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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105. 예레미야 31:1-6 / 시온에 모여라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105. 예레미야 31:1-6 / 시온에 모여라

정인순 2011. 4. 7. 08:42

 

 

시온에 모여라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1년 4월 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1-6

(렘 31:1,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렘 31:2,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렘 31:3, 개역)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렘 31:4, 개역)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로 너를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

(렘 31:5, 개역)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되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렘 31:6, 개역)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수꾼이 외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사람은 자신의 계획한 것에 집착하면 주변 사태의 변화 때문에 늘 마음 고생을 해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계획해놓으신 일은 천지개벽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변개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인간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시고 계십니다. 우리 자신이 평생 투자한 것에다 마음 빼앗지기 말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하나님의 계획이 나와 있습니다.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게 해 주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계획이 마무리 되는 것은 시온산에 집합하는 자에게만 해당된다는 겁니다. 이 시온산은 지리적인 시온산이 아닙니다. 이 시온산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이 아무리 찾아올려도 찾을 수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가족에 관심을 보이는 첫 대목은 국가 이스라엘이 처음 탄생하는 첫 번째 유월절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13:1-2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장자란 육적인 가족의 대를 이를 자입니다. 이 장자를 하나님께서 돌리는 작업을 하나님깨서는 무서운 심판을 통해서 감행하셨습니다. 모세를 보내어 이 같은 계획은 다음과 같은 사전 목적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12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이 산’은 바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호렙산입니다. 그 산으로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은 데리고 가야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모든 이스라엘 가정의 맏아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아들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계약입니다. 어떤 계약을 말하는 겁니까?

육에서 영으로 옮겨가는 계약말입니다. 가족이란 부부와 자식들 모두 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육적인 가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영적 요소가 가미되어 ‘영의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이 ‘영적 요소’가 곧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아니하면 영적 가족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이스르엘이 하나님과 최종 만나는 지점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온산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자기 백성을 데리고 나와서 바로 시온산인 이스라엘로 데려가지 않는 겁니까? 왜 시내산을 거쳐서 가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시내산 밑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게 되고 그리고 언약궤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된다는 말은 이스라엘 가족 중의 대표자인 장자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관계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런 언약이 유지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도 그저 육적인 사람들만 뭉쳐진 육적 가족일 뿐입니다. 시내산에서 언약궤가 만들어지고 이스라엘 나라는 그 언약궤를 따라 다니게 됩니다.

홍해를 건너올 때는 언약궤가 없었지만 요단강을 건널 때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8:30,33에 보면, 그 언약궤가 곧 축복과 저주를 끌어당기는 중심점이 됨이 나타납니다.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 대로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 뿐입니다. 산은 축복산과 저주산 둘로 나뉘어집니다. 물론 이스라엘 지파도 둘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축복산이 아니라 저주산에다 안치하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축복과 저주에서 축복을 받는 원리를 말해주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의 언약은 저주의 자리에서 축복을 받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겁니다.

즉 누구든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을 자라는 인식이 없는 자는 저주가 퍼부어지고, 반대로 유월절을 생각하면서 자신은 저주받아 마땅한 자이고 이런 인식을 가져다 준 것은 흠없는 양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임을 받아들이는 자는 곧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궤에 담겨 있는 ‘흠없는 제물의 희생’ 정신을 자신에 대한 저주성을 대신 받은 것이라는 인식을 같이 해야 이 언약궤와 더불어 영원히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시편 2:7-9에 보면,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가족의 하나님으로 여호와를 섬길 자들이 이 시온산에 모이는 이유는 거기에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아드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신 장자는 인간의 가족 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 중에서 나오신 장자입니다. 이 장자로 오시는 그 자리가 언약궤가 드리고 긴 여정을 끝내고 안착하시고 안식하시는 자리가 됩니다. 바로 십자가 피를 흘러지는 곳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시온산에 ‘흠없는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자들, 144,000명이 모여든다고 되어 있습니다. (14:1)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구약에서 언약궤를 졸졸 따라다닌 이스라엘 사람처럼 오늘날 새언약을 따라가는 가족들이야 말로 참으로 영적 가족들입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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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오용익

 

105강-렘31장1-6(시온산에 모여라)-jer11040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1장 1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01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30: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로 너를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되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숫군이 외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세상에서 자기가 소속한 단체나 조직이나 가정이 있으면 그것이 잘못될까 굉장히 불안하고 걱정이 될 거예요. 하나님의 하시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모르고 자기가 애쓰고 힘쓰고 그동안 구축한 자기 것, 자기 소유, 그것이 흔들리고 깨질까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자기 것이 깨어지기에 그때서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들. 그렇게 하다 보니 하나님의 본뜻은 알지 못하고 기껏 자기가 투자한 자기 것에만 평생 얽매여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늘 불안할 수밖에 없고 초조할 수밖에 없고 안정감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는 것은 인간들이 하는 것은 늘 어설프고 흔들릴 수밖에 없으니까 비록 그것이 나의 것이고 비록 그것에 평생 몸 바친다 할 찌라도 그것을 의지하지 말고 지금 이순간도 하나님께서 깔끔하게 빈틈없이 정확하게 일하시는 그 일에 대해서 의지한다면 자기 것을 의지하면서 불안했던 그런 삶은 사라질 겁니다.

 

 

우리는 우리 것을 의지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을 의지해야 되지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말할 거예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명확하게 알아야 그것을 우리가 의지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반박을 하겠습니다만 이 성경자체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분명하게 명확하게 언급을 해 줬습니다. 우리는 장래 일을 몰라요. 기껏 우리가 했던 것들을 간수 하는데 급급하지요.

 

 

고마운 것은 하나님의 일은 과거, 현재, 미래까지 다 확정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처럼 안절부절 할 이유가 없어요.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관심 안 갖고 내가 갖고 있는 그 일을 자꾸 붙들려고 하니까 조금만 어떤 변화가 일어나면, 일본에 지진이 일어난다든지 하는 변화가 일어나면 자기 인생에 대해서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담 하지요.

 

 

그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것을 의지했다는 것이 들통 나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좋아하느냐, 마귀만 좋다고 껄껄거리면서 웃지요. 하나님의 계획이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1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분명히 하나님께서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라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보고 그렇게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 주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올 우리의 질문이 뭐냐, 어떻게 하나님이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까, 라고 나올 거예요.

 

 

본문 6절 끝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시온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모든 가족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겁니다. 이미 확정지었지요. 제가 주일 오후 예배 때 언급 했습니다. 나팔소리와 더불어서 무덤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 때 제가 무슨 이야기 했던가요? 나팔 소리가 잘 들리려면 우리가 나팔을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 땅에서 죽은 자로서 살면 그 나팔소리만큼 기다려지는 소리가 또 없어요. 세상 것을 자꾸 의지하니까 세상 것이 흔들리면 덩달아 같이 낙심하는데 온 우주에 울려 퍼지는 나팔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의 자연적인 변화, 물가 올라가는 것, 기름 값 올라가는 것, 비 많이 오는 것, 비 많이 오지 않는 것, 방사능 문제, 그런 것으로 불행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시온에 올라가라.’고 하는데 시온이 어딘지를 알아야 올라 갈 것이 아니냐, 하는 거지요. 시온이라 하면 지금의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간단한 문제예요. 계돈 모아서 비행기 타고 성지순례하면 하나님의 백성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시온이라는 것은 지리적인 시온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좀 명확하게 설교 시간이나 강의시간을 통해서 정리되어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계획을 정리한다는 말은 더 이상 평생토록 내가 투자한 것들 때문에 현재에 와서 내 마음을 쥐락펴락 되기는 싫다는 거예요. 평생 우리는 세상의 변화에 시달려 왔잖아요. 그런데 지금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러서 아직도 세상 것 가지고 마음이 흔들리면 안 되지요.

 

 

손자 오줌 쌌다고 그것가지고 흔들리고 사위 아프다고 그것 가지고 괴로워하고 ……, 이제는 그 흔들기에 그만 놀아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만 뚝! 그만 놀아나야 돼요. 시온을 바라봐야 되는데 시온이 아닌 곳에 계속 마음을 두고 있으니까 마귀가 그것을 무당 대나무 흔들 듯이 흔들어버리니까, 마음을 시온에 두면 시온은 흔들리지 않는 곳이라서 든든한데 시온에 마음을 안두고 흔들리는 세상에 두니까 그걸 흔들어버리면 어쩌나, 어쩌나, 하면서 같이 흔들리는 겁니다.

 

 

성경에 분명히 그 줄거리가 있으니까 그 줄거리를 말씀 드릴게요. 여기 1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라고 되어 있잖아요. 가족의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혼자 예수 믿으면 되는데 왜 온 가족의 하나님이 될까요?

 

 

이것은 그 당시에 한 가족의 제일 어른이 있어요. 그것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가족을 통솔하고 책임지고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 아버지의 자리에 누가 오느냐, 하나님이 그 아버지 자리를 대체한다는 겁니다. 그럼 기존의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되고요? 요한계시록에서 시온 산이라는 것은 천국입니다. 천국은 육으로서는 가지 못해요.

 

 

천국에 가려면 육이 없어지고 영의 사람이 되어야 될 텐데, 그래서 지금 우리의 관심사가 뭐냐, 육은 육으로 낳고 영은 영으로서 낳기 때문에 육적 사람에서 영적 사람으로 바뀌어져서 천국 가야 되는데, 가족이라 하는 것은 육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만남입니다. 신랑신부도 다 육체지요, 신랑신부가 결혼해서 낳은 자식들도 다 육체지요.

 

 

육체끼리 한 가족 모아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봐야 그것은 말짱 소용없는 겁니다. 뭔가 조치가 있어야 돼요. 누구 조치?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내려지는 조치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조치로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의 하나님이 되려면……, 나만 구원받으면 안 되잖아요, 온 가족의 하나님이 되려면 가족에게 어떤 조치가 있어야 됩니다.

 

 

그 조치가 뭐냐, 육적인 아버지, 육적인 어머니, 육적인 자녀를 대치할 수 있는 영적인 가정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조치가 있었는가를 믿어야 되지요. 출애굽기 13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유월절이 있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장자를 달라는 겁니다. 장자, 대를 이을 사람이지요. 그 장자가 그 전까지는 육적인 소유였는데 그 장자를 하나님께서 가져가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가져가서 그 장자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면 그 나머지 가족이 하나님의 것이 되는 계약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여러분이 집 계약, 땅 계약, 여러 가지 계약을 많이 해 봤겠지만 이런 계획 어떻습니까? 이런 계약 괜찮지요. 육적에서 영적으로 변하는 계약, 여기에 사인하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못하는 것, 불가능한 것을 하시는 겁니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려면 불가능한 사건을 기다리지 말고 불가능한 것에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말을 이상하게 하는가, 그렇게 보시겠는데요. 우리는 자꾸 불가능한 기적을 기다리잖아요. 불가능한 기적은 육에서는 일어날 자격도 없어요. 그러나 이 육신에 불가능한 것이 주어지는 사건이 주어지는 겁니다. ‘도저히 이 세상에 저런 분은 나타날 수 없어. 저 분은 보통 사람하고 달라. 어떻게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 다 있어? 보통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나는데 어떻게 성령에 의해서 사람이 태어난다는 말인가?’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가능한 것인데 하나님께 가능한 것이 이 지상에 섞여오니까 인간들은 뭐냐, 불가능한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관계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보통 분이 아닙니다. 당신은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그 불가능한 존재, 불가능한 분이 벌이시는 일이 우리 인생 속에 삽입되면 그 분이 일으키는 사건으로 인하여 우리가 육에서 영으로 바뀌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본문 2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지금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가족의 대표자를 장자로 삼았고 장자는 항상 이전에 그 장자를 태어나게 했던 아빠, 엄마의 소유가 아니라 낳기는 그 부부가 낳았더라도 그 장자의 소유권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계약을 체결하시는 거예요.

 

 

출애굽기 3장 12절에 보면 원래 출애굽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약을 맺기 위해서 장자 중심으로 이끄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여기서 ‘이 산’이란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시내 산을 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시내 산에서 만났는데 본문에서는 시내 산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만나는가, 시온 산에서 만나는 거예요. 어? 왜 시내 산에서 만난다고 해놓고 시온 산으로 옮겨가느냐는 말이지요. 이것이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데 순서가 있고 절차가 있어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일반도로와 고속국도가 나란히 가는 노선이 있어요. 일반도로에서 차를 몰고 가면서 고속국도를 보면 별것 아니게 보이지요. 그런데 별것 아니게 보이는, 바로 옆에 보이는 고속국도에 들어서려고 해 보세요. 아무리 일반도로에서 차를 가지고 방방 뛰어도 고속국도로 못 옮깁니다.

 

 

아무리 가까이 바로 옆에 보인다고 해도 반드시 톨게이트를 가야 고속국도에 올라갈 수 있어요. 더구나 일반도로 휴게소하고 고속국도 휴게소와는 완전히 수준차이 납니다. 일반도로 휴게소는 화장실에 가보면 관리자도 없어요. 하지만 고속국도 화장실은 항상 깨끗하지요. 음악 틀어주지요, 금연 표지 붙여 놓았지요. 어떤 데는 비데기까지 달아놓았어요. 참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적인 노선, 이것은 일반도로지요, 영적인 노선, 이것은 고속국도입니다, 고속국도 달려야 천국가고 일반도로 달리면 지옥 가는데 일반도로라는 육의 노선에서 고속국도라는 영의 노선으로 전환시키는 그 톨게이트 역할은 뻔히 보여도 자기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이 볼 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찬양하고 있으면 그것은 자기도 돈 내고 찬양하고 다 할 수 있겠다고 하지만 진짜 성령이 함께 하는 성도의 모임은 육적인 사람이 아무리 가담해도 들어갈 수가 없어요. 자기는 일반도로거든요. 뻔히 다 보입니다. 고속국도에 차가 다니는 것을 봐도 참여가 안 된다니까요.

 

 

하나님께서 톨게이트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톨게이트를 통해서야 고속국도 휴게소에 가는 거예요. 그 고속도로 휴게소가 시온 산이에요. 안식, 휴게소, 편히 쉬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새 교회들은 그야말로 고속국도 휴게소가 아니고 일반도로 휴게소예요. 육적으로 살다가 교회 와서 육적으로 재미있던 것 그냥 육적으로 즐기다가 다시 세상에 나가면 다시 육적으로 사는 겁니다.

 

 

교회와도 육이고 교회 밖에 나가도 육이고, 언제 한 번도 고속국도 타 본적이 없어요. 영적생활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저 육적인 것밖에 없어요. 근래에 한기총의 비리에 대해서 SBS에서 방송한 적이 있어요. 길자연 목사가 한기총 대표 뽑는 선거에서 돈을 뿌렸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손봉호 교수부터 몇몇 사람들이 나왔어요.

 

 

교회사 전공한 사람도 ‘한국교회가 이럴 수가 있느냐, 한국교회처럼 썩은 이런 교회는 교회역사에도 없는 일’이라고 했어요. 완전히 돈 판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왜 교회가 그런 돈 판이 되고 완전히 돈으로 쳐 바르는 교회가 되었는지를. 그게 일반도로 휴게소라 그래요. 세상 사람들이 교회 와서 심리적인 안정을 얻으려고 하고 하나님의 안식은 맛도 못 봤어요.

 

 

일반도로 휴게소 오뎅하고 고속국도 휴게소 오뎅하고 맛이 틀립니다. 주님이 주신 안식의 맛은 세상 적으로 맛볼 수 없는 거예요. 세상은 돈의 천지잖아요. 돈의 천지가 교회와도 똑같이 돈이 천지라는 말은 그 교회가 일반도로에 있는 아주 지저분한 휴게소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영적인 세계의 휴게소, 진짜 참된 교회는 돈 문제 같은 것이 문제꺼리도 안돼요.

 

 

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신분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나 같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되었습니까? 복음을 위해서 살게 되다니, 내가 이 귀한 복음을 알다니!’ 그것에 감격해서 세상적인 것들에 대해서 신경 쓸 것도 없어요. ‘하나님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화평’(롬 14:17)이라 했어요.

 

 

하나님의 안식 속에 놓여 있으면 세상에 있는 자기 것 흔들린다고 그거 신경 쓰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한국교회가 돈 판이 되었다고 그것을 비판하는 그것도 내가 보니 같은 일반도로 휴게소인데 약간은 깨끗한 휴게소, 전혀 고속국도에는 들어가 본적도 없고, 교회라는 것은 스트레스 많은 현대인들의 쉼터로 전락하고 그 쉼터를 크게 하기 위해서 돈 모은 것이지 한 푼도 그들은 하나님께 헌금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 쉼터를 위해서 투자한 것이고 교회라는 이름의 주식을 산 것이지 주님을 위해서 헌금한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왜 시온 산에 있어야 될 것을 그냥 시온 산에 안가고 시내 산을 거쳐서 가느냐? 시온 산에서 뭘 만들라고 했느냐하면 언약궤를 만들라고 했어요. 육에서 영적으로 전환하는 톨게이트가 뭐냐?

 

 

지금까지 가족을 모시고 섬기고 산 그것이 육적이라면 이제부터는 하늘에서 내려온 언약궤를 모시고 언약궤를 이동시키고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따라가는 그것이 영적인 가족이 되는 겁니다. 그 언약궤 만드는 제작법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통해서 받게 되지요. 이제 뭐가 궁금한가, 그 언약궤가 광야를 이동하면서 어디서 안착하느냐, 어디가 종점이냐 하는 거지요.

 

 

그게 바로 시온 산입니다. 출애굽 한 뒤에 바로 시내 산으로 가지 않고 시온 산을 거쳐 가는 것은, 그냥 구원받겠다고 하면 여전히 자기가족밖에 모르고 나 밖에 모르는 육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일반도로에서 맨 일반도로로 가는 것밖에는 안돼요. 일반도로 휴게소에 가서 ‘아, 돈 번다고 힘들고 피곤한데 좀 쉬자. 마음 좀 풀자.’ 하는 일반도로 휴게소 밖에 안돼요.

 

 

그걸 톨게이트, 하나님이 주신 언약궤라는 톨게이트를 통해서 언약궤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겁니다. 그 언약궤가 구약에는 그냥 언약궤지만 신약에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십자가입니다. 왜, 새 언약이니까.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게 십자가, 새 언약입니다.

 

 

‘그 언약궤 무게 얼마나 나가는가? 달랑 메고 다들 뒤따라가면 되는 거지.’ 언약궤를 그 따위 식으로 바라봤다면 그것은……, 언약궤를 모신다고 하다가 언약궤에 의해서 죽은 사람이 있어요. 홉니와 비느하스, 언약궤 믿다가 죽은 사람들입니다. 언약궤가 언약궤 옆에 있는 제사장의 두 아들을 죽여 버린 겁니다.

 

 

언약궤는 어떤 자세로 이동해야 되는가, 그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시내 산에서 언약궤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언약궤가 일단 어디를 거칩니다. 언약궤를 옮기면서 그 언약궤는 어떤 자세로 옮겨야 언약궤와 합치되는가, 그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지요. 설교를 다시 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계획이 있고 스케줄이 있지만 하나님도 자기 계획이 있고 스케줄이 있어요.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내 계획만 의지하다가는 세상 흔들리면 같이 흔들린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세상이 아무리 분잡해도 흔들리는 법이 없어요. 지금 제가 그 계획, 스케줄, 시나리오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디를 거치느냐, 여호수아 8장에 보면 그 언약궤를 앞장세워서 요단강을 건너가요. 홍해를 건널 때는 언약궤가 없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시내 산 도착 - 시내 산에서 언약궤 제작법에 언약궤 만듦 - 그 언약궤 들고 요단강 건너감 - 요단강 건너가서 여리고성 무너뜨림, 여리고성 무너뜨리고 그 근처에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교인들에게 자주 냈던 재미있는 문제였는데 다시 한 번 내 볼게요. 지금 언약궤는 한 개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두 패로 나눕니다.

 

 

한패는 그리심 산, 축복 산에 세우고 다른 한 패는 에발 산, 곧 저주 산에 세웁니다. 봉우리가 두 개 있는 산 사이에 백성들을 둡니다. 반을 쪼개서 한쪽은 축복 산, 한쪽은 저주 산에 두는 거예요. 문제 나갑니다. 언약궤는 하나밖에 없어요. 언약궤를 두 쪽 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언약궤를 축복 산 밑에 모실 것인가, 아니면 저주 산에 모실 것인가, 그 문제를 제가 자주 냈는데 하도 자주 내다보니 정답을 여러분이 다 알고 있습니다.

 

 

레위 인이 저주 산에 언약궤를 안치합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궤를 모시는 마음 자세입니다. 자신을 저주받는 자라고 인정할 때 저 맞은편에 있는 이미 배치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축복이 화살처럼 날아들어요. 중국영화에 나오는 수없는 화살처럼 축복이 날아오게 되어 있어요. 저주 산이나 축복 산에 배치되어 있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향하여 축복하게 되어 있어요.

 

 

‘주여, 나는 죽을 죄인이며 저주받을 자’라고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하늘의 모든 축복이 쏟아집니다. 축복 쏟아지는 그 장소가 어디냐, 언약궤에요. 언약궤는 자동으로 축복이나 저주가 오는 것이 아니고 언약궤를 모시는 자신의 마음자리, 위치를 언약궤가 지정해줘요. ‘제발 이 언약궤 안에 들어 있는 그 희생과 저주받아 희생당한 그 흠 없는 어린양, 네 죄 때문에 대신 희생에 동참’한 사람에게만 하늘의 축복이 그득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이제 그 언약궤 안에 있는 그 마음이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 그 마음은 뭐가 되느냐, 아들의 마음이 됩니다. 이게 어렵지요. 시온 산에 가게 되면 그들이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방금 하나님의 축복은 언약궤에 화살처럼 쏟아진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다윗언약이라면 언약궤가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에게 동참한 자들, 그 아들에게 입 맞춘 자들에게 축복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 2편 7절에 보면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것이 다윗 언약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육에서 나온 아들 말고 영이 되신 하나님이 직접 낳은 아들이 언약궤가 영원히 안치되는 그 자리에 합류되는 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자 아들이 이 땅에 오시는 그 자리가 바로 시온 산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뽑아낸 거예요. 성경의 흐름입니다. 확실해요. 우리의 펀드, 주식투자, 확실치 않습니다. 부동산도 확실치 않습니다. 대구의 부동산이 5년 째 죽어 있어요. 부동산 임대업 하는 사람들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한테 투자한 이것은 시대에 따라, 사태에 따라, 경제상황에 따라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계획은 지진, 화산,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천지개벽을 해서 세상이 두 조각나도 변치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걸 잡아야 돼요. 적어도 고속국도에 올라간 사람 같으면. 고속국도에 올라간 사람은 변하지 않는 그것을 붙잡아야 돼요. 윤동주의 시에 이런 것이 있어요.

 

 

‘별을 헤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리라.’ 재미있지요.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리라.’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살아 있는 것들을 사랑하리라, 살아 있는 꽃을 사랑하리라, 그게 아니고 살아있는 코스모스, 살아있는 강아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리라. 여러분들이 자기식구를 볼 때 ‘아이고, 불쌍해라. 죽어가는 것!’ 그런 안목으로 보라 그 말이지요.

 

 

왜 우리가 죽어간다는 것을 확신할 수밖에 없는가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계획은, 육으로 태어난 자는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언약궤 옆에서 깨닫는 거예요. 우리는 마지막에는 십자가 앞에서 확실히 깨닫고. 우리는 죄인이고 죽어야 마땅하구나, 그것을 십자가 앞에서 깨닫는 거예요.

 

 

바로 그럴 때 내 대신 죽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겁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우리도 같이 아들 되면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겁니다. 이게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 가족의 하나님이 된다.’는 거예요. 이 가족은 육적인 가족이 아니고 영적인 가족 됩니다. 그 영적인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은 시내 산을 거쳐서, 에발 산 그리심 산을 거쳐서, 시온 산에 올라가야 되는데 그 시온산은 언약궤가 마지막 최종 안착되는 지점이에요.

 

 

완료가 되는 지점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한 장소에 안착되는데 그 장소가 예루살렘, 시온 산이 되는 겁니다. 그 시온산은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 인 맞은 사람 144,000이 종려나무 들고 가는데, 어린양의 피로써 깨끗하게 씻음 받은 사람이 그 시온 산에 참여가 되는 겁니다.

 

 

거기 가는 톨게이트는 하나밖에 없어요. 흠 없는 어린양의 피, 그 피를 받은 자는 그 피가 아들의 피기 때문에 그 피를 받은 사람들도 아들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아들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아주 특수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우리가 뭘 의지해야 되고 뭘 믿어야 됩니까? 한국교회가 썩었다, 썩든 말든 맘대로 하라고 하세요. 어차피 일반도로니까. 교인들이 떠난다, 떠나든 말든 맘대로 하세요. 나가든 말든 그것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계획은, 그 계획대로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받은 사람은 ‘시온 산에서 모이자.’ 한 그 모이는 장소, 지금의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이 아니고, 그 어린양의 피 앞에서 우리는 ‘제가 바로 죽어가는 자 맞습니다.’ 고백합니다.

 

그 죽어가는 자들을 사랑하시는 엄청난 사람, 본문에 나오지요, 칼에서 죽어간 너희들을 광야에서 사랑했다는 그 마지막 사랑은 자기 아들의 흘린 피, 화목제물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걸 여러분이 듬뿍 의지하면서 살아갑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의 계획, 대통령의 계획, 국가 간의 약속, 다 허무한 것들이고 소용없는 것들임을 깨닫게 해주시고 고속국도 뚫려버린 진짜 완공된 하늘나라 가는 그 길, 십자가의 길, 그 스케줄과 그 하나님의 계획, 그 것만이 저희들의 행복이고 의지할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