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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사도행전31강 / 행 13:48 (작정된 자) / 111124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도행전

사도행전31강 / 행 13:48 (작정된 자) / 111124

정인순 2011. 11. 25. 07:24

111124 사도행전3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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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공은주

대전-111124a-사도행전13:48~14:9(작정된 자)

31강-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13:48~14:9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시니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오늘은 사도행전13장48절하겠습니다. 지난시간에 사울이 구약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의 요지가 뭐냐 하면, 회개였습니다. 그림으로 그리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그냥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이 인간을 그냥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회개라는 것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고, 그 말입니다.

 

  그러면 회개라는 것은 전제가 무엇이겠습니까? “니 죄를 알렸다!” 이리 되겠지요. 내가 이리 말하면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부정적으로 하나님을 보느냐’ 이렇게 하는데요. 이건 사도 바울이 성령 받아서 예수님 만나고 이렇게 설교해요. 그렇다면 이렇게 회개하는데 어디서부터 회개를 돌이키는 거니까 그 전에는 회개가 있었다? 없었다? 없었다. 이말 입니다. 그 전에는 회개가 제대로 안됐다 이말 입니다.

 

  회개 안 된 바탕을 뭐로 하냐면, 그게 유대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신학이라 하는 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갖고 있던 신학이지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무슨 일을 했지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데모 했어요? 환영했습니까? 좋아했습니까? 죽였지요. 죽였다는 말은 ‘쓸데없다’는 뜻 이예요.

 

예수를 안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 만약에 나한테 관여하면 ‘나는 당신 예수를 죽여 버리겠다’는 잠재성, 가망성을 두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예수가 없이 하나님을 믿겠다는 말은 그럼 유대인들이 예수 대신 갖고 있는 게 뭐겠어요? 그게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도 그렇고,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여기 43절에 보면,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있지요. 이 사도바울이 누구하고 얘기하고 있어요.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지요. 다시 45절 보세요.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어떻게 됐습니까? 뭐가 가득하다 했어요? 시기하죠. 그렇다면, 다시한번 강의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그냥 인간의 선함과 착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갈수 있다? 없다? 없다. 이말 이지요. 없다 했는데 그때 당시 유대인들은 그걸 뭐로 봤습니까? 부정적으로 봤다 이말 이지요.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데 왜 부정적으로 보느냐 이말 이지요. 잘 믿고 있는데.

 

 예를 들어, 성도가 교회 가서 ‘회개하시오.’ 하면 ‘지금 우리교회 예배당 세우고 잘 믿고 있어요. 뭘 회개해요. 회개할 게 뭐가 있다고. 지금 잘 되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바울의 사람들을 추방시킨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에 대해서 견해가 갑자기 몇 가지 됐어요? 2가지 됐지요. 하나는 ‘기존에 있던 것을 버려야 된다.’는 쪽과 한 쪽은 ‘기존에 있는 거 가지고 대충 때우면 된다.’ 하는 그 2쪽 이잖아요. 문제는 진짜 하나님이 어느 쪽을 어느 쪽에서 방법을 제시하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뭘 좋아하느냐 뭘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진짜 하나님이 진짜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어느 노선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기를 원했냐가 중요한 거예요. 여기 유대신학이라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이야기 했지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주장은 그러면 아예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있잖아요. 주로 이방인이 되겠지요. 이방인들에 대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어떤 식으로 접촉을 시도해서 이방인들도 유대인 되게 하고, 여호와 하나님 믿어서 구원 받게 하느냐 하면, 그들에게는 2가지만 하면 돼요.

 

할례라는 것과 안식일에 참여하면 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토요일 날 유대인 의식에 참석하여 등록하면 유대인이 돼요. 그러면 그들은 아브라함자손과 더불어 메시아나라에 참석할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그러면 한번 봅시다.

 

  유대신학을 갖고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와 하나님을 모른다는 이방인 사이에는 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장애가 있어요? 없어요? 장애가 없지요. 왜냐하면 할례와 안식일만 행하면 되니까. 세례 받을 때 물 받는 거 그게 어렵습니까? 그냥 머리 드리밀면 되는 일 가지고. 천주교에서 성당에서 떡과 예수님의 포도주 먹는 게 어렵습니까? 입만 낼~름 받아먹으면 되고. 마시면 되잖아요. 자격 있어야 된다하면, 그거 일 년 동안만 영세받기 위해서 교육받으면 되고. 그거는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아니 고시 패스도 하는데 그것도 못해요. 운전면허도 어떤 사람은 250번 만에 된 사람도 있어요. 되잖아요. 된다니까요.

 

 그런데 유대신학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하나님한테는 인간의 행함으로 됩니까? 안 됩니까? 이게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왜 안 되느냐 하면, 자기 행함으로 쭉쭉 보태고 또 보태고, 보태서 도달되면 이게 가능성 있고 쉬울 텐데 뭐라고 하냐 하면, 지금까지 행한 것을 몽땅 죄라고 규정하란 말이죠.

 

  그럼 죄라고 규정하려면 지금 빵 먹었는데, 빵 먹는 것이 죄라고 한다면 그 기준이 있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냥 죄다.’ 이거는 누구나 강제로 총 들고 ‘죄라 해!’ ‘예, 할게요.’ 그거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거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진정으로 이것을 죄라고 알 때만 죄라고 이야기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이렇게 내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천국에 이룰 수 없는 죄가 된다. 라는 증거로서 사도바울 쪽에서 내세우는 증거가 뭡니까?

 

  그게 바로 십자가라는 거예요. 왜 십자가가 우리가 죄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느냐 하면, 십자가라는 것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이 신을 향하여, 천국을 향하여 기어 나아오려 하는 개미처럼 온갖 방법 불교는 불교방법,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방법, 온갖 방법 있을 거 아닙니까? 모든 방법들이 하나님한테는 일체 인정 안 받는 거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중간에 다리를 끊어 놓은 거예요.

 

 다리를 이으려면 삼일 만에 삼일기간이 필요한 겁니다. 예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내가 죽었을 때 모든 인간은 죽은 것이라.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 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모든 인간은 죽은 것이 예요. 죽은 자라 하는 것은 더 이상 행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 란 말이죠.

 

  죽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뭐가 되냐 하면, 사흘 만에 건너뛰는 것은 예수님마저도 성령이 와서 죽은 자를 성령께서 살리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그러면 예수님께 찾아왔던 그 성령이 우리에게 안 찾아오면 우리는 뭡니까? 시도만 하고 끝나는 거예요. 그냥 교회 열심히 다니고, 목사말만 들을 뿐이지 결국 가기는 지옥 가는 거예요. 참~~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암만 죽은 것도 천만다행 이예요. 요새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거 있잖아요. ‘안~~돼!’ 안된다니까요. 그게.

 

  어떤 여자 분이 저한테 전화했어요. 멀리서 전화해서 술 먹어도 되는가? 하고요. 술 먹건, 안 먹건, 끊더라도 그건 안 돼! 안된다니까요. 이렇게 이방인에서 유대인은 돼요. 유대신학은 된다고. 그런데 유대인 중에 유대인은 누구였습니까? 사울이었잖아요. 그 사람이 지금 누굴 만났어요. 예수님 만나고 바울 되고 난 뒤에 예수님 아니면 안 돼!

 

  기쁜 소식은 뭐냐 하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인데 살려낼 수 있는 권한은 우리 예수님에게만 그 능력이 있어서 그 예수를 믿게 된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돌아서면 회개다 그거죠.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설교 사도바울이 한 설교는 다 성령에 의한 설교거든요. 성경에 계시가 담겨져 있으니까. 그럴 때 반응은 결국 뭡니까? 인간의 힘으로서는 믿을 수 없다는 거예요. 다시한번 정리하면, 사도바울이 백날 설교해 봐야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구원 받는가? 48절에 정답이 나와 있어요. 이건 평생에 잊어서는 안 되죠.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것은 사람을 약을 올려도 보통 올리는 게 아니 예요.

 

대한예수교장로회 다 믿더라 하면 괜찮은데 삼위일체 믿는 사람 그게 아니고 삼위일체고 조직신학이고 구원론이 아니고 이분론, 삼분론이 아니라 영생주기로 작정한 사람은 다 믿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말만 사도바울이 했더라. 이말 이예요. 사람의 능력으로 안 되는 이야기만 했더라구요. 결국 천국 오지 말라는 거예요. 구원 받지 말라는 이야기와 똑같은 말을 한 거예요.

 

  이 노선이 진짜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노선입니다. 이 사도행전에 나온 이야기가 그냥 헛으로 들을 수 없는 것이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나,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에 나온 해석할 때 전부 배경으로 깔리는 거죠. 예를 들어서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요 이야기는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육으로 난 사람과 영으로 난 사람 두 노선이 있는데 육으로 난 사람이 성령으로 난 사람을 핍박 하더라. 그리 되어 있어요.

 그런데 성령으로 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기는 육적인 어떤 실적이 없는데 자녀 없는 쪽이 오히려 하늘나라에 자녀를 많이 가진 사람으로서 인정을 받는 그런 어려운 내용이 나와요.

 

 우리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 해 가지고 희한한 이야기를 한다고요. 우리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 너희 어머니는 지상에 있지만 대전에 살지만 우리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 그 하늘에 있는 어머니는 예루살렘이다. 아주 이건 함축이 된 건지, 그냥 심볼인지, 이미지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특수한 용어들이 사도 바울 입에서 팍팍 나오고 있어요. 믿으란 말인지, 믿지 말라는 말인지 분간도 안 돼요.

 

  결국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만 그 말을 알아듣는 거예요. 들을 자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듣고 들을 귀 없는 자는 못 듣는 방식이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면 육에 있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럼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 해석을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걸 알아야 그들의 사기 쳐 먹는 방법을 그 술수를 아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상대하고 그리고 인간을 상대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가? 잘 들어 보세요. 들어 보면 많이 들어 본 기억이 난다 하실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했거든요. 창조. 해결을 창조부터 시작해요. 아브라함은 뭡니까? 회개 안 되게 붙이잖아요. 십자가부터 사도바울은 시작하거든요. 왜 십자가부터 시작하는가? 사도바울은 옛날에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옛날에는 무엇부터 시작한 거예요? 창조부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맘을 알고 난 뒤부터 창조는 그만두고 십자가부터 출발한 거예요.

 

 죽음이란 모든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살려주는 것은 주님의 고유 권한이고 영생주기로 작정한 사람만 창세전에 예정된 택함 받은 자만 구원 받는다는 쪽으로 나가는데, 오늘날 교회는 그래서는 장사가 안 되는가 싶은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보세요.

 

 첫 번째 ’창조했다‘ 두 번째 ’창조 속에는 하나님께서 사람 을 끌어당길 수 있는 낚시 밥 같은 것을 미리 담아 놨다‘ 그걸 ’하나님의 형상‘이라 합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은 뭐라 하면, 동물하고 인간하고 차이성을 두고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동물에는 없는데, 인간에만 있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보는 거예요. 그들은.

 

  그러면 동물에 없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은 보통 4가지를 이야기 하는데 그 중에 한 가지를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양심이라는 것. 그리고 신을 찾는 종교심이라는 것. 이걸 사회학적으로 보게 되면 언어와 불, 도구, 손... 이런 것 까지 인류문화 되겠지만. 이걸 기독교에서는 형상이라 하는 것은 양심과 종교심 천주교에서는 이성적인 것. 이성은 순우리말로 하면 ‘따짐’ 다른 말로 하면 ‘판단력’

 

  칸트의 순수이성실천 있거든요. 판단하는 거예요. 판단할 때 이 판단은 어떻게 하겠어요? 옳고, 이것은 그르다 하겠지요. 동양철학에서는 이것을 ’이‘라고 해요. 이치. 따지는 것. 사람이 이가 없으면 짐승만도 못 하다. 이치에서 인간의 관계는 5가지 부부관계, 형제관계, 자식관계, 친구관계. 이 관계만 잘 되면 자연과 합치돼서 인간답게 산다. 이런 겁니다. 그게 바로 서양에 오면 사람의 형상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과연 상식적이죠. 이게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플라톤, 헬라철학에 이미 나왔던 겁니다. 그걸 그대로 기독교가 베낀 거예요. 이게 영지주의로 발달된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동물은 안 사랑하는데 인간은 사랑하셔서 자신의 품성, 자신의 형상을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에 나오는 거예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독교 이전의 사람입니다. 상식선에서 인간의 도 닦으면 다 나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 문제가 요 형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조상을 잘못 만나서 아담이 따 먹고 난 뒤에 이것이 망가졌다는 겁니다.

 

 수리가 필요한 거예요. 수리가 필요한데, 고치는데 필요해서 그 다음에 하나님이 뭘 주느냐 하면, 창조해 놓고, 형상 있다. 했지요.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여기에 말씀을 주는 겁니다. 말씀을 주게 되면 이 형상이 회복되는데 말씀의 내용이 중요한 내용이 2가지로 요약된다 하는 겁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 번째는 이웃을 영원히 사랑하는 것. 요 2가지를 집어 넣어주면 인간의 양심과 종교심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쪽으로 회복이 된다는 이야기죠.

 

  그러면 개신교하고 천주교 차이점이 뭐냐 하면 천주교에서는 교육을 하는 거예요. 말씀으로 교육하면 누구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잠재적인 자질은 누구나 있다는 겁니다. 천주교 당신들은 왜 그렇게 주장하느냐? 하면 사람이 뭔가 요소를 안 들었기 때문에 착한 사람 못 되지. 착한품성은 누구나 품고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맹자의 성선설이지요. 맹자의 교육방법은 ’훈련‘입니다. 계속 반복적인 훈련 이예요. 자기 자식을 어떻게 합니까? 자식교육을 위해서 이사를 몇 번해요? 강남 쪽 아닙니까? 3번 하잖아요. 맹모삼천지교. 반복하면 된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 들어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실시하는 교육과 똑같은 거예요. 결국은. 조지면 뭐든지 된다는 거예요. 천주교가 그렇게 하니까.

 

 천주교가 왜 그렇게 주장하느냐 하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한 말씀을 준 것은 이미 우리 속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그 선한 것을 받아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는 모르지만 심히 하나님은 알고 있으니까 그 말씀대로 훌륭하다 보면 ’아하, 내가 이렇게 선할 수 있는 인간이구나! 내가 미처 개발을 못 했네.‘ 라고 머리를 치면서 바르게 살 수가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개신교가 반대에 나선거지요. 어떻게 반대하느냐 하면, 그러면 성령을 왜 줬느냐? 성령을 줘야 할 수 있는 일을 천주교는 성령 없이 그냥 인간들의 양심 개발하면 작업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러면 개신교는 뭐냐, 일단 성령이 오게 되면 자신이 전적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서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게 살아나요. 죽었던 형상이 성령에 의해서 살아나게 되면 그 다음에 주어진 말씀을 가지고 합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더욱더 가속화 내어 하나님의 형상이 본받을 때 까지 진격, 진도, 발전보이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서 구원받는다는 얘기예요.

 

 그러면 차이점이 어디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성령이 와야 가능하다 이말 아닙니까? 천주교와의 차이점은. 그러면 천주교에서는 개신교의 이런 반발을 어떻게 설명 합니까? 천주교는 이렇게 설명해요.

 

  인간의 양심이 있다는 자체가 이미 성령이 새삼 올 필요도 없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선하심이니까 선하심에 의해서 이미 터 잡은 거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나오죠. 성신께서 창세전에 이미 어둠속에 물이 있었지요. 그것처럼 성령이라 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구원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라 하는 것은 이 자연세계를 그동안 유지 보전시키는 충분히 왔던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자연의 일부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 속에 양심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도 성령의 솜씨다. 그것을 근거 하는 증거가 뭐냐 하면 시편105편에 나와요. 모든 자연의 세계는 성령에 의해서 짝이 있다. 따라서 이미 인간의 이전에 성령이 포괄적 범위로 넓은 범위로 활동해 왔는데 개신교 이 인간들은 지 구원론만 성령을 적용시키지 세상의 모든 섭리는 구성을 안 시키니까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 폭이 좁다 이렇게 반박해 버려요. 아시겠어요?

 

  물론 그들은 성령을 통해서 구원한다는 것은 인정해요. 하지만 성령이 전부가 아니고 다만 성령을 통해서 회개 한다는 말은 ‘성령께서 이미 은혜를 줬는데 그걸 몰랐구나!’ 새삼스럽게 넓은 범위를 새삼스럽게 인정하는 것뿐이지. 성령이 와야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십자가 복음이 오기 전에 강감찬장군이나 이순신장군, 을지문덕장군은 다 지옥가란 말인가? 하고 천주교가 화를 더 내요.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이런 사람은 데게 착한데 그 착함은 어디서 나온 착함이겠습니까? 그것은 성령께서 착하도록 보존하고 유지했기 때문에 착한 거예요. 천주교에서. 따라서 그들에게 이미 착하지만 보장한 것은 착한 것은 착한 것인데 예수그리스도의 죄 씻음 요러한 지식 하나 모자라기 때문에 그것은 패자부활전 있잖아요. 연옥 있잖아요. 연옥 가서 교도소에서 한 달에 한 50만원 주고 빼내면 다 되게.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방인들이 유대교 넘어올 때 그 턱이 높지 않고 낮지요. 이미 있는 거 바보같이 활용을 못 한 거예요. 활용을 하면 구원 받는데. 개신교, 천주교 당신들은 왜 그렇게 주장하느냐? 천주교는 간단해요.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넓어 보이죠. 불교에서 말하는 대성불교지요. 짝이 잘 맞지요. 그래서 환경운동하고, 북한 쌀 보내고, 나라예산 다 털고, 존재의 하나님이고, 존재의 있음 자체가 뭐냐 하면, 곧 사랑으로 있는 것이지 존재자체가 선이고, 없는 것은 악이 되고, 있는 것은 선이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입니다. 오늘날 개신교가 이것을 써 먹는다니까요. 공부를 해 본적도 없고 몰라요. 잘 꼬시면 끝나는 거예요. 무조건. 꼬셔서 헌금 돈 받아내서 예배당 지으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하고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큰 교회니까 천당 가는데 더 진리답다고 생각하고 올 거다 이 말 입니다. 영업용으로 써 먹는 거예요. 이런 게.

 

 그러면 개신교는 맞느냐? 개신교는 천주교와 똑같은 거예요. 결국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옥은 왜 만들어 놨는데. 이게 안 풀리는 거예요. 개신교에서는 사랑을 어디라 합니까? 사랑은 하나님은 일단 내가 존재하면 사랑으로 본다는 거예요. 비슷해요. 같아요.

 

  개신교는 결국 어디에 집착 합니까? 구원론. 하나님이 사랑을 못 해서 환장했어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 못 해서 환장했어요. 그러면 창세기3장 22절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좇아낸 취지는 뭡니까? 좇아내지 말지 왜 좇아냈는데. 또 선악과나무 심어 놓으면 되지. 뭐 그리 답답해서. 이것이 누구 중심입니까? 개신교는 ‘주체 중심’ 곧 ‘나 중심’입니다.

 

 이 개신교의 모습이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중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를 잘 섬겼는데 망했습니다. 여호와를 섬겼는데 실제로는 진짜 하늘나라 천상회의를 참석한 성령 성신 받은 선지자는 계속 죽여 버렸고 죽인 피의 노선을 따라서 세례요한이 오게 돼있고 그 목 베인 세례요한 노선 따라 누가 오냐? 예수님 오게 돼있고 예수님 노선 따라서 제자들이 그 길을 가게 됩니다.

 

  인간의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자기아들 예수님 사랑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지체란 이유 때문에 주님의 예수님 받은 사랑에 합류했기 때문에 주님 혼자 누릴 사랑을 우리가 같이 누리게 된 것 뿐 이예요.

 

  우리에게 줄 죄인에게 줄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면 그 예수 그리스도가 택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고자 작정된 사람 그런 사람에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만 주는 사랑을 그 몸이기 때문에 지체기 때문에 주어지는 거예요. 사랑받고도 황공스럽고 미안하고 그래요.

 

 우리는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 못 받고, 주님 덕분에 그걸 예수 이름으로 내 이름으로 구원 받으면 나 당당할 텐데. ’나, 이 근호 왔습니다. 사랑주소.’ 이렇게 하면, 내 이름으로 구원 받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부끄러운지 이거는 표정 나와야 돼요. ‘왜 왔는데?‘ ’저는 주를 믿습니다.‘ ’예수안‘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 챙기는 사랑 이예요. 그게 예수이름으로가 구원이란 뜻입니다.

 

  이미 다 해 놨다는 거예요. 니가 더 보텔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다 해 논 것을 받아 챙기면 그것이 구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리 되려면 받아 챙기면 쉽잖아요. 쉽지 않지요. 뭘 부인 합니까? 지금까지 누구 사랑? 내 사랑. 누굴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하나님을 포기해야 돼요. 이게 미치는 거예요. 날 위해서 예수 믿는 것도 포기해 줘야 돼요. 그것은 성령이 임해야 가능한 겁니다.

 

  만약, 이걸 포기 안 하게 되면 우리는 천국가도 심심해서 못 삽니다. 모든 시선이 예수님 잘 난 쪽으로 다 가버리면 누가 이 외로움을 이 절대 고독을 누가 날 위로해 주지? 이 재범. 윤 복희. 누가 날 위로해 주나? 교회 오는 것은 외로움 달래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노인들이. 외로움 때문에. 하나님도 내편이더라, 목사님도 내편. 장로님도 내편. 구역장도 내 편이더라 ’아이고~ 내편 많아서 좋다~‘ ’으이구~ 할마야, 우리 교회가자! 내 편 많더라.‘ 하나님도 내 편이래. 그게 자기 부인 되겠습니까? 회개 되겠습니까?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것은 이거는 교회든 교회 아니든 이것은 필히 성령께서 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전하는 그것이 바로 전도가 되려면, ’십자가 도‘를 전해야 전도지 ’십자가 도‘가 아닌 것은 전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구원 받는가? 전도, 십자가라는 것은 ’오지 마‘ 하지만 내 아들 죽인 내 아들이 죽었던 죽음이 들어있는 사람 같으면 내 나라에 올 수 있다. 현재 우리 안에 나 때문에 죽은 예수님 아들이 죽은 죽음이 우리 안에 있으면 다른 말로 하면 피지요. 예수님의 죽음이 내 안에 있으면 예수님 죽은 것 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냥 우리 이름으로 우리 자격으로 구원되는 게 아니 예요. 우리 짜게 가지고 그 안에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 있어요. 그럼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 있는 사람의 특징은 어떻겠습니까? 항상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 있으니까 지는 잘 난체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나 때문에 죽은 분이 내 안에 계시는데 어떻게 잘 난체 합니까?

 

  자기가 실수 해 가지고 막 태어난 아들을 실수로 죽였다 하면 그 아들 죽은날 제삿날 생각하면 그냥 지낼 수 없고 헤헤 할 수 없다 말이죠. 나 때문에 죽었는데....그래서 그걸 ’십자가안‘ 에서 구원 받았다. 하는 겁니다. 그 노선만이 바울이 알았던 ’십자가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 그걸 그대로 이야기 하는 겁니다. 나는 사람을 좋게 하면 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진도 나가 봅시다.

 

  50~52절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 게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이 설교한 곳이 안디옥이라는 곳이지요. 14절 비시디아 안디옥 이지요. 이곳은 터키지방인데요. 이쪽에서 쫓겨나 가지고 이고니아 수평적으로 약간 떨어진 이고니아 가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진짜 사도바울과 성령이 함께 있다면 목회일이나 전도를 팍팍 도와주면 안 됩니까? 도와주는데 쫓겨나게 만들고 왜 그렇게 하느냐 말이죠. 왜 쫓겨나게 하느냐 하면, 성령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의 영이거든요. 성령은 무얼 반복하느냐 하면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 받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살아왔던 그 모든 행적을 되풀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되풀이 하다 보니까 예수님이 항상 갈릴리나 전도하면서 환영을 받지 못하고 결국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주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잖아요. 그걸 되풀이 해 주는 거예요. 되풀이함으로서 현재 우리가 가는 딛고 있는 이 세상은 땅이란 이 세상에서는 땅을 물리적인 땅으로 생각해선 안 되고 땅이라 하는 것은 배후에 영적인 세력이 여기 먼저 터 잡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쫓겨 다니는 것을 통해서 그것도 복음의 내용에 포함되게 하시는 겁니다. 온 몸으로 느끼게 만드는 거예요. 사도들이 아예 마음을 다짐해요.

 

  이것은 ‘안 믿는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오히려 어떤 것에 놀라느냐 하면 믿는 자가 있다는 것에 오히려 놀래 버려요. 그래서 놀래 가지고 사도는 사십대 하나 감안 39대 태장 3번 맞고, 강의 위험과, 산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심지어 굶어 가면서 하는 이유가 아직도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가 혹시 저 산 너머 저 고을 넘어 있을 줄 알고 혹시....

 

 그러니까 사람들을 납득해서 사람을 끌어 모으는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고 혹시 말도 안 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걸 그런 식으로 그들은 선교 여행을 다닌 겁니다. 그리고 자기는 하는 말이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 생명은 하늘에 있으니까 이 지상에 대해서는 어떤 미련 같은 것은 없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두 사도가 바나바와 바울을 말하겠지요. 14장 3절에 보면,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시니” 십자가마을에 질문 있었지요. ‘표적과 기사가 어떻게 다릅니까?’ 그걸 물으셨는데 제 답변은 현대에서는 표적과 기사는 다 같이 기적으로 사람이 하지 못하는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기준으로 묘사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왜 둘로 나눴는가? 사람들은 이적을 기적을 원해요. 내가 못하는 것을 해 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원하는 기적을 예수님께서 해줌으로서 기적을 원하는 그 자체가 전형적인 불신앙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여, 포도주가 떨어졌다.’ 이 집 가나안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 때 예수님 뭐라 합니까? ‘포도주 떨어진 게 나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이러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항아리에 물 채우라 하지요. 상관없으면 포도주를 안 만들어 주는 게 맞는데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도 물 채우라 했거든요. 그것도 말이 안 되지. 포도주를 그냥 만들어 주면 되지 물은 왜 채우라 하느냐 말입니다. 결국은 이런 거예요.

 

 예수님께서 혼인잔치에 갔을 때 마침 포도주가 없다. 포도주가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자기가 장차 십자가에 지신 그것이 십자가 피거든요. 예수님께서 성만찬할 때 내 피를 마시라 하시잖아요. 하나님께서 앞서서 성령을 통해서 혼인잔치에 가게 하신 것은 이 혼인잔치가 의미 없이 가게 하신 것이 아니고, 장차 예수님의 때, 완성의 때를 미리 보여주시기 위해서 앞당겨서 이 집에 먼저 도달되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거기에서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제공하기 위해서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물로 채워요. 그럼 물로 채웠으니 무슨 항아리? 물 항아리. 물 항아리로서 인간은 끝나버려요. 인간은 뭐다? 물이예요. 물인데 그걸 예수님께서 포도주 되게 했다면 이미 인간의 손을 넘어서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세계잖아요. 물이 포도주 되는 그것이 나중에 예수님 십자가에서 이루어져 버리잖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물이 포도주 되는 것을 또 포도주 떨어진 것을 채운 그것을 믿는 자체가 불신앙이 되죠. 왜 자기 아쉬운 것을 자기를 위하여 예수님을 이용한 것 밖에 안 되니까. 그건 불신앙이니까 참 신앙이라면 내가 바로 물이라는 것. 주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내 위력이 아니고 내 희망이 아니고 주님의 희망과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물 같은 내가 포도주 같은 주의 귀한 몸이 됐다는 사실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것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또 표적이 있지요. 요나의 표적. 요나가 고기 속에 들어가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요나 속에 자신의 영이 미리 들어있는 거고,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고 사실은 그렇게 된 사실을 요나를 보여준 그 심~볼 상징이 비로소 자기 예수님 때에 십자가를 통해서 드디어 꽃이 핀 거예요. 요나이야기는 ‘사실은 내 이야기였어.’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요나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못 끄집어내니까 너희들의 신앙은 신앙이 아니고 엉터리였다. 이거예요. ‘너희 애비는 마귀다’ 이말 입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이렇게 비난해요. 이 근호 목사는 지금 20년 동안 한 소리만 한다고 큰소리만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궁금한 게 그 같은 소리란 내용이 뭘 가지고 같은 소리인가 묻고 싶은 거예요. 뻔한 게 왜 예수님 이야기만 하느냐? 왜 피 이야기만 하느냐 아닙니까? 그래 구원능력이 ‘피’에 있고 우리가 자기 행함을 믿어서는 안 되잖아요. 믿을 분이 동행하는 분이 예수님 밖에 없으니까 자기 동행하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성령이 임한 사람이 자기 증거 하면 안 되잖아요.

 

  예수님 성령 임한 사람이 필히 예수님 증거만 하면 되는데 아니 예수님 증거만 하고 자기 증거 안 했다고 해서 그것이 불만이고 잘못됐다는 이 말인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만 증거 하는 게 아니고, 인간 증거 하는 곳으로 가겠다는 겁니다. 그 소리 듣고 내가 제대로 전하긴 전했는가 보다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제 소리 듣고 강의 듣고 계속 기다린 거예요. 언제 인간이 뭘 해야 된다. 그 소리 나오기를 계속 기다려도 20년 기다려도 안 나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예수님이 표적과 기사를 행했다는 말은 결국은 너희들이 기적과 표적을 보고도 그들은 5절 보면 돌로 치고 달려들지요. 왜냐하면 기적이라 하는 것이 기적이 필요한 사람에게만 기적이 좋아 보이지만 기적이 필요 없는 사람한테는 기적은 모독하는 겁니다.

 

  ‘니가 지금 요술 하냐? 마술 하냐? 지금.’ 마술가들이 그렇게 존경 안 받는 이유는 쓸데없는 마술을 하기 때문 이예요. 아니 집에 돈이 없어서 돈을 5억 주던지, 주식 올려 주던지, 땅값 올려 주던지, 이러면 왜 존경 안 하겠습니까? 지가 지 맘대로 필요한 것을 지 맘대로 해 놓고 우리보고 구경하라 해 놓으니 그건 니한테 신기한 거지 좋은 거지 우리한테는 안 좋은 거예요.

 

  지금 몸이 아파서 낫게 해 주면 니 믿을 게. 이리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긍정하고 죄가 없는 사람한테는 죄 이야기 하고 아픈데 이야기 하면 부정적인 관심사라 해서 굉장히 거부하고, 싫어합니다.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말씀이 만든 것이 아니고 오늘날 교회는 고객들의 의견이 모아져서 교회가 돼요. 그걸 ‘산당‘이라 합니다.

 

구약의 ’산당’ 산 많아서 산당. 저희들이 알아서 와요. 안의 모든 규칙과 모든 내용은 저희들이 위에서 내려오는 말씀 없어도 저희들이 이렇게 해 놓고 결재만 받아 가지고 내 원하는 대로 해 달라는 거예요. 완전히 산당으로 변한 거예요. 그리고 이런 고객의 요청을 거부하게 되면 장사는 안 되게 돼있어요. 그 가게 문 닫습니다. 고객만족. 고객이 왕 이예요. 돈 많은 장로 말 안 들으면 안 되지요.

 

  그래서 여기에 6절에 보면 돌로 쳐서 도망했지요. 결국 도망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지금 사도 바울이 바나바가 하는 것은 지금 말씀 전파에 있지요. 교회 세우는 게 아니고, 뭡니까? 말씀 전파에 있지요. 왜 말씀 전파해서 구원 됩니까? 로마서10장에 보니까 구원은 들으면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난다 하거든요. 말씀 들어서 오늘밤에 낙원에 가면 됐지.

 

  아, 교회는 왜 세웠는데요. 이거 다 목사가 지 생계수단이란 그 말 외엔 어떤 다른 합당한 근거는 없어요. 생계수단일 뿐 이예요. 고객이 원하면 무당 짓 해주고, 서비스 해 주고, 사람들이 천국을 뭐로 보냐 하면 ‘풍요의 나라’로 넉넉한 것. 넘치는 것. 큰 것. 인간은 하나님을 왜 찾느냐 하면 항상 미흡할 때, 모자랄 때, 보충할 때, 보충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보상 받을 때, 과거에 상실한 것을 그 상실한 부분을 그 빈자리는 남아 있으니까 빈자리에 그걸 너끈히 기쁨으로 채울 수 있는 다른 것을 채워달라고 오는 거예요.

 

  천국의 특징은 뭐라 했습니까? 풍요고, 넘쳐나고, 풍부하고, 풍족하고, 가득한 거죠. 그러면 천국과 지상이 제대로 이어졌다면 천국은 풍요하니까 지상에 천국의 대행업체란 교회는 어떠해야 돼요? 커야 되고, 넘쳐나야 되고, 풍성해야 되고, 그러면 그거는 진실에 가까운 천국에 갈 수 있는 교회가 되고,

 

  비실비실하고 형광등 불은 껌뻑 껌뻑하고 사람도 없고, 아이고~ 저런 천국 가다가는 빌어먹는 천국 가겠다! 그래서 인간이 이미 알고 상정해 있는 풍부한 천국을 원하다 보니까 교회도 천국에 걸맞게 샹제리도 화려하고, 아름답고, 고상하고, 거룩해 보이고, 파이프 오르간도 있고, 관현악도 갖추어져 있어 마치 천사가 와도 깜짝 놀랄 정도로 그리 갖추어질 때 늘 사람들은 천국의 대체물로 교회를 찾아가는 겁니다.

 

  물질적인 욕구가 끊임없이(성도 중에서)결핍이죠. 미흡이죠. 사람이라 하는 것은 라캉에 나오죠. 지가 뭘 모자란 것을 채우는 게 아니고 외부인이 지가 관계하는 타인이 만들어 줘요. ‘니 이거 없지?’ 약 오르게 만든다니까요. 사람이 으뜸이 되지 못하면 지가 지한테 화가 나요. 어느 장소에 어느 단체에 가도 으뜸이 되지 못하고 2인자나 3인자 되면 지가 지한테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우리 재혁이 피아노 쳐서 3등 해 보면 화가 나, 안나? 하기 전 까지는 3등만 예선통과만 하다가 막상 하고 나면 ‘에이~씨, 1등 해야 되는데’ 이런 생각 들지요. 으뜸이 되지 아니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학대 합니다. 그러면 사람은 욕심을 안 내느냐? 욕심을 안내는 게 아니고 자포자기하죠. 포기함으로서 자기 욕망을 얼기설기 가리워 버리는 거예요.

 

  사업하는 것도 대충하면 이만하면 됐다. 하지만 여기서 ‘돈 3조원 빌려 줄 테니 한번 해 보시오.’ 하면, 으으~ 대번하죠. 이자 없습니다. 그냥 3조 줄 테니 동업합시다. 대번 공단 알아보고..... 크면 클수록 이윤 많이 남잖아요. 문어발처럼 벌리고. 대기업이 상자, 종이까지 침범해서 돈 되는 것은 다 하고. 이게 뭐냐 하면 남이 가만 두질 않는다니까요. 돈 그냥 놔두질 않아요. ‘이거, 쪼다 아니야, 이거’ ‘니 뭐하고 있어? 니 꼴찌야.’ 남들이 놀린다니까요. 마누라 놀리고, 자식 놀리고, 아버지 승진 안 해보세요. 스트레스 받아요. 남편이 바가지 긁힌 게 수번일 거예요.

 

  여기에 7,8절 보면,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 있지요. 항상 사도행전 처음 나올 때 사도행전 1장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1장에 사도들이 뭘 받아요? 성령을 받지요. 그 ‘성령안’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 있지요. 사도는 ‘성령안‘ 에서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사도만 보이고 그 안에 들어있는 누구는 안 보입니까? 예수님은 안 보이는 거예요.

 

  안 보이니 항상 사도가 했다. 사도가 했다. 이래 보는 거예요. 왜 그리 볼까요? 본인들의 안에 예수가 없으니까. ’아이고! 지 보니까 지나 나나 똑같이 예수 없네.‘ ’지 밖에 없네.’전부 다 안일하게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9절에 보세요.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되어 있지요. 그래서 우리의 모임에는 악인의 실수가 많기 때문에 음성을 누가 또 한사람 해요. 여기보면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걸 봤다 했지요. 그러면 구원받을만한 믿음을 봤다 했으니까 그럼 이 본 것은 사도바울이 봤다고 돼있지만 사도바울은 성령과 함께 있지요.

 

  성령이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이미 사도바울을 이용해서 옛날 예수님께서 병을 고쳤던 그 작업을 쉬지 않고 멈추지 않고 계속 해 주시는데 차이점이 있어요. 옛날 예수님 십자가 지기 전에 고쳤던 그것은 그냥 병만 고쳤는데 여기 와서는 구원받을 믿음. 구원받을 믿음으로서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미 십자가에서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얼마 전에 그런 설교 했잖아요. 문둥병 열 명이 왔는데 구원받은 사람 몇 명밖에 없습니까? 한 명 밖에 없지요. 왜 기적을 보였는데 십자가 지기 전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앞서 보이기 때문에 기적을 하면서 그 사람들은 기적으로 인정하지만 표적으로 이해해야 돼요.

 

 요한복음9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실로암에 가서 진흙으로 눈은 떴지만, 누가 날 고쳐줬는지 모르는 거예요. 나중에 ‘나다.’ 하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예수를 믿게 되죠. 그래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 거예요. 병 고친 것. 앉은뱅이 고친 것. 아무상관 없습니다. 병 안 고쳐도 괜찮고, 앉은뱅이 안 고쳐도 괜찮아요. 예수 믿으면 그게 최종적 이예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