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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사도행전 33강 / 행 14:19 (현존) / 120126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도행전

사도행전 33강 / 행 14:19 (현존) / 120126

정인순 2012. 1. 26. 23:12

 

 

음성1  

동영상

 

녹취:공은주

대전33강-행14:19(현존)120126a-이 근호목사

 

사도행전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오늘은 사도행전14장 19절 할 차례입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오에서 와서 돌로 쳤다. 했는데 안디옥이라 하는 것은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 말고 터키안에 있는 안디옥 있어요. 안디옥에서 가까운 거리예요. 가까운 거리라 해도 몇 백키로지만.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요 동네에서 지금 사도바울이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을 거쳐서 루스드라동네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쉽게 말해서 사도바울이 전도 했더니만 나쁜 소문났지요. 그 사람은 살려두면 안되겠다. 안 갔으면 핍박을 안 받는데 그들과 대면하고 난 뒤부터는 저 놈은 살려둬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급상승 한 겁니다.

 

그래서 복음전할 때 주위사람들이 차라리 안 전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하지만 분명히 사도바울에 대해 내가 수천 번 얘기했지만 사도바울이 개인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여분의 힘’이거든요. 당신이 신자 맞습니까? 할 때, 현존이란 말은 지금 여기 계시다란 말이거든요. 만약에 지금 나만 현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결정을 내가 해야 돼요. 머리 통밥을 굴려서 팍팍 내가 해야 되는데. 성령이 함께 있다는 것은 그 사람과 누구와 함께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현존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현존하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누구만 보이는가 하면, 사도바울만 보이는데 사도바울 본인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겁니다.

 

 로마 갈 때 배에 할 때, 주께서 옆에 서서 풍랑 일어 다 죽게 되었을 때 ‘걱정하지 마. 니는 안 죽어. 로마에 가야 하니까.’ 라는 것을 누가 얘기합니까? 옆에 섰던 주님께서 또는 다른 말로하면 천사가 와서 ‘너는 폭풍에 죽을 사람이 아니고 니를 기어이 로마에 데려 가고 말리라.’ 하고 하나님께서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그것을 사도바울이 남한테 얘기할 수가 없는 거예요. 얘기해 봤자 못 알아듣거든요. ‘또 미쳤다. 미쳤어.’ 이런다 말이지요. 예수님도 그랬지요. 예수님도 이렇게 기도를 하면 ‘거봐! 귀신을 부르잖아. 저 봐!‘ 이런다고요. 주님은 아버지의 성령에 의해서 일하는데 ’저 봐! 희한한 소리를 하는 거봐. 완전히 귀신들렸어.‘ 이런 식으로 주를 오해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설득을 해 가지고 저 사람으로 하여금 전도에 성과를 얻어내겠다는 모든 시도는 접어야 합니다. 주님이 현존하지 않는다면 자기 머리를 굴려야 돼요.

 

그런데 주님이 함께 있고, 성령이 함께 있는 사람 같으면 머리 굴리면 안 됩니다. 결국 남들이 나를 오해하고 비난하고 놀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성령이 함께 있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하는 고난이라 생각하고 그걸 수용해야지, 그것을 일일이 변명하고 납득시키고 찾아가서 설득할 필요는 없어요. 물론 설득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설득하라는 구석도 있어요. 일률적으로 ‘나는 설득 안 해. 나는 두 번 다시 이야기 안 해.’ 이렇게 법으로 정하면 안 되는 건데, 사도바울이 어떨 때 보면 일관성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율법 지키지 말라해 해놓고 어떨 때는 자기가 스스로 머리 깎고, 할례 행하고 하잖아요. 그래서 하는 말이 나는 율법에 있는 사람에게는 율법을 가지고 율법 없는 식으로 이야기했고, 율법 없다 하는 사람에게는 율법 없는 채로 가가지고 율법이 왜 필요한가를 이야기하고. 그러니까 이것은 미꾸라지라 할까요. 사람의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사상과 철학에 의해서 기름을 발라놓은 거 같아요. 만지면 쫄딱 빠지고, 저 사람은 분명히 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달려들면 또 쫄딱 빠져 버리는 거예요.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차이와 타자에서 언급했습니다만 내가 있고 남이 있잖아요. 예수님과 함께 현존하는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지붕위에서 내려오는 홈통이라 할까요. 물이 빠지는 통. 물이 빠지는 통처럼 사용된다고 보면 됩니다. 지붕에 넓게 흐르는 물이 한쪽으로 모아져서 그 물 홈통을 통해서 쏴악 빠져서 지면에 한 곳에만 물이 빠지도록 그렇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실 때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고 홈통이 사도바울에게 모여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갈 때 이것은 뭐냐 하면 사도바울은 자기가 소유하는 게 아니에요. 물홈통이라 하는 것은 프라스틱 그 통이 만들어 내지는 안잖아요. ‘어어어, 뭐가 지나간다. 지나가네.’ 지나가면 지나갈 뿐이지요. 그냥 말씀이 자기 속에서 와르르 지나갈 뿐이지요. 사도바울도, 사도요한도, 베드로도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걸 엿가락처럼 딱 끊어서 ‘여기까지는 내 거. 요 건 내가 간직해야 돼.’ 계시는 지가 지 용도로 지 소유로 끊으면 안돼요. 끊어서 나는 요거 알고 있는데. ‘타자 이리 나와! 남 이리 나와!’ 누가 더 많이 아는지 시합하자. 이것은 주님이 현존하지 않는 자기들의 자존심 싸움이지요. 이런 식으로 말씀을 가지고 자기 위상높이는 용도로 그렇게 쓰임 받도록 하나님께서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안 계시면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주님이 현존해 버리면 사도바울이 오히려 죽을 지경이에요. 남들은 사도바울이 손수건으로 어떻게 했다고 하지만 자기가 아이디어를 냈으면 자기가 존경받을 텐데, 손수건으로 한 아이디어는 자기한테 의논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의논한 겁니다.

 

수요일 날 중국에서 오신 목사님하고 부러진 화살이란 영화를 봤어요. 거기에 우리나라의 집합론의 제일 권위자인 수학교수와 변호인하고 할 때 둘이 재판장에서 막 싸우는 거예요. 보통은 피고는 가만히 있고 변호사가 이야기하는데 이 교수는 너무 깐깐해 가지고 ‘어이, 내가 이야기할게.’ 싸우는 거죠. 그럴 때 변호사가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그 변호사입장이 누구냐 하면 바로 사도바울 입장이에요.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입장입니다. 뭐 할라치면 ‘어, 하지 마!’ 뭐 안 할라하면 ‘해!’ 이것은 가만 놔두질 않아요. 그것을 ‘주의 종’이라 하는 겁니다.

 

 주의 종이라 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주님과의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에 주의 종이라고 떠벌일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주의 종이라고 떠벌리면 알아 주냐 그것은 위험해요. 상대방이 주의 종인지 아닌지 몰라야 돼요. 본인만 알고 있으면 돼요. 본인만 알고 있으면 되지, 주의 종이라고 거들먹거려서 돈만 챙기려하면 안 돼요.   다시 이야기하면 신앙이라 하는 것은 ‘여분의 힘’인데 여분의 힘이 어떤 사람을 장악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세상 보는 구조, 인식을 비켜가면서 그것을 지적하면서 사도가 포함되어 있는 구조를 저들에게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그런 식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을 드릴게요. 사도바울이 전도를 하니까 전도하기 전까지는 곱게 살 수 있는 인생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전도하게 하셔서 그야말로 벌집을 건드린 거예요. 벌집을 건드리면 벌이 끝까지 따라오잖아요. 와락 따라 와 가지고 이쪽 동네 왔는데 이쪽 동네 따라 와 가지고 소문나 버렸어요. ‘죽여라. 빨리 죽여라.’ 사도바울의 전도 내용이 뭐였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살아났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너희들은 이제 죽었다. 이말 입니다. 간단한 거예요.

 

하나님 살아계시고 자비롭습니다. 그거 아니에요. 그럴 것 같으면 유대인이 돌 던질 이유 없습니다. 다 같이 여호와 섬깁시다. 다 같이 십계명 지킵시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니까요. 그런 복음 같으면 죽을 이유가 없지요. 착하게 사세요. 착하게 살라 하면 공자, 맹자 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것은 모든 사상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그것은 문제가 아니고 모든 사상이 다 죽여라, 죽여라고 사도바울에게 돌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 사도바울이란 홈통을 통해서 나오게 하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이미 하나님이 왔는데 너희들은 알아보지를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날을 준비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못 알아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이런 죄인을 십자가 피만 의존해서 용서를 구하는 사람만 구원받는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복음 내용입니다.

 

 사도행전을 하면서 신학자들은 그렇게 하는데 교인들은 이렇게 할 능력이 없는데 사실은 사도행전을 하면서 무엇과 연관시켜야 하느냐 하면 에베소서, 갈라디아서, 로마서, 고린도전서 다 연관시켜야 돼요. 그래야 복음 맞습니다. 그게 옳거든요. 그래서 제가 질문을 드림으로서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예를 들게요. 사도바울이 복음전하다가 돌에 맞지요. 그런데 누가 던집니까? 유대인들이 죽었는줄 알고 성 밖으로 끄집어냈잖아요.

 

에베소서 6장 12절 보면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했지요. 그러면 제가 질문 드립니다. 오늘 사도행전 4장19절에서 사도바울이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죽었는데 그 싸움은 사람과의 싸움입니까? 혈과 육의 싸움입니까? 공중권세와의 싸움입니까? 그게 이상하잖아요. 그 사람이 돌 던질 때 ‘나는 악마다’ 하고 가슴에 붙이고 때려죽인 게 아니잖아요. 지금 유대인들이 뭐냐 하면 악에 받쳐서 ‘죽여야 돼! 죽여야 돼!’ 해서 죽였잖아요. 그냥 폼만 내는 게 아닙니다. 석궁 들고 폼만 잡는 게 아니고 진짜 죽이려고 돌 던져 죽인 거예요. 죽으라는 말은 없어져라 라는 말입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구조에 너 같은 것은 이질적인 것이니까 사라져야 돼! 라는 말이지요.

 

우리 몸에 세균이 들어오면 백혈구가 나서서 여기에 막는데 이질적인 것이 우리 원래의 세포가 아니고 우리 몸에 구경도 못한 것들이 왔기 때문에 백혈구가 나서서 방어하고 방어해서 나온 흔적이 고름이고 그게 약간 너무 심하게 변형하게 되면 내 것이 다치면 그게 염증이라 하고 자기 면약체계가 그렇습니다. 유대인이 돌로 쳐 죽였다는 이 말은 그 사람이 돈 갚으라고 사도바울이 돈 떼어먹어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도대체 인간으로서 ‘저 놈 때려 죽여야 돼!’ 하고 생각이 들 때가 언제입니까? 저 인간 죽여야겠다. 내가 못 참겠다. 언제 듭니까? 나의 존재 가치를 무시할 때,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을 죽이려하는 사도바울의 말속에 뭐가 들어 있다는 말입니까? 인간을 근원적으로 인간을 개같이 여겼던 요소가 들어있던 거예요.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그 자체를 부끄럽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저 인간을 안 죽이면 나는 완전히 개 되어 버리고 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살아도 천국은커녕 죄만 짓는 인간적인 요소로서 그런 내용이 담겨있는 겁니다. 담긴 내용이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다 나와 있는 거예요. 베드로전서1장에 보면 너는 이미 죽었고 너의 생명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 단, 누구에게만 간직되어 있다. 예수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그러면 맹자, 공자 하는 유교 집안이 이 성경을 볼 때, 성경을 불에 집어 쳐 넣고 싶은 충동이 뭐냐 하면 성경 자체가 보편적 인류애를 어떻게 합니까? 보편적인 인간의 사랑과 단결심을 어떻게 해요? 부추기는 거예요? 지옥 갈사람 따로 있고 천국 갈사람 따로 있고 마귀자식 따로 있고 하나님자녀 따로 있다는 것을 성경이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우리 생각은 그걸 받아들이면 될 텐데 받아들이는 대신 어떻게 합니까?

 

성경을 불태워 버리고 그리고 기독교에게 모독하는 거죠. 기독교인들은 독선적이라서 보편적인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양심과 이성 합리적인 생각, 모든 인간은 진화될 때 같은 종으로서 전부다 같은 편으로 했는데 같은 인간이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역사적으로 분쟁과 투쟁만 일삼는 그러한 독선적인 종교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져야 됩니다. 인간의 인류와 평화를 위해서. 그럼 진리가 뭐예요? 그럼 그 사람들의 진리라는 게 뭡니까? 보편적인 휴머니즘. 인간애 사랑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원수지지 말고 어떤 경우라도 원수라도 화평해야 되고, 지난주에 대전에서 했지요. 마태복음에 나오잖아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우고. 나온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공자, 맹자, 불교에 있는 사람이 볼 때, 요새 교회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이야기하고 싶겠어요? 안하고 싶겠어요? 안하고 싶은 거예요. 사도바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겠습니까? 안하고 싶은 거예요. 교회 와서 기도해서 당신 얻을 것만 얻고 커미션만 내고 얼른 너희 집에 가서 복이나 받아라 그러잖아요. 고객들도 교인들도 그게 편하고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왜 성경을 안 보느냐 하면 성경 안보는 게 편하다는 거예요. 결국 진리가 뭡니까? 보편적 인류애라는 것은 핑계고 지 몸 편한 게 진리예요. 따지고 보면 지 몸 편한 게 진리예요. 사도바울은 그것이 허용이 돼요? 안돼요? 허용이 안돼요. 본의 아니게 지금 공중권세 잡은 자와 싸워야 된다 말이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이 돌로 자기를 쳤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진짜 그 사람들이 밉습니까? 아니면 돕고 싶습니까? 돕고 싶은 거예요. 돌로 쳐도 돕고 싶은 거예요.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것이 사도바울의 본인의 능력이 아니고 여분의 힘. 사도바울에 누가 현존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같이 현존하는 거예요. 남이 보기에는 사도바울만 현존하지요. 사도바울에게는 니는 내가 여기 있는 것이 분명하지, 나한테는 주님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분명한 거예요. 이게 성경 안에서 니가 내 안에, 내가 니 안에 있다는 것이 설명되는 거예요.

 

 이걸 어떤 철학이 이 경유를 뚫고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기도를 몇 년간을 해야 그 경유를 뚫어요? 이것은 성령을 선물로 받지 않으면 그 경계선 안에 못 들어갑니다. 마치 유리구슬 안을 손가락으로 파도 못 들어가지요. 변화된 모습이 보이기는 보이는데 그 변화된 모습에 동참 못하는 것이 육과 영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이야기 했던가요. 사도바울은 옛날에 예수님을 육체로 알았던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6절 말씀.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을 육체로 알았던 거예요. 그렇다면 성령 받은 사람은 두 가지를 알아야 돼요. 예수님을 육체로 아는 경우가 어떤 경우이며, 예수님을 영으로 아는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사람들은 예수님하면 잘 이야기하지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줄줄줄 잘 이야기해요. 그것은 육체로 아는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것. 아예 읽으세요. 성경 잘 외워요. 그거 육체로 아는 거예요. 육체가 아니고 성령으로 안다면 사도바울은 자기만의 현존이 아닙니다.

 

자기만의 현존이 아니니까 자기 자존심이 우선이 아니지요. 내가 돌 얻어맞고, 내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자기한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자기에게 중요한 것이 자기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니까요. 세상에 이런 것이 있어요? 사도바울은 로마서14장에 보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로다. 우리가 성경에 로마서14장에 나온 것을 얼마나 많이 봤습니까? 문제는 자주 대하면 뭐합니까? 실감이 안 나는데. 이게 현존이 안 되는데.

 

여자들이 아가씨 때 남자친구를 만나면 남자친구가 할 일이 없을 때, 군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재미나게 들어요. 군에서 축구한 이야기, 얻어맞은 이야기 죽~ 하는데 그 이야기를 3년간 들었다 합시다. 그러면 군대생활 안 할까요? 백이면 남자들 거의 없습니다. 여군 하사관들 빼 놓고는. 아무리 그럴듯하게 설명해도 3년 동안 이야기해도 안 되는 이유가 그걸 아셔야 돼요. 휘영청 달 밝은 밤에 이순신은 큰칼 찼지만 총 들고 보초 설 때 그걸 제가 느낀 게 뭐냐 하면 보초는 30분 선다 하면 30분 동안 생각한 것이 3년 이상 갑니다. 30분 생각하고 상상한 것이 저 뒷동산 넘어가면 내 고향 보일까, 그 생각을 하면서 30분을 보내요. 30분밖에 안 되는데 이야기할 것 같으면 3년 이야기해도 30분 다 이야기해요. 인간 자체가 영물이에요. 요물이에요. 수학적인 계산이 안 되는 인간이에요. 그것처럼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생각하는 이상으로 더 넓어요. 인간의 세계가.

 

그래서 영으로 알 때는 사도바울은 뭘 아느냐 하면 돌을 맞을 때에 ‘니네 죽었다. 니네 지옥 간다.’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로 하여금 말씀이 흐르는 홈통으로 그냥 사용한 겁니다. 사용한 그것까지라도 계시로 편입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 앞에 철저하게 유린당한 겁니다. 철저하게 유린당해요. 왜, 주님의 현존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 대목을 보면 여러번 했는데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를 이야기했지요. 그럴 때 제자들은 자기만 현존한다고 생각했는데 내려가는 가운데 누가 현존했습니까? 어떤 아저씨가 현존한 거죠. 아저씨로 봤는데 나중에 보니까 예수님이 현존했다 말이지요. 사도바울은 돌에 맞을 때만 마귀와 싸운 것이 아니고 돌이 날아오든 안 날아오든 그냥 집에 편히 잠잘 때도 공중권세와 싸우고 있는 입장입니다.

 

자, 이제 진도 나갑시다. 중요한 것. 또 한 번 물어 봅시다. 사람과 사람의 싸움은 자존심싸움 되기 때문에 ‘아이고, 그래 내가 당신 도와줄게.’ 하면 끝날 문제에요. ‘그래, 그래 내가 몰라서 그런 거야, 어쨌든 내가 힘들고 어렵게 했지만 당신을 돕고 싶어.’ 이런 마음가짐이 문제인데. 제가 묻는 것은 뭐냐 하면 공중권세 잡은 자와 싸운다 이말 입니다. 사람은 화해하면 돼요. 왜, 그것은 마귀의 허수아비니까. 지가 지 맘대로 못하고 마귀가 시킨 대로 했기 때문에. 오야봉! 오야봉 나와! 잔챙이들 말고 오야봉 나와!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로마서7장에 율법이 주어질 때 우리가 마중 나가려 하면 율법이 뭐라 합니까? 너 말고 니 속에 있는 오야봉 나와! 죄 나와! 했잖아요. 기억나시지요. 녹취 다 돼있습니다. 그럴 때 사도바울은 사람하고 화해하면 그만이지만, 그래서 로마서에 될 수 있으면 화해하라는 말이 나오지요. 화해하면 그만이란 말이지요.

 

 교회에서 사기쳐먹다가도 화해하거든 재판 걸지 말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마귀는 화해할 대상이 아닙니다. 절대로 화해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본인이 문제 아니고 함께 현존해 계시는 그리스도와 마귀사이는 이미 영원한 철천지원수로서 이미 규정이 되어 버렸어요. 이미 끝나버렸어요. 이것은 완전히 확정된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타협할 여지가 없는데 제가 묻는 질문은 그때 마귀와 싸울 때 무기는 뭐냐 하는 질문입니다. 화해의 제스처를 위한 무기가 아니고 마귀와의 영원히 원수질 수밖에 없게 하는 그런 무기를 사도바울은 계속 사용하는데 그게 뭐냐 하는 겁니다.

 

 에베소서6장에 계속 나오지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해 놓고 그 뒤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 하고 방어무기, 공격무기 다 나옵니다. 주로 방어무기가 많이 나오는데 여기에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렇다면 여기에 항목들이 나와요. 자기 몸에 걸치고 있는 용도는 자기 폼 내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돋보이게 하는 용도도 아니지요. 성경구절 많이 안다고 남한테 알아달라고 하는 구절 아니지요.

 

  수요일 설교하고 난 뒤에 아내한테 지적받은 게 있어요. 훈민정음 서론 외운 것으로 당신 지식 자랑하나, 하는데 아내는 하나 몰랐던 게 있었어요. 우리는 학교 다닐 때 달달달 외웠어요. 안양강의 가니까 60세 넘으신 분도 다 외워요. 워낙 교육 받을 때 반복학습을 받았기 때문에 나라 말씀이 달라 좀 더 그대로 사용했을 뿐인데. 지적받은 것이 아는 체 한다 하는데 이게 진짜 어려워요. 어려워서 할 말이 없는데 아는 체 하는 것이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다시 합니다. 육체로 아는 것과 영으로 아는 것 두 가지를 알아야 되지요.

 

육체로 알 때, 우리가 육체로 상대방을 설복시키고 굴복시키고 그 사람을 은혜롭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답게 온유하고, 마음을 낮추면서 겸손하고, 인자하고 그거 육체로 아는 거거든요. 그것은 자기가 자기만 현존하는 거예요. 자기가 가정교육 받은 것부터 시작해서 고상한 것, 경건한 것, 온갖 좋은 것 다가지고 와요. 그래서 사람을 감동, 탄복 시켜서 여러분들, 전도할 때 많이 했지요. 그 사람들로 하여금 내 사랑에 넘어와서 그리스도 안으로 당겨볼까 하는 그런 수법 그거 육체로 아는 겁니다.

 

  성령으로 하는 것은 지가 망가져야 돼요. 어떻게 망가지느냐, 너는 인간성도 개판이고, 너는 윤리도덕도 엉망이고, 너는 인간의 기본도 안 돼 있고, 니는 빛과 소금은 근처도 안 갔고, 니가 하는 행동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가리고 또 가리는 짓이고, 라는 욕들을 먹어 가면서 주께서는 일들을 시키십니다. 이런 거 몰랐지요? 그러니까 어려운거예요. 왜냐 하면 항상 모든 선교 전도 모든 프로그램과 모든 기획안이 누구한테서 나옵니까? 예수님에게서 나오지요. 그럼 예수님이 하늘에서 책상에서 탁자공론 했습니까? 아니지요. 직접 이 땅에 와서 이 땅에 뛰어 내려와서 이 땅에서 살았잖아요. 예수님의 모든 선교와 전도의 방식은 탁자공론이 아니고 책상에서 끄적, 끄적한 것이 아니고 직접 이 땅에서 환란과 고난을 다 받았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2장에 보면 니가 이 땅에서 어떤 고난을 당해도 내가 다 안다. 그러니까 니는 나만 믿어라. 니가 당하는 거 내는 모른다 싶지만 나는 다 알고 있어. 나도 그런 환난 다 당해봤단 말이야. 더 이상 예수 안 믿겠습니다. 못 믿겠습니다. 그러지 말란 말이야. 그럴 때마다 나한테 기도하라. 왜, 나는 너를 체휼하는 사람이고 너의 심정을 다 이해한다 말이지요. 니가 복음 때문에 그러는지, 니 욕심 때문에 그러는지, 내가 다 안다 이 말이지요. 욕심 때문에 그러면 이 기회를 통해 회개하고, 복음 때문에 그러면 감사해야 되고, 복음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은 니 위에 성령이 있다 했잖아요. 베드로전서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셨을 때, 유대인들에게 어떤 수모를 당했습니까? 온갖 욕은 욕대로 다 들은 거예요. 욕 중에 최고의 욕이 ‘저거는 마귀다.’ ‘마귀 대장이다.’ ‘바알세불의 왕이다.’ 했어요. 인터넷보세요. 저보고 ‘악마의 왕이다.’ 나옵니다. 이근호 치면 나와요. 악마의 목사라고. 부산에 있는 어떤 목사가. 그런 욕이 나오게 된 이유가 뭐냐 하면, 그 사람이 생명나무, 선악과 설명할 때 내가 토를 달았어요. 항상 해석할 때는 인간에서 나올 수 있는 오류를 집어넣어서 해석하세요. 인간은 요 정도인데 이런 오류고 십자가에서 나오는 복음과 차이와 비교해서 해석하세요. 그 이야기했다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전도를 할 때 욕을 얻어먹을 수밖에 없는 유도를 해 줘야 사람들이 자기를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수가 있어요. 12제자 설득 못 하는 게 예수님 아닙니까? 단 1명도 설득 못 했어요. 그럼 성령이 왔다는 것은 설득의 의미가 아니고 성령이 왔다는 것은 지적의 의미고, 책망의 의미예요. ‘우리 다 같은 생각인데 요게 모자라네.’ 이런 게 아니라 ‘니는 죄인이야.‘ 이게 성령의 역사란 말이지요.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너는 잘못 생각하고 있어. 근본이 잘못되어 있어.‘ 이게 성령의역사란 말이지요.

 

그러면 ‘나 같은 인간 죽여 버리지, 지옥 보내지 왜, 살게 합니까?’ ‘너는 내 일 하라고 사는 것 때문에 너는 구원 받는 거야.’ 사도가 구원받든 천국 가든 자기를 위해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일 하라고 예수님에게 면류관 반납하라고 그 사람에게 성령이 온 거예요. 성령은 누구 말 들어요? 예수님 말 듣는다고 돼 있지요. 제가 묻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이야기만 하거든요. 그러면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누구를 위해 일 합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위해 일 하는 거예요. 우리는 고집이 세서 성령이 들어와도 매일 어떻습니까? 평소에 행동하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 합니까? 나의 이득권, 나의 자존심, 나의 체면과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성령을 우리가 도용하잖아요. ‘성령 받았다 까불지 마!’ ‘나, 건드리지 마.’ 매일 두 쪽 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그 소리 들으면서도 우리 뜻대로 안 해주는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주님만을 공로를 높이는 쪽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돌에 맞아도 할 수 없어요. 주님께서 그냥 홈통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어떻게 자기 인생이 아니라니까요. 자기 인생의 주도권이 건너가 버렸는데 자기는 껍데기예요. 껍데기.

 

자, 그렇다면 무기가 뭐냐, 사도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여기서 인간의 신체에 관련된 것 다 빼버립시다. 신, 투구, 띠, 흉배 빼면 남는 게 뭐냐 하면 복음이지요. 복음, 믿음, 구원, 성령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이거 어디서 생산된 겁니까? 하늘의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만들어서 하늘나라 가셔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신제품으로 주어진 거죠. 그러면 그 제품은 우리 살기위한 생존의 용도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한 용도입니까? 이것은 우리 생존은 부수적인 겁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죽였다가 살렸다가, 살렸다가 죽였다가 이것은 주님께서 알아서 하는 거예요.

 

그 대목 하나가 사도행전은 바로 사도바울을 죽음에 몰아넣습니다. 죽음에 몰아넣어 가지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사도바울이 죽은 줄 알고 더 이상 때리지를 않았어요. 그러니까 유대인이 실수한 거죠. 확실히 죽었는지 맥박을 짚어봐야 되는데 대충 죽었다고 생각하고 성 밖으로 내침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계시가 뭐냐 하면 사도행전 14장 22절 적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받는다.’ 요 공식 하나 만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사도바울을 어떻게 했습니까?

 

죽는 척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하나님, 예수님 나 이제 그만 죽게 해 주세요. 죽습니다, 죽습니다, 죽습니다, 죽었당.' 하고 연기했습니까? 아, 이 정도하면 죽는데. 완전히 죽었습니다. 사도바울을 완전히 죽여 놓고 하는 말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는다.’ 이 환난 속에 뭐가 포함돼 있습니까? 죽을 수도 있다가 포함되어 있어요. 요 공식 만들기 위해서. 이 공식이 주워졌으면 사도바울에게만 해당된다? 성경을 보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겁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러한 공식이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립보서 속에 이것이 다 담겨있어요.

 

로마서8장 같은 경우에 우리가 환난을 당하나 걱정하지 말라. 장차올 하늘나라의 영광은 이 환난과 족히 비교가 안 된다. 환난을 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대해서는 미련과 집착을 떼게 만드는 거예요. 잊어라. 우리는 떠나야 된다. 수요일날 했잖아요. 떠나라, 떠나자. 주님께서 짧게 퐁당! 잠시 욕조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처럼 주님께서 잠시 세상에 33살이란 인생을 짧게 들어갔다 나오면서 우리보고 하는 ‘말이 떠나자! 살 곳 못 된다.’ 다만 단독적으로 못하고 니는 나와 같이 현존을 같이 할 때만 내 이름 내 안에서 이 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땅에서 벗어나는 것이 소원이 되어야 돼요.

 

사도바울이 뭐라 했습니까? 내가 소원이 있는데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은 내가 빨리 이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다. 많은 신학자들은 그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가 결혼을 안 해 보니까 그런 철없는 소리를 한다. 거기에 대해서 단호한 반박은 사도행전19장에 나옵니다. 마귀가 하는 말이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하면 who are you? 너는 누구냐? 니는 니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니가 모르는 누구를 나 악마는 이미 익히 알고 있다. 니는 백날해도 예수처럼, 사도바울처럼 내 밖에서 못 벗어난다. 사도바울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벗어났지만, 니그들은 죽잖게 흉내 내는 인간들은 내 안에서 못 벗어난다. 마귀가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요번에 교회는 미신이다 하는 책 낼 때 가칭입니다. 책 제목 정한 게 아닙니다. 책 표제 첫마디에 너는 누구냐? 니가 알고 있는 니는 니가 아니다. 왜, 니 현존만 고집하면서 만들어 낸 자기 평가거든요. 아침에 거울을 보세요. 전신거울을 보세요. 누가 있습니까? 주님 안 보입니다. 거울 앞에 누가 현존하고 있어요? 자기가 있는 거예요. 그것이 버릇이 되어서 계속 가동되는 거예요. 나는 나뿐이다. 전도를 하던지, 선교를 하던지 내가 알아서 한다. 그 안에는 주님의 현존이 없기 때문에 모든 성과와 업적이 자기 자존심과 자기 밥먹고 오래 사는 것으로 계속 되돌아오는 거예요. 그걸 누가 안단 말입니까? 그걸 마귀가 안다니까요. 마귀가.

 

사도바울은 결혼 안 해서 식언 없는 소리 안합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이 현존해 계시거든요. 사도바울의 그런 말은 계시다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받는다 할 때에 이 공식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우리가 밥 잘 먹고 편하게 누워 있을 때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뭐로 규정한다 말입니까? 그걸 환난이라고 규정 된다 이말 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진짜 어려운 이야기예요.

 

우리가 고난 받으면 그 고난 받는 예측을 우리가 스스로 상상합니다. 자꾸 연출해요. 일부러 복음듣기 싫어한다 해 가지고 옆에 가서 ‘뺨 때려. 뺨 때려’ 뺨 맞고 ‘주여!’ 뺨 맞고 조작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우리가 그냥 편안히 목욕탕에 앉아가지고 ‘으~~ 좋다.’ 이것도 환난 이예요. 환난을 환난인 것과 아닌 것을 우리가 의도적으로 내 경험을 기준으로 해서 이렇게 구조를 짜지 마세요. 성도 자체가 산다는 것이 순교고 환난입니다. 곱게 자는 것도 순교고 곱게 숨 쉬다 돌아가셔도 밥 먹다 돌아가셔도 그것도 환난이에요. 세상자체가 환난입니다.

 

그것 설명해 드릴게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을 받아야 된다. 했지요.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하늘나라가 여기 있습니다. 하늘나라 들어갈 때 파이프가 길이라면 뭐가 있다? 환난이 있지요. 환난이 있다는 것은 외부의 환경이 환난을 유발한다는 증거가 사도행전14장 19절을 통해서 봤지요. 사도바울이 그 사람 미워했습니까? 그 사람의 돈을 떼먹고 도망치던 중이었습니까? 아니었잖아요. 사도바울의 홈통을 통해서 뭐가 나왔어요? 하늘나라에 계시는 현존 때문에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말하는 대로 했을 뿐인데 이렇게 말함으로 말미암아 잠잠해 있던 세상의 정체가 다시 한번 발칵 뒤집어 지면서 사도바울을 돌로 쳐 죽였다 말이지요. 그걸 사도바울은 두 자로 뭐라 했습니까? 이것을 ‘환난’이라 한 거예요.

 

환난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 자체가 환난유발 요인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하나 더 아신다 치고 잊지 마시고 하나 더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이 환난유발 요인 중에 누가 들어있는 게 중요해요? 이 점이 중요한데. ‘나’지요. 나라는 육신이 너무 세상적으로 익숙하다 보니까 환난을 외부에서 주기도 하지만, 내부적인 요소가 이미 내 육신에 꽉 차 있어요. 가스가.

 

추울 때 동파 당하지요. 그럼 수도관 파이프가 있는데 바깥이 추우면 안도 춥지요. 바깥이 추으니까 안쪽의 물이 터지잖아요. 파이프가 우리라면 바깥세상이 예수님에 대하여 대적하고 반발하고 예수님을 욕하는 거라면 그 욕을 누가 만들어요. 우리 자신도 시시때때로 누가 만들어요? 우리 자신도 만드는 거예요. ‘에이, 씨~~ 인생 참, 더럽네. 꼭 이렇게 살아야 되겠어?’ 그 말은 생략했지만 추적해 보면 뭐가 있어요? ‘하나님! 왜? 자꾸 저를 힘들게 하십니까?’ 원망이 나오지요. 아이고, 믿음 좋은 사람은 원망이 안 나온다고 하는데 욥이 원망 안 했습니까? 욥의 중간에 보세요. 욥의 원망이 꽉 차 있잖아요.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지, 그런 이야기가 선지자도 원망했고 사도들도 원망했잖아요. 이 눈의 가시 빼달라고 3번 기도했잖아요. 고집도 세지. 삼진아웃이라.

 

 환난 있다 할 때 우리의 환난은 복음에 기준해서 측정합니까? 지 몸의 소망대로 비전대로 꿈꾸는 미래상대로 자기 계획대로 꼬이고 안 될 때 그때 우리는 본의 아니게 뿔다구 나지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환난유발 요인이 되는 겁니다. 부러진 화살 영화 보면 교수가 재판에서 지니까 화가 나서 판사 집에 가서 석궁으로 쏘지 않고 겨루기만 했는데 그 교수가 석궁 들고 간 이유가 뭡니까? 사도바울 같으면 어떻게 했겠어요? 사도바울이 재판에서 졌다. 석궁 들고 가겠습니까? 아이고, 처음부터 재판하지도 않아요. 떠나는 세상에 ‘잘 먹고 잘 살아라’ 하는 거예요. 아니 거지 나사로가 부잣집 앞에서 돌 던져 유리창 깨고 했습니까? 요새 용사참사처럼. 거기서 데모했습니까? 거지 나사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아이고, 잘 먹고 잘 살아라 나, 빨리 죽을게.’ 이랬잖아요.

 

 그런데 용사참사 거기에 돕겠다고 누가 나섰습니까? 소위 목사들이 나섰습니다. 목사는 중 아닌가요? 이 사람들. 목사들이 왜 나서요? 목사들이 어떻게 해야 돼요? ‘아저씨, 그냥 이런 세상이다 생각하고 주께서 주신 돈 주신자도 하나님이고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시니’ 이렇게 해야지. 아마 그렇게 하다가는 완전히 휘발통에 덮여요. 그 용사참사가 기독교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지, 복음하고.

 

사람들은 복음을 원하는 게 아니고 힘을 원합니다. 교회가 커지면 위험한 이유가 교회가 커지면 교회로 복음으로 안 보이고 힘으로 보입니다. 힘으로 보이면 새로 개업했다. 단골하기 위해서 감사헌금하고 어떤 유명한 의사가 있다 하면 가고 내가 취직하려고 한다. 높은 상사가 있다 그한테 잘 보여서 취직하려고 하고 내 거래처와 관계된 사람 있다. 그 사람한테 잘 보여서 일감을 받으려하고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힘이지요. 그럼 힘은 어디에 소용됩니까? 하늘나라에서 필요합니까? 이 세상에서 필요합니까? 이 세상에 필요한 거죠.

 

예수님을 왜 믿어요. 예수님은 지금 떠나라하는데 약한데서 강하라 했는데 이거는 떠날 생각이 전혀 없어요. 떠날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 뭐라 하느냐 하면 ‘주여! 내가 교회 가서 환난이 많습니다.’ ‘미쳤어. 돌았나?’ 자기 힘을 부르는데 무슨 환난이 있어요. 그런 식으로 환난 같으면 지가 환난을 유발 한다니까. 자꾸 내가 나다운 거. 그걸 왜 지가 해요. 하나의 홈통인데. 지만 현존합니까? 주님과 함께 현존해 있으면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미련을 두지 말라고 자식이고 남편이고 미련두지 말라고 ‘니는 내가 쓰이면 쓰이는 대로 그냥 빨리 와이!’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그렇게 나와 있는데 사도바울이 주님과 함께 현존하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한 거예요.

 

그래서 결국 오늘 본문을 정리한다면 하늘나라 가는 데는 뭘 겪는다? 환난을 겪는데 그 환난은 우리의 야심과 야망 때문에 겪는 게 아니라 내가 복음으로 기뻐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의 복음의 구조 안에 들어갑니다. 구조 안에 모여 있으면 그 구조가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하늘나라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항상 범사에 감사할 수가 있는 겁니다. 10분 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