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목사
110721 사도행전 27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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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대전110721a행12장-(베드로 투옥)-27강-(이 근호 목사) 대전강의7월21일 사도행전 27강
사도행전 12장 봅시다. 사도행전 내용이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구나,’하는 여러 가지 변화를 이야기하죠. 지금 지상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습니다. 방금 제가 변화란 이야기를 했습니다. 변화라 하는 것은 하나의 하늘나라의 고정된 진리가 이 땅에 왔을 때는 변화로 이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변화를 통해서 어디를 추적해야 됩니까? 예수님의 고정된 진리를 파악해야 되겠죠. 진리를 파악하고 그리고 뭘 아느냐 하면 ‘아, 이런 고정된 진리가 역사라는 바탕에서는 이러, 이러한 류의 흔적과 변화를 남기는구나,’ 이걸 알게 되면 우리가 지금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날 때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진리와 변화 사이에 ?노선과 같은 노선인가를 우리가 파악할 수 있겠죠. 그래서 사도행전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요. 제가 변화란 말을 두세 번 쓰는 이유가 사람 자체가 매일 다르고 사람 사는 세상이 늘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끼리 모아서 고정된 진리를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 밑의 사람들이 각각 쥐고 있는 게 있어요. 예를 들면 밧줄을 쥐고 있다. 어떤 사람은 확인증, 세례 증을 쥐고 있다. 이런 걸 쥐고 있다면 고정된 사도행전에 나오는 진리, 앞으로 나오는 이야기 할 건데요. 고정된 진리가 이 땅에 왔을 때, 밧줄 쥐라. 세례 증 쥐라, 모태 신앙‘ 이런 거 쥐라 이야기 했습니까? 아니면 ‘특정교회 다니면 구원된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아니죠. 그러면 이게 뭐냐 하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는 노끈, 밧줄을 쥐고 있어서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이 사람들의 고정된 원리는 뭐냐 하면 노끈, 밧줄이 되죠.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이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를 주는 것은 뭐냐 하면, 주 예수를 믿었다 말이죠. 주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실제로 밧줄 같으면 실제로 물질적으로 실제로 손에 쥘 수 있고 교회서 받은 세례 증 같으면 액자에 걸어놓으면 그 자리에 늘 있잖아요. 그런데 주 예수 이걸 믿는 것은 어떻게 쥐란 말입니까? 쥘 수가 없죠.
이걸 유치원 애들한테 하는 것처럼 한번 해 봅시다. ‘자, 천국에 가려면 우리가 뭐를 쥐어야 합니까?’ 물어 볼 때, 그 애들이 ‘교회 다니면 돼요.’ 그러면 ‘그건 아니고,’ ‘주일 학교 참석하면 돼요.’ ‘그것도 아니고.’ ‘모태 유아세례 받으면 돼요.’ ‘그것도 아니고,’
그럼 주님이 살아있고 역사 속에 연결이 뭐냐, 정기적으로 성경 공부하는 이것도 아니고, 전도하는 이것도 아니고, 헌금도 아니고 예배 참석도 물론 아니고, 그러면 우리가 쥐어서 구원 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말라기 끝에 보면 그때 마지막 때에 엘리야가 와서 복음을 전하면, 여호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돌리는 거죠. 그러면 한번 적어 봅시다. 말라기에서 예언 된 게 뭐냐, ‘마음 돌림’입니다. 구약 성경 마지막 구절에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마음을 돌리는 겁니다.
그럼 여기 만약에 어느 노처녀가 있다고 칩시다. 그 노처녀가 만약에 영화배우 배용준이를 좋아한다고 합시다. 돈 되? 몸 되지, 얼굴 되지, 다 되잖아요. 그 노처녀가 배용준이를 좋아한다 말이죠. 그럼 배용준이가 노처녀한테 마음이 돌아옵니까? 지가 배용준이하고 그러고 싶은 것은 지 마음이고, ‘배용준씨, 저하고 식사 같이 할까요?’ 하면 식사 같이 해 줍니까? 마음이 안 돌아오죠.
그래서 구원이라는 게 이게 어렵고 기적이 되는 거예요. 구원이라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로, 그 사랑을 받는 우리가 우리 마음이 이제 나한테 있지 않고 주님에게로, 그 마음이 돌아가는 거예요. 어디 밧줄 쥐고 어디 참선하고 어디 성경공부 하는 이게 아니고 실제로 아버지의 마음이 ‘야, 너 탕자지? 내가 사랑하기로 했어.’ 그런 마음을 실제로 받아야 돼요. 이건 저는 못 주고 여러분도 못 주는 겁니다. 실제로 마음 주는 현상이 사도행전에 일어나니까 이걸 어떻게 흉내 낸다고 같을 수가 있습니까?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에서 멸망한다고 삼일 동안에 선포했습니다. 요나가 자기가 선포하면 반드시 내가 선포한 그 결과로 그들이 회개할 거라고 예상했어요? 예상 안 했어요? 예상 안 했기 때문에 회개하니까 삐졌잖아요. 그냥 지는 지 할 일 했을 뿐 이예요. 그런데 회개 했잖아요. 그러면 그건 요나 본인 마음이 아니죠.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 마음을 돌리겠다.’ 하면 하나님 하는 일을 누가 돌릴 수가 없습니다. 이건 말릴 수가 없어요.
외양간에 소가 없고, 이번에 구제역 있잖아요. 하박국 아닙니까? 외양간에 소가 없고, 무화나 나무에 열매가 없고,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어도, 나는 구원의 여호와로 감사하리라.‘ 이 마음이 어떻게 성경공부 한다고, 어디 교회에서 수련회에 돈 다 대준다고 어떻게 그 마음이 생깁니까? 그 마음은 순전히 누구만 줄 수 있는 거예요? 이것은 주님이 스스로 주님이 주고 싶은 사람에게 스스로 주는 변화가 사도행전이 된다 이 말이죠.
사도행전을 천 독, 만 독해도 소용없어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돼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가 되려면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우리가 받았을 경우에만 사도행전 이야기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 Our Story, ‘진짜 그 당시 사람들은 변하던데 나도 이렇게 변화가 왔구나, 와우~ 내가 사랑받다니.‘ 그럴 때 사도행전이 고정된 진리가 이해되니까 사도행전 전체가 이해가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의 말씀 여러분 혹시 기억나?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은 저주 받는 것이 기정사실인데 그 중에 희한한 변화가 있다. 뭐냐, 저주 받아야 마땅한데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등장해 버리니까 거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이런 말이 되는 거예요. 저주를 안 받는데 주를 사랑 안 해서 저주를 받는 게 아니고 원래 저주 받게 돼 있는데 그 중에 희한하게도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데 고정된 진리에서 나온 변화가 뭐냐 하면 평소에는 자기를 사랑했는데 그때부터 주님을 사랑했으면 그 사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이, 니 누구 사랑해?’ ‘주님 사랑하게 되었어요. 주님 사랑 받아서. 그런데 알려 줄게.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성도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그냥 저주 받는 가운데 있는 거예요. 피아노 레슨을 하든지 바이올린 레슨을 하든지 공을 차든 야구를 하든지 이 땅에서는 상관없어요. 의사가 되든지 판사가 되든지 국회의원이 되든지 다 저주예요. 대전 시장이 되든지 목사가 되든지, 장로가 되든지 그런 저주 바탕에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할 때 그것을 굉장히 반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주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아이, 살기 바쁜데 언제 주를 사랑 안했다고 그래 우리를 저주 하나‘ 이래 나온다면 그 자체가 전혀 주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교회서 목사가 교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바로 이걸 전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교회 나온다고 해서 그게 주의사랑이 아니고, 정말 주의 사랑은 교회 사랑이 아니고, 지 교회사랑은 지 교회에 돈 냈으니까 그 교회 사랑하는 거지,ㅎ 자기를 내치는 교회를 사랑합니까? 사랑 안 하죠. 결국은 인간은 자기를 사랑해요. 자기가 자기를 사랑했는데 그것을 염두에 두고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했는데 이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이건 나무뿌리 뽑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죠. 자기 믿음을 자기가 죄라고 여기니까, 자기가 예수 믿는 것을 죄라고 여기니까 자기가 예수 믿으면서도 구원 못 받거든요. 주께서 믿게 할 때만 구원 받는다. 이래 되기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자기가 예수 믿으려고 애를 썼겠습니까? 예수 안 믿으면서도 믿는 척을 하며, ’이게 舅습甄? 믿음이다.‘ 자기 신앙이 얼마나 좋습니까? 진짜 주님의 사랑이 와 버릴 때는 ’주여, 주를 믿으니 이것도 죄군요.‘라고 회개하게 되고 그 회개하는 즐거움은 이거는 수천억을 줘도 그 즐거움을 바꿀 수 없습니다. 왜, 진짜로 주님을 만났으니까. 진짜로!!!
주님은 꼭 유령 같아요. 망자가 아니고, 망자와 유령의 차이점은요? 망자는 잊혀 진 과거 인물이 망자고, 잊혀 진 사람이고, 유령은 눈에 안 보이지만 활개치고 있잖아요. 살아 있잖아요. 이게 사도행전 아닙니까? 예수님은 살아 계셔요. 성전의 앉은뱅이를 낫게 했어요. 보이지 않는 분이 육으로 있는 것처럼 활개치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증인들이 사도행전에서는 그걸 ‘사도’라 하고 사도행전 12장에서는 그 사도 중에 한 사람인 야고보가 살해당합니다. 한번 봅시다.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이래 돼 있죠? 마태복음 10장 2절 잠시 봅시다.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 여기에 야고보 나오죠. 그런데 여기 야고보 또 나와요.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야고보가 요한하고 형제지만, 야고보가 형인 느낌이 들죠? 이름이 먼저 나왔으니까, 제 생각인가, 그건 확실히 모르겠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나오죠. 야고보가 또 나와요. 예수님의 형제, 요셉과 마리아의 사이에서 태어난 야고보가 있습니다.
여기 12장에서 죽은 야고보가 누구냐 하면 이름이 나와 있어요. 요한의 형제 야고보라 돼 있어요. 열두 사도 중에 세 명의 야고보 중에서 한 명이 죽었고 야보고서에 나오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라고 보통 그렇게 알고 있는데 정확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알고 있어요. 여기 12장에서 야고보가 죽었잖아요. 오늘날 같으면 복음을 아는 분이 죽었다 이렇게 보면 되거든요. 복음을 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봤던, 사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예요. 유령이 있다는, 지금 주님도 안 계시고 살아 있다고.
부활은 뭔 뜻입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거와 똑같이 엄연히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거예요. 자꾸 잃어버린 망자, 과거에 살았다, 살았었다.‘ 이렇게 과거로 하지 말고, 현재 우리가 매일같이 내가 살아 있는 것 이상으로 살아계신 분으로 본 분이 그것이 사도예요.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니까, 그러니 이게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도 아니고 훈련소, 학원에서 배워서 되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우리 같으면 그런 분들이 오래 오래 살아서 복음 전파하면 복음은 많이 전파되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천국 갈 수 있다는 그런 계산이 서는데 毬ご途꼈?어떻게 합니까? 그 야고보를 죽이잖아요. 그리고 죽이는 취지가 야고보에게 해당되는 게 아니고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해당될 수가 있어요. ’복음 알아? 그래, 죽여줄게.‘ 이럴 수가 있다 이 말이죠. ’아닙니다. 나는 복음을 알기 때문에 더 오래 살아야 되는데.‘라고 할 수가 있는 거예요.
자, 한번 물어봅시다. 왜 하나님은 야고보를 죽이십니까? 그렇게 쓸모가 있는 분인데, 제자 하나 공국 사관학교 사관생도 하나 키우는 것도 수억 든다는데 예수님 사도 하나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데 왜 죽이십니까? 요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거기 나와요. ‘15:40성령의 중심은 정결한 책‘에 보면 나오는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수님의 일생의 스케줄‘을 요걸 복사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일생이 뭡니까? 복음 전하다가 죽고 사흘 만에 부활, 이렇게 되죠. 그 모든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에 있고, 그 십자가 복음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장, 모든 엑기스와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야고보를 계속 살려서 복음 전하는 방식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고 야고보를 죽임으로써 그것을 누가 허락했다? 유령처럼 살아계신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걸 허용하신 거예요. 그럼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뉘앙스를 주겠습니까? ‘아! 이 세상이 예수님을 죽인 그 세상과 같은 질의 세상이 아직도 여전하구나.’ 라는 것을 사람들이 초대교회 때 느끼게 되겠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세상이 전혀 달라진 게 없구나.’ 예, 전혀 달라진 게 없어요. 예수님께 현실을 바꿔달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잘못 이예요. 나가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그걸 노리는 거예요. 예수 믿고 난 뒤에 형편이 나아지길 원하는 겁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전혀 달라진 게 없어요.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전혀 안 믿으면서 믿는다고 하는 그런 현상이 계속되는 겁니다. 짜증날 정도로. 잔뜩 부풀은 기대를 갖고 있는데 그 기대가 완전히 묵사발 되는 그 아픔, 뭔가 예수 믿고 난 뒤에 내가 스타가 될 수 있는 그런 조짐과 그런 징조가 보여야 되는데 전혀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를 괴롭히는 사람은 가다가 객사 하든지 독수리에 물리든지 개한테 물리든지 해야 되는데 더 잘되고 오히려 물리지 않고 더 번성해요. 그래서 시편 73편에 나오죠. ‘내가 거의 미끄러질 뻔하였다. 내가 악인이 너무 잘 되고 세상에 죽을 때도 고통도 아픔도 없어요. 죽을 때도 고난이 없이 죽으니까, 얼굴도 살결이 윤기가 흐르고 기름기가 촉촉하고 피부도 좋고 자녀고 뭐고 다 만사형통이라. 욥의 친구들 같아요. 얼마나 잘 되는지 몰라요. 욥만 죽었다 살았지 나머지는 너무 편해요. 그래서 미끄러질 뻔 한 거예요. 미끄러지지는 歌?
아! 다른 관점을 예수 믿는다는 것이 나의 기준 관점에서 내가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봤을 때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는 그 현상 자체를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 뭣 때문에 주를 사랑하지 않는 걸 다 보게 하는 겁니다. 자식 잘 되고 돈 많은데 뭘 미쳤다고 예수 십자가 죽음을 사랑합니까? 안 사랑하지, ‘아~! 저거구나, 그래 지옥 갈 때까지만 부자처럼 실컷 맛있는 것 많이 먹고 나중에 지옥 갈 때는 다~~ 버리고 영원한 무서운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영혼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영원히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 주님께서는 아주 뭐 진짜 다 아신다는 듯이 이야기하시잖아요. 사실은 다 알지만, 마치 지옥을 친히 만든 분처럼. 만든 분처럼 이 아니고 사실은 예수님이 만드셨죠. 하지만 우리에게는 만든 것처럼 하는 말이 더 시원한 말.
내가 도달할 끝 지점에 가 계신 것처럼, 사실은 미리 가 계시지만, 넓은 길로 가지 말고 부탁하노니 제발 좁은 길로 가거라. 그게 생명의 길이 닿아있는 길이 따로 있는데, 왜 자꾸 넓은 길로 가는가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지고 보고 싶은 것은 이미 번지 수를 엉뚱한 길로 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안 보이는 곳으로 자꾸 기어들어가요.
작은 교회 다니면서 주님과 동행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큰 교회 가면 사람만 보이고 목사만 보이고 프로그램만 보이고 주님이 안 보이는 거예요. 얼마나 이 세상이 위험한지 아시겠죠? 바로 야고보와 같은 경우에는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죽었습니다. 왜 죽었죠? 예수님 복음 때문에 죽은 거예요. 그걸 야고보가 잘못 했다고 하면 안 돼요. 이걸 야고보?죽었을 때에, 예를 들어서 십자가 뗌뼁?우리교회 이상규 집사님 돌아가셨다, 소식 들으면 ‘아! 댓글 너무 올리다 죽었구나. 벌 받았구나.’ 얼마든지 외부에서 할 수 있잖아요. 그런 오해를 받을 수 있잖아요. 듣는 이상규 집사님은 기분 안 나쁜데, 특히 이상규 집사님 부인되시는 김 집사님 다음 주일에 교회 안 나오는지 몰라. 하~~ 내 남편 어때서, 하필 내 남편을....ㅎ
보세요. 야고보는 되는데, 내 남편 내 자식은 안 된다는 거예요. 사도행전이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야고보는 죽었고, ‘참, 하나님께서 쓰시다가 죽는구나.’라고 쉽게 말을 하는데, ‘함, 니 한번 죽어볼래?’ ‘안 돼요. 전 야고보 아닙니다. 믿음 없습니다. 저는 아직 사도 아니거든요.’ 하면서 자꾸 내빼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사도행전에서 남의 이야기가 돼요.
야고보는 죽었고, 그 다음에 누가 죽느냐 하면 베드로가 죽죠. 아니 베드로는 살았잖아요. 아니에요. 베드로는 지가 감옥소에서 나온다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잡힐 때는 베드로는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죽을 줄 알고 편안히 잠자는 거예요. 이것이 사도의 부활의 신앙입니다. 살려 달라고 ‘부활을 믿으니까 살려주세요.’라는 것이 그런 흥정이 필요치 않아요.
제가 어제 수요 설교하면서 강도 이야기 했잖아요. 제가 찬송가 가사 부를 때 찬송가 가사에 엉뚱한 .., ‘어떤 강도는 예수 믿어서,’ 그게 문제가 아니고 왜 한쪽 강도는 안 믿었느냐, 하는 문제예요. 왜 한쪽 강도는 왜 안 믿었습니까? 평소에 내가 자기를 살려왔던 방식을 왜 예수 당신은 팽개치지 못하냐 말이죠. 그러니까 큰 교회 옆에 있는 시장 바닥에 너무 살기 힘들어서, 만날 비오고 해서 장사가 안 돼서 어릴 때 주일학교 때 빵 얻어먹은 것 생각나서 길 가다가 교회 와서 ‘주여, 내가 이 장사해서 애들 세 명 키운다고 고생하는데 왜 주님이 안도와 주십니까?’ 하는 것은 평소에 자기가 교회 다니면서 자기가 살던 방식 있잖아요. ‘돈 있어야 산다. 돈 없으면 죽는다.’ 그런 방식 그대로 누구한테 삿대질 하는 겁니까? ‘예수여, 내가 뒤 늦게라도 교회 왔잖아요. 빨리 내가 내 사는 방식대로 나를 살려 달라’고 할 때 그것이 바로 지옥 가는 주님을 조롱할 수밖에 없는 강도와 똑같은 거예요.
그럴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돈 다발 들고 ‘그래, 이거 원했나?’ 그러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져 버려요. 십자가를 진다니까요.
도마가 문 닫혔을 때에 예수님 오셨을 때에 도마가 없었거든요. 뒤 늦게 와서 ‘예수님 부활했다. 하니까 도마가 ’나 안 믿는다. 세상에 무슨? 니가 인간인가, 무슨 그런 거짓말을 하느냐,‘ ’진짜다, 나도 못 믿는데 예수님이 오셨다.‘ ’아이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하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잖아요. 도마가 ’나는 보지 않고는 믿지 않는다.’라고 할 때에 도마가 이랬습니까? ‘ 이제 보니까 믿어지네.’ 이랬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주여, 나의 하나님이여.‘ 했죠.
보고야 믿겠다는 자기의 믿음의 과거의 자기 나름대로의 공식, 원칙, 법칙이 막상 주님을 립ご歐?그게 다 옛날 지가 죄악 된 자기에게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는 자기 원칙에 불과한 거예요. 그냥 만나니까 ‘주시요, 그리스도시요.’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돼요. 내 죄 대신 돌아가신 희생을 보니까 창 자국, 못 자국 보니까 그냥 ‘주여, 하나님이지, 무슨 ’이제야 보니까 믿어지네요.‘ 이런 소리 안 나옵니다. 꼭 예수를 만나본 인간들이 ’나 은혜 받고 기적 받고 난 뒤에 예수 믿었다‘고 꼭 사기를 치고 있어요.
진짜 주님 만나면, ‘주여, 보고 믿는다는 자체가 죄고 이 암 낫게 해주시면 예수 잘 믿겠습니다.’ 할 때 ‘암 낫게 해달라고 요청했던 그 자체가 십자가 앞에서 더럽기 짝이 없는 악마의 속성이었습니다.‘ 죄라고 자인하게 됩니다.
야고보가 죽은 것은 예수님의 성령이 있을 때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복음 전하고 죽으신 그것을 재현하죠. 십자가 부활까지. 야고보가 시범적으로 먼저 부름을 받고 그 다음에 베드로가 부름을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야고보나 베드로에 있어서 성령 받으면 이게 농담이 아닙니다. 진짜 성령 받아보니까 진짜 주와 함께 있습니다. 진짜 주와 함께 있으니까 자기가 복음 전하다가 죽는 것이 이게 보통 천사도 부러워할 놀라운 신분, 이건 보통 직책이 아닙求? 감사원장, 대통령, 이건 유도 아니에요. 이건 하늘나라, 땅, 천국, 지옥, 모든 이에게 부러워할 만한 놀라운 직책 이예요. 천사도 부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요. 고린도전서에 나오잖아요. 우리가 성도라는 게 천사도 부러워 할 직분을 받았다고 나오잖아요. 너무나 귀한 직분, 주와 함께 있으니까.
그 베드로 발 앞에 헌금 바치다 죽은 사람 있죠? 아나니아와 삽비라. 그거 보세요. 그걸 오늘날 사도행전 성경 구절 말고 오늘날 교회 버전으로 해석해 봅시다. 베드로 앞에서, 5藥灌?도사였다. 왜, 자기 소유를 저희끼리 숨겼는데 베드로는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신기생뎐 드라마에 레이저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 이야기해서 욕 얻어먹었는데,ㅎ 베드로에서 레이저가 나와서 한 것 같으면 그래서 두 부부가 하루아침에 다 죽었죠. 그렇다면 그 레이저가 아까워서라도 그 놀라운 투시력이 아까워서 베드로를 일찍 죽일 이유가 없죠. 그런데 베드로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잡혀 있잖아요. ‘주여, 내 눈에서 레이저 나오는데 이렇게 잡혀 있으면 안 되는데요. 야고보는 죽어도 모르는데요. 나는 야고보보다 더 센, 야고보는 나보다 더 하수고 나는 제자 중에 수제자인데 나를 죽이면 안 되죠. 안 죽일 거죠? 안 죽일 거죠?’ 이렇게 생각 했습니까?
그러니까 이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속여도 이게 자기의 실력이나 자기의 능력이 아닌 다른 능력에 의해 그냥 쓰임 받는 것 뿐 이예요. 만약에 강아지가 주인이 바뀌어서 새로운 낯선 주인이 오면 처음에는 낯설어할 거예요. 그런데 며칠 안 가서 밥 잘 주고 하면 좋다고 할 거예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형 같아요. 가락 교회 가니까 김 중우 집사님이 ‘목사님, 인간은 아바타죠?’ 자기 속에 딴 게 들어있다 말이죠. 주인이 조정하는 대로 주정당하는 거예요.
지금 야고보와 베드로는 성령이 주인 이예요. 주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오잖아요. “누구든지 복음을 위해 고난 받거든 기뻐하라.” 참아라가 아니라 아주 기뻐하라. 성령이 너희 머리위에 임했다는 증거라는 거예요. 달리 이야기하면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누구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가신 그 코스를 달려갈 때 오히려 그걸 알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라 말이죠. 아무나 주어지는 코스가 아니란 말이죠. 특별한 사람에게 가는 천국 가기 위한 코스인데 그 코스를 사도들이 마다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부활의 영을 받지 않고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바로 소위 신학자들, 목사들, 이 사람들은 교인들에게 어떤 위해주는 설교를 하다 보니까 사도행전이 이렇게 나오면, ‘베드로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용기내면 이깁니다.’ 이따위 소리를 하고 있어요. 무슨 베드로가 용기를 내서 이겼어요? 용기 낼 것 같으면 자기 신념訣? 무슨 믿음 이예요? 그게 무슨 성령입니까? 그런 순교자라 하는 것은 이슬람교에 많아요. 9.11테러할 때 얼마나 순교했습니까? 불교도 순교자 많고 각종 종교마다 순교자 많고 종교 없더라도 안중근 의사 같은 경우는 무슨 의사인지 모르지만 나라에 충성했잖아요. 어떤 사람은 윤봉길 의사도 변또(도시락폭탄)를 던져서 순교했잖아요.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보면 혹 선인을 위해서 죽는 자가 있거니와 죄인을 위해서 죽는 자가 누가 있느냐 말이죠. 자기에게 가해한 사람을 위해 대신 목숨을 던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 밖에 누가 있습니까? 주님 밖에 없어요. 그게 우리에게 찾아온 사랑이라는 겁니다. ‘나 아니면 지옥 가야 돼,’ 란 뜻 이예요. 오죽 했으면 지난주일 날 ‘아니, 천국 갈 거야? 말 거야?’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럴 소리 했겠어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주님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지, 교회 나온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니잖아요. 목사가 돼서 목회하려고 목사하면 안 돼요. 신앙인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말씀을 들어야지 교회가 좋다고 이러면 안 된다 말이죠. 목사 할 일이 뭡니까?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 지 교회 부흥을 위한 복음을 전하면 되요? 안되죠.
이제 베드로 죽을 차롑니다. 6절에 보세요.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잠을 잤다 이 말이죠.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체포당했을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겁을 냈으면 예수님의 시신까지 파수꾼을 세워 지키겠습니까?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 있고 그리고 자기 몸은 어땠습니까? 두 쇠사슬에 탓늑? 쇠사슬에 매였다는 말은 묶여있다는 말 아닙니까? 드라마의 뒷부분을 모른다고 칩시다. 그리고 베드로란 이름을 지워버리고 예를 들어서 아무 이름, 김 연철이라 합시다. 김 연철이란 분이 복음을 전하다가 쇠사슬에 잡혔다. 그리고 외부에 못 빠져 나가게 군사로 지키고 자기편들이 구출도 못하도록 했다. 김 연철이란 사람을 그렇게 했다고 할 때 이건 백이면 백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김 연철은 갔네. 야고보 죽인 자들이 야고보는 하수고 수제자는 베드로니까 곧 작살나겠네.’ 모든 사람이 포기할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 바칠 때 이삭을 포기했죠. 주님은 언제 등장하느냐 하면 내가 내 방식으로 나를 살리려고 한 것을 포기할 때 그때 주님의 솜씨가 비로소 보입니다. 남편이 아내 사랑을 포기할 때, 비로소 남편은 아내가 보이죠. 왜냐하면 그냥 내가 사랑해버리면 반드시 대가를 원해요. ‘내가 이만큼 사랑해 줬으니까 너도 나만큼 사랑해야 돼.‘라는 대사를 요구하는데 ’나는 도저히 당신 사랑할 수 없는 남자야.‘라고 포기했을 때 그 모습이 온유와 화평 자비와 양선 그 모습이죠. 가끔 그런 모습 보이시죠?ㅎ
그래서 야고보에 이러셨잖아요. ‘제발 주님 앞에서 마음을 낮춰라. 마음을 낮추면 그때 하나님께서 너를 높이신다.’ 높이는 것을 기대해서 마음 낮추는 것은 낮추는 게 아니고 이건 하나의 굴리는 수가 될 수 있어요. 한번 맞아야 돼요.ㅎ 높아지려고 마음 낮추는 것까지 시도하는 거예요.
베드로가 이처럼 본의 아니게 살아있는 예수님처럼 그렇게 돼 버렸어요. 죽기를 기다리는. 그 다음 이야기는 베드로도 쓸 수가 없고요. 베드로를 기다리는 사람도 쓸 수가 없어요. 그 다음 사건 전개는 순전히 누구한테 일임된 사실이죠? 순전히 예수님에게만 일임한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 부활 안 했다면, 예수님 죽고 그 시체도 없어졌다면 시체 자체가 그대로 썩었다면, 그러면 예수님 부활했다는 것은 구라고 거짓말이며 지어낸 말이며 실제로는 예수님 전혀 부활한 적이 없고 그냥 외치다가 권력에 매어 그냥 죽고 끝났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베드로만 용 썼지요. 부활 되지도 않은 자를 부활 됐다고 사기 쳤으니까 이건 죽어 마땅하죠.
이것은 스데반 집사가 이렇게 외칠 때에 스데반 집사가 죽어 마땅하다고 여긴 자가 누군지 알아요? 바로 나중에 사도바울이 된 사울 아닙니까? 혹독하게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우리는 부정하는 경험이 있어야 돼요. 혹독하게!! ‘예수 살아있으면 손에 장을 지을게. 이순신 장군도 죽었고 강감찬이도 죽었는데 예수 지가 뭔데 살아있어? 예수 살아있으면 내가 손에 장을 지을게’ 라는 혹독한 주님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제가 알기로는 거의 한국교회 모든 목사가 예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데 왜 목사 하느냐? 예수의 삶입니다. 십자가 정신, 요즘도 유행했죠. 인간의 갖고 있는 선한양심에 호소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롤 모델 삼아서 예수님처럼 삽시다. 그거 가지고 밥 먹고 살아요. 예수님처럼 사시면 하나님께서 복 주십니다. 다단계도 이런 다단계 없습니다. 세상에 그 다단계, 그동안 속아왔습니다. 노인네도 아니고 노인네한테 정력제 파는 거와 똑같아요. 비아그라 캑?거와 비슷하죠. 그것이 영업 방법 이예요. 전혀 믿지 않아요. 안 믿습니다.
믿을 것 같으면 만날 살아계신 주님하고 이바구하면서 ‘나올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주님!’ 만날 이 소리밖에 안 해요. 주님을 안 믿기 때문에 내 행함의 의미를 자기 존재를 찾는 거예요. 누구나 스물 네 시간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주의 성령께서 그때그때마다, 만날 베드로가 감옥에 들어가는 건 아니잖아요. 마찬가지예요. 이미 영이 함께 있기 때문에 불쑥불쑥 그러한 십자가 은혜가 주어지는 거예요. 이미 덮어 씌었기 때문에, 이미 성령이 덮어 씌었기 때문에 2초 3초 나오는 거예요.
그때 6절에서 베드로는 이제 마감했습니다. 죽은 건데, 7절에 홀연히 베드로의 교인들이 나타났습니까? 이게 문제예요. 기독교가 예수의 사명이라든지 예수의 정신 같으면 뭐가 빠져야 되요? 주의 천사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돼요. 예수 믿는 바른 사람, 훌륭한 목사 이야기, 다 도와주고 다 헌신하는 그런 훌륭한 사람 이야기를 해야 돼요. 주의 천사가 그랬다 하면 안 된다 말이죠. 만약에 목사가 주의 천사 이야기해버리면 만약에 그 교회 5천명 가운데 주의 천사 안 만난 사람은 그 다음 聆臼?교회 안 나올 수가 있어요. ‘아니 이거 무당 단체 아냐,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라 목사야, 우리는 주의 천사 필요 없어. 우리는 예수의 삶을 살면 복 받는다는 그것만 필요한 거야. 예수처럼 희생하고 봉사하는 예수처럼 남을 위해 일을 하면 복이 우리한테 돌아온다.’ 그런 소리가 필요한 거예요. 그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 예수의 삶을 살면 망합니다.’ 그런 이야기가 듣고 싶은 것이 아니고, ‘예수의 삶을 살면 반대급부로 보상을 충분히 해주신다.’ 그런 이야기 듣고 싶어 오는 거예요. 이웃 사랑이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고 내가 평소에 내 사랑하는 내 사랑을 더 확고히 쥐고 싶다 이 말입니다. 밧줄 쥐듯이, 증하나 얻듯이, 어떤 간증집회 할 수 있는 실적은 없는가, 그렇게 하고 싶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주의 천사를 말을 안 합니다.
주의 천사는 우리 인간이 조정할 수가 없어요. 골로새서 한번 봅시다. 참 이래 이야기하니까 진짜 주변에 믿는 사람 있다는 자체가 놀라울 정도죠. 이걸 어떻게 믿습니까? 다시 말해서 주의 천사를, 주님 부활을 어떻게 믿어요? 나만 살아있으면 되지, 그분들이 왜 살아야 되는데. 골로새서 2장 18절에 보면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그 다음에 뭐라고 돼 있죠? “천사를 숭배함”이죠? 사도행전 12장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주의 천사를 만났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베드로가 주의 천?만난 것 가지고 주의 천사 숭배하고 그것 가지고 전도하는데 써먹습니까? 아니죠. 베드로는 주의 천사를 만나도 베드로가 자랑하는 것은 천사를 자랑하는 게 아니고 천사는 예수님의 스케줄에 봉사하기 위해서 보내준 일꾼 이예요. ‘베드로님, 일어나세요. 왜 잠을 이리 많이 자나 몰라. 일어나세요.’ 라고 깨우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때 베드로는 뭐라고 합니까? ‘ 천사님, 누가 보냈습니까?’ 그럼 천사가 ‘내 알아서 왔잖아.’ 아니죠. ‘바로 당신 속에 성령을 보낸 우리 주님이 나보고 잠 깨우라고 보냈습니다.’라는 말을 하죠.
그러면 베드로가 누구 증거 해야 돼요? 천사 증거 해야 돼요? 누구 증거 해야 돼요? 자기에게 천사를 보내신 주님을 증거 해야 되죠. 주님이 왜 보냈으며 자기 살라고 보냈습니까? 복음 전하라고 보냈는데 그때는 베드로는 가야 되는 거예요. 갔으면 고생 덜 했어요. 십자가 거꾸로 지고 그럴 것도 없었어요. 그런데 베드로는 원치 않는 길로 계속 가야 됩니다. 원치 않는 길로. ‘이제는 죽네.‘ 하고 좋아하면 잠 깨어버리고 기존에 우리가 사는 사고방식하고 어떻게 됩니까? 정 반대예요. 우리는 못 살아서 환장했잖아요. 요양병원에 돈 주고 똥, 오줌을 벽에 쳐 바르면서도 살잖아요. 링거 꽂으면서도 살잖아요. 못 살아서 환장했는데, 베드로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요. 왜, 베드로가 예뻐서가 아니라 복음 때문에.
그러니 베드로가 야고보를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아이고, 형님은 좋겠다. 나는 보내달라는데 왜 안 보내주고.’ 사도행전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야 돼요. 강사, 목사가. 다시 이야기할게요. 내가 사는 방식을 주께서 채워달라고 하면 안 돼요. 그동안 내가 살았던 방식 자체가 우리는 저주 받아 마땅한 죄가 된 것을 드러내시는 거예요. 그럼 내가 사는 방식은 주께서 이 땅에서 죽었다 사는 그 방식만 내가 사는 방식 이예요. 그건 뭐냐, 날마다 니가 니 목숨을 얻고자 하지 말고 잃고자 하라. 그러면 니가 산다는 것은 잃고자 하면 복음 위해서 쓰여 질 대로 쓰여 졌다가 나중에 시한이 끝나면 폐기처분해서 내가 가져갈게.
주님은 복음밖에 몰라요. 왜, 베드로는 십자가 안 졌잖아요. 십자가 지신 분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 십자가 피가 구원하기 때문에 ‘ 저 사람들 천국 갈 거야 말 거야, 천국 보내요. 천국은 피가 아니면 갈라냅니다. 따라서 베드로도 줄 창 그 피 증거 하는데 그래서 베드로전서에 뭡니까? 피 뿌림으로 삶을 얻었다. 거룩하게 되었다 하잖아요. 그 피 증거 하기 위해서 베드로는 또 여름 뜨거운 땡 빛에 자다가 깨어나야 돼. 이런 팔자가 다 있다니까요. 그냥 보내지도 못하고 깨서 가는데 7절에 쇠사슬을 보세요. 쇠사슬이 손에서 벗어났죠. 그 다음에 신 끈을 매라 했죠.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했죠. 하나, 하나가 베드로가 한 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거 천사가 했다고 하지 마세요. 위에서 천사를 보내신 주님께서 그런 식으로 베드로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성도를 이렇게 인도하십求?
10절에 보니까 천사가 떠나고 난 뒤에 11절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참으로 주께서 그 천사를 보냈잖아요. 그러니 골로새서 2장 16절에 천사를 숭배하면 돼요? 안 돼요? 천사 숭배하면 안 되는 거예요. 천사가 십자가도 안 졌는데 그 피조물을 왜 숭배합니까? 십자가 지신 분을 놔두고 십자가 안 진 사람을 왜 숭배해요? 그거 숭배하면 다른 사람이 믿음 좋다고 알아주는 그걸 내다보죠. 그리고 난 뒤에 13절에 로데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베드로보고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귀신으로 보죠. 귀신은 산채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죽은 채로 존재하는 걸 귀신이라 해요. 존재를 안 하는 게 아니고 존재해요. 그런데 어느 세계에서? 산 사람 세계에서 봤을 때는 산 사람 세계에 속하지 않는 어떤 존재, 이게 귀신이잖아요. 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산 사람끼리 서로서로 살았다고 여기는 그 원리는 적용이 안 되는 그런 존재, 귀신 아닙니까? 베드로보고 귀신이라 한 거예요. 왜 귀신이라 했습니까? 분명히 잡혔고 쇠사슬에 묶였고 군사들이 지키고 못 빠져나오는데 살아있으니까 이게 베드로가 아니고 베드로가 죽은 후에 귀신인 줄 알았던 겁니다. ‘아이쿠, 귀신인데 우리 베드로하고 똑같이 생겼네.’ 이 소리예요.
그럴 때 17절에 보면, 베드로가 쭉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 19절을 봅시다.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숫군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그래서 난데없이 파숫군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적인 면에서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갇히게 했고 빠져나오게 안했더라면 누가 안 죽었을까요? 그 파숫군, 간수는 안 죽었을 건데 갇혔다가 빠져나오니까 그 죄 없는 죽을죄도 안 지은 파숫군이 죽었다 이 말이죠. 이건 결국 뭐냐 하면 요한복음 17장 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권세를 아들에?주셨으니” 자기 택한 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걸 활용해요. 누가 살아서 죽든지 죽어서 살아나든지 천사가 왔다 갔다 하든지 물고기 아가리가 벌어지든 간에 모든 변화, 이 세상의 모든 변화가 결국은 자기 백성에게 영생 돌아가게 하는 조치고 절차로서 활용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중심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 생명 중심, 복음중심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이게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2장에 보면 내가 전한 복음은 망하는 자에게는 악취요. 믿는 자에게는 향기라. 향기와 악취는 반대잖아요. 거기에 망하는 자에게는 악취, 망하는 자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왜 망하는 자가 망하는 줄 알면서 왜 이 땅에 태어나게 했습니까? 그것은 복음을 위해서 ‘니는 망하는 역할을 해 줘야겠다.’ 왜, 니가 있음으로써 구원 받는 사람의 진가와 주님의 공로가 확실하게 드러나기 때문 이예요.
‘우리는 망한 자고 우리는 진즉에 죄인입니다.’라는 그것이 주님이 지금까지 우리 같은 인간을 구원하신 지금까지 농사짓는 거예요. 그런데 이 복음을 모르고 복음을 안 듣고자 하는 사람, 지금 이 순간 지금 5시50분 이 순간 그 사람들은 뭘 위해 삽니까? 하나님의 영광? 아닙니다. 뭘 위해 사는 겁니까? 아무 생각 없죠. 그냥 자기 욕구대로 그냥 살죠. 그리고 아주 나쁜 경우가 뭐냐, 이게 자기가 정상이며 이것은 죄 아니며 지금 지옥 안 가고 있으며 지금 저주 안 받고 있다고 여기겠죠. 그러니까 문제예요. 그러니까 소경이 눈이 보는 사람이고 소경이 아니라 여기는 인간들이 소경되는 거예요.
이게 전부 다 예수님 십자가 때문에 졸지에 세상은 전부 다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데 그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강아지 모양 베드로를 끌고 그 당시 세상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거꾸로잖아. 거꾸로잖아. 반대잖아. 반대. 다 아는 소리잖아.’ 사도바울 데리고 ‘다 반대다 반대. 다 죄잖아.’ 이걸 드러내는 거예요. 십자가 피만 구원 받지 인간의 행함으로는 구원 못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