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100514요일3장7절a /이근호 목사님
요한일서3장7,8절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7.8절 보면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그렇게 돼있죠? 여기에 죄, 의 나오는데 죄의 차원은 설명이 좀 필요한데요, 이 세상에 우리 혼자 있다면, 내가 착한 일을 했다, 나쁜 일을 했다 할 때 누가 판정합니까. 혼자 있다면. 나의 양심이 판단하죠? 이거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착한 일을 했어, 나쁜 일을 했어, 내가 판정하는데 어떤 한 사람, 다른 사람이 있다면 나 혼자 판정하면 안 되고, 물어야 되요. “여보게, 나 착한 일 했어 나쁜 일 했어? ”에이, 당신 나쁜 일 했어,“ ”그래?“ 서로 의논 되겠지요. 여기에 마귀가 있다고 합시다. 마귀가 있다고 한다면, 여기 본문에 보면 마귀는 첨부터 범죄 했죠. 혼자 있을 때는 양심에 묻고 둘이 있을 때는 서로 묻고, 마귀가 있다면 우리는 마귀와 대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어요.
‘마귀야, 마귀야 나 착한 일 했어, 나쁜 일 했어?’ 이렇게 한다면, 마귀는 첨부터 미혹하고 나쁜 인간이기 때문에 착한 일은 뭔 일로 봅니까, 착한 일은 악한 일로 간주해버리고 나쁜 일은 착한일 한걸로 간주하지요. 그런데 제가 여기에다 마귀하고 우리 사이에, 이렇게 말하면 ‘어느 인간이 마귀하고 대화 합니까, 사람하고 대화하지 귀신보고 대화하는 사람 어딨어’이러거든요. 그 말은 맞아요. 마귀하고 대화하시는 분, 우리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 사이에 넣어 봅시다. 그럼, 다시 해봅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묻는다 합시다. “마귀야 내가 하는 일이 착한 일이야, 나쁜 일이야?” 그러면 마귀가 뭐라합니까. 예수님 하는 일은 무조건 나쁜 일이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 광야에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했더라면 예수님은 착한 예수님이 되겠지요.
바로 예수님과 마귀,ㅡ그러니까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보통 우리가 착하다 나쁘다를 내가 결정하고, 의롭다 악하다를 나 혼자, 양심이 결정하는데 성경은 요한일서1장1절부터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났으니,’ 라고 해서 기준점을 너희 양심에 묻지 말고 예수님이 마귀한테 어떻게 당했는가를 봐라,는 겁니다. 그러면, 착하다 나쁘다는 기준을 누가 세웁니까. 예수님과 마귀와 있었던 그 일이 오는 세상, 지금 세상 모든 것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착한 일과 나쁜 일의 평가가 되겠지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된다는 겁니다, 성경말씀과 요한일서를.
보시면,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같이 의롭고, 여기서 의를 행한다는 것은 판정을 누가 하라고요? 양심에 물어보라고요? 아니죠? 남에게 물어보라고요? 아니죠? 마귀에게 물어보라고요? 아니죠? 그럼 뭡니까, 마귀한테 당했던 예수님의 입장에서 의가 뭘까, 이것은 예수님만이 의라는 얘깁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죄 없다 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주님 앞에서 누구든지 죄인일 수밖에 없는데, 이 죄를 예수님의 생명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한(그 자체가 마귀가 보기에는, 마귀나라에서는 아주 싫은) 착한 일, 의로운 일이 될 겁니다. 마귀나라 입장에서는 악한 일이 되겠지요. 예수님의 나라에서는 그것이 뭐가 되겠어요. 진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게 되겠지요.
그 이루심 안에서 행하는 것, 그것은 바로 예수님 안에서 행하게 되면, 그 판정을 우리는 예수님과 마귀 사이에 있었던 일로 판정을 받기 때문에 마귀 앞에서도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자랑할 만 한 겁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이것도 한번 봅시다. 죄를 지었다 안 지었다 판정을 내 양심이 내릴까요? 아니다, 그럼 죄를 지었다 안 지었다는 자신에게 물어볼까요?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죄 지었다 안 지었다를 우리가 예수님만 만나도 안 되겠지요. 왜냐면 예수님은 무조건 우리편이다, 우길 거니까.
예수님이 마귀한테 당했던 그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냐, 에 따라서 예수님이 억울했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마귀의 미혹에 빠지지 않겠지요. 그렇잖아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에게 모든 걸 맡기고 사는 사람 같으면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지요. 왜! 마귀로부터 예수님이 당했으니까.ㅡ참 마귀는 나빠, 하늘에서 오신 분을... 나는 마귀한테 당하고도 예수님과 같이 순교해도 좋아. 네 편은 들지 않겠어.ㅡ라는 사람이 마귀의 미혹이라는 게 뭔지 아는 사람이에요. 다시 할게요. 마귀와 예수님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을 아는 사람만이 마귀편에 서지 않고, 마귀 미혹에 빠지지 않고 항상 어떠한 어려움이 오더라도 누구편에 서겠습니까. 예수님 편에 서겠지요. 그게 바로 의를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
내 양심이 결정하는 거 아닙니다. 예수님과 마귀사이에서 일어났던 일, 십자가 일을 기준으로 볼 때에 비로소, 예수님 앞에서 마귀의 일이 확연히 드러났죠. 우리 양심 앞에서 마귀의 일은 절대로 마귀 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도와주고 격려하고 ㅡ그래, 너는 착하게 살 수 있어, 잘하면 훌륭한 사람 되는 거야, 원래부터 너는 사랑받기로 작정한 사람이야,ㅡ 이런식으로 마귀는 우리 자체가 우리를 평가하도록 (오늘 중요한 거 합니다.) 항상 마귀의 미혹이 뭡니까, “너 하는 행동은 네가 측정할 수 있어” 하는 게 마귀예요. 어느 인간치고 자기 하는 행동을 좋게 보지 나쁘게 볼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최선을 다했는데, ‘일이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 책임입니다, 이게 인간의 보편적인 습관이고 습성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요한일서에서 마귀라고 할 때는 반드시 우리하고 마귀하고 직접 상대하지 말고, 마귀가 예수님을 어떻게 다루었고, 예수님이 마귀를 어떻게 다루었는가, 이 관계 덩어리 자체, 예수님이 마귀한테 어떻게 당했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마귀와 예수님 만남에서 오는 것이 뭡니까, 십자가잖아요. 십자가 비중을 잡아댕기면 예수님이 마귀에게 당했던 기준을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안다면, 우리는 마귀의 미혹에 안 빠지죠. 빠질 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그 사실을 알 때, 마귀가 노리는, 마귀가 착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빼버리고 스스로 양심껏 착한 일 하는 것>, 이게 마귀가 노리는 바죠. “네가 착할 수 있는데 왜 예수를 믿어, 예수 생각하지마, 한번 생각했으면 잊어버려, 이제는 예수 믿고 착한 사람 됐으니까 착해질 수 있어” 이게 마귀의 미혹입니다. 그러면 판정을 누가 내리죠? 내행동을 내가 내리니까 내가 하는 일은 뭐든지, 어쩔 수 없었고, 할 수밖에 없었고, 훌륭했었고 변명의 여지가 많지요. 정작 나는 죄인이라는 소리가 안 나오지요. 왜! 내 행동을 내가 판정하니까. 이게 바로 마귀의 미혹이에요. 진짜 측정은 예수님이 마귀한테 어떤 식으로 당했는가, 예수님의 의가 마귀에게 무엇으로 바뀌었습니까. 악이었고 마기는 예수님께 자기처럼 악하라고 한다 말이지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잊어버리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뭐가 ‘의’냐 하면 예수님께 모든 것 맡기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의가 되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잊어버리는 것, 생각지 않는 것, 이게 마귀의 미혹에 빠지는 ‘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죄 짓지 아니한다, 죄 짓지 아니하는 거예요. 왜, 마귀를 아니까. 마귀의 노림수를 아니까. 마귀는 무조건 예수님이 모든 죄를 가져갔다는 것을 못 믿게 하는 거예요. 이게 마귀의 미혹이에요. 도대체 마귀는 우리에게 뭘 이야기 합니까. 완벽하면 완벽할 수 있고, 착하면 바르게 살 수 있고, 전부 다 모든 측정과 행동을 내가 판정하도록 되는 겁니다.
보통 일기를 쓰는 이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죠. ‘나는 오늘 이렇게 했다’ 이거는 사실 거짓말입니다. 오늘 이렇게 했다,는 말은 없어요. 왜냐면 모든 인간이라는 것은(이거는 깊이 들어가는 얘긴데), 일본에 빠징꼬 게임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빠징꼬 게임이라는 게 뭐냐면, 게임기를 작동하면 조그마한 볼, 쇠볼이 텅 올라와서 떨어지는 게 그냥 떨어지는 게 아니고 못 박아 놓은 경로를 통해 툭,툭,툭 이쪽저쪽 튕기면서 밑바닥까지 떨어지죠. 그래서 아다리(일치)되면 먹고 살잖아요.
인생이라는 것은요, 자기가 판단하고 설득해서 인생길을 가는 것이 아니고, 주변에서 몰아가는 거예요. 몰아가면 어쩔 수 없이 몰리게 되어 있어요. 몰리게 되면서 자기 공간이라라고 여기는 겁니다. 쪼아대는 거죠. 내가 인생을 선택해서 가는 게 아니고 주변이 그렇게 쪼아대는 겁니다. 우리가 왜 아프리카나 북한에 태어나지 않고 한국 사람입니까. 주변 상황이 그렇게 몰아가는 겁니다. 몰아갈 때 빠찡꼬 하는 것처럼 들쑥날쑥 홈이 파입니다.
홈 파인데다 물 부으면 물이 알아서 ‘나 이 길 싫어 딴길 갈래,’ 이런 물이 없잖아요. 물은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낮은 쪽으로, 홈 따라서 왼쪽 꺾이고 오른쪽 꺾이고 시냇물도 흐르면서 왼쪽 오른쪽 흐르잖아요. 자유의지가 있어서 ‘다른 길로 돌아갈래,’ 이런 거 없다 이 말이죠. 홈 따라 가게 되어 있어요. 물도 마찬가지고 우리 인간도 마찬가집니다.
구원받는 사람은 항상 천국으로 통하는 사다리 게임처럼, 천국으로 통하는 홈 따라 가보니까 나중엔 천국이에요. 그래서 천국에 와서 면류관 반환하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난리치는 거예요. 내가 된 거 없습니다. 주께서 몰아가십니다. 주께서 몰아간 거예요. 그런데 마귀는 뭐라고 미혹합니까. “네가 알아서 열심히 해야 구원받는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도하신 은혜를 완전히 빼빠로 밀어 홈을 다 지워버리고, 앞의 선택은 네가 천국 지옥은 네가 하기 나름이라고 모든 것을 밀어 부쳐줍니다. 평지를 만들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마귀 들리면 자살하죠. 왜! ‘그때 저쪽이 옳았을 건데...’ 인간은 저쪽이쪽 하는 거 없어요. 뭐든지 뒤에서 밀면 가게 되어 있어요. 마치, 정차된 차 같아요. ‘에이, 왼쪽으로 빠져야 되는데’ 하고 있을 때 뒤에서 빵빵!! 하면 일단 가야돼요.
여러분들은 결혼을 해봐서 그렇지만 결혼 안 해본 사람은, 결혼하면 자유로울 줄 알아요. 막상 해보면, 왜 그렇게 얼킨 게 많고 설킨 게 많은지... 총각 같으면 ‘에이, 더러워서 이거 아니면 밥 못 먹나’ 사표 낼 수 있는 문제를, 사표 내려고 하니까 “여보, 오늘 산부인과 가는데 우리 애 생겼어.” 듣는 순간 사표를 얼른 집어넣는 거예요. 홈입니다 홈. 내가 예상치도 않은 홈이 있는 거예요.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저것보다 이게 더 좋다고 좋은 쪽으로 선택해도, 원래 더 좋은 쪽은 감춰져 있고, 현재 있는 것이 선택의 폭이 제한되어 있어요. 그렇게 몰아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몰아가시면 결국, 지옥 갈 사람들은 아무리 복음 전하고 아무리 십자가 전해도 자기는 그 복음이 듣기 싫어요. 왜냐면 그 홈이 그쪽으로 갈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운명이 지옥 갈 사람이기 때문에요. 남 배려하고, 성격도 좋고, 인정도 많고 친절천사 같아도 돈만 달라면 화내고 (저와 여러분들 식구들과 안 같습니까 ) 딴 건 다 하는데 교회 가라는 소리 하지 마라, 이런 식으로...
이게 뭐냐 하면은, 전도를 못하고 복음을 못 들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본성이, 인간이라는 것은 악마가 자기 백성을 알고 하나님께서도 알아요. 영적인 세계에서는 알아요, 그 사람이 지옥 갈 사람인지 알기 때문에 아무리 가고 싶어도 홈으로 밀어붙이면 그쪽이 좋아지게 되어 있고 그쪽으로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가 베드로나 열 두 사도들을 삼켜서, 지옥 보내기 위해서, 타락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애써도 주께서 기도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밀 까부르듯이 그들을 청구해서, 베드로가 어쩔 수 없이 천국을 가야되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천국을 가야되는 거예요.
교회 비판 잘한다, 교회 썩은 거 잘 이야기 했구나 기쁘다, 들을 게 있다, 해도 막상 복음을 이야기 하면 다 가버려요. 오병이어에 했잖아요. 예수님께서 복음 이야기하니까 두 번 다시 예수님과 같이 다니는 사람이 없다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랬습니다. ‘너희도 가지 왜, 너희는 왜 안 가느냐.’ 주께서, 아버지께서 내게 보낸 자 아니면 아무도 올 수 없다, 했어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와 우리사이에 홈이 파여, 공이 홈에 빠지게 되면 ,못 나오듯이 이미 홈에 빠진 볼링공처럼, 꽉 짜인 홈으로 오게 되면 우리는 좋든 싫든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되어 있고,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지을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훌륭해서 죄 지을 수 없는 게 아니고 홈 자체가 죄 안 짓는 홈에 빠졌기 때문에 그 코스를 따라 접어 들어버렸어요. 우린 길이 하나밖에 없어요. 가봤자 천국이라. 가다가 거지꼴도 나고 사업도 망하고 온갖 일들이 와도 사업 망했다고 ‘두 번 다시 예수믿으면 나는 개다, 나는 예수 안 믿는다,’ 했는데 어디서 복음 소리 들으면 얼른 “복음이다!” 하고 좇아가지요. 왜그러냐면, 복음이란 출처가 어디에요. 복음은 출처가 천국입니다. 천국 갈 사람은 천국의 종소리 땡~! 땡~! 종소리를 들으면 견딜 수가 없어 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목회자는 복음만 전하면 돼요. 교인 수 따지지 마세요. 복음 전하니까 나가더라, 그것은 홈이 복음 전하면 듣기 싫어하는 홈 쪽에 있기 때문에 나가는 거예요. 그 책임은 목사한테 없습니다. 그런데 천국 갈 사람은 복음 전하지 않고 딴 거전하면 그들이 나가버려요.
요한일서에서 사람이 사적인 결단력, 의지력 이런 것으로 요한일서를 해석해버리면 특히, 이 본문 같은 경우 “예수님께 속한 자는 범죄 하지 않는다.” 이 구절이 난해 구절이 되어버립니다. 왜냐면 본인들이 경험한 게 있거든요. “나는 이제부터 예수 믿게 되었다, 이제 새사람 되었다 두 번 다시 죄 안 짓는다.” 라고 했는데ㅡ여기 9절 보세요, 주께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ㅡ 이게 미친다니까요. 죄 짓지 않는다 하니까 그렇다면 죄 짓지 않는 대표적인 것이 뭐냐, 마태복음 5장의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간음한 자라”그 죄 안 지었냐 이 말이죠. 제가 대전 강의할 때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설명했어요. 남자가 앉아 있는데 여자 비슷한 물체가 지나가더라, 그러면 붙들고 ‘결혼 합시다’ 이래지더냐 말입니다.
그렇게 안 되거든요. 여자가 지나가면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어야 되요, 그래야 결혼 상대자가 되는 겁니다. 뒤태를 한번 보자, 앞태를 한번 보자, 뒤태는 머리가 예쁜데 앞태는 영 아니네. 계단에 올라오는데, ‘아, 상반신이 너무 예쁘더라, 그래서 저 여자 같으면 결혼하겠다 싶은데 밑에 보니까 이게(다리) 짧네. (스크린 다 올라왔는데 키가 너무 작아)여자가 결혼할 때 어떻게 합니까,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어야 상대자를 고를 수가 있어요 인간이. “여자십니까,; 감사합니다 결혼합시다.” 이런 남자는 없어요. 의자 앉았다가 열 명의 여자가 지나가면 여자 열 명을 자기가 생각해야 된다고요. 선을 한번도 안 본 사람도, 버스 타면 승강기에 올라오는 사람 많이 봅니다. ’저 여자 관심 간다‘ 어디 모임에 가서도 마찬가지고, 교회 청년회 놀러가서 곰발바닥 새발바닥, 하면서도 다 생각한다고요. ’저 남자 괜찮은데‘ 보니까 옆에 있던 어떤 여자 청년도 좋아하니까, 지들끼리 삐져 눈꼴질하고...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음욕을 품지 말라,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산상설교는 당시 바리새인들, 최고의 성화론을 주장했던 바리새인들 너희들마저도 지옥갈 수밖에 없은 죄인이라는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 산상설교를 주신 겁니다.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 했는데 그 바리새인마저 내가 준 율법에 대해서 순종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입니다. 바리새인도 그런데 우리일까보냐, 우리는 말 할 꺼리가안 되죠.
그러니까 이 본문을 보고 ‘하나님께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하니 미치는 거예요. 이걸 째든지 지우든지 해야 되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를 ‘고의로 죄를 짓지 아니한다’ 이러는 겁니다. 다 헛소리예요. 고의로 짓는지 아닌지는 치매 걸리면 고의가 아니에요. 기분이 나쁜 사람, 그리고 술 많이 먹어서 필림이 끊겼다 하면 끝나는 거예요.“당신 어제 왜 음주 운전했어.”“아, 모르겠는데요 필림이 끊긴 모양이네요.” 이러면 다 넘어갑니까? 다 넘어가요? 사람이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면, 본의 아니게 남에게 실례를 범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본의 아니게...
비가 오는데, 자기가 해야 될 일에 정신없다 보면 버스타면서 우산을 접고 타야하는데, 마치 그때 아이디어 떠올라서 집중하다가, 빗물 줄줄 흘러 앉아있는 사람 바짓가랑이 다 적셨네, 보니까 자신이 우산을 안접은 겁니다. 그래 “어이쿠, 미안합니다” 하잖아요. 죄지었잖아요. 그런데 여기 보면 죄 안 짓는다면서요?
그리고 죄라는 것이 인위적으로 나쁜 것을 다짐하고 지은 죄만 죄가 아닙니다. 자기 완벽 정도가 아니라, 사랑하지 않으면, 특히 형제를 위해 목숨을 내 놓지 아니하면, 그것도 죄가 되는 거예요. 목숨은 하나고 형제는 열 명인데 어쩌란 말입니까. 표 나눠주면서 “줄 서라 줄...내 신장 이식 받을 사람 줄 서세요~!” 신장은 하나밖에 없고, 성경말씀에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하니까, 전부 예수 믿는다 하고, 번호표 받아가지고 하든지, 가위바위보 하든지, 축구를 해서 결승전에 간 한 사람만 해주든지, 특히 부모가 되어가지고 애가 둘, 셋인데 한 애한테 밥 맛있게 먹으면서, 한쪽을 사랑하면 다른 한쪽은 상대적으로 뭘 느끼냐 하면, 엄마가 나를 미워하는 걸로 느껴요.(애 셋 키워보니 어떻습니까, 그런 경우 있지요?) 분명히 똑 같이 해줬는데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요소가 개입되니까, 못한 대우를 받았다고 우기는 겁니다.
아침 열시에 와서 분명히 한 데나리온 준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도 한 데나리온 줄 줄이야, 아침 열시에 올 때는 예상도 못했죠. 아침 열시에 와서 한 데나리온 준다고 할 때는 노는 주제에 좋다고 와서 일했는데 주님께서 열두시, 오후 세시, 다섯 시까지 불러다가 다섯 시에 온 사람부터 한 데나리온 주니까 누가 화냈습니까. 아침 열시에 온 사람이 화냈어요. 상대적으로 비교되는 것이 투입되기 전까지는 자기는 주님을 잘 믿고 예수를 잘 믿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그 판정은, 현재 내가 나를 우수한 존재로 양심적인 좋은 사람이라고 봤는데, 막상 오후 다섯 시에 와서 천국 가니깐, 화가 난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평소에 내가 착하다고 판정을 누가 내렸습니까. 내가 내려놓고 우리는 뭐라고 우기냐면, 주님께서 판정을 그렇게 본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정당한 판정 기준은 뭐냐, 우리는 제외하고, 예수님이 악마에게 어떻게 당했는가, 그것이 기준이 돼야 되요. 예수님이 마귀한테 당한 걸 보니까 어느 누구도 예수님 같은 의인은 없다는 것을 아는 그 기준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면, 바로 마귀는 예수님을 비난했고 홀대했던 그 기준이 우리에게 왔을 때 이 기준을 아는 우리는, 마귀에 대해 미혹에 빠지지 않고, 나는 어떠한 경우라도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다는, 내부에서 성령의 소리가 들리니까, 그 사람은 죄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것은 본인이 판정하는 것이 아니고 구조적으로 그 홈에 들쑥날쑥 하는 구조적으로, 지리산 계곡물처럼, 계곡물이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그 길로만 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천국 가는 사람은 똑같은 코스대로 자기가 스스로 죄인이면서 주님의 ‘의’ 때문에 살았다는 그 코스를 밟아서 우리는 천국가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물 한 방울이 있다면, 그 계곡에 나 외에 다른 사람이 또 한 방울로 같이 내려오는 사람이 있죠. 그런 사람은 전부 다 예수님 때문에 사는 사람들이 모인 것을 통해 형제라 하고 그 사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웃사랑, 형제사랑인, 교회가 성립되는 겁니다. 그 집단은 오직 복음만 기뻐해요. 인간의 행함, 어떻게 행하느냐가 아니라, ‘주께서 이렇게 행하셨습니다,’ 를 듣고 싶어서 이렇게 다 이루었다는 것을 듣고 싶어 하죠. 그것이 하나의 교회로서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이해 되셨죠? 누가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하세요.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짓지 않는다”는 것은 죄 짓고 안 짓고를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지옥 갈 사람은 죄의 코스로 가게 마련이고, 우리는 죄 안 짓는 코스로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내가 죄 안 짓는 것이 아니고 죄 안 짓는 코스에 들어섰다는 이유 때문에 마귀로부터, 또 주님으로부터 죄 없는 자로 인정 받으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의 구조가 그래요 구조가. 팔자가 그렇습니다. 운명인데요 운명.
9절에 봅시다.“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라” 씨를 우리가 어떻게 관리합니까, 내가 관리 못하죠, 씨는 자생하죠. 스스로의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저도 범죄치 못한 것은 하나님께로 났음이라”
요한복음 1장13절에 있는 말씀: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의 양심껏 아들이 될 수 없지요. 외부의 권세가 제가 구조라고 했습니다. 권세를 구조로 바꾸니까 더 쉽죠? 아들이 되는 ‘틀’ 그걸 ‘거푸집’에 의해서 아들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부산의 삼화공장이라고 신발공장이라고 옛날에 유명했어요 지금은 망했지만... 그 신발공장에 제가 가본 적 있는데 거푸집에서 고무를 집어넣으면 탁,탁 찍혀 나오잖아요. 아들이 그렇게 만들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모델이고 (딱,딱 찍어내듯이) 그대로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구조가 뭐냐 하면은, 마귀와 싸웠던 구조가 우리에게 들어온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난 자는 마귀가 먼저 알아요. 마귀는 무조건 예수님과의 관계를, 십자가의 복음을 가리는 것이 마귀예요. 고린도후서4장4절에 나와 있죠.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이 세상 신이 그들의 눈을 버리게 해서 복음의 광채가 그 마음에 비치지 못하게 합니다.
어제 대전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좋아하고 다 좋아하는데, 한 달 후에 무슨 일이 있느냐 하면, 월드컵이 있습니다. 축구 싫어하는 여자나 노인네 같으면 별문제 없는데, 복음, 복음 좋아하는 20대가 지금 시험공부하고 있는데 갑자기, 슛! 골인~! 하면 눈 어디로 갑니까. 분명히 복음이 더 좋은 건 아는데, 갑자기 어디서, “이겼나, 이겼나, 우리편이 이겼나,”-우리편이 없는데 우리편 이겼나 하죠.- 졌다하면 기분 푹 나빠져, 복음도 안들어 오고, 이겼다 하면 복음도 술술 들어오고, 그거는 문제 있죠.
그러니 인간내부에, 이 마음을 우리가 다스리지 않습니다. 그런, 축구 좋아하고 야구 좋아하고, 스포츠 좋아하더라도 홈 파인 곳으로 가버리면, 이게 구조적으로 흔들려서, 아하, 그것이 바로 죄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아들 되게 하실 때, 월드컵 축구만 좋아하고 복음 싫어하고, 일등만 좋아하는 이 더러운 세상에 태어난 우리를 주님께서 거푸집, 또는 구조, 또는, 권세, 구조적 권세가 우리에게 넘어뜨려서 몰아가는 거예요. 몰아가게 되면, 월드컵 초반에 져버리고, 전반전에 8:0으로 져버리고, “에이, 후반전 보기도 싫어, 8대빵, 복음이나 들어야지,” 몰아가 복음 듣게 하죠. 그런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잔뜩 기대를 했는데, “아, 내 뜻대로 안되네, 에이쒸, 성경이나 보자” 하면 은혜 받고 그런 경우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우리 매사가, 성도의 가는 길이 늘 그래요. 우리는 항상 제갈길로 가기 좋아하죠. 왜! 양이니까. 김양 최양 특징이 그거거든요. 항상 옆길로 갑니다. “우리는 양 같아서 제 갈길로 가거늘...” 그 갔던 것을, 거푸집, 틀로써 ‘그게 바로 죄거든? 악마의 길이거든?’ 하고 말려서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쪽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그것을 권세라는 겁니다. 권세... 권세를 다른 말로 하면, ‘힘’ 힘이예요. 어떤 힘? 우리를 몰아가는 힘! 우리로 하여금, 정해진 천국 가는 좁은 길로 가게 하는 힘!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주여, 힘주소서!” “무슨 힘?” “좁은 길로 가는 힘주소서!” 성경과 맞잖아요. “좁은 길로 가는 힘주소서! 넓은 길로 새지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외로워도 참는 일 없어 좋습니다. 그 길이 영생의 길이라면 그 길을 가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 성령 아니면 안 나옵니다.
금요철야 기도해 보세요, 전부 다 넓은 길로 간다고 외치고 있는데. 사업 잘되고, 애 공부 잘하고, 교회 부흥되고, 하면 그거 예수를 왜 믿습니까. 그거는 자기가 벌어둔 돈 믿지 왜 믿겠어요. “주여, 좁은 길이 어딥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이래야죠 “어디가 좁은 길입니까” 이래야죠. 혹간 “목사님 우린 일 안 해도 이미 좁은 길입니다” 이러시는데, 저는 좁은 길 맛도 못 봤어요.(아직 덜 망해서 그런가 봐요.) 아무리 인간이 망했다, 망했다 해도, 일단 숨쉴만하면 넓은 길이 돼버려요.
좁은 길은 뭐냐면, 빨리 죽어서 이 세상을 작별하면 좋은데, 제가 찬송가 중에 불만 있는 게 뭐냐면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그 가사에 불만 있어요. ‘만나기는 뭐, 미쳤다고 만납니까, 주님 만나며 되지, 봤던 거 왜 만나요, 에구 지긋지긋한데...’ ‘작별 ... 굿바이 굿바이 노래 있어요.
천국 앞에서 우리가 산다는 것 죽는다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뭐 했냐는 것도 의미 없고 묻지도 마세요. 그건 옥경이한테만 묻고 묻지 마세요.’‘아무 후회가 없는 거예요, 살아도 소용없어요.’ ‘사법고시 합격했습니까? 쓸데없는 짓 했습니다,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부도 당했다 해도 아무것도 아니고 부도 안 당했어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전부 다 작별인사나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지 말고 우리 이쯤 헤어집시다. 해야 되요. 확실히 작별을 좋아해야 되고, 반겨야 되고, 죽음이 있다는 것이 든든해야 됩니다.‘죽음 여기 있구나, 든든하다야.’
한번 적어볼까요? 오늘 배운거...‘사는 게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를 않습니다.’ 내가 말해준 홈 따라 잘 왔다,는 겁니다. 너희가 선택해서 살아온 게 아니고 내가 너희를 밀어 넣었다,는 겁니다. 그쪽으로 가라고...자꾸만 옆으로, 넓은 길로 새는 걸 억지로 집어넣은 거예요.
자, 어려운 거 하나 해봅시다. 어려운 거. 문제를 하나 낼테니까 (잠이 오시는 모양인데) 문제를 하나 낼테니 맞춰보세요. 어떤 사람이 횡당보도를 건너가는데 차가 와서, 그 사람을 치어서 죽었습니다. 나라의 경찰이나 그 누구도 거기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각기 제갈길로 다 갔고, 죽은 가족이 와서 시체 치우고, 사고 냈던 차는 범퍼에 묻은 피나 닦고 그냥 갔다고 합시다. 뭐, 문제될 거 있습니까?
노인네가 파란불 들어와 정상적으로 가고 있는데, 차가 신호 안 지켜서 박았고. 노인은 죽었고, 가족들이 와서 데리고 갔고, 시간이 한 5분 늦었네, 하고 그냥 갔다. 할지라도 문제될 게 있냐 그 말이지요. 만약에 이것이 경찰이 와도 ‘빨리 가세요’ 하면서 교통정리 하면 그만이고. 이것이 용납이 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용납이 된다면. 교통사고 말도 못하게 많이 일어나겠지요. 전부다 성격 더러운 사람은 권총차고 사람 죽인다고 달려들어, 왜, 죽으면 그만이니까.
그럴 때 죽었던 가족이 와서, “아저씨,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으니까 보상해 내세요.”한다면 차 운전사 하는 말이, “내가 당신의 아버지를 치인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5분 전의 이야기고, 5분 전은 과거기 때문에, 과거는 지금 없는 겁니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하면 어떻게 나올 거예요.
제가 왜 이런 문제를 하냐면요, 문제가 상당히 어렵죠? 왜 하냐면, 성경에 우리의 모든 죄를 어떻게 한다? 용서했지요? 용서했으니까, 만약에 우리가 졸음운전 해서 죽였어도 주께서는 우리가 과거에 일어난 일도 용서될 거잖아요. 용서를 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냐면, 그냥 책임도 없단 뜻이에요. 용서했는데 책임지라는 건 말도 안돼요.
죄를 씻어준다는 것은 그 모든 책임도, 벌도 없어졌습니다, 라는 뜻이다 말이지요. 그럼 예수 믿고 돌아다니면서 사람 찔러 죽이면 되겠네? 다 과거의 일이니까... 문제가 너무 어려웠습니까? 그럼 이번엔 약간 쉬운 문제 낼께요. 두 아이가... 두 아이가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말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한 아이가 한 아이를 밀었어요.
두 아이가 있는데, A라는 아이와 B라는 아이가 있는데 싸웠어요. 싸우다가 B라는 아이가 A라는 아이를 밀었어요. 발라당 넘어졌습니다. 툴툴 털고 일어났습니다. “어? 너 나 밀었지?” 반대로 B라는 아이가 A라는 아이를 밀었어요. 똑같은 압력으로 아이를 밀었어요. 아이가 넘어져서 뇌에 손상이 갔습니다.
자, 누가 잘못했습니까? 더 세게 민 게 아니예요. B가 밀었던 아이와 똑 같이 밀었고, 자기는 벌떡 일어났는데, 똑같은 힘으로... 더 세게 민 것도 아닌데 이빨 깨졌어요. 똑같은 힘으로 밀었는데 80평생 동안 정신적인 장애를 느꼈다. 그러면 같이 나이가 비슷하니까, 돈 벌어 보상해주기 바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81세 때 알아보니까, 이 사람의 뇌손상은 밀어서 생긴 손상이 아니고, 유전적인 병이었다는 게 알려졌을 때, 그때는 다시 물어줘야 됩니까 어쩝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의 죄를 다 용서했지요? 예수 믿는 사람은 돌아다니면서 사람 죽여도 보상할 필요도 없고, 미안하단 소리 할 필요도 없고, 지금 내가 한 게 아니고 과거의 일이다, 5분 전의 내가 한 짓이기 때문에 지금 없는 사건을 책임질 필요 없다고 나올 때에 만약에 우리가 책임져야 된다면, 죄는 용서 받지만 책임져야 된다면, 5분 전의 사건까지 책임져야 됩니까, 50년 전의 사건까지 책임져야 됩니까? ‘당신 5분 전에 우리 아버지 죽였잖아 책임져,’ 5분 전 같으면...예레미야에 뭐라고 되어 있나 봅니다. 50년 전은? 물어줘야 됩니까? 몇 년 잡을까요. 줄여서 25년? 20년으로 합의 할까요? 도대체 기준이 어딨습니까. 기준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나의 기억날 때까지만 물어준다? 그것도 말이 안돼요, 기억 줄이는 약 먹어서 책임 면하면 되니까. ‘나 기억나지 않는다, 필림 끊겼다’ 이럽니까?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합니다.
아까 제가 뭐라 해요. 홈 파였잖아요 홈. 홈 파인데를 갔지요. 하나님께서는 과거 미래를 없애주는 대신, 우리의 과거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서는 없어지지만, 그건 누구 손에 있느냐 하면, 주님의 손으로 압수당합니다. 그렇다면, 그때그때마다 복음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과거의 우리의 일을 사용해버려요.
어떤 사람이 차를 타고 가다가 어떤 할아버지를 치여 죽였다고 한다면, 주님께서 현재 할아버지 마주쳤던 이 사건을 가지고 복음화 시키기 위해서 우리보고 할아버지에게 물어주도록 홈을 파서 집을 팔아서라도 할아버지에 대한 보상금과 남은 가족에 대한 책임을 하도록, 조치를 해버릴 때 우리는 순종해야 돼요. 우리는 순종해야 됩니다.
이게, 거푸집, 홈, 구조를 이렇게 설명해야 설명이 되지, 다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도의 태어나면서부터 천국 갈 때까지, 죽을 때까지 모든 것을 누구소유로? 이젠 주님 소유로 잡아서 주님의 손으로 그것을 찢어서 없애버린 게 아니고, 우리를 어디에 활용한다? 우리의 과거를, 우리의 치욕스런 과거를 현재 복음 전하는데 유용하게 사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합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과거 일이지만 하나님이 사용하니까 그것이 복음을 위해서 현재라는 표피층 위에 계속 떠올라야 되는 겁니다. 떠올라 와야 돼요. 구조적으로 홈 파여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제 다 해결 됐지요?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두 사람, 아이 때에 넘어져서 뇌손상을 입어, 80세까지 돈 실컷 벌어서 보상해준다고 같이 늙어 갔던 이 사람, 이 사람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해결 하냐 하면은, 어느 쪽이 가해자고 피해자입니까. 넘어져서 손상 당하는 사람이 피해자가 되고, 손상시킨 사람이 가해자가 되겠지요?
성경은 둘 다 뭘로 보느냐 하면,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만들어버리고 피해자는 누구밖에 없다?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 이렇게 설명하게 되면 이 사람은, “당신이 떠밀려서 그리됐으니 물어내!”라고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래서 모든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떠밀게 된 가해자라는 입장에서 평생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밀쳐뜨리는, 예수님 필요 없다고 외치는, 그런 속성으로 이땅에 태어나서 우리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렸습니다 하는, 피해자는 예수님밖에 없고 어느 누구도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그걸 느끼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5리를 가거든 10리를 가게 해라, 우리는 더 맞아야 되고 더 맞아도 싸니까!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피해자에서 벗어난 적이 없음을 분명히 아는 겁니다. 눈만 뜨면 음욕이요, 눈만 뜨면 살인이요, 눈만 뜨면 자기 자랑밖에 않고, 눈만 뜨면 남이 죽든 말든 자기만 살면 그만이고, 눈만 뜨면 넓은 길이고 좁은 길은 죽어도 가기 싫고, 눈만 뜨면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돼가지고, 누가 유산 50억 안주나 이것만 생각하는, 남편이 ‘여보 나 어디서 돈 주워왔다’ 돈 10억 주워오지 않을까, 눈만 뜨면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우리는 주님께서 만들어준 홈에 가면 그게 양편에 내 죄만 쫘악 있어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하는 것처럼 우리는 간음한 자가 될뿐더러 간음한 사람을 돌로 치려고 우기는, 그런 교만한 자도 되고, 성경에 나온 똑같은 인간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 해결은 어떻게 합니까. 십자가 앞에서 해결 다 되어버렸죠. 한쪽은 뭡니까, 한쪽은 과거 현재 미래를 잊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사용하면 얼마든지 지금이라도, 네가 감춰놓은 과거라도 복음이 필요하다면 내가 사용하겠다, 거기에 대해서는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라는 것이 십자가고, 두 번째 경우에는, 우리는 누구도 누구에게 사기 당했다고, 제발 피해자라고 우기지 마라!
‘그 돈 네 돈 아니야! 그 돈은 하나님 돈이고, 너는 사기 당했다면 진작 2년 전에 차사고로 죽어야 되었을 거야!’ 살려주니깐 사기 당했네, 어쨌네, 진즉 태어날 때부터 죽어도 마땅한 인간이 태어나서 사기 당했니, 뭐, 애썼는데 경제 뒤떨어졌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느니, 교회부흥이니, 그따위소리 하지마라 말이죠.
우리는 모두 하나님 주시는 은혜를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는 피해를 주는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원한 게 아니고 바나바를 원해요. 예수 살려줘서는 귀찮아서 안돼! 내가 의롭기 위해서는 바나바를 살려주고, 예수님을 죽여 버리자하는, 거기에 합세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다 십자가로서 해결 된 거예요. 그 이야기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본문에 나옵니다.
십분 쉽시다.
안산100514요일3장7절b /이근호 목사님
10절에 봅시다. 3장10절 ...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 제가 아까 얘기했죠, 홈이 두 종류밖에 없다고.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사람, 우리가 선택합니까? 아니라했죠? 우리는 그냥 홈 파인데로 수채구멍으로 물이 졸졸 흐르듯이, 우리의 가는 코스를 주께서 탁탁 받혀줘요. 가게 되면, 그래서 우리가 아는 것이 뭐냐 하면, 악마하고 예수님 사이에서 있었던 일, 그 일의 내막을 그것이 홈의 구조요, 홈이 되어서 이쪽저쪽 갈라진다는 걸 아는 겁니다.
왜냐 하면, 여기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있고 여긴 무슨 자녀입니까? 마귀의 자녀거든요. 보세요, 하나님의 자녀 마귀의 자녀, 자녀, 자녀 떼버리면 남은 게 뭡니까? 마귀와 하나님. 그 거푸집, 그 구조...그걸로 세상은 짜여져 있습니다, 끝이. 길이 두 갈래 길밖에 없어요. 길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는 천국 가는 길이고, 그 나머지는 악마의, 지옥으로 가는 그 길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지금도 그렇습니까, 옛날에 그랬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물어는 봐야죠) 이런 구조로 창세기를 보아라, 성경전체를 다 해석을 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왜냐면, 천국 가는 구조 자체가 내막을 우리들은 아니까.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이렇게 짜여진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아는 반면에, 지옥 가는 사람은 무엇을 거부하느냐 하면, 악마와 예수그리스도 그 십자가 사건, 예수님과 악마 가건 자체를 사람들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남는 것은 오직 자기의 몸뚱아리, 몸뚱아리! 자기의 몸밖에 없어요. 자기의 몸! 사나 죽으나 오직 자기 몸이야, 자기 몸! 그런데 사나 죽으나 자기 몸일 때 이건 언제적 몸이냐 하면, 처녀 총각 때 몸이에요. 그런데 결혼을 했다, 아기를 낳았다, 그런데 누가 봐도 아기는 딴 몸이죠. 예?
아기 있고 아빠 있으면 식구가 한 식굽니까 세 식굽니까, 세 식구잖아요. 식구 얼맙니까? 둘입니다. 아기는요? ‘아기는 내게 속하고요’ 이러면 안돼요. 아기가 생겼으면 세 식군데 절대로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아기가 태어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몸과 하나가 된 아기라서 아기가 잘 못되면 내가 아프고, 아기가 웃으면 자기도 웃고 이래요. 이건 아빠 엄마도 마찬가집니다. (아빠 엄마는 부부야 남남이니까 그렇지만) 아기가 있으면 아무리 장성해도 다른 몸 되도 내 몸 되고, 이걸 육이라 합니다, 육. 처음 총각 때는 육이 내 몸밖에 없었는데 결혼하면 남편이 내 육이 되고 자식 낳으면 자식이 내 육이 되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하늘나라 갈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악마와 예수님 구조를 모르기 때문에 돈을 벌어도 내 식구, 내 가족밖에 몰라요.
모든 중심, 모든 사회 국가 민족이 아무리 커도 돋보기 들고 골목골목 비춰봐도 자기 가정밖에 몰아요, 자기 가정. “천하 자식이라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했거든요. 그게 통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남의 자식 엎어져도 괜찮아도, 내 자식 죽으면 환장합니다. 전에 얘기 했잖아요. 서해안 사건 명단 보니까, 자기는 동해안에 근무하니까 서해안에 없거든요. 그러면 서해안 이야기는 내 자식 거기 없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내 혈육이, 내 몸이, 내 육이 없으니까 사십 몇 명 죽든 말든 나는 ‘야 야~ 너 잘 있지? 총 너무 쏘지 마라 위험하다’ 딴데 가 있는 애한테 급히 안부 하는 거지요. 왜, 내 몸이니까. 자식이 내 몸이니까. 이런 육에서 우리가 그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력으로. 안 끊어지고 땡기지요 갈수록... 갈수록 더 땡기지 끊어지기는 뭘 끊어져요 안 끊어집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간다”고 했어요. 문제는 그게 우리의 본성인데 우리의 수준이 안 되는 본성인데, 그 본성 가지고는 하늘나라 못가니까 문제예요. 구원이 안 되니까 문제예요. 이 사태를 어떻게 할래요. 고칠 수 있으면 고쳐서라도 구원받고 싶은데, 자기 식구 자기 가족밖에 모른 이거는, 이것은 타고나서 고칠 수가 없어요, 이거는. 교회 10년 다니고 성경공부 해도 안 고쳐져요. 본성이 그런데요 뭐, 해결책은 뭡니까.
해결책은 이겁니다. 누가 와서 그런 육을 죽이면 되지요. 죽이면 되는데 죽고 그냥 가버리면 곤란합니다. 죽고 가버리면 강도가 되지요. '돈 내놔! 안 내놔?‘ 죽여! 그냥 가버리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죽이면 죽이되, 영으로 계신분이 죽이면 우리는 영으로 다시 살 수 있지요.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은 다시 사는 거예요. 그렇지만 성령이 와서 ‘내 자식밖에 모르고, 내 남편밖에 모르고, 내 몸밖에 모르고, 오직 나밖에 모르는...그러니까 월드컵하면 일본은 망하고 우리나라 잘하고, 북한은 망하고...항상 내 중심이잖아요. 이것밖에 모르는 이것을 날마다 주께서 죽여주시는데, 다만, 죽이실 때 죽이는 방법이 영으로 죽여요, 영으로.
영으로 죽이면 되는데 죽이는 방법이 뭐냐, 육을 죽이는 방법이...성경적으로 하면 총도 아니고 칼도 아니고 뭐냐 하면 바로, 율법...말씀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지금살아 가는 것이, 이게 은혜로 살지 내 힘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면 돼요. 늘 말씀을 대하면서 내가 사는 것이, 지금 날마다 나를 죽이고 나를 날마다 살려내는 말씀의 덕 말씀 때문에, 말씀이 내게 있기 때문에, 내가 말씀 증거하라고 살아있다는 것을 늘 그걸 확인해주시면 되는 겁니다.
제가 수요설교 했는데 수요설교 들어본 적 있습니까? 보면, 컴퓨터 게임하다가 지포나 오징어포 옆에 있으면 게임하다보면 언제 이걸 다 먹어버렸어요, 지포나 오징어포를... 우리가 오징어포와 쥐포 같아요. 말씀 찢어버리면 ‘나’라는 게 없어요. 다 찢어버리면... 80살까지 찢어버리면 다 찢어져 없어요. 날마다 말씀으로 우리는 찢어버려야 돼요.
찢어버리면 나도 없고, 현재 나 있는 것이 말씀대로 되어진, 말씀의 작품이죠, 말씀대로! ‘죽은 너를 살린다.’ 참새를 하나님께서 기르시나니... 그 참새는 그냥 참새가 아니고 하나님이 기르시는 참새지요. 하나님이 기르시는 참새... 들풀은 없어요. 하나님이 기르시는 들풀. 하나님의 소유된 들풀 그렇게 되면 말씀이 오게 되면, 나는 육이 아니고, 하나님은 육을 죽이고 영을 날마다 살려 내시는 주의 백성! 그것은 말씀 앞에서는 알고 말씀 외면해버리면, 또 덩치 내덩치만 남고, 내 힘으로 살아야지, 이거 견뎌야지, 남에게 이겨야지, 또 이게 나오는 거예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가지고,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죠? 날마다 우리를 죽음에 내주고 죽은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가 살아서 날마다 내 것은 죽고, 주님의 것은 나라는 이 형체로서 되살아나게 하시는 작업을 지금도 바람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오늘도 해서 이 자리까지 만나게 된 겁니다. 근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평소 습관대로 ‘내가 알아서 왔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가다가 차사고 나서 죽어볼래요? 이러면 또 달라지죠. 갑자기 전화가 와가지고,‘애가 어떻게 됐어, 병원에 갔다고요?’ ‘에구 미안합니다, 병원에 갔다고요?’ 이러면 그때마다 평소에 ‘아...평소에 우리 애도 주께서 지켜주었구나’ 하게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 ‘내 탓이오’ 하지 마세요. 그거 다 핑곕니다.
홈 따라 가게 되어 있지, 잘못해서 간 게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리 옳고 그름을 알더라도, 우리가 즐기는 거 좋아하는 것 따로 있어요. 옳다 하더라도 그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왜, 밀어 넣으니까. 처녀들, 새댁들 얘기하지요? ‘내가 미쳤지 저 남자와 결혼했지? 좋다는 남자 선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 하필 필이 꽂혀가지고 이 남자 만났다,;고
하지만 막상 그때 되가지고, 그때 그 남자들 다시 세워보세요, 그 남자 택하지요, 왜, 주께서 몰아넣으니까. 주께서 몰아 넣었어요. 왜냐면 그 여자 인생은 주님의 인생이기 때문에... 그 남자를 만나야 자신이 죄인인 걸 알거든요. 그래야 여기서 천국 가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마치 선택한 것처럼 “아이구..다 내가 못난 탓이다” ‘괜히 그렇게 어려운 체 하지 마세요 못난 탓이라고...‘ 못난 탓이라고 가슴 쳐봐도 같은 상황 되면 또 같은 선택을 하게 마련입니다.
자기가 남편 잘못 고른 그 엄마가, 나중에 딸이 남자 데리고 오면 또 잘못된 선택, ‘그 남자 이래서 싫고 저 남자 저래서 싫고, 엄마 시킨 대로 해라’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사기꾼이야,‘ 자기 결혼할 때랑 똑같아. 주께서 홈을 그렇게 파인 겁니다. 인간이 천당 가는 게 자기가 선택해서 가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쪽으로 몰아넣으니까 갔다는 걸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과거는, 복음을 위해 지나온 과저지요. 복음을 위하여... 나를 위한 과거가 아니었고. 복음이 위대하다는 걸, 복음 때문에 너 같은 인간이 산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험한 나그네 길을 살게 하신 겁니다. 야곱처럼. 그렇게 아시면 됩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마귀에 속한 자녀, 하나님께 속한 자녀는 성도만 압니다. 불신자들이 아는 것은 자기의 몸밖에 모릅니다. 이 몸밖에 모른 인간이 기껏 한다는 게, 교회 가주기, 성경읽어보기입니다. 백날해야 자기가 선택한 거예요. 왜! 바쁘면 교회 안 갑니다. 바쁘면 성경 안 봅니다. 왜! 중요한 것은 내 몸이, 내가 관리하는 내 몸이 중요하지, 내 몸 외에는 ...다 내 몸 좋아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 좋아라 하는 게 아니고.
그런데 어느날 순간, 성령이 임해서 말씀이 와버릴 때...내가 배우는 말씀 말고 진짜 살아있는 말씀이 나에게 쳐들어와버리면 내가 살아온 것이 주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의 패어진 홈이었고, 틀이었고 구조였다는 것을 알지요.
그러면 전체 구조는 뭘로 되어 있습니까. 악마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일이 성도를 움직이는 구조로서 여기 적용되는 겁니다. 악마와 예수님 사이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죠? 뭘 다 이루었습니까, 앞에? ㅡ말씀을 다 이루었다.ㅡ 말씀을 다 이룬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의 홈으로, 구조로서 동원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우리 주변에 말씀대로 안 되는 것이 없어요. 말씀대로 안 되는 게 없어요, 전체 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이라는 거 아시고 돈 안 좋아하게 만드시려고 돈 없게 만드시고... 그런데 사람이 부자라는 것이요, 얼마 이상을 부자라 합니까? 이게 한정도 없어요. 백억 가진 사람은 부자라고 않습니다. ‘천억 가진 사람 수두룩한데 내가 왜 부자야?’ 합니다.
돈 백 만원밖에 없어도 자기가 부자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고 그래요. 빚져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마이너스 통장인 사람도 있으니까... 부자라서 천당 가는 것도 아니고, 가난해서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다고 천당 가는 것도 아니고, 부자라고 지옥 가는 것도 아닙니다. 뭘 알아야 되요? 마귀와 예수님 사이의 ‘다 이루었다’를 하나의, 자기를 이끄는, 주변을 쪼아내는, 몰아넣는, 능력 있는 말씀의 틀로, 현실로 간주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가지고 12절에 봅시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다니라”고 되어 있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악한 자에게 속했다” 이게 창세기 어디 나옵니까? 악이 개처럼 엎드려 있다가 펄쩍, 하고 누굴 덮칩니까? 가인을 덮치죠? 악한 자이 특징은 악한 자의 특징은 자기가 아우를 관리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를 판정하면 항상 자기 좋은 쪽으로 세수를 하게 되는데, 어느 날 순간에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이 화가 나고 짜증이 날 때가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항상 그 낮은 차원, 낮은 차원에서 자기를 보니까 자기를 좋게 보는데, 자기보다 더 높은데서 보는 시선을 우리가 볼 기회가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내 일이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리면 갑자기 벌컥 화를 내지요. ‘하나님! 제가 왜 뭘 잘못했습니까,’ 하고 대들거든요. 대들게 되면 그 순간, 누가 피해자가 되고? 예수님이 아벨이 되고, 누가 가인이 되고? 우리가 가인이 되는, 그런 경우가 바로 말씀이 홈통에 우리에게 적용시킬 경우에 바로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바로 가인이었구나, 가인...!’
우리가 나 혼자 살 때는 자기가 아벨이고 나쁜 놈이 아벨인 줄 알았더니만 자기가 가인인 줄 몰랐잖아요. 그게 바로 말씀으로 우리를 주어지게 되면, 우리로 죄 있는 자가 되게 하셔서 죄 있는 자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다 이루심’이 우리와 조인트가 되게 되어 있어요, 만나게 해가지고.
아, 죄인은, 우리가 죄인을 부르러 왔거든요. 주님께서 죄인을 부름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인됨이 목적이 아니고 우리를 부른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이 의인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른 거예요. (참, 말이 어렵다 정말로...)
보통 환자가 병원에 가면 뭡니까, 의사 만나고 병 나아서 집에 돌아오는 걸 기대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를 환자로 부르신 이유는 오직, 의사되시는 분이 의인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게 고린도후서에 나오죠. 우리로 하여금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 되게 하사,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 되고, 그 ‘의’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과 ‘의’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인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거예요. 우리를 용서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과정자체가 ‘의’예요. 그 ‘의’ 안에서 우리는 의인 돼버렸어요. 하나님의 의라는 작업에 포함된 공정과정이니까. 죄인이 의인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전체 공정에 이게 포함된 경로입니다. 메카니즘에 포함되어 있어요. 포함이 되어 있다고요!
물건을 팔 때, 티브이를 사면 티브이 벽걸이 말고, 스텐드 있잖아요. 티브이를 사는데 스텐드도 따라가요. ‘나는 스텐드 안사요,’ 이러면 안된다 말입니다. 그러면 티브이가 턱 넘어지고 턱,넘어지는데...그거 따라온 거예요. 나는 예수님 믿습니다. 나 이제 예수님 믿으니 죄인이라 하지 마세요. 우리가 죄인이라는 세트로 딸려줘야, 그래야 우리가 의인 돼요. 우리가 티브이와 한 세트가 된다니까요. 엎드려서 티브이 볼 겁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위주로 예수님이 오신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주 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했던 겁니다. 죄인들이 필요한 거예요.
에덴동산에 에덴동산 만들었으면 인간만 있습니까 아니면, 두 가지 나무가 따로 있습니까. 생명나무는 도대체 왜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에덴동산 자체가 인간을 위한 동산이 아니고,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한 에덴동산이에요. 그런데 마귀가 훼방질 해가지고 선악과 없애버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독립하게 만들었지요. 그러니까 주께서 에덴동산을 깨버렸잖아요. 깨놓고, ‘난 생명나무만 있어도 에덴동산 해방하는데 지장 없어’하고 생명나무 길을 차단시켰잖아요.
우리는 거기서 쫓겨나가지고 땅을 갈면서 고생 실컷 하게 만들고 그 이유가 뭐냐, 인간 고생하고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니고, 예수님의 주 되심, 처음에 누구와 짝짝쿵해서 천지를 창조했는가, 창조의 주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이란 게 첨부터 만들어졌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면 십자가 오실 필요 없어요. 그냥 하나님끼리 잘 살면 그만이에요. 주님을 주님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죄인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성경 해석할 때 아주 간단하게 되죠. 뭐냐 하면, 성경 해석할 때 반드시 거기에다가, 우리를 천국으로 가고 있는 홈, 패인 홈통 같은 걸 만드는데, 신구약의 모든 말씀이 다 도배하듯이 우리 주변에 깔려서, 도배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도배로서 작용하는 거예요.
“아우를 죽였으니 어찌 연고인고... ” 자, 가인이 아벨 죽인 이야기를 다시하면, 구약으로 들어가서 해석을 해봅시다. 가인이 아벨 지키는 사람 맞습니까 아닙니까. 형이 동생을 지켜야 돼요, 안 지켜야 돼요. 동생 지키라고 형을 만들어놨습니까? 가인은 그렇게 생각 안했죠. 동생은 동생이고 나는 나라고 본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형이 있다고 했습니다.
동생을 죽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동생을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동생 따로 형 따로 역시 같이 살지요. 하나님은 동생의 제사를 받아버렸지요. 그러면, 가인이 구원받으려하면 누구에게 복종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제사 받으시는 그것이 하늘과 땅이 통하는 공간입니다.
하나님이 동생의 제사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는 터전을 넓혀 놓았어요. 하나님쪽에서... 그러면, 형이 동생을 지킨다는 말은 동생에게 일어난 사건을 본인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무슨 뜻이냐 하면, 가인과 아벨이 있을 때, 이게 가인이, 가인의 생각은 먼저고 가인의 생각은 동생 따로 자기 따로예요. 이 일은 뭘 모르냐 하면, 왜 동생이 있어야 하는지 왜 내가 형이 되었는지, 아무의미도 없습니다.
목적도 몰라요. 구조를 몰라요. 구조... 말씀의 구조를 모릅니다. 말씀의 구조를 모르는데 앞으로 구조를 몰랐으나 구조를 알게 된 거지요. 가인은 악의 홈통 악의 구조, 아벨은 천국으로 가는 구조가 되겠지요. 현재는 둘 다 아무도 몰라요. 어떻게 엮이는지를 몰라요. 다만, 여기 존재한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뿐이니까. 태어나도 두 관계가...하나님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모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둘을 통해서 이 세상의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가인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이 제사를 드리니까 하나님께서 안 받았죠?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한쪽을 안 받는다는 말은, 제사를 안 받고 받는다는 것이, 따로따로 하게 되어있는 게 아니고 반드시 안 받는 쪽이 받는 쪽을 공격하는 식으로 죄라는 것이 짜여져 있음을 두 형제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사람이 그냥... 두 사람이 아무소리 않고 “예 알겠습니다, 예...” 이러면 두 사람이 되요. 그런데 언제 하나가 되느냐면, “실례지만 예수 믿으시죠.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하면 “이노옴~!” 이런 소리 나오죠. “어디서 내 앞에서 그런 기독교적 이야기를 해!” 둘이가 만나게 되는 거예요. ‘아... 이런 관계구나’ 관계가 비로소 짜여지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면, 남남이 아니고, 한 구조 속에 하나는 하나님이 복음을 보여주면 그것이 축소된 현실, 작은 현실, 작은 미래상이 이 안에 형성되게 되어 있어요. 가인과 아벨은 그걸 몰랐던 거죠. 그런데 가인도 아벨을 죽일 마음이 없었는데 갑자기 뭐가 덮쳤습니까? 악이 덮쳤죠. 죄가 덮치니까 이거는...안죽이면 자기가 슬퍼, 사람은 즐기는대로 살거든요. 동생을 죽여야 자기가 즐겁겠어, 이거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생 죽이면 나빠, 그래 나는 안 죽이겠다’ 이런 인간은 없어요.
사람이 생각한 것과 행동은 달라요. 어쩔 수 없어요. 나쁘든 좋든 관계없이 땡기는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그걸 이야기한 겁니다. 그리고,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이것도 가인 말이 아니에요. 이거는 악마가 해야 될 말이에요.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건 자기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나와야 될 말이에요.
내가, “어이, 동생아” “예!” “네가 교회 나오라는데 내가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노” 이게 자기도 그런 말이 나오게 될 줄은 미처 몰랐어요. 누가 복음을 전할 때 그런 말이 나오는 겁니다. 예수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는데? 온 천지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이거는 콩나물 판다고 못하고, 여기는 미용실 일 한다고 그 이야기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예수 믿는 손님 놓칠까봐 그 이야기를 못하는 거예요.
세상은 모두 누구 중심? 나 중심! 나 중심이기 때문에 내게 간섭하고 잔소리 하는 건 다 나하고 상관없어요. 특히, 나 위해서... ‘예수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는데,’ 이게 본인 말이 아닙니다. 그 안에 마귀가 들었어 마귀가. 마귀의 말을 자기 입으로 내뱉는 겁니다. 마태복음10장20절에 나오잖아요.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이 말할 수밖에 없어요. “저 예수와 관계가 있거든요?” 이런 말을 성도가 할 수밖에 없어요. 예,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인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 현대말로 하면, ‘내가 복음을 전하는 자니이까.’ ‘내가 예수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나는 예수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이미 아벨은 하나님과 통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암튼 ‘나는 안 통하는데 누가 하나님과 통하면 그게 미워!’ ‘혼자 은혜 받아서 너무 싫어!’ 왜, ‘하나님 내게는 은혜 안줍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는 은혜를 못 받기 위해서 은혜를 안 줘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쪽에서는 그게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제게 왜 은혜를 주셨습니까, 안줘도 되는데..‘ 이렇게 되고, 안 받은 사람은, 달라하는데 왜 안줍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은혜라 하는 것은 하나님 맘대롭니다. 줄 사람은 주고 안 줄 사람은 안주는 거예요.
그거는, 한쪽은 주었고 한쪽은 안주었다는, 그 틀로 짝이 모여서 그게 우주고 그게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입니다. 주님께서는 긍휼, 공의롭게 지옥 갈 사람은 지옥 보내고, 구원받은 사람은 천국 보내고. 그게 첨부터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의논한 바입니다. 그 내용이에요. 숨겨진 바! 하나님의 속마음을 성령이 아니고서야 누가 아냐, 하는 것을 누군가 설교했지요?
십자가를 알면 세상 다 아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속사정이니까요. 십자가... 안 믿으면 지옥 가고 믿으면 천국 간다는 그 속사정을.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말 할 수밖에 없어요. 말 하는 쪽으로 주께서 홈을 패여서 말하는 쪽으로 할 수밖에 없어요. ‘네가 꼭 집구석 이러는데 예수 믿어야 되겠느냐, 네가 꼭 교회 가야 되겠느냐,’ 그런 소리를 많이 들을 거예요. 들을 때, 이것도 은혜인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와야돼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이 구조가, 가인과 아벨의 구조가 그때뿐이고 그다음에는 일어나지 않습니까, 계속 됩니까? 계속 된다는 겁니다. 왜! 말씀의 틀이 음양... 악마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의 만남으로 현실이 짜여져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런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자들이 너무 힘들지 않느냐, 하는데 힘든 것이 아니고 우리가 확인이 되죠. 아! 저쪽과 나의 차이, 차이점을 통해서 자기 위치가 분명히 파악이 되죠.
‘아... 이 자리가 은혜의 자리구나,’ 저쪽엔 은혜 없는 자리구나, 이게 파악이 되죠. 가인이구나! 그리고, 아벨이구나!, 그래서 저쪽이 죽인다 할지라도 악이 악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죽이려하기 때문에 ‘곱게 보내드리오리다!’ ‘곱게 작별할게.’ 네가 죽이면 그걸 통해서 너는 가인으로 드러나고, 나는 아벨로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밀어 넣으신 겁니다.
열두 제자를 이렇게 사도로 보내서 순교케 하시는데, 가짜, 마지막 끝에 가서 기겁을 하고 도망친 사람이 있지요? 열두 사도 중에서... 가룟유다...끝까지 용케도 숨어 있다가 기어히 정체를 드러내잖아요. 그러니 교인 천명 만명 부러워하지 마세요. 복음 전해버리면 한 두세 명 남습니다. 다 가버려요, 두세 명 남아요. 그거는 우리 개혁주의 논문 발표할 때 봤잖아요. 얼마나 그거 참 재밌든지...또 하고 싶네요, 또 가고 싶어. 이번엔 또 무슨 산 하지? 전에는 계룡산 나왔는데 이제는 집에서 나올지 모르지.
13절에 봅시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그걸 이상히 여기지 말래잖아요.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 말아야 된다? 있어야 그게 확인이 된다고, 확인이... 하나님이 그런 배치를 하고, 구조를 만들어 놨는데, 항상 구조를 생각해요 구조를. ‘나는 싫어해’ 나는 없어요. 나는 그냥 몰아넣는 대로 즐기는 대로 가다 보니까 좁은 길, 천당 가는 길입니다. 이거는, 진짜 성도는요, 어떤 어려움에도 복음이 오게 되면 댕댕한 복음의 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어요.
우리 정낙원 목사님 수원에 강의 했잖아요. 다 갔답니다. 김사장님(?)빼고 다 갔대요. 그러니까 잘 전했죠. 그들이 포섭해서 당신들이 오신다 했으면 안 나갔을 거 아닙니까. 기어히 가짜가 떨어져 나가잖아요. 제대로 떨어져 나갔지요. 그게 뭐냐 하면, 그게 떨어져 나갈 때, 성경대로 되는 거잖아요. ‘아하,,세상이란 게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있다는 거,’‘악마에 속한 자들이 있다는 거’ 분명히 알죠. 그렇게 나간 사람들 중에 20년 후에 돌아올지 모르지만, 그건 그때 문제고, 지금 복음 싫어하면 나가는 겁니다.
자, 복음을 왜 싫어할까요? 아까 전에 했는데, 복음을 싫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뭐만 생각한다? 자기의 육, 자기의 가족과 몽뚱아리, 자기의 생계, 아벨처럼 ‘하나님께서 내 제사 받았다’는 게 아니고 제사 드려서 어떻게 내 몸이 사는 하는 문제고! 아벨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표현하느냐가 주 관심사고, 저쪽은 예수 이용해서 내가 어떻게 밥 먹고 사느냐가 주 관심사고. 하나님이 그렇게 둘이 즐겨서 좋아하는 홈으로, 그런 구조로 들쑥 날쑥이라는 세상 틀로써, 다만 잠시 만났을 뿐이요, 다시 만났다가 다 제갈길로 갔을 뿐이고, 복음 전했던 정낙원 목사님은 욕만 들었을 뿐이고, 하나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그때가 마지막 때다, 다음에 할 수 있다, 이런 것은 장담하면 안돼요. 괜히 기대하면 실망이 큽니다.
감사해야 돼요. 이런 자리를 열어주니 감사하고, 또 열면 감사하고. 우리 안산 모임보세요. 4년 전에 벌써 끝났어야 할 모임이죠. 그런데 단 한 사람이라도, 복음을 그리워한다면, 그 단 한사람이 아니고 그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그 한 사람이 아벨 아닙니까, 아벨 배후에 누가 있어요. 주님이 계시잖아요, 주님이. 두 세 사람이 나와 함께 있으면? 내 이름을 부르는 자 두 세 사람이라도 함께 있을 것이다. 양이 문제가 아니고 어떤 노선이냐가 문제입니다.
제가 대전에서 마태복음 하면서 그런 얘기 했었어요. 그림을 그렸거든요? 오른 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버려라, 나머지 가지고 찍어버리고 천국 가는 게 낫지, 양손 가지고 지옥 가는 것보다 낫지. 이러거든요. 그림을 그려봅시다. 손가락이 죄지었습니다. 그러면 면적상 어느 것이 넓습니까. 오른 손이 나쁜일 했고 왼 손이 착한일 했어요. 그러면 천당 갈까요 지옥갈까요? 어중간하게 있을까요? 어디갈까요? 지옥 가죠! 면적이 99퍼센트 착해도 1퍼센트만 나쁜 점 있으면 나머지 90퍼센트도 다 따라간다고요.
죄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는 것은 면적으로 죄를 따지지 말고, 죄라는 것은 면적이 아니고 너를 덮치는 차원이다, 차원! 오른 손에 죄 있다는 말은 ‘죄가 너를 지배하고 있다!’ 는 말입니다. 다만 오른 손이 그 죄를 실행에 옮겼을 뿐이죠. 가인이 죄가 덮쳤다고 해서 온 몸이 시커먼게 아닙니다. 죄에 덮치면 그게 아무리 건장해도 죄한테 지게 되면 누구든지 죄의 종이 된다 했어요. 로마서 6장에 나오죠. 누구든지 죄한테 지면 죄의 종이 된다.
한쪽이 착한 일 많이 했으니까 착하다고 하지 말자고 하는 것은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는 선악적인 회개, 회개죠, 회개장부! 그런 식으로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니까 그걸 공박하기 위해서 주께서 이 말씀 하신 거예요. ‘너희들 회개장부 간수 잘하지?’ ‘많은 쪽이 많은 쪽으로 쏠린다고 네가 주장하지,’ 적은 쪽이 많은 쪽을 끌고 간다, 이렇게 얘기 했어요 주님께서. 적은 쪽이 많은 쪽을 끌고 간다. 나머지는 지옥 가면 좋겠느냐, 그러니 잘라버려라! 못 자르지요. 전기톱 가지고 못 자르지요. 결국 이거는 집에 갖고 있다 말이지요.
오른 눈 뺀다고 왼 눈가지고 착해집니까, 주께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희들이 이미 말도 안 되는 사고방식 가지고 자기들이 의인인 척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 말도 안 되는 것이, 오늘날 자기 몸뚱아리만 생각하는 것을, 말도 아닌 것을 가지고 철학인양 쥐고, 자기 인생관이라고 살아가는 거예요. 정말 말도 안돼요. 맨날 변명하고 있다고요. 도적질 하면 사회가 더러워서 그렇다 하고, 전부 다 자기 변화 자기 사수.
교회와도 마찬가지예요, 교회와도... 내가 나쁜 일 했지만 헌금하고 십일조 했기 때문에 착한 일 했으니까 천국단다는 거죠. 이게 바로 바리새인 아닙니까. 착하고 안 착하다는 것은 비율을 따질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어느 쪽이 지배하느냐가 문제예요, 어느 쪽이 지배하느냐.
롯데자이언츠 야구팀 안에, 야구팀이 20명 있다고 칩시다. SK 와이번즈 선수하나 있으면 롯데 팀 나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되지요 그거는, 100퍼센트 롯데 자이언츠 돼야지요. ‘에이, 90퍼센트 이상이니까 롯데라고 해주자.’ 이거는 말이 안 됩니다. 박지성이 그러면 영국 팀 뛸까요? ‘지배한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묶음’이라고 하는데 주님께서 하나로 묶어요. 묶는 이야기는 의존교회에 가서 이야기해야 되지 싶은데요. 여기서 하면 주제가 넓어지니까.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노선이 다르기 때문에 가인은 가인으로서의 행세를 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미움이 안 받는 것이 이상해요 오히려. 복음 안 전하면 미움 안 받는데 복음 전했다면 그 순간부터 저거는 예수쟁이고 복음밖에 모르고 이럽니다. 저거는 기존 교회는 다 이단이라 하더라, 기존 교회가 이단되는 거 기분 나빠하지 말고 예수 믿으라는 이야기예요. 교회 믿지 말고.
어떤 분이 내게 말하기를 이근호 목사는 딴 건 다 좋은데 교회관이 잘못 되었다는 거예요. 어떤 분이 내공부에 참석하니까, 첨 참석하는 분이 이근호 목사가 건전한지 자기 목사한테 일러줬어요. 그래서 목사가 이근호 목사를 조사를 해봤어요. 조사해 보니까 그 목사의 친구가 옛날 내가 총신에서 학생들 모아놓고 강의할 때 너무 강의가 맘에 들고 책도 만이 봤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너무 건전하고 좋아했는데, 막상 친구 목사가 현실에서 교회 가보니까 부딪힐 거 아닙니까. 그때부터 이근호 목사 책 안 읽고 현실의 그 교회 현실에 순종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들끼리 내린 결론이, 다른 건 다 맞는데 교회론이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어디에 지배를 받는가,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으면 다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른 거지요. 이거는 괜찮은데 저거는 저런다는 이런 건 없어요. 예수 믿는 거와 교회 믿는 거 그거예요. 세상이 교회도 믿고 예수 믿는 건 없어요.
교회 믿는 목사가 있는 교회 가면요, 그거는 지옥 갑니다. 이단이에요. 예수를 믿는 교회는 교회이야기를 안 해요. 왜? 예수님만 이야기해야 그게 교회됨을 알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의 공로만 이야기해야 그게 교회임을 알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 반 이야기하고 교회 반 이야기하고... 짬짬뽕입니까? 자장면 짬뽕 섞인 겁니까? 짬짬이라 하던가.
목사들이 왜 자꾸 교회를 믿냐 하면 교회 머리가 자기가 되고 싶어서 그럽니다. 아까 첨에 강의할 때 그랬죠. 교회냐 아니냐는 자기 양심이 결정하려 한다고... 십자가 사건으로 결정하려는 게 아니고. 그렇게 되면, 자기가 잘되면 무조건 축복이고, 자기가 못되면 무조건 저주로 알고 있어요. 그러면 스데반 집사는 저주 받았네요? 목회도 못하고 죽었으니까.
예수그리스도만 증거한 사람은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가로막는 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게 뭐냐,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이야깁니다. 그거는 다음 달 초 하나교회에서 할 거예요. 일곱 교회 의미가 뭐냐 하면, 일곱으로 남는 게 아니고 일곱 교회는 일곱 촛대에서 나온 거예요. 촛대가 일곱 개여서 일곱 교회예요. 여덟 개면 여덟 교회가 되었을 거예요. 그런데 촛대가 하나에 스텐드가 하나라는 거예요. 일곱은 퍼져있는 거예요. 퍼져있는 것을 어디로 모은다? 내가 예수그리스도 권한으로 하나로 모으겠다는 게 일곱 교회 존재의 의미입니다.
일곱 교회가 일곱 교회로 있는 게 아니고, 일곱 교회가 어디 달리 있더라도 보여주는 모습은 오직 하나!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주는 그곳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것이 일곱 교회를 퍼뜨려놓은 이유예요. 그래서 일곱 교회를 믿지 마라, 각자 각자를 믿지 마라 이 말이죠. 각자 교회가 됐으면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죠. 예수님은 이런 모습이다, 라는 걸 믿어야죠.
사도요한은 거기서 죽은 시체가 되었습니다. 진짜 예수님 만나거든요. “주여! 제가...” 죽은 자 되어 벌벌 떠는 거예요. 진짜 만나니까. 주님 앞에 벌벌 떨면요, 좋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첫째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의미 없는 걸 알아요. 자기가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주님 만나면 다 이루었기 때문에 만사 오케이기 때문에, 어떻게 살았는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아요. 의미가 없다는 걸... 그렇게 되면 인생에서 스트레스를 안 받습니다.
스트레스 받는 게 자기 나름의 인생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주님 앞에서는 촛불이 어디 햇빛 앞에서 깝죽댑니까. 그거는 빛도 못 봐요. 그냥 훅, 하고 불어버려야 해요. 주님의 빛을 받아야 돼요. 두 번째, 할 일이 생깁니다. 할 일이...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하든지 간에...목사 하란 말 안해요. 뭘 하든지 간에, 파출부를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천국 가는 길이 이쪽 길이기 때문에, 파출부 가는 길이 길목이기 때문에 그리로 가는 거예요.
‘아이구...당신은 가정이 파탄되어 사는군요. 저는 천국 가는 길입니다.’ 가정 어려워서 가는 게 아니고 천국 가는 길이 이쪽길이기 때문에 가는 겁니다. 종로2가 쪽이 아니고 이쪽 길입니다. 사명이 없을 때는 자기가 사명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안 되면 자살합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자살해야 하는데, 사명은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죽든 살든, 그거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아요. 사명만 있다면 죽어도 좋아요. 사명만 남아있다면...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자살 같은 거 생각합니다. 우울증 걸리죠. 바쁘면 천국가기 바쁜데 죽을 생각이 어디 납니까 지금. ‘에구 조금 있다 죽읍시다, 조금 있다 죽읍시다. 지금 바빠서 못 죽습니다.’ ‘우리 연탄 피워놓고 죽자,’ ‘바쁘거든 내가 지금?’ 죽을 시간이 없어 바빠서. 사람이 자기 몸뚱아리를 생각하게 되면, 바쁠 때는 엄청 바쁘고 놀 때는 권태로워가지고, 우울증 걸려가지고 심심해서 뭘 할까, 이렇게 되는데, 숨쉬는 것도 주님이 주신 운동이고, 천국 가는 운동입니다. 숨쉬는 것도...
환자가 병원에 있는 것이 훌륭한 주의 사명이고, 감당하는 주의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병원에 환자 있으면, 응...아픈 게 이런 게 아픈 거구나, 그래서...그 다음에 봅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지라” 여기, 형제가 누굽니까? 마귀로부터 같이 욕 얻어먹는 사람, 그 형제입니다.
내가 스스로 내 장점과 내 나쁜 점을 판정해버리면, 천상천하유아독존 누구밖에 없습니까. 오직 나밖에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형제를 주셔가지고, 너는 나 안 믿고 나는 너 안 믿고, 둘 다 안 믿고 너는 너 되게 하고 나는 나 되게 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섬길 때 그때 비로소 형제 사랑이 일어납니다. 형제 사랑이 있다는 것은 형제 사랑하자가 아니라, 형제 이상의 차원에서 양쪽 다 사랑을 주시는 분이 계실 때 아래쪽에서 형제 사랑이 저절로 이어지는 겁니다.
태어나면서 가정형편상 두 형제가 쌍둥이 형제인데 헤어졌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났다, ‘아버지 어떻게 되셨고 어머니 어떻게 되셨나...’ ‘아 그렇구나, 반갑다 형제야,’ 이렇게 되잖아요. 오랜만에 날 낳은 아버지를 같이 모신 분을, 주를 모신 분을 만났다면 반가운 마음에 형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형제라 할라치면 반드시 복음이 들어가야 돼요. 복음으로만 사귀어야 됩니다. 교회 보면, 복음으로 시작했다가 또 돈 문제로 끝나는 수가 있어요. 돈 문제로...
‘오자마자 정수기 사라하고 보험 들라 하고, 미치겠네’ ‘집사님 왜 교회 안나와요, 그 교회 이단 맞죠,’ 교회 있어야 내게 일거리가 들어와요.‘허걱, 그게 뭐야 그게, 그 교회 내가 부주한 것 만해도 지금 10년 째 부주하고 있고, 이번에 딸 키우는데 그 교회 있어야 내가 낸 부주 다 받아내요’ ‘뭡니까, 그 사람은 형제가 없어요. 자기 몸뚱아리밖에. 자기밖에 모르고.
사명감으로 그 교회 있는 건 좋아요. 사명감으로... 제가 어느 날 설교했잖아요. 교회 안오고 등산한 건 좋다 이 말이죠. 사명감 가지고 등산을 가라말이죠, 사명감 가지고. ‘주여, 오늘은 산에 가서 복음 전하고 설교하겠습니다.’ 이런 사명감 가지고 가면 되는데, 어디를 가도 복음과 더불어 가면 돼요. 산에 가는 사람이 복음 전하러 산에 갑니까? 친구와 술 한 잔 하러 가야지. 이미 그것은 자기 몸뚱아리만 생각하고, ‘이제는 나는 복음 없는 곳에 가고 싶다, 그거는 나는 즐겁다,’ 사는 즐거움 쪽으로 홈이 파였어요, 홈이 파였다고.
물론, 그렇게 타락했다가 홈 파이면 돌아오지만, 그건 그때고, 항상 인간은 제 하고 싶은 대로 살거든요. 왠지 복음이 좋으면 천국은 가게 돼있고.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 뜻이면 가게 돼있고. 왠지 복음이 싫으면 자기 뜻이 아니면 지옥가게 돼있어요. 왠지 복음이 싫으면...복음이 뭔지 알아요? 우리는 나밖에 모르는 죄인이고, 이 죄인 때문에 주님께서 피 흘려 죽었다는 걸 받아드리는 게 복음입니다. 나는 가해자고, 나 같은 인간 때문에 누가 피해봤다? 주님이 피해 본 것을 아는 사람. 그게 복음인데 복음 아는 사람은 자기자랑을 안하니까 마귀의 유혹이나 시험을 받을 필요가 없지요.
‘너 잘 돼야 된데이, 너 훌륭하게 돼야 된데이,’ ‘나는 안 돼거든, 애초부터 나는 될성싶은 놈이 아니거든’ 이렇게 나오면 끝나는 거잖아요. ‘너 부자 돼야 되, 나는 원래 가난해야 되거든,’ 마귀의 시험 받을 일이 없어요. ‘너는 너 살고싶은 대로 살면 안돼!’‘나는 원래부터 나 하고싶은 대로 하거든?’‘너 하고싶은 게 뭔데?’ ‘나 복음 좋아하는 거!’
15절에 봅시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다” 이렇게 돼있죠.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모든 율법 계명이 전부 다 ‘몸을 담고 있는 형제,’ 할 때 형제한테 하는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라? 소자한테 하는 것이 누구한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예수님한테 한 것이다. 항상 예수님은 오늘날 형제를 앞장세워서 “네가 복음을 사랑하느냐,” 묻고 있습니다. 사람 만날 때 육과 육으로 만나느냐, 아니면 복음은 복음으로 만나느냐, 를 오늘 본문은 묻고 있는 겁니다.
네가 저 사람을 형제라고 간주할 때, 정수기 하나라도 팔려고 형제라 했느냐 아니면, 뭣 때문에 우리 둘 사이가 맺어졌느냐 말이죠. 안산 모임이 도대체 뭣 때문이냐 이 말이죠. 교회부흥하려고 모인 거 아니잖아요. 뭣 때문입니까. 장사 잘하려고 만나는 게 아니고 오직 복음으로 모였을 때 그것을 형제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만 바라보면 우리를 통해서 사랑은 발산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그 십자가 죽으심과 우리를 사랑해 주심을 이 봄날에도 다시 듣게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잊었던 것을 다시 회복해서 세상이 즐겁지 않고, 차라리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 우리의 참 소망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께서 만들어 놓은 좁은 길 그 홈이 그 구조에 따라서 즐겨 복음을 잊지 않고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09-05 10:25:23 녹취 : 박온정 | |