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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뒤에서 본 한국교회] 갈라디아서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뒤에서 본 한국교회

[뒤에서 본 한국교회] 갈라디아서

정인순 2011. 1. 4. 09:28

갈라디아서

 

 

◈ 이제 갈라디아서를 !!

 

로마서는 이 정도로 정리하고 이제 갈라디아서로 넘어가겠는데, 일단 갈라디아서 1장 4절의 말씀을 먼저 보자. 이번 여름수련회 때에 강의를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갈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 오직 예수님의 '자기 몸'으로 !!

 

제가 여기서 퀴즈를 하나 내겠는데,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 )을 드리셨으니" 라고 하는데, 이 ( )안에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가? '자기 몸' 인데, 이것이 사실 엄청 어려운 내용이라는 것이다.

 

왜 어려운가? 죄는 우리 인간들이 불순종함으로 지었는데, 그렇다면 그 해결도 역시 우리 인간들이 해야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자율성이 있는 인간이니 말이다. 자유는 책임이 따르는 것이고 말이다. 우리가 죄를 지었으면 그것을 씻는 것도 당연히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 책임을 누가 담당하셨는가? 예수님이 자기 몸을 드려서 다 해결을 했다는 것이다.

 

◈ 복음이란, 죄는 인간이, 해결은 예수님, 그 관계 ??

 

바로 이런 둘 사이의 관계(?)를 두고 '복음' 이라고 하는데, 즉 죄는 인간이 짓고 그 해결은 예수님이 하셨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에는 두 가지 요소가 다 들어가야 하는데, 첫째로 죄는 우리 인간이 지었다는 것과, 둘째는 그러한 우리 인간들의 죄 문제를 엉뚱하게도(?)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드려서 그 죄를 해결했다고 하는 것이 말이다. 그리고 이것을 아울러 함께 가지고 있어야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까 교회를 두고서 정치적 욕망의 장(場)이라고 했는데, 그러니 "교회를 개혁하자" 라는 것은 정치적 야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 "니가 정치적 야망을 부르짖던 말던 간에 니는 죄인이고, 나는 너를 위해서 몸을 바쳤다" 라고 하시면서, 그런 간단한(?) 논리로서 접근을 하신다는 말이다.

 

◈ 그런데 여기에 '법'이 들어오면 !!

 

일단 이것을 분명히 하고, 여기에 제가 무엇을 하나 집어넣겠는데, 율법을 말이다. 율법이라고 하면 어려우니 그냥 '법' 이라고 하자는 것이자. 그리고 아까 말한 로마서 12장에 의하면, '하라' 라는 것이 줄줄이 나왔는데,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그렇게 말이다.

 

이렇게 하늘의 법이 들어왔는데, 도대체 이 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아까 제가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던져서 해결하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이 법을 어디에다 집어넣어야 하겠느냐는 말이다.

 

* 퀴즈 - 법은 다음 중 어디에 들어가야 하는가? (1) 우리 죄, (2) 예수님의 자기 몸, (3) 복음

 

물론 3번인 복음은 1번과 2번을 합친 것이기는 한데, 사실은 이 법은 3번 복음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를 알아서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알았기에 우리가 죄인임을 알았기에 말이다. 그러니 일단 법이 복음으로 가서, 그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로 온다는 것이다.

 

◈ 법은 복음에 들어가야 !!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율법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오기는 오는 것이지만, 그러나 곧바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일단 복음으로 가서, 즉 "너희들이 이렇게 이렇게 죄인이니 내가 용서한다" 라고 해서, 그 다음에 우리에게로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그것이 아니라, 율법이 곧 바로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가 이렇게 나쁜 죄인이니 십자가를 믿자"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지금 어디 일반교회들 치고 십자가를 거부하는 교회가 있는가? 그럼에도 그들이 이단인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말씀을 가지고 자기 죄를 깨닫는다고 하는데, 하지만 성경말씀을 가지고 자기 죄를 깨달을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인데, 왜냐하면 자기가 기껏 살아봐야 100년인데, 그러니 인생을 얼마동안 살지를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성경말씀 가운데 어떤 것은 지키고 또 어떤 것을 지키지 못한다고 한다는 것이다. 생전에 바람도 한번 피워보지 못한 사람은 "간음을 하지 말라" 라는 것은 자기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 평생을 무인도에서 산 사람이 간음을 ??

 

하지만 그렇지 않은데, 설령 무인도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여자를 한번도 구경하지 못한 인간이라도 그것이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일단 법을 자기에게 당겨서 "야, 내가 10개중에서 5개는 지키겠는데, 나머지 5개는 도저히 안 되겠네" 라고 하면서, 즉 자기가 지키지 못하는 5개의 법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해결하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행태인데,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이냐는 것이다. 그런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 이 갈라디아서가 있다는 말이다. 즉 이 갈라디아서는 "법을 자기에게로 곧 바로 가지고 오는 사람은 엉터리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아니야" 라고 소리치기 위해서 말이다.

 

◈ 이단 중에서 제일 오야붕은?

 

그래서 수많은 이단 중에서 제일 오야붕(대장?) 이단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미처 다 지키지 못한 법을, 이제는 예수님을 믿고 제대로 한번 지켜 보세나. 그렇게 하세" 라고 하는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자기들이 과거에 하지 못하던 것을,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어서 그 법을 제대로 한번 지켜보겠다고 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법이 예수님에게 가는 줄을 모르고, 직접 자기에게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성경책을 보고 자기가 죄인임을 알았는데, 그 죄가 자기 힘으로 되지를 않더라는 말이다. 그래서 해결책을 찾아보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그냥 용서해주신다고 하니, 그 십자가의 피를 찍어 발라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래서 이제 완전한 새사람이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말씀을 지키자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놈들이 이단 중의 이단이라는 말이다.

 

* 질문 - 그렇게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살자고 하는 인간들이 그렇다는 말씀이죠?

 

물론 그러한데,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을 기독교의 정치꾼들이 이용한 것인데, 즉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상식과 타협을 했다는 말이다. 기존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윤리성과 손을 잡았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더 해보겠는데, 죄는 우리 인간들이 지었는데 해결은 누가 하는고 하니, 엉뚱하게 예수님이 자기 몸을 드려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미 자기 몸을 드려서 끝을 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미 끝난 이야기이니, 굳이 새사람이 되어서 무엇을 더 지키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자기 몸으로 해결, 끝 !!

 

정말이지 이것이 믿어지면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가는데, 혹시 가시면 주님께 안부를 좀 전해주면 좋고 말이다. (ㅋㅋ) 그러니 이 구원의 해결책을 자기에게 끌어오지 말라는 것이다. 구원의 모든 해결책은 이미 주님이 자기 몸으로 해결을 했으니, 그런 해결책을 우리에게 끌어올 필요조차도 없다는 말이다. 다만 예수님은 그 모든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믿으라고 통고하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 : 근호야, 니는 내 믿나?

* 이근호 : 믿습니다.

* 예수님 : 정말로 내 믿나?

* 이근호 : 예, 믿습니다.

* 예수님 : 정말로 믿지?

* 이근호 : 예, 정말로 믿습니다.

 

그런데 개그콘서트의 '출산드라'에 보면 '먹어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것은 '먹어라' 라는 것은 명령이라는 것이다. '믿어라' 라고 해야 하는데 말이다. 무슨 말인지 몰라요? 여러분은 TV는 전혀 보지 않는 것 같은데, 성경말씀만 보나요? 부흥회를 희화화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인데, 제대로 복음적으로(?) 하려고 하면 "나를 믿어라" 라고 해야 하는데, 믿으면 비쩍 마른 사람이 이렇게 뚱뚱하게 된다고 해야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처럼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해버리면, 그것은 기존 종교가 되는데, 하지만 이 종교는 지상 최대의 사기극이라는 말이다. 그 원조가 누구인고 하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라는 것이다. 그 원조들이 예수님을 죽여버렸는데,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을 죽여버렸다는 말이다. 사건은 그때부터 시작이 되는데, 그 사건이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이제 진도를 좀 빨리 빼겠는데, 일단 3장 1절을 보자.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누가 너희를 꾀더냐 !!

 

도대체 누가 꾀겠는가? 물론 신부와 목사들인데, 아닌가? 아무튼 지금 사도바울이 뭐라고 말하는가? 갈라디아서 사람들을 보고 어리석다고 하면서, 그 이유가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너무나도 선명한데 말이다.

 

그러면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자기들도 십자가를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를 알면 왜 자기가 스스로 알아서 법을 지키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모르니 그런 일이 생기는데, 그런데 만약에 십자가를 안다면, 자기가 불순종할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올라갈 수 없는 십자가를 주님이 올라가셨는데, 즉 우리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이 행하셨다는 말이다.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고민이 엄청 많을 때는 이 십자가를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가 그런 고민거리를 해결해주기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고민조차도 자기의 불순종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각양각색의 모든 고민도 말이다.

 

◈ 예수님, 제 손목이 왜 이렇게 가늘어요?

 

저는 사춘기 때 고민이 무엇이었는고 하니, 여러분이 들으면 웃을지 몰라도 남들보다 손목이 가늘어서 울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이렇게 손목이 가늘게 생겼느냐는 말이다. 그것을 만약에 종교적인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아하, 내가 십일조를 하지 않아서 가늘게 생겼구나" 라고 할 텐데, 그것이 17살 때 일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30살이 되면 그러한 고민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30살대로의 또 고민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결혼을 못하지?" 라고 말이다. 그런데 60살이 되면 또 나름대로의 고민거리가 있고 말이다. "내가 무슨 축복을 받았기에 이렇게 결혼도 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지?" 라고 하든지 말이다.

 

하지만 거지 나사로나 강도의 경우를 생각해보게 되면 결국은, "내가 무슨 복을 받았기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한 평생을 살아왔던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그렇게 자기가 살았다고 하는 자체를 복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귀엽게(?) 보시는데, 마치 벌레가 접시 위에서 그 무슨 짓을 해도 파닥파닥이고, 예쁘게 봐주시듯이 말이다. 그래서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천사에 받들려져서 하늘나라에 올라갔다는 것이다.

 

◈ 제 아내가 초상집에서 !!

 

이번에 집안에 초상이 났는데, 저는 일요일이라서 못 가고 제 아내만 참석했는데, 그런데 가서 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친척들이 마구 퍼부었는데, 집안의 며느리가 되어서 절도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자기들도 원래 죽은 사람에게는 절을 하지 않는데, 그런데 그쪽에서 하는 내용인즉, 죽은지 3일 동안은 신이 머물러 있기 때문에 절을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바로 아브라함의 품에 갔는데, 무슨 3일 동안을 머물러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옛날 미신이 그대로 종교화되어서 그러한데, 불교도 아니고 천주교에서 그렇게 주장한다는 말이다. 이번 초상을 천주교식으로 했는데,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눅 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러니 이것이 지상최대의 사기극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말이다. 성경을 보는지 마는지, 성경에는 그냥 죽으면 바로 천국에 갈 사람은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갈 인간들은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지금 가만히 있는 것을 보니 초상집에 가서 절을 해본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 그렇게 절을 하고 말고 하는 것을 진리의 문제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정치적으로 타협을 하는데, 좋은 것이 좋다고 말이다. 즉 옳고 그름이 아니라 가능한 한 자기가 편한 대로, 그렇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행동을 하는데, 그러니 인간은 순종치 아니함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 주님의 사랑하는 대상이란 이유만으로 !!

 

다시 말해서, 1968년도에 불순종을 했고, 또한 2019년에도 불순종을 할 것이고, 그렇다고 이런 것을 알았다고 해서 진리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또 정치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알든 모르든 간에 우리 인간은 죽을 때까지 죄인인데, 그런데 이렇게 살아온 것은 오직 주님께서 사랑하는 대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것이지, 결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너희는 내 사랑의 대상이야. 창세 전에 이미 구원을 받도록 되어있어" 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해도 몽땅 용서해주겠다" 라고 하는 것이, 그것을 세 글자로 무슨 사건이라고 하는가? 바로 '십자가 사건' 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들을 꼬시던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즉 "주님이 몽땅 다 용서를 해주겠다고 하는 십자가가 지금 그렇게 보이는데, 그런데 도대체 누가 또 너희들을 보고 또 무엇을 하라고 그렇게 꼬드기고 유혹을 하든가?" 라는 말이다. 꼬시는 놈도 그렇고, 넘어가는 놈도 다 나쁜 놈들이라는 것이다.

 

이제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보자.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왜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는가?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는데, 누구를 위해서 받는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저주를 받는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저주를 받은 것이 실패가 아니라고 한다면, 즉 예수님이 성공을 했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도 역시 그런 저주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것이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라고 하면, 그 성공은 곧 '우리를 위해서' 한 것이 성공이라는 말인데, 그러니 우리가 저주에서 벗어나서 구원을 받은 것에 성공했다는 말인데, 그러니 그것이 기쁜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아까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율법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간다고 했는데, 3번으로 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저주를 받는 이유는, 물론 십자가 사건이후에 알았지만, 인간들이 율법대로 살지 못하고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율법이 먼저 만났다는 것이다. 나중에 보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율법대로 저주를 받아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성공을 했기 때문에, 이제 그 율법이 다가오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우리는 불순종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아하, 나는 순종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구나" 라고 말이다.

 

◈ 우리 가슴을 설레발하게 하는 성경말씀 !!

 

여러분은 이 성경말씀이 어떻게 재미있지 않나요?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설레발하게(?) 만드느냐는 것이다. 마치 고등학교 다닐 때 몰래 '선데이 서울'을 보듯이 말이다. 물론 유지인이나 정윤희 사진은 나오지 않지만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런 귀한 복음이 어디에서 만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왜 보지 않는가? 이렇게 푸는 것이 사실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읽고 5분도 안 되어서 잠이 든다는 것이다. 머리를 그만큼 많이 쓰니 산소가 모자라서(?) 잠이 온다는 것이다. 너무 생뚱맞은 말들이 많아서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제 3장 10절의 말씀을 보자.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여기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저주 아래' 있음을 강조하는데, 우리가 결코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아시고 우리를 위하여 우리 대신에 저주를 받았는데, 그것이 13절에 나오는데, 구약 신명기 21장의 말씀을 인용해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14절에 나오듯이, 그 아브라함의 복을 성령을 통해서 받게 하신다는 것이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리고 3장 22절을 보면 뭐라고 하는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라고 하는데, 즉 율법은 예수님에게 주어졌고, 그래서 예수님이 그 율법을 제대로 모두 처리를 해서 그 십자가의 효과를, 즉 약속을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5장 1절을 보자.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기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율법을 따라서 살지 말라" 라는 것인데, 즉 율법의 종의 되지 말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성경말씀을 보자.

 

(갈 5: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갈 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갈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여기 4절에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하는데, 즉 율법 안에서 새삼스럽게 자기를 의롭게 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인간의 의로운 행동이 나온다고 여기는 사람은 은혜에서 끊어진 자라는 것이다.

 

◈ 의(義)의 종은, 인간의 불순종과 예수님의 용서하심이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인간에게서는 결코 의로운 행동이 나올 수 없고, 불순종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불순종과 주님의 용서하심이, 즉 사랑이 결합해서 우리 인간의 의(義)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義)가 나오는데,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의 의(義)에 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율법의 종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러한 자가 바로 하나님의 의(義)에 종이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니 율법을 바로 받게 되면 은혜에서 떨어진다는 말씀이죠?

 

율법은 개개인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 집어넣는데, 즉 율법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있는 영역을 지배해 버린다는 것이다. 화성인이 쳐들어오면 이 지구가 멸망하듯이, 율법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멸망을 당하는데, 왜냐하면, 율법 아래에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저주아래에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 어떤 인간도 이 법을 지키지 못하는데, 어떤 경우에도 지키지 못하는데, 항상 못 지키고, 전혀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율법이 그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것도 제대로 모르는데, 그러니 어떻게 율법을 지키겠느냐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간음하지 말라" 라고 했을 때, 그 뜻을 누가 알았는가? 예수님이 오셔서 가르쳐주시니 비로소 알았지 말이다.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은 것도 간음이고, 형제를 미워한 것도 살인한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라도 했느냐는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실제로 여자를 덮치고, 사람을 칼로 찔러야만 그 계명을 어기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그렇게 말이다. 하지만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 라는 것은, 남을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이유는 단 하나, '내가 너를 사랑했다' !!

 

그러니 우리 인간들은 십계명이고 뭐고 간에 아는 것이 도무지 없는데,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데, 그야말로 동물적인 본능과 충동으로 말이다. 그렇게 자기편이나 만들면서 순종치 않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올해도 그렇고, 내년에도 그렇고, 2019년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결혼을 해도 불순종이고, 결혼을 하지 않아도 역시 불순종이고 말이다.

 

그러니 사람이 아이를 낳았다고 철이 드는 것도 아니고, 또 오래 산다고 해서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로지 성도는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이란 이유만으로,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다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가 세상의 종교라는 사기극에 속지 말고 성경말씀이 뭐라고 하는지 깨닫게 하옵소서.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그런데 해결은 주님이 하셨다는 것을 순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8,12,21 오후 9시 46분에 마침.

 

드디어 무서운 눈이 온다. 예수님은 오시면 안 되나?

 

05칠곡강의 [뒤에서 본 한국교회] 43 - 법, 갈라디아서2

05,09,1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인간의 '자기 영역확대'에 대해서 !!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정(精)으로 만난다고 말은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분석해보면, 그 사람과 자기가 공통성이 있을 때만 사람들은 대화가 소통이 되고 친하게 지낸다는 것이다. 공통된 소통, 즉 취미가 같다든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있다든지, 같은 고향이나 학교 출신이든지 말이다. 이렇게 될 때는 상대방이 자기편이 되어주는데, 그것을 두고 자기의 '영역확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죄라고만 생각하지를 말고(?) 인간의 본능이라고 보면 되는데, 왜 짐승들이 일정한 구역마다 오줌을 눈다고 하지 않는가? 왜 그런고 하니까, 학자들마다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목소리가 그것은 개가 그렇게 오줌을 누는 것은 자기 영역의 표시라는 것이다. 물론 똥개가 돌아다니다가 자기 집이 아니라 밖에서 다리를 쳐들고 누는 것은 급해서 그런 경우가 많겠지만 말이다.

 

◈ 잠시 수학특강을 ??

 

알다시피 수학에서는 "1+1=2" 라고 하는데, 그런데 사람의 경우에는 "1+1=3", 혹은 "1+1=4", "1+1=5" 라고, 그렇게 확대가 되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1+1=2"가 일시적으로 되지만, 그러나 2가 되면 저쪽에 1이 남는데, 그렇게 되면 2가 1을 잠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1+1=3"이 될 가능성이 1보다는 많다는 것이다. (??)

 

무슨 말인고 하니, "1+1=2"가 되는 동시에, 즉 여기에 이렇게 집단이 죽 놓여져 있다면, 이런 집단이 개별적으로 있다가 "1+1=2"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2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다른 1보다 2배의 차이점 때문에 곧장 3으로 갈 가능성이 있고, 그리고 여기에 있는 1은 0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흡수통합이 되니 말이다. (??)

 

그래서 아파트 단지에 처음에는 각자 각자가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그렇게 이사를 오더라도, 어느 날 보면 군집이 되어있는데, 그것이 이장들이나 통장들 모임에 가보면 알 수 있는데 말이다. 바로 그것은 자기 영역의 확대를 인간은 쉬지 않고 해나가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포섭을 해서 자기편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 공자왈, 세 사람만 모여도 한 사람의 지도자가 !!

 

그래서 공자가 뭐라고 했는가? 세 사람만 모여 있어도 한 사람의 지도자가 생긴다고 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리더가 등장하고, 그래서 리더쉽이 어쩌고 하면서 가르쳐주는 곳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리더쉽은 일종의 '다른 사람 이용하기'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리더에게 복종하려고 리더쉽을 공부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희생을 좀 덜하고, 당신이 성깔이 좋으니 열심히 뛰어서 뭔가 일이 되면, 우리는 그 부스러기나 좀 얻어먹을게. 그 대신 당신에게 잘한다고 박수를 쳐줄게" 라고 말이다. 그렇게 뒤에서 잘한다고 박수나 쳐주고 부추기면, 그 사람은 더욱 열심히 일을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새로운 리더는 그만큼 자기희생에 대한 보람을 느끼는데, 즉 그냥 희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만약에 그 사람이 정수기를 판다고 하면 많이 팔 가능성이 있고, 또 보험회사에 다닌다면 보험계약을 많이 체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그러니 교회도 큰 교회를 가야 !!

 

그래서 교회를 가더라도 큰 교회에 가게 되는데, 왜냐하면 단골을 보다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 말이다. 대학을 다니던 자기 아이가 방학을 하면 아르바이트 자리가 많을 수도 있고, 또 과년한 딸이 있으면 선을 볼 기회가 많아지고 말이다. 나중에 자기가 장사를 하게 되더라도 손님이 많아지고 말이다.

 

그렇게 하나의 집단에서는, 물론 교회도 마찬가지이지만, 아무튼 하나의 집단에서는 자기 혼자 고립이 되어서는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연줄로 연줄로 해서 이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다는 것이다.

 

◈ 라캉 - 타인의 욕망이 '나'를 만들어 !!

 

이것을 좀 어렵게 이야기하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라고 하는데, 라캉이 주장한 유명한 이론인데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나' 라고 하는 것을 항상 새롭게 조립을 하는데, 그 '나'는 타인의 욕망이 만든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도 조금 했지 싶은데, 그런데 그런 타인의 욕망이 '나'를 만들려고 하면, '나'를 타인에게 인수인계를 시켜야 하는데, 이것을 라캉은 조이너스, 즉 '항유' 라고 했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즐긴다' 라는 의미인데, 물론 이것은 육체적 쾌감과는 약간 다른데, 즉 술을 마시면 그것은 그때뿐이고 지나고 나면 머리만 아프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향유는 정신적 쾌감이 되어서, "내가 이 사람에게 술을 접대했더니만 하청을 주었더라" 라고 해서, 그 사람에게는 사실 술을 먹는 것이 쾌감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술 상무와 같은 경우에는 그것이 직업이니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고통이지만, 그러나 더 정신적인 향유가 따르기 때문에 견딜 수 있다는 말이다.

 

◈ 타인의 욕망은 외부의 시선이 !!

 

이러한 타인의 욕망에, 사실 여기서 이 타인의 욕망이 중요한데, 이 타인의 욕망은 어디서 만드는고 하니, 이 타인의 욕망은 외부의 시선이 만든다는 것이다. 즉 외부의 따가운 눈총이 말이다. 물론 포근하고 부러워하는 눈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타인의 그런 수많은 눈동자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데, "얼마나 잘 되는지 한번 보자" 라고 하면서 말이다. 즉 얼마나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데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거기에 물어보면 관심이 없는데, 그러니 본인은 정작 자기 것은 없고 타인의 그런 기대감에 둘러 쌓여있다는 것이다.

 

◈ 조이너스, 꼼빠니아, 논노 ??

 

그런 타인의 욕망을 전체적으로 다 합치면 일종의 꽃다발이 된다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한 엄청난 타인의 욕망에다 자기를 헌신하게 될 때, 그것을 '조이너스' 라고, 라캉이 그렇게 주장한다는 것이다. '조이너스' 라고 하니 과거 여성복 브랜드 이름이 떠오는데 말이다. 꼼빠니아도 있었고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조이너스, 즉 '항유' 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결핍을 타인의 욕망에다 전가시켜서, 그렇게 해서 타인의 책임으로 돌려버린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너희들이 그렇게 원했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엄마가 시켰잖아 !!

 

이런 것이 어릴 때 잘 드러나는데, 즉 "나는 공부를 하기 싫지만, 엄마가 원해서 공부를 했잖아" 라고 하는데,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이것이 무의식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잠재되어있는데, "엄마, 한번 두고 보세요. 내가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올 테니" 라고 말이다. 그러니 어릴 때 그런 것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자기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인간에게 참 불행한 것인데, 인간은 무엇을 하나 경험하면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바쁘다보니 잠시 떨어져 있다가, 어떤 계기가 되면 다시 솟아오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릴 때의 여러 가지 것들이, 이것은 체험은 아닌데, 왜냐하면 체험은 날아가 버리니 말이다.

 

◈ 상흔(傷痕)이 복수심으로 !!

 

그것은 체험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마음의 상처라고 할까요? 그것을 '상흔(傷痕)' 이라고 하는데, 즉 상처가 난 흔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남아서 복수심으로 나아가는데, 이런 복수가 자기 힘으로 되지 않으니 타인의 힘을 빌리게 되는데, 그래서 타인의 욕망에 자기가 손을 들고 들어가서 남들이 보란 듯이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서, 타인의 욕망도 만족시키게 되고, 자기에는 복수도 된다는 말이다.

 

◈ 라캉 - 그것이 바로 '분열된 주체' !!

 

아무튼 이런 방식으로 인간은 부지런히 주체를 만들어나가는데, 그런 주체를 두고서 라캉은 '분열된 주체' 라고 했는데, 인간은 날마다 그렇게 분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분열이 되면 결핍이 생기는데, 그래서 인간은 안절부절못하는데, 왜냐하면 자꾸만 모자람이 있기에 말이다. 즉 인간은 밑 빠진 독처럼 채워도 채워도 모자란다는 것이다. 그 모자람은 바로 타인의 시선에서 나오고 말이다.

 

◈ 이등병은 치마만 둘러도 !!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 중에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까, 군대에서 이등병이 바라보는 애인상과 병장이 바라보는 애인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등병은 치마만 두르면 다 좋다고 하는데, 그런데 병장이 되면 마음이 달라지는데, 치마는 기본이고 얼굴도 좀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대를 하고 나오면 백수가 되는데, 그때는 또 달라지는데, 다시 치마를 두르는 것으로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여자들은 백수를 잡는 것이 훨씬 유리한데, 백수들은 자기를 사랑해주는 것만으로 감격해하니 말이다. "아니, 나 같은 인간은 사랑해주다니"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렇게 사귀다가 그 남자가 취직을 하게 되면 그 남자는 다른 여자를 쳐다보는데, 그것은 그 남자가 인간성이 더럽고 바람기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자기 결핍을 채우려고 배신을 ??

 

이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그 남자는 타인의 통해서 자기의 결핍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여자를 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향유'를 하게 되는데, 즉 삶의 보람을 느낀다는 말이다. 새로운 기대와 새로운 소망 가운데서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여자 같으면 재미가 없는데, 물론 이런 이야기는 여자들이 들으면 상당히 기분이 나쁘고 외설적이 되지만, 남자가 그런 여자를 가지게 되면 그 여자에게서는 자기 결핍을 채울 수 없기 때문에, 그 여자는 타인으로서 자기를 땡기는 맛이 없다는 것이다. 즉 신선도가 영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점점 헤어질 핑계거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 시절에는 30대라고 해도 한 여자와 사귀면 그것을 정리하고 다른 여자를 사귀었는데, 그런데 요즘은 겹치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양다리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문어발 작전을 펼치는데, 이 여자를 사귀면서 또 다른 여자를 사귀고, 또 다른 여자를 걸치고 말이다.

 

◈ 가치는 서로의 차별을 통해서 !!

 

지금 분위기가 이것이 성경공부보다 더 재미가 있다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아무튼 사람은 자기 혼자 있으면 가치를 모르는데, 왜냐하면 가치는 서로의 차별을 통해서 드러나기에 말이다. 즉 반드시 차이를 통해서 가치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들만 줄줄이 있는 집에 여자가 태어나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그런데 딸만 5명인데, 또 딸이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혹시나 "얼굴에도 품위가 있다" 라는 말을 아세요? 얼굴에서 나는 빛이 다르다는 것인데, 그러면 어느 집에서 자란 딸이 얼굴에 더욱 더 빛이 빛나겠는가?

 

그리고 옷을 하나 골라도 어떠한고 하니, 10만원자리와 30만원자리가 있으면 30만원자리가 훨씬 좋아 보이지만 빛도 나고 말이다. 그러나 300만원자리가 그 옆에 오면 30만원자라는 그만 이전의 광채를 완전히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전혀 비교가 안 되게 말이다.

 

그렇게 새로운 것이 오게 되면 주체는 또 다시 새로운 기대와 소망으로 그만 설레이게 되는데, 바로 그것을 '향유' 라고 한다는 말이다. 남자의 경우에, 그 새로운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그동안 자기가 차지했던 여자를 과감하게 정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자는 남자를 정리하면 안 되나?)

 

그래서 잉어낚시를 하더라도 자꾸만 새로운 잉어를 잡고 또 잡아야 재미가 있고 신이 나는 것이지, 앞에서 잉어를 잡았던 즐거움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소설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말이다.

 

◈ 알 수 없는 소망 ??

 

흔히들 '알 수 없는 소망' 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애초부터 결핍된 주체가 인간 속에 태어날 때부터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가 자꾸 분열을 하는데, 자꾸만 무너지고 말이다. 그렇게 새로운 즐거움을 향해서 나아가는데, 그런데 그 즐거움은 결핍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결핍이 만들어져야, 그것을 '구멍' 이라고 하는데, 그런 구멍이 있어야지 욕망을 내뿜는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 질문 - 그런 즐거움은 획일화된 것은 아니지 싶은데, 그런 다양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나요? 환경인가요? 아니면 교육인가? 타고난 성격인가요?

 

그것은 본인의 성격이 아니라, 외부의 우발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것이다.

 

* 질문 - 아까 목사님은 경험의 해석인 상흔을 말씀하셨는데, 그것 때문에 그런가요?

 

그런 상흔은 계속해서 쌓이는데, 잊어버렸다고 해도 의식 속에서 잊어버린 것이지, 사실 무의식 속에서는 그런 잊어버린다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반드시 차곡차곡 쌓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꿈에 나타나는데, 19살 때의 자기 첫 사랑인 은정이와 손잡고 놀던 풍경이 떠오르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그런 다양성의 즐거움을 어디서 비롯되는가요?

 

그것은 의식의 세계에서 새로운 우발적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자기의 욕망과 만나면서 욕망이 새로운 결핍을 느끼게 되는데, 즉 "아, 저것을 가지고 싶어" 라고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백 만원자리 옷을 한번 입고 나면 그 촉감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자기의 형편에는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소망이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입고 말겠다는 것이다. - 치토스 ??

 

* 질문 - 그러면 그런 즐거움은 자기 경험을 해석한 것에서 나타난 것인데, 그러면 의미부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마다 각자의 즐거움이 다르다는 말인가요?

 

거기에 대한 해석을 유명한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어떻게 했는고 하니, 놀랍게도 그것을 인간의 '죽음' 이라고 보았는데, 즉 죽음이 손짓을 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죽음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으로 간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렇다면 그렇게 해석을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요?

 

물론 해석의 주체도 역시 타인인데, 즉 "너는 이렇게 이렇게 해야 돼" 라고 말이다. 그러니 자기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런 다양한 즐거움은 타인의 눈에 의해서 본인의 즐거움이 표출되는 것인가요?

 

그래서 정치적 타협을 하는데,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얻을 것은 얻고 말이다. 그것은 본인이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경험이 모두 다르고, 또한 거기에 대한 해석도 다들 다르니 말이다. 아니, 가정환경이 똑같은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 질문 - 그러면 결국 개인의 주체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개인의 주체는 없는데, 그래서 이런 라캉의 주장을 사람들이 굉장히 불쾌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아니, 자기가 없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말이다. 이렇게 '내'가 엄연히 존재해 있는데, 그런데 주체가 없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본인이 즐거워하는 것도 타인의 의한 즐거움이 아닌가요?

 

물론 타인의 시선이 원하는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예비군을 갔다고 하면, 거기서 시키는 데로 하지 않으면 벌금이 나오고 하니 할 수 없이 따라하는데, 그러니 다시 '나' 라는 것은 그만 사라지고, 즉 오늘 오후에 데이트하기로 했는데, 그런 기대감은 모두가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종일 거기서 시키는 데로 훈련을 받는다는 것이다.

 

◈ 예, 알겠습니다 !!

 

그렇게 보면 라캉이 하는 말이 맞는데, "당신이 그렇게 큰소리를 쳐도 당신을 그렇게 억압하고 옭아매는 집단이 왔을 때 당신은 어떻게 되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만 다시 거기에 적응을 하는데,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다.

 

직장 동료들과 노래방에 가서는 "김 부장, 나와!" 라고 하면서 큰소리를 마구 쳐도, 막상 그 다음날 회사에서 그 부장을 만나면 곧 바로 기고 말이다. 바로 그런 것이 우리 인생을 살아가면서 평생동안 계속해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세상의 모든 변화를 습득하기가 불가능 !!

 

그러면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온 세상의 모든 변화에 대해서 습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정보와 지식을 다 습득을 할 수도 없고, 더욱이 그것을 본인이 모두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가 없으니, 낯선 곳에 가서는 그만 머뭇머뭇거린다는 것이다.

 

왜 영화가 막 시작해서 극장 안에 들어가면 처음에 캄캄하지 않는가? 그래서 더듬어야 하는데, 그러다가 실수로(?) 앉아있는 남의 아가씨 젖가슴도 만지고 말이다. 그런데 극장 직원들은 그 복도를 귀신같이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도 조금 있다가보면 뭔가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물론 그렇게 뭔가를 좀 보려고 하면 막상 영화는 끝나고 말지만 말이다. (영화만 보면 되지, 또 뭘 보려고?)

 

그러니 인간이라는 것은, 구약 전도서의 말씀대로 결국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된 것인데, 그러니 전혀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다. 마치 조영남이 노래한 것처럼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인생은 그렇다는 말이다.

 

* 질문 - 개인적 즐거움이 타인의 시선의 변화에 의해서, 변화가 가능하다는 말씀인가요?

 

물론 가능한데, 습관은 성격이 되고, 이 성격은 정치적 타협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결국 인간은 환경적 동물이네요? 교육도 그런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당연히 그러한데, 물론 환경을 30%로 보는데, 그런데 유전적 요인이나 그런 잘 모르는 것을 빼버리면 30% 자체가 100%라는 말이다.

 

* 질문 - 모든 인간이 획일화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30%는 다 공통화가 되어있다는 것인가요?

 

그렇게 획일화된 교육을 받는데, 그런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교육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육자들이 이것을 잘 모르는데, 사실은 선생님과 인간적인 교류가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다. 교육내용은 인터넷으로도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교육내용보다는 선생님이 중요 !!

 

그런데 배우는 학생들 눈에는 모든 것이 다 신비로운데, 그래서 새로운 신비에 대한 향유도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 결핍을 채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이 좋으면 그 과목성적이 올라가게 되고 선생님이 싫으면 그 과목성적도 그만 떨어진다는 말이다. 물론 머리가 나쁘면 이래도 떨어지고 저래도 떨어지지만, 상대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너무 정을 많이 주면 안 되는데, 그것은 교육의 본래목적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교육의 본래목표는 뛰어난 학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평준화' 인데, 그것이 교육의 본래적인 이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어느 누구를 편애하게 되면 자기들 사이에 문제가 일어나는데, 교육이고 뭐고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잘된 학생 하나를 위해서 열 명이 희생이 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학교에 돈을 갖다 바치고 상처도 받고 말이다. 우리가 훌륭한 선생님도 기억을 하지만, 그러나 자기를 괴롭힌 그런 못된 선생님도 기억하는데, 아니 평생을 잊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런 못된 선생님들이 학교 안에 너무나 많고 말이다. 부모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강의한 이러한 내용들이 오늘 성경공부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게 될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법'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이 법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 복음에 새로운 요소는 없다 ??

 

아까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김 집사님과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데, "복음에 새로운 요소는 없다" 라고 말이다. 이것은 복음이 싫다는 말이 아니고, 더 이상 새롭게 추가된 것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복음은 단독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어디에 들어있는데, 그것이 어디인고 하니, '법 안'에 둘러 쌓여있는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 복음은 우리를 구원해주는 기쁜 소식인데, 이렇게 법이 아니라 복음이 구원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을 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나를 구원시켜주는 것이지,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김 집사님의 말이 분명히 맞는데, 자기가 부산으로 가든, 서울로 가든, 인천으로 가든, 아니면 광주로 가든지 간에 말이다.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대구로 간다고 해서 구원이 더 빨리지는 것도 전혀 아니고 말이다.

 

◈ 복음은 반드시 '법 안'에서 !!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놓치면 안 되는고 하니, 이 복음은 반드시 법 안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아는 사람이 제가 살펴본 논문들에 의하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법인가? 복음인가?" 라고 하면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지 말이다.

 

◈ 아니야, 법은 아니야 !!

 

하지만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는 그것이 아니라, 복음은 반드시 법 안에 나타나는데, 그런데 그렇게 법 안에서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법은 아니고 복음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법도 전혀 없는데, "야, 내가 복음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법에 의해서 완전히 포위가 되어있으면서 하는 말이, "글세, 내 말이 그 말인데, 법이 아니라니깐"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복음이 무엇인지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므로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는 그런 율법적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런데 그런 율법적 굴레에서 살아가면서 복음을 안다는 말씀이지요?

 

참 좋은 질문인데, 당연히 그렇다는 말이다. 이 법은 어디에서 생기는고 하니, 라캉에 의하면 자기의 욕망과, 사실 자기의 욕망이라고 하면 안 되고 주체라고 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것이 너무 어려우니, 일단 자기의 욕망이라고 하면, 그 자기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이 서로 타협을 해서, 그런 타협의 결과로서 법이 생긴다는 것이다.

 

◈ 법을 자기가 만들고, 또 자기가 지키고 ??

 

예를 들어서, 일본 아줌마들이 배용준을 엄청 좋아하는데, 그래도 자기 집을 팔아서 욘사마에게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나리따 공항에 나와서 손을 흔들고 디카로 찍기는 하지만, 그러나 거기까지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타협인데, 그런데 욘사마가 어떤 아줌마 팬에게 한국까지 초청을 해서 직접 식사를 했다고 하면, 그 아줌마는 다시 타협을 하게 되는데, 즉 집은 아니더라도 자동차를 팔 용의는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타협과 타협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한 글자로 '법'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법은 누가 만드는가? 인간인가? 물론 맞는데, 인간이라고 하지 말고 '내'가 만들었다고 하면 맞다는 것이다. 즉 법은 '내'가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법을 자기가 만들고, 또 자기가 지키고, 또 자기가 잘했다고 한다는 것이다.

 

◈ 여기서 깜짝 놀랄 일이란?

 

그러므로 이러한 법의 특징이 바로 타협인데, 이런 것이 아주 재미가 있는데 말이다. 아마 여러분이 들으면 깜짝 놀라지 싶은데, 사람이 죄를 짓는다는 것은, 그것은 자기가 만든 법이 있을 때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즉 자기 규칙이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인간이 본능 자체로 있을 때는 죄가 아닌가요?

 

본능이 곧 욕망인데, 그래서 들뢰즈는 "인간은 욕망 덩어리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자기가 법을 만드는데, 그런데 자기가 법을 만들어놓고도 위반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성질이 날 때라든지 말이다. 그래서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욕이 튀어나오곤 한다는 말이다.

◈ 죄가 내부적으로 선과 타협을 !!

 

그런데 이렇게 죄를 지으면 이 죄가 내부적으로 선과 타협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나쁜 짓을 했으면 착한 일을 한 것이 지분을 떼 내어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밤잠을 마구 설치게 되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서 죄는 선에서 나온 미끼를 얻어먹고는 당분간 입을 다문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이번에 비록 욕을 해서 죄를 지었지만, 그래도 일주일 전에 길을 잃고 그만 헤매는 할머니를 집에 안전하게 모셔다 주었잖아"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죄를 지은 자기 입을, 자기가 한 착한 일의 일부분을 가지고 그만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서로 적당히 타협을 해서 일종의 휴전상태에 들어가는데, 그러나 그렇게 되면 법의 경계선이 이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전에는 "이제 다시는 욕을 안 할거야" 라고 하다가, 그 다음에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너무 자주 욕을 하면 안 되지. 물론 안 되고 말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 그런데 그만 '자유'가 튀어나와서 !!

 

이것이 결코 만만한 내용이 아닌데, 아무튼 의식 상태에서는 "이제는 가능한 한 욕을 하지 말아야지" 라고 하고 있는데, 그런 의식 상태로 그냥 가만히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에서 '자유' 라는 놈이 나와서,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말이, "그러면 나는 욕할 자유도 없나? 그리고 아무도 없으면 좀 해도 되잖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자유의지' 라는 것인데, 그것이 치고 올라온다는 말이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리비도' 라고 해서 '성적욕망'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이것을 추적해 나가면 죽음의 욕망과 삶의 욕망이 나오고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아까 말씀한 죽음의 욕망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올라온다는 것이죠?

 

그렇게 무의식의 세계에서 치고 올라오는데, 그런데 '자유'를 부르짖으면서 나온다는 것이다. 즉 "나는 로봇이 아니잖아? 그런데 왜 내가 구속을 받아야 해? 나는 법에서 해방되고 싶어" 라고 부르짖으면서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 나는 법에서 해방되고 싶어 !!

 

여기서 무엇이 중요한고 하니, 바로 이 "나는 법에서 해방되고 싶어" 라는 것인데, 지금 이것을 가지고 겨울 수련회 교재로 사용하려고 글을 쓰고 있는데, 그렇다면 제가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이것이 복음인가? 아니면 우리의 본성인가?" 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본성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런데 왜 기존교회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반칙이 어디 있느냐는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복음이냐는 말이다. 분명 인간의 본성인데 말이다. 그런 인간의 자유를 누가 막겠는가? 전두환이 막겠는가? 이명박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19세기 폴란드 혁명의 구호가 무엇인고 하니, "땅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고 했는데, 그런 자유에 대한 욕구를 누가 막겠느냐는 것이다.

 

◈ 인간은 누구나 바바리 맨 ??

 

그런데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그런 자유가 어디서 나오는가? 본인에게 물어보면 정작 당사자는 모르는데, 왜냐하면 자기 무의식의 세계에서 나왔으니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아무리 점잖을 빼고 해도 그것이 다 눈감고 아웅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유라는 놈이 이리 삐죽, 저리 삐죽 튀어나와서, 자기가 언제 바바리맨(?)이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병을 어떻게 보았는고 하니, 인간이 자기에게서 올라오는 그 자유를 억누르고 짓밟는데, 올라오면 자기 생활이 엉망이 되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올라오지 말라고 밟는 것이 너무나도 힘이 든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니 말이다. 그래서 정신병이 생긴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렇게 자유를 억누르는 이유가 법 때문에 그런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계속해서 억누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유를 그냥 놓아둘 수도 없고, 그래서 서로가 타협을 하는데, 그것이 법이고, 그게 오래되면 '관행'이 된다는 것이다. (관습법?) 그리고 그 관행이 그 사람의 성격이 되고 말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성격이 좋다" 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내 자유도 당신을 위해서 포기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성질대로 하겠다는 것은, 즉 "왜? 내 자유다. 씨" 라고 하는데, 그것은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고 말이다.

 

◈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이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무엇을 명심해야 하는고 하니,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동물적 충동과 욕망 그 자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 그대로라는 말이다.

 

이런 면에서 복음을 좋아하면서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원초적 본능에서 나오는 자기 자유로서 이해한 복음을 생각하면서 "아멘, 할렐루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말이다.

 

이런 현상은 진짜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즐기고 싶은 것을 즐기는데, 그런데 그것을 두고 "나는 복음을 안다" 라는 식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유의 확대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아무튼 그런 자기의 자유를 막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그 자유를 두고 놀랍게도 죽음의 충동에서 나왔다고 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자유의 끝은 죽음이라는 것인데, 이것을 두고 제가 아까 죽음이 손짓한다고 했고 말이다. 그런 것의 일종이 마약이나 동성애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것까지도 모두 다 경험할 수 있는 자유라는 말이다.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것까지도 모두 정복해서 자기 존재의 영역을 확대하는 자유, 바로 그것이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나온 자유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람을 피우고, 온갖 짓을 다한다는 말이다.

 

◈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것을 !!

 

사도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7장에서 뭐라고 했는가? '하지 말라' 라고 하면 그것이 또 새로운 유혹이 되어서, "내가 하고야 말리라" 라는 것으로 해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현재 모습인데, 그것이 바로 그 '자유' 라는 놈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욕망이 부추긴 자유 때문에 말이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 무엇을 '하고 말고' 가 아닌 믿음 !!

 

그러한 의미에서 '하라'와 '하지 말라' 라는 것은 사실 같은 말인데, 왜냐하면 '하라' 라고 하면 '하지 말고 싶은' 자유가 생기고, 또 '하지 말라' 라고 하면 '하고 싶은' 자유가 생기니 말이다. 그러므로 지옥으로 가는 사람은 믿음이 없어서 가는 것이지, 결코 무엇을 한다든지, 혹은 무엇을 하지 못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러한 복음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용서가 되지 않는데, 그래서 복음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나' 임을 십자가 앞에서 고백하라는 것이다. 자기가 얼마나 못난 놈인지를 말이다. 마치 개구리처럼 어디로 튈지도 모르고 말이다. 또한 고백을 하지 않는 것도 자기 자유라고 하면서 버티지 말고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이 그런 '나' 임을 아는가요?

 

사실 그것이 문제인데,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주체는 규정되지 않고 허물허물해지니 말이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주체를 누가 대신해서 담당했는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 주체가 자기의 주체가 되었기 때문에 확고한 주체가 십자가에서 확보가 된다는 것이다. 허물허물한 주체가 아니고 말이다.

 

여기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같이 읽어보자.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죽고 사는 그 관계가 믿음 ??

 

여기에 보면 주체가 바뀌었는데, 사도바울의 주체는 죽음으로 끝이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또 살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기가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려주는 삶이 새롭게 발생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관계를 두고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사는 것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여기 마지막 부분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사는데, 이제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고 나니, 이제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 싶은데 말이다.

 

여기서 일단 갈라디아서 3장 1절의 말씀을 보자.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보통 불신자들은 뭐라고 말하는가? "내 주체와 십자가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는 그 말을 이해하게 되는데, "그렇지. 주체 자체가 없는데, 왜 자꾸만 십자가를 빼놓고서 내 자유를 중심으로 단독적인 주체를 형성하려고 하는가? 아하, 그것이 참 어리석은 짓이구나" 라고 말이다. 바로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 믿지 않아서 지옥에 !!

 

이것이 바로 믿음인데, 그러니 믿음은 결코 '하라'와 '하지 말라' 라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라'와 '하지 말라' 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습니까?" 라는 것을 묻는데, 그러므로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무엇을 하지 않아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주체를 대신합니다" 라는 것인데,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으면 그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는 말이다.

 

◈ '나'는 무엇인가? '너'는 흐물흐물 ??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나'는 계속해서 무정형(無定形) 상태인데, 즉 정형이 되지 않은 뭔가 흐물흐물하다는 것이다. 무정형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과 자기의 욕망을 타협해서 법을 만들어 놓고는, 그런데 밑에서 괴물과 같은 자유가 올라와서 "내가 미쳤나? 법을 지키게. 나는 법에서 해방되고 싶어. 그것이 나의 유일한 욕망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원한다고 하면, 그것이 임자가 있는 남의 집 여편네든지, 아니면 같은 남자든지 간에, 아무튼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 자유가 절대화되는데, 즉 자기 욕망이 최고이고 절대라는 것이다.

 

◈ 그래서 국민윤리 교과서에서는 !!

 

그래서 그러한 자유를 사로잡기 위해서 국민윤리 교과서에 뭐라고 하는가? "인간의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자기만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자유가 있고, 그래서 그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 너무 자기 자유를 누리게 되면 양심에 어긋난다" 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그래, 맞아. 너무 내 자유만 누리면 안 되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을 타협을 해야 하는 것이고, 일단 성질이 나면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쁜 줄은 알지만 성질이 나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기차 안에서도 음악을 크게 틀고 한다는 것이다.

 

학교 선생님이 아무리 자기 반에서 학생들을 보고 "여러분, 같은 급우들이니 서로 사이좋게 지내세요" 라고 해도, 아무리 그렇게 해도 '짱'도 생기고 '왕따'도 생긴다는 것이다. 이 짱은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리고 왕따는 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에 의해서 한 하나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왕따는 언제나 약한 놈이 !!

 

우리가 다 학교를 다녀봐서 알지만 왕따를 시키고 싶어서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자연히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성질을 풀어야 하는데, 덩치 큰놈에게 덤빌 수는 없고, 또 자기 아버지가 경찰인 놈에게도 덤비기가 그렇고, 그래서 덩치도 좀 작고 성격도 온순하고 힘이 없는 놈이 왕따를 당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학교 어느 반에 가도 다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당연히 선생님이 야단을 치는데, 즉 "애들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기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기 마련인데, 그러니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선생님이 아무리 그렇게 이야기해도 학생들이 말을 듣겠는가? 사실 선생님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는가?

 

◈ 그런데 고3이 되면 !!

 

그런데 그렇게 자유를 부르짖던 아이들이 그만 법을 위해서(?) 자기 자유를 참게 되는데, 고3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수능시험 때문에 공부를 하지 말라고 해도 다들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그렇게 농띠를 치던 놈들도 말이다. 왜냐하면, 법에 수능시험을 잘 쳐야만 좋은 대학에 가도록 되어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때뿐이지만 말이다. 취직시험 때도 그렇고 말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남들도 다들 하기 때문인데, 그렇게 남들이 한다는 것은 타인의 욕망이고 말이다. 학교 다닐 때는 그렇게 주먹으로 까불다가 이제 사회에 나오면 머리로 까불어야 하는데, 그래서 졸업할 때가 되면 공부를 한다는 말이다. 지나간 시절을 후회하면서 말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법 안에 복음이 있다" 라는 말을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보자.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여기 마지막에 보면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런 말씀이 있다고 하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또한 어렵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문장에 여러 단어들이 있지만, 여기서 '육체' 라는 단어에 일단 주목을 하자는 것이다. 이 '육체' 라는 말은 우리의 몸이고 신체인데, 그냥 우리 전체를 다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제가 질문을 하겠는데, 마음속으로 답변을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천국에는 누가 가는가? 의인들만이 가지요? 죄가 있는 사람들은 가지 못하는데, 그러므로 천국에 가는 신체는 의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 행함으로 자기 몸이 의롭게 되는가? 결코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인간의 몸이 법을 만들고 추구하는데 !!

 

그런데도 놀랍게도(?) 이러한 우리 인간의 몸이 무엇을 만드는가? 법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은 타인의 법으로서, 즉 타인의 욕망으로 만든 법이라는 말이다. 즉 여기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하는 율법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아까 제 아무리 농띠를 치는 인간이라도 고3이 되면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그런데 수시는 왜 보는가? 빨리 대학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고 놀려고 말이다. 아무튼 왜 고3은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는가? 그것은 바로 고3은 목표가 다 좋은 대학에 가려는 것인데, 그것이 곧 타인의 욕망이고 또한 법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육체가 고3이 되면 열심히 공부한다는 법을 만나고, 동시에 육체는 그 법에 대해서 결핍과 기대와 소망을 남긴다는 것이다. 즉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법대에 합격하면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기뻐할까? 그러면 이 지묘3동에 '저근호, 서울법대 합격' 이라고 플랜카드고 걸리겠지" 라고 하면서 좋아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상상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자기 자유대로 하면 안 되고,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 법이 바로 수능시험이라고 하는 국가적인 법, 즉 타인의 욕망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타인의 욕망에 자기의 자유가 결합하면서, 그런 결과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아무튼 육체는 법을 찾는데, 그 법은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 저근호, 이리와 봐 !!

 

예를 들어서, 선생님이 "야, 니는 그 성적으로 거기는 안 된다. 전문대학에 가라" 라고 한다면, "아닙니다. 저는 4년제 대학에 가야 됩니다. 보내주세요" 라고 하면, 선생님은 다시 뭐라고 하는가? "안 된다니까, 그러니 전문대학에 가서 좋은 기술을 배워 취직하면 되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타인의 법이고 말이다.

 

* 선생님 : 저근호, 이리와 봐. 어디 갈거야?

* 학 생 : 예, 4년제 좋은 대학요.

* 선생님 : 안 돼. 전문대학에 가.

* 학 생 : 싫어요.

* 선생님 : 성적이 안 되잖아. 진작에 열심히 좀 하지.

* 학 생 : 그래도 좀 써 주세요.

* 선생님 : 안 된다니까.

* 학 생 : ? ? ?

 

아무튼 이렇게 "고3 학생은 수능시험을 쳐야한다" 라는 전체 법에 대항해서 또 나름대로의 법을 만드는데, 즉 "나는 고3이니, 고3에 맞는 공부를 해야한다" 라는 것이 또 하나의 법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법을 만들고 또 만들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 하지만 법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어 !!

 

이렇게 인간의 육체는 법을 추구하는데, 하지만 이렇게 법을 추구해서는 무엇이 나오지 않는고 하니,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의하면, 문제는 이러한 법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금 제가 말한 것은 율법뿐만이 아니라 모든 법들을 다 포함하는데, 즉 인간이면 생각할 수가 있는 모든 법 전체를 다 말이다.

 

이렇게 의(義)가 나오지 않는 것을 두고서 '죄'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것도 평소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 않는가? 사람들은 죄를 지어야 죄라고 여기는데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벽한 의가 없으면, 그것을 두고 죄라고 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아니라면 모두가 다 죄인 !!

 

사람들이 저를 보고 뭐라고 하는가? "당신은 사람들만 보면 죄인이라고 하는가?"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제가 말하는 죄인의 의미는, "예수님이 아니면 죄인이다" 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전한 의인데, 그런데 그 의는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아니라면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런 죄인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법을 가지고 타협을 한다는 것이다. "나도 의인이다" 라는 쪽으로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까불지 마. 그렇게 해서는 의인이 될 수 없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의 육체는 죄만 남는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 -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우리가 육체로는 결코 의인이 될 수 없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는가?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받는 사람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오히려 그 사람은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은 법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 안에 복음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법을 통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알고, 그 안에서 예수님 덕분이 의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와 함께 있음으로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렇게 예수님이 함께 있는 믿음 때문에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 우리의 믿음이 아닌, 예수님의 믿음 덕분에 !!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는데, "우리가 의인이 된 것은 예수님의 믿음 덕분이지, 우리의 믿음 때문이 아니다" 라고 말이다. 상당히 일리가 있고, 산뜻하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설명을 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예수님의 그러한 믿음에 동참이 되니까, 그래서 그 믿음이 자기의 믿음이 되어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러한 의인이 되는 것은 '나'의 소망인가? 아니면 주님의 소망인가?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소망인데, 왜냐하면 인간의 소망은 자기 육체를 포기하기 않는 것이니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결코 자기 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죄란, 내가 예수님처럼 완벽하지 않는 것 !!

 

지금까지 길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 중에서 우리는 이것 하나만 기억하면 되는데, 이 '죄' 라는 의미가 자기가 예수님처럼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 그것이 곧 죄임을 알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무엇이 허물어지는고 하니까, 법이 오는데, 그런데 그 법은 새 법으로서, 즉 예수님이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법이라는 말이다.

 

◈ 다시 간단히 정리하면 !!

 

이것이 마지막 고비인데(?), 잘 한번 들어보세요. 거기에 앞서서 지금까지 한 것을 간단하게 다시금 정리하면, 기존 사람들에게 죄라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가 만든 법을 자기가 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죄가 있으면 기분이 나쁘니 그 죄를 자기의 착한 일의 여분을 가지고 입을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착한 일을 많이 했는데도 죄인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법으로는 천국에 가지를 못하는 엉터리 법인데, 그래서 새로운 사랑의 법이 오게 되는데, 여기서 법이 바뀌는데, 자기가 만든 법이 아닌 주님의 법으로 말이다. 이렇게 사랑의 법이 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사랑의 법 안에 있으면 의가 된다는 것이다. 법의 바깥에 있으면 죄가 되고 말이다. 그러니 이제 기준이 바뀐다는 것이다.

 

◈ 성도는 전혀 새로운 기준으로 !!

 

그러니 이제는 무엇을 '하고, 말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어디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 그것이 의가 되고,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전혀 새로운 기준으로 사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들을 '성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하고, 말고' 하는 것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사랑 안에 있는 것이 완벽한 의(義) !!

 

사실 우리가 살다가 일이 계속해서 꼬이면, 자기도 모르게 뭔가 좀 착한 일을 해서라도 그것을 풀어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물론 계속해서 그런 생각만 들면 성도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읽고 복음적 설교를 듣다가, 그런 것마저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 믿어지면, 그것이 바로 천국에 가는 완벽한 의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사는 것이 좀 어렵다고 해서 착한 일을 해서 그런 것을 해결하려고 했던, 그런 어리석은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것들이 모두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이라는 말이다.

 

◈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 '어리석도다' 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상당한 심한 말인데 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말이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이렇게 눈앞에 밝히 보이는데, 도대체 누가 유혹을 하드냐는 것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잠시만 연극을 !!

 

이것을 가지고 연극을 한번 해보면, 제가 건방지게 십자가라고 한다면, 저는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그만 김 집사님이 아주 비싼 도자기를 깨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렇게 십자가는 무사히 잘 있는데, 그러면 되는데 비싼 도자기를 깨었다고 사람들이 김 집사님을 마구 다그친다는 것이다. 왜 좀 조심하지 않고 깨었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도자기가 깨지고 말고 하는 것은 사실상 별 문제가 되지 않는데, 아무리 비싸도 말이다. 그런데도 누가 이렇게 십자가가 아닌 이런 도자기 같은 것에 얽매이도록 유혹을 했느냐는 것이다. 지금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그러한 의미인데, 물론 마귀가 그렇게 시켰지만 말이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의미를 가리기 위해서 마귀가 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계속해서 어디에 얽매이게 되는데,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말이다. 즉 "내가 그렇게 하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남들이 욕을 좀 해서 욕을 들어먹으면 어떤가? 욕을 하는 그 인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오직 예수 안에 있을 때만 의인이라는 것이다.

 

◈ 예수 안에 있으면 의인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자기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서 자기가 바로 의인임을 보여준 것이지, "너희들도 나처럼 완벽해야만 돼" 라고 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모두가 다 엉터리이고 가짜 예수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려고 왔지, 결코 의인을 부르려 온 것이 아닌데,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우냐는 것이다. 병든 자라야 의사가 필요하지, 자기가 건강한데 의사가 왜 필요하냐는 말이다. 주님은 그런 병들고 헐벗고 못난 놈들을 찾으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런데 왜 자기가 수습한다고 그런 생쇼를 벌리고, 그렇게 하라고 도대체 누가 그렇게 꼬시드냐는 말이다. 전혀 수습도 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바로 그런 모습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것이 갈라디아서라는 것이다.

 

◈ 참 자유는, 기존 자유가 박탈되어야 !!

 

그렇게 자기가 해결하고 수습을 하려면 또 하나의 법을 만들고 규칙을 만들게 되는데, 그러니 이것이 아까 말한 인간의 자유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는 그런 인간의 자유가 박탈되고, 그런데 이런 자유가 박탈되는 기쁨을 두고 성경에서는 '자유'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 우리들의 자유가 박탈당한 그것이 바로, 기존의 모든 법에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서 진정한 자유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종의 출애굽 사건과도 같다는 말이다.

 

◈ 이런,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

 

지금까지 강의한 것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어떤 일을 저질렀을 때, 사실 그것은 저지른 것이 아니라 그것도 일종의 사랑인데,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만든 법 때문에 그것을 위반했으니까 "이런,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베푸는 사랑의 법이 아닌, 자기가 만든 법을 위반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큰 실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상에 불과하지 말이다. "이어쿠, 내가 이렇게 큰 실수를 하다니, 내 인생의 오점이다"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인생전체가 큰 오점이라면 오점이지 말이다. 그런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 주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것을 가지고 예수님이 시비를 건다고 하면 주님이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다 용서해주겠다고 십자가를 졌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니, 왜냐하면 자기에는 자기가 만든 법이 있으니, 그 법이 중요하지 십자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하는 말이, 도대체 이렇게 눈에 밝히 보이는 십자가보다도, 자기가 만든 법이 더욱 중요하다고 꼬드긴 놈이 도대체 누구냐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악마가 아니면 누가 그런 짓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 술꾼들은 정신적으로 불안해 !!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정서적으로 불안하다는 것인데, 거의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혹시 이 가운데도 정서적으로 불안한 분이 계신가요? 그러한 불안함이 혼자서 소주를 마실 때는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그러나 여러 명이 같이 마실 때는 분위기에 희석이 되어서 제대로 드러나지를 않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1차와 2차를 지나서 3차 정도를 가게 되면 서서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1차와 2차까지는 분위기도 좋고 단합도 잘 되는데, 그런데 3차 정도가 진행이 되면, 부장도 욕을 하고 사장도 욕을 한다는 말이다. 즉 다시 정서적으로 불안해지기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든지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서로의 단결을 위해서는 그런 술자리를 같이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우리편이야. 우리 소속이야" 라고 하는, 그런 도장을 찍는 애정이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고 하니까, "탁, 깨놓고 이야기해서" 라고 나오는데, 그런 자리가 곧 술판이고 노래판이고 고스톱판이라는 말이다.

 

◈ 낮은 데로 임하소서 ??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나도 고상한 가면을 벗고 이렇게 까발렸으니, 너도 가면을 벗고 다 내어놓아라" 라는 것인데, 즉 전부가 다 벌거벗고 완전히 알몸으로 한번 나딩굴어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다 더럽기에 발가벗으면 서로가 서로를 지적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모두가 다 그놈이 그놈이니 말이다. 그때는 분위기가 그야말로 "낮은 데로 임하소서(?)" 인데, 무슨 우리나라 영화제목 같기도 한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괜찮은 것이 제 정신이기에 말이다. 아직까지는 단결이 목적이니 정서적인(?) 것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2차를 지나서 3차를 가면 드디어 욕설이 나오고, 하소연이 나오고, 고함소리가 나오면서 결국은 대판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때는 단결이고 뭐고 모두 날아가고 없다는 말이다.

 

◈ 적당히 마시세요 !!

 

이렇게 길게 이야기했지만, 이것을 한 문장으로 줄이자면 "적당히 마셔라" 라는 것인데, 어느 정도가 적당한고 하니까, 개개인의 정서적 불안정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즉 목적이 목적으로만 그칠 때가 적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남에게 자기의 한풀이를 하는 3차까지 가게 된다면, 그것은 단합이 아니라 오히려 원수지간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과거를 잊지를 않으니 말이다. 그것이 무의식의 세계 속에 있다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취중진심' 이라는 말도 있지만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다음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인가요?

 

물론 거짓말인데,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어제 일을 잊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용서는 해주겠다" 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잊혀진다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다만 의식세계 속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숨을 수는 있지만 말이다.

 

◈ 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

 

제가 왜 이런 1차, 2차, 3차 이야기를 자꾸 하는고 하니, 그것이 굳이 그런 술판이 아니고 교회에서 영화를 보러간다든지 커피 한잔을 하더라도, 그것도 그냥 1차로 그쳐야지, 계속해서 2차, 3차를 가게 되면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3차는 부흥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또 정서불안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술로 감추면 비겁한 사람 !!

 

그런데 제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을 괘씸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에게 그런 정서불안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술로 감추려고 하는 것이 비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내놓지 못하고 말이다. 그래서 남에게 함부로 욕을 하는데, 그것은 자기의 괴로움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인데, 맨 정신에는 안 되니 술기운을 빌어서 말이다. 그러니 술을 마시든 무엇을 하든지 항상 적당히 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회는 자기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 어울려서 살아가야 하는데, 물론 남들과 어울려서 살아가는 것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때그때 분위기를 맞추어서 대충대충 흘러가는 것이 사회라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만족스러운 것은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완벽하게 자기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완벽함이란 있을 수 없는데, 그런 완벽함을 기대하는 것도 물론 나쁘지만, 자기가 그렇게 완벽하게 해보겠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런 완벽함이란 없다는 말이다.

 

* 질문 - 모든 인간은 다 정서적으로 불안한데, 그것을 습관적으로 술을 마심으로 해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것도 있지 않나요?

 

물론 있는데, 그런데 술은 그렇게 습관적으로 마심으로 일종의 중독이 되는데, 그렇게 과도하게 됨으로서 숨어있던 인간의 자유가 술기운을 빌어서 마구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지나쳐서 절제가 되지 않으니 문제가 되고 말이다. 인간의 머리 속은 신경으로 연결되어서 있어서 알콜이 들어가지 않으면 지나침이 없는데, 즉 술기운이 아닌 야구나 축구를 통해서 해소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렇다고 그런 정서적 불안상태를 없앨 수는 없지 않나요?

 

물론 우리 인간들이 없앨 수는 없는데, 그것은 누구든지 다 노력을 하지만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법을 만들고 말이다. 아이들의 일기장을 보면 반드시 반성이 있는데,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지켜지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법을 만든다는 말이다.

 

◈ 마귀는, 사랑이 아닌 법으로 !!

 

지금 제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하라', '하지 마라' 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가운데서도 마귀가 자기를 참 궁지로 몰아넣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를 믿지 못하도록, 주님의 사랑을 거부하도록 말이다.

 

다시 말해서, 마귀는 그러한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라, '하라'와 '하지 마라' 라는 법으로서 해결하도록 자꾸만 인간을 유혹하는데, 바로 그것을 눈치채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사랑이 아닌 법으로 마귀가 유혹하고 있음을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정서적 불안은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것이 표현만 그렇게 정서적 불안으로 하신 것이고 말입니다.

 

물론 그러한데, 그래서 성경에서 "술 취하지 말라" 라는 대목이 자주 등장을 하는데, "성령에 취하라" 라는 것에 대비해서 말이다. 성도라면 당연히 어디에 취해야 하겠는가? 술에 취하면 남들에게 얼마나 피해를 많이 주는가? 술 냄새, 오줌 냄새(?), 그런 것들이 다 자기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들이란 말이다.

 

◈ 일방적 사랑과 그 주변에 정서불안이 !!

 

오늘 강의가 상당히 어려운 것 같지만, 간단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복음은 우리가 손을 전혀 대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사랑해주세요" 라는 것은 결코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사랑이 자기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덮쳐오는 것인데, 그런데 그 주변에 정서불안이 항상 놓여져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다 보자는 것인데, 어느 한 가지만 보지 말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성도인데, 두 가지를 다 보는 말이다. 하지만 불신자는 때려죽여도 한 가지밖에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일방적인 사랑을 이상하리만큼 거부하고 보지 않으려고 하는데, 물론 배후에서 마귀가 역사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아무리 힘이 들어도 예수님의 사랑이 아닌 자기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자기 안에 양심이 있어서, 그 양심이 법을 만들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물론 배후에는 마귀가 있고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극복했다고 여기지 않나요?

 

그것은 아직 자기보다도 더욱 더 윤리적인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그러한데, 예를 들어서, 자기는 신장을 사촌에게 떼 주었다고 참으로 대단하고 착한 일을 했다고 여길지 몰라도, 그런데 아무런 친인척 관계도 없는데도 주는 사람을 보면 그만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테레사 수녀가 마귀적인 이유는?

 

테레사 수녀가 마귀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그녀는 인도정부의 지원도 받지 않고 참 힘들게 활동을 했고, 또한 말라리아가 창궐을 하는 줄 알면서 가서 그들을 돌보다가 결국 말라리아에 걸려서 죽었다는 것이다. 사실은 나이가 많아서 죽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본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사람은 주위에서 아무도 말릴 수가 없는데, 제가 보기에 바로 그런 점이 술에 취한 사람과 똑같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착한 일을 해보면 얼마나 흥분이 되는지, 마치 마약을 복용한 것과 동일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집구석은 엉망으로 해놓고 자원봉사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을 핑계로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말이다.

 

* 질문 - 개신교에도 수도사가 있나요? 다일 공동체에서 남자 3명을 배출했다는데 말입니다.

 

그런 것이 다 2차, 3차의 모습들인데, 그러니 그런 공동체를 그냥 '룸살롱' 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정서불안의 한 단면들이고 말이다. 도대체 그 안에 얼마나 추잡한 짓들을 하는지, 역겹지 그지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룸살롱이 훨씬 더 깨끗하다는 말이다.

 

◈ 목사님, 예수 믿는 사람이 술을 마셔도 됩니까?

 

그래서 저에게 어떤 사람이 고전적인(?) 질문을 오래 전에 한 적이 있는데, 물론 요즘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없지만 말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술을 마셔도 됩니까?" 라고 말이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답변을 했는고 하니, "술집에 가든지 그 어디를 가든지 간에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마세요" 라고 말이다. 꽤나 괜찮은 답변이지 않나요?

 

* 질문 - 그런데 저는 술을 마시고 나면, 술을 마실 때는 저 자신이 괜찮아 보이는데, 그런데 그 다음날에 술이 깨면 참으로 저 자신이 부질없음을 깨닫거든요? 쪽팔린다고 할까요? (ㅋㅋ)

 

◈ 왜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는가?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왜 우리가 말씀을 자꾸만 가까이 해야 하는고 하니까, 이 말씀 속에 복음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은, 우리가 이 복음을 통해서 무엇을 하나라도 더 배워야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복음은, 우리가 복음을 모르는 순간에도 주님의 사랑은 끊어진 적이 없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항상 가까이 해여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박살이 나고 뭉개질 때만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자기가 얼마나 못난 인간인지 알게 되는데,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잘났고 그렇지 않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도 없이 이미 주님은 창세 전부터 사랑하기로 작정을 하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랑을 풍성히 알고 감사하게 될 때, 그때 주님은 기뻐하신다는 말이다.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알 때만 말이다.

 

물론 우리 자신은 연약해서(?) 그렇게 망가지고 깨질 때 그런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면 가증한 것이 되고 말이다. 하지만 주님의 그 사랑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이미 창세 전에 베풀어주기로, 그렇게 주님이 작정을 하셨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주님의 기쁨은 주님이 만들지 않나요? 우리에게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요인이 전혀 없지 않나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 없으니 말입니다.

 

◈ 하지만 '하게 하는' 명령이 오게 되면 !!

 

인간에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 요소가 없다는 말은 맞는데,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런 일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명령이 오는데, 그 명령은 어떤 사람을 보고서 무엇을 '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하게 하는' 명령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힘있는 명령이 되어서, 만약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세요" 라고 하면, "아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옳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에, 물론 옆에서는 보기에는 그 사람이 본질상(?) 그렇게 움직인다고 볼지 몰라도, 그러나 거기에는 주님의 힘있는 명령이 동반되어서 작용한다는 말이다. 그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으니, 그런 죽은 자가 움직인다는 것은 그가 아닌 다른 분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기에 말이다.

 

◈ 나는 못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하십니다 !!

 

만약에 그런 일을 주님에게 우리에게 시켰다고 한다면,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우리는 그 공로를 당연히 주님께 돌려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못합니다" 라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사실은 이 두 개가 같은 매카니즘이지만, "나는 못합니다" 라는 것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십니다" 라는 것으로 바꾸라는 말이다.

 

* 질문 - 인간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는데, 아니 인간은 그냥 자기 테두리 안에서만 행위를 하는데, 그런데 그 행위를 통해서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씀이지요?

 

물론 그러한데, 주님께 기쁨이 되는 동일한 사건이 터졌는데,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집사님의 질문내용이 다 맞는데, 결코 우리 인간은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했다" 라는 것이고, 그것이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저는 죽어도 못하고, 주께서 해주셔야 됩니다" 라는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동일한 한 사건이 두고, 그것이 주님께 기쁨이 된다고 하면, 우리들은 "저는 죽어도 못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주께서 하셨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둘 다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굳이 순서를 따지면, 먼저 "저는 죽어도 못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고 난 다음에, "주께서 하셨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저는 전혀 학원을 운영할 수 없는데,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라고 말이다.

* 질문 -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파악이 안 되는 것이지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냥 남들처럼 학원을 운영하는 것인데, 그것이 전혀 구별도 되지 않고 설득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그런 본인의 행동을 두고서 말하기를, "그것이 그냥 인간적인 행동에 불과한 것이지, 도대체 그것이 무슨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우리는 그러한 타인의 시선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는 곳이 전혀 다르니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경우에,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가 뭐라고 하든지, 그냥 그렇게 마구 짓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는 오직 본인과 주님과의 문제인데, 목사도 전혀 필요가 없고 말이다.

 

* 질문 - 그런데 그런 사건이 터져도 본인이 모를 수도 있지 않나요?

 

물론 본인이 100% 다는 알 수 없겠지만, 그러나 주께서 깨닫게 하는 사건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되는지 그것은 우리가 전부 다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무튼 주께서 깨닫게 하는 것은 본인은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일일이 다 설명은 할 수 없어도 말이다. 물론 그렇게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 질문 - 저는 제 과거를 돌이켜보면, 정말 그러한지 항상 궁금해요?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혹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라고, 그렇게 제가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시건방지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물론 남을 의식하게 되면 그것이 정리가 되지 않는데, 즉 언어로서 어떻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방금도 말했지만 본인은 그것을 알지만, 그것을 남에게 설명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에게 구태여 설득할 생각은 하지 말고, 그냥 본인이 느끼는 데로만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본인이 느낀 것은 본인에게는 속일 수가 없으니 말이다. 우리가 주님을 속일 수 없듯이 본인의 양심도 역시 속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남에게 설명을 하려면, 그런 납득시킬 수 있는 요소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본인은 다 안다는 것이다. 사실 상대방도 어느 정도는 아는데, 그냥 모르는 척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 오늘 갈라디아서를 끝내면서 !!

 

이것으로서 갈라디아서는 오늘 마치고 싶은데, 뒤에 나오는 것들은 신학적인 문제들이 대부분이기에 말이다. 마치기 전에 몇 가지 중요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자는 것이다.

 

먼저 '법'은 누가 만들었다고 했는가? 본인이 직접 만드는데, 그렇다면 왜 만들었는가? 자기 육체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인데,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께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의인이 되는가? 그것은 자기가 만든 그 법을 지키고 말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전혀 또 다른 법이 있기에 된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진짜 법이 말이다.

 

그것이 곧 십자가 법이고 사랑의 법인데, 그러면 이 사랑의 법은 누가 지키는가? 본인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키는데, 물론 자기 법은 자기가 만들고 말이다. 인간이 자기 자유로서 말이다. 즉 "내가 먹고 싶은데, 왜 니가 말이 많은가?" 라는 것인데, 자기가 그렇게 땡기는 것을 하면 되고, 또 그것이 잘못되면 반성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라, 하지 말라" 라는 차원인데,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평생을 살아가지만 말이다. 그런데 성도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도 역시 "하라, 하지 말라" 라고 하면서 자기 법을 만들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도에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 말고도 새로운 주님의 사랑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을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로 그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무엇이든지 법으로 만들어서 잘난 척을 해야 속이 시원한 것이 저희들의 모습인데, 하지만 그런 인간도 사랑해주시는 그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잊지 않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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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인간의 자기 착함은 기존교회에서 사랑으로 나타난다면, 그러나 거기에 비해 주님의 사랑은 남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기도로(?) 바로 들어간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니 간증들은 일단 모두가 사기라고 보면 되고, 주님의 사랑은 자기 혼자만이 간직하는 애틋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행위로 나타나지만, 그러나 남들은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에게 대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말이다.

 

* 질문 - 사도바울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경우에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한 함께 감사하는 사람도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율법에 속한 사람에게는 율법대로 이야기하고, 그렇게 않은 사람에게는 또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사도바울에게 심한 비난도 하고 왜 그렇게 오락가락 하느냐고 했지만, 그러나 사도바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주님의 사랑이 자기를 강권하니 자기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니 사도바울의 행위를 그대로 본받으려고 하면 안 되지 않나요? 또 사도바울이 전했던 것을 규칙으로 만들어서, 그것이 마치 복음인 것처럼 이야기해버리고 말입니다.

 

물론 안 되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속에서 그때그때마다 알아서 일으킬 문제이지, 우리가 그것을 따라하려고 법으로 만들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전한 것은 법이 아니라 사랑인데, 그것을 법으로 만들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또 그렇게 규칙으로 만들어버리면, 그것이 바로 자기 의(義)라는 말이다. 그렇게 규칙, 즉 법으로 만들게 되면 스스로 또 고민하게 되는데, "선을 넘을까? 말까?" 라고 하다가 자기 자유에다 넣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뭐라고 하겠는가? "내가 잘못하면 반성하면 되지 뭐"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위반할 것 같으면 굳이 왜 법을 만드느냐는 것이다. 법은 누구나 다 위반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에 구애받지를 말라는 것이다. 성도는 오직 십자가만을 바라보면 되는데, 스스로 자기를 너무 자책하면 주님이 습습해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