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와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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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12년 8월 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5:16-22
(애 5:16, 개역) 『우리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이니이다』
(애 5:17, 개역) 『이러므로 우리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이 어두우며』
(애 5:18, 개역) 『시온 산이 황무하여 여우가 거기서 노나이다』
(애 5:19, 개역)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
(애 5:20, 개역)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애 5:21, 개역)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 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 5:22, 개역)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
설교자들은 오늘 본문을 놓고 무척 당황스러워합니다. 그것은 21절과 22절이 뒤 바뀌지 않았나 하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21절이 제일 뒤에 가고 그 바로 앞에 22절이 있으면 이는 곧 극한 환란과 절망 가운데서 희망의 빛을 잃지 않고 있다는 상황이 됩니다. 반면에 22절이 제일 나중에서 21절이 그 앞에 놓였으면 아무리 희망을 품어도 결국 절망이 마지막을 장식한다는 뜻이 됩니다.
자 이 둘 중에 어느 쪽이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게 될까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중간에 극한 절망 속을 헤매더라도 희망으로 끝나는 것이 하나님답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런 안목이 바로 인간의 문제점입니다. 인간들은 일단 자기 자신을 살려 놓겠다는 의욕이 근본적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어디선가 희망의 숨통을 터놓았겠지 라고 믿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이러한 의도를 무산시키십니다. 일체 인간의 바람을 거부하십니다. 설사 인간들이 간절한 희망의 소망을 쏟아내어도 하나님께서는 그저 마저 저주로 되갚아주십니다.
오늘 본문 22절이 그 말씀입니다. ‘우리를 아주 버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특별난 진노하심’이 인간의 모든 예측을 능가하고 빗나가게 만든다는 겁니다. 일체의 낙관이나 희망의 씨도 허용하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특별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브라함의 약속이 개입됩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이란 ‘약속의 땅’과 ‘약속된 씨’, 곧 ‘약속의 자손’을 언급하셨습니다. 여기서 ‘약속’이라는 것이 인간들의 마음 속에 사전에 들어있는 그런 속성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곧 약속이 주어져도 인간들은 그것이 약속인 줄 모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살 궁리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정작 말씀의 주인공이 인간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조차도 하나님 위함이 아니라 인간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것처럼 오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도리어 인간의 들러리로 전락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 영광에 밀려나서 천대받게 됩니다.
그래놓고서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운운합니다. 이것은 인간 쪽에서 말씀을 최선을 다해서 성의껏 지켜줄 테니 정작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원하는 바를 제 때에 충분하게 채워달라는 요망입니다. 이것은 인간 대 인간끼리 장사할 때나 써먹을 의식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으로 사는 것은, 어떻게든 하나님께서는 인간 본인들의 꿈을 끝까지 부수지 말라는 의지천명입니다.
인간은 아무런 이유나 목적이나 의미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자기 자신만이 끝까지 살아남아야 된다고 우깁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본적으로 이런 의지 천명과 결탁시키려고 시도합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유독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저주를 퍼붓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약속의 씨로서 약속의 땅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 자체가 뭔지를 꼭 온몸으로 체험해야 될 대상자로 선택당한 민족입니다. 여러분들이 팔레스틴 땅이나 이스라엘이나 가나안 땅을 방문하신다면 거기에서 평범한 땅을 보게 되실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땅말입니다. 거기에 가면 ‘약속의 땅’이라는 팻말을 붙여놓지 않았습니다. 그냥 땅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 평범한 땅이고 특별난 풍광도 없으면서도 ‘약속의 땅’이 될 수 있는 겁니까? 그것은 거기에 ‘약속의 씨’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살아계신 거룩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온 민족입니다. 따라서 그들만큼은 이 세상의 어느 민족과는 다른 특이한 동행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저주입니다. 곧 ‘약속=저주’요 ‘약속=심판’입니다. 인간에게 남아 있을 그 마지막 존엄성과 자존심과 의미와 가치를 겨냥하여 사정없이 저주를 퍼붓는 그것이 바로 약속입니다. 살려고 하는 자를 도리어 심하게 죽여버리는 능력이 약속에서 나오는 저주입니다. 왜 그런 겁니까? 왜 인간하고 협상이나 타협이 되지 않는 걸까요?
그것은 약속의 끝은 십자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마저 죽어야 된다는 그 내용이 곧 약속이 궁극적으로 담아 내어보일 약속입니다. 사람이기에 사람이어야 하는 그 사람들의 여망을 저주와 분노와 심판으로 공격하는 것이 약속입니다. 고린도전서 15:23을 보면, 예수님을 부활의 첫열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이 수두룩한데 어떻게 예수님을 부활의 첫열매라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전의 사람들은 제대로 죽음다운 죽음을 죽어본 적이 없는 자들입니다. 즉 약속에 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궁극적이고 극단적인 저주스러운 순간을 그들은 맞이한 적이 없는 겁니다.
따라서 미완성적인 약속을 그들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일말의 희망이라도 품을 자격이 자신들에게 있는 것처럼 여기면서 하나님의 그 다음 행적을 사모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작고 희미한 일말의 희망마저 철저한 분노로서 제거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자신의 가치를 쥐려는 것조차 죄가 되고 저주와 심판을 유발하는 요인임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희망을 가지고 감히 약속의 실체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약속을 자기 포부와 연계한 바로 그것이 잘못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게는 감히 맛보지 못한 저주와 심판을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서 사는 약속이 씨앗에게 퍼붓게 됩니다. 약속의 진수를 맛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니이까!” 아들마저 사정보지 않고 버리시는 그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이나 다른 하나님의 약속은 없습니다. 부활이란 죽는 체 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궁극적인 죽음에 참여 될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축복과 기적이란 예수님의 죽으심에 함께 참여된 상황을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자기를 건지는 식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능력만이 사람은 건짐받습니다. 그래서 구약 선지자들은 예수님만을 고대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 생각 가장 깊은 곳에 예수님의 죽음이 담겨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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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13강-애가5장 16-22(저주와 약속)12080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5장 16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0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애가 5:16-22
“우리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이니이다 이러므로 우리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이 어두우며 시온 산이 황무하여 여우가 거기서 노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 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
하나님하고 대화할 때 우리 인간 쪽에서 만약에 우리가 지어내서 기도한다면 아무런 계시가 없고 아무런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도 하나님이 뜻도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상상해서 기도하라 하면 절대로 이런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쉬운 것 기도하고 안 들어주면 말고 그렇게 되죠.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이 실존한다. 하나님이 실제로 있는지 여전히 모호한 상태기 때문에 있으면 좋고 없어도 아쉽지 않도록 자체적인 방어망이 구축돼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으면 보너스를 얻을 것이고 없으면 없는 그 상태로 자기 살림을 꾸려나갈 만반의 준비자세가 돼 있기 때문에 그렇게 다급하다든지 그렇게 진지하질 않아요.
그런데 여기 예레미야 애가 방금 읽었던 본문에 보면 기도하시는 예레미야는 대단히 진지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로 진지하냐 하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지 아니하면 나는 이 세상에 있어도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할 정도로 그 정도로 하나님만 쳐다보고 하나님만 애타게 그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럼 이런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도 기도하시고 선지자도 기도했지만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 기도하는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기도 받는 하나님이 중요하시기 때문에 따라서 기도해야 될 우리가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이 먼저 중요하고 또 ‘하나님이 중요하십니다.’를 외쳐야 될 우리들이 그 다음에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보통 세상 사람들 기도할 때는 내가 일단 중요하고 그 다음에 내 소원을 들어줘야 되기 위해서 2차적으로 하나님이 중요하고, 그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예레미야는, 선지자들은 반대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이렇다고 이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 자기가 모태로부터 이미 택함을 입었다. 선지자로 택함을 입었다고 단정되어 나옵니다. 그래서 그 선지자와 하나님, 하나님과 선지자의 관계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선지자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뜻이란 말은 다른 데는 뜻을 찾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선지자에게 기름 부어서 선지자 노릇을 함으로서 우리가 단독적으로 내 아쉬운 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조성하는 나쁜 버릇, 하나님의 뜻이 없는 상태에서 내가 억지로라도 뜻을 이런 뜻일 것이라고 만들어 내는 오류, 그런 오류들을 이 성경 말씀에 나오는 말씀들은 그걸 칩니다. ‘니가 지어내 봐야 그건 다 환상에 불과하고 상상, 허상에 불과하니 제대로 돌아오려면 성경 말씀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와야 됩니다.
평소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이렇게 힘듭니까? 아니면 내 뜻대로 세상이 안 돌아가서 힘든 겁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상이 자기 마음먹은 대로 안 돼서 세상 살기 힘들다 어렵다.‘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정확한 주의 뜻이 몰라서 궁금해 하는 사람 같으면 그야말로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정말 성도입니다. 관심사가 주의 뜻에 가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만 ‘주의 말씀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과연 신자인지 의심이 든다.‘라고 평소에 자주 언급합니다. 주의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말은 관심사는 내 뜻을 이 땅에서 어떻게 달성하고 성취하느냐, 거기에 뜻이 집중돼 있다 이 말이거든요. 내 포부와 내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집중하다 보니까 거기다 하나님이란 단어를 섞어버리면 하나님의 본래 뜻은 잘라버리고 하나님이란 단어와 용어만 달랑 빌려와서 현재 내가 먼저 장만해 놓은 이 뜻을 하나님은 무조건 이것을 성취해야 내가 믿을만한 하나님이 되니까 알아서 조치해주세요.’라고 억지를 부리는 그런 식의 종교생활이 되겠죠.
그런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이미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우리는 뭘 해도 죄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죄밖에 안 되니까 내가 내 뜻을 펼쳐놓은 것은 이미 십자가 앞에서 죽음 앞에서 가로막혔으니까 이건 포기하고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전달되는 하늘의 진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그런 쪽에 관심을 가지고 그 뜻을 위하여 우리가 성도로 택정함을 입었다는 사실에 그런 식으로 인생을 정리해 나가는 겁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성도가 되겠죠.
물론 자기 능력으로는 그렇게 안 되고 스스로 성령께서 이렇게 역사하시고 일 하셔서 그 순간, 그 순간마다 내 뜻보다 주의 뜻이 우선인 것을 깨닫는 그런 기쁨의 순간들이 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제가 말씀드릴 것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선지자와 하나님, 하나님과 선지자의 돈독한 관계 속에서 비로소 전달된 그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오늘 본문 마지막에 나옵니다.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 이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이 말씀을 빼고 싶죠. 이 말씀이 성경에 없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이 예레미야 5장을 읽은 어느 목사나 주석가들이 22절의 말씀 때문에 굉장히 신경이 불편해 졌어요.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 그냥 버린 게 아니고 아주 버리셨으며, 특별히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특심하게 주어졌음이라는 예레미야 애가는 끝이 납니다. 그래서 이 주석가나 목사들이 이 22절이 눈의 가시처럼 자꾸 켕기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거예요. 22절하고 21절을 살짝 바꿔보는 거예요. 그럼 21절이 뭐냐 하면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 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요걸 뒤로 돌리고 21절 자리에다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 이걸 살짝 바꿔치기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절망은 절망대로 있되 결국 끝은, 그 마지막은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키려는 본론이 늘어났다. 이런 식으로 주의 뜻을 정리하려고 그렇게 트릭을 씁니다.
그것은 바로 여전히 교회가 목사 자기 뜻이 주의 뜻이다.‘라고 이렇게 고집을 부리니까 성경말씀을 바꿔치기하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바꿔치기하면 안 돼요. 22절이 마감이 돼야 됩니다. 그럼 22절을 생각한다면 아주 우리를 버렸다는 것은 너무 절망적이죠? 그럼 기도하고 신앙심 갖는 보람이 없지 않은가, 그들은 이렇게 들고 나옵니다. 열심히 기도한 보람도 없고 하나님을 끝까지 믿었던 보람도 없이 결국 버림받으면 그러면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 하겠느냐, 누가 신앙생활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이렇게 하는데, 저는 이야기합니다.
왜, 당신은 버림받으면 안 되는데? 결국 ‘나는 버림받으면 안 돼.’라는 마음이 사람들 마음 제일 밑바닥에 딱 장착돼 있어요. 고건 안 들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위에다가 ‘죄인입니다. 죄인의 괴수입니다. 우리는 뭘 해도 진노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 소리는 헛소리, 개소리예요. 그건 진짜 진실 된 자기 마음은 안 들키려고 생각했죠. 설마 요 마음은 안 들키리라 딱 숨겨놓고 고걸 안 들키기 위한 술책이 뭐냐 하면 자기 죄인인 척하는 거예요. ‘천하에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뭐 어떻습니다. 주를 죽인 죄인은 제가 바로 죄인입니다.’ 요렇게 멘트를 날리는 이유가 이정도로 나는 주님에 대해 죄인인 걸 아니까 ‘주여 저를 버리지 마옵소서.’ 이런 무슨 장사가 있습니까? 이런 흥정이 다 있어요? 누구 마음대로 그런 트릭을 쓰죠?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지만 그런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여기 22절 끝에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 요걸 몰라서 그래요. 특별히 심하면 특별 조치를 내립니다. 어디서? 약속의 땅에서. 누굴 향하여? 약속된 씨, 약속된 자손. 씨, 경상도 말로 시가 아니고 씨! 약속된 씨, 아브라함의 자손 그 씨, 약속된 땅, 약속된 씨, 요번 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어요. 약속의 땅 보신 적 있습니까? 그랬어요. 아무도 약속의 땅을 본 사람이 없어요. 왜, 가보면 땅이지, 약속의 땅이 없어요. 거기에 ‘약속의 땅’이라고 글자로 플랜 카드 붙여놓은 것 없어요. 그냥 보통 땅 이예요. 이건 백 사람이 봐도 그냥 땅이고 이스라엘 땅이고 팔레스타인 땅 이예요. 천 사람이 봐도 그냥 땅 이예요.
거기가 약속의 땅으로 보이는 사람은 오직 약속으로 된 씨에 해당되는 사람만 그 땅이 약속의 땅이지, 옛날 그것도 옛날 아브라함 시대에, 아브라함의 눈에만 약속의 땅이지, 그 아브라함이 들어오기 전의 원주민에게는 약속의 땅이라고 하면 ‘웃기네.’ 한다고요. 자기네 땅이지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거기가 그냥 땅으로 보이고 약속의 땅으로 안 보이는 이유가 약속하신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 성경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렇게 눈에 보이는 어떤 아저씨하고 상대할 것 같으면 성경 어렵지 않습니다. ‘아저씨, 이거 아저씨가 지었어요?’ 이렇게 묻기고 하면 되는데 성경말씀은 성령으로 돼서 성령 자체가 보이지 않아요.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보이게 하는 하나님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믿을래? 안 믿을래?’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행할래? 안 행할래?’가 아니고 ‘니가 믿나? 안 믿나?’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원인도 없이 원인이 인간 쪽에서 어떤 원인이 나오지 않았는데 주께서는 그 약속의 땅에 특심한 심판과 저주가 퍼붜졌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그 땅이 약속의 땅이 되려면 그 땅이 사람의 예상을 넘어서 무서운 진노와 저주가 퍼붜줘야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결국은 전 세상이 모두 약속의 땅에 포함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옛날 구약에는 이스라엘 땅, 아브라함이 살던 그 땅이 약속의 땅 이예요. 그 바다 건너 유럽이나 저쪽에 있는 중국이나 저 일본이나 예수님 태어난 시대가 주몽이 막 고구려를 세웠던 그 시대고 아마 신라 백제도 그때 세워졌을 아마 그때가 예수님 기원전쯤 돼요. 그 전에는 한 ..시대고 그 전에는 고조선 시대고, 그때 그 한국 땅 고조선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그때는 약속의 땅 따로 있고 일반 땅 따로 있어요.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것을 일반 땅에 없는 것이 있을 때 약속의 땅 이예요. 하나님의 약속은 약속이 내려진 그 무대가 아브라함이 살던 그 땅,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인데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들은 어떻게 오해했느냐 하면 지리적으로 ‘여기서 요거 넘어가면 아브라함이 약속한 가나안 땅이다. 가나안 땅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이다.’ 이렇게 편하게 생각한 겁니다. 그거 오해거든요. 약속의 땅은 사람이 건너가서 살면 되는 곳이 아니고 약속이 사건화 되어서 터져줘야 그게 약속의 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라는 것이 한두 개 떨어져서 약속의 땅이 아니고 그 약속의 끝이 뭐냐, 약속의 끝까지 약속된 끝이 마지막으로 다 퍼붜 줄 때 그게 약속의 땅 이예요. 그 약속의 끝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특심한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약속의 땅이라는 건 하나님만이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땅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내려준 땅이라는 것은 선악과 따먹은 모든 인류에게 무서운 진노와 저주를 내리시는 그 권한이 하나님만이 내리실 수 있는 권한이고 약속의 마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마감을 보여주는 거예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이 아브라함 자손이면서도 진정한 아브라함 자손에게는 뭐가 임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특심한 저주, 특심한 심판이 와 닿을 때 그게 바로 약속의 종착점, 약속의 끝입니다. 그걸 예수님의 몸은 그걸 다 받는 거예요.
사람들은 약속이 끝이어야 되는데 중간쯤 돼서 ‘하나님, 제가 뭘 하면 구원을 받겠습니까?’ 자꾸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 자기는 챙겨놓고 자, 하나님의 복은 저쯤 있으니까 내가 저기 있는 복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저쪽에서 쏘아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차근차근 지켜 나가면 비로소 나는 약속의 사람, 천국 가는 사람이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께서 보낸 그 모든 말씀의 끝이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그 안에 머금고 있어서 그것이 나의 마지막 자존심, 마지막 살고자 하는 의지, ’누가 죽더라도 나는 살아야 돼.’라는 그 살려는 마지막 의지마저 그걸 갉아먹고 그걸 폭파시킨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겁을 내는 거예요.
끝까지 가서 끝까지 구원받아야 되는데 무서워서 대충 가서 지 맘대로 끝이라고 여기고 자, 이쯤 왔으니까, ‘주여, 약속대로 복 주셔야지.‘ 이러는 거예요. ’주여, 이정도 죽은 척 했으니까 이제부터 죽으면 끝이고, 부활의 복을 주옵소서.‘ 죽음의 끝은 안 오고, 예수님은 죽음까지 가서 사흘 만에 부활했는데 우리는 어설프게 죽지도 않고 대충 와 놓고 ’주여, 이정도 같으면 제 딴아 많이 죽었으니까 이제 영생 주옵소서.‘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무슨 이런 거래가 있습니까?
금은방에 가서 다이아몬드하고 다른 물건을 사면서 ‘얼마입니까?’ ‘예, 600만원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하고 100만원, 200만원, 주인이 ‘다 주소.’ 하면 300만원, 400만원, 550만원, 590만원, ‘590만원 받고 주소.’ 하면 ‘아니 마저 값을 치러야지.’ ‘당신 봤잖아. 나도 나름대로 성의를 다해 줬다니까.’ ‘아니 값을 다 치러야 된다니까.’ ‘그래도 성의는 다 보였잖아, 이정도 했으면 줘야지.’
여러분 다 아시는 이야기해 볼게요. 예수님께서 우리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쳤습니다. 제 말 틀렸습니까? 이 말하고, 예수님께서 우리 죄 값을 다 치르기 위해서 죽는 척 했습니다. 어느 게 맞습니까? 죽는 척 하신 거예요? 죽으신 거예요? 목숨을 내놓는 척 했습니까? 목숨을 내놓은 겁니까? 목숨을 내놨잖아요. 값을 다 치렀잖아요. 91% 치른 게 아니잖아요. 값을 다 치렀잖아요. 그럴 때 그 주님 받으시고 부활로 갚아서 생명, 영생을 주셨다 이 말이죠. 그것이 성령의 작업이거든요.
그 성령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우리에게 뭘 가르치십니까? 우리가 타고난 본성, 다시 말해서 가장 귀한 것은 감춰서 들키지 않으려고 하고 대충 내 생각에 하나님께 성의만 표하는 그 정도로 하나님께 성의를 다하는 그 정도 수준으로서 자기가 할 도리를 다하게 되면 ‘주께서 성의를 봐서라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정성을 봐서라고 복 주겠지.’ 라는 어디서 사람들하고 놀던 행세를, 어디서 감히 교회 와서 하나님을 상대로 그러한 꼼수를 씁니까? 이거는 용서와 용납이 안 됩니다.
구약은 미완성 시대예요. 신약이 아니라서 미완성 시대입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로 선지자지만 메시아는 아니에요. 예레미야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우리가 주께 돌아오게 하옵소서. 그런데 어떻게 몽땅 버리십니까?’ 요게 바로 예레미야 마지막 대목입니다.
예레미야는 우리의 솔직한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어요. ‘하나님이여, 우리는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죄지었지만 할 수 있거든 주께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해 주옵소서. 그런데 주께서는 아주 버리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진노가 우리의 예상을 넘어서 특별한 조치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우리에게 완벽한 저주를 퍼붰습니다.’ 그걸로 끝나버려요.
티끌만큼이라도 우리 아이디어로서 내가 구원받는 일은 일체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디어! 내 뜻으로 내미는 제안이나 대안, 이런 걸로 구원받는 일은 일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에 놀아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창세전에 하나님은 우리하고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의논해서 구원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우리보고는 이럽니다. ‘니 좀 빠져줄래? 좀 니 좀 나가줄래? 빠져줄래?’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약속의 땅만 약속의 땅이 아니고 중국도 약속의 땅이고 아프리카도 약속의 땅인 이유는 마지막 심판이 주께서 당했던 그 저주가 결국에는 온 지구상에 전부 다 임한다고 누가복음 21장에 나옵니다. 온 지구상에 모든 이에게, 하나도 예외가 없어요. 심지어 이미 죽었던 자들까지 다 산채로 회생시켜서라도 하나님의 특심한 저주와 심판이 모든 자에게 내려짐으로 말미암아 어떤 특정 지역이 약속의 땅이 아니라 실은 이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땅이 주께서는 약속의 땅 화(化) 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전환시켰습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성취가 받아내야 될 그런 모든 땅이 나의 약속의 땅이 되는 겁니다. 이제는 성소란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세계, 내 옆집이 내 골목이 우리 집 입구가 약속의 땅 이예요. 동시에 이 약속의 땅은 저주 받을 땅이라서 저주를 받아야 될 땅이요. 그 땅에서 부활의 영으로 회복한 땅이 어느 땅이냐,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 땅이 저주받은 땅을 근거로 해서 새 하늘 새 땅이 주어지는데 그 근거에 개입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피를 믿는 자, 적시는 자만 그 새 하늘 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디다 희망을 걸고 있습니까? 예레미야가 이런 기도한다는 건 아직도 자기 몸에 대해서 기대를 걸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약속의 땅이 이곳이 약속의 땅이라고 할 때 그런데 뭐를 놓치고 뭐를 모르고 있느냐 하면 자기 몸이 온전히 약속의 땅에 합당한 약속의 씨인가에 대해서는 예레미야가 돌아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걸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주시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니가 약속의 땅을 넘나볼 수 있는 자격이 못 된다는 겁니다. 니는 버림받아야 돼요. 마치 누구와 같이? 우리를 대체하신 인물, 예수님이 아버지께 버림받듯이.
그래서 예레미야는 구원받을 생각하지 말고 다시 오실 메시아를 기다려야 돼요. 기다리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안 돼, 나는 안 돼, 내가 경험한 거, 내가 한 것 가지고는 구원이 될 수가 없어. 구원은 나 말고 다른 몸이,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다른 몸에 의해서 그분이 값을 치러야 그래야 내가 구원받는 거야.’라고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게 되고 기다리는 겁니다. 그것이 변화 산에서 모세도 그러했고 엘리야도 그러했고 아브라함도 그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그렇게 될 거예요. 구약의 죽었던 성도들은 바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예요. 아브라함 품에 안겼던 거지 나사로도 메사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를 기다렸던 겁니다. 왜, 그분만이 약속을 약속대로 성취하고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가 약속의 사람이라고 자부했는데 진정한 저주가 오지 아니하면 약속의 사람이 될 수 없어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약속의 씨앗, 또는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약속이 끝까지 완결판이 주어질 때 약속의 사람, 약속의 씨, 약속의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약속의 완결판은 우리한테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한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는 이런 어려운 말씀이 있어요. 어떤 어려운 말씀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 했습니다. 보신 적 있죠? 그걸 보시고 약간 의심 들지 않았습니까? ‘어, 아닌데, 회당장의 딸도 죽었다가 살아나고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도 죽었다가 살아나고 에녹도 죽지 않고 갔고, 엘리야는 시체도 없이 산채로 불 수레 타고 하늘로 승천했는데.’ 어떻게 부활의 첫 열매가 예수님이라면. 그럼 그 전에 왔던 그 분들은, 두 번째 세 번째라면 뭡니까? 그런 생각 안 들던가요?
부활의 첫 열매라 했는데 그럼 부활 이전에는 부활된 사람이 없을 때 부활의 첫 번째 주자가 되는데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이미 많은 사람이 살아났거든요. 어떤 사람 엘리야 무덤에서 닿아서 살아난 사람도 있었거든요. 심지어 예수님보다 먼저 부활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었을 때 예루살렘에 있는 무덤, 공동묘지가 열리면서 죽은 자가 살아났어요. 그러면 예수님보다, 예수님은 사흘 뒤에 살아났으니까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보다 그들이 먼저 부활의 첫 열매가 아닐까요?
여기서 시간적은 서열은, 시간적인 순서는 이건 약속의 땅의 원칙에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약속의 땅은 약속에 관한 모든 것은 수평적인 시간의 수평적 흐름이 아니고 수직적으로 예수님이 첫 번째 열매고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거예요. 부활의 주의 자리에서부터. 주의 자리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주께서 주의 자리를 포지션 위치를 마련해 주고, 주의 자리 마련된 오른편, 주의 자리 앉을 때 비로소 주의 자리가 성립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약속의 전부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예레미야는 본인이 약속의 백성이라고 여기고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는 언약의 백성이라고 하고 자기 자신을 기준해서 약속이라고 우기니까 이상스럽게 그 약속의 씨가 살고 있는 약속의 땅에 자꾸 뭔가 불안정한 것을 느끼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 들어갔으면 이방나라가 안 쳐들어와야 되는데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난 뒤에 주변의 모압, 블레셋 미디안도 심심하면 쳐들어오는 거예요. 무슨 이런 약속의 땅이 다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예수 믿고 만사형통해야 된다고 생각 하는데 만사형통하던가요? 오히려 반대죠? 만사 안 형통이죠? 만사 꼬임! 그건 우리가 갖고 있는 약속이 내 소망이 주의 약속이 아니고 ‘나는 저주받아 마땅함’이 약속이기 때문에 그걸 우리가 깜박깜박 잊어버려요.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고 요번에 강의 한 주제처럼 우리는 무시당해도 마땅하다. 이것을 자꾸 잊어버리고 ‘난 무시당하면 안 돼, 왜, 약속의 자식이니까.’ 자꾸 자기가 무시당하지 않는 용도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성자 성령을 자꾸 도용하는 그러한 버릇, 그 어디서 꼼수를 쓰냐 말이죠. 꼼수를. 예수님은 목숨을 다 내놨는데, 우리는 아깝다고 쥐고 있으면서 부활을 넘보고 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의 뜻을 봅시다. 이 뜻은 예레미야는 뭔가를 다 알았다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기도를 통해서 얻는 겁니다. ‘주여,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겠습니다. 내가 요런 꼼수를 쓰면 구원하겠지, 요렇게 겸손하고 요렇게 마음 낮추면 구원하겠지, 복 주겠지.‘ 이게 아니라 그냥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다 하시면 그걸로 저는 믿습니다.’ 이걸로 끝납니다.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게 약속의 자식이고 그런 사람만이 약속의 땅,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님 앞에 사람 쓰는 꼼수를 주 앞에 쓰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은근히 딴 거 세상적인 야망을 노리면서 아닌 척 하면서 겸손의 티를 내고, 기도 많이 하는 척, 복음 잘 아는 척 했던 모든 것들, 이걸 확 파헤쳐서 우리는 진노 받아야 마땅한 그 자리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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