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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구원에 있어 시간과의 연관성 문제 3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성경 신학 · 기타

구원에 있어 시간과의 연관성 문제 3

정인순 2011. 1. 1. 23:11

(계속)
이처럼 사도의 명령이나 주님의 명령이나 또한 설교자의 명령은 모두 구원될 자가 누구인가를 구별짓는 사역이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4-16) 사도 바울이 경험은 구원 사역은 항상 이런 식의 결과를 유발한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3-5) 이 본문에서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즉 망할 자들이 필히 복음이 가리워진 입장을 고수하는 것조차도 바로 예수님이 주 되심으로 인한 작용과 구원적 기능의 결과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제일 마지막 대목도 이러한 정신에 부합된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행 28:24-28) 사도 바울의 자신의 전도가 안먹혀들어가는 현실이 원망스러워 말씀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말씀대로 완악한 자들은 필히 완악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 성취의 완성된 종말이기에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람들이 말씀을 빠짐없이 다 들어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성취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랑은(딛 3:4) 오로지 택한 자에게만 흘러들어가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딤후 2:10) 성경은, 영역의 확장으로서의 이해될 수 있는 하나님 나라 사상을 언급하지 않는다. 지상 차원이 아니라 말씀 성취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나타낸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 10:18) 전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아직'은 그만큼 좁혀진다든지 메꾸어 나갈 수 있다는 발상은 주님의 정신과 전혀 다른 것이다. '아직'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에 전도가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내는 분의 전도의 성취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보냄을 입지 못하고 또한 그렇게 보냄을 입은 자가 등장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발걸음 자체가 전도의 미완성이 아니라 완성되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말씀이 완성된 시기이기에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 반응된 자는 이미 종말적인 구원 원리에 의해서 반응받는 자이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1-14) 여기에 나오는 '너희'에 해당되는 자는 결코 새삼스럽게 구원되기 위해 스스로 절제하는 자가 아니다. 이 주님의 완성된 말씀이 적용됨을 보여지는 자들이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8-9) 그래서 아직 구원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든지 아니면 아직 구원되지 못해서 허기진 자는 이러한 종말적 상태를 가리게 되는 자이다. 즉 여전히 어두움의 일을 벗지 못하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자를 구원받은 자라고 간주해 줄 어떤 근거도 없다. 또한 어두움의 일을 벗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나중에 구원이 된다고 여기는 자도 주님으로부터 구원된 자가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이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의 능력으로 어두움의 일을 벗을 수 있는 자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성도는 다음과 같은 자이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이러한 영광성은 예수님에 의해 비로소 말씀이 성취되었음으로 나타냄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취지를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21)

Ⅲ 결 론

인간에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유혹으로 작용한다. 구원 이야기도 유혹의 일종으로 받아드리며 자기 구원으로 이전시켜 놓는다. 그래서 자기만의 의를 생산하여 따로 간직해 두려고 한다. 그것없이는 '나 만의 나' 됨이 상실하기 때문이다. 종교란 이처럼 유혹의 절정이며 최후로 빠지게 되는 황홀한 함정이며 동시에 놀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 말을 듣지 아니한다. 복음은 지속적인 심판이며, 택한 자에게만 구원이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저주 행위이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게임으로 만들어놓고 성직자들은 그것을 사업체로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성도는 그저 자기 인생을 뜯어내며 사는 자이다. 시간으로 중무장이 된 세월을 뜯어내면 그 자리가 어두움의 자리로 드러난다. 이것이 태초의 빛이 자기 자녀에 대해서 행하시는 업무이기도 하다. 한평생 다가도록 빛의 증인이기에 성도는 빛과 사귀는 사람이다. 빛과 사귀는 그 순간부터 세상은 온통 어두움인 것을 안다. 빛과 사귀는 자는 다시는 어두움에 거하지 아니한다. 빛과 사귀기에 정신없기 때문이다. 세상 좋은 줄 모른다. 이것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선(행 26:18) 사람들의 특징이다. 여기에 비해 세상 사람들은 늘 자기 자신과 사귄다.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만 덩그라니 남는다. 사귀는 대상이 없다. 어쩔 수 없이 구원을 자기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사귐'이 뭔지를 모른다. 그저 '애씀'만 있다. 빛과 사귐에는 시간도 무의미하다. 사귐에는 '흐르는 시간'이라는 묘사는 적합치 못하다. 지나쳐온 과거의 유물도 없고 기다려야 될 미래의 빛도 없다. 계획을 부정한다. 단지 빛되신 분과 함께 빛의 영광 안에 지내고 있을 뿐이다. 자기 구원을 위해 틀이 되어 줄 객관화될 시간도 없고, 영예로운 훈장처럼 가슴 앞에 달고 싶은 구속사도 없다. 빛이 주시는 안도감과 사랑과 용서하심과 의롭다 하심과 긍휼히 여기심만이 충만한 그 광경을 기쁨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세상은 빛이 주도해 왔고 빛의 뜻대로 파도치고 있다. 성도가 빛과 사귀게 된 것은 그 빛을 일부러 불러내어 소유화 한 것이 아니다. 그 빛은 어두움의 경계선을 넘어 길게 뻗어 들어오신 것이다. 양치는 목자들의 주위를 두루 비취던 그 빛의 '터 잡음'이 (눅 2:9) 바울에게도 일어나고 모든 성도에게도 일어나는 것이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하나님과 성도와의 사귐은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가능하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게 3:20)


신학 탐구, 그것으로도 빛되시는 분과의 사귐을 대신할 수 없다. 신학이 인간을 위한 인간 구원을 돕기 위한 취지로 진행된다면 깜깜한 소경의 절규에 해당된다. "땅의 것을 생각치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골 3:1-3) 도로 땅의 것에 집착하게 만드는 그런 신학을 전개한다면 어떻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신학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세상 지혜는 헛것이라"고 하신 성경 말씀을 가지고 (고전 3:20) 어떻게 세상 지혜를 긍정하고 옹호하는 신학을 전개할 수 있는가. "인간의 지혜로는 십자가를 알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성경 말씀을 다루면서(고전 2:4-12) 어떻게 인간의 종교성을 신뢰하자는 신학을 내세울 수가 있단 말인가. 십자가는, 인간들의 신학마저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고 부정한다는 점을 신학에 천착하는 자들마저 자동적으로 아는 사실이 아니다. 여기에 신학의 죄악성이 노출된다.


신학은 사람을 구원해주기 위해 발판을 만드는 작업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도리어 그것을 부정하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지금 앉아 계시는 하나님 보좌 우편의 자리가 얼마나 대단한 자리인지를 증거 하는 것만이 내용이어야 한다.(행 2:34-36) 신학은 시간 의식이 토대가 되어서 이루어지는 경향을 결코 속일 수 없다. 그럴수록 자기를 부인하고 미워하고 그리스도만의 공로만 내세워야 하는 고백으로 터져나와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목회나 신학 작업조차 어느 새 "자기 죄 위장하기"의 한 경향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십자가는 신학자라고해서 봐주고 비켜지나가지 않는다. 우수한 설교자라고해서 따로 반편성해 주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영원히 십자가 앞에서 서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거기서 영원한 죄인의 모습으로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진 것을 두고 두고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을 발견해야 한다. 다만 빛에 의해서 빛의 자녀가 된 것 뿐이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 주님은 이 어두움의 세상에서 놓여있는 자기 자녀들에게 다음을 요구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 20:22) 그렇다, 은혜를 받았은즉 고난의 잔 또한 받지 않겠는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