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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나 1:4-10 / 선장과의 대화 / 120610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요나

요나 1:4-10 / 선장과의 대화 / 120610

정인순 2012. 6. 10. 15:29

 

선장과의 대화(욘 1:4-10)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2년 6월 10일                       

 

본문 말씀: 요나 1:4-10


(욘 1:4, 개역) 『여호와께서 대풍을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욘 1:5, 개역)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욘 1:6, 개역)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욘 1:7, 개역)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욘 1:8, 개역)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욘 1:9, 개역)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욘 1:10, 개역)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오늘 본문을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대단히 순전한 사람들로 보이게 됩니다. 예상 밖의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위태롭게 될 때에 사람들이 취하는 조치들이 너무나도 미신적이고 신화적으로 보입니다. 일기예보를 제대로 보고 왔어야 함으로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필시 자신이 믿는 신에게 죄를 지을 자가 잠입했다. 그래서 그 신이 그 사람을 따라와서 족치는 바람에 덩달아 우리마저 위험에 노출되었다”라는 의식 자체가 순박해보이기까지 할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문명이란 신을 합류시킨 놀이요 게임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동네 골목에서 왕놀이를 하는 것 같습니다. 신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놓고 인간들이 그 전지전능한 신에게 어떻게 잘 보이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생존에 유리하다고 보는 겁니다. 참 순진한 발상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성도는 지금 죽어도 낙원에 가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얼른 죽어서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이 소원이 어디 사도 바울만의 소원이겠습니까. 모든 성도의 소원이기도 하고 현실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은 이 땅에서 삶의 생존에 필요한 신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면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당한 시험에 넘어가는 바가 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신을 섬기기에 이런 사고방식에 준한 ‘죄’라는 개념은 늘 자기 생존에 불리한 식으로 나타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게 되었는데 그 배에는 이처럼 기존의 신을 믿는 자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사실 요나는 그들의 신 놀이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그냥 자기 갈 길만 가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나의 그런 사적 공간을 공적 공간으로 넓히게 만들었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요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엮이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의 상황도 이와같습니다.

전혀 동의가 안되는 그런 사람들의 놀이동산으로 둘러싸여서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참 살아계신 하나님이 인간이 만들어낸 우상과 어떤 차이를 지녔는지를 보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생존차원에서 찾아오는 게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생존 차원에서 죄를 거론하는 것이 늘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로 알게 하십니다.

요나에게 찾아들어오신 하나님께서는 사명 때문에 찾아드신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사명이 없는 이들의 신이란 항상 사명자들과 함께 계신 참 하나님으로부터 인하여 그들의 생존에 위협받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아는 자들을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은 사명에 준해서 살아가는 자들이 자기 목숨부지가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상황을 흔들어 버리시므로서 말미암아 그 벌어진 간격 사이로 하나님의 사명적 의도가 비쳐 나오게 하십니다. 죄라는 것은 이처럼 사명을 못 본척하는 겁니다. 요나의 개인적 구원이나 죽음은 여기서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요나의 입에서 증거되는 다음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시편 104:3-4의 말씀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또한 시편 135:7에 보면, “안개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 이런 말씀은 단순히 대자연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점에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요나처럼 특별한 인물이 보여주는 특별난 사명을 위해서 주변 대자연이 구성되어있음을 알리는 겁니다.

즉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죽음이라는 것이 끝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죽음이란 도리어 사명의 시작점입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모든 사진은 영정사진이다”고 말입니다. 이 영정사진의 모델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꽃옆에서 사진을 찍어도 꽃 옆에 시신을 두고 있던 그런 사진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도리어 이 죽음의 한계 안에서 살아보려는 발바둥칩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애써도 죽음이 주는 위협과 공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며 또한 그런 기준에 준해서 죄와 의를 논하게 됩니다. 즉 “죄지었다면 죽음이, 죄 짓지 않는 자에게만 생명연장이”라는 구호를 마음에 담고 살아가게 됩니다. 과연 성도조차 그렇게 살게 될까요?

사도행전 27정에 보면 사도 바울는 요나가 만난 비슷한 자연환경을 접하게 됩니다. 로마로 가기 위해 타고 가던 배가 유라굴로라는 대풍을 만나게 됩니다. 이럴 때 사도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즉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사도와 함께 있는 여러분의 목숨은 사도에게 주신 예수님의 사명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죽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지만 사명이 우리를 지배하고 이끌고 인도하기에 이 사명이 능력이 발휘되면서 우리 성도들도 같이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만의 공간이라는 것처럼 애초부터 허락될 수 없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는 찬송가 가시처럼 아무 것도 의지할 게 없다는 그것이 사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돕고 있습니다. 그들의 천박하고 공포에 잠겨있는 종교들마저 성도가 감당할 사명을 돕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존속을 위하여 몸부림칠 때, 사실 그런 정도라면 우리는 잠이나 깊이 잘 수가 있습니다. 요나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사명이 성도를 깨웁니다. 요나처럼 말이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사적 공간이 실은 하나님이 개입한 공적 공간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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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02강-욘1장4-10(선장과의 대화)1206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요나서 1장 4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287페이지입니다.

요나 1:4-10
“여호와께서 대풍을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이 대목을 보게 되면 요나가 배를 탔는데 여객선을 탔죠. 그런데 갑자기 예상 못하게 풍랑이 일어서 배가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 대목에 있어서 배 사고라 하는 것은 흔히 일어나지 않습니까? 바다가 항상 흔들리니까, 배 사고가 일어나게 마련인데 오늘 대목을 보면 좀 순진하다 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배에 풍랑이 일 때에 ‘아, 우리가 일기예보를 잘못 봤구나. 어제 뉴스만 보고 스포츠만 보고 그냥 자버렸는데 오늘 일기예보를 볼 걸. 일기예보를 제대로 체크하지 않았구나.’ 이렇게 나오면 상당히 과학적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들리는데, ‘자, 이거 분명히 우리가 죄졌다. 아니, 아니 죄 진 사람이 우리 안에 포함이 돼서 그 죄진 사람이 믿던 신이 다른 사람은 갋지 않고 지한테 죄진 사람한테 갋아서 다른 사람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으니까 빨리 색출하자. 자기 신에게 죄진 사람을 색출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하고 처리해서 나머지 사람은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이 세상 관, 이 사고방식, 이 자체가 오늘날 현대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억수로 그건 순박하다 할까요, 순진하다 할까요, 이거 뭐 뜯어고칠 수도 없고 어떻게 평소에 그 정도로 신에 눌려 사는, 신한테 놀아나는 그런 식으로 인간이 인간의 자유성을 포기하고 미신에 묶여서 살아가는 그런 모습을 오늘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바다가 풍랑이 이는 것은 지구의 자전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구의 자전과 태양열의 태양 에너지가 대기에 의해서 온실처럼 묶여져 있으면 태양열이 바다의 수온을 높이고, 그리고 지구의 자전으로 말미암아 대기의 흐름이 바뀌면 북극에서 날아오는 찬바람과 바다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바람이 만나서 에너지 교란상태가 벌어지게 되면 그래서 그 기압의 차, 위에서 내려오는 공기라는 게 있는데, (산소와 질서의) 공기가 내리는 압력의 차이에 의해서 압력의 차이를 균형 있게 조정하기 위해서 고기압에서(무거운데서 물이 흐르듯이) 낮은 데로 흐르다 보면 흐르는 과정에서 바람이 불게 돼 있습니다.

여기 무슨 신이 왜 개입합니까? 여기 왜 죄가 개입하는 거예요? 아직 21세기에 우리가 요나를 보고 있다는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너무 순박해서 천진난만해서 이걸 보고 있는 것인지, 비과학적인 이야기를 보고 있다는 것은 여기서 비과학적인데서 뭐를 얻을 게 있겠어요?

미국의 3대 대통령 프랭클린 그 사람이 피뢰침을 만들기 전까지는 이 번개라는 것이 신이 저주해서 자기가 죄진 사람에게 지목해서 때려주는 하나님의 징벌로 여겼습니다. 이거는 요한계시록에 보면 나와 있거든요. 번개와 지진, 이 모든 것은 신이 ‘죄지었다’에 대한 ‘내가,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있어. 안 죽었어. 하나님이 안 죽었단 말이야. 죄 지은 것은 반드시 살아있는 신의 분노를 유발하게 돼 있어.’라고 그걸 증거해 보여주는 확실한 증험이 번개였습니다.

그런데 그 번개를 피뢰침이 잡아버렸네. 아, 피뢰침이 더 세네. 하나님이 피뢰침한테 져버렸네. 높은 건물에 피뢰침 달려 있으면 건물에서 50미터 사이에 방금 도둑질하고 피뢰침 털고 가는 강도에게 피뢰침이 없으면 번개 칠 때 강도질했기 때문에 그쪽에서 머리를 때려줘야 되는데 강도가 머리를 써서 예배당이 좋아서 피뢰침을 보고 숨어드니까 그 우루르쾅쾅 치는 그 번개가 자기를 피해서 피뢰침한테 다 쏟아 넣으니까 피뢰침이 대속의 십자가입니까?

우리가 과학이 진리라고 간주하는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 안목으로 볼 때에 이 요나에서 풍랑이 일고 그것과 관련된 모든 것은 그 시대의 인간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 시대에!  애들이 소꿉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어릴 때 대구시 서구 비산동 144번지 대성초등학교 앞에는 대성백화점이 있고 골목길에서 놀이를 하고 있을 때 여름 대면 애들이 학원도 안 다니고 바람 부는 골목에서 놀았어요. 그래서 한 놀이가 뭐냐 하면 ‘왕 놀이’를 했어요. 의자를 서너 개 놓고 ‘가위 바위 보’해서 이긴 애는 제일 좋은 의자에 앉고 왕이 딱 정해지면 그냥 가위 바위 보 안 해요. 일단은 절을 받아야 돼요. 절을 공손하게 3번 해야 돼요. 가위 바위 보해서 이기면 그 자리 차지하고 그게 재밌다 이 말이죠.

그런데 저녁 쯤 돼서 엄마가 ‘얘야, 밥 먹자.’ 할 때 애들을 보게 되면 애들이 게임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할머니가 ‘밥 먹자.’ 하면서 뭘 들고 가느냐 하면 왕 의자를 들고 가요. ‘이거 뭐 하노, 지금이 몇 시인데.’ 하면서 들고 가면, 우리 할머니는 왕보다 세네. 애들이 알고 있는 소꿉놀이 세계관 속에서 그 외부의 세계관이 와버리면 그것은 가치와 의미가 완전히 무산되는 겁니다.

옛날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룰 때는 인간의 소꿉놀이를 그냥 인정해 줘요. 왜, 인간이 알고 있는 세계관은 기껏 고정도 게임 속에서 하나님이고 그런 속에서 자기의 정신관과 인생관이 구축이 되는 겁니다. 이거는 여러분들이 ‘목사님, 지금은 과학시대기 때문에 신이 없는 게 아닙니까?’ 과학시대니까 처음에는 망원경으로 하나님, 천사들 보려고 망원경 만들었거든요. 아무래도 천사가 안 보여요. 기껏 보이는 것이 지 눈밖에 안 보인다 말이죠. 그러니까 점차로 신은 안 보이는데 계시다 이렇게 나오니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신은 없다.’

그 말은 뭐냐, 꼭 신은 안 찾아도 우리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럼 그 말을 거꾸로 돌려버리면 뭐가 되겠어요? 그동안 신을 찾은 것은 신이 좋아서 찾은 게 아니고 너무 살기 힘드니까 신을 찾은 거예요.

제가 오늘 방송에 안 보는데 얼른 보니까 전국노래자랑의 사회자가 자기도 모르게 멋진 말을 했어요. 뭐냐 하면 유채영이라는 그런 분이 계신데 그분이 오버하듯이 춤을 췄거든요. 그러니까 사회자 하는 말이 ‘저 춤추는 것은 마치 주술사 같다.’ 했고, 한 마디, ‘비도 내리겠다.’ 요새 비가 안 오잖아요? 비가 안 올 때 기껏 그 당시 소꿉놀이에서 했던 방법은 자기를 자학하듯이 춤을 추게 되면 가엽게 어여쁘게 여겨서 ‘아이쿠, 니가 그 정도로 스스로 맘을 낮추는구나. 그래, 그래 줄게. 비 줄게.’ 해서 비를 내리는 거예요.

열왕기상에 보면 엘리야가 850대1로 붙을 때 3년 6개월 간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바알과 아세라는 뭘 했느냐 하면 자기를 자학해서 칼로 자기를 찔렀습니다. 같은 구경꾼 인간들 보기에는 정말 너무나 대견스럽죠. 그런데 엘리야 보기에는 바로 그런 짓들이 오히려 비를 못 오게 만든 요인이었고 원인이었다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의 방식과 기존 인간들이 하나님 섬기는 방식이 달라도 너무 다르거든요. 너무 다른데 인간들은 자기들이 죄지었다는 생각을 안 하고 정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복음의 시작 아닙니까? ‘정성이 부족하니까 정성을 보태면 뭔가 우리가 원하는 생존에 유리하겠다.‘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한테 시험받을 때 이미 그 한계는 들통 났어요. 인간의 생존에 대해서 신을 부르면 부를수록 오히려 악마한테 더 붙잡혀있다는 사실이 이미 드러났어요. 예수님보고 뭐라 했어요? 돌이 떡 되게 하라 했잖아요? 지금 40일 금식 기도한 분에게. 그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사흘만 굶어도 신이고 뭐고, 예수고 뭐고 다 버리고 오직 ’떡만 주세요. 밥만 주세요. 이게 악마가 됐든 신이 됐든 천사가 됐든 아무나 좋으니까 제발 내 배를 채울 수만 있다면 제가 아낌없이 섬기고 봉사하겠습니다.‘ 이게 이미 길들여진 인간의 모든 양상이라 말이죠. 비가 오지 않는데 저렇게 과격한 몸짓을 하게 되면 비도 내리겠다는 거예요. 얼마나 자기 세계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한 겁니까?

비행기로 먹구름이 있을 때 드라이아이스로 알갱이를 만들게 되면 알갱이 주변에서 차가운 수증기가 모이면서 이게 무게를 가지고 중력에 따라서 밑으로 떨어지면 비가 된다 말이죠. 그런데 구름이 끼었는데 비는 안 온다. 그때는 알갱이를 인공으로 집어넣는 게 인공 비라는 거예요. 지금 중국이나 많은 나라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가 발명 안 됐을 때는 뭐를 했습니까? 땅에서 그냥 지랄발광을 해야죠. 40일 새벽 기도를 하든지, 지랄발광을 해야죠.

결국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은 인간의 바닥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설교 핵심을 분명히 짧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인간의 죄라는 것은 살려고 하는 자체가 죄가 돼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을 중심으로 해서 세상을 보지 아니하면 무슨 짓을 해도 그건 전부 다 죄가 되는 겁니다. ‘아이쿠, 죽어야 될 인간이 살아있구나.’ 이거는 괜찮은데 ‘왜 살려고 하는데 왜 사는 게 힘이 들어.’ 이 자체가 죄가 된다 이 말이죠.

이번에 서울에 강의하러 갔는데 어떤 집사님이 정말 올바로 듣는 훌륭한 말씀을 해줬어요. 뭐라 했느냐 하면 ‘집에 있는 모든 사진은 영정사진입니다.‘ 그 이야기가 가슴에 팍 꽂히는데 그래서 그분 집사님 사진 다 치워버렸어요. 모든 사진은 영정사진 이예요. 아, 나는 왜 그 표현을 못했을까.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집안에 있는 사진이 모두 영정사진인데, 놀러가서 찍은 사진, 웃으며 찍었든, 결혼식에 찍었든 어떻게 찍었든 영정사진인데, 그 영정사진 모델이 누굽니까? 본인 아닙니까? 그러면 본인이 영정사진이 됐다는 말은 본인이 지금 죽어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거예요. 사람이 죽어있는 자에게는 생존하려고 할 때는 신이 필요하고 몸부림을 치고 지랄발광이 필요하겠지만 죽으려고 한 사람한테는 그 따위 소꿉놀이 신은 필요 없는 거예요. ’혹시나 살려 줄까’해서 빌어보는 거죠. 그러나 이미 죽음이 확정된 사람, ‘이미 끝났어.‘하는 사람한테는 더 이상 신은 필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는 요나와 살려고 신을 믿는 그 주변 인물들이 함께 모여서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 잘 하게 하는 방법은 혼자 도 닦고 수행하러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게 아니고, 바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그들 무리 속에 우리가 늘 놓여있으면서 그들이 믿는 신과 정작 내가 복음을 안다고 우기는 나의 신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주께서는 비교하게 하시는 겁니다. 고맙죠. 감사한 이야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정사진의 모델이 된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잊어버리거든요. 잊어버려요. 놀러 가면 카메라 들고 영정사진을 얼마나 찍어댑니까? 꽃 옆에 가서 찍고 시체를 옆에 가서 웃으면서 찍고, 바로 그런 세계관 속에 주님께서 어떤 식으로 개입하느냐 하면, 개입할 때 우리 보고 이야기하죠. 또는 요나보고 ‘요나야, 니 죄를 알렸다. 니 죄를 알렸다.’

요나가 이미 하나님을 알아요. 모르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나가 하나님한테 이런 추적을 당한 것은 지금 살겠다고 하나님을 믿고 뭐 더 살겠다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런 게 요나의 레벨이 아니에요. 요나는 그 정도는 넘어선 사람 이예요. 선지자예요. 문제는 요나가 살기 위해서 믿는 다른 사람과 달리 사명이 살아있다면 요나도 살아있어야 돼요. 사나 죽으나 요나도 살고 죽음이 사명에 준해서 다시 정리가 되고 재평가 돼야 되죠. 다른 사람은 사명이 없어요. 그러나 그 속에 난데없이 끼어든 요나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 사명을 가당하기 귀찮아서 사명도 모르는 기존의 소꿉놀이 판에 끼어들어 보니까 하나님의 사명은 눈치코치도 없이 그게 배 위인지, 항공모함 안인지 비행기 안인지 거기다가 계속 거기에 끼어든 거예요.

‘여기 요나 있나? 요나, 요나, 니는 소용없어. 니는 폭풍에 포위되었다. 자수해라. 요나야 나오너라.’하는 이야기를 사명이 끝까지 따라붙으면서 그렇게 외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가 십자가 알면 이미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갑니다. 죽고 사는 문제에 있어 고만 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 때문에 교인들 닦달내고 하는 게 아닙니다. 왜 본인에게 있는 사명을 그렇게 감당을 귀찮아하느냐, 이 말입니다. 살고 죽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 전하러 강의하러 가면 교인들, 우리 교인들 다 이야기해요. ‘목사님, 죽는 게 편합니다.’ 누구는 모릅니까? 다 알죠. 죽는 게 편한지. ‘오늘밤 낙원에 있으리라.‘ 한 그것처럼. 사도바울도 그랬잖아요. 지금이라도 죽고 싶다고. 모릅니까? 아는데, 아직 사명이 남아 있어요. 사명! 해야 될 일이 남아있다고요. 자식들이나 가족한테 미안하지만, 죽는 게 최고죠.

요나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니가 죽고 싶어도 니 맘대로 못 죽는다 이 말이죠. 니 몸이 그냥 구원용으로, 니 몸이 있다면 구원받기 위해서 작살내도 되지만, 사명 때문에 구원이 있는 겁니다. 이게 좀 어려운데요. ‘나는 내 구원 때문에 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하다.’라는 그 구원관을 사명 적 구원관이 그냥 봐두지 않고 그걸 부숴버린다 이 말이죠. 우리는 눈만 뜨면 ‘나는 어떻게 구원받지?’ 자기 구원부터 챙기는데 그 구원관을 그것 말고 하나님 차원의 구원관이 사적인 구원관을 이걸 부숴버려요. 찾아와서 들춰낸다 말이죠.

이걸 오늘 본문에는 어려운 말로 사적 공간이 공적 공간으로 나아가면서 그 실체가 파악되는 겁니다. 요나의 사적 공간이 기존의 공적 공간에 들어갔을 때 그쪽 주변 사람들이 난데없는 낭패를 당하는 그런 조치를 누가? 하나님이 끈질긴 사명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러 가지 대목이 재밌습니다. 길게 하면 2시간도 3시간도 되는데 여기 9절에 보면 선장이 물어요. 그들의 신에 의해서 소꿉놀이를 한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분명히 우리 가운데 자기 신에게 죄진 사람이 있다. 얼마나 순박합니까? 얼마나 순박해요? 분명히 하나님이 노했다. 이 말 아닙니까? 요거 말씀 드리고 사도행전 27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이 풍랑 만난 상태를 말씀드려서 어떤 차이가 있는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묻습니다. ‘신들 앞에 죄졌죠?’ 물음 자체도 순박하죠. 요새 순박한 사람들 사기 많이 당합니다. ‘당신 죄 지은 것은 신에게 나쁜 짓해서, 목사한테 뒤에서 험담 한 것 빨리 캄프러치 안하면 당신 계속 어렵다.’ 얼마나 순박합니까? 순박하니까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속이는 거, 어렵지 않아요. 아주 쉬워요. 이미 지가 ‘나 좀 속여 줘.’하는 그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그 사람 원하는 인생관을 해줘버리면 그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깜박 넘어가서 ‘잘못됐습니다.’하고 회개하죠.

그러니 여기 질문 보세요. 요나가 이르되, 여기 8절에 보면 여기 세무조사 나왔어요.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그거와 똑같은 질문 이예요. 옥경이하고 비슷하잖아요. 니가 어디서 어떻게, 그것은 요나에 대해서 궁금한 게 아니에요. 지금 자기 노는 생존의 바닥에 문제가 틀어져서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장이 요나에게 할 때는 선장은 요나의 여호와를 몰라요. 자기들 소꿉놀이에서 통하는 신 개념, 오직 생존, 존재, 그저 밥 먹고 살기 위해서 갖다 비는 그런 천박하고 투박한 그 신의 세계를 가지고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도망치면서도 복음을 전하고 있는 거예요. 뭐라고 하느냐, 9절에 보세요.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왜 쓸데없이 이 소리해서,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데 예, 뭔데요? 아닙니다. 나 그냥 보통 사람인데 괜히 오버하지 마세요. 괜히 사람 죄인으로 몰아넣지 마소. 나 그냥 배 삯 끊고 다시스 관광하러 놀러 가는 사람인데.’ 이렇게 나올 수 있는데 요나는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겁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현재 바다와 육지를 만들은 것이 해수면의 온도차가 아니라는 거죠. 뭐라 합니까? 어떤 분, 어떤 어르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장치된 그 속에 그런 하나님, 바로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내가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104편 3~5절에 보면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라고 시편 104편에 나와 있어요. 이걸 믿는 사람입니다. 뜻 이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복음이 중요한 게 아니고 자기 생존이 위태하니까 10절에 보면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라고 말함으로 말미암아 은연중에 그 주변의 사람들, 선장부터 다른 선객들은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준 사명에 엮어지게 된 겁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전혀 별개의 존재이던 우리가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알게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창세전에 예수 안에 택했던 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엮이게 만드는 그런 식으로 바람과 바다와 우리의 한평생이 거기에 진척되고 있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그리고 우리는 지금 늘 풍랑에 빠져 있어요. 왜 빠뜨리느냐, 죽고 살기 위해서 여호와를 있느냐, 아니면 여호와께 받은 사명 때문에 니가 존재하느냐, 니가 옛날 인간들이 하는 천박한 투박한 그런 우상의 하나님이냐, 아니면 진짜 예수님이 받았던 그 동일한 사명을 부여받은 진짜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이냐를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바로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똑같은 ‘유라굴로’라 하는 대풍이 대작하는 그런 지중해의 바다 속에 이 사도바울이 일행과 더불어서 거기에 요나처럼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미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렸습니다. ‘쉬었다 갑시다. 가지 맙시다.’ 그런데 고집을 부렸어요. 사람 고집을, 민주주의는 다수결인데 버텨냅니까? 그래서 노력이란 노력은 다했어요. 노력할 대로 노력했는데 남은 것은 뭐냐 하면 영정사진이었습니다. 다 해보니까 결국은 우리는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사명이 출발하는 최초의 지점 이예요. ‘주여, 저 죽어도 좋습니다.’가 사명이 시작되는 첫 지점 이예요. ‘저 안 살아도 됩니다. 죽어도 좋습니다.’

아까 불렀던 찬송가 가사 338장에 1절 가사 처음에 여러분 아시잖아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옵니다. 의지할 게 있으면 손들고 나올 필요가 없죠. ’헤헤‘ 거리고 나오겠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옵니다.‘ 내 나름대로 잘 놀고 있는 바람 부는 골목에 서구 비산동 144번지 그 골목에 할머니가 오셔서 ’밥 먹자.‘고 의자 들고 가는 것처럼 그동안 왕의자 한번 되려고 특히 노는데 지금 가위 바위 보, 해서 이겨서 거기 앉을 수 있는데, ’얘야, 밥 먹자.‘ 해서 철거해 버리면 참, 지금까지 공들인 게 어떻게 됩니까?

반드시 주께서는 우리가 노릴만한 걸 철거해 갑니다. 그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의자를 다시 배치합니다. 우리가 전에 원했던 나의 영광을 위해서 필요했던 것들 있잖아요. 결혼하기, 애 공부 잘하기, 이런 모든 것들을 다시 주께 돌려줄 때, 그 돌려준 그것은 더 이상 나의 영광이나 내 명예나 내 체면을 위해서 거기 배치돼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사명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요나는 요나의 사명이 요나를 바닷물에 빠뜨려 죽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현장에서부터 이미 요나의 사명은 죽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계획은 죽지 않습니다. 우리의 나태하고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기어이 되돌려서 주의 사명에 참여시켜주시는 이 고마움! 이게 요나가 받은 구원의 고마움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살려고 한다면 그냥 예수 믿어 챙기면 그만이지만 내 사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 살리기 위해서 복음에 빚진 자로서 우리를 활용하겠다고 나설 때는 더 이상 생존 차원이 아니라 사명 차원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천부여 의지하고 손들면서 늘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