 나를 만화의 주인공,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왜곡시킨 결과냐 이말 이지요.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든 말씀을 소급해서 보면, 이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주고, 그 말씀 속에 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 불 속에서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지구도 없고, 달도 없고, 태양도 없고 전부 다 태워버리는 거예요. 그런 말씀을 물로서 홍수 난 것도 이 안에 들어있고, 불로서 멸망한 것도 들어 있고, 이 말씀을 우리가 평소에 진지하게 그런 식으로 봤느냐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도 구원 안 되는 걸 가지고 우리 풍선에 십자가 푹 쑤셔가지고 십자가 피 묻은 손으로 우리를 건져내시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하얀 옷에 어린양의 피 묻은 자들만 올라오라, 올라오라, 위로 올라 와! 십자가의 피를 적셔서 우리 심령에 확 쑤셔서 우리는 풍선 안에, 눈에 보이는 세계 안에 전부인데, 뭔가 어깨에 쑤시고 들어와 보니까 십자가 피더란 말이지요.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하는 이것이 너희와 언약하는 새 언약이에요. 새 약속이다 이리 하는 겁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시작하겠습니다. 베드로후서3장10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왜 날이 도적같이 옵니까? 좋게 오셔도 되는데 도적같이 와요. 아! 도적같이! 왜 모르게 오시느냐 말이지요. 도망갈 수도 없는 입장인데.
“도덕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따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난다.” 이리 되어 있어요. 베드로 보고 우리가 물을 거예요. “니가 봤나? 어느 책에서 이리 뽑았나?” 할 수도 있거든요. 니가 하나님도 아닌데 이것은 세상을 부정하는 정도가 아니지요. 세상이 나쁘다, 악하다, 정도가 아니고 세상 자체가 없어진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구라를 쳐도 대충 치면 우리가 믿어줄만한데. 베드로의 이 말은 구라, 거짓말 수준을 능가해서 아예 모든 게 없어지는 걸 믿어라 이 말이거든요. “우리 모두가 없어짐을 믿읍시다!” 없어지는 걸 찬양하면서 박수친다 말이지요. 모든 게 없어지는 걸.
그러면 교회에서 부흥회할 때, 이 본문가지고 한다 칩시다. “이 교회가 없어집니다. 우리 박수 칩시다.“ 와 같은 소리예요. 부흥회할 때, 오전에는 부모를 공경해야 구원받습니다. 해놓고 만약에 오후에 이 설교한다면 무엇이 없어진다? 부모도 없어지면 효도할 대상이 없어지는데 효도는 왜 하는데? 오전에 교회에 충상합시다! 오후에 이 말씀 전해버리면 교회가 있어야 충성하지, 교회가 없어졌는데. 그러니 지금 이 모든 것이 떠나가 버리고. 뭐가? 하늘이.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 지각 동그란 지구 땅덩어리가 뜨거운 불어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 그 땅의 모든 식물과 동물, 인간들이 하는 모든 일이 다 완전히 노출되고 다 드러나야 된다. 이것을 우리가 아주 기쁘고 즐겁게 믿읍시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지요. 이 이야기를 기쁘고 즐겁게 믿으려면 평소에 완전히 미친 사람 돼야 됩니다.
완전 미친 사람 돼야지 그러니까 이 말씀을 기쁘고 즐겁게 믿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여, 어서 세상을 끝장내 주소서!”라는 것이 더도 덜도 말고 오직 기도 제목이 하나, 그저 끝장내게 해달라는 그거 하나, 그냥 끝장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저 세상에 눈에 띠는 것, 안 띠는 것, 다 없애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만 이 본문이 즐겁다 이 말이지요.
그럼 이 본문만 딱 떼어서 앞에 나오는 사도바울 이야기나 다니엘 등 전부 다 대조해 보란 말이지요. 대조를 해보면, 성경자체가 결국은 이거 지켜야 되느냐, 마느냐 할 문제가 아니지요. 성경자체가 소용없는 거지요. 성경자체가 책으로 됐던 것이 폭파하니까 이것이 하늘도 날아가 버리고 땅도 날아가 버렸다. 성경자체는 하나의 시한폭탄, 또는 벌벌 타는 보일러 같아서 성경자체가 책인 줄 알고, 베개로 자기도 하고 이랬는데, 갑자기 폭발해버리니까 불기둥 나와서 하늘이고 땅이고 다 불기운에 다 녹아버리더라, 우리가 평소에 성경책을 베개 삼고 보는 것은 불을 보고 있는 거다 말이지요. “아이고, 불 색깔 봐!”
그러니 성경책 보자, 읽자, 그것도 의미 없고 지키자 하는 것도 의미 없어요. 왜냐하면 성경을 지켰더니만 폭발한 것이 아니고 성경을 지키든 안 지키든 읽든 안 읽든 관계없이 언젠가 때가 되면, 5,4,3,2,1,0 폭발해 버리면 성경자체도 다 날아가 버린다 말이지요. 이에 대한 이야기가 7절에 나옵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이렇게 되어 있지요. 말씀 안에는 무슨 능력이 있다? 세상의 하늘과 땅을 불살라 버리는 위력이 들어 있는 말씀이다. 모든 말씀이.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 게 진짜 말씀을 지키려면 말씀 속에 있는 불이 어디 속에 가야 되는가, 내 안에 있는 불로 이전되어야 말씀 지킨 게 되잖아요. 무슨 말이냐 하면, 불안에 세상을 불 지르는 에너지가 들어있지요. 그러면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말씀을 뚝 떼어서 내 품에 가졌다는 말은 세상을 폭파시킬 위력이 말씀에만 들어있는 게 아니고 말씀을 내가 안았으니까 내 안에도 세상을 폭파할 수 있는 위력을 가졌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내가 말씀을 간직하고 이걸 품속에 가졌다는 말은 시한폭탄을 평소에 쥐고 세상을 돌아다닌다. 시한폭탄을 품고 자전거 타고 오고, 걸어오신 게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 베드로후서 3장 1절부터 지금까지 쭉 읽어보면 눈에 띄는 게 뭐냐 하면, 폭발되기 직전에 우리는 한시적으로 뭔가 대기상태, 또는 말씀이 관찰하는 관찰자 대상의 입장에서 그냥 말씀이 지켜보는 가운데 폭발직전에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짧은 안개 같은 인생을 그냥 하루, 하루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이 뭔가 하면, 불신자는 말씀이 폭발해 온다는 것은 전혀 생각 못하고 자기 영역, 자기 공간을 어떻게 확장하고, 팽창할 것이냐, 여기에만 몰두하고 있지요. 그리고 누가 와서 “쉿! 비밀인데, 이 세상은 완전히 불로 불살라 버린데.“하면 ”시끄럽다. 어디 그런 게 있어?“ ”성경 말씀에.“ ”나, 성경 말씀 안 믿는다.“ 그러면 성경 말씀 안 믿는다고 내치게 되면 남는 게 뭡니까? 오직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그러한 논리와 진리, 그런 거만 덩그러니 남겠지요.
우리가 본문을 시작하면서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첫 번 째를 생각해 봅시다. 말씀에 세상을 불로서 살라버리는 그런 능력이 어떻게 말씀이 갖고 있느냐 그 문제입니다. 말씀대로 되니까 하늘도 땅도 불태워졌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그 능력이 왜 말씀이 갖고 있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①왜 말씀에 파멸의 능력이 있느냐? ② 모든 것이 불로 태워진다면 남는 것은 뭐만 남을까? 불탄 그 공백에 무엇이 등장하는가? 모든 것을 송두리째 훌훌 불태워버릴 때, 그러면 그 현장에 죄도 날아가 버린 그 현장에, 나타나는 게 뭘까요? 예수님의 나라지요. 그렇다면 ②번을 먼저 봅시다. 예수님의 나라가 등장하잖아요. 예수님의 나라를 뭘로 안 들키도록 무엇으로 감싸고 있다는 뜻이 됩니까? 말씀으로 감싸고 있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런데 말씀의 속성은 뭐로 되어 있다? 말씀이 지상과 만나면 결국은 말씀의 본색이 드러낼 때는 불로 나타나니까, 결국은 예수님을 뭐로 감싼다? 불타는 말씀으로 감싸는 것은 창세3장 21절에 보면 생명나무를 뭐로 감싸고 있어요? 두루 도는 불춤 추는 칼로서 화염검으로 사실은 천사거든요. 천사가 자기 기능을 발휘해서 불로서 보호하는 거예요. 이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1023
모세 때 홍해건널 때는 물로서 건넜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똑같이 인용하면서 무슨 바다하면, 불의 바다라, 다른 형식은 똑같은데 물이 뭘로 바뀌는가 하면, 불로 바뀌게 되어 있어요. 15장 2절에 말씀, 불이 섞인 유리바다를 건너가는 거예요. 옛날의 구약 때는 애굽나라, 홍해, 약속의 땅 이리되잖아요. 그런데 신약은 뭐냐 하면, 현재의 모든 세계를 전부 다 어디에 집어넣는가하면, 애굽나라로 다 집어넣어버려요. 몽땅. 전부 다 애굽나라라는 창고에 집어넣고, 그 다음에 세상나라가 애굽나라로 몰려갔으니까 그러면 세상나라 말고는 한 나라도 안 남아 있지요. 세상나라가 안 남아 있으니까 눈에 띄지도 않고 우리는 그런 세계 나라는 없어, 없어, 없다고 한 나라가 결국은 어느 너머에 있습니까? 불 홍해 저쪽 너머에 있는 거예요. 그럼 그걸 우리가 무슨 수로 압니까? 어떻게 경험해야 아는 겁니까?
어려운 거 해 봅시다. 열왕기상19장 11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위가 떨어져나가는 그 정도로 강력한 바람이 있는데 뭔가 경험했어요. 엘리야가 경험했는데 무엇을 강조하는가 하면, 여호와께서는 거기에 계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강력한 바람을 받았다는 것은 여호와가 거기에 함께 있다는 말입니까? 계시지 않다는 말입니까? 바람 불었다는 것을 가지고 여호와를 만났다고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는 거거든요. 그 다음에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한다. “야, 여호와 여기 계시는가보다. 어?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는 계시지 않네.” 이거는 옛날에 했던 방법은 시내산에 여호와 나타날 때, 시내산 전체가 벌벌 떨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났거든요. 그런데 그 지진에도 여호와는 안 계시거든요. 하여튼 하나님은 일관성이 없어요. 똑 같은 방법을 두 번 다시 사용하지 않아요.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같으면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여호와와 대화했습니다. 그래서 신기한 불이면 반드시 거기에 하나님 계신 거 맞다, 라고 누구한테 자부심, 장담을 할 수 있는데 그것도 아니다 말이지요. 계시지 아니하고 불 가운데 세미한 소리가 있는데 보니까 거기에 엘리야야! 하고 불렀다 했습니다. 세미한 소리. 이걸 초월적 돌파라 합니다. 뚫어가는 것, 돌파 하는 것.
인간이 경험할 수 있고,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한계 안에서 인간이 경험한 바람, 지진, 그 어떤 것에도 하나님이 거기에 있다고 확답할 수 없습니다. 그럼 뭐냐, 세미한 소리다. 소리. 분명히 요란스럽고 우당탕탕, 예를 들어서 지금도 허리케인 불고, 뉴욕에 허리케인 들이닥치잖아요. 돌풍불고 얼어붙고 화산 터지고 굉장히 요란스러운데, 지난 가락강의에서 실제로 나타난 것은 손가락 가지고 글씨 쓰는 거지요. 여기서 엘리야 같은 경우에는 세미한 음성. 그러면 결국은 뭐냐 하면, 인간이 불의 바다를 건너서 하나님 계신 곳에 가겠다는 말은 세미한 소리라고 되어있고 손가락이라고 했지만, 지금 손가락 잡으려고 매미채 들고 어느 교회를 찾아다녀야 되겠습니까? 아마 손가락 나타난 교회 같으면 부흥될 거예요. 드디어 우리 교회에 손가락 나타났다. 다른 교회는 우리 교회 목사님은 어제 밤에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 우리 목사님은 진짜 주의 종이다. 왜? 세미한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이미 그건 엘리야 때 다 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 요한 때,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본인들이 예상을 했어요? 안 했어요? 여기에 경건 나옵니다. 경건한 사람만 구원받습니다. 결국 경건이라 하는 것은, 경건의 법칙을 세웁시다. 예상한다? 못한다? 예상 못한다. 이거 하나 원칙을 세워야 돼요. 나는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믿을 거야, 예수님 믿을 만한 장소에 가도 안 계시는 거예요. 왜? 이미 우리가 예상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예상을 10개하면 11번째 나오고, 22개를 하면 23번째 나타나요. 반드시 우리가 예상을 모아 놓은 그 안에서는 주님은 우리하고 상대를 안 합니다.
옷가게 하면 손님이 꼭 이런 사람이 있어요. 없는 것 찾는 사람 있어요. 문방구가도 꼭 없는 거 찾는 애들이 있어요. 지금 주님 오시면 드리려고 온갖 것 준비했는데 꼭 우리 없는 것 찾는다니까요. 주님께서는. 없는 걸 찾아요. 실컷 오실 만반의 준비를 다했는데 기름도 SK기름, 현대오일도 넣고, 참기름, 들기름, 온갖 기름 준비해서 신랑 되신 주님만 오시기만 하면 아쉬운 것 없이 다 준비했는데, 내가 원하는 기름 없네. 하고 가버리면 그동안 준비한, 그동안 지혜로운 다섯 처녀 되겠다고 애썼던 노력이 다 헛수고가 되겠지요. 원칙 하나가 우리가 예상한 것은 안한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엘리야와 모세를 만난 그것은 사전에 모의하고 만난 그런 거 없지요. 사전에 목욕하고 그런 거 없지요. 꾀죄죄한 그대로 선배신앙인을 만났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 좀 깨끗한 거 입고 올 걸 그랬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거기 가니까 더러운 옷 입었다고 닦달하지 아니하시고, 헌금 들고 오지 않은 것도 닦달하지 아니하시고, 전도 몇 명인지 따지지도 않으시고, 지적 안하시고 “오늘은 3명만 변화산으로 올라 와.“ 가보니까 예상 밖의 모세와 엘리야가 있을 줄이야, 그런 미팅은 사전에 언 줄을 준적도 없어요. ”니만 알려줄게. 오늘 변화산 간다.“ 이런 것도 없었다니까요. 그냥 주님한테 따라가니까 그게 하늘나라라, 꼭 오늘날 우리가 주님 따라가는 거와 비슷해요. 항상 예상 못한 쪽으로 인도해 버립니다.
우리가 이건 좁은 길이라고 예상하면 그 길로 안 오십니다. 좁은 길은 생산되는 거예요. 창조되는 겁니다. 우리가 싸잡아서 우리가 거기에 눌러 앉아 있으면 그게 좁은 길이 얼마안가 넓은 길이 돼버려요. 항상 예상 못한 다른 길이 계속해서 번져 나오는 겁니다. 어? 길이 없네, 하면 새로운 길이 나오고, 주께서 자꾸 고시는 거 같아요.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귀신이 꾀이는 거 같아. 점점 가다보면 떠나온 길과 너무 멀러져. 이상한 길로 가는 것 같아.
그래서 결국 세미한 음성이란 뭐냐 하면, 세미한 음성은 다 주의 뜻이 아니고 친히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자립적으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이끄신다는 사실입니다. 에스더가 왕궁의 미스 바사나라에서 미스 진선미에서 진되어서 왕후 되었을 때에, 옛날부터 오디션 있었어요. 오디션 봐서 1등해서 왕비 되었을 때에 내가 한 6개월 뒤에는 죽으면 죽으리라, 예상 못했지요. 그걸로 인생은 불행 끝, 행복 시작으로 더 이상 위기가 찾아오지 않으리라 여긴 거예요. 모든 동화가 그렇지만, 마지막은 뭐로 끝납니까? 결혼이지요. 결혼해서 잘 먹고 잘살았다 하지 않습니까? 백설공주도 결혼으로 끝나지요. 신데렐라도 결혼으로 끝나지요. 춘향이도 결혼으로 끝나지요. 결혼은 전반전도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모든 드라마는 뭐로 끝납니까? 전부 결혼으로 끝나잖아요.
주님이 보여주는 끝은 뭡니까? 결혼이 아니고 죽음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란 말이지요. 모든 드라마는 죽음으로 끝나요. 그것도 그냥 죽음이 아니고 십자가와 함께 죽는 죽음, 제가 지금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세미한 음성도 아니고, 지진도 아니고, 폭풍도 아니고, 화산 터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세미한 음성처럼 나타나는 이야기가 뭐냐, 십자가 이야기,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그리고 베드로전서1장에도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피 흘림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얻었다. 하는 게 베드로도 이야기하지요.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말씀 불탄 공력이 뭐로 나타난다? 결국은 십자가로 등장한다. 십자가라고 표현했지만, 요한계시록에는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또는 ‘어린양의 보좌’ 거기에 24장로들이 면류관 받친다고 후닥닥 소리가 나지요. 먼저 받치려고. 자기 거 아낌없이 바치기 위해서. 그 보좌 앞에서. 그게 십자가의 효과 아닙니까?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생명나무 과실들이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강줄기를 따라서 양쪽에 생명나무 과실이 주렁주렁 맺히지요. 그것이 바로 불의 유리바다, 불타는 유리바다 그걸 건너 온 사람의 몫이에요. 일단 불탄 데서만 통과한 사람에게만 그 생명나무, 생명수 해당되지, 그게 아니고 그 불탄 유리바다를 못 건너온 사람들은 어림도 없는 소리를 들려줘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말이지요.
그래서 제가 대구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홍해를 건너와 보니까 세상에 애굽 군인들의 시체와 군장과 칼과 활들이 해변가에 널려 있을 때, 귀부인들이 뭐라 했습니까? 뭘 건너온 거야? 죽음을 건너온 거예요. 죽음을. 저 사람이 우리보다 더 건강해요. 더 식스팩이고, 전부 근육이고, 땅땅하니 전부 다 군사들, 용병들, 전사들 한 가닥 한 사람들인데 그들마저 시체가 됐는데, 자기 집의 어린애도 방금 통과한 것이 결국 뭐냐, 누구나 죽는다 하는 그 지역을 통과한 거예요. 우리가 놀라야 됩니다. 죽은 애굽 군사들보고 안타깝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내가 죽은 거야? 살은 거야? 자기가 지보고 깜짝 놀라야 돼요. 홍해바다 건너서 지가 거울보고 지가 지보고 놀라야 돼요. 이게 꿈이야? 생시야? 좀비야? 시체야? 유령이야? 니 정체를 밝혀라! 어떻게 죽어야 마땅한데 왜 살아난 거야?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저는 죽어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하란 말이지요. 어느 쪽을 향하여? 생명나무 과실이 맺히는 그 십자가를 향하여 하는 말이 “우리가 여기 올수 없는데 주님께서 뭔가 뒤에서 떠밀고 밑에서 당겨서 예상치도 못한 이런 결과가 났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거기에 무슨 교회가 있고 거기에 무슨 헌금, 전도 그런 행함, 성화론, 그런 게 어떻게 지 산 것도 발 앞에 던지기 바쁜데, 그게 무슨 성과주의가 있고, 그 무슨 세상 축복이 있습니까? 가나안땅, 이스라엘이 살았던 그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도 요한계시록에 오게 되면 그것도 어디에 몰았다 했습니까? 그것도 애굽의 일종으로서 애굽의 영토예요. 애굽의 영토. 소위 이스라엘 사람이 살았던 그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라는 것도. 성지순례를 왜 하는지 몰라요. 그것도 전부 다 애굽의 일종이에요. 지금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성지순례, 현지의 예수살렘, 그게 다 말씀에 불타 버리잖아요. 불타는데 재를 미리 본다고 갔습니까? 불탈 장소에서 사진 찍고. 가려면 피켓해서 ‘여기도 불타리라‘ 이런 거 하나 써가지고 ’여기도 불태워 지리라. 베드로후서 3장 10절‘ 이거 써서 관광단 성지 순례단에 껴서 들고 다니고. 써 붙이고.
제가 목회자로 설교자로서 늘 생각하는 게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이 말씀이 취미에 멈추지 않는가, 그걸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취미에 멈추는 것, 교회 다니는 게 취미, 말씀이 취미가 아니고 이건 실제 상황인데, 사람들은 취미로 여긴다 말이지요. 취미가 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고 이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걸로 숨겨진 취미잖아요.
옛날에 여러분들이 왕자표 크레파스 봤지요. 이 크레용 사게 되면 꼭 남는 게 있어요. 일찍 닳는 게 노란색, 길게 남는 색은 은색, 금색, 칙칙한 거, 감청색도 아니고, 그런 거 많이 남고, 좋아하는 색은 빨리 닳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요런 것도 필요하고 저런 것도 필요한데 덜 안 필요한 것도 있다 말이지요. 덜 안 필요한 것이 뭐냐, 잘 안 쓰는 크레파스 용도가 뭐냐, 교회 또는 성경보기 이런 거예요.
진짜 24시간 중요한 것은 돈 버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 한가로울 때, 심심해서 비틀어지고 재미없을 때 그 때 슥 보는 게 뭐가 있어요? 성경보기, 기도하기 이런 거지요. 잘 안 쓰는 크레파스 처럼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그거 없다고 가슴 아픈 거 없고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식입니다. 그래서 이야기했잖아요. 아브라함보고 니 자식 받쳐라. 부모가 밖에 나가 찬바람 맞으며 일하는 이유가 자식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남편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자식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어떻든 말씀이 실제인데, 돌아서면 취미활동 돼버려요. 꽃꽂이 하다가 이거 하다가 사물놀이 장구 치다가 이것도 하고, 교회 갔다가 신앙 있다 하면 권사들 모여 성지 순례 가는 거, 이거 노는 거예요. 교회가 노는 장소예요. 베드로후서 3장10절 전혀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이런 설교 함부로 하게 되면, 교회도 불타게 되어 있어요. 목사가 진짜 생각한다면 목사도 나이타 들고 가야 돼요. 교회 현판부터 불 질러야 돼요. 어차피 말씀이 중요하지, 교회는 안 중요하니까. 예배당은 안 중요해요. 뭐가 중요하다? 말씀이 중요한 거예요.
이야기를 이어보겠습니다.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지요. 그럼 첫 번째 나타난 게 어려운 게 뭐냐 하면, 그 무서운 불에 사르게 된 인간이 불 안 사르게 된 세계로 뛰어넘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종이를 태우려고 라이터를 들고 갔을 때, 종이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어요. “야, 주인님이 라이터 들고 온다.” “너는 파란종이, 나는 노란 종이, 그런데 우리 왜 같이 모여 있지? 수상한데, 어? 주인이 나타났어. 뭐? 손에 라이터? 그것도 폭팔한다는 중국산?” 라이터 들고 왔다 말이지요. “아이고, 나는 불타기 싫어!” 주인이 불을 퍽 쥐고 있으니까. 한 종이가 살려고 기어가서 “여기까지는 불이 안 붙었지. 불 속인데 불속을 통과해서, 와~ 나는 살았다! 드디어 불 속에서 벗어났다.” 이게 말이 되느냐 말이지요.
말씀은 동일한 말씀으로 세상에는 불타게 되어 있다 했지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우리는 불태워질 대상이 되잖아요. 대상이 되는 내가 어떻게 스스로 불에 탈 수 밖에 없는 요소를 갖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불 속을 통과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말씀은 불이다. 우리는 불태워진다. 불태워지는 우리가 그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불을 통과해서 불 안 붙는 그런 세계로 우리가 스스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없지요.
제 말이 논리상 맞지 않습니까? 없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그걸 통과한 사람이 있데요. 한 번 봅시다. 3장 7절,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여기 경건한 사람 따로 있는 거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경건한 사람은 뭘로 만들어졌기에 불에 안타는 거지요? 이상하다? 경간한 사람의 뼈와 살은 우리와 다른 DNA인가요? 아니면 경건한 사람은 불에는 안타고 불에 그슬리기만 하는 겁니까? 불났을 때, 나는 경건함, 불은 탔는데 보니까 불이 많이 번지지 않아서 그래서 구원 받는 거예요? 우리가 글자 그대로 해봅시다. 우리가 믿잖아요. 믿는다면, 고민거리가 한 두 개가 아니라니까요. 지금.
경건한 사람은 어떻게 구원 받느냐, 9절 끝에 보면 있어요.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그 다음에 뭡니까? 회개하지요. 회개. 그러면 경건하다는 말은 완벽하게 착하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을 한 사람이다? 회개를 한 사람이다. 회개를 한 사람이다 말이지요. 그러면 회개를 할 때, 내가 만약 회개해서 구원 받고자 한다면, 그럼 뭐에 대해서 회개한다고? 회개할 게 뭐가 있다고? 뭐에 대해서 회개하는데요. 제가 어제 글을 썼어요. 에스더, 느헤미야, 겨울수련회 한다고 해놓고 교재를 썼거든요. 교재 서론에 이런 내용 있어요.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다 했잖아요. 그런데 물이라 하는 것은 극성분자로 해서 전기적 성질을 띠고 있잖아요. 그리고 공유 결합되어 있고 다른 물과 분자는 수소 결합되어 있거든요. 나무랄 게 없잖아요. 뭘 잘못했다고 꾸짖어요. 물 분자가 뭐가 잘못 됐다고 꾸짖어요. 물 분자인데.
물 분자가 있는데, 바람의 에너지가 와서 흔들렸다 말이지요. 위로 움직이니 파도가 되는데. 그걸 나무라면 물 분자는 어떻게 하라고? 잘못된 게 있어야 잘못 됐다고 하지. 그런데 성경은 뭡니까? 바다를 꾸짖었더니만 그 때 바다는 어떻게 됐다? 잔잔하게 됐다 이 말이지요. 잔잔하게 됐거든요. 아니, 물 분자가 지가 잘못한 것을 지가 안다는 말이잖아요. 물질에 인격을 가미할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우리는 꾸지람을 할 때, 사람이라든지 개든지 뭔가 인격이라든지 감성이 있을 때만 나무랄 수 있는데, 바다는 물이잖아요. 바람은 공기의 집합입니다. 공기의 움직임이 바람이에요. 그걸 보고 꾸짖는다면 꾸짖는 대상이 뭡니까? 그 안에 귀신이 들어있어요? 뭘 보고 꾸짖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바다보고 지금 꾸짖었다는 말은, 제자들이 “어! 저 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네.“ 했지요. 그러면 예수님께 현재 제자들이 순종하고 있다? 안 하고 있다? 제자들이 순종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제자들은 왜 순종을 못할 수밖에 없는가 하면, 풍랑이 일 때는 배가 뒤집어져서 죽습니다. 그게 바로 제자들이 아는 경험한 거예요. 자기의 경험한 세계는 배에 물이 들어오면 자기는 고기가 아니니까, 아가미로 숨 쉬는 게 아니니까 물에 빠지면 죽는다. 따라서 살기위해서는 예수님을 깨웠고 물을 퍼내야 된다. 이것 자체를 주님 앞에서는 회개해야 된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회개할 수 없는 것이 기껏 인간이 아는 수준이 그것 밖에 안돼요. 지난주일 낮에 제일 먼저 운을 뗀 것이 뭐냐, 우리 교회에 나오는 태민이가 나를 만나자마자 로봇 팔 부러진 이야기하더란 말이지요. 인간이 경험한 것, 인간이 생각한 것은 인간의 눈에 보고 있는 것은 지세계 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뭘 회개해야 돼요. ”나는 내 세계밖에 모르고 그게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가 불로 싸질러져야 된다는 생각은 말씀이 오기 전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회개라 하는 것은 범위를 넓힙니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 과학을 이야기하고, 철학 이야기하는 그 범위를 우리는 넘어서는 거예요. 뭘로 바꿔야 된다? 말씀으로 바꿔야 되는 겁니다. 말씀으로 바꾼다하는 것은 말씀의 구절이 너무 많기 때문에 어느 구절로 바꿔야 하는지 말씀 통째로 외워야 하는지, 창세기1장은 중요하고 요한계시록은 안 중요한지, 어느 구절이 중요한지, 말씀이 온다는 것이 이게 또 우리한테는 하나의 딜레마가 되겠지요.
그런데 그 딜레마는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의 세계를 요한복음3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이 말씀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제가 철학을 공부하고, 학문을 공부하면서 이 말씀 없으면 특히 동양철학 공부하게 되면, 눌릴 수밖에 없어요. 기독교건 다 늘려요. 불교 같은 경우 워낙 범위가 넓어서 공부하게 되면 너무나 깊이 있게 다루기 때문에 “아이고, 기독교나 불교나 같네, 오히려 불교보다 기독교가 한 수 아래네.”하게 된다 말이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3장 27절 봅시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하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가 없다. 말씀을 공부하는 게 이게 하늘에서 받은 게 아니에요. 그럼 뭐냐, 모든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겁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바람과 바다가 예수님을 순종하는 것은 우리가 바람과 바다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이것이 수소 두개에 산소 하나로 된 것이 이게 물 분자거든요. 이런 식으로 물을 분석하고 관찰하는 그 관계 말고 다른 관계 바람과 바다는 주님을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관계, 다른 관계를 그들은 이미 갖추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왜 그걸 눈치 못 챘는가? 인간은 자기 범위와 영역을 그냥 확대시키는 용어로서 넓혀지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확대시키려고.
풍선 속에 인간이, 주머니 속에 있는 인간이 밖에 나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벽을 자꾸 미는 거예요. 벽을 밀면 좀 넓어지잖아요. 넓어졌으니까 그 만큼 발전했다고 보는 거예요. 이게 진화론입니다. 135억년전에 우주는 빅뱅이 일어나서 되었고, 지구는 47억년전에 유성들이 결합해서 지구가 됐다는 겁니다. 달도 비슷한 시기에 지구에서 갈라져 나가서 달이 되고. 그 이유가 뭐냐, 자꾸 돈다는 거예요. 공전이죠. 제자리에서 자꾸 팽이처럼 돈다는 거예요. 자전이죠. 돈다는 것은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옛날 처음에 깨어질 때, 놀던 그 관성이 계속 남아서 돈다는 거예요. 이 135억년 전에 빅뱅 때문에 우주가 발생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우주 너머에 뭐가 있느냐, 그거는 모른다고 하다가 한 20년전에 슈퍼스팅 초건이론이 나와서 평행우주론이 등장해요. 수학으로 11차원까지 계산해요. 우주밖에는 또 우주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주밖에 있는 우주, 그 우주 밖에는 또 뭐가 있는데? 우주밖에 없다. 그러면 불교의 중들이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중들이 맞지!” 세상은 옛적부터 그저 있었고, 있던 것이 그냥 변화할 뿐이다. 생, 노, 병, 사 그리고 태어났다가 소멸하고, 소멸한 게 태어나고. 천문학자는 말합니다. 현재 인류 이 몸, 지구 모든 것은 핵반응의 핵폐기물이다. 이리 하는 겁니다. 초반에 있던 수소와 헤륨이 결합되어서 나온 핵폐기물들, 그것들이 금, 은, 철, 금속이 되고 금속들이 뭉쳐서 오늘날 인간이 되었기에 결국, 핵 작용의 폐기물들,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까. 먼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으니까, 이 우주라 하는 것은 더 더할 필요도 없고 더 뺄 필요도 없고 있는 것이 그냥 모양새만 바뀌었을 뿐이다. 라고 하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보자기를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게 전부예요. 이렇게 하면 종교라 하는 것은 취미가 되는 겁니다. 잘 안 쓰는 크레파스, 물감, 취미가 되는 거지요.
그런데 요한복음3장27절에 뭐라 했습니까? 하늘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항상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은사는 하늘에서 왔다. 야고보서 1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외부에서 갇혀있는 우리에게 강제로 침투해서 뭔가 강제로 우리 속에 영생의 물질이 요소가 우리 속에 들어올 때만 비로소 육에서 육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육에서 영이 돼서 거듭나는 거예요.
그러면 거듭나기 이전의 인간들이 있던 모든 종교적인 것, 흰두교나 기독교나 모든 인간들의 아이디어는 다 불로 태워질 소실되어야 할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지키지 말고 말씀이 우리를 만들어낸다, 보시면 돼요. 믿음이. 내가 말씀 몇 개 지켰습니다. 하고 우기지 말고 지금도 주께서 나를 이렇게 새롭게 말씀대로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뭐가 탈락하는가, 시간도 우리 속에서 탈락해 버리고 공간요소도 우리에게 탈락해 버려요. 시간이라 하는 것은 추억이고 기억이거든요. 추억과 기억은 우리로 하여금 우울증에 빠지게 하기도 하고 힘들게 하기도 해요. 과학적으로 우울증이라 하는 것은 일조량이 적어져서 세로토닌이란 신경물질이 적게 나와서 남자들이 바바리 깃 세우고 낙엽 밟아가면서 우울해한대요. 가을철에 백날 우울해도요, 지 일이 바쁘면 그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할 짓 없어서 우울증입니다. 바빠 보세요. 우울증 있나. 바빠 보면 세월 언제 갔는지 몰라요. 후딱 가버리지요.
인간은 결국, 역사가 문제예요. 개인적인 인생사도 문제이고, 교회사도 문제이고, 가정사도 문제고, 이놈의 역사가 인간의 발목을 잡네. 역사가. 찬란한 역사든, 엉망진창인 역사든 간에 사람은 자기가 걸어온 긴 그림자는 그렇게 아름답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걸 미화시켜요. 자기한테 너무 관대해요. “아이고, 불쌍한 내야, 그동안 니 고생 많이 했지. 불쌍한 내야.” 이렇게 하지요.
역사라 하는 것은 공간이 없으면 역사가 사라져요. 역사라 하는 것은 공간의 변화가 집합한 게 역사의 시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가 없으면 시간도 없어요. 똑같은 변화지 않는 가운데 사람은 시간을 못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그래요. 삼풍백화점 무너졌을 때, 16일 동안 갇혀 있었던 애에게 몇 일 있었느냐 하니까, 내가 한 10시간 있었나? 생체리듬은 환경에 적응하게 되어 있거든요. 인간의 몸은 덩치가 있지만, 사실은 각자의 세포 아닙니까? 세포는 하나의 살아있는 거거든요. 살아있는 것은 외부환경과 상호보완적으로 주고받고 해서 환경에 껌딱지처럼 들어붙어서 안 떨어지려하는 버릇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동안 몸 전체를 놀던 게 몸이 중지돼 있으니까 세포가 다른 시간에 맞추어서 세포가 자동적으로 자동조절 돼버렸어요. 인간은 또 지가 누군지 몰라요. 환경이 이래서 내가 이랬다 하지만, 다른 환경에 집어넣어버리면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모해 버립니다. 환경 따라서.
군에 가기 전에 그렇게 말 안 듣던 아들이 그저 빠라빠라 오토바이 타고 돌아다니면서 골목에 사람 치여서 보상만 갚아주고 하던 애먹인 아들이 군에 집어넣고 난 뒤에 충성! 부모님께 경례! 그것도 울면서. 초코파이가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습니다! 어머님, 효도하겠습니다! 제대할 때 보세요. 효도하나. 원상복귀해서 그 전과 똑같이 돼요.
환경에 적응을 잘 할 줄 아는 시험이 뭐냐 하면, 개나 원숭이 훈련시키는 겁니다. 세상에 개가 글을 읽고 새가 숫자를 맞추잖아요. 훈련된 거거든요. 그러니까 현대 심리학에서는 인간은 훈련하기 나름이다. 북한의 주민들 전부 다 훈련된 거예요. 김일성한테. 김정일만 세워놓으면 전부 다 눈물 줄줄 흘린다니까요. 연기가 아니에요. 눈물이 막 흘러요. 그래서 교육학이나 심리학에서 환경이 70%, 타고난 게 30%라 하지 않습니까? 환경만 바꿔주면 인간되고, 환경 나쁘면 인간 안 된다, 이런 이야기예요. 그러면 환경 나쁜데 인간되면 이건 뭐예요? 환경 별로 안 좋은데 인간된 건 그건 평소에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못 잊어져 그런 겁니까?
말씀은 우리를 성도 만들기 위해서 모든 게 짜 맞춰진 거예요. 말씀이 인생의 틀을 만들어 놓았는데 모든 틀은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자기 백성 되게 하기 위해서 구비된 모든 설비들이고 장치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성도는 회개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바로 이 세계에 나는 주인공도 아니고 주님이 주인공인데 눈에는 안 보이는 거예요. 그걸 회개하는 거예요. 안 보이는 분이 주인공인데 마치 보이는 내가 주인공처럼 내가 행세해서 어떻게든 내 식으로 구원받아 보려고 애썼던 그걸 회개하는 겁니다.
말씀이 나를 구원해 주고 또 하늘에서 오신 은사가 구원하는데 우리는 내가 주물럭 주물럭 손꼽 놀이하는 것도 아니고 지가 어떻게 종교생활해서 신앙생활해서 지가 지를 구원하려는 모든 시도, 그게 얼마나 나를 만화의 주인공,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왜곡시킨 결과냐 이말 이지요.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든 말씀을 소급해서 보면, 이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주고, 그 말씀 속에 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 불 속에서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지구도 없고, 달도 없고, 태양도 없고 전부 다 태워버리는 거예요. 그런 말씀을 물로서 홍수 난 것도 이 안에 들어있고, 불로서 멸망한 것도 들어 있고, 이 말씀을 우리가 평소에 진지하게 그런 식으로 봤느냐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도 구원 안 되는 걸 가지고 우리 풍선에 십자가 푹 쑤셔가지고 십자가 피 묻은 손으로 우리를 건져내시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하얀 옷에 어린양의 피 묻은 자들만 올라오라, 올라오라, 위로 올라 와! 십자가의 피를 적셔서 우리 심령에 확 쑤셔서 우리는 풍선 안에, 눈에 보이는 세계 안에 전부인데, 뭔가 어깨에 쑤시고 들어와 보니까 십자가 피더란 말이지요.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하는 이것이 너희와 언약하는 새 언약이에요. 새 약속이다 이리 하는 겁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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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121109b-벧후3장10절(불의 사실성) - 이 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간직하려면 말씀이 한 두 말도 아니고 창세기1장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렇게 많은 걸 어떻게, 이것 잘 지키면 저것 소홀히 하고 저것 잊어버리면 이것 잊어버리는데 어떻게 되느냐 하는 생각이 들겠지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다 이루었다“ 했지요. 다 이루었다 하는 걸로 어떤 구절이든지 간에 공히 십자가의 실로 엮여져 있다. 이리 보면 돼요. 모든 말씀은 십자가를 십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다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란 뭐냐 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잖아요. 이게 십자가 아닙니까? 그러면 세상 죄를 다 누가 담당해야 돼요? 바로 우리가 담당하고 그 세상 죄를 죽고 죄인을 의인 만드는 그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언약적인 근거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자꾸 넘보면 안 됩니다. 그거는 주제 넘는 일이 거든요. “내가 이렇게 하면 착해집니까?” 그것은 우리가 할 게 아니에요. 착하고 안착하고, 의롭고 선하고는 그 쪽은 우리는 죄인으로 들어가고 그 다음에 죄인을 아버지 앞에 어떻게 이어지느냐 하는 것은 중보자 되신 예수님 자기가 다 해야 될 일을 우리가 자꾸 욕심내가지고 그걸 넘봐서 저도 끼워주세요. 이리 나오면 그것은 죄인주제에 건방지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뭐라 하십니까? ‘다 이루었다.“ 뭘 다 이룬 거예요? 모든 말씀을 이로써 다 이룬 거예요. 예수님이 세례요한한테 세례 받으려 들어가니까 세례요한이 말렸어요. ”이러지 마세요. 제가 세례 받아야 되는데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할 때, 우리가 이리해야 모든 의가 다 이루어지는 거예요. 모든 말씀이 다 이루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죄인으로서 거기에 가담이 될 때, 아까 이야기를 불로 시작했잖아요. 불로 하면 불로 태운다. 그런데 여기서 경건한 사람이 등장하고 여기서 이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이고, 회개하는 사람은 불로 태워진 이 밖으로 벗어나서 불 자체를 통과하고 뛰어넘어서 산채로 뛰어넘는 그런 경우라 했지요. 바로 물이 넘실대는 그 홍해가 아니고 불이 넘실거리는 불의 바다, 불의 바다를 이 사람은 통과해서 나오는 겁니다. 어린양의 피로서.
그렇다면 불로 태운다. 그리고 경건한 사람 할 때, 이것 태워질 이유가 뭐 때문에 태워지는가 하면, 이게 죄이기 때문에, 또는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태워지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뜻은 이겁니다. 하늘에서 은사가 내려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 보기에 몽땅 더럽다. 그리고 죄밖에 없다. 의? 의는 기대하지 말라. 거룩한 것? 거룩한 것도 없어. 라는 것을 고분고분 이걸 동의하고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뭐가 되는가 하면, 바로 주님에 의해서 끌려가는 주님에 의해서 구원받는 사람에게만 그것이 해당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옛날 이스라엘이 그렇게 역할 하라고 한 거예요.
율법 줘서 주변에 있는 사람 죄인 만들고 그 율법이 나오는 그 중앙지점에는 매일같이 연기가 피어올라서 아무 죄도 없는 희생제물이 아침, 저녁마다 죽어 나가고. 그리고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덕을 봐서 거룩한 백성 되고, 이 언약관계가 계약관계가 백성 있고 거기에 어린양이 등장했다면 신약시대에는 백성이 누구인 줄 모르고 그냥 예수님만 덜렁 나와서 예수님과 엮여진 사람을 예수님이 찾아다니는 식으로 뽑아내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걸 선택이라 합니다. 내가 선택한 사람은 내 효과를 볼 것이다. 내가 선택한 사람만 효과 본다. 그러니까 이 선택은 “저 구원 받으려면 선택해야 되는데 저 선택해 주세요.” 이런 게 선택이 아니고 선택해 달라는 그게 무슨 선택입니까? 그건 요구지요.
선택은 아무도 모르고 주님만 아시기에 “너, 선택했어!” 라고 통보가 갈 거지요. 통보 안 오면 어떻게 합니까? 통보 안 오면 그냥 지옥 가는 거지요. 죄 씻음 받지 못하고 죄인으로 그냥 가는 거지요. 그런데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통보가 왔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아느냐를 사도바울 식으로 말한다면,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또 다른 말로 하면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이 꾀나 복잡해요. 지금 어디까지 이야기 했느냐 하면, 예수님 어린양이 먼저 등장해서 우리는 자동적으로 백성 되는 게 아니고 먼저 어린양이 등장해서 어린양이 알고 있는 사람만 백성으로 뽑는다 했습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알고, 그 둘 사이에는 아무도 모르지요. 누가 브라우니하고 대화하겠습니까? 과묵한 개인데 인형 개하고 누가 대화를 하겠어요? 안되지요.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는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세례요한 옆에 누가 있는가 싶어서 아무리 봐도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뭐라 합니까? 위에서 주지 아니하면 나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돌은 것 같고 미친 거예요.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동방박사를 죽이려 하는데 동방박사가 다른 길로 갔다는 것을 헤롯 군대에게 듣고, 동방박사가 다른 길로 갔다는 것은 천사가 와서 빼돌렸잖아요. 성경에서는 헤롯이 동방박사를 빼돌린 것이 분이 나서 베들레헴 2살 애를 다 죽였다 했거든요. 속이긴 누가 속였는데? 지 속임수에 안속아 넘어가면 다 속인 거예요? 동방박사가 자기들 아이디어에 의해서 “야, 뭔가 수상하다? 빨리 도망가자!”이리 했습니까? 아니고 동방박사는 그냥 자연스럽게 갈 뿐이에요. 누가 헤롯이 우리를 죽인다 했다. 그런 것도 신경 안 쓰고 그냥 갔을 뿐인데, 천사가 와서 앞에 브레이크를 걸지요. 그 천사가 안 왔으면 어떻게 하느냐? 안 오면 동방박사 죽는 거지요. 안 오면. 안 온다고 동방박사 지옥 갈 것도 아니고. 동방박사가 천사가 안 와서 지옥 가는 거 아닙니다. 동방박사는 그 것으로 인생마감하고 천사가 와서 또 돌려주면 동방박사 더 살아야 되고 그런 거죠. 꼭 천사가 우리한테 와야 한다는 법은 없어요. 이리 가나 저리 사다리 타나 천국 도착하는 것은 마찬가지거든요. 먼저 죽은 사람 같으면 “왜, 이제 왔어?” 타박할 거예요. “아~ 그 때 죽으려했는데 천사가 와서 빼돌려가지고 아이~ 그것 때문에 괜히 오래 살았네.“ 한다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있어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선택한다 할 때에 백성은 없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문제인데, “저요! 저요!” 손든다고 구원해 주는 게 아니고 “손 내려! 손 내려! 가만히 있어! 씨~ 손 내려놔! 내려놔!” 손든다고 구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 쪽에서 선택이라는 게 왔을 때, 이것을 '성령의 인(도장)' 성령의 도장을 찍어버려요. 성령의 도장을 찍게 되면 성령의 인은 뭐와 같은가 하면,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있을 때, 하늘에서 비둘기처럼 성령이 내려와서 얻는 거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할 때 예수님은 어디의 조종을 받느냐 하면, 성령의 힘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았어요.
예수님은 성령의 뜻에 거슬려서 어떻게 행동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 말이지요. 이럴 경우에 오늘날 성도가 성령을 받아버리면 누가 주는가 하면, 예수님이 주시거든요. 예수님이 주시니까 이 성령의 인도 받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예수님의 구원하심의 능력에서 우리가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가 없다. 왜? 도장을 찍었으니까. “너는 내거야.” 하고 도장을 찍었다 말이지요.
도살장의 돼지 뒷다리 엉덩이에다가 '참 맛있어요.' 도장을 찍었다면 이 돼지고기는 어떻게 다른데 샐 수가 없어요. 돼지고기가 도장 맞고 난 뒤에 지가 스스로 털 깎고 기어나갈 수가 없는 거예요. 이미 도살돼서 있기에. 벌건 도장이 찍혔는데. 그러니 '도장 찍혔습니다.' 하는 보이는 쪽으로 우리는 다루어질 수밖에 없어요. 인생이라는 게. 우리가 중요하지 않고 우리에게 찍힌 도장이 중요한 거예요. 성령의 뜻이 중요하고, 성령의 뜻은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런 대표자가 사도들이에요. 사도들은 제자들은 본인 인생을 지 맘대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빼도 박도 못 하는 거예요. 성령이 너희를 인도할 것이다. 그러니 사도들은 죽는 것, 사는 것, 사는 것, 죽는 것, 뭔가 하나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어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이야기하기를 성령의 도장을 받았기 때문에 그 다음 나온 결과는 뭐든지 너희 뜻대로 안 될 것이다. 라고 하시면서 뭐가 안 되는 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평소에 뭐를 원하고 있는가를 말씀을 통해서 다 보여줍니다. 말씀을 통해서.
그게 뭐냐 하면,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워 따먹는 것처럼, 비로소 우리는 세상에서 성령 받고 난 뒤에 세상을 제대로 아는 거예요. 전부 다 내 욕망과 합치되는 것, 내가 갖고 싶은 것,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되고 싶은 것이 바다의 파도처럼 출렁이는 풀장에 빠져가지고 허우적댄다는 것을 비로소 알지요. 회개 안할 수가 없습니다. 왜? 모든 세상 것이 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회개한다는 말은 내 힘으로 헤엄쳐 나올 것 같으면 회개할 거 없어요. “주님, 알았습니다. 내가 헤엄치겠습니다.” 하고 나오면 되는데 아무리 헤엄쳐도 나는 저런 거 안 좋아해. 하고 헤쳐 보면 진짜 좋아하는 것이 또 등장하니까. 안 돼, 안 돼, 나는 저 옷 갖고 싶어. 겨울철 다됐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옷은 꼭 사 입어야 돼! 10개월 월부 하던지 해야 돼요. TV틀면 나오잖아요. 이번 구성은 새로운 구성이라서 이거 놓치면 후회하십니다. 5분 남았습니다. 지금 매진 직전, 임박했습니다. 이거 사시면 2,000원 할인 혜택 있습니다. 죽~ 나오잖아요. 일주일 만에 사흘 만에 택배 갑니다. 이러면 또 "그래, 저걸 사야 돼!" 사놓고 보면 이미 사논 게 여러 가지 있어요. 안 쓰고, 남아있고.
세상이라 하는 것은 빠져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세상이 나고 내가 곧 세상인데,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고마움, 얼마나 고맙습니까?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거예요. 네가 내 죽음을 아느냐? 이렇게 하시면서. 우리는 살기 위해서 항상 죽음을 잊어버려야 되거든요. 죽음의 흔적을 지우개로 지워야 돼요. 전영록이 불렀잖아요. 사랑을 쓰려거든 지우개로 쓰세요. 자꾸 지워야 되니까 연필로 써야 돼요. 볼펜으로 써서 종이만 찢어진다니까. 대충 사랑하고, 대충 헤어지고, 또 지우고. 우리는 자꾸 주님께 그런 식으로 하더라도 "왜, 하나님은 저를 버리지 않습니까?"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이만하면 버릴 만도한데, 왜 저를 버리지 않고 자꾸 저를 파파라치처럼 따라오시고 진드기처럼 안 떨어지십니까? 기어이 저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을 일깨워주십니까?” 하는 그 고백 그게 바로 회개예요.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경건은 없습니다. 왜? 자기 자신을 생각안하니까. 사람이 자기 생각하면 그거는 죄가 되고 자기 생각을 할 수가 없지요. 하면 할수록 주님한테 해로움밖에 안 나오니까. 그래서 모든 게 풀어지는 거죠.
그 다음에 11절 봅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전에도 그런 만화이야기 했습니다. 고양이가 신나게 달리다보니까 절벽인지도 모르고 쥐한테 쫓겨서 계속 달리듯이, 군에서 제일 짜증나는 것이 아침에 자고 있는데 이불을 확 제치는 거예요. 일어나라고. 제일 싫거든요. 지 집 동생 같으면 죽이고 싶을 거예요. 자고 있는데 이불 확 걷어치워서 일어나라고 하면. 여기서 이게 뭐냐 하면, 여기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쟁반을 확~ 빼는 거예요.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쟁반을 빼버리면 남는 게 뭡니까? 우리에게는 죽음만 남지요. 죽은 자를 죽은 자되게 해서 살려내시는 것이 주님의 구원의 환경입니다.
11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라는 것은 자기 생각만 안하면 돼요. 이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니고 세상이 만들어지면서 나도 하나 만들어졌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오늘 아침에 내가 밥을 왜 못 먹었을까? 세상이 밥을 못 먹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못 먹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경건이고 거룩 이예요. 내일은 꼭 밥을 챙겨먹어야지. 이렇게 나오면 이것은 바로 경건이 아닙니다. 또 지 중심으로 돌아서는 거예요.
겨울이 온다는 거, 바람이 분다는 거, 러시아에 폭설이 왔다는 거, 이거 뭐 하나 다 기도해서 된 게 아니고 내 맘대로 안 되는 거예요. 기도도 내 맘대로 되는 기도가 있는 반면에 내 맘대로 안 되는 기도도 있어요. 내 맘대로 하는 기도는 장난입니다. 기도 했다가 온갖 공상 다 했다가 으이구, 정신 차려야지, 기도 했다가 30분 채워야지, 시계 보다가 온갖 잡 생각하다가 그러다가 잠 오면 자다가 꿈인지, 기도인지 하는데, 진짜 기도하게 되면 폭발이에요. 폭발. 따다닥 나와요.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영어1등급 받으려 했는데 2개 틀릴 수가. 그게 애가 기도하는 거예요. 이거는 신자만 기도하는 게 아니고 불신자도 기도하는 거예요. 하소연하고 맺혀있는 한을 푸는 겁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성질 나온다. 성질 나온다. 그렇지, 그거지. 그래, 그게 니 성질이야, 니가 주인공 돼야 되고, 세상만사가 다 니 뜻대로 돼야 만족하지, 니만 살고 니만 챙기면 그만이지, 그런 생각이 매일같이 우리 속에서 터져 나옵니다. 환율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환율 걱정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공장 어떻게 되지? 수출하고 있는데 아이구, 가만있다 가는 손해 보겠네. 모든 게 자기중심이에요.
그래서 이 모든 말씀은 우리의 바탕과 바닥은 아예 우리한테는 없다고 생각하세요. 우리가 디딜 비빌 언덕도 없고 우리가 기댈 것도 없고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침대가 있다면 주께서 받쳐준 것이고 내게 등받이 있다면 주께서 주신 것이고, 보일러가 안 되면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고. 이 주변 모든 상황이 현재 나를 생산하겠다는 기어이 하늘의 은사로서 기어이 성도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열심과 노력과 집착과 집념의 흔적이 주변에 있는 모든 상황입니다. 이걸 생각하게 되면 행복 안 하려고해도 안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남편이 "너는 말이야, 너는?" 이렇게 하면, “왜 팔이 그것뿐이 안 나와! 더 길지. 고함지르지 마라, 고함 안 질러도 세상 그냥 흘러가는 거야.” 열 낸다고 세상의 변화가 인간의 의지에 따라서 달라집니까? 안 달라지지요.
키르기스스탄이란 나라가 있어요. 중국, 우즈베키스탄 사이 밑에 있는 키르기스스탄이 있는데, 세계에서 두 번째 큰 호수가 있고 90%가 산악지대이고 아주 못 사는 나라인데, 그 나라에 애가 6개월 지나면 폭포, 텐진산맥 고지가 7000m예요. 60m 되는 폭포에 가서 어린양을 잡아요. 그 폭포 밑에서 양의 목을 땁니다. 양을 대신 죽여요. 죽여 놓고 이제는 이 애가 크면서 모든 애군과 불행은 양이 짊어지고 갔다, 이렇게 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왜 이런 짓하는 겁니까? 누구는 살겠다는 거예요? 애는 누구 애입니까? 자기애죠. 남의 집 애 아니지요. 자기 집안, 혈육, 자기 육, 이걸 사수하고 지키겠다는 거예요. 대대로 번영하겠다는 거예요. 이러니까 이 모습이 한국 사람이 보름달보고 소원하는 게 정동진에 가서 해 뜨는 거 보고 비는 게 전부 뭡니까? 내 가족, 내 남편, 내 자식, 우리 집 식구 올 한 해 그저 몸 건강하고 하는 일 잘되고 공부 잘하고 가정이 화목했으면 더는 소원 없겠습니다. 이리 하는 거예요.
그럴 때, 밑에 받쳐 논 쟁반을 확 빼버리는 거예요. 빼버릴 때, 내가 그 소원 빌었던 그 자체가 전혀 현실에 안 맞는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자기 밖에 모르는 불경건한 더러운 육의 모습을 낱낱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말씀이 안 맞는 거예요. 말씀은 예수님 중심인데. 우리 인간들은 누구 중심이다? 각자 자기중심이잖아요. 원래 말씀이 만든 세상하고, 내 중심으로 사는 거하고 안 맞으니까 어느 한 쪽은 불로 태워야 되는 거예요. 우리도 마땅히 불로 태워져야 되는데 애굽군대의 시체처럼, “내가 어떻게 통과했지? 나도 내 중심으로 사는데. 어떻게 통과했지?” 보니까 옷에 뭐가 묻었습니까? 피가 묻어있는 거예요. 결국은 우리를 구원함이 아니고 피 자체를 돋아내기 위해서 피의 공로를 돋보이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들러리 우리를 이용한 거예요. 이제 와서 보니 와! 씨~ 주님을,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를 완전히 갖고 노신 거라니까요. 그게 기분 나빠요? 주섬주섬 면류관이고 이제는 다 벗어야 돼요. 피만을 증거 하기 때문에 자랑한 거 다 토해내고 게워내야 돼요. 이제는.
12절에 봅시다.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불에 타면 어쩌라고? 우리보고. 위 지붕 빼버리고 밑에 있는 바닥 빼버리고 하늘 태워버리고 아래 태워버리고 우리는 공중에 붕 떴어요. 완전히 고양이처럼, 쥐처럼. 위에도 없고 아래도 없고 붕 떠있어요.
13절,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주께서는 우리의 일이 꼬이는 이유가 있어요. 이 세상 미련 두지 마라는 거예요. 볼 걸 보라고. 안 볼 걸 보지 말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성도는 일종의 바바리맨 이에요. 새 하늘과 새 땅 써가지고 봐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주는 바바리맨 있잖아요. 그냥 바바리맨은 볼 거 없지만, 어! 저건 볼 거 있네.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인다 말이에요.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뭐냐, "그의 약속대로" 그 다음에 뭡니까? 의에 거하는바. 야~~ 이게 오늘의 해답이네.
그동안 불탈 이유는 죄이기 때문에 불탔고, 우리가 그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은 우리 때문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뭐가 있어야 된다? 하나님의 의가 있는 자라면 의에 합당한 자리에 가야 됩니다. 의인이 지옥 가도록 하나님이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니 의인인데 왜 거기가 있어? 이리 와!" 하고 강제로 모가지 질질 끌고 의인은 의인의 나라에 집어넣어야 돼요. 그곳은 죄인들이 가는 곳이에요. "지옥 한 번만 보여주세요." "지옥 한 번도 안 돼!" "그래도 한 번 보고 싶어요. 지옥에 나 애먹인 놈 한 번 보고.“ "다 있으니까 너는 무조건 거기 가지 말고 이리 와!" 강제로 모가지 끌고 의의나라 보내주는 겁니다.
근거는 뭡니까? 착하게 살았다? 바르게 살았다? 국민 남편? 웃기고 있네. 국민 남편도 아니고 국민 아들도 아니고 나라 자체가 없어졌는데 무슨 국민이 있습니까? 국민 가수도 아니고 국민 배우도 아니에요. 그냥 피에 이용당했다니까요. 피가 묻어있으니까 그 피 때문에 우리를 거기다가 섞어 넣을 수가 없어요. 그 피가 있는 한.
그 피가 제공한 원천의 자리로 질질 끌고 가는 겁니다. 제가 울산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제목이 시간의 출처 있잖아요. 시간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폭포수처럼. 시내산 위에서 나오지요. 말씀에서 시간이 나옵니다. 이 말은 뭐냐, 세상의 모든 역사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고 말씀이 만들어 낼 때만 비로소 제대로 된 시간이라 할 수 있고, 다시 그걸 회수해 버리면 시간은 없는 게 돼 버려요. 하루가 천년같이, 천년이 하루같이 없는 게 돼요. 우리는 결국 시간에 놀아난 거예요. 과거라는 거, 추억이라는 거, 다 주님이 만들어 놨는데 우리는 내가 나를 그 긴긴 시간 지금의 나를 작품처럼 만들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누구한테 놀아난 거예요? 결국 우리가 우리자신의 시간과 공간에 놀아난 겁니다.
우리가 주머니 안에 들어있다 합시다. 크게 만들면 꽤나 넓지요. 우리는 만날 베개나 치고 있다 말이지요. 공간이나 넓히고. 넓혀서 야구할 일 있어요? 축구할 일 있어요? 축구해도 갇혀 있는데.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나오지요. 우리는 어디에 갇혀있다? 죄에 갇혀 있다. 더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이 죄에 갇혀 있도록 했다. 우리 중에 누가 있습니까? 우리를 다스리는 공중권세 잡은 자가 누구지요? 악마지요. 악마를 가두기 위해서 우리도 가두어줘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악마가 시키는 대로 에베소서 2장 1~2절,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같은 통속인데 우리가 즐거운 것은 둘 다 갇혀 있다는 사실, 둘 다 우리는 유치장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교도소 안에서 악마는 깡패노릇 하고 있는데, 여기에 면회 와서 빼줬으니 악마가 완전히 닭 좇던 개가 됐다 말이지요. 그러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갇혀 있는 우리가 잘나서 벗어난 게 아니고 피 때문에 온 거예요. 우리가 잘나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피 때문에 왔다는 그 은사는 하늘에서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걸 알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왜냐 하면 갇혀 있으면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내 가치는 내가 챙긴다. 나 잘난 것도 내가 챙긴다. 내가 우수한 것도 내가 챙겨야 돼! 그래서 항상 나로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로 돌아가는 훈련 심화 학습 받고 교육 받았어요.
여러분들, 흔히 이런 걸 보지요. 최면술. 가상 잠들게 해서. 지금은 당신이 조선시대에 와 있습니다. “당신의 직업은 뭡니까?” “예, 당신의 직업은 왕자라고요.” “예~ 왕자입니다.” 사람이 최면 걸어 직업 나오는 거 보면 만화에 나오는 거, 소설책에 나오는 그런 것들이에요. 진짜 전생이라는 게 없습니다. 없는데 뭐 속에 있다? 잠자다보면, 시간이야기 해야겠습니다. 시간이 이리 되어 있거든요. 층층이 흘러갑니다. 사암층 있고, 모래층 있고, 자갈층 있고, 암석층 있고 하듯이 시간의 층이 있어서 층이 각자 시작점이 다 달라요. 12살에 시작한 거, 5살에 시작한 거, 30살에 시작한 거 현재 우리의 의식 속에 이걸 무의식이라 한다면 사실은 의식도 무의식의 확장이지만, 이게 자동적으로 흐르다가 뭔가 하나 자동차 사고가 났다. 깜짝 놀랐다하면 이것이 7살 때 나온 기억과 마주치면 그 때 7살 때 먹은 시간대가 용출, 분출되면서 다른 기억들을 제치고 7살 때 만났던 거기에 초등학교 짝꿍 순이, 교통사고 나면서 순이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러다가 또 37살 때 암 선고 맞고 난 뒤에 이번에는 9살 때 기억과 마주치면 그 때 9살 때 내가 커서 뭐가 되려고 했던가, 하고 기억나는 거예요. 이런 기억들, 이런 기억들을 다른 말로 하면 관계, 무슨 관계? '타인과의 관계' 에 기억들입니다.
그래서 진공상태의 기억은 없어요. 전부 다 뭔가 엉켜 있고 섞여 있는 겁니다. 이걸 불교에서는 인연이라 합니다. 필연을 가장한 우연처럼 말이지요. 뭔가 모든 것이 얽히고 섞인 거예요.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다, 이런 거요. 이 모든 것이 인간의 관계예요. 얽히고설킨 게. 그 관계라는 것이 실제 관계가 아니고 내 기억 창고 속에 잠자고 있던 관계예요. 지금 인덕원 오시면서 세탁소에서 무슨 빨래 있던가 기억납니까? 기억 안 나지요. 세탁소에서. 그것은 분명히 세탁소에서 건너올 때, 뭔가 세탁이 있었지만, 내가 거기서는 기억할만한 것이 엮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내 기억 속에 저장할 내용이 없었던 거예요. 결국 이 모든 세계라 하는 것은 나만의 세계입니다. 그 나만의 세계에 갇혀있던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옭아맸고, 자기가 자기를 못살게 굴었고, 자기를 괴롭힌 것은 자기 자신의 추억이에요. 내 인생이라는 것도 일방적인 자기 인생, 남들이 볼 때는 울 필요도 없는데 지 혼자 울고, 재수했다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삼수했다고 뛰어내리고. 중력의 법칙 시험하나? 몸소 중력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듯이 삼천궁녀처럼 우두두 뛰어내린다 말이지요.
주나라 시대 때, 왕이란 것이 얼마나 못된 인간인지, 왕 지가 죽으면 혼자 죽으면 되잖아요. 무릇 500명을 함께 죽여요. 왕 죽었다고. 왜 죽였는지 알아요? 니가 살아있으면 내 추억이 내 죽음 밖에서 계속 돌아가고 있잖아요. 내가. 나하고 맺힌 인연이 만약에 나하고 몸을 섞었던 어떤 일곱째 부인이 내 죽는데 참여 안 해버리면 거기에 또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릴게 아닙니까? 그러면 왕의 자존심, 가치가 어떻게 되는 데요? 그러니 세상이 누구 중심이어야 된다? 자기중심이지요. 왕은 500명 했지요. 귀족은 수십명 됩니다. 결국 돈 있는 놈은 자기 기억마저 계속 영원하게 만들기 위해서 생사람 잡듯이 돈 없는 인간은 자기 세계 되고 싶어도 살아있을 때도 돈 없어서 설움 받고, 죽을 때도 외롭게 자기 기억만 간수하다가 무덤 속에 들어가 버리고. 그래놓고 주나라에 있으면서 백성들이 그게 왕 일방적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지요. 그 주나라가 지금 중국 됐잖아요. 만약에 중국의 최고 인민 최고 높은 사람이 죽을 때, 500명 같이 죽자고 한다면 지금 중국 인민들 들고 일어나겠지요. 한 번 따져 보세요. 왜 같은 인간인데 그 때는 “아이고, 왕이시니까 잘하셨습니다.“ 하고 지금 이 시대에 최고지도자가 죽을 때 자기 부인하고 친척하고 아는 신하들 같이 죽으면 지금은 왜 데모하듯이 들고 일어나는 이유는 뭡니까? 똑 같은 짓을 했는데. 결국은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도 그 때 그 때 달라요. 이게 무슨 이게 진리냐 말이지요. 그 시대는 그게 진리인 줄 알았어요. 김일성 동상한테 비는 게 진리인 줄 알았지요. 그 때는 레닌 동상, 스탈린 동상에 비는 게 진리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레닌동상, 스탈린 동상 다 부셨잖아요. 그럼 뭐가 진리입니까? 갇혀 있음을 아는 게 진리예요. ‘갇혀 있다는 것’ 우리는 절대로 어떤 경우라도 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북한에 있는 김정일 신하가 북한의 김정일에게 이거는 비민주주의에 복종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을 때는 나는 김정일 일가를 규탄한다. 이렇게 나올거다 말이지요. 그러면 니가 손바닥을 왜 그렇게도 비볐느냐? 자기한테 유리하기 위해서. 그럼 그게 진리냐? 나한테는 진리지요. 결국 진리는 뭐냐, 내가 곧 진리요,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생명이다. 결국 보니까 종교라는 것이 저주 주머니 속에 갇혀있을 때, 아무리 성경보고 말씀을 줘도 이게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누가 옆에서 십자가 피를 꽉 쑤셔서 주지 아니하면 펑! 하고 십자가 피를 느끼지 아니하면, 결국 다 지 좋아라고 하는 마귀의 나라로 곧장 변신에 변신을 거듭할 뿐이에요. 이것은 자기의 의만 확장, 저축할 뿐입니다.
그러니 이 십자가이야기를 끄집어내니까 “그만해라, 많이 먹었다. 친구야, 많이 먹었다. 그만해라.” 십자가이야기 그만하래요. 십자가이야기가 이 주머니 속에 안 들려 버리면, 그러면 이 주머니 안은 뭡니까? 큰 종교. 아주 교회가 부흥돼요. 부흥돼도 너무 부흥돼요. 선교사도 수백 명 보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게. 선교사 수백 명 모이고, 교회 크고, 기독교 발전하고 이게 무슨 구원이에요? 이게.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십자가만이 회개의 능력을 주지요. 교회 앞에서는 회개가 안 됩니다. 교회 앞에서는 자랑만 할 뿐입니다. 자랑만 할 뿐이지, 회개가 안 되지요. 자랑질 할 거 고갈되면 나와야 돼요. 자기 의 빼놓고 자랑할 게 없을 때, 마귀한테 갇혀있다, 이리 보면 됩니다. 우리도 평소에 그걸 얼마나 부러워했던가요. 우리도 마찬가지거든요. 나도 욕하지만, 나도 저렇게 자랑할 만한 것이 있으면 십자가 바라보겠습니까? 주님 바라보겠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위험한 갇혀있음에도 갇혀있음을 모르는 그런 세계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이 이야기 듣지만 각자 가정에 돌아가 보세요. 갇혀있는 그 세계 속에 이야기만 잔소리처럼 들려오지요. 제가 드라마를 즐겨보지는 않지만, 보는 이유가 갇혀 있는 모습을 어떻게 그렇게 잘 규격화해서 잘 보여주는지, 마지막에는 결혼으로 끝나요. 결혼으로 끝내면 안돼요. 결혼하고 또 싸우고. 뭐든지 결혼으로 끝내 버려요. 세상의 축복이라는 것이 결국 마귀가 “나가지마, 여기서 우리끼리 살아.” 그런 이야기, 회유하겠다는 이야기, 극동방송, 기독교방송 봤던 사람 이야기 들어보면 우리끼리 갇혀 있는 것, 이 세상의 축복이 주의 축복이라고 그게 예수 믿는 축복이고, 재미이고, 보람이라고 다들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경험을 이야기했지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경험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경험밖에 없다? 사도바울에게서는.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경험에 그 어떤 경험도 주님의 역사하시는 경험도 아니에요. 세미한 음성도 아니에요. 손가락 백 개 나타나도 아닙니다. 그거는 비행접시 비슷한 거고, 귀신 손이고, 바람이 불었다. 그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세미한 음성조차도 아니에요. 결국 뭐냐, 오직 내 앞에 뭐만 보이나니, 십자가만 보이나니, 죽음이야기, 죽음을 빼버리면 인생 모른다.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 그게 성령께서 계속 십자가로 쑤시고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14절 봅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힘쓰라, 라는 말은 이 말씀대로 주께서 그렇게 힘쓰지 않으면 안 되게 우리를 그렇게 조지시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말씀대로만 움직이시거든요. 힘쓰라 하는 말씀이 우리에게 작용하거든 “아, 주님께서 힘쓰고 계시네.” 이리 믿으면 되는 거예요.
15절,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주님은 오래 참으시는구나!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다른 말로 하면, 갇혀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들락 달락, 주님은 어떤 지뢰밭도 다 뚫고, 불도 뚫고, 지금도 들락 달락 하시면서 이 말씀대로 우리를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흠도 없고 티도 없고”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오직 예수님의 피, 하나님의 의, 의를 의답게 보존하는 데는 우리를 들러리로 충분하게 하나님의 말씀에서 놀아나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16절 봅시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성경말씀에는 멸망의 요소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다이하드 그런 영화에 보면 또는 마지막에 나오는 미국형사들 보면 “빨간 줄 끊을까? 파란 줄 끊을까?” 나오잖아요. 온 몸을 얻어터져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 빨간 줄 끊을까? 파란 줄 끊을까? 하면 검찰내부에 첩자가 있어가지고 빨간 줄 끊으라 하십니다. 그래! 하면서 파란 줄 끊잖아요. 반전이 일어나서.
그러니까 성경은 그냥 풀면 풀고 안 풀면 그만이고 그게 아니고 이게 잘못 건드리면 뭐가 이른다? 멸망이 이를 수 있는, 빨간 줄이 멸망이고 파란 줄이 구원이라면, 빨간 줄을 건드릴 수밖에 없는 요인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을 해석한다는 자체가 결국은 그런 가능성이 반반이라면 어디 성경이 무서워서 성경 보겠습니까? 못 보잖아요. 잘못 풀다가는 멸망당하는데 차라리 성경 안 풀고 말지,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성경을 풀게 하실 경우에만 성경이 풀리게 돼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렇습니다. 그걸 설명하겠습니다. 성경은 누가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누가 만들어 가는가? 예수님이 또는 주님이 같은 분이시니까. 주님이 성경을 만들어 가요. 누구에 맞추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을 맞추기 위해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성경이 있고, 예수님이 있다면, 성경과 예수님 사이에는 무슨 관계인가 하면, 아무도 여기에 침범할 수 없는 파이프 같은 게 있다 말이지요. 그래서 이걸 가지고 디모데후서3장 16절에서는 뭐라 하시는가 하면, 성경은 성령에 의해서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썼다 말입니다. 이 말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만이 이 파이프 속에 이 노선 속에 들어와서 성경을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보는가 하면, 성경만 보는 게 아니고, 자기가 교통 순경하는 거예요. 성경 한 번 보고, 예수님 한 번 보고, 성경을 지나서 예수님한테 가는구나! 이걸 보게 되면 풀리게 돼요. 모든 성경은 내게 대해서 증거 한다 하시니까 레위기이든 민수기이든 성경이 주님에게로, 요렇게 풀린다 말이지요.
그런데 성경을 볼 때, 주님이 안 보이는 사람은 성경을 풀려고 나선 사람이 나잖아요. 나한테 납득이 돼야 되니까 성경이 결국 나한테 좋아라고 자기한테 솔솔 오게 되면 이게 바로 주님께서 “비켜라! 누구야? 내 앞에서 얼쩡거리는 놈이 누구야? 마귀잖아! 너는 죽었어.” 이리되는 겁니다. 성경을 풀다가 멸망한 자들이 누구냐? 마귀의 자식으로, 뱀으로 등장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에요.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몰라요. 지금도 유대인들, 하시디즘 하는 게 있어요. 지독한 근본주의 정통 유대인들,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구랫 나루를 안 깎아요. 지가 엘비스 프레슬리도 아닌 게 털을 죽 내리고, 함 속에 성경말씀 있어가지고 팔목에 챙챙 감고, 이마에도 감아요. 남자는 까만 복장, 하얀 옷 해서 머리에는 모자 쓰고 그 위에 카우보이 같은 모자 하나 덧쓰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나는 거룩한 택하신 백성이다!” 이리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는 어디가 있습니까? 없지요. 그 사람들은 참으로 경건하고 정말 거룩해요. 한국교회 목사들 같아요. 개혁주의 청교도들 같아요. 그걸 ‘경건한 사기꾼’이라 합니다. 거룩한 사기꾼들! 뭐가 빠졌지요? 예수님의 피가 빠졌지요. 예수님의 피는 어떻게 생긴 겁니까? 그들을 향해 뭐라고 외쳤어요? 이 독사의 새끼들아! 자식들아! 했더니만, 그들이 “어디 마귀대장이 와서 큰소리 해, 에라~ 죽어라!” 해서 죽였더니만 흘려진 피가 그 피잖아요. 성령께서 그 피를 주워가지고 지금 우리 몸에 갔다 붙여놓은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피의 증인되지요. 피의 증인된다는 말은 뭐를 보여준다? 경건한 사기꾼들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왜 바리새인들이 마귀 새끼인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마귀 새끼가 안 돼요. 왜냐하면, 가장 경건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갇혀있는 상태에서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되지 아니하면 천국 못가지요. 갇혀있는 상태에서 최고점을 찍는 사람, 수능 400점 만점에 400점 맞은 사람 같은 거예요. 모든 행동이 다 1등급이에요. 구제하는 사기꾼, 경건한 사기꾼, 거룩한 사기꾼, 모자 쓴 사기꾼, 털 기른 사기꾼, 하루에 기도 7시간 하고 ‘코셔’라고 해요. 코셔는 뭐냐 하면, 코 쑤시는 게 아니고 이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제조된 식품입니다. 하는 게 그들 동네 슈퍼에 가면 있어요. 코셔 마크가 있는 것만 사는 거예요. 우유제품은 어미와 같이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이고, 온갖 무지무지 많아요. 613가지인가 엄청 있습니다. 그걸 지키는 그들에게는 뭐가 빠져있다? 예수님의 피가 빠져 있다.
이걸 저쪽의 유대인 말고 오늘날 한국교회에 적용시켜 봅시다. 오늘 공부의 적용! 이걸 한국교회에 적용시켜 봅시다. 마귀가 역사할 때 뭐를 뺍니까? 딴 거 안 뺍니다. 경건을 빼는 게 아니에요. 거룩을 빼는 게 아니고 말씀을 빼는 게 아니고 뭐를 뺍니까? 십자가를 빼는 거예요. 십자가를 뺄 때, 하나님의 의가 빠져 나가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피를 뺄 때, 하나님의 의가 빠져 나와요. 그러면 뭐만 남아 있어요? 자기 자랑거리, 자기 의, 자기 우수함, 자기 잘 믿음, 자기가 베푼 성령의 열매들,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악령의 열매지요. 그런 것들을 그들은 내세우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편지에는 바로 그들이 불의 홍해바다를 건너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로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편지를 써버립니다. “멸망 받을 자는 제발 멸망 받을 애굽에 머물러 있어 둬! 자꾸 담 넘어 보지 말고, 천국 어떻게 생겼나 보지 말고, 니 동네나 깨끗이 청소해라, 그 나라 의를 만들어라, 그 동네 천국 만들어라.“
천국이라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만 사람에게만 보이는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는 뭐가 날아간다? 자기의 모든 의, 나는 강도요, 세리입니다. 그런 고백하는 사람들만. 자랑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만 모여 있고 저 쪽에는 지 자랑만 모여 있는 거예요. 설령 그 사람이 담 타넘어서 천국에 왔다 할지라도 그 나라 싫어, 왜? 자기를 사랑하는 이상은 그 나라 살수도 없을뿐더러 살아도 재미하나도 없어요. 재미없어도 너무 재미없어. 아니 지 자랑 못하는 세계에 답답해서 어떻게 삽니까? 그렇잖아요.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은 입만 열면 내 자랑하는 내가 싫어. 싫어도 그냥 싫은 게 아니고 내가 너무 싫어. 입만 뜨면 내 자랑하고 지 역사 자랑하고, 지 과거 자랑하고, 지 잘 란 거 자랑하고 내가 너무 싫어. 십자가만 자랑하고 싶어. 그런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에게는 사람이 풀 수 없는 그런 성령으로 기록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하신 모든 일들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갈 사람은 가고 남아있을 사람은 남아있게 하는 분류작업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마음껏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루어지고 거기에 이용당하는 그 기쁨을 저희에게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