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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나 3:1-4 / 요나의 전도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요나

요나 3:1-4 / 요나의 전도

정인순 2012. 7. 1. 15:34

 

 

요나의 전도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2년  7월 1일                       

 

본문 말씀: 요나 3:1-4 

 
(욘 3:1,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 3:2, 개역)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욘 3:3, 개역)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욘 3:4, 개역)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요나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전에 고국에 있을 때 받았던 그 말씀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어차피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이나  자기 자신의 신상과 관련되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나의 오산입니다. 요나는 여전히 ‘니느웨 심판’ 사건에 왜 자꾸가 끼어 들어가는지 그 연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요나는 사흘 길이 되는 도성을 하루만이 돌아버린 겁니다. 건성으로 돌았던 것입니다. 어차피 자신이 외치나 아니 외치나 니느웨성은 망하기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 자신이 전한다고 해서 안 망할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전도한다고 해서 안 망한다면 이는 처음부터 40일 만에 망한다는 그 하나님의 예언 자체가 오류가 되는 모순이 발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이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요나의 잘못은 요나 자신과 요나가 속해 있는 나라, 즉 이스라엘 입장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런 출발점 자체를 변경시키고자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더 깊숙이 설명하지면, 장차 오실 예수님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인간 중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구약적으로 말해서는 ‘언약’을 위하여 말씀이 주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언약만 남고 이스라엘이나 요나는 항상 언약 앞에서 사라져주어야 합니다. 즉 요나는 없고 오직 하나님의 속성인 축복과 저주를 보여주기 위한 요나만 있을 뿐입니다. 요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요나가 품고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인 축복과 저주는 늘 총계가 일정합니다. ‘거룩 총량 불변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나가 자기 입장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이스라엘 일부로 소속되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이스라엘에게 소속된 것이 아니라 언약에 소속되어 있고, 이 요나가 보여주는 언약에 소속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마치 옛날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는 이스라엘의 일부로 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오로지 모세만 불러세웠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제 모세에게 소속되어야 합니다. 이는 모세가 산 위에서 가지고 온 언약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언약을 부정하는 모든 이스라엘은 광야나 약속의 땅을 통해서 제거되게 됩니다. 이는 언약이 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해서 기존의 이스라엘을 부정하고 요나에게 내려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조성하려 하십니다.

요나는 이점을 모르고 약속된 나라인 이스라엘 대 비-언약적 나라인 멸망받아야 할 니느웨로 구분짓는 안목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자기 주장을 하나님의 계시가 호응해주는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니느웨는 전면적으로 온 나라가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40일 지나면 심판받는다는 그 심판은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요나로 하여금 자신을 가장 수치스럽게 만드는 상황이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요나 4장에 들어가면 요나는 자살을 시도하게 됩니다. 이는 평소에 요나가 자신에게 수치가 오지 않는 한, 하나님을 섬길 용의가 있다는 의식이 살아있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 위에서 선지자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 터전 위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결과가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맞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의 자존심이라는 것이 뭘까요? 그것은 바로 모든 계시가 선지자가 독점하고 있다는 권위의식의 확산입니다. 선지자 본인이 납득되지 않는 하나님의 계획이 따로 있을 리가 없다는 자만심 같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선지자로 하여금 니느웨 심판을 전달하면서도, 그리고 구체적인 날짜까지 거명하면서까지 하면서도 선지자의 신빙성을 무산시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나 요나 중심으로 회개나 구원을 구축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모든 하나님의 일은 외부에서 날마다 새롭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 자신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그동안 쌓아올린 위치이나 체면이나 자존심에 손상이 가해지는 사태가 일어나야 합니다. 기초가 문제입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어놓고서는 반석이라고 우겨봤자 사람들만 속아 넘어갈 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이런 억지가 통하지 않습니다. 
왜 선지자 자체의 계시가 변경되는 사태가 일어나는 겁니까? 우리는 구약이 신약시대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19-20에 보면,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 구약에서는 개인적인 것이 되지만 신약에서는 보편적인 것이 됩니다. 요나는 사적으로 하나님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 자칭 빛이라고 우겼기에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이라고 간주되는 니느웨를 통해서 ‘빛’의 역할을 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뿌리를 보는 겁니다. 바탕을 보게 하는 겁니다.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에다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짓는다는 것은 곧 자신을 오히려 망하게 하는 계시의 말씀인 것을 알게 하십니다. 더 쉽게 말해서 이 세상은 온통 말씀의 구조 안에 담겨있습니다. 어디에도 다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일에 몰두하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끝을 향하여 질주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자 곧 썩어들어가는 자신의 뿌리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대하면서 자신의 겉 멋으로 하나님을 상대하던 것에서 자신의 뿌리로 눈길을 돌렸다는 말이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의 뿌리를 가지고 예수님에 나와서 향유를 뿌린 것처럼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어느 지점에서 예수님과 관련되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겉멋에 스스로 속아넘어가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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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05강-욘3장1-4(요나의 전도)1207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요나서 3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288페이지입니다.

요나 3:1-4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두 번째 이야기했는데 첫 번째 이야기한 것은 고국에 있을 때 이야기했죠. ‘니느웨 가서 심판에 대해서 증거 하라.‘ 안 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두 번째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님께서 도대체 니느웨를 걱정하시는지, 요나를 걱정하시는 건지 우리가 분석을 해봐야 되겠죠.

니느웨는 이방나라기 때문에 이미 버린 자식이고, 심지어 이들이 회개해도 나중에 니느웨는 반드시 멸망하게 돼 있습니다. 나훔 선지자에 의하면 니느웨는 필히 멸망하게 돼 있어요. ‘어차피 멸망할 거 그냥 멸망시키면 될 텐데, 어차피 내가 전하지 않더라도 멸망하는데 구태여 전할 이유가 뭐냐,’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나는 구원받았다고 여기는 너 때문에 주변에 다른 배치 물을 배치해 놓은 겁니다.

왜 이단들이 설치는데 가만히 있습니까? 너 때문에, 이단들이 문제가 아니고, 너 때문에. 왜 불신자들이 번창하는 걸 가만히 방치하십니까? 소위 믿는다는 너 지적하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너’라고 하는 요나, 하나님의 뜻은 요나부터 새로 시작하자는 겁니다. 요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나라 있고 이스라엘 나라에 내가 속해 있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을 잊어라.‘ 이스라엘을 잊어버리고 이스라엘에 속해 있는 요나가 아니라 요나에 속해 있는 이스라엘로 바뀌게 만들겠다는 겁니다.

처음에 출애굽할 때에 이스라엘 속에 모세가 있었죠? 이스라엘 속에 모세가 있으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중의 한 사람이라고 사람들은 다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만을 하나님께서 시내 산 위로 불러옴으로 말미암아 모세 세계와 산 밑의 세계가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모세는 산 밑에 속한 사람 중에 일개 한 사람이 아니라 모세로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그 하나님이 갖고 있는 그 십계명, 그 언약에 소속될 거냐 말 거냐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새롭게 구성되는 겁니다.

그걸 소위 뽑기라고 하는데 뽑기, 지속적인 선택, 추첨, 지속적인 추첨이란 표현이 좋겠네요.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추첨이 되는 겁니다. 어느 가족들 나오너라. 나왔냐? 여기서 어느 가족은 나오고 어느 가족은 남아라. 남았냐? 남은 가족 가운데 어느 가족은 나가고 어느 가족은 남아라. 남았냐? 계속해서 쪼개고, 쪼개고 최후의 1인자를 찾는 겁니다.

그렇게 쪼갤 때마다 그 쪼갤 때 일어나는 현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뭘 찾느냐 하면 축복과 저주, 축복과 저주를 계속해서 거기서 새로운 뉘앙스를 새로운 축복이 이것이며 저주가 이것이라는 새로운 면을 계속해서 거기서 만들어 내는 겁니다.

저는 이걸 일방적으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거룩 보존의 법칙’이라고. 물리학에서 보존의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에너지가 어떤 형태로 변해도 총 에너지 동량은 변하지 않는다. 열역학 제1법칙 이예요. 에너지 변화의 형태가 갈수록 혼란해진다는 것, 멸망의 길로 행한다는 것이 물리학에서 19세기 말에 나왔던 제2법칙인데 물리학의 제2법칙에 의하면 세상은 필히 망하게 돼 있습니다. 계란을 깨놓고 깨진 계란을 보고 다시 원상복귀 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미 흘러가버리고 끝난 거예요. 이걸 비가역적 법칙이라고 하는데 이미 가버린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겁니다. 우리 인생이 그런 거예요. 다시 젊을 때 사진 꺼내놓고 훌쩍거리는 이유가 다시 되돌아 갈 수가 없어요. 이미 쏟아버린 것을 다시 담을 수가 없는 겁니다.

전도서에서는 이걸 전부 모든 것이 다 흘러간다고 하죠. 그렇게 흘러가고 흘러가면서 사람은 고집이 있어서 그 안에서 버티려고 애를 써요. 집 천장에 쥐가 살고 있다. 그럼 그때는 쥐 잡는 것에 몰두하지 그 순간 쥐 잡는 것에 몰두하면서 교회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교회사 전체 속에 또는 세계 역사 속에 우리가 포함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코앞에 있는 어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거기에 몰두하다 보면 나머지는 다 제거되게 되죠.

이것은 내 중심으로 자르고, 자르고 결국 인간도 나름대로 선택하고 선택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지 몸 편한 것만 남고 예수든 하나님이든 관심도 없고 지 몸 편하면 최고가 돼 버립니다.

이러한 흐름에서 주님께서는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뿌리째 거덜 나는 거예요. 뿌리째 거덜 난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우리의 뿌리를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일상의 행동들이 우리 자신과 관련돼 있지 하나님과 관련 없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하죠.

아까 불렀던 찬송가에 보면 보통 찬송가 가사는 인간들이 지어내는 건데 379장 같은 경우는 거의 순진하게 80%이상 성경구절 그대롭니다. ‘주의 말씀 듣고도 준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터 닦고 집을 지음 같아, 비가 오고 물 나며 바람 부딪쳐도 반석위에 세운 집 넘어지지 않네.’ 2절 가사가 뭐냐 하면 주의 말씀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터 닦고 집을 지음 같아.‘ 이렇게 돼 있다고요.

이건 뭘 뜻하느냐 하면 우리의 뿌리가 뭐냐, 뿌리가 결정하지, 근사한 껍데기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겉모습 껍데기가 전부라고 여깁니다. 직행 1번 버스인가 타게 되면 버스에 광고가 돼 있어요. 옛날 천하장사 이만기가 광고하고 있는데 세상에 이만기가 관절통을 앓는다는 소식이 나와 있습니다. 이만기도 관절통을 앓는다. 세상에 덩치 큰 사람이. 허벅지가 하나가 이만한데, 역시 뿌리는 못 속이네. 허벅지가 이만해도 관절통 앓아버리면 그 허벅지도 주저앉게 돼 있잖아요.

이 뿌리 문제는 뽑혀야 되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이 뽑히지 않습니다. 왜냐, 이스라엘은 자기가 있음에 그 있다는 그 자체를 유지하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서 요나 선지자도 같이 물들은 겁니다. ‘그래, 이스라엘 구원받았어. 하나님은 우리 편이야, 다른 신을 믿는 사람은 멸망 받을 거야.’라고 안심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니느웨 멸망한다.’ 전하라 하니까 요나 입장에서 ‘남의 나라 당연한 거 아닙니까? 당연히 멸망하는데 왜 내가 가야 합니까?’ 그래서 스페인 쪽으로 도망쳐 버린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로 요나에게 이야기합니다. 또 이야기합니다. 약간 비슷한 이야긴데 상세하게 이야기하죠. “니는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이렇게 합니다. 요나는 여전히 이해 못합니다. 멸망당할 나라에 왜 전하라고 하는가,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사람에게 충고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가능성이 있을 때는 충고 하는 것이죠. 남의 자식 같으면 충고할 필요 없거든요. 지 자식이기 때문에 아끼기 때문에 하는 건데, 분명히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외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에요. 이건 시편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주를 모르는 이방백성들아, 멸망할 것이라. 이미 약속으로 정해진 거예요.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계시는 이스라엘 좋아라고 있는 것이지, 남의 나라 좋아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또 전하라고 하니까 멸망받기로 정해졌다 할 때 하나님께서 낌새를 주면 요나는 괜찮아요. 뭐냐 하면 ‘니가 전하게 되면 그들이 회개할 것이고 뭐 어쩌고 저쩌고..’ 이게 아니고, ‘40일 지나면 심판 받는다.’고 전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요나라고 생각해 봅시다. 40일 지나면, 오늘 7월 1일 아닙니까? 40일 지나면 8월 10일 런던 올림픽 할 그때쯤 된다 말이죠.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 뭡니까? 우리교회 망한다는 게 아니잖아요. ‘옆의 교회나 밑의 교회나 다른 갓 바위 망한다.’ 그 소리로 들었다면 우리는 그냥 지켜보면 되는 거예요. 지켜보고 외치라 하면 외치고 ‘저렇게 망하는구나.’ 하고 지켜보면 되는 겁니다.

전혀 우리 자신의 뿌리와 상관없다고 우리는 간주하게 될 거라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요나에게 이걸 전하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요나 입장에서 가장 모욕적인 현상이 일어나요. 인간에게 가장 모욕적인 것, 그걸 보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할 정도로. 나중에 요나가 자살하죠.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이런 꼴을 볼 것 같으면 차라리 내가 죽을 게 나을 뻔했습니다.’라는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말이죠. 결국 이스라엘과 요나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지존심 위에 터 잡고 그동안 살아온 거예요. 자기 자존심 위에. ‘나 이정도 일이 일어나면 내 모욕 심 때문에 내가 참지 못해서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하는 그 터전 위에 있었던 거예요. 뭐, 여호와의 은혜 위에? 아이고, 예수님의 피 위에? 어이고, 어디서? 사실은 지 자존심 위에, 체면 위에서 자기를 건설한 겁니다.

교회가 부흥되는 거요? 남의 교회 부흥돼 보세요. 잠을 못 자는데? 목사한테 가장 모욕스런 게 뭡니까? 말씀은 우리교회서 듣고 돈은 딴 데 내는 것 아닙니까? ㅎ 미친다니까요. 그래서 목사는 기도합니다. 저주받으라고. 딴 데 헌금한 백성 발병 나라고. 그 돈 다 까먹는 사건 일어나라고, 암 걸려서, 교통사고 나서 다 까먹으라고. 그 집에 불나서 홀라당 다 타고 예배당 불나서 다 까먹으라고,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그 사람 뭡니까? 지가 뭐예요? 지가 십자가 졌습니까? 지가 메시아예요? 뭡니까? 바로 자기의 체면 위에 선 거예요. 신학교 간 것부터 문제입니다. 신학교 가고 목사 라이센스 받은 것이 결국 자기 자존심을 굳히게 만들었던 거예요. 장립 집사 될 때 아주 겸손했던 사람이 장로 되고 난 뒤에 사람이 변했어요. 어디 장로하고 장립집사하고 맞먹으려고. 어디 3급 공무원하고 7급 공무원하고 맞먹으려고. 얼마나 돈 내고 딴 장로인데.

이미 교회 올 때부터 내 가정, 내 사업체, 내 교회부터 생각한다는 자체가 그건 자존심이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신 언약에 의하면 언약 보존의 법칙에 의하면 이건 저주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회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하는 겁니다. 부메랑이죠. 던지면 픽, 픽, 픽, 픽 돌아서 결국은 나한테 돌아오는. 니느웨를 우회해서 돌아오는 겁니다.

이거, 요나 선교하고 아~무 상관없는 책입니다. 요나 거론해서 선교 비 획책하고 기관에서 선교 운영하고 그럴 책이 아니에요. 무슨 책이냐 하면 ‘선교를 해? 니 자존심 때문에 선교한다.’는 거예요. 그저 시집 못가고 장가 못가서 선교한다하면 되지. 평생 선교한다고 독신으로 살다가 좋은 남자 만나면 후다닥 가버리는데. 여기서 좋은 남자라 하는 것은 키 크고 돈 많고 인물 잘 생긴. 신앙은 보지도 않아요.

이스라엘은 없다고 칩시다. 그리고 요나도 없다고 칩시다. 아니 요나 여기 있는데 없다고 칩니까? 요나가 없어요. 요나의 속성만 있어요.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은 속성만 있는 거예요. 알사탕 먹을 때 포장지 버리고 알사탕만 먹잖아요. 주께서는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만 취하는 거예요. 그 알맹이가 뭐냐, 거룩 보존의 법칙, 언약 보존의 법칙을 위하여 요나를 사용하는 겁니다. ‘너는 이제부터 나의 저주가 무엇이며 그리고 나의 거룩이 무엇인걸 보여줄 역할을 맡았느니라. 끝! 끝나는 거예요. ’하나님, 요나 이런 믿음 갖고 있습니다.‘ ’니 믿음 내게 보여 달라.‘라는 소리도 안 해요. 니 믿음은 아예 거절해요. 우리의 믿음, 우리의 소망, 다 거절하고 주께서 그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가, 주님의 속성이 그 사람에게 어떻게 와 닿고 그것이 어떻게 발현되는가, 하나님께서 그것만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이요? 성경 봐서 알겠지만 언제 선교가려고 손든 적 없고 없습니다. 그냥 방앗간 주인 이예요. 그냥 추수하고 옛날에는 방앗간도 농사 지가 다 알아서 했으니까. 그런데 본인이 원치 않아요. 부득불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신이 찾아오니까 성신이 찾아오니까 부득불 하는 거예요. 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아이쿠, 이번 전쟁에 이겼으니까 당신 아들이 대를 이어서 큰 교회 당회장 목회 하지.’ 세습해서 목사 하라고 시키니까 자기가 반대합니다. ‘아니 내가 안 했는데 왜 내 아들이 거론돼? 내가 한 게 없는데. 나도 구원받은 주제인데. 나도 그냥 공짜로 구원받은 주젠데 왜 자꾸 나를 쳐다보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못된 에브라임 지파는 기드온을 좋아한 게 아닙니다. 기드온을 앞장 세워서 배후에 권력의 맛을 이번 차에 정권을 쥐겠다는 거예요. 뭐 여자는 대통령이 되면 안 되고, 그런 이야기도 마찬가지고 박OO가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뒤에 지가 권력의 맛을 한번 보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것이 바로 세속 정치와 하나님의 성신이 임하는 세계의 격차를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성경 이예요.

그러면 요나의 이러한 외침은 요나의 어떤 속성을 보여주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분명히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여기 성경말씀 거론할 때 요나가 갈 길이 사흘 길이라, 3일 동안 가야 될 길이라고 분명히 언급돼 있습니다.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망한다”

신났죠. 지하고 상관없으니까. 지가 망한 거 아니니까. 남 못되는 거 얼마나 고소하다고요. 체증이 다 풀리는데. 사흘 가야 될 길을 하룻길에 갔다는 말은 대충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요나가 지시들을 때는 아예 방향을 반대방향으로 도망쳤죠. 니느웨는 이라크 쪽이고 다시스는 스페인 쪽이니까 방향이 완전히 동과 서로 반대방향이거든요. 이번에는 가기는 가는데 전도 기간이 문제라. 사흘 동안 해야 될 것을 하루 만에 때려 치워버려요. 그냥 대충 해버려요.

이런 속성도 다 버릴 게 없어요. 다 필요합니다. 제발 여러분이 갖고 있는 성질 바꾸지 마세요. 사람의 본성은 안 바꿔집니다. 위선적이 될 뿐이지, 절대로 바꿔지지는 않습니다. 물침대처럼 하나 누르면 하나 튕겨져 나오게 돼 있지, ‘나는 화를 참았다.’ 다른 걸로 풀었다. 이 말이거든요. 다시 말해서 노래방에 가서 풀었다 이 말이거든요. 괜히 꾹꾹 참으면 안 돼요. 풀 때는 풀어야 되는데 누른다고 사람이 더 고상해지고 점잖아지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고상한 사람이 무서워요. 나중에 보면 고상한 사람은 터지는 게 아니고 나중에 찢어집니다. 온 몸이 찢어져서 큰 일 납니다.

그러면 요나가 보여주는 이 속성은 신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그걸 요나의 속성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부터 3장에 보면, 그걸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걸 요나에게 직접 연결시켜 봅시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전도를 했지만 요나 본인은 빛으로 오지 않는 거예요. 요나는 빛을 증거 하라 했지만 빛을 증거 하는 당사자가 빛으로 오질 않아요. 그저 빛을 피해서 그저 관찰 자, 변두리를 빙빙 돌고 있어요. ‘그래도 나는 선지자인데. 나는 목사인데.’

어제 결혼식이 있어서 대구 오월의 정원인가 거기 갔더니 음식 하나는 잘 나오데요. 처가 쪽이라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거기 우리 친척 아는 목사님이 와서 저한테 ‘이 목사, 들을 거 없다. 나온나. 거짓말 하는 거 듣지 말고 밥 먹으러 가자. ’ 안동의 큰 교회 목사예요. 나는 그래도 또 무슨 소리 하는가, 다 자료니까, 무슨 소리 하는가 들어보니, 참 입에 담지 못할 기도를 해요. 결혼식 기도하면 순서가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해서 둘이 결혼했다. 뒤에는 빠지면 안 돼요. 이건 옵션처럼 다 들어가는 거예요. 아들 잘 낳아야 되고 신랑 신부가 나중에 나라와 국가와 교회에 큰 인물이 돼야 되고 그 다음에 빠지지 않는 게 시가집 잘 섬겨야 되고 다른 사람한테 복 받았다는 소리를 들어야 되고 축복 받아서. 옵션, 그러니까 에어컨 돼야 되고 에어백 있어야 되고 있는 것처럼, 다 들어가야 돼요.

축복이 뭔지도 몰라요. 요나 이야기 미리 이야기할게요. 예수님께 제자들이 ‘내가 하늘나라에 가면 어느 자리에 앉습니까?’ 제가 수요일 날 이야기했잖아요. 아들이 대통령 된다 하니까 아버지가 ‘니 대통령 되면 나 뭐 시켜 줄꼬?’ 하니까 아들이 가만히 생각하더니 ‘탕수육 시켜줄게.’ 지는 내무부 장관 바라는데 탕수육 시켜준다고 하니.

제자들도 마찬가지예요. ‘나중에 하늘나라 가면 무슨 자리 줄 겁니까?’ 하니까 ‘내 쓴잔을 마실 수 있느냐. 아유, 인간아, 내 쓴잔을 마실 수 있느냐.’ 쓴잔은 안 보이고 하늘나라 장관 자리만 보이느냐 이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 지 자존심이 체면위에 소위 거짓 신앙을 건설하다 보니까 전부 다 그 위에 세워진 것이 예수 믿는 것도 삼위일체 섬기는 것도 성경공부 하는 것도 전부 다 지 자존심에 대한 강화작업이라. 자존심 굳히기 작업, 체면 굳히기 작업 이예요. 이건 멸망의 길로 작정한 거예요. 넓은 길로 지옥 길로 가자고 환장하고 있는 겁니다. 거룩하다고.

요한복음 3장에서 요나 자체를 어두움으로 바로 시켜 버리면 요나는 지금 뭘 보여주느냐, 어두움이 무엇이며 빛이 무엇인가를 요나의 행적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어두움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빛으로 드러나고 놀랍게도 빛이라고 장담했던 본인이 어두움으로 드러나는, 이것은 바로 구약에서 어떤 인물을 선택할 때는 신약에 있는 보편적인 현상을 미리 앞당겨서 예고편으로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come in soon. 곧 개봉박두. 앞에서 이야기한 것이 신약에 오면 그게 보편적으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요나는 가장 모욕적인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러면 빛이 뭐냐, 바로 생각해 보세요. 니느웨가 이뻐서가 아니라 요나가 속해있는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우회해서 빙~ 돌아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거든요. 이스라엘이 지금 자칭 빛이라 여기고 구원받은 백성이라 여기는데 뭐가 빠졌어요. 뭐가 빠졌을까요? 요나 마지막에 보면 나옵니다. 은혜를 받았어요. 그럼 은혜를 왜 빠졌느냐, 늘 회개 입장에 있지 않기 때문에, 회개란 말이 뭐냐, 자기의 뿌리를 보는 게 회개예요. 울고불고 하는 게 회개가 아니고 자기 뿌리를 보는 겁니다.

만약에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가서 동상 걸린 등산가들을 보게 되면 위는 멀쩡한데 양말을 벗으면 발 뿌리가 시커멓죠. 썩어 들어오는 거죠. 들어오는 자기의 본모습을 보는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비싼 향유, 비싼 향수병을 과감하게 주님 앞에 던져 버린 것은 주님과 자기의 만남을 멋들어진, 멋있는 이 외모에서 만난 게 아니고 자기 뿌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거예요. 그런데 그걸 비웃고 있는 점심 대접한 바리새인은 자기의 뿌리로서 예수님을 만난 게 아니고 뿌리를 살며시 감추고 자기의 멋스러운 자기의 겉면만 가지고 주님한테 점심 대접한다고 유세를 떨고 있는 겁니다.

평소에 우리가 바리새인들이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가, 뻔히 알잖아요. 우리들의 사람 관계와 똑같잖아요. 그러나 주님 만날 때는 사람과 사람 만날 때 그런 식으로 만나면 안 됩니다. 우리의 뿌리를 봐야 돼요.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면 우리 뿌리, 발바닥부터 썩어 들어오잖아요.

니느웨 사람들은 죄를 지을 때는 남한테 안 지려고 경쟁적으로 죄를 짓고 멋있어 보이려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요나가 외치는 그 말씀이 딱 오니까 우리는 나와 상관없이 어차피 말씀 세계 속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말씀에 입각해 볼 때 우리는 썩어 문드러져야 될 그러한 존재라는 것을 니느웨 사람들은 발견한 겁니다. 그때부터 40일이라는 역사적 시간은 묵시로 말미암아 사라져 버려요.

40일은 그 40일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 세상 끝 날까지 40일 이었습니다. 그게 말씀 속에서의 40일은 지상의 40일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했다고 해서 어떤 사람은 39일하고 어떤 사람은 40일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평생 하라는 말 이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일을 걸은 것은 40일 동안 한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미래와 영원까지를 다 포함해서 압축해서 그렇게 보여준 겁니다. 만나 없이는 못 사는 기간이 40일이잖아요. 주의 은혜 없이는 니가 천국 못 간다는 이야기를 40일 동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다 보여준 겁니다. 그걸 예수님이 40일로 축소시킨 거고.

40일 하는 것은 요나가 이방인을 볼 때 자기 시간성으로 했지만 주님 안에서는 40일이라 하는 것은 회개하게 되면 그 40일이 바로 유보된 영원한 유보가 됩니다. 심판이 유보된 거예요. 회개하는 순간 역사적 시간관은 없어지고 영원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들은 회개하는 기간이 40일 기간, 40일 되기 전에 그들은 회개했다. 오늘날 우리 백성보고 주께서 구름타고 오기 전에 회개하시라 그 이야깁니다. 이방인들아, 아직도 40일이다. 아직도 말씀 세계 속에 있다. 머리를 들어보라. 모든 것이 말씀이다. 손에 잡히는 게 다 말씀이다. 이건 누가 증거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아니 증거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안 들어서 그래요. 우리가 듣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지금도 요나는 살아 있습니다. 왜냐, 예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보낸 종들은 주님이 살아있듯이 그들의 종들은 계속해서 나타날 거예요. 그리고 분명히 우리의 뿌리를 보라고. 썩어문드러진 뿌리를 보라고 할 겁니다. 뭣 때문에, 회개하라고.

회개라 하는 것은 세상은 말씀으로 돼 있고 우리는 다만 말씀을 증거 하게 돼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그것이 정립하면 그게 회개입니다. 쓸데없이 울고불고 하지 마세요. 금식한다고 밥 굶고 하지 마세요. 밥 먹어 가면서 뷔페 가서 접시 하나 더 갖고 오면서 두 세 차례 갖고 오면서 주의 은혜로 사는 걸 알 때 십자가를 알게 되면 금식 단식 회개 방언 어떤 것도 그 안에서 다 완성된 걸로 쳐 줍니다. 예배 참석, 헌금한 것, 기도한 것, 어떤 것도 예수 십자가 믿으면 다 쳐준 걸로 돼 있고 헌금하거나 재산 반을 바치거나 뭐 전도하더라도 십자가 복음에서 자기 뿌리 모르면 그건 회개가 안 되기 때문에 그건 다 종교 취미생활에 불과한 겁니다. 아직도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할 때 이유를 몰랐어요. 저하고 뭐하라는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그 이후에 자살을 시도하게 됩니다. 너무나 우사스러워서. 이 선지자의 자존심, 하나님이여 동업자인 하나님한테 오히려 배신당한 느낌, 요 느낌 괜찮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뜻이 뭉개지는 그 느낌, 그것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부터 다시 원천적으로 다시 개시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대단한 자존심이 죽으면 죽었지 남에게 안 지려고 하는 오기, 무슨 수로 우리가 그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웬 은혠지 이렇게 우리에게 모욕적이고 우리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일어나니 이런 상황을 오히려 감사하면서 다시는 내가 없고 오직 주의 역할만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