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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나 4:4-11 / 하나님의 뜻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요나

요나 4:4-11 / 하나님의 뜻

정인순 2012. 7. 22. 17:22

 

 

하나님의 뜻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2년 7월 22일                          

 

본문 말씀: 요나 4:4-11

 (욘 4:4, 개역)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욘 4:5, 개역)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욘 4:6, 개역)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욘 4:7, 개역)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욘 4:8, 개역)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욘 4:9, 개역)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욘 4:10,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욘 4:11, 개역)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사람하고 이야기하면서 시사 문제를 내놓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사람들이 심각한 당면한 문제라고 여기도록 만들 상황을 만들어놓으시고서는 지켜보시기다 뛰어드십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 일어난 상황까지 자신이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요나 주변을 박넝쿨이 자라도록 조치하셨습니다.

그래놓고 개입하십니다. 요나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이 으레 자기 자신이 누릴 마땅한 상황이라고 여기면서 이용하려 합니다. 박넝쿨로 인하여 요나가 시원해지니 요나는 생각하기를 자신은 마땅히 시원해야 될 존재라고 간주하는 겁니다. 바로 요나의 이런 태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개입은 인간들이 심각하게 생각하는데 뛰어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조성하면서 개입하십니다. 그런 상황들 속에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그 본성이란 바로 ‘자기 동일성’입니다. 자기 동질성이란, 어제에서 기대한 바대로 오늘의 나일 것이고 현재 기대한 바대로 내일의 나는 나일 것이라는 겁니다.

즉 어제와 오늘과 내일 사이에는 나는 달라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와 인간들의 이런 견해를 고치려고 새로운 상황을 유발시키면서 몰아가십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의 동질성을 고집하면서 하나님이 도리어 자신을 위해 잘 처신해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요나의 경우에는, 박넝쿨을 죽이지 말고 계속 살려내어서 자신의 그늘이 되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박넝쿨을 조성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요나의 사전 동의도 없이 말입니다. 없던 박넝쿨을 조성해놓고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손으로 벌레를 통해 사라지게 했을 때 나타나는 요나의 반응! 그것은 바로 요나 자신이 스스로 즉으려고 하는 바입니다.

요나가 스스로 죽고자 하는 것은 전에 있던 자아와 현재 자신의 자아가 다르기 때문이랍니다. 즉 자신의 동질성이 보장받지 못하기에 전에 있는 동질성을 안고 그냥 이 세상을 하직하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요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동질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약속의 동질성을 위하여 요나를 이용하신 겁니다.

인형이 까불면서 잘 놀다가는 어느날 갑자가 동작이 스톱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형 안에 들어있는 건전지가 다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인형의 동질성을 그 안에 들어있는 건전지의 동일성을 찾아내지를 못합니다. 우리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항상 죽어있는 존재라는 동질성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이라는 동질성은 외부로 그 원인과 이유를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에 저에게 다음과 같이 항의합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매사가 왜 부정적입니까?”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분에게 되묻고 싶은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떤 하나님을 원하십니까?”라고 물을 수 있는데 이 물음은 다음과 같은 물음과 같습니다. “어제의 나를 오늘이고 내일이고 그대로 보장해줄 수 있는 하나님을 원하지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참된 하나님께서는 ‘걸림돌’을 집어넣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걸림돌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집어넣으므로 말미암아 그 앞에서 그 어떤 인간도 자기 동일성이란 허락될 수 없다는 점이 밝혀집니다. 즉 나의 동일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동일성을 위하여 우리는 이 지상에 나타나야 했던 존재입니다. 마치 박넝쿨 같습니다. 잠시 있다가 다시 시들어버릴 밖에 없는 그 박넝쿨, 바로 이 박넝쿨은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을 위하여 잠시 존재해야 했습니다.

바로 이 입장이 요나나 오늘날 성도들의 입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묻습니다. “박넝쿨이 너에게 귀하지?”라고 말입니다. 잠시 있다고 없어지는 것도 요나에게 박넝쿨이 귀한 존재인 것처럼, 12여만명의 니느웨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에게는 박넝쿨과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그들은 분명 40일 지나면 이 지상에서 멸망 받아 사라져주어야 될 대상들이었습니다. 즉 그들의 동일성이란 40일 지나면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 언약의 동질성으로 인하여 그들은 40일 이후에도 계속 살아남았습니다. ‘회개하면 용서된다’라는 이 언약의 일관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멸망당할 그들조차 계속 살아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의 일관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박넝쿨과 벌레와 요나와 니느웨성 12만여 명의 사람들과 가축들을 친히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동일성을 보장받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들이 아닙니다. 영원무궁토록 이 세상 삶을 살 자들이 아닙니다.

사람이란 환란 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자기를 얼마나 잘못 읽고 있는가가 밝혀집니다. 무더운 여름날, 아파트에서 에어컨을 꼈다고 칩시다. 온 가족들은 일시적으로 시원한 밤 공기를 만끽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어컨은 선풍기 30대의 에너지를 소비시킵니다.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늘 걱정하는 주부가 한 밤중에 에어컨을 꺼버리면, 그동안 시원함을 맛본 식구들은 열대야의 답답한 공기 속에서 짜증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몸이란 한 번 맛본 것을 기억하기에 그 몸의 습관을 기반으로 해서 다음의 일어날 것들을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이로서 어느새 자기 동일성을 갖추어나가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가 고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고치려면 자기가 자신의 창조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에 맞는 자신으로 개조해야 하는데 이미 몸이 익힌 속성들이 어디로 사라질 리는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그 몸을 자기 힘으로 사라지게 만들고자 자실을 시도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고자 하시는 회개거리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스스로 자기 문제를 본인이 처리하려는 시도, 이것이 하나님의 일관성을 모독하는 짓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런 것들을 지적하는 걸림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다 이루심” 바탕 위에서 우리가 살고 있음을 인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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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08강-욘4장4-11(하나님의 뜻)1207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요나서 4장 4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289페이지입니다.

요나 4:4-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여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요나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요? 요나하고 가정사 문제라든지 국제정세에 대해서, 환율에 대해서, 시리아내전 문제에 대해서, 그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이야기를 하고 12월 달인가 대통령 대선문제, 대통령 선거라면 우리가 할 말이 많이 있는데, 정작 하나님께서 요나하고 이야기 할 때에 하나님께 이야기를 지어내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뭐가 아쉬운가 보다가 인간이 뭔가 기대하고 있다, 뭣 때문에 혼자 키득거리고 좋아하는 걸 아시고, 좋아하는 조건을 철거해 버립니다. 좋아하는 조건을 만드시고 철거해버리죠.

이것은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등장하고 나타나요.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요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요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박 넝쿨이 갑자기 커지면서 자기에게 그늘이 되니까 요나가 굉장히 기뻐했습니다. 처음부터 요나가 박 넝쿨을 만든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주셨다 이 말이죠. 일단 주셨으니까 고맙고 감사한 마음도 있었는데 박 넝쿨을 준비한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벌레를 준비했어요. 박 넝쿨 준비했는데 이번에는 벌레를 준비해서 그 벌레가 박 넝쿨을 아작아작 씹어 먹기 시작하자마자 햇빛은 강렬하게 찌고 너무 더워서 요나는 못 견뎌서 요나가 스스로 구하기를 ‘하나님, 차라리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습니다.’라고 바락바락 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하나님께서 박 넝쿨 만드셨죠. 씹어 먹는 벌레 만드셨죠. 그 다음이 중요해요. 화내는 요나를 하나님이 만드셨죠. 그 다음에 니느웨 12만 사람을 또 만드셨죠. 하나님께서는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기의 본심을 드러내는데 충분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취지에 대해서 요나가 모르고 요나는 ‘아따 시원하다. 아따 뜨겁다.’하고 똑같아요. 꼭 목욕탕에 들어온 할아버지 같습니다. 물이 좀 식으면 식었다고 주인 불러내고 온수가 뜨거우면 뜨겁다고 왜 이리 뜨거우냐고 짜증내고, 지밖에 모르는 인생.

이 요나를 앞장세워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바는 이겁니다. 니 같은 고집불통, 니밖에 모르는 인간도 이 하나님이 쓰시면 하나님의 본심을 드러내는데 아주 유용 스럽게 쓰여 지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아따 시원하다. 아따 덥다 못 살겠다.’ 이런 거예요.

보통 아파트에 보면 에어컨들이 달려 있잖아요. 저도 한 때는 에어컨 달린 아파트에서 살고 싶었던 그런 희망 있었습니다. 지금 희망이 가물가물하지만, 아직 희망의 끄나풀은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에어컨 달린 아파트에 살 때, 만약에 살았다고 치고 뭐가 걱정이 되느냐 하면 에어컨을 온종일 트는 것은 좀 사는 집에서 아마 그럴 거예요. 한 달 수입이 한 1500만원되는 사는 집에서는 에어컨을 온종일 틀 건데, 분명히 이건 서민인지 중산층인지 구분 안 되는 집 있잖아요. 이런 집은 분명히 몸 빼 입은 엄마가 켜놓고 끌 거다 말이죠. 더울 때 잠시 켰다가 껐을 때 그 켰을 때의 시원한 맛과 그 시원한 맛을 한번 봤다는 그것 때문에 껐을 때 짜증내는 자식들이나 식구들의 그 짜증을 무슨 수로 감당합니까? 차라리 에어컨을 꺼놓는 게 낫지, 시원한 맛을 봤거든요. 시원한 맛을 봤는데 계속 그 상태로 가면 좋을 텐데, 살림 걱정하는 것은 주부가 걱정하잖아요. ‘됐다. 고만 끄자.’ 후딱 꺼버렸다 말이죠. 애들이나 바깥어른이나 ‘조금 더 틀자.’ ‘시끄럽다. 끈다. 전기세 많이 나온다.’ 일방적으로 꺼버리고 ‘덥거든 물 한바가지 한번 붜라. 덥거든 샤워해라.’ 이렇게 나왔을 때 조금 전까지 시원한 것이 날라 가 버리고 더 덥게 느껴질 게 아니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아직까지 제가 에어컨 달린 아파트에 못 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돈이 없어서 못 달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인간을 괴롭힙니까? 오늘 주제가 그거예요.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거예요? 그 괴롭히는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찾아내야 됩니다. 어렵게 이야기해서 그걸 동질성 문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어제 그 다음 날이 오늘이고 그 다음 날이 내일이죠. 인간들은 오늘 ‘나’하고 어제 ‘나’하고 내일 ‘나’하고 계속해서 같은 ‘나’이기를 고집을 해요. 계속 나, 나, 나로 고집을 한다 말이죠.

그래서 분명히 박 넝쿨이 있어서 시원했던 ‘나’가 ‘나’예요. 그런데 벌레가 와서 박 넝쿨을 갉아먹으니까 갑자기 박 넝쿨이 죽어서 덥습니다. 그래서 더운 ‘나’는 ‘나’가 아니라고 본 거예요. 내가 나답게 되려면 시원했던 내가 연속되어야 비로소 나답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렵게 촌에서 살던 청년들이 군에 가면 군대생활을 그렇게 잘 해요. 곡갱이로 땅을 파고 일 하라 하면 그렇게 군소리 안 하고 잘해요. ‘이거 뭐 촌에서 늘 하던 일인데’ 하고 잘 하는데 그냥 대학생이라 해서 만날 막걸리나 마시고 놀러 다니던 애들은 군에 가면 괴로워 죽습니다. 뭘 하라 해도 바보같이 뭘 못 해요. 어설프고 바보가 따로 없어요. 그걸 세 자로 고문관이라 합니다. 이런 애들은 처음부터 가르쳐줘도 못 해요. 살아온 환경이 이미 험한 일을 안 해봐서 힘들죠.

그게 왜 못하느냐 하면 내가 이런 일을 할 위인이 아니라는 거예요. 적어도 나라는 인간이 이런 일을 할 위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한번 이렇게 호강을 얻게 되면 그게 계속해서 자기가 호강스러워야 진짜 자기답다고 여기고 만약에 호강스러움이 자기에게 오지 않으면 죽으려고 해요.

죽는다는 것은 뭐냐, 내 동질성을 내가 부지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과거의 동질성을 내가 기어이 그걸 나는 포기 못하겠다. 이렇게 해서 자살하려는 이유가 거기 있거든요. 어제하고 오늘하고 다른 나 말고, 어제 생각했던 나가 그대로 오늘도 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뭐가 문제냐 하면 하나님께서 요나 속에 뭔가 담겨준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거기서는 하나님의 죽음, 죽음이라는 사실이 요나한테 담긴 거예요. 인형이 이렇게 까불까불 놀면 애들은 그 인형만 보고 인형이 살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어느 날 보면 인형이 까불다가 가만히 서있을 때가 있어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건전지가 들어있거든요. 건전지가 죽어버리면 까불다가 못 까불잖아요.

애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자기 안에 하나님이 집어넣은 죽음이라는 건전지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나는 계속 서늘해야 되고 나는 계속 이렇게 만족스럽게 살아가도 마땅하다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렇게 돼 버리면 그 사람한테는 회개라는 게 나오질 않습니다.

자, 오늘 본문 들어갑니다. 박 넝쿨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기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 이 말을 제가 줄여버리면 박 넝쿨이 있는데 그 박 넝쿨은 잠시 피었다가 죽어버린 박 넝쿨, 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했잖아요. 그러니까 잠간 있다가 잠간 없어지는 박 넝쿨을 하나님께서 무슨 뜻이 있어서 친히 그걸 준비해 놓은 거예요. 그런데 12절을 봅시다.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요나야
요나 :  예
하나님: 니 박 넝쿨 아깝냐?
요나 :  아깝습니다.
하나님: 니한테 박 넝쿨이 아깝지? 나한테는 니느웨 12만 명과 육축이 아깝다.
이렇게 보시는 거예요.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아까운 박 넝쿨, 하나님이 준비해 놨다가 없애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요게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요나의 핵심이기도 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뭘 말하고 싶냐 하면 ‘니 안에 죽음 있다.’ 요걸 말하고 싶은 거예요.

‘근호야, 이리와.‘ ’예. 하나님 이거 이루어 주옵소서. 아파트 사게 해주옵소서. 에어컨....‘ 이렇게 기도하면 ’이리와, 니 안에 죽음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이런 것 주옵소서. 이런 것 주옵소서.‘ 할 때는 우리는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나‘라는 인간은 동질 해야 된다. 어제와 내가 지금 같아야 되고 계속 지금 잘 나야 되고 훌륭해야 되고 누가 날 손대면 안 되고 건드리면 안 되고 난 더 뛰어나고 남은 죽어도 난 살아나야 돼.’ 이런 동질성의 고집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 하룻밤에 피었다 망해버린 박 넝쿨로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 견해하고 우리 견해하고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려고 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내 뜻대로 사용하려고 주장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는 내 구미에 맞는 하나님을 따로 상정하고 따로 이렇게 만들어 내요. 어떤 분하고 대화하다가 갑자기 대화가 막혀버리는 경우를 많이 당합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왜 부정적으로 합니까? 그냥 성경대로 하지 않고 왜 부정적으로 합니까?’ 이렇게 나와요. 단번에 탁 올라오는 게 뭐냐 하면 ‘그럼 당신은 어떤 하나님을 원하십니까?’

그분은 십자가 이야기를 빼고 하나님 이야기를 하자는 거예요. 그런데 제 생각은 ‘왜 십자가를 집어넣으면 왜 당신에게 거슬리는 하나님이 되시는 이유가 뭡니까?’라고 묻고 싶은 거예요. 성경에 십자가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재밌어요. 걸림돌, 십자가는 걸려서 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 이야기를 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분은 나는 안 걸리고 싶은 거예요. 나는 니 말 듣고 안 걸리고 싶다는 거예요. 왜, 나 자신은 어제도 안 걸리고 오늘도 안 걸리는 나, ‘나’라는 인간은 계속 뭔가 하자 없고 난 잘못도 없고 안 걸려야 된다는 거예요. 나는 완벽하고 수준 있고 나는 괜찮은 존재로서 계속 가줘야 된다는 거예요.

슬슬 여러분들이 제 이야기가 이해되십니까? 박 넝쿨이 아깝죠. 아깝지만 하나님께서 그 박 넝쿨을 망하게 했다니까요. 박 넝쿨을 준비하신 분이 하나님 이예요. 준비하신 분이 박 넝쿨을 망하게 했다 말이죠. 그게 피조물의 기능이라니까요. 그 죽어야 될 망해야 될 건전지가 우리 안에 들어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니까 그 사람 하는 말이 그 이야기 빼고 하나님 이야기해라, 이 말입니다.

저는 그게 걸림돌이니까 걸림돌을 집어넣어야 그게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람은 그런 하나님은 듣기 싫다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을 이야기해버리면 교회에 사람들이 안 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묻고 싶은 게 교회 사람이 안 오는 게 중요합니까? 진짜 하나님을 우리가 증거 하는 게 중요합니까? 우리 사명과 기능이 뭐예요? 진짜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지, 내가 담임해서 교인들 모으는 게 제 할 일 아니잖아요. 교인들 모았다 하지만 교인들이 웃습니다. 누가 누굴 모았다 말이죠? 교회 한 번 가주니까 기가 살아서 지가 모은 것처럼 착각하고 있네.

사실 목사들이 오해하고 있어요. 교인들을 모으는 게 아닙니다. 그건 교인들이 지 이용거리 있어서 놀러간 거예요. 큰 교회 가면 놀기 좋아요. 에어컨도 빵빵합니다. 에어컨 리모콘도 있어요. 거기는 노인들 사비도 다 돼 있어요. 이용하러 갑니다. 거기는 애들 영어도 가르쳐주죠. 놀이시설 다 돼 있죠. 교회 한 번 갔다 오면 하나님 앞에 출석했다는 티도 나고, 그럼 일주일 동안 복 받는 느낌도 들고, 문제는 걸림돌이 없다니까요. 나는 망해야 된다는 그 건전지를 본인이 생각을 못하고 있다니까요.

그러면 목사님, 하시고자 하는 취지가 뭡니까? 물으신다면, 망하는 자를 망했던 안 망했던 내가 망하는 것이 나한테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이 바로 안 망하는 사람의 유일한 안 망하는 사람들이라는 그 이야기를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박 넝쿨 같이 망해야 돼요. 망해야 되는데, 망해야 된다고 분명히 요나를 통해서 이미 예언 했습니다. 40일 지나면 분명히 망한다고 했습니다. 망한다고 했는데 그들이 회개하니까 안 망해버린 거예요. 이것은 그 사람들이 망하고 안 망하고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사람 속에는 사람들이 동질성이 아니고 그 사람 사람을 다루는 ‘하나님의 약속의 동질성, 약속의 연속성’을 니느웨 사람 요나를 통해서 주께서 연속적으로 일관되게 보여주겠다는 취지인 겁니다.

잠시 야구 이야기 해볼게요. 우리 교인들 야구 좋아하지 않지만 하도 야구가 유행하니까 삼성라이온즈란 대구가 연고지인 야구팀이 있어요. 요새도 그런 게 있어요. 한번 들어봐요. 생전 못 들었겠지만 그 팀이 현재 우리나라 800 야구팀에서 1등을 하고 있는 팀이거든요. 대전을 근거지로 하는 하나 이글스란 팀이 있는데 이게 5회까지 5:0으로 삼성이 지고 있었던 거예요. 보통 같으면 ‘이제 졌어. 안 돼. 졌어.’ 하는데 그 삼성 관중들은 집에 안 갑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반드시 이기게 돼 있어, 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6회부터 점수 나오더니 9회까지  5:5되고 10회 가서 6:5로 역전승을 하는 거예요. 특히 5:5로 비길 때는 그 다음부터 삼성 팀들이 안심을 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그 팀에는 끝장대장이라 해서 오승환 투수가 공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던지거든요. 오승환이 있으면 점수를 못 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 삼성 팀들은 흐뭇한 거예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삼성이 이기지, 애간장을 다 녹입니까? 그게 하나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아슬아슬하게 우리의 죄로 인하여 지옥 갈 때가지 가보는 거예요. 아슬아슬해요. 하지만 끝장대장은 이기리로다. 반드시 이기리로다하는 주님이 건전지 속에, 우리 속에 있는데 그분이 왜 있느냐 하면 그분이 이미 죽었다가 마귀를 이기고 살아나신 분이거든요. 이 마귀를 이겼다는 그 능력이 우리 안에 내장돼 있으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똑바로 보고 나는 죄인인데 주님께서 죄를 용서했다. 이것만 있으면 마지막에 웃는 자가 마지막 웃는 자가 되고 마지막 승리자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나의 동질성이 아니고 내 속에 계신 분의 동질성, 내 속에 계신 예수님의 일관성, 연속성을 우리가 그대로 담고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뜨거울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고 하지만 한번 좋았다고 계속 좋아야 한다고 고집부리지 마시고 한번 뜨겁다고 늘 뜨거워진다고 그렇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뭐 우리가 어디까지 뜨거워지는지 분간도 안 됩니다만, 하여튼 갈 때까지 가 봐도 주께서 주님의 스케줄이 우리 안에 들어있다면 그 스케줄 따라서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쓰여 지는 겁니다.

여기 박 넝쿨이 누구냐, 바로 우리 자신이 박 넝쿨 이예요. 잠간 있다가 망해도 주께서 쓰셨다면 그것은 주께서 귀히 보시는 박 넝쿨입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주님 보시기에 귀한 겁니다.

십자가의 강도가 몇 년 살았습니까? 지가 80을 살았습니까? 90을 살았습니까? 뭐 강도 짓하다가 죽은 사람이 몇 년 살지도 않은 것 같아요. 사형 당했으니까. 그래도 그 사람은 지금 천국에 가 있습니다. 천국 갔으면 됐죠. 천국 갔으면 승리한 거죠. 이 땅에서 국회의원하고 승리하고 국회의원 5번 되도 지옥 가는 사람 많은데, 부자 보세요. 거지 나사로 부러워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했겠습니까? 이게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이게 현실이라고 여기신다면 우리 자신 속에 죽음과 그 죽음을 이기시는 분이 함께 있다는 것, 우리는 그런 건전지가 들어있는 예쁘장한 인형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믿읍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세상 보면 매일같이 낙담과 낙심의 연속입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하루에도 열 백 번, 열 십 번 이야기 하면서도 다시 한 번 주님을 생각해 볼 때 주께서 그렇게 만드시고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마지막 웃는 자로서 웃으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