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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구원에 있어 시간과의 연관성 문제 1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성경 신학 · 기타

구원에 있어 시간과의 연관성 문제 1

정인순 2011. 1. 1. 23:07

구원에 있어 시간과의 연관성 문제
2000년 8월 12일
Ⅰ. 서 론

1. 인간의 구원성
남을 구원하겠다는 사람은 필히 자기 자신이 구원받은 방식의 범주 안에서 구원을 시도하게 된다. '나처럼 구원되면 그것이 곧 참 구원이다'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남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이 과연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생각인지를 먼저 검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무지하면서도 남을 구원하겠다는 의도만은 아마 하나님 보시기에 무조건 옳은 행위로 비쳐질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기 정당함 외치고서 돌아 다니는 당돌함은 허용되지 못한다. 성경은 항상 옳은 내용만이 들어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나선다고해서 성경에 대해서 참된 해석을 내릴만한 자격자로 인정해 줄 수 없다. 그것은 설교자나 성경 해석자나 자신들 자체가 방해물로 이미 등장되기 때문이다. 본 글은 인간들이 어떤 궁리를 하기에 성경 해석을 방해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는가를 탐구한 글이다. 흔히 생각하기를, 성경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만 전하면 그것이 사도와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긍정적인 자아상이 구축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말씀 자체가 설교자 자신을 친다는 것은 도무지 인정치 않으면 늘 음흉한 삯꾼의 냄새나 피운다는 것은 명확한 귀결이다. 인간이 성경을 대하든 무엇을 대하든 이미 스스로 구원을 쟁취하려는 의지에 휩싸인채 일방적 해석을 내리는데 여기서 '시간 의식'이 핵심적인 내용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본 글은 인간의 죄악성과 그것을 놓치지 않고 철저하게 들추어주는 성경의 내용을 대비하고자 한다.


성경에 말씀하는 바에 의하면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 소관이며 하나님만이 해내시는 일이다. "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제자에게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5-26) 따라서 구원이 무엇이며 어떤 방식이 동원되는가 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 견해에만 국한되어야 한다. "인간 자신들이 행한 일이 전혀 하나님의 일에 도움은 되지 못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구원에는 차질이 없었더라"라는 고백 안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일은 실제로 없을뿐더러 그런 것을 염두에 두어서도 아니된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에 방해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거듭난 자 안에서도 예외없이 유지되어야 있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일로서만 마감됨이 거듭난 성도를 통해 증거된다. 타인이 의해서나 본인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서 구원되었다는 그런 구원은 하늘 나라에서는 구원이라고 간주해 주지 않는다. 그저 같은 지옥 안에서의 위치 이동을 한 결과이다. 구원이란 반드시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그 성령에 의한 구원은 반드시 구원 시켜 주신 주체자가 예수 그리스도 임을 밝히 깨닫게 해주신다. 모든 일은 오직 그리스도 중심으로만 움직인다. 주님의 능력은 심지어 마귀의 존재까지 적절하게 활용하면서까지 구원에 차질이 없게 하신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 4:4-5) 인간은 어느 누구 할 것이 없는 이런 능력은 없다. 따라서 인간들의 구원 시도는 모두 허사로 끝나게 되어 있다. 단순히 구원에 관한 성경 지식이나 신학 지식을 확보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다. 이런 능력은 인간에게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구원받는 것은 오직 주님의 능력뿐이다. 예수님만이 십자가 지셨기에 하나님께서 인정받는 능력으로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구원되고자 하는 모든 방법을 '지혜'라고 표현하고 있으면서도 그 '지혜'가 모두 헛것이라도 단정해 버린다.(고전 3:20) 왜 인간의 모든 '지혜'가 헛것인가? 그것은 도저히 십자가를 받아 드릴 수 없는 지혜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고전 2:6-9) 왜 받아 드릴 수 없는가? 그 십자가의 지혜는 하나님은 깊은 비밀에 속한 지혜이기에 인간의 머리로는 알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고전 2:4) 즉 사도 바울은 십자가 지혜를 논하면서 결코 인간의 지혜로부터 출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헛 지혜, 헛 십자가 사상으로 끝을 맺는 것이 확실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십자가 지혜 안에 잠겨 있으며 이 담긴 지혜는 인간이 밖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끄집어 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구원이기에 하나님이 선물로 주지 아니하면 구원은 발생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구원관은 인간의 구원관과 이렇게 확연히 다르다. 인간의 구원관은 인간의 지혜의 바탕 위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신학을 비롯한 모든 종교와 철학과 과학과 경제와 정치와 사회, 예술을 막론하고 모두를 나름대로 스스로 자아를 고통의 운명에서 해방되기 위한 구원 노력이다. 모든 고통은, 스스로 절대자가 되어 살 수 없다는데서 기인한 근원적 분통과 안타까움에서 온다. 어쨌던 이러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구원은 구원이 아닌 것과 대비되는 식으로 세상에 등장하는데 여기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다. 이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킨 인간의 구원 노력과 지혜의 본질을 분해해 보면 여기에 인간의 시간관이 들어 있고 이 시간관에 따라 '자기 행함'에 대한 규정짓기과 '평가 매기기'가 동원된다. 이 시간관에 입각한 행함 원칙으로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들을 해석하므로서 이 시대에 거짓된 구원론을 낳는다.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야 될 것이 인간 중심으로 '중심 이동'이 실시되고 있는 상태이다. 오늘날 이러한 구원적 사상이 진리적 권위를 지니고 대량으로 유포되고 있다.

2. 성경적 인식의 전환
흔히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중심 안에 여전히 선악적 인식이 살아있다면 이는 온전한 그리스도 중심이 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선한 능력으로 자기 구원에 보탬이 되고자 하지만 악한 능력이 왜곡된 그리스도 중심을 창출하여 헛된 구원성으로 이끈다. 따라서 인간 자신을 사물(thing)로 보는 입각점에서 벗어나 인간의 능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사건(event)에 의한 그리스도 중심으로 인식 변환이 일어나야 한다. 즉 그리스도 고유의 사건으로서만이 그리스도 중심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흔히들 이것은 계시의 활동, 혹은 말씀의 운동이라고 말하지만 구체적 내용은 바로 언약이다. 즉 언약적 사건이 생성되면 거기서 언약적 의미가 제공되고 그 언약적 의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용서)와 인간의 죄가 내용으로 담겨있다. 그러니까 언약적 사건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그 어떤 인간도 은혜와 자신의 죄를 모른다는 말이 된다. 자신의 죄를 모르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행위는 육체의 지혜에 준해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성도는 그렇지 아니하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늘 생명 안에서 가두어두시는데 그 들어가는 방식이 죽음이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1) 이로서 성도는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만을 밖으로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이래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증인은 순전히 성령님의 몫이다. 성령께서 성도는 날마다 십자가에 매달게 하시는 것이다.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갈 5:24-25)


문제는 이러한 언약적 사건을 인간 육체의 의식에 근거해서 나오게 되는 시간관념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자기 존재의 구원성과 영원성을 기정사실화한채 시간론이 펼쳐지기 때문에 기껏 심오한 신학은 구축될지 모르지만 그 신학이라는 것도 늘 유혹적인 육체의 지혜덩어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신학이든 언약적 사건을 유발하시는 주체자이신 성령님 자체가 아닐뿐더러 그분에게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본론에서는 이런 점을 보다 분명히 다루었다.


Ⅱ. 본 론

1. 인간들의 시간관
시간이 '있다', 혹은 '없다'라는 것은, 사물적 대상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그 존재를 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단 과학의 범주에서 배제되어야 마땅하다. 과학의 범주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더 이상 진리라고 간주할 수가 없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객관적 사물이 아닌 이 시간을 과학에서 필히 도입하지 아니하면 과학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과학이 진리로서 큰소리 칠 수 있기 위해서는 진리가 아닌 허깨비 같은 것을 가지고 체계를 정비한 후에 그 체제 안에서 논리 전개가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나중에 가서 '시간은 없다'는 식으로 도로 배척을 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아인슈타인) 일단 시간을 과학의 필수 전제 조건을 모셔야 한다는 점이 이상스러운 점이다.
과학의 이런 자세가 이상스럽게 보이는 것은 과학이 근대 이후에 모든 형이상학을 대신하는 궁극적 철학의 체제를 구축해 왔기 때문이다. 여타의 형이상학을 공박하고 공격하면서 자신 스스로 비과학적 속성 위에 건설해 왔던 것이다. 과학 시대 이전의 삶이 오늘날의 사람들 보기에 힘겹고 비위생적이고 불편해 보인다는 것은 짐작해 볼만하다. 그러나 그들이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전쟁에서의 승전보를 전하기 위하여 42,195M을 달려오지 말고 휴대폰으로 간편하게 연락하면 될 일이지만 그 때 당시의 그들은 그것이 합리적이고 달리 표현하면 과학적이었다. 이처럼 시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는 것이 인류가 생겨날 때부터 지속된 것이지 과학 시대에 와서 비로소 시작한 생활이 아니다. 단지 과학 시대에는 그 시간관념이 과학이라는 형이상학에 준해서 적용되었을 뿐이다. 이 말은 애초부터 인간이란 꼭 눈에 보이는 객체적인 사물들만 염두에 두고 관찰하면서 사는 삶이 아니다는 말이다. 인간의 생활은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마음속의 직관이 기초가 되어 살아왔다. 시간이란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간을 논하지만 인간의 마음과 의식을 논해야 마땅하다.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는 시간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사건들로 이루어진 흐르는 강물" 시간을 즉 어떤 '흐름'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사건이 과연 '흐름'이 될 수 있을까? 사건이라 것은 각기 종결점을 지니고 있는 경우에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해서 '흐름'이라는 것은 적절치 않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흐르는 강물 위에 가끔 물고기가 물위로 솟아오르면서 군데군데 물을 튀기는 자국을 남기는 그런 광경 전체를 시간으로 하면 어떨까? 그러나 강물의 경우에는 물고기를 튀어 올라오지 않더라도 전체 강물의 흐름이 한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제의 시간이란 사건의 특이성이 생성되지 아니하면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 아니면 아예 없는지 파악조차 불가능하다. 즉 태양이 규칙성을 가지고 움직이고 별과 달과 자연의 사계절의 변화와 거기에 따라 인체의 생리 현상이 호응해 줄 때 시간이라는 것이 감지되는 법이다. 삼풍 백화점이 붕괴 될 때, 그 더미 속에서 14일 동안이나 갇혔던 청년의 증언에 의하면 자기는 불과 10시간 정도의 시간이 경과된 줄로 알았다고 했다. 그 청년은 고백은 실제적 우주의 별과 태양과 달의 변화에 비추어 볼 때에 분명 틀린 것이다. 그러나 생리학적 관점에서 시간관을 출발할 때 과연 그 청년의 말은 틀린 것인가? 물론 그 청년이 바깥 세상으로 나와서는 물리적인 시간관에 따라 산다. 그러나 생리적 인간 시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변 환경에 적응할 뿐이며 다시 어두운 지하 동굴에 가서는 바깥 세상과 다른 시간관을 토로할 것이다. 이것은 그 청년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다.


인체가 주변에 적응하고 반응하는 주체성 활동성을 근원적으로 무시한 채 외부에다 요지부동의 절대적 요소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라는 것이 의문시된다. 물론 편리하다든지 많은 인류를 제대로 먹여 살리는데 필요한 대량 생산 체제를 가능케 하여 인류의 번영에 유용하다든지, 사회 유지에 있어 공동체 내의 개념의 혼란을 최소한으로 방지하는 게 필수적이다 는 말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고에 걸친 불변의 진리, 그 자체냐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태양이 과연 인류의 복지와 건강을 위하여 하늘에 떠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고 우리 중에 누가 결정했는가? 강물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흘러가는 것이 바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흐른다고 단정할 만한 증거가 어디 있는가?


여기서 인간들은 시간을 두 개념으로 나누어 설명하게 된다. 둘로 나눈다는 말은 둘 사이에는 서로 합칠 수 있는 사항이 못되며 필히 분리해야 한다는 점을 기성 사실화 한 것이다. 그 둘은 바로, 크로노스(chronos)로서의 시간과 템푸스(tempus)로서의 시간이다. 즉 기계적으로 균일화된 시간과 심리적 시간 의식으로 시간이다. 시간 개념이 이렇게 따로 따로 분리되다 보니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진리로서의 참 시간인가에 관한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즉 어느 것이 어느 것에 종속되고 어느 것이 우선적인 하는 것이다. 둘 다를 대등하게 여기고 존중해서 서로 보완적으로 다루면 된다는 것이 유용성에 있어서 상투적인 요령 같은 것이지만 참 진리를 찾아서 결정해야 하는 경우에는 이런 무책임한 발상은 결국 용납될 수 없다. 심리적 시간 의식은 사실상 과학적 시간관에 대드는 약자의 입장에 서 있다. 온 천지가 과학 천지가 되었기에 자연적으로 이 기계적 시간관만이 진리로 통용되고 있는 실정에 있다. 기계적 시간, 혹은 물리적 시간은 고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절대 세계로부터 흘러나오는 시간이다.


과학자들은 자연을 기계적이고 확정된 절대 세계로 객관화 시켜 놓고 탐구에 들어갔다. 질적으로 오직 하나의 보편적 질적으로 묶어 놓고 그 다음으로 그것을 계량화시켰다. 즉 양적으로 분할도 가능하고 결합도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다. 모두다 동일한 질적 차원에 속하도록 만들어 놓고 단지 양적으로만 크다/작다, 길다/ 짧다, 무겁다/가볍다, 진하다/엷다, 넓다/좁다 하는 식으로 가치를 규정한 것이다. 여기에 시간도 예외가 아니다. 빠르다/늦다, 동시적이다/순차적이다, 길다/짧다 하는 식으로 다루어진다. 도마 위에 물고기 몸통을 자르듯이 시간을 잘게 잘게 균일하게 자른다. 마치 좌표 위에서의 공간은 촘촘히 자르고 또 자를 수 있는 점들의 뭉치로 표현할 수 있듯이, 시간도 순간을 점으로 찍어 놓고 그 점들을 연결시켜 직선으로 시간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에 일종이란 이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강물이 흘러가듯이 인생도 시간의 강물 따라 같이 흘러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시간의 노예이며 시간의 피조물이 된다.


이러한 과학의 비정함과 냉정함에 대해서 철학자들은 반발하기 시작한다.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과학에 의해 흡수, 통합 당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칸트는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 개념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자연이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은 움직임에 있어서도 다른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움직여지고, 정지에 관해서도 다른 저항력에 의해서 제어된다. 스스로의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 어떤 합목적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진정 기계라면 인간 나름대로의 의지성이나 목적성이나 자유성이 나올 수가 없다는 본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가 생각하는 공간과 시간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직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직관은 관조가 아니다. 자연을 의도적으로 대상화 결과라는 것이다. 일종의 현상이다. 칸트가 강조하는 바는, 시간과 공간이란 신이 세계를 보는 방식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보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오성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계론적 규정을 벗어나는 자연, 우리에게 대상화되지 않는 자연은 어떤 자연인가? 그것을 알려면 인과 법칙에서 벗어나 있는 장소를 찾으면 된다. 칸트는 그 장소를 인간의 마음으로 보았다. 거기에는 주체적 자유가 발휘되고 있는 자리이다. 무슨 상상이든 가능한 장소이다. 인간은 분명 목적을 갖고 있다. 그 목적에 맞추어 자연을 대상화하고 관찰한다면 결국 공간과 시간 관념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편리와 유용을 위하여 그렇게 자연을 조직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의 원리란 자연 통제의 원리를 의미한다. 통제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연 이해의 한계도 알아야 된다. 여기서 마음의 자리에서는 사물화 될 수 없는 신까지 찾게 된다. 신의 관점에서 현 자연 통제의 한계를 알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이란 기계적 자연 세계를 넘어서는 현상이 일어나는 자리이다. 칸트 이외에도 기계적 자연관에 대드는 사람이 있다.


베르그송은 생물 주의에서 자연 과학이 출발되기를 원했다."우리에게 가장 확실하고도 또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는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자신의 존재이다"고 했다. 다른 자연 대상들은 피상적 개념밖에 모르지만(예를 들면, 우리가 원숭이의 마음을 아는가?) 인간 자신에 대해서는 내적으로 가장 깊이 자각하고 있는 바이다. 따라서 인간 의식에서부터 모든 것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갈릴레이나 뉴우턴이나 아인슈타인에 대항해서 베르그송은 심리적 형이상학을 구축했다. 직관으로 봐서 자연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창조된다. 그러나 이성적 과학론을 주창해 버리면 과학적 이성이 하는 일이란 고작 있는 바에 대해서 설명하고 원인과 결과만을 연결시킬 뿐이다. 설명한다는 것은 결국 설명해 놓고서 제거하는 작업의 반복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여기에 그 어떤 것도 새로운 것도 도출될 수 없다. 즉 자연의 생성력과 창조력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놓쳐 버리는 비실재적 결말만 쥐게 된다. 자연이 과학으로 인해 이성화 되는 동시에 점점 빈약해져 간다. 변화 무쌍한 자연의 풍성함은 이런 과학 방식으로는 찾아낼 길이 없다. 여기에, 자연 세계는 단일의 질(質)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차등의 질(質)이 있다는 것을 내세우는 자가 베르그송이다. 자연에 다양한 질이 있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아는가? 그는 직관을 내세운다. 인간의 정신은 자신을 무한히 창조하기 위해 변화한다. 정신의 세계에서는 불변의 대상이라는 것은 없다. 이러한 정신의 변화를 잡아내는 것이 직관이다. 여기서 변화란, 사물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 그 자체의 변화를 말한다. 생명력의 움직임이 정신 내부에서 발견된다. 이 움직임만이 실재이다. 이 움직임을 베르그송은 '지속'이라고 표현한다. 공간적 개념을 거부하고 시간적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칸트의 시간관 조차도 공간화된 시간에 불과함을 지적해 내고 있다. 지속이란,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창조적 활동을 뜻한다. 기계론적 과학에서 말하는 등질적 시간은 이러한 변화에 부합되지 못하고 그저 지속의 양적 상징에 불과하므로 변화를 놓치는 허구적 표현이다. 자연 세계는 예견이 불가능한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창조되고 있는 그 동적 자체가 곧 실재인데 이 실재를 담아 내는 표현이 '지속'개념이다. 일종의 시간질(質)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명체는 순간 순간 자기를 자유롭게 창조한다. 이 자유성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은 또 없다. 이 자유성으로 사물과 자연 세계를 분석해야 한다. 자연 세계에 의해 도리어 이 자유가 분석 받아서는 아니된다. 이 지속 개념이 우주에 관해서도 성립한다는 두 말 할 것도 없다. 이렇게 분석하게 되면 물질은 근본적으로 "절대적으로 나타난 바 있는 그대로이다"이다 는 점이 파악된다. 물질을 이해하기 위해 따로 과학적 인식을 재구성할 필요가 없다. 물질이란 그 내부에 신비적 속성이 따로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 바 그대로가 곧 본질이다. 주관과 객관이 일치되는 것이다. 물질은 변화의 운동의 도구가 된다. 인간 신체도 마찬가지이다. 운동의 각 기관들이 되지만 결코 각 기관들이 새로운 운동성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이 자유로운 지속성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이 자의에 의해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은 자신을 순수 지속 내에 위치해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밀려와서 미래로 흘러가는 그 지속에 의해서 늘 새로운 변화가 창조되어 일어난다. 그래서 지속에는 '현재'라는 것이 미래가 나아간다. 만약 지속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게 되면 등질적 시간관을 갖고 있는 과학자들은 그 정지점이 '현재'라고 부르게 되고 그 현재를 공간화 시켜 '동시성'으로 삼아서 거기서 가치와 의미를 끄집어낸다. 그래서 직선적 시간 사고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현재성이 주는 진리값에 따라 변함없이 살기를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이로서 베르그송은, '지속'이라는 시간개념으로부터 윤리관까지 도출한다. 자발적인 창조성의 억압하는 것이 나쁜 짓이 되는 것이다. 이 나쁜 것 중의 허구적인 기계 과학적 관점의 시간관이라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도발적으로 과학적 시간관을 공박하는 이유는, 진리를 찾는 과학 작업에서 인간이 주체로서 행사할 자격을 근원적으로 폐지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진리의 근원은 소립자의 임의성에 있지 인간의 의지나 인식론에 있는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시간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물리적으로 볼 때, 시간이라는 것이 성립하려면 물질적 변화와 반응이 가역적이 되면 안되고 비가역적이 되어야 한다. 가역적(원래대로 되돌아가 버리는 성질)이 되어 버리면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이 확실히 결과인지 아닌지 원인의 원인이지, 아니면 다른 원인으로 인해 삽입된 결과인지 알 도리가 없다. 인과론에 혼란이 일어나 버리면 과학의 주특기인 미래적 예견에 차질이 생기고 우주는 제멋대로의 우주가 되어 아예 자연 세계에 대한 일정한 원칙 잡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 진다. 한번 일어난 일은 어쨌던 미래에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아니되고 그리고 그 미래의 일은 필히 과거나 현재의 일과 관련성이 있어서 나타난 현상이어야 한다. 그래서 과거나 현재와 무관한 미래의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작업에 돌입한다. 이러한 인과론을 철주를 박아 단단히 고정하는 것이 바로 시간의식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글 수 없다"라는 의식이다. (베르그송의 의식은, "지금의 몸은 과거의 몸과 같다"이라는 관점이다. 즉 "과거는 자동적으로 스스로 보존될 수 있다"는 원리를 내세운다.) 즉 우리의 몸도 강물의 흐름도 모두 시간이라는 절대적 기준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인간의 몸이 강물과 만나서 얻는 체험은 순간마다 다르지만 시간이 일정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사실만큼은 추호도 달라질 수가 없다는 말도 된다. 아무리 먼 거리에 상호 떨어져있다 할지라도 같은 정해진 시각에 맞추어서 같이 행동을 했다면 그 행위 사이에는 동시에 일을 했다는 동시성 개념이 필히 성립한다. 이 사실은 꼭 말로 하지 않더라도 누구도 부인 못할 상식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만큼 시간만큼은 공간의 갭을 커버하고 있고 공간의 제한성에 저촉되지 않을 정도로 절대적이라는 말이다. 세계의 모든 괘종시계는 어느 나라에 있는가와 상관없이 같은 리듬으로 영원까지 똑딱거린다. 이러한 시간관 아래에서의 공간은, 시간을 매개변수로 하는 방정식들에 의해서 측정된다. 중력의 힘을 받는 공간에서의 높이는 자유 낙하 시간의 제곱이라는 비율로 빈틈없이 측정할 수 있다. 시간이 균일하게 일정 방향으로 흐른다면 이 우주 공간의 어느 미래 시점에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인지도 예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시간의 균일성을 과거까지 이어보면 미래에 일어난 일식이나 월식을 측정하는 것만큼 과거의 일식이나 월식도 측정이 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렇게 되면 과거 그 때 그 당시의 상황을 현재나 미래에 다시금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과거든 미래든, 이 현재에 다 모을 수 있게끔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시간은 아무 것도 창조하지도 않으면 아무 것도 파괴하지도 않는다. 그냥 박자에 맞춰 똑딱거리면서 진로나 표시해 줄뿐이다. 여기서 개인적인 모든 시간도 우주적인 모든 시간과 동일한 양을 가지게 되며 개인적인 시간이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따라서 물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템푸스라는 심리적 시간은 비과학적인 미신으로서 폐기 처분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오직 하나의 시간만 참 시간이 되고 나머지 개별적 시간들은 이 시간에 종속되어야 한다. 이제 시간의 양을 결정하는데 인간은 더 이상 관여치 못하고 배제된다. 정확히 균일하게 진전하는 우주적 시간만으로 만사는 명확히 이해되고 만물은 이 시간에 실려 미래로 흘러가고 있다. 예상되는 사건들을 토해 놓으면서 말이다….
독보적인 우주의 절대적 시간 하에서 자연세계는 하나의 균질화로 뭉쳐져서 변화된다. 자연도 인간도 하나로 대우받는다. 철학이나 신학이라는 이름을 앞세우면서 인간의 고유성이나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독보적 위치를 보장받고자 발버둥 쳐보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다. 이제는 과학 탐구로 인해 비로소 열려지는 우주의 참 실재성 앞에 고개를 숙이고 과학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고분고분 신비로운 지식이나 동냥 받아야 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진리 문제를 독점한 대가로 모든 변화를 다 해명해 내어야 하는 막중한 책무가 주어져 있다. 절대적 시간 원리로서 설명해 내지 못하는 변화가 없어야 된다는 말이다. 과연 모든 현상들이 과거나 현재, 미래 할 것없이 동일한 원칙으로 동일하게 적용시켜도 부합되는 결과들일까?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열역학계에서 맨 먼저 제기되었다. 시간이 한쪽 방향으로 흐르고 다른 방향으로 도로 역전할 수 없다는 사실들이 엄연히 있음이 확인되었다. 열은 뜨거움에서 차가움으로 전이된다. 열은 비가역적이었다. 과학은 이제 이 비가역적인 사실까지 절대적 시간으로 설명이 가능했어야 했다. 과연 절대적 시간은 영원토록 이어지는가? 혹시 절대적 시간이 낭떠러지를 맞이하는 것은 아닐까?


과학자들은 경험적 관찰을 통해 다음과 사실을 정립할 수 있었다. 자연계에서 물리적 질서 관계가 형성되면 결코 옛 질서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하는 점과 그리고 절대적 시간 안에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혼란도는 멈추지 않고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질적이 아니라 여전히 양적으로 해명하면서 양적 개념인 엔트로피(entropie)라는 용어를 등장시킨다. 엔트로피가 높다는 것은 혼란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뜻이요 엔트로피가 낮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더 질서 잡혀 있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엔트로피 법칙(열역학 제 2법칙)에 의하면 다시 질서의 상태로 거슬려갈 수 없기에 시간이라는 것도 일방성을 지닌 채 한쪽 방향으로만 달려간다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세상은 갈수록 무질서쪽으로 치닫는다는 것은 새로운 질서 체제에 대해서 절대적 시간관에 준한 절대적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예상치 못한 것들이 어느 순간 불쑥 나타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물질의 초기 조건을 아무리 확실하게 조사해도 그 필연적 결과물에 대해서는 장담을 못하게 된다. 절대적 시간의 범주 안에서 불안스러운 물질의 미래상이 짐작된다는 것은 절대적 시간관이 결국 무의미해져 버리는 상황을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은 물리학을 순수기하학, 다시 말해서 '역사 없는' 형태로 이끌고 감으로써, 비가역성이라는 개념을 아예 물리학에서 제거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아이디어는 소립자의 존재와 변화를 다루는 양자역학의 등장에서 기인한다. 미세 세계에서는 절대시간에 준한 절대적 위치와 운동성 실체 파악에 있어 그저 통계학적 확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여기서 한없이 쪼개고 나누어서 관찰하는 대상에서 소립자들은 벗어나 있다. 아인슈타인은 빛을 '광량자'라고 불렀는데 이는 무한히 나누어 질 수 있는 알갱이적 성격이 아니라 하나의 뭉치로 봤기 때문이다. 고유의 임의성을 잃지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립자들의 실제적 임의성과 우연성은, 엄밀성을 생명으로 물리계의 자만심을 심하게 훼손한 것이다. "확실하게 알 수 없다"를 양자역학의 결론 최종적 진리라고 세상에다 공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연성과 개연성이 적은 거시 세계에 관한 탐구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물리학의 발전은 필히 우연성과 개연성이 큰 미시 세계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기적으로, 혹은 제멋대로 불쑥 생성되는 (소립자들 무리가 마치 살아있는 개체인 것처럼 서로 의견 조정을 거쳐서, 지금 자기네들을 잔뜩 관찰하고 있는 관찰자인 그 과학자를 상대로 마치 장난치거나 내기하거나 숨바꼭질 게임을 하듯이 나타나는) 소립자의 모습을 잡아내기 위해서는 확률로 커버하는 일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동안의 원칙과 엄연히 관찰되는 사실에 대한 해석 놓고 물리계는 상당한 논란이 생겼다. 비가역성, 그 자체를 명백히 부정하는 법칙 위에 비가역성을 계속 놓아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비가역성의 손을 들어줘 버리면, 나타난 결과가 미래에 비로소 생긴 것인지 아니면 과거의 것인지 (다른 말로 하면, 엔트로피가 증가해서 나타난 결과인지 감소되었기에 나타난 결과인지)를 판정할 방도가 없게 된다. 이것이 판정이 안되면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것인지 아니면 미래에서 과거로 거꾸로 흐르고 있는 것인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아예 "절대 시간은 환상이다"고 외치면서 그런 쪽으로 정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리고진을 비롯한 다른 학자들은 비가역성의 실재성을 자연의 고유한 속성으로 지탱시키면서도 혼돈의 체계가 자조직적(自組織的)으로 진화해나간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시간은 결코 인간 가슴속에서만 일방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계와 우주 자연 세계 속에서도 동일하게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이 확인된다고 했다. 즉 우주는 다함계 어울려 동조(同調)하고 동조받는 관계로서 자체적이고 자발적인 상태에서 새로운 질서를 조성하기에 뉴턴의 주장처럼, 개인적 시간이나 우주의 변동과 무관하게 절대적으로 독단적으로 동일하게 흐르는 별도의 시간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조차도 대우주의 자연의 변화와 함께 창조되고 생성되는 진화의 결과로서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어쨌던 그 동안 존재의 안정성을 기반으로 해서 등장된 시간이 이제부터는 운동의 변화성을 기반으로 시간개념으로 달라졌다. 질적 층위에 따라 상이한 시간 이해가 가능하다는 말이며 더나아가서 시간의 대칭성을 앞 뒤 동일하게 보장해 주지 못한다. 자연은 안정적 대칭을 잃지 않는 가운데서 창조가 일어난다. 곧 무에서 유의 물질 창조는,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깨어져 있는, 숨겨진 대칭성이 겉으로 드러난 결과이다. 소립자 수준에서 탐색해보면, 전기 전하(電荷)의 대칭성과(+와 -), 좌우의 대칭성과, 전 후가 동일하게 반응하는 시간의 대칭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전체적으로 대칭성을 가지고 유지되는 원리였다. 하지만 물질과 늘 상쇄되어 없어져 버린 반(反)물질의 존재가 제기되면서 자연의 대칭성은 실제로는 도리어 전기 전하의 비대칭성과 좌우의 비대칭성과 시간의 비대칭성적 요소가 한데 어울려 도리어 대칭성을 지탱시키고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즉 이 세가지 요소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독자적으로는 절대적 불변성을 보장해 줄 수 없는 것이 물질 세계의 내막이다. 시간에 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늘 미래로 흐른다는 보장이 없다는 말이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원리는, 빛의 절대적 속도 아래서(빛의 속도는 어떤 관측자의 운동에 영향을 받지 않고 전달 속도가 절대적으로 일정하다. 그리고 빛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 동시성이 어떻게 깨어지는가를 보여준다. 관찰자가 동시적 일어난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는 일도 사실은 그것은 어디까지 관찰자 입장에서만 그러하고 다른 관찰자에 의하면 결코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 일이 된다. 즉 시간이라는 것이 속도에 따라 탄력적이라는 점이 여러 가지 점에서 드러나고 있다. 실제로 괘종 시계를 공간에서 빨리 이동시킬 때는 똑딱거리는 속도마저 늦어지게 된다. 탑 위에 있는 시계는 땅 바닥 놓여 있는 시계에 비해 빨리 간다. 중력이 시간을 느리게 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계의 속도 완화는 불안정한 기초 소립자 세계에서 큰 구별로 관찰된다. 소립자에 있어 정지하면 제 명대로 죽게 되지만 반대로 빨리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생존 기간은 길어진다. 이제 시간을 시간 자체적인 측정에 맡길 수 없다. 시간은 공간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변화와 함께 변화되며, 빛의 절대적 속도에 맞춘 역학 체제에 종속된 상태에 놓여 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시간은 시간끼리 상호 연결이 무제한적으로 가능하다는 주장은 이제 완전히 거짓이다. 늦은 시간차원에 속한 사람은 빠른 시간 차원 속에 사는 사람과 같은 동시성을 갖지 않기에 상대적으로 보다 젊게 인생을 산다. 더나아가서 한쪽에서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같은 시각에 다른 한쪽에서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 될 수도 있다. 한쪽은 과거라고 판정하고 다른 한쪽은 미래라고 어긋난 판정을 내리게 된다. 둘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그런 통일된 시간관은 절대로 마련할 수 없다. 인간들은 제 각각의 시간대를 가지고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또한 서로를 관찰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에게 있어 시간이란, 시간의 정의나 개념 구성이나 존재 여부보다는 '동시성 개념'의 상대성, 즉 자연 세계에 있어 '시간적 상대성'을 보이기 위한 매개항으로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심리적이든, 우주론적이든 '시간' 자체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개별적 의미성과 가치성은 어떤 식으로도 수립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 심리적 면으로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 우리가 놓여 있는 이 우주가 이런 우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억지로 우겨서라도 이런 물리적 우주상을 부정하고 싶다면, 빛보다 더 빠른 물질이나 입자나 있다는 것과 빛의 속도가 일정치 않다는 것을 제시한 다음에야 성립된다. 그래서 물리학적으로 봤을 때, 만약 어떤 사람이 아직도 '시간'을 개념상 현실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면 아직도 자기 의식에 자아내는 환상 속에 잠겨 있는 자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시간 개념'이 과학적으로 볼 때 유용하지 않고 활용도가 낮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객체로서 독자적 위치를 가질 수 없고 인간 의식의 일부 면으로 드러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진리 파악에 있어 시간에 의지하며 풀어 가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참으로 큰 오류이다. 물리적으로 우주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난 이 과학시대에 들어섰어도 아직도 이러한 오류는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는데 그 주된 지역은 문학계이다.

2. 문학에 있어서의 '시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인간 영혼이 자신에 대한 명상하는 위기의 순간 전후에서의 필연적인 자기 확장으로서 고찰했다. 따라서 자기가 죽는다면 시간도 끝난다. 단지 자신이 살아 있을 동안에 자기 죽음 이후까지 세계를 확장시켜서 죽어 가는 자기 자신에게 영원한 의미를 덧입힐 수 있는 사전 작업을 실시할 수가 있다. 이것이 역사의식이다. 인간은 '역사'라는 이름의 구원의 방주를 만들어놓고서 자기 생명을 거기에 위탁한 채 안심하고 숨을 거두고자 한다. 문학이란, 이 짧은 세상 안에서 마냥 즐기기만 위한 허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역사를 조립하고 정립하기 위한 가상적인 '역사 만들기'이다. 마음속에 들어있는 영혼의 확장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실제 역사화 시키는 것이 문학이다. 그러니까 마음의 상상력의 산물이니까 '허구'라고 말 할 수밖에 없지만 실증적이고 규범적 역사와 공통성을 나누면서 영혼의 확장이 진전되고 있다는 시간적 공감대가 용납 받는다면 문학은 허구적 해석이라는 짐에서 벗어나 실효성이 있다고 칭송 받는 예언자적 계열에 합류될 수 있다.


칼 포퍼가 말한 대로 어차피 역사란 없고 역사 이야기가 있을 뿐이라는데, 규범적 역사의 쇠퇴와 더불어 역사 서술은 결국 허구의 요소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고 그렇다면 허구적 요소가 담겨있는 그 시대의 패러다임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 남는다. 패러다임은 바로 원시 시대부터 인간의 기본적 요구에 상응하여 의미를 공유하기 위해 있어왔는데 그 토대는 인간성의 연속성, 즉 '시간성'이 차지했다. 예언이 곧 진리 전달의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의 존재 가치도 실제성이 농후한 시간의 내용을 제시해 내는데 있다. 시간을 어떻게 규모 있게 농축시키고 확대시키느냐에 따라 문학은 역사 안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간단한 예로 시계의 소리를 들어본다. 시계가 어떤 소리를 내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이 한결같이 '똑딱' 소리를 낸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의성어는 시계로 하여금 인간의 언어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내는 허구적 표현이다. '똑-딱'에는 두 가지의 허구성 차이를 부여된 언어가 등장하는데 물론 그렇게 하는 것도 인간 자신이다. 앞 뒤 소리가 달리 들린다는 것이다. 틀리다는 것이다. '똑'이 '딱'과 서로 틀린 글자를 사용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두 가지 다른 소리로 들리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은 '똑'과 '딱' 사이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 채 흐르고 있는 중립적 시간 의식을 상정할 경우뿐이다. 이것을 '지속'이라고 부른다면 이 지속이 시간 체계로서 간주될 때만 처음과 끝소리가 감지될 수 있다. 이 점은 '똑-딱'처럼 동일하게 반복되는 리듬 구조를 청취하는 피실험자가 그 구조 내에 간격은 정확하게 재생할 수 있지만, 리듬군 단위 사이, 즉 '딱',과 '똑' 사이의 간격은 그것이 일정한 경우에도 자동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실험 결과가 나와 있다. 똑과 딱 사이의 구별은 단순히 음성적 차이에 기인하고 있는 아니다는 이야기이다. 음성적 차이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 근원적인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대상을 받아들이면서 공간적ㆍ시간적 인식으로서 형태를 조성하고 리듬을 타는 듯한 환각에 사로잡힌다. 두 번째 소리를 '딱'이라고 구별해 부른다는 사실은 첫 번째 '딱'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시간적 구조를 즉흥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똑',과 '딱' 사이의 간격을 의미 있는 지속으로 채운다. 이 시계의 '똑-딱'을 우리는 시계가 나타내는 플롯이라고 부를 수 있다. 플롯은 시간에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시간을 인간화시킨 구성물의 한 모델이 된다. 시간은 이처럼 인간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거시적 플롯에 따라 종말론을 이해할 때도 이 가장 기본적인 '똑-딱'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똑'은 초라한 기원이라면 '딱'은 그 초라함과 같은 양으로 상응하는 미약한 최후이다. 그런데 줄거리 구성이 '똑-딱'보다 훨씬 복잡할 때는 어떻게 되는가? 가령 1000페이지의 소설을 가정해 보자. 그것은 분명 이른바 우리의 '시간적 지평' 범위 내에 있지 않으므로 경험을 체계화하여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허구적 장치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 장치들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관계된 소리 중 두 번째의 '딱'과 같은 종류이겠지만, 분명히 보다 더 효과적이고 정교할 것을 요구받게 된다. 이 장치들은 '똑'과 '딱' 사이의 간격이 도중에 사라지려는 성향을 물리쳐야 한다. 그리고 '똑'에 이어지는 간격 내에서 '딱'이 이어지리라는 생생한 기대와 함께 '딱'이 아무리 늦게 올지라도 그 안에 발생하는 각가지 일들은 '딱'이 확실히 뒤따를 것인 양 발생한다는 의식과 관계성을 치밀하게 유지시켜야 한다. 그러한 모든 플롯(구성)은 결말이 모든 지속에 부여해줄 어떤 의미를 전제하고 또 필요로 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 간격에서 단순한 시간성, '딱-똑' 사이의 공허감, 즉 인간적 흥미와는 무관한 연속성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간격은 하나의 의미 있는 때, 즉 시작과 종말 사이에 위치한 카이로스(kairos)가 된다. 그것은 심리학자들이 다루는 것보다 훨씬 큰 규모에서 그들이 '시간적 통합'이라고 부르며 현재에 대한 지각과 과거에 대한 기억, 미래에의 기대를 하나의 공통된 구성에 의해 함께 묶는 방식이다. 이 구성에 의해서 단순히 연속적이라고 간주된 것이 이제는 과거가 과거로서, 미래로서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된다. '크로노스(chronos)'였던 것이 '카이로스'(의미 있는 특정한 한 때)가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둘은 구별되나?


보통 신약 성경 사도행전 1:7에서 나타난 용어의 구분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얻으려한다. "크로노스(때)와 카이로스(시)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 알 바 아니요" 이 구절에 나오는 시간에 관한 두 표현에 대해 오스카 쿨만의 [그리스도의 시간]은 강력하게 두 구별을 극으로 몰아가고 있다. 즉 크로노스가 시간의 경과를 의미한다면 카이로스는 정해진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의도적으로 이 의미에 차별을 두고 특히 지정된 시점인 카이로스을 가지고 친히 '구속사의 체제' 형성에 나셨다는 것이다.(살전 5;1/마 26:18/요 7:6/벧전 1:5) 틸리히는 '카이로스'를 특별하게 사용하지만, 기본적으로 '위기의 순간'이란 의미로, 또는 모호하게 '시간의 운명'이란 의미로 쓴다. 어떤 경우든지 그는 그 말을 '삶의 기반이 발밑에서 흔들리는' 시대인 현대 특유의 삶의 의식과 강력히 결부시키고 있다. 그런 견해는 현대인의 철학적 탐구에서 줄곧 되풀이되는데, 그 한 예가 야스퍼스의 '한계 상황'으로서, 이것은 죽음, 고통, 죄악 등의 개인적 위기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역사적으로 결정짓는 자료들과는 관련된다. 반면에 쿨만과 마시는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를 전통적, 성서적 의미로 쓰고자 한다. 즉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시간' 또는 '기다리는 시간' - 묵시록에 의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의미가 충만한, 즉 종말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의미로 차 있는 구원의 시점이며 구원의 때이다.


방금 말한 바는 아주 극단적인 구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과거를 새로 이해하게 만들었으며, 새롭게 완성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종말'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고 종말과 관련된 과거 에서 초시간적 의의를 갖는 역사적 시점들, 곧 '카이로이'가 생겨난다. 그러한 신적인 플롯(줄거리)은 '종말'과 관계되는 '카이로이'의 패턴이다. 희랍인들뿐만 아니라 히브리인들도 이러한 대립항을 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시에 의하면. 히브리인에게는 '크로노스'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었고 따라서 "다음에서 다음으로 지겹게 이어질 뿐인" 시간과 '카이로스'와 같은 집약된 시간 사이의 대조가 없었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시대의식(현대인은 여러 시대aiones가 겹쳐진 가운데 살고 있다는 의식이 강하다)과 다른 성격의 시간들 사이의 현대적 구별, 즉 신의 시간(kairos)의 도래, 신의 시간의 완성(kairos-마가복음 1장 15절). 여러 시기의 징조(마태복음 16:2-3) 등을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와 대립되는 것으로서 보는 구별에 기초가 잡힌 것은 신약 성서에서였다. 여기에서는 완성의 관념이 필수적인바, '카이로스'는 과거를 변화시키고, 구약성서의 예표와 예언의 타당성을 확인시키고, 종말뿐만 아니라 인류의 태초의 기원과의 일치도 시도한다. 그러므로 '크로노스-카이로스'의 구분은 현대의 일부 신학자들의 예표론적 관심과 상관성이 깊으며, 일부 문학비평가들도 그랬다. 예표들의 매력은 궁극적으로, 한가운데 처한 자신의 위치를 지각하고 시작과 종말을 조화시키는 의미 있는 시점들을 소망하는 인간에게 어떠한 도움을 주느냐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제임스 바 교수 같은 자는 쿨만과 마시, 로빈슨 등의 저서를 검토하고 이 학자들의 '최상의 수준'에서 현대 성경 신학의 특성을 보여준다고 평하면서도 모두 성서의 언어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크로노스-카이로스의 구별은 사실 신약성서의 언어에는 없는 것이다. 마가복음 1:15에는 "때가 찼고"라고 되어 있지만, 갈라디아서 4:4에 "때가 참"이라고 번역된 문구는 "pleroma tou chronou"이다. 사도행전 1:7과 데살로니가 전서 5:1에서는 hoi chronoi kai hoi kairoi라고 씌어 있듯이, 두 용어는 변별되어 있지 않고 흠정역은 이 구절을 "때와 기한"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또한 구약성서도 앞서 언급한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보다는 흘러가는 시간에 훨씬 큰 관심을 보여준다고 바 교수는 말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는 대조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서로 바꿔 쓸 수가 있다. 아마도 카이로스의 의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결정적인 시간'에 가까운 것 같고 크로노스는 보다 양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바 교수에 의하면 성경에서 '카이로스 개념'을 얻을 수 없으며 비록 카이로이를 '결정적인 시점들'로 이해한다할지라도 그 뜻이 성경에서만 고정된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스카 쿨만은 그의 저서,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역설하기를 예수님마저 '旣存'(이미)과 '未存'(아직) 사이에서 긴장을 나타내는 종말론을 펼치시면서 구속사의 존재를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활동을 보여주는데 주력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체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변함이 없으시지만 하나님의 활동성으로 볼 때 '미완'의 부분이 미래에 남아 있고 이것을 한 줄로 이어 보면 분명 구원의 역사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주님의 활동을 보게 되면 아직 미래에 펼칠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이점에 대해서 그도 인정했다. 오스카 쿨만이 내세우는 구속사 이론에 의하면 '이미'와 '아직 아니'는 병렬적의 위치에 놓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고 그것도 일직선을 이룬다고 한다. 또한 그의 또다른 저서, '그리스도와 시간'에 서는 그는 "초대 기독교도의 신앙과 사상은 공간적인 장소로서 '이 세상'이나 '저 세상'(혹은 차안이나 피안)을 대립시키는 데서 출발하지 않고, 오히려 '이미'와 '지금' 또는 '그 때'라는 하는 시간 구별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공간적인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시간의 과정에 완전히 속해 있어 근본적인 것은 공간적인 대립이 아니라 시간의 구별이다는 것이다. 영원이라는 것도 또한 시간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과연 오스카 쿨만과 같이 시간을 공간적인 구원관과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했느냐 하는 점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의식을 공유하고 계신 분이시고 모든 말씀도 이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시간 의식 구조는 본능적으로 공간적 그림을 구성하며 이해하게 되어 있는데 시간을 흐르는 강물처럼 일직선적 도상(圖上)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미 공간적 사고의 일환이다. 그런데 오스카 쿨만은 이 직선적 시간인식을 가지고 아예 모든 입체적 공간적 의식 형태를 말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기가 지금 사용하고자 하는 방식 자체가 없어지는 방향으로 방식을 활용하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뱀이 스스로 자기 꼬리를 먹어들어가서 결국 자기 모습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일은 불합리하다. 주님도 이런 불합리한 인식을 강변하시기 위해 '이미'라는 표현까지 동원하신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주님이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아들이라는 존재성에 있었지 결코 시간관 조작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요 10:33)


시간을 일직선 도형으로 대체해 놓고 봐서도, '이미'란 '아직'을 직선선상에서 후차 지점에 두고 있지 않는 경우를 뜻하고, '아직 아니'는 '이미'를 일직선상으로 앞에 두지 않았을 때나 성립하는 개념이다. 수학에서 직선이란 점들의 순차적 계열에 따른다. 따라서 '아직', '아직', …의 이어짐으로 표현된 일직선뿐이든지 아니면 '이미'라는 한 점으로 직선을 끝내든지 해야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일직선 위에 묵시 세계라는 명목으로 직사각형과 같은 면적이 있는 도형을 얹어 그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묵시는 시간과 점으로만 표현 할 수 있지 면적이 있는 공간으로 표현하면 묵시란, 기껏 '많은 시간들의 연속'이라는 개념으로 왜곡되어 정의(定議)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오스카 쿨만의 이와 같은 무리수는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말씀의 완성'을 곡해했기 때문이다. 즉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에 긴장이 있다고 했는데, 시간 자체가 긴장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질을 느끼는 주체자들이 갖는 긴장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긴장이나 사도나 초대 교회 성도들의 긴장은 '아직 아니'이라는 시간상 미착성(未着性)으로 인해 아직도 손도 못된 미해결 문제의 존속으로 인해 야기된 긴장이 아니라 '이미'를 믿지 못하는 이 어두움의 세계의 속성으로 긴장했고 또 고난을 받았다. 오스카 쿨만처럼 그저 다가오는 시간에다 모든 고민거리를 위탁해서 넘겨버리는 식으로 해결 지우려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대내외적이고 심적인 악의 유혹과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그들은 구원의 '아직 아니'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긴장이 아니라 기쁨 가운데 있었다. 성령이 주는 기쁨이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4-7) 이 본문에 볼 것 같으면, 주님이 지키겠다는 데 무슨 '아직 아니'가 남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주님이 아니 지켜 주겠다는 것인가? 성도들은 예수님이 모든 활동을 하시던 이미 말씀이 성취된 가운데서의 활동임을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지구가 아직 파장을 맞이하고 있지 않고 시간적으로 끄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아직' 구원이 덜 되어서 뭔가 주님께서 일을 더 하시고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저 착수만하고 마감은 아직도 되지 않은 미완성적 구원관은 예수님이나 사도에게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사고이다. 실제가 현상으로 드러날 때, 그 현상은 실제적 차원의 내용에 의해서 평가받지 다른 범주적 평가를 허용할 수 없다. '이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이미'의 담긴 내용대로 '이미'의 가치성만을 드러내 줄뿐이다. 예수님의 '이미'는 '아직'과 대비되는 '이미'가 아니라 '이미'의 성과 자체가 '아직도' 시간 의식에 기대를 거는 그 '이미'를 공박하는 기능을 수행하자고 나타난 '이미'이다.


오스카 쿨만 교수의 구속사 이론의 치명적인 결함은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성을 절대적 시간에 예속된 예수 그리스도 중심성에 인식하고 있다는데 있다. 즉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십자가 사건이 터진 것이 아니라 구속사 선상의 한 시점에 국한되는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이 다른 시간의 사건들과 차별되게 대조된다는 시점에 놓여 있다는 시점에 있다는 것 인해 비로소 그리스도 중심성이 확인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나오는 십자가 사건이 아니라 그 십자가 사건이 전 구속사의 중심점 작용을 했다는 것에 준해서만 그리스도 중심성을 인정하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유발되는 일들이 아니라 일단 십자가 사건이라는 역사의 '중심점 만들기'를 위한 것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 중심을 보여주자고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역사의 중심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변모되고 만 것이다. 세상 만사가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것은 옳다. 하지만 그리스도 중심을 '시간의 중심' 혹은 '구속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을 수 합당한 사유의 연결 고리가 제시될 수 있는가? '시간의 중심'이라는 것이 과연 개념적으로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표현이다. 오스카 쿨만의 주장대로 구속사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흘러간다면서 어찌 '중심'이라는 것이 따로 규정될 수 있단 말인가? 단절된 막대기 같으면 무게의 중심점이나 길이 중심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수학의 수직선과 같은 것에 중심점이라는 개념은 있을 수 없으며 단지 한 지점에 의해서 두 개의 직선으로 분리해 나가는 분절점은 상정 할 수 있다. 따라서 오스카 쿨만 교수가 십자가 사건을 구속사의 중심으로 주장하려면 구속사가 한 개가 아니라 두 번째로 새로 시작하는 또 다른 구속의 역사라고 주장해야 한다. 이런 견해에 부합되는 학자가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이다.


이 학자가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의 약속은 스스로를 넘어서 더 나아가는 성취를 지시하여 첫 성취 자체가 다시 약속이 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먼저 번 선지자가 이야기한 것이 문자대로 후대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후기 선지자의 시대에 성취된 역사는 그 예언을 추월해서 미래의 내용이 더 추가적으로 함유된 성취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신약 시대에 있어서도 동일하기에 예수님의 부활도 미래의 것이 선취(先取)되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궁극적 목적을 향해서 무작정 '약속-성취'의 속성만을 보이는 역사가 아니라 최종적 계시가 예수님에게는 먼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만큼은 비추월성을 지닌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의 모든 계시가 전부 우리에게 다 알려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신성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모든 사건이 완결된 후에 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최종 통치에 마주 향해 가는 아직도 열린 미래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사건은 역사 안에서 아직 미완결이며 잠정적이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판넨베르그가 말하는 종말이란, 세상 종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취성 안에서 새롭게 미래로 출발하면서 또 하나의 최종 성취를 기다리는 보편사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절점 설정은 같은 구속사 선상에 놓여 있는 다른 사건들에 의해서는 자체적으로 결정될 수 없고 또 결정되었음을 증명할 길도 없다. 구속사가 되었든 보편사가 되었든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의미에 대해 역사를 정립하는 방법으로는 온전히 받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역사나 사건 자체에서 계시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계시를 배척하는 속성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늘에서 오신 의인이 나타나야 한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들이 인식 근거로 여기는 구속사 위주의 사건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 계신 분에 의한 말씀 성취 차원의 사건임을 뜻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는 구속사를 완성시켜 건지기 위함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다 이루었다는데 다른 차원의 선포이다. 예수님을 '때'를 성취하신 분이 아니라 '말씀'을 성취하신 분이다. 단지 실시하신 특정 '때'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특정 '때'를 기다리시기는 했지만 그 특정 '때'를 위해서 오신 분은 아니다. 이처럼 오스카 쿨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나 존재 보다 구속사라는 시간적 요소를 절대적 계시의 대용으로 삼고자 했다. 이는 유대교적인 히브리인의 사고의 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시도로 볼 수밖에 없다.


흔히 고대 문화에는 두 대조적인 인식 사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헬라)적 사유가 그것인데 그 중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한 쪽 사유, 즉 히브리적 사유를 계시 전달에 적합하다고 여겨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히브리적 사유 쪽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의 본래의 취지가 보다 확연해 진다는 것이다. 토를라이프 보만 교수는 그의 저서,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에서 히브리 사유적 시간관의 특징은, 궁극적인 목적을 지향하는데 있다고 했다. 과연 이러한 인식론이 계시 이해에 도움이 되었을까 아니면 장애가 되었을까? 성경을 통해서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 22:41-46) 바리새인들의 말씀 해석은 시간의 흐름에 준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틀은 예수님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궁극적 목적을 지향하는 역사 인식이 도리어 메시야 앞에서 좌초된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죄라고 규정짓고 부정해 버리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히브리적 사유든 아니면 헬라적 사유든 상관없이 말이다. 제임스 바 교수는 원어 분석이라든지 언어 그 자체에 무슨 비결이라도 들어 있는 온갖 해법을 거기에다 기대를 거는 것에 대해서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 기껏 해봐야 연못에 자기 얼굴을 비쳐 보는 것과 같이 자기의 선입견만 되찾아 오기 마련이다. 더나아가서 기독교적 직선론과 희랍적 순환론간의 엄격한 구별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한다. 게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유명한 구절처럼 "맨 바탕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살펴보라!"에 충실하면 인간의 시간 관념 속에는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외에도 '아이온'(시대)과 '플레로마'(특정한 질의 때의 충만) 같은 것들도 있다. 물론 이런 용어들의 사용은 일종의 그 시대의 용어 사용에 있어 서로들 언어 규칙에 존중하겠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이런 게임은 단순히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모호한 문화적 현상들을 보아 합리적으로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도 있고 물리적 시간성과 조화를 위한 목적도 있다.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미래 시대에 대해서 확신 있는 내용으로 확장시켜 채우자는 데 있다. 인간은 생래적으로 미래를 지향한다. 아무리 지금 형편이 엉망이라 할지라도 구원 될 미래를 내다보는데 생의 전부를 건다. 따라서 의미의 충만과 완성의 때, 즉 '플레로마'를 필요로 한다. 꼭 성경이나 신학이 아니더라도 모든 문학이 이런 성향을 담고 있다. 플롯(줄거리)에 의해서 과거 및 중간의 시점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미래에 대한 인간들의 물릴 줄 모르는 관심 탓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똑-딱'이라는 시간성으로 이어지는 인간성이 동일한 인간성을 유지시켜 주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연 과거의 그 인간과 현재의 그 인간과 미래의 그 인간이 그 어떤 변화를 보이지 않고 모든 면에 있어 연속적인 동일인으로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구속사는 이미 모든 인류의 문학과 문화가 자생적으로 배태해 오고 있는 실정인데 이 구속사가 그 내용만큼이나 실제적으로 균일한 속성을 함유하고 오고 있는지 어떻게 확인 할 수 있는가? 만약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구속사적 성향을 드러내는 모든 문학작품과 또한 성경의 내용으로 가져놓은 구속사 체계나 신학 체계는 참으로 허구적이기에 고유의 가치를 발하는 일반 문학작품과 동등한 평가 체제에 놓이게 된다. 허구성에 의해 지지를 받는 문학 표현은 독자와 저자와 공감하는 영역 안에서 구원 의미의 효과 창출을 그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의 구원의 실제성이 내다보는 것은 구원 사건의 실제적 재현이 아니라, 이야기꺼리가 수시로 첨부되어가는 구속사라는 이름의 시나리오의 완성이다. 그러니까 실제적 구원 사건이 터지는 것을 대단히 모호하고 낯선 일로 생각하고 주류 밖으로 추방해 버린다. 이처럼 구속사의 가치는, 구원 사건의 실제적 발휘가 아니라 구원 사건에 관해 그 의미성을 수집하여 거기에다 자기 구원을 대비시켜 그 진위를 확인해 보자는데 있다.


조작이나 허구는, 문학에서 이단아적인 사고가 아니라 필수적이다. 허상의 세계는 조작되기를 요청하고 그렇게 해서 당대의 민중들에게 그들을 지배하는 신화라는 허구성에서 되레 변화를 촉구하는 각성의 계기를 제공해 준다. 만약 허구의 이러한 반발이 없다면 인간들의 옛날 신화로 자꾸만 후퇴하기 때문에 허구야말로 현재를 현재의 의미로 이해케 하고 미래로 향한 개방의 발판을 닦아주는 현재가 되도록 해준다. 문학에서의 허구란, 이처럼 시간과 시간의 간격에다 인간의 존귀함과 영원함을 집어 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 동반해서 시간도 의미 있는 것으로 사용케 한다. 혼돈,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혼돈을 느끼는 것은, 인간 스스로 독립성을 지니지 못하고 자꾸만 시간의 노예가 되려고 근성 때문에 발생된다. 문학의 임무는, 인간들의 이러한 노예성을 정확하게 지적해서 그들의 실존을 낱낱이 공개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태 속에서 자아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만드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지 시간이 아니다. 기독교 교리에서 "이제 믿을 것은 주의 재림밖에 없다"라는 표현은 문학에서의 "이제 믿을 것은 허구밖에 없다"로 표현 안에 포괄적으로 담겨 있는 셈이다. 앞으로의 세계는, 현재의 세계와 대비되면서 존재 확인이 안 되는 가상의 세계라는 의미에서 그런 '허구'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그 허구의 세계에 대해서 인간들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그래도 뭔가 이 지금의 세계를 도와주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문학, 즉 허구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허구적 표현과 시간의 틀을 경과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이를 위반하면 '신화'로 분류되어 과거의 패러다임(인식 체제)라고 핍박을 받게 된다. 성경을 문학적으로, 문예적으로 해석을 시도하겠다는 의도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실제와 현실을 그 어떤 경우에도 언어의 상징적 기능이 동원되어 '현 시대의 문학'으로 나타난다. 언어 범주가 인간의 사고 범주를 다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 범주를 입장에서 서서 보면 수용이 다 되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완전히 수용한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는 약조가 사회적으로 형성될 수가 있다. 기호 체제의 본질은 '나타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규약'이다. 놀이를 하는 어떠한 사람도 놀이 그 자체보다 더 위대해 질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게임 안에서의 진리란, 그 게임의 규칙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여 자기 완결적으로 조작해 낸 것이기에, 다양한 경우들을 통해 절대조건을 대리하는 분산된 조건과 의미만을 제공할 뿐이다. 즉 변별성만이 의미를 생성한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인간이 자기 사회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에 마찬가지이다. 이 사회을 변별적 구조를 통해서 잡아내려고 한다. 문학은 이 작업의 연장이다. 문학을 이루는 개인의 상상력은 사실에 있어 그 사회 구성원으로 갖는 체험의 일부이다. 따라서 작가의 상상력 안에는 자신의 속해 있는 그 사회의 성질을 함유하고 있기에 타인과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작품 활동을 한다. 접쳐진 사회 구조가 작자의 예리한 해석력으로 인해 펼쳐지고 그 틈 사이에 숨어 있어 의미가 비로소 만개 한다.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사건이라고 간주하고 그 사건의 다발을 텍스트화시켜서 자체적으로 독립적 존재임을 외부에 알리고, 그 독립된 텍스트가 문학(문예)의 옷을 걸치고 나타나서 자기 시대가 요구하고 확인하고 싶은 진리치를 예술적 유혹으로 포장하여 타인과 대화에 나서는 것이다. 자기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타인과 더불어 공유된 시간이기를 기대한다. 세계는, 우연은 제거되고 영원한 반복성만이 규칙으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이것이 언어 소통에 준한 인간 사회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관을 신학자들은 놓치지 않고 계시를 정의(定議)하는 아이디어로 삼는다. 그리스도의 화해 메시지를 바탕으로해서 그 위에 인간 사회를 놓으면 개인주의적 계시관과 더 이상 계시를 두고 주도권 싸움을 벌릴 필요도 없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서로'라는 호칭으로 교류가 되는 하나님의 계시 자리가 얻어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화해의 손길을 뻗친 이상 '그' 분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너'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나'들은 '우리' 안에서 언제나 '너'이신 분 앞에서 '너'인채 만나게 된다. 이로서 계시는 '그' 분과 개인적인 '나'의 만남이 아니라 '우리'라는 동일성이 갖추어진 상황 안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대하면서 찾아드는 질문과 대답의 장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모든 교육적, 훈계적 사역은 반성과 참된 회개를 유발하는 중재적 사역이 계시적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이 각자 개인적인 '나'만 관심두고 '나' 그 자체을 본질성을 삼고 존재하는데서 벗어나서, 자발적으로 자기를 부인하시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 '너' 되시는 분을 뵙기 위해서라도 동일한 부정성이 각자에게도 유발될 필요가 있는데 이 중재적 계시 활동이 지금도 교회에서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서 교회의 존재함, 그 자체는 계시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교회 역사도 나름대로 계시로 대우받는다. 인류는 이처럼 교회 존재를 구심점으로 늘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은 인간을 '우리' 안으로 이끄시며 그 안에서 남을 위한 '너'가 되도록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계시라는 것이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역사가 곧 계시가 되고 성경은 이 계시활동의 일부로 편입된다. 이로서 성경은 역사의 대상물로서 풀이 가능한 내용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쓰여짐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보편적 인식을 염두에 두고 의사 소통하기 위하여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의 물음은 끝없이 이어지게 되어 있고, 물음의 영원성은 보편성에 대한 희망을 피력한 것이다. 즉 인간이 만들어내는 절대성이라는 계시인식은, 이미 없어져 버리고 사라져 버리는 것들까지 보편적 관념들을 동원시켜 붙잡아 묶어둔 모음집이다. 그래야지만 '나'에게서 한없이 터져나오는 물음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되고 이로인하여 '나' 자체에 대한 가치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신이 되었든 그 어떤 절대 사물의 관한 과학적 원리가 되었든 종국에는 '나'의 절대적 가치를 능가하는 가치는 '나' 자체에서 물음으로 도출될 수 없는 법이다. '나'를 중심으로한 산발적인 게임에 늘 파묻혀 사는 것이 인간이다. 여기서 '인간 행함의 보금자리'가 장만된다. 즉 나의 행함도 계시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이 뜬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