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하나님의 선택(34) - 산상설교 요약, 새 언약 9 본문
| 하나님의 선택(34) - 산상설교 요약, 새 언약 9 99,1,4 이근호 (구득영 정리) ▣ 산상설교를 다시 한번 정리하면서 ▣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마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 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 이 말씀을 언뜻 들으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무너지지 아니하는 집을 짓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에게 하신 것인데,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고 하니,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만 구원받는데 충분하지 않고, 뭔가 행해야 하는 것으로 여길 수가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구원 = 믿음 + 행함 ? * 여기서 '주여' 라고 부르는 자는 믿는 자로 여길 수가 있고, 그러므로 믿는다고 해서 바로 천국과는 연결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정훈택이 말하는 것처럼, [ 구원 = 믿음 + 행함 ] 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주장이 옳은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늘 생각해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 시간에 있어서 믿음과 행함 - 자,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시간적으로 보아서, '믿음+행함' 에서 시간적인 요소를 집어 넣어버리면 나중의 것이 불필요하게 된다. * 다시 말해서, 예수님처럼 행해 버리면 무엇이 필요 없는고 하니, 사실 행함의 앞에 오는 믿음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뒤에 오는 행함이라는 것이 믿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믿음 반, 행함 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머리를 감는다고 할 때, 아무리 머리를 잘 깎아도 머리를 감아야 이발이 마무리가 되고, 사실은 이 마지막에 더 강조점이 놓인다는 것이다. 예가 이상한가? * '믿음+행함' 이라는 것은, 사실상 마지막에 이 행함으로 마무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앞에 있는 믿음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도 산상설교에 나와 있는 것처럼 행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 많은 신학자들이 이렇게 주장을 하는데, 이러한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주장을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가 있다. ◈ 행함의 종류 - ① 교회 일을 행함으로 본다. - 전도, 봉사, 예배 등 ② 사회정의 구현이다. - 빛과 소금(주로 통합측) ③ 개인이 성전이기에 거룩해야 한다. - 신인합일(神人合一) * 이렇게 믿음에서 행함(성화)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교회라는 조직은 꼭 필요하며, 그래서 목사는 제자 훈련을 통해서 교인들이 사회에 나가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개인적인 성숙과 성화에 열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이렇게 주장하면, 교회성장의 당위성과 목사의 자기 입지를 보다 굳힐 수가 있는 것이다. 목사가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교인들에게 내세우는 이득도 함께 얻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이 바로 산상설교를 행함으로 보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들인 것이다. * 그런데 이것을 무조건 반박하려고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비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남을 비판하면, 잘못하면 자기의 것을 소유로 삼을 가능성이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것도 버릴 수 있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내 소유를 가지고 아무리 천국을 만들어 보아야, 그곳이야말로 지옥이면 몰라도, 천국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십자가를 지지 않았음을 날마다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천국은 결코 내 자존심을 세우는 곳이 아닌 것이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행함으로 설교를 하셨는데, 이 행함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해석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 예수님과 사도바울 - 그러면 여기서 사도바울로 왜 넘어가는고 하니, 우리도 번역된 글자를 다 알기에 예수님의 설교를 바로 보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사도들은 최초로 성령을 받은 자로서 그들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이다. 사도를 개인적으로 보면 안 되는 것이다. 사도들의 글들은 성령을 받아서, '진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이러하다' 라고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는 마태복음을 비롯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과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한 것이 같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받은 계시는 주님의 계시이고, 마태복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사도들이 받은 계시가 예수님의 말씀을 보완하는 차원도 아니고, 서로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 그러면 사도가 무엇을 받았는가? *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성령을 받아서 마태복음을 보는 자와 성령을 받지 않고 성경을 보는 자들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성경을 문자로만 보는 것이다. (고후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 성령을 받은 사람이 12 사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라는 것은 성령의 공동체이고, 머릿돌은 예수님이고 기둥은 선지자와 사도들인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보면서, '아, 여기에 있네!' 라고 싶게 넘어가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직접 보려고 하는 것보다, 사도들을 통해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 성령의 역할 - 요한복음을 보면 고발이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그런데 이것이 고린도 전서 5장에 보면, 아버지의 아내와 통간한 놈은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로마서에 13장에 보면, '탐내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라고 하면서 사랑으로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에는 무엇을 행하든지 성령으로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5장에도, 사랑과 자비와 온유 등이 나오는 것이다. (고전 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 도다 (고전 5: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롬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빌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여기서 갈라디아서 5장을 다시 한번 보자. (갈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 육체의 일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을 육체의 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얼마나 깊이가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산상설교에서는 육체의 일이 빠져버리고, 지켜서 행하지 아니하면 무너진다고 하는 것이다. 주여, 주여 라고 부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간다고 했는데, 사도바울은 이것을 육체의 일로 보고 있는 것이다. * 산상설교에서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이 구분이 안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천국에 간다고 되어 있는데, 그런데 성령을 받은 사도가 하는 말이, 육체의 일이 따로 있고 성령의 일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가 바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라고 하는 것이다. ◈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는 행함으로만 되어 있던 것이, 사도바울에 와서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인간들은 '행하라' 라고 하니, 자기가 육체인 줄도 모르고 행한다고 폼을 잡는 것이다. 그것이 여전히 육체에 속해 있는 일에 불과한 것인데도 말이다. ◈ 사도바울에 있어서 육체의 일 = 믿음, 행함 * 이 육체의 일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믿는 것도 육체의 일이고 행하는 것도 육체의 일이라는 것이다. 육체의 일은 인간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믿음+행함'을 해도, 여전히 육체의 일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아느냐고 사도바울이 외치고 있는 것이다. 산상설교는 포괄적인데, 넓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해석은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내려주는 것이다. * 바둑에 '대마는 죽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믿고 10급에 불과하면서도 자기가 마음대로 두면 대마고 뭐고 다 죽고 만다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행함으로 하면 망한다' 라고 했을 때, 이러한 행함 속에는, '네가 주여, 주여 하는 것과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갈 5장에 있듯이, 참 믿음과 행함은 오직 성령에서만 나온다' 라는 것이다. 이痼?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도바울의 해석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이 현저히 다르니까 말이다. * 사도바울이 이렇게 나누어서 말씀을 해석하고 있으니, 그러므로 우리도 자의적으로가 아니라, 이렇게 나누어진 입장에서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다시 새緞?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이렇게 산상설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행함을 주장하는 자들이 하는 말이, 자기들은 이러한 것을 이미 다 안다는 것이다. 즉, 내가 믿은 것이 성령께서 하신 일이기에, 그래서 믿은 내가 산상설교를 지키는 것이 당연히 성령이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 그러나 성령의 일이라는 것은 육체의 일과는 차이가 나야만 하는 것이다. 육체로 못하는 것을 성령이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육체로 못하는데, 그런데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감추고, '주여, 최선을 다합니다' 라고 바꾸는 것이다.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그런데 이렇게 사람이 온전해지면 십자가를 질 필요가 있는가? 그런데 성경은 누구든지 죄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 것이다. (요일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일 2: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 율법의 기능 - 그리고 율법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아 버린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저주 아래에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갈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 온전하면 죄가 없고, 그렇게 되면 십자가가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이다. 날마다 새로운 욕심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욕심은 인간에게 있어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나오는 것이다. ◈ 욕심이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 자기가 온전하지 못하는 것이니까, 최선을 다한다고 우기는 것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고, 주님은 온전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율법의 하나라도 어기면 안되고 다 지키라는 것이다. 무엇을 봐주는 것이 없는 것이다. ◈ 산상설교의 목적 - 그래서 산상설교라는 것은 구원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이다' 라는 것을 계시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즉, 세상은 불의하며, 주님은 온전하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성경을 구원 문제로 다루어 버리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종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창세 전부터 종으로서, 주님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선택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시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성령 - 인간의 관심사를 구원문제에서 계시문제로 바꾸는데, 이것을 바울은 성령이라고 하는 것이다. * 성령이 오고 나니까, 구약에서 말한 모든 것이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즉, 구약에서 인간을 제외시켜버림으로, 구약이 구원문제에서 계시문제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계시문제였는데, 이것이 성령의 오심으로 밝혀지게 된 것이다. * 그러면, 누가 이러한 사실을 아는가? 성령이 하신 것이기에,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 산상설교의 의미 -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의와 거룩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분이시다. *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구약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하기 위해서 올라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그래서 그가 얼마나 무섭고 거룩한 분인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갔다는 것이다. * 즉, 모세가 하나님께 간 것은, 이러한 계시의 차원에서 율법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신약에 와서 이 일을 예수님이 그대로 하신 것이다. * 참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이 십계명만 주신 것이 아니라, 십계명과 아울러 제사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 제사법을 보면, 피를 뿌리는데, 먼저 십계명이 들어있는 법궤 위에다 뿌리고 백성들에게 뿌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피라는 흔적을 통해서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마치시고 가는 곳이 어디인가? 자기의 피를 뿌리기 위해서 십자가로 가시는 것이다. 친히 화목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것이다. (히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이러한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힘입어 담대히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이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 만약에 강도사 고시 시험문제를 낸다면, "예수님의 산상설교와 로마서 3장을 연결시켜 보아라" 라고 한다면, 신구약 성경을 다 뚫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산상설교의 '내 말을 지키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 라는 것과 롬 3장의 '하나님의 화목 제물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른다' 라는 것을 연결시켜 보라는 것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과 제사법이 다 동원되어야 하는 것이다. ◈ 사랑 - 그러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여기서 이룬 것은 무엇인가? 제사법만 이룬 것이 아니라, 십계명부터 하나씩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 십계명을 로마서에서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 그러면, 산상설교를 두 글자로 줄이면 무엇인가? - 사랑 * 그런데 이러한 사랑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우리의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이러한 사랑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데,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빌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 성령으로 봉사하는 자는 성령을 받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것이다.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은 어떤 기(氣)나 에너지가 아니고 어르신인데,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하도록 독려하는 어르신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 성령을 자꾸만 힘으로 생각을 하니, 성령을 받아서 내가 한번 해 보겠다는 것이다. 성령을 이용해서 자기 자신을 계속 유지하려는 것이다. ◈ 행함의 종류 - ① 교회 일을 행함으로 본다. - 전도, 봉사, 예배 등 ② 사회정의 구현이다. - 빛과 소금(주로 통합측) ③ 개인이 성전이기에 거룩해야 한다. - 신인합일(神人合一) * 이렇게 ①②③과 같이 행함을 주장하는 자들은, 그 특징이 다 육체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서 자기가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빌 3:3은 나를 도구로 삼아서 성령이 일하신다는 것이다. 나를 도구로 삼아서 내가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런 자들은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성령을 받은 자는 자기가 아니라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회를, 사회를, 개인을 강조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자의 길이 아닌 것이다. * 이호식 씨가 토론을 하고 나서 얼마나 시기를 하던가? 이것은 육에 속한 자의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는가? 왜 인간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가? 자기가 아무리 주의 종이고 외쳐도, 그렇게 한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믿게 해야 되는 것이다. (갈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 이러한 육체의 일은 한마디로 자존심이고 정과 욕심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러한 정과 욕심에 의해서, 소위 행함이라는 것을 통해서 계속 키워나가는 것이다.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 은혜에 속하기 위해서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은혜에 속한 자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은혜에 속한 자의 모습이다. ◈ 산상설교의 취지 -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어떤 인간도 자기의 육체적 행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체제 아래에 있는 모든 자들을 고발하기 위해서 산상설교를 준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모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준 것같이 말이다. ◈ 참된 신자 - 정말 주님의 제자라면, 산상설교의 뒤를 따라나오는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산상설교와 아울러서 자기를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 참된 신자라는 것이다. (마 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 병 고침 사역 - 간질병이나 중풍병이 나으면 구원받은 것인가? 아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공짜로 고쳐주시는가? 그것은 앞으로 예수님이 하시는 십자가의 모든 일이, 간질병과 중풍병과 같이 다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지만, 오직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것이다. * 그래서 제자들이 '주여, 주여' 한다고 다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질병을 고치고 권능을 행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지금 예수님이 마 4장에서 하시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권능이 아니라 거룩의 입장에서 보고 계시는 것이다. * 주님이 보시기에 잘난 놈이나 간질병에 걸린 놈이나 똑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보시기에 전부가 다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산상설교가 보여주는 것이다. * 만약에 산상설교를 행함으로 본다고 한다면, 왜 자기들의 눈을 빼고 손을 찍어 버리지 않는가? 예수님이 언제 눈을 뺄 정도로 비정한 각오를 하라고 했는가? 실제로 빼어 내어버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온전케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 예수님은 이러한 산상설교를 말씀을 하시기 이전에 병자들을 공짜로 고쳐주시고, 그리고 산상설교를 마치시고 나서 문둥병자를 고쳐주시면서 모세의 율법대로 참새 두 마리를 잡아서 하나는 죽여서 피를 몸에 뿌리고, 다른 하나는 날려주고 그 몸을 제사장에게 보여주시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마 8: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 8: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마 8: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마 8: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마 8: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마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 사도바울은 이??산상설교 전체를 성령의 일이라고 하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러한 십자가 나올 때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형제사랑과 같은 성령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 죄악 속에 있는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그 크신 은혜가 밖으로 튀어나올 때, 사회정의가 문제가 아니라, 먹든지 마시든지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행해지는 것이며,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라고 외쳐도, 마지막에 헌금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은혜 받은 자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교회는 돈 없이도 움직임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돈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사업체에 불과한 것이다. * 교회에 나온다고 돈을 내라고 한다면, 이것은 도시에 가서 빌딩을 본 할매에게 보았으니 돈을 내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를 찬양하는데 왜 입장료가 필요한 것인가? 과부의 두렙돈이라도 바쳐야 된다고 하지만, 그러나 과부의 두렙돈이 무슨 교회에 물질적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 교회는 세상에 대한 주님의 복수극이다 ! * 교회에서 돈이 필요 없다는 것은, 돈만 아는 이 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주님이 복수극을 벌인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즉, 세상을 정죄하는 것이다. (삼하 21:4) 기브온 사람이 대답하되 사울과 그 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나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의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 이스라엘이 여호수아 때 가나안 땅에서 기브온 사람이 왔을 때 언약을 맺었는데, 그들이 물긷는 것과 장작을 패도록 하고 쫓아내지 아니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사울왕 때에 가만히 보니까, 이들이 자기 땅에 있는 것이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마치 바로왕이 이스라엘 민족을 보고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사울왕이 그들의 일부를 죽여 버렸다. * 그런데 다윗 때에 3년 동안 비가 오지 아니하고 흉년이 들자 다윗은 이 일이 심각한 것임을 알았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주목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일을 바로 잡아야 하는데, 그래서 다윗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서 '돈줄까?' 그렇게 된 것이다. *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기브온 사람의 말이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고 언약대로 복수를 해야 한다고 하자, 그래서 7명을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비가 오고 풍년이 든 것이다. * 그러면 여기서, 교회는 무엇인가? 주님의 약속이면 충분한데, 은금이 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돈이 있어야 일이 된다는 육체의 행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교회의 구제와 선교와 같은 행함이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니, 도대체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 우리는 이미 망가져 버린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죄에 빠질 번한 것이 아니라, 죄에 이미 푹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버린 몸인데 무엇이 고상하고 자랑할 만한 것이 있는가?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훼방꾼은 누구인가? 목회자 자신이다. 자꾸만 자신에게 의미를 두고 목회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산상설교 앞에서 우리의 가치와 의미를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눈을 못 빼고 손을 자르지 못하는 인간인 것이다. 우리는 마음으로 날마다 간음을 하고 무엇을 입을 것인가를 염려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바른 복음이 아니라, 바르게 목회를 하면 먹고사는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얼마나 간사한가? 죽기를 각오하면 살 수 있는가? * '예수 천당, 불신 지옥' - 이것만이라도 제대로 외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학박사라는 학위가 왜 필요한가? 제대로 복음도 하나 전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 초대교회는 먼저 죽으려고 새치기까지도 하고, 예수님이 옷을 벗고 돌아가셨는데, 그래서 옷을 입고 죽는 것이 황송해서 그들도 옷을 벗고 죽어간 것이다. * 도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는 그 당시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제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자 그들을 죽여버린 것이다. 그 때에 80만 명이나 죽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 당시의 왕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왕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 그러면 지금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과연 이러한 핍박이 있는가? 조찬기도회까지 해가면서 국가를 염려해주고 있는데, 왜 정부가 싫어하겠는가? 세금까지도 면제해 주지를 않는가? 그리고 노회에서도 예수만을 이야기를 하면 핍박을 받는 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 이것은 바꾸어서 말하면, 교회와 성도는 지금까지 타락한 적이 없는데, 다만 가짜 교회, 가짜 성도들이 범람을 해서 진짜 교회처럼 행색을 한 것이다. 진정한 교회와 성도에게는 타락이란 것이 없다. 예수님과 붙어있는데, 예수님이 타락했다는 말인가? * 주일성수 - 주일성수를 강조하는 분들이 있는데, 예수님이 과연 주일성수를 하셨는가? 주일에는 직접 오시고 수요일에는 천사를 보내시는가? 하나님이 언제 주일과 월요일을 가려 가면서 활동을 하셨다는 말인가? 이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바로 인간의 육에서 나오는 행함이라는 것이다. * 엘리야는 850 : 1 로 싸웠다. 그리고 그 당시의 남은 7000명이 어떻게 싸웠겠는가? 그러면 엘리야가 왜 이렇게 혼자만 남게 되었는가? 대적들이 칼을 가지고 엘리야를 제외하고는 다 죽여버린 것이다. 마귀들도 믿음이 있는 자를 아는 것이다. (왕상 19: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 한번 생각을 해 보라. 엘리야는 그래도 살아났으니 괜찮다고 할 수가 있겠지만, 그 당시에 대적들의 칼에 죽은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러나 이것을 초대교회 순교자들에게 말하면 믿음이 없다고 따귀를 맞을 것이다. 먼저 죽는 것이 영광인줄을 모르니 말이다. 지옥 같은 이 세상을 오래 사는 엘리야가 오히려 불쌍하지 아니한가? 너무 오래 사는 것도 부끄러운 것이다. * 그러니, 자기를 쓰레기로 여기지 아니하는 이러한 자기 자신이 바로 목회의 가장 큰 방해물이 되는 것이다. 자기만은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핍박이 없는 것이다. 마귀가 이런 쓸데없는데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라고 외치고 있는데, 이 세상의 문화도 긍정적으로 여겨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 장로가 있다고 한다면, 어디 그런 교회에서 목회가 제대로 되겠는가? 관심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한심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 산상설교를 볼 때는 문맥을 잘라서 보지 말고 앞뒤로 다 보자는 것이다. 간질병을 고치고 문둥병을 고치는 것을 다 집어넣어서 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다 보았을 때, 예수님과 같은 분은 한 사람도 없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신 짊어질 죄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주님 앞에서 무너지는 것이다. * 그리고 성령이 오게 되면, 사랑의 차원에서 성령이 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간음했느냐' 를 묻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서처럼 성령의 열매로서 '온유했느냐' 를 묻게 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산상설교는 성령이 주시는 사랑 안에서 성도가 온전하게 지키게 되는 것이고, 이렇게 나를 온전케 하시는 내 안에 있는 주님의 화목제물을 한마디로 의(義)라고 하는 것이다.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위의 두 구절을 한번 비교해 보라. 마 7장에서는 행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5장에서는 의로 말미암아 천국에 말미암아 들어간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의라는 것이다.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그러니 이러한 사도바울의 말이 맞는 것이다.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으니, 그것이 화목제물이고, 이러한 의를 믿는 자는 의인이 되나니, 경건치 않고, 죄인 된, 원수 된 자 등이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것이다. (고후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사람들은 자기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 줄도 모르고, 최선을 다해서 하자고 설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산상설교에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대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한 평생 잊어버리지 아니해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귀신 들린 자이고, 중풍병자이고, 간질병 환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긍휼을 베푸심으로 말미암아서, 베푸신 그 사랑이 대단한 것이지, 우리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러한 낮아짐이 있는 것이 목회라는 것이다. *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세 번째로, 자기가 신과 하나가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음 구절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시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너무나 확실한 것이다. 자기 이름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릎을 꿇는 것밖에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상 더 무슨 말을 하리요 ! [ 새언약 ] 9 ☞ 하나님의 선택, 192 페이지 [ 3. 육을 공격하시는 하나님의 선택 ] ⊙ 애초부터 육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그런 메시야가 아니었다. (책) * 왜냐하면, 구약에 보면 육이라고 해놓고 인간의 선택한 육을 비켜 가는 것이다. '에서일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면 야곱으로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이라고 생각을 해서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그러나 이스마엘은 종에서 태어난 철저히 육적인 자녀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난데없이 이삭이 태어나는 것이다. *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하나님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에는 교제를 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와 상대를 하시는가? 중간매체가 따로 있는 것이다. * 가인의 제사도, 아벨의 제사도 받지 아니하시고, 다만 아벨의 제물만을 받는데, 이 제물이 보여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아벨의 것을 받으시면 아벨이 죽지 않고 메시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벨이 아니라 제물에 합당한 모습으로 오시는 그리스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 또 출 20장을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높여 부르자고 한다. 번제와 화목제로 오시는 분이 있다는 것이다. (출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육을 도구로 사용은 하지만, 육과 교제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지 말이다. 우리가 무엇이 잘랐는가? 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하는 것이다. * 기드온이 위대한가? 아니다. 그는 겁 많은 방앗간지기이며, 졸장부이다. 기드온과 300명이 칼을 가지고 싸웠는가? 승리는 했지만, 누구의 승리인가? 하나님이 기드온을 사용은 하셨지만, 결코 기드온의 승리가 아닌 것이다. 육은 아니라는 것이다. 육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에서, 다윗도 마찬가지이다. 어른도 많이 있는데, 왜 하필 소년 다윗인가? 소년 다윗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이가 힘이 세면 얼마나 세겠는가? 하나님이 하셨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 어떤 분이, '교회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라는 말을 하는데, 그러나 교회는 없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부동산이 문제가 아니고, 없는 것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없는데서 생기는 것이 교회인 것이다. 어제의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 * 지금 주님이 살아 계시는데, 그래서 지금 은혜를 주셔야 교회이지, 과거에 얽매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인데, 우리가 쓸고 닦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붙든다고 해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목회자들이 낙담을 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사람들은 아직도 교회를 소유로 여기는, 교회를 전혀 모르는 자들인 것이다. * [ 교회 무소유 ] - 그래서 목회와 신학에 '교회 무소유' 라는 글을 적었는데, 법정은 재산 무소유이지만, 교회 무소유만 되면 싸움이 일어나지 않고 교파가 갈라지지 않는 것이다. 교회가 없는데, 무슨 싸울 것이 있단 말인가? 내가 성전이고 교회인데, 죽을 때까지 복음만 전하면 되는 것이다. * 그렇다고 있는 것을 일부러 부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주께서 있게 하시면 있는 것이다. 목사가 심방이나 설교를 통해서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은 주께서 알아서 하시는 것이다. 목사는 그것을 증거하면 되는데, 왜 자신을 내세우는가? 이렇게 살펴보면, 놀랍게도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목회자가 가장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다. 나는 아璣? * 그러면 우리보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 죽으라는 것이다. 간단하다. 어떻게 하면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살려고 하니까 꼬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192 페이지 ⊙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는 메시야의 모습 앞에서 그 어떤 인간도 자기의 의를 갖다 놓을 수가 없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책) (마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이 본문이 보통 어려운 본문이 아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몰트만이 책을 3권이나 내었던 것이다. 아직도 해결이 안 되는 것이다. 몰트만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이것을 하나님의 상실로 보았던 것이다. 몰트만이 이 문제를 가지고 끙끙거리는 것은 십자가를 인간을 구원하는 십자가로 보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이 죽은 것이 되어서, 이것은 마치 중세시대의 니케아 회의에서 이단이 된 아리우스와 비슷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에게 무슨 어머니가 있는가? 자꾸만 구원론으로 문제를 풀어 가는 것이다. ◈ 구원론에 집착하는 위험성 - 예수님을 구원하시는 분으로만 생각을 해버리면, 예수님에게는 인성과 신성이 있는데,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주간매체로 해서 인성으로 들어갔다가 신성으로 나오면 신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상이다. 예수님을 하나의 기계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욕구가 이정도로 심각한 것이다. * 그러나 정작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 과정에서 구원은 하나의 기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에 대한 중보기도는 예수님에게만 해당이 되지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 부모를 위해서 기도해 보라. 구원을 받는가? * 우리는 의인이 아니기에 중보기도를 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를 구원받게 해 달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 우리 어머니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를 하되, 내 이름이 아니고, 내 중심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차원에서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을 높이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가 되는 것이다. * 주기도문을 아십니까?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영화롭게 하옵시며 ...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를 계시론적 차원에서 설명을 해 버리면, 모든 육에 대한 종착점이 되는 것이다. 육에 대한 단절이다. * 육으로 구원받는 것은 없고, 이제는 오직 예수님만으로 이다. 예수님이 부활된 것은 성령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부활도 성령의 일하심이고, 아버지의 일하심이라는 것이다. 약속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 하나님의 저주 앞에서 견딜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참 메시야는 그 안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갈 3:13). (책)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예수님이 이렇게 버림을 받았는데, 우리가 구원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이 어찌 욕심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우리도 버림받아야 하는 것이다. ⊙ 인간 세계는 메시야 없는 세상으로 남게 되었다. (책) * 이 세상에 종교는 많지만 메시야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성령이 찾아온 사람은 메시야를 만나는 것이다. 육으로 난 사람은 육이고, 영으로 난 자라야만 메시야를 만난다는 것이다. 니고데모처럼 밤에 찾아와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오직 성령을 받아야 만 구원을 받는 것이다. * 그래서 이호식 씨와 토론을 하면서, 구원받고 안 받고 하는 것을 나에게 물어보면 안 된다고 했던 것이다. 인간에게는 그러한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주님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 그러면 교회는 무엇인가? 이미 말씀을 듣고 구원받은 자들이 모이는 것이다.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말이다. 말씀에 '예수를 믿어라' 라고 하는 것은 명령법이 아니라, '빛이 있어라' 라고 하는 창조하는 것처럼,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다. 믿어지는 것이다.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말씀이 우리의 가슴에 박혀서 우리가 믿게 된 것이지, 내가 순종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우리는 에스겔처럼, 남이 듣기를 싫어해도 전해야 하는 것이다. 보내심을 받은 자가 전하지 아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남자라서 병원에 흰 가운을 입고 있어서 의사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간호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사귀려는 여자 친구가 놀려도, 그런 자존심 상하는 것에 구애를 받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 줄 알고 감사한다면 얼마나 좋으냐는 것이다. * 마찬가지로,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교인이 가족 두 명밖에 없다고 놀려도, 노아가 한 명도 전도를 못해도 약속대로 비가 왔듯이, 담대하게 주의 일을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메시야가 없는 세상에, 메시야를 전하는 자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192 페이지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과연 우리는 날마다 죽는가?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그래야 그리스도의 생명이 펄펄뛰는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가 되기 때문이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탓하지 말고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주님 같으면 이 시대에 평안하게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실 줄 믿습니다. 예수라고 하면 죽던 시대가 아니고, 지금은 아무리 예수라고 해도 핍박이 없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주저 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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