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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레 1:3-9 / 번제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레위기

레 1:3-9 / 번제

정인순 2011. 1. 13. 10:28

2. 번제(燔祭) (레 1:3-9)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레위기-1990/(02)번제(레1,3-9).MP3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레위기-1990/(02)번제(레1,3-9).hwp

 

 

  요즘 현대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노라면 아주 커다란 쇠뭉치를 뒤에 매달고 억지로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서 한 바탕 웃고 나도, 그 뒤에 찾아오는 허전함과 근심은 그 누구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술을 좋아하고, 스포츠를 좋아하고, T.V를 안 본다고 말하면서도 보고 또 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술이나 T.V나 모두 다 같은 것입니다.  지금 나의 현실을 잊어버리고 박찬호 같은 스포츠의 영웅이나, T.V의 드라마의 세계에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들어가 살아보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만화영화, 특히 로버트가 나오는 만화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지금은 자기가 힘이 없지만 그 만화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되어서, 힘센 로버트가 되어서 나쁜 놈들을 다 박살을 내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집 아이들은 만화 영화를 보고도 자기들 마음에 다 안 차는지, T.V를 끄고 나서 저희들끼리 한 참을 "피카츄", "후레쉬 맨" 하고 설쳐됩니다.  가끔 저도 한 번씩 끼어 들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처럼 인생이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린아이나 어른들이나 모두 다 같습니다.  여러분들 요즘 거울을 자주 보십니까?  20대의 피부가 탱탱한 처녀 시절에는 시간마다 보았겠지만, 지금은 잘 안 보잖아요?  봐 봤자 주름만이 쭈글쭈글한, 고생에 찌들린 그 얼굴 밖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울을 보고 나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노!" 하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자기가 돈이 많든지 적든지 간에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인생이란 이러한 무거운 짐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벗어버리려고 해도 도무지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잠을 자도 그 무거운 짐은 항상 나의 꿈속에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때로는 징그럽기까지 합니다.

 

  이런 인생에 있어서 과연 하나님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이런 우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곰곰이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십니까? 

 

  혹시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인생에 있어서, 또 하나님까지 있으니까, 귀찮은 분으로 여기지는 않습니까?  내가 일주일동안 회사에서 고생고생을 하다가 쉬는 날이 되어서 푹 쉬려고 하는데, 또 교회에 가야 된다고 불평을 터뜨리지는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내가 먹고살기도 바쁜데 또 주님의 말씀에 순종도 해야 되지, 얼마나 힘이 드느냐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분명하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라고 되어 있는데, 나에게는 전혀 쉰다는 느낌은 없고, 힘만 점점 더 들더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시간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일 수밖에 없습니까?  하나님을 안 믿으면 이 시간에도 내 마음대로 나가서 놀 수도 있고, 가족들하고 놀러 갈 수 있는데, 하나님을 믿기에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나의 시간들을 다 바쳐야만 하는 것인가? 

 

  그러나 여러분, 도대체 무엇이 사실이고, 거짓인가를 한 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 인생의 괴로움을, 무거움을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분명히 아실 텐데, 왜 나를 자유롭게, 평안하게 해 주지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우리가 분명히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려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들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 차례 강조를 합니다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내가 믿는 하나님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1장 3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제사순서가 제법 복잡합니다.  그냥 정성을 다해서 제물을 잡아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맛있게 드시면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 뭔가를 하나 하나씩 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물을 잡을 때는 제사장이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모두 잡아서 해 놓으면  제사장은 들고 가서 태우는 일만하고, 실제 모든 여러 가지 일들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다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제물을 드리는 사람에게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일일이 다 시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그 짐승이 정해져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소를 잡고, 그렇지 않으면 양이나 염소, 그리고 그것도 아니면 새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특히 암컷은 안되고 흠 없는 수컷으로 잡으라고 하십니다.  물론 새는 상관없습니다만.  제물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먼저 제사를 드리는 제물을 잡으면 피가 나오는데, 그 피를 제단 주위에 뿌려야 되고, 그 제물을 잡아서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여러 조각으로 나눕니다.  오늘 본문에는 각을 떤다고 되어 있습니다.  짐승을 여러 조각으로 각을 뜨고, 내장도 모두다 끄집어내어서 깨끗이 씻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끗하게 다 준비를 해 놓으면 제사장이 그것을 가지고 제단 위에 올려놓고 불에 태워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때 제물이 타는 그 냄새를 하나님께서는 향기롭다고 하시면서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제사를 짐승을 잡아 불에 태운다고 해서, 태우는 의미의 태울 '번(燔)'자를 써서 "번제(燔祭)"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짐승을 잡되 아무 짐승이라도 되는 것이 아니고, 또 통째로 그냥 태워서 드리면 안 되고 각을 떠서 내장은 깨끗하게 씻고 가죽은 가죽대로, 머리는 머리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다 나누게 하시고 하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게 하시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다 있습니다. 

 

  이것은 뭔가를, 큰 비밀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렇게 일부러 하신 것입니다.  괜히 고생시키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삶에 찌들린 인생에게, 무거운 쇠 덩어리를 끌어가는 불쌍한 인생들에게 참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러한 복잡하고 힘든 제사를 지내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제사를 통해서 과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제사의 비밀을 우리는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꼬꼬마 텔레토비" 라는 T.V프로가 아이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보라돌이', '뚜비',  '나나', '뽀' 라고 하는 인형들이 나옵니다.  그러한 인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 인형들이 인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특히 여자아이들이 인형을 좋아하는데, 누군가 그 인형을 빼앗아서 때리면 그 아이는 자기가 맞은 것보다 더 아프고 슬프게 웁니다.  왜 인형을 때리느냐는 것입니다.  즉, 그 인형을 때리는 것은 그 아이에게 있어서 자기를 때리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말로, '그 인형과 자기를 동일시한다' 라고 합니다.  즉, 내가 인형이 되고, 분명히 인형은 인형이고 아이는 아인데, 서로 전혀 같지 않은데, 그 아이는 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같이 하나라는 그런 생각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에 그대로 적용시켜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 아이는 그 인형과 자신을 하나로 여겼듯이, 이 바치는 제물과 드리는 사람이 하나라는 느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을 바칠 때에는 반드시 바치기 전에 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4절의 말씀을 보면,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할지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이 직접 안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이 안수를 합니다.  안수, 아시죠?  머리에 손을 얹는 것입니다.  이 안수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이 신약 시대에 넘어오면 세례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나의 운명이 바로 이 제물의 운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수를 그 드리는 제물에게 하는 것은, 이 제물은 단순히 짐승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짐승이 죽는 것은 바로 내가 죽는 것이요, 내가 죽어 깨끗이 씻어져서 불에 태워지는 것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무슨 수를 써도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피를 흘리고 죽임을 당해서 불에 태워져 없어지는 그 제물, 그 처참한 모습이 바로, 그 제물을 드리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제사를 통해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우리들이나 고달프고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얼마 고생을 많이 했습니까?  광야 길을 걸어다니면서, 낮에는 불볕 더위와 싸우고 밤에는 추위와 싸우고, 길이라도 좋습니까?  온갖 해충과 지저분한 것들이 깔려 있지요, 먹을 것이나 풍족하게 있습니까?  그야말로 죽지 않을 만큼만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를 다닐 때마다 불평을 했던 것입니다.  "이게 무슨 고생이고"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원래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비참하게 불에 태워져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참된 모습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불평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인가를 똑똑히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면서, 그 불에 태워 사라지는 짐승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야말로 자기들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아무 소리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 제사를 무슨 제사라고 했습니까?  바로 '사랑의 제사' 라는 것입니다.  누구의 사랑입니까?  인간의 사랑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지금 당장 죽여도 시원치 않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사를 통해서, 그 제물을 받으시고 용서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을 바칠 때 그냥 바치지 말고 안수하고, 즉, 네 모습이라고 여겨서, 하나로 만들어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제물로 바치려고 잡는 양이나 소를 자기의 모습으로 여기고서 직접 자기가 그 제물을 잡는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그것을 알라고 제물을 제사장이나 다른 사람이 잡지 않고, 제사를 드리는 본인이, 자기 자신이 직접 잡는다는 것입니다.

 

  짐승에게 칼을 찔러서 피가 날 때, 그것은 바로 자기의 찔림이요, 아픔이 되는 것이고, 그 고기를 여러 조각으로 나눌 때에도 자기의 몸이 찢어지는 아픔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장을 꺼내서 왜 씻습니까?  어차피 다 태울 것인데 말입니다.  자기의  죄를 씻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씻어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제물을 마지막으로 불에 태워서 하나님께 바칩니다.  "하나님이여, 저의 몸입니다. 받으옵소서!" 라는 마음가짐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불에 태워서 드리는 번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제사의 모습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드리는 제사는 그것은 제사가 아닙니다.  거기에 무슨 자기 희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음식을 놓고 마련할 거기에 자기의 운명을 그 음식에 같이 담아 놓고 가요? 아닙니다.  그냥 조상 귀신이 와서 맛있게 먹고 잘 봐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 놓고는 결국 자기들이다 먹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사, 제사" 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제사 "제"자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생각할 때, 너무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니까, 힘들고 고달프고 어렵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나와서 자기 인생의 모습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을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제대로 본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바쳐진 인생으로 산다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신 인생으로 산다면, 우리는 이러한 고생들이 고달픈 것이 아니고, 옛날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범죄 한 그 결과로 발생한,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날마다 회개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내 인생을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여긴다면, 우리의 삶은 고달프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꾸만 뭔가를 하려고 설치니까, 마음에 부담이 되고 강박관념이 생기고, 초조해지고, 마음에 평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라고 해서 나의 것이 아니고, 그래서 내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인생임을 안다면, 우리에게는 정말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비뚤어지고 엉망이 되어버린 인생의 모습을 안다면, 이런 죄의 비참한 모습을 제대로 안다면, 우리는 불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 원래 인생이 이런 것이 아니고, 죄로 말미암아 이렇게 참혹하게 부수어져 버렸구나!" 라는 것을 제대로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느낀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번제' 라고 하는, 불에 태우는 제사의 핵심은 바로 용서입니다.  자신의 죄를 철저히 깨닫고 회개할 때, 즉, 자기 자신의 모습을 담은 그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바쳐서 드릴 때, 하나님께서도 그 짐승이 타는 것을 제사를 드리는 자의 죄가 다 타 버리고 사라지는 것으로 보시고, 그 불에 타는 제물의 냄새를 향기롭게 여기시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태워 드리는 것, 없애 버리는 것, 그래서 용서함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냥 말로서만, "믿습니다" "믿습니다"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자기에게 아들을 많이 주고 돈도 많이 주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님을 믿는 모습이 아닙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 드리는 모습이 어떠합니까?  이러한 태워 드리는 모습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내장까지도 다 태워 라고 하십니다.  어느 한 부분만을 태워서 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몽땅 다 태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의 모습을 모두 바치는, 태우는 것입니까?  구약처럼 양을, 소를 잡을까요?  어떻게 해야 바쳐드리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 완전한 희생양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제사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제물에게 안수를 했지만, 이제는 온전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안수하는, 아니 안수를 받는, 그래서 그분과 하나가 되는 모습이, 세례 받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직 그분의 의로운 희생에 동참하는 길이 영생의 길이고, 이것을 바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전혀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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