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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욘 4:1-5 / 선지자의 불평 120715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요나

욘 4:1-5 / 선지자의 불평 120715

정인순 2012. 7. 15. 17:23

 

 

선지자의 불평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2년 7월 15일                         

 

본문 말씀: 욘 4:1-5

 

(욘 4:1, 개역)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욘 4:2, 개역)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욘 4:3, 개역)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욘 4:4, 개역)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욘 4:5, 개역)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요나는 오늘 본문에서는 ‘사라짐’을 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그 현장에서 빠져보려고 합니다. 단단히 삐친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과연 이 문장 외움이 요나 자신의 구원을 보장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얼마나 똑똑하며 얼마나 기억력이 좋은가를 묻지를 않습니다. 4절에 보면,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하십니다. 사람은 진짜 고이 간직하고 싶은 자아는 안쪽으로 돌리고 바깥쪽에서는 대인관계용으로 다른 자아를 제시합니다.

이 버릇은 하나님 앞에서도 여전합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치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이나 외부 인사로 인하여 다칠만한 자아의 요소들은 바깥에 배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나는 자살을 암시하는 말을 합니다. 자살이란 자아가 가장 긴장되고 딱딱해지는 순간입니다. 최후로 건질만한 것들과 함께 자폭하는 것이 자살입니다.

자살할 수 있는 권한은 최후로 써먹는 법입니다. 왜 자살할까요? 그것은 자기에게 있어 가장 고귀한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 고귀한 것이 바로 ‘가치 있는 자아’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벌리시는 그 현장에서도 자신만이 고귀한 가치만큼은 상실되지 않기를 염두에 두면서 전도한 것입니다.

이러한 위선은 하나님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사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요나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자아상이 구원에 합당치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래서 요나가 기대하는 것과 다른 조치를 내린 겁니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힘들고 난감한 것은 성도가 고대했던 바와 하나님의 사건이 일치되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대대로 이루어지는 기도 응답을 줄 수가 없는 이유는, 그 안에는 필히 자신의 가치를 지속하려는 인간적인 버팀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 모든 것이 어떻게 달라지든지 간에 내 가치를 가치있게 지키겠다는 이 사실은 지울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대치와 비켜갑니다. 따라서 요나는 그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에서 자신을 빼내려고 합니다. 빼내어야 나머지 자신의 가치라도 지켜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사는 실은 니느웨에게 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요나와 요나로 대변되는 이스라엘 나라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그들을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자신을 무가치하게 간주한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 자리에 같이 동참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전도인’ 그 자체의 가치를 자신의 가치로 소지하려고 합니다.

요나에게는 하나님의 완벽하게 표현하는 문장과 기억력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지식으로 하나님의 관계가 뒤틀려지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입장에서 하나님의 자존심은 충분히 챙겨드렸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남아있는 자신의 기차 몫은 자신이 처분할 권리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인간이 무가치하다는 쪽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그 어떤 기도 응답도 오로지 이 응답으로 주어집니다. 사람은 다급한 일이 생기면 자발적으로 기도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의 몸이 과거 기억의 뭉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을 인간의 자아가 조정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이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쪽으로 다가오실 때 어떤 층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층은 바로 악마로 둘러쳐진 층입니다. 예수님께서 악마를 언급하기 때문에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사이좋게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 대화하는 것을 하나님쪽에서 용납하지를 않습니다.

악마의 권세로 둘러싸여 있는 인간이 그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챙기는 식으로 훈련받아 왔습니다. 인간 사회 자체가 전부, “우리 가치 챙깁니다. 하나로도 놓치지 마시고”라고 구호로 우렁찹니다. 사람들이 이 말에 모두 예외없이 동감을 표하는 이유는 악마가 그렇게 인간 몸에 훈련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세상 뜻대로 안되면 자살이라는 최후의 방도가 아직 남아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하고 대화하고 그 대화에 인간이 동의해서 구원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라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회개란, 우리 자신에게는 그 어떤 가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가치함을 스스로 인정하도록 유도하면서 그 무가치가 스스로 조성할 상황이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주부들이 도마 위에서 생선을 두들겨서 포를 만들 듯이 하나님께서는 마귀 안에서 잠들고 있는 인간 인생을 향하여 정신없이 두들려주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아가 더 이상 단단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아가 단단하면 단단해진 자아를 구축하고 지키려고 달려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단단해진 자아를 끝까지 신봉하고 사수하고 섬기려고 시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와해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는 자신의 작업 현장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종교 언어나 신앙이나 신학 개념들을 거론하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대체하려는 그런 시도를 묵살하시고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자살충동이 들게 만드는 사태에 집어넣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기도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 속에서 우리 속에 있는 본심을 밖으로 나오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밖으로 나온 그 본심이 무가치함을 통보하십니다. 죽어 마땅한 존재를 죽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을 구원의 순간으로 전환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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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07강-욘4장1-5(선지자의 불평)1207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요나서 4장 1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289페이지입니다.

요나 4:1-5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오늘 본문에 요나가 누가 들어도 제대로 된 고백을 하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주께서는 자비로우시며 주께서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주께서는 인자가 크시며 주께서는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제가 고백합니다.’ 100점 만점에 100점이죠. 누가 와서 지적할 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런 모든 것이 여기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찜이냐.’ 부득부득 성을 내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재앙을 돌이키시고 인자를 바라십니다. 네, 참 훌륭들 하십니다. 참 훌륭한 분을 알았사오니 저는 영광입니다. 죽이소서.’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래서 이것은 어떤 교리나 문장, 삼위일체, 사도신경, 그런 것을 외우는 것이 과연 어떻게든 헌금, 기도, 예배참석, 전도, 이런 것들이 그것이 하나님께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주께서는 딴 거는 묻지 않아요. ‘지금 너 성냈지? 성 냈지? 너 인생에 대해서 너 자신에 대해서 성내고 있지? 모든 것이 실망스럽고 모든 것이 세상에서 망신당하니까 화나지? 화나지?’ 그런 뜻에서 질문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답변하죠.  ‘저는 방긋이 웃습니다. 방긋이.’ 이렇게 억지로 웃으면서 감사의 티를 내면서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형제우애 항목을 갖추려고 애를 쓰죠. 그럼 주께서 뭐라 하십니까? ‘그냥 니 성질대로 해. 니 하던 대로 해. 쓸데없이 자꾸 연기하지 마시고 니 평소에 하던 행세대로 하라니까.’

그건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라짐’입니다. 사라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일을 멋지게 하시네요. 그럼 나 없어도 되죠? 그럼 저는 빠집니다.’ 빠지는 거, 사라지는 거, 그리고 나만의 장소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관람하는 거, 구경하면서 박수치는 거, 바로 요나의 이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이, 또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든 그 이유가 되는 겁니다.

사라진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기를 감추는 거예요. 이 말은 나를 바깥에 내세우는 나 따로 있고 그리고 아무에게도 드러내기 싫어하는 진짜배기 나, ‘진짜 나야.’ 하는 것은 속에 따로 감추어 두는 겁니다. 그래서 요건 들키지 않고 내가 원하는 나 되기 위해서 고건 나만이 간직하고 자살을 시도하게 되죠. ‘그래 이쁜 나야, 나와 함께 죽자.’ 하고 같이 자결하려는 거예요.

옛날에 우리 집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하도 시어머니가 애를 먹이니까 둘째 아들을 꼭 붙들고 약을 갖고 와서 소화제 비슷한 약이죠. 화가 나서 ‘근호야, 같이 죽자. 이렇게 사느니 같이 죽자.’ 저는 기억나는데 어머니는 기억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기억나요. 보세요. 진짜 다치기 싫어하는 나는 따로 있어요. 주변 환경이 받쳐주질 않습니다. 너무 힘들게 합니다.

그러면 버티고 버티는 것은 그분 좋아서가 아니고 순수한 나, 천심이죠. 순수한 나를 진짜 순수하게 지키기 위해서 살인을 당하는 거예요. 이게 환경이 이르러 보세요. 감당이 안 돼요.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고만 사는 것도 싫고 ‘고만 같이 죽어버리자.’ (나중에 보니까 소화제예요.ㅎ) 이렇게 하는 거예요. 또 자식이 너무 애를 먹이니까 교도소에 면회 가서 ‘야, 니 이러려면 나하고 약 먹고 죽자.’하는 식으로 엄포용으로 그렇게 하는 수가 있고 어쨌든 간에 순수한 나는 어떤 경우라도 나는 흠집나기 싫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순수한 나를 바깥에 드러내고 가짜 나를 집어넣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니느웨 회개사건을 통해서 그대로 요나에게 적용합니다. 요나는 걸려든 거예요. 하나님의 묘략과 지혜에 걸려든 겁니다. 자기는 구경만 하려고 했어요. 관념 속의 자기의 나를 잡아 당겨서 그 니느웨 심판 사건 속에 집어넣을 줄을 요나는 미처 몰랐습니다. 박수만 치려고 했습니다. ‘박수 치는 니 나와.’ 하고 집어넣죠.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을 할 때에 나를 구원한다면, 내 몸을 실험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거 잊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겠다는 말은 내 속에 구원사건을 폭파시키고 일으키겠다는 겁니다. 구원이 이르렀다는 게 나로 하여금 따로 놀지 않고 구원의 현장에 내가 그 안에 있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 너, 너’ 너 자신의 너 자신 속에 니가 부끄러워서 감추어 놓은 정말 수치스러워서 감추어 놓은 너 자신을 너도 손대지 않는 너를 내가 너를 손대어서 천국 가는 사람으로 만들어내겠다는 사실이 구원의 사건입니다.

니느웨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요나, 다른 말로 하면 요나가 속해 있는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 속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 그 이스라엘을 반드시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그냥 변덕부리는 식으로 아무것도 아닌 니느웨를 회개시키는 겁니다. 요나는 삐졌어요.

자, 그러면 우리는 왜 사라지면 안 됩니까? 뭐 우리가 주의 앞에 별 도움도 안 되고 보탬도 안 되면 우리를 빼놓고 주께서 알아서 혼자 다 하면 될 텐데 왜 우리를 자꾸 그냥 놔두지 않고 사라지지 않도록 만드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신약에서 밝혀지는데 신약에서 예수님과 유대인이 이야기할 때 의견이 소통이 돼야 될 텐데 단어 하나가 들어가서 소통이 안 됩니다. 그건 뭐냐 하면 ‘유대인 너희들의 아비는 마귀니라. 또는 귀신이다. 마귀 새끼다.’ 이런 이야기하죠. 귀신, 마귀, 이런 이야기를 집어넣으니까 대화가 단절돼 버리죠.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의 구원은 우리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마귀와 상대해서 주께서는 그 안에 갇혀있는 우리를 탈출시키는 방법으로 하늘나라에다 집어넣는 겁니다. 마귀에 속한 우리를 탈출시켜서 집어넣는데 우리는 탈출될 여력도 능력도 없어요. 그래서 우리 속에 마귀가 있다면 그 마귀를 상대하려고 뚫는 방법은 예수님만 알고 있지 우리는 모르거든요. 우리는 흉내 낼 수도 없고 흉내가 안 돼요. 예수님이 하는 것은 주님만 하시지 우리는 못하거든요.

디디디딕 뚫는 거예요. 마귀를 상대로 뚫는 방법은 마귀는 알아요. 예수님께서 마귀를 공격할 때 뭐로 뚫는가를 마귀는 압니다. 처음에 욥은 몰랐는데 나중에 보면 욥이 알아요. 하나님께서 욥을 구원할 때 마귀를 상대한 이유에 대해서 압니다. 그것은 뭐냐,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주님의 행함으로, 자비와 용서로 구원한다는 사실, 나중에 욥기 마지막에 보면 욥이 친구를 위해서 대신 기도해주죠. 바로 그 방법이 그 대신 기도하고 대신 구원하고 대신 욕보시고 대신 고생하시고 대신 희생하시는 방법이 마귀가 제일 거북스러워하고 제일 싫어하는 방식입니다.

‘아니 내 혼자도 할 수 있는데 그거 뭐 꼭, 대신 피 흘림, 꼭 그거 믿어야 되겠어? 니 혼자도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하면 훌륭한 사람 되는 거야.‘라는 이런 소리가 외부에서만 들려오는 게 아닙니다. 자꾸 우리 내부에서 내가 나 자신도 그걸 자꾸 외치고 있어요. 자식이 시험을 앞두고 있다. 어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다.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갑자기 사람이 행동자체가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본인이 절제하게 됩니다. 절제하면서 공손해집니다. 행여나 요 착함과 선행이 내가 기대하는 일에 다소나마 보탬이 될까 싶어서, 그런데 만약에 보탬이 된다면 그건 큰 문제가 됩니다. 보탬이 된다면 그 사람은 마귀로부터 빠져나오지도 못하면서도 마치 빠져나온 것처럼 생각하고 그 빠져나온 방식에 대해서 자기도 어느 정도 기여를 하고 도움을 줬다. 보탰다는 것이 계속해서 내 몸에 기억이 돼 버립니다.

그 다음부터 그 사람 몸은 또 그다음부터 또 중요한 일이 있게 되면 또 자제를 하고 조심을 해버려요. 이게 버릇이 돼 버리면 이건 마귀한테 완전히 속아 넘어 가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긴 소리 할 것 없이 단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몸이 급할 때 하나님한테 기도하게 되고 어쩔 수 없습니다. 축구 시합을 하게 되면 마지막 패널티 킥 찰 때는  누구나 온 국민이 손 모아서 기도하게 됩니다. 불교 신자는 불교신자대로 ‘한 골 넣어줘. 홍명보 한 골 넣어서 4강에 올라가기를.’ 그때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여학교 때 시험 칠 때 보면 전부 다 기도하고 있어요. 중요한 순간이거든요.

그런데 기도하는 자기의 모습은 알면서도 기도 응답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 모르는 거, 제가 알려드립니다. 그 애매한 거, 제가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우리로 하여금 초라하게 만드는 식으로 주께서 응답하십니다. 우리를 초라하게 만들고 쓸모없는 인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기도의 응답으로서의 작업을 개시하십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왜 그러느냐 하면 그것은 우리를 마귀 속에 있는, 마귀 속에서 사는 우리를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나타날 때가 언제냐, 자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할 때는 사람은 나타나고, 긴장을 하게 돼 있어요. 사업을 할 때나 애 시험 칠 때나 왜 긴장하느냐 하면 고것만 넘어가고 고것만 합격하고 고것만 사업에 성공하게 되면 나는 가치 있는 인간이 되거든요. 가치 있는 인간이 되면 구태여 이 땅에서 사라질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의 사라짐의 끝은 자살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그걸 보여주거든요.

자기가 가치 있을 때만 하나님이고 하나님과 동업에 서슴없이 나섭니다. ‘하나님께서 키워준다는데 제가 말릴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미약하나마 보탬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리고 우리가 못하는 기도의 응답은 바로 기도의 응답을 받아서 응답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가치 있다고 여겼던 것을 골라서 버리지 않고 고것만 골라잡아서 꽃다발 만들어서 그걸 자기한테 갖다 붙여놓고 그걸 응답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도의 기도는 기도하게 된 그 자체가 응답인데요. 기도 안 한 인간이 하게 된 자체가 응답이 돼요. 왜냐 하면 그 기도를 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처음부터 나는 무가치한 존재인 것을 비로소 아는 계기를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끊어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급한 일을 발생시켜서 기도 안 하고 못 버티게 돼서 절로 무릎 꿇고 기도하게 만드시는 그것도 주께서 하시는 주님의 기도의 응답으로서 우리는 가입된 거예요. 가입돼 보면 마지막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짜배기 응답은 뭐냐 하면 바로 ‘아! 내가 이렇게 쓸모없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쓸모 있다고 여기는 순간에서 얼마나 자신을 긴장하고 바짝 졸아들고 ’요 순간만큼은 내가 나쁜 짓 안 하고 나쁜 생각 안 먹어서 이건 반드시 내 손으로, 신앙의 업적의 결과로 내 손에 쥐고 싶다.‘는 그런 숨어있는 지옥 갈 몸인 진짜배기 나의 자아를 다시 한 번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그런 작업을 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요나가 니느웨를 언제부터 알았습니까? 요나가 니느웨 구경하고 싶어 환장한 사람 아니잖아요. 요나는 스페인 그쪽 구경하고 싶었는데 니느웨는 구경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그쪽에 가기 싫다고 딴 쪽으로 간 게 스페인 이예요. 다시스거든요. 요즘 같으면 불국사를 오든지 금강산을 가든지, 호주 뉴질랜드 그런데 가도 되는데, 스페인 그쪽에 간 것은 혼자 놀기 좋은 모양입니다. 자기를 숨길 수 있으면서도 즐길 수 있는 장소, 어느 간섭도 안 받으면서 내 속에 있는 나로 인하여 흐뭇해 할 수 있는 장소.

만약에 우리교회 교인들에게 오후 설교를 저한테 하지 말고 돌아가면서 죽 설교를 하신다면 그리고 그 설교한 대가로 목사 월급 반을 쪼개서 나눈다면 그때는 양복 입고 넥타이 매고 정신 차려서 사전에 빡세게 기도하면서 ‘주여, 말실수 하지 않게 하시고 누가 기도하면 흠담 없이 완벽한 설교되게 하소서.’ 한다 말이죠. 우리 권사님이 자주 부탁했어요. 기도 하게 되면 미리 이야기하면 준비하겠다고. 준비 하나 안 하나 무가치한 존재인데 뭘.ㅎ

그러니 이건 뭐냐 바깥에 있는 남한테 제시하는 나와 숨어있는 난데 그 바깥의 나에게 기회를 주시면 숨어있는 나가 이만큼 평소에 숨어있는 예쁘장한 나를 보일 수 있는 그러한 식으로서 평소에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지금 주께서는 그것이 마귀가 그동안 길들여온 마귀 속에 속한 기억된 몸이거든요. 몸은 기억 덩어리입니다. 우리 몸은 행동, 그냥 나오는 게 아닙니다. 옛날에 여러 번 했던 것들이 떨어져서 나오는 거예요. 담배 끊어도 전자 담배 물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담배 피웠었구나.’ 알죠. 아내에게 큰 소리 치는 것도 옛날에 큰 소리 쳐왔다는 것이 표 다 나는 겁니다. 이거 하루아침에 못 끊어요. 뭐 ‘예쁩니다. 사랑합니다.’ 하다가도 중요한 사건이 나면 어, 하고 큰 소리 나버리죠.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몸이 로마서 7장에 나오잖아요. 이 몸은 사도바울이 고백했잖아요. 이 몸이 도대체 이거는 천국 못 가는 몸을 갖고 있음을 비로소 주님 앞에 고백한다 이 말 아닙니까? 그게 사도바울의 구원 이예요. ‘주여, 이 몸이 품고 있는 기억과 이러한 습관은 도저히 천국 가서 거기서 써먹을 기억도 써먹을 용도도 아니다.’라는 것을 본인이 고백하는 겁니다. 이 몸을 어떻게 고칠 수도 없고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할 밖에 없는.

주께서는 요나보고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나오라는 이 말 이예요. 그런데 요나는 숨어있는데 그 마지막 숨어있는 결정이 자살이었습니다. ‘주여, 잘 먹고 잘 사이소, 하나님 훌륭한 것을 내가 죽어서도 박수 쳐줄 테니까 혼자 똑똑하고 혼자 잘나고 혼자 거룩하신 하나님, 맘껏 되소서. 나는 하나님에서 빼주소서. 나는 고이고이 간직한 나의 가치 있는 것을 나는 이건 내가 주님한테 안 빼앗기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숨어있는 그 몸, 내가 바꿔줄게. 은혜로 바꿔주고 천국 가는 몸으로 바꿔 줄게.’ 하고 들통 내기 위해서 안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바깥을 안으로 집어넣어서 주께서는 그 요나를 살려주시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정리해야 될 것은 내가 신앙생활이 어려운 이유가 내가 고대하고 기대하는 그것과 주께서 일으키는 사건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은근히 노리는 그것을 주께서는 그걸 피해 가버려요. 그게 안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 말은 그거 안 해준다는 말은 니가 기적을 만들 그런 몸도 아니요, 기적을 꾸며낼 그런 자격도 없고 니가 생각하는 니가 그런 기적을 받을 몸이 안 돼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적을 받을 몸으로 바꿔주는데 주님의 기적을 받을 몸은 지금 니느웨 사람들이 방금 보여줬어요.

니느웨 사람들이 방금 뭘 보여줬습니까? 3장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 그 다음에 모두가 물도 마시지 말고 회개하는 것이죠. 회개가 뭡니까? ‘우리는 벌 받아도 쌉니다. 우리가 지금 벌 안 받을 짓을 해서 이만큼 버티고 온 것이 아니고 사실은 벌 받아도 되는데 웬 은혠지 웬 축복인지 그것도 모르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그걸 몰랐습니다. 모든 게 은혜고 감사인지 몰랐습니다.’라는 몸이 된다면 재앙도 철회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요나는 멀찍이 보면서도 삐진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주의 은혜가 계속해서 삽입될 몸이 아니고 엉뚱한 몸,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몸이니까 주께서는 굳어진 몸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부드럽게 만들려면 자살할 때 인간은 가장 격앙돼 있잖아요. 굳어져 있잖아요. 얼마나 오기와 고집이 세면 자살하겠습니까? 자살하겠다는 것은 그 순간에는 자아가 딴딴해 지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나는 이미 죽었는데 산다.’ 이렇게 퍼져 있는 몸으로 이렇게 유들유들하게 바꿀 필요가 있어요. 바꿀 때는 어떻게 바꾸는가, 그거 예를 제가 하나 들고 마치겠습니다. 주부들이 도마에다 딱딱한 것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빨래해서 모시 풀 먹이면 빳빳해서 손  대면 벨 정도로 빳빳한 것을 옛날에 할머니와 어머니가 돌로 만든 다듬잇돌에 방망이 둘을 가지고 양쪽에서 잡아당겨서 접어서 그 다음부터 두드리는데 다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가 그 리듬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그 리듬이 자진모리인지는 모르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 할머니와 어머니의 두드리는 것이 똑같이 안 두드리고 저쪽이 두드리는 박자 중간 중간에 상대방의 박자를 집어넣는 방법으로 두드리는 거예요. 다다다닥, 다다다닥, 야,
~ 그러니까 그걸 왜 하느냐, 그러면 풀이 죽어서 빨래가 녹초가 돼요. 헤벨레 헐~ 지금도 딱딱한 거, 명태나 다른 것을 할 때 도마에 놓고 마구 두드려서 갈기갈기 찢어놓고 그 다음에 간장 넣고 고추 넣고 양념해서 내놓잖아요.

주께서는 매일같이 우리를 도마 위에 놓고 신나게 다다다닥, 다다다닥, 다다다닥 내려치는 거예요. 긴장하지 말라고. 자살하지 말라고. 니 몸은 니 기억으로 딴딴하게 굳지 말라고. 풀어지게 하는 거예요. 퍽 퍼지게 만들어요. 왜, 퍼진 몸은 내 것이란 것이 따로 딴딴하게 정립이 안 됩니다. ‘그래 우리는 내 것이 없어.’ 이 두드리는 은혜가 그 숨어있는 나를 딱딱한 나를 바깥으로 집어넣어서 주님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시키는 방법을 주께서 사용하십니다. 강도가 강도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강도 되게 하셔서 내가 무가치한 걸 만개 공개시켜서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강도 된 게 축복인 것을 강도는 그때 알았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의 우리가 된 것이 축복인지는 우리가 얼마나 주님한테 얻어맞아 터졌는가의 여부에 달린 줄 압니다.  우리 힘으로 마귀를 이길 수가 없고 그저 퍼져있던 몸인데 따로 가치 있는 것을 숨기지 말고 주의 의해서 끌려 나와서 주님의 은혜의 몽둥이에 맘껏 얻어맞는 즐거움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