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예레미야애가 4:18-22 / 함정 본문
함정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4:18-22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오용익 12강-애가4장 18-22(함정)12072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4장 18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49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애가 4:18-22 “저희가 우리 자취를 엿보니 우리가 거리에 행할 수 없음이여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이 다하였고 우리의 마지막이 이르렀도다 우리를 쫓는 자가 공중의 독수리보다 빠름이여 산꼭대기에서도 쫓고 광야에도 매복하였도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저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저의 그늘 아래서 열국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우스 땅에 거하는 처녀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므나 잔이 네게도 이를찌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처녀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않게 하시리로다 처녀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딱 보면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나열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해서는 이것을 현실적으로 옮기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 대해서 감동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내 입맛에 맞지 않는 일을 서술하기에 그렇습니다. 내가 고대하고 내가 얻고자 하는 그 결과에 대해서 성경은 전혀 관심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성경이 우리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도 성경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두지 않고자 하는 마음, 결심이 이미 서 있는 겁니다.
사람이 사귄다는 것은 서로 서로 좋을 경우에, 서로에게 이익이 될 경우에 사귀는데 나는 얻을 것이 없고 그냥 일방적으로 강요한다면 더 이상 그 상대에 사귄다는 것이 괴롭겠지요. 우리가 예수님과 사귄다 할 때 우리가 어떤 오해에 빠진다면 예수님께서 내 뜻과 기대대로 해 줄 경우에만 메시아다,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내 뜻대로 안되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소홀할 수밖에 없어요. 전혀 어떤 이득이 나오지를 않는데 언제까지 주님만 쳐다보면서 희망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날마다 주님께서 우리의 희망을 꺾어놓는 판국에. 그래서 우리는 예레미야애가 4장 끝을 보면서 여기에 나오는 이 내용이 도무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감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선뜻 감이 오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실제로 주님께서는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메시아로 왔는데 사람들은 메시아를 찾고 있어요. 참 희한하지요? 지금 이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자이시고 더 나아가 심판주가 되시는 분이, 세상 마지막 날 심판하실 분이 이 땅에 이미 왔어요. 구체적으로 이름도 밝혔습니다. 예수, 나사렛 예수라고. 물론 사도바울이야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서야 안 사실이지만. 메시아가 이렇게 이미 왔는데 사람들은 지금 메시아를 못 찾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마음에 맞는 메시아, 자기의 뜻에 맞는 구원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네 구미에 맞는 메시아 보내줄게’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고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메시아가 나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엉뚱한 메시아를 메시아로 찾고 있다 보니 정작 오신 메시아를 무관심하게 놓쳐버린 경우를 우리가 지금 보내고 있구나,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화들짝 놀라고 아주 충격적으로 받아 들어야 될 그런 모습으로 메시아는 오셨습니다.
딱 깨놓고 이야기해서 진짜 메시아가 온 것을 믿게 된다면 그 사람은 발가벗고 시내 돌아다녀도 전혀 주눅들 일이 없습니다. 집이 홀라당 불이 나도 주눅들 일이 없어요. 자기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 때문에 메시아가 왔다는 사실이 주는 그 충격과 기쁨을 빼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메시아를 진짜 만나버리면 우리는 그동안 엉뚱한 메시아를 찾고 있었다는 후회감과 더불어 그것이 기쁨으로 변하지요. ‘아, 내가 익히 알던 메시아를 만났더라면 인생 끝장날 뻔 했다. 내가 생각하지 않고 내가 기대하지 않은 다른 메시아가 오셔서 나로 하여금, 너 지금 실수하고 있는 거야, 너 잘못 살아 온 거야.’ 하고 지적받을 때 그 지적받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요? 세상에는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런 기쁨이 매일같이 계속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설교한 것을 다시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메시아를 주께서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뭔가 내가 잘못 살았다는데서 오는 충격적인 즐거움,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한 경우가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본문도 그렇고 이 예레미야 애가 전체가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이 예레미야 전체 내용이 뭐냐 하면 ‘놀랬지?’입니다. ‘놀랬지? 하나님께서 일을 그렇게 처리하실 줄 몰랐지. 그리고 놀랬지?’
만약에 내가 우리 가정에 기대한 것이 있을 때 그것이 뜻대로 안될 때는 짜증이 납니다. 그런데 뜻대로 안되게 하신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뜻대로 안되게 하신 그 분이 바로 장차 오실 메시아인 것을 안다면 주께서 ‘놀랬지?’ 하는 그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으로 ‘정말 놀랬습니다. 아이고, 그동안 내가 잘못 살았군요. 이제야 그것을 깨닫다니 정말 기뻐서 놀랬습니다.’ 할 정도로 그런 기쁨의 놀람이 우리에게 찾아와 줘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현실을 보는 눈이 다시 한 번 바뀌어 져야 되는 거지요.
그러면 그 당시에 이 예레미야가 전했던 이 말씀 오늘 본문에 대해서 그 당시 사람들 중에서 만약 이 말씀을 기쁨으로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오늘 본문가운데서 어느 대목에서 큰 기쁨을 누리겠습니까? 18절에 보면 “저희가 우리 자취를 엿보니 우리가 거리에 행할 수 없음이여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이 다하였고 우리의 마지막이 이르렀도다.” ‘우리의 마지막이 이르렀도다.’라는 이 대목, 이 대목에서 마지막에 이른 것을 미리 앞당겨서 그 마지막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말끔하게 싹쓸이하고 다 가져가는 거지요. 내 것이 없는 것, 마지막 남은 내 것까지 싹쓸이해서 하나님께서 다 철거하고 치워버리는 것, 더 이상 내 것이라는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를 상상해 봅시다.
내 집안에 내 신상에 내 것이라는 것은 깡그리 다 날라 가버렸을 때, 심지어 마지막 최후까지 남아 있는 내 귀한 목숨, 그동안 살려고 애썼던 그 목숨마저 깡그리 손을 털어야 될 때가 왔을 때, 여러분, 기쁩니까, 아니면 괴롭습니까? 홀가분합니까, 아니면 무거운 짐입니까? 마지막 남은 내 목숨까지 털털 털어야 돼요. 툭툭 털면 먼지만 남고 이제는 아무것도 없어요. 이제 내 목숨마저 떨어질 판국이에요. 그럴 때 홀가분합니까, 아니면 속상합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했다는데서 오는 차이겠지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했다는데서 우리는 기쁨입니다. 그동안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온 거지요.
그런데 여기에 보면 그 마지막에 등장인물이 하나 등장하네요. 19절에 보면 “우리를 쫓는 자”가 등장합니다. 이 마을 다시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을 탈탈 털어서 아무것도 없게 만들어요. 이제 끝이니까 몽땅 다 거덜 났어요. 19절에 보면 “우리를 쫓는 자가 공중의 독수리보다 빠름이여 산꼭대기에서도 쫓고 광야에도 매복하였도다.” 그러니까 우리를 탈탈 털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쓰시고 다루시는 우리의 적이 상당히 날쌔게, 일을 처리해도 아주 철저하고 오류 없고, 하자 없고, 실수 없이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탈탈 털어내는 일단의 무리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둘을 합쳐보면 뭐가 되는가, 그게 바로 전쟁입니다. 제가 글을 하나 읽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6.25때 이야기입니다. 어느 지방대학교의 식물학 교수가 있어요. 그 사람의 꿈이 있어요. 남한에는 없고 북한에만 있는 희귀식물을 채집해서 논문 발표하는 것이 평소 그 사람의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나이가 좀 되었어도 입대해서 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북한쪽으로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고지에서 전쟁을 하는데 세상에, 자기가 그토록 찾던 희귀식물이 발견되었어요. 남들 전쟁하고 있는데 그것을 삽으로 곱게 팠습니다. 그런 희귀식물을 계속 찾으면서 북으로, 북으로 계속 전진했어요.
그런데 중공군이 내려오면서 그 교수였던 장교는 포탄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게 바로 전쟁입니다. 전쟁이란 소박한 나만의 현실, 나만의 공간, 나만의 세계를 우리는 간직하고 있어서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데 그 주변에 있는 전쟁이라는 상황이 일체 봐주는 것이 없이, 수십 년 고대하고 공들인 것, 인류 공영과 평화를 위해서, 내 신상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를 고통에서 구하려는 숭고한 이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 소박한 꿈마저 전쟁은 다 무효로 돌려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이스라엘아, 구원은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는 겁니다. 개인적인 심리적인 결심이나 결단, 요새 흔히 말하는 구원론 같은 것, 그런 것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런 걸로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탈탈 털게 만들어요. ‘나는 구원받았으니까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하고, 선교, 봉사……’, 소박한 꿈을 펼치고 그렇게 해 나가는 그 모든 것, 이게 전쟁이 아니라면 우리는 충분히 그런 희망을 가져도 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게 전쟁 통이 아니라면.
그러나 지금도 울부짖는 사자같이 악한 마귀와 주님은 싸우고 있습니다. 이게 전쟁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온 것처럼 여자의 남은 후손과 악마가 지금도 싸우고 있습니다. 전쟁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전쟁에서 전쟁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본심,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 어떤 식으로 구원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거예요. 그러면 뜸들이지 않고 바로 이야기하겠습니다. 20절입니다. “우리의 콧김 저희 함정에 빠졌음이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하는데 뭐까지 동원시키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함정을 파는 것 까지 동원시켜 가면서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벌입니다.
그런데 그 함정에 빠진 이유가 뭐냐 하면, 20절에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저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저의 그늘 아래서 열국 중에서 살겠다 하던 자로다.”라고 하는데 주체도 등장하지 않고 아주 모호하지요.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유다의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백성들에게 뭐라고 했느냐하면, ‘나만 믿으라. 나는 하나님과 통하기 때문에 나만 믿으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백성들이 뭐라고 하느냐, ‘저는 임금님만 믿겠습니다. 임금님은 우리의 생명이고 우리의 콧김입니다. 임금님만 생생하게 정상적으로 간다면 우리나라가 전쟁에서 패하지 않고 평화롭게 유지될 줄 믿습니다.’ 하고 백성들이 그 왕의 말을 듣고 고분고분 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큰 소리 치던 그 왕이 기껏 한다는 것이 뭐냐, 이웃나라 강대국에 의지하는 방법을 채택했습니다. 백성들은 힘이 없고. 그런데 그 지도자가 하는 말이 ‘여러분들은 걱정하지 마세요. 이 왕이 있잖아요. 내가 알아서 여러분을 평안하게 살도록 생명과 재산을 지켜드리겠습니다.’라고 큰소리쳤고 백성들은 그 왕을 믿는다는 것이 함정에 빠진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거예요. 왜, 백성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이 말이 어려워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누가 뭘 해도 여러분이 믿지 마세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아까 인터넷 뉴스를 보고 나서 십자가마을에 글을 올렸어요. 그 내용이 뭐냐, 미국의 애틀란타 목사인데 목사가 사모한테 건축헌금 받는 목사 처음 봤어요. 63살 먹은 사모님이 64살 먹은 목사를 권총으로 쏴서 살해했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목사님이 신학교를 운영한다고 세웠는데 학생들이 모집이 안 되는 거예요. 은행에 빚은 져놓았니 독촉장은 날라 오지 빚은 갚을 길이 없지, 그것 때문에 부부싸움이 자주 일어났어요. 이제는 사택도 헐값에 내놓은 판국이고. 그 와중에 싸우다가 부인이 강도 잡으려고 둔 권총 가지고 자기 남편을 잡아버렸어요.
그 기사를 보면서 제가 그 목사의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제가 그 목사라면 과연 미국 가서 이민목회 하면서 성경연구 하면서 이후로는 많은 신학생들과 젊은 분들이 바른 복음을 전했으면 좋겠다는 사명감, 내 인생을 내 배나 채우면서 살 수는 없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버린 것처럼 내 한 몸 버려서 신학생들 키우면서 주님 앞에 영광 돌리고 복음적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자신의 어떤 확신과 비전에 모든 것을 걸고 그렇게 했는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했는지 학생들이 한 명도 안 왔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제가 묻고 싶어요. 만약에 그 목사님이 다시 애틀란타 가서 다시 목회한다면 역시 그 분은 그 길 외에 다른 길로 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거운 철로입니다. 기차가 있는데 이 철로를 뚝 떼어서 들고 다른 데로 옮길 수 있는 여력이 우리 인생한테는 없습니다. 그 목사님은 다시 태어나도 그렇게 신학교 세웠을 것이고 또 은행에서 차압 들어왔을 것이고 아무리 목사님이 선을 백번을 봐도 자기에게 권총 싸서 자신을 살해할 사모를 만나게 되어 있고 결혼하게 되어 있고 자식 낳게 되어 있고 죽을 때 결국 총 맞아 죽는 거예요.
그걸 알고 그것을 다시 감안해서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다시 결혼해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은 선택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꾸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이 뭐냐, ‘아, 그때 내가 안 했으면, 그때 내가 이랬으면 지금 내가 이렇게 안 살걸.’ 하는데 전쟁에서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전쟁하는 환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정한 것으로 그 전쟁에서 우리의 선택권은 완전히 박탈당합니다. 물론 그 목사님은 제가 글 쓴 것처럼 신학교 할 때 ‘분명히 내 마누라가 총을 쏠 것이다.’ 이런 것을 기대했다든지, ‘주여, 마누라가 나에게 총을 쏘게 하옵소서.’ 라는 것을 절대로 기도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사적인 이익 다 버리고 오직 이 신학교에 목숨 바쳤더니만 하나님이 감동해서 학생들을 몰아주는데 이것은 감당이 불감당이야, 학생들이 너무 몰려와서 은행에서 더 대출 늘려서 부지 넓혀서 아내는 학교 재정담당 하고 아들은 교수시키고 ……, 이런 것 기대하면서 간절히 기도했을 거예요. ‘주여, 적당한 시기에 마누라가 나를 총으로 쏘게 하옵소서.’ 이렇게는 안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런 뜻을 품든 안 품든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뭐냐 하면, 그게 함정이라는 겁니다.
오늘 설교의 제일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것이 주께서 파놓은 함정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님, 함정 피하고 살 수는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함정 피하는 경우는 주의 전쟁이 아닙니다. 주께서 만든 전쟁은 모든 것이 함정입니다. 지금의 마누라 만난 것도 함정이고 내가 살아가는 모든 인생 자체가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보내시는 메시아를 알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 구미에 맞는, 내 뜻에 맞는, 내 입맛에 맞는 메시아, 그리고 그런 하나님, 내 인생 좋은 인생 만들어주는 좋으신, 정말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 메시아만 찾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런 인간을 구원하려면 주께서는 우리 앞에 함정을 팔수밖에 없습니다.
그 함정은 ‘함정이다’ 하고 피할 수 있는 입장이 못돼요. 왜 그런가, 선악과 따먹을 때 시커멓고 물러터진 것 같았으면 아담이 꼴 보기 싫어서 따먹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따먹을 때부터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했던 거예요. 따라서 주의 말씀은 뒷전이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먹음직스러운 저것이 먹고 싶다는 그것이 앞장선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함정에 대해서는 우리가 우리 능력으로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이 우선이 아니고 내 구미에 맞는, 내가 내 욕망과 탐욕에 이끌리는 그것이 우선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이고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쟁 통에 집어넣는 방법이에요. 탈탈 털게 만들어요. 우리의 꿈과 기도와 비전을 탈탈 털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깨닫게 만듭니다. ‘하나님, 제가 함정에 빠졌군요.’ ‘그래, 너는 함정에 빠졌어. 너는 네 욕심에 이끌려서 함정에 빠진 거야.’ 여기서 긴 시간동안 구약의 이스라엘이 전쟁에 이끌려서 함정에 빠져서 패배한 전쟁들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여호수아나 사사기에 보면 수십 번이나 이스라엘은 함정에 빠집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빠지도록 조치를 하셔요. 이방민족을 통해서.
왜, 인간이 다른 메시아를 찾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의 본심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다른 것을 구하는 방법은 다른 것을 함정에 빠뜨려서 더 이상 선택할 여지가 없이 그냥 두 손 두 발 다 놓고 하나님께서 건져주면 건짐 받고 안 거지면 그냥 지옥가고,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깨닫는 방법, 그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그 방법이 우리한테는 기쁨이요 즐거움이 되어야 된다, 그 이야기입니다. 잠언서 22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
말씀이 참 어려워요. 음녀에게 꾀임을 받아서 함정에 빠진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참 알기가 쉬운데 그게 아니고 “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 하나님의 진노를 당해야 될 자는 필히 좀 빠져 줘, 그 말입니다. 네가 빠지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에 빠질 자는 필히 음녀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야 된다,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 뭘 모르냐 하면, 음녀라는 자체를 우리는 음녀로 보지 않고 성녀로 본다니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메시아 자체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메시아만 잘못 이해할 뿐만이 아니고 현실 자체를 전부 잘못 이해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다보니 이것은 음녀인지 성녀인지, 성녀인지 음녀인지 분간도 못하고 있는 겁니다. 남편 목사한테 권총을 쏜 그 사모님이 행여나 바라기는 ‘여보, 당신같이 이렇게 고생하고 착한 사람, 너무 고생이 많았으니 내가 당신을 빨리 천국에 보내줄게. 너무나 당신을 사랑해.’ 이래서 권총을 쏘았으면 우리가 그 사모님 참 훌륭하다, 하겠는데 그 기사에 보면 돈 때문에 서로 싸웠다고 하거든요.
그러니 그런 식으로 죽인 것은 아닐 테고 ‘내가 당신 만나서 내 신세를 망쳤다.’고 권총을 쏜 거예요. 그것은 그 분만이 아니고 우리도 마찬가지인 겁니다. 너 때문에 나 망했다, 그 이야기를 우리는 하루에서 수십 번씩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해 댑니까? 그런데 우리 뜻대로 안 되는 주변의 인물을 보고 우리는 왜 감사를 못하느냐 그 말이지요. 탁탁 털게 만드는 하나님의 작전인데, 지금 그게 영적인 전쟁인데. 함정에 빠뜨린 자를 보고 멱살을 쥐고 흔들지 말고 함정에 빠지도록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누구한테? 이스라엘 백성들한테, 유다백성들한테 그렇게 하신 겁니다. 왜, 함정에 빠져봐야 더 이상 자기가 자기 인생을 좌지우지 하지 않고 허허 웃으면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려놓을 것도 없어요. 뭐가 있어야 내려놓지 다 털렸는데. 다시 말씀드리면 철로에 있는 인생이라 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철로에는 마지막에 창세전에 예정되어 있는 사람은 천국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천국 가려면, 본문 말씀에 ‘끝이 이르렀다.’고 했으니까 그 끝은 천국입니다, 천국은 어떤 사람이 가느냐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며 내가 나한테 한 것은 다 죄밖에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면서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끝부분에 천국 가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는 우리가 내 뜻대로 무조건 다 들어주는 그런 메시아를 교체하는 것이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보고 교체하라고 하면 합니까, 안하지요. 그러니까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갖고 있는 죄성이 함정에 빠지는 사태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오늘도 얼마나 많은 함정에 자진해서 빠졌습니까? 뜻대로 안 된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날씨는 무덥고 왜 기온은 높아만 가느냐, 소나기 올만도 한데 왜 안 오지? ‘소나기가 왜 와야 되는데요?’ ‘그래야 내가 시원하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아직 자기 시원한 것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탈탈 털지를 않았어요.
소나기가 안와도 감사하고 와도 감사하고, 죽어도 감사하고 살아도 감사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경우는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뭐냐, ‘내가 그동안 잘못된 메시아를 만났구나. 진짜 메시아는 내 생각과 전혀 다른 메시아가 오셨구나.’라는 것을 기쁨으로 충격으로 받는 순간, 그때부터 소나기가 와도 안와도 그게 절대로 우리에게 슬픔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현실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현실은 우리 자신이 잘못된 현실에 지금 살고 있다, 잘못된 현실을 매일같이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말씀이 주시는 참된 현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빠짐이여’ 하는 것도 기쁘고 그 다음에 22절을 봅시다. “처녀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않게 하시리로다.”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여기 있는 처녀 시온이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다시는 세상에 잡히지 않도록 해준다는 그 보상, 그 구원의 기쁨도 또 기쁨으로 받을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스케줄, 이 변화하지 않는 철로, 이 스케줄 속에 우리는 그냥 놓여서 딸려가는 중에 있습니다. 얼마나 기쁩니까? 함정에 빠진 것도 주의 뜻이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도 깨닫게 해주니 감사하고, 거기다가 우리의 죄악을 벗어버릴 날도 온다니까 그것도 감사하고,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 그것이 이미 구원받기로 정해진 철로 위를 달리고 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택할 여지도 없는 우리는 이것저것 따지고 선택하고 후회하고 반성하고 계획 잡고 좌절하고 또 소망 갖고 꿈 갖고, 하루하루 그렇게 분주하게 보냅니다. 기쁨과 감사는 날라 가 버리고 근심과 걱정만 찾아오는 하루하루, 이제는 우리가 잘못되게 살았다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 주어지는, 진짜 메시아를 만났다는 그 기쁨이 평생 저희들에게 덮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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