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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사도행전 30강 / 행 13:17 (바울의 설교) / 111027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도행전

사도행전 30강 / 행 13:17 (바울의 설교) / 111027

정인순 2011. 10. 28. 07:33

 

 

 사도행전30강  1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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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대전111027a-행13장(바울의 설교)30강-이 근호 목사

 

대전강의10월27일 사도행전 30강

오늘은 사도행전 13장 17절을 해봅시다. 여기 13장에 나오는 이 내용은 사도바울이 바나바와 같이 터키 중심지에 있는 안디옥이라는 데가 있어요. 안디옥이 터키에도 있고 저 지중해에 있는 이스라엘 땅에도 안디옥이 있어요. 지금의 시리아 두 군데에 있는데 안디옥이라는 터키의 중심지 안디옥에 있습니다. 얼마 전에 지진이 난 곳은 이쪽에 지진이 났고 안디옥에서 설교를 하는 대목인데, 사도바울이 설교를 하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느냐 하면 사도바울은 사도거든요. 사도가 설교할 때 성령 받아서 설교 할 것이고 그 설교내용도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 설교내용과 비교가 되는 성경이 돼야 돼요. 성경을 ‘나 성경 안 보겠어. 나 성경 덮어버리겠어. 난 놀기 삼아 교회 가겠어.’ 이러면, 설교가 재미나는 설교, 사람 꼬시는 설교, 교회 와서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그런 사람 위로하는 설교로서 충분하죠. 어차피 하나의 점집이니까, 하나의 가게니까, 그냥 사람들 모여서 돈 뿌리고 뿌리는 사업은 번창하게 마련이거든요. 그걸로 충분하다고 보면 되는데, 성경만 펼치면 문제가 돼요.

 

성경만 펼치면 거기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하고 오늘날 목사들의 설교를 비교를 시도한다는 그 자체가 이것은 생각을 달리하게 돼요. ‘하아~ 우리가 교회 놀러가고 교회 다닌다고 해서 이게 하늘나라에서도 반겨주는 게 아니구나, 교회서 교회 목사는 반겨주는데 문제의 관건은 교회까지는 왔는데 문제는 천국은 이게 보장이 안 되는 거예요. 실컷 교회에서 노인들이 많이 놀거든요. 그만큼 시설이 잘 돼 있으니까 노인들이 놀기 좋은데, 점심 주고 저녁까지도 주고 좋은데 문제는 교회가 그런 데가 교회가 아니고 교회라 하는 것은 천국을 갈 수 있는 능력 속에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 그런 말씀이 있죠.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다.’ 두 세 사람이 있으니까 이건 얼마나 작은 숫자입니까? 그래도 너와 함께 있겠다. 그런데 지금 만약에 두 세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주변에서 무시하고 새로 온 사람도 ‘두 사람밖에 없네.‘ 하고 두 번 다시 안 올 거라 말이죠.

 

그러니까 복음 전하는 목사들로 하여금 용기를 잃게 만들고 절망케 하는 그런 분위기가 되죠. 그래서 제가 자주 이야기합니다만 교회가 있음이 교회를 망친다는 말을 제가 그래서 하는 거예요. 지금이 만약에 영 정조 시대, 조선시대 후기인데 여기 대전에 교회가 있다 하면 ‘교회가 뭐지?’ 하고 호기심으로 올 건데, 지나 개나 전부 다 교회 다 세워놓으니까 기존의 교회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참된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교회 아닌 것처럼 그렇게 매도당하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그게 마귀의 전략이고 악마의 전략이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설교를 어떻게 했는가 하는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도바울이 설교한 것하고 예수님이 설교한 것하고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결론적으로 내릴 수 있어요.

 

뜸들이지 않고 바로 직접적으로 사도바울의 설교의 핵심부분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죽 나오는데 사도바울이 구약 가지고 설교를 해요. 사도바울이 안디옥에서 유대인을 상대로 설교를 하는데 여기 26절에 보면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이렇게 돼 있어요. 그 앞에 것은 조금 있다가 설명을 해드릴게요. 핵심부분만 먼저 짚고 갑니다.

 

여기서 말씀 앞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구원의 말씀’이죠.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 이런 톤으로 이런 식으로 설교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배척받을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뭐냐 하면, ‘구원을 받으라.’는 거예요. 사람을 무시해도 보통 무시한 게 아닙니다. 재현이가 피아노 치고 있는데 ‘구원받으세요.’ 이러면 얼마나 기분 나쁩니까? 지금 자기의 음악성을 들어줘야 되는데, 요리사가 지금 한참 요리하고 있는데 ‘실례지만 구원을 받으세요.’

 

‘구원을 받으세요.‘란 이 말은 모든 능력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모독케 합니다. 거리에서 교통신호하고 있는 순경한테 다가가서 ’구원을 받으세요.‘ 이것은 ’당신은 구원받지 않으면 당신은 사람 취급 못 받습니다.‘하는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톤으로 이야기했어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 오른손이 범죄 하면 찍어버려라 그리고 오른손이 없는 채로 나머지 지체가지고 지옥 불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을 받으세요. 찍어버리더라도 오른 눈 빼버리고 오른팔 없더라도 지옥 불에 안 들어가는 것이 낫습니다. 구원을 받으세요.’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지금 지옥 가고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예요. ‘당신은 지금 지옥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찌할꼬, ‘구원을 받으세요.’

 

그러면 구원이 뭔가를 38절에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람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죄 사람을 받으라 돼 있죠? 그렇죠? 38절 맞죠? 죄 사함!!

 

그럼 교회에서 오늘날 목사가 설교할 때 뭐부터 해야 됩니까? 성경을 펼쳐놓고 그 다음에 뭐다? ‘구원을 받으세요.’ 그 다음에 구원은 어떤 식으로 해준다? 죄 사함을 누구의 힘을 입어서? 이 사람, 이 사람이 누굽니까? 예수님이거든요.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예수님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정하신 분이라 했어요. 하나님이 정하신 분이니까, 결국 예수님의 설교의 핵심이 뭐냐 하면 아버지께서 이 세상이 지금 구원받으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빠졌으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를 보내셔서 구원을 받게 하는데 구원을 받는 거 그 전제는 뭐냐, 죄가 있고 그 죄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을 경우에만 뭐가 성립됩니까? 구원이 된다는 이야기예요. 지금 사도바울이 이 설교를 하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기도하면 복 받고 어떻게 헌금하시면 여러분 가정이 핍니다. 이런 이야기가 없다니까요. 사도행전에 그게 없다니까요. 지금 일반 대중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교회에서 이야기를 하질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사도바울도 그렇고, 그러면 예수님이나 사도가 이야기한 그 취지가 아닌 다른 설교를 한다는 것은 이미 노선이 좁은 길이 아니고 넓은 길, 멸망의 길을 가기 위해서 마귀가 만들어 놓은 교회 다니고 있는 거예요.

 

죄 사람을 받는데 있어서 증거가 ‘병이 나으면 죄 사함 받았습니다. 방언하면 죄 사함 받았습니다.’ 이런 증거가 없어요.

죄 사함은 증거가 딴 게 아니고 지금까지 날 위해 살다가 이렇게 되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돼 있어요. 원래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서 몸 바치는 사람들이 모임이 돼야 되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몸 바쳤다는 그 크기에 만족해서 오는 사람들은 안 돼요. 자기는 멀쩡히 살아있고 예수님만 아주 고생하고, 이런 것을 노리고 오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이 한 몸을 주님을 위해서 바치리라.

 

진주에 가면 유명한 성이 있잖아요. 거기 유명한 옛날 임진왜란 때 기생이 있죠? 논개, 그 논개 충절을 노래했던 한국 노래 있잖아요. 지난번에도 노래불렀습니다마는 ‘몸 바쳐서 몸 바쳐서’ 그게 뭐냐 하면 왜장한테 몸 바쳐서 나라 구했던 논개의 애국심을 말한 게 아닙니까?

 

교회가 뭡니까? 이 몸 바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리라. 이거 교회 아닙니까? 아주 깔끔하죠.ㅎ 문제는 이런 깔끔한 교회에 대해서 떠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전부 다 자기 챙길 거 챙기기 위해서 이유를 위해서 온 거예요. 헌금 내고 자기 원하는 거 더 많이 30배, 60배, 100배로 갖고 가려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다 말이죠. 마치 가게 커피숍이나 옷 사고 돈 주고 커피 먹고 돈 주고 하는 것처럼 교회 헌금 내고 지는 챙길 것 챙겨가는 구원이나 챙기고 하나님 복이나 챙기는 그러한 가게들로, 점치는 점집으로 그렇게 대나무 꽂아 꽂은 데, 대나무 대신에 십자가를 대신 꽂아 놓았는데, 십자가나 대나무나 그게 똑같은 거죠.ㅎ

 

왜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모이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제가 어제 대구 금호강을 산책을 하는데 뭔가 사람들이 모일 장소가 아닌데 많이 모여 있어요. 그것도 50대 남자들이. 쓱 들여다보니까 포커 판을 벌이고 있는데 만 원짜리가 즐비해요. 그래서 몇 걸음 떨어져서 112 신고했죠. 지금 포커 판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들이 100원 짜리 한다고 밑에는 100원짜리를 깔아놨어요. 혹시 덮치면 ‘우리 100원짜리 장난인데?’ 이렇게 해놓고 실제 판돈은 만 원짜리로 깔아놓은 거예요. 그것도 알려줬어요. 그래서 산책하고 돌아오다 보니까 완전히 해산되고 말았어요.ㅎ 참 좋은 일 했었습니다.ㅎㅎ 그 사람들 살리는 방법 이예요. 그 사람들이 정신이 빠져있으니까. 그 사람들이 도박에 빠져있는 거나 교회에 와서 하나님이 주신다는 복, 간증 거기 빠져서 하는 것이나, 그 도박판이나 이 도박판이나 신고감이죠.ㅎㅎ

 

나에게 하나님이 뭘 주실 것인가가 아니라 이 껍데기 같은 이 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쓰일 것인가, 그걸 이야기하는 것이 교회다 이 말이죠. 그게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 내 속에 주님 들어올 정도가 아니고 주님이 내 앞에 계셔서 거래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내 안을 주님이 점령해 버립니다. 그게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50절 봅시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그 지경에서 쫓아냈죠. 이게 바로 예수님의 설교와 공통점이라 말이죠. 예수님이 설교하면 ‘제발 좀 우리 동네에서 놀지 말고 딴 동네로 가 주세요.’라고 쫓아낸 거예요. 오늘날 교회 가서 복음 이야기하면 교회서 쫓아내 버립니다. ‘남 영업하는데 니가 와서 왜 십자가 이야기해서 영업 방해하느냐’고 쫓아내 버려요. ‘지금 우리가 낸 헌금 가지고 놀고 있는데 이렇게 좋아하면서 교회서 역시 착한 일해서 수백 명이 와서 놀고 이게 얼마나 좋은 일 하는데 당신이 왜 우리 영업을 방해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우리를 모독하느냐.’ 이런 식으로 쫓아내요.

 

그러니 교회가 있다는 자체가 교회를 가로막아요. 교회는 늘 없다고 생각하고 말씀만 있으면 되는데, 말씀 가지고 교회 만들어서 말씀은 버리고 교회만 쥐려고 한다 말이죠.

질문자: 그런데 그 즐거움이 커서 그렇게 다니는 사람이 있잖아요.

목사님: 당연하죠.

질문자: 그 맛이라도 있어서 살맛이 나는 사람이 있잖아요.

목사님: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주체에 대한 눈에 보이는 증거물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자기 대체물, 이 대체물은 남자들이 차 살 때 아주 애지중지 하죠. 여자들이 명품 가방 사는 것 이상으로 남자들이 차를 사게 되면 정말 신경 바짝 씁니다. 마찬가지고 교인이 헌금을 하게 되면 그 교회에 자기가 차 산 것처럼 교회에 그만큼 애정을 쏟게 돼 있어요. 그걸 목사들이 그 심리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서리집사에서 장로집사는 의도적으로 강제적으로 돈을 내라 합니다. 돈이 필요해서 돈 내라 하는 것도 있지만 일단 목돈 내면 어떤 경우라도 어지간한 경우라도 이 교회는 떠나지 않는다는 그런 심리적인 것을 이미 알고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집사에서 장로집사, 장로집사에서 장로 될 때 막대한 목돈을 냄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낸 교회 지분, 주식을 산 것처럼 여겨서 이제는 몸 바쳐서 이제는 두 번 다시 이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그렇게 만드는 전략을 씁니다. 떠나면 그동안 돈 낸 게 아까워서 십일조 낸 거 복리로 계산해서...ㅎ

 

그러니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그 말이 그 말 이예요. 뛰는 놈은 교인들이고 나는 놈은 목사라니까요. 사기꾼 위에 사기꾼 이예요. 어떤 책에 보니까 나는 놈 위에 또 있다고 합니다. 노는 놈이 있답니다.ㅎ

 

자, 그러면 사도가 성경을 보면서 아까 3가지 뽑아냈죠. 하나는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과 두 번째는 죄 사함, 죄 사함은 그냥 죄 사람이 아니고 이 사람이 예수님과 관련돼 있다는 것, 세 번째는 그렇게 설교하니까 쫓아냈다. 그만큼 예수님이 오셨던 이 세상은 어두운 세상 이예요. 말씀을 전하기 전까지는 이렇게 어두울 줄은 몰랐는데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고 십자가를 증거 하니까 쫓아냈다는 것은 그 뒤에 껍데기만 교회지 사실은 지옥 갈 사람들을 모집하는 여행사에요.

 

태국에 유명한 휴양지 있죠? 괌이나 여행지에 모집하듯이 지옥을 제대로 갈 수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는 데가 교회라 하면, 이런 이야기를 제가 지금 글로 다 적어서 11달에 한번 쓰려고 합니다. 이렇게 수고 안 해도 글을 써 놓으면 누가 그댈 녹취를 해주니까 하려고 예정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게 구약성경은 이 설교를 누구보고 합니까? 구약성경을 신봉하고 있는 유대인들 보고 하죠. 터키 그 지방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었어요. 그래서 그 유대인들 모아놓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디에 도사입니까? 구약에 도사고 말씀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보는데 사도는 거기서 죄 사함을, 구원의 말씀을 끄집어내는데 그들은 이 구약말씀 가운데서 끄집어내지를 못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것을 고린도후서 3장에서 사도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요. ‘너희들은 성경을 볼 때 문자적으로 해석하니까 이러한 십자가가 안 나오고 있더라.’ 그럼 나, 사도바울 본인은 영적으로 해석하니까 십자가가 나오는 거예요.

 

성경말씀을 영적으로 십자가로 해석을 하지 않으면 교회 부흥되기가 나옵니다. 교회 사랑하기, 이게 나와요. 빛과 소금역할 하기, 이런 게 나와요. 사람들에게 인기 얻어야 교회는 이 나라의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큰 일 할 수 있는 정신적인 구심점이 된다. 큰 교회 모토는 우리 교회에서 기도함으로써 남북통일 되고 이 나라가 좌파에 눌리지 않고 우파 정권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대전은 모르지만 서울에서는 그렇게 설교들을 하는 모양 이예요. 그래서 선거법에도 거리고 하는 모양 이예요. 누구 찍으라고.

 

그것은 뭐냐 하면 교회가 이 사회에 기여를 해야 되고 교회가 이 사회에 정신적인 구심적 역할을 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확실한 증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뛰는 놈,(평신도들, 놈이라 해서 죄송합니다만) 어지간한 교수, 박사해도 뛰는 놈이거든요. 이 사람들이 나는 놈 수법에 다 넘어가는 거예요. 무식한 목사보다 더 못한 거예요. 기껏 대학에서 교수라 해도 대학에서 영문학, 언어학 교수라 해도 성경 해석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 나물에 그 밥 이예요.

 

그걸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 뿌리 깊은 나물이라 하데요. 요새 연속극 뿌리 깊은 나무 하잖아요. 뿌리 깊은 나물이 다른 말로 하면 콩나물 아닙니까? 콩나물 비빔밥, 그거 뿌리가 안 깊어요. 지 딴아 교회 30년 다니고 어떻고, 어떻게 ‘한국 교회는 개혁돼야 된다. 비판해야 된다.’ 보면 뿌리 깊은 나물 이예요. 전부 다 육적인 해석, 유대인, 바리새인적인 사고방식 이예요. 손OO 교수, 다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지도자, 저희들 맘대로 지도자.

 

사도바울처럼 해석을 해야 그래야 영적해석이 되는 겁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석을 하면 그야말로 육적이고 문자적으로 해석한 사람이 대부분인데 뛰는 자들이 다 이런 자들인데 교회는 안 되죠. 그야말로 두 세 사람이 모이죠. 그럼 이런 말씀을 전하려면 전하는 목사가 어느 정도가 돼야 합니까? 두 세 사람이 있는 것도 감지덕지 할 정도로 더 큰 세계를 바라보면서 살 수 있는 목사만이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어야 돼요. ‘니 교회 몇 명이냐,’ 이렇게 수요일 날 그런 설교 했잖아요. 하나님 믿고 계산한다고, 하나님 믿고 일체 계산하지 않는 사람 돼야 복음을 전할 수 있어요. 만약에 하나님 믿고 ‘내가 하나님 복음 전하는데 교인은 몇 명 왔고 헌금은 얼마고, 자꾸 계산을 해대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은 여전히 문자적 해석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나중에는 점점 더 좌절감, 좌절감, 절망감에 빠져서 ’에라 내가 미쳤나, 내가 백날 복음 전해도 오지도 않고 때려 치워라, 씨, 먹히지도 않는 이야기를 왜 하나,‘ 이런다니까요.

 

예레미야는 계산하지 않는데 자꾸 예레미야 흉내는 내서 ‘복음 전하는 것이 뜻이다.’ 이렇게 나오는 사람들은 나중에는 자기가 자기 스스로한테 지쳐버려요. ‘아휴, 20년간 복음 전했는데 교인들 다 나가버리고 나만 남았다. 나중에는 본인이 자괴감에 빠져버려요. 놀랍게도 그 한계가 처음부터 있었는데 자기는 마치 영적 사람인 줄 알고 착각을 했었죠.

 

자, 그러면 사도바울은 같은 구약을 봐도 하나는 문자로 하나는 영적으로 해석을 했다. 이걸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영적으로 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아야 된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말씀을 줬다는 게 어떤 의미에서 나오는가, 17절에 보면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이렇게 돼 있죠? 구약을 볼 때 긍정적으로 구약에 있는 조상들을 좋게 보고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 이거 문자적 관점입니다. 왜 조상들을 긍정적으로 봐야 하느냐 하면, 조상들을 긍정적으로 봐야 지금의 그 조상의 후손들도 조상님만큼 경건해야 하는 근거 때문에 조상님도 살았듯이 우리도 살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우리에게 보장돼 있다고 그렇게 보는 겁니다.

 

조상님이 이렇게 경건했기 때문에 구원받듯이 지금 우리 현대인 이스라엘은 이처럼 경건하기 때문에 우리도 구원받는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반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조상들이 거의 경건치 않았다. 조상들은 오히려 그들이 소행은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봐주지 아니하면 늘 멸망과 위기 속에 놓여 있었다.’라고 역사를 긍정적으로 본 게 아니고 뭐로 봅니까? 부정적으로 평가를 내려버리죠. 이렇게 구약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모든 아브라함 후손들 전체를 다 제해버리고 그 중에 누구 하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저쪽을 발로 차 버리는 겁니다.

 

믿어야 될 것은 조상들의 언덕을 믿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이 의인이고 다른 사람은 그분 앞에서 다 조상이고 뭐고 다 죄인이라는 것을 사도바울은 언급하면서 설교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목사들이 설교할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 기철 목사, 손 양원 목사 훌륭하다.‘ 이런 소리 하면 안 되죠. 20년 전에 이 교회 세운 어느 돌아가신 장로님, 고 김 기백 장로님, 얼마나 훌륭한지, 이런 소리 하면 안 된다고요. 땅을 다 내시고 그 유산을 몽땅 다 하나님의 복음 전하라고 내놓으시고 얼마나 그 신앙을 본받아서, 이런 소리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이런 소리해야 돼요. 고 김 기백 장로는 땅을 냈지만 그것도 죕니다. 이런 소리해야 된다고요. 아마 부 교역자 그 사람은 그 다음 주부터 부 교역자 자리 잘립니다. 전혀 교회에 보탬이 안 된다고. 사도바울이 설교할 때, 이건 성령 받아서 설교한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설교 내용과 예수님의 설교 내용과 베드로 설교가 전부 다 유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한분만 의인이고 나머지는 죄 사함을 받아야 될 구원돼야 될 죄인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여기에 20절에 사무엘 나오죠.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사도바울이 사사를 주셨다고 말을 한 것은, 요즘 말로 하면 줘도 무슨 소용이 있었느냐 하는 겁니다. 원판이 시커먼데 인간의 원 심령이 영혼이 완전히 추잡스럽고 더러운데 아무리 사사를 주고 사무엘을 주고 뒤에 다윗을 줘요. 다윗을 왕으로 삼아준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이제는 예수님마저 주셨잖아요. 그러한 더러운 심보에 예수님까지 찾아왔다. 하지만 예수님을 어떻게 했다 말입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옛날 선지자 핍박하듯이 동일하게 핍박했다. 요게 복음입니다. 요게 신구약 설교하는 모델 이예요.

 

하나님이 약속을 해서 세례요한을 보내줬다. 하지만 27절을 보세요.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한번 보세요. 그들은 안식일마다 뭐를 외웠습니까? 성경 말씀 외웠죠. 그들은 외웠으니까 뭐를 자부합니까? ‘성경에 정통하고 성경 말씀을 제대로 외웠으니까 성경 말씀 잘 안다.’라고 했던 그들이 도리어 어떻게 했습니까? 선지자의 말씀을 성취하러 오신 그분을 정죄하여 어떻게 됐다? “선지자의 말을 응하게 했다.” 야! 요거 아주 교묘하죠. 마귀가 하나님의 전략에 말려든 거예요. 마귀와 그 종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잡힐 때 빌라도가 뭐라 그랬느냐 하면 ‘예수여, 나한테 잘 보이면 내가 당신 풀어줄게. 당신 보니 죄 없는 게 확실한데 내 말 들으면 풀어줄게.’ 하니까 예수님 말씀이 ‘니가 지금 나한테 풀어 줄 권세가 있다고 우기냐, 누가 지금 사태 파악을 못하는지 모르겠어. 지금이라도 하늘의 천사가 와서 풀어준다. 그런데 니가 지금 나를 잡아 넘긴 것은 니가 악한 역할로 내 일에 참여된 꼴이 됐다. 하나님이 니가 나쁜 짓해서 지옥 가라고 이 나쁜 짓에 니를 집어넣은 거야.’

 

그렇다면 처음부터 누가 승자입니까? 예수님이 애초부터 승리자였고 처음부터 누가 패배자였습니까? 빌라도는 처음부터 이미 지고 들어간 거예요. 게임 오버, 게임 끝나버렸어요. 우리가 성도가 이 땅에 대구 땅에 대전 땅에 살면서 이 점을 믿어야 됩니다. 이미 다 이루었다는 속에 게임 끝난 거예요. 성도는 어떻게 되든 승자입니다. 성도가 빌어먹든 말아먹든 노숙자든 어떤 경우라도 거지 나사로가 되는 경우라도 어떤 경우라도 그들은 게임 끝난 거예요.

 

지난 주 ‘거지 나사로’ 했거든요. 거지 나사로 주변 전류 안에 뭐가 칭칭 감겼다 했습니까? 아브라함의 언약, 약속이 감겨 있잖아요. 그러면 나사로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지금부터라도 함께 있고 부자는 백날 돈을 쌓아놓고 살아도 부자 곁에는 부자 자기밖에 없어요.

 

참, 요즘 모든 교육이 바로 너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교육으로 다 이미 전환되고 말았습니다. 카이스트도 마찬가지고, 모든 교육이 ‘니 일은 니가 알아서 해야지, 남이 안 도와준다. 너 밖에 없다.’ 몰라 아브라함의 언약, 예수님의 은혜가 칭칭 감겨있으면 그건 천만다행이고, 앞으로 잘한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니는 끝났다, 어떤 지경에 빠져도 이미 니는 승자, 세상을 초월한 사람이 돼 버렸어요.

 

그걸 지난 수요일 날 유리구슬 속에 있는 존재라 했죠. 손톱으로 후벼 파도 그 안에 못 들어가는 거예요. 훤히 보면서도 그 세계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아무리 노력해도. 사정해서 살살 빌어도 못 들어가요.

 

그래서 말씀이 응했다. ‘말씀을 응했다‘고 돼 있거든요. 그러면 사도바울이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 어느 안에 사는 사람입니까? 말씀 안에서 움직였던 사람 이예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말씀 밖에 있기 때문에 말씀 안의 세계를 뭐로 전환시키느냐 하면 이 대전바닥, 대구바닥, 서울바닥으로 그냥 말씀을 말씀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로 전환시켜 버렸습니다. 오늘날 목사들 같아요.

 

목사가 두 세 사람이 모여도 우리는 말씀 안에 있다고 자부심을 가지면 되는데 ‘저쪽 교회는 500명인데 우리는 333명입니다. 빨리 따라붙자.’ 이거는 말씀 안의 세계가 아니고 이 대전 바닥 속의 세계 아닙니까? 이건 장사하는 영업세계에요. 기업세계. 거기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성령을 통해서

말씀 세계가 돼 버리면 두 세 사람이 있어도 이미 그 자체가 게임 오버, 끝나버렸어요. 이미 구원 받았는데 여기 5천명이 있어도 말씀 세계에 못 들어오고 있는 거예요. 말씀 세계에 못 들어오고 있으니까 만날 노인들한테 복지를 베풀어서 동네 노인들 다 끌어 모아놓고 교회를 운영한다 말이죠. 필요하면 바자회 열어서 빛과 소금의 폼만 내서 노숙자 점심 주면서 뭔가 착한 일해서 인기 몰이하려고. 어디 이 동네 시의원 나올 일 있나. 정치적으로 국회의원 장악하려고, 배후에서 조정 하려고, 우리 교회는 표가 몇 표인줄 아느냐, 이런 식으로.

 

말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니까 못 들어왔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말씀 바닥에서 새삼스럽게 경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 말씀 안에서는 이미 경쟁이 끝나버렸는데, 모든 걸 다 이뤘는데, 저쪽에서는 이뤄볼까 싶어서, 어떻게 하면 이 바닥에서 승자되고 내가 다니는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더 크게 될까 시도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들은 이야긴데 대구에 어떤 교회는 헌금 경쟁을 하는데 어떤 아는 사람 친구는 가슴이 아프다고, 이번에 자기가 헌금 1등 되는 줄 알고 헌금을 냈는데 세상에 3등을 해서 뿔다구가 났데요. 그게 뛰는 놈 이예요. 나는 놈은 기분 좋아하고, 그 위에 노는 놈은 기분이 더 좋고.ㅎ 자존심, 그게 새삼스럽게 경쟁에 이겨보겠다는 거예요. 왜 그런 현상이 있느냐 하면 과거에 술 먹고 담배 피우고 하나님 몰랐던 그때 그 시절에 비해서 지금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받았다는 것을 남한테 과시하는 경쟁에 들어간 거예요. 일종의 도박이라. 김 장O이가 기부천사라 하죠. 기부하는 것도 도박입니다. 그거 한번 빠져버리면 못 헤어나요. 한국 기부는 재미없어요. 아프리카 가야 돼요. 김 O자처럼 아프리카 가서 오드리헵번처럼 죽어야 돼요. 이게 한번 착한일 하게 되면 자기 존재감이 달라져요. 지가 지한테 미쳐버려요. 주의해야 됩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 이예요. 간 떼 주고 신장 떼 주는 것도 그 쾌감이 보통 쾌감이 아닙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누구의 팬으로 사는 것, 변 진섭, 이 상우, 20년 동안 ‘오빠’ 하며 따라다니는 사람들, 일본에서는 배 용준, 장 근석, K파, 이게 종교 없는 사람들은 종교 대체물로. 일본은 종교가 없거든요. 그저 비는 것밖에 없거든요. 그거 대체물로 현세적인 자기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숭배해서 자기의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어떤 대상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여기는 이 근호 목사님 팬 아니에요? 예, 팬은 팬인데 돈이 안 되니까, 으하하하~ 모기들만 와요.ㅎ

 

그래서 여기 보면 29절에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죽였죠. 죽이니까 이 세상이 고요하게 된 거에요. 말씀 밖에서는 다 고요해요. 무덤이고 공동묘지고, 에스겔에 나오는 뼈만 있는 골짜기고, 조용한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려줬잖아요. 이게 바로 말씀에 응했던 말씀 세계의 핵심이죠.

 

그렇다면 묻습니다. 말씀 세계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십자가!! 왜냐 하면 말씀 세계와 이 대전 바닥의 접촉점은 오직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이 나와 함께 있을 경우에만 말씀 세계 속에 함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사람은 말씀에 응해서 구원된 사람의 한 사람에 포함이 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내 소원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된 말씀에 응해서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것도 말씀에 응한 것이고, 그뿐 아니고 예수 믿어야 될 사람이 믿게 되는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예정된 채로 믿게 되지, 말씀의 능력이 아니면 우리가 아무리 자진해서 손들고 나가도 구원 못 받습니다. 이게 바로 침례교 쪽에서 이야기하는 손들고 나와도 안 되고 미국의 남 침례하고 다른 거예요.

 

이 십자가까지는 주님이 하시고 나머지 손들고 나오는 것은 자유의지라고 이야기 하는데 제 말은 그건 잘못이라는 겁니다. 지금 사도가 증거 한 게 뭐냐 하면 사도는 이 말씀 바깥에 있으면서 ‘어떻게 구원해 봅시다. 이러면 잘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걸 도모하는 게 아니고 사도바울 자체가 말씀 속에 있으면서 ‘혹시 이 중에 말씀 속에 있는 사람 계세요?’ 하고 손들라고 그 이야기하기 위한 멘트를 날리는 거예요. 그게 교회 설교이어야 한다 이 말이죠. 노인들을 꼬이는 설교가 아니고 ‘ 이 가운데 혹시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 있습니까?’ 고거 확인 차 말씀을 증거 해야 돼요.

 

새삼스럽게 게임을, 누가 목회 잘하고 누가 사람들 끌어 모으나, 게임을 사도바울은 벌이지 않습니다. 그러는 자들과 레벨이 달라요. 36절 봅시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라고 돼 있죠? 그러면 다윗은 무엇이 대표자입니까? 모든 썩어짐의 대표자들이죠? 그러면 ‘사람은 죽으면 썩으면 그만이다.’라고 했을 때 ‘죽어도 썩어도 다시 부활된다.’ 가 초점이 아니고 이야기 잘 들어보세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삽니다.‘가 설교 초점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 죽은데서 삽니다.’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

 

내가 예수 믿으니까 난 살았다. 자기가 죽었다가 자기가 산 것이 초점이 아니고, 그게 설교의 초점이 아니고 내가 살았다가 핵심이 아니라 누가 살려주느냐가 핵심이 되는 거예요. 질문: 그런데 예수님의 영이 임하는 거하고 성령이 임하는 거하고 같은 거죠? 예, 같은 거죠. 왜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져야 성령이 오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이 왔다는 말은 일체 인간들은 자력으로 주님을 믿을 수도 없고 지가 손들고 나와서 쉽게 구원받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죠.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은 뭐라 합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지, 절대로 내 열심과 노력으로 몸부림쳐서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란 고백을 현실적으로 솔직하게 지가 느낀 대로 그걸 외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건 안면 바친다. 아는 사람이다. 저 사람 권세 있다. 내가 저 사람 아니면 저 사람이 쫓아낸다. 그런 말씀 밖의 속에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청종할 이유가 없어요.

 

다니엘 세 친구 보세요. 내가 저라면 풀무 불 들어가는 것은 당신들 자유지만 그렇게 내가 하나님이 날 살려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가 죽느냐, 내가 사느냐, 지금 그 문제는 이차적인 문제고 어쨌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이 그게 일차적으로 내가 증거 해야 될 문제입니다. 주께서 살려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절하지 않겠습니다. 하니까 집어넣었죠. ‘그래, 알았어, 그럼 그게 니 현실이라면 본대를 보여줄게,’ 그래서 불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하고 같이 춤추고 있었죠.

 

그러니 성경이 얼마나 신기합니까? 우리가 상식 밖의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잖아요. 상식 밖의 이야기를 언급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왜 자꾸 상식 밖의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하면, 물 위를 걸었다든지, 왜 하느냐 하면 그래야 이쪽의 상식 속에 사는 것이 상식이 아니고 그 자체가 죄라는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곧 우리보고 ‘니는 죄인이야.’라고 집중해서 다가오게 우리를 만들어 몰아가는 그 험악한 세상 속에 우리가 놓여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설교를 여기까지 해서 한번 정리해 보면 간단한 거죠. 인간이 있었다. 여기에 예수님 오셨다. 예수님 오심으로써 인간과 비교해 봤다. 그래서 인간은 뭐가 됐다? 의인이 아니요. 전부 다 죄인이고 그 죄인 되기 위해서 예수님은 사람들 몸에 의도적으로 죽임을 당하셔서 말씀이 응했다. 너희들은 처음부터 죄인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죽었는데 이 자체가 말씀 세계의 완성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 세계를 완성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더불어서 완성했기 때문에 우린 여기서 손쓸 수는 없어요. 그래서 결국 우리가 매일매일 삶은 막 살 수밖에 없어요. 이것이 우리한테 해당되는 겁니다. 어떻게 손쓸 수가 없잖아요. 성령 받았으면 성령 받은 대로 막 사시면 돼요. 그런데 ‘성령 받은 대로 막 산다‘ 가 이해 안 되는 사람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 하면 지가 절제해서 막 사는 세계에서 막 안사는 세계로 접근을 시도하고 이걸 도약을 시도하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성령 받아 막 산다는 말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간추려 이야기하면 뭘 못 받았다? 성령을 못 받은 게 돼요. 성령을 못 받은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막 산다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막 산다는 이야기를 안 해버리면 성령 안 받은 사람이 성령 받은 척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질문: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되는 거죠? 그렇죠. 그 이야기죠. 자유케 하죠. 우리가 사는 것은 막살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늘 자유롭게 만들죠. ‘너는 자유야, 자유야,’라는 소리가 늘 들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항상 남 이야기도 그렇고 우리 이야기도 마찬가진데 우리가 항상 성경 말씀 들을 때는 그러지만 돌아서면 상식의 세계로 넘어와 버립니다.

 

상식의 세계는 예수님이 빠져있는 세계거든요. 예수님이 빠져있으면 예수님 자리에 누가 오느냐 하면 지가 되고 싶은 것, 지가 안 가졌는데 이미 다 가진 자, 지가 되고 싶은 그 자리를 먼저 앞서서 그 자리를 접수 하고 있는 사람, 내가 희망 사항을 이미 실천에 옮기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이 와서 여기서 ‘나는 뭐고?’ 자꾸 계산하게 되죠. 이게 상식의 세계. 우리는 이렇게 수시로 돌아설 수밖에 없죠. 상식의 세계. 상식이 세계는 예수님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저 멀리 하늘 저편에 있죠. 하늘 저편에 ‘주님 주일날 봅시다.’ 이렇게 되죠.ㅎ

 

사단은 주님이 저 멀리 하나의 대상으로 훌쳐 버리죠. ‘니 일은 니가 알아서 해야 된다.’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니 아무도 안 도와준다.’ 이 말은 뭐냐, 열심히 하면 된다, 안 된다. 문제가 아니고 뭔 뜻이냐 하면 ‘니 인생이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각인시키는 겁니다. 늘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예수님보다 내가 중요해. 예수님보다 내가 소중해.’ 그러면서도 교회 와서는 노래 부르기는 뭐가 부릅니까?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런 거짓말!!!ㅎ 입에 침을 바르고 거짓말을...

 

그래서 우리가 설교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그냥 밑바닥으로 가도록 설교를 해야 돼요. 그냥 중간에 환상 속에 예수님을 만나 버리면 다시 주님께 오지 말고 ‘니 자리 가 있어.’ 니 자리 가서 나는 줄 창 나만 생각하는 그 자리 가 있으면 성령께서 오시게 돼 있어요. 성도에게만.

 

성경 말씀은 사도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오라하지 않고 ‘니 자리에, 멸망 받을 자리, 저주의 자리’에 우리를 보내는 겁니다. ‘자꾸 니 자리 떠나지 마, 니 자리 붕 떠있는 자리가 니 자리가 아니고 니밖에 모르는 자리가 니 자리야.’ 그리고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니 마음껏 상식대로 살고 그냥 니가 진짜 막 살고 ‘나는 나밖에 없어. 나만 최고야.’ 그걸 본대를 보이란 말 이예요. 그 자리에 갔을 때 우리를 죄인 중에 괴수로 만들 때 그게 말씀에 응한 말씀의 완성 상태예요. 아! 정말 내가 말씀에 비춰봐서 내가 내놓을 게 없구나, 나는 나밖에 모르는구나,‘ 느껴지게 하는 능력이 주님이 같이 구원돼 있는 게임 오버된 완료된 주님과 함께 있는 구원된 상태를 두고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항상 붕붕 뜨죠. 갑자기 어깨에 어릴 때 풍선 날리면서 자기가 붕붕 뜨죠.

 

그냥 시장바닥에서 쪼그려 앉아서 떡 볶기 먹을 때는 자기가 지 자린 줄 알지만 갑자기 파티 참석해서 드레스 입고 가면 갑자기 자기가 고관귀족이 된 것처럼 붕붕 뜬다니까요. 시장바닥에 전포에 앉아서 떡 볶기 먹을 때가 차라리 낫지, 붕~ 떠서, 그래서 성경에서 ‘잔치 집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 그게 니 자리다. 그래서 초상집에 갈 때는 까만 양복을 입고 갈 게 아니고 평상복보다 더 집에서 입던 파자마 입고 가든지, 진짜 낮게 가는 게 옳은데, 사회 관념상 안 되죠. 다른 사람에 대한 예의도 있으니까. 주관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은 썩어졌는데, 다윗이 뭘 대표해요? ‘모든 사람은 썩었다’를 대표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뭐냐, ‘제발 다윗을 믿어라’ 이 말 이예요. 재밌는 사실은 ‘다윗이 썩었잖아.’ 썩은 다윗을 믿으라 이 말이죠. 너희 유대인들은 그 당시 ‘다윗은 위대하다. 다윗 같은 왕이 올 것이다.’ 자꾸 다윗을 높였는데 다윗을 완전히 풍선 바람을 다 빼버렸어요. 썩어빠진, 썩어문드러진 다윗, 문둥병 같은 다윗, 그 다윗을 믿자는 거예요. 그렇게 훌륭해도 썩었잖아. 봐라, 썩었잖아. 니 썩을 놈 믿었잖아. 썩은 주 기철 믿고 썩은 손 양원 믿고, 썩은 죽은 고김 기백 장로 믿고, 썩었잖아. 돈 헌금 내고 죽어 썩어버렸는데요 뭐. 김 기백이라는 이름은 그냥 내가 지어낸 거예요.

 

39절 봅시다.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그러니까 아예 사도바울이 설교하면서 전제가 뭐입니까? 모세 율법에서 어떤 너희가 존경하는 조상도 율법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 못 받았다? 못 받았다. 심지어 다윗까지도 썩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렇게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45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그러면 영생 얻을 자냐. 아니냐. 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판정을 내리셨습니까? 내가 성령 받은 사도를 보내서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 그 십자가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영생 받지 못할 자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 대전바닥에서 대구바닥에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성도님들은 딴 걱정 말고 이, 십자가 복음 전하시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 이예요. 하나님의 영광이라 해서 몸 바친다 해서 모든 걸 다 끄집어내서 이러는 게 아니고 집도 치우고 기도원에 기도하는 게 아니고 평소에 막 사시면서 성령 안에서 막 사시면서 십자가 이야기하면 여러분 주위에서 영생 받아야 될 사람과 기어이 받지 말아야 될 사람이 구분됩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