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하나님의 선택(47) - 새언약 21 본문
하나님의 선택(47) - 새언약 21
99,7,12 이근호 (김진철 정리)
◈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 사람들이 하나님을 통해서 내려온다는 하나님의 뜻과, 직접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맞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신 내용이 맞는가, 아니면 사람들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 성경에 보니까 그렇게 되어 있더라' 라는 것이 맞는가? 직접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이 맞는 것이다.
*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서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느냐를 신경 안 쓸 수 없는데, 신경을 쓰더라도 직접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말씀하셨는가를 더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외에 다른 하나님의 뜻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라 해서 남들이 말한 것을 절대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하신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 설교 - '어느 목사가 이렇게 하더라', '어느 교인이 이렇게 생각을 하더라' 라는 것을 들을 때에, 그것을 무시하면 안 되고, 저것이 왜 죄이냐를 포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들이 이야기하는 것의 토대가 무엇이냐, 왜 잘못 되었느냐를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야기를 한 것은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생각과는 다르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하신 것과 여러분이 이야기한 것이 이렇게 때문에 다르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설교라는 것이다.
◈ 설교란 '대조하기' 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머리에 담고 있는 뜻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신 것과 서로 상충된다는 것을 낱낱이 다 드러내 보이는 것이 설교라는 것이다.
* 그러면 세상의 뜻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는가? 일일이 사람들의 마음 속을 다 들여다보아야 하는가?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던 생각이 바로 성경책을 보고 상상했던 뜻이니까, 그들의 생각으로 포착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행동을 하고 말을 할 때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어떤 취지로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했는가?' 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 모자라서 예수님을 뜻을 더한 것이 아니고, 이것은 기존의 한국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이고, 인간이 이미 알고 있다는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이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 인간들은 다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 부딪힐 돌 - 이것을 부딪힐 돌에 부딪혔다고 한다는 것이다(롬 9:32-33). 이런 부딪힐 돌이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닌 것이다. 인간들이 내세울 수 있는 모든 것은 부딪혀야만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철학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그래서 철학까지라도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성경 말씀을 이 정도 밖에 해석 못하는가?' 라는 것을 밝혀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뜻이 왜 이렇게 예수님의 뜻과 맞지를 않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놀 틈이 없다는 것이다.
(롬 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 9: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 그것이 왜 예수님의 뜻과 마찰을 일으키는가, 왜 맞지 않는가 하는 원인을 다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배후에 있는 악마의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비록 이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마귀의 나라에서 지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마귀는 세상에서 유명하다는 것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귀가 보기에 분명히 예수님의 뜻대로 살고 바르게 사는데 사람들에게 유명하지 않는 사람을 마귀는 주목하는데, 우리도 역시 이런 사람들을 주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가 '내가 바울도 알고, 예수도 안다' 라는 것은 마귀에게도 분별력이 있다는 것이다. 마귀는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한다는 것이다.
(시 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냥 부딪힐 돌로 살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양쪽 옆에 두 강도가 같이 달렸는데,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이 부딪힐 돌이었다는 것이다. 한 강도가 부딪힐 돌에 걸려 넘어졌는데,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부딪히는 것이다.
* 예수님의 종이란, 바로 예수님처럼 부딪히는 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이 된 자도 마찬가지로 부딪힐 돌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부딪힐 돌의 역할을 하는데, 그 원리를 사도바울은 행함으로 나오는 것은 다 죄악으로 본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이 행함에 대해서 얼마나 거부하고 있는지는 상상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행함을 차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전 2: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 만약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행함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체의 행함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십자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행함을 가지고서 십자가를 알 수 있다고 한 사람들은 그 뒤에 행함이 나오고, 성령으로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행함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구나', '우리는 구원을 받았구나' 라고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하늘나라에 들어온 사람과 들어오려고 아둥바둥거리는 사람과는 그 차이점이 하늘과 땅이라는 것이다. 결국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이야기한 뜻과 인간들이 자기 행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것과는 너무나도 상충된다는 것이다.
* 그러면 사람의 행함 밑에는 무엇이 있는가? 철학에서는, 니체에 의하면 사람의 행함 밑에는 의지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것을 '초인의 의지' 라고 하는데, 초인의 의지에서 초인에 된다는 것이다.
* 사회학에서는 이렇게 '초인이 된다, 안 된다' 라는 것은 타인을 보고 확인한다는 것이다. 초인이라는 것은 사회학적으로 구축된 그 틀 안에서 새롭게 형성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야구선수가 한국에서는 시속 150km를 던지면 굉장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160km를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 종교학자인 드루깽이 말하기를,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를 다 논하고 난 뒤에 남는 짜투리가 개인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개인이란 사회를 다 이야기하고 안 뒤에 남은 짜투리의 관심사가 개인이라는 것이다.
* 여자가 시집을 가서 남편과 자식을 뒷바라지를 하고 난 뒤에서야 비로소 자기 개인을 안다는 것이다. 여자 나이 50이 되어서 세상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시집' 혹은 '가정' 이라고 하는 사회만 알았지, 내가 누구이이며, 나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해도 가정을 위해서 기도했지, 내가 누구이며 십자가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 십자가에 세 사람이 달렸는데, 공통점은 세 사람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받는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죄를 하나님 쪽에서 없애주기 위해서 대신 받는 형벌이라는 것이다.
* 여기서 강도가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다. 폎생 강도질을 하면서도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그래서 강도 짓을 한 것은 나도 남들처럼 살아보자는 사회적 개념의 틀에서 한 것이고, 남들이 누리는 것을 나도 좀 같이 누려보자고 한 것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평생을 살면서 그 강도는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 그런데 베드로는 그물을 오른편에 던짐으로서 자기를 알았다는 것이다(눅 5장).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물을 버리느냐 하는 것이다. 찢어져서 못쓰게 되었는가? 여기서 그물과 고기는 사회적 인식인데, '내가 누구이냐' 라는 관점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지' 라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면 이 사회에서 사회인답게 남에게 뒤지지 않게 살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 이사야는 이사야 6장에서,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함으로, 이사야는 자기 자신을 알았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십자가 한편의 강도가 예수님을 만나고 사형이 취소가 되었는가?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도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서 자기 자신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울에게 있어서 이 사회에서 '나' 라고 하는 존재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 현대철학에 밝혀낸 것이지만, 철학은 처음부터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질문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타자(他者) 앞에서라는 것이다. 현대철학은 타자 앞에서 타자가 있음으로 인하여서 '나' 라는 존재를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다. 헤겔이 이것을 밝혔는데, '인간의 노동이 인간을 소외시킨다' 라고 하였던 것이다.
* 소외시킨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나를 감추어버린다는 것이다. 노동의 업적이 있으니 말이다. 자璲?하는 노동 속에서 진정한 자기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자기의 노동이 자기를 대체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으면, '나는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라는 것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대체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명함을 만들게 되면 자기의 직업을 기록하지, '죄인입니다' 라고 기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 승합차에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적어서 한번 달려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경찰에 걸려도 할말이 있지를 않겠는가?
* 하나님을 직접 만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서, 마노아가 부부가 밭에서 일을 하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제단에서 염소로 제사를 드리다가 그분이 그 불꽃을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보고서 비로소 천사인줄 알았다는 것이다.
*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산다든지, 무엇을 먹고 산다든지 하는 관점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알 것을 다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약이라는 것은 '오실 예수님, 즉 알 것을 다 아시는 분이 이런 이런 충격적인 일을 알려줄 그 날이 올 것이다' 라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그 모습을 조금씩 보여준다는 것이다.
* 화엄사상(華嚴思想) - 불교의 교리 중에, 큰 거울이 있는데 그 거울에 우주가 담긴다고 한다면 깨어진 거울 조각에도 마찬가지로 우주가 담긴다는 것이다. 즉, 부분에 전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화엄사상이라는 것이다. 화엄이라고 하는 것은 꽃이 활짝 피는데, 만가지 꽃 하나 하나에 만가지 우주가 다 담겨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또한 '인디라 상' 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분이 전체이고, 전체가 부분이라는 것이다.
* 불가지론(不可知論) - 그러나 불교이나 진리를 알지 못하는데, 단지 우주를 반사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은 실재(實在)를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 계몽주의에 와서는 실재란 없다고 본다는 것이다. 오직 나타난 현상만을 다룬다는 것이다. 실재가 '있고, 없고' 하는 것은 논의 밖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칸트에 의해서 더욱더 구체화되었는데, 알 수가 없다고 해서 이것을 불가지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 이나, 혹은 '사랑' 이라는 것 등은 나타난 현상이 아니니까 논하지 말자는 것이다.
* 경험론 - 그래서 드디어 경험론이 등장하는 것이다. 경험되어진 것, 그것도 반복해서 이루어지는 것, 그래서 모든 우연은 필연적인 원칙에 집어넣어서 필연적인 원칙과 방정식으로 풀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의 발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기하다' 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귀신이라고 해도 그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 청진기를 갖다 대어야만 하는 것이다.
* 과학 - 무지(無知)는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는데, 그런데 과학만이 그 무지에서 해방시켜준다는 것이다. 즉, 과학만이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어준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 있어서 구원자는 바로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신비로운 것, 우연적인 요소는 과학으로 다 바꾸는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과학적 사고방식이 사회학과 철학에도 관련이 되어서, '한 사회가 어떤 사회로 발전할 때에 반드시 어떤 과학적인 과정을 갖는다' 라고 한 사람이 바로 마르크스인 것이다.
* 마르크스 - 마르크스는 '자본' 과 '노동' 과 '토지' 와의 관계를 통해서 법칙을 만들었는데, 잉여이윤을 자본가가 착취한 것에 대하여 노동자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가 혁명을 일으켜 자본주의 없애버리고 사회주의가 되고, 나중에는 이 사회주의조차도 사라져 계급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가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즉, 자기의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자기의 필요에 따라서 쓰는 것이 공산주의라는 것이다. 마치 초대교회처럼 말이다.
* 경영학 분야에서도 아주 유행을 하는데,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12가지 방법' 등이 속하는 것이다. '적극적 사고방식을 추구하라', '모범이 되어라', '시간 개념에 철저 하라', '먼저 말을 하지 말고 듣는 쪽에 서라' 등이 판을 치는 것이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라는 것이 없고, '내가 사회인으로서 인정받으면서 살아갈 수 없을까' 라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 드루깽 - 요즘 드루깽의 책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는데, 물론 그가 신앙인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에 의하면, 진리와 비진리는 그 사회가 결정을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굳이 그것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 팔은 내가 흔들면 된다는 것이다. 그 사회가 인정하는 것에 따라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 이것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이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성령이 있고, 다른 쪽은 없음,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 시므온과 안나만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다른 사람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면서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주님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 인간은 내가 이 사회에서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드루깽은 이 사회에서 인간에게 참을 수 없는 것은, '너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 있으나 마나 한 존재라는 것을 옛날 여인들은 참아 내면서 시집을 살았는데, 왜냐하면 노동을 할 수 있는 것이 토지에서만 나왔기 때문에, 만약 시집에서 쫓겨나면 토지가 없기 때문에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는 농업 위주의 사회가 아니고 기술 위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너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라고 하면 항상 이혼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이혼할 준비가 된 가정이 무려 80%는 된다고 보는 것이다.
* 식당에서 일을 하면 자기 한 몸은 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자식들도 귀찮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바람을 피우게 되면 그 여자는 가정에서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기장 기분 나쁜 것은 바로 '너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 라는 것이다. 그래서 독립해서 자기 나름대로 일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혼이 늘어나는 것이다.
◈ 백수의 서러움은 무엇인가? 이 사회에서 있으나 마나한 존재라는 것이다 !
* 이 사회에서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어지면 마지막 보루인 엄마의 사랑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그 자식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이 사회가 요구하는 진리의 기준에 맞는 자식이 되어서, 나에게도 이런 훌륭한 자식놈이 있음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 바로 엄마의 소망이라는 것이다. 즉,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는 없다는 것이다.
* 자식이 잘하면 본전이지만 잘못하면 나를 아주 우사스럽게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자식 때문에 나까지 이 사회에서 있으나 만한 존재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공부 못하고, 날마다 남에게 피해를 주고, 음주 운전해서 한 평생 모아 둔 재산을 다 날리고, 그래서 남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말이다.
* 이것은 자식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버지를 존경하되 언제 존경을 하는가? 아버지가 이 사회에서 있어야 할 존재로 남아 있을 경우에만 존경을 한다는 것이다. 그 아버지가 만약에 술을 먹고 노름을 해서 재산을 다 날리고, 암이 걸려서 병원에서 한 달에 치료비로 수백 만원씩을 날리게 되면, 그런 아버지에게 효도할 자식이 어디 있는가? 그러면 갓바위에서 가서, '그저 자는 잠에 가게 하옵소서!' 라고 비는 것이다. 아버지가 이 사회에서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될 때에, 자식은 그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두르깽 - 존경이라는 것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부합될 때에만 존경받을 사람이 된다 !
* 이것을 설교자가 교회에게 말하게 되면 누가 잠을 자겠는가? 몸서리가 쳐지는 것이다. 교회에 온 사람들은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려고 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자기만 사랑하는 인간이지,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철학과 사회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이 속아넘어갈 줄로 일지만, 그러나 여유 있는 웃음을 웃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가 바뀌면 그 틀도 다 바뀐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철학자들은 이제 사회가 요구하는 데로 살지를 말자는 것이다. 만약에 자기가 배운 데로 기계를 전공하게 되면, 음악이나 예술 등에는 먹통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란 한가지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 동네에서는 박사지만, 다른 동네에서는 병신인 것이다.
*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 것이 왜 고통이 되는가? 가인은 다른 동네에 가서 떠돌이 이고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라고 하는 것이다. 죽을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 동네의 텃세라고 하는 것은 말로 표현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 왕따 !
◈ 정리하면 - 근대는 이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현대는 이것이 해체되면서 '네 팔 네가 흔들어라' 라는 것이다. 근대의 초점은 주체사상이고, 이 주체사상은 남과 비교하는 가운데 남들보다 더 초인이 되려고 하는 니체가 말하는 의지력, 승부근성이라는 것이다. 남을 이길 때에 사람은 사는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서 생기는 것인데, 그러다가 타자를 통해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이것마저 극복되어서, 타자가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타자라는 것이다. 자기 팔 자기가 흔드는 것, 어차피 세상은 자기 주특기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 이런 것을 알아두면 아무리 어려운 철학 책을 접하더라도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기초로 해서 책을 차분히 살펴보라는 것이다. 어렵다고 해서 쉽게 포기를 해서는 안 되고, 상대방의 패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요 11: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도다
(요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 도다 하였으니
* 가야바가 하는 말이,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된다' 라는 것이다. 여기서 온 백성이란 그 당시의 사회를 말하는 것이고, 한 사람은 예수님 개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개인이라는 것은 결국은 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하나의 사료(飼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51, 52절에서 이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서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말한다는 것이다.
(요 11: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요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은 반드시 인간의 선택을 이용하셔서 자신의 선택에 나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 인간의 선택은 죄였고, 하나님의 선택만이 의(義)였다는 것이다. 인간의 선택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죄악으로서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씨를 뿌리고 물을 주되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다 이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그래서 행함은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행함은 우리가 죄인 됨을 드러낼 뿐이고, 그리고 우리의 행함이라는 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정당성, 있으나 마나 한 인간에서 꼭 필요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그런 의지력이라는 것이다.
* 인간의 행함 밑에는 의지가 있고, 그 의지 밑에는 욕망이 있고, 욕망 밑에는 욕구가 있고, 욕구 밑에는 세포가 있는데, 욕구란 세포가 원하는 열량, 곧 에너지를 말한다는 것이다. 우리 몸은 2조의 세포로 되어 있는데, 이 세포들은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몸이 요구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 포카리스웨트
◈ 마아슬루의 7가지 욕구설
* [ 생존의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 지식의 욕구< 지혜의 욕구< 사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
* 생존의 욕구 - 먹고사는 것
* 안전의 욕구 - 불이 나면 도망가는 것
* 소속의 욕구 - 가정에 소속되는 것
* 지식의 욕구 - 무엇을 좀더 알고자 하는 것
* 지혜의 욕구 - 아는 것을 통일시키고자 하는 것
* 사랑의 욕구 -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
* 자아실현의 욕구 -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실현의 욕구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조직이든 무엇이든 자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아슬루의 이론의 문제점은 이것이 순서대로 진화한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은 동시다발적으로 막 튀어나오는데 말이다. 순서대로가 아니고, 생존의 욕구 다음에 사랑의 욕구도 올 수 있고, 지식의 욕구도 올 수가 있다는 것이다.
* [ 인간 = 동물 + ] - 마아슬루의 주장은, 사랑이니 무엇이니 해도 생존의 욕구가 먼저라고 하는데, 배고픈데 사랑을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인간은 짐승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 ' 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 질문 - 마아슬루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인간은 짐승이다' 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인간은 신이다' 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입니까?
* 답변 - 마아슬루는 인간의 욕구가 진화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당신도 할 수 있다' 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신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가 있으니 힘내라는 것이다.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라는 것이다.
* 짐승은 생식기를 노출해서 시도 때도 없이 성 관계를 하는데(사실은 짐승은 발정기에만 하고, 사람이 시도 때도 없이 하지만), 사람의 경우에는 생물학자들이 주장하기를, 뇌하수체가 성욕을 조절함으로 말미암아 성(性)이라는 짐승의 본능으로부터 윤리적으로 성장과 성숙한다고 본다는 것이다.
* 왜 이러한 주장을 하는고 하니, 이 사회에서는 짐승 같은 놈이 있고, 성자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기를 인간은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 동물적 인간 < 윤리적 인간 < 영적 인간 ] 이라는 것이다. 성자 같은 인간이 이 세상을 다스려야 하고, 짐승 같은 놈은 감옥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있는 그 당시 사회에 너무나 잘 맞는 철학이라는 것이다.
* 요즘같이 자기 팔 자기 흔들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X세대는 각자 잘 하는 것이 있으면 되지만, 그러나 기성 세대는 직업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한 달 수입이 얼마인가로 인간의 서열을 재편성한다는 것이다. 돈이 많은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 되고, 아무리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도 돈이 적으면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는 것이다. 머리 쓰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은 그만큼 짐승에 가깝다는 것이다.
* 지금 '좋은 세상 만들기' 라는 프로에 나오는 할머니들의 수입이 얼마나 되겠는가? 옛날에만 하더라도 고추농사를 지어서 학교에도 보내고 먹고도 살았지만, 그러나 기술의 향상이 없이 지금에 와서는 완전히 거지가 되는 것이다. 국민소득이 천 달러와 만 달러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기술의 향상이 없이 고추를 대량생산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이 할머니들은 그런 기술을 배울 머리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머리를 잘 사용하지 못하니 짐승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주차요원을 뽑을 때는 월수입이 200만원이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뽑을 때에는 월수입이 300만원도 적은 것이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압축도 못 푸는데 무슨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말인가? 그래서 목사들도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하지를 못하고, 그래서 '믿습니다' 라고 기도만을 강조하는 자들은 짐승에 가깝다는 설(說)도 있는 것이다.
* 라캉 - 철학은 이처럼 초인이 되기 위한 욕구에서 욕망으로, 이것을 라캉은 사회적 욕망이라고 했는데, 사회가 요구하는, 타자가 요구하는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 이렇게 생각하면, 목사는 교인들이 요구하는 그런 목사가 될 때에 목사는 목사다운 것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만 좋은 일을 하신 분이시다. 이 말은 사람들의 사회성에 대해서는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이다.
(요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 사람이 이유 없이 악하다고 할 때에 듣는 사람은 기분이 매우 나쁜 것이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노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잘하려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홍정길과 옥한흠 등이 지금 바르게 한번 살아보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근호 당신은 그런 것도 잘 모르면서 남을 비판하느냐는 것이다.
* 그러나 본인이 묻고 싶은 것은, '이렇게 교회를 방어하려는 것이 일반 현 사회에 요구하는 사회성이지 직접 이 세상에 내려온 예수님의 말씀과 맞는지를 비교하는가?' 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비교하면 사람들이 안 모이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런 것이 바로 악하다는 것이다.
* [ 온전한 뜻 = 하나님의 뜻 + 예수님의 뜻 ] ? -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은 맞으니, 거기에다가 예수님의 뜻을 보태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온전한 뜻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 쪽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도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만 하나님의 뜻이지 나머지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전혀 생각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 세포의 욕구 - 그 밑바닥에는 바로 세포가 있다는 것이다. '나' 라고 하는 세포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사회에 부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사람의 뜻을 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라고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라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 걸림돌 -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걸림돌로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의 역할은 끝나는 것이다. 오늘 할 일이 따로 있고, 내일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걸림돌의 역할을 할뿐이지, 내가 이 세상을 개혁할 필요는 없고, 내가 이 세상을 다 구원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일을 맡겨졌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일은 그때 그때에 맡기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43 페이지
⊙ 구원이란 결코 육의 기준에 의해서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약속의 일관성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책)
* 유대인들은 왜 성령이 이방인들에게도 내리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유대인들이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이란 '약속된 자가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성령이 오는 사건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유대인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성령이 오시는 사건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사건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베르그송 - 이것이 베르그송의 주장인데, 그는 사건의 다발로 보는 것이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없고 다만 사건의 지속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건의 지속, 이것이 바로 그의 '시간론' 이라는 것이다. 시간이란 없고, 사건이 발생됨으로 시간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 그 대표적인 예가, 어느 종업원이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에 20일 정도 건물더미에 갇혔는데, 구출되고 난 뒤에 몇 시간 정도 갇혀 있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20시간 정도로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는 콘크리트에 갇힌 것 외에는 별로 사건이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세포덩어리에 불과하지 인격은 없다는 것이다. 그 세포가 20시간으로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밖으로 나와서 그렇게 20일 동안을 있으면 굶어죽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깥에는 사건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 하루조차도 못 견디는 것이다.
* 생성론적 교회론 -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인가? 부활하신 주님이 사건을 계속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날 경우에만 교회가 되는 것을 '생성론적 교회론' 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형교회, 유형교회가 아니고 말이다. 칼빈은 베르그송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칼빈 이후의 인물이니까 말이다.
* 다시 말해서, 칼빈이 배운 것은 존재 철학이지 기능 철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시대가 그런 것이다. 운동과 존재는 모순되기 때문에, 제논의 화살은 날아가지만 순간적으로는 멈추어 있다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운동을 포착하니 포착이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래서 파스칼과 라이프니찌는 미분(微分)을 만들어서 쪼개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모아서 양(量)으로 만드는 것이 적분(積分)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을 공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마르크스에 와서는 노동시간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것에 의해서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 시간에 개입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은 과학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과학적이란 말?인격이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인간은 짐승으로, 일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이라는 기계는 몇 시간 노동할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인간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의 직업이 텐트를 만드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의 서신서들 중에서 이러한 텐트 만드는 기술에 대漫?한 마디 정도는 언급을 해도 되지를 않는가? 그런 기록이 있는가? 일하기가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는 했지만 말이다.
* 질문 - 교회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소멸론적' 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왜 아주 독특하게 '생성론적' 이란 용어를 굳이 사용하십니까?
* 답변 - 생성론적 교회론을 말하는 것은 성령이 임의로 불기 때문인데, 주의 사건은 임의로 터진다는 것이다. 그 원칙은 교만한 자를 낮추는 일에 꼭 개입하신다는 것이다. 성령충만은 우리의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십자가의 사건을 유발시키는데 있다는 것이다. 항상 교만할 때에 얻어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인사상, 나는 너 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에 반드시 얻어터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로서 '나는 잡초이다. 이름도 빛도 없이 사라져도 무방하다' 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명 안 해야 되고 병이 안 나아도 괜찮은 것이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 마치 전도서의 말씀처럼, 방금 태어났다가 방금 사라지는 그 아이와 나를 똑같이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유명해지려는 것을 다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유명해야 한다는 자기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이 인력으로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의 의식을 갖고 자기를 초월했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했다는 것 자체가 자기 부인이 아니고, 그것이 자기 긍정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것을 또 확인시키고 확인시키시는 것이다.
* 그래서 성령이 역사하는 것을 어떻게 체험하는가? 자기가 고난을 겪을 때, 이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볼 때에, 그 사람과 동일시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이 역사로 보면 되는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며, 나는 돌멩이에 지나지 않으며, 사람에게 차여도 마땅하다는 것을 알 때,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 나의 행함이 공격받을 때, 그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
* 성령의 역사는 성공이 아니고, 그냥 나를 무의미하게 만들 때가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나 같은 인간도 구원받을 수 있다니!' 라고 하면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일 때, 이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행함을 부인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44 페이지
⊙ 어떤 사람들은 요한복음 3:16을 토대로 하나님의 세상 전부를 사랑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책)
(요 17: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 내가 주신 자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성론적으로 하는 것이다. 한번 신자는 신자이지만, 한번 교인은 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게 주신 자'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두 아시고 내게 주신 자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 한번 성도는 성도이지만 한번 교인은 교인이 아니다 !
* 소멸과 생성은 같은 의미가 아니라, 소멸과 생성을 반복할 때에 그것을 생성론적 교회론이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이다. 교회 있음이 교회 없음이 되고, 교회 없음이 교회 있음이 된募?것이다. 하나님 때문에 교회 있음, 그리고 교회 없음, 또 하나님 때문에 교회 있음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계속 지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의 임무는 날마다 교회를 없애야 하는 것이다.
* 소멸론이 아니고, 생성론은 해체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있음이 괜찮은 있음이 되어 버리면, 이렇게 바라보는 눈이 나도 있음, 그래서 괜찮은 목사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없음이 되면 무의미한 존재가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교회는 내가 있으라고 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있게 하시는 것이다.
◈ 목사의 임무는 날마다 교회를 없애는 것이다 !
* 왜 목사가 사례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가? 교회가 없는데 말이다. 헌금이 들어와서 주면 그냥 고맙게 받는 것이다. 사실은 사례도 아니고, 그냥 얻어먹는 것이다. 있다면 주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 그래서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다루는 것은 주께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가 걱정한다고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잔소리한다고 사람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람되게 하시는 것은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직장과 가정에서 어떤 일이 발생이 되는데, 그 일이 사람되게 한다는 것이다.
* 목사에게 있어서 제일 황당한 것은, 설교를 하고 나서 자기 스스로가 불만스러워서 '계속 목회를 할까 말까' 라고 생각을 하는데, 교인들은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 난리를 피운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말이다. 이것은 주께서 그렇게 사건을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 지상에 있는 유대인이라는 조건은, 절대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당길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계약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복을 주지 않고서는 안 되는 어떤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 복을 달라는 자체가 자기가 불만족스럽다는 것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복 달라는 자체가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나 '복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늘 감사해야 하지, '복 주소서' 라고 하면, '나는 지금 주신 것에 대하여 마음에 안 듭니다' 라는 것이다. 복을 달라고 하지 말고 있는 복을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45 페이지
⊙ 유대인 조상에게 준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백성의 외도로 인해 잠시 이방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이로써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그 실현을 보게 된다. (책)
*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은, '야곱은 이스라엘이고, 에서는 이방인이다' 라는 그 성취가 개인적으로도 해당이 되지만 집단적으로도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온 이스라엘과 관련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 - 이것이 구약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사랑하시고 이방인은 미워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구약을 혈통적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혈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야곱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서 바울은 이것을 하나의 비유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려운 것인데, 비유로 본다는 말은 해석의 단절이라는 것이다. 비유는 아무리 파고 또 파보아도 해석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유자체가 육으로 해석됨을 막는다는 것이다. 우리 혈통은 사랑의 혈통이라는,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했다는 것을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야곱에게서 사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에서 야곱을 결정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이다.
◈ 창세기 18장의 '세 천사와 한 아이' 에 대해서
*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세 명의 천사가 와서 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할 때, 어떻게 세 명의 천사가 한 아들이 될 수 있느냐로 보지를 말고, 한 아들에서 세 명의 천사를 규명해 주어야, 이것이 진짜 삼위일체이며, 진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세 명의 천사가 아들을 낳는다면 아들이 세 명이 되어야 하지를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3에서 1로 넘어가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사의 아들을 낳는 것이 아니고, 한 아들을 낳는데 한 아들을 증명하기 위해서 무려 세 명의 천사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 한 아들을 증명하기 위해서 한 천사가 오면 될 텐데 세 명의 천사가 온다는 것은, 단절되었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 이것은 해석단절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이 말은 '어떻게 우리의 형상인데 남자 하나가 나오는가?(창 1:21)' 라는 것이다. '우리 형상' 같으면 복수로서 그 형상이 나와야 하는데, '왜 한 아들인가? 한 남자(아담)이냐?' 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창 15: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 여기서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라고 하는 것은 이삭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인데, 세 천사가 아들 하나를 고지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사 두 명은 심판을 하러 왔다는 것이다. 천사가 세 명이 온 것은 심판에 관한 것이 아니고 이삭탄생에 관한 이야기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세 마리의 암소, 세 마리의 암염소' 라고 한다면, 삼위일체와 맞아서 해석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데 "삼년된" 세 마리가 아니고, 한 마리라는 것이다. 한 마리인데 삼 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만약 일년 된 것이라면 출애굽기 12장에 의해서 이해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나의 알레고리는 여기까지라고 했는데, 드디어 해석이 된다는 것이다.
* 세 천사가 어떻게 아들을 낳느냐로 접근하니 해석이 안 되었는데, 반대로 한 아들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 천사가 등장한다고 하니까, 드디어 해석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삭 세 명이 아니라, 오직 '한 아들' 이라는 것이다. 한 아들에 관해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은 아들은 하나밖에 없음을, 그래서 신약에서는 메시야는 한 분밖에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한 아들을 위해서 세 천사는 증거인으로 세웠다고 하니, 해석이 풀린다는 것이다. 하나라는 것은 하늘과 땅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땅과 하늘의 만남의 최초의 구절이 창세기 3장 15절인데,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여자는 땅의 여자라는 것이다. 그 후손으로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 4장 1절에 나오는데,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한 것이 아니고, 하와로 인하여 여호와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하와는 가인이 하나님인 줄로 알았으나 착각(?)이었다는 것이다.
(창 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 암컷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한 아들이란 무엇인가? 이삭이 아버지로 인하여 죽임을 당할 때 숲 속에서 숫양이 나왔는데, 이것은 숫양의 수준은 이삭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삭은 하늘에서 낳게 하였다는 것이다. 약속의 아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숫양의 반대되는 하늘의 요소는 아비가 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상위등급인 양보다 높은 등급은 염소와 소라는 것이다. 그래서 상위등급에서 수컷이 되면 안 되고 암컷이 되어야, 이 숫양은 하늘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대비를 통해서 밝혀진다는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땅에 남자가 없다는 것이다.
* 그러면 삼년은 무엇인가? 왜, 세 마리가 아닌가? 한 마리의 수양이니까 상위 등급도 세 마리가 되면 안 되고 한 마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삼년인가? 그것이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것이다. 사실은 '왜 삼년인가?' 라는 것을 풀어놓고도, 등잔 밑이 어둡다고 깨닫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출 12:2)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 일년 된 어린양에서 '일년' 이라는 것은 '어리다' 라는 의미이고, '새로 시작한다' 라는 의미인 것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새로 탄생한 날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세 마리에서 '삼' 이라는 것은 '어리다'는 것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 즉, 출애굽기 12장에서 어린양을 바친 것은 새로 시작하기 때문에 어린양을 바쳤지만, 창세기 15장에서 '삼년 된 암소와 암염소' 라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기성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수양은 求첼【?태어났기 때문에, 하늘에 이미 있는 수명을 당기기 때문에 그냥 삼년 된 암소와 암염소라는 것이다. '삼년' 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늘과 땅을 연결한다는 것이다.
* 새로 시작할 때에는 일년 된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삼 년이라는 것은 이미 기존의 존재하는 것, 이미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주신 한 마리의 양, 곧 이삭인데, 천사가 세 명이 와서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는데, 복수가 왔지만 낳기는 하나라는 것이다. - ?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뿐인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하나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태어났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이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 아담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하다 !
* 그래서 구약학자들은 '우리' 라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천군 천사라는 것이다. 하늘의 형상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형상대로 만든 것이 사람(아담)이라는 것이다. 즉, 하늘의 요소가 담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아담은 예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깨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윤리적인 개념은 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에 가면 우리들이 하나님 형상을 보좌한다는 것이다.
* 이러한 사실은 루터도, 칼빈도, 바르트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알레고리처럼 들릴지는 몰라도, 성경을 일관되게 살펴보면 이것이 알레고리가 아니고, 제대로 된 해석이라는 것이다.
* 출애굽 때에는 왜 어린양인가? - 그것도 일년 된 어린양인가? 여기서 '어린양' 이라고 하는 것은 그 날이 이스라엘이 새로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년 된 수양으로 제물을 할 수가 없는 것이,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계약할 때에 일년 된 수양이 아니고 삼년 된 수양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물이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 인데, 즉 암수라는 것은 다르지만 삼년은 같다는 것이다.
* 암컷의 의미 - 하늘의 수명과, 그리고 하늘의 수명이면서도 다른 점은, 창세기 3장 15절의 땅의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땅의 일은 반드시 아들로서 태어나야 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들이 아니고 '암' 이라는 하늘의 약속의 성취자로서 온다는 것이다.
* 제물과 하나님 - 그래서 이 제물은 둘로 쪼개어 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제물의 본성은 무엇인가? 이 쪼개어진 고기 사이로 횃불이 지나가는데, 이것은 제물은 곧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제물이 왜 하나님인가? 하나님의 그 내부를 장식한다는 것이다. 쪼개놓고 마주본다는 것은 원래 하나라는 것인데, 이렇게 하나인데, 그 하나됨의 내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내부는 불이고, 이 불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횃불이 지나간 것은 하나님이 지나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제물이 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삭이 된다는 것이다. 장차 오실 하나님이 이삭이 된다는 것이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수양이라는 것이다.
* 그러면, 왜 세 마리는 안 되는가? 하나됨을 증거하기 위해서 전부 다 한 마리인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제물이 다 일년 어린양인데, 유독 창세기 15장에서 제물이 삼년인 것은 이삭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된 아들과 관련이 있기에, '여호와 이레' 라는 의미로 수양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외쳤던 그 분의 말씀을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 하늘의 요소가 땅에 나타날 때에는 수양으로 나타남을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컷은 땅이고 암컷은 하늘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수명이 같은 것은 하늘의 사람으로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출애굽 때에는 왜 어린양인가? 그것은 처음으로 시작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양이 아들이라는 것은, 창세기 22장에서 숲 속에서 이삭 대신에 숫양이 나타났기 때문인 것이다. 수양을 중심으로 해서 위에는 하늘의 계층이고, 수양은 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는 이유는, 창세기 22장의 모리아 산 사건에 근거해서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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