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뒤에서 본 한국교회] 로마서 7 본문
로마서 7강
05칠곡강의 [뒤에서 본 한국교회] 41 - 로마서7
05,07,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이놈들아, 왜 까불어 ??
오늘은 로마서 9장을 시작하겠는데, 먼저 20절과 21절을 보자.
(롬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지금 여기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만드신 분이고, 인간은 지음은 받은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20절에 보면,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라고 하는데, 이 '힐문' 이라는 잘 쓰지 않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감히 대드는가?"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냉정하게 꾸중을 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하겠는가? 자동차 사고가 나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즉 자기 운명에 관한 것인데 말이다.
◈ 하나님은 토기장이 !!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21절에서 '토기장이'를 예를 들면서,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드는데, 하나는 그냥 마구 쓸 수 있는 토기를 하나 만들고, 다른 하나는 일년에 한 번 쓰는 아주 귀한 토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천한 토기가 하는 말이 "나는 왜 이렇게 함부로 마구 쓰는 그릇입니까?" 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결론은 대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하, 나는 이렇게 쓰이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었구나" 라고 하면서, 그것이 자기의 경계가 되고 한계가 된다는 말이다. 그 경계선 밖으로는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22절과 23절을 살펴보자.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 왜 진노의 그릇이고, 긍휼의 그릇인가?
여기에 보면, 진노의 그릇이 나오고 또 긍휼이 나오는데,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진노의 그릇에 대해서 오래 참고 관용을 베푼다고 해서 시비를 걸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 23절에서, 긍휼의 그릇에 대해서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한 것에 대해서도 또한 시비를 걸면 안 되고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오래 참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게 진노의 그릇에 대해서 참으심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긍휼이 무엇인지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말인가? 그것은 바로 진노를 받을 자들에게 말이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러나 그것이 우리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한 갈대가 성한 갈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꺾어지고, 꺼져가는 심지도 결국은 꺼지고 만다는 말이다.
(마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하지만 지금 당장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총과 자비와 긍휼하심으로 참아주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상한 갈대가 꺾어지고, 심지가 꺼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와 긍휼하심이 무엇인지, 그것을 알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니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참아주셔서 그렇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물론 그러한데, 하지만 불신자를 누가 관리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마귀가 모두 알아서 하도록 그만 가만히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관리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인간이라도 주님께서 관리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불신자들은 왜 지옥으로 가는가? 그들은 지옥에 가는 것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옥에 가면서, "야, 주님이 그동안 그렇게 참으시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셨구나" 라고 하면서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그런데, 택함을 받은 자들만 이 사실을 !!
그런데 여기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러한 사실을 누구만 안다는 것인가? 정말 놀라운 것은, 이러한 사실을 안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들만, 이런 사실을 아는데, 그들이 바로 귀한 긍휼의 그릇이고, 영광의 그릇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논리를 초월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도가 되어서 참으로 난감한 것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는 말씀에 근거해서 이 세상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상대방인 저쪽에서는 어떻게 나오는가? 성경말씀을 무슨 동화책이나 한물 간 전설로 그냥 취급을 한다는 것이다.
◈ 서로 대화가 전혀 안 돼 !!
그러니 성경말씀이 아닌 다른 것에 근거해서 이야기를 하니, 그래서 서로 전혀 말이 통하지 않을 때, 그때 얼마나 답답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즉 자기는 지금 이렇게 로마서 9장 20절과 21절에 근거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런데 상대방은 공자의 말씀이나 세상의 상식에 근거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전혀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공자에 근거해서 이야기한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신이 있다면 왜 지옥을 만들었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면 답변하기를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와 사랑을 모독했기에, 그 진노하심의 결과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은 또 뭐라고 하겠는가? "아니,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성경이라는 책이 있으니 그렇지 않은가? 만약에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이 말이나 되는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당신의 말에 누가 동의하겠는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 니도 괴롭나, 나도 괴롭다 ??
그렇게 되면 대화가 그만 단절이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답답해서 하나님에게 호소를 하는데, "하나님이여, 제가 이렇게 말씀을 가지고 진리를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상대방은 왜 저렇게 삐딱하게 나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면 또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이 로마서 9장의 말씀을 가지고 하시는 말씀이 "니도 괴롭나? 나도 괴롭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햇빛도 주시고, 공기도 주시고, 먹을 것도 주시고,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주었지만 인간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신이 되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든 것에 대해서 동의하고 박수를 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오늘은 목사님의 강의가 평소처럼 술술 나오지 않는 것 같은데, 무슨 근심이나 걱정거리가 있는지요? (야, 귀신이다. ㅋㅋ) (사실은 이 로마서 9장이 엄청 난코스임)
물론 제가 매일같이 하는 것이 근심과 걱정이지만, 물론 무슨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말이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여기서 9장 18절을 보자.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 하나님의 '강팍케 하심'에 대해서 !!
여기에 보면, '긍휼'과 '강팍'이 나오는데, 사실은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본인은 그냥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일부러 강팍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 하나님 : 이래도 가만히 있어?
* 인 간 : 예, 그냥 있을 랍니다.
* 하나님 : 어쭈, 이래도 가만히 있어?
* 인 간 : 예, 그래도 그냥 있을 랍니다.
* 하나님 : 어쭈, 제법이네. 이래도 가만히 있어?
* 인 간 : 하나님, 제발 좀 그만 하세요.
* 하나님 : 봐, 니가 나에게 대들었잖아.
* 인 간 : ? ? ?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이미 창세 전에 하나는 미워하도록 되어있고, 또 하나는 좋아하도록 확정된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이제 좀 술술 풀립니까? (ㅋㅋ)
* 질문 - 그러니 성도를 강팍케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죠?
물론 그러한데, 불신자를 그렇게 강팍하게 하는 것이지 성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바로 왕이 하나님께서 강팍케 한 대표적인 경우이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긍휼을 베푸는 것은 누구에게 그렇게 하나요?
그것은 성도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다 그렇게 베푼다는 말이다. 이 부분이 참으로 어려운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은혜만 다 주어버리면 하나님의 진노가 나올 구석이 없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화를 내는 분이라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은혜를 주지 않은 상태에서 진노를 하게 되면 저쪽에서 할 말이 있고 말이다.
◈ 하나님은 은혜도 주시고, 진노도 주시고 !!
그러니 이런 두 가지 요소를 다 충족하기 위해서 일단 은혜를 주시는데, 그런데 거기서 "감사합니다" 라고 해버리면 진노가 나오지 않으니, "그까짓 것 그것이 무슨 은혜야. 내 인생을 이 꼬라지로 만들어놓고, 말도 안 돼" 라고 하면서, 그렇게 강팍케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차버리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그들을 강팍케 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퍼붓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미혹케 되도록 창조함을 받은 자들이고, 그런데 그렇지 않고 감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도록 창조함을 받은 자들이라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그런 것마저도 이미 다 결정이 되어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결정이 되어있는데, 그러니 이렇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어있음에 되어서 화를 낸다든지 열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은혜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을 '성도' 라고 하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애굽의 바로 왕은 평소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는 말씀이지요?
물론 그러한데, 당연히 바로 왕은 하나님의 은혜로서 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을 받은 것은 전혀 아니고, 다만 그런 강팍이 잠복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바로 왕 본인도 모르고, 또 모세도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바로 왕에게 "너는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이다" 라고 하니 말이다.
◈ 이 강팍함은 먼저 잠재가 되어있기에 !!
하지만 정작 본인은 모르는데, 그런데 어느 날 모세가 와서 자기 백성을 내어달라고 할 때, 그때 바로 왕에게 잠복되어있던 그 강팍함이 튀어나오는데,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바로 왕에게 주었던 바로 그 강팍이라는 것이다.
* 질문 - 성도는 성령에 의해서 본인이 긍휼의 그릇임을 알게 하는데, 그렇다면 비성도들도 성령에 의해서 자기들이 진노의 그릇임을 알게 되나요?
그것은 안 되는데, 여기서 '비성도' 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어떤 사람' 이라고 하면 좋은데, 성령을 받으면 누구나 다 알지만,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이 곧 성도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는 결과적으로 성도임을 아는 것이지, 자기가 성도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성도가 아나면, 자기가 진노의 그릇임을 알지 못해 !!
그리고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자기가 진노의 그릇임을 알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말이다. 물론 마귀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가 멸망당할 것임을 잘 아는데,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하지만 사람들도 죽기 직전에는 다 부질없음을 알지 않습니까?
그런 인생이 부질없고 허무하다는 것은 공자나 부처도 다 하는 이야기인데, 그러나 본인이 죄인임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죄인인가? 그동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을 모르고, 감사하지도 않고 자기가 잘아서 산 줄로 아니 당연히 죄인이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자기가 진노의 그릇이기 죽는다는 사실을 알 수는 없겠네요?
물론 없는데, 지금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질문이 먼저 나와서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지금 제가 말을 하려는 것은 교회 내부의 문제인데, 지금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저는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 진노의 그릇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즉 성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저는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그런 것을 많이 느끼는데 말이다.
◈ 이 세상을 무엇으로 바라볼 것인가?
왜 그런고 하니, 아까도 말을 했지만, 성경에 근거해서 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런데 성경이 아닌 자기 자신에 근거해서, 그런 자기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또한 예수님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런 것이 점점 더 심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일을 하시는데, 얼마나 고지식한지 모른다는 말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미움을 받기로 작정된 사람이 있고, 사랑을 받기로 작정이 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 가족 중에서 누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든지 하면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 효자(?)가 만든 '연옥교리'에 대해서 !!
어거스틴의 어머니가 '모니카' 인데, 이 어머니가 교회를 다니지 않고 죽어서 어거스틴은 '연옥' 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어떻게 하든지 자기 어머니를 구원시켜보려고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2000년 동안 천주교 교회 안에 그대로 존재해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거스틴과 같은 인간들이 교회 안에는 수두룩하니 말이다.
이 연옥은 쉽게 말하면 패자부활전인데, 일단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어도 연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다른 누군가의 도움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교회의 분위기가 연옥에 있는 부모님을 천국으로 보내기 위해서 교회들이 돈을 긁어모으는 짓들을 했다는 것이다.
이 어거스틴은 자기 어머니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었는데, 그래서 어거스틴이 자기 믿음으로 한번 어머니를 구원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얼마나 효심이 지극한지 모른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 저의 믿음을 보시고 어머니를 구원해주세요" 라고 말이다. 물론 모세가 자기 이름을 걸고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한 적은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이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성경에도 없는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일단 그렇게 만들어놓고 적당한 성경구절을 가져다 부치면 되는데, 교회 안에 그런 연옥과 같은 것이 한 두 개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연옥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 장소인데, 그러니 교회에 있는 자식들이 잘하면 천국으로 올라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좋은(?) 교리이냐는 말이다.
◈ 그 대표적인 작품이 단테의 '신곡' !!
여기에 대해서 보다 더 자세한 것은 이번 십자가 마을 여름수련회에서 강의할 것인데, 그래서 천주교 교회사를 살펴보면 연옥에 갔다온 사람들의 간증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단테의 '신곡' 인데, 물론 그 자체는 소설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당시 교회가 그런 분위기에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보면 이 세상에서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얼마나 연옥에서 고생을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거짓말을 한 사람은 자기 혀가 하늘에 꽂혀서 몸이 대롱대롱 매달려서 있는 벌을 받고 말이다. 그렇게 참으로 기발한 장면들이 나오는데, 물론 그것이 단테의 천재적인 모습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단테의 신곡은 그 당시 사람들의 간증이나, 그러한 시대적인 분위기를 토대로 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교회 분위기가 천주교뿐만 아니라, 개신교도 연옥 쪽으로 넘어가는 추세인데, 교인들이 너무 좋아하니 말이다. 물론 돈도 되고 말이다. 그 연옥에 나오는 첫 단계가 '중보기도' 라는 것인데, 이것을 요즘 개신교 교회들도 모두 다 하고 있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렇다면 그 당시 사람들은 이런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연옥설과 같은 것으로 인해서 마음의 위로를 많이 받지는 않나요? 엄청 받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물론 위로를 받는데, 그래서 제가 주장하는 것이, 하나님은 성경말씀대로 일을 하시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사랑으로 하나님을 믿으니, 결국은 성경말씀과 자기 사랑이 충돌하게 되는데, 그때 인간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저는 성경은 잘 모르고, 그냥 제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살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식 중의 하나가 바로 '연옥설' 이고 말이다.
◈ 연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방법은?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연옥에서 나와서 천국으로 가는가? 그 방법론까지도 제시를 해주어야 교인들이 좋아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야만 교회에 돈도 많이 들어오고 말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제시한 방법이 4가지라는 것이다.
첫째는 신부가 성찬식을 통해서 연옥에서 빼내올 수가 있고, 둘째가 교회에 돈이나 재산을 기부하면 되고, 불교에서는 '보시(普施)' 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똑같다는 것이다. 셋째가 기도하면 되고, 마지막 넷째가 금식인데, 밥도 먹지 않고 목숨을 내어놓고 매달리면, 설마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보내주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 하나님은 청소부 ??
이렇게 4가지를 방법을 통해서 패자부활전을 치러서 천국으로 보내주는데, 그런데 이 연옥설을 만든 아이디어 중의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잘 한번 들어보세요.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천국과 이 세상을 정화시키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카타르시스' 라고 하는데, 즉 깨끗하게 완전히 물청소를 해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우리가 살아가면서 죄를 짓는데, 마음속에 음욕을 품는 것도 죄이니 말이다. 그렇게 되니 그 죄를 정화를 시켜야 하는데, 즉 주님은 청소부라는 것이다. 그렇게 청소하기 위해서 연옥을 통과시켜서 불 가운데 구원을 받도록, 그렇게 죄를 불로서 죄를 태우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물청소가 아닌 불청소인데, ㅋㅋ)
그렇게 되면, 주님은 주님대로 불로서 이 더러운 세상에서 죄 문제가 해결이 되어서 좋고, 또 인간은 인간대로 좋은 것이, 자기가 할 수는 없는 것을, 물론 연옥에서 고생은 좀 하겠지만, 그래도 정화가 되어서 천국에 갈 수 있어서 좋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 연옥설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공의가 드러나서 좋고, 또 인간은 인간대로 죄 씻음을 받아서 좋고 말이다.
◈ 그러나 연옥설은 이 세상의 아이디어 !!
사실 이러한 연옥설과 같은 아이디어는 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상식에 의한 것인데, 즉 사람이 고생을 하게 되면 두 가지 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과거의 자기 업보로 고생을 한다는 것과, 둘째는 그런 업보를 통해서 앞으로 잘되기 위한 하나의 중간 시련과정이라는 것이다. 물론 결국 보상이 된다는 것인데, 미리 매를 맞으면 나중에 맞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처음 것은, 이미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한 매를 맞는 것이고, 그렇게 매를 맞는다고 고생을 했으니 주님이 자비를 베풀어서 보상을 해준다는 것이다. 즉 "니가 그래도 니 잘못을 알고 순순히 벌을 받는구나. 그래, 수고했다. 여기 빵이 있다. 먹어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두 번째는 앞으로 잘못을 할 것에 대해서 미리 벌을 받는 것이고 말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경우가 사람들에는 이미 다 들어있는데, 이것을 최근에 와서 '라캉' 이란 철학자가 캐내었는데, 소위 욕망이론을 통해서 말이다. 참 재미있는 것은 이 양반이 신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프로이트가 초자아, 즉 양심을 통해서 이야기했고 말이다.
◈ 이번 여름수련회 주제가 '은혜와 양심' 인데 !!
이번 여름수련회 주제가 '은혜와 양심' 인데, 이 양심은 이방인들 속에 있는 법으로서, 도대체 이 양심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도대체 양심대로 살면 되는지, 양심의 허점은 무엇인지, 또 사람들은 왜 양심을 이야기하는지, 도대체 무엇을 노리고 양심을 이야기하는지, 그 취지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또 이 양심과 연옥의 발생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런 것을 한번 이야기해보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혹시 바쁘지 않고 시간이 많이 남는다면, 울산의 시원한 파도소리를 들어가면서 한번 참석해서 공부를 해보자는 것이다. 학교 교직원들을 위한 콘도 비슷한 곳에서 하는데, 바로 바닷가 옆인데, 물론 놀기도 좋고 말이다. 아무튼 3일 동안 하는데, 또 녹음을 너무 기대하지 말고 말이다.
거기서 제가 연옥에 갔다온 사람들의 간증을 10개정도 언급할 것인데, 그것을 들어보면 아마 과거에 부흥회에서 들었던 것들이 생각이 나지 싶다는 말이다. 개신교의 부흥사가 연옥이라는 소리를 하면 안 되니까, 그것을 쏙 빼버리고 그런 간증들만 써먹는다는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들의 경험담,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비겁한 인간들인지 말이다.
거기에는 고리대금업자를 비롯한 추잡한 인간들이 다 등장하는데, 그런데 그들을 취조하는데 고문이라는 고문은 다 나온다는 것이다. 소위 '입신' 이라는 것인데, 그것이 천주교에서 나온 것인데, 개신교는 그런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개신교에서 어떻게 교묘하게 써먹었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 육이 아닌 영으로 !!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맞아, 맞아, 그러니 죄를 지으면 안 되지" 라고 무릎을 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여전히 그런 사람은 '육' 속에 거하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 마을의 강의를 들어도 무릎을 아무 곳에서나 치면 안 된다는 말이다. (ㅋㅋ)
그런데 여기에 비해서, '영'은 평소에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영이란 예수님의 행하심이 우리 속에 들어오신 것이기에, 그래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 그런 것은 기억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날아버리고, 이제 남는 것은 율법의 완성인데,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두 이루신 바로 그 새언약 들어와서 구원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육에 속한 인간들은 무엇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고 하니까, "그래, 저 사람은 나쁜 짓을 해서 저렇게 비참하게 죽는구나. 내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 자신의 행위에다 기대를 걸고, 마치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 질문 - 결국은 육에 속한 사람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게로 회귀만 한다는 말씀이죠?
물론 그러한데, 술을 마시다가 벼락을 맞아서(?) 왼쪽 팔이 마비되었다고 하면, 그러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내가 다시는 술을 먹는가 봐라" 라고 하겠지만, 하지만 제가 자신 있기 이야기하겠는데 "그 인간이 다시는 술을 끊는지 봐라" 라고 말이다. 오른팔이 움직이는 한 술을 못 끊는다는 것이다. 즉 술을 끊고 말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것을 문제삼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말이다.
이것이 중요한데, 그렇게 술을 마시고 비오는 날 전봇대에서 오줌을 누다가 벼락을 맞아서 왼쪽 팔이 그만 마비가 되었는데, 사실 오줌을 누는 곳이 마비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벼락을 맞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육적이라는 것이다.
◈ 영은, 자기 몸이 아닌 예수님에게 관심을 !!
그런데 '영' 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자기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오로지 예수님에만 관심이 있어야 하는데, 바로 그런 관계가 '영' 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이지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귀담아 들어야 하는데,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하겠느냐는 말이다. 이것조차도 육적인 생각인가? (ㅋㅋ)
* 질문 - 그러니 자꾸 핑계를 댄다는 것은 자기 책임을 전가는 모습이라는 말씀이죠?
물론 그러한데, 그래서 교회에 와서 매일같이 하는 소리가 무엇인가? "앞으로는 하나님께 잘 할게요" 라고 말이다. 앞으로 무엇을 잘하겠다는 것인지, 그래서 제가 지난 강의 때 아주 명언(?)을 남겼는데, 즉 "하나님은 인간을 믿지 않는다" 라고 말이다. 마치 엄마에게 아이가 야단을 맞고 하듯이 말이다. "이제 엄마 딸이 아니야?" 라고 하면, 아이는 "이제, 잘 할게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인간을 믿지 않는다 !!
인간은 이것을 가지고 평생을 되풀이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러니 제발 그렇게 무엇을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영으로 살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영으로 사는 성도를 원하는 것이지, 육으로 잘하는 인간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입도 좀 나아지고 배가 불러지면 그렇게 잘해보려고 하지만, 그러나 생활고에 찌들리게 되면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돈 벌기에 혈안이 되어있지,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그렇게 착하게 살겠다고 하는, 그런 사치스런(?) 생각이 어디 들겠느냐는 말이다. 집에 가면 늙은 부모와 자기 새끼들이 입을 벌리고 배가 고프다고 난리인데 말이다.
이제 로마서 92장 25절과 26절을 살펴보자.
(롬 9: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 예수님을 '주' 라고 인정하는 자만이 !!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상식이,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과 아닌 자를 구분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즉 유대인들이 상식적으로, "저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야. 우리만 하나님의 백성이야" 라는 것이 역전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겼는데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여겼는데 백성이 맞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확정을 하는가? 그것은 바로 로마서에 의하면, 예수님을 주라고 인정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를 하나 내겠는데 답변을 해보라는 것이다.
* 퀴즈 - 창세 전부터 사랑을 받기로 된 사람과 창세 전부터 미움을 받기로 된 사람으로서, 그렇게 이미 확정이 된 것과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지금 제가 무지무지하게 어려운 질문을 하나 던졌는데, 로마서 9장 13절에도 보면,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라고 했는데, 구약 말라기 1장에도 나오고 말이다. 그것이 도대체 십자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정 그렇다고 하면 사랑할 놈은 사랑하고, 미워할 놈은 미워하면 되는데,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이 드는 놈들만 골라서 천국에 데리고 가면 되는데, 그런데 왜 십자가를 믿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즉 그렇게 운명이 확정된 것과 십자가를 믿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다.
* 질문(?) - 그런 인간의 운명이 역전이 될 수 있으니, 그런 게 아닙니까?
방금 '역전' 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것이 약간의 힌트가 될 수 있는데, 그러면 역전과 이것이 무슨 관계가 있나요? 무슨 야구게임도 아닌데 말이다. 여러분에게 제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한 것 같아서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드는데, 하지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칼 바르트의 '숨어있는 하나님' !!
바로 이 문제를 풀려고 시도한 사람이 그 유명한 '칼 바르트' 라는 신학자인데,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라로 불리는데 말이다. 하지만 바르트는 풀려고 시도는 했지만 그렇게 성공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언약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가 이 문제를 '역전' 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접근할 수도 있는데, 거기서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숨어있는 하나님" 이란 말이다. 이것이 이사야서 45장 15절에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숨어있는 하나님" 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이 아담처럼 무슨 잘못이라도 했는가? 왜 숨어 계시는가?
(사 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질문을 다시 한번 더하면, 창세 전에 이미 사랑을 받기로 작정이 되어있고, 또한 미움을 받도록 작정이 되어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하면, 그렇다면 그것을 그대로 실행하면 그만이지, 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미 작정을 했다면, 자기가 그대로 알아서 하면 되는데 말이다.
◈ 창세 전 예정인가? 아니면 십자가를 믿어야 하는가?
말을 바꾸어서 하면 이런 질문이 될 수 있는데, "이미 창세 전에 예정이 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십자가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알다시피 당연히 십자가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창세 전에 예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또 하느냐는 것이다. 필요하지 않아 보이는데 말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그런 했다는 것은, 분명히 이것이 십자가와 관련이 있다는 말인데, 도대체 무슨 관련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 질문(?) -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니 그런 것이 아닙니까?
물론 인간의 힘으로는 안 돠는대, 하지만 어차피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문제이니 굳이 십자가는 없어도 되고, 우리는 그냥 "사랑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인데, 그런데 여기에 왜 십자가를 믿으라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예정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되는데, 그것이 아닌 십자가를 믿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 인간의 사고방식 자체가 역전되었기에 !!
아까 집사님이 대답한 '역전' 이라는 것은,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뒤바뀐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요? 이미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되었다는 것은, 그러니 사실은 사고방식 자체가 역전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역전이 된 사고방식에 하나님의 창세 전 선택이 들어와 버리니, 과연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겠는가? 아니면 그것조차도 역전된 사고방식으로, 즉 거꾸로 이해를 하겠는가? 당연히 인간은 거꾸로 이해를 하는데, 무슨 '거꾸로 보일러(?)'도 아니고 말이다. 그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맞는 이야기인데, 그런데 인간은 범죄를 한 이후이기에 정반대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이해를 한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한다는 말인가? 자기 중심으로 이해를 하는데, 즉 "나는 창세 전 예정을 믿기 때문에 이미 사랑을 받기로 선택을 받은 사람이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 중심적으로 이 문제를 판단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 20세기 'THE THEOLOGIAN' 칼 바르트 !!
여기에 대해서 칼 바르트는 반대를 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칼 바르트가 이런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그 당시가 20세기 초엽인데, 그때까지는 2000년 기독교의 역사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예정론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칼빈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루터는?) 즉 하나님의 예정론을 알고 있으면, 그 사람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이라고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칼 바르트는 반대를 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칼 바르트가 칼빈을 쳐버리는데, "칼빈의 예정론은 유대교적 사고방식이지, 결코 성경적이 아니다" 라고 말이다. 같은 칼씨(?)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칼 바르트를 두고서 '신정통주의'니 뭐니 하면서 무진장 공격을 하는데, 특히 '반틸'과 같은 칼빈의 신학을 이어받은 자들이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칼빈의 성경관은 인간의 구원중심이라는 말씀이지요?
제대로 보았는데, 칼빈뿐만 아니라 다들 그렇게 구원중심의 신학을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기가 앞으로 잘해보겠다는 것이 바로 육적인 생각인데, 여러분이 동의를 하든 말든 간에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핑계에 지나지 않는데, 하나님은 결코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 아하, 정말 예수님이 하셨군요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제가 잘 하겠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아하, 정말 예수님이 하셨군요. 감사합니다" 라는 것을 요구하는데, 하지만 인간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던 간에 자기가 앞으로 잘하면 된다고 우긴다는 말이다. 자기가 잘못해서 벼락을 맞았는데, 그래서 앞으로는 벼락을 맞지 않도록 잘하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운전을 하다가 과속을 해서 경찰에서 잡히면,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신호위반으로 잡히면, 또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라고 할 것이고, 그런데 다음에는 안전벨트 미착용, 또 그 다음에는 불법선팅, 또 그 다음에는 불법전조등 등등, 그렇게 자꾸만 잡히면 나중에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한국신학대학에 칼 바르트를 전공한 교수가 있던데요?
물론 그들은 칼 바르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성공했다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그러나 제가 보기에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이사야서 45장 15절을 보자.
(사 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 기존 인간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다 가짜야 !!
이렇게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칼 바르트가 주장을 했는데, 그것이 그의 위대한 점이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다" 라고 하면,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인간들이 알았던 하나님은 다 가짜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 아닙니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니, 당연히 칼 바르트가 욕을 엄청나게 얻어먹었고, 또한 유대인들 때문에 핍박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아니, 유대인도 독일인을 핍박했나?)
이렇게 하나님이 숨어 계신다는 말은, 마치 춘향이가 이도령을 보고 "날 잡아봐라" 라고 하면서 도망을 치는 것과도 같은데, 그렇게 하나님은 잡으러교 하면 도망을 치고, 또 도망을 치고 만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신을 얼마나 열심히 찾는가? 심지어 겨울에는 동안거(冬安居)도 하면서 말이다.
인류 최초로 하나님께 제사를 누가 드렸는고 하니,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인데, 하지만 그는 신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 하나님에게 다가서면 하나님은 그만 사라져버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은 다가오시고 말이다.
◈ 필연적이 아닌, 우연적 하나님 !!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아무리 찾으려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숨어 계시다가, 인간이 그냥 그대로 있으면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하게 난데없이 들이닥치는 하나님인데, 그러니 하나님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필연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우연적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우연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두고 '에벨링(?)' 이라는 신학자는 '사건'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주님은 우리에게 사건을 만든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도 문제가 있는데, 정말 사건인지 아닌지를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정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꼴리는 데로 말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엄청 큰 사건이라도, 자기에게는 아무런 별 사건이 아닐 수도 있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바닷가에 놀러가서 배가 부를 때는 파도소리가 좋고 갈매기 소리가 엄청 좋아도, 그러나 배가 고플 때는 "밥 무라(?)" 라는 소리가 제일 크게 들리고 좋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환경을 조성해서, 동일한 사건이지만 어느 한쪽에 집중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치' 라는 사람이 그렇게 주장했는데, 지난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요?
◈ 숨어 계시는 채로 나타나는 하나님 !!
아직까지 제가 아까 낸 퀴즈에 대해서 해답을 다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하나님은 숨어 계시고, 또한 도망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칼 바르트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러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채로 나타난다" 라고 했는데, 표현력이 참 기발하지요? 이렇게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채로 나타나는데, 그것을 두 글자로 '비밀'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흔히 비밀이라고 하면 숨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공개된 비밀이라는 것이다. 태어날 때는 하늘에서 별이 움직이고, 어른이 되어서는 욕설도 마구 내뱉고, 물위도 걸어다니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행하고, 또한 성전에 가서는 채찍으로 난장판을 만들고 말이다. 그야말로 그렇게 난리를 피우면서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는데, 그런데 그러한 것이 그들에게는 더욱 더 비밀스러운 분으로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 비밀이 더욱 더 비밀이 되게 !!
그러니 하나님은 비밀스러움이 크게 드러나는 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밀을 해소하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비밀이 더욱 더 비밀이 되게 말이다. 바로 그렇게 비밀이 비밀이 되도록 활동을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런 것을 알면, 기존 교회의 목사들이 얼마나 사기꾼이지 제대로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데, 일단 13절을 보자.
(마 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 오우, 베리 베리 디프컬트 !!
이 말씀이 어느 정도 어려운고 하니까, 다시 설명을 해보면, "보여줌으로서, 그들이 보지 못하는 자들임을 비로소 들추어내기 위해서 보여준다" 라는 것이다. 어떻게 말이 이해가 됩니까? 비록 우리나라 말이지만 엄청나게 어렵지요? 마치 꽈배기가 꼬이듯이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줌으로 인해서, 그들이 아무리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결코 볼 수가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바로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은 활동을 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들려줌으로서, 그들은 전혀 듣지 못하는 존재임을 비로소 폭로시키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들려주신다는 것이다.
◈ 보지 못함을 알라고 보여주시는 하나님 !!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들려주고 보여주지 않으면, 자기들은 잘 듣고 있다고 여기고 잘 보고 있다고 여길 것인데, 그런데 막상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이 땅에 오니까, 사태가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하나님과 얼굴을 비비고, 또 어떤 이들은 그분의 귀싸대기를(?) 때렸는데, 그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뺨을 쳤는데도 그들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가롯유다의 경우에 그렇게 3년을 따라다니면서 동고동락을 하고, 심지어 자기가 그런 기적을 베풀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그냥 평범한 보통 인간으로 결론을 지우고 자기의 길로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 과연 누가 가롯유다인가?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대부분의 목사들과 장로들과 신학자들이 가롯유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교인들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즉 "내가 그렇게 교회를 50년을 다녔는데, 예수는 그냥 보통 사람이더라" 라는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지우고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훌륭하다는 것은 인정을 하지만 말이다.
* 질문 - 베드로의 경우에, 자기가 띠를 띠고 원치 않는 곳으로 가는 시점에서야 바뀌게 되었나요?
그것은 시점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이후라고 해도 성령이 아니고서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데반 집사나 사도바울이라고 해도 역시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이 문제가 더 어려워지는데, 사람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생각에는, 그래도 예수님과 3년 동안을 합숙훈련을 하고 공부를 했으면, "척하면 삼척이다" 라고 되어야 하는데, 만약에 그렇다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지 말았어야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심지어 베드로는 물위도 예수님과 함께 걸었는데, 또 변화산에 영광스런 예수님의 모습도 보았고 말이다.
◈ 죄가 그 얼마나 끈질긴지 !!
그런데 그렇게 본 모든 기적과 경험이 무엇을 이기지 못했는고 하니, 자기 자신이 살아야 한다는 것, 바로 그런 자기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나는 살고 예수는 죽이자" 라는 행태인데, 그래서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했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인간의 자아는 지독하다는 말이다.
* 질문 - 하지만 성령께서 예수님을 깨닫도록 하고 난 이후에는 계속해서 따르지 않았나요?
물론 그러한데, 그것은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러니 결국 자기 안에 있는 예수님이 움직여야 비로소 성공하는 것이지, 자기 판단력으로 움직이면 또 다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성도에게는 판단의 자유가 없어 !!
과거에 에덴동산의 아담에게는 하나님께서 판단력을 주셨는데, 즉 선악과를 따먹든지 말든지 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지금 성도에게는 그런 판단의 자유가 없는데, 즉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냥 그대로 두면 우리는 예수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니 말이다. 사실 부인하지 않을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베드로와 불신자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베드로나 불신자나 다같이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하는 것은 다 같다는 것이다. 다만 차이점이라고 하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했고, 그렇지 않은 자는 미워했다는 것, 그것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쪽은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고, 다른 쪽은 미워하되 끝까지 미워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강의 처음으로 돌아갔는데, 창세 전에 하나는 미워하고 하나는 사랑하고 말이다. 즉 어떤 사람은 긍휼의 그릇이고 어떤 사람은 진노의 그릇이고 말이다. 그런데 베드로나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창세 전부터 미움을 받은 사람들이 이방인들이고, 또 창세 전에 사랑을 받은 자들이 당연히 자기들이라고 여겼는데, 그것이 바로 아까 집사님이 이야기한 '역전'의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대역전이라는 말이다.
◈ 예수님은 반전 드라마의 주인공 ??
바로 그런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분으로 나타나는데, 그분이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 모든 인간들의 사고방식이기도 하고 말이다. 즉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서, 그렇게 왜곡되고 역전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역전을 시키고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숨어있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는데, 그것이 바로 '비밀' 이라는 것이다.
* 예수님 : 너희들은 누구지?
* 유대인 : 예,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 예수님 :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 유대인 : 예, 그렇습니다.
* 예수님 : 아닐 걸?
* 유대인 : 맞는데요.
* 예수님 : 아닐 걸?
* 유대인 : 맞는데요.
그렇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끝까지 우기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서 활동하심으로서, 그것이 아님이 온 천하에 모두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8장에서 백부장과 하시는 말씀 중에 마지막에 뭐라고 하시는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역전인데, 이렇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역전이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다.
(마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마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세상을 우리 마음대로 볼 자격이 우리에는 없어 !!
사람들이 저에게 하는 말이, 왜 세상을 보던 성경을 보던 왜 그렇게 삐딱하게 보느냐고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처럼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분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삐딱하게 보는데, 그러니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자기 중심적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숨어 계시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일을 하시는데,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창세 전부터 구원을 받기로 한 것에 대해서, 그것이 전혀 자기의 지식이나 노력이나 종교적 열심 때문이 아님을 잘 알기에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오직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데, "아하, 예수님께서 그렇게 다 하시는구나. 창세 전에 이미 천국에 갈 놈과 지옥에 갈 놈을 구별해놓았구나" 라고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건방지게 우리 인간들이 시비를 걸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제가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창세 전부터 지옥에 가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를 갚으려고 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 예수님이 노시는 분이 아니기에 말이다. 지옥에 갈 놈은 지옥에 가도록 철저하게 관리하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의 지독한 분류작업인 것이다.
◈ 내가 보고 온 연옥 !!
이것을 아까 말한 연옥과 비교해보면, 사람은 일단 죽으면 연옥에 간다는 말이다. 물론 이 연옥설도 조금씩 바뀌는데, 초창기에는 모든 죽은 사람은 연옥에 가는데, 심지어 예수님도 죽으면 연옥에 간다고 했는데,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보면,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라고 했으니 말이다.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벧전 3: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죽고 난 뒤에 사흘만에 살아나셔서 본인도 연옥에 가서 불시련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과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들은 워낙 도사가 되어서 불시련을 당해도 그냥 통과하는데, 그런데 평소에 죄가 남아있던 사람들은 그런 불을 통과하다가 화상을 입고 말이다.
그것이 죄목에 따라서 다른데, 그렇게 고통을 당하는 죄목과 장소가 리스트로 작성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어디서 어떻게 고통을 당하는지, 그런 것이 아주 상세하게 적혀있다는 말이다. 그것도 그냥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그것을 보고 온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서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 증언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까, 거기에 가면 다리가 있어서 지옥으로 건너가는데, 그런데 그 다리 밑에서 사람들이 잡아당기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성자가 빠지려고 하면 천사가 와서 밑에서 당기는 놈들을 물리치고 건져주고 말이다. "이놈들이 어디서 우리 성자에게 손을 대노" 라고 하면서 말이다.
◈ 그린 그린 글래스 오브 홈 !!
그렇게 다리를 지나면 빛의 세상이 나타나는데, 그야말로 평온하고 아늑한 초원이 있고 물이 흐르는 강이 있는데, 아마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면 환장하지 싶은데 말이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품'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설명하는데, 물론 다들 조금씩은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 연옥이 두 군데 있는 경우도 있는데, 지옥도 두 군데 있고, 또 천국도 두 군데 있고 말이다.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모든 인간들이 죽어서 연옥에 가서 시련을 당하는데, 거기서 될 놈은 천국에 가고, 그렇지 않은 놈은 지옥에 가고 말이다. 이것도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연옥에 보낸 사람은 일단 다 천국에 간다는 주장도 있고 말이다. 그러니 이곳은 마치 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낸 사람들이 다시 와서 교육을 받는 곳과도 같다는 것이다.
◈ 하지만, 성경은 분류작업을 !!
이렇게 되면 개인적인 정화가 되는데,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분류작업은 무엇인가?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그런 연옥과 같은 방식으로 정화가 되어서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편을 갈라버린다는 것이다. 즉 창세 전에 이미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을 확정지어서 나누어 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 제 아무리 천국에 가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이미 정한대로 천국에 갈 놈은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갈 놈은 지옥에 가고 말이다. 그렇게 분류를 해놓으면, 천국에서 자석을 가지고 아무리 당겨도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지독하고 철저하게 분류를 해버린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분류작업을 믿어야 하는데, 누구는 영국에 가서 병아리 암수구별을 한다고 하던데, 그런 직업을 '병아리 감별사' 라고 하나요? 아무튼 우리가 사고를 쳤다고 해서 천국으로 갈 놈이 지옥에 가는 것도 아니고, 제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설령 지하철에서 남을 구하다가 죽어도 지옥에 갈 인간이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분류작업의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
바로 그런 분류작업의 기준이 누구인고 하니, 숨어 계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냥 예수님이라고 하면, 마치 무당을 섬기듯이 예수님을 섬기려고 할 것인데, 하지만 그러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서, 즉 그렇게 죄를 해결하신 그분의 분류작업을 인해서 성도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개인적으로 죄를 씻으려고 하는, 즉 시련을 당하고 불 가운데를 통과하려는 사고방식이 다 날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작도 예수님이 하시고, 마무리도 예수님이 모두 깔끔하게 하심으로서 구원을 해버린다는 말이다.
◈ 이것이 복음의 비밀이다 !!
그렇게 되니, 여기에서는 자기 중심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비밀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물론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는 예수님 중심이 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 중심이 되어버리면, "예수님, 방금 이 목사님이 이야기한 것을 저는 믿는데, 그러니 고생을 좀 적게 하도록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또 다시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즉 복음을 지식으로 확보를 했기 때문에, 그러니 자기에게 좀 유리하게 혜택을 베풀어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항상 잊지 말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인데,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자기 위안거리밖에는 되지 않겠네요?
위안이라고 하기보다는 변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이 매일같이 하는 짓이 그렇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자기가 천국에 갔다왔다고 하면서 천국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그렇게 간증을 하는 것은 어떤가요? 성경에서는 그것을 공개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요?
◈ 왜 간증에 관심을 갖는가?
성경에서 공개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이 그런 것을 선호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천국에 가보니 자기에게 함부로 한 신부는 지옥에서 고생을 하고 어쩌고 하는 간증들이 천주교에도 많이 있는데, 도대체 그런 것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 질문 - 천국에 가면 그만큼 위안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감 때문이 아닌가요?
물론 그것은 맞는 말인데, 이 세상에서 고생을 그렇게 몸서리치게 했던 자기 자신이, 드디어 깨끗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마음껏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자유를 쟁취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래서 그런 천국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선호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무슨 시험에 드는고 하니까, 그만 난데없이 죄를 짓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드디어 자기 본색이 드러나게 되면서, 앞으로 다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또 다시 제2의 죄를 짓는다는 말이다. 그런 것들이 쌓여서 결국 바리새인들이 되고 말이다.
◈ 천국과 지옥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 !!
그러니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데, 천국이 어떻든 지옥이 어떻든 간에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말이다. 실제로 우리 인간들의 소관이 전혀 아니고 말이다. 즉 천국을 만드신 분이 따로 계시고, 거기에 들어가는 사람도 주님이 직접 다 알아서 열심히 분류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분류작업을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간단한가? 제가 지난 수요일에 한 설교가 바로 그것인데,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 라고 말이다. 사람들은 너무 간단해서 믿지 않는데,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데, 그러니 이 얼마나 간단한 분류작업이냐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들 예수님을 이름을 부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데, 그런데 어떤 권사가 갑자기 와서 하는 말이, 자기는 천국에 가보았는데, 거기에는 다리가 놓여있고, 강물이 흐르고, 푸른 잔디가 잘 자리고 있고, 어느 목사는 지옥에 가있고, 또 어느 집사는 천당에 가 있다고, 그렇게 간증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 '예수 이름'의 의미는?
여기서 말하는 '예수 이름'은 예수님의 힘을 의미하는데, 즉 인간의 '자기 이름'을 마구 부수어 버리는 힘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은 자기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데, 그런데 그런 천국에 대한 간증을 들으니 은근히 탐이 난다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하자면, 여기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만약에 자기가 밭에서 고구마를 캤다고 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이름으로 고구마를 캔 것이라는 말이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요?
이렇게 '이름' 이라는 것은 자기와 하나가 되는 것인데, 즉 "내가 이름이고, 이름이 곧 나이다" 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제가 밭에서 일을 했다면, 그것을 두고 "이근호가 일을 했다" 라고 하지, 그것을 두고 "저근호가 일을 했다" 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원은 이근호가 일을 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께서 일을 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데, 그것을 두고서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간단한데, 제가 20년 이상 성경을 공부하면서 이런 비밀이 있다는 것에 얼마나 감격을 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 주님이 권사나 장로들의 배후에서 !!
우리 옆에 이런 구원의 비밀이 있는데, 그야말로 되지도 않는 소위 기도한다고 하는 권사나 장로들이 와서 뭐라고 하는가? 목사도 그렇지만 말이다. 그들이 "내가 천국을 보고 왔다" 라고 하면서 바람을 잡으니, 사람들이 관심이 저기에 있다가 이쪽으로 그만 쏠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그렇지. 이제는 술도 끊고 담배도 끊어야지. 또한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해서 천국에 상급을 쌓아야지. 또 착하게 살아야지" 라고 말이다. 갑자기(?) 그렇게 자기 이름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이렇게 하는가? 마귀가 그렇게 하는가? 그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갈 사람들이 예수 이름은 말고 자기 이름에 길들여져서 그렇게 활동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활동을 하고 있는가? 그 배후에 누가 있는고 하니, 바로 주님이 계신다는 말이다.
주께서 악마들이 그렇게 활동을 하도록 하심으로서, 그렇게 해서 천국에 속한 자와 지옥에 속한 자를 확실하게 구별하고 분류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마구 설치고 돌아다니도록 한다는 것이다. 우리 생각에는 그냥 발목을 잡아서 꽁꽁 묶어놓았으니 좋겠지만 말이다.
◈ 다시, 왜 십자가를 믿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조금 전에 한 질문, 즉 "왜 십자가를 믿어야 하는가?" 라는 것인데,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존재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즉 십자가 사건이 무엇인고 하니, 지옥에 갈 사람들이 분명히 있는데, 그들이 천국에 갈 사람들을 제대로 알아보고서 죽여버린 사건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자기 중심의 사고방식을 역전시켜야 하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질문 - 그런데 제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굳이 그렇게 분류를 하지 않아도?
그것은 앞에 강의를 할 때 없어서 그러한데, 진노의 그릇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하시는 분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긍휼의 역시 그릇도 그렇고 말이다. 하나님의 내부에 있는 속성은 공의와 자비인데, 그것이 로마서 11장에 나오는데,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롬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 '엄위'와 '인자' 앞에 무릎 꿇어!!
이 말씀의 취지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 인간들아, 무릎을 꿇어!" 라는 것인데, 마치 조폭두목이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22절에 나오는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을, 즉 '엄위'와 '인자'를,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만약에 저에게 심장과 간이 있다면, 심장과 간을 각각 이렇게 매달아서 바라보면서, "이것은 내 심장, 이것은 내 간덩이(?)" 라고 하면서 흐뭇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의 엄위와 인자를 끄집어내어서, 그것을 보시고는 흐뭇해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하는 것이지, 그런데 왜 인간들이 거기에 대해서 말이 많으냐는 것이다. 하나님 마음이지 말이다.
계속해서 33절 이하를 살펴보자.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롬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여기 '모사(謀士)'는 스승이라는 의미인데, 그리고 아무도 바쳐서 복을 받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36절 마지막에 '아멘' 이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아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얼마나 깊고 부요한지, 도저히 우리 인간이 측량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천국에 갈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을 적절하게 분류하시고, 악마도 다루어가면서 말이다.
◈ 야, 양수겸장이다 !!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기 속성을 드러내기 위함인데, 자기가 얼마나 공의롭고 자비로운지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야말로 멋드러지게 장기알을 굴려서 일을 처리하시는데, 그래서 결국은 꼼짝도 못하게 해놓고 "장군 받아라!" 라는 것으로 끝을 내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도는 장기알로서 주님이 시키는 데로 움직이면 되고 말이다. 차도, 포도, 마도, 상도, 졸도, 그 모든 것들이 다 주께서 와서 주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그것이 바로 모든 피조물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지옥에 가는 인간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지옥으로 가면서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로서 분류작업이 지금도 진행 중이고 말이다.
* 질문 - 그렇게 이미 다 정해졌는데, 다시 굳이 분류작업을 할 이유가 있나요?
그런 질문이 강의 처음에 나왔는데, 무엇인고 하니, 은혜를 주고 난 다음에 강팍케 하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여기에 진노가 동원된다는 것이다. 아까 제가 심장과 간을 보고서 흐뭇해한다고 엽기적인(?)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에게는 진노의 속성이 있고 자비의 속성이 있다고 했는데 말이다.
여기서 진노라는 것은, 아무런 자비도 베풀지 않고 진노하는 것이 아니라, 즉 햇빛도 안 주고 공기도 안 주고 말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지금도 은혜를 베푸시는데, 그래서 온 만물이 다 자라게 하시는데, 그런데도 그들이 강팍하도록 해서 하나님에게 대들도록 만들어서, "그러니까 매를 맞아도 당연하지" 라는 진노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 진노에 앞서서 은혜가 ??
하나님의 그런 분류작업에 대해서 막상 지옥에 간 사람들은 불만이 없지 싶은데, 왜냐하면, "하나님, 우리가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라고 나올 것이니 말이다. 그들이 이 땅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지옥에서는 그런 사실을 알지 않겠는가? "아하,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라고 말이다.
* 질문 - 아까 그 질문은, 하나님께서 바로 자기 능력을 보이시면 되는데, 왜 그렇게 미리 창세 전에 분류를 하고 복잡하게 하시느냐는 말인 것 같은데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하나님은 진노하시기 위해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데, 그렇게 해야 진노할 이유가 생기니 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내가 진노하는데 니가 왜?" 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공의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진노와 더불어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니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병 주고 약 주고", 그렇데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 하나님, 왜 우리 어머님이 돌아가셔야 됩니까?
물론 그러한데,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착한 자기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그래서 "하나님, 왜 우리 어머님이 돌아가셔야 됩니까?" 라고 대드니,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도대체 그 어머니를 태어나게 하신 분이 누구인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어머니가 계시는데, 그래서 자기도 있는 것이고 말이다.
그래서 그 어머니를 자식인 자기가 사랑한다고 하면 안 되고, 그 어머니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 은혜 가운데 하나로서 그 어머니에게 자식까지 허락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 라는 존재도 어머니에게 은혜를 베푸신 그 일부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은혜이고, 이렇게 해도 은혜인데,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것밖에 없는데, 그런데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는 "우리 어머니를 왜 죽게 합니까?" 라고 나온다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는가? "아예, 매를 사라 사" 라고 말이다.
* 질문 - 하나님이 미리 다 정해놓고 일을 하심으로서, 우리에게 뭔가 보여주는 것이 있지 않나요?
하나님은 일부러 우리를 강팍케 하심으로서 자기의 자비와 진노를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아까 말한 "병 주고, 약 주고" 라는 표현이 제법 적당한데,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병 주고, 약은 안 주고(?)", 그렇게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숨어있는 하나님인데, 그 이전까지는 그런 하나님을 몰랐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비로소 알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그 복음을 전했고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왔다" 라고 했을 때, 그동안 잠재되었던 인간의 분노가 대폭발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반전드라마의 주인공 ??
인간이 왜 착하게 살려고 하는가? 그것은 이 세상에서 좀 고생을 덜 하다가 천국에 가기 위함인데, 그런데 예수님의 그 말씀 한 마디, 즉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왔다" 라고 하는 말씀에 의해서 완전히 역전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기막힌 반전드라마(?)가 어디 있는가?
바리새인들을 보고 "창기와 세리와 너희들보다 낫다" 라고 하는 말씀이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렇게 극악 무도한 강도짓을 한 자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을 것이다" 라고 하니,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이냐는 것이다. 인간들이 그동안 쌓아온 존엄성과 가치가 모두 다 날아가 버린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 속에 착해지려고 하는 그 힘을 빼버리는 것인데, 즉 "힘을 빼고서 빈 털털이로 살아라" 라고 하는 것이 주님의 요구이고, 이에 반해서 우리는 무엇인가? "아니, 제가 좀 착하게 살면 안 됩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착하게 살아가는 것을 두고, 죄라고 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러니 그것을 마귀가 하는 짓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가 서로 !!
다시 말해서, 우리의 착함과 주님이 새롭게 제시한 하나님의 의와의 전쟁인데, 평생을 두고서 그렇게 싸운다는 말이다. 주님이 바라보는 의는 주님을 믿는 것이고, 우리의 의는 자기가 조금 더 착해지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 한평생을 싸우고 또 싸운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죄와 주님의 용서하심과의 싸움인데, 즉 인간은 자기 죄에 관심을 두고서 그것을 그렇게 씻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반면에, 주님은 그것이 아니라 자기의 용서하심에 관심을 두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저는 교회에 다니면서 참으로 많은 선하고 착한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리고 여러분들은 아마 이 세상에서 더 많은 악한 사람들을 보았지 싶은데, 저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니 말이다. 택시를 운전하면서 술을 마시고 온갖 더러운 짓을 다하는 인간들을 보았을 것이고, 또 직장에서 회식을 하면서 온갖 추태를 다 부리는 인간들을 보았지 싶은데 말이다.
하지만 주님의 용서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짓는 그 어떤 죄보다도 더 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용서는, 기껏해야 자기가 회개하거나 반성을 할 때 나오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은 가짜 용서라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의 자기가 자신 십자가의 피를 근거로 해서 주는 용서를 받아야지, 자기가 스스로 반성했다고 해서 생겨나는 용서는 결코 용서가 아니라, 아까 말한 "제가 앞으로 잘 할게요" 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으로 용서를 받으려고 하는데, 그런 것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용서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는 하나의 연출이고, 그러니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신청곡, 불효자는 웁니다 !!
그러니 이런 가짜 용서는 낱낱이 다 들켜서 고발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용서는 오후 3시에 라디오를 틀어보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음악 프로그램인데, 청취자의 사연을 들어보면 그런 것들이 많다는 말이다. 즉 "어머님, 이제 제가 나이가 60이 되고 보니 어머니의 그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어머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신청곡은 '불효자는 웁니다'입니다. 부탁합니다" 라고 말이다.
왜 이런 내용을 많이 들어보셨지요? 그러니 자기 스스로 자기에게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고, 그야말로 난리를 피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님의 피에 근거한 용서가 아니라, 결국은 "아직도 저는 선한 요소가 남아있는 잘난 인간입니다. 그러니 착한 자식이 맞지요? 그렇지요 어머니?" 라는 것에 다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이미 바리새인들이 그동안 많이 했던 것이고, 바로 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십자가 피로 용서함을 받는다고 하니 죽였다는 말이다. 너무나 자기들이 잘난 인간이기에, 도저히 그런 예수님의 용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용서는 필요치 않다고 말이다.
◈ 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셨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셨는가? 그렇게 예수님이 나누어준 떡과 포도주를 먹어야만 구원을 얻지, 인간들이 스스로 생산한 떡과 포도주는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냥 나누어주는 것을 먹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 이상 더 좋은 믿음이 없다는 말이다. 염치고 뭐고 전혀 없이 말이다.
그것이 참으로 좋은 믿음인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자기가 자기에게 용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에게 벌을 세우고 야단을 치고 무릎을 끓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죄보다도 예수님의 용서하심이 더 크다고 하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마치고 질문을 해야 하는데, 그만 잊어버릴까 싶어서 말입니다. 왜 사도행전에 보면 교회가 나오는데, 그런데 왜 공동체의 형태로 등장합니까? 구제를 하든 무엇을 하든 간에 집단적으로 하는 것 같고 말입니다. 그냥 개별적으로 해도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 교회는, 주님을 증거하는 새로운 공동체 !!
예수님의 12제자가 구약의 12지파를 대체하는데, 이 12지파는 이스라엘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공동체로 등장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이스라엘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12제를 통해서 이 일을 하시는데, 11제자가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가롯유다가 그만 탈락을 하니 다시 투표를 해서 '맛디아'를 뽑음으로서 다시 12명의 숫자를 맞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12지파이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교회라는 이름의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는데, "여기에는 그 어떤 인간의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전혀 예상 밖의 행동들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그 귀한 돈을 주님에게 바친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공동체에게 바치는 게 아니고 말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주님에게 바치지 않아서 죽었고 말이다.
그렇게 주님에게 바치면, 주님은 어렵고 힘든 과부나 고아가 있으면 그들에게 나누어주는데, 그래서 그들은 공동체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이다. 분명히 옆에는 사람이 돈을 냈는데, 그런데 그 돈은 그 사람이 낸 돈이 아니라 주님이 낸 돈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공동체라는 말이다.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이제 로마서 11장 6절을 보겠습니다.
(롬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 행위가 아닌 은혜 !!
그러니 무엇이 개입되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는가? 행위가 개입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행위가 빠지면 은혜이고, 행위가 들어오면 은혜가 깨어진다는 것이다. 은혜가 컵이라면 행위가 망치인데, 그 망치로 때리면 깨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은혜는 연약한 유리컵(?)인데, 우리가 그 유리컵으로 구원을 받는데, 그런데 갑자기 망치를 들고 설치면 은혜가 다 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 '남은 자'는 오직 은혜로 !!
지금 로마서 11장 6절의 성경말씀이 어떤 경우인고 하니, 지금 이 로마서 11장에서 '남은 자'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즉 남은 자는 그 어떤 행위로도 되지 않고 오직 은혜로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7절에 나오는데 말이다.
(롬 11:7)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이 '남은 자'를 하려고 하면 엘리야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지금은 좀 그렇고, 아무튼 이 엘리야가 다른 선지자들은 다 죽고 자기만 남았다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은혜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을 남겨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5절에 보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이렇게 은혜로 택했다고 하는 것은 행위가 빠지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가 착해서 남은 자가 된 경우는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은혜로 선택된 남은 자가 있으니, 즉 7000명이 있으니, 자기의 행위를 보고 남니 마니 하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11장 26절을 보자.
(롬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여기에 보면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하는데, 누구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인가? 도대체 누구의 작품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행위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27절에 보면,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라고 하는데, 도대체 누가 죄를 없애는 작업을 했는가? 인간들인가?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기 약속대로 우리 죄를 다 날아가 버리게 하고, 오직 은혜로 남은 자를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자가 28절에 의하면, "사랑을 입은 자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롬 11:27)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28)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 저는 남의 나라 메시야를 믿습니다 !!
이러한 모든 결과에 대해서 결국 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유대인들의 구원자인 예수님을 이방인들이 찾는다는 것이다. 즉 남의 나라 메시야를 그야말로 자존심도 없이(?) 찾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남의 나라 메시야를 자기의 메시야로 바라본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이미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남은 자이기 때문에 자기 행함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즉 모든 것이 주님의 공로임을 고백하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로마서 11장에서 이야기하는 성령을 받은 사도바울의 구원관이라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세속적이고 더러운 생각들이 끊이지 않는 모습들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과거 복음을 모를 때는, 그래도 자기가 열심히 해서 뭔가를 새롭게 해보려고 하고 반성도 많이 했는데,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다 육적인 것이고, 결코 주님의 뜻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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