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104. 예레미야 30:18-22 / 긍휼받은 도성 본문
긍휼받은 도성(렘 30:18-22)
이근호
본문 말씀: 예레미야 30:18-22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오용익
104강-렘30장18-22(긍휼받은 도성)-jer11033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0장 18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00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30:18-2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포로된 야곱의 장막들을 돌이키고 그 거하는 곳들을 긍휼히 여길 것이라 그 성읍은 자기 산에 중건될 것이요 그 궁궐은 본래대로 거하는 곳이 될 것이며 감사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자의 목소리가 그 중에서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케 하리니 쇠잔치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영화롭게 하리니 비천하지 아니하겠으며 그 자손은 여전하겠고 그 회중은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며 무릇 그를 압박하는 자는 내가 다 벌하리라 그 왕은 그 본족에게서 날 것이요 그 통치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며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므로 그가 내게 접근하리라 그렇지 않고 담대히 내게 접근할 자가 누구뇨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우리 속에 연결이 되려면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 따로 챙겨놓은 우리 자신을 위한 자리가 파괴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나 다른 선지서에 보면 파괴하고 다시 세우고 파괴하고 다시 세우고, 이런 것이 번갈아가면서 자꾸 나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연결하는 것에는 우리 인간의 것, 쉽게 말해서 죄가 묻어 있고 죄가 나오는 것을 주님께서 용납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주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그들과 함께 동행해야 되는 두 가지 일을 다 하시기 때문에 날마다 우리를 부수고 세우시고 부수고 세우시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사람 입장에서는 하나님마저 자기 하나님으로 삼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부터 든든히 갖추고, 자기 자신부터 확고하게 유지를 시켜놓고 그 다음에 나의 확고하게 유지된 그것을 옹호해주고 부응해 주는 그런 하나님을 자꾸만 원해요. 하나님께서 나를 친다든지 때려 부순다든지 내 것을 없앤다든지, 그런 하나님을 별로 원치를 않고 있습니다.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실망할 때나 만족할 경우에 무엇 때문에 실망하고 무엇 때문에 만족하는지 말씀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거예요. 검토하는 것은 이런 예를 들면 아주 쉬워요. 예수는 안 믿는데 모든 것을 다 누리고 가졌을 때 우리는 얼마나 부러워합니까? 그 사람이 예수는 안 믿는데 그 사람이 가정도 하는 일도 모든 것이 잘 될 때, 사업도 잘되고 죽을 때도 고난 없이 죽고, 이렇게 모든 것이 잘 될 때 ‘아이고 부러워라.’ 하고 부러워하지요.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스럽다, 그 말 아닙니까? 그런데 그 사람에게 뭐가 빠져 있는가, 예수님이 빠진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빠진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빠져버리면 아무리 잘살고 남들 보기에 후덕하고 인품이 높고 인격적으로 사람답고 칭찬을 받는다 할지라도 언약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람취급 하지 않습니다.
한 줌의 재로 취급하지요. 짐승보다 더 못한 자로 취급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과 인간의 관점이 이렇게 다릅니다. 예수는 안 믿는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진 것에 대해서 우리가 부러워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깨어질 요소를 우리가 아직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따로 챙기면서 덧대기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시도를 하니까 하나님에게 허용이 되지를 않는 거지요.
내 것도 챙기고 구원까지 받으려고 시도하니까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과 전혀 상관없는 구원이 되겠지요. 제가 며칠 전에 어디 가서 들은 이야기인데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유치원 원장님인데 팔십 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한 것도 잊어버렸대요. 그런데 3월 신학기에 딱 80명이 되었답니다.
얼마나 신기한지 90명 되게 해달라고 할 걸 괜히 80명만 되게 해달라고 해서 80명이 되었다고 하면서 굉장히 감격해 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유치원생 80명 된다는 것이 성경 어느 구절에 나와 있나, 아무리 봐도 성경에는 유치원을 80명 채우라는 이야기가 없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80명을 채워야 된다는 생각은 어디서 나왔느냐, 아직 자기 자신이 죽지 않고, ‘나라는 것은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이정도 영역에서 이정도 힘을 가지고 세력을 가질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인정하겠어.’라는 데서 나온 생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80명을 달라고 했는데 달랑 8 명밖에 주지 않았을 때 비로소 세상이라는 것이 내 뜻대로는 안 된다, 라는 것과 더불어서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그것은 기본이고요, 그러면 세상은 누구 뜻대로 되는가? 주님의 뜻과 내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야 돼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내 뜻과 주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내 뜻이 없다고 해서 주께서 일을 못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문제는 그 반대입니다. 내 뜻이 있는 것으로 인해서 매일 주님의 뜻이 방해받고 있고 주님께서 섭섭해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이렇게 정리하면 되겠지요. 나에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을 내 일에 끌어당기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다고 볼 수가 없어요.
본문에서 유념해서 봐야 할 것은 18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포로 된 야곱의 장막들을 돌이키고” 할 때 ‘포로 된 장막’이라는 것이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구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야곱의 장막을 구원하는 겁니다. 야곱의 장막이 뭐냐, 하는 것은 설사 야곱의 장막에 해당되어서 구원되는 본인도 구원받기 전에는 몰라요.
야곱의 장막이라는 것을 생각 못합니다. 사람은 자기 장막밖에 몰라요. 자기 집구석, 자기집안, 내 식구 내 가족밖에 몰라요. 내 장막 외에는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장막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야곱의 장막을 구원하고,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거든요.
나에서부터 출발해서 이스라엘로 넘어가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한 적이 없어요. 이스라엘은 언약으로부터 출발해서 언약으로 마감되는데 그 와중에서 생기는 것이 이스라엘이지 나부터 출발해사 내가 이스라엘 되어서 내가 이스라엘의 일원으로서 구원된다, 그런 것이 없어요. 출발이 나부터가 아닙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흔히 교인들이 실수하는 대목, 오류가 이런 거예요. ‘나는 어떻게 구원받아야 될까? 구원받는데 복음적으로 정리된 것이 없을까?’ 설교 들어보면 ‘첫째 대지, 죄인이 되어야 한다.’ 고 하지요. ‘아, 나는 죄인이 되어야 되는구나. 나는 죄인입니다.’ ‘두 번째 대지, 죄인 되었으면 십자가 피를 믿으면 된다.’ ‘십자가 피를 믿습니다.’
‘세 번째 대지, 이제 예수님의 피를 믿었으면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삶을 살면 된다.’ ‘그렇게 살겠습니다. 이제 나도 복음 안다.’ 그렇게 결론지어요. 그걸 약간만 헤쳐 보면 그 시작점이 자기구원, 내 것 챙기는 것을 포기를 안 하고 내가 구원받아야 하나님의 뜻이다, 하는 것을 전제로 깔고 시작해요. 무슨 권리, 무슨 자격으로 그따위 욕심을 냅니까?
‘어떻게 구원받아야 합니까?’ 할 때 ‘우리는 죄인 되면 됩니다.’ 할 때 ‘내가 죄인된 것을 알면 구원받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그 문장 자체가 틀린 문장이에요. 진짜 성령이 오셔서 죄인된 것 같으면 나부터 출발해서 나온 것, ‘내가 구원받으려면 내가 죄인인 것을 알아야 된다.’라는 문장자체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죄악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돼요.
이걸 흔히 ‘복음 안다, 언약 안다, 십자가 안다, 피 중심이다.’라고 그렇게들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차이점을 알지 못하고 있어요. 성령을 안 받아서 그렇겠지요. 이야기 끄집어내면 ‘나는 죄인’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죄인이라는 것이 먼저 내가 있고 그 다음에 죄인이라고 하다 보니 먼저 있는 그것을 스스로 부정하지를 않고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지? 아, 내가 죄인인줄 알면 되는구나. 까짓 거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항상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구색에 불과해요. 정말 죄인이라면 내가 구원 안 되는 것이 주의 뜻에 합당하는 것을 알아야 돼요. 주의 관심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야곱의 장막에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겁니다. 오죽 했으면 사도바울이 로마서 11장에서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 이야기를 하면서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은 특혜지 정상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자기 본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니까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보충용, 보완용으로 뒤늦게 개입된 것이 이방인 구원이지 이방인들 구원할 목적으로 유대인들이 타락한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이 말은 뭐냐, 유대인중심도 아니고 이방인중심도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기언약만 세워버리면 손 털고 하나님의 작업은 끝나는 거예요.
씨 뿌리는 비유에서 왜 네 가지 밭을 이야기합니까? 그것은 선악과를 왜 심어놓았느냐, 하는 것과 같은 차원이에요. 씨를 심고 옥토 되게 하는 것은 전부 다 우리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결정 날 문제지 옥토 되게 해달라고 손들고 달려든다고 해서 옥토 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씨 뿌리는 비유로 이야기 한 거예요.
옥토 될 사람 따로 있고 돌 짝밭 될 사람 따로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옥토 되고 싶고 천국가고 싶고 구원받고 싶어서 애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구원을 받는데 일체 영향력을 줄 수 없다는 거예요. 왜, 아담이 죽었으므로 이미 모든 인간은 죽은 겁니다. 해골, 그것도 바짝 마른 해골이 되어 있으라는 말이지요.
건져주고 안 건져주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하시는 예수님 소관이지 본인이 구원받겠다고 손들고 나오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할 때 항상 유념해야 되는 것은 믿지 말아야 될 사람에게 혹시 믿어지는 경우가 있을까봐서 항시 염려해야 됩니다. 믿어서는 안 될 사람이 이해되면 안 되거든요.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이해되면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러면 야곱의 장막이라는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세 가지 요소가 들어 있어요. 언약의 세 가지 요소가 뭐냐, 공간과 시간과 씨, 곧 인간입니다. 24절에 “나 여호와의 진노는 내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마지막 때에 알게 될 것이라, 하지요. 마지막 때라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숫자, 시간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게 되면 마지막 때에 벌이신 주님의 일이 느껴지는 거예요. 사람으로 출발하게 되면 사람 나름대로의 시간과 공간과 이해력이 있는데 그게 내 중심입니다. 독도는 우리 땅, 한국 땅이라는 것을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에서 그다지 신경 안 씁니다.
공간적으로 독도하고 나이지리아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대한민국 사람이기 때문에 일본이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면 거기에 대해서 화가 나지요. 공간적으로 한국 땅이라는 제한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자기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때 그냥 자기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둘러싸인 채 그 안에 들어 있는 나 예요.
일본에서 방사능 유출되었을 때 우리가 아무리 걱정해도 일본인들처럼 걱정은 하지 않잖아요. 왜, 일본 사람이 아니니까. 이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나와 관련되어 있느냐, 아니냐를 먼저 따지잖아요.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은 내게 유리한 시간과 공간을 따로 챙기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에요.
나한테 유리한, 내가 신경 안 써도 되는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나한테 신경 써야 될 것은 따로 챙겨서 나라는 것을 형성시킨 겁니다.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그런 나를 구원해 달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같잖지도 않지요. 세상에 대한 시간과 공간을 일방적으로 해석해놓고 무조건 인정해달라고 하니 말이 됩니까?
가지를 쳐내야 되는 거예요. 우리의 시간도 쳐내고 우리의 공간도 쳐내고, 나의 혈육적인 것, 나의 가족, 이것도 쳐내버리는 겁니다. 쳐내버리면 남는 것은 뭐가 남는가? 야곱의 장막, 하나님의 언약적인 시간과 공간은 예수님의 일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하신 일에 의해서 어떻게 발생되느냐에 관심을 갖게 되지요.
설교가 어렵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내가 여기 있는데 하나님은 저기 계시다. ‘하나님이여, 저를 건져주세요.’ 라고 하지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죄인 되면 됩니까? 십자기 피 믿으면 됩니까?’ 이런 식으로 다가가는 것은 내 위주의 구원관, 내 위주의 하나님 관, 내 위주의 천국 관, 전부 다 내 위주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서 언약의 사람을 만들어요. 언약의 사람을 만들어서 이 지상에 일을 일으킬 때 특이한 일이 일어나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내 위주로 하지만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이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찾아오신 언약의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게 이루어지더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특수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이 땅에서 발생시켜요.
그렇게 언약사건이 일어나는 사람을 데려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이 찾아와서 언약적인 조치를 취해놓고 언약적인 조치를 취한 그 다음에 데려가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마약을 먹고 취해서 집안에서 자기 가족을 때리고 행패를 부릴 때는 119나 경찰이 와서 그냥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아예 마취주사를 놓아서 행패를 못 부리게 해놓고 그 다음에 수갑을 채워서 꼼짝 못하게 해 놓고 그 다음에 그 인간을 데려가지요.
데려가면 그 마약 했던 인간이, 내가 경찰서에 간 것은 내가 걸어서 갔다, 애써서 갔다, 내가 119에 전화해서 내 발로 갔다, 그 따위 소리를 못하지요. 그런 소리를 못하고 뭐가 와서 수갑을 채우고 뭐가 와서 포승줄로 묶어서 나를 꼼짝 못하게 해놓고 경찰서에 데려온 다음 마약환자들 병원에 집어넣더라, 그런 고백을 하잖아요.
그 묶는 포승줄이 바로 언약이라니까요. 같은 땅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자기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언약사건이 중요한지를 몰라요. 이번학기에 유치원 애들 80명 채웠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했고 80명 채웠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 80명은 성경에 안 나옵니다. 그래서 언약이 아니라니까요.
80명 채우겠다는 것은 자기역사, 자기시간, 자기 공간, 자기 자신의 건강을 생각하는데서 발생된 거잖아요. 그래가지고 천국가면 천국 가서 자기자랑 할 거라는 말이지요. 뭔가는 수정이 변화가 전환이 일어나야 돼요. 그 전환은 기적입니다. 뭔가 내 뜻대로 했는데 하는 족족 안 되더라, 내가 원하는 것은 다 거부하시더라, 그냥 막연한 거부가 아니라 거부를 하시면서 ‘야, 너 성경말씀 새롭게 이해해. 너 중심이 아니야. 예수님 중심이야.’라고 말씀이 예수님 중심으로 성취된다는 것이 접촉이 되면 두 자로 기적입니다.
주님께서 내 인생에 깊숙하게 개입했다, 이것은 지식으로도 알아요. 그것을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내 인생에 깊숙하게 관여했다, 어떻게 관여했느냐, 내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던 이 성경말씀들이 들썩들썩 살아서 내 속에서 살아서 움직여서 성경말씀이 그야말로 진짜 현실인 것을 깨닫게 하고 내가 생각했던 내 중심의 공간과 시간과 내 혈육은 다 허구에 불과하고 환상에 불과한 것을 깨닫게 하시더라, 그러한 사건들이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야곱의 장막에서 야곱이라 하는 것은 아브라함언약에서 내려왔습니다. 아브라함언약이 이삭언약 되고 이삭의 언약이 야곱의 언약 되고, 아브라함 언약이 성취된 것이 이삭언약이고 이삭언약이 성취된 것이 야곱언약이고 야곱언약이 성취된 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입니다. 그러면 야곱언약에게 긍휼이 주어진다는 것은 그냥 가만있으면 긍휼이 주어진다는 뜻이 아니에요.
야곱의 장막이란 야곱언약에서 보면 야곱은 자기중심의……,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자기시간, 자기 공간, 자기축복, 내 가족, 열두 아들은 내 아들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 야곱과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자와 직접 얍복강에서 밤중에 붙었어요. 왜 하나님께서 밤중에 찾아가서 야곱에게 싸움을 유도했습니까?
그것은 기존의 야곱, 육적인 야곱, 자기밖에 모르는 야곱, 이 야곱과의 부딪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은 네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깨우치기 위해서 밤중에 야곱과 싸웠던 거예요. 그 때에 야곱은 자기 힘의 근원이 되는 환도 뼈가 왕창 내려앉지요. 그 때부터 지팡이 짚고 저는 사람이 된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야곱이 받은 축복이 뭐냐, 야곱 이름이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이것은 접촉이에요. 이것은 기적입니다. 그전까지 내 노선으로 살다가 내 노선의 끝은 천국인줄 알았는데 자기노선의 끝은 천국과 늘 싸워야 될 가짜 천국이었던 겁니다. 교인들이 교회 와서 천국가게 해달라는 그것은 가짜 천국이에요.
진짜 천국은 죽어서 하늘나라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고 이 지상에 십자가지신 예수님의 아픔과 부딪힐 때 그게 이미 지상에서부터 시작된 새 언약의 노선입니다. 유치원생 80명 되게 해달라고 해서 기도응답 받아서 80명 되니 고맙습니다, 했는데 어느 날 성령이 오게 되면 내 죄 때문에 죽은 주님이 그 십자가의 피를 흘렸는데 그 내 죄가 뭔지를 소급해서 생각해 보니까 80명을 채워줘서 좋다고 까불었던,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나의 원수 취급했던 그 죄가 바로 그 죄군요,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천국이 시작이 된 겁니다.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을 마련하신 주님께서 먼저 방문해서 그 사람에게 천국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알려주는 부딪힘이 이미 시작된 거예요. 그럴 때 그 사람은 80명 기도한 것만 죄가 아니라 내가 그동안 했던 모든 것, 숨 쉬는 것까지 모든 것 까지 다 천국에 합당하지 않는 죄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되겠지요.
그러면 그 분은 유치원 때려치우고 기도나 할까요? 문제는 이거예요. 새로운 천국 가는 노선이 인간의 기능이나 행위나 직업을 바꾼다고 해서 그 노선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떤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우리가 그 노선에 유지될 수 있는 자질이 우리에게서 안 나옵니다. 우리는 그 노선의 은혜를 입는다고 할지라도 언제든지 그 노선에서 이탈해서 다른 노선으로 갈 공산이 많아요.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예수는 안 믿는데 모든 것이 잘 될 때, 불신자들이 그런 자랑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이 권사, 교회 바꿔 봐도 소용없다니까. 우리교회에서 내가 기도하는대로 다 응답돼. 둘째 아들 모 공사에 취업하고 큰 딸은 의사한테 시집보냈고, 이렇게 응답이 잘되는데 기도응답도 안 되는 교회 왜 다니는지 모르겠다.’
그럴 때 우리는 갑자기 그것이 부러워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상하다. 복음 아는 효과가 있어야 되는데 그 효과가 없어져버렸으니 이 노선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우리는 다시 저쪽 노선을 부러워하게 되는 겁니다. 천국 가지 못하는 사람을 그렇게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 노선이 유지되려면 처음도 주님의 기적으로 주어져야 되지만 그 유지도 기적과 기적의 연속으로 주어져야 되지요. 다만 주께서 약속하신 것은 한 번 택한 사람은 버리지 않는다는 그 약속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노선을 원하지 않더라도 주께서 ‘그 노선은 아니야.’라고 자꾸 자기노선으로 몰아넣지요.
영남권 신공항 백지화 된 것에 대해서 전라도 광주사람들은 아무감각 없습니다. 신공항이 백지가 되든지 검은지가 되든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런데 신공항 백지화 되었다고 데모할 때 ‘대구의 교회들이 기도 참 많이 했는데 왜 이것이 백지화 됐노? 대통령이 장로인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서 좀 해주시지.’ 그렇게 되지요.
우리는 뭔가 사건이 하나 터지면 갑자기 그것이 탐이 나고 그리워지는 거예요. 또 다시 주께서 기적을 주시게 되면 ‘아하, 주께서 주시는 그 영생이라는 것이 신공항 건설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인 것을…….’ 그 순간 또 다시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늘 스스로 인도하시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전화하는 것을 지나가면서 들었어요. 교인인데 전화통화 내용을 그대로 말씀드릴게요. ‘언니는 고추장 담그러 갔습니다.’ 하는 거예요. ‘언니는 고추장 담그러 갔습니다.’ 하는 말이 왜 나왔냐 하면 ‘대 심방 가는데 언니가 어디에 갔느냐.’고 한 거예요. 그래서 나온 답변이 ‘언니는 고추장 담그러 갔어요.’
바로 그것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상대화 가운데 하나잖아요. (언니가) 고추장 담그는 일 따로 있고 예수 믿는 일 따로 있습니까? 제가 여러분들께 질문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게 따로 되지를 않아요. 고추장 담그는 것은 세속일이고 교회 나오는 것은 영적일이라는 구분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천국 가는 노선에 있으면서 고추장 담그는 일이 있더라도 이것도 주께서 주신 은혜라고 여기면서 ‘언니는 고추장 담그러 갔고 나는 담에 담글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그렇지 않고 교회일은 주의일이고 고추장 담그는 것은 세상적인 일이라고 구분 짓게 되면 그 사람은 같은 고추장을 담가도 다른 노선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 천국의 사건이라 하는 것은 고추장을 담그든 된장을 담그든 이 지상에 흔히 우리가 걷고 말하고 일하고 목욕하고 뛰놀고 ……, 이러한 모든 일상가운데서 우리는 우리 맘대로 하면서도 완전히 천국으로 가고 있는 그 노선, 길이 될 수 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아이고, 지금 대 심방인데 고추장이나 담그고 있고……, 빨리 교회 나오라고!’ 이게 영적인 일이나 주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일상적이고 별 특별한 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 말 ‘언니는 고추장 담그러 갔습니다.’라는 그 말이 제 뇌리에 콕 박혔어요. ‘고추장 담글 는 고추장 담그자. 고추장 담그면서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하는 거예요.
고추장 담그면서 천국 갈 수 있고 애들 기저귀 갈면서 천국 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세속적인 일이라고 취급하지 말자, 고추장, 기저귀, 그 하나하나에 다 주님의 은혜로 이끄시는 겁니다. 고추장, 기저귀, 거기에 인생 걸지 말라고. 구원받는 것은 주께서 지금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날마다! 어떤 작용?
고추장 남들은 잘도 담그는데 왜 나는 이 모양인가, 이런 식으로가 아니라 그런 속에서 다시 한 번 우리가 무엇에 만족하며 무엇에 실망하는지를, 진짜 우리가 감사해야 될 것은 주께서 고추장 담그는 이 사소한 일까지라도 주께서 주시는 은혜인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천국의 노선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야곱의 장막에 주신 긍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부터 먼저 챙기고 그 다음에 천국 챙기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먼저 우리에게 침투하여서 우리가 지금 평범하고 사소한 일 가운데서도 주의 손이 떠나지 않고 우리 방향을 바로잡아 주시는 것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한시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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