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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예수님의 승천에 관해서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성경 신학 · 기타

예수님의 승천에 관해서

정인순 2011. 1. 1. 22:58

예수님의 승천에 관해서
2001년 11월 24일   이 근 호 목사

가. 서 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으며, 구약의 완성이 되며 택한 자에게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보다 명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메시야로서의 독창적인 사역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예사로 보아서는 아니된다.

혹시 예사로 본 그 점 때문에 지금까지 정립된 신학에서 난제로 제쳐놓을 수 있는 일들이 발생되기 때문이다. 제대로 납득이 안되는 문제를 앞에 두고 혹시 그 해결점이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한 예수님 사역속에 잠자고 있을 수도 있?것이다.

성경, 특히 신약성경에 보면 메시야 자격으로 예수님만이 행해야만 하는 일들이 드러난다. 잉태부터 재림까지 메시야는 범인이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한 운명을 지니고 그 시대를 사셨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전 세계는 그분의 지배를 계속해서 받게됨을 보이는 일련의 사태를 접수하게 된다. 문제는 그분의 그런 일련의 운명이 어떻게 해서 구원의 사건으로 변하는가 하는 점이다. 즉 그분에게 한정된 일이 어떻게 해서 타인에게 전수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점을 보다 확실히 하는데는 그분의 변신의 의의를 보다 밀도있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왜 꼭 그러한 단계와 순서를 가져야 하느냐 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구원에 관한 정보를 보다 확대시킬 것이며 산재한 어러가지 신학적 난제들에게 해결점을 안겨주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각 단계마다 분명 고유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만약 그 어느 것 하나를 소홀히 다룬다든지 그 가치를 약화시켜 놓는다면 그만큼 불실한 구원관이 제공될 것은 뻔한 이치이다. 종전의 신학에서는 신약의 구속사 중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큰 값어치를 주었다. 십자가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서 서로 대립되는 예수님의 형태에서 서로 대립되는 의미를 꺼집어 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십자기 이전에는 예수님의 비하라면 십자기 이후에는 예수님의 승귀를 말한다는 것이다. 십자가 이전에는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고 지상으로 하강하는 메시야의 자세를 보여주고 십자가 이후에는 지상에서의 천한 생활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초월적 영광을 한몸에 받고 하늘 자리로 복귀하는 자태를 지녔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하라든지 승귀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그분의 위상에 국한 하는 용어일 뿐이지 그분이 형성시킨 구원의 세계의 위상변위까지 담아내기에는 부족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론으로부터 파생시켜 구원의 효과를 발견시키려는 발상은 존재로부터의 운동을 유도하는 철학적사고로부터 유래한다. 이는 조직신학이라는 이름하에 일정한 교리들로 모든 성경의 진리를 담아 놓을려고 하는 시도이다. 성경의 불변성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욕심을 내어 교리의 불변성을 노린 시도들인 것이다. 궁극적인 교리 창고를 지어놓고 그속에서 무엇이든지 구원의 필요한 것을 꺼집어 낼려는 것은 너무 안일한 태도이다. 존재론적으로 정돈되지 않으면 그 어느 근거들도 불확실한 것이라는 기우는 철학에 깊이 의존한 편향된 사상이다. 즉 존재의 확실성에다 자기의 사상을 다 내맡기고 싶은 것이지 성경에다 자기의 모든 것을 걸기에는 뭔가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이다. 자신이 직접 성경에서 꺼집어 내면 될 것을 교리라는 철학체계를 중매로 하여 두단계를 밟게 하는 것은, 인간들이 자기가 납득할만한 궁극적 존재에 대한 정신적 의존도가 심히 강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믿기보다는 성경에서 한없이 따로 꺼집어낸 재로를 가지고 신이나 궁극적 존재를 새로 수립하여 그것을 의지할려고 한다. 이러한 인간들의 철학활동의 습성은 예수님의 지상사역을 모두 예수님의 존재분석에다 촛점을 맞추어서 해석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되면 예수님이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보다 예수님은 누구신가로 모든 것이 종결된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점이 어떻게 자동적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안겨다 줄 수 있단말인가. 결국 예수님의 모든 구원사역의 단계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추인하는 정도로 머문다면 이는 신과 인간과의 괴리는 여전히 남게 된다. 비록 예수님이 참인간임을 주장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참인간임을 주장하기 위해서 특별한 구원사역을 수행했어야만 하는가? 메시야 역할을 안하면 인간이 못되시는가?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결코 예수님의 존재를 정립시켜 주기 위함이 아니다. 다른 목적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전체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찾을려고 하지말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을 할때만 메시야가 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역은 예수님 자신을 겨냥하기 보다는 중보자 입장에서 아버지와 죄인을 연계시켜주는데 촛점이 모아져있다. 중보자되기 위한 사역을 위해서 예수님이 나타나셨지 자신의 신성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인간앞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중보적 기능이 자신의 신성과 인성의 절묘한 결합이 해명되어야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말씀과 육신의 인격적 교환이 결코 인간과 하나님의 인격적 교류와 결합을 만족스럽게 설명해주지 못한다. 옛언약 시대때의 제사장직이라는 기능은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화할 때 결코 제사장 자신이 신성을 지니고 있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자신의 목숨(피)를 바침으로 가능한 것이다. 최종적으로 제사장은 백성이 바친 제물 중 피만을 추려서 성소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행해졌던 첫 유월절 때, 문지방에 양의 피를 바르고 그 집안에서는 양고기를 뜯어 먹음으로써 죽음을 요구하는 심판의 천사에게 충분한 만족이 된 것이다. 죽음의 천사는 그것을 양의 목숨으로 보지않고 그 집안에 들어있는 장자의 목숨으로 받아주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지상에서 구체화를 겨냥하는 과정으로서 희생제물과 인간의 일체성이 충분히 그 본유의 가치를 다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제물과 제물 드리는자의 동질성은 그 유월절의 의미를 늘 재현하고 반복시켜 언약의 최종상태까지 유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제사장의 고유한 어떤 신적인 요소가 제물 드리는 자에게 유입되어 제물드리는 자가 거룩해지는 것이 이미 제물을 바침으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고 제물을 받는 자의 생명과 합일되므로 거룩해지는 것이다. 이것을 인간편에서만 바라볼 게 아니라 하나님편에서 보게되면 하나님의 거룩성이 인간의 내부까지 모두 점령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거룩한 나라 곧 이스라엘의 본질이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전쟁의 부산물이 아닌 것은 모두 속된 것으로 보기 ㄸ문에 거룩이라는 개념도 "더이상 속된 것과 연관성을 갖는 것이 없다. 그런 것은 모두 죽었다"라는 분리의 개념으로 봐야 한다.

이렇게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직사역도 영-육, 말씀-육신, 신성-인성 이라는 이중적 도식을 해명하는 식으로 설명되어서는 안되고 하나님과 죄인을 연결시켜주는 충분한 구원의 효과면에서 거론되어야 한다. 따라서 십자가 달리신 그리스도 그분이 부활하셨다 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지 말고 십자가가 달렸다가 다시 살아남으로서 구원의 상황이 얼마나 진전되었는가에 촛점이 모아져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승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승천을 단순히 신분의 상승으로만 풀이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현양되어 고유의 체통을 유지하게 되었다에 촛점을 모아서는 아니되고 승천이 됨으로 부활 때와는 다른 어떤 구원의 분위기가 새롭게 형성되었는가를 승천신학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 소위 추가된 구원의 비밀이 그 사건 속에 담겨있어야 한다.


나. 본 론

1. 메시야직에 있어 부활이 갖는 의미

메시야직에 있어 왕직에 앞어 제사장직에 먼저 중점을 두어야 될 이유는 창세기 12: 1- 3에서 "선택된 국가"의 수립자로서 아브라함이 뽑히고난 뒤, 아브라함은 복의 원천이 하늘의 왕이 친히 제사장이 되어 지상에 관여하기 때문이라고 소돔 전쟁에서 체험하게 된다 (창세기 14:18). 아브라함의 나라는 멜기세덱의 반열의 제사장의 축복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이다. 자기 몸에서 뒤이어 나타날 왕들도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주어진 언약의 한계속에 있다. (창세기17:6 참조) 정말 이스라엘이 왕같은 제사장나라가 될려면 (출애굽기19:6 참조) 멜기세덱이 지상에 관여한 사역을 재현해야 한다. 여기에 제사장직의 원형이 도입된다. 그 사역이란 바로 "여호와 전쟁"이다. 즉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진 신에 의해서 세상은 침노를 당하고 궁극적으로 정복을 당해야 된다는 말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복이 제사장을 통해서 지상에 내려오고 그것에 대해 유일하게 반응할 줄 아는 지상의 국가로서 이스라엘은 존재하고 사역해야 한다. 이것이 메시야직의 본질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제사장 국가로 자리잡은 것은 필연적이다. 제사장국가란 제사장이 국가의 중심이 되어 모든 백성들은 그 제사장의 운명에 복속되는 형태를 뜻한다. 제사장이 실패하면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덮쳐진다. (레위기10:6) 제사장의 바른 처신을 위해서 선지자가 존재한다. 제사장은 예하에 있는 모든 백성의 목숨을 거두어서 보관하고 있는 셈이다. 여호와의 등장으로 전세계가 여호와전쟁에 휩싸여 있는 판국에 제사장에게 자기 목숨을 바치지 아니하면 이미 저주가 임하고 있다고 봐야 하나다.

생명이 있는 피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제사장직의 효능을 말하고 계시다. 그것은 여호와 전쟁에서의 제사장직의 효능을 말하는데, 제사장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은 소위 "거룩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여호와 전쟁에서 저주가 면제된다. 여호와 전쟁은 속되고 죄악된 것에 대해서만 공격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제사장에게 목숨을 던져버린 사람들이 "거룩한 사람"이 되나? 창세기 15:1에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나는 너의 방패에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다. 하나님이 친히 방패가 되셔서 아브라함에게 오는 공격과 저주를 막고 계시는 것이다. 그 방패 속에서 수많은 후손들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번식된다. 아브라함이 이 사실을 믿으니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고 간주하셨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죄악된 국가들이 이 약속의 땅에서 징벌하겠다고 하신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는 의라는 의미는 여호와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을 뜻한다. 뭔가 도중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차단해 주는 방패역할 하신 분의 존재로 말미암아 이런 결과가 의로 주어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면서 계약을 수립하는데 그 형태는 서로 마주보며 쪼개져 있는 제물 사이로 하나님이 친히 통과함으로 수립되어 진다. 이 뜻은 이제 아브라함이 하는 일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언약안에서 일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언약으로 말미암아 한 통속이 되는 것이다. 멜기세덱의 반열이 제사장적 일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다. 그 이후에 아브라함은 그 동네에서 "하나님의 방백"노릇도 하며 (창세기23:6) 심판에서 빼내어주고 저주도 풀게하는 중보자적 기능을 갖고 있는 복의 근원으로서의 모습을 보인다(창세기 19:29/ 20;17-18). 이 중보적 기능으로 인해 하나님 자체 즉 거룩의 상급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미 계약된 대로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메시야직능도 이러한 구약의 계약차원에 국한해서 실현되어져야 함은 마땅한 일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갖는 의미는, 십자가 죽음이 제사장직에 의거한 하나님의 계약의 성취임을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다. 이는 여호와 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의롭지 못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의지는 아직도 수구려 들지 않았고 오히려 본격적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 주변 국가에 국소적으로 적용이 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이스라엘 민족과 로마의 행정관이 직접적으로 관여됨에 따라 여호와 전쟁은 전 세계를 상대로 진행이 된다. 십자가사건이 과연 계약대로의 메시야직의 성취로서 이루어진 사건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옛 계약에 의하면 확인해야 될 점이 있다. 그점은 상급(전리품)이 생겨나야 하고 이 전리품은 여호와 전쟁의 유발요인이 이미 극복되어 다시는 여호와 전쟁의 대상이 되지 않아야되는 내용을 담게 된다. 종전의 신학은 부활한 그분이 십자가에 달린 그 당사자이어야만 한다는 것에 촛점을 모아 해석했다. 그 이유는 예수를 믿는 자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가신 운명과 동일한 운명의 코스를 밟게하여 구원을 효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소위 대리죽음이 갖는 구원의 효능의 근거를 확실하게 해주기 위함이다.

대리희생자와 그에게 모든 것을 걸어놓고 있는 추종자의 관계에서 비록 죽음의 단계라고 이 관계가 단절되어서는 아니되고 그 죽음의 벽까지 넘어서서 이어져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대리죽음의 본래의 가치가 살아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20-22/ 고린도후서 5:14-15/ 사도행전 2;30-36).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는 약점이 있다. 십자가 사건이 그 자체로서 어떤 메시야직 사건으로는 부족하고 부활사건까지 연결해야 온전한 메시야사건화 된다는 점이다. 즉 부활사건은, 십자가사건이 정말 메시야직에 의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사건과 결합하고 난 뒤 그 두사건을 결합해야지만 제대로 메시야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 사건이 메시야직의 중심사건이 되지 못하고 "죽음-다시 살아남" 이것이 중심사건이 된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십자가사건은 단순한 통관절차에 불과하고 결국 부활사건이 최종적 의미까지 다 함유하고 있는 진정한 메시야사건으로 비중이 어쩔 수 없이 쏠리게 된다. 십자가 사건은 최종적 부활의 영광을 위한 하나의 에피소드나 지나간 아찔했던 추억거리로 남게 된다. 과거야 어쨌든 지금 이 부활의 즐거움에 도취되자는 식이다. 어쨌든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난 이 마당에 있어 그 전과정인 십자가의 죽음이 지금의 우리의 신분에 무슨 관여가 되겠는가 말이다. 다만 십자가사건을 언급하는 이유는 부활의 고마움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과거의 비참했던 일을 회상하는 구실밖에 못하는게 된다. 정말 큰일 날 뻔 했다! 라는 말로 십자가의 의미를 다 말했다고 할 수 있을까? 부활로 말미암아 신자에게 퍼부어진 혜택에 너무 치중을 하다보니 부활사건 그 자체가 기독교의 중심사건의 자리에 앉게 된다. 부활 그 이후가 기독교가 되고 만다. 그러나 분명히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너희중에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2: 2) 갈라디아서 3: 1에도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드냐"고 말했다. 그리고 세상과 신자와의 칸막이가 아직도 부활사건이 아니라 십자가사건으로 치여진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14 "

그리스도의 메시야직에 의한 전리품은 십자가의 경험을 안고있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의 출현이다. (출애굽기 15:17-18 참조). 이런 자들의 등장이 바로 메시야직이 온전히 수행되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종전의 부활개념은, 자기 백성을 메시야가 자기존재 속에 담아가지고 처리한다는 존재론적 시각에서 파악했었다. 그렇게되니 이미 부활한 예수님이 십자가 달린 과거의 예수님을 신학적으로 지배하게 된 것이다. 즉 마지막 사건이 그 전의 사건의 취지를 다 포함하여 우위에 설수 있다는 사고는 역사적으로는 가능한 일이겠지만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특히 신약시대에는 용납될 수 없는 견해이다.

오히려 부활사건과 승천사건과 재림사건을 십자가사건의 부산물로 봐야한다. 이미 완성된 메시야직의 적용으로 봐야 한다.

특히 대리속죄 사상에서도 존재론적으로 파악해서는 아니되고 관계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이미 구약의 "언약 안에서" 해석에 준해서 풀이되어야 한다. "언약 안에서"는 존재론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아브라함 품속이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동일하게 지금 우리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단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에게만 한해서.

그렇게 볼 때,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2:20에서 말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라는 말은 실제로 사도바울이 십자가에 올라갔다는 말이 아니라 연이어 나오는 말에 따라 "그를 믿는 믿음"이 그런 효과와 같은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즉 그의 사건이 옛 계약안에서의 메시야직이라는 믿음 말이다.

그럼 부활의 의의는 무엇인가? 부활과 십자가의 관계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 요한복음이 잘 말해주고 있다. 요한복음 12: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썩으면'이 아니다)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또 요한복음 15:1에서도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요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제자들을 열매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안붙어있는 열매에게는 나중에 멸망이 따르게된다고 언급하면서 농부되시는 분의 기본 방침을 소개해 준다. 그런데 십자가사건이 지사에서는 죽음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달리 이야기하고 계시다. 즉 아버지에게로 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흔히 말하는 죽음이 안다. 죽음이란 생명의 종언인데 예수님에게는 생명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확산이 된다. 십자가사건이 요한복음에서는 잠시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여 무대 뒤로 가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역사의 현장에 다시 나타날 때는 전에는 없던 것을 대동하고 나타나시는데 그것이 보혜사 성령이시다. 왜 성령과 함께 나타나시는가?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비록 한분은 하늘에 계시고 한분은 지상에 계셔도 조금도 분리됨이 없이 한 처소에 계신 것으로 만들어 주는 영역이다. 성령께서는 생명과 생명사이에만 연결이 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기 생명을 뿌린 그 자리에다 아버지와 연결시켜 주기 위해 성령을 모시고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요한복음에서의 부활이란 십자가사건을 인간과 하나님이 함께 동거할 수 있는 창구로 열어놓은 사건이다. 이는 이미 새로운 차원으로 성숙된 십자가사건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단순한 소생사건이 아니다. 따라서 부활이란 십자가사건을 무로 돌리거나 취소화 시키거나 십자가에서 벗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계속해서 십자가사건 안에 놓여있으면서 그 십자가를 본격적으로 생명의 창구로 널리 전파하는 사건이다. (요한복음 16:7-12) 결국 부활이란 추가된 메시야사건이 아니다. 그래서 십자가사건이 부활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사건이 십자가사건에 흡수된다. 이는 예수님의 메시야직의 최종 모습으로 부활이 설정될 수 없고 계속해서 십자가사건이 중심이 된다. (요한복음은 부활 이후의 예수님의 묘사에서도 못자국과 창자국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20:25, 27)

사도바울에 있어 부활은 십자가사건을 넘어서서 미래의 영광의 광경의 모델로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흙에 속한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으리라 (고린도전서 15:49)". 그런데 사도 바울은 부활을 승천 전까지 예수님이 다시 살아 사셔서 40일간 계신 것을 말하고 있는게 아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5:8에 보면 맨 나중에 자기에게도 부
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이때 나타난 예수님은 이미 승천하신 예수님이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부활을 승천사건까지 포함하고 심지어 재림까지 포함하고 있다(고린도전서 15:23 참조). 이는 예수님 혼자만의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의 부활까지를 내포하여 일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예수님의 승천사건의 효과와 그 결과를 부활로 간주하고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승천사건의 의의를 따로 빼내어 설명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부활을 예수님의 단독 희생사건으로 사도바울이 보지 않는 것은 사도바울 이 주님을 만나서 이해한 부활이 단지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 속에서 썩지않고 다시 십자가 죽음 전의 몸으로 회복되는 것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그 영광스러움까지 회복되는 것을 뜻한다. 사도바울은 주님의 부활의 최종상태를 주님을 믿는 신자의 최종상태로 동일하게 간주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의 승천이 갖는 특별한 신학적 의미 속에, 구약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목표점을 발견한 어떤 점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예수님이 메시야 되신다면 구약에서 이미 거론한 메시야와 그 백성들 사이에 연관된 모든 신학적 주제들이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최종 수준이 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 부화로 40일 동안 재회한 후 예수님의 승천으로 예수님과 헤어지게 된 제자들과, 이제는 승천하신 분으로서 직접 특별한 사역과 사명을 부여해준 제자 사이에는 추가되고 새로이 정립된 신학적 내용으로 인해 복음의 폭이 확산되고 세밀화될 수 있다. 물론 더 세밀화된 내용은 구약의 메시야직의 구체적 완성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승천하지 않았으면 메시야직에 어떤 점이 감추어질 수 있으며 어떤 점이 미완성으로 남는가? 그리고 왜 예수님은 죽음에서 바로 승천하시지 않고 40일간의 지상 부활을 거쳐서 승처너에 이르시는가? 이런 점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2. 사도 바울의 승천 신학

바울 신학은 그리스도의 승천이, 부활의 그리스도를 단순히 그리스도 사적신분의 변화에서만 정지되는 것이 아니라 전우주로 영향을 미치게 된 결정적 사건으로 보는데서부터 시작된다. 그 영향이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직에 관한 제대로의 위상과 사역이 본격화됨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승천 신학은 반드시 그 다양한 효과와 영향을 구약의 메시야직의 특성을 고려해서 생각해야 한다. 구약에서 무엇이 언급되었으며 그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얼마만큼 실효성을 갖게 되었느냐가 탐구되어야 한다. 만약 승천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소생으로 부활의 의의가 다한다면 구약에서 밝힌바 있는 그리스도로서의 자격에 미흡할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구약의 메시야직의 구성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1) 아담의 육체성과 메시야직의 기반

죄의 삯이 죽음이라고 했을 때, 죽움이라는 독특한 처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죽음과 죽음 아닌 것을 구별짓는 형태가 있어야 한다. 그 형태가 바로 신체성이다. 아담의 신체성을 두고 그 신체가 흙으로 와해되는 것이 죽음이라는 형상이다. 그러면 이러한 인간의 신체성은 어디서 왔는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 주어진 것이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성의 환원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는 죽음으로 붕괴해 가는 아담의 신체성 대신에 새로 등장한 그리스도의 신체이다. 그런데 그 신체는 아담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의 형상을 입어써기에 영원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영광된 신체성을 가져야만 하는가? 바로 여기에 대한 해답이 메시야직의 근원이 된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은 죄의 결과로 인해 인간의 신체가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하신다. 흙이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기 전의 상태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미처 닫기 전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평범한 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번한다. 흙에서부터 생령으로 탄생되는 순간이다. 이 생령은 인간이 무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태이다. 아직 죄에 오염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럴 때 가장 "하나님의 형상"다운 그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몸이 죄로 인해서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성질이 있다면 아담이 가졌던 "하나님 형상"은 죄의 유무를 가름할 뿐아니라 죄라는 것이 무엇을 소멸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계기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죄라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은 동시에 존립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만약에 아담이 가졌던 그 신체성이 영원히 죄로부터 극복된 형태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영원한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을 띠고 나타나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단순한 소생에 부활의 의미를 두지 않고 영원히 영광스러움을 부활의 진정한 모습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 신체성의 대변혁이야말로 죄로부터 완전한 격리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이 흙에 속한 형상을 입은 것같이 이제 우리는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것이라고 내다보는 이유는, 죄로부터의 진정한 해소는 그 신체성의 영광으로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승천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늘의 형상을 소유했고 죄로부터 완벅한 승리를 가지게 되었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직은 바로 신체의 고양에 그 기초를 깔고 있다. 육신의 재생뿐 아니라 다시 가지게 된 신체가 영화롭게까지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메시야성이 확인된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신체성이 없는 소위 영적인 부활은 당연히 사도 바울로부터 거부당할 수 밖에 없었다. 사도에게 있어 최종적인 부활의 가치는 영화된 신체성으로 인해서 마음놓고 다음과 같이 외쳐보는데 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고린도 전서15:55"

(2) 아브라함의 메시야직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아브라함의 위상은 약속을 함유한 최초의 인물이라는데 있다. 약속을 함유했다는 말은, 지상에서 자기 약속을 성취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미 간직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데, 여기서 말하는 의가 어떤 경로로 아브라함에게 떨어졌는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보이는 메시야성이 밝혀질 것이다.

창세기 14장 소돔전쟁에서 아브라함은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이번 전쟁의 성겨거에 관한 것이다.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 소돔전쟁에 관여하게 된다.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오는 길에 두개의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왕을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은 세속왕이라고 할 수 있는 소돔왕이요 다른 한 사람은 천상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살렘왕이다. 그런데 그 살렘왕 멜기세덱이 하는 말이 나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지금 이 가나안 땅을 지배하는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에게 승리가 온 것을 직감한다. 그리고 자기가 하란을 떠날 때, 이 땅을 제공하고 큰 국가로 탄생시키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이 바로 이 전쟁을 처음부터 주도했다는 것을 느낀다. 그렇다면 이번 전쟁의 승리는 결코 아브라함 자신의 노력과는 무관했던 것이다. 그 지극히 높으신 약속의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성취시키는 수준으로 아브라함 자신을 이 전쟁에 투입시킨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적은 곧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적도 동일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 모든 사실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아브라함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떡과 포도주가 들려있다. 떡과 포도주는 이 가나안 땅이 축복상태에 놓일 때의 산물이다. 아브라함은 그 받은 떡과 포도주에서 10%를 취하여 도로 멜기세덱에게 바친다. 이는 이 가나안 땅의 모든 소유는 자기가 아니라는 뜻이며 진정한 소유쥬인 이번 전쟁의 승리자인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복속되겠다는 의사표시이다. 그리고 소돔왕이 가지고 온 전리품을 아브라함은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아브라함의 행위는 가나안의 정복이 단순한 자기의 생존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원수를 척결한다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신의 전쟁이었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의가 있어야 한다. 그 의는 지극히 높으신 제사장의 축복으로 제공된다. 아브라함은 그 멜기세덱에게 예속됨을 고백함으로 이번 전쟁에서 하나님편에 속했다는 자기 입장을 분명히 한다. 아브라함의 분명한 태도가 있은 후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약속한다. "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상급이요 방패가 된다" 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급"이란 바로 여호와전쟁의 전리품을 말하고 방패란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브라함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보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브라함의 신앙이 값어치 있는 것으로 간주해서 하늘의 별같이 자손을 확장시키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받아드렸다.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번 소돔전쟁에서 일어난 모든 과정이 진정한 약속의 후손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왕이면서도 제사장 신분을 지닌 그 위인에게 모든 것을 위탁함으로 하나님의 전쟁에서 보호받고 안전을 확보하는 의에 속한 자가 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돔와의 승리도 아니요 아브라함 자신의 승리도 아니다. 오직 승리자는 살렘왕 멜기세덱의 승리이다. 왜 승리할 수 있는 힘이 있는가?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제사장이라 그분의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여호와 전쟁에서 가지는 제사자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천상의 제사장은 지상에서는 왕직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 어떤 세속왕도 그 자체로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이란 오직 의를 소유한 자를 빼놓고서는 그 이외의 인물들은 모조리 하나님의 대적임을 밝힌다. 동시에 의를 소유한 국가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전쟁의 군대가 되어 악의 무리를 부숴야 될 사명을 지닌다(창세기15:16). 이것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은 애굽에 내려가서 하나의 여호와 군대로서 4대만에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형식을 통한 구원, 이것이 여호와 언약의 유일한 성취방법이다. 이제부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제사장 역할을 하게 된다. 아브라함은 밤에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들어갔다. 마주 쪼개진 제물의 사이로 하나님이 통과하심으로 이제부터는 아브라함이 하는 일은 곧 여호와 전쟁의 주체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언약이 아브라함과 약속의 하나님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갈라진 제물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동급동종 속죄 원칙에 따라 이 언약의 제물의 실체가 무엇인가? 그점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잡을 때 밝혀진다. 제사장의 입장에서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언약을 존속시키는 책임에 들어서 있다. 사랑하는 독자, 그 하나밖에 없는 자식은 바로 언약에 의하여 주어진 자식이다. 그 자식이 제물이다. 언약이란 바로 언약의 인물이 제물이 되어 희생됨으로 제공된 새로운 상황에서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장치이다. 이 장치에서 죽음이 극복되는 것을 아브라함은 보았다.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여호와 이레) 제물의 실체를 믿음으로 이삭은 그 믿음에 의해서 되살아난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되살아난 자식으로 인해 원수가 정복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죽음이란 이삭안에서 이제는 극복된 것으로 간주된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믿음의 정의를 특정 인물에게 발생된 사건으로 국한하고 있다. 없는데서 있게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 하나님의 일관된 방침이 믿음의 최종내용에서 확인되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보고 있다.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24-25).

여기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옛 모리아산 위에서의 희생제물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 뿐만아니라 아브라함을 모든 믿는 자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 사도는 아브라함 자리에 신약 성도를 놓고있고 이삭 자리에 예수님을 놓고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일관된 언약사역으로 정리했다. 사도는 율법과 상관없는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구원이 가능한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아브라함 언약과 연결을 지음으로 해석해 내고 있다. 아브라함에 있어 메시야직이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가능케한 그 "희생의 제물" 되시는 그분의 활동이다(로마서 4:14-16).

그러면 여기서 필연적으로 거론되는 쟁점은, 율법이 없어도 구원이 가능하다면 무엇때문에 율법이 왔으며 예수님은 어찌하여 율법에 의해서만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가 하는것이다.

(3) 모세 율법에서의 메시야직과 그리스도의 승천

모세가 받은 율법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이라는 원칙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해주기 위해 주어진다. 믿는다는 것이 과연 희생 제물되시는 분과 어떤 연결성을 지닌 모습인가를 보여주게 된다. 모세가 활동을 개시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장자" 생산에 그 동기에 있었다(출 4:22-23). "하나님의 장자"란 아브라함 언약에 따르면 언약성취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어지는 인물을 말한다. 희생제물 안에서 하나님은 사역하신다. 그 장자가 되는 자격은 아브라함 언약에 따르면 "할례" 행한 자에 한한다. 난지 8일만에 하례 힝한자는 최초로 이삭이라는 인물이다. 그 인물의 희생제사 안에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은 언약의 원형을 보게 된다. 그 아브라함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장자의 생산은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제공된다. 애굽나라의 장자를 죽이는 와중에서 애굽의 장자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장자가 "하나님의 장자"라는 명분으로 애굽에서 밤에 탈출해 나온다. 애굽의 장자와 다른 점은 그들이 어린 양의 희생으로 심판을 면했다는 경험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계속해서 반복되기를 요구하셔ㄸ다. 그리고 이 유월절 축제는 오직 할례를 행한 자에게만 해당되도록 제한하셨다(출12:44) 할례와 어린 양의 희생과 연결을 지어서 "장자"의 본질을 형성시키기 위함이다(출13:1-3) 어린 양의 희생으로 심판의 밤을 넘긴 무리가 애굽에서부터 벗어나자 마자 애굽은 전쟁을 걸어온다.

이제부터의 전쟁은 노예와 원주인간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장자"와 장자가 아닌 자의 싸움이다. 그 싸움의 장소는 홍해바다이다. 인간이면 그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바다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장자"를 모집하러 왔을 때 가지고 온 지팡이를 들고 모세는 바닷가에 서 있다. 그 지팡이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장자"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의 신분으로 갈라진 바다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에서 그들은 여호와가 싸우는 모습을 관람했다. 자신들이 무사히 통과된 그 바다는 이번에는 애굽의 바로 군대를 용서하지 않았다. 바다물은 사정을 보지않고 뒤따라 전쟁터에 들어온 그들을 몰살시켜 버렸다. 주께 거스리는 자들의 종말이다. 일관된 하나님의 "장자만들기" 사역은 신적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해서 유월절을 지켜야 하는가? 하늘의 별만큼 모래만큼 하나님의 장자를 생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처음 출애굽의 경험을 가진 자드러에게 유월절을 축제일로 정해 지속적으로 반복하기를 오청하셨다. 첫 번 유월절 그 경험에 동참하지 못하는 후손은 하나님의 장자가 아니다. 장자됨의 의미를 모른 자는 애굽에게 내린 재앙들이 그들에게도 똑같이 내려진다(출15:26). 이미 할례된 자로서 유월절을 지키게 되어있으므로 자신이 받은 할례의 진정한 뜻을 희생제사와 연결지어서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연이은 율법을 제시하심으로 유월절의 의미를 보다 세밀히 하시고 확대하기를 원하셨다. "맏물"이나 "맏이"이 대하여 계속적으로 이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그 속에 희생개념을 담아 두신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식으로 희생제물과 일체성을 가진 장자가 되는가 하는데 있다.

광야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해서 모세와 하나님께서 원망과 불평을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희생의 뜻을 품고 있는 만나나 생수를 공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애굽지향적으로 움직인다. 급기야 모세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에 그들은 애굽에서 섬기던 형상을 통해서 여호와를 섬길려고 한다. 금 송아지 형상은 그들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총동원해서 성의를 가지고 제조했다. 마침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내려오던 모세는 그것을 보고 들고있던 말씀판을 깨뜨린다.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긴 것 때문에 하나님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사정없이 깨진다. 모든 언약이 무로 돌아갔을 때, 모세는 자기를 담보로하여 다시 한번 언약이 회생되기를 기도했다. 그후에 모세가 산위에서 가져 온 돌판은 단순한 돌판이 아니라 "증거판"이다(출25:22). 그 증거판은 인간의 범죄로 깨어진 말씀을 증거한다. 인간의 죄악을 지속적으로 고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이 회복되는 것은 일년에 한차례식 온 백성의 죄를 홀로 책임지고 나서는 대제사장이 증판궤 위에 뿌리는 희생의 피 때문이다. 그 뚜껑을 시은좌 또는 속죄소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그 말씀의 깨어짐과 다시 회복됨은 그 모두가 인간의 죄악 때문이다. 바로 이 증거궤를 모신 성막을 중심으로 새로운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일년에 세차례씩 절기를 지켜야 한다. 유월절과 맥추절과 그리고 대속죄일 중심이 되어버린 수장절은 맏물과 장자의 본질을 인간에게서 출발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희생제물에서부터 도출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것이 10번째 재앙의 반복이며 홍해전쟁의 재현이다.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는 첫번 유월절의 연장으로서 죽음의 의식이다. 자신들의 죽음을 안수를 통해서 희생제물에게 넘길 때, 그 희생제물은 자기가 넘겨 받은 죄인의 죄 때문에 죄인과 함께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런데 그 번제단이 바로 화목제단이 된다. 번제로 드린 재위에 바로 화목제물이 얹힌다(레위기 3 : 5). 오직 장자만 만들기를 고집했고 이 세상에서 화목으로서 응답하신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는 회개했다는 조건하에 속죄제를 통해 번제에 참여할 권리를 얻는다(레위기 4 : 14, 23, 28) 사도 바울은 율법의 기능을 죄를 깨달아 그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저주 밑으로 데려가는 것이라고 ㅎ다. 왜 그런 주장을 하느냐 하며는 바로 진정한 할례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로마서 2 : 25 - 27에 보면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라고 되어 있다. 사도는 할례와 율법을 직접 만나게 연결시켜 놓고 율법이란 할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라고 보고있다. 즉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고것이 진장한 할례를 아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할례란 무슨 뜻인가? 자기를 죽여 언약의 희생제물에 참여하는 것이다. 자신의 혈통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할례는 마음에 하라! 는 사도의 주장은 율법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진정한 할례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할례가 제대로 성사될려면 실제적으로 그 죄인이 희생제물에 동참해서 죽어져야 한다. 과연 그 할례가 어떻게 가능한가? 사도는 그 실현을 그리스도에게서 찾는다. 골로새서 2 : 11 - 12를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을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라고 되어있다. [그리스도의 할례]가 모든 할례를 대신하기 때문에 무할례자의 오명을 벗을 수 있다는 말이다(골 2 : 13).

그러면 그 진정한 할례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가? 사도는 [세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받는 것이 참된 할례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세례가 인간에게 어떻게 가능한가? 사도는 세례의 원형을 홍해사건에서 찾았다(고린도전서 10 : 2)

사도가 이해하는 메시야직에서 자기 백성들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성사시키는 것은 존재론적 내부의 일치성이나 동질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같이 동참한 사건에 근거한다. 여호와는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통해서 자기의 뜻을 전한다. 홍해전쟁은 애굽과 모세의 지팡이 싸움이다. 그런데 그 싸움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참을 해야한다.

그래야 [군대]라는 이름에 걸맞는 태도이다(출 6 : 26 / 12 : 17). 위대한 여호와의 전쟁에 참전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지팡이를 들어 바다속에 육지를 만들었다(출 14 : 16). 거기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친히 용사가 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출 15 : 3).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전쟁]이다. 그 전쟁은 오직 하나님이 홀로 용사되시어 혼자의 힘으로만 승리을 낚아챌 수 있는 전쟁이다. 그 분 혼자의 힘때문에 얻게 된 모든 탈취물은 같이 참전한 자기 군사들의 몫으로 돌아간다(출 15 : 9).

사도 바울은 세례의 원형을 이 홍해전쟁사건에서 찾으므로 세례가 가능해질 만큼 완벽한 구원사역에는 반드시 최종 승리자의 최종 업적이 수반되는 경우에 한함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 근거로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하여 모든 참전자와 용사 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거하는 공간을 마련한 것을 이스라엘 구원의 최종 모습으로 간주한 출애굽기 15 : 17 - 18의 [성소] 개념이 그 사건을 통해 보여지기 때문이다.

사도는 현재 예수님의 위치를 [주]의 위치로 보고 있다(빌립보서 2 : 11). 그 주의 위치란 역사적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적들을 결정적으로 물리친 업적이 있어야 앉을 수 있는 자리이다. 사도는 정말 궁극적인 구원의 최종 모습을 갖추려면 백성들과 주님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즉 성소가 마련되어 있어야 된다고 본다. 따라서 홍해사건을 세례사건으로 이해한 사도의 신학적 선입감속에는 이미 예수님은 주의 영광된 자리를 확보해 놓고 있기에 제대로 된 세례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구원사역의 과정으로서의 연합이 아니라 마지막 승리를 축하하고 영광돌리기 위한 최종적 신분으로서의 연합이 이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홍해사건에서의 전쟁의 마당은 구름기둥과 바다속이었는데 지금에 와서의 전쟁의 장소는 어디인가? 이 물음은 곧 성도는 어떤 상태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과 삶을 승리자와 힘께 공유된 체험을 할 수 있느냐라는 물음과 같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성령]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승천하신 주님께서 백성들과 자기가 연합하도록 보낸 [주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성도로 하여금 [여호와 전쟁사역]으로 각인된 그리스도적 인상을 성도 그들의 모습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일하신다. 그래야 예수님이 하신 기능이 단지 예수님만이 하신 메시야적 기능이 아니라 이제는 전쟁에 참여한 성도들의 기능이 되어서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의 부산물을 공유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활동범주를 흔히 종전의 신학자들의 의견들처럼 신비로운 존재론적 유기적 연합에 두지 않고 메시야적인 지속적 활동성과 기능성에 두는 이유는 예수님이 계속해서 주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존재론적 완성체라서가 아니라 구약에 언급된 하나님과의 계약활동의 최종적 성취성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령의 활동은 항상 계약중심이다.

구약에 언급된 그 사실들이 신약에 와서 실제적으로 그 성과를 보여야 한다. 구약이 존재론적이 아니라 지상과의 부단한 관계속에서 여호와되심을 보여주었다면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 : 8 - 10에서 신약에서의 성령의 위상 기능을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 보고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한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 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끝부분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실 수 있다]는 그 구약적 근거는 무엇일까? 홍해전쟁의 끝부분과 비교해보자. 출애굽기 15 : 17 - 18에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홍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리다]. [영원무궁]한 것은 이 세상에서 오직 [여호와 전쟁]의 부산물인 [주의 성소]뿐이다. 성령께서 주께서 애써서 일구어낸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영원무궁한 성소를 만드는데 참여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은사로 내려오셨다. 그래서 만든 것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다(엡 2 : 22). 그 속에 이미 세상을 향하여 전쟁을 벌리시고 이미 승리한 댓가가 위력과 능력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모든 것이 이것을 중심으로 통합될 뿐이다(에베소서 1 : 10). 모든 것은 그 교회의 머리되신 분에게 복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에베소서 1 : 20 - 22). 그 복종시킵으로 인해 교회는 만물안에 충만케 된다(에베소서 1 : 23). 사도 바울이 보는 부활이란 단순히 나사렛 예수님의 소생이 아니라 승천까지 되어 주의 자리에 등극된 그 상태로 보는 이유가 바로 이런 구약적 근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그 안에서 반드시 주의 능력과 위력과 메시야적들 기능들을 수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성령의 세례]라는 용어만 채용하다가 덧붙인다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또 [세례]란 세례주는 자와 세례받는 자의 존재적인 구별에 강조점이 있지 않고 그 둘이 함께 하여 어떻게 구약의 언약을 성취시키고 있느냐가 본질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교회라는 개념을 기능적으로 파악한다. [성소] 또는 [거룩한 성전] 개념을 언급할 때도 반드시 십자가 사역을 거론하기 위해 부르심을 입을 때에는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다. 그들이 할일은 무엇일까?

뭔가 더 거룩한 일을 추가하는 일인가? 아니다. 오히려 [지킴] 에 관한 일이다. 이미 완성된 것에 대한 지킴이다. 모세가 받은 사회법이 [이웃환대법]이나 [약자보호법]이 그 자체로서 의의가 있는게 아니라 [너희들이 어디에 있었다가 어떻게 이곳 약속의 땅에 들어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신앙고백의 형태로 실시되어야 될 법이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였기 때문이다(출애굽기 22 : 21 - 24). 따라서 국가 이스라엘 내부에서 움직이는 모든 움직임은 [애굽에서 종되었던 그들을 이끌이 내신 여호와의 자비]를 쳐더 보는데서 신앙적 구원의 의의가 있다.

사도 바울이 밝히는 성령의 교회를 향한 사역은 그리스도의 [종의 형체]로 인해 야기된 [약함]속에서(고린도후서 13 : 4) 어떻게 해서 주의 자리까지 등극하셨냐에 대한 그 증거물로서 지상에 세우는 데 있다. 이 일을 위하여 교회는 국가 이스라엘처럼 [부르심을 입어 거룩한 성도]가 되었다(고린도전서 1 : 2). 교회가 환란중에 기뻐해야 하고 자기를 비워야 하고 육체의 소욕을 죽여야 하고 어찌하든지 십자가로 자기를 몰아넣어야 하는 이유가 이미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기 때문이요 땅에서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골로새서 3 : 1 - 3).

성령을 보내사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이유는 교회가 그냥 종교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버텨내는 능력을 덧입혀주고자 하는데 있다. 꺽어도 꺽이지 않는 교회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내용으로 하는 지상의 [아들의 형상]이다. 따라서 성도가 지상에서 겪는 고난이나 환란은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사역을 대신하거나 추가하거나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것]이 구분되어야 하듯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것]의 사역도 구분되어야 한다. 성도의 사역은 계속해서 하늘의 그리스도께 의지하고 복종하는 자세를 취해야 하고 이미 완성되었음을 누리는 신앙고백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 높이를 날마다 더해나가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자기의 고난의 의미를 거기에다 더 보태는 것은 허용되지 안는다. 여기서 사도가 보여주는 독특한 죄의 개념이 등장하는데 죄란 자기 의를 고집하는데 있다.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지 않게 하는 행위이다(로마서 1 : 21 / 10 : 1 - 3).

그러면 성령께서는 뭐하시는가? 따로 임의의 추가할 메시야적 사역이 있는게 아닐까? 왜 성자만이 독보적으로 승천할 자격이 있는가? 성령님은 하나님의 고유 계획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다 완성된 것으로 보고 계신다. 따라서 성령님이 지상 사역에 개입하신 것도 독자적인 입지에서가 아니라 메시야적 사역의 지속성을 위해서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모든 성도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성령께서 그런식으로 고집하고 간구하고 또 활약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더불어 그 형제들로부터 아바 아버지라고 부름을 받는데 있어 그 [아들됨]의 근원을 예수님의 사역에 두고 있음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그것을 아버지의 뜻으로 보고 합세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목표로 잡은 그 [아들의 형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을 두고 말할까? 나사렛 예수님이 사셨던 사회적 환경을 두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문화적 배경속에 그후의 인간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아들의 형상]을 어디서 찾는가?

그것은 이미 승천하셔서 주의 자리에서 영광을 지니신 [그 아들]에게서 찾아야 한다. [영광스러운 하늘의 육체성]이 성령활동의 목표이다. 하지만 성도는 [종의 형체]를 지니고 땅에서 산다. 어떻게 이 지상에서 [하늘의 영광]을 반영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 대한 실마리가 고린도후서 3:1-18에 나온다. 내용인즉, 복음이 갖고 있는 영광을 옛 율법기능의 영광과 연관시켜 밝히고 있다. 사람을 죽이고 정죄하는 기능을 지닌 것은 모세가 들고온 율법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 그런 기능을 하기 위해 내려온 모세를 사람들은 마음놓고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찬란한 빛이 반사되어 비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수 없이 모세는 그 기능을 수행하면서 얼굴에 수건을 쓰야만 했었다. 사람을 정죄하는 소극적 기능을 하는 율법의 영광도 이정도인데 만약에 사람을 적극적으로 살려내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복음을 만약에 직접 하나님께 받아 인간앞에 등장시킨다면 누가 과연 그 앞에 설 자가 있겠는가! 사도 바울은 이미 자신의 복음사역의 영광성을 승천하신 주님의 영광성 그 자체로부터 온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3:1-3). 마치 모세 경우처럼.

그러나 해결책이 있다. 그 해결책은 다름이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과 마주 대할때는 모세가 수건을 벗었다는데서 핵심이 있다. 만약에 성도가 주께로 돌아선다면 꼭 수건없이도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주의 영]이 수건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에 동원되는 성령의 역할을 사도는 [자유함]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죄악된 육체가 받는 영광에 대한 피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자유를 말한다. 율법안에서는 이런 자유함이 없다. 그러나 주의 영이 계신 곳에서는 비천이 영광과의 접촉이 가능하다. 여기서 사도는 자신과 성도 전부를 모세와 그 이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렇게 끌어올릴 수 있는것도 주의 위치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보고 있다. 바로 성령이 하는 일은 모든 방침이 주님 선에서 이미 결정된다는 그 흔적과 증거를 지상에 남기기 위해 열매를 맺히는데 있다. 사도는 [첫열매]라는 구약표현을 서슴치 않고 도입한다. 구약에서의 여호와의 사역은 반드시 첫 열매가 있기 마련이다. (예레미야 2:3). 첫 열매란, 여호와께서 일을 성공리에 마무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필연적 귀결이다. 사도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면서(고린도전서 15:20) 동시에 우리가 거기에 귀속되기를 바라고 있다(고린도전서 15:23). 주님께서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다(고린도후서 1:22/ 5: 5).

위와같이 성령께서 자체적으로 어떤 메시야적 삶을 제공하지 않고 이미 메시야되신 주님께 성도들이 철저하게 귀속되도록 조치하는 일만 하신다. 이것을 봐서 성령께서는 오직 [주의 영]으로만 일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 이외에 더 보탤 그 어떤 메시야적 기능을 성령을 비롯하여 다른데서 또 찾아서는 아니된다. 그리스도론적 성령론은 성령론적 그리
스도론을 배격하고 있으며 성령의 존재 의의도 메시야적 활동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사도가 밝힌 성령의 처신이며 그 모든 처신은 이미 구속사역의 완성체로 승천하신 그리스도론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4) 다윗언약에서의 메시야직과 그리스도의 승천

그리스도가 반드시 [다윗혈통의 자손]이어야 될 필요성이 어디 있을까? 아브라함 혈통들 가운데서 유독 유다혈통만이 메시야 혈통으로 결정지어진 것은 다윗 개인의 운명이 아브라함 언약의 모든 진수를 집약되게 한 시점에 서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면, 가나안 땅 10족속에 대한 정복이 마무리되면 아브라함 언약은 성취가 된다(창15:18-21). 예루살렘성이 여부스 족속의 중심지임을 감안할 때(사무엘하 5:6) 이들에 대한 정복은 결코 다윗의 자질에의한 것이 아니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주어진 결과이다(삼하5:10/ 심싱17:45).다윗은 그 [만군의 여호와]의 군대에 불과했다. 그래서 다윗은 이해하기를 이스라엘이 치르는 전쟁은 여호와께속한 것이다(삼상 17:47). 다윗의 이러한 관점은 이스라엘의 본질에 서서 보는 관점이다. 만약 이러한 시각을 갖지 못하게되면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이스라엘에서 이탈된다.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라는 것은 여부스 족속의 정복과 더불어 그 지역 정복이 무엇을 보여주는 정복인가 까지를 내포해야만 진정 성취이다. 그것은 여호와에 대한 정복이기에 오직 여호와께서 땅의 주인이 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왕으로 등극되는 최종적 모습을 띄어야 한다. 이것을 알고있는 다윗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를 축하하기 위해 여호와의 존재로 인정되는 법궤를 예루살렘의 왕자리에 앉히고 자신은 단지 그 진정한 왕되시는 하나님을 모시는 제사장 역할에 들어가겠다고 예복을 입는다. 이는 창세기 14장 소돔전쟁에서 사렘왕 멜기세덱이 제사장 위치에 있는 것을 감안한 처사였다. 참으로 아브라함 언약의 하나님을 섬긴다면 멜기세덱같은 위상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다윗은 한걸음 더 나아가 최종 정복자 여호와를 영원히 모시기 위해 거처를 마련하겠다고 하나님께 제안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완곡하게 거절했는데 여기서 아브라함 언약의 진정한 성취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어떤 식으로 여호와께서 계속해서 영원히 이스라엘의 왕으로 행사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지상에서의 자기사역에 대한 완벽한 승리와 성공을 어떤 모습으로도 남기는데 있다. 그것은 자신의 통수권을 다윗과 그 후손에게 위임시키는 형식이다. 이 시도는 백성들의 비언약적 의도에서 왕제도가 도입된 후 최초의 왕인 사울왕을 하나님이 친히 선택한 왕인 다윗왕이 등장하여 부정해 버렸다는 점에서 납득이 된다. 이 왕은 결코 백성 기준의 왕이 아니다. 또 이는 베냐민 가문과 유다 가문과의 쟁투이기도 했다. 한 가문이 전체 가문을 대신하여 언약 국가를
지배하고 이끌어 나간다는 것은 여타 가문이 한 가문의 행위에 예속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왕제도를 반대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모두 참된 왕이신 여호와에게만 예속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책임에 대해 전 지파에게 문책하는 의미에서 베냐민 지파를 대신하여 등장된 유다지파 속에 전 지파를 예속시켜 버렸다. 원리 이스라엘은 전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출 4:22). 아들 혹은 장자(맏이)란 아버지의 심정을 표현할 수 있는 자라야 한다. 지상에서 전쟁이 일으킬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를 이스라엘이 함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다윗때 와서는 다윗혈통만이 여호와의 의도를 제대로 아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다. 이것을 소위 [다윗언약]을 통해 고정화 시켜버렸다. 그 내용은 여호와께서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고자 다윗의 제안처럼 백성들 속에 거하시는 공간을 마련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거처 마련이 다윗이 생각하는 형식과 다른다. 그것은 다윗이 지어주는 것이 집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먼저 지워진 집인데 그 집은 다윗가문에 속한 어느 한 후손이 제대로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언약을 맺었다(사무엘하 7:11-14). 그 후손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따라서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는 것은 다윗의 혈통 중 누가 하나님이 거하실 영원한 집을 제대로 지어 드릴 수 있느냐하는 것이 관권이다. 하나님은 바로 [자기 아들] 속에만 거처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다윗언약만으로 하나님은 지상에 비로소 제 모습을 백성들 앞에 드러내실 것이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1:2-3에서 밝혔듯이, 그리스도는 반드시 [다윗의 혈통]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가 유다지파의 인물이라는 것을 어디서 확인했을까? 사도행전 22:8에 보면, 사울이 다메섹으로 내려가다가 승천하신 메시야를 만나게 된다. 그 때 사도 바울이 제일 먼저 궁금했던 것은 이 지상에서 누가 메시야 자리를 이미 점령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주는 누구십니까?] 주를 보고 누구십니까 라고 물어야 될 사도 바울의 궁금증을 이해해야 한다. 그때 하늘에서 나온 답변은 [나는 나사렛 예수이다!] 였다. 사도바울은 그때까지 핍박해야될 적으로 간주했던 그 당사자가 바로 이미 메시야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나사렛 예수님이 다윗 혈통의 유다지파 사람이라는 사실을 메시야직의 완성과 연결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변심하기 전,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박해할 때에도 여전히 나사렛 예수님을 그들 제자들이 다윗의 자손으로서 메시야임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 제자들의 주장을 자기이해로 받을 수 없었을까? 그것은 사도 바울 본인이 나사렛 예수님의 그리스도됨 승천속에서 확인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로 보건데 사도가 이해하는 승천신학은, 예수님의 단순한 희생소식으로만 나사렛 예수님의 그리스도됨을 인정하는데 미흡할 것이고 그분의 승천까지 연결시켜야 제대로 그리스도됨이 완성된다고 보고 있다. 사도는로마서 1:3에서 계속 말하기를 예수님의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되시는데 또 다른 증거를 제공한다. 그것은 [성결의 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았다고 했다. 이 두번재 [성결의 영]이라는 대목은 첫번 대목인 [육신]과 대비하는 표현이다. 즉 여기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단순히 [죽은 육신]과 [산 육신] 의 연결로만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성결의 영] 즉 [성령]의 작용으로 해석해야만 제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육신]의 형체에서 [성결의 영]의 형체 위치까지 이끌려야 제대로된 부활이며 이런 부활이 있어야 다윗언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구약 [다윗언약]에서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몸의 변신은 어떤 식으로 소개되어 있나? 다윗이 인간왕으로서 한계를 느끼게되는 사건이 하나 나온다. 그것은 밧세바 간음사건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지은 다윗의 자기 고백에 보면 다음과 같은 귀절이 나온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편 51: 5). 이 말은 자기의 간음행위를 단순한 우발적인 실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는 자기 한계를 보여준다. 이스라엘 왕의 위치에 있는 자로서의 죄악이란 이스라엘 운명과 연결된다(사무엘상 12:14-15,25). 왕 자신의 치명적인 범죄에도 불구하고 암몬군대로부터 승리를 가져온 것은 누구 때문인가? 다윗은 그 덕을 자기로부터 억울하게 죽어간 신하 우리아의 희생 덕분으로 보고 있다(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시편 51:8). 여기서 말하는 [꺾으신 뼈]란 결코 동물 희생제물을 두고 말하는게 아니다. 시편 34:20 참조.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고백하듯이, 시온성의 안전이란 자신의 군사력과 선행이나 제사제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와 긍휼에 의해서 유지됨을 알았다. 이러한 긍휼과 자비는 [주께서 꺾으신 뼈]를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시켜 성사시키는 과정의 결과로 주어진다. 그렇다면 다윗언약에 의한 이스라엘 왕의 자리는 무엇인가? 오직 자비를 아는 자리요 긍휼을 아는 자리에서 위상을 갖추어져야 한다. 다윗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자기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회개하는 상한 심령]이다. 유다지파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것은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아는 자리에서라고 선택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제공하고 긍휼을 제공할 수 밖에 없는 근거를 제공한 희생의 자리에는 누가 등장하는가? 다윗의 때에는 이방사람 우리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마태복음 1:17에서 ~에게서라는 표현방식이 도입되는 과정 앞에서는 반드시 여자가 등장하고 또 여성 그 본인의 이름이 거론되는데 유독 밧세바 자리에는 밧세바 대신 [우리아의 아내]라는 표현이 등장됨을 본다. 이로 인하여 마태복음의 저자는 14대 14대 14대로 족보를 나열한다면서 실상 14대 15대 14대로 기록해 놓고 있는 것이다. 즉 솔로몬을 다윗의 후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아의 후예로 보면서 혈통적으로 따져 계산에서 1대를 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사람의 희생이 주는 의미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체의 한계를 고발하는데 있다. 계속해서 이방사람의 희생이 동원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언약에 의해서 영원히 이스라엘에게서 자비를 제공할 수 있는 참된 제사장은 어디서 오는가?

여기에 대해 우선 시편 76:1-3을 보자. [하나님이 유대에 알린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끼치셨도다]라고 되어있다. 여기에 나오는 지명 [살렘]이 지칭하는 점은 무엇인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결코 지상의 예룻ㄹ렘이 아니다 라는 점을 하나님은 유다국가에서 알리고 있다. 그러면 어디서 유다를 도와주면 다윗언약이 이루어지며 자비와 긍휼이 내려지는가? 시편 110편에서 선지자 다윗의 입을 통해 밝혀진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 다스리소서-중략-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니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여기에 보면 [다윗언약의 영원성]은 결코 유다지파를 따라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유다지파와 전혀 별개인 멜기세덱지파를 따라 이루어진다. 그런데 멜기세덱지파란 전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과 상관없다. 그런데 그 지파를 따라서 강림하시는 분이 진정 이스라엘의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분에 의해서 모든 것은 여호와 전쟁을 통해 평정된다. 유다지파란 바로 이 사실을 담고 전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영원함이란 더이상 다른 제사장이 필요없다라는 뜻이다(히브리서 7:23). 다윗언약은 그 영원한 제사장의 손에 의해서 완성될 것이다. 다윗언약에 의하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는 솔로몬의 지은 성전이 아니다. 그 성전은 인간들의 죄로 인해 무너지고 부서져야 될 성전이다(열왕기상 9:6-9).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혔을 때에 그들이 지은 성전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그 처소도 붕괴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언약은 취소되는 것인가? 과연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를 마련할 [하나님의 아들]은 나타나지 않는 거서인가? 에스겔 선지자의 말을 통해 보면 새로운 성전은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만 건립된다. 이것은 인간의 그 어떤 노력과 수고도 허용치 않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기대는 이제 종결된 것이다. 인간의 오염으로부터 철저하게 무관한 [성결의 성신]에 의해서만 성결된 성전이 건립된다. 그 구별되고 거룩한 성전안에서만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신다(에스겔 48:35의 여호와 삼마/ 출 29:46). 특히 에스겔이 말하는 성전은 죽은 뼈에서 새롭게 생기를 얻은 자들에 의해 구성되는 성전이다(에스겔 37:25-26). 왕과 [하나님의 신]의 만남은 왕, 즉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하나님의 신]에 의해 주도되어 사역된 그 업적을 담고있는 모습으로 등장된다. 그것이 영광된 신의 모습이다(에스겔 1:28).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메시야 사역의 마지막 모습을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깨끗한 성전의 등장에 두고 그러한 성전을 설립할 수 있는 능력자가 바로 참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로 보고 있다. 메시야의 죽음을 참된 성결된 성전을 이루는 필연적 과정으로 보는 이유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성결된 성전을 이룰 수 있다는 에스겔의 예언에 충실을 기하기 위해서이다. 죽으심과 영광된 영의 모습 사이를 대비하면서 그 속에서 사도는 다윗언약에 의한 참된 [하나님의 아들]사역을 발견한 것이다. 즉 초월적 인물로 이어져서 결국 성결된 영으로서 제 역할을 마무리하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하나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승천하신 초월적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만났기에 나올 수 있는 승천신학이다.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수님의 승천

예수님이 지상에서 마지막 보여주신 모습은 승천이다. 승천이 어떤 의의가 있느냐 하는 점은, 승천 그 다음 사건을 무엇으로 장식하느냐와 연관있다. 승천이 원인이 되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사건이 그다음 사건이라면 승천의 의의는 그 사건 안에서 확인된다. 만약 승천과 그 다음 사건인 성령강림사건이 무관하다면, 성령강림은 예수님의 승천사건 없이도 가능함을 보여야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는 누가복음에 보게 되면 성령강림은 반드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셔야 가능한 일이라고 언급하고 있다(24:49). 그렇다면 예수님의 승천은 성령강림을 성사하기 위한 필연적 수순이었다. 따라서 성령강림의 의의를 통해 예수님 승천이유를 알아본다.

왜 예수님에게는 성령강림이 그토록 요긴하고 반드시 성사되어야 될 일인가? 성령강림이 안되면 무엇이 누락되고 미흡되는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있어 성령강림은 성령세례를 위함이다. 누가복음은 성령의 활동을 구약에서 예언된 언약들을 성취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 언약들은 범죄하고 합당한 열매를 맺혀드리지 못함에 대한 단호한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로서의 언약이다. 성령의 예언에 의해 출생된 예언자 요한은 구약 선지자의 맥을 이으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다가올 그 무서운 진노의 심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회개하고 물세례를 받으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무작정 있으면 장차 올 무서운 불심판을 거쳐서 지옥불에 던져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세례 요한은, 심판시기를 준비하는 의식으로 보고 있다. 물세례는 회개하면서 장차 종말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라는 증표이다. 장래의 심판은 알곡과 가라지로 구분하는 작업을 통해 마무리 될 것인데, 거기에 필요한 세례는 성령세례와 물세례이다(눅 3:16). 그러면 왜 심판때 세례라는 것이 필요한가? 세례요한에게 있어 세례란 [뭔가에 의해서 뒤집어 씌움을 당하는] 형식을 두고 말한다.

물세례란 바로 [물속에 수장]되는 것을 말한다. 불세례란 불속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의 성령세례란 성령께서 하고 싶어하는 일 즉 언약완성(눅 1:73-74)사역에 참여하여 일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 언약완성시기가 바로 종말의 시기요 심판의 시기이다. 최초로 성령세례를 받은 분은 예수님이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을 때 그분에게 사명이 주어진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은 예수님은 마리아가 찬가하면서 예언한 것처럼 언약을 성취해 나가시는 길로 나서신다. [교만한 자를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눅 1:52-55)

성령세례를 받지 아니하면,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도저히 하실 수 없는 일을 성령세례를 예수님이 받았기에 본격적으로 하실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 일을 통해서 이미 종말은 시작이 되었다. 세례요한의 물세례가 종말을 대비한 세례라면 그 물세례가 성령세례와 결합됨으로 심판활동이 물세례적 범주안에서 이미 개시된 것이다. 예수님의 물세례는 세례요한이 시행한 세례행위에 대해서 언약완성(의의 산출) 측면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뿐만 아니라 그 세례에 동참하여 같이 동참한 그 회개한 자들에게는 언약완성의 실체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데서 동기를 찾아볼 수 있다. 언약이 완성될려면 심판이 시행되는 가운데 구원활동이 하나님의 은총만으로(선택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행 2:39). 예수님이 물세례에 참여함으로 죄사함을 받을 자로서 하나님의 심판행위를 거치게 된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내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누가복음 12:49-50)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가 받을 세례]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시련을 두고 말한다. 그러너데 그것을 왜 세례라는 형식을 통해서 표현하시는가? 분명 예수님은 세례를 주시는 분이요 행사하시는 분이지 받을 분은 아니시다.

 

그럼에도 [받는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자신이 현재 취해있는 신분이나 역할상 세례를 받아야될 입장에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받은 세례는 오직 물세례밖에 없으며 이 말은 곧, 자신이 당하는 시련은 예수님 자신이 받은 그 물세례를 함께 받은 자들의 [죄씻음]과 연류된 시련이라고 볼 수 있다. 심판하는 자로서, 한편으로 심판받는 자가 되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시는 그 심판의 기준이 자기가 받는 심판에 의해서 새로이 조성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언약이 완성되어야만 비로소 나올 수 있는 [심판의 근거]로서의 의가, 회개한 죄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쪽으로 성령께서 예수님을 인도했다면 이것이 곧 언약완성의 유일한 길인 동시에 의가 되면서 새로운 심판의 유일한 근거로서 제시된다. 심판이 이루어질려면 의를 가득담은 심판자가 그 의를 지상에 쏟아부음으로써 세상은 견디지 못하고 그 심판의 정당성에 굴복하게 된다. 마리아가 예언하면서 부른 그 찬가의 내용은 이제 새로운 각도로 인식되는 [미천한 자]와 [교만한 자]로 분류된다. [미천한 자]는 단순히 경제적으로 상대빈곤에 빠져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을 알고 회개에 동참한 자가 되고 교만한 자는 반대로 회개가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된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사도행전 2:38). 세례요한의 물세례가 [그리스도의 이름]의 물세례로 의미가 바뀌면서, 회개하고 세례받는 자의 입장을 전에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받을 때 성령이 임했던 그 입장속으로 흡수하고 있다. 그때 받은 능력은 의를 생산하기위한 언약완성을 위한 능력이었다면 성령을 선물로 받은 성도들의 능력이란 이미 성취된 의를 가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작업에 나설 수 있는 권능이다. 사도행전 1:5에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되지 못하여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이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심판주가 되심을 보이는 증인으로 삼고자 하는데 있다. 즉 성령세례란 신분결정에 목표를 두기보다는 어떤 구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일꾼됨에 목표를 두고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이때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을 일축하시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새 임무를 부여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사건은 예수님이 실제적으로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사건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함께 딸려 올라갈 필요가 없다. 그래서 천사들이 와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다구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순절 성령강림은 결국 예수님께서 주의 자리에 등극하여 그 기준과 수준에 의해서 심판이 행사된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의의가 있다. 제자들이 관심있는 [이스라엘 회복]은 그들이 권능으로 행사하는 심판작업 속에서 [어찌할꼬!]라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져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요엘의 예언인용은 종말이 되어야지만 나타나는 징조이다(요엘 2:31-32). 종말이란 바로 심판이 진행되는 기간이다. 누가복음 24:44, 47-49 에는 다음과 같이 성령 세례에 의미를 주고 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를 촉구하는 작업이 예루살렘부터 시작하여 모든족속에게 이루어질려면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 약속된 능력(성령)을 위에서 예수님이 보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회개를 촉구하는 그 메세지의 내용은 바로 [예수님의 승천]에 있다. 문제는, [예수님의 승천]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어떻게 회개를 독촉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 내용이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단순히 개인의 윤리성이나 경제정의구현이나 균등한 삶의 보장 같은 것이 회개의 촉구내용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만이 회개의 촉구내용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만이 회개의 밑거름이 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나사렛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시면 유대인의 심판주가 되는 동시에 이스라엘 왕이 세상의 심판 주가 된다는 언약내용에 따라 구성된 논리이다. 이스라엘은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고 믿고 있는 민족이다. 즉 [주]의 존재 자체로서 구원과 언약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통해서 성립된다. [주의 이름]이 기념되고 경배되고 구원주로서 의지의 대상이 될 때만 관계가 정상적이다(출애굽기 20:24). 이스라엘인드러에게 하나님은 추상적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이름을 가질 떠ㅐ는 지상에서 구체화되는 것이다. 물론 그 구체화되는 이유는 타민족의 우상들과 전쟁을 치루기 위한 조치이다. 그들의 신들은 이름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하나님의 이름]이 언약을 따라 이스라엘속에 어떠한 모습을 한 인격으로 동거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 남겨진 비밀이었다. 참된 하나님은 오직 그 인격적 [이름]으로만 알 수 있다(요 17:6). 사실상 그동안 [하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소외당하고 모독받고 주술적으로 남용해서 더럽혀지기도 했다(이사야 52: 6). 모든 민족들이 여호와를 두려워하게 된다(시편 86:9/ 102:16/ 에스겔 23:49/ 24:24,27/ 25:7, 17 / 26:6 / 28:24,26 / 29:16,21 / 30:26). 그런데 이런 앎이 모두 심판가운데 행사된다는 것이 구약의 예언이다(출9:17). 하나님의 현존은 이러한 언약적 심판을 행사하시는 그 인격의 이름안에 계시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도 그 심판행위속에서 이루어진다.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다고 베드로는 강변하고 있다(행 4:12). 이러한 주장을 마음껏 베드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신 그분을 언약완성의 차원인 [주]의 자리에 앉혀있다는 믿음때문이다. 그러면 베드로는 옛언약안의 어떤 논리에 준하여 예수님이 주가 되어써다고 하는가? 베드로는 다윗이 예언한 대목부터 이론을 전개한다. 그의 예언에 의하면 장차 그리스도로 올 사람은 븐드시 죽음의 자리에 머물 수 없고 육신의 썩음이 발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행 2:27,31).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수님의 인격을 규정하는데 결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다윗의 예언 가운데 주의 위치의 변화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 두개를 가지고 예수님의 위상을 그리고 있다. 처음 메시야의 위치는, 하나님을 자기 우편에 두는 위치이다.[내가(예수) 항상 내(예수) 앞에 계신 주를(여호와) 뵈었음이여 나(예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여호와) 내(예수) 우편에 계시도다] (행 2:25). 여기서 말하는 [요동치 않게]라는 것은 확고한 자리 확보를 위하여 죽음과 음부로부터 피해를 보지않게 하신다는 것이다(행 2:27-28). 육체가 썩어지는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게된 이유는 능력의 여호와(주)께서 내(예수) 우편에 계셔 보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부활이후 예수님의 위치는 어떤 예언에 부합되게 변신되나? 사도행전 2:34-35에 보면 [주께서(여호와) 내(다윗) 주(예수)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여호와)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 예수님 자리에 다윗이 낄 수 없는 이유는 다윗은 아직까지 음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하실 일은 고정되게 된다. 그 고정된 일이란 전에 하나님께서 예수님 오른편에서 하셨던 일 바로 그 일이다. 즉 하나님이 [주의 이름]을 의지하고 부른 백성을 더 이상 죽음과 음부에 방치하시지 않고 살려서 주와 함께 세상을 통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주에 관한 사항들이 빠짐없이 빈틈없이 일관성이 있고 순조롭게 반드시 마무리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부르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지자 요엘의 예언에 의해서 주의 자리에 앉은 예수님이 할 일은 두가지가 된다. 하나는 성령세례요 또다른 하나는 불심판이다. 베드로가 성령세례를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 남은 작업 즉 불심판은 누구에게 떨어지는가? 분명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은 것은 원수에 대한 보복이며 그의 불심판도 원수를 겨냥한 임무수행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원수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들은 주의 증인들이기 때문에 주님의 원수에 대하여 언급해야만 하고 또 그래야 그 고발로 인하여 회개도 촉구된다. 그 원수는 바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해 모든 시도를 아끼지 아니한 자들이다. 그들이 그런 짓을 하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었다.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불충성이요 모독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런 동기로 해서 예수님은 죽음안으로 배척받은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등극하여 그 원수들을 정복하는데 일차적으로 성령을 보내서 종말의 현상을 통한 자신의 우상을 밝히고 그래서 앞으로 자신 주도하의 불심판이 얼마나 당연하며 정당한 것인가를 보인다. 일이 이렇게되면 일단 그당시 예수님의 살해에 동조했던 예루살렘민들이 하나님의 적이 되는 셈이다. 심판과 고발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기에 회개의 촉구도 예루살렘부터 실효성을 가진다. 왜 주님은 제자들을 보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했는가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있다. 그들이 바로 십자가 사건을 발생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주되심에 대한 일차적 모독은 그들 속에서 발생되었다. 따라서 고발의 대상이 되며, 그들이 고발의 대상이 된다는 말은, 그들이 언약백성으로 해야될 모든 사명에 대한 고발로 이어진다. 모든 민족들의 복의 근원이요 제사장으로서의 구실도 고발당한다. 이러한 중심체제 붕괴는 구약 예언서에 나타난대로 [새언약 공동체중심의 종말론]체제로 들어선다. 즉 유대나라는 타국가를 구원하기 위한 중심국가에서 인간의 죄성을 대표하는 국가로 변모된 뒤(스데반 집사의 설교의 요지가 바로 이점이다) 그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곧 반언약적 이방나라에 대한 태도로 밝혀졌다. 따라서 모든 국가들은 새롭게 등장한 새언약공동체에 태도여하에 따라 운명이 좌우된다. 구약의 예언자들에 의할 것 같으면, 이방민족에 대한 징벌과 심판은 언약의 나라에 대한 비난과 과도한 핍박이 근거가 되어 일어나다. 그 심판이 현실화 되기 위해서는 유대나라가 완전히 언약완성형태를 보여야 한다. 그런데 새롭게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으로 선택된 예수의 제자들의 모임의 등장은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도를 가졌다는 증거로서 하나님의 약속의 그 성령이 그들에게 떨어진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이방인들은 긴장을 해야 한다. 구약대로라면 이제 이방민족에 대한 심판은 현실화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증인들을 땅끝까지 배포하기 시작했다. 언약 완성에 따르는 본격적인 적용 부분에 접어든 것이다. 언약적으로 유효한 증인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주의 심판의 증인 노릇을 해야한다(행 1:8). 언제 불심판이 행사될런지는 모른다. 다만 주의 증인들이 불심판을 증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순절날 성령님은 불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는 성령세례받은 자들의 사명과 연관된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성령세례 받을 때는 비둘기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도 또한 예수님이 아들로서 해야될 사명을 말하는 것으로 언약의 완성을 기대하는 암시이다(창세기 8: 9-12 참조). 어쨌든 [주의 이름]이 예수님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단의 무리들에게 성령의 강림으로 확인된 이상 예수님의 승천은 바로 성령을 보내기 위한 주의 자리의 등극이라고 증명된다.


다. 결 론

그동안의 성경신학계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으로 모든 것을 풀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되다보니 성경자체가 말하는 이슈와 잘 조화되지 않았었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보고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때니이까?]라고 질한한 그 부질없는 질의를 지금까지도 중단하지 못한 채 그 질의에 만족시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도는 사실은 자기구워너에 집착한 종교이기주의의 산물이다. 이미 아직의 상호모순된 표현을 가지고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려 하지만 표현력의 한계만 드러낼 뿐아니라 성경자체가 [하나님 나라]개념이 중심주제가 아니었다. [하나님 나라]개념은 성경의 중심주제의 열매일 뿐이다. 그러면 무엇이 중심주제인가? 그것은 [언약]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건과 개념들은 이 [언약]을 묘사하기 위해 다양하게 동원된 재료들이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피조믈인 선택된 인간과의 맺은 언약은,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언약의 범주를 따라 행동하신다. 예수님의 승천도 성경의 중심주제인 [언약]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 승천사건이 없다면 구약은 신약때에 와서 완성이 못된다. 세례요한이 밝힌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승천해야만이 이루어질 언약완성이었다. 승천을 [하나님 나라]에 비추어서 해석할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중복되고 의미의 분리가 불가능해진다. 마치 승천사건을 부활사건에 딸린 부록으로 간주한다면 구원사건의 순차도 무시될 뿐더러 성령세례의 의미분석에 있어 승천사건이 불필요하게 된다. 부활의 의미로도 이해되는 성령세례는 잘못된 해석이 될 가능성이 많다.

끝으로 교계의 현실을 비추어 볼 때, 개신교가 다시 천주교의 꼴로 되돌아가는 이유가 [하나님 나라]=[교회] 로 보기 때문이며 여기에 대해 제동을 거는 그 어떤 신학적 근거도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몸]이 되는 것이 신학적으로 옳은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란 존재론적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새언약이 실행되어 열매가 나타나는 구원의 기관이다. 그렇다면 [교회]=[언약공동체]이기 때문에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선택행위만이 충만해야되지 그렇지 않는 단체는 아무리 위장해도 사이비 교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