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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마가복음 2:13-17 / 병든 자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마가복음

마가복음 2:13-17 / 병든 자

정인순 2011. 1. 7. 09:57

 

 

본문 : 마가복음 2장 11-17절
제목 : 병든 자
듣기 : 음성 , 보기 : 동영상

 

병든 자
이근호
2008년 4월 13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2:13-17

(막 2: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막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막 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막 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중요한 원칙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가위로 오려서 가슴퍅 안에 담아 두시기 바랍니다. 그 원칙은 바로 ‘죄인을 부르셔서 구원하심’입니다. 여기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나옵니다. 하나는 ‘죄인’이요 다른 하나는 ‘부르심’입니다.

사람이 살기 힘든 것은 자기 삶의 기준을 본인이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뭐든지 주위에 보이는 것은 몽땅 내 것으로 집어넣는 버릇을 발휘합니다. 예를 들면 어린 아기가 태어나면, 그 때부터 아빠, 엄마, 형, 삼촌 이 모든 관계들이 이미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치 기저귀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아무 것도 그냥 태어났구나”라고 알면 될터인데 그게 아니라 주위의 있는 모든 것들을 자기라는 쓰레기통 안에다 다 집어넣고서는 그 창고를 ‘자아’리고 부릅니다. 결국 자아란 ‘자기 것’을 두고 말입니다. 여기에는 재물만이 아니라 힘의 관계만이 아니라 자존심과 위신과 특히 자기 의로움도 담기게 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을 보는데 잘못된 기준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군불 때듯이 밑에서부터 자꾸만 욕심이 밀려들어와서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자아를 만들어내게 됩니? 하지만 또 다른 기준이 이 성경에 나옵니다. 마치 어릴 때, 집안의 다락방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중요한 물건, 잘 보지도 못한 진귀한 것들은 다락방에 둡니다.

어린 마음에 계단을 딛고 다락에 목을 빼고 보는 순간, 예전에 못보는 것들과 냄새가 밀어들어옵니다. 이와마찬가지로 그 다락방에는 밑에서 통하는 다른 기준이 통하는 동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지상에서 난무하는 인간들의 기준과는 달리, 자비와 은총과 사랑과 긍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동네입니다.

모든 죄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자신이 지은 죄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길 없이 해결해 버린 그런 동네가 다락방 동네요 천국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기준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나의 구원은 의인을 부르는 식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는 방식이다. 마치 병든 자에게라여 의사가 필요한 것과 같다’입니다.

사람이란 것은 원래 자아성이 필요치 않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세요. 그 새에게는 무슨 자아성이 있어, 자신의 살 길을 자기가 챙긴다는 식으로 창고를 만들어 곡간을 채웁니까. 새는 매일같이 하나님 의존적입니다. 이 의존적 관계를 통해서 새가 보여주는 하나님은 ‘기르시는 하나님’으로 보여집니다.

들풀도 마찬가지입니다. 들풀이 보여주는 하나님은 ‘기르시는 하나님’입니다. 역시 하나님과 의존적 관계가 맺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보세요. 그는 전혀 의존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매일의 과제는 그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걱정하는 겁니다. 새보다 더 못하고 들풀보다 더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본래의 의존적 관계를 말해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새처럼 길려지고 들풀처럼 입히는 것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와 의를 보여주는 이유로 인해 의존적 관계가 갖추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빨간 볼펜은 빨간색 심지를 지니고 있고, 파란 볼펜은 파란색 심지를 갖고 있듯이 우리 인간은 그 나라와 의를 보여주는 심지로서 하나님께 의존하는 관계에 있어야 인간입니다. 이런 의존적 관계가 없는 자는 기껏 자신의 욕심만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기존 인간들의 기준이란 ‘자기 것의 완벽성’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실패를 겁냅니다. 인간의 수치는 실패감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 실패감이란 자기가 만든 기준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기준 자체를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기준이 바꾸면 실패라는 것이 아예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치도 없는 법입니다.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수치를 느꼈지만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수치는 몸의 일부가 부끄러운 지경이 아니라 인간의 몸 전체가 수치를 느끼는 운명으로 주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늙고 죽는 것을 막을 자가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내세운 기준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세운 기준은 ‘피’입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십자가 피는 로마서 8:3에 의하면 ‘죄 있는 육신의 몸’에서 나온 피입니다. 그 피를 깔대기로 밑에서 받아내어 보세요.

그 피 속에는 우리들의 ‘죄 있는 육신의 몸’의 파편이 피로 변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 어떤 삶의 기준을 내세워도 하나님에게는 버림받을 소용없는 기준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법으로 만든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은 자신이 가진하는 의로움이 유지되는 기준입니다.

예를 들면, ‘돈을 훔치는 것이 나쁘다’라고 알 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돈을 왜 훔칠까요? 그것은 ‘나의 것’이 따로 있어 그 창고를 채우기 위해 돈을 훔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것’이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돈을 훔칠 이유도 없는 법입니다. 비록 지금 돈을 훔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의 것’이 따로 장만되어 있다면 언제든지 돈을 훔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아예 죄인으로 간주해서 더 이상 죄인된 우리 위주의 기준에 적용되지 말기를 원하십니다. 그 대신의 피의 기준의 그물망 속으로 불러주십니다. 기존의 도덕과 윤리이 기준에서는 항상 완벽해야 하고 실패하면 안되게 되어 있지만 피의 기준에서는 두 번 다시 죄를 찾을 길 없이 사랑으로 사라져버린 세계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의(義)입니다.

로마서 10:2-3에 보면,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기준에 집착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피를 모독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불러내시는 그 사랑을 기존의 우리 자존심 위주의 기준으로 인해 모독당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