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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107. 예레미야 31:10-14 / 강자로부터 구원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107. 예레미야 31:10-14 / 강자로부터 구원

정인순 2011. 4. 21. 07:56

 

 

강자로부터 구원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1년 4월 2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10-14

 (렘 31:10, 개역)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무리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렘 31:11, 개역) 『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

(렘 31:12, 개역)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렘 31:13, 개역)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니라』

(렘 31:14, 개역)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구원에 있어 우리 자신이 기준을 적용시키면 안됩니다. 우리가 보는 구원의 기준은 따로 있고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구원의 기준 따로 있습니다. 우리들은 교회 나오면서, “적어도 하나님께서 이런 정도는 해결해주셔서 구원받은 것 맞다”는 식으로 일방적인 기준을 적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기준 적용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하면서 우리들의 구원기준은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어떻게 다를까요? 우리는 현재에 필요한 구원과 축복기준을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되어질 상황을 미리 제공하면서 그것을 구원의 기준으로 적용시킵니다.

예를 들면, 세상과 역사의 끝자락을 잡아당겨서 현재에 겹치고 접합시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능력으로 도저히 알 수 없는 사태들이 성도 주변에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각가지 개념들, 양, 시온, 강자로부터 구원, 속량, 흩어진 자를 모음 같은 개념들은 낯설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미래에 심판날이 되면 이런 개념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 축복인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우리에게 적용하는 구원과 축복의 기준과는 전혀 상관없지만 말입니다. 첫째, 흩어진 자를 모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모음이 성립되려면 우리들은 항상 흩어지기를 원하는 자라는 것이 기정사실화 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조차 교회 갈 시간되면 딱 교회 가기 싫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잘 왔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곳에 기어이 기피하고, 조금의 핑계거리라도 있으면 참석하지 않으려합니다. 하지만 장래 구원받아야 될 성도같으면 하나님께서 자꾸만 말씀 앞으로 모아주시는 것을 현재에 느끼게 됩니다.

둘째로, 우리를 하나님께서 양으로 취급하십니다. 이로서 양으로 취급받는 자들은 독자적으로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목자가 따로 계시다는 점을 늘 느끼면서 삽니다. 목자에게는 지팡이와 막대기가 손에 들여져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천국의 영광을 가리려는 세력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기도 하고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마다 천국이 더 크게보이는 길로 들어서게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강자로부터 벗어나게 하십니다. 강자란 실은 우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인간들을 태어나면서부터 주변에 강자가 우굴거리는 사회 안에서 살게 됩니다. 그 강자를 인생성공 사례라 간주하고 그들을 부러워하고 동시의 그들의 기세에 눌리면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강자의 품에서 떠날 생각을 못합니다.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갖고 있으면서 그들처럼 되고 싶어 자신을 자책하게 됩니다. 돈에 강자, 인물에 강자, 목회 성공의 강자, 가정 행복의 강자, 건강의 강자 등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변에 이런 강자들을 배치하므로서 우리로 하여금 현재 구원이 시급한 상황임을 알려주십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그는 이방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는 마치 이 약속의 땅에서 세상적인 성공을 기대하고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막상 들어서고 보니 하나님께서는 결코 세상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 땅에서 정착과 안정을 보장해주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은 이 땅에서 나그네요 객이요 이방인으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세상 것으로 가지고 정착과 안정에 성공한 사람들이 보게 되면 아브라함과 그 자손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실패한 인생으로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비로소 자신의 본향이 이 지상이 아니라 하늘에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것은 그들의 노력의 결실들이 아닙니다.

노아언약에 의하면 선인이나 악인이나 자연의 선물이라는 것을 다 얻어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은혜를 주신 분은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십자가로 인해 새언약 시대입니다. 과거의 노아언약도 실은 노아가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노아언약의 실제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은혜가 세상에 제공되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단순히 자연의 선물을 받은 것으로 구원이 되는 것이 오늘 본문처럼 ‘속량’을 받는 것이 참된 축복입니다. 이 죄사함의 은혜를 받았다면 결코 성도는 그 어떤 형편에서도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 수 없고 이미 성공한 인생입니다.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채 세상것으로 행복과 만족을 누리려는 자들이 차라리 크게 인생실패자입니다.

자신을 주신 은혜의 주인공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준 적용이 진정한 구원의 기준이요 축복의 기준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오늘 본문에서 네 번째 등장하는 구원 개념인 ‘근심하지 않는다’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세상 것의 실상을 알게 되니 부러울 것이 없고, 부러울 것이 없으니 근심하지 않는 겁니다.

시온산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의 고향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기뻐하게 됩니다. 다 하나님의 구원의 솜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자신을 실패자로 간주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오용익

107강-렘31장10-14(강자로부터 구원)-jer11042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1장 10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01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31:10-14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무리에게 행함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찌어다 그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니라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구원을 받고자 할 때 두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기준, 하나님이 구원을 이렇게 해주면 고맙겠습니다, 하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우리가 만들어낸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든 기준은 주변의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서로 경쟁하면서 부러워하는 것이나 갖고 싶은 것들을 모은 것들이 기준이 되지요.

 

‘하나님 , 이 정도는 되어야 구원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는 그것을 채워달라는 식의 기준이 있는 반면에 진짜 구원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기대하는 기준을 제시하면 안돼요. 누가 제시하느냐, 성경에 하나님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기준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안보고 외면하니까 교회 와서 자기 기준을 포기를 안 하고 있어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기준이 따로 있는데,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평가한다.’는 기준이 따로 있는데 우리는 뭐만 고집하느냐하면, 내가 나를 어떤 식으로 만들어낼까, 그런 자기기준만 자신에게 강요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내 기준에 내 현 모습이 안 맞을 때 본인이 스스로 자신에게 짜증을 내요.

 

그런데 성경을 펼쳐버리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머리카락도 세시고 발걸음을 세신다고 되어 있어요. 머리카락 빠지면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 머리카락 세시고 발걸음을 세시는 그 기준을 나에게 적용시킬 때, 일치시킬 때 현재 구원받고 있는 중이십니다. 세상에 자기 머리카락 있음을 자랑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약간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 이렇습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이 있는 것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노아와의 무지개약속에 의해서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지금도 나쁜 일을 하는 사람에게도 성폭행 범으로 교도소에 가 있는 사람에게도 아침 되면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셔요. 교도소 생활하는 주제에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신다는 말이지요.

 

너무 후한 대접을 하는 게 아닙니까? 교도소 가도 단비를 얻을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은혜를 너무 많이 주시는 것 같아요. 지금도 북한의 김정일은 맛있는 고기로 포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큰 은혜를 주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연적인 은혜, 선물은 선인과 악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어요.

 

중고등부 설교 전도서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우리 보기에 어처구니없는 내용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착해도 악인이 받는 대우를 받으면서 처참하게 망가지고 있고 아무리 악해도 착한 일 많이 한 사람이 받는 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고 되어 있어요. 어디에서요? 성경에.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저 사람은 잘 사는 것을 보니 착한 일 해서 복 받았구나.’ 그렇게 단정 짓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 기준이지요. ‘저 사람은 객사하는 것을 보니 나쁜 짓을 많이 했구나.’ 하고 그 사람을 함부로 단정 짓지 마세요. ‘많이 착해도 세상은 그를 잊어버린다.’고 전도서에 되어 있습니다.

 

‘이런 착한 일을 많이 했으면 사람들이 나를 인정할 것이다.’ 하는데 천만의 말씀, ‘세상은 그를 속히 잊어버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 뜻대로 안 되는 거예요. 우리 뜻대로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이 세상의 모든 은혜와 생존은 하나님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지기에 네가 희생하지 않은 이상 그렇게 주어지는 축복과 은혜에 대해서 왈가왈부 네가 시비 걸지 말라.’ 하는 겁니다.

 

본인이 애쓰지 않고 본인이 수고도 안한 것이 지금도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에게도 단비와 햇빛을 주시는 것에 대해서 시비 걸면 안돼요. ‘앞집에 사는 보살 집은 망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네가 뭘 했다고 무슨 자격으로 앞에 있는 보살집이 망해야 된다.’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나는 무조건 잘돼야 됩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 기준을 적용시키면 안돼요.

 

제 서론이 왜 이렇게 기냐 하면, 본문의 내용이 구원받는 모델입니다. 그 모델에 몇 가지 특별한 내용이 나와요. ‘흩어진 자를 모으시고, 목자가 양 무리를 인도하고, 속량하고, 시온에서 찬양하게 하고, 물댄 동산 같고, 제사장이 기뻐한다.’는 몇 가지 항목들이 있어요. 이런 것이 갖추어졌을 때 구원이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우리 기준에서는 이런 것들이 필요치 않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자식 잘되고 부부화목하고 촌에 땅 사놓는 것 오르고 교회 부흥되어서 헌금부담 좀 줄이고,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축복이라 하고 그런 것들을 구원의 증거인줄 알고 그런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 하는 목사님들은 교인수가 늘어나면 축복이고 안 늘어나면 저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목사가 성경을 공부해도 다 헛일이고 실제는 목사 되기 전부터 ‘나는 이쯤 되어야 복 받았다고 할 수 있다.’라는 일방적인 자기 기준을 자기에게 적용시켜 버리는 겁니다. 반칙이죠.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이런 것이 구원의 모델입니다.’ 하면 ‘재미 하나도 없습니다.’ 할 거예요.

 

그런데 그걸 생각해야 돼요. 성경에서 구원의 모델로 제시하는 것은 ‘지금 네가 이렇게 애쓰고 행함을 하고 실천에 옮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가장 구원의 기본적인 것을 말씀드릴게요. 이것은 여러 번 했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릴게요. 이 주보로서 설명하겠습니다. 이 주보를 이렇게 접습니다. 접으면 하나의 선이 되겠지요.

 

이것이 처음이고 이것이 끝인데 이 끝자락을 당겨서 현재에 겹치는 것이 구원의 모델입니다. 끝자락을 당겨서 현재에 겹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히브리서 11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현재 약속의 땅에 도착했었습니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까 그것이 구원이 아니었어요.

 

도착하고 보니까 자기가 가야할 '영원한 땅은 이 지상에는 없었더라.'를 느끼게 된 거예요. 도착하고 보니까 그랬어요. 도착하기 전에 이방나라에 있을 때는 ‘약속의 땅에 가면 거기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임과 함께 한 백년 살고 싶어.’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까 거기서 텐트 생활을 하면서 나그네요 객이요 외지인으로서 살다가 거기서 ‘영원한 본향은 약속의 땅 위쪽에 따로 있’는데 그 본향을 오늘 본문에서 시온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는 현재에 만족할 만한, 현재에 자기가 정착할 만한, 현재에 자기가 소유할 만한 귀한 것들을 건지고자 하나님 따라 왔는데 그것은 현재 자기가 자기에게 적용시킨 기준이고 하나님의 기준은 미래가 현재를 겹치고 덮치는 그것이 구원의 모델이 되는 겁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부자가 창고 지어서 이만하면 넉넉하다 생각할 때 ‘오늘밤 네 영혼을 데려가면 저 많은 재산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했습니다. 오늘 밤, 그것이 새벽 2시 5분인지 새벽 3시 3분인지 아무도 몰라요. ‘오늘 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그 모든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부모님 돌아가실 때, 그것도 갑자기 돌아가실 때 얼마나 자식들이 시원섭섭합니까?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분이 뭐 그리 집착하고 죽을 때까지도 세상에 대해서 욕심을 챙기면서 이기적으로 살아갔는지. 그래서 노인에게는 이름을 붙여야 돼요. 이 갑자기, 김 갑자기. 사람은 언제 심장이 멈출지 모르거든요. 그것이 이사야에 나옵니다. 사람의 호흡은 심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뇌사상태라 해서 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코에 있다고(사 2:22).

 

‘코에서 숨 안 나오면 그것으로 끝이다. 내가 그렇게 거둘 것이다.’ 주께서 영혼을 가져가면 그것으로 자신의 피곤한 인생은 마감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전에 죽음 이후의 상황이 겹쳐져야 돼요. 맛봐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맛보는데 어떻게 맛보는가? 10절에 보면, 지금 구원의 모델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네 번째 이야기하는데 자꾸 자기 기준을 생각하지 마시고 주님의 성경의 기준을 보세요.

 

10절에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이것이 돼야 됩니다. 지금 목숨 유지할 때 바로 이 밤에 이것이 느껴져야 돼요. 주님은 흩으신 자를 친히 모으시는 분이시라는 겁니다. 흩어지는 자를 모으시는 것이 구원이기에 우리는 흩어져 있어야 돼요. 우리가 알아서 주님한테 나오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한테 안 가려 하는데 주께서 갑자기 목숨 빼앗듯이 갑자기 말씀 앞으로 모으는 그것이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느껴져야 돼요.

 

‘아, 이것이 흩으신 자를 모으시는 작업이구나.’ 제가 목사하기 전에 집사로 있을 때 늘 느끼는 것이 뭐냐, 정말 교회 다니기 싫어요. 그런데 교회가기 싫은데 교회 와보면 잘 왔다 느껴져요. 이것이 매주 되풀이 됩니다. 직장도 변변한 것도 아니었지만 직장생활 하면서 ‘좀 쉬었으면 좋겠다, 좀 더 잤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신자니까 교회 가야지. 주여, 오늘 교회 왔습니다, 하고 출석도장 찍어야지. 그 대신 빨리 마치고 집에 와서 자야지.’ 하고 가서 성가대도 하고 온갖 것 다 해보면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요.

 

성가대도 재미있고 뭔가 내가 참여된다는 것, 뭔가 예배에 내가 중요한 일원이 되었다는 그것이 자긍심을 유발시키는 아주 멋진 겁니다. 특히 성가대가 너무 기뻤던 것은 일반 교인들은 그 자리에 앉아서 강대상을 바라보지만 성가대의 특징이 뭐냐, 목사가 보는 시선으로 누가 지금 뭘 하는지를 바라보면서, 살피면서 볼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것도 높은 자리에서 가운 입고 본다는 거예요. 그게 굉장히 재미있는 거예요.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설교도 안 듣지요. 사람 구경하는 그 재미가 성가대에 앉는 재미가 된 겁니다. 성가대 마치고 따로 연습하면 특권의식도 생기고 또 끝나면 불고기도 사주니까. 그게 그렇게 사는 보람을 주는 거예요.

 

주께서는 이렇게 자꾸 혼자서 세상 적으로 있고 싶은 것을 주님 앞으로 더불어 모으는 작업을 할 때 이것이 미래의 모습을 현재에 겹치는 모습입니다. 첫 번째는 흩어지는 이스라엘을 모으시는 하나님을 온 몸으로 체험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10절에 “목자가 그 양 무리에게 행함같이 그를 지키”신다고 나와요.

 

목자와 양의 관계를 느끼도록 해 주는 겁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 우리의 목숨이 없어지기 전에 우리의 호흡이 코에서 끊어지기 전에 주께서는 우리를 양으로 취급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양의 특징이 뭐냐, 갈피를 못 잡아요. 우왕좌왕 합니다. 어느 것이 천국 길인 줄을 몰라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목자가 되시는데 목자에게는 지팡이가 있습니다.

 

그 지팡이는 양을 치는 늑대나 이리를 치는 일도 하지만 자기 양을 몰아세우는 기능의 지팡이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또 인도도 해주십니다. 그런데 그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 우리 기준에서 돈 잘 벌고 자식 잘되는 그런 기준이 아니고 천국이 크게 보이도록, 천국이 비현실이 아니고 실제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살도록 우리를 그 때 그 때 사건마다 말씀으로 권고해주시는 일을 하는 겁니다.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그럴 때 오랜만에 동창을 만난다든지 오랜 만에 아는 친척을 만나도 ‘나는 목자가 있는데 당신은 목자가 있습니까?’라고 전도하는 마음도 생기지요. ‘당신은 아직도 혼자십니까?’ ‘혼자 삽니다.’ ‘나는 목자가 있습니다.’ 그 목자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구원해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목자와 양의 관계가 얼마나 희한한 관계인지 양이 목자에게 뭘 바쳐서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고, 양에게 뭘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목자 되시는 분이 우리에게 제공하면서 천국으로 우리를 이끄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에서 목자가 주시는 것,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얻을 수 없는 것이 뭔가를 찾는 거지요.

 

첫 번째는 흩어진 자를 모으는 것. 두 번째는 우리를 철딱서니 없는 양으로 취급하면서도, 목자께서 우리의 철없음을 아시면서도, 죄짓는 것을 반복하는 줄 아시면서도 떠나지 않는 목자로서 막대기와 지팡이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 세 번째는 11절에 나옵니다.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

 

이것은 약간 길게 해야 돼요. 미래의 것이 현재에 겹치게 되고 맛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뭘 우리에게 보여주느냐, 강한 자를 우리에게 마주치게 합니다. 그러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우리는 그 앞에서 기가 팍 죽어버립니다. ‘나 인생 이렇게 살아서 되겠는가? 한 평생 이 꼬락서니로 사는 이것이 내 인생인가? 참 서글프다. 저 인간들 사는 것 보니 나는 내 인생이 실패한 것 같아. 부럽다 부러워. 나도 저렇게 한 번 살아봤으면.’ 라고 느낄 만한 인생을 만나게 해주는 겁니다.

 

이것은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주변에 항상 나보다 강한 사람을 붙여줘요. 이 말은 어폐가 있습니다. 나보다 강한 사람을 붙여주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붙여주지만 우리의 시선과 관심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는 관심이 없어요. 자기가 부러워하는 사람을 추종하다 보니까 ‘나는 그 사람보다 못해.’

 

제가 대구 비산동에 있는 대성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그 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내내 우리 동창생 송 씨가 그렇게 부러웠어요. 시험만 치면 백점인데 그 애가 결국 나중에 판사 되었어요. 시험 때만 되면 그 시험 그 자체보다도 저 애는 이번에 몇 점 맞을까, 그것에 그렇게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기쁜 일이 있어도 기쁘지 않아요. 좀 우쭐대는 일이 생겨도 그 애 집 앞에만 지나갈라 치면 기가 팍 죽어요.

 

그 애만 공부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애 누나도 공부를 잘하고 그 집안 DNA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집안이 몽땅 공부를 잘해요. 그 집에서 판사만 세 명이 나왔습니다. 그 집 앞만 지나가면 다 기 팍 죽는 거예요. 그 다음에 20대 되니까 또 어떤 부러움이 생겼느냐, 키 크고 인물 좋은 애들이 보이는 거예요. 인물이 좋고 훤하고, 인물이 좋으니 여자가 따르지요.

 

그게 그렇게도 부러운 거예요. 하여튼 사람은 평생을 가면서 강자들만 붙여줘서 항상 자괴감, ‘이것은 사는 것도 아니야. 내 인생이 왜 이 꼴인지 모르겠어.’라고 느끼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일거예요. 직장에 가면 자기보다 빨리 승진하는 사람 보면 때려죽이고 싶고, 사업을 하면 같은 식당을 해도 자기는 파리만 날리고 있는데 저쪽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내일 오라고 번호표 나눠주고 있고, 이쪽은 음식이 썩어나가고 저쪽에는 줄서서 기다려서 먹고 가고 각 방송사에서 취재 와서 소문까지 내고.

 

똑같은 원조 간판이 붙었는데 소용이 없어요. 피아노 치는 사람한테는 어찌도 그렇게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을 붙여줬는지. 그래서 사람이라 하는 것은 항상 강자 앞에서 뭘 느끼느냐, 자신의 목표가 결국은 나에게 찾아온 강자의 자리에 도달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 있어서 항상 우리는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되는데.’라는 그 자리를 탐내면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주신 기쁨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남들 보란 듯이 떵떵거리면서 부러워하는 존재로 탈바꿈 되는 이 목적이 내가 노력하고 투자하는 모든 내면에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이 양이, 김 양, 박 양, 이 양이 얼마나 철딱서니가 없어요. 주님 가신 길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좁은 길이라고 마태복음 7장에 그렇게 나와 있지만 사람들의 심보가 ‘주여, 좁은 길을 갈 테니까 내가 원하는 성공이 나한테 적용되게 하옵소서.’라는 이것을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좁은 길을 가 줄 테니 내가 내 기준에 합해서 축복이라는 그것이 이 정도는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구원이라고 할 만 합니다.’라는 그 기준을 계속 우리는 고집하고 있는 겁니다. ‘이 정도 돼야 축복 아닙니까?’라고 떼를 쓰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기준은 그게 아닌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그 강자를 자주 만나고, 거기서 자기가 낙오자라는 인식을 의도적으로 심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통해서 뭘 느끼느냐, 마귀의 유혹과 마귀의 시험을 느끼게 됩니다. 선악과 따먹을 때 인간들은 따먹을 생각이 없었는데 뭔가 악마가 자기가 실패자라는 것을 드러냈어요. 하늘나라 살 악마가 땅에 내려왔으니 악마의 자기 삶은 실패한 거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라이벌로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을 라이벌로 생각해서 ‘네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한 거예요. 그 소리에 말려들어서 보암직하고 먹음직도 한 그 선악과를 따먹고 난 그 때부터는 술 취한 것처럼 자기 방향도 못 찾는 겁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악마가 주는 미끼에 질질 끌려가듯이 주님이 주는 은혜는 생각 안하고 내가 부러워하는 그것을 미처 가지지 못하는 것 때문에 좌절하고 낙담하면서 주신 은혜까지 다 스스로 내팽개치는 겁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지금 숨 쉬고 있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희생으로 숨쉬고 있고 모든 언약, 노아언약의 완성도 새 언약이거든요. 새 언약이 뭡니까? 십자가 아닙니까. 노아언약 때문에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셨다면 이제는 그 노아언약이 어디에 들어 있느냐,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노아언약이 바로 은혜를 주는 게 아닙니다. 노아언약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미 우리에게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은혜를 주신 거예요. 심지어 악인에게까지 은혜를 주신 겁니다. 그런데 숨 쉬는 것도 대가없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지신 대가로 숨을 쉬는 겁니다. 그 은혜를 누가 알며 그 사랑을 누가 알며 그것에 대해 누가 하나님께 감사하겠습니까?

 

그저 마귀가 시키는 대로 ‘장 동건 같이 잘생겼으면 좋겠다. 이건희 마냥 부자한 번 되었으면 좋겠다.’ 괜히 잘사는 주택가에 가 서성대면서 ‘이 집은 대체 경계선이 어디서 어디까지야? 비좁은 아파트에 사는 것 보다는 이렇게 넓은데서 정원도 가꾸면서 살아봤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지요. 그처럼 항상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것들이 우리 곁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주께서 주신 성공이란 이미 미래의 것이 현재에 덮치면 그게 성공한 인생인데, 이게 아브라함 인생인데 이미 성공을 해놓고서도 주님 주신 성공은 시답지 않게 여기고 그저 지옥 갈 사람들은 그렇게도 부러워하고 미래도 모르고 앞일도 모르고 오늘밤에 주께서 그 목숨 가져갈 수도 있음을 모르는 그 인간은 그렇게도 부럽고, ‘오늘밤 죽어도 낙원에 있으리라.’ 한 그 축복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할 줄도 모르고. 이 철딱서니 없는.

 

그래서 우리 구원의 모델을 성경에서 찾아야지, 자꾸 세상적인 인간적인 것에서 찾으면 안 되는 거예요. 11절에 보면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 바로 그런 식으로 죄 값을 치르고 우리를 강한 자에게서 구원하신 겁니다. 우리가 무슨 수로 그 강자를 안 부러워해요. 성령이 오니까 ‘아, 지금 죽어도 천국 가는 것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수천억보다 귀한 영생이구나.’ 하는 것을 아는 그 기쁨이 오는 그 순간, 강자는 다 속빈 강정이에요.

 

강자가 아니고 오히려 인생실패자로 보이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왕이면 구원도 받고 부자도 되면 안 되겠습니까?’ 하는데 구원, 부자 두 가지를 다 생각한다면, 진짜 구원받은 부자라면 우리가 돈에 대해서 느끼는 이상으로 돈이 짐스러워질 겁니다. 우리는 돈이 없으니 짐스러운 것도 없지만 그들은 벗어야 될 짐을 한 무더기 지는 것이 돼요.

 

어떤 화가가 있는데 그 서양화가는 재미나게도 사람의 뒷모습만 그리는 화가였어요. 사람들이 자꾸 앞면과 앞면만 비교하는 세상에서 뒤태를 보면 다 똑같아요. 그걸 보면서 제가 느낀 것은 ‘강자를 부러워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을 놔버려라.’ 하는 겁니다. 지금 있는 것을 놔버리면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넘치도록 부어주신 하나님의 영생이 그 어떤 것보다 귀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 실패한 것 아닙니다. 미래가 이미 이렇게 겹쳐지면 이미 성공한 겁니다. 성공했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귀한 성공이며 누구의 희생 때문에 주어진 성공이냐 하는 것을 깨닫는 방식으로 목자 되시는 분께서 우리에게 권고하시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12절에 보면 “그 심령이 물댄 동산 같겠고.” 그 심령이 물댄 동산 같겠다고 하니까 항상 넉넉하고 그득하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다시는 근심이 없다는 것은 바로 내가 어느 날 부러워했던 강자들, 성공했다는 자들이 사실은 허수아비들이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이 세상에서 부러운 것이 없어지면 근심도 없는 법이지요. 그리고 나중에 시온 산에서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하나님께 찬양하는 그것이 여호와의 약속이라는 겁니다.

 

그 약속이 지금도 실제로 이 현실 속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모르는가, 너무 세상적인 강자를 또 찾아다니다 보니까, 지금 우리 집에 있는 보물을 보물로 여기지 아니하고 엉뚱한데서 자꾸 보물을 찾으니까 이것을 잊어버린 거예요. 주께서는 강자에게 기죽고 강자에게 설움당하는 순간 다시 자기 자녀에게 주어진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말씀했어요. 고린도후서 12장의 말씀이지요. ‘예수님의 은혜가 네게 충분하게 넘친다. 그러니 네 몸 아픈 것을 너무 탓하지 마라. 네가 몸이 아파도 그것으로 족하다.’ 그 말입니다. ‘삼층 천 봤으면 되었다. 뭘 더 원해.’ 이러한 은혜가 저희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기준을 너무 적용시키다 보니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대해서 깜박 잊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면 온갖 잘난 사람들의 경쟁마당인 것을 느낍니다. 그들 앞에서 우리가 패배자요 가진 것 없고 인생 헛산 것 같지만 그렇게 강자들을 배치하신 것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기 위한 조치인줄 아오니 주님 주신 그 십자가의 죄용서가 천하보다 귀한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